2018년 6월 26일 화요일

무림실록(武林實錄) 전신전설(戰神傳說) 제11장~제13장 - 내가위







제11장  도주



산해관의 겨울은 중원 그 어느 곳 보다도 빠르게 찾아온다.  다른 곳은 벼 베기에 한

창일 때였지만 이곳은 겨울의 한풍(寒風)이 벌써 밀어닥치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은

이미 볏단이 논 가득 세워져 있었다.

세워져 있는 볏단은 묵천과 벽진연 두 사람에게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두 사람은 볏짚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서로 꼭 붙어있었다.

눈보라는 아니었지만 매서운 바람이 칼로 에는 듯 느껴졌었기 때문이었다.

아삭―!

무를 베어물자 알싸한 느낌과 시원함이 혀 사이를 누볐다.

아무리 겨울이 빨리 오는 지역이라 하여도 가을은 가을이었다.

밭에는 푸성귀가 넉넉했고, 산에는 아직 다 따지 못한 과실들이 즐비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도망중인 두 사람에게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묵천은 생각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동영에 다다라야 한다. 그래야 안심할 수 있다.'

휘잉―!

다시 또 바람이 불었다.

볏짚 안이라고는 하나 바람은 거칠것이 없이 밀어닥치고 있었다.

그녀는 추운 듯 몸을 움츠렸다. 그는 자신의 옆에 붙어 있는 벽진연의 얼굴을 보았다. 달빛이 얼굴에 부딪쳐 파랗게 반짝였다. 그녀는 근 오 일간 그렇게 넋을 놓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촛점이 없었다. 단지 하늘에 뜬 달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지난 오 일간 잠조차 자지 않았다.

음식조차 먹으려 하지 않았고, 그저 멍하니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그렇게 하늘만을.......

그는 그녀의 어깨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그녀는 묵천의 손이 닿자 움찔했다. 마치 어미 곁을 떠난 새끼사슴이 호랑이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묵천이 부드럽게 안아주면서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자 곧 그 떨림은 점점 잦아들었다. 그리고는 오래간만에 찾아온 편안한 기분에 취해서 이내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고 말았다.

묵천은 그녀의 머리에 가만히 기대었다. 그녀의 머리에서는 풀꽃 냄새가 났다.

'이런 누이가 있었으면 했었지. 이대로 세상이 멈추어 버렸으면.......'

벽진연은 할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단 한 마디도 제대로 된 말을 뱉아내지 못했다.

실성한 사람처럼 하늘만 바라보는 모습이 묵천에게는 더욱 애처롭게만 느껴졌다.

'너를 지켜주겠어. 그리고 꼭 다시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게 해주겠다.'

묵천은 벽진연이 자신의 친가족처럼 느껴지는 것을 어쩔수 없었다. 고아로 자라서, 외롭게 자란 그에게 그녀가 피붙이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녀도 혼자라서 였을까?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이 그녀를 지켜주고, 그녀가 행복하게만 살아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묵천, 그는 어느새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그리워하게 된 것이다.

'아, 이대로 너와 함께 은거해서 모든 것을 잊고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묵천은 한없이 나약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이런,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사부님을 죽인 그자를, 아직 그자를 내 손으로 죽이지 못했는데. 벌써 이렇게 나약해 지다니, 나약해 지다니.......'

그러나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녀와 어느 산골 한 구석에서 밭이나 일구며 그저 그렇게 평온함 삶을 살았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몹시도 추운 가을밤이었으나. 묵천이 지금껏 지내온 어떠한 밤보다도 아늑하고 포근한 밤이었다.

*               *               *

거룡곡(巨龍谷).

거룡이 먹이를 먹기 위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세인들은 거룡곡이라 불렀다.

게다가 이 계곡은 구조가 호로병처럼 생겨 연신 살을 베어내는 듯한 바람을 토해내고 있었고, 작은 바위들이 연신 튀어 올라왔다.

아마 이 바람에 휘말리면 바위라도 한 조각의 모래로 화해 버릴 것이다.

이런 계곡의 절벽 위에 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삼라만상을 머릿속에 담고 있다고 알려진 사나이, 하늘의 진리를 이미 터득했다고 알려진 사나이인 문천 우문성이었다.

무인들도 오르기 힘든 이곳에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알려진 그가 어떻게 올라와 있는 것일까?

그의 전신은 바람으로 인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나의 조사결과 천하에 그의 무공이 숨겨져 있을만한 곳은 이곳뿐이었다. 분명히 저 아래에는 그의 무공이 숨겨져 있다. 전신(戰神). 그랬기에 그의 종적을 잡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우문성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무려 칠 년간 삼만의 수하들을 풀어 천하를 뒤졌다. 심해 깊은 곳까지.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그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 열 번을 도전해 모두 실패한 곳, 백 명의 수하들을 앗아간 곳, 크흐흐흐.......

이곳이다. 나의 피가 부르고 있다. 나의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선, 전신, 너의 무공이 필요하다. 기다려라."

우문성은 거룡곡의 안으로 몸을 날렸다.

천근추(千斤墜)를 시전해 몸을 무겁게 하고, 호신강기(護身剛氣)로 몸을 보호하며 강철벽도 바스러뜨려 버릴 듯한 바람 속으로 사라져갔다.

우문성이 들어가자 더욱 강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 했고 곧 그의 그림자는 바람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한 사람의 연약한 문사로 알려진 그가 데리고 있다는 삼만의 수하는 무엇이며, 또 지금 보여주고 있는 이 신위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               *               *

황제의 집무실인 집법전(執法殿)에서는 만조백관들이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

상좌에는 당금 황제인 주익균이 앉아 있었고, 그의 바로 앞에는 무복차림을 한 신하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황제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서신을 접으며 말했다.

"이것이 사실인가?"

"추호도 거짓은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누루아치가 반란을 도모하고 있다는 말이렸다."

"그렇습니다. 그는 삼십만 군사를 훈련시키고 있으며, 철 수요가 세 배로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사람들을 보내어 염탐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럼, 이자가 기어코. 흠!"

주익균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황궁의 밤은 암흑 천지에 별빛이라도 내려앉은 듯 많은 불빛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그 불빛 중의 하나가 새어나오는 전각의 안에는 한 사나이가 뒷짐을 지고 있었다.

전 중원을 경영하는 자, 그는 황제 주익균이었다.

하지만 실상 그 전각의 삼십여 장 아래의 지하에는 전각보다도 넓고 큰 대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백여 명의 무사들이 도열해 있었고, 상석에는 한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지상에 서성이고 있는 주익균이 아닌가?

지상과 지하에 같은 사람이 동시에 존재한다니,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실제로는 지하의 주익균이 진짜이고, 지상에서 서성이는 것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지상의 사나이는 그의 수하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절대권력자인 황제는 모든 이의 이목을 속이고 또 다른 모습으로 뭔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의 앞에는 한 사나이가 부복한 채로 자리하고 있었다. 온몸이 선혈로 뒤덮여 있을뿐 아니라, 이미 옷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모습으로 갈기갈기 찢겨진 옷을 걸치고 있었다. 사내는 연신 입에서 검붉은 피를 토했다.

"황상."

"어찌된 일인가?"

황제의 목소리는 그렇게 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오히려 숨막힐 정도로 더디고 낮게 들려왔지만 그 무게는 사뭇 엄청났다.

"엄청난 폭발이었습니다. 그것을 감지하자마자, 소인이 지둔술로 십여 장을 파고들어 갔으나 그 폭발의 여파를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이미 소인은 내장이 자리를 이탈해 가망이 없습니다."

그는 비록 낮기는 했으나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소인이 그곳에 당도한 것은 해질녘이었습니다. 소인은 몸을 숨기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세 시진이 지났을 때 였습니다. 그곳은 여느 때와 같이 너무도 고요하고, 다른 주루와 같았습니다. 그렇게 흥청거리던 주루에 수많은 흑의인들이 달려 들어온 순간, 주루는 적막이 쌓이면서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소인이 알아 차렸을 때는 이미 폭약이 터지고 있었습니다. 정말 어마어마한 위력이었습니다."

그는 공포로 인해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침투했던 자들은 숨 한 번 몰아쉴 틈도 없이 순식간에 녹아버렸습니다. 잠입했던 오십 명 중 소인이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커억...... 욱!"

그는 다시 한 무더기의 핏덩어리를 바닥에 뱉아 냈다.

"그럼, 그곳에 비밀통로는 있었느냐?"

사내는 흐릿해지려는 눈을 애써 치켜뜨고 있었다.

"소인이 조사한 바로는 비밀통로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기관 구조상 의심가는 부분이 있긴 했습니다만 발견할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커억!"

사내의 입에서는 또 다시 선혈이 품어져 나왔고, 눈에서는 이미 생기가 꺼져가고 있었다.

"그럼, 그곳에 들어온 자들은 봤느냐?"

"하아...... 하아......."

사내의 숨 마디가 점점 급박해졌다. 이제 더 이상 그의 말은 또박또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그의 동공은 풀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은 초인적인 힘을 필요로 한 것이었다.

"예. 하...... 하오나...... 그...... 욱! 마교의 무공을......."

사내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주익균의 아미에는 내천(川)자가 새겨졌다.

"마교. 흠, 이 시기에 마교라. 공교롭군."

*               *               *

"나는 마도의 이름으로 힘을 얻었고, 정도의 이름으론 명분을 얻었다. 이로써 천하를 지배할 것이다. 그리고 총령은 이제 자신이 갖고 있는 단 하나마저도 잃게 될 것이다. 백천우!"

남태천의 뒤에는 한 사나이가 부복해 있었다.

"예."

"그대는 그대의 모든 노력을 동원해 총령의 위에 앉아 있는 자를 알아내야 한다. 그가 누구인지, 얼굴조차 보이지 않으면서 마교를 다스릴 수 있는 자가 누구인지 꼭 알아내라!"

"예. 알겠습니다."

남태천의 입에서는 더 이상 어떤 말도 없었다. 잠시 다음에 있을지도 모를 말을 기다리던 백천우는 남태천에게 읍을 해 보이고는 사라졌다.

백천우가 사라지자 남태천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흠! 저놈은 제 어미도 잡아먹을 사갈 같은 놈이다. 자신의 마음을 구 푼 정도는 숨기고 있을걸? 이곳 저곳에 붙어 그 중 어부지리를 얻으려 하겠지. 허나 쉽지는 않을 것이다. 언젠가 너 역시 나의 손에 죽을 테니까."

남태천이 갑자기 장난처럼 슬쩍 소매 끝을 흔들었다.

그러자 우두둑! 소리와 함께 처마 끝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처마 끝을 타고 한줄기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벌써 세 명째! 나의 일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군. 나에게 관심을 보일만한 사람은 모두 두 사람이다. 둘  중 누구일까?"

그의 목소리는 음산하게 울려퍼졌고 가늘게 뜬 눈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               *               *

천지가 자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지축을 흔들고 뇌우(雷雨)를 방불케하는 물줄기의 소리가 바로 옆 사람의 말소리조차도 주의해 듣지 않고는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길림성(吉林城)에는 자천협(紫天峽)이라는 곳이 있었다.그 물빛이 자주빛을 띠고 있어 자천협이라 부르는 이 협곡은 그 절경으로 인해 많은 시인묵객들이 드나들었고, 그 명성은 길림성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곳은 국경과 인접해 있었고 북으로는 로(虜)를, 동으로는 왜(倭)을 두고 있었으므로 평화로운 지역일수는 없었다.

명 황조는 이들을 북로남왜(北虜南倭)라 하여 경시하였으나, 그들의 세력은 무시할 수 없어 이곳에 십만의 장병을 이동시켜 놓았다.

그래서 그 경비가 철통과 같았고, 사사로이 이곳을 넘는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처형시켜 이곳을 망향산(望鄕山)이라고도 불렀다.

한 번 넘으면 죽건 살건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허억, 허억......."

벽진연의 입에서는 잦은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이미 피골이 상접해 있었으며, 병마가 깃들어 혈기를 찾아볼 수 없어 마치 시신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녀의 눈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촛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의 앞에는 묵천이 걷고 있었다. 그의 모습도 그녀보다 별반 나을 게 없어보였다.

앞으로 걸어가고는 있었으나 생각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랬왔던 습관대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시체가 걸어간다면 이런 모습일까?

털썩!

얼마를 그렇게 걷더니 벽진연은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녀보다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가던 묵천은 그녀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병들어 움직이기조차 힘든 그녀를 끌고 십오 일을 버텨 이곳까지 왔다. 그도 이제 지칠대로 지친 것이다.

앞으로 이 산을 넘으면 조선과의 국경이 나올 것이고 국경만 넘으면 그는 왜국(倭國)으로 도망갈 생각이었다.

