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9일 화요일
44 소이비도 제3권 깨어진 침묵
깨어진 침묵
초류빈을 보고 밖으로 뛰쳐나온 낭천의 위는 이미 마비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그가 뛰쳐나가는 것을 보고도 형무명은 말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입가에 냉혹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낭천이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초류빈을 구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더욱이 그것은 설소하라는 여인 때문에 더 확고하다는 사실을 느낀 것이다.
낭천은 전신이 졸아드는 것을 느끼고 갑자기 허리를 굽히고는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낭천이 토한 것은 물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낭천은 추종해 오던 이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다.
'당신은 꼭 제게 약속을 해 주셔야 해요. 어떤 일이 있어도 꼭 돌아오신다고요. 저는 영원히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
어렴풋이 그러나 귓전을 강하게 때리는 음성, 바로 설소하였다. 더욱이 낭천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인의 말이기도 했다. 낭천은 이 애절한 말을 위해서라도 결코 죽을 수 없었다.
그러나 초류빈...낭천의 가장 좋은 친구일 뿐만 아니라 낭천이 여태까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인격이 완전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이곳에 서서 다른 사람이 초류빈을 죽이는 것을 어떻게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낭천은 속이 뒤집히는 것을 참지 못하고 계속 쓴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한편, 매우 컴컴하기 이를 데 없는 지하실 안의 초류빈은 지금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지도 몰랐을 뿐 아니라 또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는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느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움직일 수도 없었다. 바로 모든 혈도가 제압당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호천강이 빙긋 웃으며 말을 했다.
"아무리 사나운 맹수라 할지라도 열흘을 넘게 굶주리다 보면 자연히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호유성이 길게 탄식을 내뿜었다.
"난 본래부터 그를 죽이길 바라지 않지만...지난날의 그 교훈 때문에 다시는 그런 의외의 일을 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오."
형무명은 한참 머뭇거리고 있더니 갑자기 물었다.
"그의 칼은 어디 있소?"
호유성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내키지 않는 투로 물었다.
"형대협께선 그의 칼을 보고 싶습니까?"
형무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것은 전혀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호유성은 서릿발처럼 싸늘한 그의 표정을 쳐다보다가 결국은 품속에서 한 자루 칼을 꺼냈다. 칼은 매우 가벼울 뿐 아니라 짧고 가늘어 마치 한 잎의 버들잎을 보는 것 같았다. 형무명은 그 칼을 받아 가볍게 매만졌다.
호유성은 그의 이러한 행동이 우스웠던지 빙긋 웃었다.
"사실 이 칼은 이기(利器)가 아닌 보통 칼에 불과합니다."
형무명은 넋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이기라고...당신 같은 사람이 이기를 얘기할 자격이 있소?"
이때 형무명의 눈동자는 호유성을 쏘아보며 마치 심문을 하듯 냉랭하게 따지고 있었다.
"당신은 무엇이 이기인 줄이나 알고 그러는 거요?"
형무명의 눈동자에는 비록 신광이 번뜩이지는 않았지만 형용할 수 없는 괴이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마치 꿈속에서 귀신의 눈을 보고 깜짝 놀라 깬 후에도 여전히 무서움을 타는 것 같은 그런 눈이었다.
호유성은 숨통까지 막히는 것을 느끼고 억지로 입을 벌려 물었다.
"나...난 모르니 가르쳐 주십시오."
형무명은 그제야 눈동자를 다시 칼로 돌렸다.
"살인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기요. 그렇지 않으면 제아무리 좋은 칼이라도 당신 같은 사람의 수중에 들어가면 이기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오."
호유성은 빙긋 웃으며 그의 말에 찬동을 보냈다.
"그렇습니다. 형대협의 견해는 과연 고명합니다."
형무명은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려 다시 물었다.
"당신은 오늘날까지 이 칼 아래 몇 명이나 죽었을 것 같소?"
"글쎄...아마 헤아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형무명은 힘 있고 짧은 어투로 내뱉었다.
"헤아릴 수가 있소!"
금전방이 강호에 나선 지는 불과 이 년밖에 되지 않지만 그 전에 얼마나 오랜 세월을 두고 창설 계획을 세웠는지 모른다.
때문에 금전방이 이 짧은 이 년이라는 세월에 강호를 위진시킬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호유성은 이런 점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금전방이 창립하기도 전에 강호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의 내력을 상세히 조사해 본 적이 있었다. 이 일에 그 얼마나 많은 인력과 무수한 물질을 소비했는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일이었다.
호유성은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이해할 수가 없어 계속 다그쳐 물었다.
"정말입니까? 정말 헤아릴 수 있단 말입니까?"
형무명은 짧게 대꾸했다.
"일흔여섯 명."
그리고 나서 형무명은 냉랭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 일흔여섯 명 중에서 당신보다 무공이 낮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소."
그러나 호유성은 이미 이런 일에 대해서는 이력이 생긴 듯 빙긋 웃기만 하면서 시선을 천천히 초류빈에게 돌렸다. 그 행동은 마치 형무명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초류빈 본인에게 증명해 보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초류빈에게는 고개조차 들 힘이 없었다.
이때 호유성이 입을 열어 말했다.
"초류빈 자신이 이 칼에 죽게 된다면 아마 억울하지 않을 것입니다."
호유성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칼빛이 번쩍 하더니 형무명의 손에서 곧장 초류빈의 앞으로 비수가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이 순간 호유성은 너무 기뻐 탄성까지 지를 뻔했다. 그러나 칼은 초류빈의 목에 떨어지지 않고 도중에서 갑자기 빙글 돌더니 바로 그의 신변에 떨어졌다. 이제보니 형무명의 암기를 쓰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었다.
이때 형무명이 냉랭한 어조로 명령했다.
"어서 그의 혈도를 풀어주시오."
호유성은 매우 놀라고 또 당황했다.
"그...그렇지만....."
형무명은 그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소리쳤다.
"그의 혈도를 풀어주라고 했소!"
이 어조에는 감히 항거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호유성 부자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다가 이내 그의 의사를 알아차렸다.
호유성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리며 말했다.
"상관방주께서 필요로 하는 것은 초류빈인데 죽든 살든 상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호천강도 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상관방주께선 술은 입에도 대시지 않는 분이니 당연히 술 주정뱅이는 싫어하시겠죠?"
호유성도 그 기세를 타고 다시 말했다.
"그리고 산 사람을 데리고 가느니 죽은 사람을 데리고 가는게 훨씬 편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는 어떤 의외의 일이 일어나지도 않을 것입니다."
호천강은 영악한 눈초리를 빛내며 빠지지 않고 거들었다.
"그러나 형대협께선 반항할 힘이 없는 사람에겐 절대 출수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형무명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버럭 소리쳤다
"정말 말들이 많군!"
호유성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예, 알았습니다. 제가 가서 그의 혈도를 풀어주지요."
처음부터 혈도를 제압한 사람이 호유성이었으므로 푸는 것도 매우 용이한 일이었다. 호유성은 초류빈의 어깨를 툭 치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현제, 형씨께서 자네와 겨루고 싶은 모양이니 절대 조심해야 할 걸세."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호유성은 초류빈더러 현제라고 부를 수 있는 배짱이 있는가 보다. 그런데 그 말투 역시 옛날과 조금도 다름없이 부드럽고 정답지 않은가. 간악의 도가 지나쳐 선하게 보이는 사람, 이런 사람을 과연 숭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초류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씁쓸하게 웃으며 옆에 떨어진 칼을 주웠다. 이것이 바로 그로 하여금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만은 비도탈명이다. 한 번도 실수를 해 본 적이 없던 그의 칼이 다시 수중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초류빈에게 아직도 이 칼을 발출해 낼 힘이 있을까.
아름다운 여인이 늙은 것과 영웅의 종말은 오두 이 세상에서 어쩔 수 없는 커다란 슬픔이다. 이런 슬픔은 사람으로 하여금 동정을 가지게 만들며 또 제일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는 단 한 사람도 초류빈을 동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호천강의 눈동자에는 교활스러움이 잔뜩 빛나고 있었다.
"비도탈명이 아직도 그 영민함을 발휘할 수가 있을까요?"
초류빈은 고개를 들어 한참 동안이나 호천강을 쳐다보다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형무명이 음침하게 입을 열었다.
"난 살인을 할 때면 으레 남에게 먼저 기회를 준다. 이것이 바로 당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요. 알겠소?"
초류빈은 아무 말없이 그저 처량하게 웃을 뿐이었다.
형무명은 차갑게 소리쳤다
"자, 어서 일어서시오!"
초류빈은 갑자기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호천강이 앞으로 나서며 짐짓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아저씨께서 만약 일어서지 못하시겠다면 제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호천강은 그러다가 눈을 깜박거리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저는 소문에 아저씨께선 앉아서도 비도를 발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누워서도 똑같이 발출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초류빈이 탄식을 하며 무엇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한 사람이 돌진해 들어왔다. 낭천이었다. 낭천의 얼굴에는 조금도 혈색이 없어 마치 죽은 사람같을 뿐 아니라 입에는 핏자국까지 있었다.
비록 잠깐의 시간이었으나 낭천은 이미 옛날의 그 영민한 행동을 많이 잊어버린 것 같았다. 낭천은 나는 듯 지하실 속으로 돌진해 들어왔으나 즉시 멈추었다. 형무명이 홱 몸을 돌렸다.
"아직도 그 마음을 버리지 못했느냐?"
이때 초류빈이 이미 고개를 들고 있었다. 넋을 잃은 혼탁한 그의 두 눈동자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낭천은 힐끗 그를 쳐다보았을 뿐 즉시 몸을 돌렸다.
"그를 죽이려면 우선 나부터 죽여야 하오!"
낭천의 음성은 매우 침중했고 또 평안스러웠다. 이 말은 여태까지 갈등해 온 낭천의 결심을 완전히 드러낸 것이었다. 형무명의 회색빛 눈동자는 즉시 특이한 변화가 일어났다.
형무명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듯 되물었다.
"그녀가 걱정되지 않느냐?"
낭천은 별 관심없는 어투로 대꾸했다.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그녀는 살아갈 수가 있소."
이 한마디 역시 아까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평안스러웠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고통의 빛이 역력하게 드러났고 호흡까지도 힘이 들 정도였다.
형무명은 이 순간 심리적으로 어떤 반응을 얻었는지 담담하게 입을 떼었다.
"그녀가 상심을 해도 좋으냐?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낭천은 황급히 형무명의 말을 잘랐다.
"살아서 불안을 느끼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소. 내가 죽지 않으면 그녀는 아마 너무 상심을 할 것이오."
형무명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너는 그녀가 그런 사람이라고 믿느냐?"
낭천은 서슴지 않고 대꾸했다.
"물론이오."
이것은 사실이었다. 낭천의 머릿속에는 여자 설소하는 비단 선녀일 뿐만 아니라 성녀(聖女)이기도 했다. 다시 형무명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가 웃는 것을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형무명 자신까지도 자기가 언제 웃었는지 잊어버릴 정도였다.
형무명의 옷음은 매우 특이했다. 그의 얼굴 근육은 이미 못쓰게 된 지도 오래 되어 굳은 빵처럼 딱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낭천은 그가 웃는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냉랭하게 소리쳤다.
"너무 좋아하지 마시오. 당신은 나를 죽일 수 있는 팔 할의 기회가 있지만 내게도 역시 이 할의 기회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순간 형무명의 미소는 이내 사라졌다.
"내 아까도 말했지만 난 너의 목숨을 꼭 살려줄 것이다."
낭천은 충혈된 눈알을 번뜩이며 버럭 소리쳤다.
"필요없소!"
"내가 널 살려주는 것은 장차....."
그러자 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이미 눈부신 검빛이 번뜩였다. 검빛이 허공으로 날으는 것은 그야말로 번개와 같았다. 그러나 다시 한 가닥의 광망이 일어났는데 먼저 출수한 빛보다 더욱 빨랐다. 그것은 무엇일까. 다음 순간 번쩍이던 빛들이 일시에 싹 거두어졌다. 동시에 모든 동작들도 멈추어졌다.
형무명의 검은 어느 새 낭천의 어깨를 찌르고 있었다. 그러나 낭천의 검은 형무명의 목구멍과 아직도 네 치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때문에 낭천의 어깨에서 시뻘건 피가 흘러내려 옷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형무명의 검은 그 자리에서 정지했다. 어째서 계속 찔러 내려가지 않는 것일까. 순간 놀랍게도 형무명의 어깨에 한 자루의 칼이 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비도탈명, 바로 비도탈명이었다. 도대체 어떤 마력이 작용을 하여 다 죽어가는 초류빈으로 하여금 이 칼을 발출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했을까.
이 순간 호유성 부자는 안색이 백지장처럼 변해 손을 떨며 한걸음 한걸음씩 후퇴하여 담구석까지 물러나왔다.
두 부자는 초류빈이 대체 어디서 힘이 생겨 칼을 발출해 냈는지 알지 못했다. 이때 초류빈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형무명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초류빈을 주시했으나 그 회색빛 눈동자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형무명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멋진 칼이오."
초류빈은 예의 그 버릇대로 빙긋 웃었다.
"별것 아니오. 다만 당신이 나를 얕보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안중에 두지 않았던 것뿐이오. 만약 그렇지 않았던들 나는 당신을 상처 입히지 못했을 거요."
형무명은 갑자기 싸늘한 냉소를 터뜨렸다.
"나를 속일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당신이 진정한 실력가이며 또 나아가선 나보다 강하다는 결론이오."
초류빈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난 속인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또 당신에게 칼을 던진다고 경고한 적도 없었소. 이것은 당신이 자초한 것이오. 다시 말해 자신의 눈동자가 자기를 속인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오."
형무명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한마디 한마디 분명하게 말했다.
"그렇소. 틀린 건 당신이 아니고 나였소."
초류빈은 다시 참을 수 없이 탄식을 토했다.
"당신은 흉수이지만 결코 소인(小人)은 아니오."
형무명은 호유성을 흘깃 쳐다보더니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소인은 결코 흉수와 말할 수 없는 거요."
초류빈은 천천히 손을 내저었다.
"좋소. 당신은 그만 가 보도록 하시오."
갑자기 형무명이 화를 벌컥 냈다.
"어째서 날 죽이지 않는 거요?"
"당신이 내 친구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오."
형무명은 일순 말을 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기의 어깨에 박혀 있는 칼을 보았다.
다시 잠시 후 형무명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난 그의 팔을 절단시키려고 했었소."
"나도 알고 있소."
형무명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의 이 칼은 무척 가볍구려."
초류빈은 싸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나 나는 누가 내게 한 가지를 주면 세 가지로 보답하는 사람이오."
형무명은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비록 무엇이라고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눈동자에는 일종의 말할 수 없는 특이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형무명이 상관금홍을 쳐다보는 눈초리와 똑같았다.
초류빈은 천천히 입을 떼었다.
"내 당신에게 두 가지 일을 가르쳐 주겠소."
형무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시오."
"내 비록 비도탈명으로 일흔여섯 명을 상하게 했지만 그중 스물일곱 명은 죽지 않았소. 그 나머지 마흔아홉 명은 꼭 죽여야 할 놈들이었소."
초류빈은 나직이 기침을 토해낸 후 계속 이었다.
"나는 여태까지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사람을 잘못 죽인 적이 없었소. 그래서 나는 지금 당신이 만약 훗날 다시 사람을 죽인다면 많이 고려를 해 주길 바라오."
형무명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나도 당신에게 한 가지 말해 줄 것이 있소."
"좋소, 어서 말해 보시오."
"나는 여태까지 남의 은혜를 입은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남의 교훈은 더욱 듣기 싫어하오."
형무명은 여기까지 말을 하고는 갑자기 어깨에 박혀 있는 칼을 힘껏 누르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밖으로 노출된 칼날은 완전히 박혀 들어가고 겉부분에는 칼잡이만이 남았다. 피가, 짙은 피가 마구 쏟아져 내려왔다. 동시에 검도 땅바닥에 떨어졌다.
형무명은 아픔으로 인해 몸이 약간 흔들렸으나 그 표정은 여전히 석고처럼 냉혹하고 암석처럼 단단했다. 조금도 고통의 빛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 아니 얼굴 근육 하나 흔들리지 않은 것 같았다. 형무명은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향없이 걸어나갔다.
영웅, 영웅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이 바로 영웅이라는 말인가. 영웅을 대표하는 것은 바로 냉혹하고 잔인할 뿐 아니라 고통과 수심이 뒤따르며 또 무정하다.
영웅, 그들은 살인을 밥먹듯 하고 도박을 미친 사람처럼 즐기며 술을 물마시듯 들이키고 여색이라면 목숨을 걸고 밝힌다. 물론 이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영웅의 모든 것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영웅에게는 또다른 한 가지 무서운 것이 있다.
초류빈과 같은 영웅이 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 세상엔 영웅도 많고 또 공통된 점도 없지 않아 있으며 각양각색의 영웅들이 많지만 그들 중 공통된 점이 단 하나 있는 게 있다. 바로 어떠한 영웅이든 영웅이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낭천의 신색은 매우 숙연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뿜으며 우울하게 말했다.
"그는 아마 일생 동안 검을 사용하지 못할 겁니다."
초류빈은 별다른 빛도 없이 대꾸했다.
"하지만 그에겐 아직 오른손이 남아 있네."
"하지만 그는 왼손잡이인 까닭에 대신 오른손을 쓰면 매우 느릴 것입니다."
낭천은 재차 수심에 가득찬 한숨을 뿜어냈다.
"검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있어 느리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낭천은 여태까지 탄식을 뿜어낸 적이 별로 없었다. 지금 그가 탄식을 뿜어내는 것은 물론 형무명뿐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기준해서이기도 했다.
초류빈은 낭천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두 눈에 광채를 번뜩였다.
"어떤 사람이든 그저 결심만 세워져 있으면 입으로 검을 물어도 손과 똑같이 빠른 법일세.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기질이 모두 쇠퇴해 버리면 설사 두 손이 있다 한들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말일세."
초류빈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세상에는 비록 두 손이 완전한 사람들이 많지만 남보다 빨리 출수해 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네."
낭천은 조용히 듣고 있었으나 어느덧 암울한 두 눈동자에 신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낭천은 갑자기 앞으로 달려가 초류빈의 두 손을 꽉 잡았다.
"알겠습니다. 저는 이제야 당신의 뜻을 알겠습니다."
초류빈도 그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자네가 꼭 깨달을 것으로 믿고 있었네."
이 말이 끝났을 때 두 사람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차 있었다.
만약 제삼자가 이들 옆에 있었다면 분명히 이들이 태도에 감동되어 같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호천강 부자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이때 한참 밖으로 도망가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초류빈은 그들을 등지고 서 있었기 때문에 전혀 기미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낭천은 그냥 그들을 힐끗 쳐다보았을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호천강 부자가 모두 무사히 도망을 간 뒤 낭천은 탄식을 하며 말을 꺼냈다.
"당신이 그들을 놔줄 것이라는 걸 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초류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전날 나를 구해 준 적이 있었다네."
"그렇습니다. 그는 그저 단 한 번밖에 당신을 구하지 않았지만 죽이려고 했던 적은 무척 많았습니다."
초류빈은 약간 처량하게 웃었다.
"기억하기 매우 어려운 일이 있는가 하면 평생 잊지 못할 일도 있는 것이라네."
낭천은 다시 한숨을 내뿜었다.
"그것은 당신이 전혀 염두에도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낭천은 어쩌면 세상의 험한 일에 부딪쳐 보지 못한 젊은이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낭천이 인생의 어떠한 일에 대해 보는 방법은 대부분의 사람보다 더 예리하고 깊이 생각하는 성격이었다.
초류빈은 그의 이 날카로운 언변에 그만 탄식을 토했다.
"그러나 어떠한 일은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꼭 시시각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있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영원히 자기의 생각을 바꾸지 못한다네. 이것 역시 인생의 커다란 고통 중의 하나일세."
낭천이 갑자기 분노 섞인 음성으로 따지고 들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정말로 그가 한 것만 기억하고 다른 일은 모두 잊었다는 말씀입니까?"
초류빈은 바보처럼 웃었다.
"어쩌면 애초부터 그와 원한이 없었는지도 모르네. 왜냐하면 그에게도 그에 따른 고뇌가 있기 때문이네."
낭천은 멍청하게 그 말을 듣고 있다가 갑자기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으하하하...저는 이제야 세상의 많은 일들이 매우 불공도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불공도라고?"
낭천은 싸늘하게 미소지었다.
"불공도(不公道)란 설명을 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한 사람의 일생은 매우 선량한데 불행하게도 한 가지 일을 잘못 처리하여 그 일이 그의 가슴속에 남아 가끔 되살아나 평생의 한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들은 그를 용서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자신까지도 자기를 용서할 수 없는 이상한 것이죠."
초류빈은 그의 말이 점점 항변조로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초류빈도 일찍부터 한 번의 실수가 천추의 한을 맺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낭천은 계속 억양 높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마도 호유성 같은 사람은 그의 일생 동안에 단 한 번밖에는 좋은 일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것은...그가 당신을 구해 주었다는 그 사실만으로 당신은 영원히 그를 나쁜 인간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낭천의 말은 매우 대담하고 또 폐부를 찌르는 것이었다. 초류빈은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그의 뜻을 깨달았다.
낭천은 바로 설소하를 위해 불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낭천은 설소하가 여태까지 초류빈에게 단 한 번의 실수밖에는 없었는데 어째서 시종 그녀를 용서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사랑이라는 것은 확실히 미묘한 것이었다. 달콤할 때가 있으면 괴로울 때가 있고 또 매우 무서울 때도 있었다. 사랑은 사람으로 하여금 바보로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장님으로 만들 수 있었다.
