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6일 화요일

무림실록(武林實錄) 전신전설(戰神傳說) 제17장~제19장 - 내가위





제17장  그림자(影)



황제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닌 듯 했다.

허공에 대고 무언가를 읊조리는 것이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의 앞에는 흐릿한 그림자가 불빛에 어른거리는 것이 아닌가?

마치 귀신이라도 나온 것 같았다.

"그래. 자네의 계략대로 하면 이번 일은 손쉽게 풀 수 있다는 말이지?"

그러자 그림자는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제 말대로만 하시면 황제폐하께오서는 그저 앉아 굴러 들어오는 떡을 집으시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럼 자네의 뜻대로 하지."

"감사합니다."

스르르륵―!

그림자는 바람결에 날리듯 날려 천장의 틈을 뚫고 사라져버렸다.

황제는 일어서 삼 보쯤을 내딛었다.

그의 걸음소리는 기이했다.

퍼석―! 퍽―!

바닥에는 그의 선명한 족적이 그려졌고, 황제는 그림자가 사라진 천장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황제인 그 역시 무공을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의 주변을 맴도는 호위들조차 그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옛말에 오지랖 넓은 쥐새끼가 제 할일 못한다고 했던가? 영리한 척하는 녀석치고 변변한 놈이 없단 말이야. 흐흐흘."

휘익―!

황제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치는 순간 무언가 튀듯 도망가려는 물체가 있었다.

콰앙―!

내전의 벽이 부르르 떨렸다.

"후! 대단하군,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니."

물체는 바닥에 내려서며 사람의 형체를 이루었고, 내려섬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어찌 궁궐이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되었지? 네놈의 정체는?"

"알 것 없다. 주군은 당신을 죽이라는 명을 내렸고 나는 그 명을 따르는 것뿐이다."

황제는 그의 말을 비웃고 있었다.

"우습군, 그래, 어디 한 번 네 실력을 보자."

우두둑―!

황제가 주먹을 쥐자 뼈마디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 모양의 물체는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서서히 어둠 속에서 그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검은 인자복장에 창을 들고 있었는데, 창은 잠행이나 암습을 전문으로 하는 인자들에게는 그다지 좋은 무기가 아니었다.

쉬익―!

뱀이 혀를 마는 소리가 들리고 그와 동시에 황제는 철포삼(鐵袍衫)의 형식으로 소매 끝에 빳빳한 강기를 넣어 날아오는 미세한 쇠침을 걷어냈다.

"매우 악랄한 수법이구나."

하지만 황제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있었고 곧,

웅...... 우웅! 웅―!

하는 벌 우는 소리와 함께 황제의 몸은 부풀어올랐다. 황제의 소매는 마치 강철 철판이 된 듯 날카롭게 변해버린 것이다.

"허억―! 반야대불승천공(盤若大佛乘天功) 천축의 무공이? 크아악―!"

그 사내는 일수에 양단 되어 버렸다. 황제는 돌아서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살기에 찬 어조였다.

"흥! 누루하치. 네놈이 서서히 마수를 드러낸단 말이냐? 용서하지 않겠다."

갑자기 내전에 한기가 도는 듯했다.

*               *               *

풍야후, 그는 지난 석 달간 많은 번뇌와 고민을 했다.

그러나 그의 고민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권력과 힘을 숭상하는 자들이 그의 뒤에서 중원을 쳐야 한다고 외치며 그의 결단을 촉구하였다.

아마 이번 결정에 의해서 그는 그의 수하들과 달단의 백성들에게 재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가 늙은 호랑이인지, 아니면 아직도 천하를 호령하는 용인지에 대해서 그들은 벌써 이러쿵저러쿵 해대고 있었다.

그러나 풍야후는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내가 일어서면 내 어린 백성들이 피를 흘리게 된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젊은 시절 나는 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무고한 자들의 피를 흘리게 했었다. 또 다시 일어선다면? 중원은 강하다. 우리의 힘으로 그들에게 타격은 줄 수 있을지언정 그들에게서 승리를 빼앗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우리 전사들의 피를 흘리게 한 자들에게 관대할 수는 없다. 허허허허....... 내가 늙었단 말인가? 이토록 생각이 많아지다니. 예전 같았으면 단숨에 창을 휘두르며 달려갔을 터인데.'

풍야후는 광활하게 펼쳐진 대지를 훑어보았다.

자신이 태어나 자라고 이제는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곳, 그는 이곳의 지배자이자 절대자였으며 신앙이었다.

그는 이 대지 위에 사는 이들에게 무언가를 해줘야만 할 의무가 있었다. 더 풍요롭고 더 따뜻한 삶을 영위하게 해줘야 하는 것이다.

기름진 대지가 겨우 산 몇 개만 넘으면 자리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명분은 세워진 것이다.

중원의 세력이 달단의 전사들을 죽였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그 세력이란 황제의 군사들이니 이보다 더 좋은 명분은 없는 것이기에 풍야후는 고민하고 있었다.

마치 잘 차려놓은 잔칫상을 받은 거렁뱅이 같은 처지랄까? 뜻하지 않은 행운에 자신도 어쩔 줄 몰라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만약 잘못 건드렸다가 주인에게 몰매를 맞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건들지 않고 바라만 보기에는 너무도 잘 차려놓은 밥상이 아닌가?

풍야후로서는 여간 난처한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다.

만약 자신이 여기서 주저한다면 이는 분명 백성들에게나 군신들에게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과도 같았다.

달단은 철저한 힘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끝을 추측할 수 없이 광활한 벌판에서 목축만을 하며 살아가는 유목민들이었기에 이들의 습성은 강함을 좋아했다. 강하지 않은 것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비호하지 않았다.

강함은 위엄이고 힘이며 명예였던 것이다.

바스락―!

누군가 풍야후의 뒤에서 다가서고 있었다.

이 달단에서 그의 허락을 받지 않고 뒤에 설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도 이곳은 스무 겹이 넘는 철통 같은 방어지역이었다.

하지만 그녀만은 가능했다. 가벼운 발소리의 주인공은 풍야후의 애첩 추양(秋陽)이었다.

추양은 풍야후와 삼십여 년의 세월을 같이 동고동락(同苦同樂)한 여인으로 지금도 그의 말이라면 풍야후는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후야! 왜 이 야심한 밤에 나와 계신 겁니까?"

"추양, 왜 이 밤에 자지 않고 나왔소?"

둘이 동시에 같은 말을 했다. 둘은 고소를 머금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둘 사이에는 훈훈한 바람이 불었다. 풍야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글쎄, 잠이 오지 않는구려. 문득 먼저 이 세상을 등진 동지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

풍야후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쉬 말을 잇지 못했다.

"나도 늙었나 보이......."

"호호호. 후야! 어찌 그런 말을 하시는 것입니까? 후야의 마음을 모두 알지는 못하지만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어린 백성들이 피를 흘릴까봐 염려하신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후야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중원을 그리워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들은 후야가 망설이는 걸 원하지 않는답니다. 당신의 명이라면 기꺼이 피를 바칠 테니까요. 중원을 향해 내달리세요. 후야는 중원 고국 땅에 뼈를 묻고 싶다는 말을 하신 적이 있질 않습니까?"

풍야후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

실로 오랜만에 볼 수 있는 웃음이었다.

"그래, 그랬지.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중원인이라니, 그렇다면 중원인의 몸으로 달단의 지도자가 되었단 말인가?

철저히 자신들의 민족으로만 이루어져온 이 달단을 지배하는 자가 중원인이었다는 것은 실로 놀랄만한 일이었다.

그렇게 놀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들은 소수민족들 이 기에 절대로 상대를 믿지 않는 종족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이들은 영토가 없는 대신 동물들이 재산이고 모든 것이다. 이들의 물욕이란 것은 얼마나 많은 말과 양, 그렇지 않으면 소를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가려지는 것으로 상대의 동물을 빼앗는다든가 하는 일은 흔한 것이었다.

이 광활한 대지에 법이란 것이 존재하며 그 누가 집행하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민족들은 물론 타민족까지도 철저히 믿지 않는 습성이 있었다.

칠 푼의 마음은 드러내고 삼 푼은 숨겨두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도자로 타민족을 두었다는 것이 믿을 수 없는 일임은 당연했다. 그것은 풍야후가 이들에게 얼마나 헌신적으로 대하고 또 믿음을 주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나의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을 손꼽았었지. 이만하면 나도 남아다운 삶을 살았으니 무엇이 두렵겠는가? 그래, 전쟁터에서 죽는 것은 무사 최고의 행운이다. 나의 생을 모두 이곳에 쏟겠다!"

풍야후는 드디어 자신의 마음을 결심했다.

'가겠다. 중원으로! 나를 버린 그곳에서 죽는다 한들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풍야후는 추양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그녀도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흰머리가 몇 가닥 보이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서른이 갓 넘은 아낙의 모습이었다.

아름답지는 않지만 대지의 여인처럼 항시 풍요롭고 넉넉함이 배어있는 여인, 풍야후의 입술은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풍야후는 문득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여인밖에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폭풍전야의 밤은 지나가고 있었고, 천 리의 거리를 두고 떨어진 한 곳에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가 있었다.

*               *                *

한 사람을 시름에 들게 하기에는 달빛이 너무도 좋았다.

이백은 달빛이 좋아 술잔을 들고 호수에 뜬 달빛을 향해 달려들었다가 죽었다니 않는가?

그러나 상념에 찬 사람에게는 달빛이란 너무도 사치스러운 존재였다.

군막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이곳은 조선국과 명의 국경을 이루는 곳이었다.

멀리 백두산이 내려다보고 있는 이곳에는 모두 삼십만의 장병들이 주둔해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비밀리에 진행되어 왔기에 이곳에는 실지로 삼천의 병사들이 있는 것으로 황궁에는 보고되고 있었다.

이는 공식적인 것으로 공문에 보관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이곳에 병사가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오 년 전부터의 일이다.

이곳은 조선과 달단, 명이 인접한 곳으로 항시 전운이 감도는 곳이었다. 그러나 삼십만의 병사까지는 필요치 않은 곳이었다.

이 사실만 보아도 누군가가 고의로 사병을 키우고 있음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군막의 가장 위쪽에 자리한 막사에는 한 사나이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가 죽은 것, 이는 명의 배반 때문이었다. 만약 나의 아버지가 명의 출신에 벼슬아치였으면 어떠한 경우라도 구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죽어 가는 나의 아버지를 버려 두었다. 그것도 성을 함락하기 위해 선봉에 서서 적과 맞서 싸우던 나의 아버지를 그들은 헌신짝처럼 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는 죽음을 맞게 되었다. 그것도 전쟁터에서 죽은 것이 아닌 불명예스럽게도 불에 타 죽은 것이다. 이는 나의 아버지가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가!"

그는 널찍한 탁자에 홀로 앉아 자작(自酌)하고 있었다.

벌써 여러 순배의 술을 들었는지 이미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만은 하늘의 유성보다도 더욱 빛나고 있었다.

"나는 강자가 될 것이다. 아니 나의 후예들은 강자가 되어야 한다. 오로지 강자만이 살아 남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철저히 강자가 되어서 진정한 지배자가 될 것이다."

이렇게 힘을 주고 말하고 있는 사나이는 바로 누루하치였다.

그는 대해와 같은 야망과 그 무엇으로 채워도 채울 수 없는 포부를 지니고 있는 사내였다. 그는 이미 저 멀리 중원을 동경해 왔고 이미 그 곳을 향해 한 걸음 내딛은 상태였다.

이미 중원에 자객마저 보내놓은 상태였고, 황제와는 힘의 대결에 들어갔다. 어느 정도의 계략(計略)을 성공시켜놓은 상태였다.

대막은 서서히 그 모습을 일으키기 시작해서 곧 중원을 위협할 것이고 또한 무림은 중원과 황제를 극도로 혼란스럽게 만들어놓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과 조선은 이미 전쟁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

군막은 고요함에 휩싸여 있었다.

이때 누루하치의 앞에 한 사내가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는 무사인 듯 갑의를 걸치고 있었고, 그의 허리에는 어른 팔뚝만한 철봉이 매달려 있었다.

"주군, 우리의 자객이 실패했습니다."

누루하치는 느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응은 어떤가?"

"아무런 변화도 없었습니다. 황제는 여전히 집무를 보고 있다고 하며, 동창이나 서창, 영반 등에서도 작은 움직임 하나 없었습니다."

누루하치는 흥미로운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래? 그런데 손님들은 당도하였느냐?"

"예. 지금 밖에 대령해 있습니다."

"그래! 들어오시라고 해라."

사내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두 사내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는 조금 전 누루하치의 앞에 나타났던 사내였고, 다른 하나는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사내였다.

