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6일 화요일
무림실록(武林實錄) 전신전설(戰神傳說) 제9장~제10장 - 내가위
제9장 죽은 자를 위하여......
묵천은 미친 듯이 산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뇌옥은 놀랍게도 거대한 산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으나 팔과 다리에 묶여있는 수갑과 족쇠로 인해 더디게 달릴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그는 이미 무공을 상실하지 않았는가? 더 이상 경공을 쓸 수 없는 그로서는 힘든 길이었다.
그러나 그는 앞만을 바라보면서 쉬지 않고 달려나갔다.
"억!"
묵천은 다급하게 달려가다가 돌부리에 걸려서 가파른 언덕 위에서 굴러 떨어져 내렸다.
파바바박!
낙엽이 무성하여 그는 다치지는 않았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개소리에 조급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달려가고 있었으나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져만 갔다.
컹― 컹―!
"빌어먹을 개새끼들."
묵천은 다시 혼신의 힘을 쏟아부으며 달렸다. 하지만 이제는 가까이서 사람들의 소리마저 들려오고 있었다.
"저기 있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많은 사내들과 몇 마리의 개들이 묵천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묵천은 손을 허우적거리며 앞으로 달려갔다.
쿠우우우.......
앞에서부터 웅장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곳까지 달려간 그의 앞에는 거대한 폭포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묵천은 벼랑의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거기에 뿌연 물안개가 피어 더욱 공포스러웠다.
묵천의 뒤를 쫓던 사내들이 묵천을 포위하고 섰다.
"이봐! 이만 포기하지 그래."
그들 중 한 명이 비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제 더 이상 길이 없었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도 없었다. 묵천의 눈에 잠시 갈등의 빛이 어렸다.
그들은 점점 조여 들어오고 있었다.
묵천은 손에 힘을 불끈 주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묵천은 폭포의 아래로 뛰어내려 버렸다.
"아아아아―!"
그의 비명소리가 멀어졌고 사내들은 묵천이 떨어진 절벽아래를 보며 말했다.
"이런 곳에서는 뼈도 안 남아나겠다."
"지독한 놈! 스스로 죽음을 택하다니."
그들은 묵천을 삼킨 폭포를 바라보며 망연히 서 있었다.
묵천의 시신은커녕 떨어진 옷 조각 하나 발견하지 못한 옥사들은 상부에 그가 병사했다고 보고를 했다.
묵천이라 불린 사나이는 그렇게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과연 이대로 죽어버린 것일까?
* * *
음침한 기운이 어린 산야(山夜), 공동묘지에서나 느낄 수 있는 기분 나쁘고 괴괴한 기운으로 온통 뒤덮인 곳이었다.
사사사사사―!
바람이 불어오자 잠들었던 수목들이 일제히 일어나 몸을 떨었다.
그리고 숲의 공지에는 두 무리의 사람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귀모는 잔뜩 긴장하면서도 태연히 말했다.
"뉘, 뉘신데 그러시오?"
병들어 떨리는 노파의 갈라진 목소리였다.
"흐흐흐....... 다 알고 왔다."
홍안의 사나이가 귀모와 천녀를 바라보며 느물느물하게 입을 열었다. 뒤를 이어 교활한 눈빛의 사나이가 싱글거리고 있었다.
"애써 부인할 필요 없어. 우린 다 알고 왔으니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귀모는 계속 병든 노파의 모습을 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당당한 귀모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너희는 웬놈들이냐?"
"흐흐흐! 웬놈이냐구?"
홍안의 사내가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흐흐흐....... 지옥에 가서 물어봐라."
휭― !
검은 귀모의 앞으로 흉험한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선천궁의 일류고수인 귀모를 한낱 강호의 무뢰배들이 이길 수가 있으랴.
귀모는 몸을 살짝 비틀어 검을 가볍게 피해버렸다. 세 명의 사나이들은 합세해 귀모를 공격했다.
"핫!"
"이얏!"
두 사나이는 기세 좋게 달려들고 있었다.
귀모는 자신의 옆으로 달려드는 사내의 목을 파혈수로 쳐버리고 동시에 철판교의 신법으로 검을 피해 사내의 단전혈을 걷어 차버렸다.
퍼억! 우두둑!
사내는 자신의 아랫배를 움켜잡으며 나뒹굴었다. 그는 너무나 큰 고통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귀모가 인정을 뒀기에 망정이지 살아서 꿈틀거리지조차 못했을 것이었다.
그러한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료들이 당하자 격분한 두 사내는 앞 뒤 가리지 않고 도검을 꼬나들고는 달려들었다.
귀모는 자신의 발을 차 넘고 뒹굴며 두 사내의 앞면을 모두 작살내버렸다.
"어이쿠."
두 사내는 뒤로 벌렁 드러누우며 쌍코피를 터뜨렸다. 개는 매를 들어야 말을 듣는다고 했던가? 그들은 그제서야 자신들이 되지도 않을 상대한테 덤볐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대 맞고나자 그 둘은 대번에 눈빛이 달라져버린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이나마 보존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어서 그 자리를 벗어나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의 결정은 너무 늦어버렸다.
"크윽!"
"컥!"
길에 누워있던 사내들이 발버둥 한 번 치지 못하고 즉사해버린 것이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황색가사를 두른 두 명의 라마승이었다. 그들에게서는 스님들에게서 느껴지는 성스러움이나 자비가 아닌 사이함과 사악함이 느껴졌다.
"나무관세음보살."
비록 그들은 불호를 외우고 불장(佛杖)을 들고 다니지만 보통 승이 아닌 소뢰음사의 승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불심 따위와는 거리가 먼 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돈이 신앙이었고, 믿음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그들은 그 믿음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다.
귀모의 등골이 서늘해지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두 라마승은 그 모습이 너무도 비슷하여 마치 원래부터 쌍둥이 같은 모습이었다.
"나무아미타불. 승의 손에 죽으면 극락왕생(極樂往生) 할 것입니다."
둘은 동시에 합장을 하며 말 또한 둘이 동시에 했다.
이는 마치 하나가 하는 듯 동시에 움직였으며, 그것은 둘의 심령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귀모는 외쳤다.
"흥! 주접 떨지말고 덤벼라!"
자신의 나이 팔십이었다. 이제 더 이상 바랄 것도 없는 그런 나이이다.
자신은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었다. 그것도 소중한 궁주를 구하는 일임에야 더욱 망설일 것이 없었다.
그녀는 궁주의 모습을 슬쩍 바라보고 전음을 날렸다.
(궁주. 제가 이들한테 달려들테니 그 순간 옥문관을 돌파하십시오. 저 넘어에는 제자들이 이미 대기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하는 중에도 귀모는 두 중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소뢰음사의 두 고수는 입에서 기묘한 소리를 내며 서 있었다.
우우우우― 우우우―!
그들의 입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기묘하면서도 사람의 신경을 거슬리고 있었다. 낮으면서도 기분 나쁜 소리가 그들의 뱃속에서 울려나왔다.
"아...... 아...... 아...... 아아......!"
그러자 귀모의 몸이 누군가에게 이끌리듯 앞으로 서서히 나가려고 하는 게 아닌가.
그녀는 초인적인 자제력으로 몸을 가누며 부동심(不動心)을 유지했고, 그것은 엄청난 고통을 유발했기에 귀모의 입에서는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합장을 한 자세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자는 낮은 저음을 계속 반복했고, 다른 한 자는 고음을 계속 반복했다.
그들의 움직임까지도 지금 귀모의 신경을 거스르고 있었다. 언제 그녀가 부동심을 잃게될지 그녀조차 장담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궁주를 다른 자들이 오기 전에 피신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잠시라도 마음을 딴 곳에 두면 그대로 그들에게 빨려들어갈 것 같아서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해져만 갔다.
귀모는 그것이 라마교 삼대무공에 속하는 섭혼마음공(攝魂魔音攻)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섭혼마음공.
이는 악기나 그 외의 것을 퉁겨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장기가 말 그대로 악기가 되어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단전은 공력의 저장고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얼마나 사용할 수 있으며 소위 공력이란 것을 얼마나 활용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활동하고 사용할 수 있는 몸의 모든 부분을 백이라 한다면 우리 인간은 약 육십 정도의 부분만을 사용하는 것이 대다수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것을 부인했다.
"어찌 인간의 몸에 스스로 한계를 결정 지으려 하는가? 나는 스스로 그 한계를 깨어보려 한다."
그리고 만들어낸 것이 바로 이 무공이었다.
이 음공의 위력은 내공에서 갈라지게 되는데 이는 단전을 자극해 공력을 울려 스스로 소리를 내게 하는 방법으로 물잔을 두들겨 소리를 내게 하는 방법에서 착안한 것이다.
물잔을 두드리면 물은 진동하면서 작은 파동을 일으킨다.
이는 공력을 자극해 스스로 파동을 주어 음공과 같은 효과를 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 물과 공력을 비교하겠는가?
이 마공에 걸리면 그 어떠한 자라도 자신의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정신적인 혼란이 그렇게 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음공은 시전자의 움직임은 물론 내공마저도 증폭시켜 사용할 수 있게되어 있어, 무기력해진 상대를 잡는데는 아무런 제약도 되지 않았다.
이 음공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면 단 한가지밖에는 없다. 이 섭혼마음공의 시전자보다도 더욱 공력이 높으면 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공력보다 많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 마공을 시전하기 위해서는 최소 백여 년의 내공이 필요하고 두 사람이 동시에 시전하기 때문에 최소 이백 년 이상의 내공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누가 이런 정도의 내공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인가? 아마 이 중원 전체를 통틀어도 다섯 명 정도밖에는 없을 것이었다.
그것을 미루어 보면 어느 정도 버티고 있는 귀모의 공력이 얼마나 절륜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섭혼마음공을 받은 채 이렇게 버틸 수 있는 그녀의 공력은 이들 두 사람과 동수(同數)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궁주 지금입니다.)
순간, 천녀는 그곳을 벗어나 빛살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녀는 내공은 없었으나 마치 날짐승처럼 빠르고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그 사이 귀모가 그들을 향해 귀선장(歸船掌)을 시전해 나갔다.
그러자 마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두 명의 소뢰음사 인물들은 두 손을 얽듯이 마주하고 기묘한 동작을 해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둘의 손동작 속에서 미미하지만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핑― 피잉!
귀모는 경악해 달려들던 몸을 뒤집었다.
"은삭!"
그러나 간발의 차로 팔에 가느다란 상처만을 입었다. 물론 그 덕택에 애꿎은 나무만 한차례 베어 넘어졌지만 말이다.
소뢰음사의 고수들은 마치 한 몸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화있게 움직이며 서로의 손에 가느다란 은삭을 묶고있었다.
이 순간에도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허공에 울려퍼졌다. 그들의 기묘한 휘파람 소리와 함께.
핑! 핑!
귀모는 그들과 상대하면서 자신이 빨리 지쳐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왜 그런지는 모르고 있었다.
단지 그들이 보내고 있는 은삭을 피하기에만 여념이 없었다.
그때였다.
"큭!"
귀모의 손목이 화끈해지며 왼쪽 손이 간만의 차로 날아가버렸다. 귀모는 자신의 피를 흘리는 손목을 움켜쥐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라마승들의 입가에서 사이한 미소가 피어나고 휘파람소리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끝장이다.'
귀모는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다. 하지만 인간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바라지 않았던 행운이 그녀에게 다가온 것이다.
"아이고, 마마. 이것이 어인 일이십니까?"
갑자기 웬 미친 늙은이가 나타나 귀모의 몸을 부둥켜 안으며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마마라니? 이 미친 늙은이가 뭐라고 지껄이는 것인가?'
귀모가 당황하여 어쩔줄 몰라하고 있을 때, 한 순간 뜨끔 하더니 그녀의 몸은 뻣뻣이 굳어져 버렸다.
'익! 첩자인가?'
급히 경계하며 몸을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이미 전신의 대혈들이 그 늙은이의 손에 점혈되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이고, 이 천하에 불충할 놈들! 감히, 감히, 이분이 뉘시라고 네놈들이 이분의 몸에 손을 대느냔 말이다!"
노인은 얼마나 분노했는지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말까지 더듬으며 라마승들에게 삿대질을 해대었다.
죽으려고 객기를 부려도 유분수지 이건 아예 목을 내놓고 옥황상제 앞에서 널을 뛰는 것이었다.
"오호! 금수만도 못한 놈들이로다. 금수만도 못해! 자신이 죄를 지어놓고도 뉘우침이 없다니. 네놈들이 그러고도 진정 사람이란 말이냐? 이 천하에 다시 없는 역적 같으니라고! 우리 마마를 괴롭힌 죄를 내가 대신 묻겠다. 이 나쁜 놈들아!"
