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1일 목요일

64 소이비도 제4권 사랑과 우정







사랑과 우정



하나는 사랑이며 또 하나는 미움이다. 낭천은 사랑의 힘으로 해서 다시 삶을 찾아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미움의 힘으로 해서 형무명에게 생명의 활력을 불어넣어 준 것이다.

그는 형무명이 삶을 다시 영위하기를 원했다. 만약 그것이 복수라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복수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복수를 한다면 인류의 역사는 더욱 찬란한 것이 될 테고 인류의 생명은 아마 영원히 존재될 것이다.

어찌 되었든 복수를 했다는 것은 통쾌하고 유쾌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낭천은 통쾌함과 유쾌함을 느끼고 있을까? 그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은 다만 피로감뿐이었다.

그는 손에 있던 검을 한참이나 넋이 빠진 사람처럼 바라보고 있다가 힘없이 떨어뜨리고 말았다.

손소홍은 이런 광경을 내려다보고 난 후 가볍게 탄식을 토해냈다. 그러더니 천천히 말을 꺼냈다.

"사람 한 명을 죽이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에요."

이것은 바로 초류빈이 했던 말이다. 어떠한 사람에 대해서든 그의 출발점은 원점에서 시작된다.

미움은 궤멸을 조성하지만 사랑은 사람에게 삶의 참맛을 느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은 항상 이렇게 넓으며 그의 인격은 영원히 위대한 것이다.

손소홍은 지금 낭천이 초류빈과 똑같이 변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초류빈을 바라보았다. 초류빈의 표정도 몹시 피곤해 보였으며 말조차 하기 싫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손소홍은 그를 한동안 쳐다보더니 갑자기 웃으며 말을 꺼냈다.

"이 세상에서 공력이 가장 고강한 두 사람을 두 분이 격파시켰어요. 그리고 이 세상에서 세력이 가장 큰 방파도 두 분의 손에 의하여 와해 되었으니 두 분께서는 기뻐해야 할 것인데 어째서 도리어 그렇게 암담한 표정을 짓고 계시지요? 마치 자신이 패한 것같이 ....."

초류빈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이윽고 길게 탄식을 터뜨리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제나 한 사람이 승리를 하고 나면 유난히 피곤해지고 적적해지고 적막해지는 법이오."

그러자 손소홍은 의문스럽다는 눈초리로 물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에요?"

초류빈은 마른침을 한 차례 삼키고 담담하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미 승리를 했고 또한 완전히 성공을 했기 때문이오. 그러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분투할 것이 없게 되며 공허만 남게 마련이오."

여기까지 말을 하고 난 초류빈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반대로 패배를 한 사람은 도리어 전신이 밝아지고 다음을 위해 분투할 수가 있소."

그러자 손소홍은 무엇인가 잠시 생각을 더듬는 듯하더니 즉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승리를 하고 성공하는 것도 결코 유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인가요?"

초류빈은 또다시 침묵을 지키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드리면서 말을 꺼냈다.

"하하...비록 그렇게 유쾌한 것은 못되지만 패배한 것보다는 아마 훨씬 더 나을 것이오."

승리와 성공은 사람에게 결코 충분한 만족감을 가져다 줄 수는 없으며 또한 건전한 쾌락을 느끼지도 못한다.

건전한 즐거움은 끝없는 어느 목적을 향해 고전분투할 때가 있는 것이다. 만약 누구를 막론하고 그러한 즐거움을 느꼈다면 그 사람은 아마 이 세상을 헛되게 살아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장정― 정자란 사람들이 이별을 하는 장소로 정해졌고 또 사용해 온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별이란 우리 사람들의 가슴에 아픔을 안겨다 주는 것이다.

주위는 더욱더 처량하게 여겨졌다.

장정 밖에 있는 작은 오솔길에서 한 쌍의 남녀가 작별을 아쉬워하면서 무엇인가 열심히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청년은 얼핏 보아 매우 영준하게 생겼으며 여자 또한 아름다웠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가 사랑하고 있는 사이인데 청춘의 환희를 누리지도 아니하고 이별을 하려는 것인가?

청년의 몸에는 검이 메어져 있었다. 청년의 두 눈은 눈물을 흘렸던 탓인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여기까지 바래다 주어서 고맙소. 이제는 그만 돌아가 보시오."

그러자 낭자는 천천히 고개를 떨구면서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언제쯤 다시 돌아올 것이죠?"

청년은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다소 주춤거리더니 침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것은 확실하게 모르겠소. 어쩌면 일 년이고...어쩌면....."

이 말을 듣고 난 낭자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어째서 꼭 가야 하며 왜 저를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시는 것이죠?"

"내 벌써 얘기했지만 나는 그들을 찾아서 그들을 꼭 이겨야만 하오."

이렇게 말한 한 청년의 두 눈에서는 강한 광채가 폭사되어 나왔다. 청년은 먼 곳을 바라보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상관금홍, 곽숭양, 초류빈, 여봉선...나는 그들에게 내가 그들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 준 후에....."

말이 끝나자 낭자는 다그쳐 물었다.

"그렇게 한 후에 어떻게 하시려는 것이죠?"

낭자는 잠시 말을 멈추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지금 매우 행복스러운데 당신은 그들을 격파시키면 우리가 더욱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인가요?"

청년은 가벼운 한숨을 몰아쉬고 나더니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오. 하지만 나는 꼭 해야만 하오."

낭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문스러운 시선으로 청년을 주시하며 물었다.

"무엇 때문이지요?"

청년이 말했다.

"나는 이렇게 밑바닥에서 평생을 지낼 수가 없소. 나는 꼭 유명해져야 하오. 상관금홍이나 초류빈과 같이 말이오. 틀림없이 해낼 수 있을 것이오."

청년은 이렇게 말하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자 낭자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는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자상스러움과 사랑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이윽고 길게 한숨을 터뜨리며 안정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당신은 틀림없이 해낼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어요. 당신이 언제 돌아오시건 간에 저는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들은 이별의 아쉬움을 가슴 아파하고 있었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미래에 대한 행복이 깃들여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별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정자가 있는 숲에서 그들의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초류빈과 손소홍 그리고 낭천이었다.

청년이 걸음을 옮겨 차츰 멀리 사라지자 손소홍은 길게 탄식을 터뜨리면서 입을 열었다.

"저 청년이 만약 상관금홍의 최후를 알고 있다면 아마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서 쉽사리 떠나지는 않을 것이에요....."

손소홍은 초류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두 눈은 어느 틈엔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킨 채 초류빈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그는 당신처럼 유명해지고 싶어하는데 그러나 당신은...당신은 그보다 더 즐거우신가요? 제 생각이지만 만약 당신이라면 절대로 저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에요."

초류빈의 시선은 청년이 사라진 곳에 멈추어져 있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그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만약 그였더라면 나 역시 저렇게 했을 것이오."

순간 손소홍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떠올렸다.

"당신이....."

초류빈이 입을 열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제나름대로 주어진 목적을 갖고 그 목표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해서 전진해야 하오. 단 그 결과가 성공인지 패배인지에 대해서는 그들은 생각하지 않고 또한 마음에 두지도 않소."

그의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가 어려 있었으며 두 눈에는 일종의 강한 광채가 폭사되어 나왔다.

"그러한 사람들이 바보라는 것은 일반 사람들의 견해요. 하지만 이 세상에 만약 그러한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변할 것인지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오."

손소홍의 두 눈에도 청년과 이별을 한 다정한 소녀와 같이 따뜻한 사랑의 광채가 폭사되어 나왔다.

낭천은 멀리 떨어져 서 있다가 이때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다가왔다. 하지만 손소홍은 초류빈의 손을 꼭 잡은 채 놓지를 않았다.

그녀는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사랑이 누구 앞에 내놓아도 결코 부끄러운 게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하고만 싶었다.

그러자 낭천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제나름대로의 생각이지만 그녀는 결코 돌아올 것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원래 이곳에서 설벽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설벽운과 호유성 사이에 어떠한 일이 생겼는지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상관금홍의 최후를 모르고 떠난 청년과 같은 것이다.

이 세상에는 모르는 채 그대로 지나쳐도 좋은 일이 많이 있다. 손소홍은 설벽운의 이름이 나오자 초류빈을 잡고 있던 손을 급히 놓았다. 그러더니 다시 손을 잡으면서 말을 꺼냈다.

"그녀는 나와 약속을 했기 때문에 틀림없이 올 것이에요."

낭천이 즉시 말을 꺼냈다.

"그녀는 아마 오지 않을 것입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손소홍은 두 눈을 치켜올리며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다그쳐 물었다.

"무엇 때문이지요?"

그러자 낭천은 길게 숨을 몰아쉬고 나더니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그녀는 자신이 이곳에 올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오."

이러한 말은 손소홍이 물었던 것에 대한 대답이었지만 그가 대답을 할 때는 시선이 초류빈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초류빈도 손소홍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는 얼마 전만 해도 설벽운의 얘기만 나오면 내심 더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자물쇠에 온몸이 채워져 꼼짝도 못하는 것과 같았다.

그는 이러한 고통 속에서 영원히 헤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이러한 고통은 과거와 같이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다. 도대체 어떠한 힘이 그의 몸에 채워진 자물쇠를 풀어준 것인가? 그와 설벽운 사이에 생긴 감정은 오랜 세월을 두고 천천히 쌓여진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두 감정 중에 어느 쪽이 더 강하단 말인가?

이때 설벽운은 그들에게서 멀리 떠나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 올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호천강은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어머님께선 어찌하여 마지막으로 그를 한 번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이죠?"

그러자 설벽운이 도리어 반문했다.

"너는 무엇 때문에 그를 만나려는 것이냐?"

호천강은 갑자기 입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저는 아버님이 무엇 때문에 죽은 것인지 그에게 자세하게 알려주었으면 합니다."

호유성은 과거에 어떠한 잘못을 저질렀던 간에 지금은 자신의 피로써 완전히 씻어냈다. 아들로서 이러한 사실을 남에게 인식시켜 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설벽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했던 것은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 의당한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지 남에게 용서를 구하거나 또한 남이 알아주기를 원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렇게 말을 한 그녀는 잠시 멈추는 듯하더니 다시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비단 자신을 위해 빚을 청산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빚까지도 청산해 주셨다. 우리가 그냥 편안하고 무사하게만 살아간다면 너의 아버님께서도 편히 눈을 감게 될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초류빈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서로가 만난다는 것이 피차간의 고통이라는 것을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이상 호유성의 시체를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강호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금전방의 시체를 치우는 방법은 매우 특이할 뿐만 아니라 또한 매우 신속하다. 그들이 설사 찾아낸다고 해도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다만 고통뿐이다.

이것은 손소홍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녀는 할아버지의 시체를 영원히 찾을 수가 없다. 이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 무척이나 많은 것이다.

이러한 일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이러한 고통 따위는 빠른 시일 내에 잊어버려야 한다.

그것은 죽는다는 것이 결코 이러한 고통을 버릴 수 있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것이 결코 어떠한 일의 해결방법이 될 수는 없다.

장정에선 다시 이별의 장면이 벌어졌다. 이번에 떠나는 사람은 낭천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 정말로 장생불로가 있는지 그리고 죽지 않는 신선이 있는지 그 여부를 확인하겠다고 말했다.

그가 말했던 것은 물론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초류빈은 제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초류빈이 심왕, 우왕, 왕진황, 주칠칠 등 기인들에 대한 얘기를 할 때는 그때마다 이상하게 표정이 변하곤 했다.

혹시 그는 이들 선배 인물들과 어떤 미묘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가 이번에 해외로 나간다는 것은 그들을 찾아가기 위한 것이 아닐까? 초류빈은 모든 것이 궁금했으나 묻지 않았다.

사람은 개나 말처럼 꼭 그 종류와 족보가 있어야만 좋은 것은 결코 아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된다는 것은 모두가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친구 간의 이별에서 축복이라는 것은 빠질 수가 없으며 또한 가슴 아파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별에는 축복만이 있을 뿐 아픔은 없었다. 그들은 서로가 모두 잘 살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도 확신했다. 특히 낭천이 초류빈의 손을 보았을 때 그는 더욱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초류빈과 손소홍은 서로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의 손은 술잔을 잡고 있었던 시간이 더 많았던 것이다. 술잔은 매우 차가웠다.

하지만 지금 그는 부드러움과 따스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손보다 더 따스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낭천은 손소홍이 누구보다도 이 손을 아껴 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의 손에는 상처가 나 있기는 하지만 차츰 가라앉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상처가 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길게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과거는 모두 지나간 것이다.'

이 한 마디는 매우 간단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틀림없이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낭천과 초류빈은 이것을 다 해냈다.

낭천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삼 년 후에 저는 틀림없이 돌아올 것입니다."

이렇게 말을 꺼내고 난 그는 만면에 미소를 띤 채 그들의 손을 바라보면서 다시 말을 꺼냈다.

"내가 돌아왔을 때 두 분께선 한턱 단단히 내셔야 합니다."

초류빈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러나 삼 년이란 너무 긴 시간이 아닐까?"

그러자 낭천은 가벼운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제가 마시고 싶어하는 술은 매우 특이한 술인데 두 분이 마시게 해 줄는지 잘 모르겠군요."

손소홍이 물었다.

"그 특이한 술이란 대체 어떠한 술이에요?"

낭천은 마른침을 한 차례 삼키고 나서 여유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혼인을 축하하는 혼인주입니다."

그렇다. 낭천이 삼 년 후라고 말을 한 것은 바로 혼인주를 먹기 위한 것이다.

그러자 손소홍은 자신도 모르게 절로 얼굴을 붉혔다.

낭천이 입을 열었다.

"저는 모든 술이란 하나도 빼지 않고 다 마셔보았으나 혼인주를 마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니 나를 실망키시지 마십시오."

손소홍은 절로 고개를 숙였으며 얼굴이 더욱 붉어진 채 초류빈을 몰래 훔쳐보았다.

초류빈의 표정은 매우 이상했다.

혼인주라는 말에 그는 일시 동안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이더니 잠시 후에야 천천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 역시 온갖 술을 다 산 적이 있으나 혼인주를 산 적은 한 번도 없었네. 자네는 무엇 때문인지 알고 있는가?"

낭천은 물론 그것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자 초류빈이 직접 대답했다.

"그것은 혼인주의 값이 너무나 비싸기 때문이네."

순간 낭천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초류빈을 향해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다그쳤다.

"아니, 너무 비싸다니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초류빈은 활짝 웃으면서 다소 여유있는 어조로 말했다.

"남자가 남에게 혼인주를 낼 때는 자기 자신이 평생 동안 이 혼인주로 인하여 진 빚을 천천히 갚아야 한다는 것일세."

초류빈은 말을 잠시 멈추는 듯하더니 또다시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평생을 두고 빚을 갚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친구를 실망키시지는 않겠네."

손소홍은 그의 말에 기쁨과 부끄러움이 함께 엉켜 자신도 모르게 갑자기 초류빈의 품속에 파고들었다. 낭천도 함께 웃었다.

그가 이렇게 여유있게 웃어 본 적도 꽤 오래 된 것 같았다. 이렇게 웃고 있는 순간 그는 갑자기 자신이 젊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비단 자신에 대하여 용기와 신념을 넣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인생에 대해서도 희망을 가졌다. 이러한 순간 앙상한 가지들도 그의 눈에는 발랄하고 그리고 매우 생기가 있어 보였다.

그는 비록 앙상한 가지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는 강한 생명력이 싹트고 있었으며, 또 얼마 후에는 다시 새로운 싹이 돋아 제모습 그대로 돌아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커다란 힘이 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초류빈에 대해서 탄복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감복도 금치 못했다.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항상 영원한 웃음을 지니고 있는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웃음을 안겨다 준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뱀을 그리는데 발을 그린다는 것은 비단 쓸데없는 짓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바보스럽고 우스운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 대부분의 번뇌는 결국 웃음이 너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웃음이란 마치 향수와도 같은 것이다. 비단 자신의 몸에 향기를 담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에게 즐거움도 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남에게 웃음을 줄 수 있다면 설사 우둔한 일을 한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더니 어느덧 삼 년이란 시간이 말없이 흘렀다.

무림은 태평했으나 결코 조용한 것만은 아니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영웅, 효웅들은 물러났으나 그들 뒤엔 언제나 젊은이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란 대개 인생의 참뜻을 모르고 혈기에 의존해 자기 멋대로 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남을 위에 서고 싶은 야망에 자신들을 끊임없이 채찍질한다.

세대는 돌고 돌기에 젊은이들은 항상 분란을 만들며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한 자루의 검을 의지한 채 천하를 질타하고 싶은 욕망! 그것은 젊은이라면 누구나 가져봄 직한 꿈이며 일종의 활력소인 것이다.

지난 삼 년 동안 뭇젊은이들은 한 가지 목표에만 모든 것을 쏟았다.

비도탈명, 초류빈!

그를 꺾고 천하제일이 되고 싶은 목적뿐인 것이다.

상관금홍, 곽숭양, 여봉선 등이 사라진 지금에는 그 누구도 초류빈이 천하제일인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조그만 비도지만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비도탈명, 젊은이들은 죽을 줄 알면서도 달려든다.

하지만 삼 년 동안 상관금홍을 만난 사람은 없었다. 상관금홍이 쓰러진 후 초류빈은 자취를 감춘 것이다.

상관금홍의 실종은 많은 젊은이들을 실망시켰다. 그들은 초류빈을 꺾고 단숨에 유명해지고 싶었는데 그 야망을 이룰 수 없게 된 것이다.

그즈음 강호엔 유명해지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소문이 나돌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백삼괴객(白衫怪客)이 한 자루의 목검을 차고 항주(抗州)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도로에서 내노라 하는 고수들을 제패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치는 그의 목검이 번개보다 빠르다 하고 혹자는 그와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초류빈밖에 없다고 한다.

결국 초류빈이 없어진 당금에선 백삼괴객이 천하제일인으로 부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많은 젊은이들은 백삼괴객을 꺾어 보려고 파리떼처럼 몰려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패뿐이었고 백삼괴객의 명성은 더욱더 높아졌다.

장안성.

육조의 도읍으로 그 화려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특히 장안성은 색향으로 기루의 규모나 수효가 중원에서 으뜸일 것이다.

장안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가향원(佳香院).

이곳에는 매우 특이한 기녀가 있어 언제나 화제로 떠올랐다. 그녀가 특별한 것은 그녀가 요구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남자였기 때문이다.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매일 최소한 열 명의 남자를 상대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매우 뛰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기에 남자들은 서로 자기를 원하는 형편이었다.

그렇지만 차츰 그녀를 찾는 남자의 숫자는 줄어들어 갔다. 처음엔 물론 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상대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에게 환멸을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그녀가 늙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가장 큰 원인은 그녀를 상대한 사람이라면 그녀가 사람이 아닌 욕정에 굶주린 암여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무서운 성욕은 마치 남자를 산 채로 집어삼킬 듯했던 것이다. 그녀는 비단 남자를 잔인하게 대했을 뿐만 아니라 남자들이 자신을 잔인하게 학대해 주기를 더욱 바랬다.

그런데 소문에 의하면 그 여자는 강호 제일의 미녀 설소하를 닮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남들이 말하는 것을 시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안성이 오늘따라 시끄럽고 사람이 몰리는 것은 오늘 백삼괴객이 장안성을 지나가기 때문이다.

백삼괴객은 장안성 일대에서 그 위명을 드높이는 철창(鐵槍) 유사강(柳士康)과 결투를 벌인다 한다.