갸름하며 체구가 작았다. 또 얼굴은 하얗게 횟가루를 칠한 듯 보였다.

누루하치는 술을 들이켰다.

"살기가 너무 짙군."

누루하치가 친구에게 말하듯 가볍게 한 마디 했다.

"당신의 주위에는 모두 다섯 사람이 포진해 있소."

무슨 소리인가? 지금 누루하치의 주변에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네의 이름은?"

"하지모도 도가지, 히데요시님의 전령입니다."

"그래......."

그런데 분명 하지모도의 말로는 그의 주위에 다섯의 무사들이 포위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누루하치의 이 느긋함은 무엇인가?

게다가 하지모도는 뭔가 불안한 표정이었다.

"나를 죽일 셈인가?"

죽임의 위협을 받고 있는 누루하치의 표정은 너무도 무덤덤했고, 오히려 칼자루를 쥐고 있는 하지모도의 이마에서는 점점 굵은 땀방울이 맺혀가고 있었다. 그는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이는 우리 주군의 명이었습니다. 당신을 시험해 보라는......."

그러나 누루하치는 그의 말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 했다.

"그래, 이것이 동영의 인자술인가? 제법이군. 그러나 너희 섬나라의 무공 따위로 중원을 넘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순간 하지모도의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수치감으로 일그러졌다.

"그래, 풍신수길은 나에게 뭘 전하라 하였나?"

"주군은 이 상자를 저에게 주시면서, 당신의 주위에 단 한 명의 군사도 보이지 않으면 서찰과 함께 전해주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모도는 품에서 작은 상자 하나와 밀봉되어진 천 조각을 건넸다.

그런데 누루하치는 웃기만 할뿐 그 상자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우선 자네의 그 알량한 수하들이나 치우게. 나도 이 물건을 쓰기는 싫으니까."

누루하치는 자신의 검을 툭 치며 말했다. 하지모도의 얼굴에 다시 식은땀이 맺혔다.

"예."

그러자 다섯 명의 흑의인들이 모두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내더니 누루하치에게 읍을 해 보이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러자 누루하치는 웃으며 자신의 오른손을 흔들어 보였다.

"자네는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야."

누루하치의 손에는 눈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는 실이 걸려 있었는데 그 실은 이미 하지모도의 목을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실은 천잠사로 그 날카롭기가 세상 어느 것도 따를 길이 없어 바위도 자를 지경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누루하치가 아무도 모르게 이 실을 하지모도의 목에 걸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하지모도 역시 알고 있었던 듯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감사합니다."

하지모도가 감사의 인사를 하는 순간이었다.

누루하치는 하지모도의 목에 걸린 실을 잡아당기는 것이 아닌가? 문약한 서생인 하지모도의 목이 금방이라도 잘려 나갈 듯한 순간이었다.

휘익―!

그러나 바람소리와 함께 하지모도는 인사를 끝내고 서너 걸음 엎드린 자세 그대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이는 부양공(浮揚功)보다도 한 단계 위의 무공이었다.

앉은 것도 아니고 엎드린 자세 그대로 뒤로 물러날 수 있다니 범인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무공수위였다.

"이제 정체를 밝히셔도 될 터인데 끝까지 숨기려 드는군. 어떠신가? 풍신수길, 아니 히데요시라 불러야 하겠는가?"

너무도 놀라운 말이었다.

일본을 통일한 장본인인 이 풍신수길이 이역만리 타국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그는 당대 최고의 효웅들 중 하나가 아닌가?

하지모도는 누루하치를 향해 씩 웃어 보이며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원숭이를 닮은 우스꽝스러운 얼굴에 작고 왜소해 보이는 모습, 그러나 그와 반대로 폐부를 꿰뚫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이 드러났다. 그것은 그가 분명히 풍신수길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군. 어떻게 나를 알아 봤는지 가르쳐 주겠나? 나로서는 이번 변장이 아무도 못 알아볼 것이라 자부하는 최고의 작품이었거든."

"그거야 자네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세 때문이었지. 단순히 심부름을 할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고 할까? 그리고 그 눈빛은 아무나 보일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 아무리 얼굴을 가린다고 해도 무형 중에 뻗어 나오는 기운과 눈빛만큼은 가릴 수가 없는 법이지. 자신의 얼굴을 숨기고 나의 진영 안까지 발을 디딜만한 간담을 지닌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자네가 들어서는 순간부터 자네가 바로 풍신수길이라는 걸 눈치 채고 있었네."

"허허허허. 대단하시오. 그렇다면 온 이유도 알고 있겠구려."

누루하치는 풍신수길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이제는 조금쯤 마음을 서로에게 보여도 되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는 적이라기보다는 동지라는 것이 많지. 이 시대는 우리를 서로에게 의지하도록 만들고 있다네."

풍신수길은 너무도 친근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소.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소. 나는 대일본을 이룩한 후 많은 시달림을 당하고 있소. 나를 시기하는 자, 나의 권좌를 노리는 자들 말이오. 이번 전쟁을 정책적으로 이용할 것이오. 그러나 나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일으키는 전쟁은 아니오. 중국을 친다는 명분 아래 우린 조선을 정복하려는 것뿐이오."

누루하치는 작달막한 사나이,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거인보다도 커 보이는 이 사나이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왜 조선을 정복하려는 것이오?"

"조선인들은 대단한 혼을 지니고 있소. 물론 지금은 부패하고 철저히 타락했지만 말이오. 그 말도 안 되는 양반이란 족속들에 의해서 썩어 들어가고 있지만, 나는 조선이 두렵소. 그들은 언제고 우리 일본을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소. 그래서 생각한 것이오. 내가 먼저 그들을 철저히 지배하기로 말이오."

"그것이 아닐 텐데, 내가 알기로는 신흥세력의 힘이 커지자 당신은 대륙정복을 빌미로 국내를 안정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들었어. 아마도 이 기회를 이용해 국내의 적들이나 반대 세력들은 모두 제거되겠군."

"그런 측면이 있다는 것도 부정하지는 않겠소."

풍신수길은 당당히 수긍했다.

"그러나 내 진정한 목적은 조선의 기를 꺾자는 것에 있음을 알아두어야 할 것이오. 아마도 당신 역시 대단한 야망이 있을 테니....... 강인한 혼을 지닌 부족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누루하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조선을 가벼이 보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 예로 그가 지금 사용 중인 식기나 술잔 하나까지 모두 조선과 고려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순박하고 표현하지 않으며 절제되어진 그들의 문화를 보고 그 역시 묘한 불안감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들이 저력이 있기에 지금 당장은 어떨지 모르더라도 그들 나름대로의 문화를 가꾸었고, 이미 그것은 대단한 지경에 이르렀으리라.

그러나 정작 그들 자신들은 모르는 듯했다.

양반들은 그런 자신들의 문화를 업신여기며 착취를 했고, 이미 많은 부분이 그로 인해 사라지거나 제대로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럼 나에게 원하는 것은?"

풍신수길은 누루하치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군대를 막아주시오. 우리가 조선을 정복하면 그땐 당신들을 돕겠소. 당신에게도 조선이 껄끄러운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소. 만약 이대로 당신이 중원을 노린다면 틀림없이 조선과 명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오. 아직도 표면상으로는 조선이 황제의 훌륭한 신하이기 때문이오. 이점은 나보다도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누루하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깊어가고 두 사람의 밀담은 길게 이어졌다.

마치 수 년 만에 만난 친우를 대하듯 서로를 향한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친근하고 격식이 없었지만, 그들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서로를 향해 깊은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새벽 동이 터 올 무렵 풍신수길은 조용히 그곳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이들이 만났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 두 사람의 밀담에 관계한 모든 자들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               *               *

"나는 각기 사람에게 그 뒤를 따르는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군요. 그 그림자는 그 사람의 인격일 수도 있고, 욕망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욕심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풍신수길과 누루하치는 서로의 야망을 위해 뜻을 같이 했던 것이오. 나는 그 욕망의 그림자가 때로는 그 주인마저도 져버릴 때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청년이 말을 하자 그 앞에 앉아 있던 남궁선이 입을 열었다.

"인상적인 말이군요. 그리고 뼈가 들어있는 말이기도 하구요. 그렇지요. 그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 되든 그 결과를 떠나서 어느 쪽 한곳으로 치우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르기도 하는 것이기도 하구요.

또한 그로 인해 인생을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자신의 세력을 갖고 있고 그들 스스로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나름대로 남궁선의 말을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렇습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나의 얘기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옳지 못한 거래를 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끝 역시도 좋지는 않았구요."

"끝이 좋지 않았다니?"

"그들은 나중에 서로를 배반했습니다. 권력에 집착한 자들의 필연적인 결과였지요. 어차피 그들은 서로를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거든요. 서로를 이용해 먹기 좋은 상대로밖에 생각하지 않았겠지요."

"그보다 사마적을 떠난 호귀라는 자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졸고 있는 듯 보였던 중추신개가 게슴츠레 눈을 뜨며 말을 꺼냈다. 청년은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듯이 탄성을 터뜨렸다.

"아! 그렇군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빠뜨렸군요."

"그자는 사마적을 떠나서 남태천의 목을 베러 갔지. 우리는 거기까지 자네에게 들었네, 그 후는 어떻게 되었는가?"

남궁선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그러나 이내 잔잔히 가라앉았고, 그 모습은 너무도 차분하고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그렇지요. 호귀라는 자는 욱하는 성질은 있었어도 바보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기회만을 노리며 남궁세가의 주변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선 자객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암습을 감행하지는 않았고, 남태천과의 비무를 원했던 것입니다."

"비무라......."

"예."

중추신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답군. 그러나 그의 무공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무모해. 남태천은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인 아닌가? 정당한 비무라니 제정신이 아니구만. 그 당시만 해도 그는 이미 인간의 능력 범주를 벗어난 사람인데......."

"글쎄요. 길고 짧은 것은 대보아야 아는 것이지만 우선 그자는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기회라는 것을 잡게 된 것입니다."

*               *               *

스산한 바람이 단풍나무를 훑고 지나가자 나무의 잔가지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천공의 달빛은 두터운 구름 속에 갇혀 나올 줄을 모르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두텁고도 긴 담장이 늘어서 있고 그 담 안으로는 간혹 보초를 서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와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것으로 어느 정도 수련을 한 자라면 곳곳에서 은근히 배어 나오는 살기를 몸으로 느낄 수가 있을 것이었다.

이때 담장 위에서 어른거리는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 누가 감히 남궁세가의 위세에 도전하려는 것인가? 그러나 그림자는 예상과 달리 담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담 밖으로 나서는 것이었다.

이는 한밤중의 괴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 그림자가 담 밖으로 나서자 뒤를 이어 또 다른 그림자 셋이 그 뒤를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이 세 그림자는 몸놀림이 신중한 것이 마치 앞의 그림자를 미행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산그늘 속으로 몸을 숨겼을 때, 담의 한 귀퉁이가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이는 은신술로 담과 같은 색의 포대를 뒤집어쓰고 누군가가 담에 기대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 포대를 젖히고 나타난 사나이는 호귀였다.

"남태천, 그런데 남태천을 쫓는 저들은? 어쨌든 기회다."

호귀 역시 그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날렸고 이내 그의 몸 역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산의 중턱, 죽은 자의 묘가 군데군데 보이는 공터였다.

하지만 묘는 비바람에 씻겨 사라진 듯, 제대로 된 형태를 찾아볼 수 없었고, 단지 무성한 잡초와 공지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중앙에는 빈터를 지키듯이 겨우 형체뿐인 비석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 네 명의 사내들이 서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기이한 것이, 정 중앙에 한 사내를 두고 포위하듯이 세 사나이가 서 있었다.

그들 중 두 사나이는 검을 뽑지 않았고, 다른 한 사나이만 남태천과 대결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다른 사내들은 검을 뽑아 들고 서 있지는 않았지만 남태천을 둘러싸고 위협하듯 그렇게 서 있었다.

남태천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여유있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나를 이곳까지 불러낸 이유는 무엇인가?"

"총령의 명이다."

"호오?"

"그대는 총령의 믿음을 져버렸다."

"그래서? 자네 이름은?"

"흑사(黑蛇)."

"검은 뱀이라....... 멋있는 이름이군."

흑사는 말이 없었다. 다만 입가에 자신에 찬 미소를 흘릴 뿐이었다.

"시작할까?"

남태천은 사내의 미소를 의미 있게 바라보며 자신의 검을 고쳐 잡았다.

파악―!

남태천의 검이 허공을 가르자 흑사라 칭한 사내는 가볍게 뒤로 일보를 물러섰다. 아슬아슬하게 남태천의 일검을 피해낸 사내는 왜인지 반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휙―! 휘익―!

