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6일 화요일
무림실록(武林實錄) 전신전설(戰神傳說) 제3장~제4장 - 내가위
제3장 사랑 앞에서
거대한 광장을 연상케 하는 대전이었다. 어찌나 큰지 천 명은 누울 수 있어 보였다.
하지만 주위가 전부 어두컴컴하고 눅눅한 것이 음침해서 암전(暗殿)이라고 해야 옳을
듯 싶었다. 지하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은 한 점의 밝은 빛조차도 하락되지 않고 있었다. 단지, 군데군데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마화(魔火)만이 암전을 흐릿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흐릿한 빛 속에서 보이는 거대한 석단(石壇), 그 위에 놓인, 족히 삼 인은 앉을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의자에 한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이때 그의 앞에 누군가가 한줄기 바람처럼 홀연히 나타나 부복을 했다.
"총령님, 중원 곳곳에 숨어있던 우리 지부들이 하나씩 발각되어 누군가에 의해 파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듯이 보이던 총령이라 불리는 사나이가 입을 열었다.
"그래. 어르신은 어떤 말씀을 하시더냐?"
"아무 연락 없으셨습니다."
"흠."
잠시 철벽 같은 침묵이 흘렀다.
"흉수는?"
"예! 홍화객이라 불리는 강호살수라고 합니다."
"음! 살수라. 그래, 다음 목표 예상자는?"
"저, 그것이......."
부복한 자의 입에서 난감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환인(煥人), 말하라."
"저! 말씀드리기 죄송스러우나, 무황 남태천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일순 총령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듯 싶더니, 그마저 바람 앞에 촛불처럼 금세 사라져버렸다.
"흠! 그래, 홍화객이라는 자를 조사해 봐라."
"예!"
말을 마친 환인은 나타났을 때처럼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흠! 홍화객이라......."
그는 또 다른 상념에 빠져 있었고 다시 대전은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 * *
<맑은 냇물이 길게 뻗친 산길을 수레는 한가롭게 달린다.
저 물도 내 맘을 아는가.
황혼 녘 새들도 나와 함께 가는가.
황성은 옛 나루터랑 가깝고
석양은 가을 산을 물들였네.
나 멀리 숭산까지 왔으니 예서 문 닫고 지낼거나.>
왕유(王維)의 '숭산(嵩山)에 와'라는 시로 잠시 속세를 벗어나 숭산으로 돌아간 작자의 희열과 실연의 애통함 등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숭산은 하남성(河南省), 등봉현(登封縣) 북쪽에 자리잡고 있고, 숭산 소실봉 밑자락에 자리잡은 소림사로 인해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소림사는 중국 불문의 발생지로 달마조사가 남천축국(南天竺國)에서 건너와 무술과 선종을 전파하여 그 위명을 날렸다.
멀리 소림사가 보이는 소실봉, 그 봉우리 끝에 한 사나이가 소림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사나이는 호랑이의 눈과 사자의 몸, 그리고 승천하는 듯한 용의 기세를 갖고 있었다.
무황 남태천. 그가 왜 이곳에 서 있는가?
그러나 그는 고뇌의 표정을 한 채 소림을 노려보며 서 있었다.
'뭇 사람들은 내가 화려한 인생을 살아온 줄 알고 있다.'
우울함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무엇이 무황의 얼굴에 우울한 그늘을 만들고 있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부친이 없는 나에게 가해졌던 모진 핍박과 무시, 그리고 처녀의 몸으로 나를 출산해야 했던 어머니가 받아야 했던 그 천대. 누가 알겠는가? 소위 백도인들이라 포장된 사람들의 그 위선을 감히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나는 증오한다. 이 세상을, 아니 인간을! 나는 이 세상을 철저히 피로 씻으리라. 철저히!'
아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그가 자신의 외가에, 아니 백도무림에 갖고 있는 이 증오는 무엇인가?
그가 드러내고 있는 것은 단순한 적의가 아니었다. 소림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은 싸늘히 식어있었다.
"흠."
그리고 그의 신영(身影)은 일순 무서운 속도로 소림을 향해 쏘아져갔다.
왠지 모를 서글픈 눈빛을 뒤로 한 채.
* * *
붉게 물든 하늘이 펼쳐진 그 아래에, 역시 붉은 장미들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드넓은 화원이 있었다.
그 한쪽 끝에 한 폭의 그림 같이 서 있는 한 여인이 보였다. 타는 듯 붉은 장미와 어우러져 있으면서도, 순결하고 성결해 보이는 이 여인. 그녀의 가냘픈 허리 뒤로 흘러내린 긴 머릿결이 그녀의 창백미를 더해주고 있었고, 그녀의 가녀린 손은 장미의 가지 끝을 조심스레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한 사나이가 있었다.
"주영, 공기가 차갑소."
주영, 화혼녀(華婚女) 진주영이란 말인가?
"장미가 아름다워요. 하지만, 이들에게도 죽음이 있겠지요. 부토(腐土)가 되어 썩어버리겠죠. 사람들의 발에, 혹은 짐승의 발길에 채이며......."
그녀의 눈가에 작은 이슬이 맺혔다.
사마천인은 그녀에게 다가서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소! 아마도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꽃잎은 그렇게 끝나겠지만 줄기와 뿌리는 남아 있잖소. 꽃잎은 썩어 훌륭한 거름이 되고 다음 해에는 더욱 생생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이오."
"하지만, 아!"
꽃을 어루만지다 가시를 건드려 진주영의 새하얀 옥수에서는 빨간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사마천인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생채기를 핥아주었다. 그리곤 그녀의 눈을 보는 순간 그는 알 수 없는 기이한 충격을 받았다.
그가 지금 느끼고 있는 건 너무도 생소한 것이었다.
무릇 사랑의 감정이란 형식이나 절차가 필요하지 않는 법이라고 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그녀에게 일어난 일을 알고 그녀를 연민의 감정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의 감정은 연민에서 사랑이 되어버렸다.
"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진주영은 붉게 물든 얼굴을 하고 도망가듯이 후원으로 사라져버렸다.
사마천인의 눈은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알아요. 당신의 마음, 하지만...... 하지만, 저는 당신과 사랑 할 수 없는 여자랍니다. 이제는 세상에 남아 있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그런 여자랍니다. 부디 제게 더 이상 세상에 남아 있을만한 이유를 만들어주지 마세요. 제발, 당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두렵습니다. 너무나도 더러운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몸이.......'
싸늘한 바람이 정원을 덮고 있었고, 그것이 정원 중간에 서있는 사마천인의 가슴을 더욱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님이시여,
나의 사랑하는 님이시여, 이제는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세상에 하나뿐인 님이시여.
당신을 기다리는 마음이 고통이 되어 나의 가슴을 예리하게 도리고 있습니다.
님이시여,
내가 죽어 한 줌의 흙이 되고
넋이 구천 지옥 끝에 떨어져 내릴지라도 잊지 못할 님이시여.......
제게 흐르는 내 눈물을 정녕 닦아주실 수는 없습니까?
당신에게 제가 바라는 단 하나의 소망은
그대 곁에 서고, 그대를 바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천하를 원하는 것도,
절대를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당신을 가리고 있는 안개가 걷히고
당신을 뒤덮은 먹구름이 사라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님이시여,
아픔을 간직한 당신의 마음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단 한마디는 오직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마음이 어째서 이토록 산란한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왜라는 질문을 해봐도 아무런 답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계속되는 그리움과 알 수 없는 서러움이 가슴 가득히 차 올라 이제는 어찌 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흠......."
사마천인은 무거운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그녀가 사라진 곳을 향해서.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마치 천근추를 시전하고 있는 듯.
그러나 그 스스로도 그녀의 뒤를 쫓는 자신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크!"
차가운 술이 목줄기를 타고 넘어가자 조금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두 없애주세요. 그렇게 한다면, 이 쓸모 없는 몸뚱이나마 당신에게 드리겠어요."
사마천인은 진주영이 했던 이 말이 아직도 그의 귓가에 울리는 것이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다음 날, 오랜만의 휴식에서 깨어난 그녀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로서는 그녀의 말이 약간 우스웠으나, 애처로워 보이는 그녀의 부탁을 그대로 묵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처음에는 동정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것은.
그녀가 복수를 하기 위해 걸어온 그 길들이 너무나도 애처로워서 그녀가 만족할 정도로만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을 죽이고, 두 사람을 죽이고.......
그때마다 보이던 그녀의 눈물과 가녀리게 떨리는 몸짓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시시각각 그의 눈에 각인되어 오는 그녀를 위해 그는 미친 듯이 살인을 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복수도 하지 못하는 그가 그녀로 인해 울분을 토하듯이 살인을 해대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점점 빠져들고 있는 자신의 감정을 깨달았다.
그에게 그녀는 늪과도 같았다.
도망하려고 몸부림치면 몸부림칠수록 더욱 빠져드는 거대한 늪과도 같았다.
우지직―!
그의 손에 들려있던 술잔이 먼지처럼 부서져 내렸다.
그는 지금 이 비참하면서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기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사마천인은 눈을 감았다.
어린 시절의 일이 환영처럼 눈앞에 일어났다.
* * *
사마제위, 그는 얼마나 많은 시각을 쫓겨다녀야 했는지 몰랐다. 때론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때론 황궁의 자들이 그들 부자의 목숨을 노리며 항시 뒤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사마제위, 그만 검을 버려라. 왜 죽음을 재촉하는가?"
다섯 명의 사내들이 상처투성이의 사내를 골목 한쪽에 몰아 세우고는 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상대의 수가 너무 많았고, 자신의 상처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사마제위라 불리는 사나이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있었다.
사마제위의 등에는 약 십이삼 세 정도의 소년이 매달려 있었다. 사마제위는 소년이 등에서 떨어지지 않게 끈을 이용해 자신의 몸에 동여매 놓았다.
"어떤가? 이제는 포기하시겠는가?"
사마제위의 눈은 그들을 향해 있지 않았다. 그들의 존재를 무시하듯 그는 아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다섯 명의 사람들은 눈을 꿈틀거리면서 사마제위를 포위하여 반원을 그리면서 그를 향해 서서히 다가서고 있었다.
"아들아! 무섭느냐?"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하하하하. 그래야지. 과연 내 아들이구나. 저따위 오합지졸들 앞에서 떤다면 나 사마제위의 아들 될 자격이 없지. 걱정하지 말거라. 내 일거에 저 파리들을 치워주겠다."
사마제위는 검을 자신의 발끝으로 늘어뜨렸다.
"와라!"
그의 벼락 같은 소리에 그를 포위하고 다가서던 사나이들이 순간 움찔했다.
"제 스스로 무덤을 파다니, 어리석은....... 죽여라!"
오 인의 사나이들은 완벽하게 방위를 차단하면서 사마제위를 향해 검을 겨누어왔다.
그들은 동창위들로 궁중무술을 시전하고 있었다.
궁중무술은 다수로 소수를 상대하는 것에서부터 소수로 다수를 사용하는 것 등, 중원 각대문파의 비전지기들을 흡수해 독창적으로 만들어져 그 위세가 나는 새라도 떨어뜨릴 듯했다.
거기에 철저하게 살인을 하게 훈련되어 있어, 그들의 손속에는 조금의 양보나 자비도 들어있지 않았다.
휭―!
대감도가 아슬아슬하게 사마제위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아직 멀었다."
사마제위는 이를 악물고 방위를 밟으며 몸을 교묘히 틀더니 상대들의 무릎을 노리며 자세를 낮췄다.
그러자 무사들은 벽력 같이 소리를 지르며 장작 패듯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쳐왔다.
"흠! 어림없다."
사마제위는 몸을 회전시키며 상대들의 무릎을 노려갔고, 그들은 자신의 무릎을 잃지 않으려고 몸을 공중으로 띄우며 피할 수밖에 없었다.
사마제위는 그 틈을 노려 몸을 굴려 그들의 공격권 내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등뒤에 매달린 어린아이 때문에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한 팔을 의지해 몸을 회전시켜 그들의 진세를 흐트리려고 하는데, 동창위 중 한 무사가 사마제위의 등뒤를 박도(朴刀)로 내리쳐왔다.
사마제위는 서늘한 기운과 함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등에는 아들이 묶여 있지 않은가?
사마제위는 진기를 끌어올릴 사이도 없이 몸을 일으켜, 검을 들어 그 사내의 도를 막아갔다.
창― !
묵직한 기운이 손바닥에 일었다. 손바닥 전체를 울리는 통증에 사마제위는 손에 들린 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크윽."
사마제위는 그 충격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내려치는 사내의 힘이 워낙 강했고, 너무나도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 도를 막는데도 허점이 있어, 도는 사마제위의 어깨를 파고들어 갔다.
"하앗!"
상대는 기압과 함께 도를 힘껏 내려그어 사마제위의 팔을 몸통에서 떼어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사마제위는 재빨리 검을 밀어내며 상대방을 손목을 베어갔고, 상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일보를 물러섰다.
자신의 손을 감싸쥔 채 물러선 그 자의 흉측한 비명소리가 듣는 이의 가슴을 섬뜩하게 했다.
그러나 사마제위의 어깨에 박힌 도를 뽑아 갈 수는 없었다.
사마제위는 그 여세를 몰아쳐 상대의 목을 베어갔다.
상대는 움직이지도 못할 듯이 보이는 사내가 갑자기 자신을 노려오자 긴장을 풀고있다 다급히 두 손을 휘저으며 막으려 했다.
그러나 검을 맨 손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
사내는 더욱 허둥대어 쓰러졌고 사마제위의 검은 그 사내의 목을 향해 발출되었다.
사내의 목숨은 풍전등화(風前燈火).
촤앙___!
이때, 옆의 사내가 그의 검을 막았다.
그리고 다른 삼 인 역시 일시에 검과 도를 휘둘러 사마제위를 노려왔고, 사마제위는 다시 일보를 물러서 벽에 기대야 했다.
동창위들 중 우두머리인 듯 보이는 사내가 소리쳤다.
"저자를 놓치면 우리가 추궁을 받게 된다. 수단을 가리지 마라!"
그러자 잠시 물러 서 있던 위사들이 일정한 진세를 이루며 사마제위를 둘러쌌다.
그들은 일검에 사마제위의 몸을 양단 하려는 듯 목과 가슴 등에 요혈을 노리며 쳐왔다.
파앙―! 파바박―!
촹―! 촤좌좡―!
"크윽"
사마제위의 몸에서는 쉴새없이 선혈이 솟구쳤지만 지혈은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상황은 급박했다.
순간 순간이 매서운 공격으로 이어졌다.
상대의 공세는 더욱 거세어졌고, 사마제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그 순간 순간을 넘기고 있었다.
"허억......허억!"
이미 정신까지 혼미해지고 있는 사마제위는 더 이상 버틸만한 여유가 없었다. 동창위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하여 모여들었다.
그때, 그들 뒤로 몇 개의 그림자들이 내려섰다.
우지직―! 끄르륵......!
"크어어억."
수채 구멍에서 물 빠지는 소리가 들리며 동창위들 중 한 사내가 목이 부러져 그냥 풀썩 쓰러졌다.
"흥! 황궁의 쥐새끼들."
사람 서넛을 뭉쳐놓은 듯 보이는 거인이었다. 그 사내의 옆으로 두 명의 사내들이 서 있었다.
걸인처럼 더러운 베옷을 입고 등에는 헝겊으로 싼 길쭉한 막대를 들고있는 사내와 이미 환갑을 넘긴 듯 보이는 사내가 서있었다. 이 나이 많은 사내는 무엇이 좋은 듯 계속 싱글거리며 웃고있었다.
"모두 죽여주마!"
거인은 다시 일수를 휘둘렀다.
"켈켈켈. 내 몫도 있어야지."
"더러운 놈들."
삼 인이 움직이자 동창위들은 마치 허수아비 같았다.
그들의 움직임을 다 파악할 사이도 없이 동창위들은 그 자리에 쓰러져 내렸다. 삼 인의 일수에 그들은 쓰러지기 바빴다.
"웨, 웬놈들이냐?"
"웬놈이라니....... 어르신이다!"
"크악!"
거지 차림의 사내가 휘두른 일검에 두 명의 위사들은 목이 잘려 날아가 버렸다.
거인의 일수에 한 동창위가 머리가 바스러져 버렸고, 거인은 자신의 손에 묻은 허연 뇌수를 핥아먹으며 웃고있었다.
"컥!"
늙은 노인은 일장에 한 사내의 가슴을 으스러뜨려 죽이더니 다시 일 장에 다른 사내의 머리를 으스러뜨려 버렸다.
"소주."
"너무 늦게 도착하였습니다."
다섯 명의 위사들을 차례대로 처치한 세 사나이는 사마제위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사마제위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광노. 소평. 호귀!"
그러나 그 순간 사마제위는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졌고 세 사람은 비조처럼 날아 사마제위와 사마천인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어느 샌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소평의 음산한 목소리를 남겨 놓은 채.......
"황제 놈, 내 친히 너의 모가지를 비틀어놓고 말겠다! 크하하하하!"
* * *
"후우―!"
사마천인의 입에서는 낮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복수도 하고 있지 못한 자신을 아버님이 뭐라 하실까 한심스러웠다.
이때 그의 뒤쪽에서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있었다.
사마천인의 몸은 흠칫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 발자국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다.'
