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6일 화요일

내가위 - 무림실록(武林實錄) 전신전설(戰神傳說) (제4장~제6장)





제5장  추월(秋月)



덜그럭―!

탁자 위에 놓인 술단지가 바꿔졌다.

쪼르르르......!

노화자는 절정의 솜씨로 술잔에 술을 채우고는 청년에게는 먹어보란 말 한마디 않은 채 훌쩍 마셔버렸다.

얘기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목이 탄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그런데 이해 할 수가 없구만. 왜 남태천은 정도의 인사들을 죽이고 마교에 들어가게 되었지? 그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중원을 좌지우지 할 수 있을 텐데. 게다가 원수라 생각되는 인물이라면 그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죽일 수 있고, 어쨌건 그는 중원의 절대강자가 아닌가?"

청년은 빙그레 웃었다.

"그의 목적은 그런 데에 있지 않았거든요. 그의 목적은 그런 작은 것이 아닌 중원무림의 말살에 있었습니다."

아! 일순간 주점 안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청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경악에 찬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게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콰앙―! 쏴아아아―!

이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흑의의 사내가 문을 밀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의 이목은 당연히 그 사나이에게 집중되었다.

사내에게서는 음산한 분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말로 저승사자가 나타난다면 그런 모습이 아닐까?

그는 검은 옷에 검은 가죽신발을 신고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다. 얼굴마저 검은 두건으로 가린 데다가 검은빛의 죽립을 쓰고 있었고, 의도적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의 평소 버릇인지 죽립으로 얼굴 전체를 가려 눈빛마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사내의 등에는 검은 천으로 둘러싼 길쭉하면서도 뭉툭한 막대가 걸려있었다.

아마도 창이나 도(刀) 같았다.

"어서 오십쇼."

의자에 기대어 연신 꾸벅거리던 주인은 구르듯 달려가 그 사내에게 굽신거렸다. 그렇게 졸라대면서도 손님이 오는 건 어찌 그리 귀신처럼 아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흑의사내는 그런 주인은 안중에도 없는지 술잔을 기울이는 노화자와 청년에게로 다가갔다.

뚜벅 뚜벅―!

순식간에 주루 안은 긴장감으로 조용해져서 오직 흑의 사내의 발걸음 소리만이 크게 울리고 있었다.

철컥―!

그는 등에 지고있던 길쭉한 물건을 탁자에 기대어 놓았다.

"앉겠소."

그러고는 의자에 앉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더욱 이상한 것은 노화자와 청년이었다.

흑의인이 두 사람의 동의 없이 자리에 앉았는데도 둘의 반응은 잠시 자리 비운 일행이 돌아온 것처럼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자연스럽기만 했다.

"켈켈켈켈....... 어디서 피냄새가 물씬 나는구만."

그 말에 문가에 앉은 우락부락하게 생긴 세 사나이는 움찔거리더니 음산한 눈길을 노화자를 향해 보내왔다.

노화자는 아는지 모르는지 더욱 호탕하게 웃으며 마치 제 술인 냥 주인장이 잽싸게 가져다 놓은 술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켈켈켈. 소형제도 술 한 잔 드시게."

흑의인은 아무 말 없이 술잔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니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조차도 보이지 않으니 그러리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청년은 흑의인으로 인해 끊긴 자기의 얘기를 계속하기 시작했다.

"그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문제는 황궁에서도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 말입니다."

*               *               *

자금성의 거대한 전각들이 달빛에 바다 가운데 솟아난 암초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을밤 그대를 그려보다가

서늘한 하늘

노래하며 거닐자니.

빈 산에 솔방울 떨어지고

그대도 잠 못 이루고 계시리.>

위응물의 시로 '가을밤'이란 제목을 지닌 시 자락이 태자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가끔가다 가을을 알리는 낙엽의 사각거리는 소리가 바람에 묻혀 들려오고 있었다.

한 사나이가 창을 등지고 서 있었다.

당금의 황제인 주익균이었다.

지금 그의 모습에서는 황제로서의 위엄은 드러나지 않았다. 단지, 패도적인 기세뿐이었다.

"후우―!"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 있어 당금의 절대자인 황제를 잠 못 이루게 하는 것일까?

"아버님은 전경황후의 치맛자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신들은 서로의 이권에 혈안이 되어 백성들의 안위나 평안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때에 무림에서조차 무언가 음모가 진행되고 있으니......."

달빛에 물들은 주익균의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아주 단호한! 종사를 위해....... 사악한 황제로 역사에 남는다 하더라도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그가 지그시 눈을 감고 상념에 젖어있을 때였다. 그의 그림자 뒤로 한 사나이가 나타나 부복을 했다.

"황상."

"그래, 중원의 일은?"

"천명단이 조사해 보고한 바에 의하면 현 중원에 암중의 세력이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음, 암중세력이라 하면?"

"마교로 추정되고 있으나 아직 확실한 실체를 파악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중원 무림맹만으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정도의 세력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헌데......."

"헌데?"

천위는 바짝 부복하며 말을 이었다.

"중원에서 활동 중이던 전대거마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시에 모습을 감추고 모두 은거해 버렸습니다. 그것이 마교의 소행이 아닌가 염려스럽습니다."

"그렇다면 무림맹에서는 그 일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 나가고 있는가?"

"전혀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그저 수수방관하는 듯 보였습니다."

"중원 무림맹이라......."

주위현은 지그시 감았던 눈을 떴다.

"천위."

"옛!"

"중원무림맹에 대해서 조사해 보도록 하라."

"옛!"

"그리고 마교에 대해서도 좀더 조사해보도록 하게. 분명 뭔가가 있을 테니."

"옛."

천위의 그림자는 스르르 사라져버렸다.

"건주(建州)의 누루하치는 야심에 찬 인물. 중원을 넘보고 있다. 그러나 나 주익균은 그것을 용납치 않겠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 사분오열되어 있는 중원이 하나가 되는 것! 그것뿐이다."

주익균의 눈에서는 굳은 결의의 빛이 반짝였다.

*               *               *

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외숙이나 그 밖의 모든 어른들을 두려워하는 심약한 소년이었다.

그리고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너무나도 맑은 영혼의 소유자였다. 비록 천하고 하잘것없는 신분의 소녀였지만 소년은 그 소녀가 하염없이 좋을 뿐이었다.

그것이 사랑인지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소년은 자신의 어머니 다음으로 그 소녀를 좋아했다.

하지만 소년은 편할 날이 없었다. 소년에게는 외숙이 있었고, 외숙은 소년에게 완고하기만 하신 분이었다.

소년은 언제나 외숙에게 붙들려 무술을 익혀야만 했다.

소년은 무술이 싫었다.

그러나 외숙의 벼락 같은 호통이 무서워 소년은 불평 한 마디 못하고 무술을 익힐 수밖에 없었다.

소년이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후부터는 더욱 소녀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소년이 피곤에 지친 심신을 쉴 수 있는 때가 바로 소녀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그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열 살이 되었고, 순진하기만 했던 소년은 절망을 맛봐야 했다. 그건 죽음보다도 더 진한 절망과 분노였다.

'어머니!'

소년은 울부짖고 있었지만 그것은 소리가 되어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소년은 어떻게 해서든 누군가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입에서는 뜻 모를 기괴한 신음만이 나올 뿐이었다.

"아......아......어......으......."

그리고 소년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항상 침착함을 잃지 않던 소년이었다. 그래서 나이에 비해 조숙해 보이기까지 하던 소년이었다.

그러나 오늘 그는 정신을 잃지 않은 것이 용하다 싶을 정도로 창백한 얼굴에 후들거리는 몸짓을 보였다.

소년의 어머니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소년은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고 있는 모습을 정말 좋아했다.

약간 피곤할 때마다 살포시 짓는 인상마저도 소년의 눈에는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오늘 소년의 어머니는 아름답지 않았다.

그녀의 손에는 바느질감이 들려 있었으나 더 이상 그녀는 바느질을 할 수 없었다. 죽은 자는 바느질을 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녀는 늘 앉아있던 의자에 바느질감을 앞에 놓고 앉아 있었지만, 그녀의 손은 바닥을 향해 축 처져 있었고, 그녀의 눈은 천장을 향해 있었으며 하얗게 뒤집혀 있었다.

소년은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무서웠다.

문 앞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 서늘한 분위기는 소년에게 너무나도 낯설었다.

그래서 소년은 어머니에게 와락 달려들지도 못한 것이었다.

"어머니!"

드디어 소년은 한 마디 내지를 수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방에서 뛰쳐나와 마구 달렸다. 지금 이 상황을 그로서는 주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는 소년도 몰랐다. 그저 마구 달리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더니 소년은 바닥에서 엉엉 울었다.

지금 이 순간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우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소녀는 그렇게 밤새 엎드려 울었다.

그리고 으슬으슬 추워오자 소년은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 곳으로 향하는지 소년 자신도 몰랐다. 그저 망연히 걸음을 떼었고 한곳에 다다랐을 때 자신의 외숙이 기거하는 누각의 앞이었다.

그렇게 무섭게만 느껴지던 외숙이었지만, 지금의 소년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피붙이의 따뜻한 위로가 필요했던 것이다.

