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6일 화요일

무림실록(武林實錄) 전신전설(戰神傳說) 제14장~제16장 - 내가위





제14장  마공(魔功)



선불변(善不變) 변불선(變不善)이라.......

선함은 변하지 아니하고 변한 것은 또한 선함이 아니다.

고대로부터 많은 학자들은 선과 악을 두고 많은 의견을 내놓았다.

선(善)이 무엇이고 악(惡)은 또 무엇인가?

우리 인간은 이 선과 악을 무엇으로 가늠하는가?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

처음에 인간이 선하게 태어났든 악하게 태어났든 간에 인간은 자라나면서 이기적인 존재로 변해간다.

그렇다면 인간이 만든 선악의 기준을 우리는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것일까?

이렇게 미묘한 문제가 탁상공론으로 제기되고 있을 때, 어느 날인가 힘을 가진 자들은 선과 악의 논리를 자신들이 지배하는 곳에 적용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들에게 이로운 것들은 선이었으며 자신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했을 때 그것은 악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악을 척결한다는 미명 아래 권력에 반대되는 자들을 축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체를 볼 때의 선과 악이요 개인으로 볼때의 선과 악은 조금 다르다.

그러나 어떤 것이 진정한 선이란 말인가?

누구나 납득할만한 최소한의 선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지켜나가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악일 수도 있는 것이다.

스스로 선악을 가르고 편애하지만 사실 순수한 의미의 악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리고는 자기만족을 위해 더욱 크고 바른 것을 무시하며 스스로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우문성은 반개한 눈을 들어 자신의 앞에 새겨진 두 글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善)과 악(惡), 이 두 글자의 진정한 무게를 측정하려 하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장중함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그는 지난 한 달여 동안 무공이란 것을 보았다. 괴이하다 할 정도의 무공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그것은 자신이 알아오던 상리를 모두 파괴시켜버린 것이었다.

음양오행 또는 각 진세의 방위 등 인간이 창안해낸 모든 무공의 틀을 파괴해버린 것이었다.

그는 하늘을 그의 머리에 넣고 있다고 자부해 왔었다.

단지 힘이 없어 자신은 무릎 꿇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그가 생각했던 것들이 얼마나 미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인지를 드디어 깨달은 것이다. 우물 속의 개구리에서 거듭나 세상을 향해 눈을 돌린 것이다.

하늘만을 바라보다가 드디어 우주를 보게 된 것이었다.

그의 몸과 마음은 제약이라는 것이 없어졌다. 그는 단 한번 움직임으로 하늘을 가릴 수도 수천 번의 움직임으로 자신의 손바닥조차 가리지 못하고 노출시킬 수 있었다.

내공이란 것도 필요치 않았다.

한계란 것이 없어진 지금 내공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가 우주이고 세계인데 이 세상에 그를 거스를 수 있는 자는 누가 있겠는가?

그에게 내공이란 것은 쓸모 없는 쓰레기와 같았다.

그는 신인(神人)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선보다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 악을 선택했다.

〈악(惡).

어차피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 그렇다면 소외되고 버려진 악을 택하리라.

그리고 그로 인해 거듭 태어날 것이다.

만악(滿惡)으로 세상을 이루어 놓을 것이다.

기다려라 세상이여.〉

그리고 한줄기 빛처럼 맴돌던 안광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               *               *

역혈마공(逆血魔功).

혈(血)이 역행하는 금단무공(禁斷武功) 기서(奇書)였다.

겉 표지에는 금물로 역혈마공이라는 네 글자가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

이 무공은 아마 마교 천년역사를 그대로 기록해놓은 역사서라고 봐도 무관할 정도였다.

신기막측하고 기괴한 무공들의 총서라 할 수 있었다.

마교의 무공이란 것이 대다수가 속성을 위해서 상리를 파하고 패도적이기 마련이다.

그런 무공을 집대성해 놓은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

그럼 누가 이 책을 만들었는가?

그것은 어느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누가 만들었고, 누가 익혔으며 누구의 손에 의해 전해지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도에 적을 두고 있는 자라면 모두 이것에 대해 듣고 있었고 알고 있었다.

남태천은 손안에 펼쳐져 있던 이 책을 다시 덮으며 치를 떨었다. 남태천은 양가죽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이건 인간의 무학이 아니다. 악마의 기서다.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이런 무공을 창안해 낼 수 있단 말인가?"

남태천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보내온 이 책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그가 이 책을 받은 것은 그의 나이 십칠 세가 되었을 때였다. 그는 자신의 외삼촌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절망감에 빠져 있었다.

그때 한 사내가 나타났다.

자신의 진면목을 가린 채 그의 처소에 나타났던 것이다.

*               *               *

남태천은 수치심과 더불어 자기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배신감이었다.

자신의 어머니를 죽게 하고 자기가 사랑하던 소녀를 망가뜨린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그는 증오하고 있었다.

그날도 남태천은 침상에 엎드려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울었을까? 울다 지쳐 눈을 드니 그의 옆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흠칫―!

남태천은 놀랐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점차 의혹이 들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이 곳에 들어 올 수가 있었을까?

남궁세가는 그렇게 녹녹한 곳이 아니었다.

중원에 알려진 이름도 이름이거니와 주야로 지키는 무사들만 일급으로 이백이었다.

이곳은 저택이라기보다 하나의 성을 이루고 있었다.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런데 이자는 마치 제집 드나들 듯 여유롭게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닌가?

남태천의 눈에는 의혹의 그림자가 어렸다.

"누구시오?"

"네 가슴에 한이 있느냐?"

남태천은 그자의 갑작스런 질문에 의아해 했다.

무슨 말인가?  남의 방에 갑자기 찾아와 뜬금없이 네게 한이 있냐고 묻다니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일인가.

남태천은 이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떠냐? 네게 한이란 것이 있느냐?"

남태천은 또 다시 그의 질문을 받고 엉겁결에 대답했다.

"예."

"그렇다면 이것을 받아 두거라. 후일 네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네가 이것을 모두 익히게 되면 내가 다시 너를 찾을 것이다."

"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후일 우린 만날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 전에 이것을 익혀야 한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이 있을 것이다."

스르륵―!

그는 바람결에 날려가는 먼지처럼 그 자리에서 소리 없이 사라져버렸다.

남태천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럴 수가....... 대단한 경공신법이구나. 이것이 혹시 말로만 듯던 불가의 부동신법? 대단하다. 움직인 듯 하면서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다니. 누구인지는 모르나 이것이 무공 비급인 듯하니 흔한 것은 아닐 터, 틀림없이 대단한 것일 거다."

소년 남태천의 눈에는 이글거리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래 주겠다면 받겠다. 나는 힘을 기를 것이다. 그래서 저들을 뛰어 넘는 천하제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조심하라. 천하여."

남태천의 모습에서는 소년의 천진난만이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단지 욕망의 그물에 걸린 한 마리 물고기만이 자리할 뿐이었다.

*               *               *

남태천은 책자의 첫 장을 넘겼다.

"이는 철저한 마공기서다. 인성은 사라지고 오직 파괴와 피에 굶주린 본능만이 남을 것이다. 금강불괴(金剛不壞)의 경지에 드는 것이다. 인성이 사라진 금강불괴라. 만약 그 당시 내가 멋모르고 이 무공에 심취했다면 난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영리했지. 후후후. 두고 보리라. 너희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파사사삭―!

책자는 한 덩어리의 먼지가 되어버렸다. 남태천의 눈이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미친 자들, 여기가 어디라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파악―!

앉은 자리에서 삼여 장을 떠 천장의 한 부분을 가격했다.

"크윽"

천장에 구멍이 뚫리며 한 사람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인도되어 내려오듯이 서서히 끌려 내려왔다.

그런데 이번엔 남태천의 몸이 허공을 격하고 내려서면서 몸에 힘을 잔뜩 주는게 아닌가. 그는 평소보다 수십 배는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우지직―!

그가 석판 바닥을 딛자 바닥이 한 자나 꺼져들어갔다.

"크악―!"

바람처럼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남태천의 발 아래에는 핏방울이 점점이 번져갔다.

그는 천장에 숨은 자객을 잡아 혈을 집어 바닥에 진기로 감싸 부드럽게 내던지고는 지둔술(地遁術)로 숨어 있던 또 다른 자객은 천근추의 신법으로 압사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 동작은 마치 물이 흐르듯이 순식간에 이루어졌으며, 너무도 찰라지간에 일어난 일이라 웬만한 안력을 갖고 있는 자가 아니라면 남태천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았다고 말했을 것이다.

실로 신기막측한 신법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자리에 앉아 자객을 바라보는 남태천의 눈에는 의혹이 어렸다.

"호. 그 짧은 순간에 자살을 하다니. 전신 혈맥을 모두 막아놓았는데, 자살에는 절정고수들이로군."

남태천은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이자들로서 서른두 명이다. 이 정도의 철저한 훈련과 자금력으로 이루어진 곳이라면 이 중원에는 단 두 곳이다. 황궁과 마교. 두 곳 모두 나의 목을 노리는 곳이지. 어쨌든 제법 바빠지겠어."

남태천은 자신의 두 손을 감싸쥐었다.

그리고는 느긋하고도 평온한 모습으로 푹신한 양가죽에 몸을 묻고 회심의 미소를 짖고 있었다.

"후후후! 시간이 빨리 가주었으면 좋겠군."

*               *               *

"그래 그들이 움직이고 있단 말이지?"

"예."

사마적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 부복해 있는 사내의 몸에서는 진홍빛의 선혈이 쉴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의 몸은 흐트러짐조차 없었다.

"인원은?"

"십만 정도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외나 변방의 무사들마저 모은다면 능히 배로 불어날 수 있습니다."

사마적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군."

사내는 움찔했다. 아무런 표정이 없던 사내는 무언가 집히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서 갑자기 황궁을 감시하라는 명을 내렸단 말인가?"

그는 십 일 전 갑자기 자신을 포함한 십여 명의 자객들에게 명이 내려졌다. 그래서 십 일동안 철저하게 황궁의 모든 상황을 보고했던 것이다.

그러다 오늘 아침에야 많은 사람들이 몰래 궁을 빠져나가는 것을 포착했다.

그는 그들 중 하나를 어렵게 잡아 족친 결과 간신히 그들이 서창의 인물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입은 이 상처도 그 서창의 인물을 생포하기 위해 생긴 것이었다.

서창은 대외적으로 황궁의 일을 처리하는 황제의 사조직이었다. 그들의 규모와 세력은 엄청났다. 그런 그들이 한꺼번에 수만 명이나 몰려나간다는 것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내는 그 사실에 놀라서 재빨리 달려와 사마적에게 보고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미 그것을 예측하고 있었던 사마적을 보니 정말 혀를 내두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빙궁의 움직임을 발견했나보군. 그들을 치겠다. 기회다. 형제들을 불러라."

"존명―!"

사내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사내의 모습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나도 생각해둔 것이 있지. 이번에 벌어지는 일, 바로 이것이 나에게 기회가 되리라."

*                *               *

아무도 없는 벌판이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이곳에 갑자기 멀리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곧 어른의 허리 부근 정도의 수풀이 그 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펼쳐진 광활한 대지에 수백 기의 기마다 나타났다.

황토빛의 먼지 구름이 지평선 멀리서 보이고 있었다. 기마들이 일다경도 채 되지 않아 평원을 가로지르는 모습이었다.

두두두두두―.

삼백여 마리의 기마가 평원에 들어서자 평원에는 순식간에 길이 생겼다.

무성하던 수풀은 잘게 부서져 없어져 버렸고 말발굽에 채인 바위는 먼지가 되어버렸다.

마상에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투구와 짐승의 가죽으로 전신을 감싼 사람들이 무서운 속도로 앞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몽고 징기스칸의 후예들이었다. 말에서 태어나고 말에서 죽는 이들은 광활한 대지를 벗삼아 살아나갔고, 자신의 생활에 철저한 약육강식의 원리를 적용시켰다. 생활환경이 척박할수록 강한 자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기때문이다.

지금 신기한 것은 철저히 가족 중심의 부족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데 이들이 이토록 많이 모여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용맹한 전사임에는 틀림없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융합되고 모이지는 않았다. 그것은 대지를 짓밟고 살아온 그들의 특유한 고집과 어느 곳에 속박 당하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들은 이렇게 모여들었고 그것은 이들에게 이런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자가 이곳 달단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혈월사신(血月死神) 풍야후(風夜后).

이자는 현재 혈문 달단의 지배자였다. 광오한 성격으로 제 이의 칸을 꿈꾸는 자였으며 세계를 자신이 지배할 것이다라고 장담하는 자였다.

그는 달단인들에게는 신으로 추앙받고 있을 정도였다.

그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는 불과 세 살에 천 리를 걸어 이 달단에 들어왔고, 그때부터 자신의 왕국을 이곳에 세우기로 작정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스물이 되었을 때, 그는 이곳에 혈문 달단을 세우고 스스로 지배자가 되었다.

혈문달단(血門 團).

이들은 스스로 칸의 후예라고 내세우면서 공공연히 칸의 영광을 위해 자신들이 일어섰노라고 했다.

이들은 극히 소수민족이었으나 풍야후에 의해서 뭉쳤고 이제는 거대한 대륙의 지배자가 되어 있었다.

달단에서 이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아이들은 이곳에 들어 전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그 꿈을 위해 어린 시절부터 무예와 기마를 배우며 성장했다.

그러던 어느날엔가부터 이곳에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 넓은 대평원을 지나는 기마의 수는 점점 늘어가기 시작했고, 혈문달단의 세력은 점차 많아져 가고 있었다.

오늘도 변방에서 모집된 혈문의 전사들은 이렇게 함께 혈문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들이 짓밟고 지나간 지면을 뚫고 뛰어나온 검은 그림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후면에서 달려가고 있던 십여 인의 목을 베어냈다. 신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완벽한 암습이었다.

앞선 자들은 자신들의 동료가 암습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예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렇게 태평하게 달려가고 있던 혈문의 전사들 앞을 가로막는 것이 있었다.

"누, 누구냐?"

"웬놈들이냐?"

검은 무복의 사내들 사십여 명이 기마의 앞에 어느샌가 늘어선 것이었다. 그들은 아무말도 없이 묵묵히 서 있기만 하였다. 하지만 혈문인들은 그들로부터 뻗어오는 살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저들은 적이다! 베어라!"

파악―! 선봉으로 달리던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외치면서 창을 휘두르며 나갔다. 막 창이 무복의 사내들 중 하나의 목을 베려는 찰라, 무복의 사내들은 비조처럼 뛰어 올라 앞 선 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이 그렇게 뛰어오르자 멀리 언덕 위에서는 화전(火箭)에 불을 붙인 궁수대가 모습을 드러내며 화살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평화롭던 평원이 순식간에 지옥도로 변해버렸다.

마른풀에는 불길이 치솟아 수많은 사람이 불길에 휩싸였고, 간신히 불길을 피한 자는 어디선가 나타난 사람들에 의해 목이 베어지고 손발이 잘려나갔다.

말에 밟혀 으스러지는 자, 날아오는 화살에 관통되어 죽는 자, 적인지 자신의 편인지도 모르고 마구잡이로 칼과 창을 휘두르다 쓰러지는 자 등 가관도 아니었다.