철창 유사강으로 말하면 병기보에 실린 고수들이 없어진 후, 그들을 대신하여 명성을 날리는 오대후웅(五大后雄) 중의 일인이다.

오대후웅은 당금의 강자들로 그들은 은근히 자신들이 초류빈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장안성 교외의 송림.

많은 인파들이 오늘의 격전을 두 눈으로 생생히 보려고 몰려들었다.

강호엔 많은 결투가 벌어지지만 진정한 고수들의 대결은 좀처럼 보기가 힘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밀리고 있었다.

과연 백삼괴객이 오대후웅들을 이길 수 있을까?

"오대후웅은 비도탈명 초류빈과도 비교가 되는 인물인데 아무리 백삼괴객이 강하다 해도 꺾기는 어려울 거야."

"하지만 백삼괴객은 지금까지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잖아.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가 언제 검을 뽑았는지조차 본 사람이 없다는 걸세."

이때였다.

나직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대한들이 장내에 모습을 나타냈다. 하나같이 흑의에 영웅건을 쓴 이들은 한 사람을 호위하듯 에워싸고 있었다.

"철창 유사강이다. 그리고 흑의 대한들은 신창산장의 수하들이다."

수하들에 둘러싸인 유사강은 얼굴 전체에서 날카로운 빛을 번뜩이는 삼십대의 장한이었다.

탄탄한 근육질의 몸과 무거운 몸가짐은 그가 얼마나 각고의 수련을 쌓은 자인지를 한눈에 나타내고 있었다.

유사강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길을 비켜주었다. 사람들로 인해 원이 형성된 장내의 한가운데에 도착한 유사강은 천천히 말에서 내렸다.

이어서 그는 자신의 병기인 십도금창(十道金槍)을 꺼내 조용히 닦기 시작했다. 결전을 앞둔 무사답게 그의 창 닦는 자세는 경건하기조차 했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중천의 해가 조금씩 서산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인파 사이에서 가벼운 소란이 일어났다.

"저 여자가 웬일로 이곳을....."

"흥! 저 여자는 남자라면 아무나 물불을 안 가리지만 특히 무림고수라면 체면 불구하고 마구 유혹을 하지."

"저 색녀는 세상의 모든 남자가 자신의 미소 앞에서 모두 굴복할 거란 망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 고질이야."

누가 보더라도 뛰어난 미인임에 분명한 여인. 그렇지만 눈 가에 흐르는 음란한 빛이 웬지 그녀를 추하게 만들고 있었다.

가향원의 특이한 기녀이며 강호 제일 미녀 설소하를 닮았다는 이 여인.

그녀는 소나무에 몸을 기댄 채 유사강을 향해 남들이 알지 못하게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석양이 송림을 붉게 채생하기 시작하자 멀리서 한 대의 마차가 나타났다.

마차는 유람이라도 나온 듯 느리게 느리게 송림으로 오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마차에 마부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마차는 곧장 송림으로 오고 있었다. 순백색의 설총마는 대단히 영리한 미물임에 분명했다.

"백삼괴객이 타고 다니는 마차다."

마차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도착하자 서서히 멈추었다. 마차를 보는 순간 유사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사강의 두 눈에선 화염 같은 광채가 스쳐갔다.

이어 그는 고저가 없는 음성으로 차분히 입을 열었다.

"백삼괴객이오? 본인은 철창 유사강이라 하오. 장시간 이곳에서 그대를 기다렸소."

"밝혀 두지만 늦은 건 본인이 아니오. 그대가 빨랐을 뿐이오."

마치 흐르는 물과 같다고 할까? 목소리는 일체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고 듣는 이에게 조금의 불쾌감도 주지 않는 해탈한 고승의 음성 같았다.

"그 말은 맞소. 이제 시간이 되었으니 모습을 나타내시오."

순간이었다. 마차에서 한 줄기 인영이 솟구친 것 같더니 한 사람이 유사강의 앞에 내려섰다.

말끔한 백의에 허리엔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목검이 비스듬히 걸려 있는 헌헌장부.

마치 조각을 본 듯 군살이라곤 하나도 없는 무쇠 같은 몸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눈매는 부드러웠으며 입가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이때, 그 헌헌장부를 보고 누구보다도 놀란 사람이 있었다.

소나무에 몸을 기대고 있던 여인은 두 눈을 부릅뜨며 튕겨지듯 앞으로 나온 것이다.

'낭...낭천!'

그녀는 백삼괴객이 누군지 알아본 것이다.

그런데 낭천이라면 삼 년 전 해외로 나갔던 초류빈의 유일한 친구인 그가 아닌가!

예전엔 마치 굶주린 이리와 같았던 그의 기질이 부드럽게 변했지만 그는 틀림없는 낭천이었다.

낭천은 여유있는 손놀림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검이래야 거무튀튀한 목검이지만 그가 잡고 있자 어떤 보검보다도 더 예리한 것 같았다.

"갈 길이 바쁜 몸...어서 공격하시오."

낭천의 재촉에 유사강이 미간을 찡그렸다.

"이 유사강은 오늘날까지 어느 정도 명성을 쌓았다고 자부하는 인물, 선수는 그대에게 양보하겠소."

낭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오. 이번 결투는 그대가 먼저 신청한 것. 도전을 받는 입장에서 어떻게 먼저 손을 쓸 수 있겠소."

유사강의 십도금창이 가볍게 떨렸다. 군중들은 이번 결투가 낭천이 먼저 도전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라고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얼핏 생각하면 별것 아니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즉 유사강이 낭천에게 먼저 도전을 신청한 것은 낭천을 꺾고 그가 얻은 명성을 일시에 자신이 차지하고 싶은 명예욕이 유사강에게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좋소. 본인이 먼저 선수를 치겠소."

유사강은 겸연쩍은 입장을 벗어나기 위해서인지 즉시 공격 준비를 하였다. 무림이란 곳은 오직 승자만이 변명도 명분도 세울 수 있는 곳인가.....

유사강의 신창이 바람소리를 내면서 낭천의 목을 파고들었다.

낭천은 그의 창이 자신의 목을 찌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동도 없었다.

목을 노리던 창이 갑자기 변화를 일으키며 낭천의 심장을 노렸다. 예측할 수 없는 변화이며 무섭도록 빠른 수법이었다.

그 눈, 낭천의 두 눈에서는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 하는 섬광이 지나갔다.

"윽!"

단연코 장담하건대 이토록 쾌속하고 신기한 검은 고금에 다시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 누구도 낭천이 언제 검을 뽑았는지 본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유사강의 철창은 반이 끊어져 있었고 그의 심장 부위에선 조금씩 선혈이 뿜어 나오고 있었다. 죽을 정도의 중상은 아니었으나 크게 상처를 입은 것이다.

누가 보아도 명백한 유사강의 패배였다.

낭천은 목검을 꽂으며 누구에게 하는 소리인지 혼자 중얼거렸다.

"지금까지의 결투 중 내가 원해서 한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내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시험하고 싶어 항주에서 청한 첫 번째 결투뿐이다. 하지만 그 후 나는 수많은 결투를 해야 했으며 천하엔 유명해지고 싶은 자들이 무수히 많음을 알았다. 나도 한때는 유명해지려고 천하를 횡행한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모든 결투를 서슴없이 받아준 것이다."

낭천은 천천히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모함과 터무니없는 혈기는 죽음뿐이다. 천하의 모든 젊은이들이 초류빈을 노리지만 진정 그들이 초류빈과 싸워 목숨을 건질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나는 이들에게 패배를 안겨 주어 자숙하기를 바라고 있다. 나 역시 패배의 쓰라림이 있었기에 오늘과 같은 성취가 있었던 것이다."

원숙해졌다고 할까! 낭천은 이미 명경지수와 같은 무심과 무탐(無貪)의 경지에 이른 것이 분명하다.

"조용히 자신을 돌이키며 끊임없이 정진하다 보면 모두 뛰어난 고수가 될 것이다. 나는 천하인이 모두 강자가 되기를 바란다. 강자란 결코 편협하거나 남을 괴롭히려 하지 않을 테니까."

낭천! 그는 확실히 많이 변했다. 이제는 철학과 이성을 가진 원숙한 인간이 된 것이다.

낭천이 막 마차로 오르려 할 때였다.

"잠깐!"

외침과 함께 낭천을 막아서는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을 보는 순간 영원히 무표정할 것 같은 낭천의 안색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어서 신음처럼 흘러나온 말 한 마디.

"설...소하!"

가향원이 특이한 기녀, 그녀는 강호 제일 미녀 설소하가 분명했던 것이다.

설소하가 고혹적인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아직도 낭천 정도는 충분히 유혹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절 모르진 않겠죠, 소천!"

낭천의 검미가 꿈틀했다. 그 옛날에는 얼마나 듣기 달콤했던 소천이란 호칭인가? 하지만 지금은 구역질을 느낄 정도로 귀에 거슬렸다.

"설낭자! 우리는 서로 잊혀진 지 오래 된 걸로 아는데....."

"그렇지 않아요.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소천을 죽도록 사랑해요. 다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서로 헤어져 있었지만....."

낭천은 분홍빛 윤기가 도는 설소하의 입술이 여전히 아름답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 입술은 독버섯이며 재앙을 부르는 근원이었다.

"과거는 돌아올 수 없는 것. 과거는 과거 속에 묻어둡시다."

낭천은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낭천! 전 당신이 원하면 뭐든지 하겠어요. 죽으라면 죽고, 구르라면 돼지우리에서도 구르겠어요. 하지만 전 당신을 잊을 수가 없어요."

설소하가 낭처의 다리를 잡으며 흐느꼈다.

"낭천! 제가 아름답다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제 몸은 당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드릴 수 있어요."

낭천은 설소하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인간의 본성이란 이토록 변하기 어려운 것인가?

설소하는 다시금 낭천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항시 자부하는 자신의 육체로...그렇지만 사나이의 마음이란 흐르는 물과 같아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이다.

"그 몸을 탐내는 자들은 천하에 많을 것이오. 또 그들 중에는 예전의 낭천처럼 미련한 자가 있을지도 모르지."

낭천이 다리를 빼며 마부석에 앉았다.

설소하의 홍수 같은 눈물 속에 악독한 빛이 나타났다. 그녀는 다시 낭천을 자신의 손에 넣을 수 없음을 알았다.

아니 자신에게 추호의 동정도 보내지 않음을 안 것이다.

사실 그녀는 백삼괴객이 온다기에 한번 유혹을 하려고 이곳에 나왔던 것이다. 아직도 그녀의 마음속엔 더러운 욕망이 가득차 있었으며 언제든지 그 욕망을 채워 줄 노예를 찾고 있었다.

그녀는 낭천을 확인하는 순간, 한 가닥의 희망을 느꼈다.

몇 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낭천의 마음도 풀어졌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자신이 있다. 저 사내에 관해선 천하에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낭천의 마음은 이미 굳어진 쇳덩이와 같았다.

"흥! 가라! 난 네가 아니라도 언제든지 남자를 잡을 수 있다."

낭천은 착잡한 시선으로 먼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대는 청춘과 미모가 한 오백 년 갈 거라고 생각하는군.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린다면 평범히 여생을 마칠 수가 있을 텐데.'

이때 마차 안에서 청아한 음성이 들려왔다.

"소천! 저 여인은 누구죠?"

"청매(淸妹)! 알려 하지 마시오. 미모는 천하제일이나 마음은 천하에서 제일 악독한 여자요."

"저 여인과 예전에 알고 있었나요?"

"그렇소. 나의 과거도 결코 깨끗한 것은 아니었소."

불쑥 마차 안에서 섬섬옥수가 살며시 나와 낭천의 등을 다독거려 주었다.

"자책하지 마세요. 지금의 당신은 깨끗해요. 하지만 저 여인은 여전히 추악하잖아요."

"....."

말 대신 낭천은 말고삐를 잡아챘다.

"청매! 지금 내 마음엔 조금 전의 여인 따위는 없소. 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초류빈을 만나 그에게 당신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뿐이오."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두 개의 옥수가 등 뒤에서 낭천의 가슴을 껴안았다.

"당신도 역시 좋은 여인이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난 언제나 마음이 평온하다오."

마차는 붉게 타오르는 석양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설소하는 그 후 어찌 되었을까?

다시 몇 년 후, 장안성의 가장 천한 창녀촌에 매우 특별한 여자가 또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여자는 장안성의 명물로 이름이 나 있다고 한다. 그녀가 유명한 것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더할 수 없이 추악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마음속의 악이 얼굴에 모두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장 우스운 것은 그녀가 술에 만취되기만 하면 강호 제일의 미인이라고 자청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차는 황혼의 들판을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낭천의 옆엔 청초한 여인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우문청(宇文淸), 동해 만악도(萬嶽島)에서 은거하던 전대기인 심왕의 외손녀였다.

낭천은 해외에 은거하던 기인들을 찾아 많은 것을 배웠다.

낭천이 원래 전대기인을 찾은 것은 가문의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낭천의 가문은 이들 전대기인들에 의해 언제나 패배자의 위치에 있어 무명의 존재였다. 낭천이 이토록 유명해지려 했던 것도 가문의 치욕을 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전대기인들을 만남으로써 낭천은 성숙하고 그릇이 더욱 커질 수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인간의 증(憎)과 원(願)이 무엇인지도 깨달았다.

이제 그는 결코 무모하게 덤비지도 더 유명해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다만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다 보면 명예와 부는 저절로 곁에 머무르는 것이다.

낭천은 문득 목이 마르다고 느꼈다.

"청매! 죽엽청이 남아 있소?"

"목이 마르세요? 죽엽청보단 물이 나을 텐데....."

"난 이렇게 긴 여행을 할 때는 마차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보기 좋다고 생각하오. 내가 초류빈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역시 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소."

"당신의 친구는 술고래라면서요? 하지만 당신은 그만큼 술을 좋아하지는 않잖아요."

"그렇지만 남자란 때때로 술이 생각나는 것이오."

"전 이해를 못하겠어요."

그러면서 우문청은 마차 안에서 호리병을 꺼내 낭천에게 주었다.

낭천은 단숨에 몇 모금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술을 마시고 싶을 때 그 즉시 마실 수 있다는 것도 조그만 행복이다. 세상은 이런 조그만 행복들이 가득하기에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때 낭천은 자신들의 앞으로 묵묵히 걸어가는 한 사람을 보았다.

그는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단조롭게 걷고 있었다.

낭천은 그 사람의 걸음걸이를 보자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도 예전엔 저런 걸음을 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몸이 편할 것을 방지하며 언제나 자신의 신체가 최대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끔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시키는 걸음인 것이다.

낭천은 문득 호기심을 느꼈다.

'저 친구도 아마 예전의 나처럼 무뚝뚝하고 절대 남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 할 것이다.'

낭천은 마차를 그 사람의 곁으로 몰았다.

"친구, 마차를 타지 않겠나!"

예상대로 그 사람에게선 아무 대꾸가 없었다.

"그렇다면 갈증이 날 텐데 이 술이나 들게."

낭천이 죽엽청을 담은 호리병을 그에게 던졌다. 그 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볍게 호리병을 받았다.

그 순간 그의 한쪽 소매가 펄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외팔이였던 것이다.

외팔은 호리병을 그대로 낭천에게 다시 던졌다.

"이유없이 남의 호의를 받고 싶지는 않소."

"이유가 없지는 않네. 길을 가다 곤란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만나면 도와주는 것이 도리일세."

외팔이의 목소리는 지극히 담담하고 싸늘했다.

"난 아무 곤란도 없소. 즐기며 걷고 있는 것이오."

"자신을 단련하기 위해선 고독한 것도 좋으나 그것이 반드시 최상의 방법이라 할 수는 없네."

낭천의 말에 외팔이의 몸이 움찔했다. 이어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당신도 나와 같은 길을 걸었던 적이 있는 것 같군."

한데 외팔이를 보는 순간 낭천의 두 눈은 휘둥그래졌다.

'아...! 호천강.....'

외팔이 그는 놀랍게도 설벽운과 호유성의 아들이며 한때 너무 영악했던 호천강이었다.

호천강도 낭천을 알아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었구려. 당신이라면 나에게 있어 선배임이 확실하오."

이제는 어엿한 장부가 된 호천강을 보며 낭천은 매우 심정이 착잡했다.

사랑이 빚은 비극에 의해 너무도 고통을 받았던 호천강. 그도 일종의 피해자이며 희생물이 아닌가?

낭천은 호천강과 보조를 맞추며 말을 몰았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자네는 복수할 생각인가?"

"복수?"

호천강의 준수한 얼굴이 찡그려지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난 복수를 할 대상이 없소. 누가 나에게 원한을 품게 했단 말이오?"

"그렇다면 자네는 무엇 때문에 스스로 힘든 길을 걷나?"

"난 나의 길을 갈 뿐이오. 끓어오르는 젊은 혈기가 있기에 천하제일인이 되고픈 야망이 있을 뿐이오."

낭천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해가 가네. 나 역시 자네와 같은 시기가 있었으니까. 아니 지금도 그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모르지."

호천강이 신비로운 미소를 지었다.

"난 초류빈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지는 않소. 하지만 내가 천하제일인이 되려면 언젠가는 그와 맞부딪치게 될 것이오."

"하지만 그는 피할지도 모르지."

"피해도 상관없소. 난 일개인에게 원한을 가질 만큼 어리지는 않으니까."

"후후...이렇게 만나니 새삼 반갑군. 나와 술 한 잔 할 아량은 없나?"

"당신은 초류빈의 친구라 술을 좋아하는군. 내려오시오."

낭천이 마차에서 훌쩍 내려섰다. 그는 호천강과 똑같은 걸음걸이로 걷기 시작했다.

그는 한 모금의 죽엽청을 마신 후 호리병을 호천강에게 내밀었다.

"이렇게 걷는 것도 오랜만이군. 예전엔 막막한 광야를 며칠씩 혼자 걷곤 했지."

호천강도 죽엽청을 몇 모금 마셨다.

"고독이란 때때로 사람을 나약하게도 하지만 비정해질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오."

"너무 비정해지진 말게. 최고의 경지에 이르려면 비정을 넘어 다정해야 하네. 초류빈의 경우가 그걸 여실히 증명하고 있지만....."

호천강이 힐끗 낭천을 쳐다본 후 잠시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그는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난 내 방법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오."

낭천은 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젊은이들이란 누구나 자기의 아집이 있기에 남의 말에 귀기울일 생각을 않는다. 특히 자신이 남보다 뛰어나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더하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낭천은 화제를 돌렸다.

"자네 어머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

"말하기가 곤란한가?"

잠시 애련에 물들었던 호천강의 눈이 다시 평소의 상태로 돌아왔다.

"그렇지는 않소. 그분은 지금 불문에 귀의했소."

"아!"

낭천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토했다.

"설벽운이 여승이 되다니....."

"가엾다는 표정을 짓지 마시오. 그분에게 있어선 그 길이 남은 여생을 편히 보낼 수 있는 방법인지도 모르니까....."

"....."

낭천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인생이란 처음엔 같이 시작하다가 어느 순간의 조그만 차이로 나중에 서로 만날 수 없는 위치에 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하지만 세월이 흐른 상태에서 옛사람의 소식을 들으면 비감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때, 멀리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무리들이 있었다.

호천강은 그들을 보자 온몸을 경직시켰다.

"당신은 먼저 가시오. 저들은 나와 시비가 있는 흑사방(黑死幇)의 무리들이오."

"자네가 피하면 되지 않는가?"

"저들이 피하면 그만이지만 난 피할 수 없소. 난 언제라도 정면에서 모든 것을 헤쳐나갈 것이오."