백천우의 마수를 피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무공만 회복한다면 사부의 복수를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벽노인의 유언을 받들어 벽진연을 데려가노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서 벽진연 역시 그와 동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그의 짐이 되고 있었다.

영양실조로 이미 기력을 잃어 움직이기 힘들 정도였기 때문에, 그의 걸음으로 십 일이면 올 수 있는 거리를 오 일이나 늦게 늦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에서는 일말의 원망의 빛도 일지 않았다. 피곤해서 일그러진 얼굴이었지만 그는 오히려 자상한 미소까지 띄우며 걸어가 그녀의 앞에 무릎을 끓고 앉았다.

그리고는 등을 보이며 업히라는 시늉을 했다.

벽진연은 묵천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무런 말없이 업혔다.

그리고 마치 아버지의 등에 업힌 것 같은지, 얼굴을 몇 번 부비적대다가, 어린아이처럼 다소곳하게 잠이 들어 버렸다.

묵천은 아무런 말없이 앞으로 걸어나갔다.

비록 그의 발이 천 근이 되는 듯 무거웠고, 그의 앞에 자리한 산이 그 높이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 보였지만, 그의 마음만큼은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그의 등으로부터 따스함이 전해져오고 있었다.

이때였다.

앞에서 누군가 두런두런 말소리가 새어나왔다.

"그자들이 이곳으로 도망쳤단 말인가?"

"그렇다니까?"

묵천은 몸을 숙여 납작하게 엎드렸다.

"태대감(太大監)이 그자를 잡으라 했다고? 아니 왜?"

"그건 모르지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관부의 높은 사람들의 명령인 모양이야. 군좌가 오늘 아침에 한바탕 닥달을 당한 모양이야."

그자들은 국경을 지키는 관군인 듯 둘이 마주 서서 보초를 서고 있었고, 장병(長兵)과 검을 휴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갑의를 입고 있었는데 둘은 같은 계급인 듯 편안히 앉아 연초를 피우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옌장. 아마 돈이라도 받은 모양이지?"

"글쎄, 높은 양반들 속을 누가 알겠는가? 게다가 그 양반들 주머니야 밑 빠진 뒤주가 아닌가?"

"밑 빠진 뒤주라니?"

"이 사람이 둔하긴. 아! 안 그런가? 들어가면 어디로 새나갔는지 그 종적을 찾을 길이 없으니 바로 밑 빠진 뒤주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 말을 들은 관병이 크게 웃었다.

"맞네. 자네의 말이 맞아. 밑 빠진 뒤주지. 암, 암. 그런데 그자들은 뭐 때문에 도망쳤다고 하던가?"

"글쎄, 들리는 말로는 그자가 중요한 정보를 훔쳐 왜국에 팔려 한다고 하는데, 남자만이 아니고 여자가 함께 도망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높은 양반들 첩이 바람나서 어떤 사내와 도망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 그런데 왜들 그자들을 잡으려고 안달인지 모르겠군."

"이 사람아 그거야! 태대감이 군좌들에게 은 백 냥을 걸었다니 않는가? 그래서 군좌들은 혈안이 되어 우리만 닥달하는 것이고, 아마 누군지는 몰라도 오지게 걸린 모양이야."

"그렇다면 그자들이 도망하면 우리들이 치도곤을 당하겠는걸?"

"아마 그렇겠지."

"빌어먹을. 처가댁에서 돈이라도 꿔다 출세해야지. 이거야 억울해서 일은 지들이 저질러놓고 깨지는 것은 우리들이니. 이거야 원."

"자! 우리도 한 바퀴 돌고 오세. 조금 있으면 순찰감사가 돌 시간이야."

"그러자구."

두 그림자는 몸을 일으켜 산등성이를 타고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움직일 때까지 묵천은 바닥에 엎드려 숨소리 한번 크게 내지 못하고 있었다.

'태대감이라고? 그럼 백천우 이자가 관부와도 줄이 다았다는 말인가? 빨리 이 산을 벗어나 국경을 넘어야 한다. 저곳, 저 계곡만 넘으면 이제 추격자는 없다.'

묵천은 조심스럽게 벽진연의 몸을 추스르며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산등성이를 넘어 계곡으로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다.

피잉―!

한발의 화살이 날아와 벽진연의 등을 뚫고 묵천의 어깨에 박혔다.

"크윽!"

묵천은 힘없이 앞으로 꼬꾸라져버렸다.

"맞았다."

뒤쪽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탄성이 들려왔다.

텀벙―!

차가운 계곡의 물살이 옷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그러나 묵천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진연!"

그는 자신의 등에 업혀있던 벽진연을 밀었다.

그러나 화살 한 대가 그 두 사람을 관통하고 있어 그녀의 몸은 밀려나지 않았다.

"진연!"

뚝! 화살이 부러져 나갔다.

묵천은 자신의 아픔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더 이상 그녀에게서는 따뜻한 고동의 느낌이 전해져 오지 않았다.

화살이 그녀의 등을 관통하고 왼쪽 가슴으로 삐져 나와 있었던 것이다.

묵천은 울지 않았다. 이미 눈물이 말라버린 것일까?

지금 그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일이 끌어안는 것인 듯 뼈가 으스러져라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의 시체는 빠르게 식어갔다.

너무도 고통스러운 삶이었기 때문인지 오히려 죽음이 너무 편해 보였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도 느끼지 못하고 그의 등에 업혀 일 순간에 절명해 버린 것은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묵천은 이 순간 자신이 왜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와 함께 밭을 일구며 조용히 살아가고 싶었던 꿈조차 꿀 수 없게 되어버린 지금, 왜 가슴속에서 증오가 일지 않는가를 모르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이런 결말이 너에겐 더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미안하다.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서. 넌 나의 단 하나의 가족이었어.......'

그건 유일한 피붙이를 잃었다는 너무나 큰 공허함 때문이었다는 것을.......

'제발, 저 세상에서라도 행복하기를.......'

그러나, 그가 감상에 젖도록 내버려둘 적들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사오십 명의 그림자들은 결코 변방의 무사일 수 없었다.

오직 살인을 위해 살아가는 마교의 검은 악마들이었다.

그들은 이 힘없는 여인과 무공을 잃어버린 이 한 사내를 죽이기 위해 이 먼 곳 변방까지 달려온 것이다.

묵천은 점차 다가서는 그들을 느끼고 있었다.

"하하하하. 지독하구나. 백천우! 그토록 나를 죽이고 싶었느냐? 그래, 하지만 나는 너의 소원을 들어 줄 수 없구나. 난 언젠가 너의 목을 베기 전까지는 절대로 죽을 수 없다. 하하하하!"

묵천은 하늘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는 광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통렬히 웃었다.

그리고 그의 사방으로는 검은 옷의 사람들이 은빛의 장검을 들고는 서서히 압박해 오고 있었다.

묵천은 웃음을 멈춤과 동시에 바닥의 돌을 집어들어 앞의 사나이에게 던졌다.

사내가 몸을 틀며 움찔하자 묵천은 뒤의 사내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리고는 그 사나이의 손목을 꺾어 검을 빼앗고는 몸을 틀어 상대의 목을 베어버렸다.

묵천에게 다가들던 사내들은 실성한 듯 보이던 사내가 갑작스럽게 덤비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들 역시 수 년간을 단지 살인만을 위해 살아온 자들이었다.

그들은 어느새 침착한 모습으로 돌아와 자신의 동료를 베어버린 묵천을 향해 빛살처럼 쳐들어왔다.

묵천도 역시 같이 움직였다.

검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서 있던 그는, 흑의인들이 달려들자 늘어뜨렸던 검을 다시 휘저었다.

촤아악―!

검 끝이 닿자 물이 반으로 갈라져 버렸고, 그 물살은 달려오던 흑의인의 눈앞을 가렸다.

당황한 흑의인들이 허우적대는 사이 묵천의 몸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달빛에 반짝이는 검과 그 검을 들고 흑의인들의 사이를 오가며 춤을 추는 묵천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폭의 지옥도였다.

묵천의 발걸음은 신묘하기 짝이 없었다.

칼을 세워놓은 듯 날카로운 바위틈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오십여 명에 달하는 사내들을 베어넘겼다.

마치 수십 줄기의 벼를 일거에 베어내는 농부의 손처럼 거침이 없었다.

묵천의 검은 움직이는 소리(劍音)조차 들리지 않았다.

한 줌의 진기조차 모이지 않는 몸이었지만 그의 눈에서는 퍼런 광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떤 이는 반이 갈라져 죽었고, 어떤 이는 사지가 절단이 나 죽었다. 어떤 이는 허리가 두 동강이나 죽기도 했다.

그것은 검무였다. 단순한 무술이 아닌 하나의 춤사위였다. 마치 장터에서 광대가 사람들의 눈을 끌기라도 하려는 듯 그는 시원스럽게 춤을 춰대고 있었다.

조금의 망설임이나 멈칫거림도 없었다.

마치 개구리를 때려잡는 아이들처럼 후회나 뉘우침도 없는 듯했다.

그의 검 아래 흑의인들의 모습은 같지 않았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모두 죽었다는 것이었다.

묵천의 몸은 한 자루의 검으로도, 열 자루의 검으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

흑의인들은 자신들이 허공을 베는 수만큼 쓰러져 갔고, 마지막 한 사나이만이 남았다.

묵천과 벽진연의 몸에 화살을 박아넣은 흑의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동료들이 쓰러지는데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걸리지 않은 것을 보았다. 너무 두려운 나머지, 그는 이 사나이가 다가서는 것을 보고도 화살을 매기려고조차 하지 못했다.

묵천은 그 흑의인을 향해 다가섰다.

흑의인의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털썩!

그는 진득한 선혈이 낭자한 곳에 주저 앉았다. 무릎에 힘이 다 빠져 나가버린 것이다.

묵천은 검을 들어 흑의인의 목에 대었다.

"사, 살려줘!"

그는 소리 질렀지만 아랑곳없이 그어진 검은 허공에 선연한 빛을 남겼다.

그리고 흑의인의 팔이 떨어져 나갔다.

"아악―! 사, 살려줘! 살려......."

파악―!

다시 한 번 검이 허공을 갈랐고 흑의인의 나머지 팔도 떨어져 나갔다. 흑의인은 두 팔을 잃고 앞으로 꼬꾸라지면서 몸으로 바닥을 기어갔다.

"사라...... 아...... 살려줘......."

묵천은 표정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그런 그의 표정이 더욱 사내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다시 그는 일 검을 떨쳤다. 이번엔 다리였다. 그러자 사내는 바닥에 엎드려 끄르륵거리며 도망치려고 버둥거리고 있었다.

"아...... 아...... 살려줘...... 아!"

묵천은 꼬챙이에 개구리를 꾀듯 서서히 아주 지루할 정도로 느릿하게 흑의인의 심장 부위에 검을 찔러넣었다.

흑의인의 몸은 검이 들어 갈수록 미친 듯이 퍼덕거렸다.

그러나 어느 정도에 이르자 다시 잠잠해졌다.

묵천은 흑의인이 움직이지 않자 검을 찔러넣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는 쓰러져 있는 벽진연의 시신을 들쳐 메고 국경을 넘어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돌아서는 묵천의 눈에는 서늘한 안광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사라지자 널린 시신들의 피냄새를 맞은 들개들이 퍼런 안광을 비치며 모여들었다.

어느 누구도 수습하지 않는 흑의인들의 시신은 이 들개들의 꽤나 훌륭한 만찬이 되었다.

*               *               *

조약빙의 앞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한 구의 시신이 있었다.

소하라 불리며 남태천의 광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여인, 그녀는 얼음으로 깎인 빙관(氷棺)에 담겨 부패하지 않게 되어 있었다.

조약빙은 망연자실했다.

동경 하나를 빼앗은 것으로 소하가 자살을 할 줄은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소하에게 그것이 고통이 된다는 것을 알고 동경을 빼앗아 그녀가 괴로워하는 걸 즐겼던 조약빙이었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어떻든 간에 조약빙의 앞에 있는 이 여인은 이미 육신만이 남아 있었고, 그로 인해 모든 책임은 그녀의 것이 되었다.

만일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빙궁과 마교는 다시 결합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의 아버지인 빙궁궁주가 계획하고 있는 일은 크게 차질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가 처음으로 마음을 빼앗긴 한 남자를 잃게 되리라는 것,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그에게 그녀 자신이 증오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들었다.

분명히 그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녀를 죽이려들 것이다. 소하가 그에게 어떤 존재인지 그녀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조약빙은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고, 그래서 결국은 계략을 짜내었다.