라마승들은 어이가 없었다. 이 미친 늙은이가 다 지어 놓은 밥에 코를 빠뜨리더니 이제는 말도 안되는 얘기로 훈계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도 나름대로는 수행을 한 승들이었으나 계속해서 욕을 듣자 저절로 인상이 험악해졌다.
"시주는 명을 재촉하는군. 소원이라면 죽여주지. 목을 늘이시구려."
피잉!
그들 둘이 노인을 향해 손을 쓰기 시작했다.
은삭은 거대한 그물처럼 한치의 틈도 주지 않고 노인의 몸을 감싸가고 있었다.
귀모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죽었구나.'
퍽― 퍽!
그런데, 둔탁한 소리를 끝으로 종내 소식이 없었다. 그리고 귀모가 눈을 다시 떴을 때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두 라마승이 자신들의 물건을 붙잡고 떼굴떼굴 구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곳은 치명적인 약점이었지만 또한 단련하기도 가장 어려운 곳이었다.
라마승들은 너무나 큰 고통에 개거품을 물고는 바닥을 박박 기고 있었다.
노인네는 두 손을 합장하며 익살스럽게 말했다.
"허허. 이거 개들도 득도해 부처를 믿다니. 부처님의 광명이 온 누리를 비추시는구려."
"끄르륵―!"
노인의 비아냥에도 그들은 숨넘어가는 소리만을 낼뿐이었다.
그리고 노인네는 자랑스럽다는 듯 귀모에게 말했다. 다시 예의 그 미친 소리가 나왔다.
"마마.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내 이 남근작살각(男根斫殺脚)으로 무뢰배들을 혼내주었습니다. 다시는 딸랑거리면서 돌아다니지 못할 것입니다."
팔십 평생 혼자 살아온 그녀로서는 낯뜨거운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맙소사. 남근이 뭐?'
노인은 놀라는 그녀를 뒤로 하고 이제는 그들을 향해 제법 근엄하고 준엄하게 꾸짖기까지 했다.
"네 이놈들! 내 네놈들의 무례함을 친히 돌보아, 내 오늘은 네놈들이 앉아서 볼일을 볼 수 있게 선처해 주마. 자 대거라."
"이 늙은이가?"
라마승들은 찔끔찔끔 흐르는 눈물을 참으며 일어서더니 이 괴상한 늙은이에게 다시 달려들려는 순간,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따악―!
여문 호두 깨어지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자신들의 중요 부위가 뭉개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퍽퍽! 퍽퍽!
아주 아작을 내려는 것인지 그나마 엉망으로 뭉개진 사타구니를 발로 짓이기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지 소뢰음사의 승들은 신음소리 하나 내지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이미 이 늙은이에게 점혈되어 소리를 내지 못할 뿐 아니라 혀마저 뽑혀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낄낄낄. 마마께 불경한 죄."
때리는 것에 맛이 들린 듯 손속에 사정이란 것이 없었다.
그는 때린 곳을 또 때리고 안 부러진 곳을 골라 부러뜨리는 능숙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별다른 목적이 있는 듯 하더니 이제는 그저 상대가 고통받는 것이 즐겁다는 듯 손바닥까지 쳐가며 아이처럼 좋아하고 있었다.
"어른을 몰라본 죄."
푸욱...... 우지직!
무엇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어김없이 그의 죄목을 나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뢰음사의 승려들은 피거품을 물며 자리에서 나뒹굴었다. 이미 그들은 이승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 손을 더럽힌 죄!"
노인은 라마승에게 공평한 발길질로 인해 그들의 물건을 어묵으로 만들어 놓고는 마치 재판관이 하듯이 준엄한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노인은 손을 탈탈 털면서 만족스럽다는 미소와 함께 귀모를 내려보더니 정중하면서도 예를 다해 말했다.
"그럼 소인은 이만......."
그리고 사라져버렸고, 그제야 점혈이 풀린 귀모는 화들짝 놀라며 궁주의 뒤를 쫓아갔다.
그녀로서는 저 이상한 노인이 왜 자신을 도와줬는지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자신의 상처조차도 돌볼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천녀 신예원은 귀모의 말대로 달렸다. 아직까지는 그녀의 앞을 막는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막 옥문관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수십 인의 군병들이 장창을 꼬나든 채 사람들을 검문하고 있었고, 그들은 그녀의 앞을 막았다.
그리고 그 뒤로 국경수비대 대장인 석천의 얼굴이 언뜻 보였다.
그녀로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것으로 끝인가?'
그때였다.
쾅― 우르릉― 콰광― 쾅―!
사방에서 우뢰와 같은 폭음소리가 들리더니 사방에서 바위들이 비산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넘지 못하게 하라. 대열을 정비하라!"
석천이 대열을 정비하라고 소리쳐댔으나 누구도 그 소리에 귀 기울일 여가가 없었다. 바로 자신들의 머리 위로 바윗덩어리들이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 틈을 타 옥문을 넘어갔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한 사나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사마적이었다.
'잘 가시오.'
그는 자신의 수하들을 시켜 귀모를 구하게 하고, 그녀의 앞에 매복해 있던 자들을 처치했으며, 폭탄을 설치해 위기의 순간을 모면하게 해준 것이었다.
돌아서면서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신예원. 당신을 살려주는 것은 양부의 복수를 위한 포석일 뿐이오.'
그렇게 새삼 복수를 위한 것임을 다짐하는 불안한 마음을 그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 * *
폭포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로 인해 피어오른 물안개가 주변을 가득 메워 가히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일곱겹의 무지개가 공중에서 부서지는 물보라 사이로 피어있었다.
그러나 이런 절경과는 상관없이 갑자기 나타난 사내들은 주변을 거친 말과 행동으로 들쑤시고 다녔다. 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던 이들은 곧 돌아갔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가자 물 속에서 하나의 물체가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사람이었다. 수압으로 인해 그는 시퍼렇게 변해 있었으나 묵천이 분명했다.
그는 얼굴을 밖으로 드러낸 채 죽은 듯 물 위에 누워있었다.
그렇게 누워있으니 자연히 물살에 떠내려가 물가의 모래사장까지 밀려나와 있었다.
시간이 흘러 계곡에 밤이 찾아왔다.
죽은 듯 누워 있던 묵천의 손이 꿈틀 움직였다.
그리고 이윽고 그의 눈이 떠지고 그는 더듬더듬 물 밖으로 기어나와 모래사장에 처박혀 잔뜩 먹었던 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우욱....... 욱! 우웩!"
그리고는 돌아누워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았다. 밤바람에 한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이 순간 만족감에 빠져있었다. 아니 희열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었다.
드디어 그곳을 탈출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살아있었다.
그는 하늘을 향해 다짐했다.
'백천우! 기다려라. 내가 사부님의 원수를 꼭 갚고야 말 것이다.'
묵천은 수갑을 덜그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어둠을 밀치고 그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백천우가 막 잠자리에 들려 했을때 그의 수하 중 하나가 놀라운 소식을 전해왔다.
'묵천이 죽었다? 그것도 시독에 녹아죽었다?'
그는 소식을 듣고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그가 죽을 것은 예상했으나 이렇게 허무하게 빨리 끝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게다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느껴지기 시작한 일말의 불안감이 그를 가만히 있게 놔두지 않았다.
백천우, 지금 그는 묵천이 있던 뇌옥 안으로 들어가 세밀히 살피고 있었다.
만약 옥지기들이 조금만 태연했어도 그는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감옥에 들어서자마자 불안에 떨던 옥지기들은 나중에는 그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무언가를 쉬쉬하기까지 했다.
그는 옥을 세밀히 조사해 들어갔다. 그리고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얼굴이 일그러져 버렸다.
'빌어먹을!'
그는 벽의 한쪽 면이 새로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른 곳에는 끼어있는 이끼가 이곳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갈라진 틈 사이로 붉은 점토가 밖으로 새어나와 있었다.
심옥(深獄)의 옥주는 천벽벽이었다.
천벽벽이라면 남가 십팔창법(十八槍法)으로 사천지방에서 패웅으로 군림하고 있던 자로, 어느날 갑자기 가족들과 그의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의 애창만을 소지한 채 사라져 소문이 무성한 패웅이었다.
그런 마웅이자 패웅인 그가 이곳에서 한낱 옥주의 일을 보고 있다는 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천벽벽은 새벽부터 상당히 기분이 언짢았다.
쾅―!
그가 내려친 탁자가 부르르 떨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그깟 애송이 녀석이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다니."
한 사나이가 날이 새기도 전에 찾아와 묵천이란 자가 감금되어 있던 뇌옥으로 안내하라고 하더니, 이제는 그곳에서 나와 옥주를 나오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었다.
왕삼이 찾아와 마흔도 되어 보이지 않는 애송이가 본전의 감찰영부를 내보이며 자신을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천벽벽은 몹시 기분이 나빠졌다.
천벽벽은 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냉막함에 싸늘함마저 느껴지는 그런 얼굴이었다.
북해의 겨울을 사람의 얼굴로 표현하라면 이런 얼굴이랄까?
사내는 싸늘히 웃으며 말했다.
"옥주."
"예."
천벽벽은 대답을 하며 내심 배알이 꼴렸다.
그러나 어찌 하겠는가? 지위가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상황이 아닌가 말이다.
본교에서는 상관에게 대드는 것은 반역으로 간주되었다.
"옥주는 이 뇌옥 안에서 사람이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벽벽은 그 물음에만큼은 자신감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요?"
"우선 우리 뇌옥은 지상과 가장 가깝게 잡아도 십여 장이 넘습니다. 거기에 이 산의 토질이 화강암질이라 쉽게 뚫을 수도 없구요. 탈주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지요."
"호오. 그렇다면 당신은 이 뇌옥에서는 단 하나의 탈주자도 없다고 자부할 수 있겠군요?"
"예!"
"만약 있다면?"
"제 목을 걸겠소이다."
천벽벽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흠. 좋소!"
백천우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그자를 들여라."
홍귀라는 자였다.
"자, 아까 내게 말했던 것을 다시 말하라. 단 한 자도 빼놓지 말고!"
홍귀는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얼굴은 일그러져 부어올라 있었고, 앞니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니까, 삼 일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천벽벽은 믿지 못할 소리를 들어야 했다.
묵천이란 자가 감옥벽을 뚫고 탈옥했으며, 폭포에서 몸을 날려 떨어져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폭포 밑을 샅샅이 뒤졌으나 아무것도 발견한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홍귀는 시체가 폭포의 물살에 떠내려 가버렸을 거라고 자신없게 말했다.
천벽벽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백천우는 그런 천벽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떤가? 약속대로 목숨을 내놓겠는가?"
천벽벽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좋소."
그는 자존심이 강한 자였다.
"나 천벽벽, 비록 이루어 놓은 것은 없지만 내가 내뱉은 말은 책임지는 사람이오."
그는 검을 들어 자신의 목을 베어갔다.
쨍―!
천벽벽의 목에 검날이 닿기 직전, 검날은 부러져 튕겨나갔다. 백천우가 한 행동이었다.
천벽벽은 의문에 찬 얼굴로 백천우를 바라보았다.
백천우는 그를 보며 말했다.
"당신의 목숨은 나의 것이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자를 다시 잡아들이시오."
그리고 백천우는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천벽벽은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참담히 일그러졌다. 백천우, 그는 어떻게 하면 영웅이 자신의 말을 따라줄 것인지를 잘 아는 효웅이었다.
묵천은 밀려오는 한기 속에서 자신의 체온을 지키기 위해 낙엽을 끌어 모아 몸 위에 덮었다.
그는 오랜만에 바라본 하늘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다.
'조금 있으면 날이 밝겠지. 그렇다면 그때 움직이기로 하자.'
그는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 상태로는 얼마가지 못해 탈진하게 될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우선 몸을 추스리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몸이 요구하는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해 썩은 나무 등걸에서 굼뱅이와 작은 벌레들을 잡아먹었다. 그리고 연한 풀뿌리와 작은 열매들로 허기와 어느 정도의 체력도 보충했다.
전신의 근육이 마치 고양이 울음소리에 화들짝 놀란 생쥐처럼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그래서 묵천은 서서히 숨을 내쉬며 전신의 힘을 풀고 긴장마저도 풀어버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해야할지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 잡히는 수가 있더라도 쉬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의 행동에 많은 제약을 받게되는 것이다.
