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20 소이비도 제2권 황홀한 여체





황홀한 여체



낭천은 많은 음식을 먹어치웠으며 그 속도는 매우 느렸다. 그는 음식을 입으로 가져갈 때마다 천천히 잘게 씹은 후 서서히 삼켰다. 하지만 초류빈처럼 음식을 음미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그는 될 수 있는 한 음식의 양분을 최대한으로 흡수하려고 했던 것이다.

어떤 음식이든 간에 자신의 신체에서 최대의 힘이 되어 줄 것을 희망한 것이며, 오랜 고난의 생활은 그에게 극히 자연스러운 습관을 안겨다 주었고 그로 하여금 음식의 귀중함을 알게 했다. 황야에서의 음식은 항상 그의 마지막 식사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 끼의 식사를 하고 나면 언제 다시 두 번째 식사를 하게 될지 그것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매 끼의 식사 때마다 음식을 조금도 낭비하지 않고 다 섭취하곤 했다.

이 객잔은 그다지 크지가 않았다. 낭천과 설소하는 쉬지 않고 하루를 걸은 후 이곳 객잔에 투숙한 것이다. 때가 너무나 늦어 음식점이 문을 닫아 그들은 방안에서 식사를 해야만 했다.

설소하는 손으로 턱을 고인 채 낭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음식물에 대해서 이렇게 중요시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 다. 그것도 그럴 것이 굶주림을 겪어본 사람만이 음식물의 중요성을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낭천은 마지막 한 알의 쌀까지 완전히 먹어치우고 나서야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만족스러운 탄식을 터뜨렸다.

설소하는 빙그레 웃으면서 물었다.

"배부르게 잡수셨나요?"

낭천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설소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매우 많은 양을 잡수시는군요. 당신이 한 끼 잡수시는 음식이라면 저는 삼 일이라도 다 먹지 못할 거예요."

낭천은 빙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삼 일 동안 식사를 하지 않고도 견딜 수가 있지만 당신은 그렇게 할 수가 있겠소?"

그의 웃음은 눈에서부터 시작되었다가 서서히 그것이 확대되어 마지막으로 입가에 도착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얼어붙은 얼음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과 같았다.

설소하는 그의 이러한 웃음을 바라보면서 넋을 잃고 말았다. 얼마쯤 침묵이 지나자 설소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당신은 한 가지 잊은 것이 있어요."

"잊은 것이 있다니 대체 그것이 무엇이오?"

"당신의 금사갑을 제가 가지고 있어요."

설소하는 이렇게 대답하면서 가지고 온 보따리를 풀어 금사갑을 꺼내 놓자 그것은 눈부신 광채를 발했다.

과연 무림의 인물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탐을 낼 만한 물건이었다.

설소하는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당신의 상처를 보기 위해 이것을 벗길 도리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돌려주는 것을 깜박 잊고 있었어요."

낭천은 금사갑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말했다.

"당신이 가지시오."

설소하의 두 눈에 일순 기쁨의 빛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으면서 입을 떼었다.

"이것은 당신이 천신만고 끝에 얻은 것인데 어찌 가볍게 남에게 넘겨줄 수가 있겠어요?"

낭천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매우 부드럽고 따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며 또 다른 사람에겐 주지 않을 것이오. 다만 당신에게 주는 것이니 받아 두시오."

설소하의 두 눈은 감격과 기쁨의 빛으로 가득차 있었다.

두 사람은 넋을 잃고 서로 마주보았다.

이렇게 서로 뜨겁게 마주보면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설소하는 격동을 못 참아 낭천의 품속으로 와락 파고들어 왔다.

밖에서는 강한 바람이 거세게 몰아닥치고 상 위에 놓인 등잔불도 꺼질 듯이 심하게 흔들렸다. 설소하의 몸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매끄럽고 따스했으며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낭천의 가슴은 더더욱 심하게 뛰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따스하고 감미로운 흥분에 싸인 적이 없었다. 낭천 역시 남자이며 또한 혈기가 왕성한 청년이다. 비록 그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고 배우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는 서서히 고개를 숙여 설소하의 입술을 자신의 입으로 덮었다. 그녀의 입술은 불같이 뜨거웠다.

이 순간 천지간의 모든 것이 아무 의미없이 변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세상의 만물이 사라지고 시간까지도 정지된 듯하였다.

설소하는 전신을 점점 더 강하게 떨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그녀의 떨리는 몸을 따라 낭천의 손은 그녀의 몸 이곳 저곳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여인의 피부는 부드럽고 매끄러웠으며 또 불같이 뜨거웠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어깨 밑으로 늘어지더니 긴 치마도 흘러 내려왔다. 그녀의 길고 흰 다리는 가냘프게 떨리면서 꼭 포개져 있었다. 낭천의 숨소리가 마치 야산의 늑대와 같이 거칠어져 갔다.

희미한 등불 아래 두 사람은 서로의 호흡을 느끼면서 꼭 붙은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설소하는 낭천의 목을 으스러져라 안은 채 향기로운 숨소리를 낭천의 귀에다 뿜어냈다. 그리고 가지런한 치아로 낭천의 귀를 잘근잘근 씹었다.

낭천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하자 그는 전신이 심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십 년 동안 잠자고 있던 본능적인 욕정이 마지막 폭발 단계에 이른 것이다.

누가 먼저인지는 알 수 없으나 두 사람은 한 데 엉킨 채 침상 위에 쓰러졌다. 낭천은 자신을 가장 잘 억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은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단언하지만 이러한 상황하에서 자신을 억제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낭천은 서서히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녀는 태어날 때의 모습 그대로 되었다. 낭천은 그녀의 몸 위에 엎드려 그녀의 전신을 애무하면서 마지막 순간을 향해 동작을 옮겨갔다.

풍만한 그녀의 젖무덤은 낭천의 강한 상체에 눌려 곧 터질 듯했고 희고 고운 두 팔과 두 다리는 낭천의 전신을 뱀과 같이 감았다. 청춘남녀의 거칠은 숨소리와 살과 살이 마찰되는 소리만이 들리면서 두 사람은 하나가 되어 마지막 한 순간을 위해 뜀박질을 해 갔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최후의 순간에 도달하려는 순간 설소하가 갑자기 있는 힘을 다해 낭천을 침상 밑으로 밀어냈다.

낭천은 벌거숭이가 된 채 침상 밑에 떨어져 넋을 잃고 일어날 줄을 몰랐다.

곧이어 설소하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우리는 이래선 안 돼요...이렇게 해선 안 돼요....."

그녀는 상 한 모퉁이에 웅크린 채 이불을 가슴에 안고 눈물을 흘렸다.

"나도 참기가 어려웠어요. 하지만 우리가 지금 만약 참지 못한다면 나중에 꼭 후회할 것이에요...당신은 후에 저를 음탕한 여인으로 여기게 될 것이고요....."

낭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한참 후에야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이 식어 있었다.

설소하가 갑자기 침상 위에서 뛰어내려 오더니 낭천의 다리를 껴안으면서 흐느꼈다.

"부탁이에요. 저를 용서해 주세요...제가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들의 장래를 위한 것이에요."

그녀는 눈물을 뿌리며 간절한 어조로 계속했다.

"우리들은 아직 젊으며 많은 앞날이 있어요....."

그녀의 말에 낭천은 가볍게 탄식을 터뜨렸다.

"당신이 이렇게 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오. 이것은 나의 잘못인데 어찌 당신을 탓하겠소."

설소하는 여전히 흐느끼면서 그의 말을 받았다.

"저는...당신이 지금 매우 견디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당신이...만약에...꼭...꼭 필요하시다면 저는...당신에게 드리겠어요. 언젠가 저는 당신의 것이 될 것이니까요."

낭천은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당신이 견딜 수 있는데 내 어찌 견딜 수가 없겠소. 우리에겐 구만리 같은 앞날이 있지 않소."

이때 깊이 숙여진 설소하의 입가엔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이 거만하고 강인한 청년을 자신이 완전히 사로잡았으며 영원히 자신의 발 밑에 엎드려 있게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낭천은 벌거숭이인 설소하를 안아 침상 위에 눕히고 이불로 그녀를 덮어 주었다. 낭천의 눈에는 설소하가 아름다운 미의 화신으로 보였으며 그녀는 이미 낭천의 몸 일부분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낭천은 떠났다. 설소하는 그가 떠났어도 침상 위에 누운 채 신비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한 남자를 정복할 수 있는 것은 실로 유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 갑자기 창문이 열리면서 차가운 바람이 엄습해 오자 설소하는 상반신을 일으키면서 소리쳐 물었다.

"누구신가요?"

창문이 열리면서 한 공포스러운 얼굴이 창문 앞에 나타났다.

얼굴은 초록색인 듯하면서도 청색을 띠고 있어 마치 귀신과도 같았다.

어두운 밤에 창문 밖에 이러한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면 설사 담이 큰 남자라고 해도 기절초풍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설소하는 태연하게 다시 침상에 누웠다. 그녀는 놀라기는커녕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간드러지게 웃더니 입을 열었다.

"호호호...왔으면 어서 들어오시지 왜 서 있기만 하지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사람은 바람같이 그녀의 침상 앞에 도착했다. 이 나타난 사람의 덩치는 무서울 만큼 크고 얼굴과 목도 매우 길었다. 그의 기다란 목이 흰 헝겊으로 싸여져 있는 것이 마치 이미 죽어 굳어진 시체와도 같았다. 하지만 그의 동작은 매우 민첩했다.

설소하는 누운 채 그의 목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부상을 당하셨나요?"

사나이는 입을 꼭 다문 채 아무 말도 없이 설소하만 내려다 보았다.

설소하는 그 사나이가 아무 말이 없자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초류빈에게 당한 것인가요?"

사나이의 안색이 순간 급변했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설소하는 탄식을 터뜨렸다.

"저는 당신이 그를 죽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도리어 반대가 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요."

나타난 괴인의 얼굴은 더욱 파랗게 변했다.

"내가 그를 죽이려 했다는 것을 네가 어떻게 알았느냐?"

설소하는 그의 물음에 선뜻 대꾸했다

"그것은 그가 구독을 죽였기 때문이지요. 구독은 당신의 제자가 아니에요?"

그녀는 담담하게 웃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은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이상하게 생각하겠지요. 사실 그것은 매우 간단한 것이지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곧이어 말을 계속했다.

"청마 이곡은 생전에 제자를 두지 않았지만 구독은 비단 당신의 공력 신법을 터득했을 뿐만 아니라 청마수까지 얻어내지 않았습니까?"

나타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이곡이었다.

이곡은 충혈된 두 눈으로 설소하를 내려다보더니 한참 후에야 한마디 한마디 분명하게 말했다.

"나도 너를 알고 있다."

설소하는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정말 영웅이군요."

이곡은 다시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구독이 죽을 때 청마수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건 확실히 없었지요."

"그가 청마수를 너에게 주었느냐?"

"글세! 그런 것 같아요."

순간, 이곡의 얼굴엔 은은한 노기가 끓어올랐다.

"그가 만약 청마수를 너에게 주지 않았다면 그가 어떻게 해서 초류빈의 손에 죽었겠느냐?"

설소하는 방긋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당신은 청마수를 제게 주지 않았지만 당신도 초류빈의 손에 당했잖아요."

이곡은 이를 부드득 갈며 갑자기 달려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설소하는 무서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더욱 달콤하게 웃었다.

"호호호...설사 그가 저 때문에 죽었다고 해도 그는 한이 없을 거예요. 그는 매우 가치가 있다고 생각을 했으니까요."

그녀의 활짝 웃는 모습은 마치 만발해 있는 장미꽃과도 같았다.

이곡은 설소하를 내려다보면서 입가에 잔인한 웃음을 띠었다.

"나는 너에게 과연 그러한 가치가 있는지 한번 보아야겠다."

그는 설소하가 덮고 있는 이불을 확 잡아당겼다.

순간 설소하의 요염한 육체가 완전히 드러났다.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과 가냘픈 허리, 그리고 숲이 우거진 삼각지대 등은 어느 한 곳 가린 곳 없이 이곡의 눈앞에 펼쳐졌다.

이곡은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설소하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어때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녀는 두 다리를 벌려 가장 신비스러운 곳을 이곡의 눈앞에 드러냈다.

이곡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힘껏 잡아당겼다.

"으윽....."

설소하는 심한 아픔에 눈물이 나왔지만 눈물이 고인 두 눈엔 일종의 흥분과 갈망의 빛이 내포되어 있었다. 흥분 때문인지 아니면 아픔 때문인지 설소하는 신음과 가쁜 숨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당신은 어째서 제 머리만 잡고 있는 것이지요? 저의 몸은 가치가 없나요?"

이곡은 갑자기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짝!

이어서 그녀의 어깨를 잡더니 있는 힘을 다해 그녀의 몸을 비틀었다.

"윽....."

그러자 설소하의 몸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고통으로 인해 떨리는 것이 아니라 욕구적인 흥분에서 일어나는 경련이었다.

이곡은 그녀의 아랫배를 내리치면서 음험하게 말했다.

"네 이년, 네년은 학대받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설소하는 이곡의 심한 구타에 연신 신음을 토하면서 미친 듯이 소리쳤다.

"어서 때리세요. 어서 저를 죽여 주세요....."

그녀의 음성엔 고통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그 어떤 원시적인 욕구를 갈망하고 있었다.

이곡은 냉랭하게 물었다.

"너는 내가 무섭지 않느냐?"

설소하는 흥분된 음성으로 그의 물음에 대꾸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당신을 무서워하겠어요? 당신은 비록 추하게 생겼지만 남자인 것은 분명하지요."

이곡은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끌어 침상 밑으로 내던졌다. 그리고는 다시 설소하를 끌어올렸다.

설소하는 이곡을 놓칠세라 꼭 껴안으면서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저는 당신이 무섭지 않아요. 저는 당신이 좋아요. 저는 많은 멋진 남자를 상대해 왔으며, 이젠 당신과 같은 남자가 필요해."

이렇게 말한 그녀는 욕정을 갈구하는 눈초리로 이곡을 쳐다보며 다시 입을 놀렸다.

"아니, 뭘 또 기다리세요....."

그녀의 말에 이곡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이곡이 아니고 그 어떠한 남자라 해도 더 이상 기다리진 못할 것이다.

방안에는 가쁜 숨소리만 남았다.

이윽고 이곡은 침상 옆에 서서 옷을 하나하나 주워 입었다. 그리고는 침상에 누워 일종의 정복자만이 가질 수 있는 교만과 만족을 얼굴에 떠올리고 있는 설소하를 내려다보았다.

한참이 지난 후 설소하가 홀연 방긋이 웃으며 물었다.

"이제야 제가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여자라는 걸 아셨어요?"

이곡은 침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정말 죽여야 하는 건데...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네 손에서 희생되어야 할는지 모르겠군."

설소하는 교태로운 몸매를 살짝 뒤척이며 배시시 웃었다.

"당신은 원래 저를 죽이려고 온 사람이었지요?"

이곡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설소하는 아름다운 여자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아양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저를 죽일 수 있나요?"

이곡은 잠시 그녀를 응시하다가 불쑥 물었다.

"너와 함께 온 그놈은 누구지?"

"왜 갑자기 그 사람을 묻는 거죠? 질투가 나서인가요? 아니면 두려워서인가요? 그분은 당신보다 몇 배나 더 착한 분이에요. 그분은 벌써 방을 얻어 멀찌감치 가서 잠을 자고 있어요. 만약 그분이 지금 이 광경을 보았다면 당신은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이곡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가 목격하지 못한 것을 그의 행운이라고 생각해."

설소하는 짐짓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상반신에 매달린 눈같이 흰 유방이 사나이의 관능을 언제라도 자극시킬 것 같았다.

"어머나! 당신은 그분까지 죽이려고 하세요?"

"흥!"

이곡은 대답 대신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설소하는 호들갑스럽게 웃으며,

"호호호...당신은 그를 죽이지 못할 거예요. 그분은 무공이 높을 뿐만 아니라 또 초류빈의 친구예요. 아셨어요? 저도 그분을 좋아하고 있어요."

이곡의 안색이 갑자기 창백하게 변하자 설소하는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며 가만히 웃었다.

"그분은 바로 이 앞 복도로 나가서 맨 끝방에 있어요. 당신은 그분을 찾아갈 용기가 있어요?"

말이 막 끝나는 순간 이곡은 이미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고 있었다.

이런 이곡의 뒷모습을 보며 설소하는 이불 속에서도 당부하기를 잊지 않았다.

"조심하세요. 당신이 목구멍에 일검을 찔리면 그때 가서 큰일을 치를 테니까."

그녀는 깔깔거리고 웃으며 알몸을 이불 속에 파묻었다.

그녀는 기분이 몹시 좋았다. 마치 어린애가 사탕을 훔쳐먹고도 어른에게 들키지 않은 것 같은 승리감도 맛보았다.

한 남자를 정복하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을 그녀는 알고 있었으며, 그것은 바로 하룻밤에 두 남자를 정복하고 그들이 서로 죽이게 하는 일이다.

"그들 중에 누가 강할까?"

이곡의 청마수가 낭천의 목을 내리칠 때를 생각하자 그녀의 눈은 진주알처럼 반짝였다. 또 낭천의 검이 이곡의 목구멍을 찌르는 것을 생각하며 그녀는 전신을 흥분으로 떨었다.

짜릿한 전율이 육체의 쾌락이 절정에 달한 순간처럼 그녀를 엄습해 왔다.

그녀는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쾌락 후의 피곤함에 잠이 들었다. 하지만 설소하는 자면서도 웃었다.

왜냐하면 누가 누구를 죽이든 그녀에게 있어서는 유쾌한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밤 그녀는 이미 충분한 만족을 느낀 것이다.

침상은 푹신푹신하고 이불도 깨끗했으나 낭천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잠을 못 이루는 것이 이토록 무서운 것인 줄은 미처 몰랐다. 예전에 그는 피곤하다고 느끼면 눈길에 쓰러져도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오늘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매우 피곤했으나 그는 아무리 뒤척여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감은 눈의 망막 속에 온통 설소하의 눈부신 자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설소하.

그녀를 생각하자 그는 마음속에서 한 가닥 달콤한 것이 물결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낭천은 그러나 또 자학에 빠져 버렸다. 그는 그녀를 범한 것에 대해 매우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 이후 그는 그녀를 더욱더 잘 대해 주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맹세를 했다. 그건 그녀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깨물어 먹고 싶도록 귀여웠기 때문이다. 아니 귀엽다기보다는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고귀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여자를 만난 자신을 행운아라고 그는 생각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가까스로 잠이 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는 갑자기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대부분의 야수들이 어떤 징조를 느끼면 깜짝 놀라는 것과 같은 낭천의 행동이었다. 그가 막 검을 허리에 차는 순간 창문이 벌컥 열려졌다.

이어 그는 한 쌍의 귀신보다 더 무서운 눈동자가 자기를 노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증오로 가득찬 눈이었다.

이곡은 창문 앞에 버티고 서서 싸늘하게 물었다.

"네놈이 설소하와 같이 온 놈이냐?"

낭천의 대답은 지극히 짤막했다.

"그렇소!"

"그래? 그럼 나오너라!"

창밖은 바로 담장이다. 담과 창문 사이에 세 자 넓이 공간에 낭천과 이곡은 마주서 있었다.

낭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원래가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먼저 입을 여는 예가 없었다

이곡의 두 눈에서 멸시와 증오에 가득찬 신광이 쏟아져 나왔다.

"너를 죽이겠다!"

이곡 역시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단 여섯 글자만 내뱉었을 따름이었다.

낭천은 잠시 침묵을 지키고 나서야 유유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오늘 살인을 하고 싶지 않소. 가시오!"

그러나 이곡의 대답은 한마디로 살기가 감돌았다.

"나도 오늘은 살인을 하고 싶지 않으나 너만은 죽이겠다!"

이렇게 말한 이곡은 다시 비웃음이 담긴 미소를 보냈다.

"너는 설소하와 같이 오는 것이 아니었어."

낭천의 눈에서 칼날 같은 광채가 폭사되어 나왔다.

"또다시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으면 너를 죽일 수밖에 없다!"

"그건 무슨 이유냐?"

"네겐 그녀의 이름을 부를 자격이 없다!"

"하하하...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녀와 잠자리도 같이했다. 어쩔 테냐?"

낭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원래 더할 수 없이 냉정하고 침착하여 이렇게 분노해 본 적이 없었으나 지금 그의 손은 분노로 인하여 떨리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는 검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때 그의 이성은 이미 그의 몸을 완전히 불태워 버리고 말았다.

휘익!

격노한 가운데 그의 장검이 허공을 가르며 찔러나갔다. 같은 순간에 청마수도 번개같이 뻗어나왔다.

쨍그랑!

맑은 금속성과 함께 낭천의 장검은 두 동강이 나서 떨어지고 말았다.

이곡은 싸늘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무공으로 나와 겨루어 보겠다고? 설소하는 너의 무공이 괜찮다고 하던데."

말을 하는 가운데 이곡의 청마수는 이미 십여 초식이나 공격을 하고 있었다.

이 병기는 정말 불가사의할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보기에는 매우 무겁고 둔한 것 같으나 매우 영활하여 나오는 초식 또한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낭천은 거의 막을 겨를이 없었다. 그의 손에는 오직 네 치 길이의 부러진 단검만 있을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신속무비한 걸음걸이로 간신히 피해낼 따름이었다.

