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6일 화요일

무림실록(武林實錄) 전신전설(戰神傳說) 제20장~제22장 - 내가위





제20장  절망이란 이름 아래서



미친 듯이 내리던 비가 점차 잦아드는 듯 보였다.

어느새 시간은 오경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하룻밤은 꼬박 새우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졸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다.

중추신개와 추정호, 그리고 남궁선과 정체를 알 수 없는 흑의인과 청년은 잠시 말이 없었다.

묘한 정적이 이어졌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

중추신개가 그런 분위기를 깨려는 듯 중얼거렸다.

탁! 타악.

청년은 장난을 하듯 술잔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재미있다는 듯 입가에 미소마저 머금고 있었다.

"슬슬 그가 올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청년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중추신개는 궁금함을 금치 못하고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자네는 이곳에 들어와서 누구를 기다린다고 했는데 그가 누구인가?"

청년은 빙그레 웃었다.

"조금 후면 아실 것입니다."

청년은 여전히 자신의 손에 들린 술잔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다 다시 얘기를 이어갔다.

"혐오감이 들 정도로 사람들은 권력과 자기 과시에 열을 올립니다. 우리는 태어나고 죽고 어차피 스쳐가는 한줄기 바람과도 같은 존재임에도 말입니다. 십 년을 살다 죽어도 백 년을 살다 죽어도 그 값어치는 바로 얼마를 살았느냐가 아닌 어떻게 살았느냐가 될 터인데도 그들은 그것을 모르는가 봅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인지."

중추신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딴은 그렇군. 그러나 말이야, 권력과 힘이 풍기는 매력은 그 누구도 뿌리치지 못하는 것일세. 극히 일부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말이야. 그렇지 않은가?"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글세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로 인한 피해자들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               *

쏴아아아―! 

겨울의 초입(初入)에 내리는 비는 그 차가움이 마치 살을 칼로 에는 듯 했다.

막불은 이미 속옷까지 축축해져 있었다.

삼 일이었다. 적의 막사가 마치 너른 강을 바라보는 것 같이 펼쳐져 있었고, 막사 하나 하나는 철저하게 위장되어 있어 잘못 보면 계곡 사이로 커다란 녹색 강이 흐르는 듯 보였다.

막불은 삼 일동안 종내 꼼짝하지 않았고, 적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었다.

적의 작음 빈틈이라도 찾기 위해서 그는 여태껏 단 한숨도 자지 않았다.

그리고 막불은 드디어 적의 허점을 찾았다.

"적은 축시(丑時) 부근에 일제히 교대를 한다. 이 시각 이야말로 절호의 찬스가 될 것이다. 누루하치! 잠든 네놈의 목줄기를 따주겠다. 그리고...... 난 꼭 살아서 돌아가겠다."

막불은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움직인 그는 작은 나뭇가지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산 중턱의 바위틈에 몸을 숨겼다.

곰팡이 냄새가 피어올랐다. 눅눅하고 퀴퀴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막불에게는 너무도 편안한 곳이었다.

막불은 그의 아내가 정성스럽게 싸준 옷을 꺼냈다. 보자기를 풀자 검은색의 무복이 곱게 개어져 나왔다. 아내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 같아 잠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막불은 다시 여며놓고 옷을 모두 벗어 놓은 채 주변의 마른 흙과 나뭇잎으로 자신의 몸을 덮었다.

아늑한 기분이었다.

번쩍! 우르릉―!

쏴아아아아―! 쏴아아―!

폭풍우가 몰아치면서 번개와 천둥이 천하를 진동시켰다. 사방이 캄캄하고 주변이 소용돌이쳐 산짐승까지도 모두 제 굴로 숨어버렸다.

막불은 정확한 시간에 눈을 떴다.

"시작이다."

그리고 그는 치성을 드리듯 조심스럽게 옷을 입었다. 마지막으로 검은 두건을 얼굴에 쓰자 그는 검을 집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너무도 신중한 모습이었다.

쏴아아아아―!

빗줄기는 갈수록 거세어 지는 듯했다.

막불은 군막 사이로 소리 없이 스쳐 지나갔다. 소리가 들린다고 해도 빗소리가 워낙에 커 묻힐 형편이었다.

"에이, 비는 언제 그치려는지."

막불이 한 막사를 돌려는 순간 억양이 센 발음의 무사 둘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휙―!

막불은 망설일 시간조차 없었다. 그대로 달려들어 두 사내를 단검으로 찔렀다.

"크윽―!"

"커억―!"

순식간이었다. 막불은 두 사람을 처치하고도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 이들이 발각되기 전에 일을 마무릴 지어야 한다.'

막불이 누루하치의 막사로 다가서는 데는 두 시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모두 여섯의 병사를 죽여야만 했다.

막불은 조급해졌다.

지금이라도 숨겨 둔 시체들이 발각되어질 것만 같았다.

'이곳이다.'

목표지점인 막사에 도착하자 그는 작은 도롱에 독화살을 끼워 물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훅―!

"아야! 모기인가?"

보초를 선 사내는 자신의 목이 따끔거리자 짜증스러운 얼굴로 만져보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그가 갑자기 쓰러지자 놀란 옆의 사내가 막 뭐라고 소리치려는 찰라, 그 사내의 목에도 단검이 날아와 꽂혔다.

어느새 비는 그쳐 있었다.

동쪽에서는 하늘이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막불은 조심스럽게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침상은 휘장이 처져있어 안이 자세히 들여다보이지는 않았지만 누군가가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막불은 자신의 검을 꼬나들었다. 그리고는 체중을 실어 침상으로 내려꽂으려고 했다.

그러나,

퍼억―!

"큭."

막불은 그대로 퉁겨나갔다.

"네가 황제가 보낸 자객인가?"

막불의 앞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대마도에서 건너온 사나이 묵천이었다.

"이상하군. 너 같이 허술한 자를 보낼 리가 없을 텐데?"

막불은 가슴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아픔을 느끼고 있을 틈이 없었다. 그는 막불이 검을 들어 자신을 막아선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때였다.

"커억!"

뭔가 뜨거운 것이 막불의 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그는 자신의 가슴에 박혀 있는 화살촉을 보았다. 비오듯 쏟아진 하나의 화살이 그를 명중시킨 것이다. 그러나 화살은 그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침상을 겨냥한 것이었다.

따다당―!

묵천은 날아오는 여러 대의 화살을 모두 검으로 쳐냈다.

"그렇군."

파악―! 쫘아아악――!

모두 오 인의 자객들이 갑작스럽게 나타나 검을 휘둘러 묵천의 등뒤에 있는 침상을 노려갔다.

그러나 그들이 침상을 베었음에도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흥! 우리가 전부 바본 줄 아는가? 그는 이미 이곳에 있지 않다."

묵천은 검을 뽑아 들었다. 다섯 자객들은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덤벼라."

다섯 자객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마음이 서로 통하는지 동시에 검을 들어 묵천을 쳐왔다.

따다당―! 차차자장―! 차장―!

검과 검이 마주쳤다.

오 대 일의 상황, 누가 보아도 불리한 싸움이었다.

게다가 군대가 잠에서 깨기 전에 끝내려는 듯 다섯의 사내들은 맹공을 펼쳤다.

"후!"

파바박―!

막불은 보았다.

정신이 가물가물한 상태였지만 환상처럼 뻗어나가는 묵천의 검을 그는 볼 수 있었다.

마치 허공을 수놓은 듯한 그 검은 나타나는 것보다도 더 빠르게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상처 입은 다섯의 사내들만이 자리했다.

막사 주위로 군사들이 모여들었다.

다섯 사내의 눈에는 절망이 어렸다.

"황제폐하 만세."

그들은 서슴없이 자신의 목을 그어버렸다. 자결을 해 더러운 꼴을 당하지 않겠다는 뜻인 듯했다.

묵천은 서서히 죽어 가는 막불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대는 다른 자들을 위한 미끼였군."

그의 목소리가 막불의 귀에는 메아리처럼 울려왔다. 그리고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버렸다.

"그래, 모두 전멸인가?"

"예, 이차 공격대까지 모두 죽었습니다."

황제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 사실이 새어나가면 안 된다. 증거 인멸을 하도록. 불씨가 남아서는 안 된다. 그자의 가족과 그자를 알고 있는 자들은 모두 죽여 없애라."

"알겠습니다."

황제의 앞에 부복해 있던 사내는 몸을 일으켜 물러났다. 황제의 눈은 공허하게 빛났다.

"난처하군."

이때였다. 한 무사가 뛰어들었다.

"급보입니다."

"무엇인가?"

"대산이 뚫렸고, 풍야후의 군대는 질풍처럼 중원으로 들어서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우리 군은?"

"수비군은 지리멸렬(支離滅裂) 했습니다. 지금 회양(回羊)에서 우리 군과 대치 중입니다. "

"좋아! 대장군 추태국을 불러라."

황제는 조금의 동요도 하지 않았다. 마치 일어나야 될 일이 일어났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예."

"흠. 그래도 너무 빠르군. 아직 시기가 오지 않았는데 너무도 빨라. 때가 안 좋아....... 이 기회에 누루하치를 쳤어야 하는 것인데......."

황제 주익균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황제는 달빛을 맞으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추태국은 막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급히 입궐하라는 영을 받고 의관도 채 갖추지 못하고 달려와야 했다.

그런데 달려와선 벌써 한 시진째 이런 자세를 하고 있었다. 꿔다놓은 보리자루 마냥 멍청히 서서 황제가 차 마시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의 앞이라고 경거망동하겠는가? 그는 아무런 불평도 없이 그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자네는 궁금하겠지."

"폐하."

황제는 탁자 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장군, 장군은 우리 나라에 전운(戰運)이 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오?"

"예? 조선국을 침략한 동영을 말씀하신 것인지요?"

황제는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추태국에게는 피 말리는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보시게."

황제는 작은 서찰을 건넸고 추태국은 급히 받아 봤다.

"아니, 이런 일이? 그런데 어찌하여 봉화가 오르지 않고 있습니까?"

"나의 명이었다. 나는 황제로서 이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들은 이 중원의 저력을 모르고 있다네. 혼란을 조장하는 무리들이 많고 그들에 의해 이 나라가 흔들리고 있어. 이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야. 그들은 극도의 혼란을 노리고 있지. 그들이 풍야후를 자극해 전쟁을 일으킨 것이네. 난 자네에게 맡기고 싶은데 자네가 풍야후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추태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이 어지러웠다. 풍야후와 그는 이미 삼십여 년 전에 전장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젊은 장수로 무명을 날리던 그들은 서로의 호방한 성격에 이끌려 어떤 지기보다도 더 두터운 지기를 쌓은 사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적이 되어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그대를 서슴없이 죽여야만 하겠군.'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내 그대에게 명을 내리겠다. 그대는 변방지역을 순찰한다는 명목으로 군 이만을 이끌고 회양으로 가라. 그대는 그곳에서 목숨을 걸고 적을 막아야 한다!"

"예. 황상. 보은에 보답하겠습니다."

추태국은 구배(九拜)를 했다.

이것은 이미 그가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만수무강하십시오."

추태국은 비장한 얼굴로 물러나갔다. 황제가 그런 추태국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으려는 때였다.

"대단하시오."

갑작스런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그리고 돌아서자 남태천이 서 있었다.

"자네는 이 궁을 자기의 집처럼 드나드는구만."

"마치 정치의 단면을 보는 듯 하오. 철저한 계산과 배반 그리고 암투....... 호오! 방금 당신을 통해서 참다운 정치란 무엇인가를 배웠소."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때로는 내 살을 베어내더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는 것이야."

"그러나 당신은 너무 잔인하오. 그와 풍야후의 관계를 아시면서 그를 전장에 내 보내다니. 아마도 그를 아직까지 대장군의 직위에 남겨 놓은 이유 역시 같은 것이겠소만......."

황제는 남태천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런데 왜 갑자기 나를 찾아 온 것인가?"

"아!"

남태천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마교가 움직이기 시작했소."

"마교가? 그들의 움직임은?"

"현재 우리의 총단 소림을 향해 주력이 움직였고, 그 외의 무리들이 무당과 화산, 첨성, 곤륜 등으로 흩어져 출발했소. 아마 가는 도중 지방 세력들을 규합할 것으로 보이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리의 약속대로 그대는 마교를 철저히 말살시켜라. 우리 군부에서는 그대들의 모든 행동을 묵과해 주겠다."

남태천은 쓰게 웃음을 지었다.

"좋소. 우리 역시 군부의 방해를 원하지는 않으니까. 그럼 이만."

남태천은 마치 한줄기 연기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               *               *

사마적은 수하들을 보았다.

모두 이만에 달하는 무사들이 차가운 한광을 흘리며 앉아 있었고 좌중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는 광노의 혈단(血團)과 소평의 천의단(天意團)만이 자리했다. 호귀가 산화한 후로 광의단(光毅團)은 두 단으로 나뉘어 편입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동안의 무리한 활동으로 인해 일만 명에 달하는 무사들이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모두들 침중한 모습이었다.

이만에 달하는 무사들의 앞에는 작은 교자상과 석 잔의 술이 놓여 있었다.

"지금 그대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는 무엇이지?"

사마적이 입을 열자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두 눈이 소의 눈망울처럼 두툼하고 얼굴이 털로 뒤덮인 장안(長眼)이었다.

그는 마치 솥뚜껑을 긁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우린 이제 주군을 떠나려 하오."

사마적은 피식 웃었다.

"이유는?"

"첫째, 그대는 우리의 주군이 아니시오. 둘째, 그대는 복수에 집착할 뿐, 우리의 안위는 도외시하고 있소이다. 셋째, 그대는 우리의 주군이 되기에는 자질이 너무 부족하오."

"자질?"

"그렇소. 그대는 자질이 부족하오. 그대는 한 사람의 무사는 될지언정 수하를 다룰만한 인물은 되지 못하오. 이것이 가장 큰 이유요. 그대는 옛 주군의 복수라는 명분마저도 퇴색시켜 버렸소."

사마적은 쓰게 웃었다.

"그럼 이 술 석 잔의 의미는 무엇인가?"

장안은 천산(天山)처럼 당당하게 외쳤다.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하늘을 향했다.

"이 잔은 그대의 명을 마지막으로 단 한번 들어주겠다는 것이오. 이는 역대 주군과 우리의 의리 때문이오."

피식―!

사마적은 다시 한 번 실소했다.

"내가 만약 그대에게 자결을 명한다면?"

장안인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죽겠소."

"좋아. 그럼 둘째 잔은?"

"이 잔은 주군의 복수를 다짐하는 잔이오. 우린 어떠한 방법으로든 주군을 해한 자들을 용서치 않을 것이오. 우리들이 갈라선 이후에도 말이오."

사내는 술잔을 들어 마시고는 잔을 부수어 버렸다.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사마적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그런 사마적을 바라보며 마지막 잔을 들었다.

"이 세 번째 잔은 우린 이 약속을 지킨 후 당신과 결별을 하겠다는 뜻이오."

사내는 망설임 없이 그 술잔을 들이 마셨다.

사마적 역시 그 석 잔의 술을 마셨고, 마치 의식을 치르듯 모든 사내들이 석 잔의 술을 마셨다.

단지 사마적의 옆에 앉아 있던 광노와 소평만은 그 술잔을 내려다보며 아무 말도 없었다.

"좋다. 그대들의 뜻에 따르겠다."

사내의 눈에는 의혹이 일었다. 사마적의 너무나 쉬운 승낙이 의외인 듯 보였다.

하지만 곧 사내는 또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의 마지막 명을 받겠소."

사마적은 눈을 감고 한참을 앉아 있다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좌중을 돌아보았다.

"그럼 나는 너희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단 한 가지 명만을 내리겠다. 난 전쟁을 치를 것이다. 너희는 약속을 지켜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다. 나를 따를 자는 남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모두 돌아가라. 이것은 너희의 약속을 빌미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곳에 남는 자들 모두가 죽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강요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좌중은 웅성거릴 뿐 누구도 일어서는 사람이 없었다.

사마적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모두의 뜻이라면 나 역시 말리지 않는다. 나는 양부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지옥의 유황불 속도 마다하지 않을 작정이다. 그리고 나 역시 이번 전투에 목숨을 걸겠다. 적이 단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사마적은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서 나왔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광노와 소평은 사마적의 뒤를 따라 왔다. 좌중의 분위기는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소주, 저희로서는 저들의 뜻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저들은 사실 대주의 인품과 그분의 뜻을 흠모하여 자청해 살수탑에 들기는 했지만, 결코 누구의 종이나 부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평이 말했다. 사마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 역시 그들을 구속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오. 단지 그들의 힘을 빌려 적을 치고자 했소. 그러나 그 방법에서 옳지 못했다는 것은 알고 있소. 질책하지는 마시오. 나 역시 마음이 편치는 않았으니....... 난, 날 위해 죽은 자들로 인해 밤새 시달려 한 잠도 이루지 못했던 적이 부지기수였소."

사마적은 말을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 나는 양부의 죽음을 지켜봤소. 칠 년. 짧다면 한없이 짧고 길다고 한다면 너무도 긴 시간이었소. 그 시간동안 나는 나의 양부가 고통스러워 나뒹굴고 피를 토하는 것을 보며 살았소. 버려진 나였기에 그에 대한 나의 집착이 과했다고 해도 좋소. 나는 그를 살리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만 했소. 그러나 그는 고통에 지쳐 죽고만 것이오. 내가 바로 그요. 그의 모든 것을 받았소. 그를 고통스럽게 한 자들을 용서하지 못하겠소. 내겐 오직 복수만이 전부요. 그 이후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단 말이오. 내가 억겁 지옥에 떨어지고 반미치광이가 되어 남은 생을 산다고 해도 복수만큼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소."

사마적의 눈가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의 두 손은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런데 그들이 이제 움직이고 있소. 중원을 차지하려는 맹수와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승냥이가 서로에게 발톱을 드러낸 것이오. 그들을 어찌 가만두란 말이오? 나는 그들을 모두 쓰러뜨릴 것이오."

광노는 눈을 감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

시종일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앉아 있는 것이 그의 최종 목표라도 되는 듯 그는 눈을 감고 앉아 아무런 말도 없었다.

사마적은 창 밖을 내다 봤다.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 한 여인의 이름을 불렀지. 그 여인은 지금 저곳에 묻혀 있소. 그녀는 나의 양모가 되었소. 내가 복수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으로 또 하나가 늘어난 것이지. 난 어떤 일이 있어도 그들 곁으로 원수를 보낼 것이오. 그래야만 나의 양부가 지옥에서나마 그를 다시 죽여 복수할 테니까."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 바람은 겨울을 알리는 바람이었다. 나뭇가지는 어느 샌가 누렇게 변해 낙엽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               *               *

대술산(大術山).

멀리 소림이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숭산 기슭에 자리한 소림에는 간혹 몇 개의 작은 등만이 불을 밝히고 있을 뿐,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괴괴한 정적만이 맴돌고 있었다.

"총령, 소림은 우리 손에 포위되었습니다. 기이한 것은 그들이 산문을 걸어 잠그고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총령은 소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은 소림의 저녁 예불시간 임에도 불구하고 승의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어떤 전란 속에서도 소림에서는 예불시간만은 어기지 않았음에도 지금 소림은 너무도 고요했다.

이때 무사 하나가 나는 듯 달려왔다.

"총령, 잠입시켰던 무사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총령은 소림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밤 자정을 기해 중원의 구대문파는 이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소림 역시 예외는 아니다. 위위구조일백계(圍魏球趙一百計)라 했다. 적을 분산시키고 공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묘책이다. 그런데 어찌 이렇게 조용한가? 게다가 잠입시켰던 무사들도 돌아오지 않다니.......'

그는 불안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총령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이 높이 떠올랐고 그 밑으로는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소림을 공격하라."

소실봉을 향해 검은 무복의 무사들이 달려들었다.

마치 야조(夜鳥)가 내려앉듯 소림의 담장 안으로 뛰어 들어 갔다.

"쳐라. 한 놈도 남기지 마라!"

"죽여라. 우린 백도 놈들과 같은 하늘 아래서 숨을 쉴 수 없다."

와아―!

무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몰려들었다.

그러나 소림은 죽어있었다. 정적, 죽음과도 같은 정적만이 소림의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곳곳에 불을 놓았다. 여기 저기에서 불길이 피어올랐고, 소림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장경각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종이조각 하나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주지원에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달마원 역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계율원에서도 역시 단 한 명의 죄수조차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사방을 뒤진 수하들의 한결같은 목소리였다. 소림에는 단 하나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총령은 갑작스런 이변에 가슴 한구석이 섬뜩해져왔다.

"함정!"

번쩍―!

총령이 외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십여 개의 섬광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적이다."

누군가가 외쳤고, 그와 동시에 화살이 비오듯이 쏟아져 내렸다.

후두두둑―!

마치 하늘에서 소나기라도 퍼붓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그와 동시에 무사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모두 침착하라. 각자 검으로 화살들을 쳐내라!"

파바박―!

따당, 따다당―!

무두가 보기에 총령은 굉장히 당황한 듯 보였으나 그는 속으로 여유있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진정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와 같은 시각, 또 한 사나이가 소림을 내려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황 남태천, 그 역시 불타오르는 소림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총령, 총령, 총령! 그 잘난 면상을 구경해 보고 싶구나. 어떠냐? 오늘 네놈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을 것이다.'

남태천은 마음속으로 흥분되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저들이 발붙일 곳을 만들지 마라."

이때였다. 남태천의 등뒤에 승하나가 다가왔다.

"잔당들이 지금 조사동(組師洞) 쪽으로 도주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잘 되었다. 매복은?"

"예. 원(圓)자 항렬의 무승들이 매복해 있습니다."

"좋다."

남태천의 눈에서는 야망의 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총령을 제거하고 나면 중원은 이제 내 것이다. 철저한 위선자들에게서 이 세상을 구해낼 것이다.'

조사동(組師洞).

숭산의 왼쪽 계곡에 자리한 조사동부는 소림 태고의 신비와 수많은 전설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그 예로 달마가 중원에 말을 들여놓았을 때, 위나라 황제가 서역에서 고승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달마를 불렀다.

위황제는 석가의 직계제자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슴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적지 않게 실망을 하고 말았다.

황제는 내심 부처의 제자가 인물이 출중하고 덕이 높은 인물일 것으로 상상했었지만 자신 앞에 나타난 자의 몰골은 그런 상상을 여지없이 구겨놓은 것이다.

그는 칠 척 장신인 데다가 체구가 집채만하며 얼굴은 온통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게다가 몸에는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려갈 듯한 남루한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괴이하게도 그는 한쪽 신발을 머리 위에 올려놓고 있었던 것이다.

위황제가 그를 보며 실망의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그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눈치 살피지 마시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으면 아무 거리낄 것 없이 물어보셔도 됩니다."

그러자 위황제는 달마에게 왜 머리 위에 신을 올려놓고 있느냐고 물었다.

달마의 대답은 이랬다.

"사물을 제대로 파악하라는 뜻입니다."

'사물을 파악케 하기 위해 신발을 머리 위에 올려놓고 다닌단 말인가?'

황제는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다시 물었다.

"아니, 사물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꼭 그렇게 머리 위에 신발을 이고 다녀야 한다는 말입니까?"

위황제가 묻자 달마는 속삭이듯 황제의 귀에 말했다.

"나는 불합리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처럼 머리에 신발을 올리고 다니는 것은 황제께 그 사실을 일깨워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곳 황제의 경직된 마음을 깨뜨리기 위해서 인 것이지요. 자신의 마음을 깨뜨리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나를 보자마자 그것을 깨달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비로소 나를 받아들일 것인지 내 쫓을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일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인도승려는 그렇게 잘라 말하고는 돌아서 가버렸다. 그는 상대방에게 전혀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러다 위황제는 달마가 사라졌을 때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다급히 외쳤다는 것이다.