게다가 어느 정도의 시간은 벌어 놓았으니 약간 쉬더라도 그다지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썩은 나뭇잎들에서 따뜻한 열기가 서서히 밀려와 그를 기분 좋게 했다.
우백은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삼대째 대장장이 일을 하고 있었다.
막 동이 트기 시작한 이른 새벽 한 사나이가 찾아왔다. 그는 팔과 다리에 수갑을 차고 있었고 거기에는 잡아뜯은 듯한 줄까지 달려있었다.
"이것을 떼어 주시오. 가능한 한 빨리!"
우백은 사내가 감옥에서 도망한 죄수가 아닌가 했다. 덥수룩한 머리, 이미 헤질대로 헤진 의복이 그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게 했다.
그러나 이 주변에는 감옥은커녕 조그마한 관청조차 있지 않았으므로 그것도 이상했다.
그렇다면 이자는 어디에서 나타난 것인가?
그 사내는 우백을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마치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것 같았다.
우백은 더 이상 이 사나이가 어떤 인물인가를 신경쓰지 않았다. 잘못하면 목숨이 달아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정신없이 사내의 손목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주철에 주석을 섞어 만든 합금으로 단단하기가 그지없는 것이었다. 거기에 수갑의 열쇠는 누가 만들었는지 정교하기가 그지없어 우백의 실력으로는 열어볼 도리가 없었다.
"이, 이것은 달궈서 끊어내야 겠는데요."
사내는 그의 말을 듣더니 묵묵히 화로로 다가가 수갑을 불에 넣었다.
그의 손 아래로 벌건 불길들이 넘실댔다. 비록 손을 직접 불에 넣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수갑을 불 속에 넣자 벌겋게 달궈지며 그의 손 역시 익어가기 시작했다.
치지직.......
메케하게 살이 익는 냄새가 나더니 사내의 신음소리는 조금씩 커져가고 있었다.
그는 어느 정도 시간이 되자 다듬쇠 위에 그 수갑을 올려놓더니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끊어!"
순간 사내의 행동에 멍하니 넋을 놓고있던 우백은 화들짝 놀라며 정으로 달궈진 쇠를 끊었다.
사내의 다리에 묶여 있는 족쇠 역시 같은 방법으로 끊어 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몸을 달구어 쇠를 끊어낸 사내보다 우백이 더욱 지쳐버렸다. 신경이 바늘 끝처럼 곤두서서 거기에 지쳐버린 것이다.
사내는 수갑을 모두 풀어버린 후 무뚝뚝하게 밖으로 걸어 나가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한 마디를 던지고 사라졌다.
"고맙소!"
우백은 구석에 뒹굴고 있는 수갑의 조각들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사람도 아냐."
정오가 조금 지난 후, 이번엔 한때의 사람들이 우백을 찾아왔다. 모두 십 인이었다. 그들은 모두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우백으로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인근 관아의 사람들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저기 아래에 자리한 무도관원들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우백은 이들에게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그런 것을 물어볼 수 없었다. 그들의 인상은 척 보기에도 무척이나 잔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한 사내가 찾아오지 않았느냐고 다그쳐 물었다. 우백으로서는 대답을 할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는 아침에 다녀간 사내의 인상착의와 수갑조각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가 달려간 방향을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제발 이자들이 이곳을 빨리 벗어나기를 간절히 빌면서.
우두머리인 듯한 사나이가 우백이 가리킨 방향을 가만히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가자!"
사나이들은 그자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라져버렸다.
우백은 그 사나이들이 다 떠나자 그때서야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리고 참 별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등을 돌렸을 때, 그는 등쪽으로부터 극렬한 통증이 뻗어나와 전신의 구석구석으로 울려 퍼지는 걸 느꼈다.
"으윽."
다리에 힘을 잃고 쓰러진 그는 금방 나갔던 사나이들 중 하나가 자신의 등에 단검을 쑤셔넣고 싱긋이 웃고있는 걸 보았다. 그리고 정신을 잃어가는데 사내가 하는 말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너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어!"
묵천은 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일부러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곳만을 찾아 걷고있었다. 당연히 그것이 훨씬 느렸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추적자들이 더 빨리 쫓아올 것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가고 있었는데 꼭 들러야만 할 곳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옥에서 산화되어 죽어간 벽공이 예전에 잠시 스치듯이 한 말을 기억해 내었던 것이다.
벽공은 자신이 곧 죽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가끔 멍한 표정으로 뭔가를 떠올리곤 했었다. 그런 그에게 몇 번인가를 묻자 그는 한 여인을 생각한다는 대답을 했었다.
그때처럼 부드러운 벽공의 표정을 묵천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 아이는 제 어미의 젖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랐다네. 아마 지금쯤 어엿한 여인이 되어있겠지. 이 못난 늙은이가 혹시 기억이 나거든 그 아이를 한 번 찾아가 주겠나? 탈출이 성공한다면 말이네. 만약 그 아이가 어엿한 가정을 꾸리고 있으면 모르되 불행한 길에 서 있다면 자네가 그 애를 보살펴 주었으면....... 흘흘. 아닐세, 아니야. 내가 망령이 났구먼. 복수만을 생각하기에도 벅찬 노릇일텐데."
그러나 그는 벽공의 눈에서 너무나도 애처로운 빛을 읽었기에 그대로 무시해 버릴 수가 없었다. 다시 재차, 그녀의 소재지를 묻고는 덜컥 벽공에게 약속을 해 버렸던 것이다. '당신에게 빚이 있으니 꼭 그녀를 찾겠소.'라고.......
묵천은 그때 눈시울이 붉어지던 벽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발걸음을 점점 빨리했다.
"그 마을이 석류촌이라고 했던가?"
다시 벽공의 모습이 떠올랐다. 벽공은 벽에 기대어 앉아 꿈에 젖은 눈으로 얘기하곤 했다.
"나의 고향은 석류나무가 무성했었지. 여름이면 분홍빛 꽃이 피고 가을에는 주홍색의 석류 알갱이가 맺혀 마치 불이라도 난 것처럼 온 산을 붉게 물들였다네. 내 지금이라도 그 석류를 하나만 먹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으련만."
그의 눈시울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그에게서는 묘한 감흥과 향수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약초에 미쳐 살던 그였다.
그래서 딸아이가 아이를 낳다 죽었을 때도 그는 곁에 있지 않았다. 아내를 병으로 잃은 후 그는 세상의 모든 병을 자신의 손으로 고쳐보고자 했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약에 미쳐 살았던 것이다.
그러한 그의 노력은 수많은 의원들에게 전해져 많은 이의 생명을 구했지만 정작 자신의 단 하나뿐인 딸은 구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 자신 역시 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묵천은 괜히 그를 생각하자 감상적이 되는 걸 느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그는 고개를 저어 벽공의 모습을 떨쳐버리고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 * *
<석류가 익으면 그리운 님 오실까.
단풍이 물들면 그리운 님 오실까.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 봐도
날 두고 가신 님은 소식이 없네.
내년 봄이 오면
동산에 단풍나무 한 그루 심어
가을되어 붉어지면 님 돌아 오시겠지.>
조약빙은 자존심이 강한 여인이었다.
언제나 그녀의 앞에 섰던 사내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었고, 함께 담소를 나누면 그 박식함에 혀를 내둘렀었다.
그러나 그녀의 앞에 나타난 이 사나이는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그것이 분했다.
처음에는 '너도 그래봤자 별 수 없는 사내라는 걸 보여줄 테다.'라는 오기로 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상하게도 그가 계속 그리운 것이다.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도, 자신이 아닌 다른 여인을 향해 열정을 불태우는 그의 모습도, 그녀의 가슴에는 비수가 되어 꽂혔다.
그렇게나 자신을 열받게 하는 사내였지만 자신의 마음이 온통 그의 모습으로 뒤덮여 있는 것을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그녀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소하라 불리는 한 여인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소하를 증오했다. 매일 그녀를 손찌검도 하고 괴롭혔지만 분이 가시지 않았다.
어느 날 화가 날대로 난 조약빙은 손찌검하는 것으로 모자라서 그녀의 손에 들린 동경을 빼앗아 버렸다. 언제나 무표정하던 소하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울었고 그것이 자신의 마음에 만족감을 주자 조약빙은 아예 동경을 숨겨버렸다.
그리고 소하가 며칠이나 울부짖고 괴성을 질러댔지만, 조약빙은 그녀에게 동경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 순간 그녀는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른다. 소하라는 여인에게도 자신이 느끼는 고통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소하는 예전보다 더욱 멍한 표정으로 창 밖을 응시했다. 그저 그렇게 앉아만 있을 뿐 음식도 먹지 않았고 눈물도 흘리지 않았으며 더 이상 괴성을 지르지도 않았다.
그렇게 소하가 창 밖만을 응시하고 있자 조약빙도 약간은 죄의식과 연민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의 괴로움을 자신이 조금 더 즐기고 싶은 마음에 그녀는 동경을 돌려주지 않았다.
남태천이 사랑하는 여인이 괴로워하는 모습은 그녀에게는 위안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받았던 상처들을 조금이나마 위로해주는.......
그 다음날이었다.
조금 야심한 시각, 그녀가 막 잠자리에 들려는데 한 시녀가 급히 그녀의 방에 들어왔다.
"소주, 소하라는 여인이 자결을 했습니다."
순간 그녀는 튕기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하가 묵고있던 침실을 향해 달려갔다.
소하는 이불을 길게 찢어 천장에 묶고 목을 매었던 것이다. 하얀 얼굴에 눈물로 얼룩져진 그녀의 모습은 귀기롭기까지 했다.
소하라는 여인의 죽음을 본 순간 조약빙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온 몸에 힘이 빠져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만약 이 사실을 그가 알게 된다면 어찌 될 것인가? 그녀는 이내 그의 원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단지 그를 사랑한 것뿐인데 이제는 영원히 그와 결합할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소하라는 여인을 이용해 그와 결혼하려 했던 그녀의 계획은 이제 소하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이제 그는 나를 증오할 거야.'
그에게 그녀는 제일가는 원수가 되어버렸다.
"이게...... 이게 아니었는데...... 이게 아니었는데......."
그녀는 한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남태천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가슴에 미묘한 바람이 흐르더니 감정이 복받쳐 오르며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달빛이 너무도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자신이 너무나 감상적이 되었다는 사실에 피식 웃어버렸다.
그의 웃음은 쓸쓸해 보였다.
한 줄기 바람과 함께 어디선가 귀뚜라미 우는소리가 들려 왔다.
"벌써 가을인가?"
그녀의 눈에는 소하라 불리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졌다. 웬지 오늘따라 그의 뇌리에 떠오른 소하의 모습은 너무나도 슬퍼보였다.
"그래도 어린 시절이 좋았는지 모르지."
* * *
멀리 열사의 바람이 지나고 밤이 찾아오면 사막은 적막함과 추위가 밀려온다.
그러나 한 여인은 추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중원을 향해있는 창가에서 밤바람을 맞고 있었다.
둥근 보름달에 사막의 모래들이 반짝이고 있어 마치 금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중원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감기면 혹시라도 묻어올지 모르는 그의 냄새를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녀의 뇌리 속에는 한 남자의 영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자신을 범하고 없어져버린 그 사내의 모습이었다.
증오가 일어야 정상일 것이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증오보다는 무언가 답답함이 일었다.
'그리움일까?'
그녀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자신을 범한 남자를 그리워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혼미한 정신 중에 보았던 그 사내의 눈은 너무나도 슬퍼보였다.
자신의 어머니처럼.......
어제 신예원은 오랜만에 어머니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사랑스럽게 가꾸셨던 꽃정원 사이를 달리고 있었고, 어머니는 그녀를 자비롭게 바라보고 계셨다.
손에 자수틀을 들고 살포시 앉아서 뛰노는 그녀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대로 향기가 묻어나올 것 같았었다.
"원아. 그렇게 뛰다간 다쳐요."
"호호호호. 엄마, 이것 좀 봐요. 너무 재미있어요. 호호호......."
"원, 애도."
그녀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좀 더 그렇게 그 꿈에 머무르고만 싶었다.
'어머니. 정말 보고 싶어요.'
자고있는 그녀의 눈썹에 어느새 이슬이 맺혀가고 있었다.
하지만 꿈속에서의 예원은 계속 뛰놀고 있었다.
"호호호! 어어...... 아얏!"
허둥지둥 달려오시는 어머니의 모습.
"원아, 다쳤니?"
꿈속의 꼬마 예원은 울면서 자신의 발 밑을 가리켰다.
"이 사람 때문에 넘어졌어요. 아앙....... 엄마, 아파요."