"그럼 난 가겠네."

낭천은 마차에 올라 호천강과 헤어졌다.

우문청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당신과 아는 사이인 모양인데 혼자서 저 많은 무리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요."

"내가 저 사람과 같은 처지에 있었을 때 나 역시 그 누구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소. 더 권해 봐야 그는 귀찮아할 것이오. 그리고 그는 절대로 저들에게 당하지도 않소."

낭천은 굳이 호천강에게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사나이는 만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상대를 찾을 수 있고, 아무리 마음이 통해도 평생을 같이 있을 수는 없기에 사나이들의 만남은 언제나 만나고 헤어짐의 연속인 것이다.

'미우나 고우나 사람은 옛사람이군.'

낭천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얼굴도 시간이 흐른 다음 만나니 어찌 이리 반가운가?

그래서 인간사가 결코 각박하지 않으며 원한이란 맺어졌다가도 풀리는 것인가?

두 남녀가 한 언덕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옆에는 소담한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기다린다는 것은 지겨운 일이나 이 두 남녀의 얼굴에는 가득 미소가 어려 있었다.

이들은 다름 아닌 초류빈과 손소홍이었다. 손소홍이 초류빈의 가슴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우리는 약속을 지키는군요. 낭천은 우리에게서 혼인주를 얻어먹고 싶다고 했는데...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어 즐거워요."

"난 그 약속보다 술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즐겁소."

"당신은 그동안 술을 마시지 못해 매우 답답했던 모양이군요."

"그렇소. 나의 주충들은 아마 아사직전일 것이오."

"전 그 주충들이 모두 죽기를 바래요."

"그 주충이 죽으면 난 인생의 즐거움을 하나 잃는 셈이 되오."

"엉터리!"

손소홍이 초류빈의 팔을 꼬집었다.

두 사람은 행복했다.

초류빈의 경우엔 얼마나 많은 시련 끝에 얻은 행복인가?

그가 진작 행복이란 일생에 있어 한 번뿐이 아니고 의지에 의해 여러 번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기나긴 고통의 세월은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상처는 남았지만 그 상처를 치료해 가는 과정도 행복이 아닌가. 그는 이제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아내의 뱃속에서는 그의 이세도 자라고 있으니까.

초류빈은 멀리 마차가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의 마음은 벌써 흥분되기 시작했다.

"낭천은 얼마나 변했을까? 그가 왔으니 난 마음놓고 은거를 해도 된다. 모르긴 해도 지금부터는 낭천이 천하제일의 위치에 설 것이다."

그는 낭천이 자신의 뒤를 이어주길 바라지만 낭천 역시 지금은 명리에 욕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초류빈은 갑자기 한바탕 웃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여자가 있고 친구가 있으니 이처럼 즐거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들은 모른다. 부와 명예를 가져야 인생이 보람된 줄 알고 악다구니를 쓰지만 결코 그것이 삶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초류빈은 누가 뭐래도 천하제일로 불리우고 있다. 하지만 자신은 한 번도 그것에 집착해 보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그의 인생은 윤택하며 조그만 행복이라도 가질 수 있었는지 모른다.

먼 훗날 자신의 과거를 돌아볼 때 웃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겠는가? 명예와 부는 언제라도 기회가 생기면 훌쩍 떠나 버린다.

그렇지만 사랑과 우정은 영원히 퇴색되지 않고 영원히 남는 것이다. 그렇기에 초류빈의 인생 여정은 언제나 인구에 회자되는 미담이 될 것이다.

사랑과 우정을 얻었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감사합니다

63 소이비도 제4권 추산식推山式





추산식(推山式)



낭천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떠한 검을 사용한다고 해도 상관금홍을 상대할 수는 없소."

손소홍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의아스러운 눈빛을 띠며 낭천을 주시했다.

"그럼...어떻게 해야만 그를 상대할 수가 있지요?"

이러한 그녀의 물음에 낭천은 대답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어떠한 방법으로 상관금홍을 상대해야 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쉽사리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세상에는 말로 해서 안 되는 것도 많았다.

손소홍은 가볍게 탄식을 터뜨리더니 입을 열었다.

"상관금홍 이외에도 당신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요."

"낭자에게 묻겠는데 상관금홍이 이곳에 돌아왔소?"

"아마 틀림없을 거예요."

말이 끝나자 낭천은 손소홍을 주시하며 즉시 다그쳐 물었다.

"어째서 틀림없다는 것입니까?"

"그가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하든 남들이 절대로 볼 수가 없게 되어 있지요."

"초류빈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창피한 일이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것입니까?"

그러자 손소홍은 다시 길게 탄식을 터뜨렸다.

"한 사람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땐 남에게 보이기를 싫어하지요."

이러한 말을 듣고 난 낭천은 잠시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손소홍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얘기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손소홍은 가볍게 숨을 내쉬고 나더니 낭천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음식 중에서 무엇을 제일 좋아하세요?"

"별로 가리는 것 없이 아무것이나 다 좋아합니다."

"저는 복숭아를 제일 좋아해요. 저는 복숭아를 먹을 때마다 매우 행복감을 느끼지요. 특히 겨울밤에 이불 속에서 혼자서 몰래 복숭아를 먹을 때 가장 행복스러움을 느끼지요."

이렇게 말을 하고 난 그녀는 방그레 웃음을 떠올리더니 다시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가 복숭아를 먹는 것을 누군가가 보고 있다면 별로 행복을 느끼지는 못하지요."

여기까지 말을 듣고 난 낭천은 무엇인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손소홍을 향해 급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상관금홍이 초류빈을 죽이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고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저는 상관금홍이 그를 성급하게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정할 수 있었던 거예요."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낭천은 즉시 다그쳐 물었다.

"어째서 그렇다는 것이오?"

손소홍은 두 눈을 깜박거리며 천천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만약에 저에게 복숭아가 단 한 개뿐이었다면 저는 틀림없이 천천히 먹었을 것이에요. 천천히 먹으면 먹을수록 나의 행복스러움을 느끼는 시간이 길어지니까요. 그것을 만약 빨리 먹어치우게 되면 내심 쓸쓸하게 될 것이에요."

사실 그러한 짐작이란 쓸쓸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텅 비는 듯한 공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공허감이란 간단한 것이지만 그녀는 형용해 내지를 못했다.

그녀는 가볍게 숨을 몰아쉬고 나서 다시 계속해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상관금홍의 눈에는 초류빈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유일한 적이지요. 그러나 초류빈을 죽이고 나면 틀림없이 쓸쓸함을 느끼게 될 것이에요."

여기까지 말을 듣고 난 낭천은 검을 허리춤에다 천천히 끼우고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매우 여유있게 말을 꺼냈다.

"나는 그를 죽이고 난 후에도 절대로 쓸쓸함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을 뱉고 난 그는 큰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그의 걸음은 별로 빠르지가 못했으나 무게가 있었다.

상관금홍과 같은 사람을 상대하려면 당연히 먼저 준비가 있어야 한다.

그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전신의 근육이 풀리는 것을 느끼고 또한 긴장이 풀리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것 또한 그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준비인 것이다.

그는 천천히 돌계단으로 올라가 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돌연 열여덟 명의 황의인이 나타났다.

이 사람들은 금전방 총타 소제지의 수위들로서 금전방의 정예들이다.

낭천은 길게 장탄식을 터뜨리더니 이윽고 냉랭하게 말을 꺼냈다.

"내 비록 살인을 하고 싶지는 않으나 다른 사람이 내 길을 막는 것도 과히 좋아하지는 않소."

그러자 한 사람이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놈이 무엇인데, 그래 길을 막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낭천이 싸늘하게 말했다.

"내 길을 막는 자에게는 죽음뿐이다."

그러자 그 사람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네놈은 개 한 마리도 제대로 잡지 못할 것이다."

"나는 개를 죽이지 않는다. 나의 검은 사람을 죽이는 검이다."

이러한 말이 끝나는 순간 상대방의 웃음소리는 끊어지고 말았다. 그의 대나무로 된 검이 발해진 것이다.

대나무에는 빛이 없었으며 검을 찌르는 순간 검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대나무로 만든 검이 살인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아니 그 어떠한 검이라고 해도 일단 낭천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면 살인을 쉽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광채도 매우 강하게 발했던 것이다. 그것은 검에서 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독에서 나온 빛이었다.

이 순간 다섯 개에 달하는 병기가 동시에 낭천을 향해서 재빠르게 날아들었다. 두 자루의 예리한 빛을 띠고 있는 칼은 그의 몸을 향해 날카롭게 공격해 들어갔다. 이러한 모습을 찬찬히 지켜보고 있던 손소홍은 웬지 차츰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그녀는 낭천이 다른 사람들과 별로 싸운 경험이 없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설사 싸웠다고 해도 한 사람씩의 일 대 일이었지 협공을 당해 본 적은 매우 드물었다.

그의 검은 한 사람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지만 여러 사람과 동시에 싸우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순간 손소홍은 즉시 달려가서 그를 도와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채 달려가기도 전에 다섯 명은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예리한 칼날이 낭천의 손에 있는 대나무 검과 부딪치는 것을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그의 대나무로 된 검은 쉽게 부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판관필이 낭천의 혈도를 향해 찔러가는 것을 틀림없이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쓰러진 사람은 상대의 공격자이지 낭천은 아니었다. 그 원인은 판관필을 사용한 사람만이 알 뿐이다.

그 사람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솜씨가 매우 정확하고 또한 자신이 틀림없이 낭천의 혈도를 찌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판관필이 낭천의 목에 가서 닿는 순간 그는 갑자기 전신에 진기가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대나무 검이 이미 그의 목을 관통한 것이다.

낭천의 동작은 그에 비하여 별로 빠르지도 못했으며 다만 눈 깜짝할 사이의 차이가 생길 뿐이었다. 하지만 그 눈 깜짝할 사이가 바로 치명적인 것이다.

순간 손소홍은 한 마리의 나비와 같이 가벼운 동작으로 몸을 날려 십여 명이나 되는 황의인을 향해 날카롭게 덮쳐 들어갔다.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여자들은 다 그러하듯이 손소홍도 경공술과 암기에 매우 뛰어난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의 무공이 고심하고 강하다고 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물론 손소홍도 예외는 아니다.

그녀가 지니고 있는 암기는 더할 수 없이 빨랐으며 신법 또한 매우 신속했다. 그리고 발걸음의 변화가 이상하기 때문에 보는 사람은 예측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목적은 살인이 아니라 낭천을 보호하는 것이다.

낭천이 검을 운용하는 방법은 매우 특이했다. 강호무림의 그 어떠한 문파의 검법과도 양상이 완전히 달랐다. 그의 검법에는 휘두르고 또 내려치는 것도 없고 오직 일직선에서 똑바로 찌르는 것뿐이다.

찌르는 것은 보통 앞으로 찌르는 것이 정상이나 낭천은 어떠한 위치에서 찌르건 모두 찌를 수가 있었다. 귀밑이나 겨드랑이 그리고 앞뒤도 역시 마찬가지로 다 찌를 수가 있다.

이때였다. 갑작스레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오면서 한 사람이 땅에서 뒹굴었다. 그러자 따로 한 명이 지상도를 전개하면서 날카롭게 공격해 들어왔다. 이 지상도의 사용법은 땅에서 구르면서 쓰는 것으로 이 도법을 연마하기는 매우 힘이 든다. 하지만 일단 연마해 내면 그 위력은 더할 수 없이 강하다.

낭천은 마치 자신의 몸 뒤에 눈이라도 달린 듯 갑자기 몸을 움츠려 맞은편에서 날카롭게 공격해 들어오는 창을 잽싸게 피하는 동시에 검을 사타구니 밑으로 하여 뒤로 찔렀다.

이때 한 쌍의 병기를 들은 자가 추산식을 전개하여 낭천의 가슴팍을 향해 잽싸게 밀어냈다. 이것 또한 초식이 괴이할 뿐만 아니라 병기도 매우 독특했다.

그 자가 사용한 것은 한 쌍의 봉익금당이었다. 이러한 병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강호에서 매우 드물었다. 그 위에는 쇠로 된 가시가 가득 달려 있으며 추, 기, 괘라는 세 가지 구결을 동시에 병용해서 전개했다.

어느 사람이든지 그것이 몸에 닿기만 하면 살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추궁만월 초식이었지만 뒤이어 전개해 낸 것이 야만분이었다.

낭천은 뒤로 즉시 후퇴를 하려고 했으나 그렇게 되면 선기를 잃게 될 것은 뻔하며 또한 선기를 잃게 되면 다른 사람의 무기에 의하여 생명마저 잃어버릴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의 정면대결은 더욱더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앞으로 공격해 들어가면 역시 마찬가지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것은 어느 누구라 해도 쉽게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낭천은 그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앞으로 마주 응수해 갔다.

손소홍은 이러한 광경을 보자 아연실색하여 자신도 모르게 하마터면 크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바로 이때였다. 낭천은 외마디의 고함소리와 함께 대나무 검을 쌍금당의 중앙을 뚫고 앞으로 똑바로 찔러갔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 대나무 검은 상대방의 목을 여지없이 관통시키고 말았다. 상대방의 쌍금당도 낭천의 가슴 앞에 와 있었다. 그러나 낭천의 몸이 채 닿기도 전에 상대는 목에 강한 자극을 받고 갑자기 전신이 오그라졌고 쌍금당을 더 이상 앞으로 밀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아랫도리가 갑자기 싸늘해지더니 금시 쓰러져 버렸다. 그의 얼굴에는 경악과 공포스러운 빛이 가득했다.

그는 세상에 이렇게 빠르고 정확한 검법이 있으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죽는 그 순간만큼 그는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방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더 이상 아무도 덤벼들지 못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 무서운 죽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 자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는 코로 도저히 맡을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속이 끓어올라 그 자리에서 구토를 일으켰다. 그들이 구토를 일으킨 것은 악취 때문이 아니라 공포스러운 광경 때문이다.

그들은 이제서야 죽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공포스럽고 추악한 것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 같았다. 어쩌면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죽음이란 보지도 못했고 견디기 어려운 것이며 그 누구도 이러한 죽음을 말하고 싶어하지도 않을 것이다.

낭천은 더 이상 손을 쓰지 않고 태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나머지 아홉 명은 두 눈이 휘둥그래진 채 낭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한 사람은 갑자기 허리를 구부려 토하기 시작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방성통곡을 했다. 그리고 어떤 자는 땅에 쓰러져 전신을 비틀었고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갑자기 몸을 돌려 변소로 급히 달려갔다.

손소홍도 역시 통곡을 하며 토해내고 싶음을 느꼈다. 그녀도 내심 경악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비애까지도 느꼈다. 이렇게 생명이 비참하게 사라지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를 못했다.

낭천은 대나무 검을 손에 낀 채 앞장서 걸어갔다. 그의 검끝에서는 아직도 피가 한 방울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검은 비단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까지도 그대로 짓밟아 버리고 말았다. 검은 이렇게 비정한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의 인간성은 대체 어떠한가.

얼마쯤 걷자 바로 앞에 갑자기 문이 하나 나타났다. 그 문은 고리로 채워져 굳게 닫혀져 있었다. 이곳이 바로 상관금홍의 침실이다. 상관금홍은 바로 이 안에 있었고 초류빈 또한 그 안에 있다.

상관금홍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아 초류빈의 생사를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상관금홍이 아직까지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초류빈이 죽지 않은 것은 틀림없었다.

손소홍은 자신도 모르게 기쁨의 만족스러운 웃음을 떠올리며 문앞으로 급히 달려나왔다. 그러나 그녀는 달려나오기가 무섭게 갑작스레 그 자리에서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된 이상 상관금홍이 안에서 열어주지 않는다면 절대로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손소홍은 갑자기 심한 현기증을 느꼈으며 발을 잘못 딛어서 마치 끝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려가는 아찔함을 느꼈다. 순간 그녀는 온몸의 맥이 풀려 문에 기댄 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기울여 온 그녀의 모든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만약 처음에서부터 실패했었다면 심리적으로 훨씬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성공 단계에까지 와서 실패를 하다니 이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러한 타격은 사람으로서 가장 견디기가 어려운 것이다.

낭천은 얼마 동안을 멍청히 서 있다가 갑자기 한 마리의 미친 야수와 같이 철문을 향해 거세게 몸을 부딪쳐 갔다.

그러나 그의 몸뚱이는 이내 다시 튀어나와 바닥에 나가떨어져 나뒹굴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옷을 툭툭 털며 다시 일어났다. 이번에는 대나무 검으로 문을 세게 찔렀다.

그러나 이번 또한 두말할 필요도 없이 문은 그대로 있었고 애석하게도 검만 부러지고 말았다.

철문으로 하여금 이 검으로부터 무너지게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대나무 검이랴.

낭천의 두 다리가 갑자기 휘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온몸에 갑자기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또 어쩔 수 없는 이상한 감각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 금시 미쳐 버리는 그런 버릇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미쳐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초류빈은 문 안에서 죽음의 구덩이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상태지만 그러나 그들은 밖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을 기다린단 말인가? 상관금홍이 득의만면해서 나올 때를 기다린단 말인가? 그가 저 문 안에서 나올 때 초류빈은 과연 살아 있을까?

그럼 무엇을 기다린단 말인가. 초류빈의 죽음을 기다린단 말인가?

상관금홍이 나올 때면 물론 그들까지도 죽이지 결코 그대로 살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나오면 그때는 그들이 죽어야 할 시간이다.

손소홍은 급히 달려와 낭천을 천천히 일으키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서 가 보세요."

낭천은 두 눈을 천천히 치켜올리며 손소홍을 향해 말했다.

"나...나더러 가란 말이오?"

"당신은 꼭 가야만 해요. 나는....."

"당신은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오?"

그러자 손소홍은 아랫입술을 으스러지도록 깨물면서 울먹이는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나는 당신과 달라요."

낭천은 손소홍의 얼굴을 똑바로 주시하며 다그쳐 물었다.

"대체 뭐가 다르다는 것이오?"

손소홍은 길게 탄식을 터뜨리고 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벌써 말을 했지만 그가 죽으면 저는 결코 혼자서 살 수가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낭천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와 함께 죽을 수는 없소."

손소홍은 마음을 진정시키느라고 잠시 말이 없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럼 어서 가야지요."

그러나 낭천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갈 수도 없소."

손소홍은 두 눈을 치켜올리며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다그쳤다.

"아니 무엇 때문이지요?"

낭천은 마른침을 한 차례 삼키고 난 후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은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손소홍은 무엇인가 잠시 생각을 더듬는 듯하더니 다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당신이 그를 위해서 복수를 하려는 것을 저는 벌써부터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것은 별로 그렇게 급하지 않기 때문에 얼마 동안 기다리면서....."

낭천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나는 기다릴 수가 없소."

손소홍이 말했다.

"기다리지 못한다면....."

말이 끝나자 낭천은 즉시 다그쳐 물었다.

"기다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된다는 것이오?"

손소홍의 입술에서는 드디어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죽어야 해요."

낭천은 고개를 천천히 숙이면서 대나무 검에 묻어 있는 피를 내려다보았다. 피는 이미 굳어져 버려 처음과는 달리 검붉은 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자 손소홍은 길게 숨을 몰아쉬고 나더니 이윽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되든 안 되든 꼭 시험해 볼 것이라는 것도 저는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것은 결코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도 저는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럼 당신이 이곳에서 초류빈과 같이 죽겠다는 것은 무슨 소용이 있소?"

손소홍은 잠시 동안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일순 망설이는 듯했다.

다시 천천히 낭천이 말을 이었다.