소년은 외숙의 방문 앞에 다가섰다.

"아아악...... 학...... 아아......."

방안에서는 끊어질 듯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소년은 그 소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문득 호기심이 일어 방안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곳에는 바로 그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소년보다 예닐곱 살 정도가 많았었다.

그녀는 지금 침상 위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채 누워있었다. 비명소리는 그녀의 입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 위에서는 자신의 외숙이 몸부림치고 있었다.

"아악...... 아아...... 흐흐흑......."

소녀는 몸부림치며 흐느끼고 있었다.

외숙은 우악스럽게 몸부림치고 있었고, 소년은 그런 외숙에게 분노를 느꼈다.

소녀는 힘이 없었다.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눈물을 흘리는 게 전부였다.

그 외에 어떤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노비는 반항할 힘이 있다 해도 반항할 수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된다. 주인에게 반항이란 곧 죽음과 직결한다는 것이 바로 법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그런 그녀에게도 묘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운명에게 반항조차 하지 못하는 그녀가 미웠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라고 부르짖고도 싶었다.

소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곳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달려간 곳은 자신이 자주 찾던 곳이었다.

비석조차 세워지지 않은 낡은 사당이 있는 그곳은, 거대한 단풍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소년은 밤새 그 사당에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던 소년의 눈에 사당 가운데 놓인 거대한 목판이 들어왔다. 그 목판은 거미줄과 먼지로 둘러싸여 있었다.

"허억."

남태천은 침상에서 구르듯이 일어섰다.

"허억! 헉!"

남태천은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정신이 들었는지 힘을 빼며 침상에 걸터앉았다.

"빌어먹을......."

그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쥐었다.

'벌써 열흘째다. 이런 악몽을 꿈꾸기 시작한 지가.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그녀.......'

남태천의 눈에서는 섬뜩한 마화가 피어올랐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위선자들의 종말이!"

우두둑!

남태천이 주먹을 꽉 움켜쥐자 침상의 한 구석이 부서져버렸다.

그리고 이런 남태천의 모습을 가을 하늘에 휘영청 뜬 달은 조용히 비추어주고 있었다.

남태천에게는 정말 기나긴 밤이었다.

*               *               *

가을 달빛에 물들어있는 동정호(洞庭湖)의 아름다운 모습은 바라보기만 하면 세상의 시름을 모두 잃어버릴 것처럼 맑고도 투명했다.

풍류를 아는 사람이 본다면 아마도 시 한 수를 읊지 않고서는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을만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동정호는 적막하기만 했다.

이때, 동정호의 한쪽에서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는 죽갓을 쓰고 있었다.

철저히 가리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죽갓에 가려진 사내의 턱은 웃고 있었다. 비록 달빛에 비친 모습이라 확신하긴 힘들어도 그의 입가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은 조소와도 같았다. 아니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리고는 귀신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직후, 두 사나이가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빌어먹을! 놓쳤잖아."

그 둘은 장사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리에 서 있으면 하루에도 열은 볼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봇짐장수들의 모습이었다.

"어디로 갔지?"

"분명히 이 근처 어딘가에 있다!"

둘은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그러나 주위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질 않았다.

"놓쳐버린 게 아닐까?"

"낭패다. 그분께 뭐라고 보고를 드린단 말인가?"

"이대로 돌아간다면 우리의 목숨은 없어."

그들의 신색은 초조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이때, 한 사나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낄낄낄....... 너희들이 나를 쫓아다니던 그 쥐새끼들이냐? 그런데 그분이 과연 누구일까? 응?"

"뭣이 쥐새끼?"

"이자식. 일부러 숨어 우리들의 말을 엿들었구나!"

"너희들은 마교의 떨거지냐, 아니면 황궁에서 보낸 첩자들이냐!"

"알 필요 없다! 하얏!"

두 사나이는 사나이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검을 뽑아들며 동시에 달려들었다.

둘은 마치 수백 번을 연습한 것처럼, 죽갓을 쓴 사나이의 상단과 하단을 노리며 베고 들어왔다.

한 사나이는 신룡번신(神龍 身)의 수법으로 죽갓 사나이의 목을 베어왔고, 다른 사나이는 토룡신수(土龍身受)의 수법으로 죽갓 사나이의 하단전을 노려왔다.

완벽한 합격술이었다.

죽갓 사나이는 몸을 띄워도 당하고 몸을 낮춰도 상대의 검에 당할 수밖에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사내는 몸을 틀면서 공중에서 몸을 빙글 돌리고는 손목에 감춰 감겨있던 철추를 돌려 상대방의 검을 모두 쳐내 버렸다.

두 사람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죽갓의 사내는 그 순간을 노려 죽갓을 벗어 상대를 향해 던져버렸다.

그들은 놀라서 피하려고 했지만 곧 자신의 허리가 화끈해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철추가 한 명의 몸을 헤집고 지나가 버린 것이었다.

"크윽."

죽갓의 사내는 허공에 떠있던 몸을 틀면서 도망하려고 허둥대는 다른 한 사나이를 향해 되돌아오던 철추를 던졌다. 되돌아오던 탄력을 이용한 것이었다.

철추는 도망하려고 버둥거리던 사내의 뒤통수에 정확히 적중했다.

퍼억! 와작!

사내의 뒤통수에 맞은 철추는, 대단한 위력으로 사내의 뒤통수를 뚫고 이마로 튀어나와 사내를 산적 꿰듯 꿰여 쓰러뜨려 버렸다.

죽갓의 사내는 죽갓을 들어올렸다. 그 아래로 드러난 사내의 얼굴은 삼십대의 냉막한 표정, 바로 사마적이었다.

사마적은 철추를 거두어들이며 자리에 섰다. 그리고 한곳을 응시하며 씩 웃었다.

"쥐새끼는 한 마리도 살려둘 필요가 없지. 마교든 황궁이든 나를 붙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사사삭.

밤중에 산길을 미친 듯이 헤치며 달려가고 있는 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달리는 도중에도 자신의 다리가 느리다는 사실에 대해 한탄하고 있었다.

자신이 경공술의 대가라고 자부하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빌어먹을!"

위적. 그는 이 일대에서 알아주는 도둑이었다. 또한 자부하는 경공술의 대가였다.

그는 어느 날 한가하게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한 사나이가 찾아왔다.

그는 기이하게 햇볕이 쨍쨍한 날인데도 우갓(雨 )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사내의 얼굴을 볼 수조차 없었다. 사내는 그에게 금 닷 냥을 내놓으며 말했다.

한 사나이의 동정을 자신에게 알려주면 매일 이만큼의 돈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바람난 마누라의 정부라도 잡으려고 그러나?'

그는 잠시 의문을 느꼈으나 황금 다섯 냥의 매력은 너무나도 거대했다.

그날 이후로 그는 한 사나이의 뒤를 쫓아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파악해 이곳 동정호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신출귀몰한 무위와 살인 장면이었다.

자신보다 앞서 그를 뒤쫓고 있던 두 사내가 그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불안이 엄습했다. 황금 닷 냥이 아무리 크다고 하나 목숨보다 클 리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자신도 저렇게 죽임을 당하고 말 것이 분명했다.

그후 그는 미친 듯이 밤길을 달렸다. 어떻게 해서든 의뢰를 한 자와 자신이 쫓고있던 자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위적이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이 쥐새끼 같은 놈, 감히 나 소평을 벗어나려 하다니! 가소롭구나!"

그의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육벽(肉壁)이 있었다.

퍼억, 와직!

위적은 더 이상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황금 닷 냥, 그것으로 위적은 한 많은 이 세상을 등져야만 했던 것이다.

*               *               *

"헉! 허억......."

묵천은 이미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온 몸은 상처와 선혈로 낭자했으며, 그의 옷은 자신의 피인지 누구의 피인지는 모르나 이미 혈의로 탈바꿈해 있었다.

그러나 아직 그의 눈은 상처 입은 늑대의 눈처럼 살아있었다. 마치 피에 굶주린 마인의 눈빛과도 같았다.

묵천은 검에 기대어 서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지친 몸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주위에는 이미 수십 구의 시신이 널려있었다.

싸움은 이미 끝난 것이 아닌가? 하지만 묵천은 무엇 때문인지 쉬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둘! 아니 측면에 하나 더! 셋이다!'

지금 묵천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적의 기척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섣불리 움직이면 이상태에서는 당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바싹바싹 타오는 속과는 다르게 담담하게 말했다.

"나와라!"

묵천의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그의 등뒤로 두 사나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켈켈켈. 어떤가, 오늘은 죽기 좋은 날이지 않나?"

"암암. 이렇게 날이 좋으면 유난히 피가 그리워지는 법이라구. 흘흘흘......."

촌노의 모습을 한 두 사내는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한 명은 기형적으로 길쭉했고, 또 한 명은 난쟁이처럼 작달막해서 심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주위에 널려있는 시신들을 보지 못한 것처럼 피로 질척해진 땅을 자연스럽게 걸어 묵천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묵천은 훤한 대낮이었지만 그들이 나타나자 왠지 음습함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뭐랄까? 도살자에게서나 맡을 수 있는 짙은 죽음의 향기라고나 할까?