꼬마 예원은 자신의 발이 걸려 넘어진 사람이 누군지 바라보았다.
바로 그 슬픈 눈의 남자.
어째서 꿈에서까지 이 남자가 나타나는 것일까?
어느새 꼬마 예원은 꿈속에서도 여인으로 변해있었다. 그녀가 놀란 눈을 들었을 때,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가만히 속삭여 주었다.
"우리 원이가 이제 어른이 됐구나."
좋은 여운이 퍼지는 그런 꿈이었다.
눈을 뜨고 나서 신예원은 자신의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자애롭게 바라보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천녀 신예원. 그녀는 어린 시절에 잠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무공을 익혔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몸이 약해 신예원을 낳고는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항상 슬픈 눈을 했었던 이유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아이가 하나였으므로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아들처럼 키우고자 하였다. 선천궁을 지킬만한 그런 딸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평범한 여인으로 자라기를 바랬다. 검보다는 자수를, 위엄과 지배보다는 사랑과 존경을 배우게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설득했고 그녀는 더 이상 무공을 배우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는 그런 어머니를 사랑했다.
또 어머니는 그녀를 앉혀놓고 자신이 온 중원이라는 곳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었다. 그리움이 가득 묻어나오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그녀는 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나, 어머니를 끔찍이도 사랑했기에 그저 묵인해 주었다.
그래서 신예원은 어머니가 태어난 중원을 동경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이 모래 폭풍치던 사막에 눈이 내렸었다.
신예원은 하얗고 소담한 눈을 두 손에 받아보았다. 손에 닿자마자 녹아 내리던 그 하얀 솜털이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였다.
그녀는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동정호의 정취 가운데 한 겨울이면 소복이 쌓이던 눈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아름다운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었고 강과 바다, 널다란 초원들이 있는 중원을 떠올렸다.
어머니가 그리우면 그리울수록 그녀는 중원이라는 곳에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때 그녀는 어머니의 유골을 중원에 묻어주리라 결심했던 것이다.
그녀의 입에서 낮은 한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는 지금 마지막 순간에 보았던 어머니의 눈과 한 사나이의 눈을 그려보고 있었다.
슬픈 듯하면서도 무언가 꿈꾸는 듯한 그 눈빛을.
* * *
사마적의 손에는 술잔이 들려있었다.
천루의 밤은 시끌벅적하다. 기녀들의 웃음소리, 주객들의 푸념소리, 악공들의 음악소리들이 끊이질 않았다.
이런 것들을 보면 어느 것 하나 여타의 다른 주루들과 다를 것이 없었지만, 웬지 이곳에는 묘한 긴장감이 어려있었다.
사마적의 손에 들린 잔에서 적갈색의 액체가 그의 입을 타고 넘어 들어갔다.
'하나, 둘, 셋, 도합 다섯이 누각의 위와 처마, 연못에 머물고 있다.'
사마적은 꽃무늬로 장식된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자신이 이루어놓은 재산을 바라보며 흡족해하는 촌부의 그것이었다.
'후후후....... 이곳이 의심스럽단 말이지.'
사마적은 어디까지나 거나하게 취한 촌부의 모습으로 그렇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불나비들에게 선물을 해줘야지!'
사마적의 손이 허공에서 기묘하게 맴돌다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암행인들조차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히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천루의 한 지붕 누각 위, 기왓장들 사이에 두 개의 눈이 건너편 건물의 들창 안의 인물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는 그 인물이 움직이는 것을 벌써 몇 시진 째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았다.
그는 평범한 촌부였다.
적당히 쓸 줄도 알고 굽실거릴 줄도 아는 평범한 촌부, 그러면서도 자신이 일궈놓은 이 모든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그런 자였다.
그런데 교에서는 만약의 경우 그에게 추살령까지 내려놓고 있었다.
그가 수상한 행동을 하거나 무공을 익힌 기미만 보이면 이곳에 파견된 특급살수 오 인이 그를 추살할 것이다.
저 노인 자신도 모르게 말이다.
그는 자신이 한낱 노인이나 암살하기 위해 그 많은 시간을 수업 받은 것에 대해 회의가 들 정도였다.
그는 어린 시절, 가난한 농군 집안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열 살이 되던 해인가?
극심한 가뭄이 들었고, 아버지는 자신의 자식들을 노비로 팔아 넘겼다.
겨우 은자 열 냥에 아이들은 팔려갔고, 그렇게 노비로 팔려간 그와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모두 죽었는지 살았는지 지금은 알 수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어느 고관의 집에 팔려갔다.
밤마다 행해지는 매질도 괴로웠지만 하루에 한 끼니의 밥도 겨우 얻어먹을 때는 정말로 배가 고파서 힘들었다. 등짐에서부터 청소, 물지게, 열 살 소년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혹독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 집의 도령들은 좋은 옷에 기름진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들은 좋은 부모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 집의 둘째 도령이 그에게 고기 조각을 던져주며 자신에게 먹으라고 했다. 그것도 개처럼 짖으면서 먹어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기로 먹지 않았고 곧 그 집의 세 도령들은 매질을 시작했다.
그는 맞아야만 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도 억울했기에 그는 그 세 도령을 늘씬하게 두들겨 패주었다.
그날 저녁 그에게 돌아온 것은 엄청난 매질이었다. 그리고 그는 삼 일간을 앓아 누워 있어야만 했다.
사흘 후 소년은 그 집을 도망쳐 나왔다.
그후, 거리에서 비렁뱅이질을 해먹던 그에게 한 사나이가 다가와 물었다.
"무공을 배우지 않겠느냐?"
그때 그는 물었다.
"무공을 배우면 누구도 나를 무시하지 않나요?"
"그렇다. 그 누구도 너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배우겠습니다."
그후부터 그는 무공이란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동영의 인자술에서부터 자객술까지, 모든 것을 익히는데 칠 년이란 시간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몇인가를 죽인 후부터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 벌레를 눌러 죽이는 일보다도 쉽게 느껴졌다.
그가 죽인 자들 중에는 자신을 버린 부모와 자신을 두들겨 패던 세 도령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겨우 저렇게 별 볼일 없는 자나 지켜보고 있어야 하다니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데 문득 자신의 등뒤가 서늘해졌다.
'응?'
그곳에는 믿겨지지 않게 거대한 몸집의 사내가 서 있었다. 그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
였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이런!'
그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거대한 몸집의 사나이는 그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그의 목을 향해 손을 뻗어왔다.
우두둑!
그는 절명해버렸기 때문에 보지 못했다. 그 거대한 사나이가 입가에 미소를 걸고 있는 것을.......
소평과 호귀, 그리고 광노는 벌써 오래 전부터 잠행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사마적의 수신호가 들어오자 재빨리 움직여 하나하나 소리 없이 그들을 제거해 나간 것이다.
천루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 * *
검이 들렸다. 언제봐도 검에 어리어 있는 살광은 아름답기가 짝이 없었다.
그는 다시 검을 내려 헝겊으로 검을 문질렀다. 그는 이렇게 마음이 산란하거나 무언가 생각할 것이 있는 날은 항상 검을 닦았다.
검을 닦을 때만큼은 그도 마음에 평정을 되찾고 고요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장 좋은 검은 어장이나 거궐 같은 신검이 아닌, 이처럼 많이 쓰인 검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피를 머금은 검일수록 그 살기가 더욱 짙어지므로 검에 어린 살광 또한 더욱 아름다울 것이기 때문이다.
총령은 자신의 검을 이리저리 훑어보고는 만족에 찬 얼굴로 검집에 검을 거두어 넣었다. 그리고는 긴장을 풀고 이완되었던 몸에 힘을 주었다. 때 마침 환인이 들어왔다.
"천루에 파견했던 살수들이 모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
"예!"
총령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몇이나 보냈었나?"
"오 인으로 모두 특급살수였습니다."
"천루의 낌새는?"
"예. 아무런 미동 없이 계속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총령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명령했다.
"다시 살수들을 파견하도록!"
"예."
그리고 환인이 모습을 감추자 총령은 읊조렸다.
"천루라......."
* * *
묵천은 마을에 도착했다.
그는 노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도착했다. 그러나 노인이 말하던 것과는 사정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석류촌(石榴村).
마을에는 노인이 말한대로 석류나무가 무성했다. 집집마다 길가나 산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석류나무였다.
그는 노인이 일러주던 길을 찾아 한곳에 다다랐다. 그러나 그를 반긴 것은 무성한 잡초와 검게 그을린 건물의 잔해였다. 그것도 수십 년이 흐른 듯 이미 잡초가 무성히 자라 있었다.
당연히 벽공의 딸은 그곳에 없었고 그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수소문을 해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벽공이 약초를 찾아 나간 후 홀연히 사라지자 얼마 후 불이나 집은 사라져버렸고 그곳에 살던 소녀는 어디론가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쉬 찾을 수 없었다.
묵천은 곧 추적자들이 쫓아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자꾸만 벽공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초초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물어가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가 악양에서 창녀로 있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하였다.
묵천은 발걸음을 악양으로 돌렸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지 않아 몇 십 인의 사람들이 석류촌에 들이닥쳤다. 그들의 무인복장에 마을 사람들은 무척 놀랐지만 그들이 자신들은 포교라고 설명하자 사람들은 긴장을 풀었다.
그들은 묵천의 인상을 설명하고 그를 봤느냐고 물었고, 아까 묵천에게 벽공의 딸이 있는 곳을 가르쳐준 그 사람이 악양으로 갔을 거라고 말하자 다시 바쁜 걸음으로 사라져 버렸다.
갑작스런 이 외지인들의 등장에 마을 사람들은 쑥덕거렸다.
"아까 그 사람, 죄인인 모양인데 왜 벽진연을 찾아다니는 거지?"
그러나 대답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제10장 함정
사마적은 등을 돌린 채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기운이 묻어났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에게서는 초조함이나 충만함 그 외 여타의 감정이나 분위기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생명 활동을 하지 않는 말라 죽은 고목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
"다 끝났군."
그는 나직이 읊조렸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등뒤로 광노가 나타났다.
"분부대로 모두 처치했습니다."
"수고했소."
"그런데 이렇게 하신다면 적에게 일부러 우리의 정체를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까?"
사마적은 돌아섰다.
그의 눈은 차갑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후후. 사실은 그렇소."
"예?"
"나는 이곳에 더 많은 파리가 꼬여 들기를 바라는 것이오."
"하오시면?"
사마적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어렸다.
그 순간 광노는 느껴야 했다.
만년한빙(萬年寒氷) 보다도 더욱 차가운 사내의 미소와 살기를. 광노는 흠칫 놀라며 섬뜩한 느낌에 몸을 떨었다.
"파리가 몰려들면 때려 잡아야겠지. 한 번에 말야. 광노, 내가 그대에게 부탁 할 것이 있소."
"무엇이든지 하시지요."
사마적의 손끝에서 종이 한 장이 떨어져 내렸다. 광노는 그 종이를 집어들어 펼쳐 보았다.
"아니, 이렇게 많은 폭약을요?"
"모두 준비해 주시오. 기간은 짧을수록 좋소."
"예. 알겠습니다. 흐음. 이 용도를 설명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사마적은 싸늘하게 웃었다.
"후후후. 아마 알게 될 것이오. 아마도 근 시일 내에 말이오."
광노는 읍을 해보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아주 화려한 불꽃놀이가 될 거야."
사마적의 낮은 읊조림이 이어졌다.
* * *
악양(岳陽)에 있는 누상촌(樓上村)에는 삼백여 호의 판자 집들이 바닷가 바위에 붙어있는 조개껍질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곳은 야화(夜花)들의 마을이었다.
낮보다는 밤에 더욱 분주한 곳으로 끈끈한 신음소리, 여인들의 웃음과 남성들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넘치는 곳이었다. 이곳은 정이나 마음보다는 돈과 쾌락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저녁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잠들어 있던 이 마을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노을이 유난히 아름답기는 했지만 여느 날과 같은 하루였다.
누상촌의 여인들이 몸단장을 끝내고 막 거리로 나서는 시각, 한 사내가 마을을 향해 들어섰다.
낡은 옷에 신발조차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헝클어진 머리가 사내의 얼굴을 가리고 있어 그 용모는 알 수가 없었다.
밖에 나와 서성이던 여인들이 그를 향해 장난스럽게 손짓하며 소리쳤다.
"호호호! 낭군님 놀다 가세요."
"낭군니임."
"호호, 저런 모습으로 힘이나 있을까 몰라."