"당신이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단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 꼭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오."

손소홍은 장탄식을 터뜨리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말투까지 점점 그를 닮아 가는군요."

이러한 말을 듣고 난 낭천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는 듯하더니 이윽고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녀가 한 말을 시인했다. 그는 그 말을 결코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으로서 초류빈과 사귄 사람이라면 그의 위대한 인격에 감동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가 있다. 만약에 낭천이 초류빈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지금쯤 인간에 대한 어떤 위대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절대 남을 신임해서도 안 되고 또 절대 남의 도움을 받아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동안 고통스럽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말은 낭천의 어머니가 했던 말이다. 낭천의 어머니의 인생은 고통과 불행으로 얼룩져 있었다. 낭천은 어머니가 웃는 것을 생전에 보지 못했다.

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신 것은 인생에 대해서 아무런 희망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너에게 미안하구나. 나는 네가 완전히 성장한 후에 죽어야 만 마땅한데 이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이 어미는 너무나 너무나 피곤하다...내가 너에게 남겨 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내가 몇 마디 한 말은 꼭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내가 친히 겪은 교훈이다.....'

낭천은 어머니가 남겨 준 이러한 말을 한 번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황야에서부터 속세로 들아온 커다란 이유는 인류를 향해 복수를 하고 어머니를 위해 복수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황야에서 속세로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만났던 사람이 바로 초류빈이었다. 초류빈은 그로 하여금 인생이 자기가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인류 역시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별로 추악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해 주었다. 그는 초류빈의 몸에서 많은 미덕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한 미덕이 초류빈의 몸에 존재하고 있으리라고는 그는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초류빈에게 너무나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심지어는 자신의 죽은 어머니보다 더.....

초류빈은 그의 어머니와는 반대로 그에게 사상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원한이나 증오가 아니었다.

사람은 증오보다 사상이 더 쉽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증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완전히 섬멸시킬 생각이다.

삶을 섬멸시키고 또한 자신을 섬멸시키고 이 세상 모든 것을 섬멸시키고 싶었으나 그는 모든 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초류빈 같은 사람이 이렇게 일생을 마친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손소홍은 갑자기 탄식을 터뜨리고 난 후에 입을 열었다.

"상관금홍이 만약 우리가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무척이나 기뻐할 거예요."

이 말을 듣자 낭천은 이를 갈면서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말을 꺼냈다.

"마음껏 기뻐하라고 하시오."

이때 돌연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자네는 잘못 생각했네."

철문은 비록 무겁고 단단하기는 하지만 문이 열릴 때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조용히 철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초류빈, 그 사람이었다.

그의 모습은 매우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탈없이 살아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피곤보다 그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그러자 낭천과 손소홍은 동시에 같이 고개를 돌리면서 그 자리에서 굳어지고 말았다. 그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양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환희의 눈물이다. 사람이 기쁨을 당할 때나 또한 슬픔을 당할 때는 눈물 이외에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다.

초류빈의 두 눈에도 어느 새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입가에 애써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는 잘못 생각했네. 마음이 좋은 사람들은 영원히 고통스럽지 않을 걸세. 악인들은 고통스러울 때가 기쁠 때보다 더 많이 있네."

그러자 손소홍은 그의 품에 갑작스레 안기면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 순간 흐느끼는 것 외에 아무 말도 꺼내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만나지 않았는가.

낭천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이내 입을 열었다.

"상관금홍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초류빈은 손을 들어 손소홍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말을 꺼냈다.

"모르긴 해도 매우 고통스러울 걸세. 그는 한 가지 잘못한 것이 있었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낭천은 두 눈을 치켜올리며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다그쳐 물었다.

"그가 대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그는 나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많았었네. 심지어 나로 하여금 절대로 손을 쓰지 못하게 할 수도 있었지. 하지만 그는 일부러 기회를 놓쳤다네."

상관금홍과 같은 사람이 어찌 기회를 헛되게 놓칠 수가 있겠는가. 손소홍은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무엇 때문이에요?"

그러자 초류빈은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일종의 도박을 한 것이오."

말이 끝나자 손소홍이 즉시 다그쳤다.

"도박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지요?"

초류빈은 마른침을 한 차례 삼키고 나더니 또박또박 말했다.

"내 비도탈명을 과연 피할 수가 있는지 마음속으로 도박을 한 것이요."

순간 손소홍의 두 눈에서는 밝은 광채가 폭사되어 나왔다.

"그는 비도탈명을 믿지 않았던 것이군요."

그러자 초류빈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는 지금까지 계속 살아오면서 그 누구도 믿지를 않았소. 그가 믿을 수 있는 일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었소."

손소홍이 말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지요?"

초류빈은 담담하게 웃으며 씹을 열었다.

"그가 졌소."

이것은 매우 간단하게 내뱉은 한 마디의 말이었다. 승부가 결정된 것은 일순간의 일이다. 하지만 그 일순간이 얼마나 긴장스러운 것인가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그 일순간이 강호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손소홍 자신은 그 일순간에 일어났던 일을 보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손소홍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생각만 해도 숨통이 저절로 막혀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었다. 비도탈명이 은빛 나는 광채를 발하면서 날아가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장관이었을까?

그리고 상관금홍의 목에 꽂혀지는 순간, 그 순간보다 더 흥분스럽고 감동적일 때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영원불멸의 광채인 것이다.

문이 열렸다. 모든 세상을 영원히 문 밖에서 격리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만약 그 누구든지 세상과 격리되고 싶으면 자신이 모든 것을 포기해야 만한다.

낭천은 열려진 문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문 안에 들어서자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비도탈명이었다. 백발백중의 비도탈명.

생각했던 대로 비도는 상관금홍의 목을 관통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치명적일 수가 있었다.

칼날은 목 밑부분에서부터 앞으로 하여 비스듬히 위로 그어 올라갔다. 이것으로 보아 그가 손을 쓴 것이 매우 약하다는 것을 금시 알 수가 있었다.

이 일대의 효웅이 죽는 모습도 그가 멸시해 오던 사람들이 죽은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으며 숨이 끊어져 버린 지금도 경악과 회의의 빛이 그대로 얼굴에 나타나 있었다.

생명은 원래부터 평등한 것이다. 특히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 그런데 사람들이 마지막에 가서야 이러한 이치를 아는 것이 다만 안타까울 뿐이다. 상관금홍도 마찬가지였으며 그 역시도 비도탈명이 이렇게 빠를 줄은 지금까지도 믿지를 못했다.

심지어 낭천까지도 이러한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초류빈이 어떻게 하여 비도탈명을 전개해 낸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다만 그 당시의 모든 상황을 초류빈이 자세하게 얘기해 주었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은근히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초류빈이 쉽사리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물어본다는 것을 일단 포기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 순간의 일을 묘사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상관금홍의 손은 오그라져 있었으며 무엇인가를 잡으려고 했다. 그는 아직도 패배를 시인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잡을 수가 없었다.

순간 낭천은 가슴이 답답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 사람에 대하여 갑작스레 동정심을 느낄 수가 있었다. 어찌하여 이러한 느낌이 드는지 자신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동정하는 것이 상관금홍이 아니라 자신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신도 사람이고 또한 상관금홍도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러하듯이 비애와 고통이 있기 마련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낭천은 몸을 돌렸다.

그제야 그는 형무명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형무명은 마치 누가 들어온 것에 대해서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했다.

그는 비록 앞에 있는 거대한 상 뒤에 서 있었지만 마치 또다른 한 세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눈은 상관금홍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상관금홍의 생명은 바로 그의 생명이며 그는 바로 상관금홍의 그림자인 것이다. 만약 생명이 사라졌다면 그림자도 사라지는 것이다. 어떠한 시간이나 장소이건 간에 형무명이 있는 곳이라면 일종의 무형의 위협과 살기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느낌이라고는 전혀 들지 않았다. 낭천은 방 안으로 들어올 때 형무명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는 비록 살아 있기는 하지만 생명이 없는 표본에 불과했다.

그러자 낭천은 길게 탄식을 터뜨렸다. 그는 형무명의 심정이 어떠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 자신도 그러한 경험을 이미 해 보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형무명은 갑자기 걸어오더니 한 손으로 상관금홍의 시체를 들어올리고는 밖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문 앞에 거의 도착했을 때 낭천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복수할 생각이 없소?"

그러나 형무명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발걸음조차도 멈추지 않았다.

낭천은 냉정하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다시 물었다.

"하하...감히 못하는 것이오?"

형무명은 그제야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낭천은 입을 열었다.

"당신의 허리에 검이 있다면 어째서 뽑지 않는 것이오?"

이렇게 말을 하고 난 낭천은 말을 잠시 멈추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의 검은 장식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것이오?"

그러자 형무명이 갑자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상관금홍의 시체는 그의 손에서 떨어졌고 검을 뽑아서 낭천의 목을 향해 찔렀다.

이 모든 것은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것이다. 그의 동작은 더할 수 없이 신속했지만 어떻게 된 것인지 낭천의 목에서 반 자 정도 떨어진 곳에까지 왔을 때 그의 동작은 갑자기 중지되고 말았다. 자세히 보니 낭천의 수중에 있는 대나무 검은 그의 목에서 이미 반 치 정도 떨어진 곳까지 접근해 있었다.

낭천은 세 자루의 대나무 검을 깎았다. 지금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바로 두 번째 검이다. 그는 형무명을 주시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의 동작은 매우 빠르오."

그는 잠시 말을 끊고는 무엇인가 잠시 생각을 더듬더니 다시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람을 무참하게 죽일 수는 없소. 무엇 때문인지 아시오?"

그러자 형무명은 힘없이 검을 내렸다. 낭천은 숨을 한 번 몰아쉬고 나더니 느긋하게 말을 꺼냈다.

"그것은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죽기를 더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오. 자신이 오직 죽기를 원하고 있을 때는 절대로 남을 죽일 수가 없는 것이오."

형무명의 두 눈에서는 고통스러운 빛이 역력히 드러났다. 그는 얼마 동안 무거운 침묵을 지키다가 암담한 표정을 나타냈다. 그러더니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낭천이 말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죽일 수 있소."

형무명은 역시 고개만을 가볍게 끄덕일 뿐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낭천이 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죽이지는 않겠소."

그러자 형무명이 두 눈을 치켜올리며 다그쳐 물었다.

"나를 죽이지 않는다고?"

"내가 당신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당신이 바로 형무명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오."

순간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형무명의 얼굴이 갑작스레 일그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양쪽 볼과 눈언저리에 가벼운 경련이 일어났다. 그는 이러한 말이 자기가 낭천을 만났을 때 했던 말과 똑같은 것이라는 걸 생각할 수가 있었다.

다만 그 당시는 자신이 낭천에 대해서 얘기를 했으나 오늘은 낭천이 그에게 한 것이 다를 뿐이다.

그는 이 몇 마디를 마음속으로 여러 번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그의 두 눈에서는 화염이 떠올랐으며 그것은 마치 타다 남은 재가 마지막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는 것과 같았다.

낭천은 형무명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천천히 말을 꺼냈다.

"이제 그만 가 보시오."

형무명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큰소리로 다시 반복했다.

"가라고.....?"

낭천이 다시 말을 꺼냈다.

"당신이 나에게 기회를 한 번 주었으니 나도 당신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겠소. 마지막 기회를....."

그러자 형무명은 낭천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상관금홍의 시체를 들어올리고는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낭천은 밖으로 걸어나가는 형무명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통쾌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형무명이 전에 그에게 준 것을 낭천은 똑같은 방식으로 형무명에게 돌려준 것이다. 한 사람의 마음이 그 생명을 잃었을 때 두 가지 힘만이 그 생명을 잃은 마음을 재생시켜 줄 수가 있다.

62 소이비도 제4권 찢기는 마음





찢기는 마음



호천강은 이불을 머리 끝까지 올린 채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바닥엔 아직 마르지 않은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켜져 있는 등불은 기름이 다 탄 듯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다 허물어져 가는 객잔 방에 희미한 등불이 어른거리는 것은 매우 음산해 보였고 전혀 생기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설벽운은 천천히 문을 열더니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자상한 어머니의 발걸음은 영원히 그렇게도 가벼운 것 같다.

세상의 어머니들이란 자신들이 꼬박 밤을 지새울망정 사랑스러운 아이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호천강은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다. 어쩌면 그 어떠한 사람보다도 세상물정에 대해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은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이 천진스러웠다.

그의 얼굴은 작고 창백했으며 몹시 야위었다. 그가 무슨 일을 했던 간에 그는 필경 고독하고 아무런 도움도 없는 어린아이임에 틀림없고 인생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설벽운은 조심스럽게 침상 곁으로 다가가 잠자고 있는 호천강을 내려다보았다. 순간 그녀는 코끝이 찡해오는 것을 느낀 것과 동시에 눈시울이 절로 뜨거워졌다.

호천강은 그녀의 유일한 혈육이다.

그녀의 피 한 방울, 살 한 점도 모두 호천강을 위해 바칠 수 있다. 그리고 호천강은 그녀에겐 이 세상에서 유일한 안식처이며 유일한 희망이다.

그녀는 죽는 한이 있어도 그와 헤어지지 않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설벽운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등불을 껐다.

'나는 더 이상 이 아이를 보아선 안 된다. 많이 보면 볼수록장차.....'

그녀는 앞으로 일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두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이 드디어 그녀의 야윈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호천강은 비록 두 눈을 꼭 감고 있었지만 역시 눈물 자국이 보였다. 그리고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너무 추워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일까?

설벽운은 허리를 다소곳이 숙여 이불을 덮어주려고 했다. 순간 그는 이불과 호천강의 옷이 촉촉히 젖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설벽운은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서야 장탄식을 터뜨리면서 탄식하듯 말했다.

"너도 나갔다 왔었구나."

그러나 호천강은 눈과 입을 꼭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벽운은 천천히 입을 열어 물었다.

"너는 내 뒤를 계속 따를 것이냐?"

호천강은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시 설벽운이 또 말했다.

"그리고 내가 한 말도 모두 다 들었겠지?"

호천강은 갑자기 이불 속에서 기름종이로 싼 작은 봉지를 꺼내면서 말했다.

"가지고 가세요."

설벽운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지?"

호천강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십니까? 이것을 가지고 가기 위해 돌아온 것이 아닙니까?"

설벽운의 두 눈에선 고통의 빛이 반사되었다.

"나는...너를 보기 위해 돌아온 것이다."

"이것 때문이 아니라 저를 보러 다시 돌아오셨다구요?"

이렇게 말한 호천강은 갑자기 눈을 뜨더니 그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역시 고통스러운 눈초리로 계속 말했다.

"아마 이 물건이 아니었더라면 벌써 가셨을 거예요."

설벽운은 암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멀리 떠나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호천강은 그녀의 말을 가로채면서 말했다.

"더 이상 얘기하실 필요없어요. 저도 어디로 가신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니까요."

설벽운은 의아해 하며 물었다.

"너도 알고 있었다고?"

호천강은 낭랑하게 말했다.

"초류빈을 구하러 가는 것이 아닌가요?"

설벽운은 아들의 그러한 말에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졌다.

호천강은 쉰 듯한 음성으로 계속 말했다.

"이 인화보감으로써 초류빈을 구할 생각이 아닌가요?"

그리고 기름종이로 싼 물건을 설벽운에게 던져주면서 계속 말했다.

"그런데 왜 가시지 않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설벽운은 심한 현기증을 느낀 듯이 비틀거렸다.

호천강은 몹시 흥분한 어조로 계속 말했다.

"이 인화보감이 있으면 상관금홍은 틀림없이 만나줄 거예요. 그 역시 무예를 연마한 사람이므로 인화보감을 보면 자연히 마음이 움직일 테니까요."

이렇게 말한 그는 이를 악문 채 계속 말을 이었다.

"어머니께선 이 기회를 이용해 그와 싸울 생각이겠지요? 물론 그가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아시겠지요....."

그는 한 차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더니 다시 말했다.

"그래서 어머니께선 잠시나마 그를 잡아두려는 것에 불과하지요. 그를 잡아두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초류빈이 오래 살 테니까요. 그렇게 되면 낭천이 그를 구하러 올는지도 모르지요."

설벽운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천강은 과연 더할 수 없이 총명한 청년이었다. 그는 설벽운의 마음을 완전히 간파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녀가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호천강은 계속해서 말했다

"초류빈이 어머니께 잘해 준 것은 사실이에요. 어머니께서 그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고 또 자식을 버린다 해도 나무랄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의 음성은 매우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께선 다른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셨나요. 저를 위해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저는....."

설벽운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참으면서 호천강의 손을 잡았다.

"나는 물론 너를 생각했다. 나는....."

호천강은 설벽운의 손을 뿌리치면서 소리쳤다.

"저에 대해서 생각하셨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어요. 어머니께서 내일 아침 저더러 그곳으로 가 그들을 기다리라고 하셨으니까요. 그들이 나를 보면 자연히 잘 돌보아 줄 테지요."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그를 꼭 구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어떻게 하지요. 그가 만약 어머니께서 죽는 것을 보면 마음이 더욱 어지러워지고 더욱 고통스러워 할 거예요. 설사 낭천이 달려간다 해도 그를 꼭 살려낼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지요."

설벽운의 몸은 학질에 걸리기라도 한 듯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호천강은 설벽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설사 그가 살아나갈 수 있고, 저를 돌봐 줄 수 있다고 해도 저는 그를 따르지 않을 거예요. 저는 그를 거들떠보고 싶지도 않아요."

설벽운은 흐느끼면서 물었다.

"무엇 때문이지?"

"그 이유는 간단하지요. 그가 증오스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너는 이미....."

"제가 그를 증오하는 것은 그가 저의 공력을 제거했기 때문이 아니에요."

"그럼 무엇 때문이지?"

"제가 그를 증오하는 것은 왜 그가 나의 아버지가 아니냐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제 자신을 증오하지요. 어째서 그의 아들이 되지 못했느냐고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이내 말을 계속했다.

"만약 제가 그의 아들이면 제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모든 것이 원만해질 것이고요."

여기까지 말한 호천강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대성통곡을 했다. 설벽운은 육신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한 아픔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그녀는 더 이상 이 고통을 참아내지 못하고 뒤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 아이가 만약 그의 아들이며 그가 만약 내 남편이라면.....'

그녀는 더 이상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이러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고난과 시련의 나날을 보내면서 그녀는 무수히 생각해 왔던 것이다.

불행한 부모 밑에 태어난 아이는 그 부모보다 더욱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 잘못은 부모에게 있는 것이지 아이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 불행의 씨앗까지도 부모와 같이 시련과 고난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설벽운은 있는 힘을 다해 일어나더니 호천강의 품에 쓰러지면서 비오듯이 눈물을 흘렸다.

"얘야, 너에게 너무 미안하구나. 나는 너에게 너무나 많은 죄를 지었다....."

이렇게 말한 그녀는 더욱더 흐느끼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 같은 부모와 너 같은 자식이 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때 창 밖에서 처량하면서도 무거운 탄식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목메인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은 그 애에게 죄를 진 것이 없으며 미안해 할 것도 없소. 모든 것이 내 잘못이오."

호유성. 그렇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바로 설벽운의 남편이고 호천강의 아버지인 바로 호유성 그였다. 전에 그를 보았던 사람이면 그가 이렇게 낭패하고 초췌하게 변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문 앞에 선 채 꼼짝하지도 않았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갈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호천강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올렸으며 아버지 하고 부르려는 듯 입술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의 입에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호유성은 장탄식을 터뜨리더니 말했다.

"네가 내 아들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설벽운도 이때 고개를 돌려 호유성을 바라보았다.