한편 호천강 부자는 그 집을 무사히 빠져나온 것에 대해 그처럼 유쾌하고 즐거울 수가 없었다.
호유성이 먼저 높은 어조로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하...강아, 잘 기억해 두어라. 다른 사람의 약점은 우리들의 기회라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라.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영원히 실패를 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호천강은 즉시 대꾸했다.
"초류빈의 약점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호유성은 눈동자를 음산하게 굴렸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언젠가 우리들 손에 죽게 될 것이다."
그 순간 갑자기 높은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웃음소리는 건너편 지붕 위에서 들려왔다. 호유성 부자가 움찔하여 고개를 돌려보니 한 사람이 지붕 위에 앉아 닭다리를 뜯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호풍자였다. 호풍자는 탐욕스럽게 닭다리를 뜯고 있을 뿐 호유성 부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것은 마치 이 닭다리가 그들 부자보다 더 잘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호풍자는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너희들, 너무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다. 초류빈은 절대 쫓아오지 않을 테니까. 만약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그는 절대 너희들을 애초부터 그 집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호유성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호유성은 이때 초류빈이 비도탈명을 던진 힘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짐작을 한 것이다. 호유성은 분노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호풍자는 절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 호유성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포권의 예를 올렸다.
"요 며칠 동안 그 친구를 보살펴 주신데 대해 정말 감사합니다."
호풍자는 여전히 게걸스럽게 닭다리를 뜯으며 대꾸했다.
"그리 감사할 필요는 없다. 초류빈은 별로 많이 먹지 않았다. 매일 그저 닭다리 두 개에 빵 몇 개면 충분했으니까. 그리고 너를 대신해서 문을 지키는 놈도 정말 백치더구나. 나는 매번 초류빈에게 음식을 갖다줄 때마다 그의 수혈을 찔렀는데 그는 자기가 정말 잠을 잔 줄로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호유성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암중으로 이를 갈았다. 그 즉시 초류빈을 죽이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이때 호풍자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본래 너는 나를 관대하게 대해 주었고 나도 널 도와준 적이 있으므로 우린 이제 아무런 빚도 없는 것이다. 너 같은 인간에겐 난 말도 하기 싫다."
그러나 호유성은 화를 내기는커녕 빙긋 웃으며 듣기만 했다.
호풍자는 입가에 묻은 기름을 닦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내 꼭 네게 할 말이 있다. 마지막 한마디 말이다."
호유성은 약간 허리를 굽혔다.
"기꺼이 듣겠습니다."
호풍자는 경멸에 가득찬 음성으로 선언했다.
"네가 만약 상관금홍과 진정으로 의형제를 맺기 원한다면 목을 매달아 죽는 편이 아마 더 나을 것이다."
이것은 과연 최후의 한마디였다. 호풍자는 이 말을 끝내자마자 지붕 뒤로 미끄러져 내려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호유성은 그의 욕설과는 달리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나와 상관금홍이 의형제를 맺는 일을 뜻밖에도 강호상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군."
담은 몹시 길었다. 초류빈과 낭천은 그 긴 담을 따라 걸으며 이제는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두 사람은 모두 침묵이 만 마디의 말보다 귀중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느덧 곱게 낙조가 대지에 깔리기 시작했다.
고요한 정적과 황혼이 찾아오는 속으로 문득 어느 집 담너머에서 피리소리가 들려왔다. 고즈넉한 황혼을 타고 들려오는 처량한 피리소리는 가끔 사람으로 하여금 옛 일을 생각나게 만들고 또 향수를 느끼게 한다.
피리소리를 듣고 있던 낭천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저는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초류빈은 별 억양없이 물었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초류빈은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엔 참지 못하고 이렇게 반문했다.
"그녀가 자네를 기다릴 것 같은가?"
낭천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이번엔 그녀가 당신을 구해 주라고 해서 온 것입니다."
낭천의 확실한 대답에 초류빈은 그만 말문이 탁 막혀 버렸다. 초류빈은 비록 설소하라는 여인의 인간됨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그녀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낭천은 한숨과 함께 말을 꺼냈다.
"제 인생 중에서 가장 가깝고 친근한 사람은 단 두 사람밖에 없습니다. 저는...당신들이 친구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이 한마디는 어찌나 어렵게 시작했던지 한참 후에야 끝이 났고 또 긴 여운까지 남겼다. 매우 힘들게 말을 한 것으로 보아 낭천의 마음도 몹시 괴로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초류빈은 낭천의 괴로운 눈동자를 대하자 말할 수 없도록 서글퍼졌다. 오직 사랑을 해 본 사람만이 애정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이해할 수가 있다. 이제 피리소리는 점차 멀어지고 있었으나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서글픔을 자아냈다.
문득 초류빈이 입을 열었다.
"나도 그녀를 만나보고 싶네."
낭천은 놀란 눈으로 초류빈을 쳐다보았다.
초류빈도 다정하게 웃었다.
"만약 내가 가는 게 불편하다면 자네가 나 대신 그녀에게 감사를 전해 주게."
낭천은 갑자기 이렇게 소리쳤다.
"저는 다만 당신이 그녀를 상하게 하지 말기를 바랄 뿐입니다."
낭천은 본래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초류빈은 한 번도 설소하를 상하게 만든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초류빈을 상하게 한 것은 오직 그 자신뿐이었다. 그러나 낭천은 설소하를 위해서 이런 말을 한 것뿐이었다.
43 소이비도 제3권 깊고 얕은 물
깊고 얕은 물
오늘 저녁에 들어온 소녀는 바로 설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설소하는 여전히 그 아름다운 얼굴에 선녀와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호천강의 표정이 오히려 굳어 버렸다. 그러나 그것도 일순간 그는 즉시 웃으며 일어났다.
"이제보니 이모님께서 장난을 치셨군요."
설소하는 눈꼬리를 치켜뜨며 입을 열었다.
"아직도 날 이모라고 부르느냐?"
호천강은 소년답지 않게 능청스러운 어조로 말을 했다.
"어쨌든 이모님은 이모님이 아니십니까?"
설소하는 갑자기 요염하게 눈을 흘겼다.
"그러나 너는 이제 어른이 되었지? 그렇지?"
설소하는 이렇게 웃고 나서 갑자기 탄식을 했다.
"못 본 지 겨우 이삼 년인데 그동안 많이 컸구나."
"이삼 년 동안 우린 시종 이모님의 소식을 알아내지 못해 모두 궁금하게 생각했어요."
"그러나 난 너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지. 소문을 듣자하니...여자들을 다루는 데 있어,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러더구나. 네가 나이 든 사람들보다 더욱 강하고....."
호천강은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참지 못해 키들거렸다.
"그러나 이모님 앞에서는 아직도 어린애인데요, 뭐....."
그러나 설소하는 눈을 부릅뜨고 토라진 음성으로 소리쳤다.
"아직도 날더러 이모라니, 내가 그처럼 늙어 보이느냐?"
호천강은 참다 못해 고개를 들었다.
설소하는 그의 앞에서 편리한 대로 자세를 잡고 서 있었다. 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유혹이 천 명의 여인들을 갖다 놓는다 하더라도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호천강도 마치 그녀의 이 유혹에 흡수된 듯 멍청히 눈을 뜨고 쳐다보았다.
설소하는 입술을 깨물고 슬픈 듯 중얼거렸다.
"소문을 듣자니 넌 앳된 소녀들만 좋아한다던데 난 이미 늙은이야....."
약간은 애교가 섞인 듯하면서도 감미로운 손처럼 전신에 스며드는 그녀의 이 말에 호천강의 가슴은 마구 소용돌이쳤다.
호천강은 크게 소리내어 외쳤다.
"아니에요. 이모님은 조금도 늙지 않았어요."
설소하의 두 눈이 다시 유혹하듯 빛났다.
"정말?"
호천강은 요동치는 가슴을 달랠 길 없어 고개를 숙였다.
"만약 당신더러 늙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장님일 겁니다."
"그렇다면 넌 어떠냐? 장님이냐, 아니면 바보님?"
호천강은 물론 장님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었다. 때문에 설소하는 호천강의 곁을 떠날 때 매우 고통스러웠다. 호천강은 어린아이도 아니었고 장님도 아니었으며 더욱 바보도 아니었다. 그저 미친 것뿐이었다.
호천강은 미쳤다. 그것도 아주 무섭도록 말이다. 세상 남자들을 다 경험해 온 설소하조차도 이렇게 미친 사내를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설소하의 눈동자에서는 아직 누구에게서도 얻을 수 없었던 일종의 만족과 유쾌함 그리고 승리감이 번쩍거렸다.
설소하는 여태까지 남자에 대해 전혀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 남자가 바보든 성인군자든 미쳤든 간에 말이다. 때문에 설소하는 늘 남자를 취하고 나서 만족을 느껴왔다. 어느덧 날은 이미 밝았다. 그런데 건넌방에서는 아직도 술을 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사람이 큰소리로 웃으며 떠들었다.
"안 마시면 몰라도 마시려면 날이 밝을 때까지 마셔야지."
그러나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사나이는 픽 쓰러졌다. 이때 설소하의 뇌리에 문득 한 사나이가 떠올랐다. 설소하는 아직도 그 사람의 기침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것 같았다.
설소하는 그 사람만 뇌리에 떠오르면 분노가 끓어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여태까지 그 특유의 미모와 재질 그리고 유혹으로많은 남자들을 정복해 왔지만 그 남자만은 정복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그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설소하는 그를 얻지 못하는 보복으로 언제나 그를 죽이려고 마음먹어 왔다.
설소하의 성격은 자신이 얻지 못하는 것이면 다른 사람의 손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성격이었다. 설소하는 이를 악물고 내심 중얼거렸다.
'내 비록 너를 죽이고 싶지만 지금은 결코 죽이지 않겠다. 그리고 난 또 네가 상관금홍의 손에 죽는 것도 절대 바라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서 그가 두려워하는 존재가 없어지기 때문이지.'
설소하는 여기까지 중얼거리고 나서 다시 잔인하게 웃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꼭 너를 내 손으로 죽이고 말 것이다. 그것도 천천히 말이다. 아주 천천히.....'
검, 한 자루의 얇은 검.
매우 가볍고 또 유연하게 보이는 검이었다. 검 손잡이에는 얇고 가벼운 나무판자를 끼웠다. 그런데 손을 보호하는 검막이 없었다. 이것은 그가 검을 찌를 때 누구도 그 손 가까이에 접근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검은 검고 가벼운 것이다. 그 어떤 무기라도 문제없이 자를 수 있었다. 게다가 일단 그의 검이 앞으로 나갔을 때엔 그 누구도 막아내는 사람이 없었다. 이것은 매우 특이한 검이었다. 이 세상에서는 오직 한 사람만이 이 검을 쓸 줄 알았다.
검은 침상 옆의 작은 상 위에 놓여 있었는데 그 옆에는 깨끗한 청색 옷이 한 벌 놓여 있었다. 낭천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첫눈에 그 검을 보았다. 순간 낭천의 게슴츠레한 눈동자가 번쩍 뜨였다. 낭천은 검을 대하자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연인들처럼 전신에 뜨거운 피가 용솟음쳐 올랐다.
낭천은 천천히 손을 내뻗었다. 이 아침에 만난 감격이 얼마나 큰지 낭천의 손은 자기도 모르게 가볍게 떨렸다. 그러나 그의 손가락이 예리한 검날에 닿는 순간 그 동작이 문득 멈추어졌다. 가볍게 검날을 만지는 낭천의 눈동자가 먼 곳으로 잠겨 들어갔다.
그것은 매우 멀었다. 말할 수 없는 먼 곳으로...아마도 그의 마음 역시 먼 곳으로 줄달음치고 있는 것 같았다. 낭천은 먼저 맨처음 이 검을 사용했을 때의 광경을 생각했다. 시뻘건 선혈이 새파란 검날을 따라 곧장 떨어지던...그리고 그는 이 검날 아래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악독한 사람들...그의 피는 이미 용광로처럼 온몸에서 용솟음치고 있었다. 이 검으로 사람을 죽이던 시절은 불행과 재난이 한꺼번에 겹쳐 들었지만 몹시 다채롭기도 했고 또 찬란했다. 더욱 쾌의은구(快意恩仇), 이 네 글자는 또 얼마나 장렬했던가.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지나간 일이다. 무척 오래 전에 지나간 일인 것이다.
낭천은 이미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옛날의 일은 모두 잊겠다고 맹세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이 생활은 편안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적적하기조차 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렇게 나쁠 것도 없었다. 조용히 안락하게 일생을 보내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 아닌가.
그때 진한 향기가 코를 자극시키며 발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설소하가 나타났다. 금방 보기에는 약간 피로해 보이고 수척했지만 입가에 맴도는 그 미소만은 여전히 이슬을 머금고 피어 있는 꽃처럼 신선했다. 그 미소, 그 어떤 귀중한 것을 희생하든 간에 그저 매일 이 꽃과 같은 미소만 볼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다 보상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낭천은 즉시 검을 내려놓고 빙긋 웃었다.
"오늘은 당신이 나보다 일찍 일어났구려. 나는 점점 잠꾸러기가 되는 것 같군....."
설소하는 그의 이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오히려 물었다.
"이 검 어때요?"
그러나 낭천은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차마 사실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고 거짓말은 더욱더 못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낭천이 대답을 못하자 설소하는 다시 물었다.
"이 검이 어디서 온 줄 아세요?"
"모르겠군."
"이것은 어젯밤 제가 특별히 당신을 위해 만든 거예요."
"무엇이, 당신이?"
설소하는 검을 집어들고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자, 보세요. 옛날 당신이 사용하던 것과 똑같나요?"
그러나 낭천은 무겁게 입을 다물었다.
설소하는 그의 눈치를 가만히 살폈다.
"왜, 싫으세요?"
낭천은 한참 후에야 입을 떼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내게 이 검을 만들어 주었소?"
"꼭 당신이 써야 하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나더러 살인을 하라는 말이오?"
"살인이 아니에요. 사람을 구하는 거예요."
"사람을 구하라고? 누구를?"
"당신의 제일 좋은 친구....."
설소하가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낭천은 펄쩍 뛰었다.
"초류빈을!"
설소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낭천의 창백했던 얼굴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소? 또 무슨 일이 일어났소?"
설소하는 그의 손을 끌어당기며 자리에 앉혔다.
"우선 앉아서 천천히 제 말부터 들으세요. 이런 일은 아무리 급해 보았자 소용이 없어요."
낭천은 길게 한숨을 토하며 무겁게 자리에 앉았다.
"이 세상에는 당신 외에 또 네 명의 무서운 고수가 있어요. 당신은 알고 있나요?"
"말해 보시오."
설소하는 숨을 길게 내쉰 후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한 사람은 천기노인이며 두 번째는 상관금홍이에요. 그리고 초류빈도 결코 그들보다 약하지 않죠."
설소하가 여기서 말을 맺자 낭천은 다시 재촉했다.
"또 한 명은 누구요?"
설소하는 깊이 탄식을 내뿜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형무명으로서 그들 중 나이가 가장 젊고 또 제일 무서운 상대예요."
"제일 무섭다고?"
"그 이유는 그는 전혀 사람이 아닌 데다 인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어요. 형무명, 그의 인생의 최대 목적은 바로 살인으로 그것을 인생의 가장 큰 쾌락으로 느끼고 있어요. 그는 살인 외에는 아무것도 모를 뿐 아니라 알고자 하지도 않아요."
순간 낭천의 두 눈동자에 광채가 번뜩였다.
"그의 무기는 어떤 것이오?"
설소하는 그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바로 검이에요."
낭천의 손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검을 잡았다. 그 힘이 어찌나 세었던지 설소하의 손까지도 떨릴 뻔했다.
설소하는 깊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소문에 듣자니 그의 검법은 당신과 똑같이 악랄하고 빠르다고 해요."
낭천은 가볍게 코웃음을 날렸다.
"난 검법 따위는 모르오. 그저 이 검으로 사람의 목을 찌르는 것밖에는 모르오."
"그것이 바로 검법이에요. 무슨 검법을 쓰든 간에 그 사람의 최후의 목적도 바로 살인을 하는 공통된 것이 아닌가요?"
낭천은 갑자기 바짝 긴장하며 설소하의 얼굴을 뚫어지도록 쏘아보았다.
"그러니까 당신의 말은...초류빈이 바로 그 사람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말이오?"
설소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혼자뿐만 아니라 상관금홍까지도 있어요. 그러나 상관금홍은 어쩌면 그곳에 없을 테니 당신은 그 한 사람만 대적하면 돼요."
설소하는 낭천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으려고 급히 뒤이었다.
"그 사람을 보지 못한 사람은 영원히 그 사람의 무서움을 몰라요. 물론 당신의 검이 그보다 빠를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그래서 지금 그 사람이 어디 있다는 거요?"
"저는 본래 두 번 다시 당신으로 하여금 검을 쓰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살인을 시키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리고 당신이 모험하는 것도 더욱 싫어하지만 초류빈을 위해...당신을 잡아둘 수가 없었어요. 저는 그렇게까지 제 욕심만을 채울 수가 없어요."
설소하를 쳐다보는 낭천의 두 눈동자는 감격의 빛으로 가득찼다.
설소하는 눈물을 흘리며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지금 당신에게 그를 찾아갈 방법을 가르쳐 주겠어요. 그렇지만 당신...당신도 제 부탁을 꼭 들어 주셔야 해요."
낭천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말해 보오."
설소하는 더욱 그의 손을 힘껏 잡고는 눈물이 가득차 있는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꼭 돌아오신다고 제게 말해 주세요. 저는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영원히 당신을 기다리겠어요."
호천강은 아까부터 구석진 곳에 앉아 앞에 서 있는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차 안은 매우 넓었으나 심한 요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장대처럼 서 있었다. 아니 마차에 처음 올라탈 때부터 그는 앉지 않았다. 마차가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며 극성스레 요동을 쳐도 그 사람은 시종일관 장승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
호천강은 한 번도 이런 사람을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더욱이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었는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호천강은 어릴 때부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전부 제 손아귀에 넣고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오만하고 안하무인격인 성격이 이 사람을 본 순간부터 약간 겁을 집어먹은 것이었다. 그리고 호천강은 이 사람이 곁에 있을 때 한 가닥의 형용할 수 없는 살기를 느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호천강에게 어떤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호천강이 요구한 것을 상관금홍은 모두 승낙했다.
영웅첩을 발출해서 많은 사람들의 승낙을 받았다. 그리고 결의의 성전은 다음달 초하루로 정해졌다. 지금 그는 형무명과 함께 초류빈을 죽이러 가는 것이다. 호천강은 이 일에 매우 자신을 갖고 있던 까닭에 이 세상에 또 누가 초류빈을 구할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가졌다. 호천강이 깊게 한숨을 토하고 눈을 감자 눈앞에는 즉시 달콤한 미소를 잔뜩 머금고 웃는 아름다운 얼굴이 자기의 품속에 안겨 속삭이던 정경이 떠올랐다.
'너는 정말로 이젠 어린애가 아니구나. 네가 알고 있는 것은 어느 어른 못지 않게 많다. 도대체 넌 이런 일을 어디서 배웠니?'
여기까지 생각을 하던 호천강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런 일은 전혀 배울 필요가 없어요. 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되는 일이 아닌가요?'
호천강은 이렇게 대꾸하며 확실히 자기가 어른이 되었다고 느꼈다. 이런 우월한 감정은 대다수의 아직 성장하지 아니한 소년들을 충분히 도취시키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었다. 소년들은 항상 어른 흉내를 내고 싶어하지만 노인들은 항상 그들을 어린애로 보고 있다.
이것은 인류가 탄생되면서 전해 내려온 많은 비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만약 다른 사람이 여기까지 생각을 했다면 황홀하여 더 이상 계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호천강은 달랐다. 그는 더욱 깊이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는 내게 그렇게 대한 것일까?'
호천강은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다시 중얼거렸다.
'혹시 초류빈의 행방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호천강은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즉시 많은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초류빈의 행방을 알아내려 했을까.....'
호천강은 다시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혹시 초류빈을 구하려고 그러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호천강은 설소하가 초류빈을 철저하게 증오하고 있으며, 오늘의 이 죽음의 설계도 설소하가 상관금홍과 형무명으로 하여금 초류빈을 살해하도록 꾸민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총명하고 영악한 호천강도 그 이상은 짐작해 낼 수 없었다.
그러나 호천강은 지금의 상황이 이상하게 변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전날 설소하는 상관금홍의 손을 빌어 초류빈을 죽이려 했지만 지금은 백팔십 도로 상황이 달라졌다.
설소하는 상관금홍과 평등한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코 초류빈과 낭천을 죽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상관금홍은 그녀를 짓밟고 일어설 것이다.
설소하는 이 말을 상관금홍의 입에서 직접 들어 그의 속셈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나는 형무명도 아니고 낭천도 아니다. 오직 나 상관금홍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이용만 하고 있을 뿐이다. 이 이용 가치가 사라졌을 때 우리는 서로 가차없이 등을 돌릴 수가 있는 것이다!'
강호의 풍운이라는 것은 바로 여인의 마음과 같이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복잡미묘한 것이다.
마차는 먼지를 일으키며 계속 달리다가 성 안에 있는 가장 번화하고 큰 포목점 앞에 멈추었다. 그렇다면 초류빈이 바로 이곳에 갇혀 있다는 말인가.