처절한 혈투, 아니 도살이 이루어졌다.

하늘은 시신과 풀이 타면서 내는 검은빛의 연기로 가득차 있었고, 메케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들판에는 말과 사람의 시체가 반쯤 그을려 여기저기에 나뒹굴고 있었다.

"으으, 으으으으......."

여기 저기서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 불화살이 쏟아지던 언덕 위에 한 사내가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팔짱을 낀 그 사내는 마치 거산(巨山)을 바라보는 것 같은 몸집을 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차양이 달린 챙이 넓은 모자가 씌여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는 삼 인의 무사가 도검을 번쩍이면서 호위를 서고 있었다.

"살아 있는 자는 철저히 척살하라!"

먼지가 풀풀 날릴 정도로 건조한 음성이었다.

"하잇―!"

무도복의 사내가 복명한 후 대지를 스치듯 뛰어 전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뒤이어 처절한 비명소리가 하늘을 수놓았다.

아아아아악―!

불길이 서서히 잦아들고 평원에는 정적이 찾아들었다.

이 사건으로 세외에는 충격이 찾아들었다.

누구냐? 누가 이 달단에서 혈문의 형제들을 건드릴 수가 있단 말이냐?

이 파문은 달단의 아주 먼 곳까지 퍼져 나갔고 달단인들은 분노에 휩싸였다.

여인의 음문과도 같이 오목히 자리한 지형 위에는 수백 개의 빠오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중 금쇄진(擒鎖陣) 형태로 배열되어진 빠오의 정 중앙에는 거대한 빠오가 지어져 있었다.

빠오의 안에서는 양의 젖으로 만든 차가 그들 특유의 난로 위에 올려져 끓고 있었고, 그 난로를 중심으로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그 정 중앙으로 한 사내가 보였다. 그는 곰의 가죽으로 둘러싸인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는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있었으며, 웬만한 어른의 두 배에 이르는 거인이었다.

벌려진 가슴에 수북한 털이나 주먹만한 두 눈을 보기만 해도 그의 성격이 다혈질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

"야후. 우리의 전사들이 이곳으로 향하던 중 공격을 받아 전멸했습니다. 이는 명백한 도전입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분한 목소리로 그 거인을 향해 말했다.

우두둑―!

 풍야후의 손에 들려있던 찻잔이 으스러졌다.

"상대는?"

"아,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은 전략적(戰略的)으로 훈련된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군에서 사용하는 전술(戰術)을 쓰고 있었습니다."

부글부글, 달그락―!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고 그로 인해 차 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군인이란 말이지?"

"그렇게 사료됩니다. 그들의 무공 흔적이나 수법은 중원의 것이었으며 그들이 사용한 무기들 역시 사천에서 자생하는 특수한 목재와 복건에서 생산되는 철을 사용한 무기들이었습니다."

그러자 발끈한 무장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우리도 그자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 합니다."

"당장이라도 진군해야 합니다."

"제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그때 뒤쪽에서 묵묵히 앉아 있던 화리(禾利)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합니다. 그토록 철저히 훈련된 자들이 이런 실수를 한다는 것이 미심쩍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누군가가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계략을 쓰려고 한 것 같습니다."

풍야우는 화리를 바라보았다.

"음모란 말인가?"

"확언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시면 안됩니다."

"하지만 음모라 할지라도 이런 일이 생긴 이상 중원으로부터 명백한 답을 들어야만 합니다."

풍야우는 말이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번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러나 그의 질문에 답하는 자가 없었다.

그도 나이를 먹었음인가? 수년 전만 해도 이런 상황이 닥쳤다고 한다면 한달음에 자신의 구룡도(九龍刀)를 집어들고 질풍같이 중원으로 쳐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도 이제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이지 않은가? 그의 눈은 어느새 벽에 걸려있는 구룡도로 향해졌다.

'오십 년 세월이 나를 이렇게 무기력하게 만들다니. 그러나 이는 간과할 수 없는 일!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               *               *

대막의 하늘 아래 가장 많은 것을 꼽으라면 단연코 모래가 될 것이다.

어른 엄지손톱 만한 알갱이에서부터 수북히 쌓여있지 않다면 보이지조차 않을 미세한 모래알갱이까지 아마 누군가가 세어 볼 수만 있다면 하늘에 떠 있는 별의 수와는 비교도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람과 그 먼지만으로도 산이 만들어지고 사라지기도 하는 곳, 그곳이 바로 대막이었다.

넓게 펼쳐진 사막에 한줄기 바람이 휩쓸자 하얀 모래밭에 검은 물체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휘이이잉―!

하늘 위로 올라간 모래는 어디론가 끌려가버렸다. 그리고 드러난 것은 시체였다.

한 구, 두 구....... 무수히 많아 세어 볼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시체들이 모래속에 묻혀 간간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갑의를 입고 있었는데 간간이 무복의 차림을 한 사내들도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군사들과 혈전을 벌인 듯 대다수가 도검에 의해 상해 죽은 자들이었다.

모래 틈으로 창과 검이 삐죽삐죽 튀어나온 것이 마치 공동묘지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시신들의 몸에서는 아직도 따듯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건 이 혈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휘이잉―!

다시 바람이 불자 시신들은 늪 속에 가라앉는 것처럼 서서히 모래 속으로 그 모습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때 무언가가 모래 속을 뚫고 솟아나왔다. 그건 손이었다. 핏자국으로 얼룩진 손은 점차 솟아오르더니 허공을 움켜잡는 듯한 동작을 해 보이더니 점차 얼굴 부분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의 상체가 전부 모래속에서 나왔다.

"켁켁. 쿨럭! 크어억―!"

갑의를 걸친 사내였다.

사내의 어깨에는 붉은색의 휘장이 걸려 있었다.

이는 이자가 평범한 신분의 사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사내는 입안에서 모래 덩어리를 뱉아내었다.

한참을 콜록거린 사내는 버둥거리며 모래 속에서 몸을 빼냈다.

그 역시 적지 않은 상처를 입은 듯 너무도 힘겨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간신히 몸을 빼냈을 때 사내는 모래 위에 다시 쓰러졌다.

얼마가 지났을까?

사내는 눈을 뜨고는 앉아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 일이 지났다. 아마도 오늘은 육 일째겠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어. 사천의 목숨을 바쳐 아무도 살아 남지 못하다니. 헤헤헤헤헤! 살아 남았다. 난 살았다!"

그는 미친 듯이 경박한 웃음을 터뜨렸다.

실성한 것인가?

"헤헤헤헤헤...... 헤헤헤헤...... 케엑! 헤헤헤헤헤......."

그의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문득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는 그쪽이 동쪽이 맞는지도 몰랐지만 간절히 동쪽이기를 바라며 본 것이다.

*               *               *

"모두 몇 명인가?"

주익균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은 데다가 너무도 낮아 마치 혼자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누군가에게 분명 묻고 있었다.

주익균의 물음이 떨어지기도 전에 허공에서 한 사내가 떨어져 내렸다.

"파병인원은 정확히 팔만이천이었습니다. 우리군은 오만이 살아 남았습니다."

"상대는?"

"상대는 이만의 희생자를 냈습니다. 그들은 일류급 무사들이었으므로 그다지 손해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주익균은 예의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지금 적의 상태는 어떤가?"

"현재 삼만의 정예가 빙궁을 포위했습니다. 지리적 불리함으로 인해 우리가 열세입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군 이만이 합류를 위해 진군 중입니다."

"그럼 나머지 군사들은?"

"현재 빙궁과 합류했던 잔당들을 처리중입니다."

주익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너무 우리쪽 피해가 크다. 상대가 나의 생각보다는 강하군. 그러나 빙궁을 철저히 파괴시키도록!"

"알겠습니다."

사내는 다시 허공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               *               *

남태천의 앞에는 전장에서 달려온 듯 먼지가 뿌옇게 뒤덮인 무사 하나가 부복하고 있었다.

"그래 빙궁이 적에게 포위 당했다고?"

"예."

"전세는?"

남태천의 얼굴에는 웬지 모를 만족감이 어려있었다.

"그들은 포위되어 있으며 탈출구는 없습니다. 현재 그곳을 포위하고 있는 무사들은 이만에서 삼만여 명 정도로 보이며 일단의 무사들이 속속히 합류하고 있습니다. 그 수는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대로 간다면 빙궁은 전멸될 것 같습니다. 현재는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해 간신히 평수를 이루고 있습니다만 시간이 갈수록 절대적으로 불리합니다."

"그래? 세외에 활동중인 우리 무사들을 모으면 몇 명쯤 되겠는가?"

무사는 흠칫했다. 남태천의 말이 너무도 의외였기 때문이었다.

"한 칠에서 팔천 정도는 모을 수 있습니다."

"그래, 지금 당장 그들을 빙궁에 보내라."

"빙궁으로 말입니까?"

"그렇다. 우리는 응원군 자격으로 당당히 들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남태천이 잠시 말을 끊었다.

남태천은 무언가 재미있는 생각을 하는 듯 흡족한 모습이었다.

무사는 알쏭달쏭한 얼굴표정이 되었다. 물론 그는 부복하고 고개를 숙인 채여서 얼굴이 보일 리 없었다. 그는 남태천과 총령, 그리고 조약빙은 미묘한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을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총령보다도 먼저 도착해야 한다. 첫째 그들의 방어진을 부수어 적들을 빙궁 안으로 들어 올 수 있게 길을 터주어야 한다. 둘째 적의 우두머리를 암살해 적을 혼란시켜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흔적을 남기되 최대한으로 총령의 수하로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알겠느냐?"

"예! 하오나......."

흡족해 있던 남태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총령님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말이 많구나."

"죄송합니다."

"그런 걱정은 집어치워라! 그자는 자신의 조력자들을 잃고 코가 쑥 빠져 우리에게 말할 기운조차 없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내 명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

"예!"

무사는 일어서 남태천에게 읍을 해 보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재미있군. 이 사실을 빨리 그 계집에게 알려야겠어. 계집! 너는 나의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을 건드렸다."

남태천의 얼굴에는 오래간만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함이나 흡족함을 머금고 있지는 않았다. 잔혹하고 싸늘한 미소였을 뿐이었다.



제15장  계략(計略)



만물을 환히 밝혀주던 해가 서산으로 떨어지고도 한참이나 지난 시각이었다. 어둠이

짙어지고 하나 둘씩 얼굴을 내밀던 별들이 더욱 총총해져만 갔다.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 검은 천공을 수놓은 밝은 별들이 지상 위에 내려앉은 듯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 대도(大都) 금릉(金陵)을 끼고 흐르는 진회하의 강상(江上)에서 형형색색으로 흔들리는 수많은 빛의 무리들은, 비록 아름답기는 하지만 별빛이 주는 신비로움이나 아름다움은 아니었다.

지분냄새에 찌들고 환락에 절어있는 퇴색된 빛이었다.

곳곳에서는 야화(夜花)들의 흐드러지는 웃음소리를 한껏 머금고 있는 작은 등불들이 흔들렸다.

넓고 넓은 강상에는 하늘에 총총한 별무리보다도 더 많은 듯 보이는 화선(花船)들이 저마다 다른 빛을 밝히고 물결을 따라 일렁이고 있었다.

흥을 돋구기 위한 악공들의 연주소리가 끊어질 듯이 이어지며 강 위에 잔잔히 깔렸다. 또한 잔잔히 흐르는 강물과 소매 끝을 간지럽히는 바람결을 따라 도도한 주향(酒香)이 피어오르고 호쾌한 사내들의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밤이 더욱 깊어질수록 그 기운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고, 서서히 물안개가 잡혀갔다.

때를 같이하여 붉은 등들은 내려질 것이며 남정네들의 도톰한 주머니를 노린 여인들의 몸짓이 시작되리라.

또한 영웅호걸임을 자처하는 위장부(偉丈夫)들과 꼿꼿한 자세로 공맹(孔孟)의 가르침을 논하던 서생 나부랭이들이 이곳에 넘쳐날 것이다.

그들은 기녀들의 손목을 못이기는 척하며 만지작거리면서 쾌락과 타락에 물들어 자신마저 잃어버릴 것이고, 태초 적부터 내려온 원초적인 몸짓을 통해서 쾌락을 얻기 위해 몸부림을 칠 것이다.

그제도 그랬고 어제도 그랬고, 아마 내일 역시도 많은 사내들의 아랫도리를 설레게 만들고 코를 벌름거리게 만드는 그 연분홍빛 향락의 역사가 계속되리라.

진회하를 밝게 물들이고 있는 강의 한 켠, 조금 외진 곳에 역시 여느 배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화선 한 척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닻을 내려놓았는지 배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물살에 흔들거리며 떠다니는 배들과는 달리 이 배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외관상으로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 화선이 사실은 평범한 소향목(紹響木) 따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애초부터 험하고 거친 바다 물살에서도 견딜 수 있게 견고하게 만들어진 배라는 사실, 또한 그 재질이 단단하기 짝이 없는 해송(海松)을 몇 번이고 제련해 만들어 수상에 떠 있는 어지간한 배들과 부딪쳐서는 흠집하나 만들기 힘들 정도라는 사실을 발견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또한 이 배가 삼 일 전 갑자기 이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아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천하제일의 정보망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신통력을 지니고 있는 자일 것이다.

가끔씩 불어오는 훈풍에 섞여오는 주향이 있었고 뱃전을 가볍게 두드리는 물결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을 뿐 화선에는 그 어떤 별다른 점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선실의 안에는 이색적인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선 선실의 분위기가 다른 화선과는 천지차이였다.

화선이란 듣기 좋은 말로 화선이지 색굴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외관상으로는 볼 수 없지만 주로 선실에는 남성의 성욕을 자극할 춘화도 같은 것이 덕지덕지 붙어있고 오색등이 걸린 곳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고풍스러운 서화 몇 점과 묵향이 진하게 배어 나오는 난화 하나가 그려진 족자가 전부였다.

그리고 바닥에는 비단으로 만들어진 방석이 몇 개 놓여 있었고, 안쪽에는 푹신한 솜과 천을 이용해 만들어진 두툼하게 만들어진 좌대(座臺)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곳의 총령은 한 사나이와 마주 앉아 있었다.

"자네는 너무 욕심이 많아. 나는 자네와 같은 눈을 가진 자들의 마음이 어떤지 잘 알고 있지. 대단히 탐욕적이고 빈틈이 없어. 또한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 하지. 자네는 군림하는 것을 좋아하겠지?"

백천우는 무표정한 모습으로 그저 묵묵히 앉아 있었다.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총령은 희미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사내라면 어느 정도의 야망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 법! 그래서 내가 이렇게 자네에게 기회라는 것을 주려고 하는 거라네. 자네는 나와 남태천과의 관계를 알고 있는가?"