"낄낄낄......."

두 사내들은 묵천을 보지 못한 듯 서서히 다가서고 있었고 연신 농담을 해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둘은 묵천에게 서서히 다가섰고, 또한 일정한 거리를 두고 팔을 기묘하게 흔들고 대었다.

묵천은 그들이 어느 정도까지 다가오자, 얼굴을 기묘하게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난 당신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서너 발 앞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서고 있을 때였다. 그들은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멈춰 섰다.

"우리를 안다고?"

그들 중 난쟁이 노인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호오, 어떻게 우리를 알고 있지?"

이번엔 긴 노인이었다.

"사부님께 들었습니다."

두 노인의 얼굴에는 소손을 바라보는 듯한 인자한 빛이 돌고 있었다. 다시 작달만한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래, 뭐라 그러던가?"

"저희 사부님께서는 강호에 마주치면 필히 피해야만할 사람 둘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그 둘은 늘 같이 붙어 다니며 살인을 한다고 했습니다."

"낄낄낄. 우리에 대해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구만."

방정맞은 웃음소리로 길쭉한 노인이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그들은 합격의 명수이며 무기는 천잠사와 극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 외에 알고 있는 것은?"

"예. 특히 친손이라도 바라보는 듯한 미소를 보일 때면 살인이 시작된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되자 두 노인의 얼굴에는 의문의 빛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우리를 너에게 이렇게 가까이 오게 만들었지?"

역시 난쟁이 노인이었다.

그러자 묵천은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흐흐....... 그건 제가 단 일검을 펼칠 수 있는 기력밖에는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흠칫 놀랐다.

찌리링―!

묵천은 자신이 짚고있던 검을 뽑아들었고, 상대는 방천화극을 꺼내어 방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묵천의 검이 이미 그들의 몸을 양단 해버리고 난 후였다. 알아채는 게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크윽."

"컥...... 빌어먹을!"

턱! 털썩―!

둘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묵천의 주위에는 두 구의 시신이 더 늘었다.

묵천은 거의 쓰러질 지경이 되어 있었으나 용케 버티며 쓰러지지는 않고 있었다.

"당신들은 내가 상처 입었다는 사실에 대해 너무도 과신하고 있었소이다. 무용쌍괴(武龍 怪) 나으리들."

무용쌍괴.

그들을 모르는 자는 중원인이 아니거나, 지독히도 깊은 산골에 처박혀 산 촌놈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바보일 것이다.

그들이 나타난 것은 삼십 년 전이었다.

그들은 단 오 년동안 괴이한 합격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그들은 대부분이 무림인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주로 천잠사와 방천화극을 이용해 상대를 물리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후 잠적을 해버렸고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러던 그들이 이십오 년만에 다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위명은 다시 세상에 나오자마자 꺾여버렸다. 바로 곧 쓰러질 것 같은 한 명의 청년에 의해서.

묵천은 검집을 짚고 힘겹게 서 있었다. 아직 한 명이 더 남아 있는 것이다.

'나와라.'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는 버티는 것조차 힘들었고, 그런 모습까지도 오래갈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무릎이 꺾이고야 말았다.

"허억...... 헉!"

무릎을 꿇은 묵천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에게 한 사나이가 다가섰다.

"대단하더군."

묵천은 눈을 들어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대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묵천의 눈에서는 바위라도 얼려버릴 듯한 한기와 살기가 방출되었다.

"백천우!"

"사제, 이제는 사형이라 칭하지도 않는가?"

"나는 너 같은 자를 사형으로 둔 적이 없다."

묵천은 으르렁거렸다.

"그래. 흐흘....... 호칭이야 아무래도 좋아. 나 역시 너를 사제로 보지 않으니까. 너의 무위를 보았다. 대단했어. 십오 일, 십오 일이었다! 너는 단 한 시진도 쉬지 못하고 싸워야 했지. 정말 대단해. 아마 나라면 그렇게 못했을 거야."

묵천은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개소리 하지 말고 죽이려면 죽여라!"

"흐흐흐, 아니 나는 너를 그렇게 쉽게 죽이지 않을 거야. 그건 너무 간단하잖아?"

"날 어떻게 하려고?"

그 순간에도 묵천은 기력을 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마지막 한 번의 칼질이라도 할 수 있는 힘이 생기기를 빌고 또 빌었다.

"흐흐....... 나는 너에게서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너는 천부적인 자질을 갖고 태어났지. 그래서 사부는 너만을 편애했어. 그렇지 않은가? 그것이 나의 열등감을 자극했지."

"크크크. 개소리."

"그러나 나는 너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 있지. 바로 이것 말이야. 머리!"

그는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그 순간에도 묵천은 버둥거리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단 한줌의 공력도 모을 수 없었다. 급기야는 머리가 무거워지며 자꾸만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너와 나의 차이지. 나는 완벽하게 자신이 있지 않으면 일을 시작하지 않거든? 하지만 너는 그렇지가 않아."

백천우는 묵천의 눈앞에 독주머니를 들고 흔들어댔다.

"우둔하게도 앞만 바라보거든? 그게 너와 나의 차이지."

"개자식!"

묵천은 희미해져 가는 정신을 추스르려고 버둥거렸으나 그의 고개는 점차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쳐갔다.

점차 아련해지는 묵천의 귓가로 백천우의 말이 아스라하게 들려왔다.

"너는 나의 천적이야. 그러므로 너는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해. 너를 놔두면 내가 위험하거든? 이제 너는 개가 될 거야. 목숨을 구걸하는 한 마리 개가. 아주 영원히 말이야. 영원히! 크하하하하!"

묵천의 귓가에는 백천우의 영원이라는 말이 메아리쳐왔다. 그 순간에도 그는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하지만 이미 독이 몸에 퍼져버려 더 이상 정신을 차리고 있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               *                *

정방형의 석실이었다. 바닥에는 썩은 물이 질퍽하게 출렁였다. 벽에는 독충들이 바글바글 했고, 사방에서는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이렇게 지옥 같은 곳의 한쪽 구석에 한 사나이가 족쇄와 수갑에 묶여 있었다.

사내의 손등으로 한 마리 벌레가 버둥거리며 기어가고 있었고 사내는 번개 같은 손길로 그 벌레를 주워 입으로 가져갔다.

아삭!

"쩝, 쩝."

벌레까지 잡아먹어야 할 정도의 상황이라면, 보통 인물은 단 한 시진도 견디지 못하고 자해를 하며 미쳐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나이는 이런 곳에서 무려 이십여 년의 시간을 갇혀 있었다. 이미 그 사나이의 손가락 마디마디는 시독으로 썩어 문드러져서 끊어져 나가버렸다. 이제는 그 형체조차 찾아보기가 힘든 손가락 마디였다.

그럼에도 그는 그 얼마 남지 않은 손가락 마디로 또 다른 벌레를 낚아채어 입 속에 넣고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으드득!

벌레의 겉껍질이 부서지는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사내의 목구멍 속으로 무언가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왕삼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사나이를 볼 때마다 왠지 섬뜩함을 금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왕삼이 다가설 때마다 사내는 서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곤 했다. 그러면 왕삼은 더욱 등골이 오싹해졌다.

왕삼은 녹림에서는 그래도 알아주던 고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일개 옥지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오 년 전의 일이다.

항시 죽음과 관의 쫓김 속에서 살던 그는 무림을 벗어나 어딘가에 은거하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평범한 모습으로 숨어 살 수만 있다면 천국이 따로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시도했던 암행에서 실수로 한 가족을 죽이게 됐고,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 이 단체에 가입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첫 발령지가 바로 이곳 뇌옥이었다.

제법 간담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으나, 아무리 아랫배에 힘을 넣고 가도 그의 곁에만 다가서면 왠지 힘이 쪽 빠지는 것이었다.

지난 오 년간 이 사내가 단 한마디의 말도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사람이 다가서면 그저 그 회색 빛의 눈을 들어 멀거니 바라보는 것이었다.

옥에서 그에게 배식을 끊은 지 벌써 이 년이 지났으나 그는 끈질기게도 죽지 않고 있었다.

벌레를 잡아 연명하고 있는 것이었다. 벌레까지 잡아먹는 그 사내 옆으로 갔다가는 생살이 뜯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사내이므로 그가 굶어 죽을 염려는 없을 것이다. 이곳에는 독충과 독물에서부터 바퀴벌레까지 흔하디 흔하게 굴러다니니까 말이다.

그런데, 오늘 이 감옥에 육 개월만에 처음으로 한 사나이가 들어왔다. 그것도 얼마나 많은 고문을 당했는지, 사내의 육신은 그 형체를 알아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그 끔찍한 괴인이 살고 있는 그 감방 안으로 배정을 받아 들어갔다.

왕삼은 누구인진 몰라도 그 사나이가 열흘을 채 넘기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독에 문드러져 죽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저 괴인에게 잡아먹혀 죽거나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그런 생각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              *               *

노인은 구겨진 종이조각처럼 널브러져 있는 묵천을 예의 회색 빛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간수들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 어떤 표정도 없이.......