천명의 적에게 둘러싸였을 때에도 그는 놀라지 않았다. 그 혹독했던 수련과 시련에 맞부딪혀 자살만을 꿈꿔왔을 때에도 적어도 태연을 가장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녀의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흠칫 놀라곤 했다. 숨길 수도 없을 만큼 뚜렷한 반응이었다.
'이렇게 한심한 모습이라니.......'
무언가를 그녀에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원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무슨 근심이 있나요?"
"아, 아니오"
사마천인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진주영을 바라보았다.
때로는 천 마디의 말보다 하나의 눈빛이 더욱더 큰 감동을 주기도 한다.
사마천인은 조용히 두 눈을 들어 탁자 뒤에 다소곳이 서 있는 진주영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말로 표현 못하는 자신의 심정을 진주영이 자신의 애타는 눈을 통해서라도 알아주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마음먹었던 모든 것은 사라져버렸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폭죽이 터지는 듯한 충격을 받아버린 것이다.
잘 절제된 몸짓에 삶의 애착이 없는 듯한 진주영의 애처로운 표정이 그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했다.
한 명의 여인으로 인해 이렇게나 혼란스러워 한다는 것은 철저히 훈련된 자에게서는 있을 수 없는 변화였기에 더욱 놀라움이 컸다.
사마천인이 필사적으로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달싹였다. 그때, 진주영이 말문을 막았다.
"그렇게, 저를 사랑하고 있나요?"
진주영의 물음 뒤로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다.
그에게 이 질문은 너무도 뜻밖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대답을 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답 한 번이 수십 명의 목숨을 빼앗는 것보다도 힘들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드디어 그의 입이 열렸다. 그러나 대답을 하는 순간에도 자신은 왜 그녀 앞에 서면 작아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소."
사마천인은 그녀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진주영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자신의 허리에 감긴 요대를 풀고는 겉옷을 벗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진주영의 알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여러 개의 곡선과 굴곡이 이어져 있었다. 한 줄기 촛불에 비쳐진 진주영의 알몸은 성스러웠다. 여신이 하강한 듯한 그 아름다움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신의 예술이라 극찬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한 허리의 곡선, 작은 흠집만 있어도 깨져버릴 듯한 유방, 그리고 투명하리만큼 처연한 얼굴, 그런 그녀의 몸을 자연스럽게 덮고 있는 굽이치는 골짜기의 세류(細流)를 닮은 그녀의 머리카락, 그리고 작은 불빛이 어른거릴 때마다 반짝이는 그녀의 신비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앞에 발가벗고 서 있는 모습을 대한다면 어느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마천인은 쥐가 날 정도로 꽉 쥔 손이 은근히 떨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를 가지세요. 당신 뜻대로 하세요."
일순, 사마천인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자, 저를 안아 보세요. 그게 당신이 바라는 것 아닌가요?"
진주영은 자신의 양 팔을 들어 마치 안아달라는 듯이 다가 서고 있었다.
"옷을 걸치시오."
그러나 진주영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당신은 바보로군요. 이렇게 좋은 기회도 없는데."
찰싹!
그의 손이 진주영의 얼굴을 후려갈겼고, 진주영의 입에서는 한 줄기 핏물이 새어나왔다.
그는 그런 진주영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듯이 돌아서서 문을 향해 걸어갔다.
진주영은 마치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 되어 돌아서 나가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깔깔깔. 병신. 당신은 병신이야! 주는 밥도 떠먹지 못하는 병신. 호호호호!"
진주영의 입에서는 일순 요기로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문고리를 잡고 밖으로 나가려던 사마천인이 멈칫하며 말했다.
"자기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마시오. 당신이 하는 짓은 어리광에 불과하오. 강해지시오. 당신이 하는 그런 자학이야말로 당신을 더욱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릴 뿐이오. 그대는 살아야 하오. 생이 다하는 날까지....... 그것이 당신을 이렇게 만든 자들에 대한 복수요."
그는 마치 벽을 향해 말하듯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말을 마치고는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문은 부서질 듯 닫히며 부르르 떨렸다.
"깔깔깔깔!"
그가 나갈 때까지 미친 듯이 웃고있던 진주영은 그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무너지듯 쓰러져 울음을 터뜨렸다.
"흐흐흐흑......!"
진주영의 몸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처절하게 떨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일순간의 감정에 의해 벌인 추태에 대한 부끄러움인가?
아니면 철저하게 강해질 수 없는 자신에 대한 학대인가?
알 수 없었다. 아마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단지 지금은 이렇게 울어 버리는 것만이 그녀가 해야 할 일이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인 것 같기에 그녀는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진주영의 슬픔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 촛불이 일순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문 밖에서 그녀의 울음을 듣고 있는 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의 손아귀에 의해 문의 손잡이가 바스러져 나갔다.
* * *
백제성의 한편에 자리한 이름 없는 주점.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한 사나이는 앞만을 노려 본 채 쉴새없이 술잔을 들이키고 있었다.
미친 자인가?
독하기로 소문난 사천의 죽엽청을 마치 아이가 우유 마시듯, 아니 물을 찾아 사막을 헤매던 사람이 오아시스를 발견하고 미친 듯이 물을 마시는 것처럼, 숨 쉴 틈 없이 술을 입에다 쏟아 붓고 있었다.
사마천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왜 이토록 고통스럽고 괴로운 줄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하고 싶었다.
수십 번의 죽음 속에서조차 살아남은 그였다.
자객수업을 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과감하게 내던졌을 때도 그는 이토록 괴롭지 않았다.
이상이 있고 기약할만한 미래가 있었으며 다시 떠오를 내일의 태양을 꿈꾸었으니까.
살아 남으리라는 희망과 복수의 대상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녀를 만난 후부터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칼로 에이는 듯한 아픔이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의 복수심마저도 희미해질 지경이었다.
"우웩!"
쉴새없이 마시던 그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토해버렸다.
그러나 술기운이 가시는 듯 하자 그는 또 가슴이 허전해왔다.
"주인장! 술, 술 가져와."
그러자 점소이가 다가서며 말했다.
"저 손님, 밤이 늦었습니다. 이제 그만......."
점소이는 난처한 듯 그의 눈빛을 보았다.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한 몸짓이었지만 굶주린 이리의 눈빛처럼 강렬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점소이는 자신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의 눈을 피하며 우물쭈물하던 점소이는 그가 황금 한 냥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것을 보았다.
점소이는 다음 순간 정신을 번쩍 차리면서 술 창고로 뛰어 갔다. 그의 뇌리 속에 이미 그의 모습은 눈빛이 무서운 손님이 아니었다.
단지 황금 한 냥을 서슴없이 내는 훌륭한 손님일 따름이었다. 돈은 훌륭한 해결사였다.
점소이가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어가 가져온 술독을 사마천인은 아예 술독 채 입에 퍼부어 대고 있었다.
마치 술에 원수진 사람인 냥.......
"으음."
"우웩, 우억!"
술에 절어 걸어가던 한 젊은이가 갑자기 벽에다 대고 토사(吐瀉)를 하고 있었다.
흔치는 않지만 간혹 이런 자들이 있다. 그저 할 일 없이 빈둥거리며 벌건 대낮에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자들, 뭐 그다지 특이할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런 모습을 본 사람들은 혀를 차고 있었다.
"에그!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젊은 사람이 왜 저런디야. 에잉. 쯧쯧쯧!"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한 마디씩 해대고 있었다.
백제성을 잡고 있는 건달 패거리가 있었다.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오 인의 건달 패거리들이었다.
강한 자에게는 한없이 비굴하고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강한 그런 자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패랑대(覇郞隊)라 칭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백제성 사람들에게는 깡패며 협잡꾼들이었다.
패랑대의 대장격인 왕호는 오늘 기분이 몹시 좋았다.
술 취한 놈이 둘이나 걸려 마음껏 패고 제법 두둑한 돈도 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에게 또 한 사나이가 걸렸다.
채 자시(子時)도 지나지 않았는데, 또 술이 잔뜩 취한 채 벽에다 대고 토사를 하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그는 재빠르게 동료들과 함께 축 늘어져 있는 그를 메고 어두운 골목으로 끌고 갔다.
"욱!"
패랑대의 오 인은 이 재수 없는 한 사나이를 사정없이 패대기치고 있었다.
끊임없이 복부를 내지르자 사내는 몸 안의 모든 것을 게워낼 듯 했다.
"끄윽, 우웩!"
사정없이 맞은 그 사나이가 일어서려고 바둥거리는 순간, 왕호의 천각현퇴(千却玄退)라는 강호에서는 하류에 속하는 각법이 사나이의 턱에 작렬했고, 왕호의 입가에는 자랑스러움이 어렸다.
구석에 널브러져 있는 사내의 가슴을 뒤지던 수하 중 하나가 말했다.
"대장! 이녀석, 제법 두둑이 갖고 있는데요."
"그래, 그럼 오늘은 이만 해주지."
지갑을 바라보며 입이 쫙 찢어진 왕호는 제법 거들먹거리며 선심 쓰듯이 말하고는 골목에서 사라져버렸다.
이때, 죽은 듯 쓰러져 있던 사나이가 꿈틀거리다 몸을 돌렸다.
그는 바로 사마천인이 아닌가!
홍화객이라 불리는 천하제일의 살수가 겨우 길거리의 불량배들에게 곤죽이 되도록 맞다니, 아마 누가 들었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크크크. 재미있는 세상이야."
그의 눈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하늘의 반만큼이라도 의연할 수 있다면......."
<바다 위에 명월 떠오르니 멀리 계신 님이랑 함께 보리.
님께서 긴 밤이 한스럽고 밤새도록 그리움만 있다더니.
달빛이 애처로워 촛불도 꺼버리고 저고리 걸치니 이슬에
촉촉하다.
저 달 손수 떠다 드리지 못하니 꿈에서나 님 뵈올까.>
장구령(張九齡)이라는 시인이 쓴 '그리움'이라는 시가 어느 늙은 창기의 목소리와 비파소리에 어우러져 새어나오고 있었다.
창기의 목소리에서는 세월이 가져다주는 서러움과 이미 퇴기가 되어버린 비애가 서려있었다.
아마도 명월(明月)을 바라보며 자신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쓰러져 있는 사마천인의 눈에는 한없는 고뇌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 * *
황궁(皇宮).
자금성(紫禁城)이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 곳이었다.
자금성은 북경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모두 네 곳의 출구를 가지고 있는데 천안문(天安門), 동화문(東和門), 서화문(西和門), 신무문(神武門)으로 사방을 점해 배치되어 있는데 이 중 천안문이 바로 황궁의 대문격이다.
황궁은 구천여 칸의 방과 삼천여 칸의 전각, 누각들로 이루어져 있고, 영화전, 홍향전 등 궁인들과 황족들, 그리고 후궁이 기거하는 전각 등이 있다. 황궁의 삼대전각으로는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으로 황궁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다.
태화전(太和殿).
민간에서는 금란전이라 부르며 황궁의 정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봉천전이라는 이름과 황극전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이곳에서는 황궁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인 황제의 등극이나 황제의 생일, 설, 동지의 행사와 명절 경축행사들을 하기도 한다.
태화전은 황궁에서 가장 웅위로운 건축이며 또한 중원에서 제일 큰 목조전당이다.
태화전은 천안문의 뒤쪽에 자리해 있고, 천안문과 태화전 사이에는 화려한 석재물로 장식되어져 있다.
중화전(中和殿).
태화전의 뒤쪽에 자리한 고궁으로서 이곳은 황제가 정사를 돌보러 태화전으로 나갈 때 휴식하며 내각 내부와 시위집사들을 배알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황제는 황태후의 휘호를 정하거나 각종 큰 의식을 거행할 때마다 여기에서 상주서와 축사를 심열한다.
보화전(保和殿).
중화전의 뒤쪽에 자리한 궁전으로 주로 명절이나 조촐한 주연을 여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여러 중신들과 황궁 귀족, 장안의 문무대신들을 불러 주연을 열거나 시화를 나누기도 하는 곳이다.
그러나 겉으로는 평화로운 이 황궁은 무수한 암투와 권력을 향한 자들의 처절한 혈투가 벌어지는 곳이었다.
권력무상(權力無常)이라는 말을 하고 죽은 황제가 있지만 그래도 야심가들에게 권력은 꿈이자 희망인 것이다.
그래서 황궁은 더욱 신비하고도 은밀한 곳이었다.
만상의 최고 일좌(一座)를 차지하고 있는 전 중국 대륙을 통치하는 황제가 살고있는 곳인 황궁의 깊숙한 곳, 구중천(九重天)의 태자전(太子殿)에도 한줄기 달빛은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태자전은 당금을 통치하는 최고의 지위자가 기거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 주위로는 열 겹, 스무 겹의 매복과 잠행인들이 깔려 있었고, 기관진식이 거미줄처럼 얽혀있어, 나는 새라도 함부로 들어 설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만력제(萬曆帝) 주익균.
그는 자리에 정좌를 하고 앉아 검을 닦고 있었다. 명주천으로 검날을 세밀히 닦아 내려갔다.
그의 모습은 문사이나 기세는 무사의 것이었다.
그는 달빛에 검을 들어 검의 날 하나 하나를 세밀히 살피다 입을 열었다.
"천위."
그의 입에서 잔잔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옛! 황상."
한 무복(武服)을 한 사내가 천장과 바닥의 중간 부분에서 떨어지듯이 나타나 부복을 했다.
동창(東廠), 본시 황궁에는 동창과 서창(西廠)으로 나뉘어 지는 사조직이 있다. 동창은 대내적으로 황제의 경호와 황족의 보호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특수조직이다. 그들은 반란자들을 물색하고 황제를 비밀리에 호위하는 것을 주 업무로 하고 있다.
그 중 동창위는 동창을 관리하는 우두머리로 황제의 명 외에는 어느 누구의 명도 받지 않는다.
서창은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조직으로 주로 해외의 침략 방지를 위해, 혹은 정세를 살피기 위해 숨어 있는 자들이다.
이 외에 영반이나 금군, 그리고 호위대 등이 있고 화포대, 기갑대, 전차대, 전병대 등이 황제의 명에 움직이는 공적인 조직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그들의 동태는?"
"아직이옵니다. 그러나 곧 그들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낼 것 같습니다."
주익균은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담겨있었다.
"천명단(天命團)을 무림에 출두시켜라. 은밀히!"
"존명(尊命)."
대답을 마친 천위는 가볍게 예를 올린 후 바닥으로 꺼지듯이 사라져버렸다. 마치 눈사람이 녹아 사라지듯이 스르르르 꺼져버린 것이었다.
"바람이 일고 있다. 풍랑을 예견하는......."
구름에 갇힌 달은 나올 줄을 모르고 있었다.
* * *
"아, 아, 아......."
사마천인은 술에 잔뜩 절어 들어왔다. 밤을 꼬박 새우고 정오가 되어서야 들어올 수 있었다.
그것도 여기저기 먼지와 그다지 대단치는 않았지만 상처가 가득한 몸을 이끌고 이제야 겨우 돌아온 것이다.
그런 그가 보아야만 했던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듯한 자신을 바로 세우려고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 아......."
단지 뜻을 알 수 없는 소리만 내지르며 두 손을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이대로 자신도 죽어가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이다지도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인가.
일장의 거리가 너무도 멀었다. 믿을 수 없는, 믿고 싶지 않은 광경이 일장 앞에 펼쳐져 있었다.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린 진주영, 그녀가 그곳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안돼, 안돼!"
그는 극렬하게 외치고 있었지만, 어느 누가 들어 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도, 자신을 낳은 어머니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았을 때에도 이토록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 순간 죽음을 떠올려 보았다. 차갑게 식어버린 그녀의 시신을 보며 자신도 같이 그곳에 누워있고 싶었다.
그의 눈에서는 아까부터 눈물이 쏟아졌고, 그 눈물은 진주영의 옷을 적셔갔다.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많이 울어본 적이 있을까?
그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주영의 몸은 그의 흐느낌에 같이 떨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은 결코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아주 평온해 보였다.
생의 모든 고통을 잊어버린 듯이.......
언제였던가?
처음 그녀의 부탁을 받고, 그녀를 위한 첫 살인을 하고 돌아오던 날이었을 것이다.
밤을 하얗게 지새운 듯 처연한 모습으로 자신을 기다리던 진주영은 창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먼지처럼 부서질 것 같이 보이기도 했었다.
왠지 금방 사라질 것만 같은 그녀의 모습에 처음 조급함을 느꼈었다.
그리고, 일의 성공여부를 제쳐두고 그의 상처를 보자 놀라서 뛰어오던 모습, 떨리는 손으로 피가 조금 내비치는 그의 팔에 손수건을 감아주던 그 모습, 미안한 마음이 가득한 얼굴 표정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때 이미 사마천인은 그녀를 사랑해버린 것 같았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떨리는 가슴이 처음에는 무엇인지도 몰라 당황한 그였지만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주영. 난 그때부터 이미......."
항상 슬픈 모습이었던 그녀, 그것은 그에게는 아픔이었고 그에게 새로운 소망 하나를 가지게 했었다.
"내가 보고 싶었던 건 당신의 정말 밝은 웃음 하나였는데, 그 소원이 그토록 컸단 말이오? 왜 당신은 나에게 마지막 희망까지도 빼앗아 가는 것이오. 왜!"
그는 오열했다. 그녀가 미웠다. 자신의 마음도 다 헤아리지 못한 채, 삶의 희망까지 꺾어버리고 도망가버린 그녀가 너무도 미웠다.