호천강 부자는 과연 무서운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은 제일 번화한 곳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호천강은 일어서며 미소를 지었다.
"내리십시오."
"자네가 먼저 내리게."
형무명이 그 먼 길을 달려오면서 말을 한 것은 이 한마디가 처음이었다. 형무명은 누구든 자기의 뒤를 따르는 것을 싫어할 뿐 아니라 또 남의 앞을 가로질러 가는 성미도 아니었다.
일행은 주인과 점원 등의 응접을 받으며 점포를 지나갔다. 점포 뒤에는 주단을 쌓아 놓는 창고가 있었다. 초류빈이 바로 이 창고 안에 갇혀 있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더할 수 없이 좋은 곳이다. 그러나 호천강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 앞을 지나쳤다.
창고를 지나면 후원이다.
후문 밖에는 이들이 타고 온 마차와 똑같은 마차가 서 있었다. 호천강은 아무 말없이 형무명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마차 위로 올라갔다. 이제보니 초류빈은 이곳에 갇혀 있지 않았다.
호천강이 이렇게 한 것은 사람의 추격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 부자는 어느 누구보다도 이 일에 대해 심사숙고 한 것 같았다. 마차는 즉시 길 모퉁이를 돌아 교외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교외의 미곡창고 앞에 멈추었으나 이곳도 초류빈이 갇힌 곳은 아니었다.
이번에 그들이 바꾸어 탄 마차는 쌀을 성으로 운반할 때 쓰이는 달구지였다. 그러나 쌀가마니가 쌓여 있는 달구지 안에는 단 두 사람밖에는 숨을 수가 없었다.
호천강은 형무명을 보며 빙긋 웃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형무명은 역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달구지는 다시 성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이 계획은 세밀했을 뿐 아니라 그 행동도 매우 신속했다. 더욱이 노선의 전환은 사람으로 하여금 도저히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도적의 종적을 수사하는데 흑도에서 그 이름을 떨친 구성명포(九城名浦)의 사람들이 구비사자구(九鼻獅子狗)라고 칭하는 만무실(萬無失)이라도 이쯤 되면 도저히 쫓아올 수가 없을 것이다.
호천강은 형무명이 자기의 이런 계획에 대해 절대로 칭찬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다소나마 감복해 하는 기색이라도 나타내 주기를 은근히 원했다. 만족스러운 일을 한 사람이 남의 칭찬을 받지 못하면 그것은 마치 오랜만에 새 옷으로 갈아입고 사랑하는 연안을 찾아갔으나 그 연인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때 호천강은 뭔가 뜨거운 것이 마음속에서 치미는 것을 느꼈다. 호천강은 확실히 어린애임에 틀림없었다. 남자들이 보는 관점에서는 이런 미성장한 소년들의 심리와 여인의 심리는 때때로 일치한다고 느낀다.
형무명은 얼굴에 아무 표정도 떠올리지 않았다. 이때 달구지는 길고 한적한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 긴 도로에는 오직 일곱 가구밖에 살고 있지 않았다. 이 일곱 가구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관가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달구지가 계속 앞으로 나가는데 갑자기 한 집의 문이 열렸다.
그러자 달구지는 기다렸다는 듯 속력을 내어 그 집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 집은 강호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좌도어사(左都御史) 빈임천(賓林泉)의 집이다. 강호의 호걸들이라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이런 관가의 인물과 교분을 맺지 않는다. 그렇다면 초류빈이 바로 이곳에 감금되어 있다는 것일까. 이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대청 계단에 환한 미소를 띠며 응접을 해 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호유성이 아닌가. 형무명이 달구지에서 내리는 즉시 호유성은 앞으로 달려나가 입을 열었다.
"일찍부터 형대협의 명성은 들어왔습니다만 오늘 이렇게 만나보니 정말 영광스럽습니다. 이곳에 오려면 남의 이목을 피해야 하는 까닭에 고생을 끼쳐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나 형무명의 회색 눈동자는 자기의 손만 주시하고 있을 뿐 호유성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호유성은 아직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대청에 술상을 봐 놓았으니 어서 들어가시죠."
형무명은 굳은 듯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냉랭하게 물었다.
"초류빈은 바로 이곳에 있소?"
호유성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이곳은 본래 빈공의 거처인데 빈선생께선 관무에 시달려 몇 개월 휴가를 얻고 며칠 전에 갑자기 떠나셨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호유성의 표정엔 일종의 득의에 가득찬 미소가 피어올랐다.
"빈공 혼자서 사는 집인데, 그는 이미 휴가를 얻어 나갔고 또 관가는 저와 잘 통하는 사이라 겨우 이곳을 빌린 것입니다."
호유성이 이곳을 빌린 것은 그다지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이유는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남들은 도저히 생각하지 못할 일이기도 했다. 때문에 호유성이 이렇게 득의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형무명은 아직까지 자기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당신을 여기까지 추종해 올 사람이 없을 것 같소?"
호유성은 안색이 변했으나 이내 담담하게 웃었다.
"만약 정말 이곳까지 추종해 온 사람이 있다면 내 기꺼이 그에게 큰절을 올려 경의를 표할 것입니다."
형무명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좋소. 그렇다면 어서 절을 올릴 준비나 하시오."
"그러나 만약....."
그러나 호유성의 얼굴은 그 다음 말을 채 계속하지도 못하고 얼굴이 굳어져 버렸다. 호천강도 자기 아버지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돌리다가 그 창백하던 얼굴이 그만 시퍼렇게 질렸다.
담구석에는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이 사람이 언제 어떻게 그리고 어디로 들어왔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일신에 청색 옷을 입고 있었다.
옷은 본래 새것이었으나 지금은 땀과 먼지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뿐 아니라 팔꿈치와 무릎 등 옷이 형편없도록 찢어져 나갔다. 또한 그의 몸이 시궁창에서 나온 것처럼 매우 더러웠을 뿐 아니라 머리도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그러나 호천강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사람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한 가닥의 살기가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온몸은 마치 허리에 차고 있는 검과 같이 보였다.
검집도 없는 한 자루의 검!
낭천이었다.
낭천은 기어코 오고 만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낭천만이 이곳까지 추종해 올 수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제일 교묘하며 제일 도피를 잘하고 가장 몸을 잘 숨기는 동물이 바로 여우다. 때문에 귀가 밝고 엄격한 훈련을 받은 사냥개라 할지라도 이 여우를 잡아 낼 수가 있을는지 의문이다.
그런데 낭천은 열한 살 때 무기도 없는 맨손으로 여우를 잡은 일이 있었다. 이들을 따라오는 동안 그 여정이 너무 고난의 연속이라 깨끗한 그의 몸이 이처럼 더러워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낭천의 모습이었다.
더럽고 추하고 옷이 찢어지고 머리가 헝클어지고...야성미가 철철 넘치는 낭천의 참모습. 낭천에게는 일종의 잠재적인 조용한 인성과 또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특이한 야성이 있었다.
호유성은 즉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제 보니 낭천형이구려. 오랜만이오."
낭천은 무섭도록 싸늘한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호유성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꺼냈다.
"형제께선 정말 용케도 이곳까지 따라왔구려. 정말 대단하오."
그러나 낭천은 여전히 싸늘한 눈동자로 말없이 그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낭천의 눈동자는 번들거리고 있는 반면 매우 예리했다. 이 이틀 동안의 피나는 추종이 낭천을 다시 옛날 그 검과 같이 매섭고 날카로운 인간으로 회복시킨 것 같았다. 이것은 형무명의 둔탁한 회색 눈동자와 아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호유성은 빙긋 웃으며 말을 꺼냈다.
"형제의 추종이 비록 교묘하기는 했지만 이분 형대협께서 눈치채셨소."
순간 낭천의 눈동자가 형무명에게로 향했다. 형무명도 역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마치 한 자루의 검이 천 년이나 묵은 암석을 뚫는 것 같았다.
누구의 검날이 더 날카로울 것인가. 아니 어쩌면 그들이 지향하는 암석이 더 견고한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비록 얘기는 주고받지 않았지만 서로 마주치는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호유성은 형무명을 쳐다보다가 다지 낭천을 바라보았다.
"형대협이 비록 형제를 발견했지만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지 아시오?"
그러나 낭천의 눈동자는 마치 형무명의 눈동자에 흡수되어 들어간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호유성은 웃으며 다시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 이유는 형대협께서는 본래부터 형제가 오길 바랐기 때문일 것이오."
여기서 말을 끊고 그는 몸을 돌려 형무명을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형대협, 제 말이 맞았습니까?"
그러나 형무명의 두 눈 역시 낭천의 눈동자에 빨려들어간 듯 한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지난 후 호유성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형대협께서 형제가 이곳에 오길 원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일념에서였소. 그것은 바로 형제를 죽이기 위해서요."
이때 호천강이 숨을 크게 내쉬며 말을 받았다.
"형대협께서 죽이려고 마음먹은 사람은 여태까지 한 명도 살아난 적이 없소."
낭천의 눈동자가 그제야 형무명이 차고 있는 검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그러자 형무명의 눈동자도 동시에 낭천이 차고 있는 검으로 옮겨졌다. 이것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흡사한 두 자루의 검인지도 모른다. 이 두 자루의 검은 상고의 이름난 병기도 아니었고 또 이름난 대장장이가 만든 검도 아니었다.
두 자루의 검은 바늘도 자를 수 있을 만큼 예리했으나 너무 얇고 약해서 곧 부러질 것 같았다. 검은 비록 똑같았으나 두 사람이 검을 찬 모습은 달랐다. 낭천은 허리 가운데 검을 차고 있었고 검자루를 오른쪽으로 향하게 하고 있었다. 형무명의 검은 허리 오른쪽에 차여져 있었는데 손잡이는 왼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 두 자루의 검 사이에는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특수한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검에 마찰되자 서로 한 걸음씩 상대방을 향해 접근해 갔다. 그러나 눈길은 한시도 상대방의 검에서 떼지 않은 채였다. 두 사람의 거리가 점차 좁혀져 약 다섯 자 정도의 사이를 두었을 때 갑자기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었다. 이어 두 사람은 그곳에 뿌리를 내린 듯 꼼짝하지 않고 섰다.
형무명은 매우 짧은 황삼을 입고 있었다. 장삼의 끝은 그저 무릎을 약간 덮고 있었고 옷소매도 접혀져 있었다. 그 소매 속에서 나온 손가락은 매우 길고 가늘었으나 뼈마디가 툭툭 불거진 것이 매우 힘이 있어 보였다.
한데 낭천의 옷은 그보다 더욱 짧았다.
옷소매는 거의 완전히 찢겨져 나갔고 손가락도 매우 가늘고 길었으나 역시 산에서 생활해 온 만큼 거칠고 우악스러웠다.
그러나 두 사람의 손톱은 둘 다 매우 짧았다. 아마도 두 사람은 검을 뽑을 때 그 어떤 방해라도 원치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그 두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제일 닮은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두 사람은 기어코 서로 만났다.
두 사람이 이렇게 맞서 있을 때 외모상으로는 극히 비슷한 것 같아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본질상으로 완전히 그 기질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다. 형무명은 마치 가면을 쓴 듯 여태껏 그 얼굴에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낭천의 얼굴 역시 빙산처럼 싸늘했으나 그 텁수룩한 머리에 가려져 있는 두 눈빛만은 언제든지 화염에 불타오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하고자 하는 어떤 일에 대해 자기 영혼을 모두 불태워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 순간 형무명의 온몸은 완전히 한 줌의 재가 되고 있었다. 이처럼 그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고고의 성을 울렸던 순간부터 그는 이미 잿더미가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낭천은 모든 일을 인내로써 참고 기다릴 수 있었으나 어떤 사람이 몸을 놀리면 그땐 참지를 못했다. 하지만 형무명은 비록 한마디로써 그리고 눈치로 살인을 할 수 있었으나 꼭 필요할 때면 상대방의 그 어떤 몸놀림도 참아낼 수가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매우 특이할 뿐만 아니라 또 무서운 사나이들이었다. 조물주께선 어째서 이 두 사람을 만드셨는지 그리고 어째서 이들로 하여금 오늘과 같은 상종이 있게 하셨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어느덧 가을은 꽤 깊어가고 있었다. 초록빛으로 빛나던 나뭇잎도 물기를 잃고 시들어갔다.
불어오는 바람은 세지 않았으나 노랗게 물든 나뭇잎이 눈물처럼 이곳저곳으로 떨어졌다. 어쩌면 이것은 바람의 조화가 아니라 두 사람의 살기를 감당해 내지 못하고 죽음을 재촉한 것인지도 모른다. 가을, 떨어지는 나뭇잎. 먼 고향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일종의 말할 수 없는 처량한 느낌이 이 땅에 충만했다.
낭천과 형무명의 검은 여전히 허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호천강 부자는 이미 긴장상태로 돌입해 들어가 숨도 제대로 쉬지를 못했다.
가을과 바람과 떨어지는 나뭇잎...그리고 굳어 버린 두 사내.
돌연, 우수에 가득찬 공간을 가르고 싸늘한 한망이 번쩍였다. 십여 개의 한망이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사방으로 쫙 퍼져서 낭천을 향해 덮쳐들고 있었다. 호유성이 먼저 출수를 해낸 것이었다. 그때 또 한 줄기의 검빛이 일어났다.
창, 창.....
한 차례 요란한 소리가 일어난 후 허공을 덮고 있던 한망이 비오듯 전부 떨어졌다.
형무명의 검이 이미 허리에서 빠져나왔다. 그 검날은 바로 낭천의 귓전에 닿아 있었다. 낭천의 손 역시 검자루를 잡고 있었지만 아직 완전히 검을 빼지 않고 있었다.
호유성이 날린 암기를 바로 형무명이 떨어뜨린 것이었다. 순간, 호유성 부자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이때 형무명과 낭천은 다시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는데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얼마쯤 지나자 형무명은 검을 다시 천천히 허리에 찔러 넣었다.
그러자 낭천의 손도 내려갔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 지 모르겠으나 형무명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너는 나의 검이 암기를 치기 위한 것이지 너를 찌르지 않을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느냐?"
낭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형무명은 훅 한숨을 뿜어냈다.
"너는 담이 매우 크구나."
암기가 날아오고 형무명의 검이 찔러올 때 낭천은 검을 뽑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추호도 당황해 하지 않았다.
형무명은 낭천이 무엇이라 대꾸를 하기 전에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나 너의 반응은 너무 늦었다."
낭천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두 눈동자에 매우 침통하고 처량한 빛을 띠었다.
"그렇소."
낭천이 순순히 시인을 하자 형무명이 다시 이었다.
"난 충분히 너를 죽일 수 있었다."
이 말에 낭천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선뜻 동의했다.
"그렇소."
낭천의 대답이 여기까지 나왔을 때 호천강 부자는 서로 암중으로 눈짓을 교환하더니 속으로 길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때 형무명이 불쑥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난 너를 죽이지 않겠다."
순간, 호천강 부자의 안색이 동시에 크게 변했다.
낭천은 놀랐는지 형무명의 회색 눈동자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를 죽이지 않겠다고?"
형무명은 표정없는 얼굴로 간단하게 대꾸했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는 것은 네가 낭천이기 때문이다."
이때 형무명의 회색 눈동자에 일종의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의 빛이 떠올랐다. 형무명의 이런 눈빛은 지금 낭천의 눈초리보다 더욱 침통한 것이었다. 마치 먼 곳에 서 있는 사람처럼 형무명은 낭천을 멀건히 바라보았다.
이 순간 마치 하나의 천사와 마귀가 혼합한 것 같았다. 천사와 마귀의 싸움은 무서운 것이다. 누구도 양보할 수 없는 싸움, 누가 이길 것인가를 예측할 수 없다.
다시 얼마나 지났을까, 형무명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내가 만약 너라면 너는 오늘 나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낭천도 이해할 수 없으며 오직 말을 한 형무명 자신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검을 쓰는 사람 중 누구를 막론하고 거의 이 년 동안이나 낭천과 같이 침체된 생활을 해 온 사람이라면 반응이 늦어지기 마련이다.
더구나 낭천은 매일 밤마다 어떤 여인에 의해 마취를 당해 온 터다. 그러므로 검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낭천의 반응을 조절할 수가 있다. 형무명이 낭천을 죽이지 않는 것은 절대 어떤 동정심에서가 아니었다. 형무명은 낭천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도 낭천과 똑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형무명이 낭천을 죽이지 않는 것은 낭천도 살아 남아 자신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원해서인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에게 실연을 당한 사람이 자기를 버린 그 사람도 역시 실연을 당했다면 그 고통은 훨씬 덜어진다. 또 재물을 잃어버린 사람이 남이 자기보다 더 많은 재물을 잃어버렸다면 어느 정도 자신을 위로시킬 수도 있다.
그런데 이때 낭천은 아직도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형무명은 낮은 기침을 하며 입을 떼었다.
"그만 가도 좋다."
순간 낭천은 고개를 갑자기 홱 쳐들었다.
"나는 가지 않겠소!"
형무명은 처음으로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안 가겠다고? 그렇다면 나더러 널 죽이라는 말이냐?"
낭천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형무명은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초류빈 때문이냐?"
"그렇소. 그가 이곳에 있는 한 절대 당신의 손에 죽게 하지 않을 거요."
이때 호유성이 크게 소리쳤다.
"설소하는 어떻게 하고? 그녀가 당신 때문에 고통을 받아도 좋다는 말이오?"
순간 낭천의 마음은 마치 한 개의 비수를 맞은 듯 몹시 아팠다.
형무명은 몸을 돌려 두 부자를 향해 소리쳤다.
"난 살인을 좋아하는 사람이오. 물론 그대들도 알겠지?"
호유성은 입가의 근육을 씰룩이며 억지로 웃었다. 그 웃음은 매우 어색한 것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형무명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난 당신이 틀림없이 알고 있기를 바라오. 그렇지 않으면 난 당신을 죽일 것이니까."
형무명은 여기까지 말한 후 호유성을 더 이상 거들떠보지 않고 몸을 돌렸다.
"초류빈은 어디 있소? 나를 데려다 주시오."
"하지만 그는....."
형무명이 다시 무섭게 소리쳤다.
"난 언제든지 그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오."
음식은 물론이고 물도 없었다. 이곳에 감금된 지 거의 십여 일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초류빈은 혈도가 제압되었기 때문에 굶주림으로 전신의 힘이 모두 없어져 버렸다. 형무명이 그의 앞에 서서 싸늘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초류빈은 구석진 곳에 축 늘어져 있었다. 지하실 안은 다섯 손가락을 한참만에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컴컴했다. 초류빈의 표정은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희미하게나마 더러운 옷 그리고 수척하며 피곤에 찌들은 신체와 절망적인 눈동자만은 분별할 수가 있었다.
형무명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이 바로 초류빈이오?"
호유성은 별 감정없이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형무명은 약간 실망한 듯 다시 물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초탐화....."
42 소이비도 제3권 탕부
탕 부
호천강의 입에서 신통치 않은 말이 흘러나온다면 상관금홍은 즉시 살수를 전개할 기세였다. 그가 일단 살수를 전개한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드디어 호천강의 입에서 생사를 판가름하는 한 마디가 내뱉어졌다.
"이번 협상은 방주님의 입장으로선 오직 이익이 있을 뿐 해가 없는 것입니다."
협상이라 함은 상례로 보아 상대방에게 모종의 조건을 제시해 그것과 비등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이익을 원한다는 것은 즉 상대방으로 하여금 모종의 희생을 무릅쓰게 하는 것과도 상통된다.
그런데 호천강은 일반 협상의 법규에서 어긋난 말을 했으니 상관금홍은 약간 주춤했다.
"그래?"
호천강은 상대방의 심리를 사전에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방주님의 위명은 천하를 진동시키고 재력 또한 감히 어깨를 겨룰 자가 없으니 방주님이 원하시는 거라면 무엇이든 수중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상관금홍은 힘주어 말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과 협상할 필요를 못 느낀다."
협상을 하러 온 사람들을 지금까지 갈기갈기 찢어 죽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호천강의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방주님께서 수중에 넣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상관금홍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가공스러운 이 어린애를 주시할 뿐이었다. 물론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굴리고 있는지는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었다.
호천강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 물건 자체는 어쩌면 별로 값어치가 없을지 모르겠지만 방주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상황이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상관금홍은 다그치듯 되물었다.
"어째서 그렇다는 것이냐?"
호천강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대답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것은 자기의 수중에 넣을 수 없는 물건이라 생각합니다."
그가 시종 핵심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상관금홍은 사뭇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네가 말하는 그게 대관절 무엇이냐?"
그러자 호천강의 작은 입에선 뜻하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초류빈의 생명입니다."
적어도 상관금홍에겐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의 냉막하던 눈동자에 금시 뜨거운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뭐라고 했지?"
"초류빈의 목숨은 우리 수중에 쥐어져 있습니다. 방주님께서 원하신다면 후배는 언제라도 그의 목을 방주님께 바칠 수 있습니다."
상관금홍은 다시 침묵을 지켰다. 한참 후에야 그의 타오르던 눈빛이 냉막하게 변해 담담하게 말했다.
"초류빈이 뭐가 대수롭다는 거냐? 나는 아예 그를 안중에 두고 있지 않다."
"정녕 그러시다면 후배는 이만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하고 한마디를 남기더니 곧 몸을 돌려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걸음은 느렸다. 그리고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상관금홍도 다시는 그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호천강은 천천히 문 입구까지 걸어가 손잡이를 잡았다.
바로 그때 등뒤에서 상관금홍의 음성이 들려왔다.
"잠깐만!"