허공을 가르는 검음(劍音)이 날카롭게 울렸고 순식간에 십 초식이 시전됐지만, 남태천은 흑사의 몸에 단 하나의 검흔조차 남기지 못했다.

남태천은 검을 거두어 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군. 네놈들이 누군지 이제야 알겠다."

"그래?"

흑사는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흥! 네놈들은 총령의 그림자, 흑상제(黑上帝)라 불리는 삼인방이다."

흑사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하하, 너야말로 정말 대단하군. 우리는 여태껏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었는데도 우리를 알아채다니."

"당신의 무공을 보고 알았지. 당신의 무공이 무슨 이름인지는 모르겠으나 주로 방어위주의 무공이 대부분이더군. 이는 자네들이 누군가의 호위나 보호를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 그리고 또 다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상대하려고 사람을 보내는데 겨우 세 사람이라는 것은 그만큼 당신들의 무공을 총령이 믿고 있다는 것이 아니겠나? 그렇다면 당신들이 누구라는 것은 손에 잡히듯 뻔한 것이지."

그러자 세 사람은 마치 약속이나 하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도 기괴하고 서늘한 웃음소리였다. 듣는 이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웃음소리는 꽤 오랜 시간동안 이어졌다.

"크흐흐! 그렇다. 장난은 이제 그만두어야겠군. 우리는 너를 죽일 것이다. 나는 자신한다. 우리 세 사람이 합공을 하면 죽지 않을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자아, 우리의 합공을 받아 봐라!"

남태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셋이든 열이든 덤벼라!"

"대단한 자신감이군."

흑사의 말이 끝나자 남태천과 조금 떨어져 있던 두 사내들은 검을 뽑아들며 남태천을 사방에서 포위했다.

이는 조금 전과는 다른 기세였다.

그저 단순히 둘러싸는 것과는 달리 무형의 기세로 남태천을 압박하고 있었다.

삼면에서 둘러싼 그들은 남태천의 허리와 머리, 그리고 가슴을 겨누며 둘러싸고 있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흥! 나를 우습게 본 모양이군. 그렇게까지 자신할 입장이 아닐 텐데."

파악―! 

남태천의 몸이 솟구치는 순간, 남태천의 몸은 그들의 공격권을 벗어나 허공에 삼 장이나 떠올랐다. 그러자 삼 인 역시 남태천의 몸을 노리며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허공에 머물렀던 남태천이 다시 빙글 몸을 돌리더니 이번엔 아래로 쏘아져 내려왔다.

그러자 갑자기 뇌성이 일었다.

우르릉―!

남태천이 검을 휘두르자 검영은 순식간에 삼 인을 압박해 왔다.

이 초식은 일검경천(一劍莖天)이라는 초식으로 진력 낭비가 많은 초식이었다.

이는 검의 기교보다는 기세와 진기만으로 상대를 압도해 나가는 것으로 필살의 경우가 아닌 다음에는 사용하지 않는 초식이었다.

그런데 남태천은 초반부터 무리한 공격으로 상대를 제압하려 하는 것이었다. 재빨리 승부를 내고 싶은 욕심이었다.

하지만 이들 역시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막 튀어 올랐던 세 사내들은 퉁겨 나가려던 자신의 몸을 뒤집으며 남태천의 강공을 피했다.

슈각―!

그러나 완벽히 피할 수는 없어 그들은 가슴과 허리에 약간의 철과상을 입어야만 했다.

하지만 공격이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 찰과상 정도로는 전력에 전혀 손실을 줄 수 없었다.

"받아라."

남태천은 자신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벽력 같은 소리를 지르며 한 사내를 향해 몸을 틀었다.

파아악―!

남태천이 검을 한 번 털자 검은 마치 먹이를 쫓는 뱀처럼 날카롭게 사내를 향해 날아갔다.

"끄르륵......!"

사내는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처럼 묘한 소리를 흘리며 몸을 비틀었고, 그와 동시에 사내의 손이 퉁겨져 나왔고 남태천의 검과 맞부딪쳤다.

검광이 번뜩이며 십여 합이 흘렀지만 상대는 남태천의 검을 교묘하게 피하며 이리저리 몸을 틀어서 서로 어떤 상처도 주지 못하고 있었다.

남태천은 세 명의 사내들을 상대하면서 잘 버티고는 있었으나 삼 인을 다 상대하기란 역시 버거웠다.

시간은 어느덧 많이 흘러 인시(寅時)가 다 되어가고 있었고, 남태천은 삼 인을 상대로 벌써 천여 합을 나누고 있었다.

남태천이 지친 듯 검을 막다 뒤로 밀리는 순간이었다. 등뒤에 서 있던 흑사가 남태천의 등을 노려갔다. 그리고 흑사와 공격을 같이하여 또 다른 흑의인 하나가 남태천의 발목을 베어갔다.

"죽어라."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파아악―!

이기어검(以氣馭劍)의 수법으로 날아온 검이 순간 방심한 사이 흑의인의 몸을 관통했다.

커억―!

흑의인은 마치 활시위를 떠나는 화살처럼 퉁겨나갔다. 그리고는 손가락 한 번 꿈틀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웬놈이냐?"

그 순간 소리치던 흑의인의 자세에 미세한 흐트러짐이 있었다. 남태천에게 틈을 보인 것이다.

"좋다."

남태천은 벽력 같이 소리를 지르며 흑의인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며 반달모양의 검영(劍影)을 남겼다.

파악―! 쫘아아아앙―!

그리고 흑의인은 단 한번의 실수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양단 되어 죽었다.

순간 흑사는 등뒤가 섬뜩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얼음 굴에 떨어져 내린 듯한 느낌이랄까? 돌아서는 순간 그의 등뒤에 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그는 그 사내를 보는 순간 자신의 이름이 무색해지는 것을 느꼈다.

검은 뱀, 그를 보자마자 흑사가 생각한 것은 사내가 뱀을 닮았다는 것이다. 먹이를 노리는 살모사의 눈을 가진 사내는 섬뜩함을 벗어나 차가움이 느껴졌다.

그림자 속의 사내의 눈은 푸르스름한 안광을 머금고 있었다. 흑사는 자신의 생각에 실소를 머금으며 눈으로 상대에게 묻고 있었다.

'어째서 우리를 방해하는 것이냐?'

그런 그의 앞으로 다가선 사내는 호귀였다.

검은 무복을 입고 낡은 천조각으로 둘둘 말아놓은 검을 든 채 흑사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호귀는 차가운 눈으로 흑사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너무 아쉬워 할 필요 없다. 저자는 나를 불러내기 위해 자네들과 잠시 놀았을 뿐이니까. 애초 너희의 상대가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흑사는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에 뭐라 항변을 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이었다.

파악―! 컥―!

등뒤에 서 있던 남태천이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 흑사는 남태천의 발길질과 함께 삼사 장 밖으로 밀려나 절명해 버렸다.

"역시 마교의 인물답군. 등뒤에서 암습을 하다니."

호귀는 남태천을 노려보며 말했다. 남태천은 여유있게 웃었다.

"괜한 힘 낭비를 할 필요는 없지 않나?"

호귀는 말이 없었다. 단지 남태천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작렬하는 듯했다.

"딴은 그렇군."

남태천은 마치 친구를 앞둔 것처럼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 년이었나?"

호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 년 전부터 나는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지. 비록 그것이 누구인지, 어디였는지는 몰랐지만 몹시도 신경에 거슬리더군. 그런데 지난 일 년동안 시간이 지날수록 그 느낌은 더욱 강해지더군. 그리고는 지난 몇 달간은 공공연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까지 했다. 나는 그것을 나에게 도전하는 것으로 해석했네만. 자신 있다는 뜻이겠지?"

호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서 오늘은 나 역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대를 불러낸 것이다. 이자들이야 그 핑계에 불과했지."

남태천은 검을 고쳐 잡았다.

"그럼 시작할까?"

남태천은 조금 전과는 사뭇 기세가 달랐다. 호귀 역시 긴장하며 전신의 진력을 끌어올렸다.

스르릉―!

남태천은 경쾌한 소리와 함께 검집에서 검을 끄집어냈다.

"그런데 나는 자네가 왜 나를 죽이려 하는지 이유조차 모르는군. 나를 노리는 이유 정도는 가르쳐줄 수 있겠지?"

호귀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너는 내 주인을 죽였다. 우리 자객들의 피에 대한 율법은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

남태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홍화객의 졸개인가?"

호귀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다만 자신이 잡고있던 검집을 바닥에 버렸을 뿐이었다. 이는 필살(必殺)을 다짐하는 무언의 행동이었다.

적을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겠다는 뜻이 담겨있었다.

휘이잉―!

한줄기 바람이 일었고 바람은 달을 구름 속에 가둬버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장애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이미 어둠을 초월할 정도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파악―!

공격은 남태천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

신룡출격(神龍出格) 신법으로 삼여 장을 단숨에 뛰어 오른 남태천은 달마십삼검(達磨十三劍)의 제일식 허식분금(虛式分金)과 제이식 금강복호(金剛伏虎), 제삼식 금륜도겁(金輪渡劫), 제사식 부구포수(浮丘抱袖), 제오식 홍애지편(洪崖指扁), 제육식 회두시안(回頭是岸), 제칠식 횡강비도(橫江飛渡), 제팔식 행공전운(行空展雲), 제구식 해천무종(海天無踪)에 이르기까지 총 삼백여 초를 순식간에 펼쳤다.

창―! 채재쟁―!

따앙―!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은 두 사람의 눈빛과 검영뿐이었다. 그리고 들리는 건 검음들 뿐이었다.

*               *               *

"그리고 호귀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은 없으실 테지요."

남궁선은 야릇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자신의 사촌인 남태천의 이야기가 나오는데도 시종 담담한 모습이었다.

청년의 말대로라면 남태천은 영웅이 아닌 배신자이며 중원의 적도인 것이다.

그런 말이 나오고 있는데도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고,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재미있는 것은 쌍마령이었다.

그들은 본시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으면 서슴없이 살인을 하고 다니기에 객점 안의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인지 휘지와 휘소의 주변 탁자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추정호는 그들을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객점 안의 손님들은 중추신개와 추정호, 흑의인, 그리고 청년과 남궁선을 따라온 몇몇의 하녀들과 무사들, 그리고 표옥자뿐이었다.

청년은 탁자를 두 손으로 탁 치며 일어섰다. 순간 표옥자와 추정호가 긴장했다.

"이거 실례하겠습니다. 소피가 급해서 화장실을 다녀오겠습니다. 주인장!"

청년이 부르자 주인장은 손에 등을 들고 나타났다.

"아이고, 안내까지 맡아주셔야 하다니. 이거 너무 황송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 아니 뭘......."

주인은 순간 당황한 듯 더듬거렸고, 남궁선과 추정호 역시 긴장하는 듯 보였다. 청년은 그런 그들을 힐끗 보고는 재미있다는 듯 미소지었다.

"쿠쿡! 주인장도 수고가 참 많으시오."

그리고 청년과 주인이 막 밖으로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쌍마령중 휘지가 막 문을 나서려는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피해!"

남궁선의 입에서 고함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청년은 제비가 날아오르듯 몸을 허공으로 솟구쳐 한 바퀴 돌고는 제자리에 내려섰고, 주인장은 뭔가에 걸렸는지 허우적거리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파바박―!

둔탁한 소리와 함께 종잇장 보다도 얇은 비수가 문가에 박혔다.

"아니 저자들이?"

추정호는 자신이 들고있던 단검을 꺼내려 했다. 그러자 중추신개가 추정호의 손을 잡았다.

"저들은 살의를 일으키지 않았네. 단지 청년의 무공을 시험해 보고 싶었을 뿐이었겠지."

청년은 쌍마령에게 포권을 해 보였다.

"저에게 좋은 선물을 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는바 없다는 듯이 다정하게 서로를 어루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청년이 나가자 중추신개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저 청년은 대단한 무공을 익혔군. 그 신법만 봐도 그의 무공수위가 화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겠어."

그러면서 흑의인을 힐끗 쳐다봤다. 그러나 흑의인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자는 것인지 아니면 뭔가를 생각하는 것인지 시종일관 그 자세로 앉아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지리한 시간이 흘렀다. 청년이 돌아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럼 다음 이야기를 시작하죠. 제가 어디까지 했습니까?"

"호귀가 죽는 부분까지 했네."

"아!"

청년은 이마를 탁 쳤다.

"그렇군요. 그럼 그 부분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호귀는 죽었습니다.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중원은 전운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이로써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제18장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임진년(壬辰年) 사월(四月) 십이일(十二日).

대혼란의 징후는 중원과는 떨어진 곳에서 시작되었다.