"당신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그러나 어느새 달마는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위황제를 말 한 마디로 눌러놓고 초연히 광야로 사라진 그 사람, 그는 석가의 법맥을 이은 이십팔대 존자 보리달마였다.

그는 황제를 만나고 바로 이 숭산에 들어와 그물을 쳐놓고 면벽에 들어갔는데 이것이 이 조사동을 유명하게 된 이유이다.

달마는 그물을 스스로 치며 그물의 뜻을 알고 찾아오는 고기를 기다렸다. 이것은 이 그물로 아무 고기나 잡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의 가르침을 받을 제자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후 천 년이 지나고 이 조사동은 소림 최대의 금지(禁地)이자 누구든지 활용할 수 있는 수련장이기도 했다.

이유인 즉, 깨달음에는 나이 차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소림의 승들은 이 조사동을 끔찍하게 성스러워했다.

그런데 이 조사동으로 마교도들이 들어선다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 전투는 치열하게 이어졌다.

"크억―!"

한 사내가 피가 뭉클뭉클 흘러나오는 눈을 움켜잡은 채 도망치려 하자 승려의 뒤이은 검이 그의 목을 날려버렸다.

그리고 그 승려 역시 한 마교고수의 손에 머리가 터져 버렸다. 자고로 머리가 으스러지고 살아날 수 있는 자는 없는 법, 그 승려는 나무토막처럼 쓰러져 버렸다.

와아아아아―!

촹― 챙― 따당―!

검음이 끊이지 않고 조사동부를 울렸고 소림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가 피로 얼룩지고 있었다.

소림의 승들은 적들과 맞서 싸우면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그 비통함을 아는지 하늘에서 역시 빗줄기를 뿌리기 시작했다.

단지 남태천과 소림의 승려로 위장한 남태천의 수하들만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같은 시각,

무당파(武當派).

화산파(華山派).

아미파(峨嵋派).

점창파(點蒼派).

전진파(全眞派).

곤륜파(崑崙派).

청성파(靑城派).

그리고 개방(  ).

이 구대문파들 역시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정도를 수호하고자 하는 그들의 열의와 열망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의지 때문이었는지, 이들은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그들은 승승장구했다. 모든 것이 구대문파의 승리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잘 짜여진 각본 같았다.

*               *               *

쏴아아아―!

야음을 틈타 속속히 모여드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검은 잠행의복(潛行衣服)을 입고 있었으며, 모두들 폭뇌(爆雷)와 도검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밤 고양이처럼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바로 앞에 소림의 산문이 그 육중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산문 너머에선 굵은 빗줄기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화광(火光)을 볼 수 있었다.

"소림에 남태천이 있다. 우린 남태천의 목을 베고 이 소림을 지상에서 사라지게 할 것이다. 그리고 마교의 잔당 역시 없애면 그대들의 일은 끝나는 것이다. 벌써 세 시진, 저들은 지쳐있다. 마교는 남태천에 의해 괴멸 직전에 이르렀다. 우린 남태천과 마교를 이 지상에서 제거해야만 한다."

사마적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는 두건을 뒤집어썼다.

"가자!"

한 무리의 무사들이 일제히 소림을 향해 들어섰다.

소림의 산문에서부터 불에 반쯤 그을린 시신들과 전장의 잔재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고, 단지 수백 년을 이어온 전각과 누각들이 한줌의 재로 변해가고 있었다.

"소림을 샅샅이 뒤져라."

그들의 움직임은 조용하면서도 민첩했다. 본업이 자객이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차별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살행이 시작되었다. 이미 기세를 꺾인 마도인과 소림의 승들간의 싸움이 점차 막바지로 들어서고 있는 때였다.

"누?"

승하나가 자신의 앞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며 소리치려는 순간, 소리 없는 검광과 함께 쓰러져야만 했다.

"적이다!"

외침이 터지고 잠행복을 입은 자객들에 의해 무차별 학살이 이루어졌다.

죽는 자들이 마치 추풍낙엽과 같았다.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잔혹한 살인이었다.

차라리 비명을 지르며 악에 받쳐 싸움을 걸어오는 것이라면 이토록 두렵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대는 말이 없었다.

아니, 움직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저 바람처럼 조용히 다가와 목을 베고는 사라져 갔다. 그들이 움직인 자리에는 싸늘한 주검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살풍(殺風). 죽음의 바람이 이어졌고 그 바람은 서서히 한곳을 향해 다가서기 시작했다.

남태천은 그들의 움직임을 보았다.

흥분되어 있던 그의 눈에는 어느새 차가운 한기가 내려앉았다.

"저들은 자객이다. 흑풍!"

"예."

그의 옆에는 환우대사가 공손히 손을 모으며 대답했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제거된 환우의 탈을 쓴 남태천의 수하였다.

"화전을 쏘아 올려라. 이제 우리의 무사들이 나설 순간이다."

"옛!"

화아악―!

그리고는 소매에서 조그만 원통을 꺼내어 허공을 향해 줄을 잡아당기자 밝은 불덩어리가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미천한 것들의 죽음이라. 화려하게 해주지. 적들을 조사동부 앞까지 유인하라."

"예."

"흐흐흐......."

남태천의 얼굴에는 싸늘한 미소가 어렸다.

사마적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한바탕 살풀이를 해대듯 그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시종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남태천. 나의 아버지의 몸에 검을 꽂은 자. 너만은 용서치 않으리라!'

삐익―!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남은 자들은 계곡 안으로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소주! 적들이 계곡 안으로 도주하고 있습니다."

"따르라."

사마적은 도망하는 승들을 쫓아 계곡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인간에게 공포감을 주는 것들 중 가장 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어둠일 것이다. 어둠은 폐쇄적이고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을 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자신이 눈을 감고 있는지 뜨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런 곳에서 사마적 일행들은 걸음을 멈춰야 했다. 그들은 이미 어둠 따위에 구속당하는 경지는 벗어난 자들이었다.

진세의 작용인지 계곡 안은 한 치 앞도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진세도 사람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일 뿐, 철저하게 정신 훈련을 받는 자객들에게는 한낱 귀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침착하라."

사마적은 주위를 경계하며 앞으로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진세는 그들에게 어떤 영향이나 위해(危害)도 가하지 않았다.

사마적 일행이 진세의 영향권을 벗어난 순간 그들은 처참한 지옥도를 보았다.

갈기갈기 찢겨진 시신과 피로 얼룩진 조사동부, 소림의 역사는 이것으로 막을 내리는 것 같았다.

"누구냐?"

"크흐흐흐......."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인간의 형상을 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덥수룩한 머리에 손과 발톱은 마치 갈고리처럼 길었고 피로 얼룩져 있었다.

낮게 웃는 소리는 마치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그들은 사마적 일행을 노리고 있었다.

그것도 그들의 수는 하나 둘이 아닌 수천에 달했다.

새카맣게 둘러싼 그들은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음에도 위압감을 주고 있었다.

일견해도 이 지옥도를 만들어 놓은 것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바로 천하영웅대회에서 선출된 중원의 기재들이었다. 남태천이 이들을 이렇게 완벽한 야수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이건?"

이때 멀리서 남태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흥! 너희가 홍화객이란 자의 졸개들인가? 이곳이 바로 지옥의 입구가 될 것이다. 지옥에 먼저 간 너희 대장이 몹시 반가워하겠구나. 쳐라!"

남태천은 오십여 장을 떨어진 벼랑 위에 있었지만 마치 옆에서 속삭이듯 생생한 목소리였다.

이것만 보아도 그의 내공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잘 가거라."

"크흐흐......."

괴수들은 서서히 사마적 일행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사마적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남태천!"

사마적의 울부짖음이 메아리로 남았다.

"후후후! 네놈이 바로 홍화객이란 자의 양자인 사마적이란 놈이로구나."

그 소리가 들려온 것은 사마적이 검을 빼들고 막 남태천에게 날리려는 찰라였다.

"뭐?"

사마적은 순간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저자가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 나는 표면적으로 단 한 순간도 나선 적이 없건만.'

무언가 불길한 예감과 억누를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을 느꼈다.

'뭐지?'

"크윽―!"

순간 사마적의 눈이 부릅떠졌다.

"네, 네가?"

사마적의 등에 검을 꽂은 것은 다름 아닌 광노였다.

"네...... 네가......!"

사마적의 눈은 원망과 불신으로 얼룩져 있었다.

광노는 사마적이 남태천에게 한눈을 파는 사이 서서히 접근해 사마적의 오른쪽 옆구리에 검을 박아 넣었던 것이다.

그것도 맹독이 검게 발라진 독비수(毒匕首)였다.

"그건 천 일간이나 독에 담가뒀었습니다. 물론 서른두 가지의 맹독을 혼합했기 때문에 해독이란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그런 상태이니 무리한 움직임을 피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흐흐흐......."

"네, 네놈이!"

광노는 교활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전 이미 오래 전부터 한 사람의 명으로 이곳에 잠입해 있었습니다. 물론 그분은 이 자리에 계시지는 않지만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분의 명으로 홍화객을 만들었고 제거했습니다."

"이놈."

적사(赤蛇) 소평이 청룡도(靑龍刀)를 휘두르며 광노의 머리를 쪼개왔다.

"흥! 어리석은, 비산개수(飛散槪數)!"

광노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고 마치 주변은 광풍이 몰아 치는 듯했다.

달려들던 적사는 달려들던 때보다 더욱 빠르게 퉁겨져 나갔고 십여 장을 밀려나 벼랑에 쳐박혀버렸다.

적사의 얼굴은 놀라움으로 얼룩져 있었다.

"이토록 무공이 높다니!"

그리고는 비분에 찬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원통하구나! 네놈의 목을 내 손으로 베지 못하는 것이......."

쩍―!

적사의 몸은 여섯 조각으로 분리되면서 선혈을 뿜어냈다.

그리고는 그대로 절명해버렸다.

사마적은 그제야 이해가 갔다.

어찌해 자신의 의부가 그토록 허무한 생을 마감해야 했는지, 그리고 호귀는 왜 그렇게 허무하게 적에게 당해야 했는지 등이 모두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자신들이 그 동안 이용당했다는 생각에 분노가 일어야 정상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허허, 허허허...... 허허허허......!"

미친 듯이 웃었다. 마치 지금 상황을 파(波)해 버릴 것처럼 웃어대는 것이었다. 그 웃음에는 허탈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웃음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좋아! 지옥의 동반자로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는 자세를 고쳤다.

'복수를 꿈꾸었건만 겨우 남의 노리게 노릇이나 하다니. 우습다, 난 무엇을 위해 살았던가. 아, 그녀의 모습을 단 한번만 볼 수 있다면!'

"하앗!"

사마적의 기합성이 터졌다. 사마적은 먼저 광노를 향해 몸을 던졌다.

"미친!"

파앙―! 따앙―!

검이 마주쳤고 광노는 우세를 점하는 듯했다. 그러나, 사마적의 기세는 이미 죽음을 초월한 듯 폭우와 같았다.

광노는 그렇게 미친 듯이 달려드는 사마적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했고 급기야는 일검에 양단이 되어버렸다.

"낙화유수(落花流水), 뇌우진천(雷雨振天), 멸(滅)!"

"크아악―!"

광노는 한 조각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비산해버렸다. 사마적은 검을 짚은 채 비틀거리며 외쳤다.

한 명의 동료라도 살려야만 했다.

"이곳에서 도망쳐라. 살아 남아라!"

그 소리에 모두들 도주를 준비하던 그 순간 남태천은 이상한 호각을 불었다.

삐익―! 삐이익―!

낮고도 강한 소리였다. 또한 음침하기도 했다. 그러자 으르렁대기만 하던 인간 야수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21장  승자(勝者)



"그후 어떻게 되었는가?"

중추신개는 조급히 물었다. 모두들 청년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다. 청년의 얼굴은 좀 전과는 다르게 딱딱히 굳어 있었다.

"그것은 필사(必死)의 사투(死鬪)였습니다. 그는 이미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는 전력을 다해 그곳을 벗어났습니다. 그리고는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그가 사랑한, 아니 사랑한다고 믿는 한 여인을 향해 말입니다."

"그럼?"

중추신개가 말하려는 순간 남궁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신예원을 찾아 간 것이군요."

청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밖에는 뿌옇게 날이 새오고 있었다. 그리고 밤새 미친 듯이 내리던 비는 이미 그쳐 있었다.

청년은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난처럼 말을 잇던 표정이 아니었다. 그의 눈에서는 그리움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자신의 정체조차 밝히지 않은 청년과 흑의사내,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곳 사람들 모두 이상한 자들이었다.

기괴한 분위기였다.

표면적으로는 너무도 평화로워 보이는 이곳이 청년의 이야기가 더해 갈수록 알 수 없는 야릇한 긴장감이 일고 있었다.

"사마적은 수십 번의 고비를 넘겨 사막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진정 지옥 속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스물 두 군데의 상처와 두 군데의 관통상을 입은 그는 곪아 썩어 가는 부분을 움켜잡은 채 사막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               *               *

사막(砂漠)은 인간이 살아 갈 수 있는 가장 극한의 대지이다. 열사가 존재하는 곳, 바로 죽음의 땅이었다.

사마적은 손에 든 검에 의지해 한 발 한 발 힘겹게 내딛고 있었다.

눈앞이 흐려지고 다리에는 힘이 풀렸다.

"허억―! 허억―!"

그의 입에서는 바람 소리보다도 더욱 거친 숨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그런 그를 더 채찍질하는 듯, 모래 바람은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미 사마적의 입에는 모래가 가득 차 있었고, 입을 움직일 때마다 사각거리며 모래가 씹혔다.

그는 지금 몇 일째 물을 먹지 못했다.

입 안은 말라 혀가 갈라졌다. 신은 지금 사마적을 시험하는 것인가? 신의 형벌이라면 너무도 가혹한 것이었다. 그는 이미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멀리서 본다면 사람이 아닌 누더기가 걸어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가야 한다. 그녀를 찾아서! '

사마적은 눈은 북쪽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비록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눈에는 바로 저 모래 너머에 그녀가 있을 것만 같았다.

사막의 밤은 몹시도 춥다.

낮에는 고열(高熱)과 강렬한 태양 빛에 시달리지만 밤이면 얼음이 얼 정도의 추위를 감소해야만 한다

짐승들마저도 활동을 하지 않는 사막의 밤, 모두가 죽어 버린 이 시각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씨, 그게 아니란 말야."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서너 살쯤 되었을까? 소년은 총명하게 반짝이는 눈을 들어 광활하게 펼쳐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럼?"

"아빠는 분명히 이 희야를 보러 올 거란 말야."

"그래, 그럴 거야."

"씨이."

소년은 그 옆에 앉아 있는 여인 앞에서 투정 아닌 투정을 하고 있었다.

여인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후!"

낮은 한숨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 그러나 그 알 수 없는 슬픈 눈빛을 잊을 수 없는 사람을 생각했다. 그녀는 그 사람의 아이를 낳았고 이제 네 살이 되었다.

'그가 왜 그랬을까?'

그녀는 이 질문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그가 자신을 겁간(劫姦)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음적이라면 그 슬픈 눈빛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찌릿한 그 슬픈 눈빛을 지닌 사내의 마음을 그녀는 알고 싶었다.

천녀 신예원.

지금 당장이라도 중원에 달려가 그 사내를 찾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여인이기 이전에 선천궁의 궁주이기 때문이었다.

변황 삼대세력 중 하나인 이 선천궁은 드러나지 않은 강한 세력과 저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을 버릴 수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추억이 담긴 이곳을 등질 수 없었고, 그녀에게 소중한 모든 사람들을 배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후......!"

그녀의 입에서 다시 낮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궁주, 안으로 드시지요."

귀모였다. 그녀는 잘려나간 손목을 긴 옷소매로 가리고 있었다. 그녀 역시 지난 사 년간 더 많이 늙은 듯 하얀 백발이 되어 있었다.

귀모는 그녀가 지난 사 년간 얼마나 많은 마음 고생을 했는지 지켜봐야만 했다. 그녀로서는 지켜보는 것이 최선이었다.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모자는 밤이면 이렇게 뜰에 나와 남쪽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낙이 되어 있었다.

귀모는 근심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궁주, 밤바람이 차갑습니다. 소궁주가 감기에라도 드시면......."

"알았어요, 유모."

그러나 밝게 대답하는 신예원의 눈가에는 이슬방울이 맺혀 있었다.

사마적은 흐릿한 눈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기를 벌써 보름동안을 계속하고 있었다. 인간이 극복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그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이 사막에서 십오 일을 버틴 것이다.

그러나 탈수 증세로 이미 이지라는 것을 잃고 있었다. 단지 이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초인적인 정신력과 본능만이 그를 지배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그의 앞에 거대한 성이 나타났다.

흰색의 성은 강렬한 태양 빛에 반사되어 그 위용을 더하고 있었다. 사막 한가운데에 나타난 성, 그것은 마치 신기루와 같았다.

드디어 성이 사마적의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조금만 더 가면 그는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던 신예원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의 몸은 마지막 한 방울의 기름을 빨아들이려는 등잔과도 같았고 언제 꺼질지 모르는 상태였다.

'선천궁!'

그는 눈앞이 아득해져옴을 느꼈다. 사마적은 모래에 처박히며 이내 정신을 잃었다.

'가야 하는데.......'

그러나 이미 그는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아득한 사막의 끝에서 검은 점으로 시작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대상행렬이었다.

"이보게 오늘은 저곳에서 하룻밤 유하고 가세."

대주인 소관(少貫)이 말하자 모두들 발길을 돌렸다. 멀리 선천궁이 보였다. 선천궁은 서역과 중원을 잇는 하나의 거점이었다.

그래서 이곳은 사막에서 가장 큰 시장이 있는 곳이기도 했고 또한 많은 상인들의 집합지이기도 했다.

숙소를 제공하고, 진기한 물건들이 즐비하며, 도적 떼로부터 상인들을 지켜주니 이곳은 날로 번창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사막을 지나는 상인들은 이곳을 꼭 들르며 신성한 땅이라 부르고 있었다.

"대주! 저길 보십시오."

선천궁에 다 도착해 갈 즈음, 후미에서 따라오던 진창이 소리쳤다.

"무슨 일인가?"

"저기 뭔가가 있는데 아무래도 사람 같습니다."

그들 중 몇몇이 달려가 보았다. 그들이 본 것은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아마도 이 사막에서 조난 당한 것 같은데요?"

"그런데 이 상처들은?"

"도적 떼를 만난 것이 아닐까요?"

"죽었나?"

진창이 가슴에 귀를 대어보았다.

"아직 가늘게 뛰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곧 죽을 것 같은데요"

"글쎄. 어쨌든 선천궁으로 옮겨야겠다. 그들이 알아서 해주겠지."

잠시 지체되었던 대상의 행렬은 더욱 빠른 속도로 선천궁을 향해 갔다.

신예원이 그 소식을 들은 것은 아들인 희야와 놀아 주고 있을 때였다.

수하 하나가 달려 들어왔다.

"궁주, 중원에서 오던 상인들이 조난자를 구조해 왔습니다."

"그래요? 그럼 상례대로 그를 돌봐주면 되지 않아요?"

"그런데 그것이......."

신예원은 평소와 다른 그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다.

"뭐가 잘못 됐나요?"

"궁주님이 직접 보시고 결정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래요?"

시체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그는 바짝 말라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몸의 여기저기는 모두 상처가 곪아 있었고, 옆구리는 이미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의식은 이미 없었고, 기적적으로 가늘게 심장만 뛰고 있을 뿐이었다.

풍전등화(風前燈火)란 말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그의 생명의 촛불은 아주 미미한 바람에도 꺼질 듯이 작아져 있었다.

그런데 신예원은 그 시신을 보자마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이 알 수 없는 답답함은?'

그녀는 그런 기분을 지우려는 듯 더욱 큰소리로 말했다.

"이, 이자를 의원에게로 옮겨 놓으세요."

*               *               *

"사마적에게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사이 중원에서도 급격한 변화가 일고 있었습니다. 그 변화는 우선 풍야후와 추태국의 전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청년의 목소리는 낮아지고 있었다. 아마도 얘기하기가 몹시도 고통스러운 모양이었다.

*               *               *

회양(回羊).

본시 이곳은 초지(草地)가 발달하여 유목을 통해 목축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명(明)이 세워지고 이곳에는 성이 지어졌다. 그후 사람들의 유목이 통제되고 있었다.

성 앞으로는 어른 가슴까지 닿을 정도의 내가 흐르고 있었는데 지금 그 내를 사이에 두고 두 사나이가 마주 서 있었다.

시각은 자정에 이르고 있었고 달빛은 흐르는 냇물에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두 사나이는 서로의 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둘의 눈은 허공에 얽혀 있었다.

뭐랄까? 알 수 없는 애잔함이 흐르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풍야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삼십 년 만인가?"

추태국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군, 벌써 그렇게 되었는가? 자네는 많이 늙었군."

"허허허....... 자네 역시 많이 변했어. 벌써 백발이 되다니 말이야."

풍야후는 허허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 둘은 그렇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로에게 삼십 년이라는 시간은 너무도 긴 시간이었던 것이다.

우의를 다짐했던 그 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삼십 년 전 언덕 위에는 한 그루의 전나무가 서 있었다. 그 높이가 이십 장이 넘었다.

나무 줄기의 둘레만 해도 어른 열 명이 손을 마주 잡고 둘러서도 다 감싸 안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아래에는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젊은 풍야후와 추태국이 마주 앉아 있었다. 서로에게 술잔을 들어 마주 댄 채 그들은 말이 없었다.

사나이와 사나이의 만남에 어떤 말이 필요한가?

아무것도 필요치 않았다.

"맑은 달이 떠 그대와 나의 마음에 담겼다. 잔을 들어 서로의 입가에 겨누고 내 마음을 배에 띄워 그대에게 보낸다. 잃은 마음이 없어서라. 더 이상 거둘 것 역시 없다. 내리는 눈만큼 내 우정도 깊이 쌓여간다."

추태국이 시를 한 소절 읊었다. 그러자 풍야후 역시 자신의 심정을 시로 읊었다.

"나 이곳에 누웠다. 백골이 진토가 되고 넋이 먼지가 되어 날린다. 망향산의 초입에 서서 돌아서니 아는 이 없다. 내가 어느 들에 묻히거든 네가 내가 되어 울어 줄 손가?"

"하하하하하......!"

둘은 그렇게 서로에게 술잔을 권하며 밤을 지샜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았다. 하나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로에게 검을 들이대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때가 생각나는구만."

"그래, 자네라면 내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야."

추태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자네와 다르지 않다네. "

둘은 마주 보았다.

달빛마저 두 사람을 보기 민망하였는지 하늘 끝으로 숨어 버렸다. 주위는 어두워졌다.

풍야후가 추태국에게 말했다.

"난 내일 자네의 성을 공격할 것이네. 자네가 진다면 나는 황성까지 달려가 황제의 목을 부러뜨려버릴 것이라네."

추태국은 희미하게 웃었다.

"나 역시 자네를 막겠네. 내 목숨을 걸고 말이네."

"그러나 내가 진다면 우리는 조용히 물러날 것이네. 내일 전장에서나 만날 수 있겠구만."

풍야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무운을 빌겠네."

풍야후가 발길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추태국의 입에서 낭랑한 시가 터져 나왔다.

"나 이곳에 누웠다. 백골이 진토가 되고 넋이 먼지가 되어 날린다. 망향산의 초입에 서서 돌아서니 아는 이 없다."

