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6일 화요일
내가위 - 무림실록(武林實錄) 전신전설(戰神傳說) (제7장~제8장)
제7장 한(恨)은 한(恨)을 만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창문 열었더니,
그대는 간 곳 없고 휘파람 새소리 요란하더라.
안타까운 마음에 옥적 꺼내 부니,
이내 마음 갈곳 없네.>
달빛이 드리워진 창가에 서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달빛에 비추인 그녀의 모습은 약간 상기되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는 언젠가부터 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무황 남태천. 그녀를 바라보는 남태천의 눈에는 짙은 애수가 담겨있었다.
그녀는 멍청히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만 들어갑시다."
그러나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남태천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어렸다.
'소하, 당신은 무얼 생각하고 있는 거요?'
"소하."
남태천은 자신이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처연한 얼굴을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감싸쥐며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꺄아악―. 아악!"
그녀는 가련할 정도로 전신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남태천은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진정하시오. 내가 잘못했소. 제발 진정하시오!"
하지만 그녀의 떨리는 몸은 멈출줄을 몰랐다.
이때, 달빛이 닿지않는 어두운 그늘 속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태천의 약혼녀인 월기신녀 조약빙이었다. 그녀가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음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싸늘한 냉소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 * *
안개 짙은 숲 한가운데, 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아침 이슬이 채 걷히지도 않은 이 곳에 그 사나이는 이미 촉촉이 젖은 옷으로 여러 시진째 서 있었다.
그 사나이의 앞에는 작고 아담한 무덤이 하나 놓여 있었다.사나이는 손을 들어 이제는 썩어 넘어질 듯한 묘비를 쓰다듬었다.
'후후. 저는 절 낳아주신 친부모의 얼굴도 모르는데, 양모마저 이렇게 만날 수 밖에는 없군요. 아버님이 마지막 순간까지 잊지 못하던 여인이여. 당신을 보고 싶었습니다.'
묘비에는 비록 흐릿하기는 했지만,
<단 한줌의 사랑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했던 여인이 이곳에 잠들다.>
라고 쓰여 있었다.
'이제는 이 사마적이 당신을 어머니라 부르겠습니다.'
<어머니.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고 불러보지 못했지만
당신은 나의 어머니입니다.
그것은 나의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못내 그리워 다시 불러봅니다.
내게는 존재하지 않던 이름이기에 당신에게서 불러봅니다.>
사마적은 묘비의 한쪽 귀퉁이를 손가락으로 파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한 자 한 자 글이 새겨 졌다.
마침내 비석에 한 줄의 글이 더 남게 되었다.
<아버님이 그랬듯이 저 역시 어머님을 사랑합니다.>
사마적은 발길을 돌렸다. 그의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봐 주십시오, 어머니. 아버님이 못다 푼 한을 제가 다 풀어 드리겠습니다."
그의 등 뒤로 낙엽이 한 장 떨어져 비석 위에 내려앉았다. 그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무림에 풍운이 일기 시작했다.
사천 지방에는 팔괴조(八怪爪)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그들의 주 업무는 살행을 하고 표물을 약탈하는 것이었다.
이름에서 말하고 있듯이, 그들은 팔 인이었다.
여덟 명의 인물이 한 조가 되어 활동했으며 그들이 노린 것은 그 무엇을 막론하고 모두 털 수 있었다. 목숨이든, 표물이든 상관없이 그들은 모든 것을 가져갔다.
그러던 어느날 그들이 홰나무에 묶인 채로 발견된 것이다.
얼마나 극심한 고통을 당했는지 이빨이 성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고통을 이기기 위해 버티다 모두 부러져 나가버린 것이었다.
그들의 손톱은 모두 빠져있었고, 가죽은 벗기어져 있어 관에서도 겨우 그들임을 알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살은 한 점 한 점 발리어져 있었는데, 그 고기가 삼십 관이 넘었다.
너무도 끔찍했던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던 관리는 열흘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그 후에도 그 이야기만 나오면 그 관리는 진저리를 쳤다.
이 이야기가 중원에 퍼지자 중원은 일시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져 물결을 일으키듯 이 소문의 파급효과는 엄청났다.
정파무림은 마교의 짓으로 단정하고, 마교의 소탕을 선언해 개파대전을 열고자 했다.
그리고 마교의 교인들은 자신들의 짓이 아니라며 정도에서 자신들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꾸민 것이라고 떠들며 죽음을 불사하고 싸울 것을 맹세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무림오흉(武林五凶)이라 불리던 악인들이 잇따라 죽은 것이다. 그것도 팔괴조와 거의 같은 모습이었다.
팔괴조와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이들이 죽은 자리에는 엽전 일 문과 한 장의 손수건이 놓여 있었다는 것이었다.
중원은 일시에 술렁거렸다.
<홍화객이 살아 돌아왔다.
그가 복수를 하기 위해 돌아왔다. 곧 중원에는 피비(血雨)가 내리리라!>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졌고 민심은 갈수록 흉흉해져 갔다. 사람들은 집 안에 틀어박혀 밖에 나가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관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교와 일전을 준비했던 중원무림맹도 아무런 결말없이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단지, 중원의 영웅 남태천만이 홍화객을 빙자하는 자들을 처단할 것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도 잠잠해졌다. 하나의 사건 때문이었다.
* * *
"소하."
그녀는 어느 곳에도 없었다.
늘 앉아 있던 그 자리에도 없었고, 그녀가 멍하니 서 있던 창가에도 없었다.
그녀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남태천은 미친 듯이 그녀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물에 빠뜨린 바늘을 찾는 기분이랄까? 미세한 흔적조차 없었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정신마저 온전치 못한 그녀였다.
그런데 이처럼 철통 같이 지키고 있는 소림사의 중지에서 소리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후 남태천은 그녀를 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 사라진 그녀가 나타날 리가 있는가?
그는 실의에 빠졌고, 조금이나마 그녀를 느끼기 위해 그녀가 늘 앉아 있던 자리에서 쉬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소하?"
그는 등 뒤에서 들리는 문소리에 퉁겨나듯 일어나 돌아섰다. 그러나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월기신녀 조약빙이었다.
"호호, 당신 같은 목석이 그런 백치 같은 여자 때문에 이렇게 몸달아 할 줄은 몰랐군요."
그녀의 말에 남태천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신이 그녀를 어떻게 알지?"
남태천은 타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왜 모르겠어요? 그녀는 나와 함께 있는데."
"뭣이!"
남태천은 그녀의 옷깃을 잡아챘다.
"그녀를 어떻게 했나? 그녀를 어떻게 했어?"
조약빙은 조소에 찬 얼굴로 말했다.
"우습군요. 당신 같은 사람이 그 병신 같은 여자에게 이렇게 빠져 있다니!"
쫘악!
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이었다. 남태천이 그녀의 뺨을 후려쳤던 것이다.
"함부로 말하지 마!"
입술이라도 터졌는지, 조약빙의 입술에서는 피가 배어나왔다.
"호호호호!"
웬지 비애감이 서린 웃음이었다.
"그녀의 목숨 따위는 안중에 두지 않는군요."
순간, 남태천의 얼굴이 일그러져버렸다.
"너!"
그러나 그녀는 남태천이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아버님은 올해가 가기 전에 우리의 혼인식을 성사시키려 하셨어요. 만약 우리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당신의 여인은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나는 널 용서 할 수 없다."
"그녀의 목숨이 사라져도 좋단 말인가요?"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 눈빛들은 서로 다른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하나는 증오의 눈빛을! 그리고 하나는 질투의 눈빛을.......
"흥! 당신은 그렇게 뻣뻣이 서서 말할 입장이 아닐 거야. 안그래?"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털썩―!
중원의 태양인 남태천이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그녀 역시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요사스럽게 웃었다.
"호호호호―!"
그녀의 웃음소리는 여러 감정을 담고 있었다. 이렇듯 일부러 과장되게 웃는 것을 승리자의 그것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당신의 요구는 받아들이겠소. 그러나 만약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좋아요! 이로써 계약이 성립되는군요."
그녀의 얼굴은 더욱 심한 모멸감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찬바람이 날 정도로 홱 돌아선 그녀는 거칠게 문을 닫고는 나가버렸다.
남태천은 석상이라도 된 듯 그저 그렇게 앉아 있었다.
* * *
중원에 한 대의 사륜마차가 들어왔다. 그 마차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천녀 신예원.
그러나 중원인치고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하나는 죽어 중원인들의 뇌리에서 사라졌지만 사선녀의 명성은 사라질 줄 모르고 있었다.
그 중 천녀 신예원은 사선녀 중 제일미로 소문이나서 중원을 질타하는 명문세가들의 후예들로부터 무수히 많은 청혼을 받은 그런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자들이 청혼을 한 더 큰 이유는 그녀의 미모보다는 그녀가 거느린 세력에 있었다.