이곡은 잠시 손을 멈추더니

"만약 내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을 한다면 내 너를 용서해 주겠다!"

그러나 낭천은 이를 악물고 콧등에서 땀만 흘릴 뿐이었다.

이곡은 청마수로 낭천을 똑바로 가리키며 넌지시 물었다.

"묻겠는데 설소하는 자주 다른 사람과 잠자리를 같이 하느냐? 그리고 너와도 잠자리를 같이 했느냐?"

"이놈!"

낭천은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고는 다시 한번 검을 거세게 찔러 갔으나 흥분한 가운데의 공격은 지극히 무모한 것이었다.

챙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겨우 남았던 반 자루의 단검은 다시 청마수에 의해 날아가 버렸다.

낭천이 쓰러지자 이곡의 청마수가 뒤따라 벽력같이 뻗어왔다.

낭천은 일어날 여지조차도 없어 하는 수 없이 땅바닥에서 뒹굴어 그의 위맹한 공격을 피해냈다.

청마수의 위력은 너무도 크고 위맹한 것이었다.

이곡은 다시 제자리에 버티고 서서 냉랭하게 물었다.

"말해라! 내가 묻는 말에 대답만 하면 너를 살려주겠다."

낭천은 처참하게도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쳤다.

"하겠소! 말하겠소!"

"그래? 으하하하....."

이곡의 입에서 득의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오는 순간, 갑자기 이곡의 눈앞에 검광이 번쩍했다. 이곡은 평생 동안 이토록 빠른 검광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검광을 보았을 때 검은 이미 그의 목구멍으로 들어가 있었다. 이곡의 얼굴엔 엄청난 놀라움으로 인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역력히 떠올랐다.

그는 죽기 전까지만 해도 이 일검이 어떻게 해서 자신의 목구멍으로 찔러들어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꿈에도 그는 이 청년이 그토록 빠른 일검을 격출할 줄은 몰랐다.

낭천은 두 개의 손가락으로 조금 전에 떨어뜨렸던 반 자루의 단검을 이곡의 목구멍에서 조금씩 뽑아내기 시작했다.

이곡의 얼굴 근육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낭천의 시선은 마치 얼음장 같았다. 그는 이곡을 노려보면서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입을 떼었다.

"그녀를 모욕하는 자는 죽는 길밖에 없다!"

이곡의 목구멍에서는 아직도 부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런 그의 눈썹과 눈 그리고 입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건 그가 웃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웃으면서 낭천에게 이런 말을 하려고 했을 것이다.

"언젠가는 너도 그녀의 손에 죽게 될 것이다....."

설소하가 노곤한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는 웬 그림자 하나가 창문 밖에서 서성이는 것을 보고 그가 낭천이라는 것을 알았다.

들어오고 싶지만 그녀가 깰까 봐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설소하는 알고 있었다. 만약 이곡이라면 그는 창밖에서 절대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설소하는 창문에 비치는 그림자를 보며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이곡은 매우 특이한 남자이며 여자를 다루는 솜씨가 능란했다.

그런 남자는 그녀에게 매우 새로운 맛을 주나, 낭천은 그보다 더 재미가 있었다. 그녀는 침상에 누워 유쾌한 기분으로 낭천을 좀더 기다리게 하고 나서 가볍게 불렀다.

"밖에 있는 분은 소천인가요?"

소천(小天), 매우 부드럽고 다정한 애칭이었다.

낭천의 그림자가 창문 밖에 우뚝 멈추어졌다.

"나요."

설소하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들어오시지 않는 거예요?"

낭천은 가만히 문을 열다가 문이 곧 열리는 것을 보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문을 잠그지 않았군요?"

설소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방긋이 웃었다.

"잊었어요. 전 뭐든지 잘 잊어버린답니다."

낭천은 급히 침상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싱싱한 여인의 살내음이 밴 이불이 그의 코를 자극했다. 풋풋한 풀냄새 같기도 한 그녀의 숨결이 낭천의 전신을 감싸는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은 약간 핼쓱했고 또 약간 부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것은 물론 이곡을 만족시켜 주고 또 자신도 만족한 노력의 부산물이다.

낭천은 안색이 약간 변하여 급히 물었다.

"무...무슨 일이 있었소?"

설소하는 쪽 고른 치아를 곱게 내보이며 달콤하게 웃었다.

"전 잠을 잘 자지 못하면 얼굴이 부어요. 어젯밤 밤새도록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해서....."

여기까지 말하던 그녀는 그래도 양심이 남아 있었든지 얼굴을 붉히며 아양을 떨었다.

"아이! 왜 자꾸 뚫어지게 쳐다봐요? 전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당신...당신은 또 엉뚱한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고는 이불을 머리 위까지 푹 뒤집어 쓰는 것이 아닌가!

낭천은 넋을 잃었다. 아니 마음까지도 따라서 녹아 버리는 것 같았다.

설소하는 이불깃을 살짝 걷으며 사나이를 녹여 버릴 듯한 미소를 보냈다.

"당신은...당신은 잘 주무셨어요?"

낭천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소. 웬 미친 개가 내 방 창문 밖에서 마구 짖어대는 바람에 말이오."

설소하는 눈을 깜박이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미친 개라구요?"

"그렇소. 하지만 난 이미 그놈을 죽여 강물에 던져 버리고 말았소."

갑자기 밖에서 땡땡땡 하는 소리가 들려 낭천은 창문을 약간 열어 보았다.

거기에는 점원이 마당에 놓여져 있는 세숫대야를 두들기며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여러 손님들, 여러분들은 요즘 강호를 떠들썩하게 하는 커다란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싶으십니까? 그러시다면 식당으로 오십시오. 거기에는 남쪽에서 오신 손(孫) 노선생께서 정각 오시(午時)에 얘기를 시작합니다. 신선하고 흥미있는 얘깃거리라는 것을 소생이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식사를 하시면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낭천이 창문을 닫으면서 고개를 가로젓자 설소하가 궁금한 듯이 살짝 물었다.

"듣고 싶지 않으세요?"

낭천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생각 없소."

설소하는 눈알을 사르르 굴리며 애교있게 말했다.

"전 가서 듣고 싶어요. 그리고 우리도 점심을 먹어야 하지 않겠어요?"

낭천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저 점원은 장사를 하는 수법이 비상한 것 같소."

설소하는 이불을 들치고 일어나려다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더니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알고보니 그녀는 전신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가 아닌가.

눈이 부실 만큼 황홀한 여체.

그녀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간드러지게 속삭였다.

"몰라요! 당신은 나빠요. 어서 옷이나 집어 줘요."

낭천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가슴은 방망이질을 하는 것처럼 쿵쾅거렸다.

그러자 설소하는 키득키득 웃으며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려요. 절대 훔쳐보면 안 돼요. 아시겠죠?"

강호의 일이란 언제나 흥미진진하여 그 누구도 듣고 싶어하는 것이어서 식당은 거의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꽉 차 있었다.

창문 쪽의 탁상에는 남색의 장삼을 입은 노인이 앉아 눈을 감고 긴 담뱃대를 빨고 있었으며 노인의 옆에는 나이가 어린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유난히 반짝이는 한 쌍의 크고 검은 눈은 한 번 보면 기어코 남자들의 넋을 빼앗을 것 같았다.

낭천과 설소하가 함께 들어서는 순간. 식당에 모인 손님들의 눈은 모두 못이 박힌 듯 그들에게서 움직이지 않았다.

긴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내린 커다란 눈의 낭자도 두 사람을 중심으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설소하도 그 낭자를 바라보더니 살며시 웃으면서 낭천에게 말했다.

"저 여자의 눈 좀 봐요. 이제부턴 제가 당신을 지켜야 되겠어요. 당신이 저 여자에게 홀리면 큰일이니까요."

그들은 자리에 앉아 몇 가지 음식을 주문했다.

이때 남삼의 노인이 담뱃대를 상에다 놓고 입을 열었다.

"홍아야. 이제 시간이 다 되었느냐?"

긴 머리의 낭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되었어요."

노인은 그제야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비록 늙고 바싹 말랐지만 눈만은 젊은이 못지 않게 젊어 정광이 번뜩이는 것이었다. 그가 눈알을 한 번 굴리니 모든 사람들을 다 노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설소하는 또 가볍게 웃으며 속삭였다.

"보아하니 저 손 노선생은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밥이나 얻어먹는 그런 엉터리 영감 같지는 않아요."

그녀의 말소리는 매우 낮았다. 하지만 손 노선생은 마치 그 말을 들은 것처럼 그녀의 얼굴을 쓸어보더니 입가에 한 가닥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머리가 긴 낭자가 뜨거운 차를 한 잔 가지고 와서 상 위에다 놓았다.

노인은 잔의 뚜껑을 열고 잔 속의 차 잎사귀를 불어가며 몇 모금 마시고 나서 갑자기 음성을 높여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매화도는 온갖 나쁜 짓을 하지만 탐화랑은 불우한 이웃을 돕는다!"

이렇게 소리친 그는 주위를 한 번 훑어본 후 다시 힘차게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내가 말한 두 사람이 누군지 아시오?"

그러나 긴 머리의 낭자는 그가 정말로 남에게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가 말을 이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고 길게 땋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입을 열었다.

"그 두 사람이 누군가요? 저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손 노선생은 빙그레 웃으면서 핀잔을 주었다.

"그렇다면 너는 무식한 증거다. 그 두 사람은 정말 유명한 사람이지. 매화도는 수십 년 동안 두 번밖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강호인들이 저지른 사건을 모두 합친다 해도 그 한 사람 것보다 많지 않다."

머리가 긴 낭자는 혀를 차면서 다시 물었다.

"오! 무서운 사람이군요. 그럼 탐화랑은 또 누구인가요?"

손 노선생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사람은 대대로 벼슬에 올라 있는 관가의 공자님이시지. 선대 중에 일곱 분이 진사(進士)에 올랐으나 아깝게도 장원을 하신 분은 없었다. 그러던 중 노탐화는 슬하에 두 공자를 두었다. 그런데 이 두 공자는 머리가 비상하고 재주가 극히 뛰어났단다. 노인네는 모든 희망을 이 두 공자에게 걸었었지. 그들 두 공자 중에서 하나라도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하여 자신의 희망을 이루어 주었으면 하고 바랐었지."

긴 머리의 낭자는 흥미로운 듯이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탐화랑직도 괜찮은데 왜 꼭 장원이 되어야만 했을까요?"

손 노선생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큰 공자는 과거시험에서 낙방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들 부자는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온 정성과 희망을 작은 도령에게 걸었다. 하지만 이 작은 도령 역시 팔자에 타고 났는지 겨우 탐화랑에 합격했다. 노탐화는 너무도 실망한 나머지 그 이듬해를 넘기지 못하고 그만 세상을 떠나 버렸다. 뒤이어 큰아들 초탐화도 불치의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 작은 탐화랑은 상심한 나머지 관직을 버리고 집안의 재산을 모두 정리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웃을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정말 남을 돕는 그의 마음씨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 말한 손 노선생은 또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 무렵, 낭천은 혈관이 팽창되고 매우 흥분된 상태에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초류빈을 칭찬하는 소리를 듣자 자기를 칭찬하는 것보다 더 기뻤기 때문이었다.

손 노선생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 탐화랑은 재주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 어떤 기인에게서 일신에 경세의 무공을 전수받았었다....."

그러자 긴 머리의 낭자가 냉큼 말을 받았다.

"할아버지께서 오늘 말씀하실 얘기가 이 두 사람에 관해서인가요?"

손 노선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다."

긴 머리의 낭자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아이 좋아라. 무척 재미있을 거예요. 그런데...그런데 그 이름 있는 탐화랑이 어떻게 해서 또 악명 높은 매화도와 관련이 되었나요?"

손 노선생의 목소리가 엄숙하게 변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단다."

"어떤 이유죠?"

긴 머리 낭자의 물음에 손 노선생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그건 매화도가 탐화랑이고 탐화랑이 바로 매화도이기 때문이란다.

"으응?"

낭천은 갑자기 노기가 와락 치밀어올라 견딜 수 없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다.

이 순간 긴 머리의 낭자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초탐화께서 자신의 억만금이 되는 재산을 아끼지 않고 모두 이웃을 위해 도와주었다면 틀림없이 돈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일 거예요."

"그렇다면?"

노인의 반문에 긴 머리 낭자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그런 그가 어떻게 남의 물건을 훔치고 약탈하는 매화도가 될 수 있겠어요? 전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요."

손 노선생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일은 네가 믿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도 믿어지지 않아서 특별히 알아보고 오는 중이다."

"소식을 알아보는 데는 할아버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그 속의 자세한 사연을 할아버지는 다 알아내셨겠군요."

"물론이지. 알아내고 말고. 그러나 너무 복잡하고 불가사의하며 또 멋들어진 것이라....."

여기까지 말한 그는 별안간 말을 끊고 눈을 감은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긴 머리 낭자는 매우 초조한 듯이 종알거렸다.

"왜 말씀을 안하세요?"

손 노선생은 담뱃대를 들어 한 모금 길게 들이키더니 그 연기를 콧구멍으로 내뿜으며 여전히 꾸벅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긴 머리 낭자는 입을 삐죽거리며,

"가장 재미있는 곳에서 그만 끊어 버리시니 공연히 사람의 감정만 상하잖아요?"

하더니 갑자기 손뼉을 탁 치면서 호들갑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알았어요. 어르신네는 술을 잡숫고 싶은 모양이로군요."

사실 그녀만 알아차린 게 아니라 다른 여러 사람들도 모두 알았다.

19 소이비도 제2권 사랑과 의리





사랑과 의리



날이 밝아왔다.

초류빈은 인사불성인 채 쓰러져 있는 심미 대사 옆에 앉아 있었고 잠에 빠져 있는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극락동주의 독충들을 모두 매장한 후에 한 시진이나 걸어 작은 고릉에 가 지금 타고 있는 마차를 구입했던 것이다.

마차는 매우 낡았다. 초류빈은 지금 달콤하게 잠자고 있었다.

그것은 극도로 피로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그릇의 두부 국을 마시고 난 초류빈은 이내 노곤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두 눈을 감았던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차가 갑자기 정지했다.

초류빈은 이 순간 눈을 뜨고 급히 창문을 열며 고개를 밖으로 내밀었다. 순간 싸늘한 바람이 그의 안면을 강하게 때려 그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들게 하였다.

마부의 음성이 들려왔다.

"숭산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선 더 이상 갈 수 없으니 나리께선 걸어가시지요."

이 마부는 초류빈에 의해 따스한 이불 속에서부터 끌려나왔고 또 마누라가 이 일을 하라고 바가지를 긁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거기에다 품삯까지 마누라가 먼저 손아귀에 넣었기 때문에 내심 몹시 기분 나빴다. 만약 그렇지만 않았다면 그는 아마 중도에서 마차를 세워 더 이상 가지 못하겠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초류빈은 이러한 마부의 심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지라 군소리 없이 심미 대사를 부축해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은자 몇 푼을 꺼내어 마부의 손에 쥐어 주고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날씨도 추운데 가다가 술이라도 한 잔 사 마시구려. 남자에게 용돈이 없다는 것은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오."

마부는 더할 수 없이 기뻐하면서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마부가 감사의 인사말을 하기도 전에 초류빈은 심미 대사를 부축한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숭산은 온통 눈과 얼음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지가 오래였다.

초류빈은 신법을 전개해 산 위로 달려 올라갔다. 산 밑에는 작은 절간이 하나 있었고 몇 명의 회포승인이 대전에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바람을 피하면서 문 뒤에 서서 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은 누군가가 경공술을 전개해 산 위로 달려 올라오는 것을 보자 급히 마중나오면서 물었다.

"시주께선 어디서 오셨습니까? 혹시....."

그중 한 명이 채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또 한 명의 화상은 초류빈이 화상을 한 명 안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급히 끼여들면서 물었다.

"시주께서 안고 있는 사람은 소림의 제자가 아니오?"

초류빈은 그들의 물음엔 대답하지 않고 갑자기 몸을 날려 두 화상의 머리 위를 지나 계속 산 위로 달려 올라갔다.

이렇게 약 한 시진쯤 지나자 소림사의 웅장한 건축이 눈에 들어왔다. 소림사의 조사(祖師)인 달마승인이 중원에 온 후 이십팔 대가 지나는 동안 소림에선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고 무림 종주의 자리를 굳혀왔다.

높고 붉은 지붕 위엔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고 녹색의 담장은 장성을 방불케 하였다.

초류빈이 산 뒤를 통해 사내로 들어가 보자 거기엔 작고 큰 탑들이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초류빈은 이곳이 바로 소림사의 성지(聖地)인 탑림(塔林)이라는 것을 알았다. 바로 소림 역대 조상의 무덤이기도 하다.

여기에 묻힌 고승들은 살아 생전에 천하에 그 명성을 떨치고 죽은 지금에도 소림 승려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누구든 이곳에만 오면 속세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물며 초류빈은 오래 전부터 험악한 세상을 증오하고 명리와 재력에 대해선 도외시하지 않았던가.

그는 심미 대사를 안은 채 가볍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 갑자기 한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감히 소림의 금지를 침범하다니 시주께선 너무 안하무인격인 것 같소."

초류빈은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심미 대사께서 부상을 당하시어 소생이 여기까지 호송해 온 것이오. 방장 대사를 좀 만나게 해주시오."

일순 경악의 소리가 연이어 들리면서 소림승려들이 분분히 나타나 합장의 예를 취했다.

"고맙습니다. 시주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십니까?"

초류빈은 절로 탄식을 터뜨리면서 대꾸했다.

"소생은 초류빈이라고 하오."

정원은 더할 수 없이 조용했다. 나뭇가지 위에 쌓였던 눈들도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소림사 대나무 숲 깊은 곳에 매우 우아한 선방이 한 채 있었다. 창문을 통해 바라보노라면 두 사람이 마주앉아 장기를 두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의 태도가 어찌나 안정되고 무게가 있었든지 마치 이 조용한 천지가 하나로 융합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왼쪽에 앉아 있는 사람은 깡마른 데다가 왜소한 노인이었다. 하지만 형형한 눈빛과 우뚝 솟은 매부리코는 이 노인을 왜소하다는 느낌에서 벗어나 보는 이로 하여금 비할 데 없는 권위와 위엄을 느끼게 하였다.

이 노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백요생이었다. 천하에서 소림의 장문인인 심호 대사와 나란히 앉아 허심탄회하게 장기를 둘 수 있는 사람은 모르긴 해도 백요생밖에 없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이 장기를 두고 있을 땐 그 어떠한 일이라도 그들의 승부를 중지시킬 수가 없었다. 하지만 초류빈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호 대사가 입을 열어 물었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보고하러 들어왔던 소림의 제자가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사숙님의 방에 계십니다."

심호 대사는 의아해하며 다시 물었다.

"너의 이사숙이 어떻게 되었느냐?"

소림제자는 여전히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사숙께선 중상을 입으셨으며 사사숙과 칠사숙께서 그 어르신네의 상처를 살피고 계십니다."

초류빈은 뒷짐을 진 채 처마 밑에 서서 수없이 밀집해 있는 소림사의 웅장한 건축물들을 바라보았다.

싸늘한 바람소리에 은은한 법창소리가 실려오자 천지가 장엄함과 신비스러움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았다

초류빈은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지 않았다.

심호 대사와 백요생은 초류빈이 서 있는 곳에서 약 십 장쯤 떨어진 곳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심호 대사는 초탐화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눈으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심호 대사는 이 게을러 보이면서도 준수하고, 소홀해 보이면서도 침착한 이 시인 기질을 지닌 방랑객이 바로 그 유명한 강호 낭객인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듯 초류빈을 본 순간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심호 대사는 초류빈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특히 그의 살이라고는 거의 없는 긴 손을 더욱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그의 이 두 손엔 도대체 어떠한 마력이 있는 것일까? 어째서 쇠로 만들어진 극히 평범한 칼이 일단 그의 손에 들어가면 무서운 신기로 변하는 것일까?

백요생은 십 년 전에 초류빈을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십 년이 지난 지금 초류빈이 조금도 변한 데가 없다고 느꼈다.

그렇다. 초류빈은 별로 변한 것이 없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마음이며 십 년 전보다 더욱 침착하고 적막해진 것 같았다. 많은 사람과 같이 있어도 초류빈은 항상 고독해 했다.

백요생은 드디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탐화, 그동안 안녕하셨소?"

초류빈은 서서히 고개를 돌리더니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선생께서 아직 소생을 기억해 주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심호 대사는 합장의 예를 취하면서 말했다.

"탐화랑께선 노승을 아시는지 모르겠구려."

초류빈은 공손히 포권의 예를 취했다.

"소생 비록 견식이 미천하지만 덕망이 높으시고 태산북두로 받들어지고 계신 대사님을 어찌 모르겠습니까...오늘 이렇게 대사를 만나게 되어 무한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심호 대사는 겸허한 표정으로 말했다.

"탐화랑께선 너무 겸손해하지 마십시오. 폐사제를 이곳까지 호송해 주신 것에 대해 심심한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송구스럽습니다."

심호 대사는 재차 합장의 예를 취하면서 말했다.

"노승은 우선 사제의 상처를 살펴본 후에 다시 시주를 찾아오겠습니다."

초류빈이 역시 공수의 예를 취했다.