호천강의 눈동자엔 금시 한 가닥의 득의에 찬 웃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가 몸을 돌렸을 때 그 웃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태도가 다시 공손하게 변해 있었다.
"방주님, 아직도 무슨 분부가 남아 있습니까?"
상관금홍은 그를 쳐다보지 않고 책상 위에 있는 등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네가 초류빈의 목숨으로써 나한테 원하는 게 무엇이냐?"
호천강은 상대방의 윤곽이 뚜렷한 옆얼굴을 주시하며 말했다.
"저의 부친께서는 오래 전부터 방주님의 명성을 들어왔지만 직접 대면할 인연이 없었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상관금홍의 음성은 냉랭했다.
"그것은 잔소리고, 단지 네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묻고 있다."
호천강은 입술에 침을 발랐다.
"저의 부친께선 단지 천하 영웅들이 모인 자리에서 방주님과 결의형제를 맺고 싶을 뿐입니다."
상관금홍은 그 말들 듣자 대뜸 눈동자에서 성난 불길이 폭사되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그 불길은 가라앉고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호유성은 아주 똑똑한 사람이군. 단지 애석하게도 그의 이번 일은 잘못 생각했다."
호천강이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상관금홍은 살기가 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너는 이번 협상을 성사시킬 자신이 있느냐?"
호천강의 말투는 강철처럼 단호했다.
"만약 자신이 없었다면 후배가 구태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상관금홍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고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호유성에게 혈육이라곤 오직 너뿐이지?"
호천강은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너를 보낸 자체가 결정적인 잘못이다."
호천강의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왔다면 도저히 방주님을 만나뵈올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 제가 온 것입니다."
상관금홍의 입가에 냉혹한 웃음이 스쳐갔다.
"너희들은 원래 이번 협상의 칼자루를 쥐고 있었지만 네가 오는 바람에 상황이 달라졌다."
호천강은 이내 그의 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방주님은 저를 인질로 삼아 저의 부친께 초류빈의 목숨을 요구할 생각입니까?"
상관금홍은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그렇다."
그러자 호천강은 홀연 빙긋이 웃는 게 아닌가.
"방주님께선 사람을 보는 눈이 명철하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저의 부친에 대해서는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상관금홍은 즉시 냉소를 쳤다.
"그렇다면 그는 설사 너의 목숨을 잃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초류빈을 내주지 않을 생각이란 말이냐?"
호천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상관금홍은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그럼 너의 부친은 사람이 아니란 말이냐?"
호천강의 대답은 걸작이었다.
"물론 사람입니다. 하지만 사람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상관금홍은 여전히 촛불을 응시한 채 물었다.
"그는 어떠한 종류의 사람이냐?"
호천강은 지체하지 않고 그의 질문에 답했다.
"저의 부친은 방주님과 똑같은 종류의 사람으로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 방법도 가리지 않을 것이며 여하한 희생도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상관금홍은 어금니를 깨물고 있는지 양쪽 턱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긴 침묵을 깨며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 이십 년 동안 감히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호천강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도리어 만족스러워하는 눈빛이었다.
"방주님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기 때문에 후배가 비로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한 말을 해야지만 방주님 같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는 이유도 있겠죠."
상관금홍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무섭게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만약 승낙하지 않으면 너희들은 초류빈을 풀어줄 작정이냐?"
호천강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렇습니다."
상관금홍의 코웃음이 그의 말끝을 이었다.
"흥! 그를 풀어주면 그는 필경 복수를 하기 위해 너희들을 죽일 텐데 그게 두렵지도 않으냐?"
"그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기 때문에 절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습니다."
하고 말하더니 빙긋이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가 만약 복수에 대해 철저한 사람이었다면 오늘날 같은 이런 비참한 신세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상관금홍은 눈동자를 굴리더니 갑자기 음성이 싸늘하게 변했다.
"너희들이 그를 풀어준다면 내가 친히 그를 죽이지 못할 것 같으냐?"
호천강의 음성은 신색만큼이나 담담했다.
"비도탈명은 아직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습니다."
상관금홍의 이마에 핏발이 섰다.
"그럼 너는 내가 그의 비도를 피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단 말이냐?"
호천강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약간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최소한 방주님께서는 확고한 자신이 없을 것입니다. 제 말이 틀립니까?"
"흥!"
상관금홍은 냉소로 답변했다.
그러자 호천강이 다시 말했다.
"방주님의 현재 신분과 지위로써 구태여 그런 모험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상관금홍의 입은 굳게 다물어졌다.
호천강은 상대방의 마음이 차츰 동요되어 간다는 사실을 잽싸게 간파했다.
"더군다나 저의 부친께선 비록 무공이 대단하지는 못하지만 명성과 지위, 그리고 심오한 지혜는 어느 누구 못지 않습니다. 방주님께서 그와 결의형제를 맺으신다면 유익무해(有益無害)할 따름입니다."
상관금홍은 다시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홀연 입을 열어 물었다.
"초류빈도 그의 결의형제가 아니더냐?"
호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결의형제를 맺었습니다."
상관금홍은 대뜸 냉소를 터뜨렸다.
"그가 초류빈을 배신하듯이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을 할 수 있겠느냐?"
이 질문에 호천강의 말문이 막힐 것이라 생각했던 상관금홍의 생각은 오산이었다.
호천강은 천연스럽게 웃었다.
"방주님은 초류빈이 아니기 때문에 저의 부친께서는 방주님을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아주 간단한 대답이면서도 송곳 끝같이 예리한 빛이 담겨져 있었다.
상관금홍은 그 말을 듣자 돌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옳은 말이다. 호유성이 설사 나를 배신할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아마 능력이 없을 것이다."
호천강은 즉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방주님께선 수락하시겠습니까?"
상관금홍은 웃음을 거두며 그의 말을 받았다.
"초류빈이 정말 너희들에게 잡혀 있는지 내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호천강은 일단 일이 성사되었다고 생각하자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방주님께서 일단 청첩장을 발부해 천하 영웅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해 저의 부친과 정식으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관금홍은 냉랭하게 가로챘다.
"내가 청첩장을 발부한다 해도 그들이 감히 올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호천강은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오든 말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모두들 그 일을 알고 있으면 됩니다."
상관금홍으로선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적수였다.
"생각이 치밀하군!"
"방주님께서도 아마 이번 일에 대해 좀더 신중할 필요가 있을 것 같으니 후배는 바로 성 안에 있는 여운객잔에서 방주님의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
하고 말하고는 침을 꿀꺽 삼키며 다음 말을 천천히 이어갔다.
"단지 방주님께서 청첩장을 발부해 다른 사람들이 다 받아 보았다는 것이 확인만 되면 후배는 언제든지 초류빈을 이리로 데려오겠습니다."
상관금홍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날렸다.
"이리로 데려온다고?...흥! 너희 부자에게 그럴 만한 재간이 있단 말이냐?"
호천강은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그 점에 대해 후배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소림의 심수 대사께서도 해내지 못한 일을 후배가 어떻게 해낼 수 있겠습니까? 단지....."
"단지 뭐냐?"
상관금홍의 가슴을 찌르는 창끝 같은 질문에 호천강은 한쪽에 서 있는 형무명에게 힐끗 눈길을 던졌다.
"형선생께서 호송을 맡아 주신다면 절대 실수가 없을 겁니다."
상관금홍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석고상처럼 잠자코 있던 형무명이 돌연 입을 열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호천강은 황급히 그에게 정중히 읍을 하며 얼굴에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감사합니다."
상관금홍은 다시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했다.
"너의 무공을 폐지시킨 사람이 바로 초류빈이 아니냐?"
호천강은 얼굴에 핀 웃음을 금시 굳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상관금홍은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며 한마디 한마디 또렷하게 물었다.
"너는 그를 원망하고 있느냐?"
호천강은 주먹을 불끈 쥐고 이빨 틈새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상관금홍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 너는 그를 원망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도리어 감사를 느껴야 한다."
호천강은 멍해지는 표정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상관금홍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만약 그가 너의 무공을 폐지시키지 않았다면 너는 오늘 영락없이 이곳에서 죽었을 것이다."
호천강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상관금홍은 다시 말했다.
"너는 어린 나이에 벌써 이다지도 음독 교활하니 십여 년 만 지나면 충분히 나와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너의 무공이 폐지되지 않았다면 내가 너를 살려 둘 것 같으냐?"
호천강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시종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암흑, 완연한 어둠이 대지를 가득 덮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사람의 신음과 막 넘어갈 것 같은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두 가지 소리가 멎고 난 후에는 밤은 더욱 깊은 정적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한 여인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저도 당신에게 꼭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었어요."
이 여인의 음성은 달콤하고도 매우 부드러웠다. 유혹이 가득 깃든 음성, 세상의 남자가 만약 이 음성의 유혹을 이기려면 귀머거리가 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인의 음성의 여운이 사라지자 한 남자의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무엇을 물어보려는 것이냐?"
그런데 이 남자의 음성은 몹시 특이했다. 가까운 곳에서 그의 말을 들으면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고 먼 곳에서 들으면 그와 정반대로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여인은 약간 의혹을 담은 음성으로 다시 물어왔다.
"당신은 사람이에요? 아니면 강철로 만들었어요?"
남자는 별 억양없이 되물었다.
"왜, 모르겠느냐?"
그러자 여인의 음성이 더욱 달콤해지고 마치 녹아 들어가는 것 같았다.
"만약 진짜 사람이라면 어째서 조금도 지치지 않는 거죠?"
"감당해 내지 못하겠느냐?"
여인은 다시 간드러지게 웃어젖혔다.
"호호호...그럼 당신은 제가 지칠 줄 아세요? 어디 한번 해 봐요."
"지금은 안 된다."
"어째서요?"
"내 지금 너에게 시킬 일이 있기 때문이다."
"뭐예요? 당신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다 듣겠어요."
"좋다! 지금 곧 가서 낭천을 죽여라."
여인은 깜짝 놀라며 일시 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한숨을 뿜으며 입을 열었다.
"전날에도 말을 했지만 아직은 그를 죽일 때가 되지 않았어요."
"아니다. 이미 죽일 때가 왔다."
"무엇 때문이죠? 초류빈은 이미 죽었잖아요?"
"아직 죽지 않았지만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
여인은 약간 동요된 음성으로 다그쳐 물었다.
"그...그는 지금 어디 있어요?"
"이미 나의 손아귀에 있다."
"요 며칠 동안 나는 당신과 같이 있었는데 당신이 무슨 수로 그를 잡아왔다는 말이에요? 당신은 분신술이라도 할 줄 안다는 말인가요?"
"내가 갖고 싶어하는 물건이라면 내가 직접 손을 쓸 필요도 없이 모두 보내오는 사람이 있다."
"누가 보내왔죠? 그 누가 초류빈을 잡아올 만큼 실력이 있어요?"
"호유성."
남자의 이 간결한 대답에 여인은 움찔하더니 이내 웃었다.
"맞았어요. 오직 초류빈의 친구만이 그를 죽일 수가 있어요. 만약 친구가 아닌 다른 무기로 그를 쓰러뜨리려면 그 어떤 것으로라도 어림없어요. 오직 정감만이 그를 사로잡을 수 있어요."
남자는 코웃음을 치더니 냉정하게 말했다.
"제법 그를 알고 있군."
여인은 방그레 웃었다.
"저는 적을 친구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요. 마치...내가 당신을 잘 모르듯이 말예요."
그러더니 그녀는 무엇이 생각났는지 즉시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호유성의 사람됨으로 봐서 그는 결코 아무런 목적없이 초류빈을 당신에게 보내진 않았을 거예요."
남자는 그 말에 움찔했다.
"아니, 뭐라고?"
"그는 자기가 초류빈을 죽이기 싫어 남의 칼을 빌리는 거예요."
"너는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이 그런 목적 때문이라고 생각하느 냐?"
"그럼 무엇 때문이겠어요?"
"그는 나더러 형제가 되어 달라고 했다."
"모두 자기들 편리한 대로 하는군요. 그런데 당신은 승낙을 했단 말예요?"
"그렇다."
"그가 당신을 이용하려는 것인 줄 모르고 있다는 말예요?"
"흥, 그러나 그는 너무 천진스럽게 생각하고 있어."
"천진스럽다고요?"
"그는 자기가 나와 의형제만 되면 내가 건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의형제가 아니고 또 친형제라면 어때? 죽이는 것에는....."
"호호호...그래요. 그는 초류빈을 속였으므로 당신도 그를 속일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러나 호유성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아들놈이 정말 무서운 놈이다."
"그 애를 만나봤나요?"
"음, 이번엔 호유성이 오지 않고 그 어린 놈이 왔더군."
"맞았어요. 그애야말로 정말 보통 아이가 아니에요."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며 무엇인가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
"저를 더 남겨 놓고 싶지 않다는 말이에요? 다른 남자들은 밤이건 낮이건 나로부터 떠나기 싫어하는데 당신만은 늘상 한 번 일을 끝내자마자 나를 쫓아내는군요."
"그 이유를 가르쳐 줄까? 나는 네가 상대해 온 다른 남자가 아니고 또 너의 친구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린 서로를 이용하고 있는 것뿐이다. 우린 이렇게 서로를 잘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거짓으로 사랑을 할 수 있겠느냐?"
여인은 아무 말없이 침상에서 일어났다. 방안은 매우 컴컴했으나 집 밖에는 희미한 불빛이 있었다. 희미한 별빛이 대지를 하얗게 비추고 있는 아래 한 사람이 어둠에 싸인 집을 지키고 있었다.
한 쌍의 회색 눈동자로 초점없이 먼 곳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몸이 마치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다. 그러나 그 굳은 동체와는 달리 그 회색 눈동자에는 형용할 수 없으리만큼 고통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이곳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특히 방안에서 새어나오는 각양각색의 소리들은 더욱 참아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잔혹하게도 어쩔 수 없이 그는 참아야 했다.
그의 일생은 오직 그 어떤 한 사람에게 충성으로써 바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상관금홍.
그의 생명, 아니 영혼까지도 완전히 상관금홍의 것이었다.
삐걱 하는 미세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어 진한 향기가 봄날의 꽃향기처럼 풍겨오며 하나의 인영이 살그머니 그의 등뒤에 와서 섰다.
별빛이 그 얼굴을 가만히 비추었다. 그 아래 나타난 얼굴, 청순하고 아름답고 그렇게 순진스러울 수가 없었다. 마치 선녀가 살포시 내려와 선 듯 방금 그녀가 무슨 일을 치르고 나왔는지 세상 모든 사람들은 미처 알아낼 수가 없으리라. 선녀의 미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악귀의 영혼을 소유한 여인, 설소하 외에 누가 있겠는가.
여인의 체취가 질식할 듯 밀려왔으나 형무명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러자 설소하는 즉시 몸을 날려 그의 앞으로 와 얼굴을 주시했다. 지금 그녀의 두 눈은 별빛보다 부드러웠다.
그러나 형무명은 여전히 먼 곳을 주시하며 마치 눈앞에 그녀가 존재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하얀 포물선이 그어지며 설소하의 손이 형무명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이어 그녀의 손은 다시 위로 올라가 가볍게 그의 귀를 어루만졌다. 설소하는 이곳이 남자의 성욕을 자극하는 민감한 부분임을 잘 알고 있는 여자였다.
형무명은 마치 전신이 마비된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참 귀를 매만지고 있던 설소하는 방그레 옥수수처럼 가지런한 흰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밖에서 우리를 지켜 주어 정말 고마워요. 나는 그런 당신이 밖에 있다는 것만 알아도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을 느껴 무슨 일을 하든 그렇게 유쾌할 수가 없어요."
설소하는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그의 귀에다 입술을 바짝 갖다대고 가만히 속삭였다.
"내 또 당신에게 해 줄 비밀 얘기가 있어요. 그는 비록 나이가 많지만 아직도 건강한 것으로 아마 여자 경험이 남보다 풍부한 것 갈더군요."
설소하는 말을 끝내고 간드러진 웃음의 여운을 남기며 사라졌다. 형무명은 아직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었으나 온몸의 근육이 아까와는 달리 중풍을 맞은 듯 떨리고 있었다.
설소하. 그 독보적인 미소와 유혹을 지닌 여자는 모든 사내들의 마음을 흐트러 놓고 있는 것이다.
여운잔(如雲棧).
여운잔은 이 성에서 가장 크고 가장 고급스럽고 화려한 객잔이었다. 때문에 이 객잔의 술이나 음식 등 모든 것이 다 비싸다. 이 객잔에서는 그저 돈만 풍부하게 갖고 있으면 객잔문을 나설 필요도 없이 모든 재미를 다 볼 수 있었다.
여기에서는 그저 돈만 내놓고 입만 연다면 성 안에서 제일 훌륭하고 비싼 요리 그리고 유명한 기생, 무릇 제일 아름다운 여인까지도 마음대로 희롱할 수 있었다.
이곳은 대낮에도 모든 문이 닫혀 있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괴상한 곳이었다. 그러나 밤만 되면 모든 문이 다 열리도록 되어 있었다.
문이 열리면서 제일 먼저 들리는 것은 여인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였고 그 다음에는 술잔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소녀들의 웃음소리와 노랫소리가 한 데 섞여서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가 점차 약해지면 이 세상에 있는 불규칙한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많은 방들 중에서 단 한 방에서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단지 가끔씩 짤막한 여인의 신음소리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방의 문도 언제나 굳게 닫혀져 있었다. 그러다가 매일 황혼 무렵이 되면 한 명의 소녀가 들어가고는 했다. 들어가는 소녀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어여쁘고 아름다웠으며 또 어렸다. 소녀들은 들어갈 때 예쁘게 화장을 했고 또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고 얼굴에는 그윽한 미소를 띠었다.
아무리 잘 훈련된 직업 여성이라고는 하지만 이 웃음이 그녀들의 얼굴에 나타날 때는 비단 싫어하는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이 되어 그 방을 나설 때는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곱게 빗은 머리가 보기 싫게 헝클어지고 군데군데 뽑힌 자국들도 있었다.
그리고 유혹과 기대로 빛나던 눈동자는 광채가 사라지고 혼탁한 물처럼 충혈되었으며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깊이 패어 들어갔다. 그뿐 아니라 생기와 웃음으로 충만된 얼굴은 하얗게 변하고 눈물 흔적까지도 있었다. 그것은 하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날이면 날마다 그랬고 들어가는 소녀마다 매번 그런 몰골이었다.
사람들은 처음엔 주의하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특히 기방을 찾는 사람들은 이런 일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입을 모아 이 방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한마디씩 했다.
"그 방엔 대체 어떤 사람이 들어 있기에 이처럼 무서운 것일까?
"그 방 손님은 필경 정력이 왕성하고 건강한 대한일 것이다."
사람들은 말로만 궁금증을 풀 수 없었는지 모두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알아본 결과 사람들은 더욱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을까? 이 방에 있는 손님은 머리에 채 피도 마르지 않은 어린애였어....."
이 말이 이 사람 저 사람의 귀로 퍼지자 사람들은 모두 호기심에 불타 그 방에 들어갔다 온 소녀들을 불러 물어 보았다. 그러나 이 일을 물었을 때 소녀들은 새파랗게 질리며 그야말로 몸서리를 쳤다. 소녀들은 눈물을 쏟으며 아무리 캐물어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캐물었다.
결국 그녀들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는 모두 공통된
"아...아, 그는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이 아니에요....."
이 한 마디뿐이었다. 또다시 이 땅에 황혼이 깔리기 시작했다. 여운잔 객잔의 그 신비의 방은 여전히 문이 꼭 닫혀 있었다. 그러나 건너편 창문이 반쯤 열려져 방안으로 시원한 공기를 실어다 주었다.
창문 앞에 얼굴이 하얗고 영준한 한 소년이 앉아 있었다. 소년은 창 밖에 서 있는 한 그루 오동나무를 바라보며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소년의 눈동자는 비록 희미했으나 사람의 소름을 끼치게 하는 독기가 번쩍이고 있었다.
호천강, 그는 상 위에 가득 차려져 있는 술과 안주에 손도 대지 않았다. 호천강은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어떤 커다란 재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는 먹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호천강은 어리지만 너무 많이 먹으면 두뇌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붉은 햇살이 비쳐 들어오는 방안에서 호천강은 일말의 흥미를 느끼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 드디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호천강은 거만하게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문이 열렸으니 어서 들어오너라."
그러자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발걸음소리는 매우 가볍고 또 느렸다. 오늘은 작은 여자가 온 것임에 틀림없었다. 더욱이 호천강이 바라는 대로 약간 겁을 먹은 채 말이다. 이것은 호천강이 아주 좋아하는 그런 소녀였다.
이유는 호천강은 매우 약골인 까닭에 강자가 되려면 오직 소녀들만이 그를 강자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었다. 발자국소리는 상 옆에서 멈추었다. 호천강은 그제야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
"널 데리고 온 사람은 이미 돈에 대해 얘기를 했겠지?"
그 소녀는 다소곳이 대꾸했다.
"했어요."
호천강은 득의하여 다시 말했다.
"이 대가는 평소 네가 받는 것보다 두 배나 많지?"
"그래요."
소녀가 대꾸하자 호천강은 냉정하게 말했다.
"알았으면 내 말에 절대 복종을 해야 한다."
"알겠어요."
호천강은 다소 싸늘한 음성으로 명령했다.
"좋다. 그렇다면 옷을 벗어라. 전부 남김없이 말이다."
소녀는 그 말에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더니 돌연 물었다.
"제가 옷을 벗을 때 보지 않을 건가요?"