그리고 간수들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달려들어 묵천의 몇 조각 남지 않은 옷을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묵천의 알몸이 드러나자 노인은 묵천의 몸 이곳저곳을 주물렀다. 흉부, 거궐, 천돌, 이두 등 전신을 이 잡듯이 샅샅이 뒤적였다.

그리고 곧 노인의 얼굴에는 환희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순식간에 바람에 휩쓸린 먼지 마냥 그 빛은 사라져버렸다. 그리고는 예의 그 자리로 돌아가 그저 묵묵히 앉아 있었다.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그 회색 빛 눈만은 번쩍였다.

묵천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이미 그의 주요혈이 파해되어 단 한줌의 내공도 끌어 모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팔목과 발목의 근육이 모두 끊기어져서 아무리 움직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뿐이었다. 단 한줌의 기력도 없었다.

"큭!"

철푸덕!

일어서려고 발버둥치던 묵천은 바닥에 깔린 썩은 물에 얼굴을 처박아야만 했다.

"백천우, 아아악! 백천우―!"

썩은 물이 묵천의 입 속으로 꿀떡꿀떡 넘어 들어왔다. 그러나 그 따위 것들은 그에게 중요치 않았다.

백천우에 대한 원망, 분노, 증오, 그리고 더 이상 회생할 수 없다는 것에서 온 절망감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그의 비명은 뇌옥의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에게 찾아드는 것은 모멸감과 패배의식 뿐이었다.

우웩! 우욱!

그는 잔뜩 들이마신 구정물을 그제서야 게워냈다. 그렇게 한참을 토해내더니 돌아누워 이제는 광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는 미친 것이 분명해 보였다.

"크하하하...... 하하!"

노인은 묵천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동안 열흘의 시간이 흘렀다. 그는 미치기도 했고 광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때로는 흐느껴 울기도 했고, 멍청히 누워 있기도 했다.

그는 지난 십여 일간 무수히 많은 감정의 변화를 겪었다. 그러더니 이제는 잠잠해져서 그저 물끄러미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옴짝달싹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죽은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일까?

노인의 회색 빛 눈빛에 의문의 빛이 떠올랐다. 노인은 달려가 그를 잡아 흔들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노인은 참기로 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              *               *

사마적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세 사나이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과연 아버님의 수하들이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옛 주인에 대한 충정을 잊지 않고 서슴없이 나를 따르다니.'

사마적은 주머니에서 서찰을 꺼내어 세 사나이에게 건네어 주었다. 그 서찰을 받아 본 세 사나이의 얼굴에는 감회의 빛과 놀람의 빛이 어리고 있었다.

<동료들에게.

이렇게 서신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이 우형을 용서하시게. 이 몸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몸이기에 이렇게 글로 인사를 전하는 것일세. 이 아이는 내가 우연히 접어든 계곡에서 나를 구해준 은인이자 나의 양자이기도 하네. 나는 이 아이에게 내가 가지고 있던 무공들을 조금씩 전해주었네. 그런데 이 아이는 천부적인 재질로 나의 무공을 흡수하기 시작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오래지 않아 나보다도 더욱 능숙하게 시전하더군. 하지만 이 아이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나더니 복수를 하겠다고 난리란 말이야. 나는 만류를 했네. 그러나 이 아이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어쩔 수 없이 일단은 자네들을 찾으라고 했네. 부탁이네. 나에겐 이미 친자식과도 같은 아이일세. 나를 대신하여 이 아이를 보살펴 주게나.

                                                     홍화객.>

그들은 편지를 읽고 다시금 사마적의 얼굴을 바라봤다.

세 사람은 모두 같이 사마적의 얼굴을 보았지만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주인님이 그렇게 된 것이었다니. 그런데 어떤 정도의 상세 이길래 이렇게 서신만을 전하는 것인가?'

광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사마적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사마적에게서는 한망과 살망이 피어올랐다.

"나의 아버지는 무림정도라 칭하는 자들에게 배반당하셨다. 그래서 삼선승과 남태천의 합격에 중상을 입고 절벽으로 떨어지셨지. 그리고 이제껏 나를 키워주시고는 십 일 전 돌아가셨다."

콰앙―!

주인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소평은 주체할 수 없는 격한 감정에 탁자를 내려쳤다. 탁자는 금방이라도 부서져나갈 듯 휘청거렸다.

"크윽!"

소평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주인께선 별 볼일 없던 우리를 구해주시고 무공까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별 볼일 없던 우리들을 친형제처럼 아끼셨습니다. 크윽......, 그런 주인이 돌아가셨다니. 정말로 하늘도 무심하십니다."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 그는 감정이 풍부한 것 같았다.

"소주, 지금껏 주인을 혼신을 다해 모셔왔던 것처럼 소주를 모시겠습니다. 주인의 양자이시면 저희에게 역시 주인이십니다."

호귀와 광노 역시 적사(赤蛇) 소평의 말에 동의하는 표정이었다.

사마적은 그들의 충의에 감동을 했다.

'역시 아버지께서는 대단한 분이시구나. 칠 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이들은 아버지를 그때 이상으로 존경하고 따르고 있지 않은가. 나 역시 이들에게 아버지만한 신의를 얻을 수 있을까?'

"소주! 앞으로 계획은 세워져 있습니까?"

"물론!"

"무엇입니까?"

사마적은 입가에 고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만한루라 했었지? 아버지처럼 주점을 해볼 작정이야. 바로 그곳에!"

세 사나이는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그러나 삼 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마적은 싱긋이 웃고 있었다.

*              *               *

<한적한 달밤에

님 그리워 강가에 나갔더니,

어디선가 불어오는 피리소리가 나의 마음을 녹이는구나.

지쳐 돌아와 밤새 울다가

밤새소리 요란해 창문을 열었더니,

기다리던 님은 오시지 않고

문소리에 놀란 밤새만이 푸드득 날아오르네.>

애심곡(愛心哭)이었다.

여인은 밤새 뜬눈으로 지새우며 이 노래만을 불러댔다. 그리고 수척해질 대로 수척해진 여인의 손에는 낡은 동경이 하나 들려 있었다.

여인은 동경에 비추인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애심곡만을 계속 불러대는 것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실성한 여인이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여인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한 쌍의 눈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남태천이었다.

그녀가 과연 누구이기에 그가 이렇게 바라보고만 있는 것인가? 남태천의 눈에서는 실낱 같은 눈물까지 비치고 있었다. 철의 사나이이고 중원을 농락할 만큼 대담한 이 남자가 한 여인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소녀는 주인님의 부름을 받고 그의 처소로 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주인은 항상 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처소에 이르니 주인은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술에 취해있었다. 그러고는 막 도착하여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그녀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훑어보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도마뱀의 눈빛처럼 징그러운 것이었다.

그녀는 묘한 위기의식을 느꼈고, 그곳에서 도망치기 위해 몸을 돌려 사력을 다해 달렸다.

하지만 아무리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자라지만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것도 평범한 남자도 아닌 무림고수의 손을 벗어날 길은 막막했다.

그녀는 그날 밤 처참하게 범해지고 말았다.

옷은 찢기어지고 그녀의 전신은 한 마리의 야수에 의해 핥아졌고 더럽혀졌다.

그녀는 울부짖었고, 울었으며 수십 번을 혼절했다.

혀를 깨물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그녀에게 그럴 용기는 없었다. 자신이 죽으면 그걸로 끝이 아닌 것이다. 역시 하인이고 하녀인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가 봉변을 당할 것이 소녀는 두려웠다.

그런데, 눈을 돌리니 설상가상으로 자신을 그렇게도 따른 소년이 그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소년은 자신보다 훨씬 어렸지만 어떤 땐 측은하고 어떨 땐 대견한 그 모습에 이미 마음을 줘버렸던 터였다. 소녀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악몽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며칠 후, 그녀는 주인에 의해 사창가로 팔려가 버렸다. 소년과 함께 꾸었던 소녀의 분홍빛 꿈은 깨어졌고, 소녀는 사내들의 한낱 노리갯감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리고 이십 년 후 소년이 성장해 소녀를 찾아갔을 때, 소녀는 이미 폐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금처럼 소년이 어린 시절 건네주었던 동경만을 바라보며 애심곡만을 불러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소년은 중원을 오시하는 무사가 되어 있었다.

남태천은 그녀의 처소에서 발길을 돌렸다. 보일 듯 말 듯 하던 그의 눈물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               *               *

당금의 세상에서 문천(文天)이라 불리는 대석학 우문성.

기라성 같은 석학들이 그에게 글을 배우고자 청했고, 황제마저도 그의 글 한 줄을 얻기 위해 친히 자금성을 나와야 했을 정도로 모든 이에게 추앙을 받는 그야말로 문(文)의 하늘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 그는 사람들을 피해 은거해버렸다. 예전에 어떤 명성을 가졌건 간에 반백이 된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한줄기 회한과 허무뿐이었다.

딸칵!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찻잔이 내려지고 그의 얼굴에서는 더욱 짙은 향수가 느껴졌다.

'그 아이는 유난히 이 가을을 좋아했지.'