그녀는 허공에 대고 말했다. 너무 많이, 그리고 오랫동안 고민을 해온 탓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건조해져 있었다.

"여봐라! 하인들을 모두 불러모아라."

"예."

시위 중 하나가 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잠시 후, 그녀의 앞에는 소하와 조약빙의 수발을 들던 하인과 하녀들이 모두 끌려왔다.

조약빙은 서늘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소하라는 여인이 죽은 것을 봤느냐?"

그러자 하인들은 그녀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약간 웅성거리다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조약빙은 싸늘하게 웃었다.

"그래서 죽는 것인줄 알아라!"

순간 하인들의 등뒤에 한 무리의 무인들이 나타나 그들을 사정없이 베어 넘겨버렸다.

"커억. 이럴 수가!"

"우억! 도, 도대체......."

하인들은 차가운 표정의 그녀를 바라보며 원망의 눈빛으로 죽어갔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 일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는 결국 내 사람이 될 것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이 사랑인가?  그녀의 눈에서는 광기가 번들거렸다.

그녀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고, 쓰러져 죽어 있던 하인들의 시신은 어느 순간에 핏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치워져 있었다.

*               *               *

사람의 눈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에는 무한한 기쁨과 행복, 그리고 갈망과 설레임 등이 녹아있다.

죽음을 눈앞에 둔 노인이라면 회안과 후회, 두려움 등이 녹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이 여인의 눈에는 공허와 무언가 알 수 없는 슬픔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사나이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하."

그녀는 조약빙의 손에 의해 빙관에 넣어진 소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남태천의 눈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지 않은가?

조약빙의 손에 제압되어 있고, 남태천을 바라보지도 않고 그저 멍한 눈을 들어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분명 그녀는 소하였고, 남태천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소중한 여인이었다.

그런데 죽은 여인이 다시 살아날 수도 있단 말인가?

남태천의 손은 가볍게 떨고 있었다.

조약빙을 향한 그의 눈은 증오의 빛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조약빙은 남태천의 눈빛을 받자 가슴에 비수를 꽂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 아니었음에도 그녀는 자신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남태천은 자신이 최초로 선택한 사내였다.

쓰레기로 치부하며 멸시하던 사내들 중 자신이 처음으로 인정했으며 스스로 마음을 준 사람이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자신에게 증오의 빛을 띠고 있고, 그것이 바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에리는 가슴을 움켜쥐고,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또박또박 말했다.

"어때요, 결정했나요?"

남태천의 눈은 소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지 얼마나 되었을까?

"좋다. 네 뜻대로 해주지."

조약빙의 눈에는 안도의 빛이 흘렀다.

"그러나!"

남태천의 목소리에 유난히 힘이 주어졌다. 조약빙은 다시 긴장했다.

"기억해 둬라. 언젠가 나는 너에게 이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그의 말에 싸늘한 표정으로 바뀐 조약빙은 날카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이 계집에는 무사할 것이라 생각하나요?"

남태천의 얼굴은 참담히 일그러졌다.

"흥! 좋아요.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해도 난 그다지 상관하지 않아요. 당신 말대로 우린 이익에 의해 만난 사이가 아닌가요? 그러나, 이것만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에요."

조약빙이 소하의 손목에 힘을 주자 멍한 눈의 소하에게 고통의 빛이 스쳤다.

남태천은 순간 움찔하고 조약빙을 노려보았으나, 이내 포기하고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 나가버렸다.

그런데 남태천이 사라지는 순간, 그토록 표독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던 조약빙이 힘없이 무너지며 오열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서러운지 그녀는 한참을 힘없이 쓰러져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고, 그 옆에는 소하가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               *               *

"크하하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가 주루 안에서 터져 나왔다.

"그렇지, 그렇지, 암암!"

노화자는 미친 듯이 웃으며 탁자를 탕탕 쳤다. 그러자 탁자 위의 사발들이 들썩거렸다.

"그것이 바로 악인의 말로가 아니겠는가? 그래, 그런데 소하라는 여인은 자결을 했는데 어떻게 살아나게 된 것인가? 빙궁에는 죽은 이도 살리는 묘약이 있단 말인가?"

그런 노화자를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 사람이 있었다. 문 옆에 앉아 드나드는 사람들을 슬금슬금 살피며 내내 청년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음침한 분위기의 사내들이었다. 악인들의 말로로 당연하다는 말이 귀에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청년은 빙그레 웃으며 노화자에게 말했다.

"그런 묘약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

"후후. 바꿔치기 한 것입니다. 혹시 노형님께서는 역천미혼공(逆天迷魂功)이란 것을 들어보셨습니까?"

노화자는 일시지간 긴장한 눈빛을 하였으나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흠! 들어본 적은 없지만 그게 무슨 도가의 술법쯤 되는 모양이구먼."

청년의 눈에도 잠시 이채가 흘렀다. 하지만 다시 아까의 쾌활한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렇습니다. 빙궁 특유의 절예로 인간의 혼백을 마비 시키는 특이한 기공입니다. 이 기공에 당하면 바보 아닌 바보가 되어 자신의 의지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단 시술자의 명에는 무조건적인 복종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호! 그럼 그 역천...... 그 무엇인가는 죽은 이도 살아나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소하는 분명히 죽었습니다. 그녀는 가짜였던 것입니다. 소하와 닮은 여인을 잡아와 역용을 하게 한 후 그녀에게 역천미혼공을 시전한 것입니다."

노화자는 탁자를 탁 쳤다.

"거참, 대단하군 그래. 하지만 남태천이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좀 이해가 되지 않는군. 아무리 역용을 했다고 하더라도 말일세. 역천미...... 뭐라는 그  무공을 시전해서 소하와 같은 상태로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청년은 술을 한 잔 쭉 들이켰다.

"글쎄요. 그건 알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제가 남태천이 아닌 다음에야 말입니다."

청년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다 말을 이었다.

"노형님, 제가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말했던 것을 기억  하십니까?"

"응? 뭘 말인가?"

청년은 술을 한 잔 쭉 들이키더니 말을 이었다.

"전신에 대해서 말입니다."

다시 노화자의 눈에 짧게 긴장이 흘렀다.

"그, 그래."

"이제부터 할 얘기는 거룡곡을 향해 몸을 던진 문천 우문성 그의 얘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전설의 전신과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쏴아아아아아아―!

그가 말을 이어나가자 웬지 주위에는 싸늘한 한기가 이는 듯 했다.

*               *               *

콰아아아아아―!

미친 듯이 소용돌이치는 무형의 기운에 우문성의 몸은 폭풍우를 만난 일엽편주(一葉片舟)처럼 휩쓸려 들어가고 있었다.

우르릉......! 콰아아아아아악―!

우문성의 몸집보다도 거대한 바위가 절벽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으드드득―!

우문성의 얼굴에서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지금 그는 필생의 공력을 운공해 천근추를 시전해 바람에 항거하며 계곡의 바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도 예전에 저 부서진 바위 꼴이 되었을 것이다.

"크흐흐....... 대단하다. 진정 대단하다. 그러나 나는 이길 것이다. 꼭 이기리라. 크하하하하하."

그리고는 용의 아가리처럼 달려드는 회색의 먼지 바람 속으로 몸을 던졌다.

마지막 순간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어렸다.

자연에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분노인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누구에 대한 분노인지 알 수는 없었다.

끼아아아악―!

마녀의 울음소리처럼 날카로운 바람의 음성이 일어났고 우문성의 몸은 회색의 먼지 바람 속으로 빨려 들어가버렸다.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는 무(無)의 공간에 갇힌 한 사나이가 있었다.

"으으으으......."

신음소리를 흘리며 누워 있는 것은 우문성이었다.

우문성의 주위에는 검은 안개 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우문성을 감싸안은 것처럼 보였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무거운 중압감이 전신을 엄습해 왔고, 그 음습하고 차가운 기운이 그의 전신을 감싸안고 있었다.

갈기갈기 찢기어진 의복과 상처투성이인 그의 전신은 피로 얼룩덜룩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몸에 난 상처의 아픔이나 추위따위를 느낄 여유가 없었다.

주위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아마도 인간이 모태 안에 있을 당시를 기억한다면 지금 이 순간과 같다고 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느낄 수도 볼 수도 생각할 수도 없었다.

'난 이 어둠 속에 갇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 많은 지식들은 어디 가고 문천 우문성은 머릿속에 천자문 하나 떠올릴 수가 없을 정도로 멍해져 있었다.

'이 공허, 이 답답함은 무엇이지? 나는 누구인가?'

그의 머리 속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 자신마저도.......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우문성이 눈을 뜨자 그의 눈에서는 마화가 번뜩이고 있었다.

세상의 그 어떤 빛보다도 붉게 타올라가고 있는 그 불꽃의 정체는 분노였다.

무언가 그의 눈에서 응어리져 세상을 향해 솟아 나가고자하는 분노가 형상화되어 비쳐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런 표정도 없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자리에 정좌해 앉아 있었다. 그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은 무위자연(無爲自然)도 무념무아(無念無我)도 아닌, 철저한 암흑과 절망, 그리고 그로 인한 상실감등이 전부였다.

지금 그 모든 것이 지옥의 불길이 되어 그의 눈으로부터 폭사해 나오고 있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우문성의 눈에서 뿜어나오던 마화가 서서히 사그러들더니 눈 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그의 행동이었다.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다는 듯이 멍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천장에는 멀리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구멍까지의 높이는 삼백 장 정도였고, 게다가 그 구멍은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밖에 안되어 보였다.

그런데다 벽에는 이끼가 잔뜩 깔려있어 무공은 고사하고 나는 새도 올라 갈 수 없을 것이었다.

바깥은 미친 듯이 불어대고 있는 광풍이 굴 밖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문성은 저 작은 구멍을 통해 삼백 장이나 아래로 떨어진 것이었다. 이곳으로 떨어진 것은 하나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내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지?"

우문성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래, 그때......."

그 당시 그는 광풍 속에서 신형을 안정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천근추를 시전해 계곡의 바닥으로 내려섰었다. 그러나 바람에 깎여 거울처럼 반질거리는 계곡 바닥에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낙심한 우문성은 부동심(不動心)이 흔들렸고, 그의 몸이 휘청이면서 이때 바람에 날려온 돌이 그의 뒷머리를 후려쳐버린 것이다.

그렇게 의식을 잃었고 지금 이 순간 다시 깨어난 것이다. 하지만 의식을 잃었던 중간에 일어난 일은 그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다지도 상쾌한 기분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의 몰골은 엉망이었으나 그의 몸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이 넘치는 기운은 예전의 내가 아니다. 뭔가 기연을 얻은 것일까?"

망연히 있던 우문성이 주위를 돌아보았다. 우문성의 얼굴은 경악에 가까운 표정으로 변해버렸다.

"이럴 수가!"



제12장  기연(奇緣)



"크하하하하하! 전신(戰神). 전신의 전설이 사실이었다."

우문성이 바라보는 석벽에는 한 줄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나의 부모를 죽인 자들! 용서치 않겠다.

                                      의각(義脚)>

의각은 소림의 사십이대 제자로 이름을 날렸던 무승이었다. 의각이란 이름이 날리게 된 것은 황하를 주름잡던 적패(赤狽)라 불리는 해적들로 인해서이다.

적패는 황하 하류에서 악명을 날리던 해적단으로 그 인원이나 규모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들은 늘 붉은 천을 머리에 쓰고 있었으며 두 척의 배를 일조로 하여 활동했고, 상선이나 유람선보다는 국가의 공물을 운송하는 군선을 주로 노렸으며 그로 인해 그들은 역도로 몰려 군단에게 쫓기던 중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용의주도하여 군의 추격을 번번히 따돌렸고, 그로 인해 군에서는 많은 사상자와 서른 척이 넘는 배를 잃게 되었다.

황제는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무림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소림에 친서를 보내 무승 서른 명을 청했다.

그들 중 하나가 의각이었다.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소림의 승들은 서너 번의 실패 끝에 해적의 본거지를 찾긴 했으나 그들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선량한 백성들이었고, 대다수가 관료의 횡포에 의해 자신들의 고향에서 쫓겨난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황제에 대해 강한 적의를 갖고 있었고, 주로 군선만을 강탈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당시 해적의 소탕을 위해 파견된 자는 내관 출신으로 황태후의 총애를 받고있던 추취(醜取)란 자였다.

그자는 자신이 신임을 얻기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명했고, 어린아이와 부녀자들만이 있던 마을을 피로 물들였다.

그리고 인근 야산을 모두 뒤져 숨어있던 자들마저 모두 목을 베고 산과 집들을 불태워버렸다.