"장문인께선 어서 가 보십시오."

심호 대사가 안으로 들어가자 백요생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출가한 사람들의 수양이란 과연 비범한 것이구려. 만약 나였더라면 아마 귀하에 대해 이렇게 예의를 갖추어 대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의 말을 듣고 초류빈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오?"

"만약 누군가가 귀하의 사랑하는 제자를 상하게 했다면 귀하는 그 사람에 대해서 예의로써 대할 수가 있겠소?"

초류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선생께선 심미 대사가 나에 의해 상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백요생은 뒷짐을 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말을 내뱉었다.

"초탐화를 제외하고 또 누가 그를 상하게 할 수가 있겠소."

초류빈은 냉랭하게 반문을 하였다.

"만약 내가 그를 상하게 했다면 무엇 때문에 그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겠소?"

"그 점이 바로 귀하의 총명한 점이 아니겠소?"

백요생은 두 눈으로 야릇한 빛을 발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누구든지 소림의 호법을 상하게 하면 영원히 편안하게 살 수가 없소. 소림의 남과 북 두 곳에 있는 삼천 명의 제자는 절대로 그 자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오. 소림 제자들의 힘을 결코 경시해선 안 되는 것이지."

초류빈도 역지 냉랭하게 대꾸했다.

"선생의 말이 맞소."

순간 백요생의 안색이 약간 변하면서 입을 떼었다.

"하지만 귀하는 부상을 당한 심미 사형을 호송해 왔으니 다른 사람들은 비단 그가 귀하의 손에 부상을 당했다고 의심하지 않을 뿐더러 귀하가 매화도라는 것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오. 더구나 귀하는 그를 상하게 한 후 소림제자들에게 감사까지 받으려 하다니 정말 너무나 고명한 수단이오."

그의 말을 다 듣고 난 초류빈은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백요생이라는 사람은 과연 모르는 것이 없군요. 강호의 모든 큰 방파들이 선생의 친구가 되기를 갈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군....."

그는 잠시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비릿한 비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선생과 친구를 맺으면 좋은 점이 매우 많을 것이오."

백요생은 그의 말을 듣고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낭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한 것은 공도(公道)에 의한 것이오."

초류빈은 싸늘한 어조로 내뱉었다.

"하지만 선생은 한 가지 잊은 것이 있소. 심미 대사는 아직 죽지 않았소. 그는 자신이 누구에 의해 상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여기까지 말한 그는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며 말을 계속했다.

"그 때가 되면 선생은 지금까지 한 말을 다시 입 안에 담을 수가 있겠소?"

백요생은 탄식을 터뜨렸다

"만약 나의 짐작이 틀림없다면 심미 사형께선 아마 말할 수 있을 기회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오."

이때 심호 대사의 살기 띤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폐사제가 만약 시주의 손에 상하지 않았다면 누구에 의해 상했단 말이오?"

심호 대사는 어느 새 다시 밖으로 나와 있었고 그의 얼굴은 서릿발과 같이 차가웠다.

초류빈이 말을 받았다.

"대사께선 그가 누구의 독에 의해 중독된 것인지 알아내지 못하였소?"

심호 대사는 그의 물음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노기 띤 음성으로 소리쳤다.

"칠사제!"

소림은 무림의 정종으로써 권법과 장법으로 공력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무림의 인물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다만 수석 일곱 제자 중의 마지막인 심감 대사(心鑑大師)는 도중에 소림에 들어온 사람으로서 소림에 몸을 담기 전엔 칠교서생(七巧書生)이란 외호를 받고 있던 독을 행하는 대가였다.

심감 대사의 안색은 마치 병자와 같이 황색이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매우 날카로워 마치 겨울밤의 별빛과도 같았다.

심감 대사는 예리한 눈초리로 초류빈을 한참 동안 노려보더니 차갑게 입을 열었다.

"이사형께서 걸리신 독은 묘강 극락동주의 오독수정(五毒水晶)입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침울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그 독은 무색무미(無色無味)하며 수정구 같은 투명체로써 중독된 자가 해독약을 구하지 못할 땐 전신이 수정과 같은 투명체로 변해 오장육부가 환히 들여다보이게 됩니다."

그의 음성은 천만근이나 되듯이 몹시 무거웠다.

"그 때가 되면 설사 신선이라고 해도 구할 수가 없습니다."

초류빈은 웃으면서 말했다.

"대사께선 과연 고명하시군요....."

심감 대사는 냉랭하게 소리쳤다.

"빈승은 이사형께서 오독수정에 중독되셨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독을 쓴 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소."

백요생이 나서며 그의 말을 받았다.

"말 한번 잘 하셨소. 독은 죽어 있는 물체와 같은 것이니 독을 쓴 사람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겠소....."

심감 대사는 여전히 냉혹한 어조로 내뱉었다.

"극락동주가 비록 악독하기는 하나 남이 그를 건드리지 않으면 그도 남을 침범하지 않소."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정색을 하며 계속했다.

"그리고 본문은 극락동주와 아무런 갈등도 없는데 그가 무엇 때문에 이 사람을 암산하였겠소?"

그들 두 사람의 말을 들은 초류빈은 절로 탄식을 터뜨렸다.

"그것은 그의 상대가 심미 대사가 아닌 바로 소생이었기 때문이오."

백요생의 눈에서 형형한 빛이 발해졌다.

"매우 묘한 말씀이시군. 그가 해치고자 하는 사람은 이렇게 멀쩡하게 서 있고 무고한 심미 사형이 도리어 해를 입었다니 세상에 이러한 일이 어디에 있겠소?"

이렇게 외친 그는 초류빈을 똑바로 노려보면서 한마디 한마디 분명하게 말했다.

"만약 귀하가 이해할 수 있는 이유를 말할 수 있다면 나는 탄복할 것이오."

초류빈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나는 말하지 않겠소. 그것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당신들이 믿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오."

그 말에 모두들 안색이 변했다.

백요생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귀하의 말은 사실 믿기가 어렵소."

초류빈은 낭랑한 어조로 대꾸했다.

"내가 말할 수는 없지만 나를 대신해서 얘기해 줄 사람은 있소."

심호 대사는 의아해 하며 급급히 물었다.

"아니, 그게 누구요?"

초류빈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심미 대사! 그가 깨어난 후에 물어보시면 모든 것을 자연 알게 될 것이오."

그의 말을 들은 심호 대사는 칼날과 같이 예리한 눈초리로 초류빈을 노려보았다.

심감 대사는 얼굴에 서릿발을 내린 채 한마디 한마디 분명한 어조로 내뱉었다.

"이사형께선 영원히 입을 열 수가 없을 것이오."

칼날과 같이 예리한 바람이 지붕 위에 쌓여 있는 눈을 쉴새없이 휘날렸다.

거대한 소림사가 더할 수 없이 조용하고 죽은 듯이 고요한 가운데 종각의 범종이 은은히 들려왔다.

이 범종소리는 소림의 호법인 심미 대사의 원적(圓寂)을 애도하는 종소리였다.

초류빈은 이 순간 추위가 전신에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쉬지 않고 격렬하게 기침을 토했다. 내심 분노인지 또 후회인지 아니면 슬픔에 차 있는 것인지 그 자신조차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미묘했다.

한참 후에 기침을 멈춘 초류빈이 고개를 들어 보자 수십 명의 회포승인이 줄을 이어 이 작은 원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살얼음과 같이 차가운 빛이 역력했다. 입은 굳게 한일 자로 닫혀 있었고 두 눈에선 살기가 폭사되어 나왔다.

종소리도 어느 틈엔가 정지했고 마치 이 세상의 모든 소리가 추운 공기에 싸여 얼어붙어 버린 것 같았다. 다만 눈덮인 땅을 한발 한발 걸어오는 승인들의 발걸음소리만이 죽음의 의미를 깔면서 들려올 뿐이었다.

잠시 후 승인들의 발걸음소리까지도 멈추어졌을 때 초류빈은 자신이 납덩어리보다 더욱 무거운 얼음 속에 빙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엄숙하고도 숙연해야 할 성지는 일순 무서운 살기로 덮였다.

심호 대사가 냉랭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도 무슨 할 말이 있소?"

초류빈은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킨 후 장탄식을 터뜨렸다.

"나로선 더 이상 할 말이 없소."

말해 보았자 소용없는 것,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그는 생각한 것이다.

백요생은 비꼬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귀하는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소."

"하하하...당신의 말이 어쩌면 맞을 것이오. 하지만 시간이 다시 되돌아 온다고 해도 나는 역시 그렇게 했을 것이오."

초류빈은 공허한 웃음을 터뜨리다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무수한 사람을 죽여 왔던 것만은 사실이오. 하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살리지 않은 적은 없었소."

심감 대사가 대노하여 소리쳤다.

"지금 이 시각에 와서도 참회하는 빛도 없이 도리어 입을 놀리려 하다니....."

여기까지 말한 그는 더욱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빈승이 살계(殺戒)를 저지르지 않을 수가 없겠소."

초류빈은 웃으면서 말했다.

"서슴지 말고 살계를 펴 보시오. 살인을 하는 화상이 한두 사람이 아니니 대사라고 못할 것은 없는 것이오."

심감 대사의 두 눈에서 살기가 폭사되어 나왔다.

"내가 살인을 하고자 하는 것은 복수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천하의 중생을 위해 악마를 제거시키고자 하는 것이오."

그리고 막 덤벼들려고 할때 갑자기 싸늘한 광채가 번득였다. 이 순간 초류빈의 수중에 작고 날카로운 비도가 쥐어져 있었다.

초류빈은 냉랭하게 외쳤다.

"내 대사에게 권하겠소. 절대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대사는 나의 상대가 되지 못하오."

순간 심감 대사는 마치 두 발이 땅에 얼어붙은 듯이 그 자리에 서서 꼼짝하지 못했다. 그는 만약 자신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초류빈 수중의 칼이 자신의 목을 관통시킬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심호 대사가 소리쳤다.

"시주는 끝끝내 반항을 할 생각이오?"

초류빈은 탄식을 터뜨리면서 말을 받았다.

"비록 좋은 생활을 영위해 나가지 못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죽고 싶은 생각은 없소."

백요생이 나서며 물었다.

"비도가 설사 빗나간 적이 없다고는 하지만 귀하에게 몇 자루의 비도가 있으며 사람을 죽인다면 몇 명을 죽일 수가 있겠소?"

초류빈은 그의 물음에 그저 담담하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말하지 않는 것이 그 어떠한 말을 하는 것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심호 대사는 초류빈 수중의 비도를 흘겨보며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좋소. 빈승이 시주의 비도가 어떠한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 가르침을 받아 보겠소."

그러더니 큰걸음으로 걸어나왔다.

하지만 백요생이 급히 제지했다.

"대사, 절대 경거망동해선 안 됩니다."

심호 대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무엇 때문이오?"

백요생은 탄식을 터뜨리면서 대답했다.

"당금 무림에서 그의 비도를 피해낼 수 있는 사람은 결단코 없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심호 대사가 반문했다.

"그의 비도를 피해낼 사람이 없다고요?"

백요생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습니다. 한 명도 없습니다."

심호 대사는 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겠소!"

이때 심감 대사도 달려와 만류했다.

"사형, 소림사의 모든 안위는 사형의 몸에 달려 있습니다. 진정하십시오."

초류빈은 웃으면서 입을 떼었다

"그렇습니다. 그 누구도 모험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소림사엔 삼천 명의 제자가 있소."

이렇게 말한 그는 주위를 훑어보며 말을 계속했다.

"그저 대사들께서 명령만 내리시면 대사들을 대신해서 죽음을 받을 사람은 적지 않을 것이오."

심호 대사의 안색이 수차에 걸쳐 변했다.

"본좌의 명령이 떨어지기 이전에 본문의 제자는 그 누구도 경거망동해선 안 된다."

이렇게 말한 그는 마른침을 한 차례 삼키며 급히 말을 이었다.

"만약 어기는 자가 있을 땐 본문의 규칙에 의거해서 가차없이 처단하겠다. 알겠느냐?"

소림의 승인들은 그의 말을 듣자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초류빈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나는 대사가 결코 제자들을 죽음에 처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소."

여기까지 말한 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냉막하게 말을 계속했다.

"소림사는 과연 무림의 정종으로써 손색이 없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바이오."

이때 백요생이 냉랭하게 물었다.

"소림의 사형제들이 설사 귀하와 싸울 수 없다고는 하지만 귀하는 이곳을 쉽게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초류빈은 빙긋 웃으면서 써답했다.

"나는 결코 가지 않을 것이오."

백요생은 의아해 하며 반문했다.

"가지 않겠다고?"

초류빈이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시비와 흑백이 가려지기 전에 내 어찌 갈 수가 있겠소?"

백요생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귀하는 극락동주를 이곳으로 데리고 와 심미 대사의 사인을 밝히기라도 하겠다는 것이오?"

초류빈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소. 그는 이미 죽었으니까....."

백요생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급급히 물었다.

"귀하가 그를 죽인 것이오?"

초류빈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 역시도 사람이오. 그래서 나의 비도를 피해내지 못했소."

이 말에 심호 대사가 황급히 끼여들면서 입을 열었다.

"시주가 만약 그의 시체를 찾아낼 수가 있다면 최소한 시주의 말이 완전한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될 것이오."

초류빈은 씁쓸히 웃으면서 말했다.

"설사 그의 시체를 찾아온다고 해도 그가 진짜 극락동주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으니 소용이 없을 것이오."

그러자 백요생이 냉랭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귀하의 결백을 증명해 줄 사람이 또 어디에 있소?"

"지금까지는 아직 생각해 낼 수가 없소."

백요생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이젠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초류빈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하...지금은 오직 술을 마시고 싶을 뿐이오."

낭천의 앉아 있는 모습은 매우 보기가 흉했다.

그는 가장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의자에 앉아 있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방안에 난로가 있어 매우 따뜻했지만 그는 도리어 거북하게 여겨졌다. 한편 설소하는 난롯가 옆에 웅크린 채 엎드려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난로에서 발해지는 뜨거운 열기에 의해 완숙한 사과와 같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틀 동안 그녀는 눈 한번 감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낭천의 상처가 기적적으로 완치되자 그녀는 겨우 안심을 하고 눈을 붙인 것이다.

그녀의 잠자는 모습은 더더욱 아름다웠다. 길고 부드러운 속눈썹은 마치 창에 걸쳐 놓은 휘장과 같이 그녀의 눈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벼운 숨결을 따라 터질 듯이 풍만한 가슴이 가볍게 기복을 일으켰다.

낭천은 넋을 잃은 채 설소하를 내려다보았다.

방안엔 그녀의 가볍고 일정한 숨소리와 난로 속의 목재가 타는 소리만이 들렸다. 밖에 쌓인 눈도 이제는 서서히 녹아 천지간에 따스함과 고요함으로 가득차 있었다.

낭천의 두 눈에 점점 고통의 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살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조용히 신을 신었다. 아름다운 일들이 순간 낭천의 뇌리에 떠올랐다가 즉시 사라졌다.

누구든지 아름다운 일들을 남겨두고 떠나려 한다면 그 사람에겐 고통과 불행만이 초래될 것이다.

낭천은 가볍게 탄식을 터뜨렸다.

"아!"

그는 방 한구석에 있는 상 위에 올려져 있던 검을 들어올렸다.

한쪽 벽에 초류빈이 친필로 쓴 족자가 걸려 있었다. 그 위엔 단 한 행으로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이 일은 추억으로 남으리라>

만약 이틀 전이라면 그는 이 글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낭천은 추억만이 영원히 남을 것이라는 뜻을 알았다. 오직 추억 속의 달콤함만이 영원히 유지될 것이다. 낭천은 서서히 검을 허리춤에다 걸쳤다.

이때 돌연 설소하의 음성이 들려왔다.

"왜...이러시는 것이지요?"

그녀는 갑자기 깨어나 아름다운 두 눈에 경악의 빛을 담은 채 낭천을 바라보았다. 낭천은 감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지 못했다. 그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 짤막하게 말했다.

"나는 가야겠소."

설소하는 의아해하며 다급하게 반문했다

"가시겠다고요?"

그녀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낭천의 앞으로 달려오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한테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떠나시겠다는 것인가요?"

낭천은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떠나갈 몸으로서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소."

설소하는 마치 전기에 감전이 된 듯 온몸을 심하게 떨더니 뒤로 물러나 의자 위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러는 그녀의 두 눈에는 수정과 같은 맑은 눈물이 흘러내려 왔다.

순간 낭천은 마음 한구석에서부터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러한 감정을 느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쓴 것인지 아니면 달콤한 것인지 그로서는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낭천은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리며 말을 했다.

"당신이...당신이 나를 구해준 은혜에 대해서는 내...내 언젠가는 보답할 것이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설소하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좋아요. 어서 보답하세요. 내가 당신을 구해준 것은 당신의 보답을 받기 위한 것이었어요."

그녀는 비록 웃고 있기는 했지만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낭천은 암담한 표정으로 입을 떼었다.

"나도 당신의 마음을 알고 있소. 하지만 나는 초류빈을 찾아가지 않을 수가 없소."

설소하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말을 받았다.

"그를 찾아가는데 저에게 얘기해 주고 저와 같이 가면 안 되나요?"

낭천은 어찌할 바를 몰라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당신에게까지 폐를 끼치고 싶지 않소."

"나에게 폐가 된다고요? 당신은 당신이 간 후에 제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설소하는 눈물을 흘리면서 애처롭게 말했다.

낭천은 그녀의 말에 무엇인가 반박하려고 했지만 입술이 심하게 떨려 도무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입술, 아니 혀까지 이렇게 떨리기는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설소하는 갑자기 낭천에게 달려와 그를 놓칠세라 힘껏 껴안으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천천히 말했다.

"저를 데려가 주세요. 만약 저를 데려가 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당신 앞에서 죽겠어요."

아름다운 여인 앞에서 매정하게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 그리고 여인이 죽겠다고 할때 그것을 보고 있을 남자는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밤은 매우 조용했다. 방안에서 나오자 눈이 소복히 쌓인 매화를 볼 수 있었다. 이곳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냉향소축이다.

이상한 것은 이틀 사이에 흥운장이 온통 떠들썩했지만 이곳에 온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낭천을 찾으려 했다면 이곳에 왔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째서 이곳에 오지 않은 것일까? 그들은 무엇 때문에 설소하를 이토록 신임하고 있는 것일까?

설소하는 낭천의 손을 꽉 잡은 채 말했다.

"저는 언니에게 우선 말을 한 후에야 떠날 수 있어요."

"어서 갔다 오시오."

설소하는 가볍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을 이곳에 혼자 남겨두는 것이 걱정이 돼요. 우리 같이 가요."

낭천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하지만 당신의 언니께서....."

그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설소하는 그의 말을 받았다.

"안심하세요. 언니도 초류빈과는 매우 친한 사이니까요."

그러더니 낭천의 손을 잡고 매화림을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한 누각에 도착했다.

누각은 매우 조용했고 등불도 매우 우울해 보였다.

작은 누각 위 복도에 등잔이 걸려 있었는데 바람에 의해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누각에 있는 방은 온통 휘장으로 쳐져 있었지만 설벽운은 혼자 멍청하니 앉아서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었다.

설소하는 낭천을 데리고 누각 위로 올라와 가볍게 입을 열어 설벽운을 불렀다.

"큰언니...큰언니, 아직 안 주무시나요?"

그러나 설벽운은 그 자리에 멍청하게 앉은 채 고개도 들지 않았다.

설소하는 안타까운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큰언니, 저는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에요. 저는 가야 해요. 하지만...절대 언니의 온정을 잊지 않겠어요. 저는 곧 돌아올 거예요."

설벽운은 그녀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한참 동안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가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가거라.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곳은 미련을 남겨 둘 곳이 못된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난 설소하는 어깨를 들먹이며 다시 물었다.

"형부께선 어디에 계시지요?"

"형부? 누구의 형부....."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설소하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물론 저의 형부죠."

설벽운은 고개를 마구 저으며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너의 형부를 모른다...나는 모른다. 몰라....."

그녀의 몸부림치는 듯한 모습을 본 설소하는 일순 넋을 잃고 말았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있던 설소하는 애써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저희들은 지금 가까운 길을 택해 소림사로 갈 거예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설벽운은 갑자기 뛰어 일어나더니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어서 가라. 어서 가! 어서...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어서 가라. 어서 가!"

그녀는 미친 듯이 양손을 흔들면서 소리쳐 설소하와 낭천을 내쫓았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실성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하하...히히....."

이때 길게 늘어진 휘장 뒤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나타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호유성이었다. 그는 설벽운을 바라보더니 입가에 음험한 미소를 띠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그들이 소림사로 갔다고 해도 소용이 없지. 이 천하에서 초류빈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으니까....."

18 소이비도 제2권 흘러간 세월 - 극락동주





극락동주



심미 대사는 전칠이 어린아이에게서 바꾸어 가지고 온 두 그릇의강냉이죽을 안심하고 먹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출가(出家)한 사람은 모든 행동에 얌전하고 절도가 있는 것을 중요시하므로 전칠이 한 그릇을 다 먹을 때까지 심미 대사는 겨우 두 수저를 떠먹었을 뿐이었다.

이때 마차는 이미 마을을 벗어나왔다.

마부는 이 귀찮은 손님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목적지까지 태워다 준 후 편안히 먹고 쉬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말을 몰았다.