그가 손수 꾸며놓은 정원은 가을바람을 타더니 붉게 물들었다. 거기에 황혼마저 짙게 깔리어 단풍들은 그야말로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그의 입에서는 낮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허허허. 이제 그 모습이 희미해질 때도 됐건만......."

허탈한 웃음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지난 세월을 회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이미 모든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확실한 것은 그가 지금 깊은 상념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제자가 저녁이 다 되었다고 부르는 소리도 못 들을 만큼 깊게 빠져있었다.

세속을 떠나 은거해버린 이 노인을 저토록 사로잡고 있는 생각이란 과연 무엇일까?

*               *               *

<가을 밤하늘 스산한데

달마저 휘황해,

한 조각 남은 마음마저 훔쳐가고.

낙엽 지는 나무 아래선

연인들의 속삭임 소리가 들려온다.

날 두고 가신 님은

어디에 계신지 소식 없네.

이 달 밝은 밤에.......>

산정의 어디에선가 피리의 소리로 이 노래가 불려지고 있었다. 이 노래는 달밤에 연인을 기다린다는 내용의 추월곡(秋月哭)이었다.

스스스.......

한줄기 바람이 불자 나무잎새들이 서로의 몸에 부딪히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마치 방울뱀이 먹이를 노리고 있는 듯한 소리였다.

하늘에는 휘영청 뜬 달이 세상을 밝게 비쳐주었다. 달에 의해 드러난 산정에는 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남태천. 중원의 절대자, 무엇하나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사나이, 그러나 그는 어딘지 모르게 고독해 보였다.

그가 왜 이 산정에서 소적(小笛)을 입에 대고 있는 것인가?

삐리리...... 삐리리―!

천공을 베는 듯한 검음(劍音)처럼 피리소리는 허공을 갈랐다. 그 소리에 밤새들은 푸드득 몸을 날렸고 산짐승들은 제 굴을 찾기에 바빴다.

그의 피리소리는 고음이었고 강했지만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슬픔도 배어있었다.

그렇게 오직 소적소리만이 들리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사내의 입에서 피리가 떼어졌다.

"누구냐?"

"호호호호!"

남태천의 옆쪽에 보이는 숲 쪽에서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대단하시군요. 마교의 소종사 나으리께서 이런 풍취가 다 있으시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어두운 숲에서 달빛에 몸을 드러낸 그녀는 남태천과 약혼한 것으로 알려진 월기신녀 조약빙이었다. 높은 무공을 보여주듯 치렁치렁한 옷차림인데도 풀에 끌리는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여긴 웬일이시오?"

남태천은 소적(小笛)을 내려놓으며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다시금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호호호! 그렇게 정색하실 필요 없어요. 단지 잠이 오지 않아 산책을 나왔다가 당신의 고아한 피리소리에 이끌렸을 뿐이니까."

남태천은 묵묵히 앉아 달만을 쳐다보았다. 그의 그런 모습은 그녀의 말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조약빙의 아미가 잔뜩 치켜졌다.

그녀는 약혼자로서 이곳에 오고 난 후, 항상 이런 대접을 받아왔던 것이다.

그녀가 누구인가?

중원의 사선녀로 추앙을 받아온 그녀가 아닌가.

날다 긴다하는 세도에, 미모로 보나 지혜로 보나 자신을 따라올 여자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 남자라도 자신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것이라 여겼거늘 남태천의 태도는 너무도 냉담했다.

게다가 항상 무시하는 듯한 저 태도를 그녀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의 높기만한 자존심은 처음 남태천을 본 순간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미소지었다. 차가운 미소였다.

"호호호! 아버님께서는 당신과 조속한 시일 내에 결혼할 것을 강요하고 있어요. 그것이 우리 빙궁과 마교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니까요."

남태천의 무심한 눈이 조약빙을 한차례 바라보았다.

"내가 알아서 하겠소 더 이상 신경 쓰지 마시오"

그렇게 무뚝뚝한 대답만을 남겨두고 그는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려 사라져버렸다.

그가 보이지 않게 되자 그녀의 참았던 분노가 터져 나왔다.

"아아악!"

콰앙!

신경질적인 비명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에서 빙혼신공(氷魂神功)이 운기되어 애꿎은 바위 하나만 얼음 조각이 되어 바스러져 버렸다.

"오호호호! 좋아! 나 조약빙은 언젠가 네놈을 내 앞에 무릎꿇게 할 것임을 맹세하겠어. 언제까지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지 두고 보겠어. 남태천!"

그녀의 말소리 뒤로 청명한 밤하늘의 달과 함께 가을밤은 더욱 깊어가고 있었다.



제6장  절망을 딛고



또 한 명의 중원사선녀 중 한 명인 천녀(天女) 신예원(愼禮元)은 먼 곳의 하늘을 바라

보고 있었다.

"유모."

"예."

그녀의 뒤에는 일흔도 넘어 보이는 노파가 자리하고 있었다. 노파는 지극히 공손한 자세로 대답했다.

"내 나이가 이제 스물일곱이에요. 이제는 중원에 나갈 수 있는 때가 왔어요."

"그, 그것은......."

노파가 뭐라고 말하려하자 신예원은 고개를 가로 저어서 그녀의 뒷말을 끊었다.

"아니예요. 이제 아버님마저 돌아가신 지금, 어머님의 유언을 들어드리고 싶어요."

"궁주, 그건 안 됩니다. 궁주는 이제 궁의 모든 이들을 책임지실 몸입니다. 궁주님 혼자만의 몸이 아니십니다."

노파는 그녀가 왜 그런 결심을 했는지 이해는 하고 있었다.

그녀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길렀으므로 그녀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사소한 것까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궁주가 너무도 사랑했던 그녀의 어머니가 궁주에게 무엇을 심어주고 어떤 것들을 꿈꾸게 했었는지를 노파는 알고 있었다. 어떤 것보다도 우선시했던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궁주의 어머니는 무림인의 아내답지 않게 여리고 청초했었다. 그녀는 그 일대에서 볼 수 있는 여인들과는 독특한 분위기와 기품을 풍겼고, 신예원은 그것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 여리고 순수한 감수성까지.

그리고 어머니가 항상 중원을 그리워했던 탓이었는지 신예원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중원을 동경하고 있었다.

"궁주."

노인은 애처롭게 소리쳤다.

그러나 궁주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내일이면 아버님의 삼년상이 끝납니다. 전 내일 떠나겠어요. 중원으로!"

그녀의 의지는 결연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눈은 무언가를 꿈꾸는 듯 몽롱하면서도 슬픔에 젖어 있었다.

그런 그녀가 알을 품듯이 꼭 움켜쥐고 있는 것은 작은 단지였다. 그것은 죽은 이를 화장시키고 그 재를 담아두는 작은 항아리였다.

"저는 갈 거예요. 어머님이 살아서 돌아가시지 못한 중원에 그분의 뼈를 묻어드릴 겁니다. 어머님의 마지막 소원을 꼭 들어드릴 거예요."

신예원을 바라보는 노파의 눈에서는 애잔함이 묻어 나왔다. 그녀의 효성이 갸륵하기는 했지만 불안이 엄습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궁주님, 강호는 거친 곳입니다.'

*               *               *

묵천은 지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걷고 있었다. 앞이 어디이고 뒤가 어디인지 도저히 알 길이 없는 끝없는 어둠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무턱대고 앞만을 보며 걷고있는 것뿐이었다.

'이곳이 어디지?'

그는 궁금해서 두리번거리면서도 계속해서 걸어나갔다. 잠시 후 그의 앞에 희멀건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부님!"

그 그림자는 죽은 사부의 모습이 아닌가?

'내가 죽은 것인가?'

사부는 묵천을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진 눈물이 곧 피가 되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사부는 묵천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다 이내 멈추고 말았다. 묵천을 바라보며 울고있는 사부의 모습은 괴기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머뭇거리던 사부의 모습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묵천은 사부를 그렇게 보낼 수가 없었다. 사부를 향해 사력을 향해 뛰었다.

하지만 뛰면 뛸수록 사부는 그에게서 더욱 멀어지고 있었다.

"사부님! 사부님!"

그는 울부짖었다. 그러나 안개들이 더욱 짙어지며 묵천의 앞을 가렸고, 묵천은 제자리에서 버둥거리기만을 할 뿐 좀처럼 달려나갈 수가 없었다.

"헉!"

묵천은 눈을 번쩍 뜨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사부님."

당황한 눈빛으로 사부님의 모습을 찾아보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검은빛의 뇌옥벽이었다.

'꿈이었군.'

묵천의 눈에서는 절망의 빛이 떠올랐다. 그의 고개는 푹 꺾여졌다.

 *               *               *

사마적의 계획을 들은 삼 인들은 고개를 가로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너무도 터무니없고 위험한 계획이었다.

"적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그들의 표적이었던 주점을 다시 연다는 것은 자살행위가 아닙니까!"

소평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펄펄 뛰었다.

호귀 역시 검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소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만한루는 이미 천하에 알려질 대로 알려져 우리의 은신처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광노만은 무슨 생각인지 말이 없었다. 그저 그들의 말을 물끄러미 듣고 있을 뿐이었다.