호유성은 그녀의 눈과 마주치자 암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당신이 내 처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소. 나라는 존재는 생존할 가치가 없는 인간일 뿐이오."

그의 말을 듣던 설벽운이 입을 열었다.

"당신....."

호유성은 그녀가 채 말을 하기도 전에 다시 말했다.

"하지만 나는 좋은 아버지, 그리고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 왔소. 다만...결과가 좋지 않았을 뿐이오."

이렇게 말한 그는 설벽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더욱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모든 일에 실패했소."

호유성은 본시 의복과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상당히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외관이 단정한 사내대장부라서 성질 또한 장부답계 우락부락한 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설벽운은 갑자기 그가 가엾게 여겨지는 것을 느꼈다. 잠시 멍하니 호유성을 쳐다보고 있던 그녀는 어둠이 잔뜩 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에게도 송구스러워요. 저 역시 당신의 좋은 아내가 되어 드리지 못했지요."

호유성은 처량하게 웃었다.

"그것은 당신의 탓이 아니오. 나의 잘못이오. 만약 내가 당신을 만나지 못하고 초류빈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 멈추더니 이내 입을 열어 계속했다.

"결코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 것이고 모두가 행복했을 것이오."

그렇다. 설벽운도 그렇고 초류빈도 그렇지만 그 자신의 운명도 설벽운과 초류빈을 만났기 때문에 이렇게 변한 것이다. 만약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결코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설벽운은 다시 눈물을 흘렸다.

"당신은 어떻게 했던지 간에 그것은 당신의 집, 당신의 가정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한숨을 짧게 내쉬고는 이내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서 당신 잘못도 없고 또 당신만을 탓할 수도 없는 것이지요."

호유성은 처량하게 웃었다.

"우리에게 잘못이 없다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이오?"

설벽운은 창 밖에 내리고 있는 빗줄기를 망연히 바라보면서 말을 받았다.

"누가 잘못했을까? 누가 잘못한 것일까....."

그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그 뉘라서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엔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고 또 대답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다.

호유성은 다시 천천히 말했다.

"나는 본시 다시는 당신과 천강이를 만나려 하지 않았었소. 이번에 당신이 나왔을 때 나는 당신이 내 곁을 떠나려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여기까지 말한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장탄식을 터뜨리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만류하지 않았고 또 돌아와 줄 것을 애원하지도 않았던 것이오. 그것은....."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 멈추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한 모든 일이 당신에게 너무나 많은 고통과 실망을 안겨 주었다는 것을 내 자신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그는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뒤를 따라나오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소. 그저 멀리서라도 당신과 천강이를 보기만 해도 나는 만족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오."

설벽운은 흐느껴 울면서 말했다.

"제발 더 이상 아무 말씀 마세요. 제발....."

"그렇소. 나는 더 이상 말할 자격이 없소. 내가 무엇이라고 말해도 때는 이미 늦었으니까."

설벽운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당신도 알겠지만 저는 초류빈에게 너무나 많은 은혜를 입었어요. 저는 그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나 역시도 그에게 많은 것을 빚졌소. 어쩌면 당신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오. 그러니 당신은 나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하오."

이렇게 말한 호유성은 이미 결심을 내린 듯 갑자기 큰걸음으로 다가왔다.

설벽운은 급급하게 물었다.

"무얼 하시려는 것이지요? 혹시....."

호유성은 갑자기 손을 내밀더니 그녀의 혈도를 찍었다. 그리고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당신은 죽어선 안 되며 또 죽을 수 없소.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은 나요. 내가 살아 있으면....."

이렇게 말한 그는 말문이 자꾸 막혀 애를 썼다.

"모든 사람에게 고통만 안겨다 줄 뿐이오. 내가 죽어야 만이 모든 사람이 행복을 누릴 수가 있을 것이오."

그러더니 기름종이로 싼 인화보감을 들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이어서 비바람소리와 함께 흐느낌에 찬 그의 음성이 멀리서 들려왔다.

"얘야, 너의 어머님을 잘 보살펴 드려라. 다만 이 아버지에 대해선...네가 인정을 하든 말든 그것은 상관없다."

호천강은 갑자기 눈을 크게 떴으며 문 밖에 내리고 있는 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더욱 참혹한 것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갑자기 목청을 돋우어 외쳤다.

"아버님, 인정합니다. 저에겐 당신만이 유일한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저만이 당신의 아들이지요."

그는 더욱더 소리 높게 외쳤다.

"저에겐 아버지 이외엔 아무도 필요없습니다."

이것은 아들이 아버지에 대한 참회다. 그리고 부자지간에만 있을 수 있는 감정이며 세상에서 이러한 감정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아버지인 호유성이 아들의 울부짖음을 듣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저 인간이라면 모두에게 참회와 후회를 느낄 때가 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참회했을 때 그 자가 비록 막다른 길에 처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역시 존경받을 수 있는 일이다.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이다. 다만 피만이 모든 과오를 씻을 수 있고 모든 원한을 끝맺음할 수 있다. 생명은 피에 귀속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새로운 생명 역시 피 속에서 태어난다.

여기는 매우 광활한 장원이다. 이 장원은 딴 부호들이 살고 있는 장원과 별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가 보면 사람의 숨을 막히게 하는 살기가 주위에 산재되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가 있다.

호유성은 대문 앞에 있는 돌계단에 올라 서 있었다. 원내는 죽은 듯이 조용했고 마치 아무도 살고 있지 않는 흉가와도 같았다.

하지만 그가 돌계단에 올라서기가 무섭게 갑자기 십여 개의 인영이 유령같이 나타났다.

나타난 사람은 모두 열여덟 명이었고 모두들 노란옷을 입고 있었다. 호유성은 그들의 얼굴을 전혀 분간해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가 않다. 그것은 그들의 얼굴을 일일이 분간해 낼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금전방의 수하들은 거의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말이 없다. 그것은 그들이 전혀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사 말을 한다고 해도 모두가 상관금홍과 똑같은 음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겐 눈도 없다. 그것은 그들이 볼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상관금홍이 그들에게 보도록 허락한 것뿐이다.

그들에게 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작은 귀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관금홍의 명령을 듣기 위한 부속품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에겐 영혼이 없다. 하지만 사지의 움직임은 매우 영활하고 민첩했으며 눈 깜짝할 사이에 호유성을 포위했다.

호유성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보아하니 이곳이 바로 금전방의 총타인 것 같군."

그러자 누군가가 물었다.

"너는 누구냐? 이곳에 무엇하러 온 것이냐?"

"사람을 찾으러 왔다."

"누구를 찾으러 온 것이냐?"

"너희들의 방주 상관금홍을 만나러 온 것이다. 그는 이미 돌아와 있겠지?"

상관금홍의 이름이 호유성의 입에서 나오자 상대방 황의인들은 마치 무서운 마력을 느낀 듯 급히 태도를 바꾸었다.

"방주께선 이미 돌아오셨습니다. 귀하께선....."

호유성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그에게 한 가지 줄 물건이 있어 찾아온 것이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방주께선 지금 손님을 만나실 수가 없습니다.

"그는 아직도 초류빈과 같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만나보아야겠군."

"존성대명이 어떻게 되십니까?"

"나의 성은 호이다. 지금 나는 매우 중요한 물건을 그에게 급히 줘야 한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잠시 멈추더니 이내 단호하게 외쳤다.

"만약 이 대사가 잘못 되는 날엔 너희들이 책임지겠느냐?"

"호씨라고요?...며칠 전에 방주와 결의를 맺으신 분이 바로 당신이오?"

"그렇다."

그의 대답이 막 끝나는 순간 갑자기 한광이 폭사되면서 한 자루의 칼과 두 자루의 검이 전광석화같이 동시에 그를 향해 엄습해 왔다.

호유성은 대노하여 소리쳤다.

"너희들, 이게 무슨 짓이냐?"

그의 고함소리가 비록 청천벽력 같기는 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고 또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호유성은 본능적으로 주먹을 휘두르면서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그의 무공은 무시할 수 없다. 그의 권법은 강호의 독보적인 것으로써 그 위력은 거대한 바위라도 능히 조각낼 수가 있다.

그러나 그에게 지금 무기가 있다면 두 개의 맨주먹뿐이다.

상대의 병기는 모두 스물두 개다. 그 중엔 창, 쌍검, 쌍편 그리고 쌍필이 있다. 그 중에서도 필이 가장 짧은 병기로써 짧은 만큼 가장 무서운 무기다. 그리고 그 수법은 과거 생사판이 독보해 오던 타혈심법이다.

이 무기는 병기보에 기재되어 있으며 풍우쌍류성 향송에 비해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 검은 송문검으로써 검법은 예전과 같고 선기를 잡는 데 으뜸가는 병기이다. 당대법을 쓰고 있는 고수들 중에서 송문검을 이긴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가장 악랄한 것은 역시 칼이다. 구환도, 칼에 달린 환이 한 번씩 울릴 때마다 사람의 혼을 빼앗는다는 말이 있을 만큼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판관필이 호유성의 혈도를 여지없이 강타했다.

그러나 그는 비명도 지르지 않았고 신음도 토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목이 이미 관통되어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다만 피만 분수와 같이 쏟아져 나올 뿐이다.

그리고 그의 몸은 기둥이 넘어지듯 맥없이 쓰러졌다. 위로 치솟았던 피는 때마침 쓰러진 그의 몸에 고스란히 쏟아져 내려왔다.

호유성은 비록 목숨이 끊어지기는 했지만 눈을 감지 않았다. 그는 쓰러진 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상대방 황의인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은 당장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듯했고 얼굴에 묻은 피가 그의 눈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어 가는 광경은 더할 수 없이 비참했다.

그는 단연 죽음을 각오하고 이곳에 왔다. 하지만 그들이 어째서 상관금홍을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일까?

그것은 호유성을 보면 가차없이 죽이라는 상관금홍의 엄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관금홍은 지금 그 어떠한 사람이라도 이 장원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했다. 상관금홍의 이러한 명령은 즉 법이며 그 누구도 위반할 수가 없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기름종이에 싸여 있던 인화보감은 호유성의 품속에서 저절로 떨어져 나왔고 역시 피로 인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주의 깊게 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호유성의 품에서 나온 물건이 사람들에게 중요시 될 수 있을까? 이로 인해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인화보감도 신비의 무림 비급과 같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이것은 인류의 행운일까 아니면 불행일까? 기름종이에 싼 인화보감은 다시 호유성의 품에 넣어졌고 호유성의 시체도 치워졌다. 금전방의 속하들은 시체를 처리하는 데에는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솜씨를 지니고 있다. 그들이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특별하다.

사람이란 확실히 이상한 동물이다. 그들은 왕왕 이해하기 어려운 원인으로써 그 어떠한 물건을 갈구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버리곤 한다.

하지만 정녕 그 얻고자 하는 물건이 나타났을 때 그들은 그것을 소홀히 인식하거나 그것의 귀중함을 인식하지 못하기 일쑤다. 이것이 일류의 우둔함일까 아니면 총명함일까?

낭천에겐 검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에겐 지금 용기와 자신에 대한 신념이 생겨나 있었다.

여기 옆에 대나무 숲이 하나 있었다.

여기에 서 있으면 금전방의 장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낭천은 대나무 하나를 잘라 세 조각을 냈다. 그리고 자신의 옷을 찢어 뭉툭한 곳을 감아 검잡이처럼 해 놓았다.

그의 동작은 매우 신속했고 조금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손은 처음 초류빈과 만날 때처럼 안정되어 있었다.

손소홍은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았는데 매우 신기한 눈초리였다. 하지만 내심 의아함을 금치 못하고 물었다.

"이 검으로 상관금홍을 상대할 수가 있나요?"

61 소이비도 제4권 진정한 세 여인





세 여인



손소홍은 초류빈이 떠나가는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며 한참 후에야 비로소 설소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설소하는 안간힘을 써서 흙탕물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될 수 있는 대로 거만하고 고귀한 자세를 취하려고 노력했으나 자신도 그것이 헛수고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스스로 자신의 꼴이 비참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손소홍은 여전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표 정이 없는 것도 일종의 경멸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설소하는 홀연 코웃음을 쳤다.

"네가 날 멸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너를 더욱 경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느냐?"

그녀가 반말로 나왔기 때문에 손소홍도 반말로 대꾸했다.

"알고 있다."

설소하는 즉시 말꼬리를 이었다.

"너는 너의 할아버지를 해쳤을 뿐만 아니라 초류빈마저 해쳤다. 그런데도 너는 나무토막처럼 여기에 멍하니 서 있는 도리밖에 없지 않느냐?"

손소홍은 태연하게 반문했다.

"그럼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된다고 생각하느냐?"

"그것은 너 자신이 잘 알고 있을 텐데...너는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알고 있다."

"그렇다면 너는 괴로워하고 참회를 해야 옳지 않을까?"

"너는 내가 괴로워하지 않는 것같이 보이느냐? 진짜 참회를 하는 자는 말로 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그래서 너는 무슨 행동을 했단 말이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이겠느냐?"

"너는 초류빈이 여기에서 떠나면 필시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최소한 그를 붙잡아야 할 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소홍은 다시 반문을 던졌다.

"내가 그를 붙잡는다고 일이 해결될 것 같으냐?"

이어 한숨을 내쉬며 단호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내가 만약 그를 붙잡았다면 그의 마음을 더욱 어지럽혀 죽음을 재촉하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다."

설소하는 눈썹을 살짝 위로 치켜올렸다.

"하지만 너는...심지어 눈물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다."

손소홍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대꾸했다.

"내가 통곡을 하고 싶었던 것을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러나 지금은 울고 싶지 않다."

설소하는 냉소를 날렸다.

"그럼 언제 울겠다는 거냐?"

"내일....."

"흥! 내일이라고? 내일이 되면 다시 내일이 있지 않느냐?"

"영원히 내일이 있으므로 영원히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비록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다. 내 진정 눈물을 흘릴지언정 내일로 미루어야겠다. 오늘은 다른 할 일이 있으니까."

겁쟁이와 바보만이 영원히 내일의 일로 인해 눈물을 흘릴 것이다.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할 용기를 갖춘 자는 역시 마찬가지로 현실을 마주할 용기를 지니고 있을 것이며 절대 자신을 눈물 속에 매장해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눈물은 치욕을 씻을 수 없고 더욱이 잘못을 보완할 수도 없다. 진정으로 참회하는 자는 용기를 꺼내 그 순간부터 새로운 계획을 할 것이다.

설소하는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입을 나불거린 것은 손소홍에게 심적인 타격을 주는데 목적이 있었다. 손소홍이 자기를 멸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로 하여금 자신마저 멸시하게 할 속셈이었다.

그러나 설소하는 실패했다.

손소홍은 그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굳세고 용기 있는 여인이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후에야 설소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할 일이 많다고 했는데 너는 무엇을 하겠느냐?"

손소홍은 천천히 그의 말을 받았다.

"여자가 남자를 돕는다는 것은 죽음을 함께 하는 게 아니다. 남자가 편안한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격려와 위안을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남자로 하여금 자신의 가치를 재인식하도록....."

설소하는 아니꼽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것으로써 충분하단 말이냐?"

손소홍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외에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일이 또 무엇이겠느냐?"

그녀는 더 이상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어떤 남자라 해도 이런 여인을 만나게 되면 모두 감격하게 될 것이다.

손소홍이 홀연 먼저 입을 열었다.

"너는 나에게 심적인 타격을 주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하고 있지만 나는 너를 나무라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문득 네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불쌍하다고? 어느 면에서 불쌍하다는 거냐?"

"저는 자신이 젊고 아름다우며 총명하다고 자부해 이 세상 모든 남자가 너의 발 밑에 무릎을 꿇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 남이 진심으로 너를 대하면 너는 도리어 그를 바보로 취급하고 고통을 주었지만 언젠가는 진심으로 너를 대한 사람은 네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많지 않으며 진실한 감정은 결코 청춘과 미모로 살 수 없는 가장 고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라 생각되어서다."

그녀는 설소하를 주시하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때가 되면 너는 비로소 아무것도 얻지 못한 빈껍데기뿐인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여인이 그런 지경에 처하게 되면 가장 불쌍한 신세가 되는 것이다."

"너는...지금 내가 그런 지경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단 말이냐?"

설소하는 부인을 하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으나 음성은 떨렸다. 전신이 떨리고 있기 때문이다. 분노로 인한 건지 아니면 추위 탓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공포를 느낀 요소가 가장 큰 것 같았다.

손소홍은 아무 대꾸없이 냉랭하게 그녀의 새파란 얼굴과 흙탕물로 뒤범벅인 몸을 주시할 뿐이다. 침묵과 차가운 눈초리는 어떠한 말보다도 그녀에게 괴로움을 안겨 줄 수 있었다.

설소하는 홀연 대소를 터뜨렸다.

"호호호...그렇다. 나는 줄곧 그를 바보로 취급하고 내 발바닥만 핥게 해 왔다. 하지만 난 다시 그를 찾아갈 것이다. 그는 변함없이 나한테 무릎을 꿇고 내 말에 순종할 것이다."

"과연 너의 뜻대로 될지 당장 가서 시험해 보는 게 어떠냐?"

"시험을 하지 않아도 나는 자신이 있다. 내가 없으면 그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다."

그녀는 비록 시험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이미 몸을 돌려 앞으로 질주해 갔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갔다.

그녀 자신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 기회를 만약 놓친다면 그녀는 정말 쓰러질 것이다.

손소홍은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비로소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때 안개 같은 빗발이 뿌려지는 어둠 속에서 또 하나의 사람 인영이 나타났다.

이 사람은 언제 왔는지 알 수 없으나 온몸이 축축하게 젖은 것으로 미루어 온 지 오래 된 것 같았다.

손소홍은 먼저 상대방의 눈동자부터 보았다. 그 눈동자는 별로 빛나지 않았다. 어쩌면 눈물을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눈빛은 초점을 잃고 있는 느낌마저 주었다.

그러나 그 눈동자는 철썩같이 믿어 온 사람의 마음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애수가 짙게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손소홍은 그의 얼굴을 보았다. 티를 찾아볼 수 없는 완미한 얼굴은 아니었다. 오래도록 햇빛을 보지 못한 것처럼 안색은 너무나도 창백했다.

그런데도 어찌된 영문인지 손소홍은 그를 보는 순간 자기가 여지껏 보아온 사람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란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이미 헝클어져 있고 옷도 빗물에 축축하게 젖어 있어 응당 초라하게 보여야 하건만 이상하게도 손소홍은 전혀 초라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인상은 그렇게도 청아하고 고귀하기만 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녀를 접하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독특한 기질과 매력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손소홍은 이 여인을 처음 보았지만 대번에 누구인지 추측해 낼 수 있었다. 설벽운. 그녀만이 비로소 초류빈 같은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손소홍은 내심 탄식했다.

'왜 다른 사람들은 설소하를 강호 제일의 미녀라 하는 것일까? 그 칭호를 설벽운에게 붙여야 옳다. 젊었을 때는 물론 두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지금도 그녀는 설소하보다 훨씬 낫다.'

그녀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지금은 비오는 밤중이었고 그녀는 여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자가 여자를 보는 견해는 어찌 되었든 간에 남자와는 다르다.

설벽운은 그녀를 주시하며 천천히 앞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손낭자죠?"

손소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당신을 알고 있어요. 그 사람에게서 가끔 당신 얘기를 들었어요."

설벽운은 그녀의 말을 듣자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극히 처량한 웃음이었다. 그녀는 물론 손소홍이 말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손소홍이 물었다.