풍야후가 뒤 소절을 받았다.

"내가 어느 들에 묻히거든 네가 내가 되어 울어 줄 손가?"

가려던 풍야후는 멈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지었던 시로군. 잘 가게. 친구."

추태국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두 사람의 마음은 서로 다르지 않을 것이니.......

다음날은 여느 아침보다 해가 일찍 뜨는 것 같았다.

무사들과 군사들은 무장을 하고 갑의를 걸쳤다. 손에 밤새 손질한 창과 도검을 든 그들의 위용은 대단하였다.

풍야후는 부하들을 모아 놓고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싸울 것이다. 모두들 살아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이곳에서 죽는다고 생각하라. 적을 죽이지 않고는 우리가 살아 돌아 갈 수 없다. 저 광활한 대지를 뛰어 노는 우리의 후손들을 생각해라."

"와아―!"

수만의 무사들이 함성을 터뜨렸다. 사기충천한 모습이었다.

유난히 하늘은 맑았다.

추태국은 성루에 올랐다.

"오늘은 치열한 하루가 될 것이다. 우리는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대들의 가족과 형제들, 그리고 이 나라의 백성들을 지켜야만 할 의무가 있다. 이곳이 뚫리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생각하라. 만약 도망치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추태국은 눈을 감았다.

"그렇기에 우린 질 수 없는 것이다."

"와아―!"

추태국의 얼굴은 딱딱히 굳어 있었다. 그러나 그 굳은 의지는 지워지지 않았다.

전쟁, 권력의 잔재이기도 하고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욕망의 가장 강력한 표현일 것이다.

서로에게 검을 대고 살인을 하고 모든 죄악과 범죄가 용서되는 곳, 이곳을 우리는 전쟁터라고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삶이 곧 전쟁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삶이 곳 전쟁이다.

이는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 순간이 어떤 것보다도 치열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야만 살아 갈 수 있는 것이 삶이기에 전쟁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만큼 잔인하겠는가?

인간이 짐승처럼 오직 본능과 자신의 힘에 의지해 살아가는 세상이 바로 이곳이다.

하늘은 티 한 점 묻지 않아 눈이 시릴 정도였다.

콰앙―!

화포소리가 울렸고 포탄이 떨어진 자리는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누군가의 죽음이 이어졌다.

성루에서 포탄을 장전하는 병사들은 이미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성을 함락하라."

"죽여라."

달단의 무사들은 비오듯 쏟아지는 포탄과 화살 세례를 피해 달려들었다.

성을 타고 오르려다 바위에 맞아 으스러지는 자, 머리가 터져 죽는 자, 화살로 고슴도치가 된 자, 그 죽는 유형도 사람 수만큼이나 많았다.

"성문을 부셔라."

콰앙―! 쾅―!

거대한 아름드리 나무를 삼십여 명의 장정이 들고 달려들어 성문을 부셨다.

그러나 명군들의 방어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끓는 물을 부었고 돌을 던졌다.

문은 견고하여 부서질 듯 하면서도 부서지지 않았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순간이었다.

이때였다.

"아버님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풍야후의 아들 중 풍휘지가 화약을 가슴에 안고 성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풍야후에게는 모두 세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풍우척, 둘째는 풍휘지, 셋째는 풍위신이었다.

그는 풍야후의 세 아들 중 둘째였다.

풍야후는 말릴 틈도 없었다.

파바바박―!

화살이 날아와 풍휘지의 전신에 빼곡이 박혔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그를 멈출 수 없었다.

콰앙―!

성문에 다다른 풍휘지는 그대로 산화해버렸다. 그리고 성문은 반쯤 날아가 버렸다.

풍야후는 자신의 아들이 죽은 것을 슬퍼할 틈이 없었다.

"돌격하라. 성문이 열렸다."

"와아―!"

풍야후의 군사들은 물밀 듯이 밀려들어갔다. 풍후지의 죽음으로 인해서인가? 풍야후의 군사들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고, 창을 휘둘렀다.

"와아―! 와―!"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전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서로 얼굴조차 모르던 사람들이 서로에게 검을 들이대며 상대에게 맹목적인 적의를 갖고 있어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도덕이나 이성은 중요치 않다. 왜냐는 질문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어차피 전쟁터에선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닌 것이니....... 살이 튀고 피가 내를 이루었다. 광란이란 단어가 너무도 잘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풍야후와 추태국은 검을 들어 서로를 향해 마주 섰다. 둘의 눈이 허공에서 얽혔다.

"난 약속을 지켜야만 한다."

추태국의 말에 풍야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마치 이 치열한 전쟁터에서 두 사람에게만은 시간이 멈춘 듯 보였다.

풍야후는 검을 고쳐 잡았다.

"받아라!"

파악―!

검은 아슬아슬하게 추태국의 눈가를 스쳐 지나갔다. 추태국의 얼굴에는 얇은 상처가 생겼다.

하지만 추태국 역시 물러서지만은 않았다.

검음이 울렸다. 마치 호곡성처럼 두 사람의 검음은 서로의 가슴을 울렸다.

스걱―!

추태국은 어깨에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풍야후 역시 허리 언저리를 베었다.

"후후, 자네 이제 늙었나 보이. 검에 힘이 없어."

풍야후가 추태국을 비웃듯 말했다. 추태국은 말이 없었다. 단지 두 눈에서 살기만을 흘리고 있었다.

"난 이 나라를 지켜야만 한다."

그들의 무공에 격식 따위는 없었다. 용호상박(龍虎相搏)의 싸움이었다.

추태국, 그의 무공은 그저 실전에서 우러나온 실력이었지만 어떤 고수의 움직임에도 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누군가 풍야후의 등에 화살을 날렸다.

휘익―! 퍼억―!

풍야후는 비틀거렸고 추태국은 그런 풍야후의 가슴에 검을 꽂았다.

"크윽―!"

묵직한 느낌과 함께 풍야후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터졌다.

"아버님!"

풍야후의 뒤로 풍우척과 풍위신이 달려왔다. 그들은 달려들어 금새라도 추태국을 벨듯했다. 그러나 무릎 꿇던 풍야후가 그 둘을 말렸다.

"아서라."

"아버님.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풍야후는 가쁜 숨소리를 보이고 있었다.

"그와 나는 서로의 목적을 위해 싸웠고 그리고 결론은 이미 내려졌다. 이제는 돌아가자꾸나. 내 형제들의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내 욕심 때문에....... 이제는 너희들에게 물려줘야겠구나. 내가 죽으면 너희들이 자란 그 초지 위에 나를 묻어다오."

풍야후는 추태국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 했다.

"자네에게 부탁하네. 더 이상의 전쟁은 무의미한 것! 이해해 주리라 믿네."

추태국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그러나 자네 손에 죽을지는 몰랐네. 단지 이렇게 편안히 갈 수 있어 즐거울 뿐이네. 이렇게...... 죽음이...... 편한지...... 이제야...... 알......."

풍야후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달단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최고의 무사인 그가 칠십육 세의 나이로 전쟁터에서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전쟁터에서 살아온 그에게 너무도 잘 어울리는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추태국은 그의 마지막 부탁대로 돌아가는 달단의 군대를 그대로 놓아보내 주었다.

*               *               *

"그후 추태국은 낙향해 집에서 농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가묘(家廟)를 지어놓고 평생 풍야후를 위로했다고 하더군요. 이것이 바로 정사에는 전해지지 않던 풍야후의 반란이었습니다."

청년은 목이 타는 듯 술잔을 들이켰다. 그의 눈은 어느 순간인가부터 문 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올 시간이 되었는데."

"그라니?"

청년은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아마도 여러분 역시 반가워하실 분입니다. 특히 당신은 더욱 반가워하실 것입니다."

청년은 남궁선을 바라보았다. 남궁선은 놀란 듯 토끼 눈이 되었다.

"내가요?"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사마적인가 하는 친구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치료를 위해 의원에게로 옮겨졌습니다."

*               *               *

"그의 상태는 어떤가요?"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지난 삼십여 년간 많은 상처 입은 사람을 치료해 왔지만, 이토록 극심한 상처와 탈수증세를 보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가망이 없습니다. 이 정도의 상처를 입고도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아마 살아 있는 것도 사상 초유(初有)일 것입니다."

신예원의 눈에는 다급함이 어렸다.

"그래요. 하지만 어떻게 의식이라도 차리게 할 수 없나요?"

"글쎄요, 이 사람의 상처야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지금 그가 보이는 정신력이라면 충분히 일어 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독에 중독 되어 있습니다. 정신을 차린다 하여도 모든 기능이 저하된 그로서는 참기 힘든 고통일 것입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기적이란 것도 있으니 한 번 두고 봅시다."

돌아서는 신예원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               *               *

북방의 겨울은 몹시도 매섭고 빨리 찾아온다.

아직 시월이 오지 않았건만 들에는 어느새 서리와 눈이 내린 흔적이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었다.

아직 사람들이 일어나기에는 이른 시각, 새벽의 한기가 전신을 엄습하는 시각이었다.

한 사나이가 막사가 즐비한 한 곳을 향해 무작정 걸어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족히 백여 개는 되어 보이는 막사들이 모여 진을 이루고 있었다.

사내는 전신이 검은 천으로 뒤덮여 있었으며 얼굴마저도 두건을 쓰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어른 손바닥 넓이의 도를 들고 있었는데, 이는 보통 도의 크기를 두 배 가까이 육박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도를 질질 끌며 가고 있었다.

이때였다. 보초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웬놈이야?"

그러나 흑의인은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참다 못한 보초가 들고 있던 창으로 사내를 찌르려 했다.

그러나 그는 흑의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쫘아―!

양단 되어진 보초는 마치 물주머니를 터뜨려 놓은 듯 흥건히 피를 쏟아놓았다.

휙―!

다른 병사 하나는 그 모습에 혼비백산해 미친 듯이 도망쳤다.

흑의인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정 중앙에 자리한 큰 막사를 향해 다가섰다. 그는 마치 자로 잰 듯 일정한 발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가 막사 앞에 서자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라."

흑의인은 서슴없이 막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막사 안, 정 중앙에는 한 사내가 의자에 앉아 있었고, 의자의 옆에는 검이 비스듬히 걸쳐 있었다.

"넌 누구냐?"

중앙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네놈이구나."

그런데 흑의인은 의자에 앉아 있는 사내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게 아닌가?

"묵천!"

의자에 앉아 있던 묵천은 흠칫했다.

"나를 아는 네놈은 누군가?"

그러다 뭔가가 생각난 듯 흠칫 놀라며 눈을 부릅떴다.

"그럼 네놈은 백천우?"

"그렇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했던가?"

백천우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천을 걷어내 버렸다. 그러자 반쯤 일그러진 얼굴이 드러났다. 마치 지옥에서 금방 올라온 악귀와도 같았다.

"재미있는 놈이군. 아직까지도 살아있다니. 누루하치는 어디 있는가?"

묵천은 고개를 저었다.

"너는 그를 찾을 필요가 없어."

"히히히히히......!"

백천우는 미친 듯이 웃었다. 마치 즐거워 미치겠다는 듯이 웃어대고 있었다.

"네놈을 보니 즐겁군. 그래 누루하치는 중요하지 않아. 그럼, 그렇지. 네놈을 죽이고 나서 그놈을 죽이면 될 테니까."

그의 모습은 진정 광인의 그것이었다.

"난 오늘 네놈을 죽일 것이고, 그것으로 내 약속도 끝이 난다. 그리고 내 원한도 끝이 나는 것이겠지."

"그래, 그래! 네놈은 자신이 있는 모양이지?"

묵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아주 좋아."

미친 듯 웃던 백천우가 갑자기 발검을 했다. 그의 도에는 진기가 모여있었다.

찌이익―!

그로 인해 단순히 발검의 동작을 취했음에도 막사는 찢겨져 나갔다.

묵천 역시 검을 집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너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었지."

"대단한 자신감이구나. 그 동안 무공이 많이 늘은 모양이군."

묵천은 백천우를 노려보았다. 묵천의 머리에는 자신의 품에서 죽어간 사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늘 궁금했다."

"뭔가?"

묵천은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그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왜 사부를 암습했는가?"

백천우는 웃었다. 비웃음인지, 아니면 자조의 웃음인지 모를 묘한 분위기가 풍겼다.

"난, 고아다. 그러나 너와는 다르지. 넌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부모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 그들은 버러지 같은 존재였다. 하인이었거든? 그들이 죽은 이유는 간단했다. 주인의 독자에게 화상을 입혔다는 것이었다. 단지 실수로 손에 화상을 입혔던 나의 부모들은 모진 매를 밤새 맞고 죽었다. 나는 어리다는 이유로 그렇게 맞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 부모가 그들에게 죽도록 맞는 것을 봐야만 했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부자는 나의 손에 검을 쥐어주었다. 부모를 죽이면 살려주겠다는 거였지. 난 그들을 죽였다. 관부에서는 은자 몇 푼에 그들이 병사했다고 기록했고 난 그곳을 도망쳐 나왔다."

백천우의 눈은 몽롱해져 있었다. 그는 마치 회상을 하며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나는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지. 그렇다면 최소한 그토록 허무하게 죽는 일은 없을 테니 말이야. 그러다 사부를 만났지. 그는 나에게 힘을 줄 수 있다고 했어. 그래서 그를 따라갔던 것이다."

잠시 말이 끊겼다. 묘한 정적이 흐르고 백천우의 눈에는 이슬이 번져있었다. 붉게 충혈된 그의 눈은 묵천을 향했다. 몹시도 도전적인 눈빛이었다.

"나는 억울했다. 왜 나의 부모가 그들에게 죽어야 했는가? 게다가 내 손으로 그들을 죽여야 했단 말이다. 나는 몹시도 억울했다. 복수를 하고 싶었지. 그러나 사부는 나의 그런 점을 알아주지 않았어. 그저 선(善)이니 도(道)를 들먹이며 나를 회유하려 했지. 그때 나에게 누군가가 찾아왔다. 그가 누구인지는 나도 몰라. 그러나 그는 나에게 힘과 권력을 주겠다고 했어. 그래서 나는 그자를 위해 사부를 암습했다."

백천우는 한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나 역시 좋은 기분은 아니었으니까. 사부를 죽이는 것이....... 하지만 그후 나는 마음 깊은 곳에 악마가 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 무엇이 잘되고 잘못 되었는가?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다. 나는 그 따위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단지 난 날 위해서만 살 뿐이니."

백천우는 살광이 일렁거리는 눈으로 묵천을 쳐다봤다. 검에서는 푸른 살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받아라. 네놈도 사부의 곁으로 보내주마."

파악―!

도가 움직였다. 본시 도는 무거운 것으로 날렵한 검과는 달리 속도[閃]보다는 그 중량(重量)과 힘[力]을 위주로 공격을 펼친다.

그러나 그의 도는 빠르기가 섬전과 같았다.

묵천은 미처 막을 틈도 없었다.

촤앙―!

묵천의 몸은 그 충격에 삼여 장을 밀려났다.

"내 도를 막으려 하지 마라. 이미 나는 무게에 연연하지 않는다. 백이십 근의 이 도도 나에게 깃털과 같은 것이다. 네놈은 빠름이 위주였지. 게다가 이제는 내공을 익힐 수 있는 지경이 아니니 더욱 빠름에 매달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빠름 역시 내공이 뒷받침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다."

묵천은 시종 말이 없었다.

"왜 죽음이 두려운가? 너는 이제 나를 뛰어 넘을 수 없다. 이 세상에서는 내가 최고다. 아는가? 강자만이 느낄 수 있는 이 자유를!"

"아니다. 그것이 무공의 극은 아니다......."

백천우는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하하―!"

그의 웃음만으로도 막사는 갈기갈기 찢어져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고, 주변의 막사들 역시 태반이 넘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주변에 병사나 무사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 넓은 진영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무공의 극, 나는 마교의 무공을 얻었다. 나의 내공은 사 갑자 이상이 되었다. 네가 감히 막을 수 있다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다. 진정한 무적(無敵)은 인자(仁者)다. 용자(勇者)가 아니다. 힘이 중요하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공(空)이다."

백천우는 몹시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너무 두려워 정신이 돈 것인가? 미쳤다. 넌 미쳤어! 아무것도 없는 것이 뭐가 두려운가? 그렇다면 칼을 든 강도보다 아무것도 없는 샌님이 더 무섭겠구나."

묵천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유한 것이 강함을 다스린다. 이것은 진리다."

슝―! 쓩―!

백천우는 넘실거리는 도기를 뿌리며 도를 휘둘렀다.

"크윽―!"

묵천은 그 기세에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감히 나의 도기도 이기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가?"

백천우는 비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이미 묵천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언제라도 눌러 죽일 수 있는 벌레를 두려워하는 자는 없는 법이잖는가!

백천우는 도를 들어 묵천의 목을 겨눴다.

"너는 내 사제였다. 그 예우로 최고의 무공으로 네놈을 죽여주지. 고통은 없을 것이다."

묵천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제 웃을 수 있었다. 사부의 말씀이 생각났다.

'거목보다는 갈대가 되거라. 너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묵천은 백천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전신이 혈광으로 파묻혀 있었다. 그의 도 역시 혈광에 둘러싸여 있었다. 극도로 공력을 끌어올린 모양이었다.

"가라. 세상을 원망하라."

도에서 넘실거리는 혈광은 금방이라도 묵천을 향해 날아올 듯 보였다.

"혈광파천(血光破天), 뇌공무하(雷功無下)!"

붉은 혈광이 깊은 골을 파며 묵천에게 다가섰다.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묵천의 몸을 덮치려는 찰라, 묵천은 중얼거렸다.

"나는 바람이다. 나는 갈대가 될 것이다. 그대는 모른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의 무서움을!"

콰앙―!

천지가 진동을 했고, 그 여파에 거석과 나무들이 그 형태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오십 장 넓이로 먼지가 뒤덮었다.

휘잉―!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그 먼지가 걷히자 드러난 것은 폐허였다. 묵천이 서 있던 자리는 넓은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그러나 묵천은 그 옆에 단정하게 서 있었다.

"어떻게?"

백천우의 눈은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바람에 순응하는 갈대가 되는 것뿐이다. 그대가 나에게 어떤 공격을 해도 나를 쓰러뜨릴 수는 없다. 그대가 아무리 바르게 나를 잡으려 해도 허공을 나는 나비는 유유하게 피하는 법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개 같은 일이! 아니다. 혈광파천(血光破天) 섬전진천하(閃電震天下). 이보다 빠를 순 없다. 죽어라!"

콰앙―!

기묘한 일이었다. 마치 벼락이 천공을 강타하고 지면에 떨어지듯 무서운 속도였다.

그러나 그 속도로도 묵천을 잡을 순 없었다.

그는 무엇을 익혔는가? 어떤 무공을 익혔기에 이토록 기묘한 신법을 구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로 묵천이 구사하는 신법은 강호 하류의 신법이라 할 수 있는 영광도영(靈光道影), 부영유혼(浮影幼魂) 등 이름만 그럴싸한 삼류 신법이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마치 바람 앞의 새털처럼 그의 공세가 미치면 자연스럽게 몸을 띄워 그 공세를 타고 물러서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힘이나 진기 소모를 하지 않았다.

묵천은 백천우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아직 깨닫지 않았는가?"

백천우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그렇지 않다. 이건. 우아아아악―!"

그것은 광인의 모습이었다. 힘의 노예가 된 그에게는 너무도 참을 수 없는 모욕이자 분노였다.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 사실은 쓰레기였다는 것이 밝혀진 자의 기분이랄까?

백천우는 혼란과 함께 분노에 휩싸였다.

묵천은 검을 고쳐 잡았다.

"이제 끝내야 하겠지. 이젠 끝날 시간이야. 백천우, 받아라!"

묵천은 무서운 속도로 달렸다.

아마 이 세상에 그 어떤 천리마를 타고 달려도 지금 그를 따라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미친, 같이 죽기라도 하겠다!"

백천우의 죽음을 도외시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혈광파천(血光破天) 벽력뇌(霹靂雷)! 이 세상에 뇌(雷)보다 강한 것은 없다."

둘의 힘이 부딪쳤고, 천지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진동했다. 풀썩 일었던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았고 두 사람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러났다.

'난 옳았다.'

백천우는 마지막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묵천의 검은 백천우의 목을 관통해 목뒤로 삐죽 나와 있었다.

쩌억―!

소리와 함께 백천우의 머리는 양단 되어 버렸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나 묵천 역시 멀쩡하지는 않았다.

백천우의 도가 묵천의 왼쪽 어깨를 반쯤 베어내고 있었다. 묵천 역시 그 자리에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하늘에서는 한두 개의 눈방울이 떨어져 내리더니 이내 함박눈이 되어버렸다.

*               *               *

신예원은 희야가 쓸 모자를 털실로 짜고 있었다. 이때 누군가가 허겁지겁 들어오는 것이었다.

"궁주, 그가 눈을 떴습니다."

들어 온 자는 의원이었다.

'그가 눈을 떴다고?'

신예원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가슴은 무서울 정도로 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신예원은 불과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마치 십 리를 걷는 것 같았다.

타다다닥―!

그녀는 계단을 뛰듯 내려갔다.

치렁치렁한 옷을 입은 그녀를 뒤쫓는 귀모는 그녀가 그러다 계단에서 구를까 걱정이었다.

콰앙―!

문이 부서질 듯 열리고 신예원은 안으로 달려들었다.

사내는 하얀 천으로 만들어진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의 전신은 진물로 얼룩진 천으로 감싸여 있었다.

둘의 눈이 마주 쳤다.

"아―!"

신예원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터뜨렸다.

'그다. 그 슬픈 듯 보이는 눈빛. 어머니의 눈을 닮았던 그 눈빛. 그래서 이이를 보는 순간 그렇게 가슴이 답답했던 거야. 아!'

둘은 말이 없었다. 단지 방안에는 질식할 것 같은 침묵만이 흘렀다.

"괘, 괜찮아요?"

신예원은 그 동안 그를 만나면 말해야겠다고 생각한 여러 가지 말들 중 가장 형편없는 말을 꺼냈다.

사마적은 그녀를 한참동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두 사람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사막에는 겨울에 비가 내린다. 그 비는 일시지간이지만 사막에 잠들어 있던 생물들을 깨운다.

쏴아아―!

열흘, 비가 내리고 있고 사마적은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미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예전의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일이면 중원은 새해를 맞는 설이다.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폭죽을 터뜨리며 즐거워하고 가족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며 명승고적을 찾아다닐 것이다.

그는 눈을 감았다.

누군가 그의 등을 살며시 짚었다. 그는 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누군지 알았다.

신예원, 그녀는 지난 백 일간 그를 극진히 돌봤다.

썩어 들어가는 상처를 도려내고, 곪아터진 것을 닦았다.

상처를 감싼 천을 갈았고, 움직이지 못하는 그의 대변을 손수 받아냈다.

귀모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시녀를 시키지 않았고, 그녀가 모두 손수 해결했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 무언가를 얘기하며 늘 웃는 모습이었다. 조금이라도 사마적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사마적이 그녀에게 찾아 온 것은 자신이 저지른 일을 조금이라도 속죄하려는 이유였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녀에게 위로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이것을 사람들은 사랑이라 하는가?'

하지만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간신히 이어가고 있었다. 이제야 사랑이란 것을 알아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세상에 미련을 남기긴 싫은데.......'

사마적은 멀리 중원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쏴아아아아―!

겨울을 알리는 빗줄기는 더욱 거세어져만 갔다.



