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6일 화요일
무림실록(武林實錄) 전신전설(戰神傳說) 제20장~제22장 - 내가위
제20장 절망이란 이름 아래서
미친 듯이 내리던 비가 점차 잦아드는 듯 보였다.
어느새 시간은 오경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하룻밤은 꼬박 새우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졸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다.
중추신개와 추정호, 그리고 남궁선과 정체를 알 수 없는 흑의인과 청년은 잠시 말이 없었다.
묘한 정적이 이어졌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
중추신개가 그런 분위기를 깨려는 듯 중얼거렸다.
탁! 타악.
청년은 장난을 하듯 술잔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재미있다는 듯 입가에 미소마저 머금고 있었다.
"슬슬 그가 올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청년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중추신개는 궁금함을 금치 못하고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자네는 이곳에 들어와서 누구를 기다린다고 했는데 그가 누구인가?"
청년은 빙그레 웃었다.
"조금 후면 아실 것입니다."
청년은 여전히 자신의 손에 들린 술잔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다 다시 얘기를 이어갔다.
"혐오감이 들 정도로 사람들은 권력과 자기 과시에 열을 올립니다. 우리는 태어나고 죽고 어차피 스쳐가는 한줄기 바람과도 같은 존재임에도 말입니다. 십 년을 살다 죽어도 백 년을 살다 죽어도 그 값어치는 바로 얼마를 살았느냐가 아닌 어떻게 살았느냐가 될 터인데도 그들은 그것을 모르는가 봅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인지."
중추신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딴은 그렇군. 그러나 말이야, 권력과 힘이 풍기는 매력은 그 누구도 뿌리치지 못하는 것일세. 극히 일부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말이야. 그렇지 않은가?"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글세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로 인한 피해자들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 *
쏴아아아―!
겨울의 초입(初入)에 내리는 비는 그 차가움이 마치 살을 칼로 에는 듯 했다.
막불은 이미 속옷까지 축축해져 있었다.
삼 일이었다. 적의 막사가 마치 너른 강을 바라보는 것 같이 펼쳐져 있었고, 막사 하나 하나는 철저하게 위장되어 있어 잘못 보면 계곡 사이로 커다란 녹색 강이 흐르는 듯 보였다.
막불은 삼 일동안 종내 꼼짝하지 않았고, 적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었다.
적의 작음 빈틈이라도 찾기 위해서 그는 여태껏 단 한숨도 자지 않았다.
그리고 막불은 드디어 적의 허점을 찾았다.
"적은 축시(丑時) 부근에 일제히 교대를 한다. 이 시각 이야말로 절호의 찬스가 될 것이다. 누루하치! 잠든 네놈의 목줄기를 따주겠다. 그리고...... 난 꼭 살아서 돌아가겠다."
막불은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움직인 그는 작은 나뭇가지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산 중턱의 바위틈에 몸을 숨겼다.
곰팡이 냄새가 피어올랐다. 눅눅하고 퀴퀴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막불에게는 너무도 편안한 곳이었다.
막불은 그의 아내가 정성스럽게 싸준 옷을 꺼냈다. 보자기를 풀자 검은색의 무복이 곱게 개어져 나왔다. 아내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 같아 잠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막불은 다시 여며놓고 옷을 모두 벗어 놓은 채 주변의 마른 흙과 나뭇잎으로 자신의 몸을 덮었다.
아늑한 기분이었다.
번쩍! 우르릉―!
쏴아아아아―! 쏴아아―!
폭풍우가 몰아치면서 번개와 천둥이 천하를 진동시켰다. 사방이 캄캄하고 주변이 소용돌이쳐 산짐승까지도 모두 제 굴로 숨어버렸다.
막불은 정확한 시간에 눈을 떴다.
"시작이다."
그리고 그는 치성을 드리듯 조심스럽게 옷을 입었다. 마지막으로 검은 두건을 얼굴에 쓰자 그는 검을 집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너무도 신중한 모습이었다.
쏴아아아아―!
빗줄기는 갈수록 거세어 지는 듯했다.
막불은 군막 사이로 소리 없이 스쳐 지나갔다. 소리가 들린다고 해도 빗소리가 워낙에 커 묻힐 형편이었다.
"에이, 비는 언제 그치려는지."
막불이 한 막사를 돌려는 순간 억양이 센 발음의 무사 둘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휙―!
막불은 망설일 시간조차 없었다. 그대로 달려들어 두 사내를 단검으로 찔렀다.
"크윽―!"
"커억―!"
순식간이었다. 막불은 두 사람을 처치하고도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 이들이 발각되기 전에 일을 마무릴 지어야 한다.'
막불이 누루하치의 막사로 다가서는 데는 두 시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모두 여섯의 병사를 죽여야만 했다.
막불은 조급해졌다.
지금이라도 숨겨 둔 시체들이 발각되어질 것만 같았다.
'이곳이다.'
목표지점인 막사에 도착하자 그는 작은 도롱에 독화살을 끼워 물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훅―!
"아야! 모기인가?"
보초를 선 사내는 자신의 목이 따끔거리자 짜증스러운 얼굴로 만져보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그가 갑자기 쓰러지자 놀란 옆의 사내가 막 뭐라고 소리치려는 찰라, 그 사내의 목에도 단검이 날아와 꽂혔다.
어느새 비는 그쳐 있었다.
동쪽에서는 하늘이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막불은 조심스럽게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침상은 휘장이 처져있어 안이 자세히 들여다보이지는 않았지만 누군가가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막불은 자신의 검을 꼬나들었다. 그리고는 체중을 실어 침상으로 내려꽂으려고 했다.
그러나,
퍼억―!
"큭."
막불은 그대로 퉁겨나갔다.
"네가 황제가 보낸 자객인가?"
막불의 앞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대마도에서 건너온 사나이 묵천이었다.
"이상하군. 너 같이 허술한 자를 보낼 리가 없을 텐데?"
막불은 가슴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아픔을 느끼고 있을 틈이 없었다. 그는 막불이 검을 들어 자신을 막아선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때였다.
"커억!"
뭔가 뜨거운 것이 막불의 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그는 자신의 가슴에 박혀 있는 화살촉을 보았다. 비오듯 쏟아진 하나의 화살이 그를 명중시킨 것이다. 그러나 화살은 그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침상을 겨냥한 것이었다.
따다당―!
묵천은 날아오는 여러 대의 화살을 모두 검으로 쳐냈다.
"그렇군."
파악―! 쫘아아악――!
모두 오 인의 자객들이 갑작스럽게 나타나 검을 휘둘러 묵천의 등뒤에 있는 침상을 노려갔다.
그러나 그들이 침상을 베었음에도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흥! 우리가 전부 바본 줄 아는가? 그는 이미 이곳에 있지 않다."
묵천은 검을 뽑아 들었다. 다섯 자객들은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덤벼라."
다섯 자객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마음이 서로 통하는지 동시에 검을 들어 묵천을 쳐왔다.
따다당―! 차차자장―! 차장―!
검과 검이 마주쳤다.
오 대 일의 상황, 누가 보아도 불리한 싸움이었다.
게다가 군대가 잠에서 깨기 전에 끝내려는 듯 다섯의 사내들은 맹공을 펼쳤다.
"후!"
파바박―!
막불은 보았다.
정신이 가물가물한 상태였지만 환상처럼 뻗어나가는 묵천의 검을 그는 볼 수 있었다.
마치 허공을 수놓은 듯한 그 검은 나타나는 것보다도 더 빠르게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상처 입은 다섯의 사내들만이 자리했다.
막사 주위로 군사들이 모여들었다.
다섯 사내의 눈에는 절망이 어렸다.
"황제폐하 만세."
그들은 서슴없이 자신의 목을 그어버렸다. 자결을 해 더러운 꼴을 당하지 않겠다는 뜻인 듯했다.
묵천은 서서히 죽어 가는 막불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대는 다른 자들을 위한 미끼였군."
그의 목소리가 막불의 귀에는 메아리처럼 울려왔다. 그리고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버렸다.
"그래, 모두 전멸인가?"
"예, 이차 공격대까지 모두 죽었습니다."
황제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 사실이 새어나가면 안 된다. 증거 인멸을 하도록. 불씨가 남아서는 안 된다. 그자의 가족과 그자를 알고 있는 자들은 모두 죽여 없애라."
"알겠습니다."
황제의 앞에 부복해 있던 사내는 몸을 일으켜 물러났다. 황제의 눈은 공허하게 빛났다.
"난처하군."
이때였다. 한 무사가 뛰어들었다.
"급보입니다."
"무엇인가?"
"대산이 뚫렸고, 풍야후의 군대는 질풍처럼 중원으로 들어서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우리 군은?"
"수비군은 지리멸렬(支離滅裂) 했습니다. 지금 회양(回羊)에서 우리 군과 대치 중입니다. "
"좋아! 대장군 추태국을 불러라."
황제는 조금의 동요도 하지 않았다. 마치 일어나야 될 일이 일어났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예."
"흠. 그래도 너무 빠르군. 아직 시기가 오지 않았는데 너무도 빨라. 때가 안 좋아....... 이 기회에 누루하치를 쳤어야 하는 것인데......."
황제 주익균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황제는 달빛을 맞으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추태국은 막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급히 입궐하라는 영을 받고 의관도 채 갖추지 못하고 달려와야 했다.
그런데 달려와선 벌써 한 시진째 이런 자세를 하고 있었다. 꿔다놓은 보리자루 마냥 멍청히 서서 황제가 차 마시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의 앞이라고 경거망동하겠는가? 그는 아무런 불평도 없이 그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자네는 궁금하겠지."
"폐하."
황제는 탁자 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장군, 장군은 우리 나라에 전운(戰運)이 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오?"
"예? 조선국을 침략한 동영을 말씀하신 것인지요?"
황제는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추태국에게는 피 말리는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보시게."
황제는 작은 서찰을 건넸고 추태국은 급히 받아 봤다.
"아니, 이런 일이? 그런데 어찌하여 봉화가 오르지 않고 있습니까?"
"나의 명이었다. 나는 황제로서 이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들은 이 중원의 저력을 모르고 있다네. 혼란을 조장하는 무리들이 많고 그들에 의해 이 나라가 흔들리고 있어. 이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야. 그들은 극도의 혼란을 노리고 있지. 그들이 풍야후를 자극해 전쟁을 일으킨 것이네. 난 자네에게 맡기고 싶은데 자네가 풍야후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추태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이 어지러웠다. 풍야후와 그는 이미 삼십여 년 전에 전장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젊은 장수로 무명을 날리던 그들은 서로의 호방한 성격에 이끌려 어떤 지기보다도 더 두터운 지기를 쌓은 사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적이 되어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그대를 서슴없이 죽여야만 하겠군.'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내 그대에게 명을 내리겠다. 그대는 변방지역을 순찰한다는 명목으로 군 이만을 이끌고 회양으로 가라. 그대는 그곳에서 목숨을 걸고 적을 막아야 한다!"
"예. 황상. 보은에 보답하겠습니다."
추태국은 구배(九拜)를 했다.
이것은 이미 그가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만수무강하십시오."
추태국은 비장한 얼굴로 물러나갔다. 황제가 그런 추태국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으려는 때였다.
"대단하시오."
갑작스런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그리고 돌아서자 남태천이 서 있었다.
"자네는 이 궁을 자기의 집처럼 드나드는구만."