전칠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 상태로 간다면 날이 밝기 전에 숭산에 도착할 수가 있겠군요."

"지금쯤 아마 본문의 제자들이 마중 나와 있을 것이오. 그저 ....."

여기까지 말하던 심미 대사는 갑자기 죽그릇을 떨어뜨리면서 전신을 떨기 시작했다.

전칠의 안색이 급변했다.

"대사...혹시 대사도....."

여기까지 말한 그는 갑자기 무엇인가 느낀 듯 사색이 된 채 버럭 소리쳤다.

"이 죽에도 독이 있단 말이오?"

심미 대사는 장탄식을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칠은 몸을 돌려 초류빈의 목덜미를 잡으면서 소리쳤다.

"나의 얼굴을 좀 보아라! 나의 얼굴이....."

초류빈은 탄식을 터뜨렸다.

"나는 비록 너를 매우 증오하고 있기는 하지만 허무하게 죽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구나."

전칠은 안색이 완전히 회색으로 변했고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붉게 충혈되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두 눈으로 초류빈을 노려보고 있던 그는 갑자기 음험하게 웃었다

"으흐흐흐.....너는 내가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는 하지만 나는 네가 죽는 꼴을 꼭 보아야겠다."

이렇게 말하는 그는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이를 부드득 갈며 말을 이었다.

"내 너를 진작 죽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기만 하구나."

초류빈은 비웃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네가 나를 죽이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렇다. 지금 너를 죽이기엔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너를 죽일 수가 있다."

이렇게 소리친 그는 두 손을 들어 초류빈의 목을 잡았다.

낭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표정은 매우 보기 흉했지만 몸은 완전하게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설소하는 사랑에 찬 눈초리로 낭천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당신은 정말 철인과 같군요. 저는 본시 최소한 삼사 일이 지나서야 일어날 줄 알았는데 반나절도 안 되어 일어나시다니 정말 놀라워요."

낭천은 방안을 두 바퀴 돌고 나서 갑자기 입을 떼며 물었다.

"당신은 그가 무사하게 소림사에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당신은 말끝마다 그 사람만 찾는군요. 당신은 어째서 저나 당신 자신에 대해선 얘기하지 않나요."

설소하는 서운하다는 눈빛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낭천은 여전히 걱정어린 얼굴로 설소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다시 물었다.

"당신은 그가 평안하게 소림사에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호호호...당신은 정말 어쩔 수가 없군요."

설소하는 눈을 가볍게 흘기다가 낭천의 손을 잡고 자리에 앉히며 마치 속삭이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안심하세요. 지금쯤 아마 심미 대사의 방장실(方丈室)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을 거예요. 소림사의 차맛은 천하일품이지요."

낭천의 얼굴엔 절로 웃음이 떠올랐다.

"내가 알기엔 그는 설사 남에게 목이 잡혀 있다 해도 결코 차를 마시지는 않을 것이오."

초류빈은 호흡이 곤란해지는 것을 느꼈다. 전칠의 얼굴도 갈수록 점점 더 공포스럽게 변해갔고 그 자신 역시도 숨통이 막힐 듯한지 파란 힘줄이 최대한으로 팽창된 그의 두 손은 초류빈의 목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초류빈은 눈앞이 점점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고 전칠의 얼굴이 점점 멀어져 보였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점점 임박해 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가 있었다

초류빈은 죽음과 삶을 사이에 둔 이 순간에 많은 생각이 떠오를 줄 알았다.

그것은 한 사람이 죽음을 눈앞에 두는 순간엔 많은 일이 뇌리에 떠오르기 마련이라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비애는 물론 심지어 공포조차 느끼지 못했고 도리어 마음 한구석에서부터 울음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일 뿐 입을 통해 흘러나오지는 못했다.

초류빈은 자신이 전칠과 동시에 숨을 거두어 황천행 동료가 될 줄이야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칠은 몹시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초류빈, 너의 명이 꽤나 길구나. 너는 어째서 아직 죽지를 않느냐?"

'나는 네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다.'

초류빈은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렇게 말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초류빈은 그저 전칠의 음성이 점점 멀어져만 가고 마치 지옥의 문에서부터 들려오는 것과 갈이 여겨졌다

그는 발버둥질 칠 힘도 없었고 점점 혼수상태로 빠져 들어갔다.

이때 초류빈의 귓전에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 비명소리는 멀리서 들려온 것 같기도 했고 또 전칠의 입에서 나온 것 같기도 했다. 이어서 꽉 막혔던 가슴이 시원하게 트이면서 눈앞이 점점 밝아졌다.

뒤따라 초류빈의 시선에 전칠의 모습이 들어왔다.

전칠은 맞은편 자리에 비스듬하게 쓰러져 있었다. 비록 숨을 거둔 상태이기는 하지만 그의 두 눈은 아직도 뜨인 채 초류빈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심미 대사는 중독된 상태인 데도 불구하고 매우 큰 힘을 쓴 듯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초류빈은 잠시 멍하니 앉아 있더니 탄식을 터뜨리면서 입을 열어 물었다.

"대사께서 나를 구해주신 것이오?"

심미 대사는 그의 물음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혈도를 풀어 주며 서서히 입을 열었다.

"오독동자가 아직 오지 않았으니 어시 피하시오."

그러나 초류빈은 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움직이지도 않았다.

"대사께선 무엇 때문에 나를 구해준 것이오? 대사께선 내가 매화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소?"

심미 대사는 탄식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초시주, 시주가 매화도이건 아니건 어서 떠나시오. 오독동자가 들이닥치는 날엔 달아나고 싶어도 달아나지 못할 것이오."

초류빈은 검게 변해 있는 심미 대사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가볍게 탄식을 터뜨렸다.

"대사의 호의는 고맙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못하는 것이 없소. 그러나 단 한 가지, 달아나는 것만은 못하오."

심미 대사는 더욱더 조급해 하면서 입을 열었다.

"지금은 만용을 부릴 때가 아니오. 시주는 체력을 회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절대 오독동자의 상대가 되지 못하오."

여기까지 말했을 때 갑자기 처절한 말울음소리가 터져나오는가 싶더니 마차가 옆에 있는 나무에 가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꽝!

심미 대사는 마차가 부딪치며 기우뚱거리는 바람에 마차 안에서 곤두박질을 했다.

하지만 아픔을 무릅쓰고 계속 초조해 하며 소리쳤다.

"어서 떠나시오. 시주는 나를 구하겠다는 것이오?"

초류빈은 담담하게 말했다.

"대사께서 저를 구해주셨는데 제가 어찌 대사를 구할 수가 없겠습니까?"

심미 대사는 초조한 나머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하지만...나는 곧 죽게 될 몸이니 위기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살아날 수는 없을 것이오....."

초류빈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하지만 아직은 살아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한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칠의 품속에서 한 자루의 작은 칼을 꺼냈다

초류빈은 이 작은 칼을 서서히 매만지면서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띠었다.

마차는 길 옆에 있는 나무에 부딪친 후 비스듬히 쓰러져 있었고 마차바퀴는 아직도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돌고 있었다. 덜커덩거리는 마차바퀴 소리는 유난히도 크게 들려 이런 황량한 어둠 속에서 듣자니 몹시 불쾌했다.

초류빈은 혼잣말인 양 중얼거렸다.

"마차바퀴에 기름을 칠 때가 된 것 같군....."

이러한 때에 마차바퀴에 기름칠 것을 걱정하고 있다니 심미 대사는 초류빈이 불가사의할 정도로 이상하다고 느꼈다.

심미 대사는 육십여 년을 살아왔지만 이러한 사람은 난생 처음이었다.

이때 초류빈은 심미 대사를 부축하여 마차에서 내려왔다.

휘이익!

뼈를 깎는 듯한 바람이 그들의 얼굴을 엄습했고 그것은 마치 예리한 칼과 같이 날카로웠다.

심미 대사는 탄식을 터뜨리며 말했다.

"초시주, 이러지 말고 어서...어서 떠나시오."

초류빈은 그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비스듬히 쓰러져 있는 마차 위에 걸터앉았다.

하늘엔 달은 물론 별 하나 보이지 않았고 주위는 온통 칠흑과 같이 어둡기만 했다.

초류빈은 고개를 숙여 수중의 칼을 매만지면서 소리쳐 물었다.

"극락동주께서 오셨소?"

그러나 거칠은 바람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초류빈은 다시 한번 소리쳤다.

"당신이 나오지 않겠다면 난 이만 가 보겠소."

그러더니 심미 대사를 번쩍 안아 올렸다.

심미 대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의아해하면서 물었다.

"시주...시주는 어디로 가려는 것이오?"

초류빈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물론 소림사요."

심미 대사는 의아해하며 반복했다.

"소림사!"

"우리가 이 고생을 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은 소림사로 가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하지만 지금은 갈 필요가 없소."

초류빈은 싸늘한 어조로 뱉어냈다.

"하지만 나는 꼭 가야겠소!"

심미 대사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무엇 때문이오?"

"그것은 소림사에 가야만 대사를 구할 수 있는 해독약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심미 대사는 믿어지지 않는 듯 더듬거리며 말했다.

"시주는...무엇 때문에 나를 구하려는 것이오? 나는 본시 시주의 적이 아니었소?"

초류빈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대사께선 나를 구해주셨소. 그것만으로도 대사는 아직 인간이라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오."

심미 대사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장탄식을 터뜨렸다.

"만의 하나라도 소림사에 도착할 수가 있다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주의 결백을 증명해 주겠소."

이렇게 말한 그는 마른침을 한차례 삼키더니 이내 말을 계속했다.

"나는 시주가 매화도가 아니라는 것을 단언할 수 있게 되었소."

초류빈은 그의 말을 듣고 그저 웃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심미 대사는 다시 암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나를 데리고서는 절대 소림사로 갈 수가 없소. 오독동자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절대로 시주를 놓아 주지 않을 것이오."

초류빈은 여전히 아무 말없이 그저 헛기침만 했다.

심미 대사는 탄식을 터뜨리며 말했다.

"시주의 경공술이라면 이곳을 피하기엔 아직 희망이 있을 것이오. 그런데 어찌 나 같은 짐까지 지려 하는 것이오....."

여기까지 말한 그는 잠시 멈추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시주가 나를 구해줄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편안히 죽을 수가 있을 것이오."

이때 갑자기 차가우면서도 징그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으하하...흐흐히히...무림의 정종인 소림의 고승이 무질서한 생활을 해 나가고 있는 천하의 풍류객 초탐화의 친구가 되었다니 정말 천하의 기문(奇聞)이 아닐 수가 없군."

이 웃음소리는 가까웠다가는 다시 멀어지고 하는 것이 도저히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심미 대사는 전신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극락동주?"

그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내가 끓인 강냉이죽의 맛이 어떻소?"

초류빈은 미소를 지으면서 대꾸했다

"귀하께서 이 풍류객 탐화의 목숨을 가지러 온 것이라면 어째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오?"

극락동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도 너의 목숨을 가져갈 수 있다."

초류빈은 냉랭하게 비웃었다

"자신이 대단하시군."

극락동주는 음흉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오늘밤까지 나의 손에 죽은 사람은 삼백구십이 명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를 보지 못했으며 심지어는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다."

그의 말을 들은 초류빈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나는 귀하가 난장이이고 또 사람들이 볼 수 없을 만큼 추하게 생겼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여기까지 말한 그는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비웃는 듯 말을 계속했다.

"나는 그것이 헛소문이 아닌 사실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네그려."

극락동주는 초류빈의 비웃는 말을 듣자 갑자기 웃음소리를 중지했다. 얼마쯤 지나자 극락동주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나는 너를 결코 쉽게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날이 밝기 전까지 온갖 고통을 다 겪게 한 후에야 죽게 할 것이다."

초류빈은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나는 날이 밝기 전까지 물론 죽지 않을 것이며, 날이 밝은 후에도 결코 죽지 않을 것이오. 하하하....."

그의 웃음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괴이한 대나무 퉁소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눈덮인 땅에 꿈틀거리는 검은 물체들이 무수하게 나타났다. 긴 것도 있고 짧은 것도 있었고 큰 것이 있는가 하면 작은 것도 있었다. 날이 어두워 이 물체들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강한 비린내가 사람으로 하여금 구토를 느끼게 하였다.

심미 대사는 아연실색하여 나직이 입을 열었다.

"오독이 일단 나오면 사람은 뼈만 남은 채 죽게 된다고 하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어서 떠나시오."

초류빈은 그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한 듯 담담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듣자하니 극락동엔 수천 수만 가지의 독물이 있다고 하는데 내가 본 것은 어찌 이 작은 벌레들에 불과할까....."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재차 말을 이었다.

"혹시 나머지 독물들은 모두 죽은 것이 아닐까?"

이때 퉁소 소리는 더욱 촉급하게 들려왔고 땅에서 꿈틀거리고 있던 검은 물체들은 초류빈과 심미 대사를 완전히 포위했다. 그리고 몇 마리는 이미 그들의 발 바로 앞까지 기어왔다.

심미 대사는 전신을 사시나무 떨듯 하면서 초류빈에게 바싹 붙어섰다.

이때 극락동주의 징그러운 웃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흐흐흐...나의 극락충은 일곱 가지의 신물을 교배시켜 만들어 낸 것이다."

그의 음성에는 강한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사람의 피나 살이 아니면 아무것도 먹지를 않는다. 잠시 후 너희들이 그들의 먹이가 되어 그들의 뱃속으로 들어가면 아마 그들이 작다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갑자기 싸늘한 광채가 폭사되었다.

그것은 비도가 발해진 것이다.

심미 대사는 이젠 마지막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두 눈을 감았다. 그는 초류빈 수중의 비도가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초류빈은 이 유일한 희망을 망막한 어둠 속에다 버 린 것이다. 만약 그의 비도가 상대방에게 적중되지 못한다면 그들은 곧 앙상한 뼈만이 남게 될 것이다.

이것은 생명을 건 도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도박에서 이길 승산은 극히 희박했다. 이것은 마지막 기회이자 단 한 번밖에 없는 기회였다.

심미 대사는 초류빈이 이렇게 경솔한 행동을 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상상을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도 역시 생각하지 못했다. 바로 칼빛이 어둠 속에서 사라지는 순간 극히 짧은 비명소리가 터져나온 것이다. 이어서 어둠 속에서부터 하나의 검은 인영이 폭사되어 나왔다.

그 몸집은 어린아이와 같고 작은 몸에는 짧은 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비록 날씨가 더할 수 없이 추웠지만 그는 두 다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채 조금도 추위를 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머리도 매우 작았으나 두 눈만이 등불과 같이 반짝거렸다.

지금 그의 두 눈엔 경악과 원한의 빛으로 가득차 있는 채 초류빈을 꿰뚫어 보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무엇인가 말하려 했지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순간 심미 대사는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는 초류빈이 던져낸 칼이 상대의 목 중앙에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심미 대사는 비도가 일단 발해지면 절대 빗나가지 않는다는 말에 대해서 새삼 실감을 하게 되었다.

극락동주는 숨통이 막힌 듯 비틀거리면서 목에 꽂힌 비도를 뽑아냈다. 순간 그의 목에서 시뻘건 선혈이 흘러내렸다.

극락동주는 있는 힘을 다해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하면서 입가에 씁쓸한 웃음을 띠었다

"과연 놀라운 칼솜씨구나!"

이때 지상에서 꿈틀거리고 있던 독충들은 이미 초류빈과 심미 대사의 다리 위까지 기어 올라왔다.

하지만 초류빈은 움직이지 않았고 심미 대사는 더더욱 꼼짝하지 못했다. 그의 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렸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비도가 비록 천하제일이기는 하지만 그들 이 독충의 왕성한 식량이 되는 것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극락동주가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면서 선혈을 뿌리고 쓰러지자 수백 마리의 독충은 갑자기 그들에게서 빠져나갔다. 그 독충들은 화살과 같이 고개를 돌려 극락동주의 몸을 향해 앞다투어 달려간 것이다. 살을 갉아먹는 소리가 쉴새없이 들리는가 싶더니 잠시 후 극락동주의 시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곳엔 하얀 뼈만이 남았다.

그리고 마음껏 포식을 한 독충들도 모두들 땅에 늘어진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천하의 독물이 자신이 키운 독충에 의해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이 처참한 광경은 차마 두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심미 대사는 두 눈을 감고 합장을 한 채 한참 동안 염불을 외우더니 안도의 한숨과 함께 눈을 떴다.

그는 초류빈을 바라보면서 격찬을 했다.

"시주께선 비단 비도가 천하무쌍일 뿐만 아니라 정력(定力) 또한 다시 찾아볼 수 없는 것이구려."

초류빈은 씁쓸히 웃었다.

"송구스럽소. 나는 이 독충들의 습성을 알고 있었을 뿐이지 사실 나 자신도 매우 두려웠소."

심미 대사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시주께서도 두려워했단 말이오?"

초류빈은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죽은 사람을 제외하고 이러한 상황에 처한다면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소."

심미 대사는 장탄식을 터뜨렸다.

"위기에 처해 있으면서도 당황해 하지 않고 비록 두려웠으나 내색하지 않는 시주의 침착성에 나는 정말 탄복하는 바이오."

그의 음성은 마지막에 가선 거의 들리지 않더니 이내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17 소이비도 제2권 친구와 적





친구와 적



소복히 눈이 쌓인 길목에 한 사람이 서 있었는데 그는 말고삐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 힘이 어찌나 세었든지 말은 미친 듯이 길길이 뛰고 있었으나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우중충한 청포를 입고 있었다. 그 장포는 누가 입더라도 땅에 질질 끌릴 만큼 긴 것이었으나 그 사람의 무릎도 채 덮지 못했다.

청포인은 한눈에 보아도 무서울 만큼 으시시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는데 머리 위에는 또 괴상한 모자를 쓰고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한 그루의 고목나무가 서 있는 것 같았다.

아무튼 한 손으로 달리는 말을 세울 수 있을 정도라면 가히 짐작이 되리라.

그러나 그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그의 두 눈동자였다. 그 두 개의 눈동자는 사람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의 눈동자는 청색이었는데 번쩍번쩍 빛까지 나 마치 성화가 불붙고 있는 것 같았다.

전칠은 고개를 내밀기 무섭게 다시 거두어들이며 입술이 하얗게 바랬다.

심미 대사는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짐작하고 침중하게 물었다.

"밖에 누가 있소?"

전칠은 떨리는 음성으로 겨우 대답하였다.

"...그렇소."

심미 대사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누구요?"

"이곡(伊哭)."

그러자 초류빈이 웃으며 말을 꺼냈다.

"이제보니 나를 찾으러 왔군."

심미 대사는 깜짝 놀라 소리쳐 물었다.

"청마수도 당신의 친구란 말이오?"

초류빈은 여전히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했다.

"애석하게도 이 친구는 나의 다른 친구와 같지 않소. 바로 내 목을 가지러 온 것이오."

심미 대사는 갑자기 얼굴이 침중해지더니 천천히 문을 열고 걸어나갔다.

"이시주요?"

청마수는 그의 아래 위를 훑어보며 냉랭히 물었다.

"심호냐? 아니면 심미냐?"

심미 대사는 격동을 누르며 겨우 대꾸했다.

"노승은 바로 심미요."

이곡은 대뜸 마차로 시선을 돌렸다.

"마차 안에는 누가 탔느냐?"

심미 대사는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대꾸했다.

"출가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소. 마차 안에는 전칠 시주와 초시주가 타고 있소."

이곡은 파란 눈에 광채를 폭사시키며 소리쳤다.

"좋다! 그렇다면 어서 초류빈을 내놓아라. 그럼 내 널 놓아 주겠다."

심미 대사는 마음을 가다듬고 조용히 말을 꺼냈다.

"노승이 초류빈을 소림사로 데려가는 것은 바로 그를 징벌하기 위해서요. 그리고 시주께서도 우리와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으니 우릴 막지 말아야 할 것이오."

이곡은 아무 말도 귀에 들리지 않는다는 듯 다시 재촉했다.

"화상! 초류빈을 내놓으면 너를 놓아줄 것이다."

이곡은 처음부터 이 한마디만 되풀이하면서 남이 무엇이라고 해도 듣지 못한 척했다. 이곡의 음산한 표정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아 조금의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심미 대사는 호흡을 가다듬고 말을 꺼냈다.

"노승이 만약 승낙을 하지 못하겠다면 시주는 어떻게 하겠소?"

"그럼 너부터 죽이고 나서 초류빈을 처리하겠다!"

이곡은 원래 왼팔을 늘어뜨리고 있었기 때문에 긴 청포에 가려져 있었다.

이때 갑자기 소매가 위로 거두어지는가 싶었는데 청색빛이 번쩍 하며 곧장 심미 대사를 향해 갔다.

이것이 바로 강호에 그 이름을 떨친 청마수라는 것이었다.

순간 심미 대사가 일성의 폭갈을 내지르자 그의 몸 뒤에서 네 개의 회색 인영이 번개같이 덮쳐왔다.

심미 대사가 이곡의 일격을 피하는 순간 네 승려가 대신 이곡을 포위했다.

이곡은 광폭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으하하하...좋다! 내 벌써부터 소림사의 나한진을 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던 참이다."

광소 속에 갑자기 한 가닥의 연기가 뿜어져나오는가 싶었는데 순식간에 온 하늘을 뒤덮는 것이 아닌가?