제22장  전신전설(戰神前說)



"그해 겨울이 가기 전 그는 죽었습니다. 그는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품

에 안겨 죽었으니 말입니다."

청년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였다.

두두두두두―! 히히히힝―!

말소리와 마차소리가 들리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삐걱―!

잠시 후, 문이 열리면 일단의 무사들이 갑의(甲衣)를 걸친 채 들어섰다.

그들은 황군(皇軍)이었다. 사십여 명의 무사들이 객점을 둘러쌌다. 모두들 갑작스러운 일에 놀람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태상황 전하가 납신다. 모두들 예를 갖추라."

무사 하나가 들어와 외쳤다. 그러나 그 말을 귀기울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관부와 무림은 서로를 경시하는 풍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태상황이 나서는 것을 보고도 누구하나 예를 표하는 자가 없었다.

"이자들이!"

그 무사가 검을 뽑으려는 찰라, 누군가 말리는 손이 있었다.

"그만 두거라."

"폐하―!"

"이들은 원래 구속되는 것을 싫어하는 자들,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내는 칠순을 바라보는 사내였다.

황금빛의 비단옷을 입고 호화로운 모자와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태상황은 완고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안에 들어서자마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인은 태상황이라는 말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 궁벽한 시골에서 관리라고 해봐야 포청의 포쾌가 전부였다. 그런데 듣지도 보지도 못한 황제가 이곳에 등장하다니!

아마 태상황이란 지위가 얼마나 지고지순한지 계산하느라 바쁠 것이다. 그의 심장이 용케 버티고 있기는 했지만 아마도 마비 직전일 것이었다.

태상황은 품에서 서찰 하나를 들어 보였다.

"나에게 이 서찰을 보낸 자가 누구인가?"

이때 청년이 몸을 일으켰다.

"제가 보냈습니다."

"호!"

태상황은 너무도 젊은 자이기에 약간은 놀라는 듯 했다.

"자네가 이 서찰을 보낸 것이 맞는가?"

"예."

"나를 알고 있었는가?"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랬군. 모두들 내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을 터인데....... 균아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가?"

"아직은 모를 것입니다."

"아직은......이라."

"그 역시 이곳으로 오고 있을 것입니다."

"음!"

태상황은 무사 하나가 끌어내 주는 의자에 앉았다. 청년과 태상황은 마주 앉아 있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의외의 인물이 등장하자 모두들 놀라는 눈치였다.

"아니 자네는 우리에게 이, 흠!"

중추신개는 헛기침을 하며 태상황을 힐끗 쳐다보았다.

"달대대사에게 죽은 것으로 말하지 않았나?"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싱긋이 웃었다.

"제가 전모를 말해드리겠습니다. 잠시 후에 말입니다."

시간이 흘렀다.

모두들 눈을 굴리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얼마나 지났을까?

창으로 밝은 햇빛이 들었다.

이때였다.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응? 뭐가 말인가?"

휘익―!

높고 가는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들렸다 싶은 순간 그 휘파람 소리는 점차 가까워지더니 문 앞까지 순식간에 이르렀다.

문이 열리고 세 사나이가 들어섰다.

세 사나이는 무복을 걸치고 있었으며, 모두 검을 등에 지고 있었다.

"이제야 모든 사건의 등장 인물들이 등장한 것 같습니다."

"그, 그게 무슨 얘긴가?"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전부 진실입니다. 모두가 말입니다."

청년은 그렇게 말하고 잠시 헛기침을 했다.

"험! 그런 사건의 전모에 대해서 말하기 이전 여러분들에게 소개 시켜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방금 도착하신 황제 폐하이십니다. 물론 지금은 숭정제(崇禎帝)께서 황제의 위에 올라 가셨지만, 실질적인 황제는 저분이십니다."

그러면서 복면을 한 세 사나이를 가리켰다. 중앙에 서 있던 사내가 복면을 벗자 오십 전후의 사내가 얼굴을 드러냈다.

"그대는 누군가?"

그러나 청년은 황제의 말을 못들은 것인지, 아니면 듣고도 듣지 않은 척한 것인지, 자신의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곳에는 무황 남태천이 나와 계십니다."

청년은 남궁선 뒤에 단정히 서 있는 표옥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표옥자는 굳은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인피면구를 떼어냈다.

그러자 추정호가 앞으로 나와 남태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추정호는 남태천의 제자였던 것이다.

아까 있었던 무산사괴와의 싸움도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 뿐이었다.

"참고로 표옥자는 벌써 십여 년 전 누구에겐가 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분이 달대대사입니다. 진노 선배님."

"하하하......!"

중추신개는 미친 듯이 대소를 터뜨렸다. 모두들 그를 바라보았다. 중추신개는 자신의 얼굴을 쥐어뜯었다. 그러자 면구 뒤에 숨겨진 얼굴이 드러났다.

감겨 보이지 않는 눈, 주물러 놓은 듯한 얼굴, 뭉툭한 입술, 어떻게 면구로 가려 놓았는지 신기할 정도로 특이한 얼굴이었다.

중추신개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상황에게 배례를 했다.

"황상. 오랜만이시오. 그 동안 신수가 훤해지신 것 같습니다."

그러자 태상황은 밝은 얼굴로 그를 맞았다.

"그 동안 잘 지내셨는가?"

둘은 마치 친구처럼 다정히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런 태상황을 증오의 눈길로 바라보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주익균이었다.

"당신은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태상황은 고개를 저었다.

"균아야! 그 동안 잘 있었느냐?"

"닥치시오. 당신은 죽은 자요. 나에게 아들임을 강요할 수 없소이다."

태상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태상황의 눈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몽롱해졌다. 회한이 가득 담긴 눈이었다.

"모두 내가 지은 업인 것을, 누구를 탓하겠는가?"

청년은 그들 사이에 끼어 들었다.

"그럼 사건의 전말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 모든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사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당시 한 문사의 억울한 사연에서 시작합니다. 그는 억울한 이유로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녀를 모두 잃게 되었습니다."

"그 문천 우문성을 말하는 것인가?"

남태천이 말했다.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전신의 전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사건은 이렇습니다. 우문성은 자신의 가족을 해한 자들에게 복수를 꿈꿉니다. 그래서 우선 천하를 주유하며 무공비급을 모으고 자신의 지식을 이용해 황금을 모읍니다. 그리고는 그 금력으로 천하의 모든 정보들을 사들인 것입니다. 또한 아무도 모르는 세력을 만들어내어 자신의 주구로 이용했지요. 그리고 그는 하나의 계획에 착수했습니다. 그 계획에는 몇 명의 인물들이 필요했지요. 그렇게 해서 그의 손에 걸린 사람들이 바로 사마천인과 남태천, 그리고 총령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상처와 야심을 이용해 적의 칼로 적을 죽이는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 만천과해지계(瞞天過海之計)를 적당히 섞어 계략을 하나 만들어 냈습니다. 바로 무림말살지계(武林抹殺之計)입니다."

청년은 그렇게 말하며 주위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모두들 제각각의 얼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우선 남태천을 통해 증오심을 키우기 위해 무공 비급을 전하기도 하고, 그의 어머니를 죽임과 동시에 그가 좋아하는 소녀를 비참하게 만들어 가장 처절한 비극을 맛보게 해준 것입니다. 남태천의 외숙에게 미혼약을 먹여 두 사람이 관계를 갖게 했고 그 상황을 남태천에게 보게 하였습니다."

청년은 남태천을 바라보았다. 남태천은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후 외숙은 자신이 시비를 건드렸다는 수치심에 그 시비를 팔아버린 것입니다. 그로 인해 남태천은 맹목적인 적의를 갖게 되었지요. 그후 비극이 일어나고 그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모두 우문성이라는 사람에 의해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콰앙―!

남태천이 분개하여 탁자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싸늘하게 물었다.

"무슨 근거인가?"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잠시만 참아주십시오. 그리고 총령을 자신의 수족을 만들어 여러분이 알다시피 남태천과의 경쟁을 유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철저히 총령을 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문성이 계획한 일 단계의 계략이 성공하게 된 것이죠."

이때 태상황이 끄덕였다.

"그후 그가 황궁을 넘보게 된 것이군."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그가 황궁에 눈길을 돌린 것인가?"

태상황이 청년에게 물었다.

"그건 간단합니다. 그가 황궁에 눈길을 돌린 것은 마지막 한 수를 만들어놓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건 막북과 빙궁 그리고 동영 등을 자극해 전쟁과 혼란을 조장하고자 하는 목적에서였습니다. 그로 인해 당금 중원을 혼란에 빠뜨리고 명을 쇠퇴시키기 위한 것이었죠."

"그런데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왜 홍화객을 등장시킨 것이지요?"

남궁선이 물었다. 청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바로 남태천과 총령 사이의 알력을 조금 조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수탑의 후예를 스스로 키운 것입니다. 그리고 한 여인을 교묘히 희생시켜 그로 하여금 남태천과 총령을 상대하게 해서, 중원 내에서의 힘의 견제를 해왔던 것입니다."

모두들 말이 없었다. 하지만 청년의 말이 끝날 때마다 그들의 얼굴에는 경악이라는 말이 옳을 정도의 표정이 어렸다.

"그리고 그들의 힘에 불균형을 주어 무너뜨리는 역할은 백천우라는 자를 이용했던 것입니다. 이는 모두 한 천재의 간악한 계획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후 우문성은 바로 전신의 전설을 찾았습니다. 이 모든 계략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도 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황제는 태상황을 힐끗 쳐다보더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럼 우린 모두 그자의 손에 놀아난 것인가?"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태상황이 죽음을 가장해야 했던 이유는?"

주익균은 청년에게 말했지만 사실은 태상황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청년은 달대대사를 바라보았다. 태상황은 눈을 감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달대대사가 대답을 했다.

"바로 자네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기 위해서였지. 실지로 황상과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그는 죽음을 가장해 시골에 작은 암자를 지어 은둔해 있었던 것이네."

"그런데 왜 나타난 것입니까?"

황제는 따지듯 태상황에게 물었다.

"저 청년의 서신을 받았다. 그는 이 모든 사건을 적으며 명의 미래를 위해 꼭 나서야만 한다고 했다. 이곳은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 위에 할아버지가 피땀을 흘려 이룩한 나라이다. 그런데 내 대에서 무너뜨릴 수는 없다. 그대에게 묻겠다."

태상황은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는 전신의 힘을 얻었는가?"

청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는?"

"제 이야기들은 이곳에 묻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기억으로 모두 끝이 나야 합니다. 누구에게도 전해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궁벽한 산골을 택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우문성이란 자는 어디 있는가?"

청년은 구석에 앉아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주인을 가리켰다.

"저자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몰렸다. 하지만 모두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저자를 죽일 이유가 있습니다. 모두 말입니다. 그리고 저자 역시 우리의 목을 베려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이때였다. 밖에서 누군가가 걸어 들어왔다.

"당신이었군."

그 사내는 휘장이 걸린 검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가 나타나자마자 쌍마령이 그의 앞으로 달려가 부복을 했다. 이 사내가 바로 쌍마령을 키운 자였던 것이다.

"총령."

남태천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살아있었구나."

"그럼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줄 알았나? 난 단지 저자를 불러내기 위해 시간을 끈 것 뿐이야. 그런데 이십 년이라는 시간이 걸릴 줄은 나도 미처 몰랐지."

남태천과 총령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을 때, 청년은 고개를 주인에게로 고정시키고 있었다.

"이제 그만 정체를 드러내시지."

"후후후후......."

주인은 음산히 웃으며 자신의 인피면구를 벗었다.

"그래, 다들 모였군."

"우문성!"

청년이 외쳤다.

"네놈이 이곳에 나타날 줄 알았다."

청년을 바라본 우문성은 놀리듯 물었다.

"그런데, 자네는 나를 어떻게 알았는가?"

"후! 나는 당신의 손을 봤다. 당신의 손은 숯이 묻어 있지만 엄지와 검지 사이에 굳은살이 있었다. 그리고 이 젖은 나무 바닥을 딛는 데도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더군. 그리고 내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오직 당신 하나뿐이었어. 당신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얘기거든. 그렇지 않은가?"

"그랬지. 지루하더군."

태상황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왜 당신은 그런 일들을 벌인 것이오?"

이곳에 있는 누구라도 하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우문성은 웃고 있었다. 그의 눈은 특이하게 흰자가 없었다. 검은자만으로 이루어진 눈을 하고 있었다.

"권력은 인간을 병들게 하고 인간은 타락했지. 그래서 나는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없애고 세상을 정화하려 한 거지. 신 인류를 만들어 모든 것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말이야."

"미친!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우문성은 자신 만만하게 소리쳤다.

"가능하다. 그것은 본좌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광오하구나!"

"아니 나의 능력이면 이 세상의 모든 타락한 자들을 사라지게 할 수 있지. 그 첫 번째가 바로 너희가 될 것이다. 지금껏 나는 내 스스로는 피를 보려하지 않았다. 나의 마성이 폭발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대들은 죽어야 한다. 그후 나는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이때 총령이 나섰다.

"전신의 능력을 얻은 네놈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지만 네놈을 없애주겠다. 던져라!"

와장창!

이때 밖에서 창을 부수고 무언가가 날아왔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닌 십여 개에 달했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폭뇌화(爆雷火)다!"

폭뇌화.

이 작은 구슬만한 폭약 한 알이면, 십 장의 지면이 모두 타버린다. 한 시진동안 꺼지지 않은 지옥의 불길로 그 위력은 상상 이상이다.

만든 자는 알려져 있진 않지만 그 위력만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전설의 병기(兵器)이다.

콰콰콰콰쾅―!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누군가의 외침 소리와 함께 모두들 빠져 나와 있었다.

총령이 외쳤다.

"그자는 죽었는가?"

모두들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저기!"

불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우문성이었다.

그 엄청난 화염 속에서도 그는 털끝 하나 그을리지 않았다.

"후후후! 우습군. 나를 그따위 어린애 장난감으로 죽이려 했다니. 나는 전신 따위와는 다르다. 그자는 마음이 약했어. 그러나 난 다르다. 마음을 죽였다. 이제 너희들에게 장송곡(葬送曲)을 들려주겠다."

"휘익―!"

총령이 휘파람을 불자 포진해 있던 삼백 명의 무사들과 쌍마령이 포진했다.

"휘익―!"

이번엔 남태천이 또다시 휘파람을 불자 소림의 승려들이 포진해 섰다.

모두 백팔 명으로 그들은 우문성을 중심으로 그 유명한 백팔나한진이 펼쳐졌다.

"나는 네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가소로운 것들!"

스륵―!

우문성이 움직였다. 아니 흐릿한 그림자가 잠시지간 스쳤고, 우문성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니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크윽―!"

"컥!"

순식간에 삼십여 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쳐라!"

백팔나한진이 발동을 했다. 천 년의 역사를 두고 단 한번도 무너지지 않았던 중원사상 최고의 진이었다.

"용등천리(龍騰千里) 해운망망(海雲茫茫)."

백팔 명이 하나같이 기합을 넣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해처럼 부딪쳐 우문성을 가두려는 찰라였다.

"좋다. 어디 부딪쳐 보자."

백팔 명과 한 사람의 충돌이 일어났다. 그러나 결과는 소림의 패배였다.

소림의 대부분의 승들은 중상을 입고 나가 떨어져 있거나, 아니면 죽음을 면치 못했는데 반해 우문성은 겨우 내상을 조금 입은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크흐흐......."

우문성은 웃고 있었다. 남태천이 소리쳤다.

"모두 함께 덤빕시다."

절망적이었다.

"대단하다. 진정 대단해."

서로 원수였던 남태천과 총령, 남궁선, 쌍마령의 휘지와 휘소에 황제와 태상황, 그리고 달대도 나섰다.

"적이 내상을 회복하기 전에 공격합시다."

"삼비박룡(三臂博龍)!"

"천풍지뢰(天風地雷)!"

"뇌화요진(雷火搖振)!"

모두들 자신의 최상의 절기를 사용해 우문성의 요혈 등을 공격해갔다.

그러나 두 손으로 대해(大海)를 담을 수 있으며, 숟가락으로 태산을 옮길 수 있겠는가?

쩌억―!

총령과 쌍마령은 마치 비단 천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양단 되어 날아가 버렸다.

"크윽―!"

"커억......!"

그들에게는 불가항력이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다른 자들은 모두 중상을 입은 채 나뒹굴었다.

"모두 죽인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과 싸웠음에도 우문성은 호흡이 흐트러짐조차 없었다. 그는 가장 가까이 쓰러져 있는 남궁선에게 다가갔다.

"가랑이를 찢어주마. 계집!"

남궁선은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우문성은 그녀의 발목을 잡고 거꾸로 들었다. 그의 말대로 그녀를 찢어 죽이려는 것 같았다.

"캬아악!"

그녀는 어느새 혼절해 버렸고,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때였다.

"잠깐!"

청년과 흑의인이었다. 흑의인은 청년의 옆에 앉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바로 그자였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이 둘이 나서는 것이었다.

"한 사나이가 있었다."

갑작스런 말에 우문성은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은 그런 우문성을 향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가 되기로 했었지.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공을 찾아 세상을 떠돌았고, 그대와 같은 장소에 들게 되었다네. 그래서 혈마(血魔)의 무공을 배우게 되었지. 천하제일이 된 그는 살성이 되어 세상을 누볐고, 그를 당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죽인 자들을 돌아보다 깨달음을 얻었다.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은거에 들어갔지......."

우문성의 눈은 검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차갑고 투명하게 보이는 눈이었다.

"그리고 그는 또 다시 나타날 자신 같은 사람을 위해 무공을 창안했지. 그가 바로 전신이오!"

"넌, 누구냐?"

"난 사마희라는 이름을 갖고 있소. 그리고 이 사람은 묵천이란 이름을 갖고 있지."

청년이 이름을 밝히자 검은천의 여인들이 그의 뒤에 가서 포진을 했다. 그녀들은 신천궁에서 나온 여자들이었던 것이다.

순간 우문성의 아미가 좁혀졌다.

"너는 사마적의 아들이냐?"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재미있군. 나를 막겠다는 것이냐? 그래서 네놈이 전신이란 자의 무공이라도 이었다는 말투로구나."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좋다. 오늘 통쾌하게 붙어보자."

우문성은 전신의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전신 모공에서는 묵광이 뿜어져 나와 전신을 휘감았다.

산 전체가 미친 듯이 몸을 떨었다.

우르릉―!

우문성이 움직이 자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렸다.

"세상을 끝내주마. 살아있는 인간들은 본좌를 경배하게 되리라!"

우문성의 외침이 터졌다. 그리고 그의 전신은 검은 구름처럼 변해버렸다.

"이젠 끝낼 때도 된 것 같소."

사마희와 묵천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희미하게 웃고 있는 듯 했다. 그렇게 눈짓을 주고받더니, 두 사람 역시 자신들의 검을 들었다.

그러고는 온몸을 던져, 그 묵광 속으로 맞부딪쳐갔다.

콰앙―! 번쩍―!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렸고, 그 묵광 속에서 섬광과 검음이 울렸다.

그리고 그후 이야기에 대해서는 아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 천 명의 무사로도 막을 수 없는 희대의 마인이 있었고, 그가 세상을 멸망시키려 할 때, 두 명의 협객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막았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왔다.

장강 상류에 자리한 풍뇌촌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전설에 귀기울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전설일 뿐이므로.......



                                              (끝)

무림실록(武林實錄) 전신전설(戰神傳說) 제17장~제19장 - 내가위





제17장  그림자(影)



황제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닌 듯 했다.

허공에 대고 무언가를 읊조리는 것이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의 앞에는 흐릿한 그림자가 불빛에 어른거리는 것이 아닌가?

마치 귀신이라도 나온 것 같았다.

"그래. 자네의 계략대로 하면 이번 일은 손쉽게 풀 수 있다는 말이지?"

그러자 그림자는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제 말대로만 하시면 황제폐하께오서는 그저 앉아 굴러 들어오는 떡을 집으시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럼 자네의 뜻대로 하지."

"감사합니다."

스르르륵―!

그림자는 바람결에 날리듯 날려 천장의 틈을 뚫고 사라져버렸다.

황제는 일어서 삼 보쯤을 내딛었다.

그의 걸음소리는 기이했다.

퍼석―! 퍽―!

바닥에는 그의 선명한 족적이 그려졌고, 황제는 그림자가 사라진 천장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황제인 그 역시 무공을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의 주변을 맴도는 호위들조차 그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옛말에 오지랖 넓은 쥐새끼가 제 할일 못한다고 했던가? 영리한 척하는 녀석치고 변변한 놈이 없단 말이야. 흐흐흘."

휘익―!

황제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치는 순간 무언가 튀듯 도망가려는 물체가 있었다.

콰앙―!

내전의 벽이 부르르 떨렸다.

"후! 대단하군,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니."

물체는 바닥에 내려서며 사람의 형체를 이루었고, 내려섬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어찌 궁궐이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되었지? 네놈의 정체는?"

"알 것 없다. 주군은 당신을 죽이라는 명을 내렸고 나는 그 명을 따르는 것뿐이다."

황제는 그의 말을 비웃고 있었다.

"우습군, 그래, 어디 한 번 네 실력을 보자."

우두둑―!

황제가 주먹을 쥐자 뼈마디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 모양의 물체는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서서히 어둠 속에서 그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검은 인자복장에 창을 들고 있었는데, 창은 잠행이나 암습을 전문으로 하는 인자들에게는 그다지 좋은 무기가 아니었다.

쉬익―!

뱀이 혀를 마는 소리가 들리고 그와 동시에 황제는 철포삼(鐵袍衫)의 형식으로 소매 끝에 빳빳한 강기를 넣어 날아오는 미세한 쇠침을 걷어냈다.

"매우 악랄한 수법이구나."

하지만 황제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있었고 곧,

웅...... 우웅! 웅―!

하는 벌 우는 소리와 함께 황제의 몸은 부풀어올랐다. 황제의 소매는 마치 강철 철판이 된 듯 날카롭게 변해버린 것이다.

"허억―! 반야대불승천공(盤若大佛乘天功) 천축의 무공이? 크아악―!"

그 사내는 일수에 양단 되어 버렸다. 황제는 돌아서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살기에 찬 어조였다.

"흥! 누루하치. 네놈이 서서히 마수를 드러낸단 말이냐? 용서하지 않겠다."

갑자기 내전에 한기가 도는 듯했다.

*               *               *

풍야후, 그는 지난 석 달간 많은 번뇌와 고민을 했다.

그러나 그의 고민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권력과 힘을 숭상하는 자들이 그의 뒤에서 중원을 쳐야 한다고 외치며 그의 결단을 촉구하였다.

아마 이번 결정에 의해서 그는 그의 수하들과 달단의 백성들에게 재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가 늙은 호랑이인지, 아니면 아직도 천하를 호령하는 용인지에 대해서 그들은 벌써 이러쿵저러쿵 해대고 있었다.

그러나 풍야후는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내가 일어서면 내 어린 백성들이 피를 흘리게 된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젊은 시절 나는 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무고한 자들의 피를 흘리게 했었다. 또 다시 일어선다면? 중원은 강하다. 우리의 힘으로 그들에게 타격은 줄 수 있을지언정 그들에게서 승리를 빼앗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우리 전사들의 피를 흘리게 한 자들에게 관대할 수는 없다. 허허허허....... 내가 늙었단 말인가? 이토록 생각이 많아지다니. 예전 같았으면 단숨에 창을 휘두르며 달려갔을 터인데.'

풍야후는 광활하게 펼쳐진 대지를 훑어보았다.

자신이 태어나 자라고 이제는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곳, 그는 이곳의 지배자이자 절대자였으며 신앙이었다.