"왜 이런 바보 같은 선택을 하느냔 말이오. 주영. 흑흑, 당신의 미소가 보고 싶소. 주영......."
사마천인의 외침이 들렸던 것일까? 항상 불안해하고 고통스러워하던 진주영의 얼굴은 지금 너무도 평온해 보였다.
비록 시퍼렇게 마른 입술이었지만 미소를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주영. 알겠소. 당신을 편하게 해주겠소."
사마천인은 그녀를 안아들었다.
비가 내리고 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대지를 감싸 안으면서 뿌연 물안개를 피어오르게 하고 있었고, 주위를 더욱 음산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지금 이곳에 서 있었다.
차가운 겨울비가 온몸을 적시고 있었지만 그는 한 점의 미동도 하지 않고 그의 앞에 금방 만들어 놓은 듯한 봉분만을 쳐다볼 뿐이었다.
빗방울이 그의 얼굴을 때릴 때마다 그는 칼로 베어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그 느낌마저도 그에게는 고통이 아니었다.
아마도 자신의 살을 한 덩어리씩 베어내도 그는 이 순간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방울들이 그의 얼굴을 타고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랑하오. 왜 이 말을 미리 하지 못했는지 후회되는구려. 내 처음으로 사랑이란 말을 내 입에 담아보오. 주영, 그곳은 편안하오? 부디 잘 가시오. 나도 언젠가 따라가겠소. 기다려 주겠오?"
그의 말은 너무도 나직했다.
"허허. 어쩐지 술이 한 잔 마시고 싶구나......."
<하늘이여,
당신이 나의 모든 것이었던 단 한사람을 빼앗아 갔으므로 제 손에는 한 자루의 철검만이 남았습니다.
당신이 내 앞에 있다면 나는 이 철검을 들어 서슴없이 베어 버렸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갖고 태어나지 못한 나이지만, 오직 그녀만은 나의 것이라 여겼는데.
하늘이여,
당신은 내게 너무나도 소중한 것 하나를 빼앗아 갔습니다.
이렇게 차가운 비를 내려 나의 슬픔을 식히려 하지만.......
불타오르는 분노와 슬픔은 단 한줌도 사그라뜨릴 수가 없습니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은 그녀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절망감에 의한 것도, 고된 삶을 살아야 했던 그녀가 불쌍해서도 아닙니다.
다시 차가운 흙 속에 누워 잊혀져야 할 그녀가 애처로워 그런 것입니다.
하늘이여.......
이젠, 불쌍한 그녀를 그대에게 보냅니다.>
"주영."
사마천인은 떨리는 손을 들어 진주영의 묘비를 한 번 쓰다듬어 보았다.
그 묘비에는 이런 글귀가 씌어있었다.
<단 한줌의 사랑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했던 한 순결한 여인이 이곳에 잠들다.>
그리곤, 무너지듯이 쓰러져버린 사마천인은 통렬하게 그녀의 이름을 외쳐 불렀다.
"주영!"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쳐 나갔다.
하늘마저도 그의 슬픔에 동조하듯 겨울비는 더욱 무섭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 * *
무황 남태천.
그의 손에서 작은 종이조각 하나가 그가 일으킨 삼매진화에 의해 바스러져 한줌의 먼지가 되었다.
"흠, 드디어 내 차례인가?"
너무도 덤덤한 그의 반응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게 했다. 단지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눈이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을 뿐.
숭산 소실봉.
태산북두(泰山北斗)라 불리는 소림사가 훤히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이곳에 서 있었다.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소림사는 그 웅장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많은 법당(法堂)과 불전(佛殿), 석탑(石塔) 그리고 줄지어 건립되어 있는 법사, 소림사의 규모는 방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소림사는 당 초엽, 혹은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세워졌다고 알려졌다.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천축에서 선종(禪宗)의 불경을 가지고 소림에 들어옴으로써 소림사는 수천 년 무림사를 영도해 나가는 태산북두격인 존재가 되었다.
면벽구년(面壁九年).
선종을 이끈 달마대사가 토굴에서 구 년이라는 면벽을 하는 동안 마침내 소림무공의 총화라할 수 있는 두 권의 기서를 남겼고 그로 인해 소림은 무의 본산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이른바 역근경(易筋經)과 세수경(洗髓經)이 그것이다. 이 두 권의 기서로 인해 소림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천 년이라는 유구한 세월동안 사십이대(四十二代)의 수많은 고승들이 명멸했으며, 그 동안 소림의 무학은 눈부신 발전을 했었다.
특히, 소림칠십이비전절예(少林七十二秘傳絶藝)는 달마대사 이래로 소림 최고의 무공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그 밖에도 소림에는 세인들의 수많은 무공과 절공비기들이 잠들어 있다고 했다.
실제로 작게 나누면 근 천팔백육십 종의 비학(秘學)이 소림에 있었으니 그야말로 중원무학의 보고라 할 수 있었다.
소림의 역사는 곧 무림의 역사와도 같았다.
불과 수 년 전 마교를 잠재웠던 것 역시 소림이었고, 수많은 전란과 혈세를 겪으면서도 그 자리를 지켜온 소림이었기에 경외감이 이는 것이 당연했다.
소림사의 요지는 소림오각(少林五閣)으로 불심각(佛心閣), 장경각(藏經閣), 세심각(洗心閣), 법화각(法華閣), 천수각(千手閣)들로 이루어져있다.
소림오원(少林五院)으로는 달마원(達磨院), 수계원(授戒院), 계도원(戒導院), 선좌원(禪坐院), 지객원(知客院)으로 이루어져있다.
소림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곳들로 특히 이 오각오원(五閣五院)은 전 선대의 장로들과 현 장문인과 동배의 대사들이 관장한다.
그 밖에도 삼전(三殿)과 팔당(八堂), 삼십육방(三十六房)이 있는데 모두 소림에서 손꼽히는 고수들이 관장을 하고 있다.
특히 삼전 중 나한전(羅漢殿)은 소림사의 중들이 무학을 익히는 곳으로, 그 유명한 소림백팔나한대진(少林百八羅漢大陣)이 이곳의 주력이다.
이렇듯 장엄무비한 소림사를 과연 누가 있어 넘볼 수 있을 것인가?
소림의 역사는 끝없이 되풀이되는 승들의 불경소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한 소림사를 남태천은 오만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세상을 오시한 채, 마치 자신이 천자라도 된 듯한 약간의 교만함이 남태천을 더욱 빛나게 했다.
지금 이곳엔 무황 남태천과 삼 인의 선승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얗게 서리 내린 눈썹과 수염을 단정히 내리고 결가부좌를 한 채였다.
반안(半眼)의 모습을 하고 있고, 비록 다 떨어진 법의(法衣)를 몸에 걸치고 있었지만 그들의 모습은 우화등선한 신선의 그것이었다.
탈속한 모습, 무심무념무아(無心無念無我)한 마치 갓 태어난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들에게서 은연중 뿜어져 나오는 기도는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 소림의 삼선승(三仙僧)은 반선(半仙)의 경지에 올랐다고 세인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현 소림장문보다도 한 배분 이상 높은 배분을 갖고 있었고 벌써 그들이 은거한지 삼십 년이 넘어서고 있었다.
그 동안 단 한시도 밖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그들이 이미 우화등선(羽化登仙)했다고도 했고, 혹자는 이미 입적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하긴 그들 중 가장 배분이 낮은 불선대사(佛仙大師)가 이미 백삼십 세를 넘어가고 있었으니, 가히 살아있는 인간화석이라고 할만 했다.
불선(佛仙) 한우백이 입을 열었다.
"허어. 왜 이리도 마음이 답답한지. 사형, 우리가 하는 일이 잘하는 것일까요?"
둘째인 불인대사(佛仁大師)가 말했다.
"사제, 잊지 말아야 하네. 이것이 탕마멸사(蕩魔滅邪)와 무림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해 태천을 보호하기 위함임을. 어쩔 수 없는 일이네."
그러자 반안을 하고 있던 첫째 무한대사(無限大師)가 가벼이 불호를 읊었다.
"아미타불....... 다 하늘의 뜻이다."
"허어. 중생을 위해 우리가 아수라가 되어야 하는군요. 그러나, 정녕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불선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휭―! 하고 바람이 한 차례 이는가 싶더니 사 인의 앞에 한 사나이가 내려섰다.
"그대가 홍화객인가?"
일순 사 인의 눈에서는 긴장이 스쳤다.
"그렇소."
"그럼 자객으로 온 것인가?"
사마천인은 눈을 들어 남태천을 바라보았다.
"아니오. 나는 그대와 정당한 대결을 위해 왔소."
그의 말을 들은 삼선승의 눈가에 이채와 함께 잠시 고통의 그림자가 어렸다.
그 중 불선 한우백의 눈빛이 더욱 심하게 흔들렸다.
남태천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분들은 소림의 고승들로 우리 대결을 지켜볼 참관인이다."
그러자 첫째인 무한대사가 말했다.
"아미타불. 무한이라 합니다."
"불인이라 하오."
"불선이오."
세 사람의 자기 소개가 끝나자 남태천이 말했다.
"좋다. 이제 네가 얼마나 대단한지 우리 한번 일수(一手)를 나누어 보자."
"좋소!"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치의 검도 뽑지 않고 있었지만 그들의 몸에서 일어나는 무형의 기세는 그들 주위에 무섭게 퉁겨나가고 있는 작은 자갈들로 미루어 그 위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이때, 남태천이 무섭게 검을 뽑아들며 사마천인에게 덮쳐갔다.
"반야대불검(般若大佛劍) 섬(閃)"
무서운 속도로 사마천인의 인중을 향해 검 끝이 다가가고 있었다.
엄청난 기세로 달려드는 검을 바라보는 사마천인의 눈에는 철저한 무심이 흐르고 있었다. 마치 생을 포기해버린 듯 그는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드디어 남태천의 검이 사마천인의 살갗에 닿으려고 했고, 그 순간 그는 움직였다.
한줄기 섬광이 번쩍였다.
카캉!
보이지는 않았으나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분명했다. 그 기세에 이기지 못한 두 사람은 뒤로 일보씩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남태천의 눈에는 불신의 빛이 흘렀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그는 다시 검 끝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 검으로부터 반야대불검 환자결(幻字結)이 터져 나오며 검기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검기는 날카롭게 반짝이며 대지를 휩쓸고, 사마천인을 향해 쏘아져가고 있었다.
사마천인도 일 보를 앞으로 내딛으며 검을 휘둘러갔다.
채채챙―!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온 산야를 뒤덮었다. 현란한 소리는 들렸으나 그 모습만은 환영이 잠시 스치는 듯 보이지 않았다.
"크윽, 대단하군."
잠시 소리가 끊기더니 모습이 보인 남태천의 몰골은 가관이 아니었다.
여기 저기 핏발이 비쳤고 옷은 이미 누더기가 되어있었다. 그가 한 번이라도 이렇게 어려운 싸움을 해본 적이 있었을까?
그는 눈빛을 빛내며 검을 고쳐 쥐었다. 공중으로 도약하며 수많은 초식을 섞어 시전을 하며 사마천인을 향해 쏘아갔다.
"종(終), 횡(橫), 극(極), 점(點)!"
수만 갈래의 검기와 검영이 사마천인을 향해 내리꽂혔다.
소실봉 위는 그들로 인해 먼지가 마치 구름처럼 피어나 산봉우리를 온통 뒤덮고 있었다.
이때, 사마천인 역시 검을 고쳐 쥐고는 떨어져 내리는 그를 향해 뛰어올랐다.
"야아앗!"
괴소를 지르며 뛰어 올라간 그는 검과 몸을 합체한 듯이 신검합일(身檢合一)의 신법으로 쏘아갔다.
두 개의 점이 공중에서 부딪치는 순간 천지를 가르는 듯한 폭음이 일었다.
콰쾅―!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인간의 한계를 넘은 신의 무위(武威)에 감탄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곧이어 척! 하고 땅으로 내려서는 가벼운 착지음이 들렸다.
그들은 자신의 발로 땅을 딛고 있었다. 다만, 남태천의 상세가 조금 더 깊을 뿐이었다.
그의 입가에는 붉은 피가 마치 물감을 뒤집어 쓴 듯 보였다.
사마천인 역시 얇은 핏줄기를 비추고 있었으나. 그의 상세 역시 녹녹치 않았다.
삼 인의 선승은 놀람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 자객의 무위라고 누가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생각했던 자객의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사마천인, 그의 무위는 능히 천하제일이라 칭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삼 인의 꽉 쥐어진 손에는 땀이 배어갔다.
"크크크....... 대단하군. 컥! 대단해. 하지만 어느 누구도 나, 남태천을 꺾을 수는 없다."
줄기줄기 피를 쏟으며 말을 잇던 남태천이 발을 정(丁)자 형태로 만들더니 검을 기묘하게 꺾으며 말했다.
"반야대불검 멸(滅)!"
산악을 쩌렁하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와 함께 그는 몸을 날렸다.
사마천인 역시 진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며 몸을 날렸다.
"무적검(無敵劍)!"
그의 입에서도 역시 통렬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파앙―!
그들이 검을 맞부딪치자 시퍼런 검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검을 맞댄 채 떨어질 줄 모르고 공중에 머물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때, 삼선승 중 막내인 불선대사가 경악성을 터뜨렸다.
"아미타불. 이것은 내력 대결이다."
내력대결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들의 내력은 이미 오 갑자를 넘었다. 일 갑자를 육십 년 공력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오 갑자가 넘는다면 무려 삼백 년 공력 이상이 된다는 얘긴데, 두 사람 모두 이 갑자 이상의 공력을 갖고 있었단 얘긴가?
내력대결이 극에 달할수록 남태천의 입에서는 쉴새없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때 둘째인 불인대사가 말했다.
"이런, 태천이 위험하다!"
삼선승이 참지 못한 채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삼선승의 첫째인 무한대사가 외쳤다.
"반야대장력을 최대한 끌어올려라."
불선 한우백도 망설이는 표정이긴 했지만 어느새 그들의 행동에 동조하고 있었다. 삼선승은 푸르스름한 기광이 번뜩이는 기의 회오리 안으로 달려들었다.
"반야대장력!"
콰앙――!
인간이 만들 수 있는 힘은 얼마인가? 엄청난 힘의 회오리였다.
지축을 울릴 듯한 충격과 소리에 숭산의 반이 날아가 버렸고 먼지가 회오리가 되어 천지사방으로 날리고 있었다.
일대 장관이라 할만하였다.
"커억....... 이, 이런 비겁한."
털썩― !
사마천인의 몸은 마치 바람에 휩싸인 낙엽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남태천은 삼선승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대단한 무위였다."
그들은 경이로운 눈으로 사마천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 불선 한우백만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미안함과 죄책감이 어려있는 표정이었다.
이때, 갑자기 남태천의 눈빛이 달라졌다. 검 빛이 몇 번 반짝였다고 느껴졌을 때,
"크아악."
"컥!"
"으아악......!"
삼선승에게 부축되어 있던 남태천이 일순 눈에서 마화를 흘리며 검으로 불선대사를 반으로 갈라버리고 불인대사의 오른 팔을 잘라버린 후 무한대사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다.
"네, 네가......!"
불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남태천을 바라보았다.
"크흐흐흐."
"당신 늙은이들은 이제 죽어줘야겠어."
그렇게 말하고 있는 남태천의 모습은 마인의 모습이었다.
"아미타불......."
심장에 검이 꽂힌 채로 아직도 쓰러지지 않은 무한대사가 불호를 외웠다.
"우리가 울 안에서 사자를 키웠다니. 업이로다."
"크흐흐! 이제야 그것을 알았다니, 죽어라 늙은이들. 마화참(魔火慘)!"
남태천의 두 손이 일순 푸르스름한 마화에 휩싸여 불인대사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파삭! 퍽!
잘 익은 수박 으깨지는 소리가 들리며 놀라 멍청히 서 있던 불인의 머리가 으스러져버렸다.
"이 천인공노할......."
무한대사의 두 손에 반야대장력이 시전되며 남태천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크크크. 늙은이 마지막 발악이군! 마화참."
무한이 마지막 본 것은 푸르스름한 마화였다.
"크악!"
이제 숭산 꼭대기 위에 서 있는 자는 남태천 한 사람뿐이었다. 붉은 강기에 휩싸여 있는 그의 모습은 진정 지옥불에서 버티고 있는 악마의 모습이었다.
"크하하하하! 나에게 도전하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사마천인은 몽롱해지는 자신의 정신을 추스르려 안간힘을 썼지만 뜻대로 되어주지 않았다. 손끝에 단 한줌의 기력도 모을 수 없었다.
'이제 죽음인가? 이것이.'
그렇게 느끼는 순간, 불인과 남태천의 격돌로 인해 생긴 권풍으로 사마천인은 숭산 뒤쪽에 자리한 만장애(萬丈崖) 근처까지 날려갔다.
"큭!"
'주영. 당신도 이런 것을 느끼며 갔소?'
그는 움직이려고 버둥거려 보았다
'죽음이 이런 것이라니....... 허무하구나. 이것이 죽음인가?'
그러나 단 한줌의 기력도 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당신을 만날 수가 있겠구려. 주영, 그것으로 족하오.'
마치 잘 구겨버린 종이조각처럼 구겨져 벼랑 끝에 걸린 그는 점차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버둥거려도 헤어날 수 없는 늪처럼 죽음은 그를 서서히 옭아매 오고 있었다.