백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우리의 관계는 미묘하기 짝이 없지. 엄밀히 말하면 그와 나는 사형제지간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사제지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정도의 친밀한 관계여야겠지만 어쩐 일인지 그와 나는 이렇게 벌어져 적대시하게 되었지. 이제는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처지까지 되었다네. 지금은 빙궁과 나와 그리고 월기신녀의 틈바구니에서 묶여 있지만 기회가 온다면 그는 비상하는 용이 될 재질을 갖고있네. 그는 틀림없이 이 기회에 빙궁을 치려 할 것이야. 아마도 나와 이간질하려 할지도 모르지. 나는 다 알고 있지만 손을 쓰진 않았네"

백천우는 총령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왜라는 의문이 어려있었다. 총령은 여유 있게 웃었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묻고 싶은 거겠지? 남태천이 조력자를 없애려고 하는데도 왜 가만히 있는 것이냐고 말이야. 나도 괴롭네. 나에게는 상당히 쓸모 있는 조력자이기에 말이야. 하지만 난 그분의 뜻을 거역할 수 없네. 그분이 내가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시거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가만히 있는 것이지. 지금의 정세를 주도하는 것은 나와 남태천을 만들어낸 바로 그분이시지."

백천우는 항상 차갑기만 하던 총령이 이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처음 보았다. 아니, 나약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총령은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그자가 누구입니까?"

백천우가 묻자 총령은 자조의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모른다. 나 역시 그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 하지만 그는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알고 있지. 지금도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이면 언제라도 나의 등뒤에 검을 들이 댈 그런 사람이야. 지금 당장이라도 말이야. 자네는 아는가? 하루 중 단 일초도 누군가에게서 벗어난 적이 없는, 그 구속당한 듯한 느낌을? 나는 그자가 두렵다. 남태천 역시 그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어. 그 자신은 모르겠지만 말이야."

백천우는 갑자기 섬뜩한 전율 같은 것이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자가 이토록 두려워하다니!'

백천우가 바라본 총령은 절대라는 말이 어울릴만한 사람이었다. 아니, 절대 그 자체였다.

마교 전체를 공포로 지배하고 있는 그의 그림자는 얼마나 거대한가! 그런 그가 두려움을 보이다니, 마교의 공포가, 마교를 지배해온 절대자가 말이다.

총령의 독백이 계속 이어졌다.

"나는 우리를 지배하는 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자가 어떤 자라는 것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지. 자네는 아는가?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곁에 그의 명령서가 도착해 있을 때의 내 기분을? 나를 이십사 시간동안 지키던 자들조차도 눈치 챈 자가 없다네. 이번에 그자가 어떠한 움직임도 불허한다는 쪽지 한 장을 내게 보냈더군. 이미 그는 암암리에 내가 빙궁과 손잡고 있었다는 사실과 황궁이 빙궁을 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네. 벌써 석 달이 지났네. 그가 나에게 소식을 끊은 지 석 달. 그자가 무엇을 하는지 무슨 계략을 세우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내가 그자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네. 그래서 자네를 부른 것이야. 나는 누가 그의 이목을 벗어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네. 바로 자네가 나오더군. 자네가 빙궁을 향해 가주기를 바라네. 자네라면 충

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네. 자네라면 말이야. 나는 자네가 멍청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자네라면 내 뜻을 충분히 짐작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떤가?"

백천우의 눈이 투명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 총령의 숨겨놓은 호위무사들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아무런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기분 나쁜 느낌, 누군가가 자신의 등골에 검이라도 쑤셔 박고 있는 듯한 이 느낌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백천우는 알고 있었다.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은 무언의 협박이었다.

그는 자신이 남태천과 총령이 두려워하는 자, 그리고 황궁의 표적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표적(標的)!

이것은 작은 의미에서의 이야기이다. 큰 의미로는 희생양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현재 빙궁은 거의 패망의 일로를 걷고 있었다.

만약 그가 지금 그들을 도우려 한다면 최소한 두 개의 거대세력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그것도 중원을 지배하는 세력 중 가장 강력하고 광범위한 세력들이다.

출전하면 십중팔구는 패전 할 것이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 책임 또한 누가 지겠는가?

그러나 만약 이 자리에서 고개를 젓는다면 그는 수십 조각의 고깃덩어리로 변해 진회하에 살고 있는 물고기들의 하룻저녁 밥이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먼 미래보다 현재가 중요한 법이다.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총령은 흡족히 웃고 있었다.

"그래, 내 그럴 줄 알았네. 그럼 자네에게 일만의 전사들을 내 주겠네. 현재 남태천의 자객들은 옥문관으로 향해 집결하고 있을 것이네. 나 역시 무사들을 추려 그곳으로 향하게 했네. 자네는 한시 바삐 옥문관으로 향해야 할 것일세. 그리고......."

따악―!

총령의 손가락이 퉁겨지자 무언가가 문을 밀고 쏘아져 들어왔다.

파악―! 척―! 척―!

사 인의 자객들이었다.

물 속에 잠겨 있었던 듯 전신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그들은 하나같이 몸에 착 달라붙는 수의(水衣)를 걸치고 있었다.

"이들이 자네를 호위 할 것이네. 이들의 능력은 의심하지 말게나. 자네를 충분히 보호하고도 남을 것이야. 게다가 자네에게 준 무사들은 충분한 훈련으로 이미 일류급의 고수가 된 자들이라네. 그러니 충분히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야."

백천우의 몸은 부르르 떨렸다.

이는 말이 좋아 호위지 자신을 철저히 감시할 것이니 허튼 짓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이들 하나 하나가 일급고수임이 분명했다. 자신의 주변에 이들이 숨어 있었음에도 그는 그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백천우는 싫은 내색조차 하지 못했다.

"예. 신명을 다해 보겠습니다."

백천우는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멋진 계획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고개 숙인 백천우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               *               *

중원의 전역에 한 가지 소문이 퍼져나갔다.

한 사람의 입에서 다른 사람의 입으로 이어져 나간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였고, 이 소문들은 중원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듣고는 찬사와 환호성을 터뜨렸다. 또한 이제 살았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람들도 많았다.

바로 묵묵히 문을 닫아걸고 침묵만을 지키던 남태천이 용성(龍聲)을 터뜨린 것이다.

그의 일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의 일성에 귀기울이던 사람들은 모두 환호성을 터뜨렸다.

"오라! 협사들이여. 소림은 그대들의 기개와 용기를 높이 살 것이다."

남태천이 섭요평(涉樂平)에서 천하영웅대회를 연다는 이야기가 전 중원에 쫙 퍼졌다. 그곳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면 당당히 남태천의 중원수비대에 들 수가 있다고도 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천하영웅대회가 중원수비군의 인원을 뽑는 자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천하제일의 영웅, 홍화객을 척살하고 중원무림의 기개를 세운 남태천을 추종하던 자들이나 그를 흠모하던 자들은 그 소문의 진의조차 파악하지 않고 소림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물론 그 중에는 출세나 명예, 혹은 부(富)를 위해서 가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어쨌건 침체되어 있던 중원이 이토록 후끈하게 달아오른 것은 정말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이렇듯 세상 모두가 그 일로 떠들썩해지고 시끌벅적했지만 유난히 조용하고 침체되어 있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바로 남태천의 외가인 남궁세가였다.

으스스한 가을 달밤이 너른 천을 펼쳐 놓은 듯 남궁세가를 비추고 있었다. 그 달빛에 후원에 자리잡은 원산(園山)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원산은 높이가 조금 낮기는 했지만 잘 꾸며져 있었다.

원림(園林)을 꾸미기 좋아하는 부호들은 자신의 정원을 꾸미기 위해 집 안에 스스로 가산을 만들어 자신의 부와 재력을 자랑하기도 했다.

원산을 하나 갖는 것이 칠 층 건물 열 채를 갖는 것보다 더욱 힘든 일이라 하였으니 부호들이 이 원림을 얼마나 중하게 여겼는지 능히 짐작 할만한 것이었다.

특히, 호를 파고 그 옆으로 가산을 세운 뒤 원림을 조성하고 그와 어우러지는 정자를 지어놓는 일은 호사취미를 갖은 사대부거나 천하를 질타하는 거부가 아니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남궁세가의 원산은 그들의 세력이 어느 정도 수준임을 보여주는 작은 일면이기도 했다.

그런 원산이 솟아있는 그 옆에는 원(園) 시대에나 지어 졌을 법한 낡은 집이 서 있었다.

벌써 십여 년째 아무도 드나들지 않은 것 같은 낡은 집이었다. 전에는 객을 쉬게 하는 객방이나 창고로 쓰였을지도 모르겠으나 이제는 폐가나 다름없었다.

그런 이곳에 흐릿한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안력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면 감히 발견하지 못했을 것 같은 그런 흐릿한 그림자였다.

그것도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누군가 봤다면 자신의 눈을 의심했을 것이다.

비록 그자가 무공을 익힌 무인라고 하여도 말이다.

건물의 표면적인 용도는 창고였으나 본래 목적은 세가 안에서 불미한 사건을 일으킨 노비나 죄인들을 심문하고 가두어 두는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벽에는 아직도 먼지를 허옇게 뒤집어 쓴 채찍이며 고문기구들이 걸려있었다. 이미 녹슬고 다 낡아 버린 것들이었지만 피를 머금은 것들이어서 그런지 묘한 거부감과 살기가 어려있었다.

그림자는 서슴없이 건물 안을 돌아다녔고 어떤 방에 들어서자 능숙하게 벽의 한곳을 어루만졌다. 벽이 갈라지며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정도의 입구가 생겼다.

사내는 망설임 없이 그 입구로 들어갔다. 이미 이곳을 잘 알고 있는 듯 망설임이나 조심스러운 몸짓은 보이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악마의 입처럼 시커먼 굴이 나왔다. 어두컴컴하고 무서워 보이는 문양이었지만 실은 벽돌로 쌓아올린 것이었다.

다시 축축한 곰팡이 냄새가 물씬 풍기는 복도를 지나자 커다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그 공간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었는데, 그 방들에는 어른 손가락 두께의 철봉이 가로질러 있었다. 그것으로 이 방들의 용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사내는 그 중 한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유독 녹이 슬지 않고 굵기도 더욱 굵은 철봉으로 막혀있는 방이었다. 그 앞에 서자 그는 자신의 얼굴을 가린 두건을 벗었다.

그런데 드러난 얼굴은 남태천이 아닌가!

남태천은 어두운 옥 안을 바라보았다. 무공이 이미 입신의 경지에 올라있는 그에게 어둠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옥 안에는 누군가가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머리를 산발해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사람이었고 골격은 매달려 있는 자가 사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남태천이 벽의 한 곳을 건드리자 철봉이 위로 올라갔고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정도의 공간이 생겼다. 남태천은 옥 안으로 들어서더니 사내의 목에 걸린 칼을 부숴 버렸다. 그것은 어른 손가락 두께의 나무판자였는데 너무도 허망하게 부서져버린 것이다.

남태천이 칼을 부술 때의 압력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그 사이로 드러난 것은 흉측한 몰골의 사내였다.

그는 쉰 살이 좀 넘어 보였는데 인간이 인간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짓을 모두 다 받아 본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선 그는 다리가 없었다.

다리는 칼에 잘리거나 원래 불구의 몸으로 태어나서 없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를 매달기 전에 잡아 뜯어버린 듯 흉하게 찢겨져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전신 혈맥 요소 요소에는 쇠침이 박혀있었는데 쇳독이 올라서 그 자리가 모두 시퍼렇게 변해 있었다.

눈이 있었음직한 자리에는 휑하니 구멍 두 개가 자리하고 있었고, 이미 으스러져버린 코는 형태라는 것이 없었다. 또 그 사내의 이는 이미 모두 뽑혀 그가 그나마 입이라고 형태를 유지한 곳은 마치 붕어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도 모자라 손과 목에는 쇠사슬이 연결되어 그의 몸은 벽에 걸어놓는 동물의 박제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사람의 몰골이 이 지경이니 주위의 처참하고 음습한 환경이야 두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럼에도 살아 있다는 것이 대단할 정도였다.

이자가 누구기에 남태천은 이토록 혹독한 고통을 주고 있는 것일까?

남태천의 입이 열렸다.

"큰 외숙."

그랬었다. 그는 지금 와병 중이라고 세상에 알려진 남태천의 외숙이자 남궁화의 오라버니인 학산노인(虐 老人) 남궁천우였던 것이다. 그는 지금 이렇듯 초라한 모습으로 최후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제게 진실을 말해 주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남궁천우는 아무런 말없이 그대로 묶여있을 뿐이었다. 죽었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죽은 것은 아니었다. 비록 거칠고 밭은 숨이었지만 그래도 숨을 쉬고는 있었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큭큭큭. 이 위선자! 왜 대답을 안 하지?"

남태천은 자신의 외숙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는 증오와 분노가 쏟아져 나왔다.

아마 눈빛으로 무언가를 태울 수 있다면 남궁천우는 한줌의 재로 화했을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알량한 명예를 위해 자신의 누이와 한 사나이를 죽였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그 사실을 철저히 은폐하고 정인군자 행세를 하다니 하늘이 두렵지도 않았던 모양이군. 어때? 이런 모습이 되고 나니까 그들의 고통이 조금이나마 느껴지나?"

남태천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텅 빈 뇌옥 안을 울렸다. 그때, 죽은 듯 움직이지 않던 남궁천우의 몸이 움찔거렸다.

"아......이야......."

이가 하나도 남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것은 아니야 라는 말이었다. 남태천은 광기 어린 표정으로 자신의 외숙을 바라보았다.

"아니야? 뭐가 아니란 거지? 아, 그래. 네가 죽인 나의 부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인가? 너한테는 쓰레기라도 된다는 거야?"

남궁천우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 어이 아이야...... 내아...... 주이고 시지는 아났어...... 처아! 아이야...... 나느 저대로 아니아......."

남궁천우는 무언가 간절히 말하고 싶은 듯 했으나 결코 남태천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더러운....... 세상에서 더러운 일은 모두 해놓고 그것을 부인만 하면,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면 그뿐이라고 생각하지. 위선자! 당신은 위선자야!"

그렇게 남궁천우를 몰아세우던 남태천은 갑자기 미친 듯이 웃어댔다. 그의 웃음소리는 비밀감옥 전체를 울릴 정도로 컸지만 그 속에서는 비애감과 허탈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웃었을까? 그의 웃음이 끝나고 얼굴을 굳힌 남태천은 남궁천우의 가슴에 손가락 하나를 대었다.

우두둑―!

뼈마디가 부서져 내리는 소리와 함께 남태천의 손가락은 남궁천우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제 당신은 살아있을 필요가 없어. 더 이상 가지고 놀 여유가 없거든."

그리고 남태천은 아무 미련 없다는 듯 돌아서 나왔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시대가 오는 거야. 나만을 위한 새로운 시대가! 나를 머뭇거리게 하고 가로막던 모든 것들이 없어졌으니......."

*               *               *

사람들의 시선이 청년의 얼굴로 모아져 있었다. 긴장이 잔뜩 흘렀다.

그때 느닷없이 중추신개가 이야기와 전혀 상관없는 질문을 했다.

"자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네. 내가 예전에 말이야. 누구에겐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거든? 그는 살인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초극(超克)의 예술이라고 하더군. 자네는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말에 동의 할 수 있겠는가?"

중추신개의 엉뚱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위 사람들은, '이 늙은이가 미쳤나? 갑자기 뜬금 없이 예술은 뭐고 살인은 뭐야?' 하는 표정들을 했다.