선천궁(先天宮).
신비방파였다. 제자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그들의 진정한 본거지는 어디인지 철저하게 가려져 있었고, 단지 상징적으로 내세워진 선천궁의 모습 속에서 미뤄 짐작해보면 소림사보다도 클 것이라는 풍문이었다.
그렇게 거대한 세력에 어느 누가 군침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청혼이란 허울 좋은 이름 아래 거대한 세력을 꿀꺽 삼키겠다는 시커먼 뱃속들이었다.
그런 그녀가 은밀히 중원에 들어왔다. 이건 일대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미 중원을 이끄는 무림맹과 마교, 그리고 궁궐에서조차 그 마차를 쫓고 있었다.
* * *
사마적은 무림오흉에게서 심각한 정보를 얻어냈다.
무림세가와 중원의 각 방파에 마교의 인물이 숨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대단한 위치의 인물로 가장해 말이다.
'만약 그들이 그 세력을 이용한다면?'
사마적으로서는 너무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지금 중원의 전 세력과 싸워야 할 판이니 말이다.
거기에 주요인물로 가장해 있는 자들 중 단 한 명도 발각 된 자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조직이 거대하고 치밀하다는 것이 아닌가?
사마적은 이 순간 거대한 벽을 느껴야만 했다.
그러나 추호도 그는 자신의 계획을 되돌릴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 * *
"크윽!"
퍽퍽퍽!
노인은 묵천을 무차별 강타했다. 인정이란 것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발로 밟지만 않았을 뿐이지 비오는 날 먼지가 날 정도로 얻어맞은 그의 전신은 성한 곳이 없었다.
"아직 멀었다."
퍽퍽퍽퍽!
이대로 죽어버리는 게 아닐까? 묵천은 죽을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이 노인이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서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복수에 대한 열망이 더욱 컸기에 묵천은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헉헉헉헉!"
묵천은 드디어 뻗어버렸다.
"마셔라. 낄낄....... 보약이야!"
노인은 쭉 뻗어있는 묵천의 입가에 무언가를 쭉 짜서 흘려 넣어 주었다.
그것을 받아 마신 묵천은 물었다.
"이게 뭐요?"
"낄낄낄!"
노인이 손을 쫙 펴 보이자 손에서는 한 무더기의 지렁이 찌꺼기가 떨어졌다.
"우웩"
묵천은 열심히 토악질을 해댔다. 너무 많이 토해내서 속에서 노란 액체가 나오고 있는데도 그는 계속 욱욱거렸다.
노인은 그런 묵천을 바라보며 재미있어했다.
"낄낄. 지난번 기절해 있을 때는 잘받아먹더니 참 별꼴이군, 그래."
헛구역질을 끝낸 묵천이 말했다.
"이런 것인 줄 알았더라면 먹지 않았을 것이오."
그러자 웃고있던 노인이 노갈을 터뜨렸다.
"미련한 녀석! 너는 이것들이 아니면 벌써 죽었을 놈이야. 네놈의 시독이 어떻게 해독되었는지 아느냐? 끌끌끌....... 미련한 녀석. 시독이 섞인 이 시궁창 물에서도 살아남는 이 지렁이만큼 좋은 해독제도 없는 게야."
묵천은 묵묵히 있었다. 노인의 노성은 더욱 커졌다.
"네놈이 복수를 해? 에잇! 이놈아 다 집어쳐! 그런 정신으론 어림없어!"
퍽!
노인은 묵천의 허리를 발길질로 걷어차버렸다.
"크윽!"
묵천은 노인의 발길질에 날아가 다시 바닥에 깔린 시궁창 위에서 뒹굴었다. 그러더니, 눈빛이 변해서는 시궁창을 헤집어 한 웅큼의 지렁이를 잡아 입 안에 넣고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
"다시 시작해 주시오."
"낄낄낄. 좋아! 좋아!"
퍽! 퍽! 퍽!
노인의 발길질이 다시 이어졌다.
"크윽......."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 이제는 묵천도 세지 못했다. 그러나 꽤 많은 시간이 지난 것만큼은 분명했다.
이제는 웬만큼 맞아도 참을 만큼 단단해졌으며 또한 온 몸의 감각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손에 힘을 주었다. 찌릿했다. 감각이 돌아오고 있다는 증거였다. 묵천은 이제 전신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때 노인은 묵천에게 달리기를 시켰다.
"달려라. 팔 다리에 족쇠가 묶여있어 몸이 무겁겠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그날 이후로 묵천은 끊임없이 왕복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녹초가 되도록 뛰고 더 이상 뛸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자리에 누워 잠을 잤다.
또 그렇게 수십 일이 지났다.
족쇄와 수갑을 차고도 제법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노인은 그를 불러 앉혔다.
"이제부터가 진짜 훈련이다. 너는 이미 내공은 연마할 수 없다. 그렇기에 외공을 연마해야 한다. 그러자면 사경을 넘나드는 고련을 통해 쌓을 수밖에 없다."
묵천은 노인을 이제 완전히 믿고 있었다. 기어다니기도 힘든 자신을 이제는 뛰어다닐 수 있게 해주었으니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알겠느냐?"
"예!"
왕삼은 간수생활 오 년동안 별별 놈을 다 보았지만 이처럼 미친놈은 처음이었다.
그는 갑자기 어느날부턴가 간수들만 지나가면 흙탕물을 끼얹고 침을 뱉고 욕설을 해서 간수들에게 거의 매일 맞았다.
만약, 상부에서 그를 죽지 못하게 하라는 소리만 없었어도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었다.
그렇게 매일 초죽음이 되면서도, 그는 어떤 잘못이든 저질러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몽둥이 찜질을 받을 짓만 하고 있는 것이다.
퍽! 퍼억!
"억! 아고고고......."
간수 서넛이 둘러서 방망이에 천을 감아 그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특히나 오늘은 그들의 매질이 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필이면 홍귀(紅鬼)라는 간수의 옷을 찢었던 것이다. 그 옷은 홍귀의 마누라가 직접 해준 것으로 홍귀가 늘 자랑하던 옷이었다.
거기에다가, 홍귀라는 자는 워낙 사납기로 유명하여 간수들도 그와 상대하기를 꺼려하는 자였으니 간단히 끝날 리가 없었다. 묵천의 앞날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모두들 입을 모아 얘기했다.
괴노인과 같이 있어서 그가 돌아버린 것이 분명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처럼 모진 매질 속에서도 묵천은 비명만 질러댈 뿐 조금의 반항도 하지 않았다.
본능적인 미세한 반항조차도 하지 않았다.
원래 너무 덤덤한 반응이 나오면 발끈해서 더욱 악랄해지게 되는 것처럼 그의 그런 모습은 간수들을 자극해서 매질은 점점 더 심해져갔다.
그렇게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여인의 질투는 오뉴월에도 서리를 내리게 한다고 했던가?
지금 한 여인의 가슴에는 질투의 회오리로 가득했다. 조약빙은 방구석에 멍하니 앉아 있는 한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 여인은 운명이 소하라 이름지은 여인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그녀는 낡은 동경을 소중한 듯 꼭 쥐고 놓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목숨보다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허공을 응시한 채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고 물건만을 가슴속에 꼭 품고 앉아 있었다.
오늘도 소하는 초점 없는 눈으로 동경을 안고있었다.
언제나 똑같은 그 멍한 모습은 조약빙을 참을 수 없게 했다.
"이 내가, 사선녀 중 한 명인 내가 저런 멍청한 계집때문에 이 수모를 받아야 한단 말인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속에서 열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느새 조약빙은 소하의 목덜미를 쥐었고, 그녀의 고개를 마구 흔들어댔다.
"뭐지? 도대체 너의 어떤 것이 그를 사로잡는 거야? 자, 말좀 해 보시지. 어떻게 그를 잡았는지!"
그녀의 말투는 점점 사나와져갔다. 이러는 자신이 천박하게 느껴졌지만 지금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의 열화를 풀지 않으면 그녀는 죽어버릴 것 같았다.
"말을 하란 말이야! 이 계집애야."
조약빙은 목을 쥐고 흔드는 것으로 모자라서, 이제는 소하의 고개를 바닥에 처박게 한 채 마구 짓누르고 있었다.
"이런 백치에 지저분한 계집이 어디가 좋아서. 나한테는 그렇게나 싸늘하면서....... 왜! 왜냔 말이야?"
조약빙은 광기어린 눈으로 소하를 쥐어박고 있었지만, 소하의 얼굴은 계속 무표정했다. 볼에 상처가 생기고, 몸 어딘가에서는 뚜둑! 거리는 뼈 어긋나는 소리까지 들렸지만, 그것은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렇게 마치 인형처럼 힘없는 그녀는 오로지 동경을 쥐고 있었을 뿐이었다.