그는 이 대지 위에 사는 이들에게 무언가를 해줘야만 할 의무가 있었다. 더 풍요롭고 더 따뜻한 삶을 영위하게 해줘야 하는 것이다.

기름진 대지가 겨우 산 몇 개만 넘으면 자리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명분은 세워진 것이다.

중원의 세력이 달단의 전사들을 죽였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그 세력이란 황제의 군사들이니 이보다 더 좋은 명분은 없는 것이기에 풍야후는 고민하고 있었다.

마치 잘 차려놓은 잔칫상을 받은 거렁뱅이 같은 처지랄까? 뜻하지 않은 행운에 자신도 어쩔 줄 몰라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만약 잘못 건드렸다가 주인에게 몰매를 맞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건들지 않고 바라만 보기에는 너무도 잘 차려놓은 밥상이 아닌가?

풍야후로서는 여간 난처한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다.

만약 자신이 여기서 주저한다면 이는 분명 백성들에게나 군신들에게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과도 같았다.

달단은 철저한 힘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끝을 추측할 수 없이 광활한 벌판에서 목축만을 하며 살아가는 유목민들이었기에 이들의 습성은 강함을 좋아했다. 강하지 않은 것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비호하지 않았다.

강함은 위엄이고 힘이며 명예였던 것이다.

바스락―!

누군가 풍야후의 뒤에서 다가서고 있었다.

이 달단에서 그의 허락을 받지 않고 뒤에 설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도 이곳은 스무 겹이 넘는 철통 같은 방어지역이었다.

하지만 그녀만은 가능했다. 가벼운 발소리의 주인공은 풍야후의 애첩 추양(秋陽)이었다.

추양은 풍야후와 삼십여 년의 세월을 같이 동고동락(同苦同樂)한 여인으로 지금도 그의 말이라면 풍야후는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후야! 왜 이 야심한 밤에 나와 계신 겁니까?"

"추양, 왜 이 밤에 자지 않고 나왔소?"

둘이 동시에 같은 말을 했다. 둘은 고소를 머금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둘 사이에는 훈훈한 바람이 불었다. 풍야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글쎄, 잠이 오지 않는구려. 문득 먼저 이 세상을 등진 동지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

풍야후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쉬 말을 잇지 못했다.

"나도 늙었나 보이......."

"호호호. 후야! 어찌 그런 말을 하시는 것입니까? 후야의 마음을 모두 알지는 못하지만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어린 백성들이 피를 흘릴까봐 염려하신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후야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중원을 그리워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들은 후야가 망설이는 걸 원하지 않는답니다. 당신의 명이라면 기꺼이 피를 바칠 테니까요. 중원을 향해 내달리세요. 후야는 중원 고국 땅에 뼈를 묻고 싶다는 말을 하신 적이 있질 않습니까?"

풍야후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

실로 오랜만에 볼 수 있는 웃음이었다.

"그래, 그랬지.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중원인이라니, 그렇다면 중원인의 몸으로 달단의 지도자가 되었단 말인가?

철저히 자신들의 민족으로만 이루어져온 이 달단을 지배하는 자가 중원인이었다는 것은 실로 놀랄만한 일이었다.

그렇게 놀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들은 소수민족들 이 기에 절대로 상대를 믿지 않는 종족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이들은 영토가 없는 대신 동물들이 재산이고 모든 것이다. 이들의 물욕이란 것은 얼마나 많은 말과 양, 그렇지 않으면 소를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가려지는 것으로 상대의 동물을 빼앗는다든가 하는 일은 흔한 것이었다.

이 광활한 대지에 법이란 것이 존재하며 그 누가 집행하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민족들은 물론 타민족까지도 철저히 믿지 않는 습성이 있었다.

칠 푼의 마음은 드러내고 삼 푼은 숨겨두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도자로 타민족을 두었다는 것이 믿을 수 없는 일임은 당연했다. 그것은 풍야후가 이들에게 얼마나 헌신적으로 대하고 또 믿음을 주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나의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을 손꼽았었지. 이만하면 나도 남아다운 삶을 살았으니 무엇이 두렵겠는가? 그래, 전쟁터에서 죽는 것은 무사 최고의 행운이다. 나의 생을 모두 이곳에 쏟겠다!"

풍야후는 드디어 자신의 마음을 결심했다.

'가겠다. 중원으로! 나를 버린 그곳에서 죽는다 한들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풍야후는 추양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그녀도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흰머리가 몇 가닥 보이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서른이 갓 넘은 아낙의 모습이었다.

아름답지는 않지만 대지의 여인처럼 항시 풍요롭고 넉넉함이 배어있는 여인, 풍야후의 입술은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풍야후는 문득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여인밖에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폭풍전야의 밤은 지나가고 있었고, 천 리의 거리를 두고 떨어진 한 곳에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가 있었다.

*               *                *

한 사람을 시름에 들게 하기에는 달빛이 너무도 좋았다.

이백은 달빛이 좋아 술잔을 들고 호수에 뜬 달빛을 향해 달려들었다가 죽었다니 않는가?

그러나 상념에 찬 사람에게는 달빛이란 너무도 사치스러운 존재였다.

군막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이곳은 조선국과 명의 국경을 이루는 곳이었다.

멀리 백두산이 내려다보고 있는 이곳에는 모두 삼십만의 장병들이 주둔해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비밀리에 진행되어 왔기에 이곳에는 실지로 삼천의 병사들이 있는 것으로 황궁에는 보고되고 있었다.

이는 공식적인 것으로 공문에 보관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이곳에 병사가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오 년 전부터의 일이다.

이곳은 조선과 달단, 명이 인접한 곳으로 항시 전운이 감도는 곳이었다. 그러나 삼십만의 병사까지는 필요치 않은 곳이었다.

이 사실만 보아도 누군가가 고의로 사병을 키우고 있음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군막의 가장 위쪽에 자리한 막사에는 한 사나이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가 죽은 것, 이는 명의 배반 때문이었다. 만약 나의 아버지가 명의 출신에 벼슬아치였으면 어떠한 경우라도 구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죽어 가는 나의 아버지를 버려 두었다. 그것도 성을 함락하기 위해 선봉에 서서 적과 맞서 싸우던 나의 아버지를 그들은 헌신짝처럼 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는 죽음을 맞게 되었다. 그것도 전쟁터에서 죽은 것이 아닌 불명예스럽게도 불에 타 죽은 것이다. 이는 나의 아버지가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가!"

그는 널찍한 탁자에 홀로 앉아 자작(自酌)하고 있었다.

벌써 여러 순배의 술을 들었는지 이미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만은 하늘의 유성보다도 더욱 빛나고 있었다.

"나는 강자가 될 것이다. 아니 나의 후예들은 강자가 되어야 한다. 오로지 강자만이 살아 남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철저히 강자가 되어서 진정한 지배자가 될 것이다."

이렇게 힘을 주고 말하고 있는 사나이는 바로 누루하치였다.

그는 대해와 같은 야망과 그 무엇으로 채워도 채울 수 없는 포부를 지니고 있는 사내였다. 그는 이미 저 멀리 중원을 동경해 왔고 이미 그 곳을 향해 한 걸음 내딛은 상태였다.

이미 중원에 자객마저 보내놓은 상태였고, 황제와는 힘의 대결에 들어갔다. 어느 정도의 계략(計略)을 성공시켜놓은 상태였다.

대막은 서서히 그 모습을 일으키기 시작해서 곧 중원을 위협할 것이고 또한 무림은 중원과 황제를 극도로 혼란스럽게 만들어놓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과 조선은 이미 전쟁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

군막은 고요함에 휩싸여 있었다.

이때 누루하치의 앞에 한 사내가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는 무사인 듯 갑의를 걸치고 있었고, 그의 허리에는 어른 팔뚝만한 철봉이 매달려 있었다.

"주군, 우리의 자객이 실패했습니다."

누루하치는 느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응은 어떤가?"

"아무런 변화도 없었습니다. 황제는 여전히 집무를 보고 있다고 하며, 동창이나 서창, 영반 등에서도 작은 움직임 하나 없었습니다."

누루하치는 흥미로운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래? 그런데 손님들은 당도하였느냐?"

"예. 지금 밖에 대령해 있습니다."

"그래! 들어오시라고 해라."

사내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두 사내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는 조금 전 누루하치의 앞에 나타났던 사내였고, 다른 하나는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사내였다.

갸름하며 체구가 작았다. 또 얼굴은 하얗게 횟가루를 칠한 듯 보였다.

누루하치는 술을 들이켰다.

"살기가 너무 짙군."

누루하치가 친구에게 말하듯 가볍게 한 마디 했다.

"당신의 주위에는 모두 다섯 사람이 포진해 있소."

무슨 소리인가? 지금 누루하치의 주변에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네의 이름은?"

"하지모도 도가지, 히데요시님의 전령입니다."

"그래......."

그런데 분명 하지모도의 말로는 그의 주위에 다섯의 무사들이 포위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누루하치의 이 느긋함은 무엇인가?

게다가 하지모도는 뭔가 불안한 표정이었다.

"나를 죽일 셈인가?"

죽임의 위협을 받고 있는 누루하치의 표정은 너무도 무덤덤했고, 오히려 칼자루를 쥐고 있는 하지모도의 이마에서는 점점 굵은 땀방울이 맺혀가고 있었다. 그는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이는 우리 주군의 명이었습니다. 당신을 시험해 보라는......."

그러나 누루하치는 그의 말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 했다.

"그래, 이것이 동영의 인자술인가? 제법이군. 그러나 너희 섬나라의 무공 따위로 중원을 넘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순간 하지모도의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수치감으로 일그러졌다.

"그래, 풍신수길은 나에게 뭘 전하라 하였나?"

"주군은 이 상자를 저에게 주시면서, 당신의 주위에 단 한 명의 군사도 보이지 않으면 서찰과 함께 전해주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모도는 품에서 작은 상자 하나와 밀봉되어진 천 조각을 건넸다.

그런데 누루하치는 웃기만 할뿐 그 상자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우선 자네의 그 알량한 수하들이나 치우게. 나도 이 물건을 쓰기는 싫으니까."

누루하치는 자신의 검을 툭 치며 말했다. 하지모도의 얼굴에 다시 식은땀이 맺혔다.

"예."

그러자 다섯 명의 흑의인들이 모두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내더니 누루하치에게 읍을 해 보이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러자 누루하치는 웃으며 자신의 오른손을 흔들어 보였다.

"자네는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야."

누루하치의 손에는 눈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는 실이 걸려 있었는데 그 실은 이미 하지모도의 목을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실은 천잠사로 그 날카롭기가 세상 어느 것도 따를 길이 없어 바위도 자를 지경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누루하치가 아무도 모르게 이 실을 하지모도의 목에 걸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하지모도 역시 알고 있었던 듯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감사합니다."

하지모도가 감사의 인사를 하는 순간이었다.

누루하치는 하지모도의 목에 걸린 실을 잡아당기는 것이 아닌가? 문약한 서생인 하지모도의 목이 금방이라도 잘려 나갈 듯한 순간이었다.

휘익―!

그러나 바람소리와 함께 하지모도는 인사를 끝내고 서너 걸음 엎드린 자세 그대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이는 부양공(浮揚功)보다도 한 단계 위의 무공이었다.

앉은 것도 아니고 엎드린 자세 그대로 뒤로 물러날 수 있다니 범인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무공수위였다.

"이제 정체를 밝히셔도 될 터인데 끝까지 숨기려 드는군. 어떠신가? 풍신수길, 아니 히데요시라 불러야 하겠는가?"

너무도 놀라운 말이었다.

일본을 통일한 장본인인 이 풍신수길이 이역만리 타국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그는 당대 최고의 효웅들 중 하나가 아닌가?

하지모도는 누루하치를 향해 씩 웃어 보이며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원숭이를 닮은 우스꽝스러운 얼굴에 작고 왜소해 보이는 모습, 그러나 그와 반대로 폐부를 꿰뚫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이 드러났다. 그것은 그가 분명히 풍신수길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군. 어떻게 나를 알아 봤는지 가르쳐 주겠나? 나로서는 이번 변장이 아무도 못 알아볼 것이라 자부하는 최고의 작품이었거든."

"그거야 자네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세 때문이었지. 단순히 심부름을 할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고 할까? 그리고 그 눈빛은 아무나 보일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 아무리 얼굴을 가린다고 해도 무형 중에 뻗어 나오는 기운과 눈빛만큼은 가릴 수가 없는 법이지. 자신의 얼굴을 숨기고 나의 진영 안까지 발을 디딜만한 간담을 지닌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자네가 들어서는 순간부터 자네가 바로 풍신수길이라는 걸 눈치 채고 있었네."

"허허허허. 대단하시오. 그렇다면 온 이유도 알고 있겠구려."

누루하치는 풍신수길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이제는 조금쯤 마음을 서로에게 보여도 되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는 적이라기보다는 동지라는 것이 많지. 이 시대는 우리를 서로에게 의지하도록 만들고 있다네."

풍신수길은 너무도 친근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소.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소. 나는 대일본을 이룩한 후 많은 시달림을 당하고 있소. 나를 시기하는 자, 나의 권좌를 노리는 자들 말이오. 이번 전쟁을 정책적으로 이용할 것이오. 그러나 나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일으키는 전쟁은 아니오. 중국을 친다는 명분 아래 우린 조선을 정복하려는 것뿐이오."

누루하치는 작달막한 사나이,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거인보다도 커 보이는 이 사나이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왜 조선을 정복하려는 것이오?"

"조선인들은 대단한 혼을 지니고 있소. 물론 지금은 부패하고 철저히 타락했지만 말이오. 그 말도 안 되는 양반이란 족속들에 의해서 썩어 들어가고 있지만, 나는 조선이 두렵소. 그들은 언제고 우리 일본을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소. 그래서 생각한 것이오. 내가 먼저 그들을 철저히 지배하기로 말이오."

"그것이 아닐 텐데, 내가 알기로는 신흥세력의 힘이 커지자 당신은 대륙정복을 빌미로 국내를 안정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들었어. 아마도 이 기회를 이용해 국내의 적들이나 반대 세력들은 모두 제거되겠군."

"그런 측면이 있다는 것도 부정하지는 않겠소."

풍신수길은 당당히 수긍했다.

"그러나 내 진정한 목적은 조선의 기를 꺾자는 것에 있음을 알아두어야 할 것이오. 아마도 당신 역시 대단한 야망이 있을 테니....... 강인한 혼을 지닌 부족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누루하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조선을 가벼이 보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 예로 그가 지금 사용 중인 식기나 술잔 하나까지 모두 조선과 고려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순박하고 표현하지 않으며 절제되어진 그들의 문화를 보고 그 역시 묘한 불안감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들이 저력이 있기에 지금 당장은 어떨지 모르더라도 그들 나름대로의 문화를 가꾸었고, 이미 그것은 대단한 지경에 이르렀으리라.

그러나 정작 그들 자신들은 모르는 듯했다.

양반들은 그런 자신들의 문화를 업신여기며 착취를 했고, 이미 많은 부분이 그로 인해 사라지거나 제대로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럼 나에게 원하는 것은?"

풍신수길은 누루하치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군대를 막아주시오. 우리가 조선을 정복하면 그땐 당신들을 돕겠소. 당신에게도 조선이 껄끄러운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소. 만약 이대로 당신이 중원을 노린다면 틀림없이 조선과 명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오. 아직도 표면상으로는 조선이 황제의 훌륭한 신하이기 때문이오. 이점은 나보다도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누루하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깊어가고 두 사람의 밀담은 길게 이어졌다.

마치 수 년 만에 만난 친우를 대하듯 서로를 향한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친근하고 격식이 없었지만, 그들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서로를 향해 깊은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새벽 동이 터 올 무렵 풍신수길은 조용히 그곳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이들이 만났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 두 사람의 밀담에 관계한 모든 자들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               *               *

"나는 각기 사람에게 그 뒤를 따르는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군요. 그 그림자는 그 사람의 인격일 수도 있고, 욕망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욕심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풍신수길과 누루하치는 서로의 야망을 위해 뜻을 같이 했던 것이오. 나는 그 욕망의 그림자가 때로는 그 주인마저도 져버릴 때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청년이 말을 하자 그 앞에 앉아 있던 남궁선이 입을 열었다.

"인상적인 말이군요. 그리고 뼈가 들어있는 말이기도 하구요. 그렇지요. 그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 되든 그 결과를 떠나서 어느 쪽 한곳으로 치우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르기도 하는 것이기도 하구요.

또한 그로 인해 인생을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자신의 세력을 갖고 있고 그들 스스로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나름대로 남궁선의 말을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렇습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나의 얘기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옳지 못한 거래를 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끝 역시도 좋지는 않았구요."

"끝이 좋지 않았다니?"

"그들은 나중에 서로를 배반했습니다. 권력에 집착한 자들의 필연적인 결과였지요. 어차피 그들은 서로를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거든요. 서로를 이용해 먹기 좋은 상대로밖에 생각하지 않았겠지요."

"그보다 사마적을 떠난 호귀라는 자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졸고 있는 듯 보였던 중추신개가 게슴츠레 눈을 뜨며 말을 꺼냈다. 청년은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듯이 탄성을 터뜨렸다.

"아! 그렇군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빠뜨렸군요."

"그자는 사마적을 떠나서 남태천의 목을 베러 갔지. 우리는 거기까지 자네에게 들었네, 그 후는 어떻게 되었는가?"

남궁선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그러나 이내 잔잔히 가라앉았고, 그 모습은 너무도 차분하고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그렇지요. 호귀라는 자는 욱하는 성질은 있었어도 바보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기회만을 노리며 남궁세가의 주변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선 자객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암습을 감행하지는 않았고, 남태천과의 비무를 원했던 것입니다."

"비무라......."

"예."

중추신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답군. 그러나 그의 무공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무모해. 남태천은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인 아닌가? 정당한 비무라니 제정신이 아니구만. 그 당시만 해도 그는 이미 인간의 능력 범주를 벗어난 사람인데......."

"글쎄요. 길고 짧은 것은 대보아야 아는 것이지만 우선 그자는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기회라는 것을 잡게 된 것입니다."

*               *               *

스산한 바람이 단풍나무를 훑고 지나가자 나무의 잔가지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천공의 달빛은 두터운 구름 속에 갇혀 나올 줄을 모르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두텁고도 긴 담장이 늘어서 있고 그 담 안으로는 간혹 보초를 서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와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것으로 어느 정도 수련을 한 자라면 곳곳에서 은근히 배어 나오는 살기를 몸으로 느낄 수가 있을 것이었다.

이때 담장 위에서 어른거리는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 누가 감히 남궁세가의 위세에 도전하려는 것인가? 그러나 그림자는 예상과 달리 담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담 밖으로 나서는 것이었다.

이는 한밤중의 괴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 그림자가 담 밖으로 나서자 뒤를 이어 또 다른 그림자 셋이 그 뒤를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이 세 그림자는 몸놀림이 신중한 것이 마치 앞의 그림자를 미행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산그늘 속으로 몸을 숨겼을 때, 담의 한 귀퉁이가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이는 은신술로 담과 같은 색의 포대를 뒤집어쓰고 누군가가 담에 기대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 포대를 젖히고 나타난 사나이는 호귀였다.

"남태천, 그런데 남태천을 쫓는 저들은? 어쨌든 기회다."

호귀 역시 그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날렸고 이내 그의 몸 역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산의 중턱, 죽은 자의 묘가 군데군데 보이는 공터였다.

하지만 묘는 비바람에 씻겨 사라진 듯, 제대로 된 형태를 찾아볼 수 없었고, 단지 무성한 잡초와 공지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중앙에는 빈터를 지키듯이 겨우 형체뿐인 비석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 네 명의 사내들이 서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기이한 것이, 정 중앙에 한 사내를 두고 포위하듯이 세 사나이가 서 있었다.

그들 중 두 사나이는 검을 뽑지 않았고, 다른 한 사나이만 남태천과 대결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다른 사내들은 검을 뽑아 들고 서 있지는 않았지만 남태천을 둘러싸고 위협하듯 그렇게 서 있었다.

남태천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여유있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나를 이곳까지 불러낸 이유는 무엇인가?"

"총령의 명이다."

"호오?"

"그대는 총령의 믿음을 져버렸다."

"그래서? 자네 이름은?"

"흑사(黑蛇)."

"검은 뱀이라....... 멋있는 이름이군."

흑사는 말이 없었다. 다만 입가에 자신에 찬 미소를 흘릴 뿐이었다.

"시작할까?"

남태천은 사내의 미소를 의미 있게 바라보며 자신의 검을 고쳐 잡았다.

파악―!

남태천의 검이 허공을 가르자 흑사라 칭한 사내는 가볍게 뒤로 일보를 물러섰다. 아슬아슬하게 남태천의 일검을 피해낸 사내는 왜인지 반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휙―! 휘익―!

허공을 가르는 검음(劍音)이 날카롭게 울렸고 순식간에 십 초식이 시전됐지만, 남태천은 흑사의 몸에 단 하나의 검흔조차 남기지 못했다.

남태천은 검을 거두어 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군. 네놈들이 누군지 이제야 알겠다."

"그래?"

흑사는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흥! 네놈들은 총령의 그림자, 흑상제(黑上帝)라 불리는 삼인방이다."

흑사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하하, 너야말로 정말 대단하군. 우리는 여태껏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었는데도 우리를 알아채다니."

"당신의 무공을 보고 알았지. 당신의 무공이 무슨 이름인지는 모르겠으나 주로 방어위주의 무공이 대부분이더군. 이는 자네들이 누군가의 호위나 보호를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 그리고 또 다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상대하려고 사람을 보내는데 겨우 세 사람이라는 것은 그만큼 당신들의 무공을 총령이 믿고 있다는 것이 아니겠나? 그렇다면 당신들이 누구라는 것은 손에 잡히듯 뻔한 것이지."

그러자 세 사람은 마치 약속이나 하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도 기괴하고 서늘한 웃음소리였다. 듣는 이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웃음소리는 꽤 오랜 시간동안 이어졌다.

"크흐흐! 그렇다. 장난은 이제 그만두어야겠군. 우리는 너를 죽일 것이다. 나는 자신한다. 우리 세 사람이 합공을 하면 죽지 않을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자아, 우리의 합공을 받아 봐라!"

남태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셋이든 열이든 덤벼라!"

"대단한 자신감이군."

흑사의 말이 끝나자 남태천과 조금 떨어져 있던 두 사내들은 검을 뽑아들며 남태천을 사방에서 포위했다.

이는 조금 전과는 다른 기세였다.

그저 단순히 둘러싸는 것과는 달리 무형의 기세로 남태천을 압박하고 있었다.

삼면에서 둘러싼 그들은 남태천의 허리와 머리, 그리고 가슴을 겨누며 둘러싸고 있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흥! 나를 우습게 본 모양이군. 그렇게까지 자신할 입장이 아닐 텐데."

파악―! 

남태천의 몸이 솟구치는 순간, 남태천의 몸은 그들의 공격권을 벗어나 허공에 삼 장이나 떠올랐다. 그러자 삼 인 역시 남태천의 몸을 노리며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허공에 머물렀던 남태천이 다시 빙글 몸을 돌리더니 이번엔 아래로 쏘아져 내려왔다.

그러자 갑자기 뇌성이 일었다.

우르릉―!

남태천이 검을 휘두르자 검영은 순식간에 삼 인을 압박해 왔다.

이 초식은 일검경천(一劍莖天)이라는 초식으로 진력 낭비가 많은 초식이었다.

이는 검의 기교보다는 기세와 진기만으로 상대를 압도해 나가는 것으로 필살의 경우가 아닌 다음에는 사용하지 않는 초식이었다.