마지막 기운을 다해 진주영의 피묻은 체대를 꼭 움켜쥐며, 영원히 되돌아 올 수 없는 깊은 꿈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한참을 광소를 터뜨리던 남태천이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크크큭. 저기 있었군."
그는 한쪽 구석에 반쯤 시신이 되어 뒹굴고 있는 사마천인을 보고는 다가갔다.
"크크크....... 미친 녀석! 어떤가? 죽음을 음미하는 기분이? 보잘 것 없는 살수 나부랭이가 나를 노리다니! 너무 무모했어. 하지만 고맙군. 어쨌든 너로 인해 그 세 늙은이를 죽일 수 있는 수 있었으니 말이야. 크하하하!"
한참을 광소하던 남태천이 아직도 꿈틀대고 있는 사마천을 보고 말했다.
"이런, 아직도 살아 있잖아. 제법 끈질긴데."
그는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마도 아까 불선 한우백의 망설임이 손속에 사정을 두게 했던 모양이었다.
"그 보답으로 고통 없이 죽여주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발은 사마천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퍼억!
발길에 채여 한참을 날아가던 사마천인은 그 깊이가 얼마인지 모를 깊은 절벽의 암류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크하하하! 기다려라. 이제 이 남태천이 중원에 복수하리라. 철저하게 피의 복수를 할 것이다!"
그의 모습은 악마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크흐흐....... 땡중들이 오시는군."
그는 경공을 시전해 달려오는 소림의 제자들이 멀리 눈에 들어오자 손에 공력을 끌어올렸다.
"마혈수(魔血手). 이것으로 모든 것은 바뀌어질 것이다."
순간 그의 오른 손이 붉으스름하게 빛이 났다.
"크윽."
그리고는 주저 없이 자신의 오른쪽 가슴에 쑤셔 넣었다.
그의 전신에 일었던 광기는 바람에 연기가 흩어지듯 걷히고, 아주 슬픈 신색이 되어 삼선승의 시신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 물론 경건하기 그지없는 자세였다.
그리고 얼마 후, 소림의 절대기재라 불리는 소림의 장문인 환우대사와 제자들이 달려왔고 경악을 금치 못하는 시선으로 남태천과 삼선승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누구도 방금 전에 있었던 음모를 눈치 채지 못한 채, 남태천의 슬픈 듯한 흐느낌만이 숭실봉을 맴돌고 있었다.
* * *
중원은 술렁거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바로 이제는 죽어버린 한 사내 때문이었다.
삼선승과 무황 남태천의 몸에 남긴 상흔(傷痕)을 달리 무엇이라 해석하겠는가?
홍화객은 마교의 인물이었고, 소림의 활불이라 불리던 삼선승이 그에 의해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마교의 인물이 나타났다는 것은 거대한 회오리요 폭풍우였지만 세상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홍화객이라는 마인은 삼선승과의 대격전 끝에 무황의 손에 의해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삼선승을 죽인 홍화객을 욕하며 무황 남태천을 찬양했다.
주점에 모인 사람들은 그를 향해 경배하는 술잔을 높이 쳐들었고, 빨래를 하는 아낙들의 입에서는 그의 무위(武威)와 출중한 용모를 얘기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그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무황 남태천.
유복자로 태어나서 무림 최고의 권좌인 무림맹주에까지 추대되어있는 그를 사람들은 경외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를 추종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마교의 인물이라 해도 일개 자객으로서, 아니 그보다 가공할만한 무위를 지녔다고 하더라도 단 한명으로 소림의 삼선승을 반항조차 하지 못하게 암습한다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환우대사조차도 자신의 제자가 이 모든 사건의 범인이라는 사실을 짐작도 하지 못했고, 소림은 백여덟 타의 종을 치며 세 선승의 입적을 추모했다.
* * *
절벽 사이로 울룩불룩한 바위들이 마치 창을 세워놓은 듯이 솟아있었다. 그 사이로 짙푸른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바위들 틈엔 무언가 검은 물체가 걸려있었다.
그 물체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나와 주변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었으나, 이내 흐르는 물에 씻기어지고 있었다.
또 하나, 피와 함께 물에 떠내려갈 듯 떠내려가지 않는 물건이 있었다. 그것은 여인의 요대처럼 보였다.
물체는 다름 아닌 사마천인인 것이다.
이곳은 안개가 어리어 절벽 위에서는 바닥조차 구분할 수 없는 형태였다. 뿌옇게 보이는 하늘이 너무도 멀게만 느껴지는 곳이었다.
죽었을까? 그는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때 발을 딛기도 힘들만큼 날카로운 바위 위를 딛고 무언가 검은 인영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바위에는 물이끼가 끼어 자칫 잘못하면 미끄러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그 물체는 마치 다람쥐가 나뭇가지 사이를 헤집고 다니듯 돌을 밟고 뛰며 빠른 속도로 시신이 놓여있는 곳에 당도했다.
그리고는 시신의 옆에 그 인영은 내려섰다. 인영은 의외로 작은 소년이었다.
어린아이를 통해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천진함 웃음, 해맑은 눈, 악의 없는 모습, 아마 아이들에게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일 것이다.
선함과 순수함의 전형적인 모습인 아이들이지만, 또 한편으론 가장 순수한 악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갖고 싶은 것과 먹고 싶은 것, 싫은 것과 좋은 것 등의 단순한 생각밖에 할 수 없는 그들로서는 갖고 싶으면 뺏는 것이고, 싫다면 버리면 되는 것이다. 어른들이 이런 모습을 보였다면 독단적이고, 편협하며, 독선적이란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아이들이라는 이유로 이들은 용서를 받지만, 때로는 물건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의 정도나 질투심 등이 도가 지나쳐 보이기도 한다.
이 소년도 한 열 살쯤 되었을까?
소년에게서는 갓 태어나 세상을 처음 바라보는 어린아이의 순수함, 천진함 등이 엿보였다. 아직까지 단 한번도 세상을 접해보지 못한 듯이 그의 눈에서는 그 어떠한 더러움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선천적인 강인함과 독선적인 자만심이 엿보이기도 했다.
비록, 식물의 줄기를 쪄서 만든 실로 얼기설기 짜 만든 옷감을 대충 걸치고 있었으나, 소년의 깨끗함과 강인함으로 인한 기이한 마력을 감출 수는 없었다.
해맑은 눈동자와 투명한 살갗으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두 볼, 그리고 입가에 흐르는 기이한 미소는 보는 사람의 마음에 친근감이 들게 하기에 족했다.
소년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손에 들고있는 나뭇가지로 시신을 꼭꼭 찔러보고 있었다.
신기한 장난감을 발견해서 막 탐색전을 벌이는 모습이었다.
움찔! 그런데 이 장난감이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소년은 놀라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그런 걸로 물러날 소년이 아니었다. 강한 호기심을 주체치 못하고 조금씩 장난감을 향해 다가섰다.
장난감을 바라보는 소년의 눈은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높다란 절벽 위로 손바닥만한 하늘이 파랗게 반짝이고 있었다.
사마천인은 자신의 몸이 이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원래부터 소생할 가망성이 없었지만, 하필이면 강가에 떨어져 피가 끊임없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에게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오직 한 가지, 진주영의 체대가 아직 그의 손에 있다는 것이었다.
'주영, 기다리시오. 이제 곧 당신에게 가오.'
곧 주영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평온해지고 조금 들뜨기까지 했다. 사마천인은 미소짓고 있었다. 비록 몸이 움직이지 않아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는 끝없는 암연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어딘가 동굴 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저기 빛이 보이는 곳으로 가면 모든 것이 끝임이 느껴졌다.
'주영을 만날 수 있다.'
그는 휘적이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때, 갑자기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이 확 불어나더니 그 빛의 구멍에 작은 인영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진주영이었다.
'주영!'
반가운 마음에 날 듯이 뛰어갔지만 진주영과의 거리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점점 빛이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진주영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천인, 아직 때가 되지 않았어요. 가여운 사람, 당신은 해야할 일이 남았어요. 가세요.......'
그녀는 그렇게 사라져 버렸고, 동시에 빛의 구멍도 없어지고 어둠 속에 그 홀로 남아있었다.
'주영, 가지 마시오! 주영―!'
사마천인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잡고 싶었지만, 그의 그런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이 어떤 것에 의해 질질 끌려가고 있다는 걸 느껴야 했다.
* * *
"그, 그후 어떻게 되었는가? 홍화객은 그렇게 죽어버렸는가? 아니지, 소년이 발견한 게 홍화객이 아닌가? 그렇다면 살았겠지?"
노화자는 아주 다급해 보였다. 자신의 친족이 죽었다 살아난들 이렇게나 수선을 떨까 싶을 정도였다.
주위에 앉아있던 사람들까지도 동작을 멈춘 채 청년을 주시하고 있었다. 모두의 얼굴에 긴장과 호기심이 잔뜩 서려있었다.
그러나 그에 대조되게 청년은 너무도 태평했고, 노화자의 물음을 듣지 못했다는 듯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을 계속했다.
"그렇게 칠 년이 흘렀습니다. 칠 년이라는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 칠 년이 길었나 봅니다. 칠 년동안 정말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청년은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는 밤의 장막을 드리운 듯 어두워져 있었고 빗줄기는 더욱 거세어졌다.
청년은 마치 자신이 그 칠 년을 보내온 사람처럼 회상하는 표정으로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런 청년을 바라보는 노화자는 점점 속에서 답답증과 열불이 나서 미칠 지경에 도달해 있었다.
"이봐―!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니까?"
"노형님은 아십니까?"
노화자의 벼락 같은 다그침에는 전혀 상관없이 청년은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꺼냈다. 붉게 물들어 있는 노화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 무얼 말인가?"
"명예와 부(富), 뭐 그런 것을 말입니다."
"켈켈켈켈켈켈!"
노화자는 한참을 미친 듯이 웃어대다가 눈물마저 찔끔거렸다.
"갑자기 뜬금 없이 명예와 부라니. 크크큭....... 하지만 거지에게는 멀고도 먼 얘기로군. 그렇지 않나?"
노화자의 넉살스러운 모습에 주위에서는 낮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허긴 어딜 가도 밥 걱정 안 하고 잠자리 걱정 안 하니 이것도 명예라면 명예고 부라면 부일 수가 있지. 암암! 이보다 더한 직업도 없고 말고. 켈켈켈."
노화자는 자랑이라도 되는 듯 자신의 가슴까지 두드려 보였다. 청년은 노화자를 보며 씁쓸히 웃었다.
"그 노형님의 얘기를 들으니 그와는 대조적으로 살아온 사람이 생각납니다. 명예와 부에 자신의 모든 인생을 건 사람이지요. 아마 냉혹하기는 북해의 빙하보다도 냉혹하고 악랄한 자일 겁니다."
"아니 그럼 홍화객의 얘기는 거기서 끝인가? 그는 그렇게 죽어버렸단 말인가? 그리고 홍화객의 시신을 발견한 그 괴소년은 또 무언가?"
노화자의 입에서는 쉴새없이 질문이 터져 나왔다.
청년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한꺼번에 말씀하시면 어떡합니까? 제가 점차 얘기해 갈 테니 조용히 하세요. 우선 이 효웅부터 얘기를 꺼내야 또 다른 비운의 사내를 얘기할 수 있으니까요."
제4장 새로운 시작
총령은 창 밖을 응시했다.
맑게 개인 하늘이 한 점 상처라도 나면 피라도 흐를 듯 투명해 보였다.
총령의 뒤로는 한 사나이가 읍을 한 채 서 있었다.
사내의 외모는 준수했다.
몸에는 사치스럽게 보이는 옥으로 된 노리개와 금붙이가 많이 매달려 있었다. 거기에다 누구라도 매료될만한 넉넉한 웃음을 머금고 있고 호인의 인상을 풍기고 있어서 부유하고 호탕한 호족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한 가지, 그의 날카로운 눈에서 풍기는 사기가 그의 외모에 반(反)하고 있었다.
"자네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감사합니다."
"백천우라 했는가?"
"그러하옵니다."
총령은 돌아서 백천우를 바라보았다.
"과연 얼굴만 봐도 남태천이 추천할만한 인재라는 걸 알 수 있겠군."
"과찬이십니다."
"대단한 능력을 지녔다지? 천문지리(天文地理)에서부터 신복지학(神僕地學), 그리고 귀모에도 뛰어나다고 들었네."
"미천한 재주이옵니다."
"자넨 참으로 겸손하군. 그토록 젊은 나이에 공도 많이 세웠던데, 재주가 미천할 리가 없지 않나?"
"시기와 행운이 저를 도왔을 뿐이지요."
"하하하. 시기와 행운을 자신의 편으로 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능력이지. 하여튼 열심히 해보시게."
"예, 알겠습니다."
백천우의 태도는 공손하기 짝이 없었다.
총령도 호탕한 웃음으로 백천우를 마주 대하고 있었으나, 그 눈만은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또한,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있는 백천우의 입가에서도 그 심정을 헤아릴 수 없는 엷은 미소가 번졌다.
잠시 후 백천후가 나가자 총령은 그가 나간 문을 노려보았다.
"아주 재미있어 지겠어. 아주 말이야. 흐흐흐흐....... 남태천! 그래, 지금은 네놈의 손아귀에서 놀아 주지. 지금은 말이야."
총령의 낮은 웃음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 * *
만장애(萬丈涯)의 계곡 위로는 사철 안개가 드리워져 있어 한 조각의 하늘을 바라보기도 힘들었다.
빛이 들지 않아 음습했고, 바위에는 무수한 이끼와 이름 모를 풀들이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그런 바위들이 일렬로 늘어선 계곡의 중앙에는 작은 동굴이 하나 뚫려있었다. 산짐승조차도 제 집으로 하기 꺼려할 듯한 음침한 동굴이었다.
그런데 그 동굴에서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지 않은가? 그 목소리는 지하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듯 나직히 울리고 있었고, 철을 긁어내리는 듯이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한편 팍 쉬어버린 노인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동굴 안,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도 협소하고 습기가 많은 곳이었다. 벽에는 끈끈한 액 같은 것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 액에서는 매캐한 냄새까지도 배어 나오고 있었다.
빛이 잘 들어오지 않긴 했지만 어느 정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는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는데, 그 옆에는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청년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비쩍 마르고 수염이 얼굴을 덮고 있어서 그 나이를 예측하기 힘든 사람이 진흙으로 만들어진 자리에 누워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은 분명 사마천인이 아닌가!
온몸이 비쩍 마르고 수염이 얼굴을 덮고 있었지만 그의 모습은 분명 사마천인이었다.
그의 몸은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 갓 서른정도일 그가 너무도 황폐해진 얼굴에 가죽과 뼈만 있는 몸 때문에 죽을 때가 다 된 노인으로 보였다.
자리에 누워있는 사마천인은 기식이 엄엄해 보였다.
그는 목안에 가래를 끄르륵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버님."
사마천인은 앞에 무릎 꿇고 앉아있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적아! 사내는...... 콜록! 함부로 우는 것이 아니다. "
그는 말하는 것조차 너무도 힘들어 보였다. 혼신의 힘을 모두 쏟아내듯 말을 하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청년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아버님."
아니, 그럼 이자가 사마천인의 아들이었단 말인가?
"이제 나는 너의 의모(義母)를 만나러 갈 수 있겠구나."
사마천인은 고통스러운 중에서도 그 사실이 기쁘다는 듯이 얘기하고 있었다.
"그래, 너에게 해주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
사마천인의 목소리는 너무도 작아 옆에 앉은 청년도 겨우 알아들을 정도였다.
그는 그마저도 힘겨운 듯 말이 뚝뚝 끊기곤 했다.
"나는 본시 한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살인기계였다. 나는 고아였다. 아니 고아가 되었지. 나의 눈앞에서 관군에 의해 아버지가 죽게 되었고, 나를 돌보던 아버지의 동조자들과도 헤어지게 된 후 그에게 구원을 받았고, 그의 손에서 자랐지. 내가 열다섯이 되던 해, 그는 나에게 살인을 강요했다. 그는 나를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을 따라 살인을 했지. 첫 살인은 나와 동갑 정도의 여자아이였다."
청년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 일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무릎을 꿇고 앉아 그 말을 듣고 있었다.
"죽음이 뭔지 몰랐지.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죽음이 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 여자아이의 눈빛을 잊어버릴 수 없단다. 무언가 강한 두려움과 절망을 보았지. 나는 그것이 싫었고, 또한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를 죽였지. 그후에도 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였단다. 그는 나에게 살인을 시키면서 이렇게 말했지. '이 세상에는 많은 악당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 악당인지 모른다. 너는 그 악당들을 죽여야 한다. 그래서 너의 아버지가 당한 만큼 그들에게 복수하는 것이다.' 난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죽이는 것이 두려웠단다. 하지만 바로 그랬기 때문에 난 사람들을 죽였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 나도 모른다. 너는 이해하지 못하리라. 왜 죽이기 싫어했음에도 많은 살인을 했는지. 콜록...... 콜록
!"
사마천인은 한바탕 자지러지게 기침을 해댔다.
청년은 미친 듯이 발작해대는 사마천인을 누르며 한참을 진정시켰다.
"그는 나에게 많은 사람들의 명단을 가져다주었고 그들을 모두 베어버리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들을 죽이고 나자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졌던 것이다. 그러다 나는 아버지의 동지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내가 이렇게 된 것도 어쩌면 하늘의 뜻인지 모르겠다. 나 역시 역린(逆鱗)을 했으니, 하늘을 거스른 대가일 게야."