그 불은 삼 일간이나 꺼지지 않고 타올랐으며 이십여 리 떨어진 마을에서도 그 연기를 볼 수 있었고, 시신이 타는 냄새로 방문을 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강에 나와 있던 해적들은 뒤늦게 마을로 돌아와 군인과 접전을 벌였지만 사상자만 내고 살아 도망친 자들은 겨우 서너 명에 불과했다.

그로 인해 추취는 황태후에게 더욱 총애를 받았고 내관으로는 처음으로 육두품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 당시 소림의 무승으로 전쟁에 참가했던 의각은 무자비한 살육에 분개해 군에 정면으로 도전을 했고 추취를 살해하려다 실패를 했다.

그로 인해 그는 역도로 몰려 참수형이 내려졌고 소림은 의각을 파문시켜버린 것이다.

의각은 분개했다. 권력과 타협해버린 소림에 대해 분개를 하던 그는 자신의 불심에 마저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그는 끝까지 군에 대항하다가 해적과 군대의 치열한 싸움을 틈타 자취를 감추었다.

의각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고서 사라져버리자 이에 분개한 추취는 의각의 부모와 형제등 구족을 멸하여 버렸지만 끝까지 의각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의각, 이자야 말로 전신의 진짜 신분이 틀림없다. 크하하하. 소림의 파계승 의각! 이제 전신의 힘으로 나의 복수가 시작되는 것이다."

우문성의 웃음소리가 석실 안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눈에 갈무리되어 번뜩이는 한 줄기 마화와 은연중에 비치고 있는 그의 갑작스런 패도적인 기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그그그긍!

석문이 열리고 한줄기 바람이 들어오자 굴 안에 수북히 쌓여 있던 먼지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화악―! 치이익―!

화섭자에 불길이 일자 메케한 내음이 일며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굴 안에는 이미 삭아 그 형체마저 없어져버린 책 더미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아마도 당대를 울렸던 기서들이거나 그렇지 않다면 능히 천하를 질타할 무공서들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형태마저 온전치 않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모두 부서져 내렸다.

우문성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니......."

콰앙―!

우문성의 주먹질에 먼지가 수북히 쌓인 책장이 먼지가 되어버렸다.

"그럴 리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오래 되었다고 하더라도 무공을 익힌 흔적마저 없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우문성은 벌써 세 개의 석실을 돌아왔다.

그러나 어디에도 다 썩어 넘어가는 책들뿐이었지 제대로 형체조차 유지하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곳이 마지막 방인데......."

그는 석실의 정 중앙에 앉아 석실의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는 뭔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역시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것이다.

"모두 방이 세 곳이다. 그 크기와 방위가 풍수학적으로 산을 등지고 강을 따라가게 만들어져 있다. 왜? 무릇 묘를 쓰더라도 머리를 산쪽으로 향하고 발치를 강에 이르게 하는 법인데 어째서 이런 역행하는 풍수를 사용했을까? 이치에 맞지 않는다."

우문성은 석실의 구석구석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만면에 미소를 띄우기 시작했다.

"하하하. 그렇구나. 진세다. 진을 짜기 위해서 그랬구나. 흠, 그런데 아무런 기운도 없는 이곳에 진이라니! 십이지신(十二支神)의 기운 중 축(丑)의 기운을 빌었고 토(土)의 기운이 성쇠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곳 땅 밑에 무언가 다른 석실이나 연공실이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해가 가지 않는군. 무엇으로 진세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

우문성은 문득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장에는 북두 칠성 모양의 작은 보석들이 박혀있었다.

"저건?"

그러다 그의 입에서 이내 광소가 터져 나왔다.

"그렇구나. 토귀둔신역진(土鬼遁身逆陣). 하하하하!"

토귀둔신역진(土鬼遁身逆陣).

말 그대로 귀신이 흙 속에 숨은 듯 진의 영향이나 흔적 따위는 없다.

게다가 본시 다른 진의 방법과는 전혀 다르게 역행(逆行)하므로 본시 그 진을 알고있다고 하더라도 쉽게 파해 할 수 없고 잘못 건드리면 진세가 발동하며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고 잘못하면 진세에 의해 목숨마저도 잃어버릴 수 있다.

이 진세의 묘용은 진세의 기운을 감추어 기물이나 물건 등을 보호하는 것으로 토(土)의 기운이 성한 곳에서 그 위력이 배가되며, 특히 풍수지리학적으로 명당이라 불리는 곳에 이 진을 쳐놓으면 귀신조차도 발견하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 진의 창시자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단지 몇몇 책자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나 그마저도 없어져 이미 세상에서는 잊혀진 진법이었다.

"위력이 없는 이 진은 현세에 이르러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진은 파해법을 모르고서는 전혀 풀 수 없는 진이기 때문이다. 아마 이 진은 소림의 나한진보다도 오래 되었을 것이다."

우문성은 눈을 감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파해법을 생각하는 것이리라.

"어쩔 수 없다. 도박을 해 보는 수밖에. 나의 계산대로라면 저곳 일곱번째 별이 생로(生路)일 것이다."

우문성은 지력을 쏘아보냈다.

퍼억―!

보석이 터지며 우문성의 얼굴에는 긴장의 빛이 흘렀다.

하지만 곧 그의 앞이 흐릿해지면서 벽에서 석문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드디어 이 우문성에게도 하늘이 길을 열어 주시는 구나."

우문성은 석문쪽으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들어섰다.

그그그긍―!

석문이 열리며 석실 안이 드러났다.

먼지 한 점 묻어 있지 않은 석실의 가운데에는 단이 하나 놓여 있었고 단 위에는 야명주가 희미한 빛을 뿜고 있었다. 야명주의 빛은 하나의 선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끝에는 목함이 놓여 있었다.

우문성은 그 어떠한 보화나 기물(奇物)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을 정도로 굳건한 정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타오르는 그 탐욕과 사악한 기운이 가득했다. 평소 그의 모습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던 것이었다.

그러나, 우문성은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우문성이 단으로 다가가자 그의 눈앞에 갑자기 희미한 빛의 덩어리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는 당황하여 멈추어 섰다.

그 형체는 서서히 하나의 형상으로 변해갔다. 그 형상은 분명 악마의 모습이었다. 그 악마가 짓고 있는 사악한 웃음은 보는 이의 마음을 뒤흔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마도 범인이 이런 모습을 봤다면 정력이 고갈되어 죽거나 그렇지 않는다면 혼절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우문성은 그 악마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자 악마 역시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우문성의 미소에 응답했다.

우문성, 그는 이미 마성에 젖어들어 악마의 웃음에도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을 신중하게 옮겼다. 드디어 그는 석단에 도달했고 그 위에는 혈마지묘(血魔至妙)라고 음각 되어진 나무조각이 놓여 있었다.

혈마(血魔).

혈마는 팔백 년 전에 세상을 혈겁에 몰아 넣었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혈마가 출현한 것은 불과 삼 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행적은 말로 다 못할 정도였다.

그는 자신이 사막의 저편 서역에서 건너 왔음을 밝혔고 한 주루에 들러 주루 안에 있던 종업원과 주인, 그리고 손님 등 사십여 명을 그 자리에서 분시해 죽이는 것으로 첫 살인을 저질렀다.

그의 이름이나 정체는 알려진바 없으나, 그의 악행은 천하를 진동시키고, 그의 무공은 하늘을 놀라게 했다.

삼 년이 지나 그의 이름은 혈마가 되었고, 그후 그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그는 삼 년이라는 시간동안 모두 사만 이상의 양민을 죽였으며 일만 이상의 무인들을 살해했다.

황제는 그의 악행을 더 이상 두고보지 못했고, 무려 십만이라는 정병을 출전시켜 혈마를 잡게 했었다.

그러나 사라진 혈마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십만의 군사는 발길을 돌려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의 기억에서 혈마라는 괴인은 점차 잊혀져 갔다.

우문성은 혈마지묘라는 나무조각을 들어보았다.

나무조각의 뒷면에는 "혈마독존진천하(血魔獨尊進天下)" 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크흐흐흐. 어리석다. 이자는 지독한 자기만족에 빠져 있구나. 혈마. 전신이라 불리는 자가 이 혈마의 후예였다니....... 크크! 천하제일마의 위용이 오늘에 이르러서 나에게서 발휘되겠구나."

우문성은 목함의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혈마무록(血魔武錄)이란 표지의 책이 한 권 들어 있었다.

"혈마의 무공이로구나."

우문성의 눈에는 흉광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그는 혈마무록의 표지를 넘겼다.

<나는 너무도 뛰어난 외모와 재능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의 어린 시절 주위의 모든 사람은 나를 시기해 칼로 피부를 한 점 한 점 도려내고 그곳에 소금을 발라 암굴 속에 밀어넣었다. 그들은 나에게 악마라 불렀다.

내가 그들보다도 더욱 뛰어나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그러나, 나는 죽지 않았다.

그곳을 탈출해 서역으로 몸을 숨겼다.

서역에서 나는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무공을 익혔고, 그로 인해 이 무공들을 창안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한계에 부딪혔다.

그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나는 인간이 한계를 가지게 되는 것은 나약한 마음 때문임을 깨닫고 철저하게 인간의 마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나는 마(魔)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가장 사이한 악마지기(惡魔地氣)가 흐르는 곳에 굴을 만들고 나의 모든 것을 이어 받을 연자를 기다린다.

그대는 이미 이 땅의 기운을 모두 흡수했다.

이곳은 악마지혈(惡魔地血)로 분류되는 금역이기에 그대는 이미 정명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다.

그대는 나의 위용을 빌어 이 땅을 지배하거나 철저하게 파괴시킬 것이다.

부디 이 세상에 나와 그대의 이름이 진동하길 빌며.......>

그 아래 부분은 지워져 잘 드러나 있지 않았다.

그러나 우문성은 그의 뜻을 조금은 이해할 수가 있었다.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주지. 그런데 놀랍군. 이 책은 종이가 아닌 인간의 피부로 만들어 졌잖은가. 그것도 여아의 것이 틀림없다. 대단한 자다. 이 정도의 책을 만들려면 최소한 백여 명의 여아를 죽여야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혈마, 이것을 기억해 두어라. 나는 너 따위를 위해 무공을 익히는 것이 아니다. 네 이름이 아닌 나의 이름으로 천하의 위정자들을 모두 없애주겠다."

우문성은 책을 한 장 한 장 넘겨가기 시작했다. 그는 서서히 악마로서의 눈을 뜨기 시작하고 있었다.

*               *               *

도도히 흐르는 강의 좌우로 어른 키를 훌쩍 넘긴 갈대들이 빽빽했다. 이곳은 조선국(朝鮮國) 압록강(鴨綠江)이었다.

사사사사―!

바람에 갈대가 일렁이고 있는데, 그 소리에 함께 멀리서 검음(劍音)이 들려오고 있었다.

촹촹―!

"쫓아라. 그를 조선국으로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

"와아아아아―!"

파아앗―!

이때 누군가가 갈대를 헤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묵천이었다. 그는 광인의 모습이었다. 그의 몸에는 십여 대의 화살이 꽂혀 있었고, 여기 저기 찢긴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이미 지치고 피곤해 쓰러질 지경이었다.

벌써 십여 일째 잠을 자지 못해 눈은 자꾸만 앞을 가리고, 다리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 꼬꾸라지려고 했다. 그래도 묵천은 다리에 없는 힘을 쏟으며 조선을 향하고자 하는 의지로 앞으로 걷고 또 걸었다.

뒷쪽에서는 계속해서 그를 쫓는 개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절뚝거리며 모래사장을 가로지르던 묵천이 갑자기 제자리에 멈춰 섰다.

"크흑―! 빌어먹을."

묵천은 전면을 쳐다보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두 소동이 나타나 하늘에 떠있는 태양보다도 더욱 밝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소동은 너무도 친근하고도 따뜻하게 웃으며 묵천을 반기고 있었지만 삼두육비(三頭六譬)의 괴물이 나타났다면 더 나았을 것 같았다.

그 친근한 웃음은 묵천의 몸에 더할 수 없는 기이한 위기감을 불어넣고 있었다. 풀어져 있던 전신의 근육들이 뻣뻣하게 힘이 들어갔다.

"흐흐흐흐. 먼 길을 오느라고 수고했다. 그러나 더 이상은 가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 그렇고 말고. 나는 이곳이 명당이라고 봐! 응! 응! 명당이고 말고. 산수 좋고 물 맑고, 부족한 것이 없잖아! 안 그런가?"

소동의 입에서 나온 것은 소름이 쫙 돋을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였다.

"그럼. 그렇고 말고. 두말하면 기분 나쁘지. "

그들의 목소리만 아니라면 아마도 아이들의 치기어린 소리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들의 모습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묵천은 온 몸을 긴장시키면서도 침착하게 상대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자신의 몸을 쉬게 하기 위해서 말을 걸어 시간을 끌었다.