그녀들의 장난스런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는 한 곳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 사내의 뒤로 여인들의 자지러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사내는 건물의 한 귀퉁이에 기대앉아 있는 병약한 여인에게로 다가섰다.
여인은 사내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정도 느낌도 없는 그 눈은 생의 작은 희망조차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수 일째 굶고 있었다. 그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에 걸린 그녀를 사줄만한, 인정 많은 사람들은 이곳에 들어서지 않는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겨를도 없었다.
단지 배고픔을 잊기 위해, 아니 오늘 하루를 살기 위해 그녀는 지금 거렁뱅이라도 잡아야 했다.
이제 그녀에게 자존심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생에 대한 의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를 좀 사주세요. 제발, 벌써 여러 날 굶었답니다. 한푼이라도 좋아요. 제발......."
그녀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애원했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비틀거리는 신형을 겨우 바로잡으며 판자집들을 비집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사내는 아무런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가 사내를 데려간 곳은 마을의 제일 뒷 켠에 자리한 판자 집의 골방이었다.
이곳은 그녀와 같은 처지의 몇몇의 여인들이 함께 사용하는 곳이었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었기에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만약 누군가 자리잡고 있다면 그녀는 다른 장소를 떠돌아야 하기 때문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방에서는 메케한 곰팡이 냄새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여인은 방 안으로 들어서 옷을 벗으려고 앞섶에 손을 갖다대었다.
그런데, 사내는 문 밖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 아닌가?
"왜 그러고 계십니까?"
그녀의 얼굴은 울상이 되어버렸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사내의 입에서는 의외의 물음이 나왔다.
"그대가 벽진연인가?"
사내의 물음에 벽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벽가 노인이 보내온 사람이다."
이 사나이는 묵천이었던 것이다. 그는 벽공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어디에 그런 힘이 있었을까?
방금까지 쓰러질것만 같던 그녀가 나는 듯 달려들어 묵천의 다리에 매달렸다.
그녀는 소리지르듯이 말했다.
"할아버지가 보낸 사람인가요? 할아버지는 어디에 계시지요? 살아 계신가요?"
그녀의 모습은 정말로 애처로와 보였다.
"제발 알려주세요."
묵천은 말이 없었다. 그저 고개만을 가로저을 뿐.......
"그럼?"
"죽었다. 그래서 내가 너를 데리러 왔다."
벽진연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죽다니......."
그녀의 마지막 희망이 꺾여버렸다.
그녀가 이렇게 모진 삶을 살면서도 끝내 삶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어딘가에 살아계실 거라 믿었던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할아버지가 자신을 데리러 오실 것이라 믿었기에 그녀는 그 날을 손꼽으며 이렇게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희망마저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망연자실한 벽진연의 모습을 묵천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나를 따라 가겠느냐?"
그러나 벽진연은 제정신이 아닌 듯 말이 없었다.
그때였다.
'살기!'
묵천은 등골이 서늘할 정도의 극렬한 살기를 느껴 몸을 비틀었다.
휘잉―!
섬뜩한 소리와 함께 귀두도가 묵천의 등을 스쳐 지나갔다. 묵천이 그 칼을 피한 것은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였다.
"흐흐흐......."
묵천의 등뒤로 십 인의 사내가 포진해 있고 그 앞에는 한 사내가 박도(朴刀)를 들고 서 있었다.
그 사내는 음습한 미소를 흘렸다.
"그 지옥을 도망쳐 나와 찾아온 곳이 겨우 여기냐? 그토록 계집이 그리웠더냐?"
묵천의 눈 주위가 씰룩거렸다.
"후후후후!"
그자의 입에서는 엷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한 달이 다 되어 가는군. 너희가 나를 쫓기 시작한 게."
"잘 아는군. 너의 자유도 여기까지다!"
사내는 귀두도를 겨누며 몸을 낮췄다.
"죽어라!"
휭―!
사내의 검이 묵천의 왼쪽 가슴을 향해 찔러왔다. 그러나, 검은 목표에 닿을 수 없었다.
묵천의 몸이 사내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고, 사내의 검은 허공을 갈랐다.
퍼벅―!
사내가 흠칫하는 사이 묵천의 수도(手刀)는 사내의 가슴을 갈랐다.
"헉!"
사내의 입에서 헛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오기도 전에 묵천의 수도는 다른 사나이의 목을 베어가고 있었다.
"크악! 무공을 모두 잃었다고 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이냐?"
한 사나이가 쓰러지며 통렬하게 외쳤다.
묵천은 먹이를 쫓는 맹수처럼 다른 표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주먹으로 한 사내의 면상을 노린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묵천의 허벅지를 철응조수(鐵鷹爪手)가 할퀴고 지나갔고 그로 인해 중심을 잃은 묵천의 주먹은 사내의 면상에 닿지 못했다.
묵천은 다시 신음을 흘릴 사이도 없이 두 발을 모아 상대의 낭심을 발로 찼다.
무림에서는 이런 수법을 쓰는 자들을 경멸한다. 너무도 비겁하고 치졸한 수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대련을 하는 것이 아니고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므로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이 수법은 너무나도 적절했다.
"크악―!"
한 번의 발길질에 사내는 아랫도리를 움켜잡으며 뒤로 나뒹굴었다.
"죽어라!"
묵천이 철응조수를 든 사내를 공격하는 사이 묵천을 공격했다. 실패한 사내는 두 자루의 단검으로 묵천의 목을 노리며 덮쳐왔다.
절대절명! 묵천은 상대의 단검을 두 손바닥으로 막았다. 단검은 묵천의 손바닥을 뚫고 나왔다. 단검의 끝을 타고 핏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 사이 묵천은 자신의 입술을 깨물어 한 웅큼의 피를 사내의 눈을 향해 뱉아냈다.
푸우―!
사내는 갑작스런 묵천의 공격에 어리둥절하다 두 눈을 문지르며 나뒹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묵천의 피는 이미 극독이지 않는가?
묵천의 손에 박혔던 검은 그의 피로 인해 이미 부식되어 빠져나왔다.
그리고 묵천의 손에는 아문 상처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독인!"
자신의 다리로 지면을 딛고있던 사내 중 하나가 소리쳤다. 묵천은 바닥에 나뒹구는 검을 주워들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사내들은 묵천을 품(品)자형으로 둘러쌌다.
"핫!"
"일검에 갈라라."
휘잉―!
검음과 함께 사방에서 검날이 다가들었다. 묵천이 네 등분으로 분해 되어 버리려는 찰라였다.
그때 묵천의 손이 움직였다. 바람에 몸을 맡긴 나뭇잎처럼 그 격식조차 없었다.
그리고 허공을 갈랐다고 생각되는 순간, 삼 인의 육체는 수십 조각의 고깃덩어리로 화해버렸다.
진정 번개보다도 더욱 빠른 순간이었다. 그는 무공을 할 수 없는데 방금 전 것은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묵천은 잠시 의문을 접어두고 벽진연을 바라보았다.
벽진연은 사색이 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상촌에서 이 두 남녀가 사라진 것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이다.
그들이 잠시 머물었던 집 앞에는 파리가 들끓는 십여 구의 시신만이 남아 있었고, 무심결에 골방에 들어섰던 창녀와 사내는 모두 기겁을 했다.
* * *
퍼억...... 파방!
총령의 손아귀에 걸린 서탁(書卓)이 일수에 바스러져 나갔다.
"무엇이! 또 다 죽었단 말이냐?"
환인은 고개를 더욱 조아리며 말했다.
"확실치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잠입했던 자들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총령은 그의 말이 끝나자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기분이 언짢았다.
요즘 그가 하려는 일들마다 자꾸만 틀어져가지 않는가? 총령의 신경은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총령이 아무말도 하고 있지 않자 환인은 오히려 더욱 불안해졌다. 그렇게 죽음과도 같은 시간이 흘렀다.
"다시 한번 시도하라. 우리의 계획에 차질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 무조건 척살 하도록! 그자가 누구든."
드디어 총령이 입을 열었다. 기다림의 시간이 끝나자 환인은 힘차게 대답했다.
"예."
그리고는 바람결에 날리는 먼지처럼 사라져버렸다.
"흠!"
총령은 다시 의자에 몸을 묻으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천루...... 그리고 홍화객......."
* * *
사마적은 거대한 전도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전도에는 몇 개의 색이 다른 점과 그 점들이 연결하는 선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사마적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사마적의 등뒤에는 광노가 서 있었다.
"광노."
"예"
"아버님이 남긴 조직이 세 곳이라고 했던가?"
"예."
"모두 몇 명쯤 되는가?"
"도합 삼만 명쯤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모두 삼단(三團)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제가 관리하는 혈단(血團)과 소평이 관리한 천의단(天意團), 그리고 호귀는 광의단(光毅團)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우리 삼 인이 각 일만 명씩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자객술과 암기술에 능한 자 천 명을 골라라."
"예. 하오시면?"
"그들로 하여금 마교의 잔당들을 모두 치는 것이다. 물론 한 사람의 이름을 도용해서 말이다."
"한 사람이라 한다면?"
"홍화객이다. 아마 다시 한 번 홍화객이라는 이름이 이 중원을 질타할 것이다."
광노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이곳이 폭풍의 핵이 되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처럼 나약하게 살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이번 계획으로 인해 숨어 있던 세력들이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아마도!"
사마적의 목소리는 나직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그 낮은 목소리에는 거역치 못할 힘이 담겨 있었다.
사마적의 눈이 붉게 타올랐다.
* * *
소림사.
숭산 소실봉에 자리한 소림사의 거대한 산문은 은은한 달빛을 받으며 굳게 닫혀있었다. 간혹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와 한줄기 바람만이 전부일 정도로 소림사는 조용했다.
이때, 고요한 밤을 깨뜨리며 몰려드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살기어린 미소와 차가운 눈빛을 가진 사십여 인의 흑의인들은 혈룡(血龍)이 그려진 두건을 쓰고 있었다.
사내들은 소림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강궁(强弓)에 활시위를 얹었다.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있었다. 무림의 거대한 용 대소림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잠들어 있었다.
흑의인들은 화살의 끝에 불을 붙였다.
"발사하라."
소림의 외단에 자리한 가옥들에서 불길이 올랐다.
휙―! 휙―!
불화살들은 우박이 떨어지듯이 쏟아져 내렸고, 소림사에서는 대 혼란이 시작되었다.
"불이야!"
승들은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불길을 잡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오합지졸보다도 더 못한 움직임들이었다.
이때 지객당을 책임지는 대불지선 묵운이 나서며 일갈성을 터뜨렸다.
"어찌 수양을 쌓은 자들이 이리 경거망동하는가?"
그제야 승들은 대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무승들은 소림의 산문을 지켜라. 사미승들은 불길을 잡고, 수도승들은 기물을 보호하라."
그의 명에 의해 소림의 승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누가 감히 소림을 건드린단 말인가?"
묵운의 선장을 쥔 손에서는 우두둑! 소리가 들려왔다.
소림의 뒤편에 자리한 조사동부였다.
소림사에서는 일대의 혼란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이곳은 한적하기 짝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음산한 기운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곳은 소림의 성지가 아닌가? 그런데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악한 힘은 불가의 성스러움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것이었다.
"후후후후!"
한 사내가 조사동부 입구에 자리한 초막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그 음산한 기운의 정체는 그곳에서 풍겨져 나왔다.
"허억...... 헉!"
전신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이 나무로 만든 침상 위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나이는 십칠이나 십팔 세 정도의 소녀로 이제 막 여인의 자태를 갖기 시작한 육체를 소유하고 있었다.
"아흡! 살려주세요. 제발."
그 여인의 전신을 주무르고 있는 것은 천일면벽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환우대사였다.
"크흐흐....... 제법 괜찮은 미약이군. 흐흐흐, 그럼 기다려라. 내가 환락경으로 보내 줄 테니."
환우대사는 달려드는 여인을 뿌리치려고 하지 않고 품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흠, 제법 훌륭한 순음지체를 가진 아이군. 아주 훌륭한 보양감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운우지락(雲雨之樂)를 나누기 위한 것조차도 아니었단 말인가?
환후대사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역천마인대법을 시전하면 나의 무공은 가일층 발전하리라."
역천마인대법(逆天魔人大法).
이는 삼백년 전 음마(淫魔)라 불리는 사나이에 의해서 만들어 졌다.
음마는 신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음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음마는 그 지역 협사들에게 쫓겨 한 동부로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천축에서 흘러들어온 방중술 책자를 발견하게 된다.