하지만 얘기를 꺼낸 중추신개의 모습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신기했는지 넋을 놓고 청년의 얘기를 귀기울이던 추정호도 중추신개를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도둑질이나 도박은 손목을 잘라서도 막을 수 없다고 말이야. 중독성이 강하기 때문이겠지. 그러나 진정 두려운 것은 피 맛을 본 자라고 생각하네. 그 중독성이 도둑질이나 도박하고는 비교가 안 되게 강하거든. 살인에 맛을 느낀 자는 어떻게도 구제할 수가 없다네. 내가 보기엔 남태천이 그런 것이 아닌가 싶구만. 목적을 위해 살인을 하던 것이 이제는 살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것이네. 사람의 심리라는 것이 단순히 일자로만 향하지는 않는 것이거든. 더욱 무서운 것은 절대의 자리, 아니 그 비슷한 자리에 있는 자는 독선적으로 되기 쉽다는데 있네. 그들은 도대체가 앞뒤를 가리지 않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옳은 것이고, 그르다고 생각하면 그른 것일 뿐 선악의 기준이나 이 세상의 윤리 따위에는 자신이 속해 있다고 생각하지 않거

든. 하나 둘이 아니라 천 명을 죽여도 언제나 정당화되며 항시 옳은 것이 되는 거라네. 자신 스스로가 선이라는 착각에 빠져있어."

중추신개의 장황한 연설이 끝을 맺자 조용히 듣기만 하던 청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도 심리적으로 나약한 자들에게나 통하는 것이지, 무공을 익힌 자에게는 그런 것이 통할 리 있겠습니까?"

객점 안에는 중추신개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청년의 목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은 그저 묵묵히 앉아 두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뭐랄까? 차분히 가라앉은 분위기가 산중에서나 느낄 수 있는 적막함마저 느끼게 했다.

이곳에 살아있는 자들은 중추신개와 청년뿐인 듯 했다.

추정호도 무척이나 흥미가 있다는 표정이긴 했지만 흑의인처럼 묵묵히 앉아 술잔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네. 나의 생각은 다르다네. 우리는 흔히 마도와 정도를 가르지. 하지만 그 마와 정의 차이가 무엇인가?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선이고 누군가가 추구하는 것이 악이겠는가? 아마 세상 누구도 정의를 내릴 수는 없을 것이야. 그래서 나는 그 둘이 추구하는 것을 살인으로 나누었네. 마는 살의를 느끼는 자들이고 정은 살의가 없는 자들이란 말이네."

추정호가 중추신개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살인을 한 자는 모두 마(魔)란 말씀이십니까?"

"아니, 아니지. 그것과는 달라. 단순히 살인만으로 정과 마를 나눌 수는 없는 것이네. 내가 말하는 것은 그 속에 숨겨진 의도라네. 자네는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는가?"

추정호는 어리둥절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죽여 보았는가?"

추정호는 말하기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 열 명쯤 될 것입니다."

"호오, 강호에서 활동이 적었던 자네가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였단 말인가? 어쨌거나 자네는 그들을 죽일 때 어떤 마음가짐이었나? 물론 부득이한 상황이었겠지만 말일세."

추정호는 자책의 빛을 띠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전 살생 자체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스스로 다른 사람을 해하기 위해 죽인 적은 없었습니다. 전 당시 그들이 죽어 마땅한 자들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물론 후회 역시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랬기에 전 조금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고 살인을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역시 제 앞에 그런 자가 있다면 가차없이 그에게 살수를 전개할 것입니다."

추정호는 자신의 좌측에 앉아 있는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알 수 없는 야릇한 살기가 감돌고 있었지만 청년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술잔을 기울이는데 바빴다.

"그래, 우리 인간은 어떤 형식으로든 자신을 합리화시키려 하지. 자네의 말도 맞을 것일세. 하지만 말이야. 내 말은 자네의 살인을 뭐라 하는 것이 아니네. 우리는 무인이고 무림이라는 영역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 그런 우리가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네. 이치에도 맞지 않지. 내 말은 어떤 형식이나 사상으로 이루어진 살인이 자네의 마음에 어떠한 여운을 남겼는가 하는 말이네."

"과히 좋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좋지 않을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무덤덤하다고 해야 할까요? 물론 처음에는 몹시 긴장을 했고 왠지 허탈함마저도 들었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무덤덤이라....... 그래, 그 표현 재미있군. 그러나 자네 역시 그 묘미를 알고 있는 듯 보이는군. 살인이라는 것은 마약과도 같지. 그래서 행하면 행할수록 그 나락에서 고통스러워하며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이야.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 나락 속에서 쾌락을 꿈꾸고 그것만을 추구하지. 하긴 인간만큼 쾌락을 꿈꾸고 그것을 추구하는 생물은, 우주만물을 통틀어 봐도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몰라. 그것으로 미루어 남태천은 스스로의 함정에 빠졌다고 해야 할까? 그런 것이 아닐까 싶네."

음산한 분위기의 객점 안, 그러나 그 분위기를 깨뜨릴 만한 간담을 갖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자들만 보아도 능히 한 지방을 좌지우지 할만한 인물들이 대부분인 이곳에서 누가 감히 나설 수 있겠는가?

지금 이곳에서 움직임이 활발한 자는 오직 자신의 이름조차도 밝히지 않은 이 청년뿐이었다.

"주인장."

쾅―!

청년이 술독을 들어보다가 술이 다 떨어진 것을 보고는 탁자에 술잔을 내려놓으며 큰소리를 쳤다. 고의였는지 아니었는지는 모르지만 술잔을 내려놓는 소리는 유달리 크게 들려왔다.

주인은 처음부터 살살거리며 비위 맞추기에 여념이 없었지만 추정호와 중추신개의 진정한 정체를 알고 난 후부터는 감히 나서지도 못하고 계산대 옆에 쭈그리고 앉아 눈만 멀건이 뜨고 있었다.

그러던 중 커다란 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라서는 허둥지둥하는 걸음으로 재빨리 달려왔다.

"예."

"술이나 한 독 더 가져다 주시오"

"예."

청년이 열 독을 비우자 주인도 이제 더 이상은 만류를 하지 않는 눈치였다.

주인장은 후다닥 주방으로 달려들어갔고 그 모습을 보던 청년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하하하...... 켁켁! 하하하하......!"

그는 얼마간을 미친 듯이 웃었고, 얘기를 나누던 중추신개와 추정호는 멍청히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러나?"

중추신개가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하하...... 하! 살다보니 이런 희귀한 일도 다 있군요."

"그게 무슨 말인가?"

청년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행동은 짐짓 과장되게 보여 어쩐지 우스꽝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은 제 생애를 통틀어 가장 호강한 날이 될 것입니다. 아니 전대미문이라고 해야 옳을까요? 어쨌건 이토록 호강한 날은 다시없을 것이란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중추신개는 청년의 행동에 별 놀랍지도 않다는 듯이 웃고 있었지만 입으로는 계속 괴이하다는 말만을 하고 있었다.

"괴이하군. 괴이해......."

그제야 주방으로 들어갔던 주인이 어른 머리통만한 술독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술독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더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멍한 눈으로 청년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아닌 주변의 모든 이들은 청년의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는 눈치였다.

청년 역시 스스로 이야기에 도취되어 있는 듯 술잔을 입에서 떼기 무섭게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험!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남태천이 주최하는 천하영웅대회의 날이 임박하였고 소림으로 많은 무인들과 기인이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               *               *

섭요평(涉樂平).

이곳이 섭요평이란 이름을 얻게 된 데에는 한 가지 사연이 있었다.

섭 씨 성을 가진 악공 처녀가 살았는데 그녀는 음악에만 몰두하다 우연히 한 사내를 알게 되었다. 사내는 처녀와 사랑을 나누다 사소한 오해로 인해 사내는 머리를 깎고 소림사에 입문해버렸다. 번뇌를 벗어버리려는 노력이었을 것이다.

처녀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는 사내를 찾아 소림사로 찾아왔지만 청년은 그 처녀를 외면하고 만나주지 않았다.

하지만 처녀는 돌아가지 않았고, 이곳 섭요평에서 한 곡의 노래를 지어 부르고는 피를 토하며 죽게 되었던 것이다. 그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너무도 애절한 그 노래를 섭요가(涉樂歌)라 칭해 부르게 되었고 그런 그 여인이 죽은 이 평야를 섭요평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후 젊은 승려 하나가 십오야에 이곳에 앉아 불경을 읊다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하는데,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그 젊은 승려가 어느 계곡으로 들어가 불당을 짓고 평생을 여인의 제를 지내며 보내다 죽었다는 것이었다.

더욱 특이한 일은 그 일이 있은 후, 이곳의 음기가 세어져서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했고, 돌무더기만 쌓인 척박한 땅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런 섭요평에 어느 샌가 돌을 쌓아 만든 단 수십 개가 놓여있었다.

소림에서 천여 명의 제자들을 투입해 지은 것이었다.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남태천의 휘하에 들기 위해 힘과 무를 겨루게 될 곳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뽑힌 자들은 구대문파의 정예들과 함께 마교와 사도 무리들을 정벌하게 될 것이다.

이번 대회는 척마대회(斥魔大會)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 대회의 개최 일이 다가올수록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시끌벅적해졌고 저마다 척마의 결의가 대단하여 그 열기 역시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 열기와는 상관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척마대회의 성격을 띤, 천하영웅대회를 하루 앞둔 밤이었다.

섭요평에는 참가자들을 위해 소림에서 지어놓은 막사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또 그 사이로는 참가자들의 안전을 위해 막사 주위를 도는 위사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지금 이 순간 어스레한 달빛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들이 있었으니.......

막사 안에는 한 사내가 가슴을 훤히 드러내놓은 채 잠이 들어있었다. 그러던 사내가 어떤 기척을 느끼고 잠에서 깨었다.

"누, 누구냐?"

그의 앞에는 뿌연 그림자가 있었는데 그림자는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종남파의 하관이냐?"

"그렇다. 네놈은 누구냐?"

뿌연 그림자가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서천귀, 아니 당신이?"

"죽어라."

퍼억!

서천귀는 사내의 머리를 시원스레 두 동강 내버렸다. 그리고는 나직히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이로서 다섯, 이제 둘만 더 처치하면 되겠구만. 이 기회에 마교의 씨를 말려 버리리라."

그는 곧 스르르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섭요평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날이 밝았다. 만취취는 사형을 깨우라는 사부의 명을 듣고 사형의 막사로 향했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아무리 개방적인 무림이라 하여도 드러내고 남녀가 함께 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깨운다는 이유로 남자가 자는 방에 들어간다는 것은 약간 억지가 있었다.

그러나 이미 약혼까지 약속한 만취취와 하관은 이미 공인된 사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누구도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만취취의 발걸음은 밤 사이 그리웠던 임을 만난다는 생각에 더욱 가볍고 바쁘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행복한 아침은 무참히 박살이 나버렸다.

"까악―!"

그녀는 하관의 막사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대로 혼절을 해버렸다. 어떤 여인이 약혼자가 양단 되어 죽어있는 것을 보고도 멀쩡할 수 있겠는가?

이후 섭요평은 대혼란에 휩싸였다.

그렇게 살해당한 자들은 모두 삼백이십 명이었고 그 중 각 문파의 후기지수가 아닌 자가 없었다. 그들 모두가 웅심을 가진 자들로서 앞으로 이 중원을 이끌어갈 인재들이었던 것이다.

소림은 이들을 죽인 흉수들을 마교로 단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참한 시신의 형태들이나 사용한 무공들의 악랄함이 원한을 갖지 않은 이상 행할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림은 백팔 번의 타종과 함께 장례를 거행했다. 당연히 대회가 중지되어야 할 커다란 사건이었지만 천하영웅대전은 참가자들의 요청에 의해 그대로 시행되었다.

이는 더 이상 마교의 만행을 보고 놔둘 수 없다는 수뇌들의 결정이기도 했다. 그리고 원한과 분노에 휩싸인 대회장은 치열한 격전장이 되어버렸다.

*               *               *

하얀 돌을 깎아 만들어 마치 얼음으로 조각해 놓은 듯 보이는 넓은 석궁(石宮) 안이었다.

장식조차 없어 삭막해 보이는 이곳에 십여 명의 무사들이 장검을 휴대한 채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교룡피(蛟龍皮)와 철갑(鐵甲)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무사들의 앞에는 한 사나이가 호피(虎皮)로 만든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허연 머리와 눈썹은 턱 언저리까지 내려와 있었고, 그의 얼굴과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 역시 눈발처럼 순백색인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는 극음공(極陰功)을 익힌 자의 특성이었다. 이 사나이는 눈마저도 검은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고 흰자가 주를 이루었다.

그것은 바로 이 사내가 빙궁의 궁주인 백색마인(白色魔人) 조귀화(朝鬼花)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조귀화의 앞에는 전령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것이 사실인가?"

"예."

"총령이 원군을 보냈다고?"

"그러하옵니다."

조귀화의 눈은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없으므로 기묘하게 번들거리는 눈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억양이 이상했다. 그것은 그들은 지금 어디 있냐고 묻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그들의 수는 얼마냐고 묻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애매한 질문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그들의 낌새는 어떠냐고 물어 보는 것처럼도 들렸다.

그러나 전령은 이미 숙달이 되어 있는 듯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들은 모두 육천이라고 밝혔습니다. 다급히 모으느라 많은 수를 몰고 올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지금 이십여 리 밖에 진을 치고 있으며 야밤을 이용해 성문을 열어 주시면 적의 눈을 피해 들어오겠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은 이마에 붉은 띠를 두르고 붉은 기를 앞세우며 들어올 것이니 적과 구별하라고 했습니다. 사자가 들고 온 문서에는 확실히 총령의 인장(印章)이 찍혀 있었으며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 봐도 의심할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현재 우리로서는 가뭄의 단비와 같은 실정입니다."

"그래."

빙공을 익혔음인가? 그의 목소리에서는 얼음 가루가 풀풀 날리는 듯 했다.

"좋다. 입성을 허락한다."

"명(命)."

전령은 다급히 문 밖으로 나갔다.

"마교의 원군이라?"

나지막히 흐르는 그의 목소리에서는 불안한 느낌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삼만여의 동창위들이 주둔해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그들의 기세는 놀라울 정도였다. 그들은 넓은 구릉 위에 위치해 있었다.

그들은 절대적인 지리적 불리함에도 불리하고 벌써 한 달여를 버텨왔으며 지금의 소강상태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정말로 지루한 기간이었다.

수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으면서도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것은 적의 요새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선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문제였다. 그들은 주로 군막을 치고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어찌나 추운지 군막 안에서도 얼어죽는 자들이 속출했고 동상을 입은 자들은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보급문제였다.

아무리 뛰어난 군사들이라 하여도 먹지 못하고는 싸울 수 없는 법이 아닌가! 이들의 행동은 황제의 지지를 받고 있기는 했으나 황궁과는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후방의 지원 따위는 기대할 수 없는 그런 형편이었고, 모든 물자와 식품은 자체적으로 해결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야생동물을 사냥하고 적의 군수품을 탈취해 그 동안 행동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조차 없는 상황이 되었다.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했기 때문에 이곳의 동식물들도 씨가 말라버렸고 적의 군수품을 탈취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빙궁 쪽에서는 자신들이 절대적인 유리한 입장이었으므로 자신들의 안방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는 아무리 야유를 퍼붓고는 싸움을 걸어도 내다보지도 않는 것이었다.