심미 대사는 그것을 보자 대경실색하며 외쳤다.

"빨리 코를 틀어 막아라!"

심미 대사가 문하들에게 경고를 하느라 그만 자기 자신을 잊고 말았다.

그가 고함을 내지를 때 한 가닥의 기체가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소림의 네 승려들은 갑자기 심미 대사의 표정이 창백해진 것을 보자 대경실색했다. 심미 대사는 즉시 공중으로 몸을 날려 삼 장 밖에 내려서더니 정좌를 하고는 수십 년 간 닦아온 진력으로 그 독기를 밀어내려고 했다.

소림 승려들은 즉시 한 줄로 늘어서서 심미 대사의 앞을 호위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리자 그들은 초류빈의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오직 심미 대사를 위해서 걱정을 했다.

이곡은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상관하지 않고 마차문 쪽으로 달려갔다.

초류빈은 여전히 마차 안에 앉아 있었으나 전칠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곡은 초류빈을 노려보며 싸늘한 음성으로 외겼다.

"구독은 네가 죽인 거냐?"

초류빈은 짧게 대꾸했다.

"그렇다."

이곡은 험상궂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잔인하게 웃었다.

"그래, 구독의 목숨으로 초류빈의 목숨과 바꾼다는 것...그것도 괜찮은 일이지."

이곡은 말하면서 청마수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한 가닥 싸늘한 바람이 주위를 휩쓸고 지나갔다.

이곡은 초류빈을 쏘아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또 무슨 할 말은 없느냐?"

초류빈은 번들번들 빛나는 그의 청마수를 쳐다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꼭 한마디밖엔 없다."

"무슨 말이냐? 어서 해 보아라."

초류빈은 말하기가 고된 듯 길게 한숨을 내뿜었다.

"왜 하필이면 내게로 와 죽음을 자초하려 하느냐?"

이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갑자기 초류빈의 손이 앞으로 뻗어져 나왔다. 칼집이 번쩍하는 순간 이곡은 잽싸게 공중으로 치솟고 있었다.

눈쌓인 대지 위에 선혈이 꽃잎처럼 선연하게 뿌려졌다. 그것은 마치 붉은 무늬를 새겨 놓은 것처럼 보였다.

이곡은 이미 수 장 밖에 나가 크게 소리쳤다.

"초류빈, 잘 기억해 두어라. 난....."

이곡은 여기까지 말하더니 갑자기 말을 끊었다. 싸늘한 바람이 휘잉 평원을 휘몰아쳐 가자 설야는 다시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고요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초류빈은 이때 이 상황이 매우 지루하다고 느꼈다. 그때 맑은 박수소리가 터져나오더니 전칠이 마차 뒤에서 크게 웃으며 달려나왔다.

"멋있었다! 비도탈명은 과연 소문 그대로군!"

초류빈은 잠시 설야 저편을 쳐다보고 있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만약 나의 혈도를 전부 풀어 주었다면 그는 절대 내 앞에서 도망을 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만약 너의 혈도를 전부 풀어 주었다면 너 역시 도망을 쳤을 것이다."

전칠은 초류빈의 어깨를 툭 치며 다시 말을 이었다.

"너는 오직 한쪽 육신으로 이곡을 부상 입히고 도망을 치게 만들었는데 너 같은 사람을 내 어찌 특별히 무서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이때 소림의 네 승려들이 심미 대사를 부축해서 데리고 왔다.

심미 대사는 얼굴이 노랗게 변한 채 마차에 오르는 즉시 서둘러 재촉했다.

"빨리 가자."

마차가 떠나게 되자 심미 대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정말 날카로운 청마수로군."

전칠은 빙긋이 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더욱 날카로운 것은 비도탈명이오."

심미 대사는 고개를 돌려 초류빈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구해 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소."

초류빈은 싱겁게 웃으며 더 이상 말하기 싫은 듯 잘랐다.

"내가 구한 것은 당신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오."

전칠은 나직한 음성으로 심미 대사의 귀에 대고 말했다.

"내가 아까 그에게 우리를 따라 소림사로 갈 것인가 아니면 이곡의 손에 들어가고 싶은가 물어보고 나서 혈도를 풀어 주고 그에게 한 자루 비도를 준 것이오."

전칠은 웃으며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나는 이렇게 해주는 것으로 승리를 얻을 자신을 갖고 있었소."

심미 대사는 무엇인가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비도탈명...정말 빠른 칼이야....."

그러는 사이 마차는 쉬지 않고 앞으로 질주해 갔다.

심미 대사의 반응은 비록 빠르지 못했으나 내력만은 몹시 심후했다. 이날 저녁 때쯤 되어서 그는 이미 독기를 밀어내고 얼굴색도 점차 회복을 했다.

일행은 객잔을 찾아 저녁밥을 먹어야 했다. 심미 대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화상도 사람이니만큼 밥을 먹어야 할 뿐 아니라 잠까지 자야 했다. 그래서 일행은 길가의 깨끗한 객점을 찾아들었다.

전칠은 초류빈을 의자에다 앉힌 후 징그럽게 웃었다.

"내가 너의 한쪽 손의 혈도를 풀어 주는 것은 밥을 먹는 젓가락을 집으라는 것이지 함부로 쓰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또 내가 너의 입을 틀어막지 않은 것은 밥을 먹으라는 것이지 함부로 입을 놀리라는 게 아니다. 알겠느냐?"

초류빈은 탄식을 내뿜으며 고개를 저었다.

"밥을 먹을 때 술이 없으면 소금을 치지 않은 반찬을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요."

"밥만 주는 것도 네게는 과분한 것이니 잠자코 먹기나 해라."

소림사의 규칙은 과연 엄중했다. 이 소림 승려들은 밥을 먹을 때 비단 말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조금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상 위에는 비록 몇 가지 야채뿐이었지만 그들은 습관이 되어서인지, 아니면 배가 고팠기 때문인지 매우 맛있게 먹었다.

그러나 심미 대사는 내상이 막 완쾌되었기 때문에 그저 죽만 한 그릇 마셨을 뿐이었다.

그리고 전칠은 몇 가지 반찬을 주문하고는 혼자서 천천히 먹으려고 옆에 있는 자리에 따로 앉았다.

초류빈은 그때 문득 두부 한 개를 집어서 막 먹으려고 하다가 홀연 내려놓더니 안색이 크게 변하여 말했다.

"이 반찬은 먹을 수 없는 것이오."

전칠이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만약 이런 야채를 못 먹는다면 굶을 수밖에 없다!"

초류빈은 음침하게 말했다.

"반찬 속에 독이 있다."

전칠은 가소로운 듯 코웃음을 치며 소리쳤다.

"이놈, 술을 먹지 못하게 했더니 다시 시작하는구나. 하하하 ....."

이때 전칠은 갑자기 웃음을 딱 멈추었다. 그의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볼땐 숨도 못 쉬게 목덜미를 잡힌 것 같았다.

전칠은 네 승려의 안색이 회색빛으로 변한 것을 본 것이다. 그러나 네 승려는 감각이 없는 듯 계속 밥을 먹고 있었다.

심미 대사는 대경실색을 하여 크게 소리쳤다.

"어서 선천진기로 심맥을 막아라!"

그러나 네 승려는 아직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고 태연하게 웃었다.

"사숙께선 지금 저희들에게 분부하신 것입니까?"

심미 대사는 몹시 다급하여 급급히 소리쳤다.

"내 당연히 너희들에게 분부한 것이다. 너희들은 중독이 되었는데도 아무런 감각도 없다는 말이냐?"

한 승려가 의아한 듯 물었다.

"중독이 되었다고요? 누구 말씀입니까?"

네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이구동성으로 크게 외쳤다.

"자네 얼굴이 어째서....."

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네 사람은 동시에 쓰러졌다. 심미 대사가 다시 그들을 보았을 때에는 이미 얼굴 모습이 변형된 뒤였고 눈과 코 등 이목구비가 한 데 조여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네 승려가 중독된 독은 비단 냄새가 없었을 뿐 아니라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때문에 이들이 일단 발작을 시작하면 구할 방법이 없었다.

전칠은 절로 몸서리를 치며 외쳤다.

"아니, 대체 무슨 독인데 이리도 무섭다는 말인가?"

심미 대사는 비록 수양이 깊은 사람이었으나 이렇게 되자 참지 못하고 밖으려 달려나가 마치 닭을 나꾸어채듯 점원의 멱살을 끌고 들어왔다.

"이놈! 너희들은 이 반찬에다 도대체 무슨 독을 집어 넣었느냐?"

점원은 바닥에 쓰러진 네 사람을 보자 그만 질겁을 하여 몸을 떨면서 미처 말을 꺼내지 못했다.

초류빈이 다시 탄식을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바보같은 짓...만약 내가 독을 집어 넣었다면 벌써 도망을 갔지 이곳에 있을 것 같소?"

심미 대사는 막 일장을 격출해 내려다가 즉시 멈추고 다시 밖으로 달려나갔다. 심미 대사는 초류빈의 말대로 점원이 한 짓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 내었던 것이다.

전칠은 뒤따라 나갔다가 다시 황급히 되돌아 와서는 초류빈을 옆구리에 끼고 냉정하게 말했다.

"설사 우리가 전부 독살을 당한다 하더라도 너는 도망가지 못할 것이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을 것이고 내가 살면 너도 살도록 할 것이다."

"정말 생각지도 않게 네가 날 정이 깊게 대해 주는구나. 그러나 애석하게도 넌 절세의 미인이 못되는 데다 난 남자라면 딱 질색이다."

초류빈이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저녁 무렵이 지나자 주방은 텅텅 비었다.

주방장과 다른 한 요리사는 술과 안주를 준비해 놓고 하루 중 가장 유쾌한 시간을 맞고 있었다.

그들이 하루하루 고된 시간을 견뎌내는 것은 바로 이런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심미 대사는 밖에서 허탕을 치자 매우 노하여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으나 두 사람을 보는 순간 일순 얼이 빠져 버렸다.

주방장은 얼큰하게 취기가 돌아 웃으며 농담을 건네었다.

"대사께서도 혹시 살짝 술을 마시러 온 것이 아닙니까? 여, 환영합니다요....."

그러나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들은 난로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난로 옆에 놓아 두었던 기름병이 쓰러져 난로 주위에 흘러내리자 즉시 시뻘건 불길이 치솟아올랐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한 마리 붉는 지네가 선연하게 나타났다.

독지네, 이제보니 바로 기름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주방장은 이 기름으로 반찬을 만들어 소림 승려들에게 먹인 후 자기들도 그 기름으로 반찬을 만들어 먹었기 때문에 원인도 모르는 채 죽어간 것이다. 어쨌든 이제 독의 원인은 찾았지만 이 독을 내린 사람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초류빈은 기름 속에 죽어 있는 지네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뿜었다.

"내 이미 그가 올 줄 알고 있었소."

심미 대사는 그 말을 듣자 급급히 소리쳤다.

"누구요? 시주는 독을 내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소?"

초류빈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말했다

"이 세상에 있는 독의 성분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소. 그 한 가지는 뱀이나 벌레에서 얻는 독이오. 초목에서 독을 얻는 사람은 비교적 많지만 뱀과 벌레 따위에서 독을 얻는 사람은 이 천하를 통틀어도 아마 얼마 되지 않을 것이오. 게다가 뱀과 벌레로 살인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이 천하를 통털어도 한두 사람 외에는 없소."

전칠은 움찔 몸을 떨며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렇다면...그렇다면 묘강 극락동(極樂洞)의 오독동자(五毒童子)라는 말이냐?"

초류빈은 탄식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도 그가 아니길 바라고 있다."

전칠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가 어째서 이 중원에 왔다는 말일까? 대체 무엇 때문에?"

"나를 찾으러 온 것이오."

"널 찾으러 왔다고? 그가 너의....."

전칠은 초류빈에게는 절대 이런 친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꺼내다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보아하니 너에겐 친구는 많지 않은 것 같은데 원수가 적지 않구나."

초류빈은 별 관심이 없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원수가 많으면 이익이 될 때도 있지만 친구는 그저 한두 명이면 족하다. 이유는...어느 날엔 친구가 원수보다 더욱 해가 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아까부터 생각에 잠겨 있던 심미 대사가 갑자기 물었다.

"그런데 초시주는 반찬 속에 독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내었소?"

"글세,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간에 알아내었소."

초류빈은 빙긋이 웃더니 다시 말했다.

"내가 만약 어느 방파가 이길 것이라고 짐작하면 틀림없이 이기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내게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면 나는 그 대답을 하지 못하겠소."

심미 대사는 초류빈을 잠깐 동안 주시하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부터 길을 가는 도중에 그가 무엇을 먹거든 우리도 같이 먹도록 합시다."

숭산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이틀은 더 걸려야 했다. 그러나 이 이틀은 평범한 나날의 보통 이틀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강호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극락동자가 일단 누구를 죽이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꼭 죽이고 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미 대사는 네 제자들의 시체를 부근에 있는 사원에다 인계한 후 황급히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누구도 길 도중에 무엇을 먹겠다고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심미 대사의 일행은 먹지 않고 마시지 않을 수 있었지만 마부는 이들과 함께 굶을 수가 없었다.

마부는 이날 정오가 되자 저 혼자서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심미 대사와 전칠은 우두커니 마차 안에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몇 조각의 고기와 몇 개의 만두로 목숨을 걸기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마부는 몇 개의 만두를 들고 먹으면서 걸어왔다.

전칠은 마부의 얼굴을 한참 주의깊에 쳐다보고 있다가 급히 물었다.

"이 만두 한 개에 얼마냐?"

마부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가격이 매우 쌀 뿐 아니라 맛도 기가 막힙니다. 한번 잡수시지 않겠습니까?"

전칠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좋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몇 개만 다오. 그럼 내 밤에 너에게 술을 사줄 테니."

이렇게 약 몇 리를 가는 동안 마부에게는 아무런 이상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칠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만두를 심미 대사에게 건네주었다.

"이 만두엔 독이 없으니 대사께선 한번 잡숴 보시오."

심미 대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만두를 초류빈에게 내밀었다.

"초시주, 한번 먹어 보시오."

초류빈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생각지도 않게 두 분께선 매우 겸손하시구려."

초류빈은 말하면서 왼손으로 만두를 들었다. 그 이유는 그는 왼쪽 손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만두를 받아들기 무섭게 다시 내려놓는 것이었다.

"이 만두도 먹을 수 없는 것이오."

전칠은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마부는 아무렇지도 않지 않느냐?"

"그는 먹을 수 있어도 우린 먹을 수 없는 것이다."

"무엇 때문이냐?"

"왜냐하면 극락동자가 독살시키려는 사람은 그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칠은 냉소를 치며 소리쳤다.

"넌 우리를 굶겨 죽일 작정이냐?"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시험을 해보면 알 게 아니냐?"

전칠은 잠시 초류빈을 쏘아보고 있다가 마부를 불러 말을 멈추게 한 후 만두 반쪽을 떼어주고는 먹으라고 했다. 마부는 영문을 몰라 하면서 두세 입에 만두를 깨끗이 먹어치웠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중독된 현상은 보이지 않았다.

전칠은 때를 만났다는 듯 싸늘하게 냉소를 쳤다.

"이놈, 그래도 이 만두를 못 먹는 것이라고 할 테냐?"

초류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그래도 먹지 못한다."

전칠은 몹시 증오스러운 듯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오냐, 내 꼭 먹어 보아야겠다!"

전칠은 비록 입으로는 이렇게 말을 했지만 그래도 감히 모험은 하지 못했다. 그때 어디서 개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몹시 배가 고픈 듯 고개를 흔들며 마구 짖어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전칠은 가지고 있던 만두를 즉시 개에게 던져 주었다. 그러나 개는 이 만두에 대해 홍미가 별로 없는 듯 한 입만 물어 보더니 그대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개는 채 몇 걸음 가기도 전에 갑자기 마구 날뛰어 바닥에 쓰러져 한참 동안이나 몸부림치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개는 사력을 다한 듯 그제야 잠잠해지는 것이었다.

전칠과 심미 대사는 그제야 크게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초류빈은 길게 탄식을 하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내 말이 어떠냐? 그러나 독살당한 건 네가 아니고 개라서 매우 애석하다."

전칠은 평소 기쁨과 슬픔을 잘 내색하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안색이 싹 변해 마부를 쏘아보며 호통쳤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마부는 몸을 벌벌 떨며 떨리는 음성으로 겨우 대답했다.

"소인은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만두는 아까 그 음식점에서 사온 것입니다."

전칠은 단번에 그의 멱살을 잡고 음흉하게 웃었다.

"개도 독살을 당했는데 너는 어째서 죽지 않는 것이냐? 네가 독을 쓴 게 분명하지?"

마부는 공포로 인해 파랗게 질려 몸을 떨며 일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초류빈은 담담하게 끼여들었다.

"그를 추궁해 보았자 아무런 소용도 없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전칠은 무서운 눈길을 그에게 돌리며 호통을 쳤다.

"이놈이 모르면 누가 안다는 말이냐?"

"내가 안다."

전칠은 움찔하며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네가 알고 있다고? 그럼 이 일이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그 만두 속엔 독이 들어 있지만 국수 국물 속에는 해독약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칠은 다시 한번 움찔하며 몹시 분한 듯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다면 우린 왜 아까 국수를 먹지 않았다는 말인가?"

초류빈은 경멸에 가득찬 음성으로 비웃었다.

"그러나 네가 만약 그 국수를 먹는다면 독은 다시 그 국수 속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극락동자가 독을 내리는 실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미처 방비할 새도 없이 손을 쓴다."

이런 적수를 만나게 되면 입을 다무는 것 외에 또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심미 대사는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다행히 하루 이틀만 있으면 소림사에 도착하게 될 테니 그 동안 꾹 참아 봅시다."

전칠은 참담한 생각이 들었다.

"대사, 아무리 먹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림없는 일일 것 같소."

"뭐요?"

"그들은 우리가 배가 고파 움직일 수 없을 때 출수를 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오."

심미 대사는 묵묵히 그 말을 들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전칠은 갑자기 눈을 번뜩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대사, 우린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온 것 같구려."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말이오?"

전칠은 표정을 어둡게 변화시키더니 음침하게 입을 떼었다.

"그가 노리는 것은 대사도 아니고 본인도 아니니....."

전칠은 초류빈을 쳐다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내심을 간파한 심미 대사는 싸늘한 어조로 못박아 말했다.

"노승은 이미 이 자를 소림사로 데려가겠다고 결심을 했으므로 절대 도중에서 죽게 할 수는 없소."

전칠은 이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초류빈을 볼 때마다 번뜩이는 그의 눈동자로 보아 이미 결심을 내린 것 같았다.

심미 대사 역시 전칠의 이런 속셈을 눈치챈 듯 언제 어디서나 한시라도 초류빈을 자기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전칠은 이것을 보자 몹시 증오스럽고 마음이 급했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마차는 계속 속력을 더해 이날 황혼녘에 한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에 도착은 했지만 이미 크게 혼난 바가 있는지라 이번에는 마부도 함부로 먹지를 못했다.

마차가 기다란 길을 지나고 있을 때 갑자기 일진의 구수한 빈대떡 굽는 냄새가 풍겨왔다. 좀더 앞으로 달려가 보니 길가에 즐비하게 빈대떡집이 늘어서 있었는데 적잖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맛있게 먹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이미 다 먹고 소매로 기름 묻은 입가를 닦고 있었 으나 독살당한 사람은 없었다.

전칠은 군침이 돌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 빈대떡도 먹을 수 없는 것이냐?"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오직 우리만은 먹을 수 없다."

초류빈의 말에 전칠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이런 말을 만약 이틀 전에 했다면 전칠은 절대로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극락동자의 독을 쓰는 수법이 너무 신비스럽고 공포스러워 모골이 송연할 지경까지 이르고 있었다. 때문에 전칠은 이 빈대떡을 먹고 나서 신선이 된다 하더라도 감히 시험을 해볼 수가 없었다.

이때 두 어린아이가 빈대떡집 앞에서 어머니를 조르고 있었다.

"엄마, 나 저 빈대떡 사 줘, 나 먹고 싶단 말이야....."

그러자 빈대떡집 옆에 있는 잡화상점 안에서 뚱뚱한 부인이 걸어나오더니 세차게 두 어린아이의 뺨을 갈기는 것이었다.

"뱃속에 거지가 들어앉았느냐? 지금 겨우 빵을 먹고 있는 것도 죽지 못해 사는 일인데 다시 빈대떡집까지 거덜을 내려고 하느냐? 오냐, 너희 그 죽지 않는 병신 같은 아비가 돈을 많이 벌면 그때 사 줄 테니 그만 울어라."

한 어린아이가 눈을 비비며 그래도 못내 발길을 옮기지 못했다.

"하지만 엄마, 난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면 그땐 빈대떡을 먹지 않고 계란덮밥을 먹을 테야."

초류빈은 그 모습을 보고 암암리에 길게 탄식을 토해내었다. 이 세상에는 빈부가 공평하지 못해 많은 사람들에게 한숨을 심어주고 있었다. 이 두 어린아이들은 그까짓 계란덮밥을 마음속으로 매우 과분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초류빈은 문득 보지 못할 것을 봤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길이 어찌나 좁은지 마차는 한참 비비적거절 후에야 겨우 거리를 빠져나올수 있었다. 이때 그 어린아이가 강냉이죽이 든 그릇을 들고 나와서 다른 사람이 먹는 빈대떡을 쳐다보며 울고 있었다.