사마적이 광노를 의아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오?"

"후후후. 소인은 주인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광노!"

소평과 호귀는 안일하게 대답하는 광노를 질책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던 사마적은 갑자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걱정들 마시오. 내게 다 생각이 있어서 꺼낸 계획이니."

말을 마친 사마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고, 삼 인은 알 수 없다는 듯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사천성에 있는 백제성(白帝城) 중심대로 옆에는 칠 년여 전부터 만들어진 공터가 하나 있었다. 백제성에 사는 사람이라면 노소를 불문하고 모두들 왜 그곳이 공터가 되어버렸는지 알았다.

그곳은 바로 홍화객, 칠 년 전 전중원을 주름잡았던 희대의 살수인 홍화객이 경영하던 만한루라는 주점이 있던 곳이었다.

원래는 당당한 모습으로 객잔이 서 있던 곳이었으나, 그가 무림의 태양인 남태천을 암습하고 무림의 삼선승을 죽인 후, 곧바로 관부에 의해 헐려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백제성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의 중심에 이렇게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폐허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삼국시대에 촉의 군주인 유비가 오와의 싸움에서 패한 비분을 삼키며 죽었기 때문에 더욱 유명해진 곳이 바로 이곳 백제성이다.

당금의 이 백제성의 성주는 만거충이라는 자였다.

백제성민이면 이구동성으로 그를 가리켜 금쥐라고 부를 만큼 뇌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그는 돈을 밝혔다.

돈 되는 일이 아니면 웃는 것조차 꺼려할 정도인 그가 오늘은 입이 귀까지 찢어질 정도로 벌어져 있었다. 그것도 좋아서 어찌할 줄 몰라하고 있는 것이었다.

"허허허허!"

만거충은 금자를 연신 들었다 놓았다하며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른 아침부터 누군가가 찾아왔다기에 귀찮아 내쫓으려다가 너무도 간곡하기에 만나줬더니 금자로 백 냥을 내어놓는 것이 아닌가?

그의 태도가 바뀐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허허허. 자자, 우선 자리에 앉으시오. 그리고 뭐든지 얘기하시오. 내 들어드릴 수 있는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어드리리다."

오히려 만거충이 부탁할 것 없냐고 물어댈 정도면, 그의 기분이 지금 어느 정도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있을까?

금자를 내놓은 사내는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굽실거리면서 말하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오라......."

"그래, 뭐요?"

"뭐 별거 아닙니다만, 저 만대인 나리."

"허어. 기탄 없이 말씀하시라니까 그러시는구려."

사내는 머뭇거리다가 결심한 듯 더욱 비굴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관 내에 놀고있는 땅이 있다면 만대인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관내에 놀고있는 땅이라 했소?"

"예에!"

"그렇다면 빨리 개발을 해야지요."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사내는 만거충의 바로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신나서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그런 곳이 어디에 있단 말이오?"

"만한루가 있지 않습니까? 만한루 자리를 저에게 파셨으면 하구요. 헤헤헤......."

순간, 웃음이 번들거리던 만거충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허허.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서 하시는 말이오?"

사내는 움찔했지만 곧 태연스레 대답을 했다.

"물론이지요."

"허허허. 만한루라....... 거긴 좀 곤란한데......."

만거충은 살짝 말꼬리를 늘였다.

"만대인. 제가 가격은 넉넉히 쳐 드리겠습니다요. 헤헤헤."

사내는 만거충의 옆으로 다가서며 징그러울 정도로 살살거렸다.

"허허. 그래요? 이미 그 사연을 알고 사는 것이고, 값까지 넉넉히 쳐 주신다니 안될 것이 없구려. 그 정도야 흔쾌히 들어드리리다. 허허허!"

만거충은 제법 호탕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나 아주 짧은 순간 만거충의 눈에서는 야릇한 빛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               *               *

대전, 아니 암전(暗殿)이라고 해야 옳을 그런 곳이었다. 육중한 기둥들이 늘어서 있고, 군데군데 놓인 철솥에서는 마화들이 피어올라 주위를 희끄무레하게 비추어주고 있었다.

암전의 앞에 놓인 석단 위에는 거대한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총령(總領)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한 사나이가 오체투지한 채 총령의 다음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만한루가 팔려 나갔다구?"

"그렇습니다."

"흠. 그래, 그걸 사들인 자는?"

"서역에서 비단과 향신료를 사고 파는 중계상이었다고 합니다. 이번에 아주 고향에 내려와 터를 잡고 싶다고 했답니다."

"신원은 확인 됐나?"

사나이는 더욱 머리를 숙이며,

"예. 확인 결과 그런 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상착의까지도 확인이 됐으나 그 자가 확실한지는 아직......."

퍼억!

가벼운, 어찌 보면 장난 같은 발길질이었다. 그러나 그런 발길질에 환인은 단 위에서 굴러 떨어져 무려 삼여 장을 굴러갔다.

하지만 아파할 겨를도 없이 그는 재빨리 되돌아와 총령의 앞자리에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다.

그는 신음소리는커녕 입가에서 흘러나온 선혈을 닦을 틈도 없었다.

"본좌는 정확한 것이 아니면 듣지 않겠다."

"옛!"

"더 조사해 보도록!"

"옛!"

"환인."

"예."

"우리의 대업을 위해서는 단 한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 알겠나?"

"옛!"

쿵! 환인은 바닥에 머리를 한 번 부딪쳤다.

그리고는 환인의 모습은 바람처럼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우리의 대업을 방해하는 것은 뭐든지 없애버리겠다. 그 무엇이든지. 설사 황궁이라 할지라도!"

그의 목소리는 텅 빈 대전의 구석구석에 울려 퍼졌다.

*               *               *

'소하.......'

남태천은 그 이름을 부르려다 꿀꺽 삼켰다. 그녀가 그 이름만 나오면 발작을 했기 때문이었다.

"한적한 달밤에, 님 그리워 강가에 나갔더니......."

그녀는 나지막한 소리로 언제나 처럼 예의 그 애심곡만을 읊조리고 있었다.

낡은 동경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면서.

남태천은 그녀의 그런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을 감싸쥐며 무릎을 꿇었다.

"예전에 아름답던 당신의 손은 어디 가고 이제는 앙상하게 마른손만이 남았구려"

순간 그녀의 눈은 경계의 빛을 띠기 시작했다.

남태천은 그녀의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러나 당신은 여전히 아름답소. 나의 소녀여."

그 순간에도 그녀는 바르르 떨며 몸을 사렸다.

남태천은 그녀에게서 손을 떼며 일어섰다.

"당신은 그저 보고만 있으시오. 이 땅에 위선자들이 자멸하는 순간을."

남태천이 이 말을 남기고 문 밖으로 사라지자 그녀의 입에서는 다시 끊어졌던 애심곡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는 언제까지고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문소리에 놀란 밤새만 푸드득 날아오르네."

그녀의 노랫소리는 너무나도 공허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만한루의 옛터를 돌아보는 사마적은 착잡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사람의 허리까지 자라 있었고, 주루는 이미 흔적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부서져 있었다.

"후후. 아버님! 이제부터 저는 멋있게 장사를 해볼 작정입니다. 이 세상을 상대로. 아버님은 말씀하셨죠. 장사에서는 손해를 봐서는 안 된다고. 전 손해보지 않을 작정입니다. 절대로 말입니다."

우두둑!

사마적의 손아귀에 잡힌 한 웅큼의 풀들이 뽑혀나갔다.

*               *               *

묵천은 서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가락 마디 하나부터 조금씩 움직여갔다.

그는 자신의 몸을 하나하나 추스르고 있었다. 벌써 이 뇌옥에 들어 온 지도 한 달이 지나갔다.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더니 처음에는 꼼짝도 하지 않던 몸이 이제는 제법 걸음도 걸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거리래야 서너 평 남짓 되는 뇌옥 안이 전부여서 몇 걸음 걷지 않아도 되었지만.

'벌써 한 달여가 지났다. 몸은 제 기능을 찾아가고 있지만 상처가 썩어들어 간다. 오늘도 상처에서 고름을 한 사발은 짜낸 것 같구나.'

묵천은 하루하루가 지옥처럼 느껴졌다.

옆에 앉아 있는 노인은 자신이 무엇을 하던지 무슨 일을 하던지 관심이 없었다.

그저 벽을 타고 기어다니는 벌레들을 잡아먹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모든 것이라도 되는 냥 벌레 잡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기분 나쁜 눈초리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는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멀거니 바라보는 것이 그의 모든 것이었다.

이곳에는 시간이란 것이 없다.

하루종일 어둡지도, 그렇다고 밝지도 않은 이런 곳에서는 언제가 낮이고 어느 때가 밤인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지금이 밤이겠거니 하고 짐작만을 할뿐이다.

오늘 아침부터 배급이 끊어졌다.

이제부터 체력을 아껴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다가올 기회를 위해서.

묵천은 노인이 벌레를 잡아먹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노인은 콩이라도 볶아놓은 것으로 아는지 오독오독 씹고있었다.

묵천의 몸은 이미 말이 아니었다.