그 책자를 이용해 그는 역천마인대법이라는 기묘한 무공을 만들게 되는데, 그로 인해 그는 단순한 음적에서 마인이 되어 이백삼십여 명의 여인들을 겁탈했고, 그 여인들의 음기를 받아들여 삼 갑자의 내공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 역시 천수를 다하게 되고 그의 무공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음마의 무공이 이자의 손에라도 들어갔단 말인가?
"흐흐흐....... 토실토실하군. 처녀일수록 음기가 강하지."
환우대사는 소녀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실었다. 소녀는 처녀의 몸으로 환우대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하악......학!"
여인은 몸을 뒤틀었다. 뇌쇄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환우대사는 음심에 가득한 표정이 변하더니 얼굴이 딱딱히 굳어져버렸다.
"옴살바마나다라옴 살바 못자 사바하."
기이한 독경소리와 함께 환우대사의 몸과 소녀의 몸이 겹쳐지는 순간, 환우대사의 몸에서는 은빛이 퍼져 나왔다.
"아악!"
소녀의 입에서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 탱탱하던 소녀의 피부가 백 년 묵은 강시의 피부처럼 푸석푸석하면서 쭈글쭈글해지는 것이 아닌가?
"아! 아......."
소녀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환우대사의 몸 아래 깔려 있던 소녀의 몸은 한 줌의 먼지가 되어버렸다.
환우대사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려는 때였다. 그는 미세한 살기가 풍겨나오는 것을 느꼈다.
"웬놈이 감히 소림의 성소까지 침입하였느냐? "
환우대사는 초옥(草屋)의 벽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그렇게 뛰어나간 환우대사가 보게 된 것은 검을 짚고 서 있는 한 사내였다.
"웬놈이냐?"
그러나 사내는 환우대사의 물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먼 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흥! 대단한 간담이군. 단신으로 이곳 소림에 뛰어들어온 것이 부족해서 금지로 들어서다니."
"후후후!"
사내는 그제야 환우대사를 바라보았다.
"당신도 들어와 있는데 무엇이 무서워 내가 들어서지 못한단 말이오?"
"흥! 삼천의 소림 고수들을 얕보는 것이냐?"
"고수라....... 과연 그들이 여기로 올까?"
"무슨 소리냐?"
"그들은 지금 소림을 공격하는 무리들을 찾아 이 산을 모조리 뒤지고 있소이다. 당신이 임의로 부르지 않는 이상 그들은 오지 않소. 그런데 당신은 천일면벽 중이거늘 그들을 어떻게 부를 수 있단 말이오?"
"......!"
환우대사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직접 이자와 맞부딪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지금 그는 소녀의 음기를 취하고 운기조식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기를 받아 들였다고 모두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기운이 상충(相衝)되어 반목(反目)하기 때문에 기를 흡입하고도 부단히 노력해서 자신의 기와 융합을 해야 겨우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
서로 상반되는 기운이 그의 한 몸 속에서 서로와 상충하고 있어 지금은 불가에 늘어놓은 폭약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이런 상황에 그가 기를 운행시키려 한다면 그는 주화입마에 들게 되는 것이다.
"나는 당신이 그 소녀의 순음지력을 빼앗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유는 당신이 더욱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환우대사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독한 놈. 그럼 소녀가 죽는 것을 보고도 네놈이 유리한 입장이 되기 위해 지켜보고 있었단 말이냐?"
사내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고, 그의 얼굴은 달빛에 드러났다.
그는 사마적이었다. 그는 싱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네놈을 죽이기 위해 왔지, 소녀를 구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지름길을 놔두고 돌아가는 우(遇) 따위는 범하지 않는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환우대사의 장심은 거대한 자루처럼 크게 부풀어 올랐다. 사마적에게 대항하기 위해 공력을 끌어올린 것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크게 일그러져 있었다.
비록 지금 자신의 내부에 자리한 힘이 상충하는 것을 막고는 있었지만 약간의 공력을 끌어올리는 데에도 엄청난 고통이 따랐던 것이다.
"후후후! 무척이나 고통스러운가 보군.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 같은 놈을 동정해줄 수는 없지. 안 그런가?"
환우대사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거렸다.
"아, 당신을 죽이는 게 내가 여기까지 온 목적의 전부라고 착각하지 말도록. 당신은 남태천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야."
"크아악! 미친......."
환우대사의 장력에서는 짙푸른 기운이 퍼져나오고 있었다.
"끌끌끌. 파옥수(破屋手), 괜찮은 수법이지. 하지만 지금 당신 몸으로 제대로 시전할 수 있을까?"
환우대사의 눈에는 절망감이 어렸다.
사마적이 기묘하게 손을 꺾으며 무언가를 퉁겨 보냈다.
환우대사의 동공이 갑자기 커졌다.
"탄지신공."
환우대사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지기도 전에 사마적의 손끝에서는 무언가 반짝이는 물체가 퉁겨 나왔다.
은침이었다.
환우대사는 들끓어 오르는 기운을 억제하기 위해 움직이지 못하고, 은침이 날아오는 것을 뻔히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런 그가 전신의 힘을 기울여 몸을 비틀려고 했을 때, 은침은 이미 환우대사의 단전에 꽂혀 들어왔다.
"커억!"
환우대사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혈색이 돌던 모습이, 순식간에 종잇장보다도 하얗게 변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저승의 사자가 이런 모습일까? 그의 얼굴에선 이미 약간의 붉은 기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분 한 갑을 모두 쏟아 놓는다면 이러하리라.
환우대사는 자신의 공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고 있는 듯 절망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으으......."
그는 주화입마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사마적은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후후후! 덕분에 나의 힘은 하나도 들이지 않았군. 아마 당신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나 역시 상당한 피해를 봤을 것이다. 당신은 죽지 않을 수도 있어. 누군가에게 발견된다면 말이지."
"으으......."
환우대사는 너무도 극심한 충격에 말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마적은 그의 전신 사혈들을 탄주해 풀어놓았다.
"그리고 살아남는다고 해도 아마 남태천의 손에 죽지 않는다면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물론 먼저 누군가의 구원을 받아야 겠지만."
사마적은 그에게 싸늘한 미소를 흘려 보내고는 북녘 하늘을 바라보고는 충룡신수(沖龍身輸)의 신법으로 지면을 박차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환우대사는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이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바람에 동전 일 문과 장미가 선명하게 그려진 손수건이 나부끼고 있었고, 환우대사의 시신은 짐승의 먹이가 된 채로 십일 후에 발견되었다.
소림의 제일중지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 더욱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홍화객이 다시 나타났다. 남태천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홍화객이 다시 복수하러 지옥에서 돌아왔다.>
이런 소문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중원은 크게 혼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은 목소리 높여 소리쳤다. 중원에 혈풍이 불어올 것이라고.......
<무기를 가진 자여 무기를 버려라.
무공을 익힌 자여 무공을 버려라.
사신(死神)이 그대들의 목을 노리고 있으니.>
그후 중원에는 정말로 혈풍이 불어닥쳤다.
종남파의 일대제자인 청풍이 단검에 두 토막이 되어 발견되었고, 하남성(河南城) 보옥장(寶玉帳) 장주의 둘째가 사지가 잘려 발견되었다.
개방의 이결제자 열다섯 명이 관제묘에서 빌어온 밥을 먹다 중독되어 피를 뿌리며 쓰러졌으며 무당, 첨성, 화산, 아미, 장강십팔채, 녹림도 등 많은 인물들이 홍화객의 표식 아래 죽어갔다.
정사(正邪)를 통털어 살해된 자는 삼백에 이르렀다.
당연히 홍화객은 무림의 공적이 되었다. 모든 중원의 무사들은 홍화객의 흔적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바다에 빠진 돌을 찾는 것과 같다고 할까?
어느 누구도 그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유일하게 홍화객과 연관성이 있는 만한루의 장소에 세워진 천루에 세인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 * *
"홍화객?"
"그렇습니다."
"그자가 살아 돌아왔다고?"
남태천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항간에는 그렇게 소문나 있습니다."
"후후후....... 그러나 그자가 아닐 것이다. 인간의 육신으로 그 벼랑 아래서 살아 돌아올 수가 없다. 아마도 누군가가 그의 이름으로 우리를 우롱하는 것이리라."
"하오나 그자가 우리의 일을 방해하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사옵니다."
"잠시만 기다리면 된다. 어차피 죽을 자이니까. 내게 금방 아주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주 재미있는....... 천령. 총령에게 전하라. 나는 빙궁(氷宮)의 일로 바빠 손을 쓸 수 없다고 말이야. 홍화객의 일은 그에게 맡긴다고 말야."
"예, 알겠습니다."
남태천의 앞에 부복해 있던 사내는 열린 창을 뛰어 넘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방안은 어둡기 짝이 없었다.
"홍화객. 하하하! 그가 살아 돌아왔단 말이지. 아주 재미있어졌어. 조금 더 빨라지겠군, 나의 계획이 말야. 하하하하!"
불빛 한 점 없는 어두운 방 안은 남태천의 대소(大笑)와 싸늘한 눈빛으로 가득찼다.
* * *
암천에 갈라진 틈으로 달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비단을 늘어뜨린 듯 달빛은 구름들 사이로 빛을 발했다. 상아빛 비단을 몇 겹이나 드리운 듯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천루의 밤은 여전히 악공들의 음악소리와 무희들의 춤이 어우러진 환락경이었다. 기녀들의 웃음소리와 술 취한 주객들의 호기로운 외침으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이때, 어두운 하늘 틈으로 거대한 야조들이 날개를 펴고 날아내렸다. 그들이 내려앉은 곳은 바로 천루의 지붕 위였다.
"크흐흐. 늙은이 하나를 죽이기 위해 우리 천랑단(天浪團) 십이검사(十二劍士)가 파견되다니 조금 한심하군. 여하튼 이 안에 있는 것들은 모두 죽여라. 우리 마교의 진정한 힘을 천하에 알릴 때다."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처럼 가볍게 그들은 건물 안으로 스며들었다. 십일 인은 발 구르는 소리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절정의 신법을 지니고 있었고 신비스럽게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천랑단의 십이 인이 서 있던 자리에 거인이 하나 나타나 투박한 웃음을 흘리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크흐흐흐흐, 불나방들!"
사내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크악! 함정이었다. 후퇴하라!"
"우리가 나타날 줄 알고 기다리다니!"
열두 개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악공들의 음악소리와 여인들의 웃음소리는 그치지 않았고 점점 커져 비명소리는 거기에 묻혀버렸다.
그리고 나서 잠시 후, 구름 속에 가려졌던 달이 얼굴을 드러내자 몇 개의 그림자가 처마 끝에서 튀어나왔다.
그들은 등에 커다란 봇짐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그들은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장검을 뽑아들며 천루로 스며들었던 열두 개의 그림자는 그렇게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 * *
"천루?"
"그렇습니다. 황상."
"흠! 그곳에 잠입한 자의 수는 모두 몇 명인가?"
"예, 약 백이십여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백이십여 명? 그럼 홍화객에게 암습당해 죽은 자는?"
"모두 삼백여 명입니다. 그중 마교 인물이 대부분에 이르고 백도의 인물도 서너 명은 끼어 있었습니다만 그들은 마교의 첩자로 의심되는 자들이었습니다."
"흠! 그럼 홍화객이란자가 마교와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가?"
천위는 더욱 바짝 읍을 하며 말했다.
"그것은 확실치 않으나 홍화객은 수 년 전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입니다. 저희로써는 그가 진짜 홍화객이 아닌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홍화객의 이름을 도용해 자신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 무언가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흠, 그래! 어쨌든 그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감시하도록 해라. 그자가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인지 철저히 파악하도록! 어차피 그자도 죽어야 할 것이니까."
"예. 알겠습니다."
천위는 무형신위(無形身位)의 수법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방안에 홀로 남아 있는 주익균은 중얼거렸다.
"홍화객이란 말이지. 후후....... 아주 좋은 징조야!"
* * *
"크아악―!
한 사내가 피떡이 되어 날아가 벽에 부딪쳤다.
상좌에는 총령이 벌겋게 달궈진 얼굴로 단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번이나 실수를 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총령이 손을 움켜쥐자 우두둑 소리가 들렸다.
그의 눈에서는 한망(寒網)이 쏟아져 나왔다. 그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았다.
총령의 옆에는 환인이 그림자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방금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어쩌면 그 사내가 피떡이 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환인."
약간은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홍화객이란 자의 종적은?"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던 환인은, 총령의 앞에 부복하며 말했다.
"그는 천루와 연관되어져 있었습니다. 지부의 단주들이 살해된 직후 삼천오백의 무사들을 풀어 그의 뒤를 쫓은바, 그의 종적은 천루 부근에 이르러서 사라졌습니다."