이러니 무슨 싸움이 되겠는가?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군마들마저 모두 잡아먹어 버린 지경이었다. 싸운다 하더라도 걸어다니면서 싸워야 할 형편이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괴로운 것은 장병들만이 아니었다.

지위관들 역시 뾰족한 수가 없어 골머리를 싸매는 중이었다.

군막 안에서는 동창위의 최고 수뇌들이 모여 앉아 회의를 하고 있었다.

현재, 이들 수뇌부는 두 파로 갈라져 있었다.

잠시 물러나 주위를 관망하다 다시 쳐들어오자는 쪽과 더 늦기 전에 전력으로 공격해 상대를 섬멸시키자는 쪽으로 나뉘었던 것이다.

많은 의견들이 어지럽게 나누어졌으며 이로 인해 좌중은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때, 한 사나이가 일어섰는데 생긴 생김은 온화했으나 그의 눈에는 신광이 갈무리되어 있어 고수라는 것이 은근히 드러나고 있었다.

"일향대(一向隊) 향주(向主) 섭장혁(涉長革)이 아뢰옵니다."

동창위에는 모두 열 개의 향대(向隊)가 존재했는데 이는 모두 십향대(十向隊)로 불리고 있었다. 또 십향대는 각각 단(團)으로 나뉘어져 모두 십 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향대는 한 명의 향주가 총괄하게 되는데 대의 총인원은 삼천 명을 상위(上位)한다.

일향주 섭장혁이 일어나자 좌중은 잠시 조용해졌다.

"지금 우리의 군세로는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식량이 바닥나 말까지도 모두 잡아먹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말도 몇 마리 남지 않았으니 이대로라면 삼 일을 버틸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후퇴하고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만이 우리가 살길입니다."

그러자 일향주의 앞에 자리한 사향주 관대(官隊)가 일갈성을 터뜨렸다.

그는 황소와 같이 생겨서 아주 우직해 보였다. 실제로도 우직하였으며 황소 같은 힘으로 많은 수훈(殊勳)을 세운 자였다.

"안 됩니다. 장부가 칼을 뽑았으면 하다 못해 무라도 베어야지요. 회군하면 적은 다시 세를 늘릴 것이고 그들을 잡기 위해서는 또 다시 많은 피를 흘릴 것입니다. 나중에 가서는 우리가 불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는 오히려 희생을 두 배로 늘리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관대가 목소리를 높이자 군막이 부르르 떨렸다. 몇몇은 귀를 막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저들은 십 년 이내에는 다시 본세를 찾기가 힘들 정도로 타격을 입었단 말입니다. 우리가 잠시 이곳에서 물러선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크게 우려할 만큼 저들이 빠른 시일 내에 회복할 것이라고는 보기 힘듭니다."

"그러니까 급습해서 끝장을 내자는 말이오. 약한 모습을 보이면 끝장이란 말입니다. 이왕 시작한 것 아주 박살을 내면 좋지 않소. 나는 자신하오. 삼 일이면 충분히 저들을 괴멸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자 다시 장수들은 자신의 주장을 펴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때였다.

"누구냐?"

섭장혁이 몸을 날리며 군막 밖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받아 들었다.

화살은 정확히 명귀의 이마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고, 섭장혁은 그 화살을 막기 위해 허공에서 몸을 세 번이나 뒤집어야 했다.

명귀의 앞에는 어느새 관대가 자신의 몸을 던져 막아서고 있었다.

가장 가까이 있던 자들이 화살을 막아서는 사이 몇몇은 이미 군막을 박차고 나섰고, 몇몇은 검을 뽑아 명귀의 주변에 포진했다.

동창위의 위력을 드러내는 무서운 동작들이었다.

마치 사전에 연습이라도 한 듯 너무나도 일사불란한 움직임들이었다.

명귀(冥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누가?'

하지만 그는 한 치의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보초들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 내 이놈의 자식들을!"

관대가 얼굴이 벌개져서는 자신의 팔뚝을 걷어올리며 막 군막 밖으로 나서려는 때였다. 명귀가 손짓을 해서 그를 불러 세웠다.

"그만해 두어라. 어차피 그 화살은 나를 해할 마음은 없었느니라."

섭장혁은 그 말에 흠칫 놀라 화살을 살폈다.

화살촉이 진흙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화살이라면 백 대를 던진다고 해도 사람을 해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화살 안은 비어 있었다. 섭장혁은 화살촉을 비틀었다. 화살대 속에서 잠자리 날개보다도 얇은 종이 한 장이 굴러 나왔다.

<전언(傳言). 오늘 저녁 자시경 성의 문이 열릴 것임.>

명귀가 그 서신을 다른 이들에게 돌렸다. 무장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야릇한 표정들을 했다.

"어떡해야 하겠는가?"

모두 웅성거리기만 할 뿐, 누구도 선뜻 나서서 말하려는 자가 없었다. 이때 관대가 나서며 말했다.

"이 서신을 보낸 자가 누구든 우리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실(失)과 익(益)을 따져봐야 합니다. 제가 보기엔 우리편인 것 같습니다."

섭장혁이 관대의 말을 막았다.

"아닙니다. 이는 적의 간교한 계략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성으로 유인해 격퇴시키려는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다시 관대가 일갈성을 터뜨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들은 이미 우리의 내부사정을 모두 파악하고 있을 것이오. 그래서 그들은 성문을 걸어 둔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 퇴각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란 말이오. 그런데 스스로 성문을 열고 우리를 불러들인단 말이오? 우리가 비록 전력이 많이 약해졌다고 하지만 수적으로 그들과는 상대조차 되지 않소. 그런데도 그들이 자신 스스로 불리한 행동을 할 것이란 말은 어불성설이오. 그들도 그 정도로 멍청한 놈들은 아닐 것이란 말이오."

섭장혁이 무언가 반박을 하려하자 명귀가 입을 열었다.

"나 역시도 사향주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오만."

동창위도 일종의 내자금성을 호위하는 군의 일족이었다. 그러므로 지위체계가 철저했으며 상관의 말이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게다가 동창위는 그 서열관계가 유난히 까다로워 상관의 말은 절대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 통념이었다. 그로 인해 섭장혁은 무언가 할 말이 있음에도 꿀꺽 삼켜야만 했다.

관대와 섭장혁은 이 동창위 내에서도 알아주는 앙숙으로 나이뿐만 아니라 서열이나 관직에 오른 시기마저도 같아 항상 서로에게 유난한 경쟁심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황제마저도 이를 알고, 이들이 서로 마주치지 않는 조직으로 떨어뜨려 놓고 업무를 보게 했었다. 그런데도 우연히도 이들은 이곳에서 마주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앙숙이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동창위의 첫번째 조건은 일가친척이 없는 고아들만으로 이루어진 단체라는 데 있다.

이곳에서는 멸문 당한 대부호나 대문호의 자제에서부터 길에서 동사한 거렁뱅이의 자식까지 귀천의 구분이 없이 데리고 동창위인으로 교육시켰다.

그로 인해 생겨난 보이지 않는 알력이 바로 이 두 사람을 대표로 표출되어 나온 것이다.

섭장혁은 유림에서 알아주던 학자인 석송(石松)의 증손으로 마적 떼의 습격을 받아 일가족이 모두 살해되었다.

그로 인해 섭장혁은 명문의 후손이라는 자부심과 일종의 권위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관대는 그런 섭장혁과는 정 반대로 황하에서 수적에게 몰살당한 떠돌이 예인집단에서 유일한 생존자라는 출신성분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예인이라면 말이 좋아 예인이지 저자거리의 술집 여자들보다도 더욱 천대받는 여인들이었다.

그녀들은 옷고름 풀기를 입 안에 밥숟가락 넣는 것보다도 더욱 손쉽게 했고, 겨울을 나고 살아 남기 위해서는 돈을 가진 자들 앞에서 스스로 아양을 떨어 몸을 뉘어야 했었다.

그들의 이런 출생 배경은 미묘한 감정의 대립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런 미묘한 감정에서부터 여타의 다른 복잡한 문제들까지 얽혀 두 파로 나뉘어 대립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각설하고, 지금 이들로 인해 명귀는 곤란한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자신의 직권으로 한 편을 옹호하면 그로 인해 다른 편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일어날 것이고 그로 인해 군세가 흔들린다면 지금까지 이뤄놓은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끝날 것이 명약관화했다.

그래서 골머리를 싸매던 중 이 서신이 구세주처럼 그에게 당도한 것이다.

그는 서서히 돌파구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 자신도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 같은 급박한 상황이라면 도박을 걸 수밖에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자정 무렵, 푸르스름한 달빛이 얼음으로 이루어진 성벽을 투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 성벽은 만년빙을 잘라서 만든 빙벽으로 그 두께를 측정할 수가 없었다.

맨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동창위의 고수들은 이 빙벽을 부수기 위해 별 방법을 다 동원했었다. 그러나 어떤 것도 소용이 없었다.

목차(木車)를 이용해 성벽을 부수려 해도 두께가 너무 두꺼워 흠도 내기 힘들었고, 화공을 써도 불길이 이는 것은 고사하고, 불화살이 성벽을 넘지도 못했었다.

특공대를 조직해 성벽을 헐어내려고 했지만 그도 발각되어 물벼락을 맞았을 정도였다.

게다가 성벽을 부수어도 빙궁 측은 낮은 기온을 이용해 물을 붓기만 하면 금새 보수가 되었기 때문에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계속 소모전만을 해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성문이 열린다는 것이 아닌가? 편지의 내용을 반신반의하면서 삼만의 동창위군들은 얼음 속에 은신 한 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리고 성루에서는 몇몇의 사람들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 동창위군과는 다르게 멀리서 성을 바라보는 무리들이 있었다.

"저들이 신호를 보내 왔느냐?"

한 사내가 달빛을 등지고 멀리 보이는 성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예. 저들은 우리를 총령의 명으로 온 무사들로 알고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자정이 넘어서 달빛이 가려지면 단 이 식경동안 문을 열어 두겠답니다."

"좋아! 그럼 문이 열림과 동시에 우리들은 적진의 깊숙한 곳으로 쳐들어간다. 외각의 군사들은 동창위들에게 맡긴다. 우리는 내전의 수비무사들과 빙궁의 제자들, 그리고 궁주인 조귀화를 죽이면 되는 것이다. 그후 적이 혼란에 빠진 사이 최대한 빨리 우리는 빠져 나오면 된다."

사내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피를 그리워하는 야수와 같이 잔인한 미소였다.

슬금슬금 검은 무복의 무리들이 성벽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분명 핏빛보다도 더 붉은 깃발이 들려있었고, 흑의인들의 이마에는 선명한 붉은 띠가 둘러져 있었다.

이윽고 하늘의 달빛이 구름의 장막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지상이 철저한 암흑 속으로 감추어진 순간이었다.

육천에 달하는 흑의인들이 야조처럼 허공을 갈랐고, 성문은 겨우 한 사람이 들어설 수 있을 정도만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흑의인들이 반쯤 들어섰을 때 한 사람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허공을 수놓았다.

"크아악! 암습이다."

"성문을 닫아라. 적의 내습이다."

그러나 성문을 뚫고 달려 들어온 흑의인들은 이미 성루에 자리한 빙궁의 무사들을 모조리 베어내고 내궁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때, 허공을 가르며 화전 하나가 솟아올랐다. 그러자 누군가가 앞으로 튀어나오며 소리쳤다.

"동창위의 영반들은 들어라. 드디어 적을 섬멸할 기회가 왔다. 일거에 쓸어버리자!"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비온 후 솟아나는 죽순처럼 얼음 벌판에서 삐죽삐죽 솟아난 사람들이 성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순식간에 성문은 부수어졌고 삼만여에 달하는 군사들이 물밀듯이 성 안으로 들어섰다.

"누, 누구냐?"

빙궁의 무사들은 그 물음을 던지고 다가서서 인영을 확인하려 했지만, 그들 앞에 서기도 전에 목숨 줄을 놓을 수밖에는 없었다. 세상 누구도 목이 잘린 채 숨을 쉴 수는 없는 법이다.

"크악. 커억―!"

어떤 이는 허둥대다가 허리가 두 동강이 나버렸다.

허리가 부러지는 자, 머리가 으스러지는 자, 목이 달아나는 자 등등 죽는 이유도 다양했고 비명소리 역시 같은 것이 없었다.

온통 눈과 얼음으로 이루어진 이곳에 마치 만개(滿開)한 장미 꽃밭처럼 붉은 혈화(血花)가 피어올랐다. 묘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백색마인 조귀화는 단정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의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있었다. 투명한 백옥 색의 액체가 가득한 찻잔에는 김이 어리지 않았다.

빙음정(氷飮情).

빙음정은 말 그대로 얼음의 정화와 같은 것이다. 빙음정은 빙하를 뚫어 얼음의 정 중앙에 고여있는 얼지 않는 물을 이르는 말이었다.

이런 정도면 그 차가움이 어떤 것이라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혹한에서도 얼지 않는 이 물은 어떤 얼음보다도 차가웠다. 이 찬물 한 방울이면 얼음 열 관을 얼려 놓은 것과 같은 효능이 있었다.

그래서 황궁에서는 더운 여름에 얼음이 필요할 때, 물에 이 빙음정 한 방울을 섞어 얼음을 만들어 먹기도 하는 귀한 물이었다.

만약 범인이라면 이 근처에만 다가가도 추위를 느낄 정도이고 이 물이 몸에 스치기만 해도 피부가 얼어 갈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물을 찻물로 이용하다니 이는 아마 전대미문의 공력과 그가 익힌 빙음공(氷陰功)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빙음정을 마시는 것도 마지막이 되겠군."

탄식인지 자조적인 말인지 모를 야릇한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앞에는 삼 인이 서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배가되더니 이내 삼백의 인물들이 그의 주위를 빽빽이 늘어서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눈에 보이는 사람은 삼백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살기까지 하면 가히 그 몇십 배를 넘을 듯한 숫자였다.

"나를 위해 오신 분들은 모두 몇인가?"

"모두 육천입니다."

백색마인 조귀화는 웃고 있었다. 차가운 미소, 얼음으로 사람을 만들어 세워 놓는다고 해도 이보다는 더 따뜻하게 느껴질 것 같은 그런 미소였다.

그의 미소로 인해 궁 안은 이미 냉굴이 되어버렸다.

"나에게 너무나 과분한 대접을 하는군. 좋아. 그대들의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지. 조심하게!"

우르릉―!

우뢰와 같은 소리가 울렸다.

조귀화 단 한명이 공력을 운기하는 것만으로 그런 소리가 인다는 것은 그의 내공이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궁 안이 은은하게 진동했다.

기(氣)라는 것은 무형(無形)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보이지만 않을 뿐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조귀화를 포위하고 있는 사람들을 본다면 그것을 여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무형의 압력에 전신을 가누기조차 힘들어하고 있었다.

아니 이미 새파랗게 질려 있었는데 그것은 그 무형의 기운에 냉한 기운까지 담겨있던 탓이었다.