"마치 정치의 단면을 보는 듯 하오. 철저한 계산과 배반 그리고 암투....... 호오! 방금 당신을 통해서 참다운 정치란 무엇인가를 배웠소."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때로는 내 살을 베어내더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는 것이야."
"그러나 당신은 너무 잔인하오. 그와 풍야후의 관계를 아시면서 그를 전장에 내 보내다니. 아마도 그를 아직까지 대장군의 직위에 남겨 놓은 이유 역시 같은 것이겠소만......."
황제는 남태천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런데 왜 갑자기 나를 찾아 온 것인가?"
"아!"
남태천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마교가 움직이기 시작했소."
"마교가? 그들의 움직임은?"
"현재 우리의 총단 소림을 향해 주력이 움직였고, 그 외의 무리들이 무당과 화산, 첨성, 곤륜 등으로 흩어져 출발했소. 아마 가는 도중 지방 세력들을 규합할 것으로 보이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리의 약속대로 그대는 마교를 철저히 말살시켜라. 우리 군부에서는 그대들의 모든 행동을 묵과해 주겠다."
남태천은 쓰게 웃음을 지었다.
"좋소. 우리 역시 군부의 방해를 원하지는 않으니까. 그럼 이만."
남태천은 마치 한줄기 연기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 * *
사마적은 수하들을 보았다.
모두 이만에 달하는 무사들이 차가운 한광을 흘리며 앉아 있었고 좌중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는 광노의 혈단(血團)과 소평의 천의단(天意團)만이 자리했다. 호귀가 산화한 후로 광의단(光毅團)은 두 단으로 나뉘어 편입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동안의 무리한 활동으로 인해 일만 명에 달하는 무사들이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모두들 침중한 모습이었다.
이만에 달하는 무사들의 앞에는 작은 교자상과 석 잔의 술이 놓여 있었다.
"지금 그대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는 무엇이지?"
사마적이 입을 열자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두 눈이 소의 눈망울처럼 두툼하고 얼굴이 털로 뒤덮인 장안(長眼)이었다.
그는 마치 솥뚜껑을 긁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우린 이제 주군을 떠나려 하오."
사마적은 피식 웃었다.
"이유는?"
"첫째, 그대는 우리의 주군이 아니시오. 둘째, 그대는 복수에 집착할 뿐, 우리의 안위는 도외시하고 있소이다. 셋째, 그대는 우리의 주군이 되기에는 자질이 너무 부족하오."
"자질?"
"그렇소. 그대는 자질이 부족하오. 그대는 한 사람의 무사는 될지언정 수하를 다룰만한 인물은 되지 못하오. 이것이 가장 큰 이유요. 그대는 옛 주군의 복수라는 명분마저도 퇴색시켜 버렸소."
사마적은 쓰게 웃었다.
"그럼 이 술 석 잔의 의미는 무엇인가?"
장안은 천산(天山)처럼 당당하게 외쳤다.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하늘을 향했다.
"이 잔은 그대의 명을 마지막으로 단 한번 들어주겠다는 것이오. 이는 역대 주군과 우리의 의리 때문이오."
피식―!
사마적은 다시 한 번 실소했다.
"내가 만약 그대에게 자결을 명한다면?"
장안인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죽겠소."
"좋아. 그럼 둘째 잔은?"
"이 잔은 주군의 복수를 다짐하는 잔이오. 우린 어떠한 방법으로든 주군을 해한 자들을 용서치 않을 것이오. 우리들이 갈라선 이후에도 말이오."
사내는 술잔을 들어 마시고는 잔을 부수어 버렸다.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사마적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그런 사마적을 바라보며 마지막 잔을 들었다.
"이 세 번째 잔은 우린 이 약속을 지킨 후 당신과 결별을 하겠다는 뜻이오."
사내는 망설임 없이 그 술잔을 들이 마셨다.
사마적 역시 그 석 잔의 술을 마셨고, 마치 의식을 치르듯 모든 사내들이 석 잔의 술을 마셨다.
단지 사마적의 옆에 앉아 있던 광노와 소평만은 그 술잔을 내려다보며 아무 말도 없었다.
"좋다. 그대들의 뜻에 따르겠다."
사내의 눈에는 의혹이 일었다. 사마적의 너무나 쉬운 승낙이 의외인 듯 보였다.
하지만 곧 사내는 또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의 마지막 명을 받겠소."
사마적은 눈을 감고 한참을 앉아 있다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좌중을 돌아보았다.
"그럼 나는 너희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단 한 가지 명만을 내리겠다. 난 전쟁을 치를 것이다. 너희는 약속을 지켜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다. 나를 따를 자는 남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모두 돌아가라. 이것은 너희의 약속을 빌미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곳에 남는 자들 모두가 죽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강요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좌중은 웅성거릴 뿐 누구도 일어서는 사람이 없었다.
사마적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모두의 뜻이라면 나 역시 말리지 않는다. 나는 양부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지옥의 유황불 속도 마다하지 않을 작정이다. 그리고 나 역시 이번 전투에 목숨을 걸겠다. 적이 단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사마적은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서 나왔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광노와 소평은 사마적의 뒤를 따라 왔다. 좌중의 분위기는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소주, 저희로서는 저들의 뜻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저들은 사실 대주의 인품과 그분의 뜻을 흠모하여 자청해 살수탑에 들기는 했지만, 결코 누구의 종이나 부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평이 말했다. 사마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 역시 그들을 구속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오. 단지 그들의 힘을 빌려 적을 치고자 했소. 그러나 그 방법에서 옳지 못했다는 것은 알고 있소. 질책하지는 마시오. 나 역시 마음이 편치는 않았으니....... 난, 날 위해 죽은 자들로 인해 밤새 시달려 한 잠도 이루지 못했던 적이 부지기수였소."
사마적은 말을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 나는 양부의 죽음을 지켜봤소. 칠 년. 짧다면 한없이 짧고 길다고 한다면 너무도 긴 시간이었소. 그 시간동안 나는 나의 양부가 고통스러워 나뒹굴고 피를 토하는 것을 보며 살았소. 버려진 나였기에 그에 대한 나의 집착이 과했다고 해도 좋소. 나는 그를 살리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만 했소. 그러나 그는 고통에 지쳐 죽고만 것이오. 내가 바로 그요. 그의 모든 것을 받았소. 그를 고통스럽게 한 자들을 용서하지 못하겠소. 내겐 오직 복수만이 전부요. 그 이후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단 말이오. 내가 억겁 지옥에 떨어지고 반미치광이가 되어 남은 생을 산다고 해도 복수만큼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소."
사마적의 눈가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의 두 손은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런데 그들이 이제 움직이고 있소. 중원을 차지하려는 맹수와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승냥이가 서로에게 발톱을 드러낸 것이오. 그들을 어찌 가만두란 말이오? 나는 그들을 모두 쓰러뜨릴 것이오."
광노는 눈을 감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
시종일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앉아 있는 것이 그의 최종 목표라도 되는 듯 그는 눈을 감고 앉아 아무런 말도 없었다.
사마적은 창 밖을 내다 봤다.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 한 여인의 이름을 불렀지. 그 여인은 지금 저곳에 묻혀 있소. 그녀는 나의 양모가 되었소. 내가 복수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으로 또 하나가 늘어난 것이지. 난 어떤 일이 있어도 그들 곁으로 원수를 보낼 것이오. 그래야만 나의 양부가 지옥에서나마 그를 다시 죽여 복수할 테니까."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 바람은 겨울을 알리는 바람이었다. 나뭇가지는 어느 샌가 누렇게 변해 낙엽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 * *
대술산(大術山).
멀리 소림이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숭산 기슭에 자리한 소림에는 간혹 몇 개의 작은 등만이 불을 밝히고 있을 뿐,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괴괴한 정적만이 맴돌고 있었다.
"총령, 소림은 우리 손에 포위되었습니다. 기이한 것은 그들이 산문을 걸어 잠그고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총령은 소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은 소림의 저녁 예불시간 임에도 불구하고 승의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어떤 전란 속에서도 소림에서는 예불시간만은 어기지 않았음에도 지금 소림은 너무도 고요했다.
이때 무사 하나가 나는 듯 달려왔다.
"총령, 잠입시켰던 무사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총령은 소림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밤 자정을 기해 중원의 구대문파는 이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소림 역시 예외는 아니다. 위위구조일백계(圍魏球趙一百計)라 했다. 적을 분산시키고 공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묘책이다. 그런데 어찌 이렇게 조용한가? 게다가 잠입시켰던 무사들도 돌아오지 않다니.......'
그는 불안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총령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이 높이 떠올랐고 그 밑으로는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소림을 공격하라."
소실봉을 향해 검은 무복의 무사들이 달려들었다.
마치 야조(夜鳥)가 내려앉듯 소림의 담장 안으로 뛰어 들어 갔다.
"쳐라. 한 놈도 남기지 마라!"
"죽여라. 우린 백도 놈들과 같은 하늘 아래서 숨을 쉴 수 없다."
와아―!
무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몰려들었다.
그러나 소림은 죽어있었다. 정적, 죽음과도 같은 정적만이 소림의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곳곳에 불을 놓았다. 여기 저기에서 불길이 피어올랐고, 소림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장경각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종이조각 하나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주지원에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달마원 역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계율원에서도 역시 단 한 명의 죄수조차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사방을 뒤진 수하들의 한결같은 목소리였다. 소림에는 단 하나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총령은 갑작스런 이변에 가슴 한구석이 섬뜩해져왔다.
"함정!"
번쩍―!
총령이 외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십여 개의 섬광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적이다."
누군가가 외쳤고, 그와 동시에 화살이 비오듯이 쏟아져 내렸다.
후두두둑―!
마치 하늘에서 소나기라도 퍼붓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그와 동시에 무사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모두 침착하라. 각자 검으로 화살들을 쳐내라!"
파바박―!
따당, 따다당―!
무두가 보기에 총령은 굉장히 당황한 듯 보였으나 그는 속으로 여유있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진정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와 같은 시각, 또 한 사나이가 소림을 내려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황 남태천, 그 역시 불타오르는 소림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총령, 총령, 총령! 그 잘난 면상을 구경해 보고 싶구나. 어떠냐? 오늘 네놈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을 것이다.'
남태천은 마음속으로 흥분되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저들이 발붙일 곳을 만들지 마라."
이때였다. 남태천의 등뒤에 승하나가 다가왔다.
"잔당들이 지금 조사동(組師洞) 쪽으로 도주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잘 되었다. 매복은?"
"예. 원(圓)자 항렬의 무승들이 매복해 있습니다."
"좋다."
남태천의 눈에서는 야망의 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총령을 제거하고 나면 중원은 이제 내 것이다. 철저한 위선자들에게서 이 세상을 구해낼 것이다.'
조사동(組師洞).
숭산의 왼쪽 계곡에 자리한 조사동부는 소림 태고의 신비와 수많은 전설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그 예로 달마가 중원에 말을 들여놓았을 때, 위나라 황제가 서역에서 고승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달마를 불렀다.
위황제는 석가의 직계제자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슴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적지 않게 실망을 하고 말았다.
황제는 내심 부처의 제자가 인물이 출중하고 덕이 높은 인물일 것으로 상상했었지만 자신 앞에 나타난 자의 몰골은 그런 상상을 여지없이 구겨놓은 것이다.