조약빙은 그렇게 소하의 모습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얼마나 많은 살심이 일었는지 모른다.
그녀에게 소하는 한 마리의 힘없는 벌레에 불과했다. 단 한번만 밟아도 죽일 수 있는 하찮은 목숨인 것이다.
그런데 그 벌레때문에 자신이 천하게 계집의 머리채를 쥐고 흔들었다는 건 더욱 자존심 상했다.
하지만 아무리 자존심이 상하고 질투에 눈이 멀어있어도 그녀는 소하를 죽일 수 없었다. 만약, 그녀가 죽으면 그가 자신을 어떻게 대하리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한숨만 쉬어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손찌검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조약빙은 수시로 속이 튀틀릴 때마다 소하를 괴롭혔다.
쫘악―!
조약빙이 따귀를 올려붙히자 소하는 저만치 굴러 떨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소하의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과 함께 피멍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소하는 자신의 몸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또 다시 동경만을 움켜쥔 채 움츠러들었다.
* * *
주익균의 앞에 한 사나이가 부복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뒤를 쫓고 있다고?"
"예, 그렇습니다. 마교뿐만 아니라 무림맹에서도 그녀의 뒤를 쫓으며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확실한가?"
"예!"
주익균의 아미에는 깊은 고랑이 패였다.
"상대방에서는 우리를 눈치 챘나?"
"예! 상대방 역시 우리가 누구인지 파악하고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래. 그럼 그녀의 일행은?"
"그것이 파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뒤쫓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음!"
주익균은 심각하게 생각에 잠긴다.
"천위."
"예!"
"그녀에게 우리가 쫓고 있음을 알려라. 그리고 우리의 세력에 동조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중립을 지킬 것을 전하라!"
"하오시면, 만약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주익균의 얼굴이 일시에 굳어졌다.
"척살하라."
"옛."
천위는 잠형신법(潛形新法)으로 사라져버렸다.
주익균은 나즈막히 중얼거렸다.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다른 이의 것도 될 수 없게 만들어야만 한다."
* * *
"환인."
총령의 권태로운 목소리가 흘렀다.
"예."
"천녀의 종적은?"
"이미 사천땅에 들어섰다고 합니다."
"음! 사천?"
"예!"
총령은 조금의 변화도 없는, 무감동한 음성으로 말했다.
"최종 목적지는?"
"그것이,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순간, 환인은 총령의 발길질이 날아오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생각보다는 절대복종 뿐이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지필묵!"
총령이 말하자 뒷쪽에 시립해 있던 소녀가 지필묵을 준비하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
잠시 후, 총령은 무언가를 서신에 적어 밀봉하더니 그것을 환인에게 건네주었다.
"이 서신을 그녀에게 전하라."
"예!"
"만약 그녀가 이 서신을 보고 응답한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는다면 죽여라! 청혈단(淸血團)을 급파하도록!"
명령이 떨어졌다. 총령의 명령은 곧 법!
마교최고의 살수조직인 청혈단이 사천땅을 향해 급파되었다.
총령은 의자에 몸을 묻은 채 눈을 감았다.
어린 시절 자신의 가족들이 주마등화(走馬燈火)처럼 지나갔다. 그의 아버지는 작은 마을의 무도관 관장이었다. 유명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인근 사람들에게 제법 신망을 얻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다른 마을에 자리하고 있던 한 무도관의 관장이 아버지를 마교도로 몰아부쳤다.
아버지가 모시던 신상이 문제였다. 그 신상은 태양제신(太陽諸神)이었고 그것은 먼 서하국의 신이었다.
그후 그의 가족은 한 무리의 인물들에게 멸문지화를 당했다.
그것은 무자비한 도살이었다. 삼십여 인의 흑의인들은 집에 불을 지르고 식구들을 모두 도륙했다.
아버지는 무려 서른여섯 번의 칼질에 찢기어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한 흑의인이 휘두른 철퇴에 머리가 터져 죽었다. 형과 누이는 그들의 발길질에 채여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어 넘어간 것이다.
그만이 옆집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그녀의 집에 숨어 있을 수 있었다.
그렇게 간신히 살아난 그였지만 그는 더 이상 그곳에서 살 수 없었다. 그의 가족이 마교로 몰려 모두 죽자 어제까지만 해도 마주하며 웃던 그의 이웃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던 것이다. 심한 경우 매질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고향을 떠나 거렁뱅이로 천하를 떠돌았다.
그러다, 노사를 만나 지금의 마교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노사 역시 가슴에 한을 갖고있는 사람들이었기에 총령의 한을 알아보고 그에게 한을 풀 수 있는 능력을 준 것이었다.
총령의 제자인 남태천 역시 가슴 한구석에 누구 못지 않은 한을 감추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지만 오히려 세상에 물들지 못한 피해자들은 자신들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지금 가슴 한구석에 거대한 음모를 계획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한을 풀어 버릴 수 있는 거대한 계획을 말이다.
* * *
남태천은 촛불 앞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종이에 적기 시작했다. 깨알 같이 적은 종이를 잘 말아 밀봉하더니 벽에 걸린 족자를 치우고 벽을 두드렸다.
벽이 열리면서 매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태천은 매의 다리에 매달린 은빛 통에 편지를 넣고는 매를 공중으로 날려보냈다.
"흠."
남태천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께엑― 푸드덕!
멀리서 한줄기 매 울음소리와 날개짓 소리가 들려왔다.
* * *
하나의 마차가 이 밤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그것이야 특이할 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마차의 모습만은 천하에 다시 없을 정도로 특이했다.
마차는 말이 아닌 흑색의 물소 여섯 마리가 마차를 끌고 있었다. 물소는 전신에 철갑을 두르고 있었으며 눈방울이 툭 튀어나와 흉맹하게 보였다. 하지만 속도는 말이 끄는 것보다도 오히려 빠른 것이 아닌가?
또, 마차의 전신에는 철로 된 상자처럼 보일 정도로 많은 철장식이 달려있었다.
그 안에서는 은은히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고, 주위에는 무복차림의 사나이들이 흑마에 탄 채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주 무서운 속도로 밤을 가르며 앞으로 달려갔다.
그때였다.
갑자기 마차를 막아선 흑의무복을 한 삼십여 명의 사람들 손에는 제각각 검과 창이 들려있었다.
그들은 마차의 앞에 일정한 진세를 이룬 채 일말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두 무리가 부딪히면 무서운 사고가 일어날텐데도 그들은 너무 태연했다. 그래도 달려오던 마차는 충돌을 할지도 모를 지점에 이르자 고삐를 잡아끌었다.
후욱― 후욱―!
마차를 끄는 물소들은 숨을 쉬고 있었다.
"당신들은 누군가?"
분명 어색하고 딱딱한 중원어였다. 하지만 지금 이곳엔 누구도 그것을 탓할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한 분의 명을 받고 편지를 전하러 온 사자들이다."
"흥! 사자들이 장검을 휴대하는가?"
마차를 몰던 노파가 또렷한 중원어로 말을 했다.
"우리는 명대로 전할뿐이다."
무복의 사내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노파를 향해 서찰을 던졌다.
제법 매서운 북동풍이 몰아치고 있었으나 서찰은 바람에 영향을 받지 않는 듯 정확히 노파의 수중에 떨어졌다.
대단한 섭물이전(攝物以前)이었다.
노파는 물건을 받아들었다.
"흥! 제법 한 가닥 하는 자군."
노파가 막 편지를 찢어버리려는 순간이었다.
"귀모(鬼母), 편지를 제게 주세요."
마차 안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파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궁주님께서 관여하실만한 일이 아니옵니다."
"아니에요. 귀모, 제게 편지를 주세요."
귀모는 머뭇거리다 마지못해 마부석 쪽으로 나있는 작은 창문을 열어 마차의 안으로 서찰을 밀어넣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차 안에서 다급성이 터져나오는 게 아닌가?
"앗!"
귀모는 화들짝 놀라서 궁주를 불렀다.
"궁주."
"아, 아니에요."
이때, 편지를 건넸던 흑의복면인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편지를 읽으셨습니까?"
"그래요."
마차 안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궁주님께 전하십시요. 우리 신천궁은 중원의 일에는 간섭하기 싫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이었다.
"흐흐흐......."
흑의인의 입에서는 음침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무슨 짓이냐! 궁주님의 말 못 들었느냐? 썩 물러나라!"
귀모는 흑의인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사내는 재미있다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흐흐흐. 그렇게 말할 입장이 아닐텐데......."
"뭣이?"
"편지지에는 독이 발라져 있었다. 아까 들렸던 비명은 바로 중독이 되었다는 증거이지."