"당신은 이곳에 온 지 오래 되었나요?"

설벽운은 고개를 떨구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나는 그가 이곳에서 결투를 벌인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몇 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달려왔어요. 그런데 문득 당신한테 하는 게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녀의 음성은 부드럽고 느렸다. 한 마디를 할 때마다 먼저 깊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든 담담하여 다른 사람이 들으면 필시 그녀를 냉막하고 무정한 여인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손소홍은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냉막한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너무나 많은 고통과 시련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손소홍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동정을 느켜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 사람은 당신을 무척 만나고 싶어 했어요. 당신이 정녕 이곳까지 온 이상 왜 그 사람을 만나지 않죠?"

설벽운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말을 더듬거렸다.

"나는...그럴 수가 없어요."

그녀는 본래 초류빈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이곳에 당도했을 때 이미 많은 사람이 초류빈의 주위에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만 모습을 나타낼 용기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행여나 다른 사람이 자기와 초류빈의 감정을 간파할까 봐 두려웠다.

그녀가 만약 초류빈 앞에 나서게 되면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수 없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비록 그러한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손소홍은 이해할 수 있었다.

손소홍은 탄식했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에 의해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자를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의 의사를 따르는 것은 상대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반대로 사랑하기 때문이죠. 상대가 무엇을 요구하든 따르는 것이 참된 사랑임을 깨달았어요."

설벽운은 줄곧 자신을 억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물은 이미 샘 솟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소홍의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바늘처럼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을 파고들어 이성이라는 벽을 무너뜨린 것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반문한 적이 있었다.

'지금의 나는 설소하와 같이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 이것은 누구의 과오로 인해 조성된 결과인가? 내 자신의 잘못이 아닐까.'

그녀는 한때 초류빈을 원망하고 저주했다. 이러한 비극을 조성한 장본인이 바로 초류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그 잘못이 초류빈에게 있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 나는 왜 그의 의사에 따랐을까? 왜 솔직히 내 마음을 털어놓아 오직 그만을 사랑하며 그 이외의 사람에겐 절대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분명하게 말을 하지 못했을까?'

손소홍은 다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비록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은 잘 모르지만....."

설벽운은 홀연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이제 나도 알았어요. 당신을 보자 나는 곧 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손소홍은 커다란 눈으로 그녀를 주시할 뿐이다.

설벽운은 스스로 말을 이어갔다.

"내가 만약 당신과 같은 용기가 있었고 당신과 같이 신념이 확고했다면 오늘날 이런 결과는 없었을 거예요."

"그러나 당신은....."

"나는 이제서야 내가 그분의 아내가 될 자격이 없는 여자라는 것을 알았어요. 당신이야말로 그에게 어울리는 여인이에요."

손소홍은 고개를 숙였다.

설벽운은 아예 그녀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당신 같은 여자라야 만이 그를 위하고 격려해 줄 수 있을 거예요. 그가 무슨 일을 하든 당신은 그에 대해 믿음이 변치 않지만 나는....."

그녀는 울적한 듯 한숨을 내쉬며 다시 눈물을 흘렸다.

손소홍은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홀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당신은 다시 그를 만날 기회가 있을 거예요. 예전의 일은 이미 지나갔으니 차후로 두 사람은 다시....."

설벽운은 다시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당신은 그에게 기회가 있고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손소홍은 단호하게 말하더니 빙긋이 웃었다.

"물론이에요. 다른 사람은 그의 모습을 보고 십중팔구 그가 자신에 대해 믿음을 잃었다고 생각할 거예요. 자신에 대한 믿음마저 잃은 사람이라면 자연히 희망이 없겠죠."

"바로 그러기에....."

손소홍은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즉시 말을 가로챘다.

"하지만 저는 알고 있어요. 그가 그런 자신없는 태도를 취한 것은 고의로 상관금홍으로 하여금 자기를 경시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거예요. 상관금홍이 적을 가볍게 여기는 생각을 갖게 되면 주의력이 분산될 가능성이 없지 않죠."

그녀는 눈동자를 유난히 빛내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그럴 가능성이 현실로 된다면 그분은 능히 상관금홍을 죽일 수 있을 거예요."

설벽운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가 정말 자신에 대해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그분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당신이 그에게 준 도움이 얼마나 큰지 당신 자신도 결코 모를 거예요."

손소홍은 고개를 다시 숙이며 빙그레 웃었다.

"저도 알고 있어요."

그녀는 비단 초류빈에게 진심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벽운은 그녀를 쳐다보며 일종의 꼬집어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부러움? 질투? 자책? 아니면 초류빈을 위한 기쁨인지.....

반평생 고통과 자포자기로 살아온 초류빈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손소홍 같은 여인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이번에 설사 싸움에서 이긴다 해도 언젠가는 쓰러지게 될 것이다. 설령 그를 쓰러뜨릴 사람이 없다 해도 그는 스스로 자신을 쓰러뜨릴 것이다.

설벽운은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그가 당신을 만난 것은 어쩌면 하늘이 그에게 내린 보상일 거예요. 물론 그에게 응당히 있어야 할 보상이지만....."

여기서 일단 말을 끊은 그녀는 홀연 물었다.

"형무명은 어떻게 하죠? 그분이 설사 상관금홍을 격파시킬 수 있다 해도 그들 두 사람의 협공은 당해내지 못할 거예요."

손소홍은 생각을 굴리며 대답했다.

"형무명은 어쩌면 출수하지 않을 거예요. 상관금홍이 짐짓 필승할 자신을 갖고 있다면 구태여 그가 출수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물론 나중엔 후회하겠지만 그때는 이미 때가 늦었을 거예요."

그녀의 말은 옳았다. 그것이야말로 초류빈의 유일한 기회이다. 그들이 초류빈을 쓰러뜨리려면 역시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없을 것이다. 비도탈명, 그는 절대 어느 누구에게도 두 번째 기회를 주지 않는다.

문제는 누가 먼저 그 기회를 포착하느냐는 것이다.

설벽운은 다그치듯 물었다.

"그럼 당신의 말뜻은 형무명이 출수하지 않아야만 그에게 기회가 있다는 건가요?"

"맞아요."

"그럼 당신은 형무명이 출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나요?"

"확신을 할 수 없어요."

하고 대답한 손소홍은 얼른 다음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한 시진 이내엔 어느 누구도 출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한 시진 이내에 기적이 생길 리는 없잖아요?"

"있어요."

"무슨 기적이죠?"

"낭천이에요."

설벽운은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몹시 실망을 하는 표정이었다.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모두들 낭천의 말만 나오면 실망할 것이다.

손소홍은 자신 있게 말을 이었다.

"모두들 낭천이 구제받을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에게 올가미가 씌워져 있기 때문이에요."

"올가미라뇨?"

"그래요. 올가미예요. 그 올가미를 풀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을 거예요."

"그게 누구죠?"

"올가미를 풀 수 있는 사람은 올가미를 씌운 사람뿐이에요."

"그렇다면...설소하....."

"그래요. 설소하는 사랑할 가치가 없는 여자임을 스스로 발견했을 때 그의 올가미는 자연히 풀어질 거예요."

설벽운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의 말이 옳은지도 몰라요. 그러나 그는 이미 수렁에 빠진 지 오래 되었는데 한 시진 이내에 벗어날 수 있을까요?"

"다른 원인이라면 물론 불가능하지만 초류빈을 위해서라면 가능할 수도 있어요."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사람은 자기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선 왕왕 평상시 해낼 수 없는 일을 행하게 되는 예가 있어요."

설소하는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되길 바랄 뿐이에요."

"그래서 저는 지금 낭천을 찾아가 그에게 모든 것을 얘기하겠어요."

"잠깐만. 나는...아직 당신에게 할 말이 남아 있어요."

"듣겠어요."

"나는 이미 오랫동안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바깥 사람들의 일은 낱낱이 알고 있어요. 당신은 그 점에 대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손소홍은 미소를 띠고 대꾸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에게 매우 영리한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설벽운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어찌 되었든 그는 역시 내 아들이에요. 그를 제외하곤 나에겐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부탁드리는 것인데 그분을 만나면 내 아들을 용서해 달라는 말을 전해 주세요."

손소홍은 가볍게 탄식을 했다.

"그분은 생전 누구를 미워한 적이 없어요. 당신도 그 점만은 알고 있을 거예요."

설벽운은 생각에 잠겼다. 하고자 하는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손소홍은 잽싸게 그녀의 표정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당신은 저에게 인화보감에 관해 말하려는 건가요?"

설벽운은 약간 놀랐다.

"당신도 그 일을 알고 있나요?"

손소홍은 방그레 웃었다.

"저의 숙부님은 바로 손....."

설벽운은 대뜸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래요. 왕노선배님이 왔을 때 손이 선생도 함께 있었어요."

"그렇다면 그 인화보감은 확실히 당신 수중에 있겠군요."

"그래요. 하지만 나는 그 일을 줄곧 그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왜 그랬죠?"

"당시 나는 무공이 비단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도리어 그를 해친다고 생각했어요. 그의 무공이 높을수록 더욱 많은 위험이 따를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당신은 그 일을 숨기고 그가 평범한 사람이 되어 평범하게 일생을 마치기를 바랐군요."

설벽운은 처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어쩌면 믿지 않으려 하겠지만....."

"저는 믿어요. 제가 만약 당신이었더라도 역시 그렇게 했을 거예요."

여자만이 여자의 생각을 이해한다. 여자라야 만이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여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한쪽에선 여자의 행동이 심지어 우스꽝스럽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여자는 어떠한 원인도 자기의 생각보다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설벽운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분에게 숨긴 것을 후회하고 있어요."

"당신이 그에게 숨긴 것은 그를 위해서였는데 왜 후회를 하죠?"

"그것은...그가 만약 인화보감에 수록돼 있는 무공 또한 터득했다면 오늘 설사 상관금홍과 형무명의 협공을 받아도 상관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당신은 죄책감을 느끼고 그에게 용서를 비는 건가요?"

설벽운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를 탓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 일을 털어놓지 않으면 난 죄책감에....."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소홍은 강경한 어투로 말했다.

"그것은 그릇된 생각이에요."

"그릇된 생각이라니....."

"그분이 만일 인화보감에 수록된 무공을 연마했다면 더욱 상관금홍의 적수가 될 수 없을 거예요."

"그건 왜 그렇죠?"

손소홍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낭천의 검이 무엇 때문에 무서운지 알고 있나요?"

"어느 누구보다도 빠르기 때문이겠죠."

"그럼 어째서 남들보다 빠른지 아시나요?"

"그것은....."

"그가 빠른 것은 다른 사람보다 정신통일이 잘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비도탈명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들이 만약 도중에서 다른 무공을 연마했다면 도리어 정신이 분산되어 어쩌면 지금과 같이 속도가 빠르지 못할 거예요."

설벽운은 고개를 떨구었다가 한참 후에야 차분히 가다듬어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내 뜻을 그에게 전해 주길 바래요."

손소홍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당신네들은 나중에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텐데 당신은 왜 직접 그에게 말하지 않죠?"

설벽운은 또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킨 후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안색은 홀연 차분하게 변해 있었다.

"이후에 우리는 어쩌면 더 이상 만날 기회가 없을 거예요."

손소홍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서죠?"

설벽운은 즉시 그녀의 말을 받았다.

"왜냐하면...왜냐하면 난 아주 아주 먼 곳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에요."

손소홍은 안타까워 말을 더듬거렸다.

"꼭...꼭 가야만 되나요?"

"꼭 가야 돼요."

"무엇 때문이죠?"

"난 이미 결심했기 때문이에요."

"결심요?"

"내 일생의 최대 약점은 한 번도 결심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에요. 이것은 어쩌면 처음으로 내린 것인지도 몰라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다시 나의 결심을 변경시키려는 것이 싫어요."

그녀의 말을 다 듣고 난 손소홍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하지만 우리는 겨우 한 번밖에 만나지 않았고 말도 별로 많이 나누지 못했으니 다시 한 번 나를 만나주세요. 저도 당신에게 할 얘기가 많아요."

설벽운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이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좋아요. 내일 아침에 바로 여기 이 자리에서 당신을 기다리겠어요."

설벽운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지금 하늘과 땅 사이에는 오직 손소홍 한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웬만해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여인이었는데 돌연 샘물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 역시 결심을 내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저 초류빈이 죽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꼭 그를 여기로 데려오려고 했다. 손소홍이 초류빈을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이미 자기의 일생을 그에게 주기로 결심을 했던 것이다.

이 결심만은 한 번도 변경시키지 않았으나 지금은 자기의 욕심이 너무 크다는 것을 느켜 자신을 희생하려고 결심했다. 그것은 자기보다 설벽운이 더욱 초류빈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는 본시 그에게 속해 있으므로 그 누구도 그들을 떼어 놓을 수가 없다.

'호천강도 안 된다. 그는 원래부터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입술을 깨문 채 눈물을 닦았다.

'설사 눈물이 난다 해도 내일 흘려야 한다. 오늘 나에겐 많은 할 일이 남아 있다.....'

그녀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주위는 매우 어두웠으며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그러나 밤이 오면 새벽이 올 것이고 또 반드시 해가 뜨기 마련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 단 두 종류의 사람만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즉 선과 악이다. 남자도 그렇지만 여자 역시 마찬가지다.

설소하는 물론 나쁜 사람, 즉 악인에 속해 있는 여자다. 하지만 설벽운과 손소홍은 어떤 종류에 속하는 사람일까? 그들은 물론 다 좋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두 사람에겐 또 서로의 다른 점이 있다. 설벽운은 어떠한 일에 있어서는 참고 참는다.

그녀는 여성의 가장 큰 미덕이 인내, 즉 참는 데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손소홍은 반항적인 기질이 있는 여자다. 잘못된 것이라고 느낀다면 그녀는 반항을 한다.

그녀는 고집이 있고 명랑하고 용기가 있다. 그리고 사람을 사랑할 줄도 알고 또 미워할 줄도 알고 있다.

바로 이 세상에 그와 같은 여자가 있기 때문에 인류는 부단히 전진되고 계속 생존해 나가는지도 모른다.

강한 여성은 인류의 상승을 인도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그녀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저 내가 그를 찾아가면 어느 때라도 그는 기어서 나에게 매달릴 것이다. 내가 없으면 그는 살아갈 수 없다.'

설소하는 진짜 이렇게 자신이 있는 것일까?

그녀는 확실히 자신이 있다. 그것은 낭천이 자신을 목숨보다도 더 소중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낭천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는 아직도 집 안에 있을 거야. 그곳은 우리 집이니까. 거기에 내가 두고 온 물건이 있고 내가 남긴 냄새가 있으니까. 그는 아직도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여기까지 생각한 설소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요 며칠 사이에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술만 먹고 있었을 거야. 그리고 집 안이 엉망진창이겠지. 아니 어쩌면 시체들도 치우지 않았을 거야.'

이렇게 생각한 설소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상관없어. 그저 나를 보기만 하면 그는 무슨 일이든지 앞다투어 할 거야.....'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 설소하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이 돌아갈 곳이 있고 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확실히 유쾌한 일이다.

'어쩌면 전에 내가 그에게 너무나 심하게 했는지도 몰라. 그를 너무 꽉 잡아두었지. 이젠 나도 방침을 바꾸어야지.....'

'남자란 어린아이와 같단 말이야. 남자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려면 어느 정도 단맛을 보여줘야 하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그녀는 전신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찌 되었든 그는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야. 어쩌면 내가 만난 남자 중 그 누구보다도 강할지도 모르지.'

그녀는 돌연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녀의 감정을 움직이게 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바로 낭천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녀는 낭천의 좋은 점이 그 어느 남성보다도 많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에게 잘해 줘야 될 거다. 이 세상에 그 같은 남자는 그리 많지 않을 거야. 아니 그 외엔 없을지도 몰라.....'

그녀는 생각하면 할수록 낭천이라는 존재가 꼭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놓쳐선 안 된다고 내심 다짐했다.

어쩌면 그녀도 애당초 그를 사랑했는지 모른다. 다만 그가 자신을 너무 사랑해 주므로 그녀로 하여금 귀찮다는 느낌을 갖게 했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가 그녀를 너무 깊이 사랑하지만 않았더라도 반대로 그녀가 그를 더욱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약점이며 인간에게만 있을 수 있는 모순인 것이다. 그래서 총명한 남자라면 그 어떠한 여성을 사랑하게 될때 절대로 자신의 사랑하는 마음을 상대 여성에게 완전무결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낭천, 안심해요. 이젠 절대로 당신을 괴롭히지 않겠어요. 과거는 지나간 것이며 우린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그저 당신이 전과 같이 나를 대해 준다면 저는 오직 당신의 뜻에만 따르겠어요.'

그러나 낭천은 과연 전과 같이 그녀를 대해 줄 것인가? 설소하는 갑자기 자신감을 잃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믿음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전에는 낭천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 이렇게 중요한지를 미처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낭천이 자신에게 잘해 주든 나쁘게 대하든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어떠한 물건에 대해 꼭 필요하다고 느꼈을 때에야 그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이러한 느낌도 역시 인류의 많은 약점 중의 하나다. 그러나 그것이 절실히 요망될 때일수록 잃을 가능성이 크니 이 또한 비극이 아닐 수가 없다.

설소하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길 옆에 자리잡고 있는 집이 눈에 들어왔다. 집 안에는 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몸에 바싹 붙은 옷 한쪽을 찢어 빗물에 적신 후 얼굴을 씻고 손으로 머리를 잘 다듬었다. 그녀는 낭천에게 자신의 낭패한 꼴을 그대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방 안 가운데에 놓여 있는 상 위엔 불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등 옆엔 죽을 끓인 솥이 있었다. 방 안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더럽지 않았다.

시체는 이미 치워졌고 핏자국도 말끔히 씻겨진 것이 전과 다름없이 깨끗했다.

낭천은 상 옆 의자에 앉은 채 죽을 먹고 있었다.

그는 본시 무엇을 하든 매우 느리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하는 습관이 있다. 그것은 음식을 얻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천천히 먹는 즐거움을 의식하면서 음식을 완전히 소화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못했다.

권태스러운 표정으로 음식을 자신의 입으로 억지로 가져가는 것 같았다. 그는 어째서 억지로 음식을 먹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이 쓰러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밤은 이미 깊었지만 그는 혼자 앉아서 죽을 억지로 입으로 가져가고 있을 뿐이다. 이런 모습을 보지 못한 사람은 이 모습이 얼마나 고독해 보이고 또 처량해 보이는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문이 가볍게 열리면서 설소하가 문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아무 말없이 낭천을 바라보았다.

낭천을 본 순간 그녀는 갑자기 체내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오랜 떠돌이 생활 끝에 가족을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어떻게 해서 이러한 느낌을 갖게 되었는지 그녀 자신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본시 차가운 피를 지닌 무정한 여자다.

그러나 낭천은 누가 들어온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 듯 고개를 숙인 채 계속 죽만 떠먹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의 얼굴 근육이 점점 굳어져 가는 것을 역력히 볼 수가 있었다.

드디어 설소하가 입을 열어 낭천을 불렀다.

"낭천....."

그녀의 음성은 여전히 부드럽고 달콤했으며 전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낭천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 그녀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의 눈초리는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혹시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이 아닐까? 설소하의 두 눈도 축축히 젖어 있었다. 얼마 간 무거운 침묵이 흐르자 설소하가 부드러우면서도 흐느낌에 가까운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낭천, 제가 돌아왔어요....."