그는 칠 척 장신인 데다가 체구가 집채만하며 얼굴은 온통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게다가 몸에는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려갈 듯한 남루한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괴이하게도 그는 한쪽 신발을 머리 위에 올려놓고 있었던 것이다.
위황제가 그를 보며 실망의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그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눈치 살피지 마시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으면 아무 거리낄 것 없이 물어보셔도 됩니다."
그러자 위황제는 달마에게 왜 머리 위에 신을 올려놓고 있느냐고 물었다.
달마의 대답은 이랬다.
"사물을 제대로 파악하라는 뜻입니다."
'사물을 파악케 하기 위해 신발을 머리 위에 올려놓고 다닌단 말인가?'
황제는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다시 물었다.
"아니, 사물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꼭 그렇게 머리 위에 신발을 이고 다녀야 한다는 말입니까?"
위황제가 묻자 달마는 속삭이듯 황제의 귀에 말했다.
"나는 불합리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처럼 머리에 신발을 올리고 다니는 것은 황제께 그 사실을 일깨워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곳 황제의 경직된 마음을 깨뜨리기 위해서 인 것이지요. 자신의 마음을 깨뜨리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나를 보자마자 그것을 깨달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비로소 나를 받아들일 것인지 내 쫓을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일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인도승려는 그렇게 잘라 말하고는 돌아서 가버렸다. 그는 상대방에게 전혀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러다 위황제는 달마가 사라졌을 때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다급히 외쳤다는 것이다.
"당신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그러나 어느새 달마는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위황제를 말 한 마디로 눌러놓고 초연히 광야로 사라진 그 사람, 그는 석가의 법맥을 이은 이십팔대 존자 보리달마였다.
그는 황제를 만나고 바로 이 숭산에 들어와 그물을 쳐놓고 면벽에 들어갔는데 이것이 이 조사동을 유명하게 된 이유이다.
달마는 그물을 스스로 치며 그물의 뜻을 알고 찾아오는 고기를 기다렸다. 이것은 이 그물로 아무 고기나 잡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의 가르침을 받을 제자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후 천 년이 지나고 이 조사동은 소림 최대의 금지(禁地)이자 누구든지 활용할 수 있는 수련장이기도 했다.
이유인 즉, 깨달음에는 나이 차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소림의 승들은 이 조사동을 끔찍하게 성스러워했다.
그런데 이 조사동으로 마교도들이 들어선다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 전투는 치열하게 이어졌다.
"크억―!"
한 사내가 피가 뭉클뭉클 흘러나오는 눈을 움켜잡은 채 도망치려 하자 승려의 뒤이은 검이 그의 목을 날려버렸다.
그리고 그 승려 역시 한 마교고수의 손에 머리가 터져 버렸다. 자고로 머리가 으스러지고 살아날 수 있는 자는 없는 법, 그 승려는 나무토막처럼 쓰러져 버렸다.
와아아아아―!
촹― 챙― 따당―!
검음이 끊이지 않고 조사동부를 울렸고 소림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가 피로 얼룩지고 있었다.
소림의 승들은 적들과 맞서 싸우면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그 비통함을 아는지 하늘에서 역시 빗줄기를 뿌리기 시작했다.
단지 남태천과 소림의 승려로 위장한 남태천의 수하들만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같은 시각,
무당파(武當派).
화산파(華山派).
아미파(峨嵋派).
점창파(點蒼派).
전진파(全眞派).
곤륜파(崑崙派).
청성파(靑城派).
그리고 개방( ).
이 구대문파들 역시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정도를 수호하고자 하는 그들의 열의와 열망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의지 때문이었는지, 이들은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그들은 승승장구했다. 모든 것이 구대문파의 승리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잘 짜여진 각본 같았다.
* * *
쏴아아아―!
야음을 틈타 속속히 모여드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검은 잠행의복(潛行衣服)을 입고 있었으며, 모두들 폭뇌(爆雷)와 도검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밤 고양이처럼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바로 앞에 소림의 산문이 그 육중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산문 너머에선 굵은 빗줄기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화광(火光)을 볼 수 있었다.
"소림에 남태천이 있다. 우린 남태천의 목을 베고 이 소림을 지상에서 사라지게 할 것이다. 그리고 마교의 잔당 역시 없애면 그대들의 일은 끝나는 것이다. 벌써 세 시진, 저들은 지쳐있다. 마교는 남태천에 의해 괴멸 직전에 이르렀다. 우린 남태천과 마교를 이 지상에서 제거해야만 한다."
사마적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는 두건을 뒤집어썼다.
"가자!"
한 무리의 무사들이 일제히 소림을 향해 들어섰다.
소림의 산문에서부터 불에 반쯤 그을린 시신들과 전장의 잔재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고, 단지 수백 년을 이어온 전각과 누각들이 한줌의 재로 변해가고 있었다.
"소림을 샅샅이 뒤져라."
그들의 움직임은 조용하면서도 민첩했다. 본업이 자객이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차별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살행이 시작되었다. 이미 기세를 꺾인 마도인과 소림의 승들간의 싸움이 점차 막바지로 들어서고 있는 때였다.
"누?"
승하나가 자신의 앞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며 소리치려는 순간, 소리 없는 검광과 함께 쓰러져야만 했다.
"적이다!"
외침이 터지고 잠행복을 입은 자객들에 의해 무차별 학살이 이루어졌다.
죽는 자들이 마치 추풍낙엽과 같았다.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잔혹한 살인이었다.
차라리 비명을 지르며 악에 받쳐 싸움을 걸어오는 것이라면 이토록 두렵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대는 말이 없었다.
아니, 움직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저 바람처럼 조용히 다가와 목을 베고는 사라져 갔다. 그들이 움직인 자리에는 싸늘한 주검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살풍(殺風). 죽음의 바람이 이어졌고 그 바람은 서서히 한곳을 향해 다가서기 시작했다.
남태천은 그들의 움직임을 보았다.
흥분되어 있던 그의 눈에는 어느새 차가운 한기가 내려앉았다.
"저들은 자객이다. 흑풍!"
"예."
그의 옆에는 환우대사가 공손히 손을 모으며 대답했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제거된 환우의 탈을 쓴 남태천의 수하였다.
"화전을 쏘아 올려라. 이제 우리의 무사들이 나설 순간이다."
"옛!"
화아악―!
그리고는 소매에서 조그만 원통을 꺼내어 허공을 향해 줄을 잡아당기자 밝은 불덩어리가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미천한 것들의 죽음이라. 화려하게 해주지. 적들을 조사동부 앞까지 유인하라."
"예."
"흐흐흐......."
남태천의 얼굴에는 싸늘한 미소가 어렸다.
사마적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한바탕 살풀이를 해대듯 그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시종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남태천. 나의 아버지의 몸에 검을 꽂은 자. 너만은 용서치 않으리라!'
삐익―!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남은 자들은 계곡 안으로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소주! 적들이 계곡 안으로 도주하고 있습니다."
"따르라."
사마적은 도망하는 승들을 쫓아 계곡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인간에게 공포감을 주는 것들 중 가장 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어둠일 것이다. 어둠은 폐쇄적이고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을 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자신이 눈을 감고 있는지 뜨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런 곳에서 사마적 일행들은 걸음을 멈춰야 했다. 그들은 이미 어둠 따위에 구속당하는 경지는 벗어난 자들이었다.
진세의 작용인지 계곡 안은 한 치 앞도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진세도 사람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일 뿐, 철저하게 정신 훈련을 받는 자객들에게는 한낱 귀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침착하라."
사마적은 주위를 경계하며 앞으로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진세는 그들에게 어떤 영향이나 위해(危害)도 가하지 않았다.
사마적 일행이 진세의 영향권을 벗어난 순간 그들은 처참한 지옥도를 보았다.
갈기갈기 찢겨진 시신과 피로 얼룩진 조사동부, 소림의 역사는 이것으로 막을 내리는 것 같았다.
"누구냐?"
"크흐흐흐......."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인간의 형상을 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덥수룩한 머리에 손과 발톱은 마치 갈고리처럼 길었고 피로 얼룩져 있었다.
낮게 웃는 소리는 마치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그들은 사마적 일행을 노리고 있었다.
그것도 그들의 수는 하나 둘이 아닌 수천에 달했다.
새카맣게 둘러싼 그들은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음에도 위압감을 주고 있었다.
일견해도 이 지옥도를 만들어 놓은 것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바로 천하영웅대회에서 선출된 중원의 기재들이었다. 남태천이 이들을 이렇게 완벽한 야수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이건?"
이때 멀리서 남태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흥! 너희가 홍화객이란 자의 졸개들인가? 이곳이 바로 지옥의 입구가 될 것이다. 지옥에 먼저 간 너희 대장이 몹시 반가워하겠구나. 쳐라!"
남태천은 오십여 장을 떨어진 벼랑 위에 있었지만 마치 옆에서 속삭이듯 생생한 목소리였다.
이것만 보아도 그의 내공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잘 가거라."
"크흐흐......."
괴수들은 서서히 사마적 일행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사마적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남태천!"
사마적의 울부짖음이 메아리로 남았다.
"후후후! 네놈이 바로 홍화객이란 자의 양자인 사마적이란 놈이로구나."
그 소리가 들려온 것은 사마적이 검을 빼들고 막 남태천에게 날리려는 찰라였다.
"뭐?"
사마적은 순간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저자가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 나는 표면적으로 단 한 순간도 나선 적이 없건만.'
무언가 불길한 예감과 억누를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을 느꼈다.
'뭐지?'
"크윽―!"
순간 사마적의 눈이 부릅떠졌다.
"네, 네가?"
사마적의 등에 검을 꽂은 것은 다름 아닌 광노였다.
"네...... 네가......!"
사마적의 눈은 원망과 불신으로 얼룩져 있었다.
광노는 사마적이 남태천에게 한눈을 파는 사이 서서히 접근해 사마적의 오른쪽 옆구리에 검을 박아 넣었던 것이다.
그것도 맹독이 검게 발라진 독비수(毒匕首)였다.
"그건 천 일간이나 독에 담가뒀었습니다. 물론 서른두 가지의 맹독을 혼합했기 때문에 해독이란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그런 상태이니 무리한 움직임을 피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흐흐흐......."
"네, 네놈이!"
광노는 교활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전 이미 오래 전부터 한 사람의 명으로 이곳에 잠입해 있었습니다. 물론 그분은 이 자리에 계시지는 않지만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분의 명으로 홍화객을 만들었고 제거했습니다."
"이놈."
적사(赤蛇) 소평이 청룡도(靑龍刀)를 휘두르며 광노의 머리를 쪼개왔다.
"흥! 어리석은, 비산개수(飛散槪數)!"
광노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고 마치 주변은 광풍이 몰아 치는 듯했다.
달려들던 적사는 달려들던 때보다 더욱 빠르게 퉁겨져 나갔고 십여 장을 밀려나 벼랑에 쳐박혀버렸다.
적사의 얼굴은 놀라움으로 얼룩져 있었다.
"이토록 무공이 높다니!"
그리고는 비분에 찬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원통하구나! 네놈의 목을 내 손으로 베지 못하는 것이......."
쩍―!
적사의 몸은 여섯 조각으로 분리되면서 선혈을 뿜어냈다.
그리고는 그대로 절명해버렸다.
사마적은 그제야 이해가 갔다.
어찌해 자신의 의부가 그토록 허무한 생을 마감해야 했는지, 그리고 호귀는 왜 그렇게 허무하게 적에게 당해야 했는지 등이 모두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자신들이 그 동안 이용당했다는 생각에 분노가 일어야 정상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허허, 허허허...... 허허허허......!"