살심이 생긴 것일까? 조귀화의 눈에서는 허연 살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크아아―! 죽어라."

"허억!"

퍼억―!

헛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얼음 조각으로 화해 바스러져 버렸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서너 명 정도가 더 검을 겨누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장송곡(葬送曲)의 시작에 불과했다.

"크악―! 커억......!"

"크아악―! 으악!"

많은 자들이 속절없이 쓰러져버렸다. 조귀화의 일수가 움직일 때마다, 비명이 들렸고 주검이 쌓였다. 그 주검이 이내 산을 이룰 정도였다.

그런 조귀화의 움직임을 막아가던 사내 하나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모두 포진하라. 상대는 하나라고 방심하지 말라. 하지만 우리 모두를 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허점을 찾아라!"

소리는 하나도 없었다.

일사불란한 움직임, 그것은 마치 하나의 수레바퀴에 걸린 나무살처럼 빠른 움직임이었다.

범상치 않은 자들이 포진을 하자 조귀화의 기세는 조금씩 꺾이기 시작했다.

마라구궁필살진(魔羅九宮必殺陳).

이들이 펼치는 진식의 이름으로 그 유례는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세인들에게 알려진 것은 마도무림에서 전해지는 최고의 절진이라는 것과 삼백 년동안 그 누구도 시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삼백 년 전 구유자(九幽者)가 실현시킨 후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이유는 이 진을 구성하는 개개인이 모두 일 갑자〔六十年〕의 내공을 소유하고 있어야 하며 오성이 뛰어나 진의 구성방식을 모두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단점 때문이었다.

오성도 오성이거니와 이 진을 만들기 위해서 개개인이 지녀야 하는 육십 년의 공력이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육십 년을 수련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약물이라도 복용을 해야 하는 것인데 그런 기연이 어찌 흔하겠는가?

그런데 이들은 지금 마라구궁필살진을 구유자보다도 더욱 훌륭하게 시전시키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들 모두가 일 갑자의 내공을 가진 자들이라는 뜻이었다.

본시 구유자가 이 진을 시전한 이유는 묵각혈룡(墨角血龍)을 제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진은 다수가 소수를 제압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약한 힘으로 강하고 성세(盛世)하는 힘을 막아내는 방파제의 역할을 하는 효용을 지닌 것이었다.

휭휭―!

조귀화의 움직임은 많이 둔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가 움직일 때마다 일어나는 경력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하지만 한 손으로 여러 손을 상대할 수가 있겠는가?

조귀화, 그의 무공은 진정 개세적인 무공이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이루어 낼 수 없을 정도로 초절한 힘이었지만, 마라구궁필살진의 위력과 쉴 새 없는 공격으로 점점 더 궁지에 몰려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방은 공격하고 사간(四間)은 후퇴하라. 적에게 틈을 주지 마라."

그는 이미 삼백서른여덟 곳에 검상을 입었다. 희대의 얼음마왕으로 불리며 천하제일의 빙공을 익힌 자의 피도 붉은 빛이었다는 것이 약간 신기했다.

그의 순백색의 옷은 이미 혈의가 되어 있었다.

"크하하! 누가 세상에서 나를 해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자만했었다. 그 자만이 오늘 나를 죽게 만드는구나."

쿵―!

그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서서히 허물어져갔다. 사라지는 그의 의식 너머로 궁 안으로 몰려오는 군사들의 함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궁 안에는 머리가 잘린 조귀화의 시체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시신들이 즐비하게 널려있었다.

*               *               *

"왜죠?"

"뭐가 말인가요?"

추정호가 의문에 찬 얼굴로 물었다.

"총령이란 사람이 보낸 백천우란 인물 말입니다. 그는 왜 도착하지 않았습니까? 그라면 한 달이라는 시간동안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을 텐데요?"

청년은 웃었다.

그 미소의 의미는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았지만 언뜻 보기에도 조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노화자는 이미 술에 취한 듯 흥얼거리다 꾸벅거리고 있었고 흑의인은 여전히 마치 목각인형처럼 조금의 흔들림이나 움직임도 없었다. 그는 영원히 움직일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누구도 청년의 그런 웃음을 신경 쓰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왜 입니까? 그자는 왜 한 달이 지나도록 도착하지 못한 겁니까? 옥문관에서 빙궁까지는 일반사람의 걸음으로도 한 달이면 갈 수 있습니다. 기마를 이용하면 십오 일 정도면 도착할 수 있구요. 그런데 무공을 익힌 자들이라면 능히 십여 일이면 도착할 수 있었을 텐데요?"

청년은 추정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당신은 화산에서 밖으로 나선 일이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 참으로 놀라운 식견을 가지고 계시군요."

그 말에 추정호는 흠칫했다.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또 그 얼굴에서는 묘한 기운이 피어올랐는데 그것은 바로 살기였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청년은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며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후후! 그 이유는 배반 때문이었지요. 백천우는 개와 같은 자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던질 수 있는 자이지요. 그래서 자기의 스승마저도 서슴없이 암습해 버린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자의 이야기를 하지요. 일단 그자는 총령의 명으로 진회하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청년이 그런 모습을 보이자 추정호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걷혔다.

"그런데 왜 그런 자에게 그런 막중한 임무를 맡겼지?"

자는 줄 알았던 중추신개가 언제 깨었는지 일어나서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청년에게 질문을 던졌다. 청년은 추정호에게 질문을 받았을 때와는 다르게 아주 순수하게 웃고 있었다.

"그거야 표면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남태천과 자신의 수하들에게는 자신이 빙궁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 그는 이미 빙궁을 포기하고 자기만의 다른 힘을 모으기 시작했었습니다."

중추신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듯 손바닥을 탁! 치는 모습이 조금 과장되어 보였다.

"오호라! 그랬군."

"그후 그는 옥문관을 거쳐 빙궁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가 어떤 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후 그를 봤다고 하는 자도 없었고, 물론 그가 이끌고 갔던 자들 역시 단 한명도 돌아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단 한 명도 말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백천우를 공격한 세력은 단 한 곳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추정호는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됩니다. 그렇다면 그자가 중간에서 사라졌다는 얘기인데, 일반 수하들이야 어떻게 한다고 하지만 그를 쫓아간 그 호위들은 어떻게 처리했단 말입니까?"

청년은 싱긋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도 잘은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보이지 않는 칼을 막을 수 없는 법이라고 했던가요? 아마 암습을 했다거나 뭐 그랬을 것입니다. 원래 백천우라는 자가 보통 간교한 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자세한 것은 누구도 모르겠지요. 그러나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한 달 후, 누군가 은밀히 남태천의 처소에 드나드는 것을 본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법 정확한 정보입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백천우라고 자신합니다."

"글쎄요. 그렇게 단정지어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정확합니다.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후후, 몹시 흥분하시는군요. 사실 이것을 꾸며진 이야기라고 해도 저야 어쩔 수 없지요. 누구도 못 믿을 만큼 황당한 얘기임에 틀림없으니까요."

그제야 자신의 행동을 자각한 듯 추정호는 얼굴을 붉히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쨌거나 그렇게 일은 마무리 지어지고 남태천은 조약빙을 찾아가게 됩니다."



제16장  분노(忿怒)



덜그럭!

석실 안이 너무도 고요한 나머지 찻잔을 놓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두 사람은 너무도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실내가 조용해지면 조용해질수록 그들 사이에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남태천, 전 중원인이 인정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찬양해 마지않는 영웅이자 협객이었다.

그런 그가 오늘 열 평도 되지 않는 작은 석실에서 사선녀 중의 일인인 월기신녀 조약빙과 마주 앉아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들은 역시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는데 둘 다 너무도 태연해 보였다.

아마도 호위장들이 그들 뒤에 도검을 번쩍이며 서 있지 않았다면 단순하게 한 여인을 손님으로 맞아서 차를 마시고 있다고 했을 정도였다.

남태천이 느긋하게 앉아 입을 열었다.

"나는 증오란 감정을 제일 먼저 배우게 되었소. 그것도 나의 큰 외숙과 작은 외숙을 통해서 말이오. 그때가 내 나이 열다섯인가? 아마도 그랬을 것이오. 그리고 그들은 나의 손에 죽었소."

조약빙은 내심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찾아온 남태천도 그랬지만 그의 등뒤에 서 있는 저들은 무엇인가?

당당히 적의를 드러낸 그의 모습은 그녀가 그토록 숨기고자 노력했던 자신의 비밀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불안을 겉으로 드러낼 만큼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태연자약했다.

"그것이 어쨌다는 거죠?"

남태천 역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행동에 오히려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었다.

"어쨌다는 것이 아니오. 당신에게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군.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두는 게 좋을 것이오. 나는 나를 거스르거나 내 증오에 불을 붙인 자들을 단 한번도 용서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그 보복의 정도가 어떠냐는 것이었지.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용서할 수 없는 대상과 이렇게 앉아 있소."

조약빙은 그의 말을 들으며 야릇한 기분에 빠져버렸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안타까움과 아릿한 고통, 그리고 서러움이 밀려왔다.

그녀가 이토록 비참해져야만 하는 이유는 한 남자를 사랑했다는 것밖에는 없었다.

세상의 남성을 발가락의 때만큼도 마음에 두지 않던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이 남자의 강함에 반하고, 그의 어떤 고독함에 끌려버린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그런 감정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다. 오로지 도도하고 자신만만하게만 살아온 그녀로서는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인내하고 기다려야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상황은 이렇게 악화되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를 만나게 한 신을 저주했다.

"호호호!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거죠? 나를 죽이겠다는 말인가요?"

남태천은 그녀의 반응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다음 말을 내뱉었다.

"아니, 난 당신을 죽이지는 않겠소. 단 소하를 내놓는다면 말이오."

남태천은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차가운 한수(寒水)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후후후, 당신은 아직 자신의 처지를 모르고 있는 것 같군. 내가 곧 알려드리리다. 당신은 이걸 보는 순간 하늘을 저주하게 될 것이오."

조약빙은 수수께끼 같기만 한 그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그러면서도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아직 소하의 죽음을 모른다.'

따악―!

남태천이 손가락 두 개를 퉁기자 남태천의 뒤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몸에 착 달라붙는 무복을 걸치고 있었다.

"물건은?"

인영의 손에는 검은 상자 하나가 들려있었는데 상자의 표면에는 서리가 내려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럼 상자 안에는 얼음이라도 채워 왔단 말인가?

무복의 사내는 조약빙의 앞에 자리한 탁자 위에 그 상자를 내려놓았다.

"그것을 열어보시오. 내가 당신에게 주는 최초이자 마지막 선물이 될 것이오."

조약빙의 얼굴에는 의혹이 어렸다. 그녀는 가슴 한 귀퉁이로 스며드는 이 불안감과 알 수 없는 떨림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떨리는 손이 그 상자를 열었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복합적인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분노, 절망, 슬픔, 좌절감, 패배감, 그리고 원한이었다. 아마 누구라도 자신의 부친 머리가 원수의 손에 들려왔다면 이런 모습일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서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남태천을 바라보았다.

남태천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사악한 미소를 띤 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뭘까? 무엇이 이 두 사람을 저주해서 서로를 증오하게 만들었는가?

그녀는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무사들은 흉흉한 안광을 뿌리며 검을 곧추세웠다. 그녀의 단 한마디면 그들은 목숨을 도외시한 채 남태천을 베어 가리라.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뒤로 흐릿한 그림자가 어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동영(東瀛)의 인자둔영술(忍者遁影術)이었다.

인자둔영술.

무공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하고 신법이라 칭하기에는 너무도 신비한 경공신술(經功神術)이었다. 이형환위(移形換位)보다도 한 단계 위라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그 형체나 기척은 없지만 분명 그림자로는 존재하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 상황을 알 리 없는 조약빙은 원독에 찬 눈으로 남태천을 노려보다가 그토록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을 뱉어냈다.

"죽여!"

조약빙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자들은 검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우두둑―!

그들의 목이 한 바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들이 검을 뽑아들기도 전이었다. 이미 그들은 산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털썩. 털썩!

그들은 집단이 쓰러지듯이 힘없이 쓰러져 내렸다.

조약빙은 곧바로 있어야 할 싸움이 벌어지지 않자 뒤를 돌아보았다.

남태천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입가에는 승리에 찬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후후후....... 기분이 어떠신가? 이미 밖에서도 내 수하들이 일을 끝냈을 것이다. 너는 졌어. 철저히! 이제는 소하를 내놓아라. 그럼 네 그 더러운 목숨이나마 살려 주겠다."

조약빙은 이미 사방에서 포위되어 있었다. 전부 여덟 자루의 검이 그녀의 요혈을 겨누고 있었다.

하지만 조약빙은 넋을 놓은 듯 멍하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던 그녀는 정말로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대기 시작했다.

"깔깔깔깔깔! 그깟 계집의 목숨이 그렇게도 중하더냐? 그토록 원한다면 나도 그년을 내어주지.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어! 이젠 모든 게 끝이야."

조약빙이 어느 한곳을 건드리자 그녀의 뒤에 자리한 석벽이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석벽이 채 다 올라가기도 전에 남태천은 퉁기듯 석벽 너머에 자리한 석실로 달려들어갔다.

어찌나 빠르던지 그의 몸이 흔들리는 순간 그는 이미 석실의 중앙에 망연히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수정으로 이루어진 관이 하나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소하가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모습으로 누워있었다.

남태천은 그 관을 짚고 서 있었다. 그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았다.

사람의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우리는 상대의 기분이나 감정을 알기 위해서 맨 처음 눈을 본다. 사람을 처음 대할 때에도 우선은 눈을 살피는 것이 정석이다.

그런데 슬픈 사람의 눈은 어떨까?

눈물이 날까? 사람이 진심으로 슬프면 피눈물이 흐른다는 얘기도 있다. 그렇다면 그보다도 슬프면, 슬픔이 극에 달해 있다면 어떨까?

그 조차도 흐르지 않을 것이다.

본 적이 있는가? 공허한 사람의 눈을, 무심하고 차가운 그러면서도 죽은 자의 눈처럼 생의 의욕이나 기운이 깃들여 있지 않은 그 모습을.......

남태천은 웃고 있었다.

"흐흐흐...... 흐흐...... 흐흐흐흐흐......."

낮은 울림처럼 낮게 시작한 그의 웃음소리는 이윽고 광소가 되었다.

"크하하......!"

미친 듯이 웃어대는 그 모습은 광인 같았다. 실성한 사람처럼 그는 배꼽까지 쥐어 잡고 웃고 있었지만 그 모습은 결코 우스워 보이지 않았다.

지금의 그에게서는 더할 수 없는 정말과 슬픔밖에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웃음소리가 그쳤을 때 그의 얼굴에서는 표정이란 것이 사라져 있었다.

"세상은 나의 마지막 꽃송이마저 꺾어버렸다."

남태천은 조약빙을 바라보았다.

조약빙은 그런 남태천을 보며 조롱이 섞인 어조로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어때? 그토록 만나고 싶던 네 여인을 만나니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가?"

남태천의 무섭도록 고요히 가라앉아 있는 눈은 조약빙을 움찔하게 했다.

퍼억―!