사마천인의 눈에는 물막이 어렸다.
"지금도 나의 손에 죽어간 자들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나는 지금까지도 나에게 명령을 내리던 사내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의 얼굴조차 본적이 없지. 너의 의모의 원수와 나를 이렇게 만든 자를 찾아 복수를 하겠다는 네 뜻은 알겠다만,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을....... 커억! 너를 이렇게 만난 것이 어쩌면 나에게는 가장 큰 행운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너는 나 같은 길은 가지 말아라......."
그의 입에서 시커멓게 죽은 핏덩이가 쏟아져 나왔다.
사마천인의 얼굴에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어려있었다.
"너에게, 너무도...... 억! 내가 순수하고 행복했을 너를 오히려 불행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세상에 나가더라도 부디......."
청년의 손을 잡고 있던 사마천인의 손에 힘이 주어지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에 스르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청년은 그런 사마천인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아니요.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저는 압니다. 당신의 빚을 모두 갚아드리겠습니다. 한 마리 짐승으로 살아야 했을 저에게 말을 가르쳐 주시고, 글을 가르쳐 주신 당신이십니다. 그저 이름 모를 풀꽃처럼 죽어가야 할 저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나눠주신 당신이십니다. 저는 결코 당신을 이렇게 만든 자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청년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확고했고, 그의 눈은 의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한바탕 혈풍을 맞을 것입니다. 전 당신을 이용한 자들과 당신을 괴롭힌 자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
그의 말에는 확고한 신념이 흘렀다. 그의 말이 끝나자 청년의 눈에서 눈물이 또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청년의 앞에 누워있는 사마천인의 몸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 * *
약한 바람에도 흔들리며 현란함을 자극하는 홍등이 욕탕 안을 비추었다. 그 안에는 네 명의 미녀들이 알몸을 드러내 놓은 채 백천우의 몸에 감겨 전신을 애무하고 있었다.
물기가 흐르는 여인의 몸은 흔들리는 붉은 빛에 의해 더욱 뇌쇄적인 빛을 띠고있었다.
"허억...... 헉! 아......!"
"하아...... 아...... 하아! 아아!"
그런데 욕탕 안에서 백천우를 상대로 몸을 비벼대는 여자들 중에는 머리를 곱게 밀은 여승도 있었고, 수궁사가 선명히 드러나 있는 여인도 있었다.
그녀들은 부끄러움도 잊은 듯 백천우의 전신을 핥아대면서 자신의 몸을 더욱 밀착시키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러나 그와는 상대적으로 백천우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흥! 내가 누구의 밑에서 가랑이나 핥으며 살 수는 없지. 남태천, 그리고 총령! 나는 무공을 익히기 위해 나의 부모들을 죽였다. 그리고 기회를 위해 서슴없이 사부를 암습했지. 이제 난 성공해야만 해. 나에게 남은 건 하나도 없거든. 크크크....... 남태천과 총령, 이들을 이용해야 한다. 철저하게.......얼마 후 그들이 이루어놓은 것은 모두 내 것이 되리라. 나를 막는 것이 있다면 서슴없이 베어 넘기고 부러뜨릴 것이다. 그 무엇이라도! 흠,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얼굴에는 싸늘한 미소가 얼굴 전체로 퍼져나갔다.
"먼저 처리해야 할 자들이 있지."
그는 자신에게 달라 붙어있는 여인들의 유방을 서슴없이 주무르면서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권력이란 좋은 것이야. 부잣집의 여식도, 고매하신 승녀도, 나의 손끝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모든 것이 나의 뜻이지. 나의 뜻! 크하하하......!"
백천우가 사악한 웃음을 터뜨리는 사이, 사타구니에 얼굴을 박고 있는 여인의 눈에는 이미 이지라는 것이 없었다. 이 여인뿐 아니라 모든 여인들의 동공이 풀려 있었고 표정이 거의 없었다.
* * *
미세한 빛조차 없을 것 같은 두터운 어둠의 장막 사이로 천공을 밝히는 한 줄기 성운처럼, 촛불이 어둠을 물리치고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비록 작은 빛이었지만 주변의 거의 모든 사물들은 그 빛으로 인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촛불의 불빛에 주위의 사물들과 그림자가 일렁거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고 있었고, 석실의 정 중앙에 놓인 탁자에는 두 사나이가 마주 앉아 있었다.
팔십은 되어 보이는 노인과 이십 세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 앉아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을 짓누르고 있었다.
"묵천아, 네가 이곳에 몸 담은 지 오 년이 지났구나."
"예, 사부님."
"묵천아, 무(武)를 뭐라 생각하느냐?"
청년은 불빛 너머에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몸짓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인의 눈은 고요히 반짝였다. 그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어렸다.
"그래, 그럼 무(武)와 무(舞)의 차이는 무엇이냐?"
청년은 응당 노인의 질문이 나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망설임 없이 손을 내보였다.
"이 손의 등과 바닥, 양면이라 할 수 있지요."
"그래? 손등과 손바닥이라. 무슨 뜻이냐?"
"손바닥은 무언가를 움켜쥐고 잡을 수 있지만 손등은 그렇지 않질 않습니까?"
노인은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그런데?"
"저는 무(武)와 무(舞)를 실과 허로 보고 있습니다."
"허와 실이라? 겉껍질은 보았구나. 묵천아!"
"예."
"무(武)가 단순한 몸짓이더냐? 그저 칼부림에 지나지 않더냐? 진정한 무는 그런 것이 아니다. 무는 정신이고 혼이다."
"그러하오시면 무(武)와 무(舞)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노인의 입가에는 자애로운 미소가 어렸다.
"묵천아! 너는 진정한 예인(藝人)의 춤사위를 본 적이 있느냐?"
"진정한 예인이라 하오시면......?"
"무(舞)에 혼과 기가 실려있는, 그러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그런 사람을 일컫는다."
"없습니다."
노인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회한이 어려 있었다.
"나는 딱 한 번 그런 사람을 본적이 있다. 내가 검을 잡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옥녀봉에 올라 수련에 열중하고 있을 때지."
* * *
천산(天山) 옥녀봉(玉女峯).
기암과 괴석이 마치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솟아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 봉우리 정상에는 널따란 바위가 자리하고 있었고, 그곳에서는 한 사나이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핫! 하이얍!"
사나이의 입에서 터져 나온 기합소리가 산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의 검에서는 줄기줄기 검기가 새어나와 주변의 바위들을 바스러뜨리고 있었다.
그의 검이 춤을 출 때마다 바위 가루가 튀었고 그의 검이 선을 만들어 갈 때마다 산이 요동을 했고 그의 입에서는 용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던 중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사나이는 검을 늘어뜨리며 자리에 섰다.
사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 그곳에는 한 자그마한 중년인이 서 있었다.
사나이는 중년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뉘쇼?"
중년인은 사람 좋아 보이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나는 홍윤성이라 불리는 사람이네만 자네는 누군가?"
"본인은 적철이란 사람이오."
"성격이 참 호방해 보이는구만. 그래, 무공을 익히고 있으신가?"
"그렇소"
적철은 상대의 유들유들한 말투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자칭 홍윤성이라 말한 저자는 자신이 무슨 학이나 되는 양, 온몸이 온통 하얀색 일색이었고, 게다가 도포는 무릎까지 내려올 정도로 기이하게 길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어투는 곱지 않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런 적철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대는 친근하게 말을 이었다.
"허허허. 기개가 대단하더군. 그런데, 기개만 너무 앞세웠어. 강할 뿐 연하지는 못하네. 그리고 기교에 치우쳐 변(變)에는 능해도 정(正)에는 미치지 못하는군."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적철은 발끈했다. 본시 무인들은 호승심이 강한 법이다. 게다가 원래 다혈질인 적철이 그냥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네놈은 무엇이관데 나의 무공을 논하느냐?"
적철의 말투는 분노가 충분히 느껴질 만큼 강압적이고 거칠었다. 하지만, 적철이 그러면 그럴수록 홍윤성이라는 자는 유들유들하게 그의 자존심을 긁었다.
"허허허. 나는 그저 풍류를 쫓는 백면서생일 뿐이네. 그러나 지금 자네라면 열이 와도 능히 피할 수 있을 걸세."
적철의 인내심이 툭 끊어졌다.
"무엇이? 그렇게 소원이라면 죽여주겠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적철의 검은 상대의 명치를 노리며 달려들고 있었다. 일점(一點)을 베는 신룡출수(神龍出手)라 불리는 초식이었다.
기교 면에서는 그리 우월하다고 할 수 없는 초식이었으나 그 빠르기가 탁월하여 순간적인 기습공격에는 그 효과가 컸다.
휭―!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검영이 홍윤성의 가슴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진정 무공을 모르는 자거나 간담이 약한 자라면 능히 기겁을 했을 진데, 그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태연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개 같은!'
너무도 느긋한 모습에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검은 홍윤성을 육박하고 있었고, 피할 길은 없어 보였다.
적철은 상대가 무술의 무자도 모르는 자라고 판단을 내렸다.
'이제 끝이다.'
적철의 검으로부터 사내의 옷 감촉을 느꼈다. 바로 그 순간, 사내는 움직였다.
그리고, 적철은 보았다.
마치 신천지를 발견한 자의 모습이 그러했을 것이다.
사람의 몸이 얼마나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고, 사람의 몸이 얼마나 유연할 수 있으며, 또한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바로 그의 모습을 통해 보았다.
그의 몸짓은 마치 바람을 타고 있는 새의 깃털과도 같았다.
적철은 당황할 틈도 없이 사내의 몸짓을 쫓기 위해 더욱 빠르게 검을 움직였다. 검은 바위를, 나무를, 그 외에 앞을 가로막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갈라버렸다.
그러나 홍윤성이란 자만은 예외였다. 그는 검을 희롱하고 도망가는 바람이었다.
두 사람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순간 적철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벌이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 춤사위인지, 또한 얼마나 완벽한 검무인지를.
검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연이어졌다.
"크윽!"
적철은 제풀에 지쳐 쓰러져버렸다. 그는 검날이 부러지면서 자신의 어깨에 깊숙이 박혀들어 왔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익!"
적철은 지금 무공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패했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어떤가? 나는 무(武)를 알지 못하네. 하지만 무(舞)와 무(武)가 큰 차이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하지. 어차피 둘은 인간이 만들어 낸 몸짓들이니 말일세."
적철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 * *
적철은 고개를 들어 묵천을 보았다. 묵천은 그저 고요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후로 그를 보지 못했다. 나의 우매함을 보고 내려온 산신이 아닐까하고도 생각했었지. 그러나 나는 그의 말뜻을 따를 수가 없었다. 이유는 나의 알량한 고집 때문이었다. 그래서 강함만을 추구했지."
적철의 눈에서는 회한의 빛이 어렸다.
"나는 강했다. 그랬기에 부러졌던 것이다. 나는 강함만을 고집했고 그랬기에 너의 사형이 나를 베고 떠났는지도 모르겠다. 묵천아!"
"예."
"너는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를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적철의 눈에서는 안광이 점차 스러지고 있었다. 동공이 풀리는 것이었다.
"갈대는 바람의 흐름을 거역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태풍 속에서도 쉬이 꺾이지 않는 것이지. 너는 나와 기질이 너무나도 같다. 너는 강하다. 나를 떠나버린 백천우보다도 강하다. 그러기에 언젠가는 너 역시 나와 같이 부러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게 했다. 그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시간이 없다. 묵천아, 지금 이 순간부터 나에게서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예."
적철은 몸을 일으켰다. 적철의 손에는 언제부턴가 화선(花扇)이 들려있었다. 금세라도 쓰러질 것 같던 그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묵천은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화선은 이미 단순한 부채가 아니었다. 나비의 신묘한 움직임이었고, 바람이었다.
적철의 손짓은 천변(千變)을 했다.
싹을 틔우는 농군의 손짓처럼 조심스럽다가, 음을 연주하는 악사의 손짓처럼 섬세하게 변했고, 바다와 싸우는 뱃사공의 손처럼 강하게도 변했다.
사랑하는 이의 몸을 애무하는 여인의 손길처럼 부드럽다가도, 천군만마를 지휘하는 장수의 손짓처럼 위엄이 서렸다.
일보에 전신의 힘을 넣다가도, 마치 산보하는 자의 걸음처럼 가볍기도 했다.
적철은 온몸으로 자연을 만들었고, 음양조화를 부렸으며 사람의 마음을 격하게도, 고요하게도, 때로는 미칠 듯 뒤흔들어 놓기도 했다.
"아, 아―!"
묵천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묵천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적철은 무(武)가 아닌 무(舞)를 하고 있었다.
가구와 집기들로 널려있는 이 좁은 석실 안이 이 순간 너른 광야로 변했고, 적철은 그 광야를 좁다하고 뛰어다니는 한 마리의 사슴이 되어버렸다.
묵천은 느끼고 있었다.
천변(千變), 만변(萬變)하는 사부의 손짓이 산을 가르고 해일이라도 뒤엎을 듯한 중(重)한 것임을, 또한 물찬 제비의 몸짓인 양 움직이는 자유롭고 경(輕)한 것임을 깨달았다.
사부의 손에 들린 것이 부채가 아니고 검이었다면 어땠을까?
묵천의 몸은 부르르 떨렸다.
"큭!"
묵천이 온몸으로 경동하고 있을 때, 적철은 한 웅큼의 핏줄기를 내뿜으며 허물어지듯이 쓰러져버렸다.
"사부님!"
"묵천아......."
"예."
"너는 버려야 한다. 네가 지금껏 배웠던 것들을 버려라. 검을 쥔 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형식도 틀도, 너는 이제 버려야 한다. 이제부터 너는 바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바람이. 너의 사형의 일은 용서하길 바란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부탁......이다......."
힘겹게 말을 잇던 적철이 이내 축 처져버렸다.
"아아아....... 사부님!"
묵천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자 동굴 안의 박쥐들이 푸드득 몸을 날렸다.
그리고 이내 정적에 휩싸였다. 묵천의 흐느낌을 뒤로 한 채.
* * *
백천우의 손끝을 떠난 금조는 하늘을 한 바퀴 선회한 뒤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흐흐흐....... 이제야 일보를 내딛었다. 이들 둘이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낼 때까지 나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두 맹수가 싸우면 이익은 그 싸움을 구경하던 여우가 취한다 했던가? 흐흐흐......."
금조는 누구에게 날아간 것일까?
"지금은 당신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주겠어. 후후후! 하지만 저 둘이 사라지고 당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날이면 당신 또한 무사하지 못 할거야. 내가 당신 위에 서 주지. 크크......."
백천우는 잔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금조가 날아간 방향을 쳐다보던 그의 눈빛이 갑자기 달라졌다.
"천후성(天后星)이 빛을 잃었다. 사부가 죽어가고 있다는 말인가?"
백천우는 경악성을 터뜨렸다. 놀람의 표정은 잠시, 그의 얼굴에는 서서히 웃음이 번져갔다.
"하하하하! 하늘마저 이 백천우를 돕는구나. 그 늙은이를 죽여주다니. 하하하하! 그렇다면......."
백천우의 눈은 싸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 * *
쏴아―! 쏴아아―!
비가 내렸다. 삼 일 주야를 퍼붓고 있는 비였다.
그리고 그 비를 친구 삼아 한 사나이가 봉분(封墳)을 지키고 앉아 삼 일을 지새웠다.
묵천의 얼굴은 많이 초췌해져 있었다.
그러나 묵천의 눈만은 섬뜩한 살광이 계속 피어 나오고 있었다. 그가 입술을 꽉 깨물자 입술에서는 한 줄기 선혈이 배어 나왔다.
"사부님. 당신은 나에게 말해 주시지 않았지만, 전 알고 있습니다. 사형이 사부를 벤 것이 대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암습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전 당신의 뜻을 알기에 모르는 척 했던 것 뿐입니다. 그를 용서하라는 말씀, 전 지킬 수가 없습니다. 고아인 저를 길러주신 사부님을 벤 자입니다. 기필코 그 자를 벨 것입니다. 기필코!"
묵천은 결연한 표정으로 일어나 삼배를 올리고는 빗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 모습이 사라져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즘,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사나이는 묘지 앞에 놓여있는 묘비를 바라보았다.
묘비에는 <나를 길러 주신 은인이 이곳에 잠들다.> 라는 말이 적혀있었다.
사나이는 준수하지만 사기가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묘비를 손으로 살며시 쓰다듬었다. 마치 아이를 어르는 부모의 손길처럼 부드럽게.
그러다가 일순 그의 미간이 사악하게 일그러졌다.
파악!
그의 손아귀에 잡힌 묘비가 모래밭의 잡초처럼 뽑혀 나왔다.
"크흐흐흐....... 사부, 당신은 어리석은 사나이요. 죽는 순간까지도 악독해지지 못했기 때문이오. 당신은 알아야 했어.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했던 인물이 당신이었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래서 난 당신을 죽이려 했지.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었지만. 흐흐....... 당신은 내가 뛰어넘어야 할 인물이었거든."
콰드득!
그의 손아귀에 들려있던 석판으로 이루어진 묘비가 바스러져 버렸다.
"당신이 죽었다는 사실이 난 지금도 믿어지지 않아. 왠지 아시나? 당신은 너무 강했어. 너무!"
그의 손에서 푸른 마화가 이글거렸다.