미친 듯이 웃었다. 마치 지금 상황을 파(波)해 버릴 것처럼 웃어대는 것이었다. 그 웃음에는 허탈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웃음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좋아! 지옥의 동반자로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는 자세를 고쳤다.
'복수를 꿈꾸었건만 겨우 남의 노리게 노릇이나 하다니. 우습다, 난 무엇을 위해 살았던가. 아, 그녀의 모습을 단 한번만 볼 수 있다면!'
"하앗!"
사마적의 기합성이 터졌다. 사마적은 먼저 광노를 향해 몸을 던졌다.
"미친!"
파앙―! 따앙―!
검이 마주쳤고 광노는 우세를 점하는 듯했다. 그러나, 사마적의 기세는 이미 죽음을 초월한 듯 폭우와 같았다.
광노는 그렇게 미친 듯이 달려드는 사마적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했고 급기야는 일검에 양단이 되어버렸다.
"낙화유수(落花流水), 뇌우진천(雷雨振天), 멸(滅)!"
"크아악―!"
광노는 한 조각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비산해버렸다. 사마적은 검을 짚은 채 비틀거리며 외쳤다.
한 명의 동료라도 살려야만 했다.
"이곳에서 도망쳐라. 살아 남아라!"
그 소리에 모두들 도주를 준비하던 그 순간 남태천은 이상한 호각을 불었다.
삐익―! 삐이익―!
낮고도 강한 소리였다. 또한 음침하기도 했다. 그러자 으르렁대기만 하던 인간 야수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21장 승자(勝者)
"그후 어떻게 되었는가?"
중추신개는 조급히 물었다. 모두들 청년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다. 청년의 얼굴은 좀 전과는 다르게 딱딱히 굳어 있었다.
"그것은 필사(必死)의 사투(死鬪)였습니다. 그는 이미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는 전력을 다해 그곳을 벗어났습니다. 그리고는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그가 사랑한, 아니 사랑한다고 믿는 한 여인을 향해 말입니다."
"그럼?"
중추신개가 말하려는 순간 남궁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신예원을 찾아 간 것이군요."
청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밖에는 뿌옇게 날이 새오고 있었다. 그리고 밤새 미친 듯이 내리던 비는 이미 그쳐 있었다.
청년은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난처럼 말을 잇던 표정이 아니었다. 그의 눈에서는 그리움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자신의 정체조차 밝히지 않은 청년과 흑의사내,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곳 사람들 모두 이상한 자들이었다.
기괴한 분위기였다.
표면적으로는 너무도 평화로워 보이는 이곳이 청년의 이야기가 더해 갈수록 알 수 없는 야릇한 긴장감이 일고 있었다.
"사마적은 수십 번의 고비를 넘겨 사막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진정 지옥 속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스물 두 군데의 상처와 두 군데의 관통상을 입은 그는 곪아 썩어 가는 부분을 움켜잡은 채 사막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 * *
사막(砂漠)은 인간이 살아 갈 수 있는 가장 극한의 대지이다. 열사가 존재하는 곳, 바로 죽음의 땅이었다.
사마적은 손에 든 검에 의지해 한 발 한 발 힘겹게 내딛고 있었다.
눈앞이 흐려지고 다리에는 힘이 풀렸다.
"허억―! 허억―!"
그의 입에서는 바람 소리보다도 더욱 거친 숨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그런 그를 더 채찍질하는 듯, 모래 바람은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미 사마적의 입에는 모래가 가득 차 있었고, 입을 움직일 때마다 사각거리며 모래가 씹혔다.
그는 지금 몇 일째 물을 먹지 못했다.
입 안은 말라 혀가 갈라졌다. 신은 지금 사마적을 시험하는 것인가? 신의 형벌이라면 너무도 가혹한 것이었다. 그는 이미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멀리서 본다면 사람이 아닌 누더기가 걸어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가야 한다. 그녀를 찾아서! '
사마적은 눈은 북쪽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비록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눈에는 바로 저 모래 너머에 그녀가 있을 것만 같았다.
사막의 밤은 몹시도 춥다.
낮에는 고열(高熱)과 강렬한 태양 빛에 시달리지만 밤이면 얼음이 얼 정도의 추위를 감소해야만 한다
짐승들마저도 활동을 하지 않는 사막의 밤, 모두가 죽어 버린 이 시각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씨, 그게 아니란 말야."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서너 살쯤 되었을까? 소년은 총명하게 반짝이는 눈을 들어 광활하게 펼쳐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럼?"
"아빠는 분명히 이 희야를 보러 올 거란 말야."
"그래, 그럴 거야."
"씨이."
소년은 그 옆에 앉아 있는 여인 앞에서 투정 아닌 투정을 하고 있었다.
여인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후!"
낮은 한숨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 그러나 그 알 수 없는 슬픈 눈빛을 잊을 수 없는 사람을 생각했다. 그녀는 그 사람의 아이를 낳았고 이제 네 살이 되었다.
'그가 왜 그랬을까?'
그녀는 이 질문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그가 자신을 겁간(劫姦)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음적이라면 그 슬픈 눈빛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찌릿한 그 슬픈 눈빛을 지닌 사내의 마음을 그녀는 알고 싶었다.
천녀 신예원.
지금 당장이라도 중원에 달려가 그 사내를 찾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여인이기 이전에 선천궁의 궁주이기 때문이었다.
변황 삼대세력 중 하나인 이 선천궁은 드러나지 않은 강한 세력과 저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을 버릴 수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추억이 담긴 이곳을 등질 수 없었고, 그녀에게 소중한 모든 사람들을 배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후......!"
그녀의 입에서 다시 낮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궁주, 안으로 드시지요."
귀모였다. 그녀는 잘려나간 손목을 긴 옷소매로 가리고 있었다. 그녀 역시 지난 사 년간 더 많이 늙은 듯 하얀 백발이 되어 있었다.
귀모는 그녀가 지난 사 년간 얼마나 많은 마음 고생을 했는지 지켜봐야만 했다. 그녀로서는 지켜보는 것이 최선이었다.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모자는 밤이면 이렇게 뜰에 나와 남쪽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낙이 되어 있었다.
귀모는 근심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궁주, 밤바람이 차갑습니다. 소궁주가 감기에라도 드시면......."
"알았어요, 유모."
그러나 밝게 대답하는 신예원의 눈가에는 이슬방울이 맺혀 있었다.
사마적은 흐릿한 눈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기를 벌써 보름동안을 계속하고 있었다. 인간이 극복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그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이 사막에서 십오 일을 버틴 것이다.
그러나 탈수 증세로 이미 이지라는 것을 잃고 있었다. 단지 이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초인적인 정신력과 본능만이 그를 지배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그의 앞에 거대한 성이 나타났다.
흰색의 성은 강렬한 태양 빛에 반사되어 그 위용을 더하고 있었다. 사막 한가운데에 나타난 성, 그것은 마치 신기루와 같았다.
드디어 성이 사마적의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조금만 더 가면 그는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던 신예원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의 몸은 마지막 한 방울의 기름을 빨아들이려는 등잔과도 같았고 언제 꺼질지 모르는 상태였다.
'선천궁!'
그는 눈앞이 아득해져옴을 느꼈다. 사마적은 모래에 처박히며 이내 정신을 잃었다.
'가야 하는데.......'
그러나 이미 그는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아득한 사막의 끝에서 검은 점으로 시작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대상행렬이었다.
"이보게 오늘은 저곳에서 하룻밤 유하고 가세."
대주인 소관(少貫)이 말하자 모두들 발길을 돌렸다. 멀리 선천궁이 보였다. 선천궁은 서역과 중원을 잇는 하나의 거점이었다.
그래서 이곳은 사막에서 가장 큰 시장이 있는 곳이기도 했고 또한 많은 상인들의 집합지이기도 했다.
숙소를 제공하고, 진기한 물건들이 즐비하며, 도적 떼로부터 상인들을 지켜주니 이곳은 날로 번창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사막을 지나는 상인들은 이곳을 꼭 들르며 신성한 땅이라 부르고 있었다.
"대주! 저길 보십시오."
선천궁에 다 도착해 갈 즈음, 후미에서 따라오던 진창이 소리쳤다.
"무슨 일인가?"
"저기 뭔가가 있는데 아무래도 사람 같습니다."
그들 중 몇몇이 달려가 보았다. 그들이 본 것은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아마도 이 사막에서 조난 당한 것 같은데요?"
"그런데 이 상처들은?"
"도적 떼를 만난 것이 아닐까요?"
"죽었나?"
진창이 가슴에 귀를 대어보았다.
"아직 가늘게 뛰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곧 죽을 것 같은데요"
"글쎄. 어쨌든 선천궁으로 옮겨야겠다. 그들이 알아서 해주겠지."
잠시 지체되었던 대상의 행렬은 더욱 빠른 속도로 선천궁을 향해 갔다.
신예원이 그 소식을 들은 것은 아들인 희야와 놀아 주고 있을 때였다.
수하 하나가 달려 들어왔다.
"궁주, 중원에서 오던 상인들이 조난자를 구조해 왔습니다."
"그래요? 그럼 상례대로 그를 돌봐주면 되지 않아요?"
"그런데 그것이......."
신예원은 평소와 다른 그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다.
"뭐가 잘못 됐나요?"
"궁주님이 직접 보시고 결정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래요?"
시체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그는 바짝 말라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몸의 여기저기는 모두 상처가 곪아 있었고, 옆구리는 이미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의식은 이미 없었고, 기적적으로 가늘게 심장만 뛰고 있을 뿐이었다.
풍전등화(風前燈火)란 말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그의 생명의 촛불은 아주 미미한 바람에도 꺼질 듯이 작아져 있었다.
그런데 신예원은 그 시신을 보자마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이 알 수 없는 답답함은?'
그녀는 그런 기분을 지우려는 듯 더욱 큰소리로 말했다.
"이, 이자를 의원에게로 옮겨 놓으세요."
* * *
"사마적에게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사이 중원에서도 급격한 변화가 일고 있었습니다. 그 변화는 우선 풍야후와 추태국의 전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청년의 목소리는 낮아지고 있었다. 아마도 얘기하기가 몹시도 고통스러운 모양이었다.
* * *
회양(回羊).
본시 이곳은 초지(草地)가 발달하여 유목을 통해 목축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명(明)이 세워지고 이곳에는 성이 지어졌다. 그후 사람들의 유목이 통제되고 있었다.
성 앞으로는 어른 가슴까지 닿을 정도의 내가 흐르고 있었는데 지금 그 내를 사이에 두고 두 사나이가 마주 서 있었다.
시각은 자정에 이르고 있었고 달빛은 흐르는 냇물에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두 사나이는 서로의 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둘의 눈은 허공에 얽혀 있었다.
뭐랄까? 알 수 없는 애잔함이 흐르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풍야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삼십 년 만인가?"
추태국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군, 벌써 그렇게 되었는가? 자네는 많이 늙었군."
"허허허....... 자네 역시 많이 변했어. 벌써 백발이 되다니 말이야."
풍야후는 허허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 둘은 그렇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로에게 삼십 년이라는 시간은 너무도 긴 시간이었던 것이다.
우의를 다짐했던 그 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삼십 년 전 언덕 위에는 한 그루의 전나무가 서 있었다. 그 높이가 이십 장이 넘었다.