그 목소리는 매우 아름답고 또 달콤했다. 남자의 온 넋을 빼앗을 만큼 말이다. 호천강은 소녀의 대담함에 일시 말을 잊고 멈칫했다.
이때 소녀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웃었다.
"여자애들이 옷을 벗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인데 어째서 포기를 하는 것이지?"
호천강은 이 순간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순간 호천강은 넋이 달아날 듯 깜짝 놀랐다.
41 소이비도 제3권 거인과 비자
거인과 비자
문은 작지만 담장은 높았다. 정원은 고요에 잠긴 채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구불구불한 긴 복도를 지나 한참 걷자 비로소 대청이 나왔다.
이때 병풍 뒤에서 한 사람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여러분들은 이미 내 형제를 모셔왔소?"
그 낭랑한 음성을 듣자 초류빈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번 계획의 주모자는 뜻밖에도 호유성이었던 것이다.
장님은 바로 병풍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분부대로 이미 초탐화를 모셔왔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병풍 뒤에서 한 사람이 걸어왔다. 그는 비단옷을 입고 만면에 웃음을 띤 호유성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그는 걸어나오자마자 초류빈의 손을 덥석 잡고 웃으며 말했다.
"그간 이 년 동안 정말 자네를 보고 싶었네. 그동안 별고 없었나?"
초류빈도 그에게 웃음을 보였다.
"형님의 분부만 있으면 저는 한시라도 빨리 이리로 달려올 텐데, 구태여 이렇게 많은 친구들에게 수고를 끼치지 않아도 되었을 겁니다."
거렁뱅이는 손뼉을 치며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내 얼굴이 절로 붉어지는군. 저런 말을 듣고도 안색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 감탄을 금치 못하겠군."
호유성은 별안간 귀머거리가 된 듯 거렁뱅이의 야멸찬 말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초류빈의 손을 잡은 채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자네가 꼭 나를 찾아오리라는 것을 알고 미리 술을 준비해 두었으니 오래간 만에 실컷 취해 보도록 하세."
그는 초류빈을 부축하며 주위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러분들, 어서 자리에 앉으시오."
하지만 장님의 발은 땅에 뿌리가 박힌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가 움직이지 않자 그의 형제들도 역시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호유성은 약간 멋쩍은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여러분들, 내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자리에 앉아 주시오."
그러자 장님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우리들이 이번 일을 수락한 것은 철전갑을 잡기 위해서였소. 이제 우리들의 임무는 끝났으니 이만 돌아가야겠소. 철전갑한테 소식이 오면 즉시 우리들에게 알려 주시오."
말을 끝낸 그는 죽장으로 땅을 한 번 찍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대청엔 과연 푸짐한 주안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장님 등은 떠나갔지만 거렁뱅이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는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앞을 다투어 상좌(上座)에 앉더니 중얼거리듯 혼자말로 말했다.
"솔직히 말해 나도 떠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주안상을 보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군."
이어 그는 초류빈에게 술잔을 들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당신도 한 잔 하시구려. 물론 술맛이 없겠지만....."
호유성은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로 초류빈을 향해 말했다.
"현제, 자네는 아마 이 호대협을 모를 걸세."
초류빈은 그 말을 듣자 눈빛이 빛났다.
"호대협이라면 이름이 혹시 불귀가 아니오?"
거렁뱅이는 술잔을 단숨에 비우며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그렇소. 내가 바로 호불귀요. 다시 말해 호불귀가 바로 나란 말이오. 당신은 비록 나를 호대협이라 칭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나를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오?"
초류빈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하하하...당신은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오. 보아하니 당신도 역시 미친 사람 같소. 당신이 만약 미치지 않았다면 호유성 같은 사람을 친구로 사귀었겠소?"
초류빈은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호불귀는 자기 술잔에 술을 따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도 그의 친구라고는 생각하지 마시오. 내가 그를 도와 준 것은 그에게 온정을 입은 적이 있기 때문이오. 이번 일을 끝냈으니 나는 그와 이제 아무런 관계가 없소."
그는 술잔을 비우더니 갑자기 탁상을 힘껏 내리쳤다.
"단지 이번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비겁한 수단을 전개한 것에 대해선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소. 나는 비겁하고 옹졸하며 아주 쓸모없는 인간이오!"
그는 말을 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뺨을 여러 차례 후려치더니 다시 책상에 코를 박고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호유성은 그의 괴팍한 행동에 대해 이미 만성이 된 듯 안색이 동요됨이 없이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도리어 초류빈이 멋쩍은 생각이 들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되었든 간에 호형이 맨 나중에 출수한 일격은 설사 내가 사전에 경계를 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역시 피하지 못했을 것이오."
호불귀는 다시 탁상을 내리치며 성난 음성으로 외쳤다.
"그건 당치도 않은 소리요! 절대 그럴 리가 없소. 내가 만약 간계를 쓰지 않았다면 아예 당신을 건드리지도 못했을 것이오. 내가 당신을 해쳤는 데도 당신은 도리어 나를 위로해 주니 그게 대관절 무슨 뜻이오?"
초류빈은 침묵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이 호불귀라는 사람의 마음을 정상적인 생각으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호불귀는 중얼거리듯 말을 계속했다.
"나는 본래 정신이 이상해 회로가 일정치 않고, 흑백을 뚜렷이 분간할 줄 모르며 행동과 언어에 두서가 없으니 표본적인 나쁜 놈이오."
여기까지 말한 그는 갑자기 눈을 부라리면서 호유성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너는 나보다 더 나쁜 놈이다. 그리고 너의 아들은 너보다도 더욱더 고약한 녀석이야. 그는 엄연히 두 다리가 있으면서도 개처럼 땅에서 기고 있으니 상다리 밑에 떨어진 뼈다귀라도 갉아먹을 속셈인가 보지?"
좀처럼 붉어질 줄 모르는 호유성의 안색도 이때는 홍당무로 변했다. 그가 즉시 고개를 숙여 보니 과연 호천강이 어느 새 탁상 밑으로 기어 들어와 손에 칼을 쥔 채 초류빈을 겨냥하고 있지 않은가.
호유성은 대뜸 그를 끌어 일으켜 험상궂은 얼굴로 호통을 쳤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냐?"
호천강의 신색은 뜻밖에도 태연자약했다.
"대장부는 은원(恩怨)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아버님께서 늘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게 어쨌다는 것이냐?"
"그가 저의 무공을 폐지시켜 평생 동안 그늘에서 살게 만들었으니 제가 그의 두 다리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어요?"
호유성의 안색은 급기야 붉으락푸르락 연신 변화가 일어났다.
"그래서 너는 복수를 할 생각이란 말이냐?"
호천강의 눈동자는 원한의 불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넌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제가 알고 있는 그는 단지 저의 불공대천의 원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호유성의 손이 그의 뺨을 후려쳤다.
"그는 너의 원수이기 전에 나와는 피를 나눈 결의형제라는 것을 명심해라. 그가 너에게 어떤 교훈을 내리든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그에게 복수심을 품고 함부로 무례하게 구느냐?"
뺨을 얻어맞은 호천강은 잠시 멍해져 있다가 눈동자를 사르르 굴리더니 홀연 초류빈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이제는 제 잘못을 알았습니다. 저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 너그러운 아량으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초류빈이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한데 호불귀가 펄쩍 뛰며 큰소리로 외쳤다.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군. 구역질이 나서...구역질이....."
그는 큰소리로 외쳐 대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호유성이 억지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한 사람의 이름은 혹시 잘못 지어질 경우도 있지만 별호만은 절대 잘못 붙여지지 않는 걸세. 어떤 사람은 미련하기가 곰과 같지만 이름만큼은 총명이라고 지을 수가 있겠지만 한 사람의 별호가 미친 사람이라면 그는 영락없는 미치광이라네."
초류빈은 원래 입을 열고 싶지 않았지만 더 이상 침묵을 지킬 수 없어 한 마디 던졌다.
"하지만 그 사람이 만약 너무 총명하고 아는 일이 많으면 역시 천천히 미치광이로 변할 것입니다."
호유성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초류빈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미치광이는 왕왕 정상적인 사람보다 더 많은 즐거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미치광이가 되는 사람도 적지 않죠."
호유성은 빙긋 웃었다.
"다행하게도 나는 똑똑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원히 미치광이가 될 수 없군."
이때 호천강은 슬그머니 밖으로 물러났다.
초류빈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숙여 술잔에 담겨 있는 술을 천천히 들이켰다. 그는 혈도가 찍혀 있기 때문에 사지를 움직일 수 없었다. 호유성은 절반 가량 남은 그의 술잔에 다시 술을 따라주며 조용히 그를 지켜볼 뿐이었다.
초류빈이 느릿느릿 술을 마실 때는 필경 중요한 말이 뒤이어 나오리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다시 한동안의 침묵이 흐르자 초류빈은 고개를 들었다.
"형님....."
호유성은 그의 얼굴을 똑바로 주시했다. 태연한 신색을 유지하려는 그의 노력이 얼굴에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과연 그의 예측대로 초류빈은 다음 말을 이어갔다.
"형님, 나는 줄곧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말이 있는데 지금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서 말해 보게."
초류빈은 상대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다년간 사귀어 온 친구가 아니겠습니까?"
호유성은 자기 앞에 있는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친구가 아니라 형제였지."
"제가 어떠한 사람인지는 형님께서 아마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네."
호유성은 천천히 대답하며 눈가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그도 역시 사람이었다. 어떠한 사람일지라도 다소 인성(人性)을 지니고 있기 마련인가 보다.
초류빈은 그의 눈가에서 이는 경련이 차츰 손으로 옮겨져 가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다.
"그럼, 형님께서 저에게 무엇을 원하든 직접 대놓고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해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호유성은 자기의 얼굴을 가리려는 듯 천천히 술잔을 들어올렸다. 초류빈이 그를 위해 할 일은 너무나도 많았다. 다시 한동안의 침묵이 흐르자 호유성은 비로소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자네의 뜻은 내 잘 알고 있네. 하지만...시간은 때로 많은 일에 대해 변화를 가져오게 하네."
초류빈의 눈동자엔 고통스러운 기색이 더욱 농후해져 갔다.
"저도 역시 형님이 저에 대해 다소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초류빈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오해라니....."
초류빈은 힘을 주며 말했다.
"오해입니다. 완전히 오해입니다. 오해를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형님은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호유성의 눈동자에도 한 가닥의 고통스러운 빛이 스쳐갔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일은 절대 오해가 아니라고 나는 장담할 수가 있네."
초류빈은 즉시
"그게 무슨 일입니까?"
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물었으나 이내 후회했다. 왜냐하면 그는 호유성이 말하려는 그 일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호유성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자네가 그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네."
초류빈은 억지로 웃음을 보였다.
"대다수의 사람은 모두 고통 속에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네의 고통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깊고 또한 많네."
"그럴까요?"
"자네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했기 때문이네."
초류빈은 고개를 숙여 술을 마셨다. 격동되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함이었다.
호유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초류빈은 고개를 숙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자네의 고통은 그래도 가장 깊다고는 말할 수 없네. 한 사람이 자신을 희생해서 남을 돕는다는 것은 때로 안위가 될 수도 있고 즐거움으로 승화시킬 수도 있으니 고통은 자연히 감소될 걸세."
칼날같이 예리한 말이었다. 그리고 일리가 없지도 않았다. 단지 그 일리는 결정적인 것이라고는 정의를 내릴 수 없다.
호유성의 술잔을 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진정한 고통이 무엇인지 아마 자네는 아직 모르고 있을 걸세."
"글쎄요....."
"자기의 처는 남이 양보해 준 여자이며 그 아내가 줄곧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네."
그렇다. 그것은 가장 큰 고통이다. 그건 고통일 뿐 아니라 일종의 모독이다. 남자라면 원래 그런 말을 죽어도 입 밖에 내지 않으려 한다. 그런 일은 자신에 대해 너무나도 큰 모독이며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한데 호유성은 그런 말을 스스로 입 밖에 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초류빈에게.
초류빈의 마음은 천 길이 넘는 벼랑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는 호유성의 그 말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첫째, 호유성은 확실히 자기보다도 더 괴로워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무서우리만큼 변한 것이다. 아마 다른 남자라 해도 그같이 변하기는 십상일 것이다. 초류빈은 그도 역시 불쌍한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가련한 사람은 왕왕 무서운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호유성이 이미 그의 앞에서 그런 말을 내뱉은 이상 절대 그를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초류빈은 비록 생사를 담담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과연 지금 이 상태로 죽을 수가 있겠는가?
그들은 별로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한 마디 할 때마다 깊이 생각한 연후에 천천히 내뱉곤 했다.
밖은 흐린 날씨였다. 그래서 아직 등불을 밝힐 때가 되지 않았는 데도 하늘색이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호유성의 안색은 찌푸린 날씨보다도 더욱 어두웠다. 그는 술잔을 들어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으며 계속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그는 술을 못 마시는 게 아니라 마시기 싫었다.
술은 사람을 흥분시킬 수 있다. 제아무리 냉혹한 사람일지라도 충동이 일면 다소 감정이 생긴다. 호유성은 행여나 자신의 감정이 되살아 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다시 긴 침묵이 흐른 후에야 호유성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나도 해선 안 될 말을 했네."
초류빈은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기 때문에 담담하게 웃으며 그의 술을 받았다.
"사람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말인지 알면서도 왕왕 입 밖에 내는 예가 있죠.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내가 자네를 데려온 것은 그런 말을 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니...그럼 자네는 내가 자네를 데려온 목적도 알고 있단 말인가?"
초류빈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호유성의 얼굴에 처음으로 놀란 기색이 나타났다.
"정말 알고 있나?"
초류빈은 똑갈은 대답을 반복했다.
"물론이죠."
그리고 나서 호유성이 다시 묻기도 전에 이어 말했다.
"형님은 흥운장에 정말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합니까?"
호유성은 오래 생각을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그래서 제가 보물이 있는 곳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시는군요?"
"자네는 응당 알고 있을 걸세."
초류빈은 히죽 웃었다.
"저에게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특이한 점이라니...그게 무엇인가?"
"알고 있어야 할 일은 도리어 모르고 있다는 점이죠."
호유성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초류빈은 그의 표정을 살피며
"사실 그 일의 자초지종은 한 사람에 의해 꾸며진 헛소문이라는 것을 형님은 모르....."
하고 말하자 호유성이 급히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나는 자네를 믿네. 자네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그는 초류빈을 똑바로 주시하며 말을 끌어나갔다.
"이 세상에서 내가 신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자네뿐이네. 그리고 나에게 친구가 있다면 그것도 역시 자네뿐이네. 내가 한 말이 다 거짓이라 해도 이 말만은 진실일세."
초류빈도 역시 그를 주시하며 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역시 형님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콜록콜록 심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호유성은 몸을 일으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대청을 두 바퀴 돌았다. 대청은 조용하기 때문에 그의 걸음소리가 더욱 무겁게 들렸다. 물론 그의 마음이 무겁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는 일부러 초류빈에게 자기의 마음이 무겁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게 목적인지도 모른다.
그러더니 그는 홀연 초류빈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자네는 내가 자네를 죽일 것이라 생각하나?"
초류빈의 신색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평정했다.
"형님이 어떻게 하시든 저는 형님을 탓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절대 자네를 죽이지 않을 걸세."
이렇게 말한 호유성의 음성에 약간 격동이 일었다.
"내가 설사 자네를 죽인다 해도 그녀의 마음을 차지할 수는 없을 뿐더러 도리어 그녀는 더욱 나를 미워하게 될 걸세."
초류빈은 장탄식을 했다.
"인생을 살아 가는데 있어 어쩔 수 없는 일이 가끔 있기 마련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
담담한 한 마디지만 기실 그것은 인생의 최대 비애(悲哀)이며 최상의 고통이었다. 그런 일이 닥치면 분투, 발버둥, 반항을 해도 소용이 없다. 심지어 자신의 육신을 발기발기 찢고 자신의 가슴을 도려낸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은 역시 어쩔 수 없다.
호유성은 주먹을 불끈 쥐며 음성도 격동으로 인해 떨리고 있었다.
"나는 비록 자네를 죽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네를 놓아 줄 수도 없네."
초류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직 당신에게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에.....'
하지만 그는 이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호유성이 제아무리 그를 배신하고 해치려 하지만 그는 아직껏 호유성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호유성은 더욱 으스러지도록 주먹을 쥐었다. 초류빈 앞에서의 그 자신은 언제나 왜소하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초류빈의 그런 위대한 우정은 비단 그에게 감동을 줄 수 없을 뿐더러 도리어 더욱 짙은 분노를 일으키게 했다. 그는 주먹을 쥐고 초류빈을 노려보며 한마디 한마디 뚜렷이 내뱉었다.
"나는 자네를 다른 사람에게 데려다 줄 생각이네. 그 사람은 벌써부터 자네를 만나고 싶어했네. 자네도...어쩌면 그를 만나야 할 필요가 있겠지."
굉장히 큰 방이었다. 그런데 창문은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아주 높은 곳에 있는 작은 창문이었다. 게다가 창문은 꼭꼭 닫혀 있기 때문에 밖의 경물은 전혀 볼 수 없었다. 문도 극히 작아 어깨가 다소 넓은 사람이라면 몸을 비스듬히 해야 들어올 수 있었다.
문도 역시 닫혀 있었다. 담벽은 흰 칠을 두껍게 하여 석벽인 지 흙으로 쌓은 벽인지, 아니면 강철로 세운 벽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방 한쪽 구석엔 침상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침상에 깔려 있는 이불은 깨끗하고 간복(簡僕)했다.
그 이외에 방안에 있는 것이라곤 큼지막한 책상 하나뿐이다. 책상 위에는 가지각색의 책이 높이 쌓여 있었다. 지금 한 사람이 책상 앞에 서서 붉은 붓으로 연신 책에다 그려대며 이따금씩 입가에 득의에 찬 미소를 떠올리곤 했다.
그 사람은 시종 서 있었다. 방안에 의자라곤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앉는 것을 싫어했다. 일단 의자에 편하게 앉으면 자신의 정신이 느슨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신이 느슨해지면 착오를 조성하기가 쉽다. 바늘구멍만한 착오라 할지라도 그것은 곧 실패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마치 제방에 작은 구멍이 뚫리면 붕괴되는 것같이.
그의 정신은 영원히 느슨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여지껏 착오가 없었고 실패도 없었다.
또 한 사람이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이 사람의 몸은 마치 창대처럼 더욱 꼿꼿했다. 그는 계속 이렇게 서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보지 못했다.
어디서 날아온 모기인지 바로 그의 눈앞에서 계속 맴돌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모기는 그의 코끝에 앉아 피를 빨아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움직일 줄 몰랐다. 그의 몸은 흡사 완전히 마비된 듯 가렵다거나 아프다는 것도 느끼지 않았다. 심지어 자기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조차 그는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두 사람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이 상관금홍과 형무명이었다. 이 세상에서 그들과 같은 사람은 다시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강호에서 가장 명성이 혁혁하고 세력이 가장 크며 재력 또한 으뜸인 금전방의 방주는 뜻밖에도 이런 누추한 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눈으로 본 금전은 단지 일종의 이용가치가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물론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의 모든 향락은 그의 눈에 목적을 달성하는 기구로밖에 미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의 유일한 애호는 바로 권력이었다. 만약 그의 몸에서 권욕을 뺀다면 그는 아마 송장이 될 것이다. 그는 권력을 위해 살고 심지어 권력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고요. 책장을 넘기는 소리 외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등불이 밝혀졌다. 그들이 이곳에서 얼마 동안 서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창 밖의 하늘색은 어둠에서 밝아오고 또 어두워졌다. 그들은 허기와 피곤과는 담을 쌓은 사람 같았다.
이때 고요를 깨고 밖에서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단지 한 번, 그것도 아주 가볍게. 상관금홍은 책장을 넘기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물론 고개도 들지 않았다.
형무명이 무덤 속에서 새어나오는 듯한 괴성으로 물었다.
"누구냐?"
문 밖에선 즉시 대답이 들렸다.
"백칠십구 호입니다."
"무슨 일이냐?"
"방주님을 뵙겠다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게 누구냐?"
"상대방은 이름을 밝히려 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로 방주를 뵙겠다더냐?"
"그것도 방주님을 직접 뵈어야지만 말하겠답니다."
형무명은 입을 다물더니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엔 상관금홍이 홀연 입을 열었다.
"그는 지금 어디 있느냐?"
"앞뜰에 있습니다."
상관금홍은 고개도 들지 않고 한마디 내뱉었다.
"그를 죽여라!"
밖에서 즉시 대답을 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자 상관금홍은 다시 물었다.
"그를 데려온 자는 누구냐?"
"제팔 타주(第八舵主) 향송(向松)입니다."
이때 형무명이 나서며
"제가 가겠습니다."
하고 한마디를 하더니 홀연 강시처럼 밖으로 걸어나가는 것이었다. 살인을 하는 데 있어 형무명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향송은 별호가 풍우유성(風雨流聖)으로서 사용하는 무기인 한 쌍의 유성추(柳聲追)만 해도 무기보에 십구 위를 차지하고 있어 그를 죽인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상관금홍을 찾아온 사람은 누구일까? 그리고 무슨 일로 그를 찾아온 것일까?
상관금홍은 그러한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한 가닥의 호기심도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차라리 인성(人性)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그는 여전히 책장을 넘기면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문이 열리면서 형무명이 다시 나타났다. 상관금홍은 그에게 죽였느냐고 묻지 않았다. 형무명은 살인을 하는 데 있어 아직 실수한 적이 없기 때문에 물을 필요도 없었다.