그런데 남태천은 초반부터 무리한 공격으로 상대를 제압하려 하는 것이었다. 재빨리 승부를 내고 싶은 욕심이었다.

하지만 이들 역시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막 튀어 올랐던 세 사내들은 퉁겨 나가려던 자신의 몸을 뒤집으며 남태천의 강공을 피했다.

슈각―!

그러나 완벽히 피할 수는 없어 그들은 가슴과 허리에 약간의 철과상을 입어야만 했다.

하지만 공격이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 찰과상 정도로는 전력에 전혀 손실을 줄 수 없었다.

"받아라."

남태천은 자신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벽력 같은 소리를 지르며 한 사내를 향해 몸을 틀었다.

파아악―!

남태천이 검을 한 번 털자 검은 마치 먹이를 쫓는 뱀처럼 날카롭게 사내를 향해 날아갔다.

"끄르륵......!"

사내는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처럼 묘한 소리를 흘리며 몸을 비틀었고, 그와 동시에 사내의 손이 퉁겨져 나왔고 남태천의 검과 맞부딪쳤다.

검광이 번뜩이며 십여 합이 흘렀지만 상대는 남태천의 검을 교묘하게 피하며 이리저리 몸을 틀어서 서로 어떤 상처도 주지 못하고 있었다.

남태천은 세 명의 사내들을 상대하면서 잘 버티고는 있었으나 삼 인을 다 상대하기란 역시 버거웠다.

시간은 어느덧 많이 흘러 인시(寅時)가 다 되어가고 있었고, 남태천은 삼 인을 상대로 벌써 천여 합을 나누고 있었다.

남태천이 지친 듯 검을 막다 뒤로 밀리는 순간이었다. 등뒤에 서 있던 흑사가 남태천의 등을 노려갔다. 그리고 흑사와 공격을 같이하여 또 다른 흑의인 하나가 남태천의 발목을 베어갔다.

"죽어라."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파아악―!

이기어검(以氣馭劍)의 수법으로 날아온 검이 순간 방심한 사이 흑의인의 몸을 관통했다.

커억―!

흑의인은 마치 활시위를 떠나는 화살처럼 퉁겨나갔다. 그리고는 손가락 한 번 꿈틀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웬놈이냐?"

그 순간 소리치던 흑의인의 자세에 미세한 흐트러짐이 있었다. 남태천에게 틈을 보인 것이다.

"좋다."

남태천은 벽력 같이 소리를 지르며 흑의인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며 반달모양의 검영(劍影)을 남겼다.

파악―! 쫘아아아앙―!

그리고 흑의인은 단 한번의 실수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양단 되어 죽었다.

순간 흑사는 등뒤가 섬뜩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얼음 굴에 떨어져 내린 듯한 느낌이랄까? 돌아서는 순간 그의 등뒤에 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그는 그 사내를 보는 순간 자신의 이름이 무색해지는 것을 느꼈다.

검은 뱀, 그를 보자마자 흑사가 생각한 것은 사내가 뱀을 닮았다는 것이다. 먹이를 노리는 살모사의 눈을 가진 사내는 섬뜩함을 벗어나 차가움이 느껴졌다.

그림자 속의 사내의 눈은 푸르스름한 안광을 머금고 있었다. 흑사는 자신의 생각에 실소를 머금으며 눈으로 상대에게 묻고 있었다.

'어째서 우리를 방해하는 것이냐?'

그런 그의 앞으로 다가선 사내는 호귀였다.

검은 무복을 입고 낡은 천조각으로 둘둘 말아놓은 검을 든 채 흑사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호귀는 차가운 눈으로 흑사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너무 아쉬워 할 필요 없다. 저자는 나를 불러내기 위해 자네들과 잠시 놀았을 뿐이니까. 애초 너희의 상대가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흑사는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에 뭐라 항변을 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이었다.

파악―! 컥―!

등뒤에 서 있던 남태천이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 흑사는 남태천의 발길질과 함께 삼사 장 밖으로 밀려나 절명해 버렸다.

"역시 마교의 인물답군. 등뒤에서 암습을 하다니."

호귀는 남태천을 노려보며 말했다. 남태천은 여유있게 웃었다.

"괜한 힘 낭비를 할 필요는 없지 않나?"

호귀는 말이 없었다. 단지 남태천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작렬하는 듯했다.

"딴은 그렇군."

남태천은 마치 친구를 앞둔 것처럼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 년이었나?"

호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 년 전부터 나는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지. 비록 그것이 누구인지, 어디였는지는 몰랐지만 몹시도 신경에 거슬리더군. 그런데 지난 일 년동안 시간이 지날수록 그 느낌은 더욱 강해지더군. 그리고는 지난 몇 달간은 공공연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까지 했다. 나는 그것을 나에게 도전하는 것으로 해석했네만. 자신 있다는 뜻이겠지?"

호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서 오늘은 나 역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대를 불러낸 것이다. 이자들이야 그 핑계에 불과했지."

남태천은 검을 고쳐 잡았다.

"그럼 시작할까?"

남태천은 조금 전과는 사뭇 기세가 달랐다. 호귀 역시 긴장하며 전신의 진력을 끌어올렸다.

스르릉―!

남태천은 경쾌한 소리와 함께 검집에서 검을 끄집어냈다.

"그런데 나는 자네가 왜 나를 죽이려 하는지 이유조차 모르는군. 나를 노리는 이유 정도는 가르쳐줄 수 있겠지?"

호귀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너는 내 주인을 죽였다. 우리 자객들의 피에 대한 율법은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

남태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홍화객의 졸개인가?"

호귀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다만 자신이 잡고있던 검집을 바닥에 버렸을 뿐이었다. 이는 필살(必殺)을 다짐하는 무언의 행동이었다.

적을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겠다는 뜻이 담겨있었다.

휘이잉―!

한줄기 바람이 일었고 바람은 달을 구름 속에 가둬버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장애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이미 어둠을 초월할 정도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파악―!

공격은 남태천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

신룡출격(神龍出格) 신법으로 삼여 장을 단숨에 뛰어 오른 남태천은 달마십삼검(達磨十三劍)의 제일식 허식분금(虛式分金)과 제이식 금강복호(金剛伏虎), 제삼식 금륜도겁(金輪渡劫), 제사식 부구포수(浮丘抱袖), 제오식 홍애지편(洪崖指扁), 제육식 회두시안(回頭是岸), 제칠식 횡강비도(橫江飛渡), 제팔식 행공전운(行空展雲), 제구식 해천무종(海天無踪)에 이르기까지 총 삼백여 초를 순식간에 펼쳤다.

창―! 채재쟁―!

따앙―!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은 두 사람의 눈빛과 검영뿐이었다. 그리고 들리는 건 검음들 뿐이었다.

*               *               *

"그리고 호귀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은 없으실 테지요."

남궁선은 야릇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자신의 사촌인 남태천의 이야기가 나오는데도 시종 담담한 모습이었다.

청년의 말대로라면 남태천은 영웅이 아닌 배신자이며 중원의 적도인 것이다.

그런 말이 나오고 있는데도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고,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재미있는 것은 쌍마령이었다.

그들은 본시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으면 서슴없이 살인을 하고 다니기에 객점 안의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인지 휘지와 휘소의 주변 탁자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추정호는 그들을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객점 안의 손님들은 중추신개와 추정호, 흑의인, 그리고 청년과 남궁선을 따라온 몇몇의 하녀들과 무사들, 그리고 표옥자뿐이었다.

청년은 탁자를 두 손으로 탁 치며 일어섰다. 순간 표옥자와 추정호가 긴장했다.

"이거 실례하겠습니다. 소피가 급해서 화장실을 다녀오겠습니다. 주인장!"

청년이 부르자 주인장은 손에 등을 들고 나타났다.

"아이고, 안내까지 맡아주셔야 하다니. 이거 너무 황송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 아니 뭘......."

주인은 순간 당황한 듯 더듬거렸고, 남궁선과 추정호 역시 긴장하는 듯 보였다. 청년은 그런 그들을 힐끗 보고는 재미있다는 듯 미소지었다.

"쿠쿡! 주인장도 수고가 참 많으시오."

그리고 청년과 주인이 막 밖으로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쌍마령중 휘지가 막 문을 나서려는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피해!"

남궁선의 입에서 고함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청년은 제비가 날아오르듯 몸을 허공으로 솟구쳐 한 바퀴 돌고는 제자리에 내려섰고, 주인장은 뭔가에 걸렸는지 허우적거리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파바박―!

둔탁한 소리와 함께 종잇장 보다도 얇은 비수가 문가에 박혔다.

"아니 저자들이?"

추정호는 자신이 들고있던 단검을 꺼내려 했다. 그러자 중추신개가 추정호의 손을 잡았다.

"저들은 살의를 일으키지 않았네. 단지 청년의 무공을 시험해 보고 싶었을 뿐이었겠지."

청년은 쌍마령에게 포권을 해 보였다.

"저에게 좋은 선물을 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는바 없다는 듯이 다정하게 서로를 어루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청년이 나가자 중추신개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저 청년은 대단한 무공을 익혔군. 그 신법만 봐도 그의 무공수위가 화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겠어."

그러면서 흑의인을 힐끗 쳐다봤다. 그러나 흑의인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자는 것인지 아니면 뭔가를 생각하는 것인지 시종일관 그 자세로 앉아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지리한 시간이 흘렀다. 청년이 돌아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럼 다음 이야기를 시작하죠. 제가 어디까지 했습니까?"

"호귀가 죽는 부분까지 했네."

"아!"

청년은 이마를 탁 쳤다.

"그렇군요. 그럼 그 부분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호귀는 죽었습니다.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중원은 전운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이로써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제18장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임진년(壬辰年) 사월(四月) 십이일(十二日).

대혼란의 징후는 중원과는 떨어진 곳에서 시작되었다.

대마도. 바람 한 점 없는 바닷가는 안개마저 짙게 끼어 한 치 앞도 바라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게다가 사월의 날씨는 겨울바람이 가시지 않아 아직 쌀쌀하기만 했다.

장병들은 벌써 한 시진을 이곳에 서 있었다.

안개에 젖은 몸이 으스스하게 떨려올 즈음, 히데요시는 부장들을 이끌고 모습을 드러냈다.

원숭이 얼굴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부하들에게 조선 출정의 명령을 내렸다.

"각자 맡은 부서와 그 예하 병력을 보고하라."

도요토미의 명령은 추상과도 같았다.

"선봉 대마도주 무네(宗) 병력 오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병력 칠천!"

차례차례 점검을 끝낸 히데요시가 십오만여 명의 장병들 앞에 섰다.

그들에게서는 묘한 긴장감이 일고 있었다.

"우리는 저 넘어에 있는 조선을 칠 것이다. 천황폐하의 명예를 걸고서라도 우리는 저 반도국을 우리의 영토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발판이 될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명(明)이다. 우리는 내일 아침을 부산성에서 먹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의 영예이자 행운인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목소리가 바닷가를 쩌렁하게 울렸다.

"출군하라!"

그의 출군 명령이 떨어지자 십오만 명의 장병들이 일사불란하게 배로 승선을 했다.

전장의 첫 징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첨사 정발(鄭撥)은 전날 사냥을 떠났다가, 짙은 안개로 인해 돌아오지 못했었다. 그래서 이날 새벽에야 돌아오려는 중이었다.

그런데 뱃머리에 서 있던 부하가 갑자기 소리쳤다.

"사또! 저기, 저게 뭡니까?"

"아니 저건!"

정발이 본 것은 수천이 넘어 보이는 선단이었다. 배가 몰려오는 곳은 동쪽만이 아니었다. 동쪽에도 남쪽에도 온통 배로 뒤덮여 있었다.

정발은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며 머리가 쭈뼛 서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빨리 빨리 배를 몰아라. 부산으로 돌아가야 한다!"

정발은 뱃전에 올라서며 발을 동동 구르며 호령하였다. 그러나 물은 썰물이었고 그에 의해 배의 속도는 더디기 그지없었다.

정발은 배가 항에 닿자마자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성을 향해 달음질쳤다.

조선국 부산포에서 김첩(金帖)은 망루에 올라 졸린 눈을 비비며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옘병, 이놈은 왜 이렇게 안 나오는겨, 졸려 죽갓구마는."

옆에는 이생민(李生民)이 창대(槍坮)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교대에 늦는 동료들을 탓하며 뭐라고 궁시렁거리던 김첩은 전방 바다를 보다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응? 저, 저, 저게 뭣이랴?"

안개로 뿌옇던 바다에 무수히 많은 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뭐, 뭔데 그란디야?"

졸던 이생민이 그의 목소리에 놀라 깨어서는 아직도 졸린 목소리로 투덜댔다.

막 일어나려는 그의 귓가에 김첩의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저, 적이다. 적이 쳐들어 왔다!"

성이 한참 소란스러울 즈음, 첨사 정발은 땀에 흠뻑 젖어 성문에 도착하며 외쳤다.

"성문을 닫아라. 적이 쳐들어온다."

수만 명의 일본군들이 부산포구에서 벌떼처럼 몰려오는 것을 바라보는 정발의 얼굴은 절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로써 칠 년간을 끌었던 임진년 왜란이 발발하게 된 것이었다.

*               *               *

멀리 바다 끝에서 태양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수평선 끝에서 검은 점이 점점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내 배의 형상으로 바뀌어 해안가에 닿았다.

멀지 않은 곳에 부산포가 자리한 이곳에서는 연기가 치솟는 것이 보였다. 간간이 포 소리와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묻혀오고 있었다.

뱃전에는 한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무복차림의 사나이는 정좌를 한 채 해안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가? 사내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무심(無心)의 경지조차도 뛰어넘은 자의 눈빛이었다.

그는 불과 일 년 전 이 해안을 통해 일본으로 들어갔었다. 수십 일을 굶주리고 죽음과 싸우며 간신히 일본에 들어갈 수 있었고, 일 년이라는 시간을 한 무사 가문의 가신이 되어 전장에서 보내야 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이곳 해안에 발을 디딘 것이다.

그는 백천우에 의해 쫓겨 두만강을 건너야 했던 사나이 묵천이었다.

묵천이 뱃전에서 해안가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조장, 주군의 전언입니다."

무사 하나가 품속에서 서찰 하나를 건넸다.

묵천은 서찰을 받아 펼쳐 보았다.

<시다. 자네는 나와의 약속을 훌륭히 지켰다. 이제 그대가 나와의 마지막 약속을 지킬 때가 되었다. 부디 완수하기 바란다. 무운을 빌겠다.>

"주군에게 전하라. 약속은 이행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무사는 배를 돌려 멀어져 갔다. 묵천은 멀리 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중원이 있었다.

어떤 미련도 남지 않은 곳이었지만 자신의 사부가 묻혀 있고 그리고 한 여인의 추억이 있기 때문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곳을 바라본 것이다.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묵천에게는 그가 아니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중원을 향한 그의 일보는 시작되었다.

*               *               *

자금성 태화전.

멀리서 자정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건물의 앞에 있는 대리석 경사로의 조형물들이 마치 전(殿)을 지키는 경비무사들처럼 달빛에 반짝이며 서 있었고, 간혹 궁을 지키는 경비무사들의 발걸음 소리만이 들리는 적적한 밤이었다.

이곳은 황제와 중신들이 정사를 논하는 곳으로 낮에는 서로의 견해를 말하는 중신들로 인해 부산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그들이 물러간 이 시간에는 쥐죽은듯 고요했다.

그런데 이 늦은 시간에도 태화전의 불은 꺼질 줄 모르고 있었다.

"황상, 더 이상 지체하실 틈이 없습니다. 그들은 지금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리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을 이대로 놓아두신다면 훗날 큰 화근이 될 것이옵니다."

대장군(大將軍) 천위성(天胃星)이 황제 보좌 아래 엎드려 있었다.

황제 보좌에는 만력제(萬曆帝) 신종(神宗) 주익균이 불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에게서는 정무(政務)에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황상."

천위성이 황제의 결정을 재촉하고 있었다.

"대장군(大將軍), 당신의 뜻은 잘 알고 있소. 나 역시 그를 치고 싶지만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여력이 없지 않소? 조선에서 일어난 왜란을 막기 위해 군사를 요청하였소. 군신간에 그들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거기에 우리에게는 누루하치를 칠만한 명분이 없지 않소."

대명의 절대자인 황제의 음성에는 비통함이 어려있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슨 복안이라도 있는가?"

"그렇습니다."

"무엇인가?"

"자객을 보내 누루하치를 암살하는 것입니다. 암살하는 것은 명분이 필요치 않을 뿐더러 그들의 기세가 약해질 것입니다. 머리 잘린 뱀이 될 테니까요."

"자객을?"

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주익균이 입을 열었다.

"가능하겠는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주익균은 보좌에 깊숙이 앉으며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드디어 주익균이 입을 열었다.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자는 있는가?"

"제가 보아둔 장수가 한 사람 있습니다."

"그 자를 내 곁으로 데려오도록. 은밀히!"

"예, 알겠습니다."

천위성이 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황제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음!"

황제의 입에서는 낮은 탄식성이 터져 나왔다. 황제의 근심과 함께 태화전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것이었다.

태자전의 아래에 자리한 지하 궁에서는 또 다른 황제가 용상에 앉아 있었다.

황제의 앞에는 십여 명의 무사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앉아 무언가를 일일이 보고했다. 황제는 눈을 감은 채 그들의 보고를 듣고만 있었다.

좌측 끝에 앉아 있던 무사가 몸을 일으켰다.

"일본이 부산포를 점령했습니다. 병사 총원은 십오만이며,  본토에 대기중인 병사는 이십만이고, 군선 오천 척과 함선 팔천 척이 유동 중입니다. 서울에 입성은 대략 오십일 정도의 시일이 소비될 것으로 예상되며 지금의 상태로 라면 이백 일 안에 조선을 점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 옆의 무사가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조선의 왕은 평양으로 피난 중입니다. 부산포가 함락되고 조선의 중신들의 의견이 엇갈렸으나 그후 급히 피난을 결정했습니다. 조선의 백성들은 왕이 성을 떠나자 궁궐을 불태웠고, 학자들의 통곡성이 성 안을 가득 메웠다고 합니다."

그 사내의 말이 끝나자 이번엔 옆의 사내 역시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누루하치는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진영은 쥐죽은듯 고요하며 요소에 배치되어 있던 군사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그의 진영 안에는 노병과 병든 군사들밖에는 없었습니다. 기밀문서와 모든 병서들은 완벽하게 소각되었으며 그들의 흔적은 중원의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달단의 풍야후는 걸어 두었던 검을 갈고 군사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는 팔 할 이상의 군세를 정비했고 이미 많은 수의 군사들이 국경선 부근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십인의 보고가 차례로 이루어졌다.

"마교의 총령은 움직임을 자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직 어떤 징후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의 처소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교의 동향이 한 사내의 입에서 읊어지자 황제는 눈을 떴다.

"됐다. 다음 지시를 기다리도록."

열 사람이 모두 물러나자 대전 안에는 황제 홀로 남아 있었다.

그의 입이 열렸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나?"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가? 황제는 마치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말하듯 입을 열었다.

그러자, 아무도 보이지 않던 황제의 앞에 한 사내가 나타나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는 남태천이었다.

중원을 움직이는 두 사람의 절대자가 이 야심한 밤에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잡초는 그 뿌리를 제거하는 수밖에는 없는 법이오."

"그래, 방법은?"

"특별한 자들을 보내는 것이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객을 말하는 것이군. 하책(下策)은 아니지. 그러나 상책 역시 아닌 것 같은데?"

남태천은 고개를 저었다.

"상책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 상황에서는 가장 효율적(效率的)인 방법입니다."

황제와 남태천의 눈이 마주쳤다.

"좋아! 그러지. 자네는 어떤가? 자네의 계획대로 잘 진행되어 가고 있는가?"

"그렇소이다."

"그러면 자네만 믿겠네."

"그럼."

남태천의 몸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다.

"무저갱과 같은 자로군. 한번 발을 잘못 딛으면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황제는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               *               *

대산(大傘)은 말 그대로 큰 우산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는 마을 북쪽에 자리한 큰 산이 마치 거대한 우산을 엎어  놓은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산을 대산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대산이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산만 넘으면 바로 달단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이 마을은 총인원이 삼십 명도 안 되는 마을이었지만 국경이 되어버린 이후 군대가 들어오면서 그 수백 배의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그후 이 대산은 이름 그대로 거대한 마을이 되어버렸다.

툭! 타닥―! 후두두둑―!

풍야후의 발끝에 걸린 작은 돌 조각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풍야후는 산 아래의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낮임에도 흥청거리는 마을과 사람들, 그리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국경수비군의 모습이 마치 바로 앞에다 늘어놓은 듯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풍야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태한 족속들이군."

풍야후의 앞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자리하고 있었고 풍야후는 순간 비틀만 해도 떨어질 듯한 아슬아슬한 자세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풍야후의 등뒤로는 삼십여 명의 무장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내들의 몸에는 은빛이 찬란한 막불(刀劍)과 무기들이 들려 있었고, 전신을 손톱 한 조각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촘촘하게 지어진 목의(木衣)로 감싸고 있었다.

풍야후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오늘은 저곳에서 점심을 먹겠다. 우리는 천명(天命)을 받아 싸우는 바 적을 두려워 할 것 없다. 게다가 저들을 보라. 술에 절은 저들은 이미 군인이 아니다. 쳐라!"

"와아아아!"

벌떼와 같다는 말이 실감나는 모습이었다.

가파른 산에서 마을까지는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되지 않았다.

수만 명의 병사들이 함성과 함께 미친 듯이 산 아래로 진격해 내려왔고,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만으로 지축이 흔들리는 듯했다.

사람들이 움직이자 마치 대산이 옷을 입고 있는 듯 서서히 산은 사람의 옷으로 뒤덮여갔다. 그들이 움직이자 마치 산이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쳐라. 죽여라! 우리는 기름진 대지를 원한다!"

"크하하하. 중원의 계집을 안아볼 수 있게 되었구나."

"와아―! 와아아아―! 우리의 숙원이 드디어 이루어지는 구나."

"우리 동료들의 복수를 하자!"

무사들은 그야말로 피비린내에 미쳐있었다. 보이는 것들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죽이려 했다.

여인들은 겁탈 당하다 죽었으며 어린아이들은 군사들의 발길에 채여 절명했다.

달단의 무사들은 복수라는 명분 아래 한 마을을 철저히 짓밟았고, 그들이 지난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태풍이 몰아친 자리와 같았다. 아무것도 없는 절망의 대지였다.

그렇게 대혼란의 또 다른 징후가 중원의 한쪽 끝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               *               *

주익균의 앞에 선 한 사내가 무언가를 읽으며 연신 보고하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이미 그 마각을 드러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벌써 여러 번 조선에 가신들을 보내었고, 대마도주는 조선에 공공연히 상호보호조약을 요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자신들과 손을 잡아 우리 명을 치자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이미 그 수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의 군사들이 비밀리에 대마도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주익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서서히 그들이 속셈을 드러내기 시작했군. 내가 조사하란 자들은?"

"예. 모두 서른세 명이 명단에 올랐습니다. 그 중 출신 성분이 의심스러운 자들을 제외하고는 세 명이 남습니다."

"음! 그래. 명단을 줘보게."

주익균은 서찰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응?"

그러다 한곳에 눈이 멈춰 섰다.

"이 자로 해야겠다."

사내는 황제의 손에서 명단을 받아 들었다.