그가 무덤을 향해 후려치자 무덤이 날아가면서 사방으로 흙이 튀어 올랐다.
옻칠을 한 붉은 목관이 그대로 드러났다.
"후후후. 이 순간 내가 얼마나 떨리고 있는지 당신은 모를 것이오. 당신이 죽었다면 나는 이 순간 이후 단 하나만을 위해 살아갈 것이오. 바로 나의 야망을 위해서!"
사내는 그대로 목관을 가격했다.
목관의 뚜껑이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목관 안에는 이미 부패하기 시작한 적철의 시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하하하!"
사내의 입에서 광소가 터져 나왔다.
"나 백천우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던 자가 이렇게 형편없이 누워 있다니. 하하하하......!"
광인의 모습이었다.
이자가 적철을 암습한 백천우였다니, 묵천이 증오하는 사형인 백천우였단 말인가?
퍼엉! 스스스스......!
백천우의 일장이 다시 움직이자 이미 썩어가기 시작한 시신은 허망하게 바스러져 버렸다.
"크흐흐흐."
그의 옷에 진흙과 시신의 살과 이미 검게 썩어가고 있는 피가 튀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가 다시 손을 까닥하자 적철의 머리가 허공섭물(虛空攝物)의 수법으로 그의 손으로 날아왔다.
"늙은이. 당신은 알아야 할 것이야. 저 애송이도 이제 곧 당신의 뒤를 이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마 저승에서 외롭지는 않을 것 같군. 크하하하! "
퍼억!
박 터지는 소리와 함께 적천의 머리는 으스러졌다. 그리고 그 피의 비속에서 백천우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미 추격이 시작되었지. 애송이! 내가 만약 너를 당장 죽이고자 했다면 너는 이 산을 벗어나지도 못할 것이다. 크하하하. 그러나 너는 내 손에 죽어야만 돼! 그렇기 때문에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 흐흐흐......."
한 광인의 모습이 더욱 짙어지는 폭우로 인해 점차 가리어지고 있었다.
쏴아―! 쏴아아―!
정말 지루한 빗줄기였다.
* * *
홍화객이 죽은 후, 지난 칠 년간 중원은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다. 남태천의 무림맹(武林盟)에 눌려 도둑의 무리나 마적 떼들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각파에서는 수많은 기재들이 무공수련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수많은 무도대회가 베풀어져 수많은 인재들이 몰리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은 남태천을 칭송했고, 무인들은 그를 선망하고 경배했다.
관(官)에서조차 그의 뜻이라면 한 수 양보하고 들어왔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중원의 무인들은 썩을 대로 썩어있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평화가 문제였다.
각파는 서로 이권을 위해 다투기 일쑤였고, 명예와 부를 위해 서로를 기만하고 배반하는 일은 허다했다.
각파에서는 제자들을 키워 자파의 위세를 세우기에만 급급했을 뿐 진정한 협사나 영웅으로 키워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현 중원은 목표를 잃고 표류하는 거대한 배와도 같은 실정이었다. 이것이 남태천이라는 거인의 그림자로 인해 생긴 폐단이었다.
하여간 남태천, 그는 중원의 거대한 태양이었다.
이날은 그 태양으로 인해 중원이 술렁거렸다.
남태천이 월기신녀 조약빙과 약혼식을 치르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죽은 화혼녀 진주영으로 인해 이미 삼 선녀가 되어버린 사 선녀 중 하나인 조약빙은 미와 지를 고루 갖춘 그런 여인이었다.
거기에 조약빙은 세외 삼대궁으로 손꼽히는 선천궁(先天宮), 빙궁(氷宮), 열화궁(烈火宮)들 중 하나인 빙궁의 소주이기도 했다.
수많은 사내들이 조약빙의 미모와 그 세력에 군침을 흘렸지만 그들은 모두 남태천에 의해 김칫국을 마셔야 했다.
이번 약혼식은 세외 세력과 손을 잡으려는 남궁철민의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일이기도 했다.
대소림사 대법원.
오늘 하루 소림사에는 수많은 무림명숙들이 찾아와 자리하고 있었고, 소림의 장문인이 친히 그들을 접대하고 수많은 하객들이 몰려들어 소림은 때아닌 인파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방에서는 승들의 불경소리, 목탁소리와 시끄러운 폭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본청에서 사람들은 주인공인 남태천과 조약빙이 얼굴을 나타내길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잠시 후, 소림의 산문 쪽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고 사람들은 일제히 술렁거렸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월기신녀다!"
"와아!"
그리고 문이 열렸다.
조막만한 당혜(唐鞋)가 마차의 발판으로 내려섰다.
하얀 설묘의 털로 짠 당혜는 중원에서는 보기 힘든 물건이었다. 그렇게 한 여인이 모습을 나타내자 중원인들 사이에서 작은 소요가 일어났다.
"와아!
비단과 하얀 천으로 전신을 감싸고 얼굴마저 얇은 면사로 가리어져 용모를 알 수 없었으나, 그녀에게서는 형용할 수 없는 고귀함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사십여 인의 호위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대전의 안에는 비단휘장으로 꾸며진 나지막한 단(檀)이 있었고, 단 위에는 홍화(紅花)로 꾸며진 의자가 놓여있었다.
단 앞에는 좌우로 길다란 탁자가 놓여있었고, 그 위에는 미주(美酒)와 산해진미(山海珍味)가 놓여있었다.
오늘만큼은 소림사에서도 어육(魚肉)을 준비하게 하였다.
탁자 주변에는 무림에서 혁혁한 신망을 드러내고 있는 무림명숙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소림의 장문인인 환우대사, 아미의 진우사태, 점창의 무적철추(無敵鐵錐) 진산, 현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성현, 개방의 소화자(小化子)와 제자인 호철, 무당의 태청노사(太淸老師), 공동의 벽개신(劈開身) 벽공 등 중원을 대표하는 스물두 개의 문파를 대표하는 대표자들과 방천화극(方天化戟)의 달인 황달, 쌍창(雙槍)의 전설로 남아있는 우두척, 경공신법의 신인 풍운진인(風雲眞人), 궁의 달인 천위향 등 많은 기인이사들과 사십여 인의 전대고수, 그리고 백여 명이 넘는 당대고수 등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젊은 기재들로 손꼽히는 무당의 운필, 천산의 독귀, 당문의 천독위 등 많은 사람들이 대전 안을 메우고 있었고, 소림승들만 해도 일백삼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사람들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대전 안에 자리한 사람들이 이럴 진데, 소림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수야 이루 말할 필요가 있을까?
월기신녀 조약빙은 대전을 가로질러 단 위로 올라가 의자 앞에 섰다.
그러자 그녀를 호위하고 나타났던 사십 인의 호위병들이 주변을 경계하던 십팔나한들의 사이에 늘어섰다.
호위병들은 하얀 백의에 가슴에는 빙궁 고유의 표식이 수놓아져 있었고 은실로 수놓아진 영웅건을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위용 앞에서 장내는 잠시 고요해졌다.
이때,
"와아!"
콰앙―!
바람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한 사나이가 들어섰다. 당금을 대표하는 영웅 중의 영웅인 남태천이었다.
웅후한 기상과 패도적인 기세는 사람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남태천은 평소 그의 차림과는 다른 전통 예복에 신랑을 상징하는 붉은 꽃으로 가슴을 장식하고 있었다.
남태천이 단 위에 올라 조약빙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러자 소림의 장문인 환우대사가 식을 진행시켰고, 명숙들과 무림인들은 술에 흠뻑 취해 중원무림의 경사를 찬양하며 술에 취해가고 있었다. 바야흐로 잔치 분위기는 무르익어 갔다.
그런데, 식이 끝나가고 환우대사가 막 두 사람의 약혼을 선포하려는 순간이었다.
밖에서는 요란한 폭죽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컥! 독이......."
"욱!"
"우욱......!"
"산공독이다."
대전의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토악질을 해대기 시작했고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사람 역시 적지 않았다.
갑작스런 상황에 환우대사가 외쳤다.
"무슨 일이냐?"
그때였다. 음식을 나르며 손님 접대에 분주하던 백삼십 명의 소림승들이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흘리며 병장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크윽....... 컥!"
"이놈들!"
상황을 채 파악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검과 도에 베어졌고 극에 찢기어졌다.
그런데도 나한십팔승과 조약빙을 호위하고 나타났던 사십여인의 호위무사들은 그런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고있는 것이 아닌가?
퍼펑!
환우대사의 일장에 검을 휘두르던 승 하나가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너희들은 소림의 제자들이 아니다. 어떤 놈들이냐? 정체를 밝혀라!"
그러나 환우대사 역시 갑작스런 장내의 상황에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상황판단을 제대로 하고, 사람들을 구하기보다는 밖으로 탈출을 시도했다면, 전세는 역전되거나 상황은 크게 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간과하고 만 것이다.
어째서 남태천이 이런 상황을 보고만 있는 것인가? 십팔나한들은 왜 장문인을 보호하려고 하지 않는 것인가? 누가 음식에 독을 탈 수 있었는가? 왜 하필이면 이 시간에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는가? 하는 것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불행히도 그는 자신의 앞에 쓰러지고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에 급급했고 그 순간에도 소림승을 가장한 자들은 산공독에 쓰러져 바둥거리는 사람들을 쳐죽이고 짓밟아 죽였다.
아미의 진우사태가 토악질을 하며 바닥을 구르다 한 승려의 발길질에 목이 꺾여 죽었다.
경공신법의 신인이라고 불리던 풍운진인이 단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쓰러져 바닥에서 바둥거리다 일검에 두 다리를 잃고 끝내 목마저 베어져 버렸다.
환우대사의 두 눈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소림에서, 이 위대한 대소림사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안 된다.'
"아아아―!"
환우대사의 입에서 장소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소리는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했다.
이미 사방으로 통하던 문들은 굳게 닫혀있었고, 밖은 엄청난 양의 폭죽과 사자춤, 그리고 악공들의 반주소리로 인해 소란스럽기 그지없었기 때문이었다.
퍼억!
순간 환우대사는 등에 강력한 충격을 받았다.
"커억."
환우대사의 입에서 한 웅큼의 선혈이 뱉어졌다. 그는 뒤돌아보았다. 자신을 암습한 자는 다름 아닌 남태천이었다.
"네, 네가!"
환우대사는 갑자기 머리가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최초에 누가 이곳에 연회장을 베풀자고 건의했던가? 누가 초대장을 발송했으며, 누가 이런 음식 등을 준비시켰는가?
남태천의 마화가 일렁이는 손이 환우대사의 가슴을 관통하는 순간, 환우대사의 정신은 아득해졌다.
그는 허공을 향해 무언가를 거머쥐려는 듯 버둥거리다 쓰러져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고 남태천은 사이한 미소를 띄우며 누군가가 가져다준 수건으로 손에 묻은 피를 닦았다.
"시신들을 치워라."
어느새 대전 안에 있던 무림인들은 피에 절은 고깃덩어리로 변해 쓰러져 있었다.
주변에 늘어서 있던 무사들과 십팔 나한은 승들을 도와 시신을 치우기 시작했다.
단 아래에 자리하고 있던 비밀통로를 통해서!
이제 막 신(辛) 시가 다 되어가고 소림사의 산문 사이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 둘 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전의 문이 열리며, 여느 때와 같이 환우대사가 돌아가는 손님들을 배웅하기 시작했다.
환우대사의 입가에는 자애로운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개방의 소화자가 제자인 호철을 데리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걸쭉한 웃음과 농담을 내뱉으며 문을 나섰고, 아미의 진우사태가 고아한 미소로 환우대사의 환송을 받으며 돌아갈 차비를 차리고 있었다.
죽었던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인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굵직굵직한 돌을 쌓아올려 만든 사각의 석실이었다. 이곳은 각종 형구와 고문기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한 사나이가 형구에 묶여 있었고, 온몸은 상처투성이로 이미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상처는 장시간이 지나야만 썩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독을 주입해 고통스럽고도 빠르게 썩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석실은 묘한 악취로 가득해져 있었다.
"으으으......."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덜컹! 하고 문이 열렸다.
한 사나이가 들어와 형구에 묶여있는 사나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작은 외숙, 전 진실을 알고 싶을 따름입니다."
"진실? 크흐흐....... 너는 네 어미를 닮았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지. 콜록!"
형구에 묶인 남궁성현은 자지러지게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나는 모른다. 왜 너의 어머니가 죽었는지."
"외숙,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큰 외숙이 왜 제 어머니를 독살하였는지....... 전 분명히 알고 싶습니다. 물론 제 아버지조차도 죽이셨겠지요? 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남궁성현은 증오에 가득 찬 눈으로 남태천을 바라보았다.
"너는 미쳤다. 아느냐? 너 자신이 마성에 젖어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지 넌 몰라! 너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콜록! 콜록!"
남궁성현의 입에서는 검게 변한 사혈(死血)이 흘러나왔다.
이미 그는 독이 심장까지 퍼져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애써 태연한 신색을 유지했다.
"너는 절대 성공하지 못해."
"당신은 마지막까지 나의 화를 돋구는군요. 정말로 말씀입니다!"
남태천의 손길은 남궁성현의 볼을 서서히 쓰다듬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턱을 지나 목에 다다르자,
"컥!"
우두둑!
남태천의 손아귀에 힘이 주어지자 남궁성현의 목은 힘없이 꺾여버렸다.
남궁선현은 혀를 길게 빼물면서 생의 종지부를 찍었다.
"흐흐흐....... 너희들이 자백하지 않아도 다 알아. 이제부터 시작이야. 모두 죽일 것이다. 나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은!"
남태천의 사이한 미소가 석실의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 * *
등룡촌(登龍村).
적성강이라는 작은 강의 하류에 자리한 이 마을은 백여 호가 넘는 집들이 자리하고 있는 제법 큰 촌이었다.
이 마을은 강변에 위치하면서도 마을 자체는 산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어 특이할만 하였다.
그러나, 매년 팔월이면 일어나는 홍수를 피하기 위한 지혜였으니 그 사정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새삼스런 일도 아니었다.
쏴아아―! 쏴아―!
칠월에 접어든지 채 열흘도 지나지 않아 내리기 시작한 폭우는 며칠이 지났는지 셀 수도 없었다.
마을로 들어오는 우마차는 진창길을 헤집으며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촤아악!
마차의 바퀴가 웅덩이를 지나자 진흙탕 물이 튀었고, 우립을 쓰고 지나가던 한 사나이는 그로 인해 낭패를 보았다.
고개를 든 사나이는 묵천이었다.
묵천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이내 우립 아래로 얼굴을 가리고 길을 따라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천루(天樓).>
등룡촌은 제법 큰 마을이기는 했지만 객점은 딱 한 곳밖에 없었다. 천루(天樓)라는 거창한 이름의 이 객점은 역시 이 마을의 유일한 주점이며 식당이고, 또 다점(茶店)이었다.
보통은 유일하다는 이유로 접대나 물품들이 형편없기 마련이지만, 이곳 천루는 그래도 훌륭하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물론 거대한 도시에 가면 중하급 정도의 객점으로 취급받을 것이 당연하겠지만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객점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은 평온한 모습이 아니었다. 방금 전 이 객점에 한 사나이가 찾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덜컹!
문이 열리는 소리에 실내는 일순 고요해졌다.
한 사나이가 비에 잔뜩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립을 걸친 채 객점 안을 가로질러 구석진 곳으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철컥. 사내는 탁자에 검을 기대어놓고 묵묵히 앉아있었다.
이 등룡촌에 이런 무인이 찾아든 것은 처음이었다.
간혹 현감의 사병들이 돌아다니긴 했지만, 그들 중 무술을 제대로 알고 있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저 현감의 비호에 거들먹거리는 정도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자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천루의 주인인 전추는 내심 두근거리는 가슴을 쓰다듬으며 사내를 향해 다가섰다.
"뭐, 뭘로 드시겠습니까?"
"밥, 돼지고기 볶음 한 접시에 소채, 죽엽청 한 말."
"예에. 그, 그럼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사나이의 묵직한 목소리에 내심 식은땀을 닦으며 돌아서려던 전추는 순간 경직했다.
"그리고."
"예?"
대답을 하는 그의 목소리는 잔뜩 얼어 있었다.
"방 하나 준비해 주시오. 따끈한 목욕물하고."
"예. 예."
전추는 고개를 탁자에 박을 정도로 숙여가며 대답을 했다. 그때 다시 소리가 들렸다.
데구르르르.......
무언가 묵직한 소리가 나며 그의 눈앞으로 굴러 들어왔다. 큼지막한 은자였다.
족히 닷 냥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은자가 아닌가?
순간, 전추의 신바람 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감사합니다요!"
곧이어 함지박만큼 벌려진 입을 한 전추는 신바람이나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도 그럴 것이 은자 한 냥이면 다섯 식구가 한 달은 떵떵거리면서 놀고먹을 수 있는 금액인데, 한끼 식사와 방 값으로 닷 냥이니 횡재도 보통 횡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추가 막 주방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콰광―! 쾅―! 우르릉―!
어마어마한 소리와 함께 천루는 무너져 내린 것이다.
사방이 먼지와 파편으로 뒤덮였다. 이 빗속에서도 이렇게 많은 먼지가 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였다.
그리고 어느 샌가 천루를 포위하는 형식으로 이십여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둘러서 있었다. 그 가운데에 폐허가 되어버린 천루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있는 사나이가 한 명 서 있었다.