상관금홍은 단지 담담하게
"향송이 만약 반격을 하지 않았다면 그의 가족에게 황금 만 냥을 주고 만일 반격을 했다면 가족을 전부 없애라."
한데 형무명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저는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상관금홍은 그제야 번쩍 고개를 들며 칼날같이 예리한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다.
형무명의 얼굴에선 아무런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데리고 온 사람은 죽일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상관금홍은 싸늘하게 외쳤다.
"세상 사람이라면 다 죽일 수 있거늘 왜 죽일 수 없다는 거냐?"
형무명의 차가운 음성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저는 어린애를 죽이지 않습니다."
그 말은 들은 상관금홍도 멍해지는 듯싶더니 손에 쥐고 있던 붓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나를 만나려고 찾아온 자가 일개 어린애더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무공이 완전히 폐지된 어린애입니다."
상관금홍은 눈에서 섬광을 번뜩이더니 잠시 생각을 굴리고 나서 입을 열었다.
"이리 데려오도록 해라."
형무명은 즉시 밖으로 나갔다.
일개 나이 어린 녀석이 상관금홍을 만나러 왔다니 상관금홍 자신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 어린애는 호랑이 담을 먹었든가 아니면 미친 녀석일 것이라 생각했다.
잠시 후 형무명이 과연 어린애를 데리고 들어왔다. 전혀 혈기를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 창백한 어린애였다. 그의 눈동자는 어린애들이 응당히 지녀야 할 밝고 맑은 광채가 없이 도리어 음침한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그는 느릿느릿 걸으며 허리도 약간 구부정한 것 같았다.
이 어린애는 보기에 흡사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인 같았다.
이 어린애는 다름 아닌 호천강이었다. 어느 누구라 해도 호천강 같은 어린애를 보면 자연히 그의 거동과 표정을 유심히 살피게 된다.
상관금홍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눈빛은 칼날같이 호천강의 얼굴에 폭사되었다. 누구라 할지라도 상관금홍의 이러한 눈빛을 접하면 설사 몸을 부들부들 떨지 않더라도 겁에 질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호천강은 예외였다.
그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와 몸을 숙여 공손히 인사를 하더니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후배 호천강이 방주께 인사를 드립니다."
상관금홍은 눈알을 굴리며 살얼음 같은 음성으로 반문했다.
"호천강이라고? 그럼 호유성은 너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호천강은 다소곳이 대답했다.
"저의 부친입니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상관금홍의 안색도 다소 변화가 이는 것 같았다.
"너의 부친이 너를 이리로 보낸 것이냐?"
"그렇습니다."
상관금홍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왜 그가 직접 오지 않았느냐?"
호천강의 표정은 서당의 훈장처럼 의젓하고 태연했다.
"만약 저의 부친께서 오셨다면 비단 방주님을 만나뵙지 못할 뿐더러 살신지화(殺身之禍)를 당하기 십상이기에 부득이 제가 대신 온 것입니다."
상관금홍은 상대방의 유연한 태도에 무의식적으로 한 가닥의 적의를 느끼며 음성이 싸늘하게 변했다.
"너를 죽이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느냐?"
호천강의 태도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침착했다.
"세상 사람들의 생명은 물론 방주님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데 따라 좌우되겠지만 저를 죽일 가치를 못 느끼리라 믿습니다."
상관금홍의 싸늘했던 안색이 뜻밖에도 온화해졌다.
"너는 비록 나이가 어리고 몸이 약하지만 간담만은 굉장히 크구나."
호천강은 그를 똑바로 주시하며 말을 받았다.
"중대한 목적을 품은 자라면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자연히 간담이 커지게 마련입니다."
상관금홍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고는 돌연 고개를 돌려 형무명에게 빙긋 웃고 물었다.
"너는 이 애의 말만 듣고 그가 어린애라고 생각했느냐?"
형무명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냉랭하게 대꾸했다.
"저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상관금홍이 그를 응시하며 얼굴에 띠었던 그 귀한 한 가닥의 웃음이 돌연 응결되었다. 호천강은 그들의 표정을 번갈아 쳐다보며 그들의 관계에 대해 굉장히 흥미를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상관금홍은 드디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너의 가장 큰 장점이지만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어쩌면 너의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형무명은 이번에는 아예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다시 긴 시간 침묵을 지키더니 상관금홍이 호천강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희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호천강은 한 차례 헛기침을 하고 나서 대답했다.
"똑같은 일이지만 그것을 설명하는 방법은 많습니다. 후배는 원래 좀더 온화하게 이번 일을 설명드릴 생각이었는데 방주님께서 한가한 시간이 별로 없을 것 같아 가장 직선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상관금홍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예도 흔치 않았다.
"좋다. 나도 잔소리를 늘어놓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을 상대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혀를 잘라 버리는 거지."
호천강은 차분하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
"후배가 이곳에 온 것은 방주님과 한 가지 협상을 하기 위함입니다."
상관금홍은 대뜸 반문했다.
"협상이라고?"
그의 안색은 더욱 차갑게 변했다.
"전에도 나와 협상을 하자는 사람이 있었지. 그런데 너는 내가 무슨 방법으로 그들을 상대했는지 알고 있느냐?"
호천강은 눈을 깜박거렸다. 상관금홍 앞에서 눈을 깜박거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후배는 귀를 씻고 듣겠습니다."
상관금홍은 뚫어지게 그의 눈동자를 주시하며 한마디 한마디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내뱉었다.
"그들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단 한 가지 방법뿐이다."
그 말에도 호천강의 안색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협상은 다른 사람과 다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후배도 감히 이곳에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일순 상관금홍의 눈에서 짙은 살기가 번뜩였다.
"협상은 어디까지나 협상일 뿐 뭐가 다르다는 거냐?"
40 소이비도 제3권 이중 미행
이중 미행
몹시 번화한 거리다. 마치 북경(北京)의 천교(天橋)와 같이 이곳에선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무엇이든 살 수 있었다. 지금은 비록 아직 정오도 채 되지 않았지만 거리 양쪽엔 이미 가지각색의 장사치들이 진을 치고 가지각색의 물건을 진열해 놓고 가지각색의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 오자 설영령의 눈은 유난히 커졌다. 그녀는 생전 이렇게 즐거워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녀는 역시 어린애였다. 초류빈이 자기를 데리고 거리 구경을 하러 나오리라곤 그녀도 실로 생각지 못했다.
'알고 보니 이 사람도 어린애 같은 데가 있군.'
이것은 설영령의 생각이었다.
초류빈의 손에 쥐어져 있는 곶감을 보자 그녀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녀의 손에도 여러 가지 먹을 것이 들려져 있었다. 이럴 때 그녀는 손이 두 개밖에 없는 게 한이었다. 여자애는 아무리 많은 물건을 얻어도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초류빈은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 주었다. 사실 초류빈이 곶감을 사먹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물론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 당시 그는 고뇌가 무엇인지 평정이 무엇인지도 몰랐었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 그는 줄곧 한 사람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그의 앞에서 걷고 있었다. 몸엔 누더기를 걸치고 다 떨어진 짚신을 질질 끌며 머리엔 낡은 털모자를 눌러쓴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시종일관 고개을 숙인 채 길을 걷고 있었다. 비록 허리를 구부리고 목을 움츠린 채 걷고 있지만 어깨만은 굉장히 넓었다. 만약 그가 허리를 편다면 아마 필시 우람한 사나이로 변모할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이 사람은 별로 독특한 데가 없었다. 기껏해야 뜻을 상실한 강호객(江湖客)이든가 아니면 거렁뱅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초류빈은 그를 발견하는 즉시 한 동작도 놓치지 않고 유심히 관찰했다. 그가 어딜 가든 초류빈은 줄곧 뒤를 미행했다. 그래서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기도 했다. 이상한 것은 그 사람을 미행하는 자는 초류빈뿐만이 아니었다.
초류빈은 원래 앞으로 달려가 그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으나 홀연 또 한 사람이 그의 뒤를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 사람은 깡마르고 키가 헌칠하며 걸음걸이가 가벼웠다. 비록 차림새는 아주 평범했지만 눈동자를 굴릴 때마다 섬광이 번뜩였다.
초류빈은 첫눈에 그가 예사스러운 인물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그는 별로 초류빈을 유의하지 않았다. 그는 온 정신을 앞서가는 거렁뱅이에게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거렁뱅이가 빨리 걸으면 걸음을 빨리하고, 거렁뱅이가 걸음을 멈추면 그도 즉시 걸음을 멈추고 옷에 묻은 먼지를 털거나 태연하게 신발을 만지작거렸다. 하나, 그의 눈은 잠시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미행을 하는데 경험이 풍부한 사람 같았다. 그러한 사람이 무엇 때문에 일개 거렁뱅이를 미행하는 것일까? 초류빈은 마음을 침착하게 먹고 끝까지 지켜보기로 작정했다.
그럼 초류빈은 또 무엇 때문에 이러는 것일까? 그는 앞서 가는 거렁뱅이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거렁뱅이는 뒤에서 자기를 미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 계속 허리를 구부린 채 천천히 걸으며 한 번도 고개를 돌리는 적이 없었다.
도중에서 그에게 돈을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돈을 받고, 돈을 주는 사람이 없으면 구걸을 하지도 않았다.
설영령은 까만 눈동자를 연신 굴리다가 홀연 초류빈의 소매를 잡아끌며 나직이 말했다.
"우린 저 거렁뱅이를 미행하고 있나요?"
정말 여우같은 계집이다. 초류빈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말했다.
"그러니 너도 큰소리로 떠들면 안 된다."
"그는 뭐하는 사람이기에 당신이 그를 미행하죠?"
"그것은 네가 알 필요가 없다."
"만약 가르쳐 주지 않으면 큰소리로 외치겠어요."
초류빈은 이 깜찍한 계집애한테는 별도리가 없는 듯 한숨을 내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나와 오래 전에 헤어졌던 친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설영령은 더욱 이상하게 생각되었는지 눈을 크게 떴다.
"당신의 친구라뇨? 그럼 개방의 제자인가요?"
초류빈은 귀찮았지만 내색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비위를 건드리면 무슨 철부지 행동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아니다."
그 대답은 물론 그녀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수 없었다.
"그럼 누구죠?"
"내가 그의 이름을 밝혀도 너는 전혀 모를 것이다."
"우리 앞에 있는 자도 역시 그를 미행하고 있는데 당신은 그 사실을 알고 있나요?"
"제법 보는 눈이 예리하구나."
"저 사람은 또한 누구죠? 역시 당신의 친구인가요?"
"아니다."
설영령은 그 대답을 듣자 다시 눈동자를 사르르 굴리며 자기 나롬대로 추측을 했다.
"친구가 아니라면 그럼 원수겠네요?"
초류빈은 계속 모른다고만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럼 왜 당신의 친구에게 알리지 않죠?"
초류빈은 속으로 생각을 굴리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 친구는 워낙 성격이 괴팍해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는....."
설영령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왜냐하면 이때 그녀의 눈은 한 곳에 고정된 채 휘둥그레져 있었다.
지금 그들이 걷고 있는 길은 굉장히 길어 한참 걸었는 데도 겨우 절반밖에 오지 못했다. 그 거렁뱅이는 마침 만두를 파는 가게 앞까지 걸어갔다.
만두가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술을 파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 몇몇 사람이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관상을 보는 장님도 끼여 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 처마 밑에는 청색옷을 입은 사나이가 서 있었다. 이때 두부장수가 지게를 지고 앞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 외에는 몸집이 큰 부인이 줄곧 잡화 앞에서 바늘을 고르고 있다가 이때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 때야 이 부인이 외눈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렁뱅이는 이미 잡화상 앞까지 걸어갔다.
순간, 술장수가 손에 쥐고 있던 닭다리를 내려놓았다. 술을 마시던 장님도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처마 밑에 있던 청의대한이 돌연 앞으로 뒤쳐오는 것과 동시에 외눈박이 부인이 날렵하게 몸을 돌렸다.
게다가 줄곧 거렁뱅이의 뒤를 미행하던 깡마른 사나이까지 합쳐 몇몇 사람이 일제히 사면팔방에서 거렁뱅이를 향해 포위해 갔다. 그 두부장수는 지게를 가로내려 놓아 마침 거렁뱅이의 앞길을 막아주었다. 주위엔 물론 사람이 많았지만 이들 몇몇 사람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설영령마저도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눈이 휘둥그레졌으니 초류빈은 더욱 말할 나위도 없이 벌써 안색이 변했다. 그는 처음 거렁뱅이를 발견할 때부터 철전갑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더욱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경거망동을 하지 않았다.
상대방은 철전갑과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원한을 맺고 있기 때문에 이번 살수는 필시 사전에 치밀한 계획에 의해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초류빈이 섣불리 나선다면 그들은 모든 것을 젖혀 놓고 우선 철전갑을 죽이고 볼 것이다.
초류빈은 설사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철전갑이 어떠한 손상을 입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평생 동안 단지 몇몇 사람에게 신세를 졌다. 철전갑은 바로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절대 철전갑이란 친구를 잃을 수 없었다. 바로 그 찰나적인 순간에 몇몇 사람이 재빠르게 거렁뱅이를 가운데 두고 포위했다.
어울러 싸늘한 광채가 번뜩이는 가운데 세 자루의 예리한 날이 거렁뱅이의 가슴과 등을 겨냥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어떻게 된 일임을 깨닫고 분분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아무도 이런 강호의 원한사건에 휘말려 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먼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 소리 말고 순순히 우리들을 따라와라. 알겠느냐?"
그 청색옷을 입은 사나이도 이를 부드득 갈며 싸늘하게 외쳤다.
"순순히 우리들의 말에 복종하면 좀더 오래 살 수 있지만 만약 서투른 행동을 한다면 당장 네놈을 없애 버리겠다!"
거렁뱅이는 반응이 몹시 우둔한 듯 지금에서야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외눈박이 부인은 세차게 그의 등을 밀며 호통을 쳤다.
"어서 가지 않고 뭘 꾸물대느냐?"
그녀가 거렁뱅이를 밀지 않았다면 별문제겠지만 미는 바람에 몇몇 사람의 표정이 굳어지며 입이 딱 벌어졌다. 거렁뱅이를 밀치는 바람에 깊이 눌러쓰고 있던 모자가 떨어지면서 얼굴이 드러난 것이다.
마치 중병을 앓다가 갓 완쾌한 듯 누르스름한 안색에 주독이 오른 듯한 빨간코, 입을 헤벌쭉 벌리고 주위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이 사람을 어떻게 철전갑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좀 부족한 백치였다. 초류빈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외눈박이 부인은 화가 치밀어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며 앙칼지게 외쳤다.
"아니...이게...이게...어떻게 된 일이죠?"
물론 거렁뱅이의 뒤를 미행해 오던 깡마른 사나이도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분명히 철전갑인데...나는 한시도 그를 놓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어째서....."
청색옷을 입은 사나이는 분해서 땅을 걷어차며 다짜고짜 거렁뱅이의 뺨을 후려쳤다.
"너는 누구냐? 대관절 누구란 말이냐?"
그의 음성은 성난 야수의 울부짖음 같았다.
거렁뱅이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여전히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나는 나고 너는 넌데 왜 때리느냐?"
이번엔 술을 팔던 사나이가 나서며 입을 열었다.
"어쩌면 칠전갑이 위장한 것인지도 모르니 우선 그의 얼굴 껍질을 벗겨 보도록 합시다!"
그러나 장님이 홀연 냉랭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럴 필요는 없네. 그는 절대 철전갑이 아닐세."
단지 그의 안색만이 여전히 얼음장같이 차갑게 굳어 있어 동요되지 않았다.
청의대한은 즉시 반문을 했다.
"형님은 그의 음성으로 자신있게 판단을 할 수 있습니까?"
장님의 음성은 여전히 차가왔다.
"철전갑은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에게 뺨을 맞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다."
그는 눈가에 가벼운 경련을 일으키더니 말을 계속했다.
"다섯째, 자네가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깡마른 사나이의 안색은 연신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이 사람은 필시 칠전갑과 내통해 내 눈을 속인 겁니다."
외눈박이 부인이 성난 음성으로 다그쳤다.
"줄곧 철가놈의 뒤를 따랐다는데 어떻게 해서 놓쳤단 말이에요?"
깡마른 사나이는 고개를 떨구며 힘없이 말했다.
"아마 뒷간에 들어갔을 때...나는 그곳까지 따라 들어갈 수 없어서....."
청의대한이 대뜸 우악스럽게 외쳤다
"알고 보니 네놈은 철가 녀석과 한패였군. 우선 네놈부터 없애 주겠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편담(扁擔)을 들어올려 거렁뱅이의 머리를 향해 후려쳐 버렸다. 편담이라 함은 두부통을 양쪽에 매달아 놓아 어깨에 짊어지는 납작하고 긴 막대기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초류빈은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렁뱅이가 정말 백치든 아니면 철전갑의 친구이든 철전갑이 그의 도움을 받은 것만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초류빈은 그가 맞아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철전갑의 소식을 알아내려면 그 자에게서 단서를 얻어야 했다. 초류빈의 몸은 바람같이 미끄러져 나갔다. 그러나 막 한 걸음을 내딛자 이내 다시 몸을 거두었다.
그의 몸놀림은 워낙 빨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그가 움직였던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는 이미 출수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다시 몸을 거둔 것이다.
뚝!
하는 소리가 들리며 내리친 편담이 허공에서 두 동강이로 부러졌다. 청의대한은 중심을 잃고 하마터면 땅에 쓰러질 뻔했다. 무엇이 날아와 편담을 부러뜨렸는지 아무도 똑똑히 보지 못했다.
모든 사람은 안색이 급변하여 분분히 뒤로 한걸음씩 물러나며 냉랭하게 외쳤다.
"일을 방해하는 자는 누구냐?"
그러자 처마 밑에서 한 사람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 사람이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처마 밑에 서 있는 자는 일신에 흰 옷을 입고 뒷짐을 진 채 처마 끝에 대롱대롱 걸려 있는 새장을 감상하고 있었다. 새장들 속의 새가 한가롭게 지저귀고 있었다.
이 백의인은 사람들보다 새에 대해 많은 흥미를 갖고 있는 듯 주위에 있는 강호객들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의 눈가엔 가느다란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러나 검미에 햇살같이 빛나는 눈동자, 백등같이 희디흰 안색은 멀리서 보아도 조금도 험잡을 데 없는 영준비범한 귀공자였다.
청의대한은 대뜸 그를 향해 포악스럽게 외쳤다.
"나의 편담을 부러뜨린 게 바로 네녀석이냐?"
백의인은 이번에는 아예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청의대한, 외눈박이 부인이 거의 동시에 노갈일성을 지르며 앞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아직 행동으로 옮기기도 전에 장님의 나직하면저도 신중한 외침이 들렸다.
"잠깐만!"
이렇게 한 마디를 내던진 그는 땅에서 은자(銀子) 한 조각을 주워 냉랭하게 말을 이어갔다.
"저 사람은 비록 자네의 편담을 부러뜨렸지만 이 은자로써 편담 백 개를 사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데 고맙다는 인사는 못할 망정 무례한 짓을 하다니....."
청의대한은 수중에 쥔 절반밖에 남지 않은 편담과 장님이 쥐고 있는 은자를 번갈아 쳐다보며 곱상하게 생긴 백의인이 작은 은자로써 자기 편담을 부러뜨렸으리라곤 도저히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백의인은 홀연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앞 못 보는 소경이 다른 사람보다도 눈이 밝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오. 그 은자를 당신에게 드리겠소."
장님은 신색 하나 변함이 없이 냉랭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노부는 비록 눈이 멀었지만 마음까지 멀지는 않았소."
여기까지 말한 그는 손에 쥔 은자를 송편 빚듯 주물럭거리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일전(一錢)의 은자면 충분히 편담을 살 수 있소. 그런데 이 은자는 넉히 십 냥은 될 것이니 너무 많은 것 같소."
그는 한편으로는 말을 하며 한편으로는 수중에 있는 은자를 가느다란 은봉(銀棒)으로 만들어 왼손으로 줄부분을 살짝 떼어 버리더니 태연하게 말했다.
"이 일전의 은자는 노부가 고맙게 받겠지만 나머지는 돌려 드리겠소!"
그 말이 끝나는 즉시 은광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한 자 남짓한 은봉이 예리한 바람소리를 내면서 백의인을 향해 날아갔다. 그가 전개한 것은 무당파 양의검법(兩儀劍法) 중의 한 절초(絶招)였다. 은광이 허공을 수놓는 것과 함께 백의인의 가슴 앞 다섯 군데 혈도가 완전히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래도 백의인은 태연자약하기만 했다. 그는 은봉이 눈빛까지 뻗쳐올 때서야 돌연 식지와 중지 두 손가락을 뻗어 은봉을 가볍게 잡았다. 그리고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검법은 훌륭하지만 너무 느린 것이 흠이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수중에 있는 은봉을 두 손가락으로 마치 가위질을 하듯 열두 토막을 내버렸다.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설영령은 눈을 토끼마냥 둥그렇게 치뜨고 나직이 말했다.
"저 사람의 손가락은 살로 만들어진 게 아닌가요?"
주위에서 구경을 하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장님이 은자를 가느다란 은봉으로 만드는 것을 보고서도 이미 놀란 나머지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는데 지금 백의인의 솜씨를 보자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편 외눈박이 부인 등도 독사한테 물린 듯 일순 표정이 굳어졌다. 장님도 역시 은자 토막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안색이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백의인은 뒷짐을 지며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한 번 남에게 준 물건은 되돌려 받지 않소. 그러니 어서 주워 가시오."