전칠은 한참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마차에서 뛰어내려 은자 한 냥을 빈대떡 가게에다 던지고는 막 구워 만든 빈대떡을 집었다.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크게 화가 났으나 그의 이 재빠른 동작을 보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칠은 빈대떡을 그 두 아이에게 주며 말했다.

"아저씨가 이 빈대떡을 모두 너희에게 줄 테니 그 죽을 내게 주겠니?"

두 어린애는 그만 두 눈을 크게 뜨고 세상에 이처럼 맘씨 좋은 사람이 있었던가 하고 실로 믿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두 어린애가 멍청하게 서 있자 전칠은 허리춤을 두드리며 다시 말했다.

"자, 아저씨가 너희에게 돈도 줄 테다."

두 어린애가 멍하니 서 있다가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한 어린애는 빈대떡을, 한 어린애는 돈을 가지고 앞으로 달려갔다.

심미 대사는 전칠이 죽그릇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자 미소를 띠며 발했다.

"시주께선 과연 지혜가 높구려."

전칠은 멋쩍게 웃으며 변명했다.

"나는 먹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이따 밤에 길을 재촉해야 하는 까닭에 이거라도 먹어야만 정신이 날 것 같아서였소. 그러지 않고 도중에 다시 변화가 일어나 감당할 수 있는 체력이 못되면 어떻게 돌진해 갈 수가 있겠소?"

심미 대사는 기다리고 있었던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승의 생각도 바로 그렇소."

전칠은 한 그릇에 담겨 있는 죽을 내밀었다.

"자, 대사께서도 잡수어 보시오."

심미 대사는 신중히 고개를 조아렸다.

"고맙소."

죽은 비록 멀겋고 소금도 쳐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거무스레하기조차 했지만 하루를 굶은 이들에겐 산해진미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이 죽의 가치가 독이 없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칠은 득의한 표정으로 초류빈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 죽도 먹을 수 없는 것이냐?"

그러나 초류빈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심하게 기침을 했다.

전칠은 득의하게 웃어대며 소리쳤다.

"으하하하...극락동자가 만약 미리 알고 이 죽에다가 독을 넣었다면 내 독살을 당한다 해도 미련이 없다."

전칠은 계속 득의하게 웃으며 그릇에 있는 죽을 순식간에 깨끗이 먹어치웠다. 심미 대사 역시 극락동자에게 제아무리 비범한 수단이 있어도 신선이 아닌 이상 미리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6 소이비도 제2권 올가미





올가미



유성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비통하게 말을 꺼냈다.

"내일...내일 자네가 떠나는데 그런데도 난....."

초류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냉막하게 말했다.

"두번 다시 날 배웅하지 마십시오. 나는 남을 배웅해 주는 것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남이 날 배웅해 주는 것도 싫어합니다. 더구나 나는 남이 나를 배웅할 때의 그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 구토를 할 것만 같습니다."

초류빈은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빙긋 웃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더구나 이번에 가는 곳은 그리 멀지 않으니 아마 사오 일 정도면 충분히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맞았네. 내 이번에 자네가 돌아오면 꼭 마중을 나가겠네. 그때 우리 다시 맘껏 마셔 보세." 호유성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한 음성이 유유히 말을 받았다.

"당신은 그가 한 번 가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자신을 속이려고 하는 거죠?" 책망어린 음성과 함께 설벽운이 천천히 몸을 나타내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창백하고 전날보다 더욱 수척해진 것 같았다.

초류빈은 그 말을 듣자 고통의 빛을 떠올렸으나 즉시 껄껄 웃었다.

"내가 어째서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이오? 당신들은 모두 나의 좋은 친구들인데....." 설벽운은 싸늘하게 초류빈의 말을 가로챘다.

"누가 당신의 친구라는 거죠? 이곳엔 당신의 친구는 하나도 없어요." 이어 그녀는 갑자기 호유성을 가리켰다.

"당신은 이 사람이 당신의 친구인 줄 아나요? 이 사람이 만약 당신의 친구라면 이미 당신을 풀어 주었을 거예요." 호유성은 창백하게 얼굴이 변해 의식적으로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그는....." 설벽운은 다시 차갑게 소리쳤다.

"그가 가지 않은 것은 당신까지 끼여들까 봐 그랬던 거예요. 그런데도 당신은 어째서 그를 놔주지 않는 것이죠? 생각해 보세요. 가고 안 가는 것은 그의 일이지만 놔주고 안 놔주는 것은 당신의 일이잖아요?" 이 말을 끝으로 그녀는 두번 다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호유성은 갑자기 무슨 커다란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몸을 바로 세우더니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가 가든 안 가든 나는 풀어 주어야만 한다."

"아하하하...하하하....." 그때 초류빈이 크게 웃어대었다.

호유성은 흠칫하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니, 자네 왜...왜 웃는 것인가?" 초류빈은 경멸에 찬 어조로 외쳤다.

"형님은 언제부터 여인의 말에 따르기로 했습니까? 내가 알고 있는 호유성은 호쾌한 남아지 여인네를 무서워하는 그런 가련한 인간은 아닙니다." 호유성은 갑자기 두 주먹을 불끈 쥐더니 눈물을 뚝뚝 흘렸다.

"동생, 자네는 나를 너무 좋게 대하는군. 나 역시 자네의 고심을 모르는 바가 아니네. 그러나...그러나 만약 이렇게 되면 난 일생 X 동안 자네에게 어떻게 보답을 하라는 말인가?" 초류빈은 입술을 깨물고 한마디 뱉어냈다.

"난 다만 형님께 한 가지 일을 부탁하고 싶소." 호유성은 그 말을 듣자 금방 안색을 밝게 바꾸며 그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인지 서슴지 말고 말해 보게."

"어제 이곳에 왔던 낭천이라는 그 젊은 청년을 형님께선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물론 기억하고 있네."

"그에게 만약 무슨 위험이 닥치면 형님께서 그를 도와주십시오." 호유성은 이 뜻밖의 말에 전신의 맥이 다 빠지는 듯 그의 어깨에서 천천히 손을 내렸다.

"자네는 이런 촉박한 시기에도 그의 일에 대해서만 걱정을 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조금도 생각해 보지 않는 건가?" 초류빈은 그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조급한 듯 다그쳤다.

"승낙하시겠습니까? 안하시겠습니까?"

"내 당연히 승낙하겠네. 하지만 어쩌면 두번 다시 그를 보지 못할지도 모르네." 호유성은 크게 한숨을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류빈은 그만 대경실색을 했다.

"아니! 그렇다면 그가 이미....."

호유성은 간신히 웃음을 꺼내며 대꾸했다.

"난 어제 그가 가는 것을 보았는데 어떻게 다시 돌아온다는 말인가?" 초류빈은 시선을 돌리며 거칠게 호흡했다.

"물론 나도 그가 다시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다시 올 것입니다."

"그가 만약 자네를 구하러 왔다면 어째서 아직까지 오지 않는 건가?" 호유성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나무라듯 다시 이었다.

"현제, 자네는 남에 대하여 의리를 산처럼 귀중하게 여기고 있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네."

"그가 나에게 어떻게 대하든 모두 그의 일입니다. 형님, 이후 언제 어디서 그를 만나더라도 그가 나의 친구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알겠네. 자네의 친구라면 바로 또한 나의 친구일세." 그때 갑자기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나리, 호나리....." 호유성은 그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앉았다.

"현제, 자네는....." 초류빈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내 일은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니 형님께선 마음놓고 가 보십시오. 그러나 내일 아침엔 절대 나를 배웅하러 오지 마십시오."

호유성은 천천히 방을 걸어나가다가 일단 문 밖을 나서자 발길이 갑자기 빨라졌다. 마당 한구석에 있는 나무 아래에서 전칠이 호유성을 향해 손짓을 하고 있었다.

호유성은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나직이 입을 떼었다.

"득수했는가?" 전칠은 애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못했습니다." 순간 호유성은 안색이 크게 변했다.

"무엇이라고? 아니, 자네들 몇 사람에다 심미 대사와 철적 선생까지 합세를 했는데 그 한 놈을 잡지 못했다는 말인가?" 전칠은 쓰디쓰게 웃었다.

"그놈 정말 무섭더군요. 조노대가 그에게 당했을 뿐만 아니라 철적 선생까지도 그의 검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호유성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내 벌써부터 그놈이 범상치 않은 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넨 철적 선생이 꼭 그를 없앨 수 있다고 장담하지 않았는가?"

"그는 비록 도망을 갔지만 심미 대사의 일장에 맞았습니다." 호유성은 주위를 휘둘러보며 언성을 높였다.

"그가 상처를 입었다면 멀리 도망가지 못했을 텐데 너희는 어째서 그의 뒤를 쫓지 않은 것이냐?"

"소림사의 승려들이 이미 쫓아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특별히 통지를 하러 온 것입니다."

"그럼 내가 가볼 테니 자네는 사람을 시켜 이곳을 지키라고 하게." 마당 한가운데 높이 쌓아둔 나무 뒤엔 산이 하나 있었다.

호유성과 전칠 두 사람이 떠나고 나자 산 뒤에서 한 인영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나타난 사람의 아름다운 두 눈동자에는 경악과 의혹이 가득 충만되어 있었고 비애와 분노로 차 있었다. 설벽운은 온몸을 떨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세상에는 갖가지 죄악도 많지만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친구를 파는 도적, 그것이 바로 그녀의 남편인 것이다.

설벽운의 마음은 유리조각처럼 산산조각으로 깨져 버렸다.

설벽운은 약하게 울며 마치 커다란 결심을 내린 사람처럼 초류빈이 갇혀 있는 집 앞으로 걸어왔다. 그러나 그때 일진의 발자국소리가 들려와 설벽운은 즉시 산 뒤에 다시 몸을 숨겼다.

전칠이 이때 칠팔 명의 경장대한들을 데리고 와 싸늘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누구든지 이곳의 출입을 금하라. 만약 불응할 시는 죽여도 무방하다."

전칠은 낭천을 잡으러 가는 것인 듯 말을 끝내기 무섭게 앞으로 달려갔다. 뒤에 남은 대한들은 무기를 쥐고 즉시 초류빈이 들어 있는 집 앞에서 삼엄한 경계를 폈다. 엄중한 경비는 그야말로 개미새끼 한 마리 들어갈 수 없을 정도였다.

설벽운은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피가 흘러내릴 지경이었다. 설벽운은 이제야 자신이 어째서 무공을 경시하고 무학을 연마하지 않았던가 하고 후회를 했다.

설벽운은 본래 이 세상의 많은 일들은 결코 무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벌어진 일들은 그녀로 하여금 무력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교훈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아." 아무런 힘도 없는 설벽운으로서는 이 방에 들어갈 수 있는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으음!" 그때 가벼운 기침소리가 들려오더니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나타난 사람의 발걸음은 일정하지 못했으나 매우 빨랐다.

설벽운은 이 사람이 오늘 초빙되어 온 철적 선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철적 선생은 집 앞에서 소리쳤다.

"초가 놈이 바로 이 집 안에 있느냐?" 대한들은 깜짝 놀라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이구동성으로 대꾸했다.

"저희들은 모릅니다."

"좋다. 비켜라! 내가 들어가 보겠다!" 체격이 우람한 한 대한이 앞으로 나서며 그의 앞을 막았다.

"전칠 나리께서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철적 선생은 크게 노하여 험악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전칠? 전칠이 대체 무엇이냐? 너희들은 내가 누구인지나 알고 있느냐?" 그 대한은 철적 선생의 옷에 묻어 있는 핏자국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튼 누구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래?"

바로 이때, 갑자기 철적 선생의 손이 허공으로 쳐들어지는가 싶었는데 공기를 가르는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수십 갈래의 한성이 앞으로 폭사되었다.

한편 초류빈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마치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이때 초류빈은 문득 비명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이 비명소리는 그렇게 크지 않았고 또 매우 짧았다.

그는 이때, 일종의 예리한 암기에 의해 목구멍을 정통으로 맞으면 비명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문득 뇌리에 떠올렸다. 사실 이런 상황을 그는 수백 번 접해 온 대전경험에 의해 잘 알고 있었다.

초류빈은 눈살을 찌푸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혹 나를 구하러 온 것이나 아닐까.....'

곧이어 초류빈은 철적을 지닌 한 금포인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금포인의 야윈 얼굴엔 혈기라곤 한 점도 없었지만 살기가 가득차 있었다.

초류빈의 눈이 철적에 떨어졌다.

"철적 선생이 아니오?" 철적 선생은 초류빈의 얼굴을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남에게 혈도를 제압당했느냐?"

"내 앞에 술을 두고서도 마시지 않는 것을 보면 모르오?" 초류빈은 빙긋이 웃으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철적 선생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네게 이미 저항할 힘이 떨어졌으므로 널 죽이지 않는 것이 정당한 일이겠지만 난 어쩔 수 없이 널 죽여야겠다." 초류빈은 그 소리에 움찔했다.

"뭣이?" 철적 선생은 작은 두 눈으로 초류빈의 얼굴을 훑어보며 말을 꺼냈다.

"넌 어째서 내가 꼭 너를 죽여야 하는 까닭을 묻지 않느냐?" 초류빈은 바보스럽게 히죽 웃었다.

"내가 만약 묻는다면 더욱 당신의 화만 돋굴 것이고 또 당신에게 해명을 해보았자 믿기는커녕 그래도 날 죽이려고 할 텐데 무엇 때문에 쓸데없이 말을 꺼내겠소?" 철적 선생은 가볍게 놀라 얼굴을 붉히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렇다! 네가 무엇이라 하든 난 꼭 널 죽이고 말 것이다!" 이어 철적 선생의 얼굴에 극심한 고통의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크게 탄식을 내뿜는 것이었다.

"여의, 당신은 매우 비참하게 죽었소. 이제 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당신의 원한을 갚고야 말겠소." 철적 선생은 말하며 천천히 철적을 들어올렸다.

초류빈은 그것을 보고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여의, 만약 당신이 지금의 나를 본다면 분명히 대경실색을 하고 말 것이오. 왜냐하면 당신은 나를 몰라볼 것이고 나 또한 당신을 모르기 때문이오." 초류빈의 말, 그것은 그가 매화도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러나 철적 선생은 그의 말뜻을 간파하지 못하고 당장에 손을 쓸 기세였다.

이때 갑자기 설벽운이 뛰어들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잠깐, 할 말이 있어요!" 철적 선생은 움찔하며 급히 몸을 돌렸다.

"부인...바로 부인이셨구려. 부인, 가능한 한 나를 막지 마시오. 아니, 누구도 나를 막지 못할 것이오!"

순간 설벽운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물론 저는 막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이곳은 저의 집이니 살인을 하려면 최소한 제게 양해를 구하셔야 해요."

철적 선생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그쳐 물었다.

"아니, 그렇다면 당신도 그를 죽이려 한다는 말이오? 어째서 그렇소?"

설벽운은 짐짓 표정을 원독에 가득차게 변화시키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내가 저 자를 죽이려는 이유는 당신보다 더욱 커요. 당신은 고작 아내를 위해 복수를 하려고 하지만 나는 아들의 복수예요. 내게는...내게는 그 애 하나밖에 없어요. 그렇지만 당신에겐 부인이 그 여자 하나뿐이 아니잖아요?"

철적 선생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고 설벽운과 초류빈을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렇다면 부인이 먼저 출수를 한 후에 내가 출수를 하겠소."

철적 선생은 자신의 철적이 가히 번개와 같아 제아무리 뒤에 손을 쓴다 하여도 설벽운의 공격보다 먼저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을 자신했다. 그런데 설벽운이 초류빈의 앞으로 다가가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몸을 돌려 철적 선생의 가슴팍으로 일장을 격출해 내는 것이 아닌가.

설벽운의 무공은 비록 높지 않았지만 결코 약한 여인은 아니었다. 더구나 이 일장은 그녀가 전력을 다해 쳐낸 것인 까닭에 철적 선생은 피할 틈도 없이 그 일장을 맞고 주르르 밀려나 벽에 심하게 부딪쳤다.

철적 선생은 또 본래부터 막중한 상세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암기로 초류빈을 죽이려 마음먹고 있었다.

철적 선생은 그 일장을 감당해 내지 못하고 선혈을 뿜어내며 기절을 하고 말았다.

설벽운 역시 머리가 아찔해 오는 것을 느끼고 그 자리에 쓰러질 뻔하였다.

초류빈은 여태까지 그녀가 개미새끼 한 마리 죽여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출수를 하여 사람을 다치게 하자 몹시 당황하였다.

초류빈은 이 당황스러움이 기쁜 것인지 무엇인지 전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초류빈은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은 또 어째서 왔소?"

설벽운은 길게 몇 번이나 숨을 내뿜더니 겨우 몸을 가누었다.

"나는...당신을 풀어 주려고 왔어요."

초류빈은 탄식을 하며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직도 내 뜻을 모른다는 말이오? 나는 한 번 안 간다면 절대로 안 가는 사람이오."

설벽운은 가늘게 입술을 떨며 괴로운 듯 말을 이었다.

"그래요. 저는 당신이 호유성 때문에 가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는...그는....."

설벽운은 갑자기 몸을 떨더니 아까보다 더욱 심하게 떨기 시작했다. 설벽운은 이런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주먹을 힘껏 쥐어 긴 손톱을 살 속으로 깊이 박아 넣었다.

설벽운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발버둥질을 치며 울부짖었다.

"그는 처음부터 당신을 속였어요. 그는 본래부터 그들과 한패란 말이에요!"

이 울부짖음이 끝나자 그녀는 옆에 있는 탁상 위에 풀썩 엎드렸다. 만약 탁상이 옆에 없었더라면 그녀는 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초류빈이 이 말을 들으면 분명 크게 놀랄 것으로 짐작하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초류빈의 표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을 뿐 아니라 눈 하나 깜빡거리지도 않고 오히려 웃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부인은 아마도 그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구려. 그가 어찌 나를 속이겠소?"

이때 설벽운이 상을 힘껏 잡아당기자 상 위에 있던 잔들이 모두 떨어졌다.

그녀는 몹시 애처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에요. 나는 눈으로 직접 보았고 또 친히 들었어요."

"아마도 부인이 잘못 보았을 거요."

설벽운은 고개를 흔들면서 소리쳤다.

"당신은 아직도 제 말을 믿지 못하겠어요?"

초류빈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달래듯 말했다.

"부인, 요 며칠 신경을 쓰다 보니 피곤하여 잘못 보았을 거요. 자, 가서 푹 쉬도록 하시오. 내일쯤이면 아마 부인께서도 당신의 남편이 얼마나 믿음직한 사람인가를 알게 될 거요."

설벽운은 너무나 평온한 초류빈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갑자기 상 위에 엎어져 목놓아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초류빈은 두 눈을 감으며 더 이상 그녀를 바라보지 못했다.

"아...아...당신은 어째서 사람이 그처럼....."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그녀는 입에서 붉은 선혈을 토해내었다. 설벽운은 드디어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십여 년 동안 억제해 온 감정이 화산이 폭발하듯 모두 터져나왔다.

사랑...그것이 다 무엇이라는 말인가. 설벽운의 두 눈에서 뜨거운 피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설벽운은 비틀거리며 초류빈을 향해 다가갔다.

"가세요. 당신이 정 가지 않겠다면 나는 당신이 보는 이 자리에서 죽고 말겠어요."

초류빈은 마음이 떨렸으나 이를 악물고 한마디 한마디 냉혹하게 뱉어내었다.

"당신이 죽든 살든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설벽운은 고개를 번쩍 쳐들고 초류빈을 놀라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아니, 당신...당신은....."

설벽운은 한걸음 한걸음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그때 갑자기 설벽운의 등 뒤에서 따뜻한 감촉이 부딪쳐왔다.

어느 새 등 뒤에는 호유성이 와 서 있었다. 호유성의 표정은 굳은 쇠처럼 침중했고 또 무거웠다. 그는 두 손으로 설벽운의 어깨를 꽉 부둥켜 안았다. 호유성이 만약 손을 놓는다면 설벽운은 자기의 곁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설벽운은 그의 손이 자기 어깨에 와 있는 것을 보자 즉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랭하게 말했다.

"손을 놓으세요. 그리고 이후부터는 영원히 나를 볼 생각도 하지 마세요."

순간 호유성의 얼굴이 크게 붉어졌다. 그는 스스로 손을 풀며 설벽운의 표정을 주시했다.

"당신도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구려?"

설벽운은 여전히 냉막하게 말했다.

"세상엔 절대로 비밀이 없는 법이에요."

"당신...당신은 이미 모든 것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구려?"

호유성의 음성은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초류빈은 가볍게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사실 그녀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난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호유성은 아까부터 계속 초류빈을 쳐다보지 못하고 있다가 그제야 고개를 들고 넋 나간 사람처럼 반문했다.

"이미 알고 있었다고?"

"그렇습니다."

초류빈의 이 대답을 듣고 호유성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언제 알게 되었는가?"

초류빈은 말을 꺼내기 싫은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바로 형님이 내 팔을 잡고 실수인 척하며 전칠을 시켜 내 혈도를 찍게 할 때였습니다. 나는 비록 알고 있었지만 결코 형님을 나무라고 싶지는 않습니다....."

호유성이 두 주먹을 불끈 쥐자 손목의 힘줄이 하나 둘씩 튀어나왔다.