"이런 씹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
노파는 자신의 의자 밑에서 쌍창을 꺼내어 들었다.
"도주로를 터라!"
그러자 마차를 호위하고 있던 이십여 명의 사내들이 흑의복면인들을 향해 치달리며 손에 들고있던 기괴한 창을 휘둘러댔다.
"나머지는 마차를 호위하라."
노파의 말에 마차 뒤에 따르고 있던 이십여 기의 호위병들이 마차를 호위하며 흑의인들을 뚫고 달려나갔다.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편지를 건냈던 흑의인은 싸늘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계집! 홍한분갈독(紅恨分渴毒)에 중독되어 네가 얼마나 달려가는지 두고보겠다."
그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흑의인들은 기마병들과 맞붙어 싸우기 시작했다.
창! 챙! 차창―!
두 무리의 실력이 비슷해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질 듯 하였으나, 흑의인들의 목적은 기마병들을 죽이는 것보다 그들의 발길을 붙잡아 놓는 것에 있었기 때문에 되도록 시간을 오래 끌려고 기를쓰고 있었다.
싸움이 좀 될만하면 뒤로 빠지고, 마차를 추격하려고 하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이때 예의 대장 같은 사람이 외쳤다.
"이들을 뚫고 마차를 뒤쫓아라!"
기마병들의 기세는 더욱 거세어졌다.
두두두둑!
수십 기의 말들이 밤길을 질주하고 있었고, 마차를 몰고있는 소들 역시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었다.
귀귀귀모는 거센 불에 기름을 끼얹듯 달리는 소의 잔등에 자꾸만 채찍질을 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를 그렇게 달렸을까?
갑자기 길의 좌우에서 불길이 무섭게 일어나면서 주위가 대낮같이 밝아졌다.
그리고 앞에는 수십 명의 사내들이 손에 도검창을 들고 학익진(鶴翼陣)을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태산만한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달려드는 마차를 향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멈춰라!"
그러자 몇몇 말들은 놀라 걸음을 멈추었고, 귀모는 마차를 세웠다.
"웬 자들이냐?"
"이 서찰을 전하라는 황제폐하의 명이다."
사내는 손에 든 서찰을 내보였다.
"흥! 한 번 속지 두 번 속는단 말이냐? 저들을 뚫고 길을 열어라."
귀모의 명에 마차를 호위하던 사내들은 맹렬한 기세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러자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외쳤다.
"반항하는 자들은 죽여라. 황제폐하의 명이시다."
그러자 포진해있던 자들 역시 지지않는 기세로 달려들었다.거대한 덩치의 사나이는 두 개의 양날도끼를 꺼내들어 기마병들을 무차별 공격하기 시작했다.
궁주를 호위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그야말로 목숨을 건 혈투였다. 우선 숫적으로 열세였던 노파의 부하들은 하나 둘 쓰러져 가기 시작했고 노파 역시 마차 안의 궁주가 걱정되어 온 힘으로 쌍창을 휘둘러대고 있었지만 많이 지쳐버렸다.
드디어 그곳을 무사히 빠져나왔을 때는 불과 몇 기의 기병들만이 마차의 뒤를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소는 무서운 기세로 달려나가고 있었고 그 뒤를 쫓던 말들 역시 부지런히 뒤따랐다.
또 다시 삼십여 리쯤 달려왔을까?
앞에 마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듯한 협곡이 나왔다. 깍아지른 듯한 절벽이 길 양옆으로 높게 솟아있었다.
망설일 틈도 없이 마차가 협곡에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핑― 피잉―!
셀 수조차 없는 많은 강전과 화살 등이 마차와 기마병들을 향해들며 쏟아져 내렸다.
"무도한 무리들!"
노파는 소리치며 쌍창을 원으로 돌려가며 자신을 보호하고 마차를 몰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버텼지만, 절벽의 중간쯤에 이르러서 귀모가 쌍창으로 화살을 쳐내느라 신경이 계속 분산되는 바람에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마차의 바퀴가 돌을 넘는 순간 귀모가 중심을 잃고 마차 밖으로 떨어져버린 것이다.
"아뿔싸."
그러나 무서운 속도로 달려나가던 마차는 노파에게서 순식간에 멀어지고 이내 협곡을 벗어나버렸다.
노파는 강전들을 피하며 미친 듯이 마차를 쫓아갔지만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궁주님!"
노파는 다시 또 마차가 사라진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것은 또 하나의 운명이 만들어지는 그 시작이었다.
제8장 비애(悲愛)
성도(成都)를 불과 십여 리 앞둔 거악산(巨嶽山) 입구에 이르렀다.
운무에 가리운 거악산이 내려다보고 있는 관도 위에는 마차 한 대가 길을 벗어나 숲에 처박혀 있었고, 마차를 끌던 소들은 전신에 강전과 화살을 맞아 한 치의 틈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상태로 죽어있었다. 아마 누군가 마음을 먹고 이렇게 다져 놓는다고 해도 힘들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마차와 혈흔은 삼십여 리를 더 이어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소는 이토록 중한 상처를 입고도 삼십여 리를 더 달려 이곳에서 죽었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이 물소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만했다.
물소의 상처 하나 하나는 지난밤 얼마나 치열한 혈전을 벌이면서 사지(死地)를 뚫고 나왔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시간이 꽤 흐르고 조금씩 바둥대던 물소들도 모두 죽어버렸다. 소들의 상처 위로는 이미 파리가 몇 마리가 모여들어 왱왱거리고 있었다. 이미 검붉게 변색된 물소의 주변에는 흥건히 피가 고여있었다.
이때 마차의 한쪽 문이 열렸다.
열린 문으로 이제 한 이십 세쯤 되어 보이는 붉은 궁장차림의 여인이 쓰러져 헐떡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어떤 얼굴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그녀의 얼굴을 가린 면사를 걷어낸다거나 아니면 바람에라도 날려 면사가 걷힌다면 모르지만 그녀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육감적인 몸매만은 감출 수 없었다.
아마 범인이라면 그것이 시체라도 달려들어 시간(屍奸)이라도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이 여인은 천하사대미녀 중 하나인 선천궁의 궁주인 신예원이라는 이름에 어울릴 정도의 아름다움이었다.
미친 듯이 그녀를 싣고 달리던 마차는 소가 넘어지면서 달리던 속도를 이기지 못해 길가로 나뒹굴었고 독에 중독 되어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기절했던 신예원은 간신히 문을 연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 저기에 상처를 입었는지 운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녀의 옷에는 핏물이 배여있었다.
문을 열어젖힌 것이 최후의 힘이었을까? 그녀는 곧 의식을 잃어버렸고, 얼굴은 중독현상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물론, 그녀의 얼굴을 가린 면사 속에서 말이다.
그녀는 중독으로 인해 기색이 엄엄해 보였다.
"으...... 응......."
그녀는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때 한 사나이가 나타나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내는 야릇한 눈빛을 반짝이더니 그녀를 들쳐업고는 숲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 것인가?
사당은 낡고 이미 폐허가 되어있었다.
이미 오래 전에 들풀과 들짐승의 집이 되어버린 듯 완벽한 폐허를 이루고 있었다.
사당 앞에는 이미 허리쯤까지 일어선 풀들이 바짝 말라 바람에 흔들거렸다.
덜컹―!
이미 낡아 반쯤 떨어져 나간 문이 열리자 먼지가 놀란 듯 풀썩 일었다 내려앉았다.
석단(石壇) 위에는 몇 년동안 방치되었는지 바싹 마른 꽃들과 낡고 깨진 제기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벽 틈으로는 잡초들이 삐져나와 있어 흉가를 방불케 하고 있었다.
수십 년을 들짐승이나 드나들던 이곳이 오늘은 때아닌 손님을 맞고 있었다.
먼지와 쓰레기 투성이던 석단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한 여인이 놓여있었다.
여인의 입에서는 간간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마적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검은 천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고 있을 줄이야."
사마적은 신음하듯 말했다.
그는 천녀의 이름이나 그의 비중으로 보아, 아니 그녀가 속한 곳의 위명으로 보아 절정은 아니더라도 그녀가 일류급 정도의 무공은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몸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무공을 익힌 흔적이란 없었다.
간혹 절정의 무인 중에는 스스로의 무공을 속으로 갈무리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정도의 고수가 독에 암습을 받고 마차에서 혼절해버리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사마적은 서서히 천녀의 얼굴에서 검은 천을 벗겨냈다. 그의 손은 미약하게나마 떨리고 있었다.
"아!"
그의 입에서 어쩔 수 없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사마적은 손에 든 면사가 땅으로 떨어지는 줄도 모른 채 그녀의 얼굴에 넋을 놓고 말았다.