"예, 이 자의 이름은 막불이란 자로 불산 출생입니다. 가족은 부인과 노부모가 아직 불산에 살고 있고, 모두 생존해 있습니다. 이자는 스물하나에 군인이 되어 이제는 단주급의 지위를 갖고 삼 년 전 사막대전에서 크게 부상을 입은 후 제대했습니다. 그후 그는 낙향해 부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자객이나 암살에는 천부적이라 할만큼의 능력을 보여 모두 서른두 번의 임무를 완성했습니다."

"그보다 특이할만한 사항이 있더군."

"무슨?"

"그자는 무려 열세 번의 전투에 참가해 모두 살아 돌아 왔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도 그 중 세 번의 전투는 그를 제외한 모든 자들이 전멸했음에도 말이야. 그를 조사해 보도록 하게. 적의 암살을 우리 군인이 아닌 자객들에게 맡길 수는 없지 않는가? 우리 군부와 내 체면을 생각해서 말일세."

"예, 알겠습니다."

*               *               *

태양의 열기가 지면을 태워 풀 한 포기 자리하지 못하는 열사의 땅에는 바람이 불면 여태껏 없던 모래언덕이 새로 생기기도, 사라지기도 했다.

이는 자연이 만들어내는 신기였다.

인간으로서는 거역할 수 없는,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절망과 경외감을 느끼게 하는 광경이었다.

휘이잉―!

바람과 함께 모래먼지가 피어올랐다.

대지를 감싸 쥐듯이 훑고 지나는 바람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듯이 허공에서 사라져버렸고, 그로 인해 한 차례 모래먼지가 허공을 맴돌다 사라졌다.

그런데 그 모래바람은 붉은 빛이 아닌가? 햇볕마저도 이 혈사(血砂)에 휩쓸려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회오리가 일자 모래바람은 마귀가 환생이라도 하는 냥 하늘에 한 차례 피어올랐다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그 붉은 모래들 사이로 무엇인가가 삐죽 삐죽 솟아올라 있었다.

그것은 창의 끝이었다. 사람의 손발, 혹은 갈기갈기 찢어진 몸뚱이도 보였다.

피가 엉겨붙어 있는 손과 발, 인간의 육신이었을 토막들, 그리고 육신의 일부분들에서는 아직도 응고되지 않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는 이 시신들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왜 우리는 죽어야 하는가? 스스로 태어나지도 못한 채 살다가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해야 하는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원초적인 질문들이 터져 나올만한 풍경이었다.

이 모래는 인간의 피가 만들어낸 혈사(血沙)였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바람이 불자 지면 위에 솟아있던 물건들이 하나 둘 모래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모래 속으로 모든 것이 묻혀버렸을 즈음, 모래를 뚫고 솟아 나오는 것이 있었다.

분명한 손이었다. 손마디가 보이고, 손바닥이 보였으며 팔꿈치가 나왔다.

그리고 어깨가 나왔을 때 모래가 파헤쳐지면서 한 사람이 모래를 뚫고 나왔다.

"푸악...... 켁! 켁!"

한참을 입에서 모래를 게워내던 막불(屠劍)은 멍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방은 온통 붉은 모래 투성이었다. 보이는 거라곤 전부 사막, 그리고 널브러져 있는 시체가 전부였다.

막불은 피로 얼룩진 갑의를 입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도 피와 모래가 엉겨붙어 친인척이 봐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엉망이었다. 붉게 충혈된 눈, 산발이 된 머리칼, 바짝 마른 입술, 무엇 하나도 그를 정상이라고 증명해줄 것은 없는 듯했다.

그가 어떤 자인지를 보여주는 것은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이었다. 그의 팔에는 반 토막 난 검이 들려있었다.

그 역시 이곳에서 피를 뿌리며 싸운 자였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막불의 눈에는 두려움과 절망이 어려있었다.

"무천, 휘진, 석두, 판휘."

그는 주문이라도 읊어대는 냥 중얼거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미친 듯이 모래를 파헤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두 손으로 파헤치다 잘 되지 않자 부러진 칼 조각으로 모래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팍! 팍팍팍!

그러나 대해를 한 줌 퍼낸다고 표가 날 리 있겠는가? 자신의 동료들의 시신을 이 사막의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막불의 온몸이 땀으로 후줄근하게 젖어왔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마치 미친 인간 같았다.

휘이잉―! 휘이이잉―! 

한 차례 바람이 불자 그의 모든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모래가 날아들어 그가 파 들어가던 구덩이는 다시 메워져 버렸다.

그의 수고가 허망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털썩!

막불은 모래 위에 망연자실해 주저앉아버렸다.

십 일이었다.

지옥 같던 그 전쟁은 십 일간 이어졌다. 그것은 무자비한 살육이었고 도살이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전쟁이었다.

'나의 동료들은!'

저기 어딘가 모래 속에 지금도 자신의 동료들이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막불은 다시 모래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쪽 모래밭에서 무언가가 기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사람이었다.

막불은 그곳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족히 몇 시진은 달리고 있는 듯 더디게 느껴졌다. 오히려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무천일까? 아니야 휘진 일거야 그는 강인하니까.'

갑자기 석두의 장난스러운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와 술을 나누던 동지들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러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막불의 눈에는 분노의 불길이 일었다.

이미 죽어가던 상대방의 눈에서도 절망의 그늘이 어렸다.

"아아아...... 아......."

그의 입에서 절망의 소리가 나왔다.

어디서 기운이 났을까? 그자가 적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막불은 반 토막의 검으로 적군 사내의 가슴을 찔러댔다.

그에게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올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저 단순하게 미친 듯이 찌르는 동작만을 반복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선혈이 흐르고 살 조각이 검에 묻었으며, 뼛조각이 튀었다.

끄르륵―!

겨우 숨만을 쉬던 사내는 기묘한 소리를 내면서 숨을 멈추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막불은 그의 가슴을 반 토막 짜리 검으로 다시 헤집기 시작했다.

그러다 멈칫하던 막불은 사내의 가슴에서 아직도 덜렁거리던 심장을 두 손으로 잡아뜯어 이로 물어뜯다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리고는 발로 짓이겨댔다.

누가 봤다면 진저리를 치며 도망갈 악귀의 모습이었다.

"아...... 아......으아......으아아―!"

그의 목소리는 늑대의 포효처럼 사막의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               *               *

"헉."

막불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빌어먹을! 또 꿈이었어.'

요 근래에 들어 젊은 시절 대막에서 적들을 소탕하던 것들이 꿈으로 자꾸 비쳐지고 있었다.

유일한 생존자였던 자신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먼저 보낸 동료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그 때의 일이 한 번도 잊혀진 적이 없었다.

때로는 동료들에게 쫓기기도 하고, 때로는 이처럼 자신 혼자 살아 남았다는 자책감으로 괴롭기도 했다.

옆에서 자던 성숙랑(成肅浪)이 막불의 팔을 잡으며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안 좋은 꿈이라도 꾸셨어요?"

막불은 걱정스러운 아내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냥 자구려. 내일 황제를 뵈러 갈 생각을 하니 걱정돼서 그런 모양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쁜 일은 아닐 테니........"

막불은 아내를 다독거려 재웠다.

"그래, 그래야지."

막불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밖에는 어느새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우리는 누군가가 사는 모습에서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 금, 은, 보석이나 또는 작은 물건들로도 한 사람을 평가하고 그의 능력을 재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눈에 보이는 그런 것이 정확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중 그 사람의 작은 부분들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생활하는 방을 보면 알 수 있다.

방의 구조나 가구의 배치, 아니면 그 사람이 주로 사용하는 집기 등을 통해 그가 정갈한 사람인지에서부터 그가 꼼꼼한 사람인지 아닌지, 혹은 성격이 난폭한지 그렇지 않은지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막불이 서 있는 이 방은 그런 면에서 조금은 애매했다.

황궁은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결코 그들의 것은 아니다.

오직 한 사람, 황제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아침 저녁으로 청소를 해대고, 정리하고, 정돈하고, 손질하기에 황제가 지나는 곳에서는 먼지 하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곳은 황제의 침실임에도 불구하고 먼지가 뿌옇게 내려앉아 있었다.

이유인 즉은 황제가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많은 내관과 시비들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

본시 황궁에서는 황제가 사용치 않는다 하더라도 매일 그곳을 담당하는 자들이 손을 보게 되어 있는 것일 텐데 말이다.

그런데 이곳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것은 황제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명령은 이곳에 드는 자는 이유를 막론하고 참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로부터는 이 황궁의 중앙에 자리한 이 건물만이 유독 폐허 아닌 폐허가 되어버렸다.

누가 감히 황제의 명을 거역하겠는가?

황제의 명을 거역하는 것은 바로 반역에 해당하는 행위였다.

그런 이곳에 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사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지도, 그리고 기웃거리지도 않았다. 다만 묵묵히 서서 앞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때였다.

"그대가 막불이라는 자인가?"

사내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헉―!"

"난 자네를 보고자 한 사람이라네."

순간 막불의 얼굴은 긴장으로 딱딱히 굳어졌다.

"만세, 만세, 만...... 만세....... 황제폐하, 막불 인사 드리옵니다."

그는 전날 한 군병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었다. 뜬금 없이 찾아온 군병은 황제의 옥새가 찍힌 서찰을 전하고 사라졌다.

그 명은 아침 일찍 자금성의 북문(北門)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막불은 그 명을 어길 수 없어 그대로 따랐고, 북문에 도착하자 한 사람이 그를 이곳에까지 안내해 주었던 것이다.

정작 이상한 일은 그가 이곳까지 이르는 동안 단 한번도 누구의 검문이나 물음도 받아 본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개미 새끼 하나 마주치지 못했었다.

본시 황제를 배알할 때는 여러 가지 절차가 필요하다.

의복을 입어야 하며 황제 앞에서 해야할 예식 등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의 신분과 출신을 조사하고 온몸을 검사해 독이나 무기들을 찾아낸다.

이 최소한의 검사 외에도 목적이나 정당한 이유, 그렇지 않으면 황제의 승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 모두를 조사 받고도 궁에서 이삼 일을 기다려야만 겨우 황제를 만날 수 있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그는 십여 가지의 조사와 복잡한 절차, 그리고 형식적인 의식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중 단 한 가지도 격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허름한 곳으로 안내 받은 데다가 갑작스럽게 황제가 나타나자 그는 불안했다.

막불은 엎드려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었다.

"자네가 막불인가?"

"예, 그렇습니다."

황제는 말이 없었다. 그렇게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황제는 아무 말 없이 막불을 바라보기만 했다. 막불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자네는 이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 무슨 말씀이시온지?"

"자네가 살고 있는 이 나라 말일세."

막불은 갑작스런 황제의 말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갑자기 궁으로 불러들여 자신에게 이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냐니 어떤 대답을 원하는 것인가?

막불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떤가?"

"전......."

"그래, 말하기가 부담스러우면 하지 않아도 좋네."

왠지 황제의 목소리가 무거워 보였다.

"내가 자네를 부른 것은 이 나라를 위해 희생해 주기를 바래서이네. 글쎄, 몹시 힘들구만.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자네에게 부탁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야."

막불은 눈을 감았다.

그는 이미 황제의 말에서 그에게 바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를 다시 전장 터로 보내고자 함이었다.

단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장군도 아닌 자신을 이렇게 따로, 그것도 은밀하게 불러들여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막불의 손은 떨림이 일기 시작했다.

지난 삼 년간 그는 어떻게 지내왔던가?

전장 속에서 죽어간 동료들과 이름을 알 수 없던 수많은 적들의 얼굴이 그의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잠을 자면 많은 원혼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고, 깨어 있어도 그는 살아 숨쉬는 것이 아니었다.

뜨거운 열기와 갑의 속으로 흘러내리는 땀, 그리고 전우들, 그 모든 것이 단순한 꿈이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금방이라도 문을 열며 농을 해줄 것 같은 그들이 그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자네는 삼 년 전 사막전투에서 살아난 유일한 생존자라는 사실을 들었네. 그리고 그 전투는 내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일 중 하나였네. 그러나 당시 그 전투로 인해 우리의 국경선이 지켜졌고 그후 세외에서는 함부로 우리를 넘보지 못 했었지."

막불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동료들의 희생이 아주 의미 없었던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궁금하겠지? 내가 왜 자네를 이렇게 불렀는지. 이유는 하나일세. 그때와 같은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기에 자네를 부른 것이라네. 자네라면 나를 충분히 이해해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네."

막불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자네는 한 사람을 죽여야 한다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말이야. 그리고 거기엔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네."

"제가 누구를 죽여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황제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바로 동쪽 끝에 있는 젊은 호랑이 누루하치라네."

막불은 자신이 더 이상 빠져 나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진정이십니까?"

황제는 확고하게 말했다.

"그렇네."

막불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저를 잘못 부르신 게 아닙니까? 저는 일개 군인일 뿐입니다."

"그렇지가 않아. 이것은 그 무엇보다도 극도의 정신력을 요하는 일이네. 자네는 전멸의 순간에도 살아남은 강인한 정신력을 지녔어. 그리고 절대적인 믿음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지. 그게 자네가 선택된 이유야."

막불은 고개를 젓고 싶었다.

그러나 황제가 이렇게 은밀히 말했을 정도면 이미 그의 운명은 결정지어진 것이었다.

명에 거역한다는 것은 이미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가 이 자리에서 승낙을 하지 않는다면 멸문이 되어버릴 일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가족과 모든 것이 황제의 명에 의해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

막불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는 없었다.

막불이 떠나고 황제는 홀로 남아 있었다. 그 황제 뒤로 남태천이 나타났다.

"정말 잔인하군. 선택의 여지도 없게 만든 후에 사지(死地)로 보내다니."

"후후후......!"

"그러나 이해할 수 없군. 어째서 보잘것없는 그런 자에게 누루하치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오?"

"자네는 그가 누루하치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글쎄. 솔직히 말해서 단 일할의 가능성도 없지."

황제는 문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렇기에 그를 보내는 것이라네."

남태천은 황제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았다.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지 눈이 투명하게 반짝였다.

*               *               *

쏴아아아―!

하늘은 개일 줄 모르고 있었다.

바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거세어졌고 객잔 안에서는 이제 한기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주인은 손수 화로에 불을 지펴왔다.

청년은 취한 듯 나른한 목소리로 얘기를 계속 이었고, 듣는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아니 어느 누구하나 술을 마시거나 움직이지 않았다.

청년이 앉아 있는 탁자 위아래에는 그 동안 마신 술독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남궁선도 재미있다는 듯이 얘기를 듣고 있었다. 마치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얘기처럼 아무 거리낌없는 태도였다. 분명 그녀의 가문에 누가 되는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황제는 왜 그자를 사지로 보내야만 했습니까?"

추정호가 물었다.

"그것이 정치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세상을 움직여 나가는 것들 중 가장 불필요하면서도 필요한 것이 이 정치라는 물건이지요. 추잡스럽고 더러운, 철저히 이익만이 우선 되는 권력 놀음이랄까요? 아마도 인간이 멸망되지 않는 한은 계속되어질 싸움이 바로 권력싸움이지요."

중추신개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군, 딴은 자네의 말이 맞아. 권력이란 무상한 것이지. 없어서도 있어서도 안 되는 것 말이야."

추정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저는 이해할 수 없군요. 황제가 그를 골라야 했던 이유를 말이죠."

청년이 입을 열었다.

"당시 정세는 공식적으로 세 곳에서 침략자들의 움직임이 일었던 것으로 드러나지만 사실 한곳이 더 있었습니다. 그곳은 바로 마교라는 집단이었지요."

"마교?"

"그렇습니다."

"호호호! 우습군요. 그렇다면 황제는 마교와 대적하기 위해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방관했다는 말이 되는군요. 겉으로만 대항하는 척 하면서 말이죠."

청년은 빙긋이 웃었다. 남궁선의 말에는 부드럽지만 뭔가 가시가 돋아나 있었다. 청년의 말이 터무니없지 않느냐는 뜻이 그녀의 말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황제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니 자신이 유리한 입장이 되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대내적으로 활동하면서 내분을 막으려 했던 것입니다."

"내분?"

"예. 마교가 바로 그것입니다. 무림이란 조직은 황제 역시도 주시하고 있었던 만큼 잠재력이 막강한 곳입니다."

"호오."

"게다가 이상한 저력이 있습니다. 만약 무림이 태동을 한다면 황제로서도 막아내기 까다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선 남태천과 손을 잡고 무림을 재정비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미리 알아챈 자가 있었습니다. 그자가 바로 홍화객을 사칭했던 사마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마교의 총령이라는 자와 사마적이라는 자, 그리고 우문성이라는 자, 남태천이라는 자, 황제. 모두들 무림을 없애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왜 서로 적이 되어 암투를 벌이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추정호가 날카롭게 지적을 했다. 그러자 청년은 빙긋이 웃었다.

"욕심 때문입니다."

"예?"

"사마적은 복수를 위해 뛰어든 것입니다. 그리고 우문성 역시 자신의 일가를 몰살한 무림세가에 복수하기 위해 뛰어든 것입니다. 남태천은 개인적인 복수와 모든 패권을 잡겠다는 욕망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지요. 그들 모두가 그 일이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자만심에 빠져 있었지요."

중추신개가 청년의 말을 잘랐다.

"그럼 황제 역시 그렇다 치고, 총령이란 자는 어째서 마교에 들어가게 된 것인가?"

"총령 역시 권력의 노예였습니다."

*               *               *

"남태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예."

총령은 부하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었다.

"음!"

총령은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리는 지금 맹렬히 움직이고 있었다. 또한 가슴 한구석이 부글부글 타오르고 있었다.

"남태천이 황제와 손을 잡았다는 것이냐?"

"예. 저희 정찰대에 의하면 그가 황궁에 드나드는 것을 여러 번 발견했다고 합니다."

총령은 손가락을 마주치며 앉아 있었다.

'남태천이 황제와 어떤 계략을 꾸민다 해도 그런 것쯤은 그다지 큰 일이 아니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바로 그자다! 그자는 벌써 삼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단시 자신의 명령서를 서신으로 보내고 있을 뿐이지. 하지만 그는 분명 이곳에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나의 움직임을 이토록 세세히 알 수 있다는 말인가? 남태천이나 황제 따위는 나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 그들의 행동은 예측 가능하기 때문에 그에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제까지 활개를 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이 예측은커녕 정체조차도 모르는 그자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움직이겠어. 나의 최후세력을 동원해서라도 그를 무림으로 끌어내어 제거하겠다. 내 모든 조직과 힘을 쏟아 넣으면 그를 제거할 수 있으리라. 이 정도의

 조직은 십 년 정도만 투자하면 재정비 할 수 있다.'

총령의 두 눈은 굳은 의지로 불타고 있었다.

"취곤을 불러라."

"예."

'그래 더 이상 움츠릴 수만은 없다.'

총령은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제19장  태상황의 서거(逝去)



뿌드득―! 뿌드득―!

눈이 밟히는 소리가 장백산에 울려 퍼졌다.

유월인데도 장백산의 정상에는 두꺼운 서리가 내려있었고 겨울의 눈이 채 녹지 않고 있었기에 발걸음을 떼기가 힘들 정도였다.

이 정상에 무장차림의 사나이들과 매화꽃으로 수가 놓아진 백색 문사건을 하고 검은빛 장삼을 걸친 누루하치〔태조(太祖)〕, 그리고 눈 위에 핀 꽃 같은 분홍빛 요선천익(腰線天益)을 입은 태종(太宗) 홍타시가 서 있었다.

홍타시는 열 살 남짓의 소년이 되어 있었다. 소년 홍타시의 얼굴은 도화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직 태양이 떠오르기에는 이른 시각이기에 대지는 숨을 죽이고 있는 듯했다.

동쪽 하늘로부터 여명이 비치기 시작했다.

소년 홍타시의 눈에서는 웅심이 활활 타올랐다.

"극(極)아!"

누루하치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대지를 돌아보는 그의 눈에는 야망이 타오르고 있었다.

"예, 아버님."

누루하치는 북서 편에 자리한 광활한 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것들을 보면 무엇을 생각하느냐?"

"대지이옵니다."

"대지라고? 무슨 뜻이냐?"

소년 홍타시는 아버지 누루하치를 보며 말했다.

"예, 제가 지배해야 할 대지입니다."

"허허허허! 그렇지 암, 그렇고 말고."

누루하치는 아들의 당돌한 말에 대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아들이 대견스러워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까지 했다.

"너의 증조부와 조부는 야망이 없으셨다. 그랬기에 명의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하셨지. 그러나 너만은 달라야 한다. 사내는 그 그릇이 클수록 더욱 큰 일을 할 수 있는 법이니라. 알겠느냐?"

"예."

"훗날 내가 이루지 못한다면 네가 그 뜻을 이뤄 네 증조부와 조부의 한을 갚아드려야 하느니라."

"예, 알겠습니다."

누루하치는 자신의 아들을 꼭 껴안고는 눈앞에 넓게 펼쳐진 대지를 가리켰다.

"중원은 넓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수천 배는 넓지.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 부자가 정복해야 할 땅이며 정복할 땅이다. 아들아 보아 두거라. 언젠가 저 천하가 네 발 아래 숨죽일 날이 올 것이다."

이 순간 어린 홍타시의 눈에는 야망의 그림자가 비쳤다. 지금 그는 아로새겨 넣고 있었다. 언젠가 자신이 다스리게 될 저 넓은 세계와 땅덩어리들을.......

이제는 태양이 완전히 솟아있었다.

*               *               *

주익균은 단 위 보좌에 앉아 조선의 사신(使臣)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래 조선에서 어인 일인가?"

황제의 물음이 끝나자 이덕형은 다급히 아뢰기 시작했다. 사신으로 파견된 이덕형은 머리를 짓찧으며 조선의 정세를 알리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절절함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황제 폐하. 저희 조선에서는 십오만 명의 일본군이 쳐들어와 약탈과 파괴를 일삼고 있으며 강산이 유린당하고 있습니다. 이에 주상께서는 황제폐하께 도움을 요청하시었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래, 주상은 지금 어떡하고 계신가?"

이덕형은 피를 토하는 음성으로 말했다.

"주상께서는 밀려오는 일본군을 피해 평양을 버리시고 영변(寧邊)으로 피하시는 것을 보고 왔습니다."

주익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극박한 상황이구려."

"그렇습니다. 폐하, 저들은 우리에게 길을 비켜달라고 했거니와 상호수호조약을 요구하며 폐하를 치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전심전력으로 막아내고 있사옵니다. 저희 나라의 고충을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덕형의 목소리가 너무도 비통하여 장내는 숙연해지고 말았다.

만조백관 등이 좌우로 나열해 있었으나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알았소. 잠시 물러가 있으시오."

이덕형이 물러가자 좌우 도어사 운위량(雲位兩)이 앞으로 나와 간하였다.

"황상, 신 운위량 아뢰옵니다."

"어사, 말해 보시오."

"우리 실정으로는 조선을 돕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되옵니다."

"무리라......."

"위에서는 달단이, 밑으로는 대월이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외의 적들이 우리를 노리고 있는 데다 누루하치는 공공연히 세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사람이라 하지만 훗날도 그가 우리 사람으로 남아있을지 염려가 되옵니다. 우리 군사를 파병하는 것은 그들이 세를 넓히는 기회를 주는 것과 같사옵니다. 먼저 우리의 국세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 옳은 듯 하옵니다."

그러나 상서(尙書) 군귀량(軍貴量)이 앞으로 한 발 나서며 운위량의 발언을 반박하고 나섰다.