그는 창백한 표정으로 초류빈을 노려보며 말했다.

"자네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어째서 말을 하지 않았던 거지?"

초류빈은 담담하게 웃으며 반문했다.

"어째서 그걸 내가 굳이 말해야 하오?"

설벽운은 다시 몸을 심하게 떨기 시작했다.

"당신이 말을 하지 않은 건 바로 나 때문이죠?"

초류빈은 눈살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 때문이라고?"

"당신은 내가 알면 마음 상할까 봐, 그리고 우리 집이 파산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죠? 왜냐하면 우리 집은 본래부터 당신의....."

설벽운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다시 눈물을 쏟았다.

초류빈은 갑자기 미친 듯이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으하하하하...여인들은 어째서 장담을 하는 걸 좋아할까? 부인, 내 아까도 말했지만 말을 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았던 거요. 그리고 내가 가지 않은 이유는 그가 절대로 나를 놓아줄 리가 없다는 것을 이미 짐작했기 때문이었소."

초류빈은 쉴새없이 웃으며 또 끊임없이 기침을 해댔다. 어느덧 그의 두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으나 웃음 때문에 흐르는 눈물인지 아니면 기침이 너무 심해 눈물이 나온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설벽운은 그의 기침이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난 아무렇지도 않아요. 난 이제 모든 것을 알았으니까요."

"안다고? 대체 당신이 뭘 안다는 거요? 당신은 호유성이 어째서 내게 이렇게 대하는지 알고 있소? 그렇소. 당신도 알다시피 그는 내가 당신의 집안을 파탄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까 봐 그러는 거요."

초류빈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이런 것은 모두 그가 집안을 중요하게 여기고 더욱 당신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오."

설벽운은 그를 쳐다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후후후후....그는 당신을 해쳤는데 그래도 당신은 그를 위해주다니 정말 좋은 친구예요. 당신은...하지만 나도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나요? 당신이 내게 그처럼 대할 수가 있느냔 말예요."

설벽운의 이 말은 격동에 가득차 있어 도대체 그녀가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초류빈은 다시 격렬하게 기침을 계속하며 이번에는 피까지 토해내었다.

호유성은 초류빈을 내려다보며 말을 꺼냈다.

"자네의 말이 맞았네. 그건 바로 이 집을 위해 그리고 내 아들을 위해서였지. 우린 본래 매우 다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자네가 온 후로 모두가 싹 변해 버렸네."

호유성은 여기까지 말을 꺼내더니 갑자기 격동이 치미는지 미친 듯이 소리쳤다.

"난 본래 한 가정의 가장이었네. 그런데 자네가 온 후부터 나는 마치 손님처럼 변해 버렸네. 그리고 나는 매우 건강하고 쾌활한 자식을 갖고 있었는데 자네가 온 후로 그 애는 반 죽은 애나 마찬가지로 되어 버렸네."

초류빈은 길게 탄식하며 괴로운 듯 고개를 내저었다.

"맞았습니다. 난...난 확실히 오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호유성은 갑자기 설벽운을 꽉 부둥켜 안았다.

"그러나 내가 제일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당신이오. 난 모든 것을 그에게 되돌려 줄 수 있어도 당신만은 절대 놓칠 수가 없소."

호유성은 말을 하면서 눈물을 쏟았다.

그러나 설벽운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가 흔드는 대로 몸을 내맡겼다. 길고 검은 속눈썹 아래로 눈물이 마치 천 개의 진주를 풀어놓은 듯 방울 방울 떨어졌다.

"그러나 당신이 아직도 날 사랑하고 있다면 결코 이렇게 할 수는 없어요."

"그렇소. 나는 결코 이렇게는 하고 싶지 않았소. 그러나 또 하나의 무서움이 나를 짓눌렀기 때문이오."

설벽운은 가만히 웃었다.

"당신 같은 사람이 무엇을 그처럼 무서워했죠?"

호유성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떠들었다.

"나는 당신이 떠날까 봐 그랬던 것이오. 당신은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난 이미 짐작하고 있었소. 그것은...당신이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하고 있는 까닭에 당신이 그에게로 돌아갈까 봐 그랬던 거요."

설벽운은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앙칼지게 외쳤다.

"이 손 치우세요! 당신은 이 손만 더러운 것이 아니라 마음은 더욱 추악해요. 당신은 날 겨우 그런 여자로 보았나요? 그리고 저 사람도 겨우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않았나요?"

설벽운은 땅에 엎드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목놓아 통곡했다.

"당신은 어쩌면 그리도 어리석어요? 당신은 내가 당신의 아내라는 것을 이미 잊었나요?"

그러나 호유성은 그 자리에 선 채 마치 석상으로 변해 버린 듯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초류빈은 그런 그를 쳐다보며 괴로운 듯 중얼거렸다.

"이것은 도대체 누구의 잘못이라는 말인가? 누구의 잘못인가 ....."

한편 낭천은 온몸이 봄날의 아지랑이 속에 잠긴 듯 나른하고 구름 위에 누워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눈앞의 공기 속에는 마치 일종의 빛이 감도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고 코를 진동시키는 향기가 감돌았다. 낭천은 이미 깨어났지만 아직까지도 꿈속을 헤매는 것 같았다.

그는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낭천은 여태까지 한 번도 이런 곳에 와 본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또 이런 꿈조차 꾸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그는 꿈을 꾸어도 영원히 녹지 않는 빙설이 뒤덮인 높은 산과 넓고 거치른 황야, 눈을 번뜩이며 노리는 야수들, 그리고 끊임없이 덮쳐오는 재난과 고난의 연속을 겪고 있었다.

낭천이 눈썹을 꿈틀거리고 있으려니까 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 깨어나셨어요?"

이 음성은 매우 부드러웠고 정다움이 가득 넘쳤다.

낭천이 이끌리듯 눈을 떠 보니 눈앞에 한 절색의 얼굴이 있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부드러운 표정,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미소, 두 눈동자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정감까지 감돌고 있었다. 그 부드럽고 아름다운 얼굴은 마치 낭천의 어머니와도 같았다.

낭천이 어려서 병이 났을 때 어머니가 이렇게 옆에 붙어 앉아 이처럼 부드럽게 자기를 지켜보았던 것을 기억해 내었다.

설소하, 눈앞의 여인은 바로 그녀였다.

낭천은 깜짝 놀라 침상에서 내려오려 했다.

"여기가 어디오?"

그러나 막 일어서는 순간 그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설소하는 그를 바로 눕히며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 주었다.

"이곳이 어디라는 것은 상관하지 마시고 그냥 당신의 집으로만 생각하세요."

"나의 집?"

낭천은 여태까지 이 집이라는 말이 무엇을 내포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낭천에겐 여태까지 집이라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설소하는 눈을 내리깔며 쑥스러운 듯 말했다.

"제가 생각하기엔 당신의 집은 분명히 부드럽고 따스할 것 같아요. 당신에겐 그처럼 좋은 어머님이 계시니까...당신 어머님은 분명히 부드럽고 아름답고 또 당신을 충분히 사랑해 줄 거예요."

낭천은 한참 동안 말을 꺼내지 못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겐 집도 없고 어머님도 없소."

설소하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혼미상태 속에서 계속 어머니를 불렀어요."

낭천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얼굴에는 표정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어머님은 돌아가셨소."

그의 얼굴에는 비록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눈동자는 이미 젖어 있었다.

설소하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미...미안해요. 내가 이 말을 꺼내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설소하가 말끝을 흐린 후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낭천은 길게 한숨을 내뿜으며 물었다.

"당신이 날 구했소?"

"그때 당신은 기절해 있었기 때문에 잘 모를 거예요. 제가 당신을 이 방으로 데려왔어요. 그러니 마음놓고 충분히 요양이나 하세요. 누구를 막론하고 이 방에는 절대로 들어올 수 없으니까요."

낭천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설소하의 눈길을 피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면서 내게 이르기를 절대 남의 도움을 받지 말라고 하셨는데 지금....."

낭천의 석고와 같은 견고하고 표정없는 얼굴이 갑자기 격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내 지금 당신에게 한 목숨을 구제받게 되었구려."

설소하는 그를 위로하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제게 빚진 것이 하나도 없어요. 제 목숨도 당신이 구해 주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낭천은 길게 탄식을 내뿜고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어째서 나를 구했소? 어째서 나를 구했느냔 말이오?"

설소하는 말없이 그를 한참 내려다보고 있다가 희고 가느다란 손을 내밀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세요. 시간이 지나면 내가 어째서 당신을 구했는지 자연히 알게 될 테니까요....."

설소하의 손가락은 마치 뼈가 없는 것처럼 부드러웠고 따스하기는 마치 수증기와도 같았다. 순간 설소하의 아름다운 얼굴이 동녘 하늘처럼 붉어졌다.

낭천은 참을 수 없어 눈을 감았다.

그의 마음은 본래 암석처럼 견고했는데 어찌 된 셈인지 지금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파문이 일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마치 평정한 호수에 커다란 소용돌이가 일어난 것 같았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에게 이런 감정이 남아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두 눈을 꼭 감고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지금은 낮이오, 밤이오?"

"아직 삼경도 못 되었어요."

낭천은 그 말을 듣자 불현듯 두 눈을 번쩍 뜨더니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설소하가 깜짝 놀라 그의 상체를 눌렀다.

"아니, 당신은 이 밤중에 어딜 가려고 그러세요?"

낭천은 이를 악물었다.

"난 절대로 그들이 초류빈을 데려가게 놔둘 수 없소."

설소하는 고개를 돌리며 냉막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떠났어요."

낭천은 그만 침상에 고꾸라지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지금은 삼경도 채 되지 않았다고 했지 않소?"

"지금은 아직 삼경도 못되었지만 초류빈은 어제 아침에 이미 떠났어요."

낭천은 실성한 사람처럼 소리쳤다.

"어제 새벽에? 그렇다면 내가 하루 동안이나 기절해 있었다는 말이오?"

"당신의 상세는 실로 엄청났어요. 때문에 당신 말고는 그 누구도 참아내지 못했을 거예요. 자, 그러니 잠자코 상처나 치료하도록 하세요."

설소하는 침상 머리맡에 있는 붉은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가볍게 닦아 주었다.

낭천은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설소하는 가볍게 그의 입을 막았다.

"더 이상 그의 말은 꺼내지 마세요. 왜냐하면 그가 처해 있는 환경이 당신보다 위험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그를 구하려면 먼저 당신의 상세부터 완치시키도록 하세요."

그녀는 그를 똑바로 눕히고 다시 이불을 덮어 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심미 대사가 그를 소림사로 데려가겠다고 했으니 도중에 절대로 어떤 위험은 생기지 않을 거예요."

낭천은 체념한 듯 아무 말없이 두 눈을 감았다.

한참 후 낭천의 모습을 옆에서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던 설소하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가 가는 도중에 절대로 위험이 없을 것이라고?"

낭천은 이렇게 물으면서 어째서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궁금해 하였다.

설소하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꾸하였다.

"절대로 없을 거예요. 심미 대사와 전칠이 그를 호송하고 가는데 누가 감히 덤빌 수 있겠어요?"

그녀는 가만히 낭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저를 믿는다면 마음놓고 주무세요. 저는 이 옆에서 당신을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요."

낭천은 눈을 크게 떠서 설소하의 부드럽고 천진스런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잠시 그녀의 눈 속에서 헤매던 낭천의 두 눈은 천천히 감겼다.

초류빈은 마차에 등을 기댄 채 말없이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러나 문득 건너편의 심미 대사와 전칠에게 눈길이 멎자 갑자기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전칠은 웃음소리를 듣자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쏘아보았다.

"무엇 때문에 웃는 거냐?"

"난 그저 매우 재미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오."

"재미있다고?"

그리고 초류빈은 길게 하품을 하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이런 모습은 마치 잠을 자려는 것 같았다.

전칠은 화가 치미는 듯 그를 끌어당기며 소리쳤다.

"나의 어디가 그처럼 우스우냐?"

"미안하지만 난 당신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오. 세상에는 비록 많은 흥미거리가 있지만 당신만은 예외요. 당신은 정말 재미가 없을 지경이라는 말이오."

전칠의 얼굴빛이 갑자기 변하는가 싶더니 한참 후에야 천천히 손을 놓는 것이었다.

옆에 있던 심미 대사는 쪽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있다가 눈썹을 불쑥 치켜올리며 소리쳤다.

"그렇다면 노승의 어디가 재미있다는 말이오?"

심미 대사는 여태껏 한 번도 남이 자기더러 재미있다고 한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초류빈은 지루한 듯 다시 하품을 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당신을 보고 재미있다고 느낀 것은 아직 한 번도 마차를 탄 화상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오. 나는 출가인이라면 말도 못 타고 마차도 못 타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승려도 사람이니 비단 말을 타야 할 뿐만 아니라 밥도 먹어야 하는 법이오."

초류빈은 눈을 크게 뜨고 의아스러운 듯 물었다.

"당신이 기왕 마차를 탔다면 어째서 편안하게 앉지 않는 거요? 난 당신이 그처럼 엉거주춤 앉은 것을 보고는 엉덩이에 혹이라도 난 줄 알았소."

순간 심미 대사의 표정이 완전히 음침해졌다

"넌 노승이 너의 입을 틀어막아 주길 바라느냐?"

"만약 나의 입을 봉쇄하고 싶다면 술병으로 하시오. 될 수 있는 한 술병에 술을 가득 채우고요."

초류빈은 조금도 초조한 기색없이 비아냥거렸다.

심미 대사가 전칠을 향해 눈길을 돌리자 전칠은 천천히 손바닥을 초류빈의 목줄기로 내밀었다.

"내가 이 손에 힘을 주기만 하면 넌 어떻게 되는 줄 알고 있느냐?"

초류빈은 빙긋이 웃으며 대꾸했다.

"만약 그 손에 힘을 준다면 많고 많은 재미있는 말을 듣지 못할 것이오."

"흥, 그렇지만 내 듣지 않기로....."

전칠이 여기까지 말하고 막 손에 힘을 주려는 찰나 갑자기 말이 크게 울부짖으며 마차가 우뚝 멈추는 것이었다

마차는 원래 비스듬한 내리막길을 매우 급하게 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멈추자 마차 속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게 되었다. 그 서슬에 사람들은 머리를 마차 천장에 부딪칠 뻔했다.

전칠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크게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 너희들이 혹시....."

전칠이 소리치며 마차 밖으로 머리를 내민 순간 그만 입을 쩍 벌리고 안색까지도 변했다.

15 소이비도 제1권 뱀과 학





뱀과 학



낭천은 대뜸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 밖에는 한 사람도 지키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어쩌면 어느 누구도 낭천이 감히 대뜸 들어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기회에 낮잠이나 실컷 자려고 했을 것이다.

땔감을 쌓아 두는 이 광 속엔 단 하나의 매우 작은 창문이 있었다. 그야말로 한마디로 표현해 천생의 지옥처럼 음산했다.

재목들이 작은 산처럼 쌓여 있는 아래 한 사람이 이미 기절을 한 것인지 아니면 잠이 들어 버렸는지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낭천은 그 자의 옷을 보자 일시에 뜨거운 피가 들끓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낭천은 어째서 이 사나이에게 이처럼 깊고도 강한 우정이 생겼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단숨에 달려가 격동에 찬 어조로 입을 떼었다.

"당...당신....."

바로 그 순간이었다. 휘익! 하는 예리한 파공음이 일더니 한가닥의 검빛이 낭천의 앞으로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검빛은 번개같이 낭천의 두 다리를 휘감고 덮쳐왔다. 이 졸지의 변화는 너무나 크게 사람의 상상을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덮쳐오는 일검의 위세도 매우 빨랐다. 다행히 낭천도 수중에 검을 쥐고 있었던 까닭에 그의 검이 더 빨랐다. 그 빠르기는 정말 불가사의할 정도라 상대의 검이 비록 먼저 찔러왔으나 낭천의 검이 먼저 발출되고 있었다.

챙!

맑은 금속성 소리가 울려퍼지며 낭천의 검은 상대방의 검신에 부딪쳤다. 상대방은 이 순간 갑자기 손목이 절단되는 것을 느끼고 수중에 있던 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나 상대방도 보기드문 고수인 듯 위험에 처했으나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에 바닥으로 몸을 굴려 일 장 밖으로 나가 있었다. 상대는 바로 유룡생이었다.

낭천은 그를 알지 못했지만 그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일검을 출수한 후에 즉시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낭천이 비록 번개같이 뒤로 피해 내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 버렸다. 문 밖에는 이미 한 개의 몽둥이와 한 자루의 금도가 길을 막고 있었다.

낭천은 깜짝 놀라 막 걸음을 멈추는 순간 갑자기 거대한 진동이 일어나더니 작은 산처럼 쌓아 놓은 재목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리고 재목들 뒤로 몇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열 명 이상의 사람들은 모두 경장을 입고 손에는 활을 든 채 낭천을 겨누고 있었다. 지금 이런 거리 정도에서는 궁도의 위력이란 실로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것이다. 어느 누구이든 간에 제아무리 위대한 실력이 있고 없고 간에 이런 땔감 광 속에서 십여 자루의 활시위를 벗어난다는 것은 실로 하늘을 날으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인 것이다.

낭천이 싸늘한 눈초리로 사방을 훑어보자 전칠이 웃으며 입을 떼었다.

"또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가?"

낭천은 천천히 한숨을 내뿜으며 그 자리에 내려앉았다.

"어서 쏘기나 하시오."

그러자 전칠은 갑자기 광이 떠나가라 크게 웃어젖혔다.

"으하하하하...당신은 과연 통쾌무쌍한 사람이구려. 내 그렇다면 당신의 소원을 이루어 주겠소."

전칠이 막 손을 흔들자 화살이 비오듯 쏟아져 왔다. 바로 이 위기일발의 순간, 낭천은 갑자기 바닥에 몸을 굴리더니 왼손으로 아까 유룡생이 떨어뜨린 탈정검을 주워 들었다.

검빛을 앞으로 날리는 순간 하나의 무형 담벼락을 만들어 화살들을 사방으로 날리게 만들었다.

"이놈, 어딜!"

그때 조정의가 폭갈을 내지르며 자금도로 일식의 입벽화산(立劈華山)을 전개해 내었다.

그러나 조정의의 일검이 막 내려오는 순간 앞에서 한가닥의 검빛이 먼저 폭사되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 일검의 빠르기는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았다.

"아니!"

조정의는 대경실색하며 초식을 바꾸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검은 어느 새 그의 목구멍을 관통시켜 시커먼 피를 내쏟게 하고 있었다.

전칠은 그것을 보자 크게 놀라며 수중에 든 큰 몽둥이를 마구 휘둘렀다. 그때 한가닥의 찬란한 무지개가 일더니 한 물체가 재빠르게 문 밖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었다.

전칠은 막 추격해 나가려고 하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음인지 갑자기 멈추었다. 조정의가 자기의 목을 어루만지며 발버둥질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그는 아직도 숨을 거두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우선 이곳을 탈출하는 것이 급선무였지 사람을 죽이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저 두 치 정도밖에 검을 밀어넣지 않아 다행히 조정의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낭천은 작은 마당으로 달려나오자 수중의 탈정검을 표창처럼 세워 전칠에게 던졌다. 그래서 전칠은 막 추격을 하려다가 멈추고 만 것이다.

낭천의 장검은 전칠의 옆을 스치고 지나가 건너편 담벼락에 깊숙이 꽂혔다.

유룡생은 그제서야 한숨을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젊은이는 보기 드물게 매우 빠른 신법을 지니고 있군요."

전칠은 빙긋이 웃으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저 운이 좋았다고 보아야 할 뿐이오."

"운이 좋았다고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소장주께선 아까 그의 몸에 화살이 두 개 꽂힌 걸 보지 못했다는 말이오?"

유룡생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맞았소. 나는 아까 그가 검을 휘두를 때 그 검막 속에 허점이 있는 것을 보았소.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가 상처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오."

"그것은 그가 늘 금사갑을 입고 있기 때문이오. 나는 천만 번이나 주의를 했지만 그것을 잊고 있었던 거요. 그렇지 않았다면 그에게 제아무리 큰 실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마 이 광을 빠져나가지는 못했을 거요."

전칠은 매우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룡생은 길게 한 숨을 내뿜으며 씁쓸한 투로 말했다.

"그러나 아무튼 그는 오늘 오지 않았어야 했고 나도 오지 말았어야 했소."

전칠은 조용히 그를 위로했다.

"승부란 원래 병가상사이니 소장주께선 너무 심려치 마시오. 그가 비록 제일관문을 통과하기는 했지만 제이관문도 뚫을 것 같소?"

낭천이 막 문을 나서는 순간 갑자기 사면팔방에서 우렁찬 불호가 울려퍼졌다. 곧이어 낭천은 다섯 명의 회포숭려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다섯 사람은 모두 합장을 하고 있어 출수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으나 그들의 그 엄중한 모습들은 그야말로 산악이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맨 앞에 서 있는 승려는 백설처럼 흰 눈썹에다 긴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왼손에는 하나의 갈색 염주를 들고 있었다.

이 대사가 바로 소림의 호법대사 심미인 것이다.

낭천은 사방을 상세히 살펴보았지만 그 오만하고 당당한 신색은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이제 보니 출가하신 분들도 매복을 할 수 있군요."