나무 줄기의 둘레만 해도 어른 열 명이 손을 마주 잡고 둘러서도 다 감싸 안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아래에는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젊은 풍야후와 추태국이 마주 앉아 있었다. 서로에게 술잔을 들어 마주 댄 채 그들은 말이 없었다.
사나이와 사나이의 만남에 어떤 말이 필요한가?
아무것도 필요치 않았다.
"맑은 달이 떠 그대와 나의 마음에 담겼다. 잔을 들어 서로의 입가에 겨누고 내 마음을 배에 띄워 그대에게 보낸다. 잃은 마음이 없어서라. 더 이상 거둘 것 역시 없다. 내리는 눈만큼 내 우정도 깊이 쌓여간다."
추태국이 시를 한 소절 읊었다. 그러자 풍야후 역시 자신의 심정을 시로 읊었다.
"나 이곳에 누웠다. 백골이 진토가 되고 넋이 먼지가 되어 날린다. 망향산의 초입에 서서 돌아서니 아는 이 없다. 내가 어느 들에 묻히거든 네가 내가 되어 울어 줄 손가?"
"하하하하하......!"
둘은 그렇게 서로에게 술잔을 권하며 밤을 지샜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았다. 하나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로에게 검을 들이대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때가 생각나는구만."
"그래, 자네라면 내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야."
추태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자네와 다르지 않다네. "
둘은 마주 보았다.
달빛마저 두 사람을 보기 민망하였는지 하늘 끝으로 숨어 버렸다. 주위는 어두워졌다.
풍야후가 추태국에게 말했다.
"난 내일 자네의 성을 공격할 것이네. 자네가 진다면 나는 황성까지 달려가 황제의 목을 부러뜨려버릴 것이라네."
추태국은 희미하게 웃었다.
"나 역시 자네를 막겠네. 내 목숨을 걸고 말이네."
"그러나 내가 진다면 우리는 조용히 물러날 것이네. 내일 전장에서나 만날 수 있겠구만."
풍야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무운을 빌겠네."
풍야후가 발길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추태국의 입에서 낭랑한 시가 터져 나왔다.
"나 이곳에 누웠다. 백골이 진토가 되고 넋이 먼지가 되어 날린다. 망향산의 초입에 서서 돌아서니 아는 이 없다."
풍야후가 뒤 소절을 받았다.
"내가 어느 들에 묻히거든 네가 내가 되어 울어 줄 손가?"
가려던 풍야후는 멈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지었던 시로군. 잘 가게. 친구."
추태국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두 사람의 마음은 서로 다르지 않을 것이니.......
다음날은 여느 아침보다 해가 일찍 뜨는 것 같았다.
무사들과 군사들은 무장을 하고 갑의를 걸쳤다. 손에 밤새 손질한 창과 도검을 든 그들의 위용은 대단하였다.
풍야후는 부하들을 모아 놓고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싸울 것이다. 모두들 살아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이곳에서 죽는다고 생각하라. 적을 죽이지 않고는 우리가 살아 돌아 갈 수 없다. 저 광활한 대지를 뛰어 노는 우리의 후손들을 생각해라."
"와아―!"
수만의 무사들이 함성을 터뜨렸다. 사기충천한 모습이었다.
유난히 하늘은 맑았다.
추태국은 성루에 올랐다.
"오늘은 치열한 하루가 될 것이다. 우리는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대들의 가족과 형제들, 그리고 이 나라의 백성들을 지켜야만 할 의무가 있다. 이곳이 뚫리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생각하라. 만약 도망치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추태국은 눈을 감았다.
"그렇기에 우린 질 수 없는 것이다."
"와아―!"
추태국의 얼굴은 딱딱히 굳어 있었다. 그러나 그 굳은 의지는 지워지지 않았다.
전쟁, 권력의 잔재이기도 하고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욕망의 가장 강력한 표현일 것이다.
서로에게 검을 대고 살인을 하고 모든 죄악과 범죄가 용서되는 곳, 이곳을 우리는 전쟁터라고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삶이 곧 전쟁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삶이 곳 전쟁이다.
이는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 순간이 어떤 것보다도 치열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야만 살아 갈 수 있는 것이 삶이기에 전쟁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만큼 잔인하겠는가?
인간이 짐승처럼 오직 본능과 자신의 힘에 의지해 살아가는 세상이 바로 이곳이다.
하늘은 티 한 점 묻지 않아 눈이 시릴 정도였다.
콰앙―!
화포소리가 울렸고 포탄이 떨어진 자리는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누군가의 죽음이 이어졌다.
성루에서 포탄을 장전하는 병사들은 이미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성을 함락하라."
"죽여라."
달단의 무사들은 비오듯 쏟아지는 포탄과 화살 세례를 피해 달려들었다.
성을 타고 오르려다 바위에 맞아 으스러지는 자, 머리가 터져 죽는 자, 화살로 고슴도치가 된 자, 그 죽는 유형도 사람 수만큼이나 많았다.
"성문을 부셔라."
콰앙―! 쾅―!
거대한 아름드리 나무를 삼십여 명의 장정이 들고 달려들어 성문을 부셨다.
그러나 명군들의 방어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끓는 물을 부었고 돌을 던졌다.
문은 견고하여 부서질 듯 하면서도 부서지지 않았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순간이었다.
이때였다.
"아버님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풍야후의 아들 중 풍휘지가 화약을 가슴에 안고 성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풍야후에게는 모두 세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풍우척, 둘째는 풍휘지, 셋째는 풍위신이었다.
그는 풍야후의 세 아들 중 둘째였다.
풍야후는 말릴 틈도 없었다.
파바바박―!
화살이 날아와 풍휘지의 전신에 빼곡이 박혔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그를 멈출 수 없었다.
콰앙―!
성문에 다다른 풍휘지는 그대로 산화해버렸다. 그리고 성문은 반쯤 날아가 버렸다.
풍야후는 자신의 아들이 죽은 것을 슬퍼할 틈이 없었다.
"돌격하라. 성문이 열렸다."
"와아―!"
풍야후의 군사들은 물밀 듯이 밀려들어갔다. 풍후지의 죽음으로 인해서인가? 풍야후의 군사들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고, 창을 휘둘렀다.
"와아―! 와―!"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전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서로 얼굴조차 모르던 사람들이 서로에게 검을 들이대며 상대에게 맹목적인 적의를 갖고 있어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도덕이나 이성은 중요치 않다. 왜냐는 질문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어차피 전쟁터에선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닌 것이니....... 살이 튀고 피가 내를 이루었다. 광란이란 단어가 너무도 잘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풍야후와 추태국은 검을 들어 서로를 향해 마주 섰다. 둘의 눈이 허공에서 얽혔다.
"난 약속을 지켜야만 한다."
추태국의 말에 풍야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마치 이 치열한 전쟁터에서 두 사람에게만은 시간이 멈춘 듯 보였다.
풍야후는 검을 고쳐 잡았다.
"받아라!"
파악―!
검은 아슬아슬하게 추태국의 눈가를 스쳐 지나갔다. 추태국의 얼굴에는 얇은 상처가 생겼다.
하지만 추태국 역시 물러서지만은 않았다.
검음이 울렸다. 마치 호곡성처럼 두 사람의 검음은 서로의 가슴을 울렸다.
스걱―!
추태국은 어깨에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풍야후 역시 허리 언저리를 베었다.
"후후, 자네 이제 늙었나 보이. 검에 힘이 없어."
풍야후가 추태국을 비웃듯 말했다. 추태국은 말이 없었다. 단지 두 눈에서 살기만을 흘리고 있었다.
"난 이 나라를 지켜야만 한다."
그들의 무공에 격식 따위는 없었다. 용호상박(龍虎相搏)의 싸움이었다.
추태국, 그의 무공은 그저 실전에서 우러나온 실력이었지만 어떤 고수의 움직임에도 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누군가 풍야후의 등에 화살을 날렸다.
휘익―! 퍼억―!
풍야후는 비틀거렸고 추태국은 그런 풍야후의 가슴에 검을 꽂았다.
"크윽―!"
묵직한 느낌과 함께 풍야후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터졌다.
"아버님!"
풍야후의 뒤로 풍우척과 풍위신이 달려왔다. 그들은 달려들어 금새라도 추태국을 벨듯했다. 그러나 무릎 꿇던 풍야후가 그 둘을 말렸다.
"아서라."
"아버님.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풍야후는 가쁜 숨소리를 보이고 있었다.
"그와 나는 서로의 목적을 위해 싸웠고 그리고 결론은 이미 내려졌다. 이제는 돌아가자꾸나. 내 형제들의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내 욕심 때문에....... 이제는 너희들에게 물려줘야겠구나. 내가 죽으면 너희들이 자란 그 초지 위에 나를 묻어다오."
풍야후는 추태국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 했다.
"자네에게 부탁하네. 더 이상의 전쟁은 무의미한 것! 이해해 주리라 믿네."
추태국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그러나 자네 손에 죽을지는 몰랐네. 단지 이렇게 편안히 갈 수 있어 즐거울 뿐이네. 이렇게...... 죽음이...... 편한지...... 이제야...... 알......."
풍야후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달단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최고의 무사인 그가 칠십육 세의 나이로 전쟁터에서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전쟁터에서 살아온 그에게 너무도 잘 어울리는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추태국은 그의 마지막 부탁대로 돌아가는 달단의 군대를 그대로 놓아보내 주었다.
* * *
"그후 추태국은 낙향해 집에서 농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가묘(家廟)를 지어놓고 평생 풍야후를 위로했다고 하더군요. 이것이 바로 정사에는 전해지지 않던 풍야후의 반란이었습니다."
청년은 목이 타는 듯 술잔을 들이켰다. 그의 눈은 어느 순간인가부터 문 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올 시간이 되었는데."
"그라니?"
청년은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아마도 여러분 역시 반가워하실 분입니다. 특히 당신은 더욱 반가워하실 것입니다."
청년은 남궁선을 바라보았다. 남궁선은 놀란 듯 토끼 눈이 되었다.
"내가요?"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사마적인가 하는 친구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치료를 위해 의원에게로 옮겨졌습니다."
* * *
"그의 상태는 어떤가요?"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지난 삼십여 년간 많은 상처 입은 사람을 치료해 왔지만, 이토록 극심한 상처와 탈수증세를 보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가망이 없습니다. 이 정도의 상처를 입고도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아마 살아 있는 것도 사상 초유(初有)일 것입니다."
신예원의 눈에는 다급함이 어렸다.
"그래요. 하지만 어떻게 의식이라도 차리게 할 수 없나요?"
"글쎄요, 이 사람의 상처야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지금 그가 보이는 정신력이라면 충분히 일어 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독에 중독 되어 있습니다. 정신을 차린다 하여도 모든 기능이 저하된 그로서는 참기 힘든 고통일 것입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기적이란 것도 있으니 한 번 두고 봅시다."
돌아서는 신예원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 * *
북방의 겨울은 몹시도 매섭고 빨리 찾아온다.
아직 시월이 오지 않았건만 들에는 어느새 서리와 눈이 내린 흔적이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었다.
아직 사람들이 일어나기에는 이른 시각, 새벽의 한기가 전신을 엄습하는 시각이었다.
한 사나이가 막사가 즐비한 한 곳을 향해 무작정 걸어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족히 백여 개는 되어 보이는 막사들이 모여 진을 이루고 있었다.