그 어떤 미사여구로 그녀를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혈관이 비치는 듯 투명한 피부와, 살이 많지도 적지도 않는 얼굴, 마치 검은 실을 물에 풀어놓은 듯 흐트러져 있는 검은 생머리는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하얀 얼굴과 대조가 되었다.
물론 사마적이 놀란 것은 그 외형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에게서는 그 누구에게서도 느낄 수 없었던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마적은 자신이 마치 수십 년을 외지로 떠돌다가 자신의 고향으로 귀향한 나그네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인간을 신이 만들어 놓은 조각이라고 칭한다면 이 여인의 얼굴을 그 중 단연코 걸작이라 할만 했다.
그리고 너무나도 고결하고 순결하며 순수하게만 느껴지는 그 모습은 한 명의 사람이 아니라 성녀가 환생한 모습과도 같았다.
사마적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무수히 많은 갈등이 일었다.
그녀를 보면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기분 좋은 향내가 느껴졌다. 시원한 아미, 살포시 닫힌 입술, 중독현상인진 몰라도 잘 익은 연시처럼 발갛게 상기된 얼굴, 거기에 다른 여자와는 다른 무언가 향수까지 그 모든 것이 지금 사마적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고 있었다.
사마적은 한쪽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어떤 욕망이나 욕념 때문이 아니었다. 웬지 그녀의 얼굴을 보면 무언가 잃어버린 것을 찾은 것 같은 충동이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어머니.
어렸을 적 버려지면서, 그에게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던 적이 과연 얼마나 있었던가?
사마적은 남들이 쉽게 연상하는 어머니를 그려보기 위해, 상상을 해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어머니의 가슴은 어떤 느낌일까, 어머니의 향기는 어떤 냄새일까, 어머니는 나를 어떻게 쓰다듬어 주셨을까?
그런 상상을 할 때 그는 얼마나 즐거웠던가. 비록, 곧 허탈함을 맛보아야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자신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어머니 품이 왜 신예원을 보면서 생각이 났는지 사마적은 알 수 없었다.
사마적의 마음에 자신의 계획에 대한 의구심이 솟아나고 있었다.
'내가 정말로 이 여인에게 그런 짓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했다. '어째서?'라는 질문을 해대었지만 그는 머리가 혼란스럽기만 할뿐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때,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맞아야 했던 한 인간을 떠올렸다.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틀에 수 년을 묶여 있어야 했던 한 사내를 생각해낸 것이다. 자신을 문명으로 인도한 바로 그 사람을.......
'그래, 이건 대계를 위한 일이다.'
사마적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희생되어야만 한다. 그는 결심을 한 듯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해야만 한다.'
그의 손에 여인의 옷은 한 꺼풀 한 꺼풀 벗기어졌다.
사르륵―!
하나 하나 떨어져 나가고 몇 개인가의 옷을 벗기자 그녀의 내의(內衣)가 드러났다.
벽 틈으로 비쳐 들어오는 빛이 그녀의 몸을 비추자 그녀의 살결이 빛 속에서 투명하게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속이 비칠 정도로 얇은 면사로 만들어진 내의가 애처로워 보였다. 그러나 그것마저 무자비한 사마적의 손에 의해 벗기어져 깊은 골짜기로 이루어진 하얀 알몸이 드러났을 때, 그 둘의 몸은 포개어졌고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 둘만의 행위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인간이, 아니 생명을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의 최초의 몸짓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어색한 몸짓이었다.
그러나 곧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동화되어가고 있었다.
파과(破瓜)의 고통 속에서 그녀는 눈을 떴다.
몽롱하고 어지러운 환상들이 그녀의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듯 했다.
그녀는 자신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아야 한다고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 들어온 것은 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것은 마치 순교자의 얼굴처럼 어떠한 고통이나 번뇌 속에서 몸부림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안돼. 이, 이건......!'
그러나 타는 듯한 어떤 갈증과 혼동 속에서 그녀는 무기력하기만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의식을 차림으로 해서 그녀는 한 남자의 모습을 가슴에 새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기력이 다한 듯 다시 혼절해버렸다.
사마적은 자신의 침에 단약을 녹여 그녀의 입 속으로 넣어 주었다.
그것은 어떤 해독제라기 보다는 그녀의 몸을 보(保)해 줄 수 있는 보약 정도의 알약이었다.
사마적은 자신의 몸에 옷을 걸치고는 돌아서려다 문득 잠들어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애처로울 정도로 가녀린 그녀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고, 그녀의 눈가에는 엷은 눈물이 맺혀있었다.
'그녀도 알고 있는 것인가?'
사마적은 그녀의 눈가에 맺힌 이슬을 훔쳐주었다. 그리고는 담담한 얼굴로 뒤돌아 나섰다.
하지만 문 앞에 이르니 발걸음이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그는 누워있는 여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 하나 하나를 가슴 깊은 곳에 새겨넣었다.
그것은 자신의 첫 여인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불길한 마음과 그녀를 향한 알 수 없는 자신의 감정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그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돌려 밖으로 나와야 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여인이여.
내가 아는 당신의 모습은 하나였습니다.
비록,
당신을 위해 사랑을 노래해 줄 수는 없지만.
후일, 그대를 위해서라면 나의 단 하나이자 모든 것인 이 목숨마저도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의 모습을 뒤로 한 채 걸음을 돌립니다.
훗날 만난다면 당신 앞에 무릎꿇고 사죄할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분시(分屍)하고, 나를 죽여 짐승의 먹이로 만든다고 해도 나는 당신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받들 것입니다.
내게 단 하나뿐인 여인이여.
이것이 진심인지는 혼란스럽습니다만, 그대를 사랑합니다.>
그렇게 그는 사라져버렸다.
미친 듯이 마차의 흔적을 찾아 쫓아온 귀모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반쯤 부서진 마차와 이미 죽어있는 소는 발견됐지만 정작 궁주의 모습은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차의 문은 열려 있었고 그녀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반쯤 실성한 듯 그녀를 찾아 나섰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무수히 많은 불길한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말리는 것인데.'
그녀가 중원행을 결심했을 때 자신이 말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리고 마음 깊숙이 그녀를 찾지 못한다면 죽음이라도 불사할 것을 다짐했다.
그녀는 그렇게 불안한 마음을 다잡아가며 숲속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녔다.
그렇게 하기를 얼마나 했을까? 그러다 귀모는 우연히 낡은 사당가에 망연히 앉아 있는 그녀를 발견했고, 그녀의 눈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촉촉한 이슬이 맺혔다.
사마적은 멀리서 그녀와 노파가 떠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훌훌 털어버리고 잊어버리면 되는 것을 왜 그렇게나 그녀에게 미련이 가는 것인지 그는 모르고 있었다.
'평생 처음 느낀 이 빌어먹을 감정이 사랑이란 것인가?'
그는 답답한 가슴을 싸안고서 돌아서야만 했다.
"푸우―!"
사마적의 입에서는 술이 품어져 나왔다. 지금 그의 기분은 언짢은 것도, 불쾌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웬지 허한 이 기분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한편으론 답답하고, 다른 한편으론 그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방정맞은 생각마저 들었다.
'왜 내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것이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랬기에 그저 술만을 들이키고 있는 것이었다.
원래, 그의 계획은 간단했다.
중원의 각 문파에게 공격당해 궁지에 몰린 그녀를 범한다면 그녀는 여인으로서 치욕과 분노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범한 자를 찾아 이 중원을 뒤지게 될 것이고 급기야는 중원인 전부를 증오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중원 전체를 향한 증오로 발전되고 결국엔 그녀는 자신을 공격했던 문파들을 찾아 보복을 하게 되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복수를 할 것이고, 자신은 그 혼란기를 틈타 자신의 아버님의 복수를 할 것이다.
이 계획은 천녀가 중원으로 들어서고 있다는 정보와 중원 문파들에 마교의 첩자들이 숨어있다는 정보를 얻은 후부터 세워졌다.
그리고 그 계획은 딱 들어맞아서 스스로도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똥 씹은 듯한 심정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마적은 만취가 되어 주점을 나섰다.
그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그가 이 세상과 접하고 처음으로 배운 것이 술이었지만 말이다.
자신의 의부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고 그로 인해 그가 가장 호기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 술이라는 물건이었다.
그래서 그는 세상으로 발을 딛는 순간 술을 한 병 구입했다.
물론 주인의 동의나 허락 따위는 얻지 않았다. 단지 한 음식점의 선반에 내어놓은 술병을 집어 마셔봤을 뿐이었다.
그런데 세상이 온통 뒤죽박죽 되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무것도 그에게는 두려운 것이 없었다.
그후 그는 주당(酒黨)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토록 취해 의식이 없을 정도로, 아니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마시지는 않았다.