백천우였다.
"명호."
백천우가 입을 열자 뒤에 읍하고 서 있던 사나이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예!"
"시신을 확인해라. 나는 본전으로 돌아가겠다."
"옛!"
백천우는 물을 차고 나는 물새처럼 허공을 가르며 사라졌다.
그러자 명호라 불렸던 사나이가 외쳤다.
"잔해를 들어내고 수색하라. 비록 고기 한 조각조차 발견하기 어렵겠지만!"
폭우의 양은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었고, 등룡촌의 사람들은 그림자조차 찾아 볼 수 없었다.
아무리 호기심 많은 바보라도 이 상황에서는 나오지 않아야 목숨을 건질 수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므로 그들은 꼭꼭 숨어서 이 상황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건물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사람들이 명호의 명령에 신속하게 움직이며 건물의 잔해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켁!"
한쪽 구석에서 잔해를 뒤적이던 사나이가 목을 감싸쥐며 쓰러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인가?"
다른 사나이가 그것을 보고 다가서며 외치는 순간, 건물의 잔해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뛰쳐나왔다.
당황한 사나이는 그림자를 보고 뭐라 소리치려고 했지만 단 한마디를 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커억!"
사나이는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
그와 함께 명호가 외쳤다.
"목표가 살아있다."
하지만 건물 잔해를 뒤지던 사나이들이 채 검을 뽑기도 전에 튀어나온 검은 물체는 생선을 노리는 고양이처럼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 모습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날쌘 동작이었다.
"크윽."
"컥!"
검은 그림자는 멋진 호선과 직선을 허공에 그렸다.
선혈이 빗속에 떨어져 빗물과 함께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마 후, 지면을 밟고 서 있는 명호의 부하는 아무도 없었다.
단 한 사나이가 선혈이 질퍽하게 흘러내리는 지면을 밟고 서있을 뿐이었다.
명호가 고개를 들어 그 사나이를 바라봤다.
짙은 눈썹에 회색 빛의 낡고 더러운 건(巾), 고집스럽게 꼭 다문 입술,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검이 그의 특징이었다. 그 검에서는 아직도 식지 않은 진홍빛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명호는 그 사나이를 바라보면서 단 한줌의 분노도 느끼지 않았다.
'나의 수하들을 죽인 자인데....... 어째서?'
분노와는 다른 감정이라는 데에 명호는 놀라고 있었다.
'나에겐 원수와도 같은 자인데.'
지금 명호의 가슴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두려움이었다.
자신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처절한 두려움, 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명호는 검을 꼭 쥐었다.
그러나 그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너희들은 백천우의 수하인가?"
명호는 그의 말에 반박이라도 하듯이 통렬하게 외쳤다.
"아, 알 필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행동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더 이상의 훌륭한 대답은 없었다.
"그렇군, 그 자였군!"
"큭. 죽어라."
명호는 손에 든 검을 공력으로 잘게 부숴 암기처럼 날려보냈다. 무사가 검을 버린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일이다.
검의 파편들은 마치 잘 짜여진 각본처럼 사내의 전신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고, 그러므로 사나이는 그 조각들을 피하기 위해 몸을 움직여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상대는 무언가 틈을 보이게 될 것이라고 명호는 생각했다.
'미세한 틈이면 된다. 아주 미세한!'
명호는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뱀의 그것처럼 번들거리는 눈으로 사나이의 작은 동작마저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예리하게 살피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으로 그의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사나이는 자신의 미간에 검 부스러기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도 조금의 놀람이나 반격의 차비를 차리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온몸을 노리면서 날아오는 검 부스러기들을 자신의 숙명인 양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자살이라도 생각하는가?'
명호는 그의 행동에 오히려 자신이 긴장을 하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검이 사나이의 미간에 적중되었다고 느껴지는 순간, 명호는 자신의 양 손을 교차하면서 장력을 방출시켰다.
바로 그때, 명호는 사내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어리는 것을 보았다.
"이 미친!"
사내는 자신이 던진 검 부스러기를 향해 달려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섬광이었다.
한 줄기 흰 선. 그리고 잠깐의 고통, 이것이 명호의 마지막이었다.
사나이는 지면을 딛고 내려섰다.
"어리석은 자군. 적은커녕 자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런 뻔한 공격을 하다니. 백천우, 이런 자로 나를 상대하려 하다니 가소롭구나!"
사나이는 냉소를 머금으며 마을의 어귀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한 사나이가 빗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돌아간 줄 알았던 백천우가 아닌가?
백천우는 사악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그래, 너는 강했지, 나보다도. 나와는 달리 너는 무(武) 외의 일에는 관심조차 없었으니까. 그러나 너는 알게 될 것이다. 단지 무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나보다 더욱 뛰어난 감각과 무예를 지니고 있지만 너는 죽을 것이야. 이미 나는 너의 무(武)라는 것을 보았으니까."
그렇다면 백천우는 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하를 희생시켜 그의 무술실력을 가늠하고 있었단 말인가?
백천우는 천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묵천, 너는 시험 당할 것이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계속! 나에게 절대적인 자신이 생겼을 때 너는 죽게 될 것이다. 처절하게!"
그리고 그는 한 줄기 빗물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 * *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감출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철저하게 무표정으로 일관을 하면 될까?
자신의 억양이나 표정을 수시로 바꿔 상대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어떨까? 그것도 아니라면 간단하게 자신의 얼굴에 천이라도 두르면 상대는 알아챌 수 없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사람이 분노하고, 즐거워하고, 흥분하고, 슬퍼하는 것은 작고 미세한 동작 속에서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숨기는 법을 알고있는 한 사나이가 있었다.
인간이 웃을 때는 모두들 기쁘거나 행복할 때 일 것이다.
간혹가다 슬픔이 극에 달해 허탈해질 때나 혹은 실성한 때에도 웃기는 한다. 하여튼 간에 인간이 웃을 때는 한정되어져 있다.
그런데 이 사나이는 늘 웃고 있었다.
이유는 없다. 그저 미친 듯이 웃어 제키거나 아니면 싱긋이 웃고 서 있는 것이, 이 사나이가 지닌 삶의 목표고 사상이라도 되는 냥 마냥 웃고 있는 것이다.
그의 직업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주방장이었다.
따다다닥.
칼과 도마의 마찰음이 경쾌하게 들려오고 주변에 늘어선 조리사들은 각자 자신들이 맡은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치이익....... 칙! 칙!
기름 위에 야채가 얹어지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끓고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몸이 코끼리를 연상케 하는 사람이 서 있었다.
주방의 열기 때문인지 그의 몸에서는 끈적끈적한 기름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몸은 보기만 해도 짜증이 일 정도였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날 공간에 그가 서 있음으로 해서 그의 곁을 지나는 사람들은 그를 피해 다른 곳으로 움직여야만 했다.
이 좁은 주방에서 그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는 주걱으로 열심히 냄비를 휘젓고 있었다.
그의 손이 움직이자 파란 불길이 피었다 사라졌다.
그는 예의 그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뚱뚱한 사람들이 그렇듯 그 역시 호인처럼 넉넉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소평. 어이, 소평!"
"왜 그러슈?"
"주인이 좀 나와 보라는데."
"옌장. 도대체 뭘 가지고 또?"
"몰라. 어여튼 나와 봐."
소평이라 불린 거대한 사나이는 몸을 뒤뚱거리며 주방에서 나가고 있었다. 짜증난 어투와는 달리 그는 만면에 예의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이봐, 소평!"
"왜 그러슈?"
이곳 주인인 금배의 얼굴에 골이 깊이 패였다.
'이 자식은 말끝마다 반말이야?'
금배는 하루에도 얼마나 많이 이 버르장머리없는 주방장을 잘라버리고 싶은지 모른다. 아마도 그의 요리솜씨가 뛰어나 손님의 대다수가 그의 음식만을 찾지 않았거나, 자신이 조금만 더 욱하는 성질이 있었다면 벌써 수 년 전에 잘라버렸을 것이다.
"이 손님이 자네를 찾아 오셨다누만."
"바빠 죽겠는데, 손님은!"
소평은 금배가 가리키고 있는 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순간 움찔했다.
'대단한 기세다. 믿지 못할 정도로!'
소평이 바라본 곳에는 화려하게 수놓아진 비단옷을 입고 있는 한 사나이가 있었다. 어린아이에게나 맞을 것 같은 색동옷이었다.
그는 홍화주(紅花酒) 한 병과 어포, 그리고 소채 한 접시를 놓고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 더운 날씨도 아닌데 사나이는 다른 쪽 손으로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왜 날 찾으셨소?"
소평은 무공에 입문조차 하지 않은 듯한 자에게서 이러한 기세를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자신이 놀랐다는 사실을 숨긴 채 입을 열었다.
"날 왜 찾으셨소?"
소평이 재차 묻자 싱글거리기만 하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흠! 자네의 요리솜씨가 너무 좋아서 한 번 보자 했네."
"요리솜씨요?"
"주인장에게 물으니 이 소채는 자네가 볶은 거라 하더군."
"아!"
사내는 소채를 집어먹으며 말했다.
그리고 사내는 맛을 음미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음. 훌륭해. 무릇 야채는 날로도 먹는 음식이라 많이 익히면 맛이 덜하지. 그리고 야채의 향을 내려면 센 불에 적당히 대치고 양념 또한 그 야채의 종류에 따라 다르게 배합을 해야해. 거기에 기름이 많이 배어들면은 맛이 나지 않으니 끓는 물에 한 번 살짝 데쳐 볶으면 그 맛이 일품이 되거든? 게다가 조금의 물도 스며 나오지 않았다."
소평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만의 비법을 모두 알고 있다. 이자는 나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한 자......!'
"다, 당신은 누구요?"
소평의 물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군. 이런 요리솜씨라면 중원최고의 살인 요리사라 꼽히는 적사(赤蛇)밖에는 없을 텐데? 그 자는 인간의 미각을 현혹시키는 요리솜씨를 지니고 있다고 하지. 그는 두 가지의 재료만 있어도 인간이 맛볼 수 있는 최고의 맛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해. 물론 죽음과 함께 말야. 그런데 적사는 당신처럼 뚱뚱하지 않거든?"
그는 마치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소평의 등골에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의 입은 더욱 거칠어졌다.
그리곤 그의 웃음 가면이 벗겨졌다. 소평의 얼굴은 꿈에도 무섭게 일그러졌다.
"네놈은 누구냐?"
"나? 하하하! 당신이 나를 알아 무얼하겠나? 적사라면 혹시 모르겠지만."
소평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익! 죽어라!"
소평의 손에 들려있던 주걱이 몇 개인지 조각으로 쪼개어지며 빗살처럼 쏟아져 날아갔다.
사내는 의자 채로 벌렁 드러누우며 발끝으로 주걱 조각들을 차냈다. 주걱 조각들은 날아오던 탄력으로 인해 나무기둥에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박혀버렸다.
소평은 다시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사내의 면상을 향해 일권을 질러갔다.
"흥!"
하지만 이번에도 사나이는 몸을 굴리며 너무도 가볍게 사내의 일 권을 피해버렸다. 발끝으로 바닥을 구르자 사내의 몸은 뒤쪽으로 주르르 밀려가 버린 것이다.
퍼펑! 소
평의 손에 걸린 탁자 하나가 바스러져 사방으로 튀었다.
"네놈은 누구냐?"
"네놈의 주인이지."
"미친!"
소평은 일갈을 하며 사내를 향해 대오장(大烏掌)을 날리며 수도(手刀)로 사내의 목을 노렸다.
그러자 그저 싱글거리던 사내는 퉁기듯 일어서며 이화접목의 수법으로 장력을 옆으로 흘려보내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옆 탁자 위에 놓인 나무젓가락으로 그의 손을 막아가며 좌수에 탄지신공을 운기했다.
"가소롭다!"
소평은 사내가 나무젓가락 하나로 자신의 수도를 막으려는 것을 보고 발끈하여 공력을 극도로 운기했다.
서너 자 정도의 대리석도 두부 가르듯 갈라지는 소평의 수도를 겨우 나무젓가락으로 막으려 하다니 소평은 자존심에 금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이마에서 핏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따당! 나무 젓가락과 수도가 맞부딪치자 불꽃이 튀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
"크윽."
반탄지력에 소평은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서야 했다.
사내는 일말의 틈도 주지 않고 물러서는 소평의 몸에 지력을 날렸다.
"크악!"
소평은 붉은 선혈을 내뱉으며 뒤로 퉁겨졌다.
쿠당탕―!
둔중한 소리들과 함께 소평의 육중한 몸은 탁자 서너 개를 부수며 벽에 부딪쳤다.
소평은 정신을 차리려고 몇 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땡그랑......!
바닥에는 낡은 동전 일문과 붉은 장미가 수놓아진 손수건이 떨어져 내렸다.
"이건!"
소평은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이미 사내의 모습은 그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았고, 소평은 엽전과 수건을 집어들고 미친 듯이 뛰쳐나갔다. 그리고 주루 안에는 금배만이 남아있었다.
금배는 너무도 놀라 눈알이 다 튀어나올 뻔했다.
그 뚱뚱보 소평이 무림인이었다니, 그리고 쾅쾅! 하는 순간 마루바닥이 뚫리고 주걱이 단단하기 그지없는 기둥에 박힌다는 건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거기에 귀신처럼 사라지기까지 하지 않는가?
"귀, 귀신들이다."
금배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한 사발이나 되는 오줌을 바지에 지리고 말았다.
* * *
하늘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리기라도 할 듯이 검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하늘 아래 짙푸른 잔디로 뒤덮인 언덕 위의 거대한 나무 옆에 한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그는 이곳에 앉아 있는지 벌써 칠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누더기가 되어버린 옷에 덥수룩한 수염, 이미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이곳은 언덕 아래에 있는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였는데, 이 사나이가 온 후로는 사람의 인적이 끊어진 적막한 곳이 되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부랑아가 있는데 어느 부모가 아이를 보내겠는가?
이 사나이는 이곳에 앉아서 일곱 번의 겨울을 보냈다. 그 사나이는 이 자리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
몇 해 전까지는 마을사람들이 혹시 사나이가 얼어죽기라도 했을까 하고 올라와 보면 사나이는 싸늘한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곤 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이 사나이에게 일체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사나이가 앉아 있는 앞에는 무언가 길쭉한 물건이 땅에 꽂혀 세워져 있었는데, 그 덕택에 그가 도인(道人)이라는 얘기도, 무인이라는 얘기도 시중에 떠돌았지만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신경 써 봐야 돌아오는 건 얼음 같은 눈빛뿐이니, 생계에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는 이 일에 오래 신경을 쓸 한가한 위인들이 없는 게 당연했다.
그의 시선은 고정되어 있었다.
오직 한 점, 앞에 놓인 검 하나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그건 검이라기보다는 한 조각 쇳덩이라고 해야 옳을 정도로 녹이 시퍼렇게 서려있었다. 간신히 검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정도의 형태만을 유지한 검이었다.
그 명목만을 유지하고 있는 물건 앞에 그 사나이는 그렇게 앉아 있었다.
문득 사내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무언가 내릴 것 같군."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사내의 눈에서는 한기가 느껴졌다.
"비였으면 좋겠어. 시원히 내려 줬으면......."
사내는 다시 검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습한 바람이 좌우에서 불어 나무와 풀잎들을 휩쓸고 있었지만 사내는 만년거석이라도 되는 냥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사나이의 주위로 폭풍을 알리는 바람이 몰아쳐 들어오고 있었다.
* * *
"소주."
소평은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사나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한 서른쯤 되었을까?
약간 유들유들한 인상에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부잣집 막내도령이라도 되는 듯한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한가롭게 부채를 부치며 살며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은 약간의 장난기마저 어린 채 신비롭게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주. 나는 아직 당신을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정적이 흘렀다. 소평은 앞에 앉은 사나이를 바라보며 그를 향해 물었다.
"앞으로 어떡하실 작정입니까?"
소평은 자신이 묻고 싶은 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음에도 불구하고 물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주인은 살아 계신가? 그렇다면 어디에 계신가? 그분을 어떻게 해야 만날 수 있는가? 그의 머릿속에서는 너무나도 많은 생각들이 뒤엉켜 정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그랬기에 소평이 그를 향해 처음 던진 질문이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이냐는 말이었다.
그러나 사나이는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소주."
그가 다시 말을 잇기 전에 사나이가 입을 열었다.
"나는 사마적이라 하오."
"사마성 씨를 쓰신다면 주인님과는......?"
"후후후! 나의 아버님이시지."
"아버님이시라구요?"
믿을 수 없다는 느낌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주인과 헤어졌을 때 주인은 겨우 스물예닐곱을 넘기고 있었다.
그런데 칠 년만에 서른은 넘어 보이는 사람을 자신의 양자로 삼다니 뭔가 맞질 않지 않는가?
"진정입니까?"
"그렇소."
"믿을 수 없습니다."
"후후. 내 나이가 너무 많아 그러시오?"
"그, 그렇습니다."
순간이었다. 아니, 찰라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의 앞에 앉아있던 서른 남짓하던 장년인은 어느새 갓 스물 정도의 청년 모습이 되어버렸다.
'변용술(變容術)!'
청년의 얼굴에는 천진한 아이의 미소가 어리어 있었다. 그 해맑은 눈은 소평의 가슴을 뻥 뚫어주는 듯한 충격을 주고 있었다.
"아!"