그의 상처들 사이로 들어선 시독이 그의 전신을 중독시켜 옴짝달싹하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었고, 상처는 이미 썩어 들어간지 한참이었다.

묵천은 움직일 기력은커녕 입 안이 깔깔해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엔가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               *               *

"아버님 문안인사 드리옵니다."

만력제 주익균은 태상황 융경제 주재후에게 문안인사를 드리고 있었다.

주재후는 아직 침상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주익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고, 주재후의 뒤에서는 황녀 진위령이 누워있는 주재후의 다리며 팔을 주무르고 있었다.

그들은 주익균의 앞에서조차 반나체로 있었으며,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능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있었다.

태상황은 귀찮은 음색으로 주익균에게 대답했다.

"그래. 알았다. 그만 나가 보거라."

주익균은 가볍게 읍을 하고 입술을 짓씹으며 발걸음을 돌려 나왔다.

태자전(太子殿)이란 글씨가 용비봉무(龍飛鳳舞)한 필체로 써진 편액이 처마의 안쪽에 걸려있었다.

"아버님은 그년의 농간에 빠져 심지를 잃으신 게 틀림없다."

황제로서 항상 품위를 잃지 않던 주익균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 나왔다.

그는 지금 극도로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주익균은 답답한 듯 탁자 위의 찻잔을 신경질적으로 만지작만지작하더니 갑자기 문 쪽을 향해 호령했다.

"게 아무도 없느냐?"

별위총감이 재빠르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국사를 만나러 가자."

"예!"

자금성은 거대하다.

상주인구만 팔천, 유동인구는 오천, 그 외에 성을 지키는 수비군까지 합한다면 그 숫자는 배로 불어난다.

그러나 자금성의 한쪽에는 그 건물의 크기에 비해 열 명의 인물도 기거하지 않는 곳이 하나 있었다.

상국사(相國寺).

바로 현 황제의 스승이 자 태상황의 막역지우인 서역의 라마승 달대대사가 머물고 있는 곳이었다.

상국사에서는 목탁소리와 염불소리로 아침을 열었다. 그리고 불상을 앞에 두고 한 노승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불경을 외우고 있었다.

사람의 얼굴을 떡메로 짓이겨 놓아도 이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을까?

노승의 얼굴은 한 마디로 가관이었다.

뭉툭하다못해 건들면 툭 터질 것 같은 코와 썰어 놓으면 족히 한 접시는 나올 것 같은 입술, 나름대로 눈이라고 붙어있기는 했으나 그 흔적만 있을 뿐 눈동자는 보이지 조차 않았다.

거기에 머리는 기형적으로 커 난쟁이에 거인의 머리를 붙여 놓은 것 같았다.

정말 처음 보는 사람들은 이게 인간의 몰골인가 할 정도였다.

"천우야. 게 천우있느냐!"

노승이 소리를 지르자 사미승 하나가 쪼르르 달려와 노승의 등뒤에 바로섰다.

"예. 큰스님."

"가서 산문 밖 좀 쓸어 놓거라. 오늘 귀한 손님이 드실 테니!"

"손님요?"

"어서!"

"예에."

사미승의 대답은 불만의 표정이 가득했다.

'이런 곳에 손님이 올게 무어람?'

상국사는 궁 안에 있어 일반인은 물론 고급 대신들도 함부로 드나들 수가 없었다. 간혹 왕족들이 오기는 했으나 일년 중 한두 번이 고작이었다.

천우는 궁시렁 거리며 비를 들고 산문을 쓸러 나갔다.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큰스님의 말을 안 들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막상 산문을 쓸려하니 한때의 사람들이 들이닥치는 것이 아닌가.

천우는 그 손님들을 맞이하며 내심 생각했다.

'큰스님은 시장 통에 돗자리만 하나 깔아도 굶어죽을 일은 없을 거야.'

천우는 손님들을 안으로 모시면서 그들의 모습을 힐끗 쳐다봤다. 조금 차갑게 보이는 사내와 무장들이었다.

'황제라도 되나 불공드리러 오는데 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

천우의 비아냥거리는 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바로 그 사나이가 당금의 대륙을 경영하는 황제 주익균이었던 것이다.

"국사."

"아니 됩니다."

주익균이 말을 꺼내자마자 국사인 달대는 일언지하에 반대하였다.

"국사. 이 나라를 위한 일이오."

"마마. 그녀는 황녀이기 이전에 마마의 어머니이십니다. 어찌 천륜을 져버리는 일을 하시려 하오십니까?"

주익균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아버님의 심기를 해하고 종사를 문란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나간다면 이 나라는 커다란 혼란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아래로는 왜인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고 위로는 누루하치가 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위험한 시국에 한 나라의 종사라는 사람이 아녀자의 치마폭아래서 놀아나고 있으니 어찌 이 나라가 평안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달대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무릇 한 나라를 꾸려 나간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을 지위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천의(天意)가 있어야하며 민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천심과 민심을 두루 살피셔야할 마마께서 천륜을 저버린다면 어느 누가 마마를 따르오리까?"

주익균은 비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껍데기뿐인 황제입니다. 아버지는 황제의 자리는 물려 주셨으되 힘은 넘겨주지 않고 계십니다. 게다가 중신들은 아직도 아버님을 추종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 태상황녀의 농간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달대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이 다시 잘라 말했다.

"인간에게는 도(道)가 있는 법입니다. 무릇 만인의 어버이인 황제마마께서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시면 이 나라는 어떻게 흘러가겠습니까"

주익균은 자리에서 일어서 밖을 향해 나서며 말했다.

"국사의 의중은 잘 알았습니다. 지금은 참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녀가 더 이상 종사를 어지럽힌다면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미타불......."

주익균이 그러고 나가자 달대의 입에서는 나지막이 불호령이 터져 나왔다.

달대의 얼굴에서는 고뇌의 표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록, 다른 이들이 보기엔 기분 나쁜 표정으로밖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               *               *

검을 사랑하는 자 검으로 망하리라.

검을 증오하는 자 검을 얻게 되리라.

검이란 무엇인가?

검을 다루는 무사라면 이런 질문을 한 번씩 해보았을 것이다.

무식자는 이렇게 말하리라.

"검이 뭐라니? 베는 것 아뇨. 어부의 손에 들리면 생선 자르는 칼이고, 조각가의 손에 들리면 조각칼이고, 살인자의 손에 들리면 사람 죽이는 검이고, 뭐 그런 거지."

그러나 무를 익히고 검을 든 자에게는 검이 단순히 베는 도구이 자 연장만은 아닌 것이다.

무사에게 검은 자신이고, 자신은 곧 검이어서 불가분의 관계였다. 또한 검은 예(禮)이고, 도(道)임으로 사람들은 검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진리를 찾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검이라도 무식자의 말처럼 도살자의 손에 들어가면 단순한 흉기로 전락하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그렇다면 검은 무엇인가?

풀리지 않는 질문이면서 무사가 없어지지 않는 한 멈추지 않을 질문이었다.

묵천은 안개가 짙어 자신의 발등도 보이지 않는 그런 곳에 서 있었다. 양 손으로는 한 자루의 검을 감싸쥐고는 그저 묵묵히 정면을 겨누고 있었다.

무엇을 배려는 것인가? 그것은 자신도 알지 못했다.

다만 '검이 무엇인가'라는 질문만 입 속으로 우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둠을 가르고 한 사내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죽기 전에는 잊을 수 없는 백천후의 얼굴이었다.

묵천은 검을 들어 상대를 베고자 했다.

그러자 그가 들고있던 검이 천 근이나 된 것처럼 무거워지는 것이 아닌가?

그저 들고 있기만 하는 것도 힘이 들었다.

백천후는 자신 있게 웃으며 묵천의 목을 베어왔다. 사악한 미소였다.

그러나 묵천은 검조차 가누지 못하고 서 있었고 곧이어 상대의 검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그는 검이 자신을 관통하는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아악!"

묵천은 비명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입에서 비릿한 맛을 느낄 수가 있었으나 그게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다.

묵천의 눈앞에는 괴노인이 앉아 있었다.

"무, 물!"

소인은 무언가 한 웅큼을 주먹에 쥐더니 묵천의 입가에 떨어뜨려 주었다.

묵천은 타는 듯한 갈증에 그 액체를 가득 받아 마셨다.

그의 입 안에 무언가 비릿함이 가득 퍼졌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잃었다.

희뿌연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묵천은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눈을 깜빡거려 보았다. 괴노인이 자신을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보며 묵천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살아났구나!  그런데 어떻게?'

묵천은 손을 까딱거려 보았다.

움직였다. 얼마를 누워 있었는지는 몰라도 몸을 움직이려하자 조금씩 움직여졌다.

몇 발자국의 걸음을 걷기 위해서 한 달을 고생했던 그가 아닌가. 그런데, 정신을 잃었다 다시 차린 후 몸이 더욱 좋아지다니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묵천이 몸을 일으켜 앉으려고 했다.

"끌끌끌. 아직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아. 시독은 그렇게 흔한 독이 아니거든."

쇠로 돌을 긁어도 그런 소리는 나지 않을 것이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 칠공에서 피가 솟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노인은 누구요?"