그에게 이 세상은 아군보다는 적군이 더 많은 곳이라 여겼기에 자신이 무기력해질 정도로 마시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마저도 귀찮았다.
내공을 운기해 주정(酒精)을 뽑아내버리면 간단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애써 마신 이유가 무색하지 않은가?
지금 그에게는 복잡해진 머리를 단순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술이었다.
술이 턱까지 차 오르도록 술을 마신 그는 주루를 나왔다.
길을 걷고 있었지만 그의 몸은 의지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고 길은 제 멋대로 비틀리고 흔들렸다. 허공을 걷는 것인지 땅을 딛는 것인지 그 역시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저 어딘가에 팍 쓰러져 잠이나 잤으면 싶었다.
왕호는 쾌재를 불렀다.
이 훤한 대낮에 술에 취해 벽에 기대어 흐느적거리는 인물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어느 문약한 서생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런 걸 보고 가만히 지나칠 패랑대가 아니었다.
문득 몇 년 전이던가 술에 잔뜩 취해 늘어져 있던 한 사나이를 떠올렸다. 그때도 저런 녀석이었는데 자신이 뛰어난 무공을 발휘해 일격에 꼬꾸라뜨리지 않았던가?
'그놈은 정말 두둑했는데.'
그들은 이 젊은 친구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손님 모시듯 끌고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그때를 회상하며 이 친구도 돈이 많기를 속으로 빌고 있었다.
퍼억! 퍼버벅!
패랑대의 왕초이자 두목인 왕호는 이것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왜 자신이 맞고 있는 것인가? 이자는 누구인가?
그따위 것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분명 술에 취한 자였다. 자신의 몸조차 가누지 못해서 비틀거리기를 해파리 흐물거리듯 하던 자가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이건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줄기차게 두들겨 패기 시작하는데 환장하다 못해 팔짝 뛰다 꼬꾸라져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이 이토록 줄기차게 많은 의문을 떠올려 본적이 평생에 단 한번도 없다고 생각했다.
힘이라고는 개미 한 마리도 눌러 죽일 수 없을 것 같던 사내한테 하나도 아닌 장정 다섯이 지금 줄기차게 얻어터지고 있으니 어찌 의문이 일지 않겠는가?
그것도 뚝심이라면 제법 있다고 자부하는 자신들이 말이다.
퍽! 퍼억! 퍽!
너무 맞다보니 이제는 아픈지 안 아픈지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단지 어딘가 부러지거나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감만이 그를 억누르고 있었다.
"아구구구!"
"어헉!"
"아이고."
다섯 사람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비명을 토해냈다. 왕호는 엎드려 손이 발이 되고 손바닥이 마르고 닳도록 빌고 또 빌었다. 그렇게 하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사내가 주먹질을 멈추었다.
사내는 그저 싸늘한 눈으로 그들을 한 차례 훑어보고 느릿하게 걸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완벽한 무방비 상태다.'
그의 뒤를 보며 왕호는 생각했고 그건 왕호에게 너무나도 달콤한 유혹이었다.
왕호는 웬지 자신들이 맞은 것이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지가 뭔데.'
그때 자신의 품안에 있던 단검이 손에 들어왔다.
'이거면!'
순간 왕호의 몸은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사내의 등을 향해 사정없이 검을 밀어넣었다. 정확히 심장을 노리며 달려든 것이다.
그러나, 사건은 그의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사내는 어느새 그의 검을 잡아채 손끝으로 쳐내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살벌해지는 상대의 눈을 왕호는 보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앞날에 어떠한 일이 벌어질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거기에 이번에는 아무리 마르고 닳도록 빌어도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왕호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그리고 마지막이 될 하루였고, 그리고 사마적에게는 몹시도 기분 나쁜 하루였다.
* * *
도저히 한 사람의 행동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격타의 소나기가 이어졌다. 숨 한 번 쉬는동안 도합 백서른 다섯 번의 발길질과 주먹질이 시전되었는데, 그것을 모두 환인은 몸으로 고스란히 맞아야만 했다.
그 어마어마한 고통을 버티다 못한 환인은 휴지조각처럼 뭉쳐져 구석에 쳐박혔다.
하지만 환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빠르게 튀어올라 총령의 발치에 부복했다. 그에게는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여유마저도 없는 것이었다.
총령은 그토록 많은 움직임을 보이고도 가쁜숨 한 번 몰아쉬지 않았다.
환인은 총령이 이렇게 분노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항시 차갑기만 했지 이렇게 드러내놓고 분노를 표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는 옥좌의 팔걸이 장식을 짚고 있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총령님."
"멍청한 것. 천녀를 놓치다니!"
파삭!
총령의 손에 걸린 옥좌의 장식 하나가 바스러져 먼지가 되어 버렸다.
그의 분노가 극에 달한 것이다.
"흔적은?"
환인은 흠칫했다. 그는 긴장하면서도 조금도 대답을 늦추지 않았다.
"예, 마차는 발견했으나 그녀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환인은 다시 저만치 굴러 처박혀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굴러간 속도보다도 다시 돌아와 부복하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그녀를 찾아 척살하라! 지금 당장!"
"옛."
환인은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사라져버렸고 갑자기 주위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어느 정도 이성을 찾은 듯 예전의 태평한 모습으로 돌아간 총령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고는 중얼거렸다.
"천녀......."
* * *
내전의 방과 창문에는 유조식(柳條式) 창살을 사용했는데 살이 성글고 복잡하지 않았다.
간결하면서도 고풍스런 분위기였다. 그 창틈으로 빛이 들어와 길게 잔영을 그리고 있었다.
잔영을 따라가 보면 고급스런 보료를 덮은 침상 위에 한 사나이가 커다란 향목 목침에 기대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한 사내가 무릎꿇고 있었다.
"뭣이?"
"그녀는 지금 옥문관을 향해 북진중입니다."
주익균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했다.
"무조건 그녀를 막아라! 절대로 그녀가 국경을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
"네."
천위는 읍하며 대답했지만 곧 의문에 찬 목소리로 되물었다.
"황상. 소인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그토록 그녀를 죽이려 하시는 겁니까? 그것이 오히려 그녀의 세력을 준동시키는 것이 아닌지 소인은 불안합니다."
주익균은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천위. 말이 많아졌구나."
천위는 흠칫하며 얼굴이 굳어졌다.
"죄송합니다."
"그녀의 세력은 작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니 우리가 아닌 적의 편에 섰다는 가정하에서이다. 그들만으로 옥문관을 넘어들어 오지 못한다. 그리고....... 자네는 머리 잘린 뱀이 살아있는 것을 본 적 있는가?"
천위는 이제서야 그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천위."
"옛."
"너는 명에 복종하기만 하면 된다. 그녀를 제거해라!"
"예!"
천위가 물러가자 주익균은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옥문관을 향하고 있단 말이지?"
* * *
비표 세 개가 귀모의 면전으로 날아왔다. 귀모는 일검에 비표를 쳐내고 상대의 아랫배를 찢어놓았다.
그러나 곧 다른 이들은 유성추로 귀모의 팔을 감아왔고 또 다른 이는 귀모의 허리를 검으로 베어왔다.
그러나 귀모 역시 녹녹치 않았다.
쌍창을 돌려치며 상대의 검을 막은 다음 유성추를 피해 바닥을 굴렀다.
그와 동시에 상대의 단전과 낭심을 걷어 차버렸다.
"큭!"
"커억."
두 사내는 저만치 날아가더니 쭉 뻗어버렸다.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두 사내는 자신이 나가떨어진 후에야 겨우 자신의 상처 부위를 붙잡고 비명을 지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이때 노파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궁주를 보았다.
웬지 멍한 눈, 그녀는 그날 이후 마치 딴 사람처럼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조차 당황하거나 살려고 고민하는 일말의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귀모는 무기를 거두며 다급히 외쳤다.
"궁주. 가셔야 합니다."
그러자 그녀는 그제야 귀모를 인식한 듯 조용히 귀모의 뒤를 따라나섰다.
귀향촌(歸鄕村).
옥문관을 지척에 두고있는 마을로 이곳을 거쳐야만 옥문관을 향해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옥문관을 통해 들어오는 사람들 역시 이 마을을 거쳐야 중원으로 나갈 수 있는 곳이었기에 이곳은 늘 장사꾼들로 북적거렸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평소의 시끌벅적함과는 달랐다. 장사치들보다 많은 군졸들과 무림인들이 이 마을에 들어와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옥문관에는 평소 두 배의 군졸들이 검문을 펼치고 있었다.
회양장.
귀향촌에 자리한 객점 중 최고로 큰 객점이었다.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이때 도검을 든 사 인의 사람들이 흉악한 인상을 흘리며 객점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중 홍안(紅顔)의 사나이가 걸걸한 목소리로 외쳤다.
"주인장, 주인장."