나지막한 감탄사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수려한 용모였다. 소평으로서는 전에도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다시 보지 못할 얼굴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사마적의 눈에서는 그 준수한 용모와는 상반되는 차가운 한광이 흐르고 있었다. 마치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한 수를 바라보는 것과 같았다.
"우리는 할 일이 많네. 이만 일어나지."
사마적은 소평의 그런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평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그들이 문 밖으로 사라지기가 무섭게 구석에서 식사를 하던 장사치 둘이 눈을 마주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의 뒤를 쫓아나가는 게 아닌가.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 술에 취해 골아 떨어져있던 사나이 역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제서야 그 동안 살벌한 분위기였던 객점 안은 평온을 찾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객점 주인에게는 평온보다는 돈이 더 중요했던 것 같았다. 뒤늦게 이들이 그냥 나간 사실을 안 주인이 노발대발하며 점소이들을 혼을 낸 것이다.
그로서는 손님을 다섯이나 공짜로 먹인 것이니 화가 나는 게 당연했겠지만, 나중에 그들 자리에 놓여있는 은자를 보고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음식값의 몇 배를 번 것에 좋아 어쩔 줄을 몰라 했다고 한다.
* * *
번쩍!
허공을 가르는 한 줄기 빛살이 대지의 어딘가에 떨어져 내렸다. 번개는 나타난 것보다도 더욱 빠르게 그 모습을 감췄다.
우르르릉―!
이번엔 천둥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하늘은 다시 한 번 개벽의 순간을 맞이하듯이 온통 난리를 피워대고 있었다.
온통 검은 하늘과 번개와 천둥뿐이 아니라 나무가 뿌리 뽑힐 것 같은 강한 바람마저 불어댔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집안으로 숨어 들어가 문고리를 잡고 집이 바람에 날려가지 않기를, 번개에 맞지 않기를, 폭풍우에 떠내려가지 않기를 부처님께 빌고 또 빌었다.
이렇게 모두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데 전혀 삶을 도외시 한 듯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언덕 위에서 칠 년째 검만 노려보고 있는 바로 그 사나이.
그는 사방이 확 트인 언덕 위에서 유일하게 서 있는 거대한 나무 아래에 자리 잡은 채 움직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점점 더 강하게 전전(雷電)이 허공을 난타하고 빛살이 전신을 때려댔지만 사나이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앞에 놓인 검만을 노려보며 앉아있을 뿐이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무심하게 하는 것일까? 무엇이 그를 그토록 집중하게 하는 것일까?
지금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의 선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검의 줄기들이 되돌아와 자신을 난타해대고 있었다. 하나의 선이 완성되고 나면 그는 곧 다른 선 하나를 만들어 내었다.
그는 무수히 많은 선을 그려대고 있었다.
이 짧은 순간에도 사나이는 자신의 뒤에서 폭풍우에 잡초처럼 나부끼는 거목을 얼마나 많이 난자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쾌와 변을 일검에 이루어야 한다.'
사내의 눈에서는 절망의 빛이 떠올랐다.
'칠 년, 칠 년이 지났다. 그러나 더 이상의 빠름도 변화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정녕 그 둘을 일검에 이룰 방법이란 없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노력이 부족한 것인가.'
번쩍―!
하나의 빛살이 허공을 휘감아 돌며 또 다시 지면을 할퀴고 사라졌다.
하나의 줄기에서 뻗어 나오는 수많은 가지가 허공을 점점이 수놓았다 사라져 버렸고, 그 순간 사내의 눈에서는 이채가 흘렀다.
'그래 바로 그거다. 번개! 나는 쾌와 다변(多變)을 동시에 시전하는 검식을 만들고자 했다. 그것만이 칠 년 전 사라진 주인의 복수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변에는 쾌가, 쾌에는 다변이 상극처럼 서로 어울릴 수 없었지.'
우르르릉―!
언제나 그렇듯이 천둥이 번개의 뒤를 따라왔다.
'천둥과 번개. 언제나 번개가 더 빠르다. 번개만큼 빠른 것을 본 적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번개에도 변화는 있다. 무엇인가? 저것이 답의 열쇠가 되는 것 같기는 한데....... 수많은 무공초식을 머릿속에 넣고 있는 내가 해답을 발견할 수가 없다니....... 무엇이냐, 저 번개의 비밀은 무엇이냐?'
사내의 눈빛은 수시로 변하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발견한 듯한 기쁨에서 혼란스러움으로, 그 혼란스러움은 급기야 절망으로 치달아갔다.
'답은 하나다. 어차피 둘 중 하나를 버릴 수밖에 없다. 둘을 융합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어.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편협해질 것이다. 그럼 나의 무공은 진일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한다.'
순간, 사내는 등골이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칠 년간의 노력이 물거품 정도가 아니라 해가 되어 돌아오려고 하지 않는가.
그렇게 그가 혼란해하고 있을 때, 그는 갑자기 하늘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고, 눈을 드는 순간 천공을 가르는 찬란한 빛을 보았다.
그 빛은 순식간에 사내의 온몸을 감싸안았고 고목에 내려꽂혀 버렸다.
콰앙! 찌르릉―!
시퍼런 녹물을 흘리고 있던 검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거대한 힘을 삼킨 듯 검명까지 내고 있었다.
쩍! 콰당탕......!
하지만 나무는 번개에 의해 쩍 갈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사나이 역시 온몸을 뚫고 지나가는 듯한 격렬한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에 사내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비로소 찾았다!
이 생각을 끝으로 사내는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사내가 의식을 차렸을 땐 자신의 전신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느껴지고 있었다.
전신은 화상으로 물집이 생겼고, 온몸으로 아직도 찌릿찌릿한 통증이 내달렸다. 게다가 주위는 시커멓게 탄 나뭇조각들로 온통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었고, 자신의 등뒤에 서 있던 고목은 검게 그을러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사내는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다 죽은 사람처럼 고개하나 돌릴 힘도 모자라는 그였지만, 눈만큼은 희열과 총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찾았다! 극쾌에서 검을 다변시키는 방법을 찾았다. 그걸 여태껏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니. 일순간 극쾌보다도 더 빠르게 움직이면 되는 거야. 어차피 검은 점에서 점을 잇는 하나의 선에 불과한 것. 방법은 탄력이다.'
어디에서 힘이 솟아났을까? 축 늘어져 죽은 사람처럼만 보이는 그 사내의 손에 검이 들렸다.
투박하고 느리게 검이 뽑혀드는 순간 그의 손의 움직임은 더 이상 죽음의 목전에 있던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허공에는 그가 상상해 놓은 무수히 많은 점과 점이 있었고, 그는 검을 들어 그 점들을 선으로 이어갔다. 허공을 수놓는 검영은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셋으로 늘어갔고 이내 허공을 가득 메웠다.
거미줄처럼 허공에 집을 짓던 검영은 어느새 그의 전신을 둘러싸 버리고 말았다. 그의 모습은 검영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슝! 슝! 슝!
사람은 보이지 않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이 사방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로는 귀신이라고 기겁을 할 일이었다.
이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바위가 검날과 부딪쳤는지 양단 되어 퉁겨 나가버렸다.
그리고 드디어 검영은 사라지고 사나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전신으로 성취감이 느껴져 왔다.
"크하하하. 드디어 이루었다. 절대검의 경지! 이제 뉘라서 나의 일검을 당할 수 있으랴?"
그의 입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나는 할 수 있다."
라는 말이 그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뭣이? 누구냐?"
일갈성과 함께 사내는 뒤쪽을 향해 일검을 뻗었다. 다시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공격이었다.
"크윽."
사내가 검으로 후려치는 순간 상대는 저만치 퉁겨 나가버렸다. 공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정확했다.
그러나, 사내는 경악으로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일검이 저 광오한 자에 의해 막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절대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자신의 일검이 실패했다는 사실에 대해 어처구니없는 황당함과 분노를 느꼈다.
'칠 년이라는 시간을 만들어왔다. 이제야 겨우 완성했건만. 지난 칠 년간의 고통이 물거품이 되다니....... 크윽!'
그의 검을 잡고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가를 나타내주고 있었다.
"대단하군."
사내의 상념을 깨는 소리였다. 그제야 사내는 사마적을 처음으로 바라보았다.
"웬놈이냐?"
사내의 입에서는 약간 쉰 듯한 목소리가 새어나왔고 상대는 그런 그를 보고 싱긋이 웃고있었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나의 가슴을 베다니 말이야."
"넌 대체 누구냐?"
사내의 눈빛은 경계의 빛을 띠기 시작했다.
상대는 나이 꽤나 들어 보이는 데도 어울리지 않게 울긋불긋한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색동옷을 입은 격이었다. 저런 부류라면 속없는 부잣집 막내도령쯤 되거나 아니면 허풍치기 좋아하는 건달이기 십상이지 않겠는가?
"내, 내가 이런 자에게 당하다니."
사내의 기분은 더욱 비참해져만 갔다. 그러나 상대는 그의 그런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앞가슴을 바라보며 궁시렁거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쯧쯧, 이게 얼마짜린데."
상대는 자신의 앞가슴이 찢어진 것이 못내 아쉬운 듯 연신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사내는 가슴에서 불이 치솟아 올랐다.
"웬놈이냐고 묻질 않느냐!"
바람이 없이도 나뭇잎이 떨어질 만큼 쩌렁쩌렁 울리는 커다란 목소리였다.
"나? 나 말인가?"
하지만 저 무례하고 버릇없는 자는 열 받아 있는 사내의 모습에 전혀 상관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는 버릇처럼, 연신 호화롭기 짝이 없는 부채를 부쳐대며 말했다.
"나야 당신을 찾아온 놈이지."
그는 사내를 약올리듯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미친놈!"
이런 상대에게 더 이상의 인내심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사내는 검을 고쳐 잡으며 상대의 허를 찾으려 했다.
그때였다.
"자네 이름이 호귀인가?"
사내는 깜짝 놀랐다.
'나의 이름을 알다니....... 적인가?'
호귀는 그제야 상대방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한 서른쯤은 되어 보이는 냉막한 표정의 사나이였다. 그는 어린아이나 입을만한 화복(華服)처럼 유치하기 짝이 없는 울긋불긋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옷차림으로 얕볼 수 있는 상대는 아니지 않는가? 자신의 혼신의 검을 막아낸 자이다.
호귀는 경계의 태세를 늦추지 않으면서 자신의 검을 고쳐 잡았다. 발검할 순간만을 노리면서 상대방과 눈싸움을 계속 벌였다. 그 순간 그의 뒤에서 다른 사람이 한 명 걸어나왔다. 그의 몸은 거대했다.
"소, 소평!"
경악성과 함께 호귀의 눈은 부릅떠졌다.
소평이라 불린 거구의 사내는 예의 그 웃음을 지으며 호귀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소주(蘇州)는 강소성에 위치해 있는데, 대륙경제의 중심을 이루던 곳으로 예로부터 '소주에 풍년이 들면 천하가 풍요롭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또한 항주와 함께 대륙의 이대 아름다운 도시이기도 했다. 상유천당 하유소항(上有天堂 下有蘇杭)이라는 말은 두 도시가 이루는 절경을 가장 잘 표현했다고 한다.
지금 소주는 푸른 녹초가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논의 벼이삭들은 푸른 물결이 치듯이 출렁거렸고, 이는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뿌듯하게 하고 있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지경이랄까?
자고로 풍요로운 곳에는 상업적인 도로가 발달하기 마련이다. 소주에도 상점과 객점 등이 어우러진 대로가 거미줄처럼 엉켜있었다.
그 중 한 거대한 대로 주변으로 많은 상점과 집들이 즐비한 것은 물론이고, 평소의 몇 배에 달할 정도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바로 오늘이 오 일 주기로 열리는 소주의 장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이리저리 몰려서는 온 시장 안을 헤집고 다녔다. 또 이곳저곳에서 파는 예쁜 장신구에 현혹된 아가씨들도 많았고, 생필품을 구하러, 혹은 구경하러 나온 아낙네들과 술 한 잔 걸쳐보려는 동네 청장년들이 거리를 꽉 메우고 있었다.
이렇게 시끌벅적한 장날에 구경거리가 빠진다면 말이 안될 것이다. 지금도 시장 한곳으로 사람이 꾸역꾸역 모여들고 있었다. 어떤 구경거리일까?
퍼억. 퍽! 팍!
삼 인의 사나이가 한 노인을 복날 개 두들겨 패듯이 패고 있었다. 사내들의 얼굴에선 온갖 짜증과 분노가 느껴졌다.
한 번만 잘못 쳐도 죽을 것 같이 생긴 노인을 건장한 사내들 셋이서 두들겨대고 있음에도 누구 하나 막으려 하는 자가 없었다.
노인은 그들에게 연신 두들겨 맞으면서도 쉴새없이 떠들어 대고 있었다.
"윽. 마마....... 통촉하시옵소서. 억!"
사내들의 발길질이 노인의 배와 등, 그리고 얼굴에도 작렬했다.
"마마....... 억!"
퍼억!
다시 복부에 한 대가 박혔다.
"마......."
빡! 이번엔 얼굴이었다.
주위에 늘어선 사람들은 그것을 바라보며 모두 한마디씩 중얼거렸다.
"에그그....... 저러다 죽지."
"저런 저런, 저걸 어쩌나 그래. 쯧쯧!"
"하필이면 저런 놈들을 건드려 가지고."
"아, 그러게 미쳐도 곱게 미쳤어야지."
사람들의 비웃음, 혹은 걱정스런 말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 명의 사내들은 노인을 두들겨 패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이고고....... 마마! 통촉을, 아이고!"
빠각!
급기야는 어딘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사내들은 발길질을 멈추었다.
"에이...... 퉤! 이 미친놈의 늙은이!"
그 중 한 사내가 침을 뱉으며 다른 사내들을 이끌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노인은 죽은 듯 누워 있었고 사람들은 이내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노인은 초죽음이 되어 누워있었지만 재미있는 구경을 한 사람들은 그 구경거리가 끝나자 곧 자리를 떠버렸다. 아무도 이 노인의 상태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이 노인이 소주거리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장날만 되면 이런 모습을 보였고 항상 결말까지도 같았다.
노인의 이름은 광노(狂老)라 했다.
그는 평상시에는 그저 주점의 그늘이나 담의 구석자리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보고 뭐라 중얼거리거나 아니면 연신 바닥에 무언가를 그려대고 지우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조금 정신이 이상해 보이기는 했지만 딱히 귀찮을 것 없는 평범한 노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만 서면 노인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붙잡고 황족에게나 쓰는 마마라는 호칭을 쓰며 사람들을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처음 마마라는 높은 호칭을 듣는 사람이야 누가 싫어하겠는가? 아니, 싫다 하더라도 미친 자의 말이니 그저 허허 웃어넘길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노인의 경우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이거야 원, 하루종일 따라다니며 마마라 불러 제키니 뉘라서 안 귀찮아 할 것이며 뉘라서 열을 안 받겠는가. 그래서 급기야는 이렇게 두들겨 맞는 것이었다.
일어나기 힘들 정도로 두들겨 맞고 난 후라야 그는 그 사람을 쫓아다니기를 포기했다.
오 일 주기로 이런 일이 벌어지니 그의 몸은 성한 구석이 한곳도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장만 서면, 그는 또 다시 끈질기게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마마라고 칭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모두들 그가 궁에서 일하던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일이 생겼든 미치게 되어 궁에서 쫓겨난 것일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는 저렇게 미친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거라는 것에 모두 만장일치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모두 추측일 뿐, 이 노인의 진정한 신분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 일이 흘러 또 다시 소주에 장이 들어섰다.
어김없이 다시 나타난 광노, 그는 어슬렁거리며 시장 안을 맴돌고 있었다. 자신의 마마가 될 자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때 노인의 앞에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서른쯤 되어 보이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화복을 입고있는 사나이, 바로 사마적이었다.
광노의 눈에서 일순간 섬광이 터져 나왔다. 미친 자의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는 현기였다. 그러나 그 섬광은 나타날 때보다 더욱 빠르게 사라져버려서 그것을 눈치 챈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마마. 이곳엔 어인 일로 납시셨나이까?"
대로 가운데에서 노인은 넙죽 엎드려 절을 하며 예의 그 미친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도 사나이가 어떤 행동을 할지 궁금해서 사나이에게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사나이의 반응은 의외였다.
"호오, 그래. 때마침 자네가 와줬군. 짐이 이렇게 왕림한 것은 다 자네를 보기 위해서이네."
아무리 장단을 맞춰도 그렇지, 사내는 노인보다 한술 더 뜨는 것이었다.
아니, 딱딱 말을 받는 그 모습은 장난만이 아니었다.
손에 든 부채를 탁탁 부치면서 제법 무게를 잡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가?"
"마마. 소신의 고생이야 하잘것없는 것이옵니다. 마마의 옥체를 위해서라면 이 한 몸 불사른다 할지언정 무슨 원망이 있겠습니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허허허....... 그대의 충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군. 내 그대를 다시 보니 반갑기 그지없다. 자, 어서 가세나 그려."
그리고서 그 둘은 총총걸음으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사람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참, 오래 살다보니 별 미친놈들을 다 보겠군."
"그러게 말이야. 짚신도 짝이 있다더니 저 미친 노인에게도 같이 장단 맞춰줄 짝이 생겼구만 그래."
그후 그 두 사람은 소주에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던 사람들 역시 얼마가 지나지 않아 모두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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