사내는 전신이 검은 천으로 뒤덮여 있었으며 얼굴마저도 두건을 쓰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어른 손바닥 넓이의 도를 들고 있었는데, 이는 보통 도의 크기를 두 배 가까이 육박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도를 질질 끌며 가고 있었다.
이때였다. 보초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웬놈이야?"
그러나 흑의인은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참다 못한 보초가 들고 있던 창으로 사내를 찌르려 했다.
그러나 그는 흑의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쫘아―!
양단 되어진 보초는 마치 물주머니를 터뜨려 놓은 듯 흥건히 피를 쏟아놓았다.
휙―!
다른 병사 하나는 그 모습에 혼비백산해 미친 듯이 도망쳤다.
흑의인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정 중앙에 자리한 큰 막사를 향해 다가섰다. 그는 마치 자로 잰 듯 일정한 발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가 막사 앞에 서자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라."
흑의인은 서슴없이 막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막사 안, 정 중앙에는 한 사내가 의자에 앉아 있었고, 의자의 옆에는 검이 비스듬히 걸쳐 있었다.
"넌 누구냐?"
중앙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네놈이구나."
그런데 흑의인은 의자에 앉아 있는 사내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게 아닌가?
"묵천!"
의자에 앉아 있던 묵천은 흠칫했다.
"나를 아는 네놈은 누군가?"
그러다 뭔가가 생각난 듯 흠칫 놀라며 눈을 부릅떴다.
"그럼 네놈은 백천우?"
"그렇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했던가?"
백천우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천을 걷어내 버렸다. 그러자 반쯤 일그러진 얼굴이 드러났다. 마치 지옥에서 금방 올라온 악귀와도 같았다.
"재미있는 놈이군. 아직까지도 살아있다니. 누루하치는 어디 있는가?"
묵천은 고개를 저었다.
"너는 그를 찾을 필요가 없어."
"히히히히히......!"
백천우는 미친 듯이 웃었다. 마치 즐거워 미치겠다는 듯이 웃어대고 있었다.
"네놈을 보니 즐겁군. 그래 누루하치는 중요하지 않아. 그럼, 그렇지. 네놈을 죽이고 나서 그놈을 죽이면 될 테니까."
그의 모습은 진정 광인의 그것이었다.
"난 오늘 네놈을 죽일 것이고, 그것으로 내 약속도 끝이 난다. 그리고 내 원한도 끝이 나는 것이겠지."
"그래, 그래! 네놈은 자신이 있는 모양이지?"
묵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아주 좋아."
미친 듯 웃던 백천우가 갑자기 발검을 했다. 그의 도에는 진기가 모여있었다.
찌이익―!
그로 인해 단순히 발검의 동작을 취했음에도 막사는 찢겨져 나갔다.
묵천 역시 검을 집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너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었지."
"대단한 자신감이구나. 그 동안 무공이 많이 늘은 모양이군."
묵천은 백천우를 노려보았다. 묵천의 머리에는 자신의 품에서 죽어간 사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늘 궁금했다."
"뭔가?"
묵천은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그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왜 사부를 암습했는가?"
백천우는 웃었다. 비웃음인지, 아니면 자조의 웃음인지 모를 묘한 분위기가 풍겼다.
"난, 고아다. 그러나 너와는 다르지. 넌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부모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 그들은 버러지 같은 존재였다. 하인이었거든? 그들이 죽은 이유는 간단했다. 주인의 독자에게 화상을 입혔다는 것이었다. 단지 실수로 손에 화상을 입혔던 나의 부모들은 모진 매를 밤새 맞고 죽었다. 나는 어리다는 이유로 그렇게 맞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 부모가 그들에게 죽도록 맞는 것을 봐야만 했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부자는 나의 손에 검을 쥐어주었다. 부모를 죽이면 살려주겠다는 거였지. 난 그들을 죽였다. 관부에서는 은자 몇 푼에 그들이 병사했다고 기록했고 난 그곳을 도망쳐 나왔다."
백천우의 눈은 몽롱해져 있었다. 그는 마치 회상을 하며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나는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지. 그렇다면 최소한 그토록 허무하게 죽는 일은 없을 테니 말이야. 그러다 사부를 만났지. 그는 나에게 힘을 줄 수 있다고 했어. 그래서 그를 따라갔던 것이다."
잠시 말이 끊겼다. 묘한 정적이 흐르고 백천우의 눈에는 이슬이 번져있었다. 붉게 충혈된 그의 눈은 묵천을 향했다. 몹시도 도전적인 눈빛이었다.
"나는 억울했다. 왜 나의 부모가 그들에게 죽어야 했는가? 게다가 내 손으로 그들을 죽여야 했단 말이다. 나는 몹시도 억울했다. 복수를 하고 싶었지. 그러나 사부는 나의 그런 점을 알아주지 않았어. 그저 선(善)이니 도(道)를 들먹이며 나를 회유하려 했지. 그때 나에게 누군가가 찾아왔다. 그가 누구인지는 나도 몰라. 그러나 그는 나에게 힘과 권력을 주겠다고 했어. 그래서 나는 그자를 위해 사부를 암습했다."
백천우는 한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나 역시 좋은 기분은 아니었으니까. 사부를 죽이는 것이....... 하지만 그후 나는 마음 깊은 곳에 악마가 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 무엇이 잘되고 잘못 되었는가?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다. 나는 그 따위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단지 난 날 위해서만 살 뿐이니."
백천우는 살광이 일렁거리는 눈으로 묵천을 쳐다봤다. 검에서는 푸른 살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받아라. 네놈도 사부의 곁으로 보내주마."
파악―!
도가 움직였다. 본시 도는 무거운 것으로 날렵한 검과는 달리 속도[閃]보다는 그 중량(重量)과 힘[力]을 위주로 공격을 펼친다.
그러나 그의 도는 빠르기가 섬전과 같았다.
묵천은 미처 막을 틈도 없었다.
촤앙―!
묵천의 몸은 그 충격에 삼여 장을 밀려났다.
"내 도를 막으려 하지 마라. 이미 나는 무게에 연연하지 않는다. 백이십 근의 이 도도 나에게 깃털과 같은 것이다. 네놈은 빠름이 위주였지. 게다가 이제는 내공을 익힐 수 있는 지경이 아니니 더욱 빠름에 매달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빠름 역시 내공이 뒷받침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다."
묵천은 시종 말이 없었다.
"왜 죽음이 두려운가? 너는 이제 나를 뛰어 넘을 수 없다. 이 세상에서는 내가 최고다. 아는가? 강자만이 느낄 수 있는 이 자유를!"
"아니다. 그것이 무공의 극은 아니다......."
백천우는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하하―!"
그의 웃음만으로도 막사는 갈기갈기 찢어져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고, 주변의 막사들 역시 태반이 넘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주변에 병사나 무사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 넓은 진영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무공의 극, 나는 마교의 무공을 얻었다. 나의 내공은 사 갑자 이상이 되었다. 네가 감히 막을 수 있다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다. 진정한 무적(無敵)은 인자(仁者)다. 용자(勇者)가 아니다. 힘이 중요하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공(空)이다."
백천우는 몹시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너무 두려워 정신이 돈 것인가? 미쳤다. 넌 미쳤어! 아무것도 없는 것이 뭐가 두려운가? 그렇다면 칼을 든 강도보다 아무것도 없는 샌님이 더 무섭겠구나."
묵천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유한 것이 강함을 다스린다. 이것은 진리다."
슝―! 쓩―!
백천우는 넘실거리는 도기를 뿌리며 도를 휘둘렀다.
"크윽―!"
묵천은 그 기세에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감히 나의 도기도 이기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가?"
백천우는 비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이미 묵천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언제라도 눌러 죽일 수 있는 벌레를 두려워하는 자는 없는 법이잖는가!
백천우는 도를 들어 묵천의 목을 겨눴다.
"너는 내 사제였다. 그 예우로 최고의 무공으로 네놈을 죽여주지. 고통은 없을 것이다."
묵천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제 웃을 수 있었다. 사부의 말씀이 생각났다.
'거목보다는 갈대가 되거라. 너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묵천은 백천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전신이 혈광으로 파묻혀 있었다. 그의 도 역시 혈광에 둘러싸여 있었다. 극도로 공력을 끌어올린 모양이었다.
"가라. 세상을 원망하라."
도에서 넘실거리는 혈광은 금방이라도 묵천을 향해 날아올 듯 보였다.
"혈광파천(血光破天), 뇌공무하(雷功無下)!"
붉은 혈광이 깊은 골을 파며 묵천에게 다가섰다.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묵천의 몸을 덮치려는 찰라, 묵천은 중얼거렸다.
"나는 바람이다. 나는 갈대가 될 것이다. 그대는 모른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의 무서움을!"
콰앙―!
천지가 진동을 했고, 그 여파에 거석과 나무들이 그 형태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오십 장 넓이로 먼지가 뒤덮었다.
휘잉―!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그 먼지가 걷히자 드러난 것은 폐허였다. 묵천이 서 있던 자리는 넓은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그러나 묵천은 그 옆에 단정하게 서 있었다.
"어떻게?"
백천우의 눈은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바람에 순응하는 갈대가 되는 것뿐이다. 그대가 나에게 어떤 공격을 해도 나를 쓰러뜨릴 수는 없다. 그대가 아무리 바르게 나를 잡으려 해도 허공을 나는 나비는 유유하게 피하는 법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개 같은 일이! 아니다. 혈광파천(血光破天) 섬전진천하(閃電震天下). 이보다 빠를 순 없다. 죽어라!"
콰앙―!
기묘한 일이었다. 마치 벼락이 천공을 강타하고 지면에 떨어지듯 무서운 속도였다.
그러나 그 속도로도 묵천을 잡을 순 없었다.
그는 무엇을 익혔는가? 어떤 무공을 익혔기에 이토록 기묘한 신법을 구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로 묵천이 구사하는 신법은 강호 하류의 신법이라 할 수 있는 영광도영(靈光道影), 부영유혼(浮影幼魂) 등 이름만 그럴싸한 삼류 신법이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마치 바람 앞의 새털처럼 그의 공세가 미치면 자연스럽게 몸을 띄워 그 공세를 타고 물러서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힘이나 진기 소모를 하지 않았다.
묵천은 백천우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아직 깨닫지 않았는가?"
백천우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그렇지 않다. 이건. 우아아아악―!"
그것은 광인의 모습이었다. 힘의 노예가 된 그에게는 너무도 참을 수 없는 모욕이자 분노였다.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 사실은 쓰레기였다는 것이 밝혀진 자의 기분이랄까?
백천우는 혼란과 함께 분노에 휩싸였다.
묵천은 검을 고쳐 잡았다.
"이제 끝내야 하겠지. 이젠 끝날 시간이야. 백천우, 받아라!"
묵천은 무서운 속도로 달렸다.
아마 이 세상에 그 어떤 천리마를 타고 달려도 지금 그를 따라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미친, 같이 죽기라도 하겠다!"
백천우의 죽음을 도외시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혈광파천(血光破天) 벽력뇌(霹靂雷)! 이 세상에 뇌(雷)보다 강한 것은 없다."
둘의 힘이 부딪쳤고, 천지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진동했다. 풀썩 일었던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았고 두 사람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러났다.
'난 옳았다.'
백천우는 마지막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묵천의 검은 백천우의 목을 관통해 목뒤로 삐죽 나와 있었다.