장님은 앞으로 걸어와 땅에 떨어진 은자 토막을 하나하나 주워들고 아무 말없이 몸을 돌려 걸어갔다. 청의대한, 외눈박이 부인 등도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설영령은 재미있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처음의 그 위풍당당하던 기세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마치 꼬리를 감추고 도망가는 초상집 개 같군요."
초류빈은 생각을 굴리며 앞쪽에 있는 만두가게를 가리켰다.
"저기 만두를 파는 작은 가게가 보이느냐?"
설영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긋이 웃었다.
"어디 보일 뿐인가요? 벌써부터 만두가 먹고 싶었어요."
"그럼 마침 잘 되었다. 너는 저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거라."
그 말에 설영령은 멍해졌다.
"당신은 저 거렁뱅이의 뒤를 계속 쫓아갈 작정인가요?"
이때 거렁뱅이는 몸을 일으켜 다시 히죽히죽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백의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전혀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은 자기와 하등의 관계도 없다는 태도였다.
초류빈은 설영령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
설영령은 울상이 되어 고개를 숙이고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저도 함께 가면 안 되나요?"
초류빈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건 절대 안 된다."
설영령은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저를 떨쳐 버릴 생각이죠?"
초류빈은 한숨을 내쉬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도 만두가 먹고 싶은데 어찌 돌아오지 않을 수 있겠니?"
그제야 설영령은 입술을 깨물며 초류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좋아요. 당신을 믿겠어요. 만약 저를 속인다면 저는 평생토록 그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겠어요."
그녀의 말투는 다분히 위협적인 냄새가 풍겼다.
거렁뱅이의 걸음은 빠르지 않았다. 이 길은 원체 사람이 많기 때문에 초류빈은 성급하게 그를 불러 세울 생각은 없었다.
사람이 많은 데서는 대화를 나누기가 불편하다. 더욱이 백의인이 줄곧 그를 주시하고 있지 않은가.
백의인은 홀연 취미를 바꾸어 새보다는 사람에게 흥미를 느낀 모양이다. 초류빈도 백의인을 자세히 관찰하고 싶었다. 조금 전에 그가 전개한 솜씨는 실로 초류빈의 흥취를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무림에 그 같은 고수는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초류빈은 이 세상에서 그런 지력을 지닌 자가 누구인지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설영령이 그를 형용한 말은 결코 과장된 것은 아니었다
'저 사람의 손은 살로 만들어진 게 아닌가요?'
무공을 연마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백의인같이 비범한 솜씨를 지닌 자에겐 흥미를 느끼기 마련이다. 친구로 사귀고 싶다든가 아니면 한번 겨루어 보고 싶은 충동을 자연히 느끼는 것이다. 평상시였더라면 초류빈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한데, 그에겐 지금 그럴 만한 심적인 여유가 없었다. 오래 전부터 찾아오던 철전갑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는 이번 기회를 그는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백의인은 그의 앞길을 가로막으려는 듯 성큼성큼 그를 향해 걸어왔다. 다행하게도 흩어졌던 군중들이 백의인의 풍채를 좀더 가까운 곳에서 보기 위해 다시 몰려왔다.
초류빈은 그 틈을 타서 미꾸라지처럼 앞으로 빠져나갔다. 그때 거렁뱅이는 길 끝쪽에서 막 왼쪽으로 돌려는 순간이었다. 왼쪽 길은 사람도 적게 왕래하고 그다지 길지도 않았다.
초류빈은 성큼성큼 앞으로 쫓아갔다. 그리고는 황급히 왼쪽으로 방향을 꺾었으나 거렁뱅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하늘로 솟은 것일까? 땅 속으로 꺼진 것일까? 초류빈은 길게 숨을 내쉬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이 길은 양쪽이 거의 인가의 뒷문이었다. 앞에 보이는 뒷문 구석진 곳에 한 사람이 쪼그리고 앉아 손에 무엇을 쥐고 있는지 연신 자기의 옷에 문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초류빈은 그 사람을 확인도 하기 전에 먼저 그 낡은 털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알고보니 거렁뱅이는 이곳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초류빈은 그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 천천히 다가갔다. 하지만 그 거렁뱅이는 역시 깜짝 놀라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얼른 등뒤로 감추었다.
하지만 초류빈의 눈은 그의 손보다 훨씬 빨랐다. 그가 쥐고 있는 것은 토막난 작은 은자였다. 아마 백의인이 은봉을 여러 토막낼 때 몰래 주운 모양이다.
초류빈은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친구, 나한테 이름을 밝혀 줄 수 있겠소?"
거렁뱅이는 대뜸 눈을 부라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네 친구가 아니야, 너도 내 친구가 아니야....."
초류빈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당신에게 한 사람에 관해 묻고 싶소. 당신은 분명히 그 사람을 알 것이오."
거렁뱅이는 계속 고개를 내둘렀다.
"나는 아무도 몰라. 그리고 날 아는 사람도 없어. 나는 한 사람도 모르고 한 사람도 나를 아는 자가 없어."
이 사람은 과연 어디가 부족한 듯했다. 간단한 한마디를 그는 거듭 몇 번을 반복했다. 또한 입에 자갈을 문 듯 어조가 분명치 않았다. 초류빈은 다른 방면으로 그에게 질문을 하려 했으나 그는 이미 초류빈의 다리 사이로 빠져나가 잽싸게 앞으로 도망갔다.
그의 뛰어가는 속도는 빨랐지만 절대 경공기초가 있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거렁뱅이라면 거의 걸음이 빨랐다. 이미 생활 수단의 일부분이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초류빈은 물론 그보다 훨씬 빨랐다.
그 거렁뱅이는 도망가면서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왜 이래? 내 은자를 빼앗으려는 거지?"
초류빈은 빙긋이 웃으며 홀연 손을 내밀어 뜻밖에도 그의 손에서 은자를 빼앗았다. 그러자 거렁뱅이는 큰소리로 외쳤다.
"강도다! 은자를 빼앗는 강도다!"
다행스럽게도 이 길은 한적해 행인이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것이다. 거렁뱅이의 은자를 빼앗았으니 영락없이 강도 중에서도 팔류(八流) 강도로 오인될 뻔했다.
거렁뱅이는 더욱 목청이 터져라 하고 외쳐댔다.
"어서 은자를 내 놔. 그렇지 않으면 너와 생사결단을 짓겠다!"
초류빈은 그를 주시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을 해 준다면 이 은자를 돌려 주고 또 한아름의 은자를 주겠소."
거렁뱅이는 눈을 깜박거리며 한참 생각을 굴리다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어서 물어봐."
초류빈은 한마디 한마디 뚜렷하게 물었다.
"철전갑은 당신의 친구가 아니오?"
거렁뱅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나에겐 친구가 없어. 거지에게 친구가 있다는 것을 본 적이 있나?"
초류빈의 질문이 줄을 이었다.
"그럼 무엇 때문에 그를 도와주었소?"
거렁뱅이는 더욱 세차게 고개를 내둘렀다.
"나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 그리고 아무도 나를 도와준 사람이 없어."
초류빈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오늘 몸집이 크고 피부색이 검은 텁석부리 사나이를 본 일이 있소?"
거렁뱅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을 굴리다가 대답했다.
"그런 사람을 본 것 같아."
그 말을 듣자 초류빈의 눈빛이 이내 빛났다.
"어디에서 그를 보았소?"
거렁뱅이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작은집에서 보았지."
초류빈은 멍해지며 즉시 반문했다.
"작은집이라면....."
거렁뱅이는 헤벌쭉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작은집은 바로 똥을 싸는 데지. 내가 똥을 싸고 있는데 그 녀석이 갑자기 뛰쳐 들어와서 나한테 술값을 벌고 싶으냐고 묻지 않겠어?"
초류빈은 손으로 턱을 괴며 빙긋이 웃었다.
"술값을 번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지."
거렁뱅이는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스스로 말을 이어갔다.
"한데, 그 녀석은 나보다도 낡은 옷을 입어 전혀 술값을 지니고 있는 것 같지 않았어."
초류빈은 재미있다는 듯 껄껄 웃었다.
"돈 있는 사람일수록 남루한 차림을 하기 좋아하오. 그러한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군."
거렁뱅이는 히죽히죽 웃었다.
"맞아, 그 말이 틀림없어. 그 녀석은 과연 은자를 꺼내 나에게 주었어. 그래서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지만 은자를 벌 수 있느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그가 뭐라고 했소?"
"나는 그가 이상한 짓을 요구하는 줄 알았더니 그냥 자기와 옷을 바꿔 입고 고개를 숙인 채 밖으로 나가 계속 고개를 들지 말고 걸으라는 거야."
초류빈의 얼굴에 드물게 웃음이 활짝 폈다.
"정말 간단하게 은자를 벌었구려."
그는 이렇게 유쾌하게 웃어본 적이 드물었다. 철전갑 같은 사람도 이젠 이런 묘책을 쓰는 요령을 터득했으니 초류빈으로서는 더없이 즐거운 일이었다.
거렁뱅이는 길게 흘러나온 콧물을 더러운 손등으로 쓱 문지르며 말했다.
"그래서 난 그 녀석을 미친놈이라고 생각했어."
초류빈은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나도 역시 미친 사람이오. 내 은자는 그의 은자보다 더 벌기 쉽소."
거렁뱅이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정말이야?"
초류빈은 자기가 지니고 있는 은자를 전부 꺼냈다. 상당한 액수였다. 거렁뱅이는 그의 손에 있는 은자를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초류빈은 그의 표정을 살피며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나를 그 텁석부리에게 데려다 준다면 이 모든 은자를 전부 드리겠소."
거렁뱅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당장 데리고 가겠어. 하지만 은자를 먼저 나한테 줘야 돼."
초류빈은 즉시 두 손에 든 은자를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거렁뱅이는 침까지 질질 흘려 가면서 빼앗듯이 은자를 집어 연신 품안으로 집어넣었다.
"이렇게 많은 은자를 지니고 있는 것을 보니 필경 어디서 훔쳐 온 것이군."
그는 은자를 집으면서 자연히 초류빈의 손을 건드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손가락이 초류빈의 손에 닿자 홀연 갈퀴처럼 구부러졌다. 순간, 초류빈은 갑자기 손목이 잘라져 나간 듯 감각을 잃고 생각을 굴릴 여지도 없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 거렁뱅이의 출수는 비단 놀랄 정도로 빠를 뿐 아니라 손가락을 구부리고 살짝 젖히는 두 동작에 당대 무림의 네 가지 가공(可恐)할 무공이 포함돼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막 초류빈의 손에 닿았을 때 이미 정통내력(正統內力)인 점의십팔질(點衣十八秩)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상대가 누구라 해도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생각은 아예 할 수 없었다.
이어 그가 전개한 것은 무당파의 칠십이로금나수(七十二路金羅手)로써 여지없이 초류빈의 맥문(脈門)을 낚아 잡은 것이다. 어느 누구라 해도 일단 그 수법에 맥문이 잡히면 진력을 사용할 망상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시 분근착골(分筋錯骨) 수법으로써 초류빈의 손목을 탈골시켰다. 나중에 그가 살짝 손을 젖히면서 초류빈을 쓰러뜨린 수법은 새외솔질인데 한 번 쓰러진 사람은 다시 일어날 수 없었다. 이 네 가지 수법에는 소림(小林)의 정통무학도 있고 무당의 진전(眞傳)도 있었으며 내공과 외공도 곁들여 있었다.
한데 어느 한 가지도 쉽게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설사 배울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터득하기가 어렵고 설령 터득을 한다 해도 최소한 십 년은 피땀어린 고된 훈련을 쌓아야만 가능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거렁뱅이는 네 가지 수법을 전부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로 터득했다.
초류빈은 필시 상대방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이미 알았다 해도 그가 이런 고수라고는 절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이 설령 이런 고수라는 것을 알았다 해도 자기를 암습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초류빈은 여지껏 살아오면서 아직 이렇게 놀란 적은 없었다.
초류빈은 공판장의 보릿자루처럼 땅에 내팽개쳐져 눈에서 불꽃이 튕기며 거의 기절할 듯한 상태였다. 그가 차츰 정신을 차렸을 때 그 거렁뱅이는 바로 그의 곁에 쪼그리고 앉아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나를 암습한 것일까? 그는 벌써 나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는 철전갑과 또한 무슨 관계가 있을까?'
초류빈은 비록 의문이 많았으나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이런 상황하에서는 역시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좋을 것같이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 거렁뱅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왜 아무 말도 묻지 않소?"
그의 말투는 다소 변했지만 여전히 장난기가 농후했다.
초류빈은 빙긋이 웃으며 대꾸했다.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한다면 귀하는 이런 상황에서 입을 열 수 있겠소?"
거렁뱅이는 약간 멍해지더니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만약 내가 당신의 입장이 되었다면 우선 욕설부터 내뱉었을 것이오."
초류빈은 정신을 가다듬고 퉁명스레 말했다.
"눈을 말짱하게 뜨고서도 귀하게 절세의 무공을 지닌 고수라는 사실을 진작 알아보지 못했으니 욕을 하더라도 나 자신에게 하는 게 옳을 것이오."
거렁뱅이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당신은 과연 괴팍한 사람이군. 당신 같은 괴인은 내 난생 처음이오. 당신이 두 마디만 더 한다면 내 얼굴은 분명히 붉어질 것이오."
여기까지 말한 거렁뱅이는 돌연 음성을 높여 외쳤다.
"이 사람은 비단 군자일 뿐 아니라 세상에서 둘도 찾아볼 수 없는 초인이다. 난 실상 이런 사람에게는 약하니 너희들이 계속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면 난 이대로 떠나겠다!"
알고 보니 그에겐 또 패거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초류빈은 그의 패거리가 누구인지 전혀 추측할 수 없어 호기심마저 생겼다. 그때, 삐그덕 하는 소리가 들리며 바로 길 옆에 있는 작은 문이 열리더니 연이어 대여섯 명이 나왔다.
새로 나타난 대여섯 명을 보는 순간 초류빈은 비로소 정말 놀랐다. 그는 이 몇몇 사람이 거렁뱅이와 한패일 줄이야 죽었다 깨어나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알고보니 이번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각본에 의해 치밀하게 짜여진 함정이었다. 처음으로 작은 문에서 나온 사람은 바로 점을 치는 장님이었다. 이어 나온 사람은 외눈박이 부인, 청의인, 두부 장수.....
초류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빈틈없는 계획이었소. 내 진심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는 바이오."
장님은 여전히 차가운 안색으로 냉랭하게 대꾸했다.
"별말씀을....."
초류빈은 그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알고 보니 이번 일은 철전갑과 전혀 관계가 없었구려."
하고 말하자 장님이 천천히 그의 말을 받았다.
"그와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소. 단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렁뱅이가 말을 다투어 나섰다.
"단지 나는 철전갑을 본 일도 없고 또한 그가 누구라는 것도 모르기 때문에 당신부터 잡기 위해 조금 전에 그 연극을 꾸민 것이오."
초류빈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쓴웃음만 지었다.
"정말 멋진 연극이었소."
장님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멋진 연극을 꾸미지 않고서야 어떻게 초탐화를 함정에 빠뜨릴 수 있겠소?"
"알고 보니 여러분들은 내가 누구라는 것도 벌써 알고 있었구 려."
"당신이 이 성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우린 이미 당신의 뒤를 따랐소."
"그런데 나를 함정에 유도한 목적이 무엇이오?"
그의 질문에 답하는 자는 항상 앞 못 보는 장님이었다.
"철전갑 때문에 일이 비롯된 것이오. 우린 천방백계로서 그를 찾으려 했지만 도저히 행방을 알아낼 수가 없었소. 그런데 만약 초탐화가 우리와 함께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그는 만사를 제쳐 놓고 우리한테 달려올 것이오."
초류빈은 여유만만하게 웃었다.
"만약 그가 오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의 노고는 수포로 돌아갈 게 아니겠소?"
장님의 말투는 단호했다.
"당신이 그의 일에 절대 관여하지 않을 수 없듯이 그 역시 당신의 일이라면 목숨마저 바칠 각오가 돼 있을 것이오. 두 분의 관계에 대해 우리들은 낱낱이 알고 있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계획을 세울 리가 있겠소?"
초류빈은 이런 계획을 꾸민 장본인이 바로 눈앞에 있는 장님이라고 생각했다.
"귀하께서 이런 계획을 세운 것으로 미루어 지모(智謀)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을....."
장님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나에게 그런 지모가 있다면 앞 못 보는 장님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오."
"당신이 아니라면......"
초류빈의 눈길은 자연히 거렁뱅이에게 쏠렸다.
거렁뱅이는 히죽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그런 묘책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위인이 아니오. 나는 머리가 이상하기 때문에 남을 해친다는 생각만 해도 골이 부서질 것만 같소."
초류빈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심각하게 말했다.
"알고 보니 여러분의 막후엔 다른 주모자가 있는 모양이구려."
장님은 지체하지 않고 그의 말을 받았다.
"그가 누구인지는 묻지 마시오. 잠시 후면 자연히 만나게 될 테니....."
이어 그는 수중의 죽장을 살짝 떨쳐 초류빈의 양쪽 무릎 환골혈(環骨穴)을 찍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그를 만나게 되면 당신은 곧 삶의 회의를 느끼게 될 것이오."
39 소이비도 제3권 어둠 속의 거래
어둠 속의 거래
그녀는 손을 내밀어 접은이의 손을 잡았다.
"화나셨나요?"
"흥!"
젊은이는 차가운 안색으로 냉소만 칠 뿐이다.
그러자 설소하는 그를 살짝 앞으로 끌어당기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호호호...정말 어린애 같군요. 자, 어서 이리 들어오세요. 제가 오늘은 색다른 방법으로 즐겁게 해 드리겠어요."
젊은이는 계속 차가운 안색을 보이려 했지만 그녀의 말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바로 이때였다.
"으악!"
어디선가 느닷없이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비명소리는 숲 속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앞서 떠난 회의인이 어찌된 영문인지 뒷걸음질치면서 숲에서 몰려나오고 있었다. 그가 뒤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선혈이 발밑에 뚝뚝 떨어졌다. 숲을 빠져나오자 그는 비로소 몸을 돌려 가마가 있는 쪽으로 도망치려 했다.
주위는 비록 어두웠지만 그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다는 것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누구에 의해 양 미간에 일검을 맞은 게 분명했다. 흑의인은 이때 숲 속으로 들어가려다가 그의 모습을 보자 이내 안색이 변하여 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졌다. 그와 동시에 회의인이 썩은 통나무처럼 그의 발밑에 쓰러졌다.
회의인은 혹시 숲 속에서 귀신을 만난 게 아닐까? 살인을 하는 악귀(惡鬼)!
흑의인은 자신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져 역시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한 자루의 비수를 꺼내어 칠흑같은 숲 속을 주시하며 싸늘하게 외쳤다.
"누구냐?"
숲 속에선 아무런 반응도 오지 않았다. 잠시 후 비로소 숲 속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키가 헌칠한 자로서 무릎까지 오는 황금색 장삼을 입고 있었다. 머리엔 커다란 죽립을 눌러 쓰고 있어 얼굴은 자세히 볼 수 없었다.
그는 비단 걸음을 옮기는 자세가 특이할 뿐 아니라 검을 찬 방법도 다른 사람과 달랐다. 단지 아무렇게나 비스듬히 허리춤에 꽂아 놓았을 뿐이다. 검은 길지 않고 검집에 들어 있었다. 이 자의 얼굴을 볼 수 없으니 흉악하게 생겼는지 아니면 순하게 생겼는지 알 수 없었다.
한데, 흑의인은 그의 모습을 보자 어찌된 영문인지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치며 손에 식은땀이 배었다. 그 자가 소리없는 살기를 대동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설소하는 가마 속에 앉아서도 그 자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았다.
형무명.
그가 살아 있으니 죽은 사람은 자연히 초류빈일 것이다. 설소하는 웃었다. 그러나 속으로만 웃은 것이지 얼굴엔 두려워하는 기색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녀는 곁에 있는 젊은이의 손을 꼭 쥐고 연신 몸을 떨었다.
"무서워요. 저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나요?"
젊은이는 억지로 웃음을 보였다.
"그가 누구이든 내가 여기 있는 한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소."
그 말을 들은 설소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생긋이 웃었다.
"이젠 무섭지 않아요. 당신이 절 지켜줄 테니까요. 당신이 제 곁에 있는 한 어느 누구도 감히 저를 건드리지 못할 거예요."
젊은이는 그녀의 말에 용기를 얻은 듯 가슴을 폈다.
"그렇소.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이리 가까이 다가오면 당장 없애 버리겠소."
큰소리는 쳤지만 사실 이 젊은이도 형무명에게서 풍기는 살기에 눌려 등줄기에선 이미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만 그는 아직 젊기 때문에 자기가 좋아하는 여인 앞에서 나약한 것을 보이고 싶지 않을 따름이었다. 형무명이 흑의인 앞으로 다가왔다.
흑의인의 손엔 여전히 예리한 비수가 쥐어져 있었다. 그는 이 비수로 숱한 사람을 죽인 경험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어찌된 영문인지 선뜻 이 비수를 전개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형무명의 죽어 있는 잿빛 눈동자를 보았던 것이다.
형무명은 아예 그를 보지도 않은 듯 냉랭하게 물었다.
"네 손에 쥐고 있는 비수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느냐?"
이 엉뚱한 질문에 흑의인은 멍해졌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질문을 던진 이상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사람을 죽일 수 있다."