대마도. 바람 한 점 없는 바닷가는 안개마저 짙게 끼어 한 치 앞도 바라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게다가 사월의 날씨는 겨울바람이 가시지 않아 아직 쌀쌀하기만 했다.

장병들은 벌써 한 시진을 이곳에 서 있었다.

안개에 젖은 몸이 으스스하게 떨려올 즈음, 히데요시는 부장들을 이끌고 모습을 드러냈다.

원숭이 얼굴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부하들에게 조선 출정의 명령을 내렸다.

"각자 맡은 부서와 그 예하 병력을 보고하라."

도요토미의 명령은 추상과도 같았다.

"선봉 대마도주 무네(宗) 병력 오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병력 칠천!"

차례차례 점검을 끝낸 히데요시가 십오만여 명의 장병들 앞에 섰다.

그들에게서는 묘한 긴장감이 일고 있었다.

"우리는 저 넘어에 있는 조선을 칠 것이다. 천황폐하의 명예를 걸고서라도 우리는 저 반도국을 우리의 영토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발판이 될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명(明)이다. 우리는 내일 아침을 부산성에서 먹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의 영예이자 행운인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목소리가 바닷가를 쩌렁하게 울렸다.

"출군하라!"

그의 출군 명령이 떨어지자 십오만 명의 장병들이 일사불란하게 배로 승선을 했다.

전장의 첫 징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첨사 정발(鄭撥)은 전날 사냥을 떠났다가, 짙은 안개로 인해 돌아오지 못했었다. 그래서 이날 새벽에야 돌아오려는 중이었다.

그런데 뱃머리에 서 있던 부하가 갑자기 소리쳤다.

"사또! 저기, 저게 뭡니까?"

"아니 저건!"

정발이 본 것은 수천이 넘어 보이는 선단이었다. 배가 몰려오는 곳은 동쪽만이 아니었다. 동쪽에도 남쪽에도 온통 배로 뒤덮여 있었다.

정발은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며 머리가 쭈뼛 서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빨리 빨리 배를 몰아라. 부산으로 돌아가야 한다!"

정발은 뱃전에 올라서며 발을 동동 구르며 호령하였다. 그러나 물은 썰물이었고 그에 의해 배의 속도는 더디기 그지없었다.

정발은 배가 항에 닿자마자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성을 향해 달음질쳤다.

조선국 부산포에서 김첩(金帖)은 망루에 올라 졸린 눈을 비비며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옘병, 이놈은 왜 이렇게 안 나오는겨, 졸려 죽갓구마는."

옆에는 이생민(李生民)이 창대(槍坮)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교대에 늦는 동료들을 탓하며 뭐라고 궁시렁거리던 김첩은 전방 바다를 보다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응? 저, 저, 저게 뭣이랴?"

안개로 뿌옇던 바다에 무수히 많은 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뭐, 뭔데 그란디야?"

졸던 이생민이 그의 목소리에 놀라 깨어서는 아직도 졸린 목소리로 투덜댔다.

막 일어나려는 그의 귓가에 김첩의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저, 적이다. 적이 쳐들어 왔다!"

성이 한참 소란스러울 즈음, 첨사 정발은 땀에 흠뻑 젖어 성문에 도착하며 외쳤다.

"성문을 닫아라. 적이 쳐들어온다."

수만 명의 일본군들이 부산포구에서 벌떼처럼 몰려오는 것을 바라보는 정발의 얼굴은 절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로써 칠 년간을 끌었던 임진년 왜란이 발발하게 된 것이었다.

*               *               *

멀리 바다 끝에서 태양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수평선 끝에서 검은 점이 점점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내 배의 형상으로 바뀌어 해안가에 닿았다.

멀지 않은 곳에 부산포가 자리한 이곳에서는 연기가 치솟는 것이 보였다. 간간이 포 소리와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묻혀오고 있었다.

뱃전에는 한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무복차림의 사나이는 정좌를 한 채 해안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가? 사내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무심(無心)의 경지조차도 뛰어넘은 자의 눈빛이었다.

그는 불과 일 년 전 이 해안을 통해 일본으로 들어갔었다. 수십 일을 굶주리고 죽음과 싸우며 간신히 일본에 들어갈 수 있었고, 일 년이라는 시간을 한 무사 가문의 가신이 되어 전장에서 보내야 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이곳 해안에 발을 디딘 것이다.

그는 백천우에 의해 쫓겨 두만강을 건너야 했던 사나이 묵천이었다.

묵천이 뱃전에서 해안가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조장, 주군의 전언입니다."

무사 하나가 품속에서 서찰 하나를 건넸다.

묵천은 서찰을 받아 펼쳐 보았다.

<시다. 자네는 나와의 약속을 훌륭히 지켰다. 이제 그대가 나와의 마지막 약속을 지킬 때가 되었다. 부디 완수하기 바란다. 무운을 빌겠다.>

"주군에게 전하라. 약속은 이행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무사는 배를 돌려 멀어져 갔다. 묵천은 멀리 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중원이 있었다.

어떤 미련도 남지 않은 곳이었지만 자신의 사부가 묻혀 있고 그리고 한 여인의 추억이 있기 때문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곳을 바라본 것이다.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묵천에게는 그가 아니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중원을 향한 그의 일보는 시작되었다.

*               *               *

자금성 태화전.

멀리서 자정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건물의 앞에 있는 대리석 경사로의 조형물들이 마치 전(殿)을 지키는 경비무사들처럼 달빛에 반짝이며 서 있었고, 간혹 궁을 지키는 경비무사들의 발걸음 소리만이 들리는 적적한 밤이었다.

이곳은 황제와 중신들이 정사를 논하는 곳으로 낮에는 서로의 견해를 말하는 중신들로 인해 부산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그들이 물러간 이 시간에는 쥐죽은듯 고요했다.

그런데 이 늦은 시간에도 태화전의 불은 꺼질 줄 모르고 있었다.

"황상, 더 이상 지체하실 틈이 없습니다. 그들은 지금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리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을 이대로 놓아두신다면 훗날 큰 화근이 될 것이옵니다."

대장군(大將軍) 천위성(天胃星)이 황제 보좌 아래 엎드려 있었다.

황제 보좌에는 만력제(萬曆帝) 신종(神宗) 주익균이 불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에게서는 정무(政務)에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황상."

천위성이 황제의 결정을 재촉하고 있었다.

"대장군(大將軍), 당신의 뜻은 잘 알고 있소. 나 역시 그를 치고 싶지만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여력이 없지 않소? 조선에서 일어난 왜란을 막기 위해 군사를 요청하였소. 군신간에 그들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거기에 우리에게는 누루하치를 칠만한 명분이 없지 않소."

대명의 절대자인 황제의 음성에는 비통함이 어려있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슨 복안이라도 있는가?"

"그렇습니다."

"무엇인가?"

"자객을 보내 누루하치를 암살하는 것입니다. 암살하는 것은 명분이 필요치 않을 뿐더러 그들의 기세가 약해질 것입니다. 머리 잘린 뱀이 될 테니까요."

"자객을?"

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주익균이 입을 열었다.

"가능하겠는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주익균은 보좌에 깊숙이 앉으며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드디어 주익균이 입을 열었다.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자는 있는가?"

"제가 보아둔 장수가 한 사람 있습니다."

"그 자를 내 곁으로 데려오도록. 은밀히!"

"예, 알겠습니다."

천위성이 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황제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음!"

황제의 입에서는 낮은 탄식성이 터져 나왔다. 황제의 근심과 함께 태화전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것이었다.

태자전의 아래에 자리한 지하 궁에서는 또 다른 황제가 용상에 앉아 있었다.

황제의 앞에는 십여 명의 무사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앉아 무언가를 일일이 보고했다. 황제는 눈을 감은 채 그들의 보고를 듣고만 있었다.

좌측 끝에 앉아 있던 무사가 몸을 일으켰다.

"일본이 부산포를 점령했습니다. 병사 총원은 십오만이며,  본토에 대기중인 병사는 이십만이고, 군선 오천 척과 함선 팔천 척이 유동 중입니다. 서울에 입성은 대략 오십일 정도의 시일이 소비될 것으로 예상되며 지금의 상태로 라면 이백 일 안에 조선을 점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 옆의 무사가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조선의 왕은 평양으로 피난 중입니다. 부산포가 함락되고 조선의 중신들의 의견이 엇갈렸으나 그후 급히 피난을 결정했습니다. 조선의 백성들은 왕이 성을 떠나자 궁궐을 불태웠고, 학자들의 통곡성이 성 안을 가득 메웠다고 합니다."

그 사내의 말이 끝나자 이번엔 옆의 사내 역시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누루하치는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진영은 쥐죽은듯 고요하며 요소에 배치되어 있던 군사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그의 진영 안에는 노병과 병든 군사들밖에는 없었습니다. 기밀문서와 모든 병서들은 완벽하게 소각되었으며 그들의 흔적은 중원의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달단의 풍야후는 걸어 두었던 검을 갈고 군사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는 팔 할 이상의 군세를 정비했고 이미 많은 수의 군사들이 국경선 부근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십인의 보고가 차례로 이루어졌다.

"마교의 총령은 움직임을 자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직 어떤 징후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의 처소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교의 동향이 한 사내의 입에서 읊어지자 황제는 눈을 떴다.

"됐다. 다음 지시를 기다리도록."

열 사람이 모두 물러나자 대전 안에는 황제 홀로 남아 있었다.

그의 입이 열렸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나?"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가? 황제는 마치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말하듯 입을 열었다.

그러자, 아무도 보이지 않던 황제의 앞에 한 사내가 나타나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는 남태천이었다.

중원을 움직이는 두 사람의 절대자가 이 야심한 밤에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잡초는 그 뿌리를 제거하는 수밖에는 없는 법이오."

"그래, 방법은?"

"특별한 자들을 보내는 것이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객을 말하는 것이군. 하책(下策)은 아니지. 그러나 상책 역시 아닌 것 같은데?"

남태천은 고개를 저었다.

"상책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 상황에서는 가장 효율적(效率的)인 방법입니다."

황제와 남태천의 눈이 마주쳤다.

"좋아! 그러지. 자네는 어떤가? 자네의 계획대로 잘 진행되어 가고 있는가?"

"그렇소이다."

"그러면 자네만 믿겠네."

"그럼."

남태천의 몸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다.

"무저갱과 같은 자로군. 한번 발을 잘못 딛으면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황제는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               *               *

대산(大傘)은 말 그대로 큰 우산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는 마을 북쪽에 자리한 큰 산이 마치 거대한 우산을 엎어  놓은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산을 대산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대산이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산만 넘으면 바로 달단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이 마을은 총인원이 삼십 명도 안 되는 마을이었지만 국경이 되어버린 이후 군대가 들어오면서 그 수백 배의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그후 이 대산은 이름 그대로 거대한 마을이 되어버렸다.

툭! 타닥―! 후두두둑―!

풍야후의 발끝에 걸린 작은 돌 조각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풍야후는 산 아래의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낮임에도 흥청거리는 마을과 사람들, 그리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국경수비군의 모습이 마치 바로 앞에다 늘어놓은 듯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풍야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태한 족속들이군."

풍야후의 앞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자리하고 있었고 풍야후는 순간 비틀만 해도 떨어질 듯한 아슬아슬한 자세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풍야후의 등뒤로는 삼십여 명의 무장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내들의 몸에는 은빛이 찬란한 막불(刀劍)과 무기들이 들려 있었고, 전신을 손톱 한 조각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촘촘하게 지어진 목의(木衣)로 감싸고 있었다.

풍야후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오늘은 저곳에서 점심을 먹겠다. 우리는 천명(天命)을 받아 싸우는 바 적을 두려워 할 것 없다. 게다가 저들을 보라. 술에 절은 저들은 이미 군인이 아니다. 쳐라!"

"와아아아!"

벌떼와 같다는 말이 실감나는 모습이었다.

가파른 산에서 마을까지는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되지 않았다.

수만 명의 병사들이 함성과 함께 미친 듯이 산 아래로 진격해 내려왔고,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만으로 지축이 흔들리는 듯했다.

사람들이 움직이자 마치 대산이 옷을 입고 있는 듯 서서히 산은 사람의 옷으로 뒤덮여갔다. 그들이 움직이자 마치 산이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쳐라. 죽여라! 우리는 기름진 대지를 원한다!"

"크하하하. 중원의 계집을 안아볼 수 있게 되었구나."

"와아―! 와아아아―! 우리의 숙원이 드디어 이루어지는 구나."

"우리 동료들의 복수를 하자!"

무사들은 그야말로 피비린내에 미쳐있었다. 보이는 것들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죽이려 했다.