심미 대사는 음침하게 입을 떼었다.

"노승은 사람을 해치고자 하는 마음은 없소. 그러니 시주께선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시오. 자고로 사람이란 입으로 화를 불러들이고 그 피해는 몸으로 받는 법이오. 그러므로 남을 상하게는커녕 오히려 자기 자신이 피해를 보고 마는 거요."

심미 대사는 매우 평온하게 얘기를 하는 것 같았으나 낭천의 귀에 닿았을 때는 그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우뢰와 같이 변해 귀를 진동시켰다.

낭천은 싸늘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러나 대사 역시 그 이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소."

그는 말하면서 옆으로 비스듬히 돌진해 들어갔다.

낭천은 만약 자신이 공중으로 뛴다면 단번에 허점이 드러나 심미 대사의 염주가 자기의 두 다리를 절단시킬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방법을 연구하다가 하는 수 없이 기회를 틈타 옆에 있는 두 사람 사이의 공지로 돌진해 들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막 움직이는 순간 소림 승려들도 갑자기 몸을 움직이더니 마치 소용돌이처럼 그의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낭천은 그들의 행동에 정신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끼고 즉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소림 승려들도 행동을 멈추었다.

심미 대사가 엄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출가한 사람은 살생을 싫어하니 시주가 만약 이 자그마한 나한진(羅漢陣)을 빠져나갈 수 있다면 내 기꺼이 보내드리겠소."

그러나 낭천은 거칠게 숨을 몰아쉴 뿐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는 이때 소림 승려들이 비단 공력만 심후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배합도 물샐틈없이 엄중하다는 것을 알았다. 때문에 그는 서투른 동작으로는 절대 저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낭천은 여덟 살 되던 해, 한 마리의 학이 커다란 구렁이에게 잡힌 것을 보았다. 학의 입은 비록 길고 예리했지만 시종일관 감히 출수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철이 없었던 터라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후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다음에야 그는 학이 구렁이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구렁이는 일단 먹이를 잡게 되면 동그랗게 뱀진을 만든다. 머리와 꼬리가 서로 엉키는 것이 그야말로 번개와 같아 만약 학이 뱀의 머리를 물게 된다면 학의 두 다리는 여지없이 뱀의 꼬리에 감기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만약 뱀의 꼬리를 문다면 그 날카로운 이빨에 모가지를 물리고 말 것이다. 학은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까닭에 계속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구렁이가 참지 못하고 먼저 공격을 감행할 때 학은 번개처럼 주둥이를 내뻗어 뱀의 목 바로 아래에 있는 급소를 물어버렸다. 물론 학이 이긴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낭천은 그날 그것을 보고 이날까지 그 이치를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낭천은 소림 승려가 움직이지 않는 한 절대로 움직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낭천은 일언반구의 대답도 없이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었다.

시간은 초조하게 흘러가고 주위에 몰아치는 바람도 매우 차가웠다.

이윽고 심미 대사는 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시주, 그렇다면 항복을 하겠다는 말이오?"

"아니오."

낭천의 대답은 매우 간단하고 명확하여 한마디도 낭비할 수 없다는 듯 보였다.

심미 대사는 이 의외의 대답에 흰 눈썹을 꿈틀거렸다.

"시주, 기왕 항복할 수 없다면 어째서 가지 않는 것이오?"

낭천은 다시 명확하게 대꾸했다.

"당신이 나를 죽이지 못하면 나 역시 당신을 살해할 수 없으며 빠져나가지 못하는 거요."

심미 대사는 흰 눈썹을 꿈틀거렸다가 냉막하게 내뱉었다.

"만약 노승을 죽일 수만 있다면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겠소."

"그렇다면 좋소."

낭천은 대답하고 나서 드디어 몸을 움직였다. 일단 행동을 개시하게 되자 그 빠르기란 마치 번개와 같았다. 허공에 검빛이 번뜩이는가 싶었는데 날카로운 검이 어느 새 심미 대사의 목구멍을 향해 찔러가고 있었다.

그러자 소림 승려들도 즉시 행동을 개시하여 여덟아홉 개의 장이 한꺼번에 산악처럼 낭천을 향해 격출해 나갔다.

바로 낭천의 검이 나가는 순간 그의 발길이 갑자기 확 변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가 발길을 바꾸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단지 그의 몸이 방향을 바꾼 것으로만 알았다.

낭천의 일검은 분명히 심미 대사를 찔러온 것이었으나 갑자기 변경을 시키자 다른 네 승려는 자기네의 손이 마치 그 검에 절단되게끔 자청해서 내민 것 같았다.

네 승려가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하는 순간 심미 대사가 냉혹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좋다!"

이 짧은 외침과 함께 심미 대사의 옷소매 속에서는 이미 한 가닥의 경풍이 쏟아져 나왔다. 네 명의 소림 승려는 비록 위험에 처해 있었지만 심미 대사는 구태여 구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소림의 나한진만이 갖고 있는 위력인 것이다.

그런데 누가 짐작이라도 했겠는가? 이 순간 낭천의 검이 찔러나가는 방향을 다시 바꾸었다. 다른 사람이 검을 변화시킬 때는 단지 출수한 부위만 변경할 뿐이지만 낭천이 검을 변식시키자 온 방향이 모두 변해 버린 것이다.

낭천의 검수가 얼마나 기묘한지 동쪽을 찌르는가 하면 갑자기 서쪽에서 나타나고는 하여 그 변화가 실로 막측하였다. 그러나 사실 그의 검세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상태였다. 변했다면 그의 발길의 변화가 너무 빨랐기 때문에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에 이런 두 다리가 있을까 하고 믿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때 예리한 소리가 들리면서 경풍을 내쏟던 심미 대사의 옷소매가 길게 찢겨져 나갔다. 곧이어 검빛이 갑자기 허공에 파란 무지개를 일으키더니 사람과 같이 혼연일체가 되어 진세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낭천은 천만다행으로 득수를 했으나 이미 등 뒤에 커다란 허점이 드러났다는 것을 그만 잊고 말았다.

이때 심미 대사가 커다란 음성으로 소리쳤다.

"잠깐만 멈추어라! 내 바래다 줄 테니까!"

동시에 낭천의 등 뒤로 한가닥의 막강한 경기가 들이닥쳤다.

이 순간 낭천은 마치 거센 쇠망치에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비록 금사갑을 입고 있었지만 이 순간 가슴의 피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그의 몸은 그 장력에 의해 실 끊어진 연처럼 허공으로 날았다.

이때 한 소년 승려가 큰소리로 외쳤다.

"추격합시다!"

그러나 심미 대사는 평온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만두어라."

소년 승려는 앞으로 나서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짙게 찌푸렸다.

"그는 이제 멀리 도망가지 못할 텐데 사숙께선 어째서 그를 도망가게 내버려 두는 것입니까?"

심미 대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으며 되물었다.

"그렇다. 그가 이미 중상을 입었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쫓겠느냐?"

소년 승려는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을 해 보더니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심미 대사는 낭천이 도주를 한 방향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떼었다.

"자고로 출가인이라면 자비를 베푸는 것이 본분이야.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을 수 있다면 되도록이면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좋다."

전칠은 이때 멀리서 이 다섯 승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칠은 빙긋이 웃더니 나직이 중얼거렸다.

"출가인의 자비 하나는 그럴싸하군. 만약 다른 사람이 그를 대신해 살인을 해 준다면 그 자신이 직접 손을 써서 불가를 더럽히는 일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전칠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언제까지나 마당 한구석에 서 있었다.

한편 낭천은 심미 대사가 밀어낸 장력에 의해 허공을 날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나는 세력을 빌어 장력을 해소시키려고 했다. 소림 호법의 장력은 과연 심후했고 또한 범상치 않았다.

낭천은 두 개의 지붕을 넘어서자 겨우 몸을 멈출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두 번째로 다시 뛸 때 자기의 내장이 이미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이런 상세쯤은 충분히 참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통으로 연마된 단련, 갖가지 고난이 엉켜 이룩되어 온 세월 등이 낭천으로 하여금 쉽게 넘어가지 않는 사람으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주위는 점차 어둠 속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사방에는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으나 이미 나무와 지붕 등에는 사람이 잠복할 만한 요소들이 갖추어지고 있었다.

지금 낭천이 만약 이곳에서 탈출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다행 중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림사의 호법과 또 사대 고승의 그 위맹한 공격 아래 탈출을 해낸 사람은 정말 천하에 보기 드문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낭천은 탈출을 원치 않았다. 그는 한 가지 하고자 했던 일이 성공을 하지 못하면 절대로 도중에서 포기를 하지 않는 성미였다.

전칠 그들은 과연 초류빈을 어디에다 숨겨 놓았다는 것일까. 낭천은 두 눈으로 마치 독수리처럼 사방을 살피며 고양이처럼 지붕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후원으로 접어들었다. 지붕 위에 있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목표물이 되기 쉽고 또 후원에는 몸을 숨길 만한 곳이 많기 때문이다.

그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숨어 들어가다가 갑자기 귓전으로 맑은 웃음소리가 때려오는 것을 들었다. 웃음소리는 그렇게 높지 않았으나 거리가 매우 가까운 것 같았다. 낭천은 이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지만 웃음을 터뜨린 사람과의 거리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수 장 밖에는 자그마한 정자가 있었는데 그 속에서 한 사람이 정신없이 책을 읽고 있었다. 그의 그러한 태도는 전혀 다른 일을 주의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다 떨어진 금포를 입고 있었는데 얼굴이 매우 노랗고 또 깡말랐다. 턱에도 몇 가닥의 수염만 났을 뿐이었는데 마치 영양실조에 걸린 늙은 학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런 노학도가 만약 수 장 밖에서 웃었다면 다른 사람은 절대 그 웃음소리를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오직 내공이 절정에 달한 고수만이 이렇게 멀리까지 소리를 보낼 수 있는 것이다.

낭천은 절로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 노학도는 사뭇 그를 보지 못한 듯 손에다 연신 침을 발라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며 흥미진진하게 들여다 보고 있었다.

낭천은 마치 무엇에 놀란 듯 한걸음 한걸음 뒤로 물러나 몇 십보 후퇴를 한 후 갑자기 몸을 홱 돌렸다. 몸을 돌리는 순간 그는 이삼 장 밖으로 나가 더 이상 고개를 돌리지 않고 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매화가 한창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자라나고 있고 일진의 향기로운 냄새가 코를 진동시키며 마음을 녹였다.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어 목구멍으로 치밀어오른 피비린내를 가라앉혔다. 더구나 아까 진기를 끌어올릴 때는 가슴에서 선혈이 치솟아오르는 것 같아 이미 남과 겨루기엔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꼈다.

바로 이 순간 일진의 미세한 피리소리가 들려왔다. 피리소리가 돌려오자 매화 위에 쌓인 눈이 그 소리에 의해 한 송이 두 송이 떨어져 낭천의 헐떡거리는 몸 위에 쌓였다.

낭천은 눈보라가 휘날리는 속으로 한 사람이 수 장 밖에 떨어진 매화나무 아래에서 피리를 불고 있는 것을 보았다. 몸에 다 떨어진 금포를 걸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책을 읽던 그 노학도가 틀림없는 것 같았다. 피리소리는 점차 높아지고 그 굴곡도 심해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이제 낭천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한마디 한마디 말을 토해 내었다.

"당신이 바로 철적 선생이오?"

이때 철적 선생이 고개를 들었다. 순간 한 쌍의 눈동자가 마치 차가운 별처럼 폭사되어 나와 낭천의 두 눈에 꽂혔다.

바로 이 순간 철적이라는 노학도는 마치 십 년이나 더 젊어진 것 같았다.

철적 선생은 낭천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꽉 다문 입에서 말을 꺼냈다.

"상처를 입었는가?"

그의 말에 약간 의아스러워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이 사람은 정말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구나!'

낭천이 아무 말이 없자 철적 선생은 다시 물어왔다.

"등에 상처를 입었는가?"

낭천은 흠칫 놀라며 싸늘한 어투로 말했다.

"이미 아시면서 어째서 또 묻는 거요?"

철적 선생은 눈동자를 굴리며 재차 물었다.

"심미 화상이 한 짓이지?"

"흥!"

낭천이 코웃음을 치자 철적 선생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소림 호법이 이제보니 고작 이 정도였구나."

"고작 어떻다는 말이오?"

철적 선생은 담담한 투로 말을 이었다.

"그의 신분으로 봐선 배후에서 사람을 공격할 수가 없네. 그리고 기왕 자네를 부상당하게 했으면 자네를 살려 보내어선 더욱 안 되는 노릇이었네."

철적 선생은 말을 끝내고 담담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노화상이 남을 이용해서 살인을 하겠다는 말인가?"

낭천은 짓궂게 웃으며 냉막하게 말을 이었다.

"내 당신에게 한 가지 가르쳐 줄 것이 있소. 첫째, 만약 그가 배후에서 출수를 하지 않았다면 그는 도저히 손을 쓰지 못했을 거요. 둘째로 그가 아무리 어느 곳이나 출수를 한다 하더라도 나를 죽일 수는 없었을 거요. 셋째, 그리고 당신 역시 나를 죽이지는 못할 거요."

철적 선생은 고개를 하늘로 올리고 크게 웃어대었다.

"으하하하...젊은이가 너무 호언장담을 하는군."

철적 선생은 즉시 웃음을 거두고 매서운 어투로 말했다.

"나 역시 자네가 이미 상처를 입었으므로 본래부터 출수하기가 싫었네. 그러나 자네의 그 이기가 너무 광오하여 내 자네에게 교훈을 주지 않을 수가 없네."

낭천 역시 자기가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것을 느꼈는지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철적 선생은 낭천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꺼냈다.

"자네는 이미 상처를 입었으니 내가 삼 초를 양보하겠다."

낭천은 철적 선생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가 소리내어 웃었다. 그는 웃으며 검을 허리춤에 찔러 넣고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철적 선생이 급급히 몸을 날려 독수리처럼 낭천의 앞을 가로막고는 소리쳤다.

"나를 만났으면서 또 어딜 가겠다는 말이냐?"

낭천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냉랭하게 입을 떼었다.

"그러나 내가 가지 않으면 당신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

철적 선생은 눈썹을 싹 치켜올리며 버럭 소리쳤다.

"내가 죽는 것이냐? 아니면 네가 죽는다는 것이냐?"

"그 누구라도 내게 삼 초를 양보할 수는 없소."

철적 선생은 그의 말뜻을 알았는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만약 너에게 삼 초를 양보하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소리냐?"

"맞았소."

"그렇다면 어째서 시합을 하지 않는 것이지?"

낭천은 이제 한마디의 대꾸도 없이 눈길을 들어 철적 선생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이 순간 철적 선생은 한 가닥의 한기가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철적 선생이 여태까지 이름을 떨쳐 온 것은 결코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고 크고 작은 무수한 혈전에서 얻은 풍부한 경험이었다. 철적 선생은 매번 혈전을 하면서 수많은 눈동자를 대해 왔다.

그러나 낭천의 두 눈동자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거의 무(無)에 가까울 만큼 표정 없는 눈동자.

철적은 자신도 모르게 위압감에 눌려 뒤로 반 정도 물러났다. 바로 이 순간 낭천의 검은 이미 출수되고 있었다.

그가 일검을 찔러내면 절대로 그 어떤 수확이 없이는 거두어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여태까지 지켜 온 낭천의 신조였다. 다시 말해서 그는 만약 자신이 없으면 절대 출수하지 않았다.

이때 철적 선생의 몸이 갑자기 매화가지 위로 치솟아 올라갔다. 그 서슬에 나뭇가지 위에 쌓여 있던 눈이 휘날려 주위를 눈보라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때 낭천은 고개조차 들지 않고 검을 다시 거두었다.

철적 선생도 이미 가벼운 몸짓으로 땅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철적 선생의 이 내려서는 동작은 마치 한 장의 종이가 떨어지는 듯했다. 한데 몸이 미처 땅에 내려서기도 전에 시뻘건 선혈이 떨어져 백설을 물들였다.

"내게 삼 초를 양보할 사람은 없소. 단 일 초도 받아넘기기 힘들 거요."

철적 선생은 매화나무에 몸을 기대어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얼굴은 몹시 창백했고 목구멍 아래로 붉은 피가 물들어 있었다. 사실 철적 선생은 낭천의 검이 출수되는 찰나 천하를 위진시킨 철적을 출수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철적 선생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낭천이 다시 냉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당신이 죽지 않았던 것은 당신이 내게 삼 초를 양보하겠다는 말을 지켰기 때문이오."

낭천은 말을 끝내고 나서 홀연히 웃더니 다시 이었다.

"그러나 당신은 심미 화상보다 훨씬 고강하오."

심미 대사가 아까 말하기를 나한진만 빠져나간다면 절대로 그를 상하게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나중에 그는 낭천에게 부상을 입혔다.

철적 선생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이렇게 소리쳤다.

"아직도 이초가 남았다."

"아직도 이초가 남았다고?"

철적 선생은 고통을 억지로 참으며 웃음을 띠었다

"나는 삼 초를 양보했는데 넌 아직까지 일 초밖에 출수하지 않았다."

낭천은 그 말에 몸을 돌리더니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시선으로 한참 그를 주시하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낭천은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철적 선생의 면전에다 가볍게 이장을 밀어내었다.

"이것으로 당신이 양보한 삼 초를 모두....."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창! 하는 맑은 금속성이 울려퍼지더니 십여 점의 한성이 마치 폭우처럼 철적 선생이 수중에 들고 있는 철적에서 폭사되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낭천은 급급히 몸을 솟구쳐 삼 장 밖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막 땅에 내려설 때 그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철적 선생의 창백한 얼굴에 한 가닥 붉은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나도 오늘 비로소 한 가지 교훈을 배웠다. 오늘부터 나는 절대 남에게 삼초를 양보하지 않겠다. 그러나 너도 한 가지 교훈을 배워야 한다. 만약 꼭 출수를 할 것이라면 기필코 상대방을 쓰러뜨려라. 그렇지 않으면 출수를 하지 말아라."

낭천은 이를 악물고 다리에 꽂힌 침을 바라보며 한마디 한마디 또렷하게 뱉어냈다.

"이 일을 영원히 잊지 않겠소."

철적 선생은 손을 흔들었다.

"좋다. 그렇다면 이제 그만 가 보아라!"

낭천이 미처 대답을 하기 전에 일진의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한 사나이의 흥분된 음성이 터져나왔다.

"선배님, 철적 선배님, 이미 득수를 하셨습니까?"

철적 선생은 대꾸하지 않고 손을 내저어 재촉했다.

"빨리 가 보게. 내겐 이미 자네를 죽일 힘도 없지만 자네가 남의 손에 죽는 것도 싫다네."

낭천은 땅바닥에 쓰러져 번개같이 두 장 밖으로 몸을 굴렸다. 그는 이미 자신이 멀리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평평한 설지에 남겨지는 흔적이 치명적인 타격인 것이다. 그에겐 설지에 남겨지는 흔적을 없애 버릴 능력이 없었다. 이 흔적을 좇아 전칠 등은 얼마 있지 않아 자기를 쫓아올 것이다. 그뿐이 아니라 낭천은 목구멍 속에서 일진의 피비린내가 물씬 풍겨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 낭천에게 남은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그저 한 번만이라도 초류빈을 만나 자기가 전력을 다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웅후한 우정에 그는 이미 목숨을 내던질 각오를 하지 않았던가.

그때 하나의 인영이 낭천을 향해 번개같이 덮쳐왔다.



실내에는 한 자루의 촛불이 밝혀져 미미하게 빛을 내며 간혹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촛불에 초류빈의 창백하고 마치 병자와 같은 얼굴이 비쳐졌다.

초류빈은 연속적으로 기침을 해댄 탓에 이제는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호유성은 아까부터 묵묵히 초류빈을 쳐다보고 있다가 그가 기침을 끝내자 술잔을 내밀어 입에다 부어 주었다.

술을 완전히 마시고 난 후 초류빈은 바보스럽게 웃었다.

"형님, 당신은 내가 한 방울의 술도 흘리지 않는 것을 보았겠군요? 아니, 설사 남이 나를 거꾸로 매달아 놓고 술을 먹여도 나는 절대로 흘리지 않을 것입니다."

호유성은 웃으려고 했지만 어쩐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나더러 자네의 혈도를 풀지 말라는 건가?"

"나는 본래부터 유혹이 심한 사람이라 만약 형님이 내 혈도를 풀어 주면 도망을 갈지도 모릅니다."

호유성은 주위를 휘둘러 보았다.

"지금 그들은 이곳에 없으니 만약 내가....."

초류빈은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챘다.

"형님, 당신은 아직도 내 뜻을 모른다는 말입니까?"

호유성은 괴로운 얼굴로 길게 탄식을 뿜어내었다.

"물론 알고 있네. 그러나....."

초류빈은 예의 그 바보스러운 미소를 얼굴에 떠올리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나는 지금 형님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내게 결코 몹쓸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형님이 나를 그 땔감을 쌓아 두는 습기찬 광에서 이곳으로 옮겨 왔고 또 술도 있으니....."

초류빈은 여기서 말을 끊고 씨익 웃었다.

"이것으로 이미 형님은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닙니까?"

촛불은 점점 타들어가 이상한 분위기에 갇혀 있는 두 사람을 벽에 기다란 그림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호유성은 마치 무거운 압력에 눌린 채 입을 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