그러나 낭천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고 또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는 온몸이 얼어붙어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설소하는 낭천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저는 당신이 기다려 주실 줄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저는 이 세상에서 유독 당신만이 저에게 진실로 대해 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이번에 그녀는 아무런 수단도 사용하지 않고 말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진실을 말한 것이다.

"저는 이제서야 모든 사람이 저에게 호의적으로 대해 준 것이 저를 이용하기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요...그리고 저는 그들을 이용하고...그렇지만 당신만은 제가 어떻게 하든 저에게 진실로 대해 주었지요."

이렇게 말한 그녀는 낭천의 표정에 대해서는 전혀 주의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점점 더 낭천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두 사람의 거리가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을 정도라 낭천의 표정 변화에 대해선 분명하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저는 다시는 당신을 속이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다시는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어떠한 일을 하시든 저는 당신을 따를 뿐이에요....."

딱!

이때 낭천의 수중에 있던 젓가락이 갑자기 부러졌다.

설소하는 낭천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다 갖다댄 후 꿈처럼 달콤한 음성으로 계속 말했다.

"제가 전에 당신에게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보상해 드리겠어요. 그리고 당신에게 저에게 당신이 해 준 것이 얼마나 보람이 있고 가치 있었던 것인지 느끼도록 해 드리겠어요."

그녀의 풍만한 가슴은 탄력이 있고 따스했으며 호흡에 따라 가볍게 출렁이고 있었다.

어떤 남자라도 그녀의 가슴에다 일단 손을 얹으면 다시는 떼어낼 수 없을 만큼 그녀의 가슴엔 무서운 흡인력이 있었다.

그러나 낭천은 그녀의 가슴에서 천천히 손을 떼었다.

순간 설소하의 두 눈은 두려움의 빛으로 가득찼다.

"당신은...당신은 혹시...혹시 저를 버리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낭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설소하라는 여자를 처음 본 듯이 그저 멍청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설소하의 몸은 어느 새 떨고 음성까지도 떨리고 있었다.

"제가 당신에게 말씀드린 것은 모두가 진실이에요. 전엔 제가 비록 딴 남자들과 관계가 있었지만 그것은 모두가 그들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어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그것은 낭천의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낭천의 표정은 마치 심한 구토를 일으키려는 듯 보기 흉하도록 일그러져 있었다.

설소하는 절로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당신...당신은 저의 진실이 싫으신가요? 아직도 제가 당신을 속이는 것을 원하시나요?"

낭천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더니 드디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 단 한 가지 의문이 있을 뿐이오."

설소하는 그의 말을 얼른 받아 물었다.

"그 의문이 무엇이지요?"

낭천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마디 한마디 분명하게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해서 당신과 같은 여자를 그토록 사랑했는지가 의문일 뿐이오."

설소하는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전신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몸을 심하게 떨었다.

낭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이 한 마디로써 자신의 의사를 십분 표현해 낸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갔다. 한 인간으로서 무수한 타격과 모욕을 당했을 땐 반드시 변하기 마련이다. 한 평범한 인간을 두고 얘기할 때 아니 그 이상의 어떠한 사람이라도 황당무계한 거짓말에 대해선 참을 수 있을지 몰라도 가장 참기 어려운 모욕은 결코 견뎌낼 수 없다.

물론 여자나 남자나 모두 마찬가지인 것이다. 설소하는 자기의 몸뚱이가 깊고 깊은 구덩이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낭천은 이때 이미 문고리를 향해 손을 내뻗어 문을 열었다.

설소하는 갑자기 뛰어가 낭천 앞에 무릎을 꿇더니 그의 두 다리를 감싸안으면서 목메어 애원을 했다.

"당신은 이대로 저를 버릴 생각이신가요...저에겐 이제 오직 당신만이 있을 뿐이에요....."

낭천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서서히 윗옷을 벗어 던진 후 설소하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빗속에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빗물은 매우 차가웠다.

그러나 낭천은 조금도 차가운 기를 느끼지 못했고 마치 자신의 몸에 묻은 모든 오점을 빗물로 씻어내려는 듯 먹구름이 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비를 맞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드디어 설소하라는 쇠사슬을 벗어던졌다.

그것은 마치 남루하여 더 이상 입을 수 없는 옷을 벗어 던진 것과 같았다.

설소하는 문앞에서 낭천의 옷만 잡고 있었다. 그녀는 이 옷 이외에 더 이상 아무것도 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제와서야 자신이 낭천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가 있었다.

그녀가 낭천을 괴롭혔던 것은 어쩌면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자란 어째서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괴롭히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그녀는 이제와서야 낭천이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가를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가 깨닫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 인간이란 모두가 다 그런 것인가?

자신이 얻은 물건에 대해서는 경멸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도 어째서 일단 그것을 잃었을 때야 그 귀중함을 깨닫는 것일까?

설소하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낭천이 벗어 던진 옷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두려울 것 없다. 나는 아직 예쁘고 젊다. 나를 좋아하는 남자라면 얼마든지 잡을 수가 있다....."

그녀는 미친 듯이 절규를 했고 그리고 비록 웃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우는 것보다 더욱 비참해 보였다

그녀는 남자를 얻는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진실은 단순히 청춘과 미모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비는 매우 차가웠다. 하지만 낭천은 차가워하기는커녕 마음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빗물을 맞으면서 그는 자신이 마비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년이 지나는 동안 처음으로 이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 년 동안 걸머지고 있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마음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때 누군가가 멀리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낭천....."

부르는 소리는 매우 가벼웠다. 만약 며칠 전에 들었다면 그는 아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귀가 어느 때보다 밝았고 두 눈도 비할 데없이 맑아 있었다.

"누구시오?"

이렇게 반문하고 몸을 서서히 돌리자 한 사람이 달려오고 있었다. 길게 땋은 두 가닥의 댕기와 반짝이는 두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처녀였다.

다만 매우 조급해 보이고 또 초췌해 보였다. 나타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손소홍이었다. 그녀는 낭천에게 바짝 다가서더니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말했다.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낭천은 그녀의 말을 가로채면서 말했다.

"나는 낭자를 기억하고 있소. 이 년 전에 낭자를 본 적이 있소. 낭자는 얘기를 매우 잘하지 않소. 요 며칠 전에도 낭자를 보았지만 낭자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소."

손소홍도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의 기억력이 이렇게 좋으실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요."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매우 상쾌해진 것 같았다. 그녀는 낭천이 다시 일어선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즉 낭천은 모든 악몽에서 헤어나 옛날 본연의 자세로 다시 되돌아 온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초류빈이 낭천의 진실한 친구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낭천은 그녀가 자신을 찾으러 온 것은 필시 무슨 일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묻지는 않았다.

자신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자연히 말을 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얼마쯤 침묵이 흐르자 낭천이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떤 말이든지 서슴지 말고 하시오. 낭자는 초류빈의 친구이니까."

손소홍은 흑백이 뚜렷한 두 눈을 깜박거리면서 물었다.

"당신은 그녀를 만나보셨나요?"

그녀는 즉 설소하를 말하는 것이었다.

낭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보았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소홍이 재빨리 물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지요?"

낭천의 안색은 순간 급변했다.

"그는 그고 나는 난데 낭자는 어째서 그것을 묻는 것이오?"

과거 누구든지 그 앞에서 설소하의 얘기를 꺼내기만 하면 그는 흥분을 느끼곤 했다. 그저 설소하의 이름만 들어도 그는 무서운 마력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

손소홍은 이러한 낭천의 모습을 보자 절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결국 자신의 몸에 감겨 있던 쇠사슬을 벗어 버렸군요."

낭천은 매우 안정된 어조로 물었다.

"쇠사슬?"

손소홍이 대답을 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다 자신을 묶을 수 있는 쇠사슬을 지니고 있지요. 그 쇠사슬을 풀 수 있는 사람에겐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지요."

낭천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소."

"꼭 이해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렇게 하신 것으로 끝내야지요."

낭천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말했다.

"내 이제야 이해할 것 같소."

"정말 이해하셨나요? 그럼 묻겠어요. 당신은 어떻게 해서 쇠사슬에서 벗어나신 것이죠?"

낭천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갑자기 생각이 트인 것뿐이오."

그의 대답은 매우 간단했다. 하지만 생각이 트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도를 내린 것도 역시 생각이 트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달마 도사는 벽을 마주한 채 십팔 년 동안 참선을 하고서야 생각이 트였다.

어떤 일이든지 그저 생각이 트일 수만 있다면 번뇌란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생각이 트이기 전까지는 무수한 번뇌를 겪었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손소홍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탄식을 터뜨렸다.

"한 사람이 생각이 트일 때까지 치러야 할 대가는 적은 것이 아닐 거예요....."

낭천은 더 이상 그러한 일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지가 않은 듯 화제를 바꿔 물었다.

"그가 낭자를 시켜 나를 찾아온 것이오?"

손소홍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는 지금 어디에 있소?"

손소홍은 갑자기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고 웃음도 일순 사라졌다.

낭천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낭자, 왜 그러시오?"

손소홍은 암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려 그가 어디에 있는지 저도 몰라요. 그리고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있지요."

낭천의 안색은 급변했다.

"낭자, 그게 무슨 말이오?"

"어쩌면 그를 찾을 수는 있을 거예요. 다만 그의 생사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낭천은 다그쳐 물었다.

"그의 생사가 어쨌다는 것이오?"

손소홍은 낭천을 똑바로 보면서 분명하게 말했다.

"그의 생사는 당신에게 달려 있어요."

밖에 비가 내리기는 하지만 방 안은 매우 건조했다. 커다란 방에는 창이 단 하나뿐이었고 그 창은 작고 땅에서 매우 높았다. 창문은 항상 닫혀 있는 데다가 햇빛이 들어오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담에는 하얀 칠이 매우 두껍게 칠해져 있었다.

그로 인해 담이 나무로 된 것인지 아니면 쇠로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담이 매우 두껍다는 것만은 누구나 알 수가 있었다.

방 안에는 두 개의 침상과 하나의 커다란 상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의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집기도 하나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방은 고행승이 사용하는 방보다도 더욱 간소하다. 그러나 강호에서 명성이 제일 가고 세력과 체력이 가장 크고 웅후한 금전방 방주가 이러한 곳에 기거하고 있다니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초류빈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상관금홍은 바로 그의 옆에 서 있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곳에 대해 만족하오?"

초류빈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웃으면서 한마디 했다.

"이곳은 매우 건조하구려."

"그렇소. 건조한 것은 사실이오. 물 한 방울 없다는 것을 내 보장할 수 있소."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 멈추더니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곳엔 물은 물론이지만 차와 술도 없으며 심지어는 이곳에선 눈물 한 방울 흘린 사람도 없소."

"피는? 이곳에서 피를 흘린 사람도 없소?"

"그것도 없소. 설사 이곳에서 죽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피는 이미 다 말라 버리니까."

이렇게 말한 그는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마음만 먹으면 그 사람이 살아 있든 죽어 있든 이곳에 들어올 수가 없소."

"솔직히 말해 살아서 이곳에 사는 것은 편치 않을지 몰라도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것은 괜찮은 일일 것이오."

"그것은 무엇 때문이오?"

"이곳은 무림과 같은 곳이니까."

"이곳이 정 맘에 든다면 내 당신을 이곳에다 묻어 주겠소."

이렇게 말한 상관금홍의 두 눈에선 잔혹한 광채가 폭사되어 나왔고 입가엔 살기띤 미소가 서렸다.

상관금홍은 바닥 한쪽을 가리키면서 계속 말했다.

"이곳에다 묻어 두면 내가 이곳에 서 있을 때마다 초류빈이란 불가사의한 인물이 내 발 밑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 아니겠소?"

여기까지 말한 그는 음침한 미소를 띠며 계속 지껄였다.

"그러면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나는 정신이 더욱더 맑아질 것이오."

"정신이 더욱 맑아진다고?"

"만약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없으면 남이 발 밑에 깔려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마다 자신에게 경고가 되거든....."

초류빈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정신이 너무 맑은 사람에게도 고통은 있는 것이오."

"나는 고통을 지금껏 느껴 보지도 못했고 앞으로도 고통 따위는 느끼지 않을 것이오."

"그것은 당신이 즐거움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오...나는 몇 번이고 어떻게 해서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당신에게 물으려고 했소."

상관금홍은 초류빈을 한참 동안 노려보더니 입을 열었다.

"자신이 왜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묻고 있는 사람이 없지 않아 있을 것이오. 하지만 더욱 가련한 것은 심지어 자신이 무엇 때문에 죽어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오."

초류빈이 배시시 웃었을 뿐 아무 말이 없자 상관금홍은 초류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재차 말했다.

"어쩌면 당신은 바로 후자에 속해 있을지도 모르오."

초류빈은 냉막하게 말했다.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소!"

상관금홍은 화를 버럭 내는 투로 외쳤다.

"생각하지 않았다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것은, 죽음이라는 것은 무슨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오."

이렇게 말한 초류빈은 상관금홍이 말을 하기도 전에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당신의 눈엔 내가 죽어 있는 시체로 보이겠지?"

"당신은 자신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있군."

"나의 죽음이 정해졌다면 나는 이제 아무런 표정도 지을 필요가 없고 또 번뇌를 느낄 필요도 없소. 하지만 당신은?"

이렇게 물은 그는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아 길게 기지개를 켜면서 만면에 웃음을 띤 채 계속 물었다.

"나는 이제 앉고 싶으면 앉고 자고 싶으면 자오. 그러나 당신은 그렇게 할 수가 있소?"

상관금홍은 일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두 주먹만 불끈 쥐었다.

초류빈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당신은 물론 나와 같이 할 수가 없소. 당신에게는 많은 걱정거리가 있고 나를 엄밀히 감시해야 하기 때문이오."

그리고 더욱 편한 자세를 취하면서 말을 계속 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당신보다 편할 것이오."

상관금홍도 갑자기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당신을 축축한 곳에서 죽이지 않겠다고 말한 이상 당신의 옷이 다 마른 후에 손을 쓰려고 했는데 지금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소."

"어째서 생각이 갑자기 바뀐 것이오?"

상관금홍은 천천히 입을 떼었다.

"나는 비단 당신에게 바싹 마른 새옷을 갈아 입혀줄 뿐만 아니라 술까지 주겠소."

이렇게 말한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띠며 계속했다.

"그것은 당신이 한 말이 매우 재미있었기 때문이오. 죽어 있는 사람의 입을 통해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60 소이비도 제4권 야릇한 관계





야릇한 관계



소슬한 바람이 부는 가운데 가랑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손소홍은 석고상처럼 굳어진 채로 마냥 빗속에 서 있었다.

그녀는 목청이 터져라고 무엇인가 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기력이 없었다. 그녀는 앞으로 뛰쳐나가려 했지만 역시 몸이 굳어져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위가 오무라들면서 구토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심지어 눈물마저 흘릴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초류빈은 그녀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지금도 역시 멈추지 않고 천천히 앞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차츰 정자 앞으로 다가가 상관금홍을 주시했다.

상관금홍은 아예 그에게 눈길도 돌리지 않고 수중에 쥐고 있는 담뱃대를 응시하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은 늦게 당도했소."

초류빈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렇소. 나는 늦은 것 같소."

그는 단지 자신의 입술이 말라 혓바닥이 마치 녹슬은 철판 같은 느낌이었다. 그로선 난생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두려움이라는 말인가?

상관금홍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늦었다는 것은 오지 않은 것보다는 낫소."

"내가 꼭 오리라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었을 텐데."

"하지만 애석하게도 와야 할 사람이 늦게 당도했고 오지 않아도 될 사람이 먼저 왔소."

이 한마디가 끝나자 두 사람은 모두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았다.

그들은 확고한 자신이 생길 때를 기다려 출수할 모양인 것 같았다. 그들이 어떠한 행동을 취하는 순간 양단간의 사생결판이 지어질 것이 분명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두운 숲 속에 또 다른 두 사람이 도사리고 있었다. 두 쌍의 눈, 네 개의 눈동자는 계속 초류빈과 상관금홍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중 한 쌍의 눈동자는 가을 호수처럼 맑고 햇빛처럼 밝았다.

눈을 까뒤집고 세상 천지를 뒤진다 해도 이렇게 아름다운 눈동자는 다시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다른 한 쌍의 눈동자는 완전히 죽어 있는 잿빛이었다. 아마 지옥에서도 이보다 무서운 눈동자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어둠 속에 설사 악귀가 숨어 있었다 해도 아마 벌써 놀란 나머지 줄행랑을 쳤을 것이다. 이 한 쌍의 눈동자는 염라대왕이 보아도 오싹 소름이 끼칠 것이다.

그들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설소하와 형무명이다. 그들은 이곳에 온 지 오래 된 것 같았다. 설소하는 형무명에게 몸을 바싹 기댄 채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싸고 있었다. 형무명은 아무 소리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설소하가 홀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만약 그를 죽이려면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예요. 이같이 좋은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거예요."

형무명은 냉랭하게 그녀의 말을 받았다.

"지금은 그를 죽일 사람이 있으니 구태여 내가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소."

설소하는 대뜸 눈을 흘겼다.

"내가 죽이라고 하는 자는 초류빈이 아니에요."

"그럼 누구를 죽이란 말이오?"

"상관금홍이에요, 상관금홍!"

그녀는 상관금홍의 이름을 내뱉으면서 흥분한 탓인지 전신에 가벼운 경련이 일며 손톱은 형무명의 살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형무명은 아무런 감각도 없는 듯 여전히 돌부처마냥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엔 한 가닥 기이한 광채가 번뜩였다. 그것은 마치 지옥에서 새어나오는 불길과 같았다.

설소하는 재촉하듯 힘주어 발을 이어갔다.

"그는 온 정신을 기울여 초류빈을 상대해야 하므로 절대 다른 사람에게는 신경쓸 여지가 없을 거예요. 더구나 그는 아직 당신 오른손의 비밀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영락없이 당신 손에 죽게 될 거예요."

형무명은 그래도 움직이지 않는다.

설소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금전방에 대해 당신보다 더 많이 아는 자는 없어요. 그를 죽인다면 당신은 자연적으로 금전방의 방주가 될 수 있어요."

그녀는 나직하게 숨을 몰아쉬고 있다. 그 숨소리는 영락없이 발정한 한 마리의 암캐였다. 그녀는 쌕쌕 숨을 몰아쉬며 다시 말했다.

"당신이 설사 금전방의 방주가 될 생각이 없다 해도 최소한 상관금홍에게 당신의 무서운 일면을 보여줘야 해요. 그가 지옥에 가서라도 후회하도록 말이에요."

형무명의 눈에서 만약 지옥의 불길이 내뿜어지고 있다면 지금 그 불길은 활활 타오를 것이다.

설소하는 다시 그를 재촉했다.

"어서! 어서 나가세요. 이번 기회를 놓치면 평생토록 후회할 거예요."

형무명은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나가겠소!"

설소하는 그제야 암암리에 숨을 내쉬며 생긋이 웃음을 보였다.

"어서 가세요. 저는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겠어요. 당신이 이번 일만 성공한다면 저는 영원히 당신 소유가 될 거예요."

형무명은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나를 기다릴 필요는 없소!"

설소하는 그 말에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그건....."

형무명은 즉시 그녀의 말을 받았다.

"당신도 나와 함께 밖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오."

설소하는 홀연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금시 공포의 빛이 짙게 깔리며 뒷걸음질하려 했으나 형무명은 이미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설소하는 자주 눈물을 흘리는 여자가 아니다. 그녀는 여자가 눈물로써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눈물 외에도 보다 좋은 방법이 많았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고통을 참지 못해 눈물이 새어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손목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대관절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형무명은 그녀의 말을 중간에서 끊어 버렸다.