"꺄악―!"

남태천이 손을 기묘하게 휘젓자 조약빙은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크으으으......."

조약빙은 원독에 찬 얼굴로 남태천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너의 모든 것을 빼앗아 주겠다."

남태천의 무심한 음성이 들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조약빙은 사지의 힘줄이 모두 잘려나갔다. 예리한 면도에 의해 사지를 관장하고 있는 그녀의 모든 힘줄은 잘려 나갔고 찢겨졌다.

너무도 느리고 완만하게 시작된 그 고문은 긴 시간 이어졌다. 조약빙은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오줌을 한 바가지나 쏟아내야 했으며, 고통에 찬 비명을 터뜨렸다.

그후 그녀는 더욱 치욕스러운 경험을 해야만 했다.

그녀가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남태천의 앞에서 벗기어지고 남태천의 수하들에 의해서 윤간을 당한 것이었다.

남태천은 시종일관 무심한 눈으로 그녀의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울부짖었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혀도 목젖도 없는 그녀가 무슨 수로 소리를 지른단 말인가?

수십 명의 사내들이 그녀의 몸을 거쳐갔고 그녀의 하관은 피범벅이 되어버렸다.

그녀가 언제 남자를 경험했겠는가? 하지만 이제 고이 간직했던 순결 따위는 그녀에게 없었다.

그녀는 많은 자의 정액과 음욕이 담긴 그릇일 뿐이었다.

그렇게 세 시진이 지났다.

모두 세 시진동안 지루하고 지루한 행렬이 이어졌고 마지막 사내가 그녀의 몸 위에서 몸부림치다 일어서는 순간 그녀는 그녀를 짓밟았던 몇몇의 사내들 손에 이끌려 나갔다.

그리고 그녀의 몸은 한 길가에 버려졌다.

맨 처음 그녀를 발견한 사람은 길 가던 농부였다.

시체인 줄 알았던지 기겁을 하며 놀라 도망치려던 농부는  그녀의 외모와 수많은 사내들을 밤새우게 했던 몸을 보더니 서서히 다가섰다.

그리고 그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자신의 몸을 그녀에게 실었다.

얼마 후 그 농부는 미련 없이 떠나버렸고, 몇 무리의 사내들이 그 농부와 같은 짓을 하고는 미련 없이 침을 뱉으며 사라졌다.

조약빙은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화려했던 과거를 회상하고 있음인가?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오직 그녀만이 알 뿐, 그렇게 밤이 찾아오고 한 무리의 거지들이 지나다 그녀를 발견했다.

그들은 무언가를 쑥덕이다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자 마치 소중한 보물을 운반하듯 그녀의 육신을 들어 옮겼다.

그리고 십여 일이 지났을 때 인근에 자리한 마을의 하천에는 한 여자의 시신이 버려졌다.

더러운 하수구 물이 쌓인 그곳에 허옇게 눈을 까뒤집은 한 여인의 시신이 버려져 있었고, 썩어 부패한 얼굴은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단지 지나는 사람들 중 양물을 지닌 남자들은 그녀가 살아 생전에는 대단한 미인이었을 것이라고 수군거렸고, 마을에서는 재수가 없다는 이유로 그 시신을 거적에 싸 구덩이를 파고 묻어버렸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자 천하 사대미인 중의 하나로 손꼽히던 월기신녀 조약빙을 기억해주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               *               *

천하영웅대회.

무공을 익힌 자들의 숨은 솜씨를 겨루는 장(場)이었다.

수만의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 중에서 자신의 뜻을 이룬 자는 이만이었다.

많은 이들이 몰려와 대회를 구경하기 위해 줄을 섰고, 무인들은 자신들의 기량을 나타내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대회는 모두 십오 일간 치러졌고, 그로 인해 그 주위의 생필품은 동이 날 지경이었다.

소림에서 커다란 솥과 냄비를 수백 개 걸어 식사를 준비했지만 그것으로는 대회 참가자들을 먹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은 하남성의 성주가 친히 주선을 해서 군의 식기까지 빌어다 쓰게 되었다.

하루 고기 수요만 봐도 소 팔백 마리, 돼지 천이백 마리가 소비되었으며, 쌀은 천오백여 가마가 소비되었다. 그리고 야채는 태반이 부족해 수레로 실어 날랐는데 그 끝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대회가 끝났을 때에는 반경 팔백 리 안에는 무 쪼가리 하나 남지 않았고, 그후 일 년동안 짐승들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 정도로 이 대회는 무림사상 최대의 대회였으며 최고의 위용이었다고 했다.

이 대회를 위해 무림의 구대방파에서는 금 오천 관과 은 팔천 관을 내 놓았으며 각 세가들이나 무림에서 이름을 날리고 싶은 문파들도 서슴없이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내 놓았다. 그들에게서 모인 물품이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토록 화려한 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었고, 기실 많은 문파의 제자들의 죽음, 그리고 그에 따른 분노와 원한으로 점철된 대회였다.

대회를 진행한 한 문파의 장로는 대회가 끝난 후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건 단순한 대회가 아니다. 하나의 전장이었다."

그만큼 각 문파들의 경쟁은 치열했다. 그리고.......

*               *               *

"어떤가?"

남태천은 승을 뒤에 세우고는 입을 열었다.

승의 이마에는 계인이 모두 넷이 박혀 있었는데 이는 이대제자 이상의 신분이라는 뜻이었다.

이는 소림에서는 그 승의 위치가 녹녹치 않은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남태천의 앞에서는 공손하기 짝이 없었다.

"모두 이만삼천의 정예를 뽑아 모두 십오 개의 단과 파로 나눠 놓았습니다. 이들은 지금 의욕에 불타며 칼을 갈고 있습니다."

"무공 수준은?"

"모두 고수급의 무공을 갖고는 있습니다만, 그들의 무공만으로는 마교와 상대하기 힘들 것입니다."

남태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른 준비는?"

"예. 모두 신체와 그들이 지닌 무공의 특징에 맞는 무공을 전수할 계획입니다. 현재 중원 구대문파와 여타 각 문파들의 무공비급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어 십여 일 후부터는 모두 훈련에 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 수고했다."

승은 조용히 읍을 하고 물러났다.

승이 나간 직후 또 다른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상태는 지금 어떤가?"

그림자는 바람 앞의 연기처럼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귀신과도 같았다. 그런 기괴한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들은 모두 중독 되어 지하 궁에 감금되어 있습니다. 이미 무공은 전폐되었으며 그들의 무공은 이미 우리의 수중에 들어왔습니다."

"그래? 흔적을 남기지 말고 죽여라!"

"예."

그리고는 그림자는 사라져버렸다.

"흥! 정도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위선자들. 명분을 위해 자신의 제자들을 죽이는 자들이나, 이익을 위해 그를 눈감아 주는 자들이나....... 철저히 썩었어! 썩은 것들은 사라져야지. 이제부터는 총령과 그자, 그리고 황제만이 나의 적수가 될 것이다."

달빛이 산 그림자를 만들었고 산 그림자는 이내 소림사를 어둠 속으로 감춰버렸다.

*               *               *

사마적은 광노와 마주 앉아 있었다.

광노는 조용히 물었다.

"소주, 어떻게 하시렵니까? 지금까지 소주가 세운 계획은 모두 성공했습니다. 비록 천녀가 아무런 반응조차 없다는 것이 의외이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우리의 수확은 적지 않았습니다."

사마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광노는 우리가 지금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하시는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많은 부분을 우위를 점하고 있으며 현재로서는 암중에서 활약하는 우리의 형제들로 인해 적의 모든 상황이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마도 우리의 계획대로 이루어진다면 아마도 명년 안에는 우리의 기반을 적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사마적은 입가에 웃음을 흘렸다.

"후후,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네. 나는 가끔 내가 옳은 일을 하는가 하는 자괴지심이 들곤 한다네. 그대는 내가 진정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요즘 따라 호귀가 많이 생각나는군."

광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제 입장으로서는 뭐랄 말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먼 훗날 드러나겠지요. 아마도 후대에서 그들이 평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우린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최선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대로 그만 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사마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사마적의 얼굴에선 예전의 서릿발 같은 냉막함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저 자조에 찬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다. 사마적은 창 밖으로 비쳐 들어오는 달빛을 바라보았다.

"음!"

한편 광노는 그런 사마적을 보면서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다시 한 번 보고하라."

총령의 앞에 선 냉막해 보이는 사내가 식은땀을 비적비적 흘리고 있었다.

그는 이미 세 번째 같은 내용을 읽고 있었다.

총령의 얼굴은 딱딱히 굳어 있어서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예. 보고에 의하면 빙궁은 전멸했습니다. 빙궁을 향하던 우리의 병사들과 백천우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동창은 황실에 이런 보고를 했습니다. 자신들이 총공세를 벌여 빙궁을 전멸시켰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빙궁은 누군가의 암계와 세력에 의해 전멸 당했습니다. 결코 동창은 그들을 칠만한 여력이 없었으며 당시에는 퇴각마저도 결심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케엑!"

더 이상 분노를 참지 못한 총령은 손을 뻗었고 그 일수에 사내의 몸은 걸레가 되어버렸다. 바닥은 사내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흥! 누구의 수작이겠는가? 남태천, 남태천! 그놈 말고 이일을 할 사람은 없다. 네놈이 기어코 내 일을 방해할 줄 알았지. 흐흐흐.......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               *               *

천하영웅대회에 세상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을 때였다.

황궁의 태자전의 전각들 사이로 야조처럼 솟았다가 태자전의 처마 밑으로 스며드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림자는 동정을 살피며 잠시 처마 밑에 머물렀다가 이내 태자전으로 스며들어갔다.

주익균은 자리에 앉아 서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중지룡(人中支龍)이라고 해야 할까? 범인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묘한 기세 같은 것이 느껴졌다.

단지 책을 읽고 있을 뿐인데도 그 위세는 마치 산악을 걸머지고 있는 사람처럼 대단했다.

그런 그의 앞에 어느새 흑의복면인이 서 있었다.

주익균의 태도로 보아 독서삼매(讀書三昧)에 빠져 아직 상대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복면인은 일부러 인기척을 내었다.

그러자 주익균은 곧 화들짝 놀라서 입을 떼었다.

"응! 그대는 누구인가? 누구이기에 감히 이곳 태자전이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오는 겐가? 속히 어떤 백성인지 아뢰지 못할까?"

복면인은 그저 묵묵히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황제를 만나고 싶다."

광오한 자였다. 감히 천하를 호령하는 황제의 앞에서 당당히 반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더 괴이한 것은 황제를 앞에 두고 황제를 찾는 다는 것이었다.

"네놈이 진정 미친 게로구나. 짐을 앞에 놓아두고 짐을 만나 보겠다니?"

황제는 더욱 성을 내며 흑의인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변함없이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을 뿐이었다.

"쥐새끼, 나는 황제를 만나겠다고 말했다. 나는 너 같은 쥐새끼를 보고자 친히 온 것이 아니다."

흑의인은 앞에 선 황제를 향하여 손을 들어올렸다. 죽이겠다는 표현이었다.

그때, 태자전의 한쪽 벽면이 스르르 열리더니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지금 서 있는 황제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뒤늦게 나타난 황제가 또 다른 황제에게 손짓을 하자 그는 조용히 읍을 하더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대는 누구인가?"

흑의인은 그의 얼굴을 가리던 검은 천을 들췄다.

"자네는?"

"소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오히려 제 자신보다도 더 잘 아시지 않소?"

황제는 웃었다.

"자네는 이미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왔구만. 그래,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는가? 남태천."

흑의인의 사내는 남태천이었던 것이다. 그라면 지금 소림사에서 천하영웅대회를 지위하고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는 왜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당신이 나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고, 또한 많은 선물을 보낼 정도로 친숙해 졌다는 정도.......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나 역시 당신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

황제의 눈은 불타는 용광로처럼 화르륵 타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그래, 자네는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군!"

"아, 우선 주변에 있는 잠자는 파리 몇 마리가 거슬리는군. 나는 당신을 해하러 온 것이 아니니 잠시 물려주실 수 있겠소?"

황제는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리고 허공에 손짓을 하자 서너 명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배례를 하고는 사라졌다.

남태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본론을 말해도 될 것 같은데......."

"말하게."

남태천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놓았다.

비단으로 만들어진 주머니였다. 황제는 서슴없이 주머니를 들어보았다.

그리고 그 주머니를 꺼냈을 때 주머니 안에서는 사람의 손가락이 나왔다.

이미 말라 비틀어져버린 손가락이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조귀화의 손가락이오. 이래야 당신이 내가 잠시 당신을 도왔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하지 않겠오?"

황제는 호탕하게 웃었다. 마치 그 동안 웃을 일이 없어 참았다 대소를 터뜨리는 사람처럼 한참을 그렇게 웃어 제켰다.

"하하하하...... 하하하......!"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래, 하고 싶은 말이란 게 무언가? 동업인가?"

남태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침묵. 이 침묵만큼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것도 없다.

때로는 단 몇 초의 침묵이 너무도 길고 지루해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도 있었다. 인간은 충동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의 사회가 아직까지 유지해 온 것은 그 충동을 억제하는 인내란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 두 사람 사이에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누군가 먼저 입을 열 기세는 아니었다. 그들 앞에 놓인 차는 이미 식어 그 향마저 모두 날아가 버렸다.

이때 황제가 먼저 침묵을 깼다.

"그래,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도 될 것 같은데....... 설마하니 이렇게 앉아 차나 마시자고 온 것은 아닐 테고."

"난 당신과 한 가지 의논할 것이 있어 왔소이다. 우리의 동업에 대해서......."

황제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어렸다. 남태천이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남태천이 눈치 채기도 전에 의아한 표정으로 싹 바뀌어버렸다.

"의논? 의논이라니?"

"난 무림을 원하오. 당신은 절대권력을 원할 것이오. 그렇다면 우리는 좋은 동반자가 될 것이오."

"어째서인가?"

"우선, 당신과 나는 많은 세력을 가지고 있소. 그렇다고 그 세력을 모두 쓸 수 있는 형편은 아니오. 당신 역시 그렇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력을 분산해야만 하오. 이유는 당신이 잘 알 것이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내가 그대와 손을 잡아야 하지?"

남태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를 시험하려 들지 마시오. 당신은 명분이 필요하오. 절대적인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군사를 움직일만한 충분한 명분이 있어야 한단 말이오. 세외정세는 그다지 간단하지 않소. 우리 중원은 비록 거대하다 하지만 사방에서 포위된 형세이니 이로울 것이 하나도 없지. 게다가 외국에서는 전쟁을 준비하는 기세가 역력하오. 그들은 지금 자신의 정치적 유리함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단 말이오. 당신이 그 전에 이 중원을 일통시키던지 아니면 몰살시켜 버리고자 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소. 그 명분을 내가 만들어 주겠단 말이오. 단, 모든 일이 끝난 후 그대와 나는 서로 모르는 상태로 돌아간다는 조건하에서! 그대는 황제로 나는 맹주로......."

황제는 수긍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능할까?"

남태천의 눈빛이 확고한 표정으로 반짝였다.

"가능하오."