쩌억―!
소리와 함께 백천우의 머리는 양단 되어 버렸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나 묵천 역시 멀쩡하지는 않았다.
백천우의 도가 묵천의 왼쪽 어깨를 반쯤 베어내고 있었다. 묵천 역시 그 자리에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하늘에서는 한두 개의 눈방울이 떨어져 내리더니 이내 함박눈이 되어버렸다.
* * *
신예원은 희야가 쓸 모자를 털실로 짜고 있었다. 이때 누군가가 허겁지겁 들어오는 것이었다.
"궁주, 그가 눈을 떴습니다."
들어 온 자는 의원이었다.
'그가 눈을 떴다고?'
신예원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가슴은 무서울 정도로 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신예원은 불과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마치 십 리를 걷는 것 같았다.
타다다닥―!
그녀는 계단을 뛰듯 내려갔다.
치렁치렁한 옷을 입은 그녀를 뒤쫓는 귀모는 그녀가 그러다 계단에서 구를까 걱정이었다.
콰앙―!
문이 부서질 듯 열리고 신예원은 안으로 달려들었다.
사내는 하얀 천으로 만들어진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의 전신은 진물로 얼룩진 천으로 감싸여 있었다.
둘의 눈이 마주 쳤다.
"아―!"
신예원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터뜨렸다.
'그다. 그 슬픈 듯 보이는 눈빛. 어머니의 눈을 닮았던 그 눈빛. 그래서 이이를 보는 순간 그렇게 가슴이 답답했던 거야. 아!'
둘은 말이 없었다. 단지 방안에는 질식할 것 같은 침묵만이 흘렀다.
"괘, 괜찮아요?"
신예원은 그 동안 그를 만나면 말해야겠다고 생각한 여러 가지 말들 중 가장 형편없는 말을 꺼냈다.
사마적은 그녀를 한참동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두 사람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사막에는 겨울에 비가 내린다. 그 비는 일시지간이지만 사막에 잠들어 있던 생물들을 깨운다.
쏴아아―!
열흘, 비가 내리고 있고 사마적은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미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예전의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일이면 중원은 새해를 맞는 설이다.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폭죽을 터뜨리며 즐거워하고 가족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며 명승고적을 찾아다닐 것이다.
그는 눈을 감았다.
누군가 그의 등을 살며시 짚었다. 그는 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누군지 알았다.
신예원, 그녀는 지난 백 일간 그를 극진히 돌봤다.
썩어 들어가는 상처를 도려내고, 곪아터진 것을 닦았다.
상처를 감싼 천을 갈았고, 움직이지 못하는 그의 대변을 손수 받아냈다.
귀모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시녀를 시키지 않았고, 그녀가 모두 손수 해결했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 무언가를 얘기하며 늘 웃는 모습이었다. 조금이라도 사마적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사마적이 그녀에게 찾아 온 것은 자신이 저지른 일을 조금이라도 속죄하려는 이유였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녀에게 위로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이것을 사람들은 사랑이라 하는가?'
하지만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간신히 이어가고 있었다. 이제야 사랑이란 것을 알아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세상에 미련을 남기긴 싫은데.......'
사마적은 멀리 중원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쏴아아아아―!
겨울을 알리는 빗줄기는 더욱 거세어져만 갔다.
제22장 전신전설(戰神前說)
"그해 겨울이 가기 전 그는 죽었습니다. 그는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품
에 안겨 죽었으니 말입니다."
청년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였다.
두두두두두―! 히히히힝―!
말소리와 마차소리가 들리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삐걱―!
잠시 후, 문이 열리면 일단의 무사들이 갑의(甲衣)를 걸친 채 들어섰다.
그들은 황군(皇軍)이었다. 사십여 명의 무사들이 객점을 둘러쌌다. 모두들 갑작스러운 일에 놀람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태상황 전하가 납신다. 모두들 예를 갖추라."
무사 하나가 들어와 외쳤다. 그러나 그 말을 귀기울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관부와 무림은 서로를 경시하는 풍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태상황이 나서는 것을 보고도 누구하나 예를 표하는 자가 없었다.
"이자들이!"
그 무사가 검을 뽑으려는 찰라, 누군가 말리는 손이 있었다.
"그만 두거라."
"폐하―!"
"이들은 원래 구속되는 것을 싫어하는 자들,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내는 칠순을 바라보는 사내였다.
황금빛의 비단옷을 입고 호화로운 모자와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태상황은 완고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안에 들어서자마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인은 태상황이라는 말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 궁벽한 시골에서 관리라고 해봐야 포청의 포쾌가 전부였다. 그런데 듣지도 보지도 못한 황제가 이곳에 등장하다니!
아마 태상황이란 지위가 얼마나 지고지순한지 계산하느라 바쁠 것이다. 그의 심장이 용케 버티고 있기는 했지만 아마도 마비 직전일 것이었다.
태상황은 품에서 서찰 하나를 들어 보였다.
"나에게 이 서찰을 보낸 자가 누구인가?"
이때 청년이 몸을 일으켰다.
"제가 보냈습니다."
"호!"
태상황은 너무도 젊은 자이기에 약간은 놀라는 듯 했다.
"자네가 이 서찰을 보낸 것이 맞는가?"
"예."
"나를 알고 있었는가?"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랬군. 모두들 내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을 터인데....... 균아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가?"
"아직은 모를 것입니다."
"아직은......이라."
"그 역시 이곳으로 오고 있을 것입니다."
"음!"
태상황은 무사 하나가 끌어내 주는 의자에 앉았다. 청년과 태상황은 마주 앉아 있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의외의 인물이 등장하자 모두들 놀라는 눈치였다.
"아니 자네는 우리에게 이, 흠!"
중추신개는 헛기침을 하며 태상황을 힐끗 쳐다보았다.
"달대대사에게 죽은 것으로 말하지 않았나?"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싱긋이 웃었다.
"제가 전모를 말해드리겠습니다. 잠시 후에 말입니다."
시간이 흘렀다.
모두들 눈을 굴리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얼마나 지났을까?
창으로 밝은 햇빛이 들었다.
이때였다.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응? 뭐가 말인가?"
휘익―!
높고 가는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들렸다 싶은 순간 그 휘파람 소리는 점차 가까워지더니 문 앞까지 순식간에 이르렀다.
문이 열리고 세 사나이가 들어섰다.
세 사나이는 무복을 걸치고 있었으며, 모두 검을 등에 지고 있었다.
"이제야 모든 사건의 등장 인물들이 등장한 것 같습니다."
"그, 그게 무슨 얘긴가?"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전부 진실입니다. 모두가 말입니다."
청년은 그렇게 말하고 잠시 헛기침을 했다.
"험! 그런 사건의 전모에 대해서 말하기 이전 여러분들에게 소개 시켜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방금 도착하신 황제 폐하이십니다. 물론 지금은 숭정제(崇禎帝)께서 황제의 위에 올라 가셨지만, 실질적인 황제는 저분이십니다."
그러면서 복면을 한 세 사나이를 가리켰다. 중앙에 서 있던 사내가 복면을 벗자 오십 전후의 사내가 얼굴을 드러냈다.
"그대는 누군가?"
그러나 청년은 황제의 말을 못들은 것인지, 아니면 듣고도 듣지 않은 척한 것인지, 자신의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곳에는 무황 남태천이 나와 계십니다."
청년은 남궁선 뒤에 단정히 서 있는 표옥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표옥자는 굳은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인피면구를 떼어냈다.
그러자 추정호가 앞으로 나와 남태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추정호는 남태천의 제자였던 것이다.
아까 있었던 무산사괴와의 싸움도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 뿐이었다.
"참고로 표옥자는 벌써 십여 년 전 누구에겐가 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분이 달대대사입니다. 진노 선배님."
"하하하......!"
중추신개는 미친 듯이 대소를 터뜨렸다. 모두들 그를 바라보았다. 중추신개는 자신의 얼굴을 쥐어뜯었다. 그러자 면구 뒤에 숨겨진 얼굴이 드러났다.
감겨 보이지 않는 눈, 주물러 놓은 듯한 얼굴, 뭉툭한 입술, 어떻게 면구로 가려 놓았는지 신기할 정도로 특이한 얼굴이었다.
중추신개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상황에게 배례를 했다.
"황상. 오랜만이시오. 그 동안 신수가 훤해지신 것 같습니다."
그러자 태상황은 밝은 얼굴로 그를 맞았다.
"그 동안 잘 지내셨는가?"
둘은 마치 친구처럼 다정히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런 태상황을 증오의 눈길로 바라보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주익균이었다.
"당신은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태상황은 고개를 저었다.
"균아야! 그 동안 잘 있었느냐?"
"닥치시오. 당신은 죽은 자요. 나에게 아들임을 강요할 수 없소이다."
태상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태상황의 눈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몽롱해졌다. 회한이 가득 담긴 눈이었다.
"모두 내가 지은 업인 것을, 누구를 탓하겠는가?"
청년은 그들 사이에 끼어 들었다.
"그럼 사건의 전말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 모든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사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당시 한 문사의 억울한 사연에서 시작합니다. 그는 억울한 이유로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녀를 모두 잃게 되었습니다."
"그 문천 우문성을 말하는 것인가?"
남태천이 말했다.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전신의 전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사건은 이렇습니다. 우문성은 자신의 가족을 해한 자들에게 복수를 꿈꿉니다. 그래서 우선 천하를 주유하며 무공비급을 모으고 자신의 지식을 이용해 황금을 모읍니다. 그리고는 그 금력으로 천하의 모든 정보들을 사들인 것입니다. 또한 아무도 모르는 세력을 만들어내어 자신의 주구로 이용했지요. 그리고 그는 하나의 계획에 착수했습니다. 그 계획에는 몇 명의 인물들이 필요했지요. 그렇게 해서 그의 손에 걸린 사람들이 바로 사마천인과 남태천, 그리고 총령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상처와 야심을 이용해 적의 칼로 적을 죽이는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 만천과해지계(瞞天過海之計)를 적당히 섞어 계략을 하나 만들어 냈습니다. 바로 무림말살지계(武林抹殺之計)입니다."
청년은 그렇게 말하며 주위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모두들 제각각의 얼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우선 남태천을 통해 증오심을 키우기 위해 무공 비급을 전하기도 하고, 그의 어머니를 죽임과 동시에 그가 좋아하는 소녀를 비참하게 만들어 가장 처절한 비극을 맛보게 해준 것입니다. 남태천의 외숙에게 미혼약을 먹여 두 사람이 관계를 갖게 했고 그 상황을 남태천에게 보게 하였습니다."
청년은 남태천을 바라보았다. 남태천은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후 외숙은 자신이 시비를 건드렸다는 수치심에 그 시비를 팔아버린 것입니다. 그로 인해 남태천은 맹목적인 적의를 갖게 되었지요. 그후 비극이 일어나고 그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모두 우문성이라는 사람에 의해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콰앙―!
남태천이 분개하여 탁자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싸늘하게 물었다.
"무슨 근거인가?"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잠시만 참아주십시오. 그리고 총령을 자신의 수족을 만들어 여러분이 알다시피 남태천과의 경쟁을 유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철저히 총령을 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문성이 계획한 일 단계의 계략이 성공하게 된 것이죠."
이때 태상황이 끄덕였다.
"그후 그가 황궁을 넘보게 된 것이군."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그가 황궁에 눈길을 돌린 것인가?"