"그럼 그곳이 그들의 본거지란 말이냐?"
"그런 것으로 사료됩니다."
"사료?"
"예."
퍼억―!
총령의 주먹이 이번엔 환인의 복부를 강타했다.
"크윽."
환인의 입에서 짧은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확한 것이 아니면 듣지 않겠다고 말했지 않느냐?"
"예. 시정하겠습니다."
"천루, 천루란 말이지?"
총령은 눈을 감으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너에게 비밀단(秘密團)의 삼백을 주겠다. 삼일 안에 천루를 지상에서 제거해 버려라. 풀 한 포기 남기지 말고!"
"옛!"
"흥! 삭근제초(削根除草)라 했다. 흠, 자객 하나에게 너무도 많은 시간을 소비했어."
그리고 나서 곧 환인은 사라졌고 그는 눈을 감았다. 방금 전까지 보였던 성나고 화난 표정이 아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 * *
"광노. 준비는 다 되었는가?"
"예."
"수하들은?"
"모두 피신시켰습니다."
"오늘 이곳에는 거대한 불꽃놀이가 벌어질 것이다. 이들은 오늘 일로 이성을 잃고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광노!"
"예."
"신호 즉시 다음 계획을 시작하도록. 이젠 그들에게 복수의 첫발을 내딛을 때가 되었다."
"예."
하지만 대답하는 광노의 눈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신의 그림자가 어렸다.
'이번 계획은 너무도 무모한 것이다. 자칫하면 타초경사의 우를 범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을 이토록 신중치 못하게 결정하다니.
게다가 무의미한 죽음이 몇으로 늘어날지 모른다. 이곳은 시내의 중심가가 아닌가?'
그러나 그는 거역할 어떠한 이유나 명분이 없었다.
광노는 이미 자신의 주인에게 의문이 일기 시작했다.
복수를 위한 것인지 단순히 파괴만을 위해 행동하는 것인지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그의 행동에 불만이 생긴 것이다. 이것은 그의 마음이 서서히 돌아서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도대체 이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광노는 천천히 읍을 하고는 돌아서 나갔다.
그런 광노의 변화를 알고 있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사마적은 득의에 찬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대혈란(大血亂)의 밤은 서서히 시작되었다.
한 무리의 그림자들이 천루의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달빛 한점 보이지 않는 하늘 아래 그들은 신묘한 고양이의 발걸음으로 날렵하게 움직이며 천루를 빈틈없이 포위해 갔다.
그 수는 무려 삼천에 육박하고 있었다.
환인은 선두에 서 있었다.
'아무런 기세가 없다. 우리가 온 것을 모르는 것인가?'
평소와 아무것도 다를 것 없는 밤이었다. 담장 너머로 악공들의 음악과 색녀들의 교소가 흘러나와 시끄럽고 복작거렸다.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 환인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 나왔다.
"쳐라. 개미새끼 한 마리 남기지 마라."
와아―!
일 순간이었다. 삼천여 명의 흑의인들이 천루의 담을 타넘고 기방을 향해 달려들어갔다. 삼천의 무사들이 움직였으나 부스럭 소리하나 들리지 않았다.
일사불란(一絲不亂). 정말로 하나가 된 듯 달려든 사내들은 루의 곳곳에 포진해 섰다.
그러나 반항은커녕 루(累) 안에는 개미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호위무사나 자객은커녕 기녀도 악공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고 바로 담 밖에서조차 기녀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담을 넘어서는 순간 이곳은 정적에 잠겨버린 것이다.
환인은 엄습하는 이 불쾌한 느낌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소리쳤다.
"함정, 함정이다."
무사들과 거의 동시에 담을 뛰어 넘어 들어온 환인은 기이한 위기감에 경악에 찬 일갈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의 말은 거대한 폭발음 속으로 묻혀버려야 했다.
콰광―! 콰르릉― ! 우릉―!
천지가 뒤집히는 듯한 거대한 소리가 들리더니 천루를 중심으로 반경 삼백 장 안의 모든 것이 날아가버렸다. 거대한 누각과 건물들이 풀썩하는 음향과 함께 먼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너무도 거대한 폭발로 천루를 향해 달려들었던 흑의인들만이 아니라 천루 주변의 수백에 달하는 일반 백성들 마저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
그리고도 모자라 화마(火魔)는 쉽사리 꺼지지 않고 백제성을 휩쓸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 불길에 휩싸여 타죽어 버렸고, 수십 채의 가옥이 전소되어 버렸다.
그리고 천루가 있던 자리에는 몇 덩어리의 흙덩이와 방원 오십 장 정도의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이는 실로 대단한 것으로 백제성의 십분지 일이 지상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니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수많은 억측과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그 진실한 내용을 아는 자는 불과 몇 명이 되지 않았다. 왜 천루가 거대한 폭발로 사라져 버렸는지에 대해서.......
이 사건으로 인해 중원에서 가장 큰 단체 두 곳과 이 중원의 거룡(巨龍)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털썩.
쓰러진 자는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 아니 아예 숯 덩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환인?"
들것에 들려온 자는 온 몸이 불에 타 숯덩이가 되어 있었다. 다리 중 하나는 떨어져 나가고 없었고,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뼈가 훤히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그의 귀와 코는 그 흔적만 있다 뿐이지 그 형체마저 찾아 볼 수도 없었다. 일그러진 입술과 불에 타 사라져버린 눈꺼풀은 반쯤 벌어져 이와 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아마 사람을 억지로 이렇게 만들려 해도 불가능 할 것이었다.
"으으으, 예."
일그러진 입술에서 사람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 어찌된 일이냐?"
놀랍도록 침착한 총령이었다.
"함정이었습니다."
"함정?"
"콜록콜록...... 욱!"
환인은 전신이 울릴 정도로 기침을 해대고는 토혈을 했다. 정신마저 혼미한 상태인 듯 보였다. 환인은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무너지듯 눈을 감아버리더니 차갑게 식어 가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총령은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함정이란 말이지."
총령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뒤로 몸을 기댔다. 그는 위기가 다가올수록 느긋해질 줄 아는 자였다.
"훗! 함정이라......."
그러나 그의 눈빛은 그렇게 느긋하지 않았다.
* * *
남태천 앞에는 한 사내가 다소곳이 서 있었다.
"소하는 찾았느냐?"
"그럴 수 없었습니다. 워낙 경계도 심한지라. 게다가 어느 곳에 숨겼는지 찾아 볼만한 곳을 모두 찾아 봤지만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탕―!
남태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 그년을 친히 죽일 것이다. 소하, 소하를 찾는 바로 그 즉시!"
남태천은 노화가 일어난 듯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아마 그를 알고 지낸 사람이 지금 그의 모습을 본다면 의아함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항시 느긋하고 수십 번을 생각한 후 행동하던 남태천이었다.
그런데 이 조급함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곧 냉정을 되찾았다.
"그럼 홍화객에 관한 소식은?"
"삼백여 명의 비밀단이 쳐들어간 직후 엄청난 폭발로 모든 것이 날아가버려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적의 함정에 죽은 자는 우리쪽 수하들뿐이었다고 합니다."
"그 사실은 어떻게 알았는가?"
"그곳에 침투했던 자들 중 하나가 살아 돌아와 보고한 바에 의하면 그들이 침투했을 때는 천루 안에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남태천은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살아 온 자는 누구인가?"
"바로, 환인입니다."
"그래, 흠! 생각보다는 피해가 작았군."
"예?"
"아니다. 상당히 대단한 자군. 잔인하고 말야."
남태천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너무도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는 듯 촛점마저도 없었다.
이제야 겨우 그의 본래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었다.
* * *
"손자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불퇴(百戰不退)라 했다. 나는 적을 조금 알았을 뿐이지."
"하오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지 않았습니까?"
사마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얼마간의 희생은 각오해야 하는 것이지. 그런 작은 것에 연연하다 보면 큰 일은 성공하기 어렵지."
광노는 그의 말에 수긍할 수 없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아니, 그럼 폭약을 조금 적게 사용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럼 주변 가옥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텐데요."
"이번으로 인해 그들은 중원세력에 큰 타격을 입었지. 이번 일은 두 가지 장점이 있어! 바로, 중원맹에 경각심을 주자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들에게 타격을 줘서 우리에게 적들의 모습을 드러내게 하자는 것이지. 그들은 분명 우리를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을걸? 아마도 말이야."
"그렇다면?"
"양민이 죽은 것을 너무했다고 생각하지는 마시게. 누가 후세에 나에게 잘못했다고 손가락질하거나 욕을 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괜찮아. 나의 양부를 죽인 자들을 죽일 수만 있다면!"
사마적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고 있었다.
그 둘 사이에는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많은 음식과 술이 놓여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은 듯해 보였지만, 술은 사마적 홀로 취해 있을 뿐이었다.
그 앞에 앉아 있는 광노의 눈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음침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천루의 사건이 일어나자 동면에 빠져있듯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던 남태천은 선포를 했다.
"천루는 마교의 손에 의해 멸문되었다. 마교가 다시 일어서고 있다. 무혼(武魂)을 가진 자들이여 마도 무리인 홍화객을 척살하라. 나 남태천은 다시 한 번 그자를 베어버릴 것이다."
사람들은 남태천이 동면을 깨고 드디어 용트림을 시작했다고 말했고, 젊은 무인들은 그를 경배하고 선망하며 검을 높이 들었다.
그로 인해 중원은 다시 풍운이 일었다
"와아...... 와아아! 마교도들을 척살하라!"
"홍화객을 베어버리자."
"중원의 정의는 우리가 지킨다."
그동안 무예를 익히던 젊은 무사들과 기인이사들, 그리고 각파의 후기지수들은 남태천이 있는 남궁세가로 몰려들었다.
중원을 지키려는 무인들의 의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모든 것이 남태천으로 인한 것이었다.
남궁세가에는 오늘따라 유난히 많은 무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은빛 도검을 든 무사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남궁세가를 중심으로 둘러서 있었다.
그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눈앞에 드러난 극히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안력(眼力)이 뛰어난 자나 감각이 예민한 자라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처마 끝에 보이는 그림자나, 수풀 하나에서까지 살기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왜 이토록 철저히 남궁세가를 보호하는 것인가?
그 이유는 남궁세가 안에서 척마대회(斥魔大會)를 개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대전 안이었다.
문은 삼중으로 되어 있었고, 벽은 석 자가 넘었다. 또한 지붕과 바닥에는 철판을 대어 뚫을 수가 없게 만들어져 있었다.
가히 철옹성이라 할만 하였다.
그리고 대전의 중앙에는 삼십여 인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는데, 중년인에서부터 노인, 여인, 소년, 거지 등 갖가지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진실한 내력을 안다면 감히 이곳에서 오금을 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문파를 대표해 앉아 있는 것이었다.
소림을 위시해, 아미파(峨嵋派), 청성(淸城)의 장문인, 오대(五大)의 수장, 곤륜(崑崙), 개방( 幇) 등 너무도 쟁쟁한 현 무림의 기둥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의 한 마디에 중원이 흔들리기도, 바로 서기도 했다.
그 중 현 무림에서 가장 배분이 높다고 알려진 아미의 현율사태가 제일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의 신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 외에도 소림의 현 장문인인 천위성진 무진(無盡), 무진보다도 더욱 반질거리는 대머리인 오대의 무적행자 조춘, 문사 차림으로 철선을 부치고 있는 곤륜의 무적철선 우위진, 공동문주 서천귀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오늘 이 자리는 이 남궁세가의 위세를 증명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수많은 쟁쟁한 사람들이 모여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기에 내실은 적막강산(寂寞江山)을 이루고 있었다.
이때, 콰앙! 하는 울림소리와 함께 남태천이 들어섰다. 남태천이 들어서자 쪽문은 밀폐되어 버렸다.
그는 서슴없이 걸어나와 제일 상석에 앉았다. 그리고는 앞에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불초소생, 워낙 시급한 일이라 거추장스러운 격식은 차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렇게 자리해주신 노선배님들께 감읍드릴 뿐입니다."
그는 다급히 말하면서도 경박하지 않고 품위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자 제일 상석에 앉아 있던 허연 수염이 발치까지 이른 노인이 말했다.
"아니네. 자네가 이처럼 중원을 위해 불철주야(不撤晝夜) 노력하는데, 우리 늙은이들이 걸음 한 것이 그리 중한 일이겠는가? 단지, 자네의 서찰을 받고 놀람과 의혹을 금치 못해 이곳으로 달려왔네."
"그렇게 불초를 이해해 주시는 천의선자님께 먼저 감사드리겠습니다."