"우리 이름말인가? 저 녀석이 우리의 이름을 물어 보는 가본데? 그럼 말해 주지. 난 대살(代殺)이다."

"시간을 끌어보고 싶은 모양이지. 좋아, 그렇다면 말해주지. 난 소살(燒殺)이다."

소살(燒殺)과 대살(代殺).

얼굴은 다르나 이들 둘은 쌍둥이 형제였다.

이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백여 년 전으로 이미 무공이 반노환동(反老還童)한 노마두들이었다.

이들은 기이한 합공으로 유명했는데 백 년 전에도 실로 이들 개개인의 내공은 별 볼일이 없었다.

기껏해야 소 방파의 수좌급이었다. 그런데도 이들이 마두로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은 이들의 합공때문이었다. 이들의 기이한 합공은 그들의 별 볼일 없는 내공을 열 배 이상으로 증폭시켜 배가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얕보다 속수무책으로 당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백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하지만 묵천은 그들의 이름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아니 놀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이름을 처음으로 듣는 이가 놀랄 수가 있을까?

그러나 묵천의 몸은 긴장으로 터질 것처럼 팽팽해져 있었다. 그의 몸은 이미 그들이 보통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많이 시간을 끌었군."

어느새 묵천의 주위에는 일단의 무사들이 나타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창(槍) 도(刀) 검(劍)등을 들고 묵천을 포위해 들어왔다.

으르르릉―!

몇 마리의 개들은 묵천을 향해 붉게 핏발선 눈빛을 드러내며 달려들려고 으르렁거렸다.

"후―!"

묵천은 그들을 잊으려는 듯 깊은숨을 몰아 쉬었다.

찌이이익―!

묵천은 자신의 옷자락을 찢어 검이 손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칭칭 동여매었다. 싸움 중간에 검을 놓치게 된다면 그것으로 인생이 끝나는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죽을 수도 있겠어.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다 묵천은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은 눈에 다 모아 넣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사부님!'

그의 눈에 돌아가신 사부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순간 떠오른 것은 마지막 순간 사부가 자신에 보여 주었던 모습이었다.

한 차례의 검무(劍舞), 묵천은 들었던 검을 밑으로 늘어뜨렸다.

마치 주위에 늘어선 무사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런 거리낌없어 보이는, 그러면서도 산보라도 나온 것처럼 한가해 보이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래, 그때 그랬었어......."

묵천은 이미 항거할 힘을 잃은 듯 보였다.

그래서 반항이나 도망도 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멈춰 버린 듯 보였다.

"삶을 포기한 모양이군."

소살은 쌍장(雙掌)에 공력을 운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살의 어깨 위에 대살이 올라앉았다.

"쌍묘투살귀공의 위력을 실감나게 해주지. 영광으로 알아라!"

쌍묘투살귀공(雙猫鬪殺鬼功).

무공의 극한은 무엇인가?

무인이라면 누구나 최고의 빠름(閃)이나 무거움(重)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둘을 모두 원할 수는 없었다. 빠른 것은 무거울 수 없고 무거운 것은 빠를 수는 없는 것이 일반론이었다.

하지만 이 두 가지의 장점만을 뽑아낸 무공이 있었으니 바로 이 쌍묘투살기공이 그것이었다.

한 마음으로 이뤄진 두 사람이 한 가지의 기공을 이용해 상하로 나뉘어 공격을 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로 인해 공격자의 내공이 일시적으로 폭발을 하면서 증가한다는데 있다.

또한 그 움직임이 고양이와 같아 그 행동을 예견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죽어라."

그들의 두 손에서 붉고 푸른빛이 일렁거렸다.

쉬익―!

대살이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묵천을 향해 쌍장을 휘둘렀다. 그리고 소살 역시 비조처럼 뛰어나가며 묵천의 단전을 향해 일장을 후려쳤다.

퍼버벙―!

모래 먼지가 풀썩하니 일었다 가라앉았다.

"억―!"

소살의 비명소리와 함께 먼지를 가르고 무지개 빛의 빛살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악!"

"아우야!"

대살의 비명이 터졌다.

먼지가 걷히자 묵천이 그 자리에서 한 발 정도 뒤로 물러서 있는 것이 보였다.

묵천이 서 있던 자리는 소살과 대살의 장력에 의해 구덩이가 움푹 파여 있었고, 대살은 반쪽으로 양단되어버린 소살을 부둥켜 안고 울부짖고 있었다.

묵천은 자신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무심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며 검을 늘어뜨리고 자리에 서 있었다.

"쳐라―!"

뒤에 늘어서 있던 무사들 중 한 사람이 소리 지르자 묵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수십 명의 사내들이 일 검에 묵천을 묵사발을 만들려는 듯이 살기를 내뿜으며 달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묵천은 그냥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그들의 검이 한줄기 유성처럼 묵천의 전신으로 떨어지려는 찰라, 묵천은 움직였다.

마치 그들이 그렇게 할 때까지 기다렸다는 듯이 어육이 되기 직전 그의 몸은 바람에 날리는 깃털처럼 가볍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그의 눈은 따뜻한 햇볕에 졸고 있는 사람마냥 한가해 보였고, 손은 밭에 씨를 뿌리는 아낙의 손처럼 분주하면서도 여유로왔다.

일 보 일 보가 한가하게 산보를 나온 사람처럼 너무도 여유롭고 평안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검 끝은 서릿발처럼 매서웠고, 그 움직임은 무거우면서도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커억―!"

"크아악"

사람들의 외마디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고 살아 있는 자들 보다 죽은 자들이 더욱 많아져 하얀 모래밭이 붉게 변하게 되자 묵천은 몇 남지 않은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사, 사람 살려!"

그러자 살아 남은 자들은 자신의 무기마저 버린 채 미친 듯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다 필설하지 못했지만 삼분지 이 이상이 이미 쓰러져 버렸는데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죽음에서 한 치라도 멀리 벗어나는 것 뿐이었다.

"이, 이게 어떻게? 분명 너에겐 힘이 없었을 텐데?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는 거지?"

대살은 그 모습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이 어떻게 했는가? 이 자를 위해 삼개단에서 차출한 삼백여 명의 고수들로 이루어진 추격조가 그의 흔적을 발견하자 십 일동안 그의 뒤를 쫓아다녔다.

물론 잠은커녕 물 한 모금 먹을 시간도 없었다. 게다가 이자는 옥에 갇혀 있었던 자였다.

정상적인 사람의 체력으로도 버티기 힘들었을텐데 원래부터 굶주리고 허약했던 이자는 좀 이상했다. 그들이 그를 쫓는 순간부터 되려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살은 일말의 경외감을 갖고 있었다.

"사, 사람도 아니다. 네가 진정 피를 갖고 있는 인간이란 말이냐? 왜? 왜냐? 너의 피부는 철갑이더란 말이냐?"

묵천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이미 움직일 만한 힘이 없었다. 너무도 기진맥진한 나머지 반쯤 혼절한 상태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움직임은 정상일 때의 그보다도 더욱 빨랐었다.

그에게 무슨 변화가 일고 있는 것인가?

묵천의 정신세계는 이미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공(空)의 상태였다.

아무것도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무엇이든 채워 넣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는 지금 자신이 지니고 있던 틀을 깨고 태어날 때처럼 본능에 의한 움직임을 하고 있었다.

대살은 순간의 공포감에 의해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소살의 시신을 외면하고 있었다.

대살은 소살을 내려다보았다.

악인에게도 동생의 죽음은 슬픔이었다.

그들의 손에 죽은 자들이 몇이던가?

그들의 죽음을 바라보면서도 단 한번도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동생이 죽었다.

이 알 수 없는 상실감, 슬픔, 그리고 막연한 분노들을 그는 뭐라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것이 묵천을 향해서인지, 자신을 향해서인지 조차도  그는 알지 못했다.

대살은 이 순간 평생 처음으로 죽음이란 것에 대해 숙연해질 수 있었다.

"왜? 죽여야 했는가? 나는 왜 죽여야 했는가? 왜?"

대살은 실성을 했는지 중얼거리면서 일어섰다. 아마도 자신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살의 눈에서는 굵직한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평생 누군가를 위해서 울지 않았던 그였다. 아니, 자신을 위해서도 울지 않던 그였다.

그런데 이 순간 그는 울고 있는 것이다.

"후후......."

대살의 입에서 알 수 없는 자조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와도 묵천은 그저 멍하게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이 일수(一手)에 나의 모든 것을 걸었다."

대살의 손은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늘에 떠있는 붉은 노을보다도 더욱 붉고 선연한 색으로 아름답게 보였다.

그리고 그 빛이 허공을 가르며 묵천의 가슴을 향해 달려가자 고요히 허공을 응시하던 묵천의 검은 물줄기를 타고 미끄러지는 은어처럼 은빛의 섬광을 터뜨리며 마주쳐갔다.

콰앙―!

두 빛이 허공에서 어우러지고 무언가가 빛을 헤치고 튀어 나왔다.

묵천이었다. 그리고 그는 허공을 가로질러 압록강의 물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 빛이 걷히자 대살이 모래밭 위에 홀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렇군. 이런 것이었군"

그의 알 수 없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전신에서는 피보라가 뿜어져 나왔다.

쫘아악―!

그리고는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잡아뜯긴 듯 분시되어 한줌의 혈수가 되어 흩어져버렸다.

*               *               *

"뭣이? 놓쳤단 말이냐?"

백천우는 분노나 아쉬움보다도 등골이 섬뜻해 옴을 느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묵천이 자신이 완벽하게 구축한 포위망을 뚫고 달아났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자 전신이 뻣뻣이 굳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예."

"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

퍼엉!

백천우는 신경질 적으로 발길질을 했다. 백천우는 본시 자신의 수하들을 쓰레기라 부르고 있었다.

아니, 세상의 대다수를 쓰레기로 보고 있었다. 이유는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는 데에 있었다.

"크윽―!"

백천우의 갑작스런 일격에 사내는 세상과의 아쉬운 이별을 해야만 했다.

"병신 같은 자들. 삼백이 단 하나를 당하지 못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 대단하다! 묵천, 역시 네놈은 나의 호적수라 불릴만하다. 그러나 다시 내 앞에 나타나면 네 목숨은 그것으로 끝일 것이다."

백천우는 뭔가 모를 초조감이 자신을 뒤덮는 것을 느끼고는 그것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 더욱 호기롭게 말했다.

*               *               *

길림성 백두산(白頭山).

백두산은 장백산의 주봉으로 멀리 남쪽과 서쪽으로 그 줄기가 뻗어있어 마치 거대한 인간이 세상을 감싸안은 것처럼 보였다.

장대한 산줄기가 마치 온 천하를 굽어보는 것처럼 펼쳐진 이곳은 일년 중 열흘도 안개가 걷히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은 천리 밖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맑고 쾌청했다.

콰아아아아―!

장백폭포의 굉음이 지축을 흔드는 듯 했다.

장백폭포가 내려다 보이는 정상의 절벽 위, 희뿌연 안개로 가려져 있던 곳에서 안개가 걷혀 내리자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른을 넘겨 마흔 줄을 바라봄직한 사내와 이제 겨우 대 여섯살 정도의 아이가 절벽 위에서 서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사내는 남서쪽 방향를 바라보며 아들에게 물었다.

"시야. 너는 이 아비가 이곳에 올라 무엇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소동은 아버지를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천진한 눈을 들어 저 먼 곳 중원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글쎄. 뭐, 아빠야 천하를 내려다보고 싶다고 했으니까 이곳에 올라온거 아니야? 응?"

사내는 웃고 있었다.

아들의 말이 재미있어서는 결코 아니었다.

"저 곳을 보거라. 너는 이 아비의 뒤를 이어 네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먼곳까지 지배해야 할 운명을 타고났다. 내가 왜 너의 형이나 동생을 데려오지 않고 너를 데리고 오는 줄 아느냐? 너의 형이나 동생들 중 오직 너만이 이 세상의 지배자가 될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너를 향해 외치는 소리를 들어봐라. 너는 황제가 될 운명인 것이다."

소동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투명한 눈으로 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작은 눈망울 속에 무엇을 그려넣고 있는 것인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세상을 온통 그려넣고 자신이 지배하는 꿈을 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작게 중얼거렸다.

"동쪽에서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은 거대한 괴물 같은 저 중원대륙을 뒤흔들 것이다. 아마도 나는 그로 인해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이 사나이의 이름은 중원을 향해 검을 겨누었던 청왕조의 시초인 태조(太祖) 누루하치였다.