여인들은 겁탈 당하다 죽었으며 어린아이들은 군사들의 발길에 채여 절명했다.

달단의 무사들은 복수라는 명분 아래 한 마을을 철저히 짓밟았고, 그들이 지난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태풍이 몰아친 자리와 같았다. 아무것도 없는 절망의 대지였다.

그렇게 대혼란의 또 다른 징후가 중원의 한쪽 끝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               *               *

주익균의 앞에 선 한 사내가 무언가를 읽으며 연신 보고하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이미 그 마각을 드러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벌써 여러 번 조선에 가신들을 보내었고, 대마도주는 조선에 공공연히 상호보호조약을 요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자신들과 손을 잡아 우리 명을 치자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이미 그 수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의 군사들이 비밀리에 대마도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주익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서서히 그들이 속셈을 드러내기 시작했군. 내가 조사하란 자들은?"

"예. 모두 서른세 명이 명단에 올랐습니다. 그 중 출신 성분이 의심스러운 자들을 제외하고는 세 명이 남습니다."

"음! 그래. 명단을 줘보게."

주익균은 서찰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응?"

그러다 한곳에 눈이 멈춰 섰다.

"이 자로 해야겠다."

사내는 황제의 손에서 명단을 받아 들었다.

"예, 이 자의 이름은 막불이란 자로 불산 출생입니다. 가족은 부인과 노부모가 아직 불산에 살고 있고, 모두 생존해 있습니다. 이자는 스물하나에 군인이 되어 이제는 단주급의 지위를 갖고 삼 년 전 사막대전에서 크게 부상을 입은 후 제대했습니다. 그후 그는 낙향해 부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자객이나 암살에는 천부적이라 할만큼의 능력을 보여 모두 서른두 번의 임무를 완성했습니다."

"그보다 특이할만한 사항이 있더군."

"무슨?"

"그자는 무려 열세 번의 전투에 참가해 모두 살아 돌아 왔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도 그 중 세 번의 전투는 그를 제외한 모든 자들이 전멸했음에도 말이야. 그를 조사해 보도록 하게. 적의 암살을 우리 군인이 아닌 자객들에게 맡길 수는 없지 않는가? 우리 군부와 내 체면을 생각해서 말일세."

"예, 알겠습니다."

*               *               *

태양의 열기가 지면을 태워 풀 한 포기 자리하지 못하는 열사의 땅에는 바람이 불면 여태껏 없던 모래언덕이 새로 생기기도, 사라지기도 했다.

이는 자연이 만들어내는 신기였다.

인간으로서는 거역할 수 없는,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절망과 경외감을 느끼게 하는 광경이었다.

휘이잉―!

바람과 함께 모래먼지가 피어올랐다.

대지를 감싸 쥐듯이 훑고 지나는 바람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듯이 허공에서 사라져버렸고, 그로 인해 한 차례 모래먼지가 허공을 맴돌다 사라졌다.

그런데 그 모래바람은 붉은 빛이 아닌가? 햇볕마저도 이 혈사(血砂)에 휩쓸려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회오리가 일자 모래바람은 마귀가 환생이라도 하는 냥 하늘에 한 차례 피어올랐다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그 붉은 모래들 사이로 무엇인가가 삐죽 삐죽 솟아올라 있었다.

그것은 창의 끝이었다. 사람의 손발, 혹은 갈기갈기 찢어진 몸뚱이도 보였다.

피가 엉겨붙어 있는 손과 발, 인간의 육신이었을 토막들, 그리고 육신의 일부분들에서는 아직도 응고되지 않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는 이 시신들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왜 우리는 죽어야 하는가? 스스로 태어나지도 못한 채 살다가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해야 하는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원초적인 질문들이 터져 나올만한 풍경이었다.

이 모래는 인간의 피가 만들어낸 혈사(血沙)였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바람이 불자 지면 위에 솟아있던 물건들이 하나 둘 모래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모래 속으로 모든 것이 묻혀버렸을 즈음, 모래를 뚫고 솟아 나오는 것이 있었다.

분명한 손이었다. 손마디가 보이고, 손바닥이 보였으며 팔꿈치가 나왔다.

그리고 어깨가 나왔을 때 모래가 파헤쳐지면서 한 사람이 모래를 뚫고 나왔다.

"푸악...... 켁! 켁!"

한참을 입에서 모래를 게워내던 막불(屠劍)은 멍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방은 온통 붉은 모래 투성이었다. 보이는 거라곤 전부 사막, 그리고 널브러져 있는 시체가 전부였다.

막불은 피로 얼룩진 갑의를 입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도 피와 모래가 엉겨붙어 친인척이 봐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엉망이었다. 붉게 충혈된 눈, 산발이 된 머리칼, 바짝 마른 입술, 무엇 하나도 그를 정상이라고 증명해줄 것은 없는 듯했다.

그가 어떤 자인지를 보여주는 것은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이었다. 그의 팔에는 반 토막 난 검이 들려있었다.

그 역시 이곳에서 피를 뿌리며 싸운 자였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막불의 눈에는 두려움과 절망이 어려있었다.

"무천, 휘진, 석두, 판휘."

그는 주문이라도 읊어대는 냥 중얼거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미친 듯이 모래를 파헤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두 손으로 파헤치다 잘 되지 않자 부러진 칼 조각으로 모래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팍! 팍팍팍!

그러나 대해를 한 줌 퍼낸다고 표가 날 리 있겠는가? 자신의 동료들의 시신을 이 사막의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막불의 온몸이 땀으로 후줄근하게 젖어왔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마치 미친 인간 같았다.

휘이잉―! 휘이이잉―! 

한 차례 바람이 불자 그의 모든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모래가 날아들어 그가 파 들어가던 구덩이는 다시 메워져 버렸다.

그의 수고가 허망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털썩!

막불은 모래 위에 망연자실해 주저앉아버렸다.

십 일이었다.

지옥 같던 그 전쟁은 십 일간 이어졌다. 그것은 무자비한 살육이었고 도살이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전쟁이었다.

'나의 동료들은!'

저기 어딘가 모래 속에 지금도 자신의 동료들이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막불은 다시 모래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쪽 모래밭에서 무언가가 기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사람이었다.

막불은 그곳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족히 몇 시진은 달리고 있는 듯 더디게 느껴졌다. 오히려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무천일까? 아니야 휘진 일거야 그는 강인하니까.'

갑자기 석두의 장난스러운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와 술을 나누던 동지들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러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막불의 눈에는 분노의 불길이 일었다.

이미 죽어가던 상대방의 눈에서도 절망의 그늘이 어렸다.

"아아아...... 아......."

그의 입에서 절망의 소리가 나왔다.

어디서 기운이 났을까? 그자가 적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막불은 반 토막의 검으로 적군 사내의 가슴을 찔러댔다.

그에게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올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저 단순하게 미친 듯이 찌르는 동작만을 반복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선혈이 흐르고 살 조각이 검에 묻었으며, 뼛조각이 튀었다.

끄르륵―!

겨우 숨만을 쉬던 사내는 기묘한 소리를 내면서 숨을 멈추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막불은 그의 가슴을 반 토막 짜리 검으로 다시 헤집기 시작했다.

그러다 멈칫하던 막불은 사내의 가슴에서 아직도 덜렁거리던 심장을 두 손으로 잡아뜯어 이로 물어뜯다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리고는 발로 짓이겨댔다.

누가 봤다면 진저리를 치며 도망갈 악귀의 모습이었다.

"아...... 아......으아......으아아―!"

그의 목소리는 늑대의 포효처럼 사막의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               *               *

"헉."

막불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빌어먹을! 또 꿈이었어.'

요 근래에 들어 젊은 시절 대막에서 적들을 소탕하던 것들이 꿈으로 자꾸 비쳐지고 있었다.

유일한 생존자였던 자신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먼저 보낸 동료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그 때의 일이 한 번도 잊혀진 적이 없었다.

때로는 동료들에게 쫓기기도 하고, 때로는 이처럼 자신 혼자 살아 남았다는 자책감으로 괴롭기도 했다.

옆에서 자던 성숙랑(成肅浪)이 막불의 팔을 잡으며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안 좋은 꿈이라도 꾸셨어요?"

막불은 걱정스러운 아내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냥 자구려. 내일 황제를 뵈러 갈 생각을 하니 걱정돼서 그런 모양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쁜 일은 아닐 테니........"

막불은 아내를 다독거려 재웠다.

"그래, 그래야지."

막불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밖에는 어느새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우리는 누군가가 사는 모습에서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 금, 은, 보석이나 또는 작은 물건들로도 한 사람을 평가하고 그의 능력을 재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눈에 보이는 그런 것이 정확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중 그 사람의 작은 부분들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생활하는 방을 보면 알 수 있다.

방의 구조나 가구의 배치, 아니면 그 사람이 주로 사용하는 집기 등을 통해 그가 정갈한 사람인지에서부터 그가 꼼꼼한 사람인지 아닌지, 혹은 성격이 난폭한지 그렇지 않은지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막불이 서 있는 이 방은 그런 면에서 조금은 애매했다.

황궁은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결코 그들의 것은 아니다.

오직 한 사람, 황제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아침 저녁으로 청소를 해대고, 정리하고, 정돈하고, 손질하기에 황제가 지나는 곳에서는 먼지 하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곳은 황제의 침실임에도 불구하고 먼지가 뿌옇게 내려앉아 있었다.

이유인 즉은 황제가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많은 내관과 시비들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

본시 황궁에서는 황제가 사용치 않는다 하더라도 매일 그곳을 담당하는 자들이 손을 보게 되어 있는 것일 텐데 말이다.

그런데 이곳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것은 황제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명령은 이곳에 드는 자는 이유를 막론하고 참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로부터는 이 황궁의 중앙에 자리한 이 건물만이 유독 폐허 아닌 폐허가 되어버렸다.

누가 감히 황제의 명을 거역하겠는가?

황제의 명을 거역하는 것은 바로 반역에 해당하는 행위였다.

그런 이곳에 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사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지도, 그리고 기웃거리지도 않았다. 다만 묵묵히 서서 앞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때였다.

"그대가 막불이라는 자인가?"

사내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헉―!"

"난 자네를 보고자 한 사람이라네."

순간 막불의 얼굴은 긴장으로 딱딱히 굳어졌다.

"만세, 만세, 만...... 만세....... 황제폐하, 막불 인사 드리옵니다."

그는 전날 한 군병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었다. 뜬금 없이 찾아온 군병은 황제의 옥새가 찍힌 서찰을 전하고 사라졌다.

그 명은 아침 일찍 자금성의 북문(北門)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막불은 그 명을 어길 수 없어 그대로 따랐고, 북문에 도착하자 한 사람이 그를 이곳에까지 안내해 주었던 것이다.

정작 이상한 일은 그가 이곳까지 이르는 동안 단 한번도 누구의 검문이나 물음도 받아 본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개미 새끼 하나 마주치지 못했었다.

본시 황제를 배알할 때는 여러 가지 절차가 필요하다.

의복을 입어야 하며 황제 앞에서 해야할 예식 등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의 신분과 출신을 조사하고 온몸을 검사해 독이나 무기들을 찾아낸다.

이 최소한의 검사 외에도 목적이나 정당한 이유, 그렇지 않으면 황제의 승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 모두를 조사 받고도 궁에서 이삼 일을 기다려야만 겨우 황제를 만날 수 있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그는 십여 가지의 조사와 복잡한 절차, 그리고 형식적인 의식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중 단 한 가지도 격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허름한 곳으로 안내 받은 데다가 갑작스럽게 황제가 나타나자 그는 불안했다.

막불은 엎드려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었다.

"자네가 막불인가?"

"예, 그렇습니다."

황제는 말이 없었다. 그렇게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황제는 아무 말 없이 막불을 바라보기만 했다. 막불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자네는 이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 무슨 말씀이시온지?"

"자네가 살고 있는 이 나라 말일세."

막불은 갑작스런 황제의 말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갑자기 궁으로 불러들여 자신에게 이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냐니 어떤 대답을 원하는 것인가?

막불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떤가?"

"전......."

"그래, 말하기가 부담스러우면 하지 않아도 좋네."

왠지 황제의 목소리가 무거워 보였다.

"내가 자네를 부른 것은 이 나라를 위해 희생해 주기를 바래서이네. 글쎄, 몹시 힘들구만.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자네에게 부탁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야."

막불은 눈을 감았다.

그는 이미 황제의 말에서 그에게 바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를 다시 전장 터로 보내고자 함이었다.

단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장군도 아닌 자신을 이렇게 따로, 그것도 은밀하게 불러들여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막불의 손은 떨림이 일기 시작했다.

지난 삼 년간 그는 어떻게 지내왔던가?