"나? 무명인이라고나 할까? 이미 잊혀진 이름이니 말해도 모를 거야."

"무명인?"

묵천은 그 노인에게서 진한 비애감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숙명이었다.

*               *               *

백제성 주민들에게 커다란 관심사가 생겼다. 초토화된 만한루 자리에 커다란 주점이 세워진 것이다.

주인은 엄청난 부호라고 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몰라도 주위에 서 있던 건물들까지 사들여 예전의 만한루보다 세 배는 크게 불려서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삼 층의 누각이 세워졌고 누각의 옆으로는 연못이 생겨 잉어들이 노닐고 있었다.

악공들의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정원의 산책로 가에는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이 빽빽이 심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천루(玔累)라는 현판이 걸렸다.

천루는 순식간에 백제성의 명소가 되었다.

하지만 누구도 천루의 저 깊은 곳에서 또 다른 장사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천루의 한 곳 밀실에서는 사마적과 삼 인의 사나이들이 무언가 은밀히 말을 나누고 있었다.

사마적은 삼 인을 둘러보며 말을 꺼냈다.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상대방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이목을 이곳에 집중시킨 후 어둠 속의 그들을 끌어내는 것이 주목적이야."

"하오시면?"

소평이었다.

"먼저 표면에 드러나 있는 적들부터 죽인다."

"그렇다면 첫 표적은 무엇입니까?"

"후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하나 제거될 것이다. 잔가지부터 처치하고 나서 마지막 순간 일거에 제거할 것이다. 나의 손에!"

순간 삼 인은 사마적의 눈에서 일어나는 그 광기를 보았다. 그리고 이 순간 한 사나이는 또 다른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우선 이곳을 거미집처럼 만들어 놓아야 해. 날아드는 나방은 하나도 도망 할 수 없는 그런 곳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이곳을 그들의 표적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지."

"하오시면."

"먼저 살생부(殺生簿)를 만들어 오도록!"

그들에게 사마적의 첫 임무가 떨어져 내렸다. 중원을 혈우(血雨)로 덮게 할 첫 임무가.......

*               *               *

노인의 뇌리를 괴롭히는 것은 한 소녀였다.

열일곱 남짓으로 순결하기만 하던 한 소녀의 모습. 단 한시도 노인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그녀가 제 어미와 아비를 따라 절에 공양을 드리러 가는 데서부터 비극은 시작되었다.

여느 때처럼 그들 세 식구는 인근에 자리한 절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소녀는 밝은 얼굴로 할아비의 장수를 빌겠다고 다짐하며 집을 나섰다. 그리고 노인은 그런 아들부부와 손녀를 밝은 미소와 함께 배웅을 했다.

하지만 저녁에 돌아온 것은 아들부부의 싸늘한 시신과 손녀딸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노인은 분노했다.

대명천지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가?

대로에서 사람이 죽고 한 소녀가 짓밟히는데도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으며 돌봐주지 않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노인은 지방의 관리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차가운 냉대와 멸시뿐이었다.

그후 그는 우연히 알게 되었다.

자신의 손녀를 짓밟은 자는 인근에서 그 세력을 떨치고 있던 무적세가의 삼공자로서, 지방관에서는 그들의 사주로 이 사건을 무마시키려 했다는 것이었다.

노인은 절망했고, 세상을 원망했다.

그는 궁에 상소를 올려 자신의 억울함을 풀려고 했다.

하지만 상소를 올린 바로 그날 밤, 상처를 입고 돌아왔던 노인의 손녀가 그날 이후 정신이상을 보이더니 노인의 눈앞에서 자살을 하고 만 것이다.

노인은 울부짖었다. 세상은 썩었노라고 소리치면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후 그의 상소가 받아들여져 관료는 삭탈관직(削奪官職) 당했고 무적세가의 삼공자와 그 일당은 형을 받았다.

그러나 그런다고 노인의 아들이, 며느리가, 손녀가 살아 돌아오겠는가? 노인의 마음은 황량한 벌판처럼 메말라가고 있었다.

그후, 노인에게는 더욱 큰 일이 닥쳤다.

일단의 흑의 무리들에게 가족들과 온 식구들이 죽음을 당하고 노인도 중한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노인은 분노했다. 그것은 무적세가의 짓이 분명한 것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그런 내용의 상소를 올렸으나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묵살되어버렸다.

황궁 측에서도 무적세가와 대치하기에는 껄끄러웠던 것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자신 있어하던 문(文)의 이치와 도(道)와 예(禮)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것을 그는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 세상엔 더 이상 도덕과 정의가 숨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노인은 결심했다. 살아 숨쉬는 위선자들을 모두 없애기로, 이 세상을 오염시키고 있는 인간들을 말살해버리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후로 십여 년이 흘렀다.

우문성의 손에는 여인의 노리개가 들려 있었다.

"란아."

손녀 생각에 그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방안은 생전(生前) 자신의 손녀딸과 아들내외가 쓰던 물건들로 가득했다.

우문성은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그것들이 가슴 아픈 추억일 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그가 잘 알고 있었다.

노리개를 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그래, 이제는 결심해야만 한다. 나의 아이들을 위해서!'

바짝 마른 손등에 힘줄이 불거져 나오고 있었다.

*               *               *

"백천우!"

묵천의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는 온 뇌옥 안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그는 백천우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그는 이미 폐인이나 다름없는데다가 이렇게 백천우의 손에 잡혀있기까지 하니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백천우는 철창 저쪽에 팔짱을 끼고 선 채 느물거리는 웃음으로 묵천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후후후. 아직도 살아 있었군."

"백천우......."

콰앙!

뇌성과 함께 묵천은 철창에 몸을 부딪쳤다. 그가 어깨로 들이박은 것이었다.

그러나 폐인이나 다름없는 그의 몸에 애 팔뚝만한 철창이 꿈쩍 하겠는가?

"크윽!"

철창은 흠집하나 없이 멀쩡했고, 묵천의 입에서만 피화살이 품어져 나왔다.

그러고 나서 묵천은 고통 때문에 뇌옥의 바닥에 나뒹굴었다.

"크흐흐. 사부가 지금의 네 모습을 보면 몹시도 좋아하겠군. 너에게 밀려났던 나는 이렇게 멀쩡하고 너는 폐인이 되어버렸다니, 재미있지 않은가? 정말 재미있어!"

"익!"

묵천은 몸을 일으키려고 버둥거렸으나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백천우는 일양지(一樣指)를 날려 뒹굴고 있는 묵천의 중극을 강타했다.

백천우에게는 무척이나 장난스러운 손동작이었다.

하지만 묵천은 어마어마한 고통에 진저리치듯 부르르 떨더니 온 뇌옥 안을 뒹굴며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크아악. 아악!"

머리를 벽에 찧었다. 온몸을 뒤틀며 고함을 질러댔으나 고통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잠잠해졌을 때 그는 입에서 토혈을 하고 있었다.

"컥. 우웩!"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백천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묵천은 실의에 빠졌다.

이제는 무공은커녕 거동조차 힘든 몸이다. 어떻게 백천우에게 복수를 한단 말인가?

'사부.......'

그는 사부의 모습에 사무치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복수하고 싶은가?"

그저 멍하게 한쪽 구석에서 그를 바라보고 앉아있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무명객이라 했던가?

묵천은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진 머리, 때에 찌들어 얼룩덜룩한 피부, 썩어서 이미 떨어져나간 손가락이 보였다.

묵천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한들 길이 있습니까?"

"크크크. 길은 있지. 암! 있고 말고."

그러나 묵천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허탈한 웃음이었다.

"노인이 무슨 재주로 내 복수를 돕겠다는 말입니까?"

"크크크....... 나는 재주가 없지만 네놈은 있지. 네놈은 말야."

묵천의 눈은 번뜩였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랄까?

"그게 무슨 소리요?"

"어떤가? 복수를 하고 싶은가?"

"그렇소이다. 만약 백천우 저 자만 죽일 수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팔아 당신에게 주겠소!"

노인은 회색이 번뜩이는 눈으로 묵천을 보며 말했다.

"좋다. 그럼 네놈이 회생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지. 아니 네놈은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몰라. 클클클."

노인은 묵천을 바라보았다.

"고통은 참을 수 있겠지?"

묵천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비장한 각오가 서려있었다.

"크윽!"

묵천의 꽉 다문 입술 사이로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비명은 새어나오지 않고 있었다. 나지막한 신음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노인은 묵천의 등에 입을 대고 한 웅큼의 살점을 찢어냈다.

"큭."

"퉤!"

"마지막 하나다. 하나만 제거하면 네놈의 몸에 박힌 침들은 모두 제거된다."

노인은 지금 묵천의 삼십이대혈에 박힌 금제침을 모두 뽑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묵천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의 전신은 땀으로 이미 범벅을 이루고 있었다.

으드득! 찌익―!

"퉤!"

노인의 입 안에서 이를 마주치는 소리가 들리자 다시 한 웅큼의 살점이 노인의 입에서 뱉어내졌다.

일이 다 끝나자 묵천은 마지막으로 잡고있던 의식의 끊을 놓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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