*               *               *

거대한 지도에는 인간의 힘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자세한 모양으로 중원이 손에 잡힐 듯 그려져 있었다.

강과 계곡, 평야와 산이 너무도 자세히 그려져 마치 자신이 허공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주익균은 곤룡포를 늘어뜨린 채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지도에는 무수히 많은 선과 점이 연결되어 있었고, 멀리 세외의 모습까지 자세히 묘사되어 있었는데 유난히 몇 개의 선만이 푸른빛을 띠며 중원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이것이 현 정세인가?"

"예."

주익균의 뒤로 다섯의 사내가 부복을 한 채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모두 잠행복을 입고 있었고 그 중 한 사내는 인자의 특수복을 입고 있었다.

"그래,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조선을 향해 서진(西進)하기 시작했다고?"

"예."

인자복의 사내가 대답했다.

"동태는 어떠한가? 풍신수길은 이 전쟁을 통해 자신의 내부에 잠재한 적들을 제거함과 동시에 불만 세력을 약화시킬 의도가 분명 합니다. 그리고 그는 비밀리에 누루하치와 연락을 취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들 사이에는 모종의 묵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익균은 지도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지도만 응시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빙궁(氷宮)은?"

그러자 다른 흑의인이 머리를 바닥에 처박으며 말했다.

"그들 역시 남진(南進)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그런 행로를 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처음 출발 당시 분명 중원을 향해 동진(東進)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방향을 바꾸어 남진하며 작은 규모의 방파들을 규합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자신들의 세력을 더욱 불리고자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들의 세외세력을 모두 규합하면 그후 그들의 행동이 기대됩니다. 백중 구십구는 이 중원을 향해 내려올 것으로 생각됩니다."

주익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들과 중원의 암중의 세력과도 묵계가 되어 있는 것인가?"

가장 뒤에 자리하고 있던 한 사내가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행동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세력이나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그들은 자신들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이 중원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으면서도 아직 기다리고 있다는 말인가?"

"예, 지금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그들의 수는 모두 삼만으로 중원 정파무림과 필적할 숫자입니다. 거기에 빙궁마저 가세한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승산이 있습니다."

주익균은 탁자를 톡톡 치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그럼 우리가 그들을 제압한다면 몇 명의 군사가 필요한가?"

"예.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우리의 병력으로는 십 배 이상을 투입해야 그들을 모두 제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의 수를 보면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이나 그들은 특수한 무공을 연마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십 배라. 그럼 삼십만인가?"

흑의인은 황공하기 그지없다는 듯이 더욱 몸을 조아렸다.

"예. 그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흠! 우리 동창과 서창을 모두 파견한다면?"

"십분지 이로 감축할 수 있습니다."

주익균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동창과 서창의 총인원을 추리면 얼마나 되지?"

흑의인은 깊이 부복하며 말했다.

"총인원은 십오만으로 이는 세외에 나가 활동하는 자들입니다. 이들 중 지금 당장이라도 불러들일 수 있는 인원은 약 오만 정도이고, 이 황궁의 별동대마저 모으면 팔만의 무사를 모을 수 있습니다."

황제 주익균의 눈에서는 섬광이 번뜩였다.

그 모습은 유령이 살아난 듯 섬뜩함을 풍기고 있었으며, 황제로서의 위엄보다는 광기를 풍기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 같았다.

"자네에게 그 인원을 내어주면 세외를 평정하고 올 수 있겠는가?"

흑의인은 잠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는 등골에서 땀 줄기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명을 거역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예. 해 보이겠습니다."

주익균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명귀(冥鬼), 너는 세외로 출병하라. 너를 정이품의 호국위장(護國衛將)으로 봉한다. 이는 나라를 위한 일임을 명심하도록!"

"존명(尊命)!"

대답과 함께 다섯 사내들은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주익균은 전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광활한 대륙의 모습이 그의 손앞에 잡힐 것처럼 한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흠! 이 곳은 철저히 나의 대지가 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나의 제국에 도전을 해서는 안 된다. 아주 뿌리를 뽑아 주리라."

콰앙―!

주익균의 일장이 지도 위에 떨어지자 지도판은 형체도 없이 부서져버렸다.

"삭근제초(削根制草). 뿌리부터 없애야 한다."

그의 모습에서는 굳은 결의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               *               *

황궁의 수많은 전각 중에 상국사란 현판이 붙어있는 전각이 하나 있었다.

이곳은 국사인 달대대사가 머물고 있는 곳이었다.

어둠이 짙게 내린 밤, 불빛 한 점 보이지 않는 빈 법당 안에서 두런두런 사람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스꽝스러운 얼굴의 달대와 마주 앉은 한 사나이, 이 나라에서 국사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실 수 있는 사람은 황제와 태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황제인 주익균은 이 시각 지하의 자신의 비밀처소에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에서 달대와 차를 마시는 사람은 바로 태상황인 주재후가 분명했다.

전경황후의 치마폭에 놀고 있다고 알려진 그가 이렇게 달대와 마주하고 있다는 것은 사건이었다.

주재후는 이미 중신들 사이에서도 배척되었고, 빼앗기듯이 황제의 위를 주익균에게 넘기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는 태상황이었고 그로 인해 전경황후는 대단한 권세를 뿌리고 있었다. 그후 주재후는 정신이 혼미해져 하루도 전경황후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비운의 황제로 불리고 있었다.

얼마간의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상황전하."

달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주재후는 묵묵히 달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주재후의 얼굴에서는 정기가 흐르고 있었다. 소문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환멸을 느낀다네. 어떠한가? 자네도 지금의 내가 어떤 심정인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달대는 침울한 모습으로 말을 하지 못했다.

"차라리 무부로 태어났다면, 이런 고뇌를 느끼지도 않았을 것이야. 나는 차라리 이 나라가 망해버렸으면 하는 바람까지 들었네"

"황상!"

달대는 무릎을 꿇더니 주재후를 향해 부복을 하며 통한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이 어린 백성들은 어떡하라고 그러십니까? 그들의 피로 이 대지를 적시려 하시나이까? 지금 황제폐하께서는 무서운 계략을 꾸미고 계십니다. 만약 그 의지를 지금 꺽지 않는다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주재후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 역시 전운(戰運)이 감돌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네. 이미 돌릴 수 없다는 것도. 우리 명(明)의 국운이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도 다 알고 있다네. 그래, 내가 막으면 얼마간 이 나라를 지탱할 수 있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는 이미 늦었네. 대명(大明)이 오랑캐들에게 농락 당하고 중신들의 부정이 민심을 울리고 원성은 하늘을 찌르고 있네. 그리고......."

물러난 황제의 얼굴에는 많은 고뇌와 아픔이 어려 있었다.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그의 얼굴에 이토록 고뇌와 고통이 어리는 것인가?

"나는 이미 균아에게 많은 죄를 짓지 않았나?"

"황상."

달대는 바닥에 엎드려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모두 내가 부덕한 탓이지. 그 아이를 만류할 자격은 내게 있지 않네. 지은 죄가 많아."

황제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황궁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제13장  풍운(風雲)



"알 수 없군....... 어째서 황제는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노화자는 진지하게 묻고 있었다.

흑의인은 종일 아무런 말없이 청년과 노화자의 사이에 앉아 노화자가 따라준 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마치 의자에 기대앉아 졸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흑의인이 자리에 없는 것처럼 아무런 신경도 쓰지않고 둘이 얘기하느라 열을 올리고 있었다.

청년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히히히히힝―!

객점의 밖이 소란스러워지며 말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우하하하! 이 쥐새끼 같은 자식! 우리를 피해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는가?"

퍼엉―! 콰앙―!

종이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객점의 문이 부서질 듯이 열리며 한 장년인이 피로 얼룩진 모습으로 객점 안으로 굴러들어왔다.

장년인의 손에는 어른 손바닥 넓이의 거두도(巨頭刀)가 들려 있었다.

장년인은 혈전을 치르고 온 듯 크지는 않았으나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대형―!"

문가에 앉아 있던 우락부락한 세 사나이는 그 사내를 발견하자마자 튕기듯 일어나 달려갔다.

"무슨 일입니까?"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세 사나이가 들어섰다. 그들은 도복을 입고 있었다.

"화산삼걸."

노화자가 그들을 바라보며 신음하듯 읊조렸다.

화산삼걸(華山三傑).

화산파 후기지수들로 알려진 삼 인이었다.

화산에는 무림에 널리 알려진 다섯 제자가 있었다.

이대 제자로는 이미 이십사수매화검(二十四手梅花劍)과 육합검(六合劍)이 화경에 달한 것으로 알려진 추정호(秋情號)가 있었고, 그 밑으로 삼대 제자인 정자(丁字) 배의 정도(丁途), 정귀(丁貴), 정파(丁派)가 있었다.

이들을 일컬어 무림삼걸이라 불렀는데 이들은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많은 일화를 남겨 놓았다.

거기에 세 사내는 화산파의 제자라는 자부심이 대단해 한때 화산을 비웃던 희대의 대도인 거두옹(巨頭擁) 천타(千打)를 석 달이나 쫓아다닌 끝에 낙양의 성곽 끝에 발가벗겨 매달아 놓은 것으로 유명했다.

"무산사괴(茂山四怪)가 모두 여기 있었구나."

정도가 장검을 뽑아들며 외쳤다.

무산사괴.

이들은 기이한 자들이었다.

무산 지방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곳이었지만 하남성 부근에 자리해 있는 쌀이 특산물로 유명한 정도였다.

이들은 모두 의형제로 불과 삼 년 전까지만 해도 이들은 그곳의 별 볼일 없는 무법자 정도였다.

그런데 무슨 이유여서인지 공동파와 시비가 붙었고 그로 인해 공동파의 제자 둘을 죽이게 된 것이다.

그후 분노한 공동파에서는 그들을 사도무리로 간주했다.

그들은 뚜렷한 악행을 한 것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후부터 쫓기는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대형이라 불린 자는 가장 나이가 많은 추자석(秋子石)이란 자였고, 다른 삼 인은 추위, 설중현(雪中現), 오귀(五鬼)였다.

"크윽―! 내가 그대들에게 무슨 해를 끼쳤다고 이러는 것이오?"

추자석은 자신의 몸을 추스르며 화산삼걸에게 외쳤다. 화산삼걸은 코웃음을 쳤다.

"네놈은 우리 화산을 모욕했다."

"모욕이라니 무슨 말이오?"

추자석은 이미 사십을 바라보는 자로 화산삼걸은 이제 스물다섯도 넘지 않은 애송이였다.

그러나 강호는 힘이 지배하는 세계였다.

"흥! 네놈의 품 속에 우리 화산의 검보가 들어 있는 것을 아는데 그런 말을 하느냐? 네놈이 탈취해간 육합검보는 우리 화산파의 보물이다."

그 말을 듣자 추자석의 얼굴은 하얗게 탈색되었다.

"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요!"

"말이 많구나. 그럼 네 품을 뒤져보면 될 것이 아니냐?"

정귀는 휙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추자석의 다리를 찔러왔다. 추자석은 이에 대경하며 장력으로 정귀의 검을 후려치고 몸을 튕기듯 일으켰다.

무산사괴의 다른 자들은 이미 결심한 듯 검을 들고 추자석의 주위에 포진하며 섰다.

"후후후. 버러지 같은 자들!"

정파는 자신의 가슴 쪽으로 검을 당기며 앞으로 나섰다.

이것은 육합검법의 유명한 기수식으로 마치 검을 끌어 안 듯이 잡는 것이었다.

이 모양은 보는 상대에게 자신의 검이 갈 방향을 예측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 더욱 빠른 공격을 하기 위한 예비 동작과도 같았다.

파악―!

정귀가 재차 검으로 추자석의 허리 부근을 쓸어가자 추자석은 몸을 틀며 일 보 뒤로 물러섰다.

추자석의 좌우에 늘어서 있던 세 사람이 동시에 도를 휘두르며 정귀의 심장과 목, 그리고 눈을 향해 노려왔다.

너무도 간악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실력차이가 너무도 뚜렷했다.

휭―! 휘잉―!

도는 모두 허공을 갈랐고, 정귀는 여유있게 피하며 도세(刀勢) 속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여유 있게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들어서던 정귀의 입에서는 낮은 비명이 터졌다.

"앗―!"

정귀는 들어서던 속도보다도 더욱 빠르게 밖으로 퉁겨 나왔다.

"사제!"

"사형."

"크윽―! 울컥―!"

정귀는 입에서 선분홍의 핏물을 뿜어냈다.

"크흐흐흐. 내 항시 당하기만 할 것 같은가?"