"당신은 여지껏 살아오면서 단 한 가지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 같소."

"과오라뇨?"

형무명은 한마디 한마디 뚜렷하게 내뱉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낭천과 같이 당신을 좋아한다는 생각 말이오!"

초류빈은 숲을 등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설소하와 형무명이 걸어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상관금홍의 얼굴에 기이한 변화가 이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상관금홍의 주의력이 분산되다니 실로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생전 남에게 이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앞으로도 절대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초류빈은 이 기회를 이용하지 못했다.

비도탈명은 그의 수중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이미 등뒤에서 엄습해 오는 무서운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비도를 전개하는 데 있어 비단 손을 사용할 뿐 아니라 온 정신, 온 정력을 동원해야만 했다. 그의 비도가 만약 손에서 벗어난다면 등뒤에서 가해 오는 공격은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는 일곱 자 가량 미끄러져 즉시 형무명의 얼굴을 보았다.

형무명은 이미 그의 뒤에 와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비로소 설소하를 보았다. 그녀가 이렇게 비참한 꼴을 하고 있는 것은 처음 본다.

비는 더욱 굵게 쏟아졌다.

모든 사람의 몸은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높이 받쳐든 호롱불은 이미 점차 처마 밑으로 옮겨졌다. 불빛은 먼곳까지 미치지 못했다.

형무명은 등불이 미치지 않는 곳에 서 있었다. 그 자체는 하나의 그림자이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체 같았다.

그러나 초류빈의 눈길은 상관금홍에게서 옮겨져 그를 응시했다. 상관금홍의 눈길은 초류빈의 옆에서 옮겨져 그를 주시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모두 이런 싸움의 승부를 판가름하는 열쇠가 그들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게 아니라 형무명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형무명은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여지껏 살아오면서 이렇게 광소를 터뜨린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허리를 구부리면서까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상관금홍은 홀연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마음껏 웃어라. 이 자리에서 웃을 수 있는 자는 오직 너밖에 없으니까."

형무명은 그제야 웃음을 죽이고 즉시 반문했다.

"당신은 웃고 싶지 않소?"

"나는 웃을 수가 없다."

"어째서 웃을 수 없다는 건지....."

"그 이유를 너는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렇소. 나는 알고 있소. 분명히 알고 있소."

그는 다시 한 차례 야릇한 웃음을 발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네들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소. 당신네들이 그 사실을 안다면 나에게 감히 출수하지 못할 것이오."

그렇다! 그의 말은 결코 과장된 게 아니다. 초류빈과 상관금홍은 감히 그에게 출수할 수 없었다.

상관금홍이 만약 출수하여 그를 죽인다 해도 그 자신 역시 초류빈에 의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는 물론 초류빈에게 기회를 줄 리가 만무하다. 초류빈의 상황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형무명은 다시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을 도와 초류빈을 죽일 수 있지만 반대로 그를 도와 당신을 죽일 수도 있소."

상관금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능히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믿고 있다고? 당신은 나를 폐인으로 보고 있지 않단 말이오?"

상관금홍은 다시 한숨을 내리쉬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못 보는 일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잘못 보았다고 어떻게 장담을 할 수 있겠소? 어쩌면 나는 진짜 폐인인지도 모르잖소?"

"너의 오른손은 왼손보다 더 힘이 세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소?"

"설소하는 연약한 여자가 아니다. 그녀를 한 손으로 제압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형무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정확히 보았소. 그러나 애석하게도 너무 늦었소."

상관금홍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나는 비단 잘못 보았을 뿐 아니라 잘못 행동했다."

"당신은 이제야 나에 대한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단 말이오?"

"그렇다. 나의 과오였다. 처음부터 너를 죽였어야 했을 텐데."

"그럼 무엇 때문에 죽이지 않았소?"

"차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당신에게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 있소?"

상관금홍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나도 역시 인간이다."

형무명의 표정은 어둠에 잠겨 자세히 볼 수 없었으나 음성은 시종일관 냉랭했다.

"나도 인간이기 때문에 차마 당신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단 말이오?"

상관금홍은 대꾸하기에 앞서 우선 설소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분명히 나를 죽이라고 했겠지?"

"그렇소."

"네가 만일 정말 나를 죽일 생각이 있다면 그녀를 데리고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소하는 돌연 대소를 터뜨렸다. 그녀가 비에 흠뻑 젖은 채 쓰러져 갑자기 대소를 터뜨리자 무덤에서 나온 산발귀신을 연상케 했다.

그녀는 대소를 그치더니 악을 쓰듯 외쳤다.

"그는 확실히 당신을 죽일 용기가 없어요. 당신이 죽으면 그도 살 수 없기 때문이에요. 이제야 나는 모든 것을 알았어요. 그는 애당초 당신을 위해 살아온 거예요. 그가 이곳에 온 것도 당신에게 그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함이죠. 그러나 다른 사람이 보는 견지에서 그는 한 푼의 가치도 없는 쓰레기 같은 인간에 불과해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너를 죽이기엔 극히 쉬운 일이라는 것이다."

"흥, 나를 죽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나요? 당신은 그에게 나를 죽이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나를 구해 주었어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그는 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친히 너를 죽이고 싶었기 때문이 다."

설소하는 다시 미친 듯이 웃어젖혔다.

"호호호...천만의 말씀, 그는 당신이 친히 그를 죽이기를 원하고 있는 거예요. 호호호....."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내가 당신과 함께 있을 때면 그는 거의 미칠 지경으로 질투를 느꼈죠. 그 당시 그가 나로 인해 그러는 줄 알았는데 이제 알고 보니 그것은 당신 때문이었어요."

"....."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누구나를 막론하고 미워했죠. 심지어 당신의 아들도 마찬가지예요. 당신 아들을 죽인 흉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요?"

상관금홍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담담하게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가 나를 위해 살인을 했다면 누구를 죽여도 상관없다."

설소하는 그를 주시하며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웃음은 점점 사라지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여지껏 남자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해 왔어요. 그런데 당신네 두 사람에 대해선 어떤 관계인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아요."

그녀는 냉소를 치며 말을 이어갔다.

"어떤 관계이든 그것은 틀림없이 구역질나는 성질의 관계일 거예요. 그러니 당신네들이 스스로 관계를 밝힌다 해도 나는 죽고 싶지 않아요."

상관금홍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너는 아는 것도 없으면서 말을 너무도 많이 하는구나."

설소하는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당신으로 하여금 그를 죽이게 할 순 없겠죠?"

형무명은 즉시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소."

설소하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내가 당신네들 손에 죽는 도리밖에 없겠군요. 문제는 누가 출수하느냐에 달려 있어요. 그가 출수할 건가요? 아니면 당신인가요?"

형무명은 입을 굳게 다물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살짝 떨쳐 설소하를 상관금홍의 발밑으로 팽개쳤다.

설소하는 흙탕물에 쓰러진 채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역시 여자이기 때문에 입을 움직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사소한 일에도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여인이 죽을 때 몸 전체에서 가장 늦게 굳어지는 부분이 바로 혓바닥이라는 흥미로운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여인의 혓바닥 근육은 유달리 다른 부분보다 훨씬 예민하기 때문이다. 설소하는 죽음을 의식하면서도 혀를 나불거리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있나요? 그가 원하는 대로 어서 어서 출수를 하시죠."

그녀는 끝까지 두려움을 내색하기 싫어 초연한 태도를 애써 취했다.

상관금홍의 입가에 한 가닥의 잔혹한 미소가 스쳐갔다.

"고통을 받으며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너는 일종의 쾌락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 나를 죽이느냐에 달렸죠. 나는 빨리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천천히 죽어야지만 진정한 죽음의 맛을 음미할 수 있으니까."

그녀는 무슨 의미에선지 홀연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사람의 일생을 통해 이런 기회는 단 한 번밖에 없어요. 그러니 설사 고통을 좀더 받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은 충분한 가치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늦게 죽는다면 너는 보다 많은 말을 지껄일 수 있겠지. 말을 하는 자체는 비단 너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공포심마저 감소시키는 역할도 할 테니까."

"당신도 역시 나를 빨리 죽일 생각은 없겠죠? 당신은 원래 여자가 사경에서 헤매는 것을 보기 좋아하니까요. 더구나 나는 당신에게 많은 이익을 주었잖아요. 최소한 내가 그동안에 애써 모은 재산을 송두리채 사기쳐 갔으니 더 이상 이용할 가치가 없을 테니까 죽이려는 게 아닌가요?"

"그렇다. 너는 이제 한 푼의 값어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아예 너를 죽이는 것조차 귀찮게 여겨진다."

말을 끝낸 그는 홀연 설소하를 초류빈 앞으로 걷어찼다.

이제 그녀는 입을 놀릴 기력조차 잃게 되었다. 축축하게 젖은 옷은 바싹 그녀의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의 몸체는 여전히 미끈하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원래 무림의 제일가는 미인이며 또한 미인은 두뇌가 둔하다는 상례를 뒤엎고 굉장히 영특했다. 그녀는 하늘이 주신 천부적인 조건으로 얼마든지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심지어 죽음마저도 선택할 여지가 없는 상황에 놓여 있지 않은가. 그녀는 원래 구름을 타고 내려온 선녀였건만 지금은 흙탕물로 뒤범벅된 한 마리의 들개에 불과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일까? 혹시 그녀는 자신이 귀중하게 여겨야 할 것을 헌신짝 취급하듯 한 탓이 아닐까?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초류빈은 흙탕물 속에 쓰러져 있는 설소하를 주시하며 비애와 동정을 느꼈다. 그가 동정하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낭천이었다.

그녀의 꼴이 이 지경으로 된 것은 자업자득이지만, 낭천은? 낭천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그는 한 사람을 잘못 사랑했기 때문에 결국 비참하게 되었다. 그 사랑했다는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그래서 초류빈이 한층 더 비애를 느끼는지도 모른다.

상관금홍은 초류빈을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그녀를 죽이지 않겠소. 당신이 나보다도 그녀를 죽여야 할 이유가 훨씬 많기 때문에 당신에게 인계해 주겠소."

초류빈은 긴 침묵을 지킨 끝에 홀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당신은 나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 같소."

상관금홍은 그의 말을 음미하듯 역시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비로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내가 당신을 과소평가한 것 같소. 당신도 역시 그녀를 죽이지 않을 테니."

그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계속했다.

"살인을 하는 데는 살기가 필요한 것, 당신은 나를 상대하기 위해 모든 살기를 집중시키고 있을 테니 물론 섣불리 다른 사람에게 낭비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테지....."

초류빈은 차분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상대가 다르면 물론 죽일 수 있겠지만, 장소가 틀려도 역시 출수할 수 없소."

"이 장소가 틀린단 말이오?"

"원래는 맞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소."

"어째서 상황이 달라졌다는 거요?"

"이 장소는 지금 너무나 비좁은 느낌을 주고 있소."

상관금홍은 히죽이 웃었다.

"당신으로 하여금 불안을 느끼게 했단 말이오?"

초류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는 자신의 생각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형무명이 설사 출수를 하지 않는다 해도 그에게는 역시 일종의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더군다나 형무명은 수시로 출수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라 해도 그와 상관금홍이 연수한 일격은 받아내지 못할 것이다.

상관금홍의 안색은 다시 철판이 깔린 듯 차갑게 변했다.

"당신은 겁이 많군. 하지만 기왕 이곳에 온 이상 순순히 보낼 사람은 없을 것이오. 그렇지 않느냐?"

마지막 한 마디는 형무명에게 내던진 것이다.

형무명은 즉시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그렇소."

그는 여전히 멀리 서 있지만 초류빈은 그가 상관금홍과 한 덩어리로 똘똘 뭉쳐 있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다.

그들이 합친 힘은 엄청나게 강해 아무도 물리칠 수 없고 아무도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초류빈은 가볍게 탄식을 하다가 문득 낭천의 모습이 뇌리에 떠올랐다. 낭천이 만약 이 자리에 자기와 함께 있다면―

상관금홍은 그의 표정에서 마음을 꿰뚫어보고 유연히 말했다.

"낭천이 만약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당신은 어쩌면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당신에게 실망밖에 줄 수 없는 존재인 것 같소."

초류빈은 강조를 하듯 힘주어 말했다.

"나는 그에 대해 실망을 느끼지 않았소.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수백 번 쓰러져도 역시 일어날 저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상관금홍은 야멸찬 말투로 내던졌다.

"당신은 그가 그런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오?"

초류빈의 음성은 못을 박듯 단호했다.

"물론이오."

"설사 당신이 그를 제대로 보았더라도 그가 일어섰을 때 당신은 이미 쓰러져 있을 것이오. 당신이 일단 쓰러지면 영원히 일어서지 못하리라고 나는 장담할 수 있소."

"지금....."

"지금 당신은 절대 기회가 없소. 다시 말해서 눈꼽만큼의 기회조차 없소."

그 말을 들은 초류빈은 홀연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나에게 장소를 선택할 아량은 베풀어야 될 게 아니겠소? 꼭 죽어야 할 사람이라면 죽을 장소를 택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오."

상관금홍의 입가엔 잔혹한 웃음이 스쳐갔다.

"당신은 또 그릇된 생각을 한 것 같소. 살인을 하는 자는 모든 권리를 쥐고 있소. 죽어야 할 자는 하등의 권리도 없는 것이오. 하지만....."

여기에서 일단 말을 중단한 그는 초류빈을 뚫어지게 주시하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당신에게만은 한 번 파격적인 예의를 할 용의가 있소. 당신은 비단 좋은 친구일 뿐 아니라 가장 구미에 맞는 적수니까."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소."

"그럼 당신은 어느 장소에서 죽고 싶소?"

초류빈은 천천히 대답했다.

"살아 생전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은 대부분 편안하게 죽기를 원하고 있소."

상관금홍은 잽싸게 말을 받았다.

"어떤 방법으로 죽든 편안한 죽음은 없소."

초류빈은 눈썹을 살짝 위로 치켜세웠다.

"나는 비가 내리지 않는 곳 그리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는 것을 원하고 있을 뿐이오. 축축하게 젖은 채로 비참한 꼴로 죽긴 싫으니까."

그는 다시 빙긋이 웃으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 목욕할 때를 제외하고 나는 몸이 물에 젖는 것을 원치 않았소."

상관금홍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한 번도 믿지 않았소. 이 세상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있으리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오. 그런데 지금...어느 정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소."

초류빈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요?"

하고 일종의 반문을 하자 상관금홍이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확실히 죽음에 대해 담담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요. 그래서 나는 더욱 이상하게 느껴지는 일이 있소."

초류빈의 시선은 줄곧 상관금홍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상하게 느껴지는 일이라니....."

상관금홍의 눈빛도 시종일관 초류빈의 표정을 지키고 있었다.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죽을 때 몸이 축축한 것을 개의하고 있으니 이상한 일이 아니겠소?"

그는 초류빈의 얼굴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듯 눈을 가늘게 감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로 당신이 그런 요구를 한 것은 필시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소."

"어떤 목적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오?"

"글쎄...어떤 사람은 당신이 일부러 지연작전을 쓰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오. 자신의 죽음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혹시나 무슨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바라는 경우도 있겠고, 최소한 신선한 공기를 한 모금이라도 더 들이킬 수 있는 이점이 있으니까."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내 어찌 당신을 그런 어리석은 자들과 비교할 수 있겠소. 당신 자신도 절대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이제 어느 누구도 당신을 죽음에서 구출하지 못할 것이오. 더욱이 당신은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잖소!"

"그럼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단 말이오?"

"내 생각에 당신이 그런 요구를 한 것은 그녀들에게 도주할 기회를 만들어 주는데 목적이 있는 것 같소. 당신은 내가 당신을 죽이기 전에 절대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정확한 계산을 하고 있을 테니 말이오. 그것은 마치 산해진미를 놓고 먼저 맛없는 만두 따위로 배를 채우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

초류빈은 담담하게 웃었다.

"이유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소."

"좋지 않은 이유지만 확고부동한 사실이오."

초류빈의 웃음은 다소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설사 확고부동한 사실이라 해도 당신이 정녕 그녀들의 죽음을 안중에 두고 있단 말이오?"

상관금홍은 냉소와 함께 대꾸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소."

그렇다.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녀들이 살아 있다는 자체는 그에게 아무런 위험도 줄 수 없었다. 그가 만약 그녀들을 죽이려 한다면 수시로 가능한 일이었다.

초류빈은 손소홍에게 눈길을 옮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생명이 있고 호흡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으로써 충분했다. 상관금홍과 함께 다른 데로 장소를 옮기는 이외에 초류빈이 손소홍을 위해 더 이상 무엇을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상관금홍은 말을 이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당신에게 만큼은 결례가 되는 행동을 할 수 없소. 당신은 다른 사람과 전혀 신분이 틀리니까 말이오."

그는 한마디 한마디 또렷하게 이어갔다.

"당신은 깨끗한 삶을 누려 왔으니 소원대로 깨끗한 죽음을 치르도록 해주겠소. 나의 가장 훌륭한 적수가 흙탕물에서 들개처럼 죽는 것은 나도 원하지 않으니까....."

죽음, 어떻게 죽을 것이며 어디서 죽느냐? 방법과 장소는 모두 중요한 것이 아니다. 편안하고 깨끗하게 죽을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손소홍은 어떻게 될 것인가?

초류빈은 차마 그녀에게 눈길을 돌릴 용기도 없었고 그럴 처지도 되지 못했다. 그의 주의력은 절대 분산될 수 없었다.

그는 지금 곧 떠나야만 한다. 물론 이번에 떠나면 영원히 그녀를 못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이번에 떠나면 어쩌면 이별이 아니라 사별이 될 것이다.

그녀는 과연 그가 이렇게 떠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둘까? 초류빈은 혹시나 그녀가 달려와 자기에게 매달리며 함께 죽겠다고 고집할까 봐 은근히 겁이 났다.

만약 그녀가 정말 그렇게 한다면 그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주먹을 날려 그녀를 기절시키거나 혈도를 찍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쓰러진 그녀를 향해 꿋꿋이 살아가라는 말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 장면은 처량하고 비참할 것이다.

초류빈은 물론 그녀가 그렇게 하지 않기를 내심 간곡히 바라고 있었다. 지금으로써도 그는 무거운 마음의 부담을 느끼고 있는데 만약 그녀가 그렇게 한다면 그의 감정이 무너질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그의 성격은 비록 강인했지만 감정은 약했다. 손소홍은 초류빈이 바라는 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심지어 초류빈에게 다가와 작별 인사도 나누지 않았다.

무엇 때문일까?

초류빈은 결국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기절해 버리지도 않았고 떠나지도 않았다. 그녀도 역시 초류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신색은 비록 슬픔에 젖어 있었지만 눈빛은 그렇게도 부드럽고 확고한 신념이 깃들어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비록 입을 열지 않았지만 눈동자는 초류빈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기꺼이 현실에 대응하세요. 저는 절대 당신을 붙잡거나 방해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필시 정확하고 올바르게 해 내리라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녀를 단 한 번 힐끗 초류빈은 바라보았지만 그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는 이미 그녀가 건장한 여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직접 말을 하지 않고 염려를 하지 않아도 그녀는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그에게 준 것은 안위와 격려였다.

초류빈은 형용할 수 없는 감격을 느꼈다. 그녀가 자기에게 준 도움이 얼마나 큰가를 그 자신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문득 자기가 이러한 여인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운임을 깨달았다.

초류빈은 드디어 떠났다.

그의 떠나는 걸음은 이곳에 올 때보다 더욱 굳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