그의 목소리에 주인인 백척은 쪼르르 달려가 그 사나이의 앞에 멈춰 섰다.
"헤헤헤. 손님 부르셨습니까?"
홍안의 사나이 옆에 서 있던, 새우처럼 얄부리하게 휜 눈을 가져 웬지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사내가 소리쳤다.
"불렀으니까 왔을거 아냐. 빨리 자리에나 안내해."
그의 갑작스런 반말에 백척은 어안이 벙벙해졌으나 곧 노련하게 사내에게 굽실거리며 창 쪽의 한자리로 안내해갔다.
그곳에는 수전증이라도 있는지 손을 벌벌 떠는 노파와 사내답지 않게 예쁘장하게 생긴 사내가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사내는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앉아 있었지만 옥으로 깍은 듯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노파의 손은 보기 불안할 정도로 떨리고 있어서 그녀의 손에 들린 음식이 단 한 줌도 흘리지 않고 그녀의 입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헤헤헤헤. 손님 합석을 좀......."
백척은 약간 비굴해 보이기까지 했다.
노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관심없다는 듯이 묵묵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사내들은 노파의 주위에 자리하고 앉아 음담패설에서 자신들의 무용담으로 떠들썩했다. 그러다 홍안의 사내가 무언가 은밀한 얘기를 하듯이 낮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자네들 얘기 들었나?"
"무슨?"
"내 친구 중에 수비군에 수좌급의 친구가 하나 있거든."
"그런데?"
"천녀가 중원에 들어왔는데, 관에서 그녀를 찾고 있는 모양이야."
그들의 말을 듣던 노파의 눈에서는 음산한 살광이 피어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지간이어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사내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관에서 상금을 걸은 모양이야."
그러자 얄부리한 눈의 사나이가 물었다.
"얼마나?"
"포상휴가와 함께 은자 열 냥!"
"은자 열 냥. 제법 짭잘한데."
"그런데......."
삼 인의 눈에서는 의아로움이 일었다.
"생사불문(生死不問)이라군."
그들은 다시 시시껄렁한 이야기로 일관하다 주인이 가져다준 음식을 먹으며 떠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목소리를 묵묵히 듣고있던 노파가 식사가 끝난 듯 일어서자 그 옆에 앉아 있던 사내 역시 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노파와 사내가 밖으로 나가자 사 인의 사나이 중 교활한 빛을 띄고 있던 한 사나이가 좌중을 향해 말했다.
"혹시 그들의 인상 착의를 아나?"
"글쎄, 노파와 젊은 여자 단 둘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왜 그러나?"
"낄낄낄! 잘하면 술 한 잔 할 수 있겠군."
홍안의 사내가 알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무슨 소리야? 이 친구야."
"자네들은 나를 따라오기만 하면 돼. 아, 가자고! 잘 하면 자네들 몸풀이 한 번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네."
그는 자신의 칼을 들고는 잰걸음으로 밖을 향해 나갔고 다른 인물들 역시 그를 쫓아나가기 시작했다.
귀향촌의 외각을 돌아나가면 작은 개천이 있고 그 개천 너머에는 나지막한 언덕 위로 몇 호인가의 집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옥문관은 그곳에서 채 십 리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노파와 여인이 옥문관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궁주. 옥문관만 지나면 궁의 제자들이 우리를 마중할 것입니다."
사내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귀모는 그녀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뭔가 알지 못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있었어.'
그녀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는 마차의 사고를 일으킨 후였다.
본래 쾌활하기 짝이 없는 궁주였다.
그녀의 출산부터 어린 시절 기저귀 갈아주며 바라봐온 궁주였다. 그런 그녀가 어머님의 유언을 들어드린다면서 중원행을 결심했을 때 귀모는 펄쩍뛰며 말렸다.
그러나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귀모는 이 순간 다짐하고 있었다. 중원이 그녀를 울린다면 중원은 피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라고.......
그녀는 이미 궁주로서보다는 귀모에게 다른 의미로 더욱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우선은 중원을 빠져나가는 것이 선결문제다. 이곳을 벗어나서 사정을 묻기로 하자.'
그렇게 걸음을 재촉하려는데 그녀들의 앞을 막는 일단의 검은 그림자들이 있었다.
"클클....... 멈춰라!"
귀모의 얼굴은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조금만 더 가면 옥문관인데.......'
* * *
묵천은 바닥에 고인 썩은 물로 전신을 문지르고 있었다.
이 물은 그저 고여 썩은 물이 아니었다. 뇌옥이 만들어지고 수십 년이 흘러 이곳에 갇혀있던 사람들의 시신이 썩어 생긴 물이었다. 바로 시신에서 흘러나온 그런 물이었다.
그래서 간수들은 뇌옥에 들어설 때마다 노루가죽으로 만들어진 가죽신을 신고 들어왔다.
만약 이 물이 살에 닿게되면 시독에 중독되어 죽음을 면키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고 요행히 살아난다 해도 살이 문드러져 썩어들어가 그 부분을 모두 도려내어야 했다.
이곳은 죄수를 가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이기 위한 장소였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어도 시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물로 상처를 씻고 있었던 것이다.
묵천은 점차 자신이 변화해 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살가죽은 날이 갈수록 단단해지고 있었다.
"클클클. 이제 견딜만 한가?"
괴노인의 쇠를 긁는 듯한 갈라지는 목소리가 이제는 정겹게 들리기까지 하였다.
아마도 그의 마음을 알고 있는 때문일 것이다.
묵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는 왜 라든지, 무엇에 좋냐 라든지 하는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다. 단지 노인이 시키는대로 할뿐이었다.
언제부턴가 그 노인의 말대로만 하면 자신이 강해질 것이라는 절대적인 믿음이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그의 모습을 한 차례 훑어보았다.
"흠. 더 이상 그들에게 맞지 않아도 되겠어. 이제야 거의 모든 준비가 끝났군."
"준비라니요?"
"클클클. 이 답답한 곳을 벗어나는 일이지."
묵천의 가슴은 심하게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이, 이곳을 벗어난단 말입니까?"
"그래. 그 전에 네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내가 왜 네놈을 살려야 했는지에 대해서......."
묵천은 한 번도 노인에게 왜 자신에게 이렇게 혹독하게 하는지, 왜 살려내려고 그렇게 노력하는지, 왜 복수를 그렇게나 강조하는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런 것을 물어볼 여유조차 묵천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이제 노인의 눈에 어린 원망의 빛을 보면서 묵천은 이 노인도 자신과 같은 한을 갖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무엇이 노인에게 저런 눈빛을 하게 만들었는지는 곧 들을 수 있을 것이었다.
* * *
대륙은 거대한 땅덩어리를 소유했지만 그 모든 곳에서 주식인 쌀이 자라나지는 않는다. 산맥도 많고 사막도 많아서 쌀 소비의 대부분을 비옥한 토지 몇 군데에서 충당하고 있었다.
그렇게 보자면 바로 이 절강성이야말로 거대한 대륙을 움직이는 모지(母地)와도 같은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이 중원이 소비하는 쌀들의 대다수가 이곳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특히 이 항주는 그 중에서도 계란의 노른자와 같은 곳이었다. 토질과 기후가 적합해 가장 맛있는 쌀이 가장 많이 생산되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항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하의촌에는 벽공이라는 괴인이 하나 살고 있었다.
그는 주로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약초를 찾아 심산유곡을 떠돌아다녔다. 그로 인해서 그는 이 중원의 그 누구보다도 많은 약초를 알고 있는 자로 알려졌고, 수많은 의원들이 그에게 약초를 문의해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괴인이라고 불린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벽공, 그는 편협할 뿐만 아니라 지독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모든 관심사는 약초뿐이었고, 그로 인해 그의 집에서는 단 하루도 약 달이는 냄새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엔가는 독초만으로 상처 치료하는 법을 찾기 위해 독초만을 모아 자신에게 직접 시험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로 인해 그가 죽을 고비를 얼마나 넘겼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단 한시도 포기하지 않고 약초를 찾아 자신의 몸에 다시 실험을 해대곤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당신이 벽공이오?"
"그렇소만은."
벽공은 이 우락부락하게 생긴 자들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가 약간 궁금했지만 일단은 대답부터 했다. 하지만 그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내의 주먹에 의식을 잃어야 했다.
그리고 다시 의식을 찾았을 때는 자신이 어느 곳에 납치되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벽공은 어두컴컴한 석실에서 삼 일을 지냈다. 그가 정신을 잃은 날이 몇 날이 되는지는 모르지만 정신을 차리고서 딱 삼 일이 지났을 때 한 사내가 그를 찾아왔다.