추자석은 손에 곤봉 같은 것을 들고 있었는데 그 곤봉은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할 수 있는 기관이 달려 있는 듯 보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의 손에서 보이지 않던 길다란 곤봉이 순식간에 나타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추자석을 봉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흥! 우리는 늘 도를 쓰는 것으로 사람들은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우리는 이 봉을 주로 다루었었다. 그럼에도 우리의 이 무기가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이 무기를 보고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파와 정도는 검을 뽑아 들었다.

"전혀 구제할 수가 없는 자들이군. 더 이상 들어볼 것도 없습니다. 사형, 대사형이 오기 전에 일을 끝냅시다."

정도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일순, 무산사괴의 얼굴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이들에게 대사형이란 것은 추정호가 아니겠는가? 추정호는 일검으로 불리는 현 무림최고의 검객이었다.

화산삼걸과는 또 다른 차원이었다.

무산사괴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눈빛이 빛났다.

아마도 암중에 서로 뜻이 오고 갔으리라. 일검이 당도하기 전에 이들을 처치하고 이곳을 벗어나기로.......

무산사괴는 도를 내려놓고는 자신들의 품에서 작은 단봉(短棒)을 꺼내어 들었다.

촹―!

그들이 무언가를 건드리자 겨우 한 자 길이의 단봉이 넉자 정도로 늘어났다.

"쳐라."

추자석이 외치자 무산사괴는 화산의 두 사람을 향해 봉을 휘둘러갔다.

휘잉―! 휭―!

봉은 흉맹한 소리를 내며 정파와 정도를 향해 다가들었다.

이런 난리가 났는데도 주인은 나와보지 조차 않는 것이었다. 아니 나와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나머지 그들이 나타나기 전부터 홀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문 앞에서 싸움이 일어나자 모두 구석에 몰려있었다.

이런 때 죽으면 이건 개죽음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세 사람은 아직도 탁자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노화자와 청년,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흑의사내가 바로 그들이었다.

"잘 돌리는구만. 소문과는 많이 다르군. 오늘 화산인가 뭔가 하는 애들이 고생 좀 하겠구먼."

무산사괴가 화산삼걸 중 이걸을 포위하고 있는 형상이었다. 정귀는 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잃은 듯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무산사괴의 합격은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구궁(九宮)의 방위를 밟는 것도 아니고 팔괘(八卦)의 진식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네 사람이서 진일보(進一步)와 퇴일보(退一步)를 번갈아 가며 둘을 압박해가는데 정파와 정도는 서서히 구석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이미 그들은 패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파아악―!

사괴가 돌리는 봉에 걸린 탁자가 바스러져 버렸다.

"흐흐흐....... 화산에서는 쥐새끼처럼 도망 다니는 것만 가르치는 모양이군."

"뭣이?"

정파는 사괴가 화산파를 비방하는 말을 듣고는 육합검(六合劍)의 육합비섬(六合飛閃)의 초식으로 그들을 베어 갔다.

그러나 이미 패색을 들어낸 그로서는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이때, 멀리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울려 왔다.

"아하하!"

마치 은은한 범종을 울리듯 작게 들리던 그 소리는 순식간에 커지더니 문 밖까지 이르고 있었다.

"추정호다."

추자석이 대경하며 외쳤다. 정파와 정도도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대사형!"

삐걱―!

문이 열리며 들어선 사나이는 서른 정도의 사내로 회색 의복에 회색 두건을 쓰고 있었으며 그의 등에는 붉은 수실이 늘어진 장검이 걸려 있었다.

그는 우산을 받지도 않았고 우갓을 쓰지도 않았지만 옷에는 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이것만 보아도 그의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가 바로 화산이 내세우는 기재 추정호였다.

추정호는 문을 열고 들어서 좌우를 서서히 돌아보더니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정귀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몸의 여기저기를 훑어보더니 그의 몸을 바로 뉘고는 전신의 혈을 몇 군데 타혈했다.

"으으......."

그러자, 죽은 듯 누워있던 정귀는 낮은 신음소리를 내더니 숨을 몰아 쉬기 시작했다.

"어떠냐? 이제 움직일 수 있겠느냐?"

정귀는 말을 하지 못했지만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 그럼 잠시 쉬고 있어라."

추정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무산사괴를 돌아보았다.

"당신들이 나의 사제들을 핍박했는가?"

그러자 무산사괴들 중 대형인 추자석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당치 않소이다. 오히려 저들이 나를 핍박하였소."

추정호는 정파와 정도를 바라보았다.

"사형, 아닙니다. 저희는 문중의 서고에서 육합검보를 탈취해간 도둑을 쫓다가 저자가 의심되어 검문을 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다짜고짜 도망치려 하기에 뒤쫓았을 뿐입니다."

그러자 추자석은 노성을 터뜨렸다.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도 마시오. 그대들이 내가 검보를 훔치는 것을 보았단 말이오? 무슨 명분으로 나의 몸을 수색하려 한단 말이오? 그래, 당신들 화산문하는 우리 같은 사람을 어떻게 대해도 좋다는 것이오?"

추정호는 난감한 듯 고개를 가로젓더니 말했다.

"고정하시오. 나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는 진의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곳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묻고자 합니다."

추정호는 뚜벅뚜벅 걸어 청년과 노화자, 그리고 흑의인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포권을 했다.

"불초 추정호라고 합니다. 소생은 이들의 말을 듣고 진의를 알고싶어 청하오니 세분께서는 이곳의 상황을 제게 자세히 말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이는 명가의 후예답게 너무도 공정하고 바른 처사였다.

추정호는 지금 도(道)와 예(禮)를 모두 지키려 하고 있었다. 그가 만약 자신들의 사제만을 믿고 행동한다면 이는 크게 경솔하다 할만 하고, 또한 예를 벗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능히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공정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추정호는 공평성을 유지하기 위해 제 삼자의 입을 통해 사정을 듣고자 하는 것이었다.

노화자는 그의 태도가 재미있다는 듯 켈켈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 화산의 제자인 추정호가 능히 대협이라는 소리를 감당할 수 있는 자라는 말을 여러 차례 듣기는 했지만 오늘 이렇게 만나보니 과연 명불허전이로군. 허나 우리도 자세한 상황은 몰라. 하지만 몇 가지 대답은 해줄 수가 있지."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그것이라도......"

추정호는 명가의 후예답게 어느 누구도 돌아볼 것 같지않은 노화자에게도 깍듯이 대답하고 있었다.

"무산사괴는 비록 사파의 무리로 쫓기고 있다고는 하지만 화산의 산문 안까지 뛰어들어 물건을 훔쳐올만한 실력은 되지 않는다고 들었네. 거기에 저들의 무술실력은 대단하지만 그것은 합격술인 경우에만 해당하는 말일세. 아마 개개인으로 나누어 보면 저들은 화산삼걸의 한 사람도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일 걸세. 그랬기에 저들의 대형인 추자석은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에 많은 상처를 입었던 거겠지. 이는 삼걸에게 대적할 실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사괴의 세 협력자들은 우리와 이곳에 내내 같이 있었다네."

"그렇다면 저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노화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로 인해 저들의 혐의는 더욱 짙어진다네. 저들이 진정한 무산사괴라면 그렇다는 말이지. 나는 그자들을 본적이 있다네. 저들은 무산사괴들의 특징을 닮기는 했지만 결코 무산사괴는 아니라는 말일세. 저들은 봉을 쓰기전 도를 쓰고 있었거든? 그들이 쓰는 도법은 은연중 사기를 흘리고 있었는데 그 도법의 특이함이 세외의 것과 비슷하더군. 현황도법(玄黃刀法)이라 불리는 하류의 도법하고 말이야."

노화자의 눈이 약간 매섭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능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자신들의 진정한 무공이나 내력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네. 그렇다면 문제는 이들이 왜 자신들을 숨기며 화산의 제자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였을까 이겠군."

추정호는 눈빛을 반짝였다.

"노인장은 누구십니까?"

추정호의 말투에는 다분히 강압적인 분위기가 담겨 있었다. 노화자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싱글거리며 입을 열었다.

"허허허. 이 늙은이의 내력은 알아서 무엇하시려는 겐가?"

이때였다.

"조심하게."

노화자의 입에서 다급성이 터져 나왔다.

반짝―!

무언가 허공을 스쳤다고 느끼는 순간 추정호는 비룡번신(飛龍蒜身)의 수법으로 몸을 허공으로 솟구친 후 다시 재주를 넘듯이 세 바퀴를 굴러 바닥에 내려섰다.

"흥, 공정히 다뤄서는 안될 자들이군."

"봉황침통(鳳凰針筒)!"

노화자는 침중히 소리쳤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이 으르렁거리던 추정호의 발걸음은 멈칫해졌다.

봉황침통(鳳凰針筒).

이것을 만든 사람은 황궁의 내관이었다.

이는 당시 황궁의 여인들이 자신의 몸을 지킬만한 호신용 무기를 원했기에 기관에 조예가 있는 내관이 만들게 된 암기였다.

이 내관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침통의 위력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었고, 이와 비슷한 모조품이 많은 하류잡배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져 시중에 나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봉황침통을 능가하는 무기는 없었으며, 이것을 보았다는 사람 역시 흔치 않았다.

이 봉황침통의 위력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굳이 꼽으라 한다면, 이 침통의 발사 유효거리는 삼백 장 정도로 그 정확성이 어른 엄지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공간이라며 충분히 맞출 수 있을 정도였다.

거기에 이 침통에서 발사되는 침에는 독액을 주입할 수 있는 특수한 관이 뚫려있어 무슨 독액이든 주입할 수가 있다.

거기에 워낙 가늘고 가벼운 침이라 육안으로는 쉽게 발견할 수 없으며 오감이 발달한 무인이라 할지라도 쉽게 피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추정호는 추자석을 노려보았다.

추자석의 오른손은 이미 쓰러져 있는 정귀를 향해 겨냥되어 있었다.

"흥! 한 번만 움직여 보시지. 이자의 꼴이 어떻게 되는지."

이때였다.

"케엑―!"

무산사괴 중 하나가 펄쩍 뛰어오르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절명해 버렸다. 죽은 자의 목에는 반토막 짜리 나무 젓가락이 꽂혀 있었다.

"누구냐?"

추자석이 다급성을 터뜨렸다.

무인에게 일순간의 틈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추자석은 당황함으로 해서 틈을 보인 것이다.

파악―!

일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추자석은 자신의 손목이 화끈 하는 것을 느껴야 했다.

투욱―!

"크윽―! 빌어먹을."

추자석은 자신의 손목이 잘려나가며 바닥에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한탄할 틈도 없이 뒤이어 날아오는 추자석의 검을 피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기 여념이 없었다.

다른 두 명 역시 정도와 정파가 함께 대적해 나가고 있었다.

"크억―!"

또 다시 사괴 중 하나가 쓰러졌다.

그자는 정파의 검이 양단되어 나뒹굴고 있었고, 마치 물 자루 터뜨려 놓은 듯 사방이 핏자국으로 흥건했다.

"받아라."

추자석은 검을 추정호에게 던졌고 추정호가 검을 피하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무언가 품 속에서 주머니를 하나 던졌다.

퍼엉―!

연기가 모락모락 나며 주위는 순식간에 연기로 흐려졌고 잠시 후, 연기가 걷혔을 때에는 막내인 오귀만이 정도와 정파에게 잡혀 억류되어 있었고, 객점 안에는 추자석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오귀는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는 듯 사시나무 떨 듯 덜덜 떨고 있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진정 무산사괴가 맞느냐?"

정파가 오귀의 목에 검을 들이대며 살벌한 표정으로 묻자 그는 이미 다 포기한 듯 입을 열었다.

"우, 우리는......"

그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빛이 번쩍였다.

"앗―!"

"크윽―!"

오귀의 몸은 바닷물 앞의 모래성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추정호는 빛살처럼 쏘아져 갔지만, 암습자의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아마도 추자석인 모양이다."

봉황침을 맞은 오귀의 몸은 매케한 냄새와 함께 부글부글 끓어오르더니 그대로 녹아버렸다.

아마도 봉황침에는 악독한 독액이 발라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같은 편에게 이토록 악랄한 방법을 쓰다니."

쏴아아―!

밖의 빗줄기는 도대체 얇아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정귀는 이 층의 방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화산삼걸 역시 정귀의 곁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들의 우의가 얼마나 짙은지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객점이 정리되고 객점 안에는 어느새 저녁이 찾아온 듯 주위의 사물이 흐리게 보일 정도로 어두워져 있었다.

줄행랑 놓았던 주인은 돌아와 탁자 위에 등을 켜놓았다.

흐릿한 등불 아래서 노화자와 세 사람은 아직 자리를 지키며 술을 마시고 있었고, 계단 옆자리의 남녀 한 쌍과 검은색 휘장을 한 여인들 넷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마을 청년인 듯 보이던 다섯은 아까의 소란으로 이미 줄행랑을 놓은 후였다.