전장 속에서 죽어간 동료들과 이름을 알 수 없던 수많은 적들의 얼굴이 그의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잠을 자면 많은 원혼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고, 깨어 있어도 그는 살아 숨쉬는 것이 아니었다.

뜨거운 열기와 갑의 속으로 흘러내리는 땀, 그리고 전우들, 그 모든 것이 단순한 꿈이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금방이라도 문을 열며 농을 해줄 것 같은 그들이 그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자네는 삼 년 전 사막전투에서 살아난 유일한 생존자라는 사실을 들었네. 그리고 그 전투는 내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일 중 하나였네. 그러나 당시 그 전투로 인해 우리의 국경선이 지켜졌고 그후 세외에서는 함부로 우리를 넘보지 못 했었지."

막불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동료들의 희생이 아주 의미 없었던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궁금하겠지? 내가 왜 자네를 이렇게 불렀는지. 이유는 하나일세. 그때와 같은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기에 자네를 부른 것이라네. 자네라면 나를 충분히 이해해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네."

막불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자네는 한 사람을 죽여야 한다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말이야. 그리고 거기엔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네."

"제가 누구를 죽여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황제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바로 동쪽 끝에 있는 젊은 호랑이 누루하치라네."

막불은 자신이 더 이상 빠져 나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진정이십니까?"

황제는 확고하게 말했다.

"그렇네."

막불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저를 잘못 부르신 게 아닙니까? 저는 일개 군인일 뿐입니다."

"그렇지가 않아. 이것은 그 무엇보다도 극도의 정신력을 요하는 일이네. 자네는 전멸의 순간에도 살아남은 강인한 정신력을 지녔어. 그리고 절대적인 믿음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지. 그게 자네가 선택된 이유야."

막불은 고개를 젓고 싶었다.

그러나 황제가 이렇게 은밀히 말했을 정도면 이미 그의 운명은 결정지어진 것이었다.

명에 거역한다는 것은 이미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가 이 자리에서 승낙을 하지 않는다면 멸문이 되어버릴 일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가족과 모든 것이 황제의 명에 의해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

막불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는 없었다.

막불이 떠나고 황제는 홀로 남아 있었다. 그 황제 뒤로 남태천이 나타났다.

"정말 잔인하군. 선택의 여지도 없게 만든 후에 사지(死地)로 보내다니."

"후후후......!"

"그러나 이해할 수 없군. 어째서 보잘것없는 그런 자에게 누루하치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오?"

"자네는 그가 누루하치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글쎄. 솔직히 말해서 단 일할의 가능성도 없지."

황제는 문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렇기에 그를 보내는 것이라네."

남태천은 황제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았다.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지 눈이 투명하게 반짝였다.

*               *               *

쏴아아아―!

하늘은 개일 줄 모르고 있었다.

바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거세어졌고 객잔 안에서는 이제 한기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주인은 손수 화로에 불을 지펴왔다.

청년은 취한 듯 나른한 목소리로 얘기를 계속 이었고, 듣는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아니 어느 누구하나 술을 마시거나 움직이지 않았다.

청년이 앉아 있는 탁자 위아래에는 그 동안 마신 술독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남궁선도 재미있다는 듯이 얘기를 듣고 있었다. 마치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얘기처럼 아무 거리낌없는 태도였다. 분명 그녀의 가문에 누가 되는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황제는 왜 그자를 사지로 보내야만 했습니까?"

추정호가 물었다.

"그것이 정치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세상을 움직여 나가는 것들 중 가장 불필요하면서도 필요한 것이 이 정치라는 물건이지요. 추잡스럽고 더러운, 철저히 이익만이 우선 되는 권력 놀음이랄까요? 아마도 인간이 멸망되지 않는 한은 계속되어질 싸움이 바로 권력싸움이지요."

중추신개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군, 딴은 자네의 말이 맞아. 권력이란 무상한 것이지. 없어서도 있어서도 안 되는 것 말이야."

추정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저는 이해할 수 없군요. 황제가 그를 골라야 했던 이유를 말이죠."

청년이 입을 열었다.

"당시 정세는 공식적으로 세 곳에서 침략자들의 움직임이 일었던 것으로 드러나지만 사실 한곳이 더 있었습니다. 그곳은 바로 마교라는 집단이었지요."

"마교?"

"그렇습니다."

"호호호! 우습군요. 그렇다면 황제는 마교와 대적하기 위해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방관했다는 말이 되는군요. 겉으로만 대항하는 척 하면서 말이죠."

청년은 빙긋이 웃었다. 남궁선의 말에는 부드럽지만 뭔가 가시가 돋아나 있었다. 청년의 말이 터무니없지 않느냐는 뜻이 그녀의 말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황제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니 자신이 유리한 입장이 되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대내적으로 활동하면서 내분을 막으려 했던 것입니다."

"내분?"

"예. 마교가 바로 그것입니다. 무림이란 조직은 황제 역시도 주시하고 있었던 만큼 잠재력이 막강한 곳입니다."

"호오."

"게다가 이상한 저력이 있습니다. 만약 무림이 태동을 한다면 황제로서도 막아내기 까다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선 남태천과 손을 잡고 무림을 재정비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미리 알아챈 자가 있었습니다. 그자가 바로 홍화객을 사칭했던 사마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마교의 총령이라는 자와 사마적이라는 자, 그리고 우문성이라는 자, 남태천이라는 자, 황제. 모두들 무림을 없애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왜 서로 적이 되어 암투를 벌이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추정호가 날카롭게 지적을 했다. 그러자 청년은 빙긋이 웃었다.

"욕심 때문입니다."

"예?"

"사마적은 복수를 위해 뛰어든 것입니다. 그리고 우문성 역시 자신의 일가를 몰살한 무림세가에 복수하기 위해 뛰어든 것입니다. 남태천은 개인적인 복수와 모든 패권을 잡겠다는 욕망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지요. 그들 모두가 그 일이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자만심에 빠져 있었지요."

중추신개가 청년의 말을 잘랐다.

"그럼 황제 역시 그렇다 치고, 총령이란 자는 어째서 마교에 들어가게 된 것인가?"

"총령 역시 권력의 노예였습니다."

*               *               *

"남태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예."

총령은 부하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었다.

"음!"

총령은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리는 지금 맹렬히 움직이고 있었다. 또한 가슴 한구석이 부글부글 타오르고 있었다.

"남태천이 황제와 손을 잡았다는 것이냐?"

"예. 저희 정찰대에 의하면 그가 황궁에 드나드는 것을 여러 번 발견했다고 합니다."

총령은 손가락을 마주치며 앉아 있었다.

'남태천이 황제와 어떤 계략을 꾸민다 해도 그런 것쯤은 그다지 큰 일이 아니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바로 그자다! 그자는 벌써 삼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단시 자신의 명령서를 서신으로 보내고 있을 뿐이지. 하지만 그는 분명 이곳에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나의 움직임을 이토록 세세히 알 수 있다는 말인가? 남태천이나 황제 따위는 나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 그들의 행동은 예측 가능하기 때문에 그에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제까지 활개를 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이 예측은커녕 정체조차도 모르는 그자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움직이겠어. 나의 최후세력을 동원해서라도 그를 무림으로 끌어내어 제거하겠다. 내 모든 조직과 힘을 쏟아 넣으면 그를 제거할 수 있으리라. 이 정도의

 조직은 십 년 정도만 투자하면 재정비 할 수 있다.'

총령의 두 눈은 굳은 의지로 불타고 있었다.

"취곤을 불러라."

"예."

'그래 더 이상 움츠릴 수만은 없다.'

총령은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제19장  태상황의 서거(逝去)



뿌드득―! 뿌드득―!

눈이 밟히는 소리가 장백산에 울려 퍼졌다.

유월인데도 장백산의 정상에는 두꺼운 서리가 내려있었고 겨울의 눈이 채 녹지 않고 있었기에 발걸음을 떼기가 힘들 정도였다.

이 정상에 무장차림의 사나이들과 매화꽃으로 수가 놓아진 백색 문사건을 하고 검은빛 장삼을 걸친 누루하치〔태조(太祖)〕, 그리고 눈 위에 핀 꽃 같은 분홍빛 요선천익(腰線天益)을 입은 태종(太宗) 홍타시가 서 있었다.

홍타시는 열 살 남짓의 소년이 되어 있었다. 소년 홍타시의 얼굴은 도화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직 태양이 떠오르기에는 이른 시각이기에 대지는 숨을 죽이고 있는 듯했다.

동쪽 하늘로부터 여명이 비치기 시작했다.

소년 홍타시의 눈에서는 웅심이 활활 타올랐다.

"극(極)아!"

누루하치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대지를 돌아보는 그의 눈에는 야망이 타오르고 있었다.

"예, 아버님."

누루하치는 북서 편에 자리한 광활한 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것들을 보면 무엇을 생각하느냐?"

"대지이옵니다."

"대지라고? 무슨 뜻이냐?"

소년 홍타시는 아버지 누루하치를 보며 말했다.

"예, 제가 지배해야 할 대지입니다."

"허허허허! 그렇지 암, 그렇고 말고."

누루하치는 아들의 당돌한 말에 대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아들이 대견스러워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까지 했다.

"너의 증조부와 조부는 야망이 없으셨다. 그랬기에 명의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하셨지. 그러나 너만은 달라야 한다. 사내는 그 그릇이 클수록 더욱 큰 일을 할 수 있는 법이니라. 알겠느냐?"

"예."

"훗날 내가 이루지 못한다면 네가 그 뜻을 이뤄 네 증조부와 조부의 한을 갚아드려야 하느니라."

"예, 알겠습니다."

누루하치는 자신의 아들을 꼭 껴안고는 눈앞에 넓게 펼쳐진 대지를 가리켰다.

"중원은 넓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수천 배는 넓지.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 부자가 정복해야 할 땅이며 정복할 땅이다. 아들아 보아 두거라. 언젠가 저 천하가 네 발 아래 숨죽일 날이 올 것이다."

이 순간 어린 홍타시의 눈에는 야망의 그림자가 비쳤다. 지금 그는 아로새겨 넣고 있었다. 언젠가 자신이 다스리게 될 저 넓은 세계와 땅덩어리들을.......

이제는 태양이 완전히 솟아있었다.

*               *               *

주익균은 단 위 보좌에 앉아 조선의 사신(使臣)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래 조선에서 어인 일인가?"

황제의 물음이 끝나자 이덕형은 다급히 아뢰기 시작했다. 사신으로 파견된 이덕형은 머리를 짓찧으며 조선의 정세를 알리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절절함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황제 폐하. 저희 조선에서는 십오만 명의 일본군이 쳐들어와 약탈과 파괴를 일삼고 있으며 강산이 유린당하고 있습니다. 이에 주상께서는 황제폐하께 도움을 요청하시었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래, 주상은 지금 어떡하고 계신가?"

이덕형은 피를 토하는 음성으로 말했다.

"주상께서는 밀려오는 일본군을 피해 평양을 버리시고 영변(寧邊)으로 피하시는 것을 보고 왔습니다."

주익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극박한 상황이구려."

"그렇습니다. 폐하, 저들은 우리에게 길을 비켜달라고 했거니와 상호수호조약을 요구하며 폐하를 치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전심전력으로 막아내고 있사옵니다. 저희 나라의 고충을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덕형의 목소리가 너무도 비통하여 장내는 숙연해지고 말았다.

만조백관 등이 좌우로 나열해 있었으나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알았소. 잠시 물러가 있으시오."

이덕형이 물러가자 좌우 도어사 운위량(雲位兩)이 앞으로 나와 간하였다.

"황상, 신 운위량 아뢰옵니다."

"어사, 말해 보시오."

"우리 실정으로는 조선을 돕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되옵니다."

"무리라......."

"위에서는 달단이, 밑으로는 대월이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외의 적들이 우리를 노리고 있는 데다 누루하치는 공공연히 세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사람이라 하지만 훗날도 그가 우리 사람으로 남아있을지 염려가 되옵니다. 우리 군사를 파병하는 것은 그들이 세를 넓히는 기회를 주는 것과 같사옵니다. 먼저 우리의 국세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 옳은 듯 하옵니다."

그러나 상서(尙書) 군귀량(軍貴量)이 앞으로 한 발 나서며 운위량의 발언을 반박하고 나섰다.

"황상. 조선은 그 동안 우리 명(明)에게 신(臣)의 예(禮)를 다해왔습니다. 군신(君臣)의 의(義)를 져버린다면 어느 누가 황상의 앞에 무릎을 꿇으오리이까? 게다가 일본의 의도는 분명 우리 명을 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막고 있는 조선을 우리가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의를 버린다는 것과 같고 황상의 위명에 먹칠을 하는 것과 같사옵니다. 그들이 조선을 정복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곧 명을 먹으러 중원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장내는 군신들의 의견이 엇갈리면서 소란해졌다. 주익균은 군신들의 의견을 듣다가 소란해지는 장내를 바로 잡으려 목각을 치게 했다.