"넌 지금부터 보통 채소로 독을 만들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은 벽공은 그들이 왜 자신을 붙잡아 왔는지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먹는 약초와 채소를 석어 독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이 세상에서 그런 것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밖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그런 독을 찾는 이유는 간단했다. 어떤 사람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일에 필요한 것일테니까.
"독을?"
그로서도 아이들 사탕 빼앗아 먹듯 그리 쉬운일 일 리가 없었다. 사람들이 항시 먹는 야채와 한약 재료로 독을 만들어 내다니, 그것도 여러 야채를 석어서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죽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그는 살기 위해 독의 제조에 들어갔다.
그는 그날부터 그들이 건네주는 수십 권의 고서들을 읽고 수천 종의 야채와 약재들을 섞어야 했다.
그들이 건네준 다 떨어질 것 같은 고서에는 의술에서부터 사람의 구조까지 자세히 나와있었다. 만약 바깥 세상에서 의원되는 자가 이 책을 본다면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가지고 싶어할 그런 책들이었다.
그는 그것들을 자료로 해서 야채들을 섞어갔다.
배추, 무, 감자 같은 것에서부터 취, 당귀 같은 낯선 음식들, 거기에 인삼, 대추 같은 약재들을 잘 섞고 배합하기를 수천 번을 했다. 그러다 그는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귀의 잎에 돼지고기와 상체라는 풀을 섞고 거기에 대추와 인삼을 섞으면 효소가 만들어지는데 그곳에 단 세 가지만 섞으면 절독이 형성된다는 것이었다.
그 물건은 바로 가지와 버섯, 그리고 홍동취였다.
그는 어서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에 그것을 그들에게 보였고, 그들은 한 사나이에게 실험을 해보고는 만족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벽공을 이곳 뇌옥에 가두어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애초에 벽공을 살려둘 생각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벽공에게 그가 만든 절독을 먹이고 그가 죽을 것을 기대하면서 뇌옥에 가두어버렸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뇌옥 안의 벌레들을 이용해 독을 중화시키는 법을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이십 년을 살아온 것이었다.
* * *
묵천은 벽공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에게 뭘 원하시오?"
벽공은 예의 괴상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런데 나는 독물들을 너무 섭취해 몇 가지 부작용을 일으켰다. 이미 간은 녹아버리고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나의 피는 독혈이 되어버렸지. 클클클....... 나의 피가 묻기만 해도 웬만한 피부는 녹아내릴 것이다."
"그렇다면 나 역시 독물들을 먹었으니 그렇게 죽소?"
"그렇지 않아. 나는 실패작이고 자네는 성공작이니까. 자네는 명실상부한 독인이 되었거든."
"독인이라니?"
"후후후! 자네는 지금까지 독물들을 먹고 시독이 스며있는 물로 목욕을 했지. 그래서 자내는 독에 내성이 생겼어. 거기에 그 동안 맞은 매들로 인해 골수에 맺혀있던 독들이 자네의 혈맥에 스며들어 아무런 변화도 느끼지 않게 될 걸세. 그게 자네를 독인으로 만들어 준거지."
"독인이 되면 어떻게 되오?"
노인은 그에게 자못 심각히 말했다.
"독인은 무슨 독이라도 다 이겨 낼만한 내성이 있어. 따라서 어떤 독도 자네를 죽일 수는 없지. 하지만 그뿐이 아니야. 자네의 피 역시 독혈이 되어버린 것이야. 만약 누군가 자네의 피를 맛보게 된다면 그는 자신의 행동을 크게 후회하게 될 걸세. 그 자리에서 처참하게 녹아내릴 테니까."
묵천은 벽공의 말을 얌전히 듣고 있었다.
"당신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오?"
"나는 네놈이 복수를 해주길 바란다."
"복수?"
"나를 이런 곳에 가둔 자들에 대한 복수 말이다."
묵천은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것은 자신이 해야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이곳에서는 어떻게 빠져나갑니까?"
노인은 그를 보며 싱긋이 웃었다.
"나는 이미 십여 년 전부터 대책을 세워놓았지."
"대책?"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등뒤의 석벽을 발로 걷어찼다.
그러자 단단하게만 보이던 석벽이 와그르르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오래 전부터 암혈을 뚫어놓고 있었지."
묵천은 궁금증이 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빠져나가지 않고 이곳에 있는 거요?"
노인은 허탈하게 웃었다. 이것은 묵천으로서는 처음 보는 노인의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도 슬픈 웃음이었다.
"이곳을 벗어나면 나는 죽어버린다."
묵천의 눈에 의아함이 일었다.
"네?"
"나는 이곳처럼 독이 있는 곳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체질이 되었네."
"독이 없으면 살질 못하다니?"
"후후. 나의 내장은 이미 독에 다 녹아내렸어. 지금 내가 버티고 있는 것은 바로 이곳에 있는 시독때문이지. 그러니 시독이 없는 곳으로 간다면 나는 곧 한 줌의 혈수가 되어버릴 것일세. 이 손가락을 보게."
노인의 손가락은 여기저기 잘리어 보기 흉했다.
"이것이 왜 이런지 아나?"
묵천은 고개를 저었다.
"동굴을 뚫는 순간 밖 공기에 다 이렇게 녹아내리고 만 것이네. 맑은 공기는 나에겐 치명적이야."
"그렇다면 내가 저 동굴을 뚫는 순간 당신은......."
"클클. 그런 것 따위는 걱정하지마. 복수만 아니었다면 예전에 죽고 싶었으니까."
묵천은 한참을 노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네가 나의 복수를 하고 안하고는 자네의 자유일세. 그러나 나는 이 순간 자네를 믿을 수밖에는 별도리가 없구만."
노인의 목소리는 비애감에 젖어있었다.
갑자기 묵천은 노인에게 오배를 했다.
"당신의 복수는 내가 맡겠소. 그것은 나의 복수이기도 하기 때문이오. 걱정 마시오."
"고맙군. 한 가지 명심하게. 이들의 세력은 거대해. 지금의 자네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것이야. 그러나 이제는 약간 달라. 그것도 나쁜 쪽으로 말이야. 자네는 예전의 자네가 아니거든. 공력을 모을 수도 닦을 수도 없는 그런 몸이란 말이네. 지금 자네의 능력은 겨우 보통사람을 능가하는 정도 수준이네. 고수와의 싸움은 무리지. 만용은 금물이야."
"알겠소이다. 내 깊이 명심하지요."
벽공은 제삼 강조했다.
"자네는 무공을 익힌 것 같더군. 그러나 이제는 사용할 수 없으니 그 무공을 버리게. 나야 무공에 대해 알지는 못하나 자네의 몸으로 무공을 무리하게 연마한다면 자네는 끝나게 될 것이네. 복수는 무공이 아닌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네. 부디 몸조심하길 빌겠네."
묵천은 벽공을 바라보았다.
벽공은 이제껏 보인 적이 없는 환한 미소를 짓더니 그에게 어서 가라고 손짓을 했다. 묵천은 잠시 망설였지만 곧 발길을 돌렸다.
그가 나간 직후 벽공의 몸은 굴을 통해 밖에서 새어들어오는 공기로 인해 점차 산화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작은 조각도 남기지 못하고 한 줌의 재가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미소를 놓지 않고 있었다.
마지막까지도.......
* * *
"이해 할 수 없군. 이해 할 수 없어!"
"무얼 말입니까?"
"그녀석 말이야. 사마적인가 하는....... 왜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천녀를 범하다니 파렴치하지 않은가? 에잉. 정말로 파렴치한 짓이야."
청년의 얼굴에 잠시 그늘이졌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노화자는 그런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굳이 변명을 한다면 천녀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말 할 수 있지만 그는 원래 계획을 그렇게 갖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그는 천녀를 이용해 이 중원을 혼란하게 만들고자 했단 말입니다. 그녀를 범하고 그녀가 돌아간 뒤 그 사실을 안 천녀는 분노해 중원으로 전력을 투입하면 중원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겠죠? 그럼 자신이 활동하기 수월할 테니까요. 그런데 그는 그녀를 잘 몰랐던 것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악랄해질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 여인의 인생은 바뀌었고, 많은 고통을 겪어야만 했지만 그것도 몰랐겠지요. 그 당시에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고통을 겪게 되리라는 것조차도 그는 몰랐습니다."
청년의 얼굴은 술에 취해있는 것인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는 그 여인과 아주 잘 아는 사이 같구먼?"
청년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화자의 얼굴에는 의문의 그림자가 어렸다.
"그녀와는 어떤 관계인가?"
청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그녀가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말입니다."
청년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왔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젖더니 표정을 바꿔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밝게 웃으며 얘기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삶과 죽음은 단지 종이 한 장의 차이도 나지 않습니다. 순간에 의해 결정되어 버리는 것이 생사이지요. 그리고 그 누구는 복수를 위해 고통스러운 생을 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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