태상황이 청년에게 물었다.
"그건 간단합니다. 그가 황궁에 눈길을 돌린 것은 마지막 한 수를 만들어놓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건 막북과 빙궁 그리고 동영 등을 자극해 전쟁과 혼란을 조장하고자 하는 목적에서였습니다. 그로 인해 당금 중원을 혼란에 빠뜨리고 명을 쇠퇴시키기 위한 것이었죠."
"그런데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왜 홍화객을 등장시킨 것이지요?"
남궁선이 물었다. 청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바로 남태천과 총령 사이의 알력을 조금 조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수탑의 후예를 스스로 키운 것입니다. 그리고 한 여인을 교묘히 희생시켜 그로 하여금 남태천과 총령을 상대하게 해서, 중원 내에서의 힘의 견제를 해왔던 것입니다."
모두들 말이 없었다. 하지만 청년의 말이 끝날 때마다 그들의 얼굴에는 경악이라는 말이 옳을 정도의 표정이 어렸다.
"그리고 그들의 힘에 불균형을 주어 무너뜨리는 역할은 백천우라는 자를 이용했던 것입니다. 이는 모두 한 천재의 간악한 계획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후 우문성은 바로 전신의 전설을 찾았습니다. 이 모든 계략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도 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황제는 태상황을 힐끗 쳐다보더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럼 우린 모두 그자의 손에 놀아난 것인가?"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태상황이 죽음을 가장해야 했던 이유는?"
주익균은 청년에게 말했지만 사실은 태상황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청년은 달대대사를 바라보았다. 태상황은 눈을 감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달대대사가 대답을 했다.
"바로 자네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기 위해서였지. 실지로 황상과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그는 죽음을 가장해 시골에 작은 암자를 지어 은둔해 있었던 것이네."
"그런데 왜 나타난 것입니까?"
황제는 따지듯 태상황에게 물었다.
"저 청년의 서신을 받았다. 그는 이 모든 사건을 적으며 명의 미래를 위해 꼭 나서야만 한다고 했다. 이곳은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 위에 할아버지가 피땀을 흘려 이룩한 나라이다. 그런데 내 대에서 무너뜨릴 수는 없다. 그대에게 묻겠다."
태상황은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는 전신의 힘을 얻었는가?"
청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는?"
"제 이야기들은 이곳에 묻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기억으로 모두 끝이 나야 합니다. 누구에게도 전해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궁벽한 산골을 택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우문성이란 자는 어디 있는가?"
청년은 구석에 앉아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주인을 가리켰다.
"저자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몰렸다. 하지만 모두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저자를 죽일 이유가 있습니다. 모두 말입니다. 그리고 저자 역시 우리의 목을 베려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이때였다. 밖에서 누군가가 걸어 들어왔다.
"당신이었군."
그 사내는 휘장이 걸린 검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가 나타나자마자 쌍마령이 그의 앞으로 달려가 부복을 했다. 이 사내가 바로 쌍마령을 키운 자였던 것이다.
"총령."
남태천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살아있었구나."
"그럼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줄 알았나? 난 단지 저자를 불러내기 위해 시간을 끈 것 뿐이야. 그런데 이십 년이라는 시간이 걸릴 줄은 나도 미처 몰랐지."
남태천과 총령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을 때, 청년은 고개를 주인에게로 고정시키고 있었다.
"이제 그만 정체를 드러내시지."
"후후후후......."
주인은 음산히 웃으며 자신의 인피면구를 벗었다.
"그래, 다들 모였군."
"우문성!"
청년이 외쳤다.
"네놈이 이곳에 나타날 줄 알았다."
청년을 바라본 우문성은 놀리듯 물었다.
"그런데, 자네는 나를 어떻게 알았는가?"
"후! 나는 당신의 손을 봤다. 당신의 손은 숯이 묻어 있지만 엄지와 검지 사이에 굳은살이 있었다. 그리고 이 젖은 나무 바닥을 딛는 데도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더군. 그리고 내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오직 당신 하나뿐이었어. 당신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얘기거든. 그렇지 않은가?"
"그랬지. 지루하더군."
태상황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왜 당신은 그런 일들을 벌인 것이오?"
이곳에 있는 누구라도 하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우문성은 웃고 있었다. 그의 눈은 특이하게 흰자가 없었다. 검은자만으로 이루어진 눈을 하고 있었다.
"권력은 인간을 병들게 하고 인간은 타락했지. 그래서 나는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없애고 세상을 정화하려 한 거지. 신 인류를 만들어 모든 것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말이야."
"미친!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우문성은 자신 만만하게 소리쳤다.
"가능하다. 그것은 본좌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광오하구나!"
"아니 나의 능력이면 이 세상의 모든 타락한 자들을 사라지게 할 수 있지. 그 첫 번째가 바로 너희가 될 것이다. 지금껏 나는 내 스스로는 피를 보려하지 않았다. 나의 마성이 폭발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대들은 죽어야 한다. 그후 나는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이때 총령이 나섰다.
"전신의 능력을 얻은 네놈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지만 네놈을 없애주겠다. 던져라!"
와장창!
이때 밖에서 창을 부수고 무언가가 날아왔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닌 십여 개에 달했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폭뇌화(爆雷火)다!"
폭뇌화.
이 작은 구슬만한 폭약 한 알이면, 십 장의 지면이 모두 타버린다. 한 시진동안 꺼지지 않은 지옥의 불길로 그 위력은 상상 이상이다.
만든 자는 알려져 있진 않지만 그 위력만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전설의 병기(兵器)이다.
콰콰콰콰쾅―!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누군가의 외침 소리와 함께 모두들 빠져 나와 있었다.
총령이 외쳤다.
"그자는 죽었는가?"
모두들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저기!"
불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우문성이었다.
그 엄청난 화염 속에서도 그는 털끝 하나 그을리지 않았다.
"후후후! 우습군. 나를 그따위 어린애 장난감으로 죽이려 했다니. 나는 전신 따위와는 다르다. 그자는 마음이 약했어. 그러나 난 다르다. 마음을 죽였다. 이제 너희들에게 장송곡(葬送曲)을 들려주겠다."
"휘익―!"
총령이 휘파람을 불자 포진해 있던 삼백 명의 무사들과 쌍마령이 포진했다.
"휘익―!"
이번엔 남태천이 또다시 휘파람을 불자 소림의 승려들이 포진해 섰다.
모두 백팔 명으로 그들은 우문성을 중심으로 그 유명한 백팔나한진이 펼쳐졌다.
"나는 네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가소로운 것들!"
스륵―!
우문성이 움직였다. 아니 흐릿한 그림자가 잠시지간 스쳤고, 우문성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니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크윽―!"
"컥!"
순식간에 삼십여 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쳐라!"
백팔나한진이 발동을 했다. 천 년의 역사를 두고 단 한번도 무너지지 않았던 중원사상 최고의 진이었다.
"용등천리(龍騰千里) 해운망망(海雲茫茫)."
백팔 명이 하나같이 기합을 넣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해처럼 부딪쳐 우문성을 가두려는 찰라였다.
"좋다. 어디 부딪쳐 보자."
백팔 명과 한 사람의 충돌이 일어났다. 그러나 결과는 소림의 패배였다.
소림의 대부분의 승들은 중상을 입고 나가 떨어져 있거나, 아니면 죽음을 면치 못했는데 반해 우문성은 겨우 내상을 조금 입은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크흐흐......."
우문성은 웃고 있었다. 남태천이 소리쳤다.
"모두 함께 덤빕시다."
절망적이었다.
"대단하다. 진정 대단해."
서로 원수였던 남태천과 총령, 남궁선, 쌍마령의 휘지와 휘소에 황제와 태상황, 그리고 달대도 나섰다.
"적이 내상을 회복하기 전에 공격합시다."
"삼비박룡(三臂博龍)!"
"천풍지뢰(天風地雷)!"
"뇌화요진(雷火搖振)!"
모두들 자신의 최상의 절기를 사용해 우문성의 요혈 등을 공격해갔다.
그러나 두 손으로 대해(大海)를 담을 수 있으며, 숟가락으로 태산을 옮길 수 있겠는가?
쩌억―!
총령과 쌍마령은 마치 비단 천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양단 되어 날아가 버렸다.
"크윽―!"
"커억......!"
그들에게는 불가항력이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다른 자들은 모두 중상을 입은 채 나뒹굴었다.
"모두 죽인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과 싸웠음에도 우문성은 호흡이 흐트러짐조차 없었다. 그는 가장 가까이 쓰러져 있는 남궁선에게 다가갔다.
"가랑이를 찢어주마. 계집!"
남궁선은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우문성은 그녀의 발목을 잡고 거꾸로 들었다. 그의 말대로 그녀를 찢어 죽이려는 것 같았다.
"캬아악!"
그녀는 어느새 혼절해 버렸고,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때였다.
"잠깐!"
청년과 흑의인이었다. 흑의인은 청년의 옆에 앉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바로 그자였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이 둘이 나서는 것이었다.
"한 사나이가 있었다."
갑작스런 말에 우문성은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은 그런 우문성을 향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가 되기로 했었지.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공을 찾아 세상을 떠돌았고, 그대와 같은 장소에 들게 되었다네. 그래서 혈마(血魔)의 무공을 배우게 되었지. 천하제일이 된 그는 살성이 되어 세상을 누볐고, 그를 당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죽인 자들을 돌아보다 깨달음을 얻었다.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은거에 들어갔지......."
우문성의 눈은 검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차갑고 투명하게 보이는 눈이었다.
"그리고 그는 또 다시 나타날 자신 같은 사람을 위해 무공을 창안했지. 그가 바로 전신이오!"
"넌, 누구냐?"
"난 사마희라는 이름을 갖고 있소. 그리고 이 사람은 묵천이란 이름을 갖고 있지."
청년이 이름을 밝히자 검은천의 여인들이 그의 뒤에 가서 포진을 했다. 그녀들은 신천궁에서 나온 여자들이었던 것이다.
순간 우문성의 아미가 좁혀졌다.
"너는 사마적의 아들이냐?"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재미있군. 나를 막겠다는 것이냐? 그래서 네놈이 전신이란 자의 무공이라도 이었다는 말투로구나."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좋다. 오늘 통쾌하게 붙어보자."
우문성은 전신의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전신 모공에서는 묵광이 뿜어져 나와 전신을 휘감았다.
산 전체가 미친 듯이 몸을 떨었다.
우르릉―!
우문성이 움직이 자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렸다.
"세상을 끝내주마. 살아있는 인간들은 본좌를 경배하게 되리라!"
우문성의 외침이 터졌다. 그리고 그의 전신은 검은 구름처럼 변해버렸다.
"이젠 끝낼 때도 된 것 같소."
사마희와 묵천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희미하게 웃고 있는 듯 했다. 그렇게 눈짓을 주고받더니, 두 사람 역시 자신들의 검을 들었다.
그러고는 온몸을 던져, 그 묵광 속으로 맞부딪쳐갔다.
콰앙―! 번쩍―!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렸고, 그 묵광 속에서 섬광과 검음이 울렸다.
그리고 그후 이야기에 대해서는 아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 천 명의 무사로도 막을 수 없는 희대의 마인이 있었고, 그가 세상을 멸망시키려 할 때, 두 명의 협객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막았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왔다.
장강 상류에 자리한 풍뇌촌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전설에 귀기울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전설일 뿐이므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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