*               *               *

비사들이 하나 하나 드러날 때마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물론 이와 같은 일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세상은 발칵 뒤집힐 것이다. 그들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 있었지만 이것이 사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인의대협(仁義大俠)으로 알려진 남태천이 일세의 효웅(梟雄)이자 간웅(奸雄)이라는 사실을 그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남태천은 이미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정도의, 아니 전 무림의 빛이자 기둥인 그를 이렇게 벌건 대낮에 욕하다니 만약 누군가가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그는 치도곤을 당해야 할 것이다.

아까부터 추정호가 살기를 품은 눈으로 청년을 바라본 이유도 아마 영웅인 남태천을 비하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러나 추정호를 제외하곤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따위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했다.

그저 청년의 이야기가 재미있다는 듯 그들의 시선은 이미 청년에게로 모여 있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그는 황제와 약조를 하게 됐습니다. 중원을 넘겨 줄 테니 무림은 자신의 손에 맡겨 달라고 말입니다."

청년의 말이 끝났을 때쯤인가?

따가닥―! 따가닥―!

히히힝―!

밖에서 수십 마리의 기마가 빗살을 가르고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객점 앞에서 멈춰 섰다.

"쿠쿡! 오늘은 유난히 이곳을 지나는 사람이 많군요."

청년이 지나가듯 말하면서 술을 부어 한 잔 들이켰다.

덜컥―!

문을 열고 처음 들어온 사람은 검은 복장의 사내였다. 검은 무복에 챙이 넓은 죽갓을 쓰고 있었다. 사내는 문을 부서져라 박차고 들어오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들 자리에서 비켜라. 나의 말이 끝난 후에도 이 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자가 있다면 몸이 성치 않을 것이다."

사내의 목소리는 어찌나 큰지 서까래가 들썩거릴 정도였다. 사내의 손에는 족히 두 자는 되어 보이는 도가 황촉의 불빛에 의해 번들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서슬이 시퍼런 협박에 움직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그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 앉은 남녀만 한 차례 힐끗거렸을 뿐이었다.

"죽기를 작정한 자들 뿐이었군."

사내는 두 남녀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얼굴은 은연중에 살기를 드리우고 있었고, 그의 표정은 이미 살심을 굳힌 듯 보였다.

"죽어라."

사내는 벽력 같은 소리와 함께 두 남녀 중 남자 쪽을 향해 도를 내려쳤다.

그 남자는 글방의 서생처럼 나약하고 문약해 보여서 금방이라도 양단 되어 버릴 듯한 급박한 상황이었다.

쌔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리고 그 문약해 보이는 서생의 몸이 반 토막으로 변하려는 순간이었다.

한없이 순해 보이기만 하던 서생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지지 않는가? 지옥의 악귀가 그럴까? 지옥의 염라대왕이 화가 난 듯한 표정이었다.

사내의 굳어진 얼굴에서는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뭐랄까? 차가움, 싸늘함,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었다.

그렇다고 그의 표정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풍겨져 나오는 느낌이 그랬다.

물론 이 무사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그의 얼굴을 접하는 순간 멈칫했고, 자신이 지금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크아악―!

아마도 그로서는 처음으로 맞이하는 가장 큰 후회일 것이다. 하지만 무사의 머리는 이미 몸을 버려 둔 채 문가를 향해 굴러가고 있었다.

이때였다.

삐걱―!

다시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왔다.

미친 자처럼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사내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들어섰고, 그 사내의 발에 걸린 무사의 머리는 그대로 으스러져버렸다.

우두둑―!

자신의 일행을 저럴 수 있는 것인가?

"어리석은 자! 감히 우리에게 대항을 하다니......."

사내는 얼굴에 표정도 없었고 고개도 돌리지 않았지만 정확히 누구를 향해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사내가 막 검을 뽑아 들려는 순간이었다.

"표옥자(標玉者). 그만 두세요."

흔히 아름다운 목소리를 옥구슬이 은쟁반 위에 구른다는 표현을 한다. 그러나 이 목소리는 그 경지를 벗어난 것이었다. 세상의 그 누가 들어도 질리지 않고, 포근하면서도 한없이 부드럽고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문턱에 들어선 여인은 전신에 흰옷을 입고 있었다.

치렁치렁하여 발에 걸릴 듯한 옷을 입고도 삐걱거리는 나무판 사이를 작은 소리 하나 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얼마만한 무공을 가지고 있는지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그런데 표옥자라니?

저 사내가 정말 표옥자라면 지금 들어선 여인은 천하 사선녀로 이름이 드높았던 남궁세가의 여식 화화녀(花火女) 남궁선(南宮仙)이 틀림없을 것이다.

표옥자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도 바로 남궁선으로 인한 것이었다.

남궁선은 당대의 영웅 남태천의 이모로, 남태천 모친의 막내 동생이었다.

늘 그렇듯이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하늘을 울릴만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 그녀의 몸에서는 은은한 향이 풍겼으며 그 냄새에 이끌린 벌 떼 수만 마리가 날아와 집 주위를 맴돌았다고 한다.

그녀의 미모는 십오 세에 절정에 이르러 스물이 되어서는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세상 사람들은 칭송했다.

그러나 불운을 타고난 탓인지 그녀의 나이 스물셋에 결혼을 하려 했으나 결혼식 날 그녀의 신랑이 갑작스레 죽음을 맞게 되고 그녀는 혼자가 되었다.

올해로 그녀의 나이는 오십을 바라보고 있으나, 그녀의 미모만은 천하를 진동시키고도 남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녀의 곁에서 단 한치도 떠나지 않는 사나이 표옥자, 사람들은 그 사내를 흑사(黑蛇)라고도 불렀다.

그는 늘 검은 옷을 입고 있었으며, 그가 한 번 노린 먹이는 뱀처럼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에게 뱀이라는 이름이 붙은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눈에 있었다.

항상 그가 머리로 가리고 다니지만 그의 눈은 기묘하다 할 정도로 찢어져 있었다. 게다가 흰자가 없고 오직 붉은 자만 있어 소름이 끼치는 형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눈을 보게 되면 아무리 간담이 큰 자라 할지라도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표옥자는 남궁선이 서른이 되던 해 그녀의 곁에 나타났고 그녀의 방원 삼 장 안에서 항시 그녀를 돌봐주고 있었다.

그 이유나 목적은 아무도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의 그런 행동을 수긍하는 자들은 있었다.

그만큼 남궁선의 미모가 뛰어났기에 시기하는 자들이나 질투하는 자들에서부터 그녀를 탐하는 자들이 너무 많아서 그녀를 지켜줄만한 사람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를 화화견(花火犬)이라 불렀다. 꽃을 지키는 개, 무사로서는 큰 모욕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남궁선이 나타나는 곳이면 어김없이 따라 다녔고, 이제는 남궁선의 그림자가 되었다.

그러니 그를 부른 여인은 남궁선이 틀림없는 것이었다.

표옥자는 지난 이십 년동안 단 한 시진도 그녀의 곁을 벗어나지 않았으니까. 그가 그녀의 곁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면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때 이외에는 없었다. 세상에 남궁세가를 능멸할 만큼 큰 간담을 지닌 자가 없을 것이므로 집에 들어가면 일단 안심이 되는 탓이었다.

"그만 두세요. 괜한 힘 낭비예요. 그들은 쉽게 이길 상대가 아니에요."

그는 그녀의 뜻을 따라 조용히 검을 갈무리했지만 눈에는 의구심이 번쩍였다.

그녀의 말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 납득할 수 없다는 불신의 표정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았을까?

"호호호!"

날카로운 남궁선의 웃음소리가 울렸고 그녀는 마치 표옥자를 약올리는 듯한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이 안에서 당신이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거예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이 꿈틀거렸다. 그리고는 좌중을 돌아보았다.

"믿지 못하겠소."

쉰 듯한 목소리였다. 아니 마치 쇠 두 개를 맞비비는 듯한 듣기 거북한 음성이었다.

"호호호호! 그럼 당신이 개방의 실질적인 우두머리인 중추신개와 손속을 나눌 수 있겠어요? 아니면 저기 앉아 있는 쌍마령(雙魔鈴) 휘지와 휘소를 능가할 수 있겠어요? 게다가 저기 앉아 있는 분들의 능력은 당신 홀로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 같아요. 물론 당신이 생사를 도외시한 채 달려든다면 이곳에 있는 사람 중 한둘을 벨 수는 있을 거예요. 하지만 결코 죽일 수는 없을 거예요."

그녀의 입에서 쌍마령이라는 말이 나오자 사람들의 눈은 두 남녀에게로 쏠렸다.

마의 소리로 불리는 악의 화신. 무수히 많은 양민과 무수한 무사들의 피로 이루어진 명성이었다.

쌍마령(雙魔鈴).

그들이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불과 삼사 년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쌓아 놓은 아성은 결코 수백 년 내에는 무너지지 않을 만큼 거대한 것이었다.

단 두 사람이 행한 기괴한 살인 기록은 전무후무할 것일 테니까 말이다.

그들의 첫 살인은 무산(武 )에서 이루어졌다.

작은 객잔에서 그들은 단지 귀퉁이가 떨어진 접시에 음식을 담아왔다는 이유만으로 그 객잔의 손님과 주인, 그리고 그 일가족과 종업원 등 무려 육십여 명의 목숨을 빼앗아 버렸다.

그들의 이런 화려한 등장 이후, 그들의 일보 일보가 혈보로 이루어졌다.

누군가 그들의 얼굴만 봐도 그들은 눈을 뽑고 죽여버렸고, 자신들 곁에서 누군가 얘기를 한다면 그자의 혀를 뽑아 죽여버렸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꽃 한 송이 뽑는 것보다도 더욱 쉽게 여겼다.

그러나 그들은 마교나 그런 무리의 인물은 아니었다.

단지 사도무림으로 분류되어 있었지만 결코 그들과 동일시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 예로 남천표국(南天 局)의 국주(局主)인 이철장이 그들이 사마외도라는 말을 술자리에서 했다가 일가가 몰살당하고 그들의 표국은 쑥대밭이 되는 일을 겪었다.

그후로 사람들은 쌍마령이란 말을 입에조차 담기를 꺼려하는 것이었다.

살령(殺鈴)이라 칭하기도 했다.

지난 사 년간 그들이 죽인 자들이 얼마인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들에 대한 소문만은 무성하였고 끊이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의 무공이 무엇인지 무기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고, 그들의 외모 역시 뚜렷이 드러난 것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을 만나고 살아남은 자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표옥자의 얼굴에는 불만이 어렸다. 수긍할 수 없는 표정이 가득했으나 그는 검자루를 잡고 있었지만 남궁선이 걸리는지 검을 뽑지는 못하고 있었다.

남궁선은 표옥자의 손을 살며시 움켜잡았다.

"전 당신이 다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제야 표옥자의 손은 검에서 떨어졌다.

여인의 혀가 무사의 검보다도 무서운 것이라 했던가?

불만으로 가득했던 표옥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검을 거두고 그녀의 뒤에 조용히 섰다.

남궁선, 그녀는 한때 중원 사대미인으로 꼽혔고, 지금도 그 중 일인으로 남아있었다. 비록 퇴색되어버린 이름이지만 그녀의 이름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 가장 큰 이유가 그녀의 조카인 남태천 때문이기도 했다.

남궁선은 좌중을 둘러보고는 검은 휘장을 두른 여인들을 향해서 가볍게 읍을 해 보이고는 중추신개를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그러자 그녀의 호위와 시녀들인 듯 십여 명의 남녀가 문가에 조용히 들어와 늘어섰다.

단 그녀를 따르는 것은 표옥자와 화려한 옷차림의 시녀뿐이었다.

시녀는 오만하게 눈을 치켜 뜨고 있었는데, 세도가의 아가씨처럼 그 위세가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입은 옷은 비단이어서 실로 남궁선의 위세는 그 시녀를 통해 대변되고 있는 듯 했다.

남궁선은 중추신개의 앞에서 가볍게 예를 올리더니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오랜만이군요."

중추신개의 반응은 떨떠름하기 짝이 없었다.

"그, 그렇군, 한 십여 년 만인가?"

추정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하며 말했다.

"말학후배 추정호 인사올립니다.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남궁선 역시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어머! 그래요. 화산파에 잠룡이 하나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과연 명불허전이군요. 반가워요!"

남궁선의 시선이 청년과 흑의인에게로 향했다.

"호호호호......! 오라버니, 이분들을 소개해 주시겠어요? 어떤 고인들이신지?"

노화자는 고개를 저었다.

"글세. 나도 이분들이 누군지 모르지. 다만 자리에 합석하게 된 것뿐이라네. 통성명을 하긴 했는데....... 그게 무명인이라니. 쩝! 자네 이젠 이름을 밝힐 때도 되지 않았나? "

청년은 싱긋이 웃었다. 너무도 악의 없고 편안한 웃음이었다.

"소인의 이름을 알고 싶으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청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좋지 않아요. 좋지 않아!"

"무엇이 말인가?"

청년은 다시금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뭐랄까? 막내 동생이 어리광을 피우기 위해 짓는 미소랄까? 천진하면서도 티없음이 보는 이를 더 이상 다그칠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제 이름 따위는 가르쳐 드려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나의 이야기가 시작되면 언급될 이름이기에 지금 제 이름을 밝힌다면 아마도 그 재미가 크게 반감될 것입니다."

"호! 그런가?"

그러자 남궁선이 나서며 물었다.

"무슨 말이지요. 얘기를 하다니?"

"하하하. 그래. 자네도 들어야 할 얘기겠구만. 뭐 어차피 이 친구가 꾸며낸 얘기겠지만, 자네의 조카도 이 친구의 얘기에서 등장을 하지. 자네도 얘기를 들어보면 깜짝 놀랄 것이네."

"그래요? 그렇다면 저 역시도 무슨 얘기인지 들어야 겠군요."

남궁선의 뒤에 서 있던 시녀는 어디선가 의자를 가져와 금색 천으로 감싸고 그 위에 두툼한 방석을 깔아놓았다.

남궁선은 그 위에 앉았고, 그 뒤로는 표옥자와 시녀가 서 있었다.

그렇게 하여 네 명이 자리하던 좌석에는 어느새 사람의 수가 다섯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어서 해보세요."

청년은 난감한 듯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어째서죠?"

청년은 남궁선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자리하고 있어서입니다. 이 이야기는 당신의 조카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그리고 당신이 간직한 비밀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남궁선은 조금 멈칫 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호탕하게 웃었다.

"호호호. 그래요? 그럼 해보세요. 전 거리낄 것이 없으니까."

"그 전에 당신은 왜 이곳에 왔습니까?"

남궁선은 일순 눈썹을 꿈틀했다. 청년의 갑작스런 물음에 놀란 듯 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요?"

"이 궁벽한 산골에 이처럼 비마저 오는데 당신 같은 사람이 이곳에 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입니다."

그러자 중추신개와 추정호,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남궁선에게로 쏠렸다.

"그건 항주를 향하다 길을 잘못 들었고 빗속을 헤매다 간신히 이곳에 당도하게 된 거예요."

"그렇군요."

청년을 조금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칠흑 같이 어두운 밤에 빗소리는 더욱 커져만 가고 있었다. 이제야 겨우 자정에 이른 시간은 더욱 더디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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