딱,딱,딱,딱!

그리고 장내의 소란이 줄어들자 주익균이 입을 열었다.

"대장군은 어찌 말이 없으시오?"

주익균은 장내의 소란을 묵묵히 바라보고 서 있던 대장군 천위성에게 물었다.

"신 대장군(大將軍) 천위성(天胃星) 아뢰옵니다."

천위성은 앞으로 나와 읍을 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신은 우선 조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그렇소?"

"황상께서 그들을 돕지 않으시면 첫째 위엄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다른 소국들의 불신임을 얻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 대명을 얕잡아 보는 마음이 생겨 난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그리되면 혼란이 더욱 가중되어 지금보다 더욱 어려운 국면에 접하게 될 것이옵니다."

"그럼 다음은 뭐요?"

"둘째로는 일본이 조선을 점령한다면 누루하치와 동맹을 맺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적의 세력을 크게 키워주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그의 말에 주위의 군신들은 수긍하는 빛을 띠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풍신수길은 야심에 찬 인물입니다. 오히려 그 도가 지나친 인물입니다. 그는 조선을 정복하고 나면 우리 명을 노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주익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 알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               *

다음날 아침 주익균은 이덕형을 불러오도록 했다.

잠시 후 이덕형이 들어서자 주익균이 이덕형과 만조백관에게 선포했다.

"우리는 조선과 오랜 시간 군신의 예를 다해왔소. 또한 그들은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고 있소. 짐은 그들을 돕기로 결정했소. 부도어사(副都御使) 이여송(李與頌)을 제독으로 임명하고 사만삼천의 군사를 줄 테니 대명의 신위를 떨치도록 하시오."

이덕형은 눈물을 흘리며 절을 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부도어사 이여송이 자리에 나와 읍을 하며 말했다.

"신 이여송 신명을 다해 싸우겠습니다."

이른 아침, 막불은 마당가에 앉아 있었다. 따뜻한 햇볕이 그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막불은 자신의 이 평화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곧 이 모든 것들과 이별을 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도 말이다.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여보! 왜 그래요? 무슨 일이 있나요?"

성숙랑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막불의 갑작스런 행동에 의아스러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자꾸만 걱정이 됐다.

"난 이렇게 앉아 있으면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것이 느껴져. 마치 말이야, 한 점의 걱정도 없는 어린아이가 된 듯한 느낌이거든. 당신은 안 그래?"

막불은 그녀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녀를 볼 때마다 미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가 전장을 누비고 다니는 동안 벌써 십여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이미 서른이 넘어버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그는 보지 않아도 알았다. 그녀는 밤마다 자신을 위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말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만약에 말이야."

"예?"

막불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만약에 내가 없다면 당신은 어떡하겠어?"

"어머, 당신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당신이 없다니 갑자기 뜬금 없이?"

막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성숙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다지 특색이 있거나 아름다운 얼굴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하염없이 포근하고 편안한 얼굴을 갖고 있었다.

항시 바보 같을 정도로 웃음만 짓는 그녀가 막불은 너무도 고마웠다.

'어떡해야만 하는가?'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사지를 향해 떠난다. 재가를 하든 다른 남자를 만나 살림을 차리던지 맘대로 해라'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막불은 고뇌에 찬 모습으로 앉아 있었고, 그런 막불을 바라보던 성숙랑은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막불은 삼 년만에 검을 손질했다. 이제는 하도 갈아서 날이 처음에 반도 안될 정도였다.

스윽―! 스윽―!

검에 묻은 녹 가루가 그의 손에 의해 떨어져 나가고 시퍼런 검신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가 검을 갈기 시작한 지 세 시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검은 이제 제 모습을 찾고 있었다.

그는 군에 들어가면서 그의 전 재산인 은 닷 냥을 주고 이 검을 고물상에서 처음 샀다.

고물상 주인 말로는 이 검의 주인이 한 노병(老兵)이었는데 자신의 아내가 아파 약값을 하려고 급히 내 놓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검의 주인을 찾아가 그 당시 자신이 지니고 있던 돈을 모두 줘버렸다.

그 노병이 내 놓은 가격은 은 한 냥에 불과 했음에도 그는 은 닷 냥을 모두 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는 십여 년의 세월을 같이 보냈다. 이제는 그 검이 자신의 피붙이인 것처럼 느껴졌다.

검은 그 동안 많은 전쟁터를 누비고 다녀서인지 당시보다 짧아져 있었다.

마치 검이 아니라 도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래, 그 많던 동료들은 가고 너와 나만 남았구나."

막불은 망연히 중얼거렸다. 그는 황제의 말이 생각났다.

<그대는 이 나라를 위해 죽을 수 있겠는가?>

그는 마음 한 구석에서 통렬히 외치고 있었다.

'이 나라가 나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가? 무엇을 해 주었다고 나에게 이런 고통스러운 짐을 떠맡기는 것인가?'

그러나 그는 스스로도 이런 준비를 하고 있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내 주위에 있는 이 선량한 사람들이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서일 뿐이다. 이따위 껍질뿐인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다."

휭―! 서걱―!

앞에 놓여있던 복숭아 나뭇가지가 잘려나갔다. 검이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음에도 나뭇가지는 깨끗이 잘려나갔다.

그의 검은 검은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서늘할 정도의 푸르스름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이는 많은 이의 피가 이 검에 스며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검은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막불이 자신의 검을 갈고 있을 때 성숙랑은 막불의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막불이 다시 전장으로 나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애써 검을 갈고 있지 않을 것이다.

지난 삼 년은 그녀에게 행복하면서도 불안한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황제의 밀서가 도착하자, 그녀는 직감적으로 다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던 것이다. 자신이 그를 잡으면 그는 편하게 떠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도 알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를 보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소망이 왜 이리 이루어지기 힘든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남편과 단 둘이 조용히 살고자 하는 것이 그녀의 모든 소망이었다.

그러나 하늘은 그 작은 소망마저도 용납하지 않았다.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이 그녀와 남편만큼은 비켜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지금도 밖으로 달려나가 그의 남편을 말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남편은 떠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조용히 보내주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러나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이 되어도 감정이 그렇게 따라주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지경이었다.

"흑―!"

그녀는 침상에 엎드려 소리 죽여 울었다. 왠지 이제 떠나면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불안함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흑흑, 왜...... 당신은 또 다시 떠나야만 하는 건가요? 왜 우리는 남들처럼 살 수 없는.......'

*               *               *

이제는 가을로 접어들어 밤이면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북경은 유난히 겨울이 빨리 찾아온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가을을 누릴만한 여유가 없다. 그런데 오늘밤은 이것이 가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알 수 없는 묘한 정취가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 그랬던가?

하늘에 뜬 달이 슬퍼 보이면 그것으로 가을이 온 것이라고. 어쩌면 가을은 우리의 마음이지도 모르겠다.

딱―! 딱딱―!

두 개의 나무를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는 황궁에서 교대를 알리는 소리였다.

교대 자들은 그들이 배정 받은 자리에서 암호와 작은 나무패를 받는다. 이것이 교대의 모든 것이었다.

중궁전(中宮殿).

황제의 아버지인 태상황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이곳은 황궁의 삼대 금지(禁止) 중 하나였다.

이곳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으며, 황제마저도 이곳에서는 함부로 행동 할 수 없었다.

그런 곳인 관계로 이곳의 경계는 다른 곳보다 더욱 심했다. 한 걸음 건너 한 사람씩 보초가 배치되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방안, 거대한 침상이 놓여 있었고 침상 위에는 금침이 덮여있었다.

침상의 사각을 이루는 기둥에는 금과 옥 등 보석으로 이루어진 장식물들이 호화롭게 붙어있었다.

그리고 그 침상 위에는 융경제 주재후가 잠들어 있었다. 그 옆으로는 황녀 진위령이 잠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누가 흔들어도 모를 만큼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이때 그들 앞에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 사나이는 태상황의 막역지우인 달대대사였다. 이 야심한 밤에 그는 왜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달대의 얼굴에서는 평소와는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그는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걸고는 황제의 곁으로 가서 자신의 품에서 꺼낸 단검으로 잠들어 있는 황제의 가슴을 힘껏 찔렀다.

푸욱―! 푹―!

무려 다섯 차례의 칼질이 이어졌고 그로 인해 솟아 나온 피로 금침은 얼룩져버렸다.

자는 순간에 당해서 그런지 태상황은 비명소리 한 번 못 지르고 즉사를 했다. 이상한 것은 진위령조차도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달대는 그런 태상황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진위령의 손에 자신이 들고 있던 칼을 쥐어주었다. 그러고는 싸늘한 미소와 함께 돌아 나왔다.

다음날, 시녀인 취취는 조심스레 찻잔이 얹어진 쟁반을 들고 중궁전을 향해 걷고 있었다. 한 방울이라도 흘릴 새라 그녀의 발걸음은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혹시라도 흘린 흔적이라도 보인다면 날벼락이 떨어질 것이 틀림없으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몇 개인가의 전각들을 지나 드디어 중궁전 앞에 이르렀다.

"누구냐?"

문 앞에서 보초를 서던 위사들 중 하나가 소리쳤다.

그녀와는 벌써 수십 번째 마주쳤지만 그는 늘 같은 질문을 던지고, 똑같은 검사를 했다.

그녀의 몸을 뒤져 무기가 될만한 것은 없는지,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든 쟁반에 무기를 숨길만한 장소는 없는지를 뒤지는 것이다. 그 후에야 그녀는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그녀는 손에 쟁반을 받쳐들고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들어섰다.

긴 회랑을 따라 돌아 들어가면 문이 나오고 그 문 안에는 황제의 침소가 자리하고 있다.

그녀는 침소를 들어가는 문 앞에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녀가 막 문을 열고 들어서는 찰라, 그녀의 이 평온한 하루는 끝이 나버리고 말았다.

"까아아악!"

"뭣이?"

침소에서 일어난 주익균은 갑작스런 비보를 들어야만 했다. 그는 의관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채 중궁전을 향해 달려갔다.

그곳에는 예조, 병조 등 각 판서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침상은 누구도 손대지 않은 태상황의 시체와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고, 그 위에는 그 피를 보며 넋을 놓고 있는 진위령이 앉아 있었다. 또한 진위령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침상을 포위하듯 위사들이 발검(拔劍)한 채 늘어서 있었고, 그 뒤로 문무관리들이 서 있었다.

이곳에 서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이는 어디에선가 반란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보다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주익균이 들어서자 그들은 모두 황제인 그에게 읍을 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주익균은 그런 일 따위에는 관심 없다는 듯 호위장에게 물었다.

"예, 오늘 아침 시비에 의해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태상황후의 손에서 살인에 쓰인 흉기가 나왔습니다."

"시각은?"

황제의 물음에 어의가 대답했다.

"어젯밤 이 경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황제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 진위령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외쳤다.

"저년을 당장 잡아들여라. 어서!"

"옛!"

진위령은 압송되어 끌려나갔다. 그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그녀로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진위령이 끌려나가자 황제는 외쳤다.

"이 사건은 없었던 것으로 한다. 상황전하는 갑작스런 병환으로 승하하신 것이다. 이 외에 다른 소문이 나돌 경우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네놈들은 모두 역적으로 간주하겠다. 그리고 후일에라도 이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역시 역도로 몰아 극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황제는 돌아서며 말했다.

"예조판서는 천품제일예관으로 봉하고 태상황 전하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를 것이며 이에 전 백성이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장례가 있는 동안은 국가 존망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모든 행사나 의식은 금한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그곳에 자리한 모든 사람들은 배례를 하며 외쳤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는 죽어버린 아버지의 모습은 쳐다볼 생각도 않고 그렇게 나가버렸다. 그가 얼마나 아버지를 미워하는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콰앙―!

주익균은 화병 하나를 벽에 던져버렸다.

그의 이런 모습은 평상시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는 야망에 불타면서도 늘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항상 싸늘하게 보이기까지 했던 그였다.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허수아비를 내세워 자기 대신 황제의 역할을 하게 했을 정도로 용의주도하기도 했다.

"빌어먹을! 그자의 목을 베어야 하는 자는 내가 되었어야만 했다. 나의 어머니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내가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그 수모 속에서 자라야만 했던 그 아픔을 그에게 그대로 돌려주려 했다. 그런데 이렇게 허망하게 가버리다니. 도저히 용서 할 수 없다. 그자는 내 손에 죽었어야 했어! 바로 내 손에!"