천의선자(天意仙者).
이 사람을 아는 사람들은 과히 많지 않다. 그것은 그를 안다는 것이 곧 중원에서 초절한 지위를 지녔거나 아니면 최소 백 년을 살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는 백 년 전에 중원을 질타하던 사람으로 백호선풍권(白虎仙風拳)의 창시자였다.
그는 도인과 같은 풍모와 신선조차도 따르지 못할 것 같은 인품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벌인 협행은 그 수를 세지 못할 정도였다.
특히 그가 황호적(黃岵賊)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양민의 피를 빨아먹던 남강의 산적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는 것은 유명한 사건이었다.
그때 그들의 시신이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것이 천의선자의 첫 협행이었으며 그의 나이 삼십칠 세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그후 그는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협행을 해왔고, 그로 인해 그의 이름은 사해를 진동시킬 정도였다.
그런 그가 그의 나이 마흔이 되던 해 갑작스럽게 종적을 감췄으니, 그것이 백 년 전의 일이었다.
그후로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자는 흔치 않았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그의 명성을 알고있는 몇몇 사람들이 그의 이름이 거론되자 존모(尊貌)의 눈빛을 띄고 있었다.
이때 공동의 문주로 있는 서천귀(抒千鬼)가 그 거대한 몸집을 일으켰다.
그의 등에는 두 개의 거대한 도끼가 꽂혀 있었는데, 천적(天賊)이란 이름으로 서천귀의 애병이었다.
그 크기가 어른의 손바닥 서너 개를 펼쳐놓아도 다 채우지 못할 정도로 컸다.
서천귀는 그 도끼를 이용해 수십 명의 마적들을 쓰러뜨렸다. 그 천적에 의해 죽은 자들 역시 천의선자에 의해 죽은 악인들에 비해 적지 않았다.
그 위명과 더불어 퍼런 빛을 띄우며 반짝이고 있는 날이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는 천의선자에게 읍을 하고는 투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천의 노선배의 말씀이 백 번 지당하십니다. 남맹주의 서신은 너무도 믿을 수가 없는 엄청난 일이기에 소인도 이렇게 두 말 않고 달려나온 것입니다. 우선 남맹주의 서신 내용이 진실인지에 대해 의구심이 듭니다. 마교는 전멸한 것으로 되어져 있었습니다. 바로 삼백 년 전에 말입니다. 십이만의 군과 우리 삼만여의 무림 선배들에 의해 마교의 교주는 효시당하고 그 잔당들의 목은 황성의 사대문 앞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그 누가 다시 마교를 일으킬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를 불렀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있다는 것이 되겠지요. 아마도 말입니다."
그는 남태천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이 점을 확실히 설명해야 할 것이네. 자네가 무엇 때문에 마교가 다시 창궐한 것이라고 말했는지 말야. 그리고 우리들까지 불러내야 했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네."
서천귀의 말투는 아무리 시급한 일이라 하더라도 어찌 우리를 함부로 불러낼 수 있느냐는 질책이 섞여있었다.
그러자 서천귀의 앞에 앉아 있던, 개방의 노화자가 술에 잔뜩 취한 듯 붉게 물든 얼굴로 꾸벅거리며 졸다가 일어서며 말했다.
"켈켈켈....... 글쎄, 서형제. 그런 것은 따져 무엇하는가? 이 사람은 현 무림맹주지 않나. 비록 그런 사정이 아니더라도 우릴 부를만한 자격은 있다고 보는데? 게다가 자네는 아직 배분을 논할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되는구만."
"뭣이?"
서천귀는 금방이라도 천적을 뽑아 노화자를 쪼개버릴 기세였다.
그러자 노화자의 옆에 앉아 장난감 팽이를 돌리던 어린아이가 그런 노화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박귀야. 어린애 앞에서 나이 자랑을 하느냐. 체신머리 없게시리......."
"크흐흐흐. 저 녀석 노는 것이 제법 귀엽지 않느냐. 제법 성깔도 있어 보이고 하니. 안 그러냐 무채야? 하지만 어리기로 하자면 너보다 어려 보이는 사람이 여기 어디에 있느냐?"
순간, 서천귀는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박귀와 무채라면 불과 수십 년 전 중원을 질타하던 괴물들이었다. 진정 괴물들이라고 해야 옳을 사람들이었다.
박귀는 원래 개방의 출신으로 백 년 내의 절정고수로 꼽히던 사람이었다.
그는 개방 장로의 눈에 들어 개방의 방주의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여인을 괴롭히던 한 무리의 청년들을 죽이게 되고, 그들이 당시 승상의 자제였다는 사실을 알고는 관부에게 쫓김을 받으며 세상을 주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천적으로 불의를 참지 못하는 그의 성격 때문에 무수히 많은 악인들이 그의 타구봉에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그의 타구봉에 맞아 죽은 악인들의 대부분이 관부의 인물이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자제나 그 주변인물들이었고, 혹은 무공을 알고 있거나 명문대파라고 거들먹거리는 자들이었다.
그랬기에 그가 자취를 감추고 이십 년이 흐른 지금에도 그의 목에 걸린 현상금은 줄어들 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소년이 무채라면 엄청난 괴물임에 틀림없었다.
잘 해봐야 열서넛 정도의 소년이었다. 그런데 그가 나이 아흔을 넘긴 박귀에게 반말을 해대는 것이 아닌가.
무채(無債). 그의 이름이었다. 그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앞에서 오금도 제대로 못 펼 것이리라.
이유인즉, 그는 이 중에서 가장 괴팍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년처럼 귀엽고 앙증맞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팽이로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것이다.
그의 손에 걸린 자치고 병신이 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예 살아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박귀와 거의 같은 연배이나, 그의 무공이 워낙 특이해 나이가 먹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어린 시절 우연히 한 고동에서 무서 한 권을 발견하고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후로 그의 몸은 전혀 자라지 않았다.
이유는 그의 무공이 사공인 이유였다.
역천대람공(逆天大嵐功).
순양지체의 소년만이 익힐 수 있는 마공이었지만 그 대단한 위력으로 인해 그 이름을 아는 자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정도였다.
이 사나이가 일지로 황소를 물주머니 터뜨리듯이 터뜨렸다는 것은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그의 성격 역시 무공과 걸맞게 광폭하여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은 가차없는 죽음을 선사했다.
그런 그가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죽인 자들은 모두 악행을 저질렀던 거두들인 이유였다.
그로 인해 서천귀는 자신의 자리에 조용히 앉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누구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우를 범하고 싶어하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때 천의선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선 맹주의 말부터 듣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외다."
그러자 남태천이 일어섰다.
"우선 노선배님께 감사드립니다."
남태천은 공손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천의선자에게 포권을 해 보였다.
"우선 제가 여러 선배님들을 모신 이유에는 중원에 여러 가지 변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변동이란 무언가?"
"우선, 홍화객이란 자입니다."
"홍화객이라?"
"예."
남태천은 나직한 목소리로 조용히 설명해가기 시작했다.
"그자는 팔 년 전 제 손에 제거된 것으로 알려진 자였습니다. 물론 제 스스로가 그자가 확실히 죽었다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만 분명 그자는 다시 회생불능인 상태로 그 깊이를 잴 수 없는 벼랑 아래로 떨어졌었습니다. 아마도 그때 살아났다고 하더라도 이토록 오래 살아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이 자를 홍화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가장을 한 것이죠."
박귀는 술을 들이키며 물었다. 이미 그의 눈은 맛이 간 듯 게슴츠레해져 있었으며,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게 그의 평상시 모습이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무엇인가?"
"우선 이자는 무언가 목적을 위해 홍화객으로 가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교와 싸움을 시작한 것이죠."
"흐음."
"제 생각으로는 무림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음모인 것 같습니다. 그 예로 홍화객의 옛 거점에 천루라는 술집을 열어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마도는 물론 정파의 제자들까지 죽임으로써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기다렸습니다. 자신이 세워놓은 거미줄에 벌레가 꼬여들기 말입니다. 그의 계략은 성공했고 마교는 그의 계략에 말려들어 삼천의 정예를 잃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한다는 말인가?"
"마교가 자신을 잡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기를 유도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자는 홍화객은 아니지만 어떤 형식으로든 홍화객과 연관이 있는 자일 것입니다. 그는 다음 목표로 나를 지목할 것입니다. 물론 마교를 더욱 혼란시킨 다음에 말입니다."
그러자 천의선자가 입을 열었다.
"그건 왜지?"
"우선 그의 목적은 사사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사로운 것이라면 마교와 명문대파들을 동시에 건들이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는 필시 사사로운 이익이나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일 것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흠, 그럼 그자가 홍화객의 복수를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가?"
남태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그자는 무림의 공멸(共滅)을 꿈꾸고 있는 듯 보입니다."
"무엇이?"
일순 낮은 탄성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모두 수양이 깊은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남태천의 말에 안색이 크게 달라졌다.
"그게 사실인가?"
천의선사조차도 떨리는 음성이었다.
남태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는 증거는 있는냐?"
무채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예. 우선 그자는 이전 홍화객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습니다. 그 예로, 예전 홍화객은 홀로 적의 우두머리만을 꺾어 비교적 담대히 나가는 반면, 지금의 홍화객은 치밀한 계획 하에 상대의 주구라 생각되는 자들까지 가차없이 베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보십시오."
딱!
남태천이 지공으로 벽면의 한구석을 쳤다. 그러자 벽이 위로 올라가며 거대한 전도 하나가 나타났다.
"이곳들을 보십시오."
전도에는 붉은 글씨로 날짜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 글씨들은 근 이백여 개가 넘었다.
"이것들은 홍화객이 죽인 자들의 날짜와 시각을 기록한 것입니다. 거의 이삼 일을 주기로 사건이 이어졌습니다만 하루만에 일어난 것도 있습니다. 한 예로 회양에서 문주까지는 말을 이용해 삼 일이 걸립니다. 그런데 살인이 일어난 날짜를 보십시오."
"아니, 불과 하루 사이에?"
"그렇습니다. 이 거리는 아무리 경공이 빠르고 말이 빠르다 해도 이틀 안에는 당도할 수 없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살인사건은 불과 하루를 사이 두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이자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암살집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그들의 무공은 이미 범인의 수준을 넘어선 상태라는 것이 또 중요합니다. 그는 이렇게 해서 자신의 실력을 상대에게 은연중 드러냈고, 이 때문에 상대는 홍화객의 도전적인 태도에 말려들어 이번의 참패를 이룬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제야 수긍이 간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렇다면 그자가 다음에 노리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자는 마교의 노골적인 추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로써 마교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겠지요. 아마도 그때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하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자와 마교를 동시에 상대해 모두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불초소생이 여러 선배님들을 모신 것입니다."
삼십여 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제일 말석에 앉아 있던 아미의 현율사태가 입을 열었다.
"그럼 맹주는 어찌할 생각이신가?"
"물론, 우리는 이 호기를 이용해 마교를 치고, 홍화객의 잔당을 모두 물리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저들보다 더욱 많은 피를 흘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싸우다 지쳐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러서 상대를 모두 처치하면 되는 것입니다."
현율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렇게 말처럼 쉽게 될까?"
"그래서 선배님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들이 마음놓을 만한 계략을 꾸미기 위해서 말입니다."
"호! 말씀해 보시게."
"전 천하영웅대회를 개최할 것입니다."
"천하영웅대회?"
몇몇 사람들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뭔가?"
현율이 물었다.
"그것에는 모두 세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중원의 각처에 머물고 있는 무사들을 불러들여 우리의 세를 넓히자는 것이고, 두번째는 우리의 단결력을 과시하자는 의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정도에 숨어 있는 파리들을 쫓아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노선배님들이 해주실 일들입니다."
"아니? 정도에 마도의 무리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말인가?"
천의선자가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자들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역력했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암암리에 조사를 계속했고 그들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음!"
사람들은 쓴 한숨을 뱉았다.
"그리고 이 대회의 가장 큰 이유는 잠시지만 중원을 적들에게 빌려주자는 것입니다. 홍화객과 마교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 언제가 좋겠는가?"
"전, 이달 십오 일에 개최할 작정입니다. 장소는 소림의 앞마당인 섭요평(涉樂平)에서 개최할 생각입니다."
그들 사이에서는 침묵이 흘렀다.
남태천은 굳은 결의와 신념으로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앞에 선 전대기인들은 모두 동의의 뜻을 비쳤다.
그러나 그의 진실된 마음을 아는 자는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중원을 위하는 영웅은 없고, 한 사람의 위선자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어느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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