형무명의 서릿발같이 차가운 음성이 곧 그의 말을 이었다.
"그럼 날 죽여라."
흑의인은 다시 멍해질 수밖에. 그는 잠시 멍청하게 서 있다가 부자연스럽게 웃었다.
"나는 너와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왜 너를 죽이겠느냐?"
형무명의 대꾸는 칼날처럼 흑의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네가 나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너를 죽이기 때문이다."
흑의인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그의 이마에서 구슬같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얍!"
싸늘한 기합소리와 함께 흑의인은 이를 악문 채 수중의 비수를 전광석화같이 내뻗었다. 무기가 짧을수록 적을 상대함에 있어 위험도가 높다. 그런데 흑의인은 이토록 짧은 비수를 사용하고 있으니 독특한 초식을 터득한 게 분명했다. 물론 속도도 빨랐다.
그러나 비수가 전개되자마자 검광이 허공에 가득 수놓아졌다. 이어 짤막한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흑의인은 땅에 쓰러졌다. 형무명의 검은 아예 검집에서 나온 적이 없는 듯 그대로 검집에 들어 있었다. 정말 빠른 검법이었다.
남색장포를 입은 젊은이도 검의 명수로서 항상 자신의 검법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 세상에 자기보다 검법이 더 빠른 사람이 있으리라곤 믿지 않았었다. 지금에서야 그것을 믿게 된 것이다.
설소하는 그의 눈가에 계속 경련이 이는 것을 보자 홀연 그의 손을 들고 조급하게 말했다.
"저 사람의 검법은 너무나도 빨라요. 그러니...당신은 속히 이곳을 떠나세요. 제 염려는 하지 말고....."
이 젊은이의 나이가 만약 사오십 세였다면 그녀의 말대로 당장 이곳을 떠났을 것이다. 사오십 세가 된 사람이라면 생명이 체면보다 귀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생명은 고귀(高貴)하지만 애정은 그보다 더욱 귀중하다는 말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필경 젊은이의 입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오십 세를 넘기기가 어렵다.
젊은이는 이를 악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말투는 견결(見決)하기 그지없었으나 당장 뛰쳐나갈 뜻은 없었다.
설소하는 눈동자를 사르르 굴리며 다시 간곡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당신은 죽을 수 없어요. 당신에겐 부모와 처자식이 있잖아요. 그러니 어서 도망가세요. 제가 당신을 위해서 저 사람을 붙잡고 늘어지겠어요. 저는 당신을 위해 죽고 싶어요."
그 말을 들은 젊은이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밖으로 뛰쳐나갔다.
설소하의 입가엔 다시 달콤한 미소가 감돌았다. 여자가 남자로 하여금 자기를 위해 생명을 바치게 하려면 우선 상대방에게 자기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있는가를 인식시켜 줘야 한다. 그로 하여금 스스로 감동을 느껴 자발적으로 목숨을 바치게끔 하는 것이다.
그 방법을 설소하는 숱하게 사용해 오면서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이번에 그녀는 비단 마음속으로 웃었을 뿐 아니라 얼굴 전체로 웃었다. 남색장포를 입은 젊은이는 이제 영원히 자기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설소하는 잘 알고 있었다.
검광은 눈부셨다. 남색장포를 입은 젊은이는 비단 검법이 뛰어날 뿐더러 그가 사용하는 검도 역시 찾아보기가 드문 보검이었다. 순식간에 그는 형무명을 향해 다섯 검을 전개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그는 벌써 깨닫고 있었다.
형무명은 뜻밖에도 전혀 반격을 하지 않았다. 남의청년이 전개한 다섯 검은 분명히 모두 상대방의 급소를 노려 전개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전부 빗나가고 말았다.
형무명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물론 질문을 던진 것이다.
"너는 점창파(點蒼派)의 부하냐?"
남의청년은 손을 거두고 더 이상 여섯 번째 검초를 전개하지 못했다. 상대방의 잿빛 눈동자는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상대방이 어떻게 해서 자기의 사문(師門)을 단번에 간파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형무명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사천령(謝天靈)은 너와 어떤 관계냐?"
남의청년은 바싹 마른 입술에 침을 묻히며 대꾸했다.
"나의...스승이다!"
형무명은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곽숭양이 이미 내 손에 죽었다는 사실을 아느냐?"
그는 별안간 밑도 끝도 없이 이런 말을 내뱉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의청년은 그의 말을 알고 있었다. 사천령은 점창파의 장문인으로서 호(號랐)는 천남제일검객(天南第一劍客)이라 일컫는다.
그는 평생 동안 천하무적이었지만 유독 곽숭양에게 계속 세 번을 패했다. 그런데 지금 곽숭양이 형무명의 손에 죽었다니 사천령은 자연히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사천령의 제자라면 더욱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남의청년의 안색이 금방 창백하게 변했다. 누구라 하더라도 형무명같은 사람은 절대 거짓말을 할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형무명은 다시 말을 꺼냈다.
"나는 단 일격에 너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 믿느냐?"
남의청년은 이를 악문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음 순간 검광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형무명은 어느 새 검을 전개해 이미 검끝으로 남의청년의 목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형무명은 냉랭하게 말했다.
"나는 단 일격에 네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 이젠 믿겠느냐?"
남의청년의 이마에선 구슬 같은 땀방울이 비오듯 떨어지고, 입술을 깨물어 피를 흘리고 있었다.
"죽이려면 어서 죽여라!"
"너는 정말 죽고 싶으냐?"
남의청년은 설소하가 들을 수 있도록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외쳤다.
"대장부로 태어나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느냐? 어서 죽여라."
그는 비록 죽음을 도외시하는 장부의 호기(豪氣)를 연출하려고 애썼지만 기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다.
형무명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한마디 한마디 뚜렷하게 말했다.
"내가 만일 너를 죽이지 않겠다면, 그래도 너는 죽고 싶으냐?"
남의청년은 그 말을 듣자 멍해졌다. 계속 생을 누릴 수 있다면 누가 죽길 원하겠는가.
형무명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그녀를 위해 죽음으로써 그녀의 마음속에 네가 영웅이라는 생각을 뿌리 깊이 박아 주고 싶겠지만 만약 네가 정말 죽는다면 그래도 그녀가 너를 좋아할 것 같으냐?"
여기까지 말한 그는 검끝으로 가마쪽을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좀더 간단하게 말해 저기 있는 계집이 지금 죽는다면 그래도 너는 그녀를 좋아하겠느냐?"
남의청년은 대답할 말을 잃었다. 차가운 검날은 이미 그의 목줄기에서 떠났다. 그는 자기가 갑자기 바보가 된 느낌이 들었다.
형무명은 그의 대답을 애당초 기대하지 않은 듯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여자가 보는 견지로선 이미 죽은 백 명의 영웅보다는 아직 살아 있는 한 명의 졸부가 낫다. 네 자신도 마찬가지로 백 명의 미녀보다 살아 있는 한 명의 평범한 여인을 원할 것이다. 내가 말한 뜻을 알겠느냐?"
남의청년은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억지로 웃음을 보였다.
"알겠습니다."
그의 말투가 공손하게 변해 있었다.
형무명은 아무 표정도 없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지금도 역시 죽고 싶으냐?"
남의청년은 얼굴을 약간 붉히며 멋쩍게 대답했다.
"역시 산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좋아, 이제야 너는 간단한 진리를 깨달았군."
하고 형무명은 말하더니 다음 말을 이어갔다.
"나는 평소에 별로 말이 없다. 그런데 오늘은 너에게 그 간단한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해 시간을 많이 낭비했다. 네가 그 진리를 깨달아야지만 나는 비로소 너를 죽일 수 있다."
남의청년은 질겁을 했다.
"나를 죽이겠다니....."
형무명의 음성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나는 질문만 하고 대답은 하지 않는다. 단지 곧 죽게 될 사람에게는 예외다."
"하지만...끝내 나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어째서 그런 말을?"
"나는 죽고 싶어하는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 네가 만약 죽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면 내 무슨 재미로 너를 죽이겠느냐?"
남의청년은 야수가 울부짖듯 고함을 지르며 일검을 전개했다. 그의 고함소리는 극히 짧았다. 그가 검을 전개하자마자 형무명의 검이 이미 그의 입 속으로 파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차가운 검날이 그의 혓바닥에 붙었다. 그는 어쨌든 죽음의 맛을 음미했다. 검은 이미 검집으로 들어가 있었다.
형무명에겐 특이한 습관이 있다. 그것은 그가 매번 살인을 한 후 꼭 재빨리 검을 검집에 넣는 것이다. 마치 다시는 검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왜냐하면 그의 검이 검집 속에 있으면 다른 사람은 비교적 경계를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이 경계를 소홀히 하길 바란다. 그러한 사람은 보통 사람보다 비교적 빨리 죽는다.
설소하는 줄곧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동작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있는 그녀의 눈빛은 첫사랑의 연인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처럼 온유하기만 했다.
형무명은 시종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이때 설소하는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매혹적인 자세로 그를 향해 걸어갔다. 그도 역시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에게 눈길을 돌리진 않았다. 설소하는 비록 웃고 있지만 눈동자는 축소되고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미를 느꼈다.
설소하가 허리를 흔들고 있었기에 두 젊은 가마꾼은 그만 넋을 잃어 번개보다도 빠른 검광을 보지 못했다. 설소하 앞으로 걸어온 형무명의 눈동자는 여전히 죽은 것이었다. 그리고 텅빈 상태에서 먼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먼 곳은 일편의 암흑이 깔려 있었다.
설소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왜 감히 저를 쳐다보지 못하죠? 저를 쳐다본 후에는 저를 죽일 용기를 잃을까 봐 두려워서인가요?"
그녀가 느낀 심상치 않은 육감은 죽음의 그림자였다.
형무명은 입가에 가벼운 경련을 일으키며 한참 후에야 싸늘하게 외쳤다.
"내가 당신을 죽이러 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이오?"
설소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어요. 제아무리 잔혹하고 무정한 사람일지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죽일 땐 역시 신색이 달라지기 마련이죠."
그녀는 처량하게 웃으며 다음 말을 이어갔다.
"당신에게 한마디 묻겠어요. 저의 죽음은 이미 결정됐으니 제 질문에 대답해 주겠죠?"
형무명은 다시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비로소 냉랭하게 말했다.
"물으시오. 곧 죽게 될 사람에겐 거짓말을 하지 않소."
설소하는 그의 얼굴을 주시하며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
"묻겠는데 누가 당신을 시켜 저를 죽이라 했죠?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이죠?"
형무명은 주먹에 힘을 주며 발광하듯 싸늘하게 외쳤다.
"아무도 없소. 그리고 이유도 없소!"
"아니에요. 필시 당신에게 지령을 내린 사람이 있을 거예요. 당신은 절대 스스로 생각해서 저를 죽이지는 않을 사람이니까요."
그녀는 더욱 처량하고 더욱 아름답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저는 당신이 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그러니 절대 저를 죽일 생각은 하지 못할 거예요."
사랑, 다른 사람의 입에서 이 단어가 튀어나오면 때로 어색한 느낌도 있지만 그녀의 입을 통해 나온 그 한마디는 아름다운 음률과도 같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비단 입으로 말할 뿐 아니라 혀로써 그리고 손, 다리, 허리, 눈까지 동원하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말을 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그 말을 하기 싫어하고 어떤 이는 입 밖에 낼 용기를 갖지 못한다. 그리고 밥먹듯이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세상에서 설소하보다 그 단어를 아름답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주먹을 쥔 형무명의 손에 더욱 힘이 가해졌다. 거의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선 여전히 하등의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신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설소하가 설사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아도 입가에 띠어진 자신 있는 미소가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자신이 있어요. 당신이 만약 저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절대 조금 전에 그 사람들을 죽이진 않았을 거예요."
형무명은 그녀의 말을 중단시키지 않고 계속 들었다.
설소하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당신이 그들을 죽인 것은 질투에서 비롯된 거예요."
"질투라고?"
"그래요. 저를 건드린 사람, 아니 심지어 저를 본 사람마저도 당신은 죽이려 할 거예요. 그것이 바로 질투예요. 저를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질투를 느낄 수 있나요?"
형무명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짐하듯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단지 당신을 죽여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오. 내가 죽여야 할 사람은 절대 살아 남을 수가 없소!"
"정말 저를 죽일 생각인가요? 그런데 왜 제게 눈길을 돌리지 않죠? 그럴 용기가 없나요?"
형무명의 손이 드디어 검자루를 쥐었다. 희미한 등불 아래서도 그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혀 있음을 역력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식은땀이다.
설소하는 그의 얼굴을 주시하며 천천히 말했다.
"당신이 만약 저를 쳐다볼 용기조차 없다면 설사 저를 죽여도 필시 후회하게 될 거예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형무명은 움직이지 않았다. 설소하의 손은 드디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그의 품안으로 파고들어 손으로 그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당신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다면 저를 그 사람에게 데려다 주세요."
그녀의 손가락이 교묘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어느 곳에서 손가락이 멎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형무명의 호흡과 근육이 긴장돼 갔다. 그는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누...누구에게 데려가 달라는 거요?"
"당신에게 저를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사람을 말하는 거죠. 저는 그로 하여금 생각을 달리하게 할 자신이 있어요."
그녀는 그의 귀뿌리를 가볍게 깨물며 말을 이어갔다.
"안심하세요. 저는 절대 당신으로 하여금 후회하지 않게 하겠어요."
형무명은 여전히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칠흑같은 숲 속을 바라보았다.
설소하는 눈동자를 사르르 소리없이 굴리더니 나직이 물었다.
"그는 바로 저 숲 속에 있나요?"
형무명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답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설소하의 달콤한 음성이 다시 그의 귓전을 간지럽혔다.
"좋아요. 제가 가서 그를 만나보겠어요. 그가 정말 저를 놓아주지 않겠다면 그때 다시 당신이 저를 죽여도 늦지는 않을 거예요."
그녀가 몸을 돌려 숲 속으로 걸어가자 형무명의 눈동자는 비로소 그녀의 뒷모습에 던져졌다. 일순 그의 잿빛 눈동자에 난생 처음으로 생명이 되살아났다. 환희인지 슬픔인지, 아니면 후회인지 그것은 심지어 그 자신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어둠에 잠긴 숲 속은 손을 코앞에 내밀어도 다섯 손가락이 잘 보이지 않았다. 설소하는 비록 빠른 걸음으로 걷지는 않았지만 하마터면 한 사람과 정면으로 충돌할 뻔했다. 그 사람은 그곳에 한 채의 빙산(氷山)처럼 서 있었다.
사실 그의 몸집은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태산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설소하는 본래 몸을 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피하기는커녕 도리어 상대방의 품안으로 쓰러졌다.
상대방은 뜻밖에도 그녀의 몸을 부축해 주지 않았다.
설소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자신의 몸을 고정시켰다.
"너무나 컴컴해서...정말 죄송합니다....."
그녀는 상대방과 한 자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서 있었기 때문에 상대방이 필시 자기의 가쁜 숨소리를 듣고 있으리라 믿었다. 또한 그 호흡소리는 충분히 남자의 마음을 동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상대방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역시 이런 방법으로 형무명의 살수를 전개할 수 없도록 만들었느냐?"
설소하의 눈이 어둠 속에서도 진주처럼 빛났다.
"그를 시켜 저를 죽이게 한 사람이 바로 당신인가요? 당신이 바로 상관방주란 말예요?"
"그렇다. 내 사전에 분명히 밝혀 두지만 너의 이러한 방법은 나에겐 하등의 효과가 없다."
그의 음성은 냉혹하지도 않고 음흉하지도 않았다. 마치 책을 읽어 나가듯 천천히, 감정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
설소하의 눈동자가 더욱 빛났다.
"그럼 무슨 방법을 동원하여야지만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나요?"
상관금홍의 음성은 여전히 담담하기만 했다.
"네가 지니고 있는 방법을 전부 동원해 보아라."
설소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절대 여자에게 쉽사리 마음이 동요될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왜 형무명을 시켜 저를 죽이게 했지요?"
상관금홍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수시로 살인을 해야 될 사람은 절대 감정을 지녀선 안 되지. 전혀 감정이 없는 사람을 훈련해 낸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형무명을 너한테로 보낸 것이다."
설소하는 백옥처럽 희디흰 치아를 드러내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당신이 만약 저를 죽인다면 손실이 많을 거예요."
상관금홍은 아무 표정없이 반문했다.
"그래?"
설소하는 그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저는 형무명보다도 쓸모가 많아요."
"그래서?"
"형무명은 단지 살인을 할 줄 알지만 저도 역시 살인은 할 줄 알아요. 그는 검으로써 살인을 하며 피까지 흘리게 하여야 되기 때문에 수준이 낮아요. 저는 피를 보이지 않고 검을 사용하지 않아도 살인을 할 수 있죠."
"그는 살인을 하는데 있어 최소한 너보다 빠르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늦은 것은 늦은 대로 이점이 있어요. 안 그런가요?"
"너는 살인을 하는 이외에 또 무슨 이점이 있느냐?"
"저에겐 돈이 많아요. 제가 지니고 있는 돈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요. 남들이 알면 미칠 정도로 많죠."
"그것은 굉장한 이점이군."
그의 음성은 다소 감정이 곁들여 있었다. 그는 돈의 용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소하는 강조하듯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저는 똑똑하므로 당신을 위해 많은 일을 해 드릴 수도 있어요."
"그것은 사실이다. 똑똑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 많은 돈을 모을 수 없으니까 말이다."
설소하의 음성은 점점 변화가 일었다. 만약 그것을 색깔로 표현한다면 필시 분홍빛일 것이다.
"그 외에도 저에겐 물론 다른 이점도 있어요."
말끝을 약간 흐린 그녀는 요염하게 웃었다.
"호호호...당신이 남자라면 곧 제가 한 말이 사실임을 믿게 될 거예요. 당신만 원하신다면 저의 모든 이점은 전부 당신 거예요."
상관금홍은 또다시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한마디 한마디 천천히 내뱉었다.
"나는 남자다."
숲 속에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다. 형무명의 전신은 이미 이슬로 인해 축축히 젖어 있었다.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석고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덧 동녘 하늘에서 먼동이 터오기 시작했으나 안개가 짙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데 숲 속에서는 계속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신음인지 탄식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간혹 설소하의 간드러진 웃음소리만이 안개를 뚫고 뚜렷이 들려왔다.
"호호호...당신은 과연 남자예요. 그리고 당신같은 남자는 난생 처음이에요. 당신이 이러한 남자일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곧이어 상관금홍의 음성이 들렸다.
"네가 이러한 여자이기 때문에 내가 비로소 이러한 남자가 된 것이다."
그의 음성은 뜻밖에도 여전히 담담했다. 이것은 실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족에 찬 설소하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날이 곧 밝아올 테니 저는 이만 돌아가야겠어요."
"왜 이렇게 서두르느냐?"
"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게 누구냐?"
"낭천이지요. 당신도 물론 그의 이름을 들었겠죠!"
"나는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다. 너는 왜 아직 그를 죽이지 않았지? 너의 살인수법은 과연 속도가 느리구나."
"저는 그를 죽일 수가 없어요. 그리고 감히 죽일 수도 없어요."
"어째서?"
"제가 만약 그를 죽이면 초류빈이 필시 저를 죽일 거예요."
이번에는 상관금홍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설소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했다.
"저는 당신이 초류빈을 죽이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고서는 형무명을 시켜 저를 죽이게 할 리가 없으니까요. 당신은 형무명으로 하여금 초류빈을 상대케 하기 위해 그가 연약해질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 거예요."
상관금홍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너는 초류빈을 두려워하고 있느냐?"
설소하는 왜 형무명과 상관금홍이 모두 자기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도 역시 초류빈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설소하는 상관금홍의 마음을 좀더 자극시키기 위해선 두려움을 더욱 과장시켜야만 했다. 그녀는 대답을 하기 앞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칠 정도로 두려워요."
과연 그녀의 예측대로 상관금홍은 다음 질문을 던졌다.
"나와 비교해서 어떠냐?"
설소하는 어떠한 기회도 놓치지 않는 여자다.
"그는 당신보다도 더 무서워요. 저는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게는 할 수 있지만 절대 그의 마음을 동요시킬 수는 없어요."
그녀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그만 없애 버린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될 거예요. 초류빈의 가장 무서운 점은 이 세상 어떤 것에 대해서든 미련을 두고 있지 않다는 거예요."
"그도 역시 사람이니 필경 어떤 약점이 있을 것이다."
"그의 유일한 약점은 설벽운이에요. 하지만 저는 감히 설벽운으로써 그를 위협할 용기가 없어요."
"그럴 만한 이유라도 있느냐?"
"저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의 손에 비도가 쥐어져 있는 한 저는 어떠한 일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어요."
그녀는 다시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가 살아 있는 한 감히 그를 건드릴 생각조차 할 수 없어요."
상관금홍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한참 허공을 바라보다가 못을 박듯 뚜렷하게 말했다.
"이젠 안심해도 좋다. 그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설소하의 응석을 부리는 듯한 교성이 들리더니 그들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안개가 차츰 걷히기 시작했다.
형무명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서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잿빛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듯 이슬방울이 매달려 있는 죽림의 가장자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상관금홍이 홀로 숲 속에서 걸어나오는 것도 보지 못한 듯했다.
상관금홍도 역시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그의 앞을 지나가며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 아침은 안개가 깔렸으니 필시 좋은 날씨가 될 것이다."
형무명은 잠자코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좋은 날씨가 될 것입니다."
이어 그는 몸을 돌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상관금홍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선후로 해서 드디어 잠잠한 아침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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