주익균은 한참을 미친 듯이 발광을 하다 의자에 걸터앉아 움직이지 않고 또 다시 몇 시진을 보냈다.

그러더니,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자를 이용하면 되겠군. 야망이 많은 자이니. 배반을 꿈꾸게 해야겠어. 그리고 나의 아버지....... 흥! 당신은 죽었지만 원수는 갚아야겠지."

상국사(相國寺).

황궁 안에 자리한 유일한 절이다.

태상황의 지기이자 고승인 달대대사가 기거하는 이곳은 어수선한 밖과는 달리 너무도 고요했다.

달대대사가 아침 염불을 끝내고 막 공양을 받으려는 순간이었다.

"대사님."

"허허, 무슨 일이냐?"

천우가 호들갑스럽게 달려왔다.

달대대사의 얼굴은 떡 반죽을 하다 만든 것으로 사람의 얼굴을 만들어 놓은 듯했다. 어지간한 사람은 마주 바라보기도 거북할 만큼 흉측한 얼굴이었다.

천우는 그런 달대대사의 얼굴에 익숙해져 있는지 전혀 상관을 하지 않았다.

"태상황께서 승하하셨습니다."

천우는 침울하게 말하면서 슬퍼할 달대대사를 상상했지만 들려온 소리는 너무도 덤덤한 목소리였다.

"그래."

자신의 친우가 죽었다는 사실을 듣고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달대는 그저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대사님!"

천우는 대사의 모습이 의아스러워 한 번 더 불러보았으나 대사의 행동은 여전했다. 그의 생각으로라면 지금 그는 태상황의 빈소를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식사를 하고 있었다.

천우로서는 이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한 저 모습은 무엇인가?

갑자기 해골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천아가 막 돌아서려 했을 때였다.

"천우야."

"예."

"가사를 챙겨 오너라."

"예."

천우는 이제서야 대사가 중궁전으로 갈 생각인 듯 하여 날랜 몸 동작으로 뛰어 들어가 벽에 걸린 가사를 집어들었다. 말이 좋아 가사지 이건 아예 걸레가 다 되어 있었다. 얼마를 기웠는지 마치 천 조각을 이어 옷을 만들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여기 저기는 삭아 잘못 만지면 부스러져 버리는 것이었다.

"내, 오늘 시내에 좀 다녀와야겠다."

"예?"

가사를 받아 입은 달대의 갑작스런 천우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아니 갑자기 미치기라도 한 것인가? 이 경황 중에 저런 말씀을 하시다니?'

달대는 휘적휘적 문 밖으로 나섰다. 그러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생(生)이란 것, 업인 것을 그대는 이제 업을 덜었구료. 그래, 나도 이제는 떠나야 할 때가 된 것 같군."

이 무슨 소리인가?

태상황을 시해한 자가 바로 그이지 않는가? 그런데 그가 이런 소리를 읊조리다니? 그리고 떠난 다는 건 무엇일까?

그런 달대를 천우는 멍청히 바라보고 있었다.

*               *               *

"세상은 나약한 자들보다 간악한 자들이 살기 좋도록 되어있지. 어설픈 악당이 아닌 진짜 악당 말이야.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자네이지 않은가?"

남태천은 백천우에게 말했다.

백천우의 얼굴은 그늘에 가려져 반쯤밖에는 드러나 있지 않았다. 나머지 반쪽마저도 백천우는 검은 천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은 예전의 백천우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불에 그을려 일그러진 얼굴에는 각종 흉터들이 거미줄처럼 얽혀있었다.

마치 잘 다져놓은 고기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마치 잘 갈아놓은 검에서나 느낄 수 있는 섬뜩함과 사악함이었다.

"당신 역시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잖는가? 나보다도 더한 진짜 악당이 바로 당신일 텐데."

"글쎄!"

"난 일만오천의 군사들을 이끌고 옥문관을 넘어 빙궁을 향했지. 그리고 당신이 비밀리에 전한 서찰대로 사막을 넘어 빙궁으로 향해 진군해 갔었다. 그런데 자네는 나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야. 우리를 사하(沙河) 속에 몰아 넣다니. 그 덕분에 대부분은 죽었지만 그래도 죽지 않은 자들과 난 대적해야만 했다. 그들은 사하가 나타나는 순간 내가 배반했다는 것을 알아버렸거든. 그리고 난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어야 했지."

백천우는 남태천을 싸늘히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대는 이렇게 살아 돌아왔지 않은가?"

"그래, 그랬지. 그 덕분에 옛날 마교의 비동을 찾아 열 수 있었던 것이니까? 그러나!"

화악―!

백천우가 뒤집어쓰고 있던 검은 천을 벗어 던졌다.

"얼굴의 반쪽은 그나마 썩어버렸다. 시독에 내 몸은 썩어 들어가고 있다."

남태천은 얼굴을 찌푸렸다.

"어때, 볼만한가?"

백천우의 어투는 점차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는 분을 감출 수 없어서 점점 남태천을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곧 백천우의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 다섯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로는 백천우의 일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크아악―!" "커억―!"

단 한방에 모두 목이 날아가 버렸다.

그러고 나서 백천우가 남태천의 목덜미를 움켜잡는데는 숨 한 번 쉬는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어때? 나는 고강해졌다. 그럼에도 너와 손을 잡은 것은 모두 네놈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너는 나를 원상태로 돌려 놓아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남태천은 고개를 저었다.

"이 손을 놓아 주실까?"

백천우는 일그러진 얼굴로 남태천의 목을 움켜잡은 손을 놓았다.

"그래, 자네의 말대로 나는 자네의 모습을 바꿔줄 수가 있네. 그러나 거기에는 많은 노력과 시간, 그리고 돈이 들어가지. 내가 왜 자네를 위해 그런 일을 해야 하지?"

백천우는 소리쳤다.

"왜? 왜냐구? 네놈은 나를 기만했다. 네 녀석이 날 이렇게 만들어 놓지 않았느냐!"

"호! 그래. 그럼 총령에게 찾아가 그렇게 말해 보시지. 내가 만약 네놈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총령에게 알리면 어떻게 될까? 그 완벽주의자인 총령이 너를 살려 두려 할까? 옛말에 한 손이 열 손을 당하지 못한다고 했다. 지금 네놈이 아무리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총령의 친위대 전부를 당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백천우의 얼굴은 더욱 심하게 일그러졌다.

"크윽―!"

"내게 좋은 생각이 있다. 네가 나를 돕는 것이다. 내 일을 도와주면 나는 너의 도움으로 총령을 제거하겠다. 그런 후 너의 모습을 돌려주지. 네 본모습으로 말이야. 그리고 이후는 네가 어떻게 하든지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백천우의 눈에서는 퍼런 안광(眼光)이 번져 나왔다.

"어떤가?"

백천우는 남태천의 말을 듣다 고개를 들었다.

"좋다. 네놈이 하자는 대로 해주지. 그러나 또 다시 나를 기만하거나 배반한다면 더 이상 용서하지 않겠다."

남태천은 환하게 웃었다.

"좋아. 그건 당신의 자유니까."

그렇게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또 다른 장소에서 한 사나이는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휘영청 뜬 달을 바라보며

떠난 님이 그리워 울다

잠이 들어 깨어보니

이슬에 젖은 옷이 축축하다.

이 옷이 마르면 가신 님 오실까?

내 마음이 젖으면 가신 님 오실까?

마음을 둘 곳 없어 술잔을 베고 다시 누워 본다.>

사마적은 창가에 기대어 앉아 자작시를 읊고 있었다.

누굴 생각하는 것인가? 그의 눈빛은 너무도 애절한 빛을 띠고 있었다. 금세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그런 슬픔이 묻어 나왔다.

그는 지난 삼여 년을 복수를 위해 뛰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적으로 인식되는 자들을 모두 죽였다. 그로 인해 홍화객이란 이름이 바쁘게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의 마음은 공허해져만 갔다. 이제는 누굴 위한 복수인지조차도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버린 것이다.

그의 전쟁은 이제 소강상태가 되어버렸다. 지루한 소모전만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부하들은 자신을 불신하고 있었다. 복수라는 명분 아래 자신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듯 보였다. 부하들을 위하지 않는 주인으로부터 그들의 마음은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그의 명을 따르는 것은 홍화객이란 이름 때문일 것이다. 홍화객이라는 이름의 그림자가 얼마나 컸는지 알만 하였다.

그는 한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계략을 실행시키기 위해서 범했던,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그렇게 조용히 희생되어버린 여인 신예원이었다.

"후!"

사마적은 쓴웃음을 지었다.

"때가 되고 있다. 이 기회에 모든 것이 끝나야 된다. 그리고 그 후에 그녀를 찾아가리라."

사마적은 한 모금의 술을 자신의 목으로 넘겼다.

알싸한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크윽―!"

사마적은 눈을 지긋이 감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몸에서 배어 나오는 그 쓸쓸함은 지워지지 않았다.

*               *               *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번 일은 꼭 성공해야만 할 것이야. 그것이 그대와 그대의 가족이 살아 남는 일이다."

막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한 자루의 은자를 내 주었다.

"네가 죽어도 걱정은 하지 마라. 네 가족들의 안전과 생활은 우리가 보장하겠다. 어떤가?"

"좋습니다."

막불은 사내의 손에서 낚아채듯 돈 자루를 잡아채 돌아섰다. 집 안에서 몰래 그를 지켜보고 있는 성숙랑의 눈길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미 배는 강을 건넌 것이다.

그는 이틀 후 아침, 이곳을 떠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집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자들이 서슴없이 그의 아내와 그 자신을 죽이려 할 것이다.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부모님과 그 외 친척들의 집도 암암리에 감시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왜 굳이?'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이들에게 지목되어야만 할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무공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특출하게 두각을 나타낸 것도 없다. 단지 십여 번의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것밖에는 없었다.'

그런 이유로 자신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살아야 한다. 어떻게든.'

성숙랑은 몇 번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임신이에요. 당신의 아이가 생겼어요."

그녀는 몇 번을 망설였다.

웬 일인지 그에게 이런 말을 하려하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이었다. 그 앞에서는 말문이 콱 막혀버리는 것이었다.

삐이걱―!

그녀는 다시 한 번 마음을 굳게 먹었다.

'기필코 말하고 말리라.'

"저......."

그러나 들어온 남편을 보고는 역시나 말문이 막혀버렸다.

"응?"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식사하셔야죠?"

"그래."

둘은 말없이 음식을 먹었다. 음식이래야 아침에 만들어 놓은 국물에 국수를 삶아 넣고 간장으로 간을 해 먹는 것이 다였다.

거기에 닭발 하나를 얹어 놓는 것이 그들에게는 최고의 사치였다.

말없는 식사가 계속 이어졌다. 그때 막불이 맨 처음 입을 열었다.

"나, 잠시 어디를 좀 다녀와야겠어."

성숙랑은 말을 할 수 없었다.

말을 했다가는 마구 그에게 매달려, 가지 말라고 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저 음식에 코를 박고 먹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아마 오래 걸릴 거야. 몇 달이 걸릴지도 모르겠어."

막불 역시 뭔가를 더 말하려다 입만 달싹거린 후 자리에서 일어서 나갔다. 성숙랑은 갑작스럽게 설움이 복받쳐 울음을 울었다.

"흐흐흐...... 흑흑......."

집 안에는 고요한 정적과 그녀의 흐느낌만이 가득했다.

이틀이라는 시간은 길게 느끼면 너무도 긴 시간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도 한 순간처럼 짧게 느껴졌다.

그리고 드디어 막불이 떠나는 아침, 성숙랑은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장수면(長壽 )을 만들었다.

본시 장수면은 육십이 넘었을 때 회갑을 맞이해서나 먹는 것이었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이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장수면에는 그가 살아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었다.

그녀가 장수면과 소채 등 여러 음식을 탁자 위에 늘어놓자 막불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먹기만 했다.

그들은 원래 말은 많이 하지 않았지만 항상 훈훈한 분위기로 살아 왔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지만 지난 이틀 동안 그들이 나눈 얘기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로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의 훈훈한 기운도 느낄 수 없었다.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건  걱정스러움과 미안함, 그리고 절망감이었다.

탕! 탕! 탕―!

이때, 누군가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막불은 검과 봇짐을 챙겨들었다.

그리고는 무뚝뚝하게 한 마디 던지고 나가버렸다.

"다녀오겠소."

성숙랑은 그가 다정한 말 한 마디를 해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꼭 돌아올 테니 기다려 달라던가, 아니면 고생이 되겠지만 참아달라던가 아주 짧은 말이라도 좋으니 그녀를 안심시켜줄 말이 그녀에게는 필요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기대는 무참히 깨져버렸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탁자에 기대어 울음을 터뜨리는 것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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