이 때 이 층에서 추정호가 내려왔다.

그런데 그는 계단을 밟고 있었음에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지날 때는 습기 먹은 계단이 미친 듯이 소리를 내었는데도 그가 오르내릴 때에는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그 이유는 당연한 것이었다.

추정호는 애초 계단을 밟지도 않았는데 무슨 소리가 나겠는가?

그는 허공에 한치 가량 떠 걸어오고 있었는데 이 신법은 부운약운(浮雲躍雲)으로 일 갑자 이상의 내공이 없으면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최상의 절예였다.

추정호는 먼저 검은 휘장을 한 여인들에게 다가갔다.

"불초를 위해 힘써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추정호는 공손히 읍을 했고, 여인들 중 하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이런 것이었다.

조금 전 추자석이 정귀에게 봉황침통을 겨누웠을 때 나무 젓가락을 던져 위기를 면하게 해준 이가 이 여인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추정호는 그 사실을 알고 이렇게 감사의 표시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추정호는 삼 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정 노선배님, 후배 추정호 인사드리옵니다."

"허허허. 어찌 나를 아는가?"

추정호는 노화자에게 너무도 공손하게 배례를 했다.

이유인 즉슨 이 빌어먹게 생긴 늙은이가 바로 개방의 현 장문보다도 두 배분이나 높은 중추신개(中樞神 ) 정도호(正屠戶)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현 무림에서 가장 높은 배분을 지니고 있었으며, 신출귀몰(神出鬼沒)한 그의 행방에 사람들에게 더욱 신비롭게 알려져 있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궁벽한 산골의 객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니, 그것도 자신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 말이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후배는 노선배님의 위명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노선배님의 혜안이 놀랍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뵙기는 처음입니다."

노화자는 빙글거리며 청년을 보았다.

"그래, 자네의 사조이신 추문도장은 안녕하신가?"

"예."

청년은 둘의 인사를 바라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추정호는 인사를 나누다 좌우에 앉아 있는 사내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제야 중추신개는 깨달은 듯 말했다.

"아! 이 사람들의 소개를 하지 않았군. 이 둘은 오늘 이 자리에서 사귄 지기들일세. 그래서 나 역시 이자들을 알지 못한다네."

청년은 중추신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포권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전 무명인이라고 합니다."

마주 포권을 하려던 추정호는 얼굴에 의문을 가득 담은 채 굳어버렸다.

"무명인이라니오?"

"죄송합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요.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추정호는 머뭇거렸다. 그러자, 답답한 듯 중추신개가 끼어들었다.

"아, 이름이야 나중에 말한다지 않는가. 인사는 대충하세."

"불초는 추정호라고 합니다."

그제서야 추정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옆의 흑의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흑의인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그는 마치 그대로 석상이라도 된 듯 종일 아무런 말이나 움직임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추정호가 어쩔줄 몰라하자 중추신개는 눈을 찡긋거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 사람은 그저 없는 셈 하는 것이 속 편할 걸세. 종일 한 마디도 않는 것을 보면 말하기 싫어 아주 입을 다문 사람이거나 아니면 아예 말을 못하는 사람일 테니까."

그러나 아주 귀마저 먹었는지 흑의인은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중추신개는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저녀석은 생략하도록 하고. 자, 자리에 앉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추정호는 빈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자네는 하던 얘기를 마저 끝내야 하지 않겠나?"

청년은 의외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허! 노인장도 보아하니 무림인인 것 같은데 제가 한 이야기가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제가 광대 앞에서 재주를 넘은 격이 되었습니다."

"허! 어차피 술자리에서 흥을 돋구는 얘기가 아닌가? 개의치 않으니 어서 해보게. 그래, 황제는 왜 자신의 아들에게 지은 죄가 있다고 했는가?"

청년은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좌중을 한 번 돌아보더니 입을 열었다.

"후! 거기에는 남모르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사정?"

"그러니까 태상황인 주재후의 부인들은 모두 아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얘기를 들으면서도 가슴이 두근반 세근반거렸다. 어느 누가 대명천지에 객점에 앉아 이런 말을 함부로 지껄일 수 있단 말인가?

이는 구족(九族)을 멸하게 될 정도로 중한 죄였다.

"뭐라고? 그게 사실인가? 그렇다면 당시 황제 위를 이어 받은 주익균은 무엇인가? 주워온 아들이란 말인가?"

"아닙니다. 그는 주재후의 아들이 맞습니다."

"그, 그럼 그게 무슨 말인가? 아들이 아니라더니 다시 아들이라니. 응?"

"그는 아들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는 정실의 소생이 아닌 궁중에서 일을 보던 기생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황제는 그 아이를 자신의 부인에게 기르게 하여 황태자로 맞아들인 것입니다."

중추신개와 추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는 아이를 못낳거나 아이를 갑자기 잃어 대가 끊기게 생겼으면, 여자를 사서 아이를 낳게 하고 쫓아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이를 인신매매해서 대를 잇게 하곤 하였다.

이것이 무슨 풍습처럼 여겨졌으나, 아이를 빼앗긴 여인이나 잃어버린 여인들은 실성을 하거나 아주 자포자기해서 몸을 파는 여인으로 전락해 버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당시 황제가 된 주익균은 그럼 기생의 아들이란 말인가?"

"예."

"그런데?"

무슨 생각을 하는가? 청년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는 잠시 무언가 회상에 빠지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 기생은 당시 황후의 시기를 사 극형에 처해졌고 어쩐 일인지 황제는 아무런 제지나 반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후일 그 일을 알게된 태자와 황제의 골은 더욱 깊어졌고, 그로 인해 부모 자식의 관계가 원수지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               *               *

우리는 삶이란 것을 살아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평이한 것들에 얽매이고 사회라는 멍에를 지고 살아가게 된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으나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것들에 치어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자신은 잃고 그저 하나의 개체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자들은 그 속에서도 작은 행복을 찾을 줄 알고 만족하며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갈줄 안다.

하지만 누구나가 그렇듯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 힘이 생기면 그만큼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태어날 때부터 힘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은 어떨까? 한 가문의 가장이라든가, 거대한 세력의 주인이 된 자들은 그것들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때로는  죽기 전에는 그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기도 하다.

황제, 당금 명을 지배하고 소유한 사람 역시 그와 같은 사내였다.

그 역시 자기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해대고 있었다. '나는 무엇에 책임감을 갖고 있느냐......?' 라고.

그러나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책임감은 자신의 백성들을 보호하고 명나라를 유지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발 아래에 모든 것을 꿇릴 수 있는가 하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주익균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중궁전(中宮殿) 위로 맑은 하늘을 희롱하듯 구름 한 조각만이 떠 다니고 있었다.

"세외가 정리되면 중원은 나의 것이 된다. 철저하게 나에 의해 움직이고 나로 인해 존재하는 곳, 중원을 진정하게 일통하고 나면 다음은 누루하치 네놈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중원의 마교와 정도맹이 서로 상잔해 자멸해야만 한다. 거기에는 홍화객이란자, 이자가 변수가 되리라. 이자의 행적을 찾아라!"

중궁전의 처마 끝에서 박쥐 형상의 검은 그림자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아마도 이자는 마교와 적대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 안돼. 그러기 위해서는 홍화객 이자를 죽여야 된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남태천 이자도 죽어야 한다. 마교의 끄나풀인 이자가 죽음으로 해서 분명 마교는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태양이라고 믿고 있는 자를 잃어버린 정파도 일어서겠지. 그리고 그들은 서로 반목하게 될 것이다."

주익균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중원을 향하여 자신의 파괴적인 성향을 드러내던 그는 잠시 그보다 더 무서운 생각을 떠올렸다. 그것은 자신의 어머니를 버린 그자에 대한 것이었다.

*                *               *

사마적은 탁자에 발을 올린 채 의자를 위태롭게 젖히며 눈을 감고 있었고, 방 안에는 그 외에도 모두 세 사람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사각의 방에 탁자 하나가 놓여 있었고, 탁자 위에는 용안만한 야명주가 빛을 발해 대낮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사마적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적사와 광노, 그리고 호귀였다.

적사는 자신의 불룩 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호남성 특유의 조리법으로 약제를 넣어만든 전병(煎餠)을 먹고 있었고, 광노는 무언가를 계속 궁시렁거리고 있었다.

호귀는 주위의 일에는 아무런 관심조차 없다는 듯 자신의 검을 닦으며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래, 적들의 동향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적사가 입 안에 가득한 전병을 튀기며 호들갑스럽게 대답했다.

"산동, 산서등 강북지방의 쓰레기는 대충 청소되었습니다. 아마도 마교는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 난리가 났을 겁니다. 우리측 살수 피해는 모두 삼십이었습니다. 실패가 둘 있었습니다만 상대는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상대측은 모두 칠십세 명이 완벽하게 제거되었습니다."

적사는 자신의 완벽한 살수행이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그때 호귀가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은 아주 어둡게 굳어있었다.

"우리쪽은 모두 팔십두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들을 죽이기 위해 우리는 그 두 배가 넘는 우리의 형제들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죽인 것은 마교의 인물이었지만 세상이목으로는 명문정파의 제자들이었기 때문에 그 저항이 컸던 것이지요. 소주, 저는 소주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물론 대주의 복수를 하겠다는 소주의 생각은 지지하오. 하지만 대주가 살아계셨다면 우리 형제들을 이토록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일을 진행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오이다."

호귀의 느른한 목소리가 이어지자 주위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잠깐 멍청히 호귀를 쳐다보던 적사가 힐책하는 어조로 호귀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가? 우리는 대주의 복수를 위해 모인 것이 아닌가? 무조건적인 복수만이 있을 뿐이네. 대주를 죽인 자들, 나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

"후!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그자들을 죽였다고 복수가 되는가? 대주를 죽인 자는 남태천이란 자가 아닌가? 우린 그자만을 죽이면 되는 것이지, 이토록 세상을 들쑤셔 놓을 필요는 없단 말일세. 나는 떠날 것이네. 나의 형제들은 자네가 맡아 주게."

스르릉―!

호귀는 검을 거둬 검집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귀."

사마적과 광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소주."

적사는 호귀의 갑작스런 행동에 사마적이 어떤 조치를 취해주길 바라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사마적은 가만히 눈을 감고만 있었다.

안타까운 적사의 눈으로 호귀의 뒷모습이 비추어졌다.

*               *               *

찌익―!

서찰은 순식간에 먼지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한줄기 바람에 의해 흩어져버렸다.

"후후후! 나에게 도전을? 이자 역시 암중의 그 인물이 보낸 자들 중 하나인가? 하하. 암습이 아니라 도전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받아주겠다."

남태천은 자신만의 용좌(龍座)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치에는 한 덩어리의 고기 토막이 놓여있었는데 그 모습을 자세히 보니 분명 사람이었다.

사지는 발려 나가있었고, 그의 전신에 털과 이, 손톱 발톱 등은 모조리 뽑혀 있었다. 어찌나 많은 고문을 가했는지 그 형체마저도 알아보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자는 남태천에게 서찰을 가져다 준 자였는데 남태천이 누가 보낸 것인지 알기 위해 고문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지경이 되었는데도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마치 햇볕에 말라죽기 직전의 지렁이처럼 미약하게나마 꿈틀거리고 있었고,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수히 많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혈도를 봉해 놓았는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그의 짓이겨진 얼굴로 고통의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남태천은 그의 그런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금 편해지고 싶지 않은가? 자네는 단 한 마디만 한다면 능히 편해질 수 있을 텐데 왜 고집을 부리지? 자, 말을 해봐. 그 즉시 고통없이 죽여줄 테니. 지금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을 텐데. 자네를 보낸 자는 누구지?"

사내의 얼굴에 어떤 갈망이 어렸다. 그것은 애원 같기도 했고 마지막 몸부림 같기도 했다. 그는 뭔가를 말하고 싶어했지만 어떤 것이 그를 강하게 억누르고 있는 듯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 순간 그는 경련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움직임이 멈춰져 버렸다.

"쯧쯧쯧. 죽어버렸군."

"예."

"흥! 개 먹이나 줘라."

그리고 시신은 어딘가로 끌려가 버렸다.

"도전, 도전이라....... 나에게 죽었던 그자가 생각나는군."

남태천은 수 년 전 죽은 한 사나이를 생각해 냈다. 그로 인해 선사 셋을 저승으로 보낼 수 있었지 않았는가?

"후후, 재미있는 세상이지. 암! 재미있는 세상이야."

이곳은 중원 불교의 발단이자 무술의 본원인 소림의 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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