"황상. 조선은 그 동안 우리 명(明)에게 신(臣)의 예(禮)를 다해왔습니다. 군신(君臣)의 의(義)를 져버린다면 어느 누가 황상의 앞에 무릎을 꿇으오리이까? 게다가 일본의 의도는 분명 우리 명을 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막고 있는 조선을 우리가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의를 버린다는 것과 같고 황상의 위명에 먹칠을 하는 것과 같사옵니다. 그들이 조선을 정복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곧 명을 먹으러 중원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장내는 군신들의 의견이 엇갈리면서 소란해졌다. 주익균은 군신들의 의견을 듣다가 소란해지는 장내를 바로 잡으려 목각을 치게 했다.

딱,딱,딱,딱!

그리고 장내의 소란이 줄어들자 주익균이 입을 열었다.

"대장군은 어찌 말이 없으시오?"

주익균은 장내의 소란을 묵묵히 바라보고 서 있던 대장군 천위성에게 물었다.

"신 대장군(大將軍) 천위성(天胃星) 아뢰옵니다."

천위성은 앞으로 나와 읍을 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신은 우선 조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그렇소?"

"황상께서 그들을 돕지 않으시면 첫째 위엄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다른 소국들의 불신임을 얻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 대명을 얕잡아 보는 마음이 생겨 난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그리되면 혼란이 더욱 가중되어 지금보다 더욱 어려운 국면에 접하게 될 것이옵니다."

"그럼 다음은 뭐요?"

"둘째로는 일본이 조선을 점령한다면 누루하치와 동맹을 맺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적의 세력을 크게 키워주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그의 말에 주위의 군신들은 수긍하는 빛을 띠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풍신수길은 야심에 찬 인물입니다. 오히려 그 도가 지나친 인물입니다. 그는 조선을 정복하고 나면 우리 명을 노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주익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 알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               *

다음날 아침 주익균은 이덕형을 불러오도록 했다.

잠시 후 이덕형이 들어서자 주익균이 이덕형과 만조백관에게 선포했다.

"우리는 조선과 오랜 시간 군신의 예를 다해왔소. 또한 그들은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고 있소. 짐은 그들을 돕기로 결정했소. 부도어사(副都御使) 이여송(李與頌)을 제독으로 임명하고 사만삼천의 군사를 줄 테니 대명의 신위를 떨치도록 하시오."

이덕형은 눈물을 흘리며 절을 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부도어사 이여송이 자리에 나와 읍을 하며 말했다.

"신 이여송 신명을 다해 싸우겠습니다."

이른 아침, 막불은 마당가에 앉아 있었다. 따뜻한 햇볕이 그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막불은 자신의 이 평화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곧 이 모든 것들과 이별을 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도 말이다.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여보! 왜 그래요? 무슨 일이 있나요?"

성숙랑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막불의 갑작스런 행동에 의아스러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자꾸만 걱정이 됐다.

"난 이렇게 앉아 있으면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것이 느껴져. 마치 말이야, 한 점의 걱정도 없는 어린아이가 된 듯한 느낌이거든. 당신은 안 그래?"

막불은 그녀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녀를 볼 때마다 미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가 전장을 누비고 다니는 동안 벌써 십여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이미 서른이 넘어버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그는 보지 않아도 알았다. 그녀는 밤마다 자신을 위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말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만약에 말이야."

"예?"

막불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만약에 내가 없다면 당신은 어떡하겠어?"

"어머, 당신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당신이 없다니 갑자기 뜬금 없이?"

막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성숙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다지 특색이 있거나 아름다운 얼굴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하염없이 포근하고 편안한 얼굴을 갖고 있었다.

항시 바보 같을 정도로 웃음만 짓는 그녀가 막불은 너무도 고마웠다.

'어떡해야만 하는가?'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사지를 향해 떠난다. 재가를 하든 다른 남자를 만나 살림을 차리던지 맘대로 해라'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막불은 고뇌에 찬 모습으로 앉아 있었고, 그런 막불을 바라보던 성숙랑은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막불은 삼 년만에 검을 손질했다. 이제는 하도 갈아서 날이 처음에 반도 안될 정도였다.

스윽―! 스윽―!

검에 묻은 녹 가루가 그의 손에 의해 떨어져 나가고 시퍼런 검신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가 검을 갈기 시작한 지 세 시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검은 이제 제 모습을 찾고 있었다.

그는 군에 들어가면서 그의 전 재산인 은 닷 냥을 주고 이 검을 고물상에서 처음 샀다.

고물상 주인 말로는 이 검의 주인이 한 노병(老兵)이었는데 자신의 아내가 아파 약값을 하려고 급히 내 놓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검의 주인을 찾아가 그 당시 자신이 지니고 있던 돈을 모두 줘버렸다.

그 노병이 내 놓은 가격은 은 한 냥에 불과 했음에도 그는 은 닷 냥을 모두 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는 십여 년의 세월을 같이 보냈다. 이제는 그 검이 자신의 피붙이인 것처럼 느껴졌다.

검은 그 동안 많은 전쟁터를 누비고 다녀서인지 당시보다 짧아져 있었다.

마치 검이 아니라 도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래, 그 많던 동료들은 가고 너와 나만 남았구나."

막불은 망연히 중얼거렸다. 그는 황제의 말이 생각났다.

<그대는 이 나라를 위해 죽을 수 있겠는가?>

그는 마음 한 구석에서 통렬히 외치고 있었다.

'이 나라가 나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가? 무엇을 해 주었다고 나에게 이런 고통스러운 짐을 떠맡기는 것인가?'

그러나 그는 스스로도 이런 준비를 하고 있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내 주위에 있는 이 선량한 사람들이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서일 뿐이다. 이따위 껍질뿐인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다."

휭―! 서걱―!

앞에 놓여있던 복숭아 나뭇가지가 잘려나갔다. 검이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음에도 나뭇가지는 깨끗이 잘려나갔다.

그의 검은 검은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서늘할 정도의 푸르스름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이는 많은 이의 피가 이 검에 스며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검은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막불이 자신의 검을 갈고 있을 때 성숙랑은 막불의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막불이 다시 전장으로 나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애써 검을 갈고 있지 않을 것이다.

지난 삼 년은 그녀에게 행복하면서도 불안한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황제의 밀서가 도착하자, 그녀는 직감적으로 다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던 것이다. 자신이 그를 잡으면 그는 편하게 떠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도 알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를 보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소망이 왜 이리 이루어지기 힘든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남편과 단 둘이 조용히 살고자 하는 것이 그녀의 모든 소망이었다.

그러나 하늘은 그 작은 소망마저도 용납하지 않았다.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이 그녀와 남편만큼은 비켜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지금도 밖으로 달려나가 그의 남편을 말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남편은 떠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조용히 보내주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러나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이 되어도 감정이 그렇게 따라주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지경이었다.

"흑―!"

그녀는 침상에 엎드려 소리 죽여 울었다. 왠지 이제 떠나면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불안함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흑흑, 왜...... 당신은 또 다시 떠나야만 하는 건가요? 왜 우리는 남들처럼 살 수 없는.......'

*               *               *

이제는 가을로 접어들어 밤이면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북경은 유난히 겨울이 빨리 찾아온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가을을 누릴만한 여유가 없다. 그런데 오늘밤은 이것이 가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알 수 없는 묘한 정취가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 그랬던가?

하늘에 뜬 달이 슬퍼 보이면 그것으로 가을이 온 것이라고. 어쩌면 가을은 우리의 마음이지도 모르겠다.

딱―! 딱딱―!

두 개의 나무를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는 황궁에서 교대를 알리는 소리였다.

교대 자들은 그들이 배정 받은 자리에서 암호와 작은 나무패를 받는다. 이것이 교대의 모든 것이었다.

중궁전(中宮殿).

황제의 아버지인 태상황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이곳은 황궁의 삼대 금지(禁止) 중 하나였다.

이곳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으며, 황제마저도 이곳에서는 함부로 행동 할 수 없었다.

그런 곳인 관계로 이곳의 경계는 다른 곳보다 더욱 심했다. 한 걸음 건너 한 사람씩 보초가 배치되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방안, 거대한 침상이 놓여 있었고 침상 위에는 금침이 덮여있었다.

침상의 사각을 이루는 기둥에는 금과 옥 등 보석으로 이루어진 장식물들이 호화롭게 붙어있었다.

그리고 그 침상 위에는 융경제 주재후가 잠들어 있었다. 그 옆으로는 황녀 진위령이 잠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누가 흔들어도 모를 만큼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이때 그들 앞에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 사나이는 태상황의 막역지우인 달대대사였다. 이 야심한 밤에 그는 왜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달대의 얼굴에서는 평소와는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그는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걸고는 황제의 곁으로 가서 자신의 품에서 꺼낸 단검으로 잠들어 있는 황제의 가슴을 힘껏 찔렀다.

푸욱―! 푹―!

무려 다섯 차례의 칼질이 이어졌고 그로 인해 솟아 나온 피로 금침은 얼룩져버렸다.

자는 순간에 당해서 그런지 태상황은 비명소리 한 번 못 지르고 즉사를 했다. 이상한 것은 진위령조차도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달대는 그런 태상황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진위령의 손에 자신이 들고 있던 칼을 쥐어주었다. 그러고는 싸늘한 미소와 함께 돌아 나왔다.

다음날, 시녀인 취취는 조심스레 찻잔이 얹어진 쟁반을 들고 중궁전을 향해 걷고 있었다. 한 방울이라도 흘릴 새라 그녀의 발걸음은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혹시라도 흘린 흔적이라도 보인다면 날벼락이 떨어질 것이 틀림없으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몇 개인가의 전각들을 지나 드디어 중궁전 앞에 이르렀다.

"누구냐?"

문 앞에서 보초를 서던 위사들 중 하나가 소리쳤다.

그녀와는 벌써 수십 번째 마주쳤지만 그는 늘 같은 질문을 던지고, 똑같은 검사를 했다.

그녀의 몸을 뒤져 무기가 될만한 것은 없는지,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든 쟁반에 무기를 숨길만한 장소는 없는지를 뒤지는 것이다. 그 후에야 그녀는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그녀는 손에 쟁반을 받쳐들고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들어섰다.

긴 회랑을 따라 돌아 들어가면 문이 나오고 그 문 안에는 황제의 침소가 자리하고 있다.

그녀는 침소를 들어가는 문 앞에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녀가 막 문을 열고 들어서는 찰라, 그녀의 이 평온한 하루는 끝이 나버리고 말았다.

"까아아악!"

"뭣이?"

침소에서 일어난 주익균은 갑작스런 비보를 들어야만 했다. 그는 의관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채 중궁전을 향해 달려갔다.

그곳에는 예조, 병조 등 각 판서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침상은 누구도 손대지 않은 태상황의 시체와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고, 그 위에는 그 피를 보며 넋을 놓고 있는 진위령이 앉아 있었다. 또한 진위령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침상을 포위하듯 위사들이 발검(拔劍)한 채 늘어서 있었고, 그 뒤로 문무관리들이 서 있었다.

이곳에 서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이는 어디에선가 반란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보다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주익균이 들어서자 그들은 모두 황제인 그에게 읍을 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주익균은 그런 일 따위에는 관심 없다는 듯 호위장에게 물었다.

"예, 오늘 아침 시비에 의해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태상황후의 손에서 살인에 쓰인 흉기가 나왔습니다."

"시각은?"

황제의 물음에 어의가 대답했다.

"어젯밤 이 경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황제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 진위령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외쳤다.

"저년을 당장 잡아들여라. 어서!"

"옛!"

진위령은 압송되어 끌려나갔다. 그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그녀로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진위령이 끌려나가자 황제는 외쳤다.

"이 사건은 없었던 것으로 한다. 상황전하는 갑작스런 병환으로 승하하신 것이다. 이 외에 다른 소문이 나돌 경우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네놈들은 모두 역적으로 간주하겠다. 그리고 후일에라도 이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역시 역도로 몰아 극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황제는 돌아서며 말했다.

"예조판서는 천품제일예관으로 봉하고 태상황 전하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를 것이며 이에 전 백성이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장례가 있는 동안은 국가 존망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모든 행사나 의식은 금한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그곳에 자리한 모든 사람들은 배례를 하며 외쳤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는 죽어버린 아버지의 모습은 쳐다볼 생각도 않고 그렇게 나가버렸다. 그가 얼마나 아버지를 미워하는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콰앙―!

주익균은 화병 하나를 벽에 던져버렸다.

그의 이런 모습은 평상시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는 야망에 불타면서도 늘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항상 싸늘하게 보이기까지 했던 그였다.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허수아비를 내세워 자기 대신 황제의 역할을 하게 했을 정도로 용의주도하기도 했다.

"빌어먹을! 그자의 목을 베어야 하는 자는 내가 되었어야만 했다. 나의 어머니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내가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그 수모 속에서 자라야만 했던 그 아픔을 그에게 그대로 돌려주려 했다. 그런데 이렇게 허망하게 가버리다니. 도저히 용서 할 수 없다. 그자는 내 손에 죽었어야 했어! 바로 내 손에!"

주익균은 한참을 미친 듯이 발광을 하다 의자에 걸터앉아 움직이지 않고 또 다시 몇 시진을 보냈다.

그러더니,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자를 이용하면 되겠군. 야망이 많은 자이니. 배반을 꿈꾸게 해야겠어. 그리고 나의 아버지....... 흥! 당신은 죽었지만 원수는 갚아야겠지."

상국사(相國寺).

황궁 안에 자리한 유일한 절이다.

태상황의 지기이자 고승인 달대대사가 기거하는 이곳은 어수선한 밖과는 달리 너무도 고요했다.

달대대사가 아침 염불을 끝내고 막 공양을 받으려는 순간이었다.

"대사님."

"허허, 무슨 일이냐?"

천우가 호들갑스럽게 달려왔다.

달대대사의 얼굴은 떡 반죽을 하다 만든 것으로 사람의 얼굴을 만들어 놓은 듯했다. 어지간한 사람은 마주 바라보기도 거북할 만큼 흉측한 얼굴이었다.

천우는 그런 달대대사의 얼굴에 익숙해져 있는지 전혀 상관을 하지 않았다.

"태상황께서 승하하셨습니다."

천우는 침울하게 말하면서 슬퍼할 달대대사를 상상했지만 들려온 소리는 너무도 덤덤한 목소리였다.

"그래."

자신의 친우가 죽었다는 사실을 듣고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달대는 그저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대사님!"

천우는 대사의 모습이 의아스러워 한 번 더 불러보았으나 대사의 행동은 여전했다. 그의 생각으로라면 지금 그는 태상황의 빈소를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식사를 하고 있었다.

천우로서는 이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한 저 모습은 무엇인가?

갑자기 해골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천아가 막 돌아서려 했을 때였다.

"천우야."

"예."

"가사를 챙겨 오너라."

"예."

천우는 이제서야 대사가 중궁전으로 갈 생각인 듯 하여 날랜 몸 동작으로 뛰어 들어가 벽에 걸린 가사를 집어들었다. 말이 좋아 가사지 이건 아예 걸레가 다 되어 있었다. 얼마를 기웠는지 마치 천 조각을 이어 옷을 만들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여기 저기는 삭아 잘못 만지면 부스러져 버리는 것이었다.

"내, 오늘 시내에 좀 다녀와야겠다."

"예?"

가사를 받아 입은 달대의 갑작스런 천우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아니 갑자기 미치기라도 한 것인가? 이 경황 중에 저런 말씀을 하시다니?'

달대는 휘적휘적 문 밖으로 나섰다. 그러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생(生)이란 것, 업인 것을 그대는 이제 업을 덜었구료. 그래, 나도 이제는 떠나야 할 때가 된 것 같군."

이 무슨 소리인가?

태상황을 시해한 자가 바로 그이지 않는가? 그런데 그가 이런 소리를 읊조리다니? 그리고 떠난 다는 건 무엇일까?

그런 달대를 천우는 멍청히 바라보고 있었다.

*               *               *

"세상은 나약한 자들보다 간악한 자들이 살기 좋도록 되어있지. 어설픈 악당이 아닌 진짜 악당 말이야.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자네이지 않은가?"

남태천은 백천우에게 말했다.

백천우의 얼굴은 그늘에 가려져 반쯤밖에는 드러나 있지 않았다. 나머지 반쪽마저도 백천우는 검은 천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은 예전의 백천우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불에 그을려 일그러진 얼굴에는 각종 흉터들이 거미줄처럼 얽혀있었다.

마치 잘 다져놓은 고기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마치 잘 갈아놓은 검에서나 느낄 수 있는 섬뜩함과 사악함이었다.

"당신 역시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잖는가? 나보다도 더한 진짜 악당이 바로 당신일 텐데."

"글쎄!"

"난 일만오천의 군사들을 이끌고 옥문관을 넘어 빙궁을 향했지. 그리고 당신이 비밀리에 전한 서찰대로 사막을 넘어 빙궁으로 향해 진군해 갔었다. 그런데 자네는 나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야. 우리를 사하(沙河) 속에 몰아 넣다니. 그 덕분에 대부분은 죽었지만 그래도 죽지 않은 자들과 난 대적해야만 했다. 그들은 사하가 나타나는 순간 내가 배반했다는 것을 알아버렸거든. 그리고 난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어야 했지."

백천우는 남태천을 싸늘히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대는 이렇게 살아 돌아왔지 않은가?"

"그래, 그랬지. 그 덕분에 옛날 마교의 비동을 찾아 열 수 있었던 것이니까? 그러나!"

화악―!

백천우가 뒤집어쓰고 있던 검은 천을 벗어 던졌다.

"얼굴의 반쪽은 그나마 썩어버렸다. 시독에 내 몸은 썩어 들어가고 있다."

남태천은 얼굴을 찌푸렸다.

"어때, 볼만한가?"

백천우의 어투는 점차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는 분을 감출 수 없어서 점점 남태천을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곧 백천우의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 다섯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로는 백천우의 일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크아악―!" "커억―!"

단 한방에 모두 목이 날아가 버렸다.

그러고 나서 백천우가 남태천의 목덜미를 움켜잡는데는 숨 한 번 쉬는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어때? 나는 고강해졌다. 그럼에도 너와 손을 잡은 것은 모두 네놈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너는 나를 원상태로 돌려 놓아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남태천은 고개를 저었다.

"이 손을 놓아 주실까?"

백천우는 일그러진 얼굴로 남태천의 목을 움켜잡은 손을 놓았다.

"그래, 자네의 말대로 나는 자네의 모습을 바꿔줄 수가 있네. 그러나 거기에는 많은 노력과 시간, 그리고 돈이 들어가지. 내가 왜 자네를 위해 그런 일을 해야 하지?"

백천우는 소리쳤다.

"왜? 왜냐구? 네놈은 나를 기만했다. 네 녀석이 날 이렇게 만들어 놓지 않았느냐!"

"호! 그래. 그럼 총령에게 찾아가 그렇게 말해 보시지. 내가 만약 네놈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총령에게 알리면 어떻게 될까? 그 완벽주의자인 총령이 너를 살려 두려 할까? 옛말에 한 손이 열 손을 당하지 못한다고 했다. 지금 네놈이 아무리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총령의 친위대 전부를 당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백천우의 얼굴은 더욱 심하게 일그러졌다.

"크윽―!"

"내게 좋은 생각이 있다. 네가 나를 돕는 것이다. 내 일을 도와주면 나는 너의 도움으로 총령을 제거하겠다. 그런 후 너의 모습을 돌려주지. 네 본모습으로 말이야. 그리고 이후는 네가 어떻게 하든지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백천우의 눈에서는 퍼런 안광(眼光)이 번져 나왔다.

"어떤가?"

백천우는 남태천의 말을 듣다 고개를 들었다.

"좋다. 네놈이 하자는 대로 해주지. 그러나 또 다시 나를 기만하거나 배반한다면 더 이상 용서하지 않겠다."

남태천은 환하게 웃었다.

"좋아. 그건 당신의 자유니까."

그렇게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또 다른 장소에서 한 사나이는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휘영청 뜬 달을 바라보며

떠난 님이 그리워 울다

잠이 들어 깨어보니

이슬에 젖은 옷이 축축하다.

이 옷이 마르면 가신 님 오실까?

내 마음이 젖으면 가신 님 오실까?

마음을 둘 곳 없어 술잔을 베고 다시 누워 본다.>

사마적은 창가에 기대어 앉아 자작시를 읊고 있었다.

누굴 생각하는 것인가? 그의 눈빛은 너무도 애절한 빛을 띠고 있었다. 금세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그런 슬픔이 묻어 나왔다.

그는 지난 삼여 년을 복수를 위해 뛰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적으로 인식되는 자들을 모두 죽였다. 그로 인해 홍화객이란 이름이 바쁘게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의 마음은 공허해져만 갔다. 이제는 누굴 위한 복수인지조차도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버린 것이다.

그의 전쟁은 이제 소강상태가 되어버렸다. 지루한 소모전만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부하들은 자신을 불신하고 있었다. 복수라는 명분 아래 자신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듯 보였다. 부하들을 위하지 않는 주인으로부터 그들의 마음은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그의 명을 따르는 것은 홍화객이란 이름 때문일 것이다. 홍화객이라는 이름의 그림자가 얼마나 컸는지 알만 하였다.

그는 한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계략을 실행시키기 위해서 범했던,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그렇게 조용히 희생되어버린 여인 신예원이었다.

"후!"

사마적은 쓴웃음을 지었다.

"때가 되고 있다. 이 기회에 모든 것이 끝나야 된다. 그리고 그 후에 그녀를 찾아가리라."

사마적은 한 모금의 술을 자신의 목으로 넘겼다.

알싸한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크윽―!"

사마적은 눈을 지긋이 감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몸에서 배어 나오는 그 쓸쓸함은 지워지지 않았다.

*               *               *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번 일은 꼭 성공해야만 할 것이야. 그것이 그대와 그대의 가족이 살아 남는 일이다."

막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한 자루의 은자를 내 주었다.

"네가 죽어도 걱정은 하지 마라. 네 가족들의 안전과 생활은 우리가 보장하겠다. 어떤가?"

"좋습니다."

막불은 사내의 손에서 낚아채듯 돈 자루를 잡아채 돌아섰다. 집 안에서 몰래 그를 지켜보고 있는 성숙랑의 눈길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미 배는 강을 건넌 것이다.

그는 이틀 후 아침, 이곳을 떠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집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자들이 서슴없이 그의 아내와 그 자신을 죽이려 할 것이다.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부모님과 그 외 친척들의 집도 암암리에 감시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왜 굳이?'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이들에게 지목되어야만 할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무공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특출하게 두각을 나타낸 것도 없다. 단지 십여 번의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것밖에는 없었다.'

그런 이유로 자신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살아야 한다. 어떻게든.'

성숙랑은 몇 번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임신이에요. 당신의 아이가 생겼어요."

그녀는 몇 번을 망설였다.

웬 일인지 그에게 이런 말을 하려하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이었다. 그 앞에서는 말문이 콱 막혀버리는 것이었다.

삐이걱―!

그녀는 다시 한 번 마음을 굳게 먹었다.

'기필코 말하고 말리라.'

"저......."

그러나 들어온 남편을 보고는 역시나 말문이 막혀버렸다.

"응?"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식사하셔야죠?"

"그래."

둘은 말없이 음식을 먹었다. 음식이래야 아침에 만들어 놓은 국물에 국수를 삶아 넣고 간장으로 간을 해 먹는 것이 다였다.

거기에 닭발 하나를 얹어 놓는 것이 그들에게는 최고의 사치였다.

말없는 식사가 계속 이어졌다. 그때 막불이 맨 처음 입을 열었다.

"나, 잠시 어디를 좀 다녀와야겠어."

성숙랑은 말을 할 수 없었다.

말을 했다가는 마구 그에게 매달려, 가지 말라고 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저 음식에 코를 박고 먹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아마 오래 걸릴 거야. 몇 달이 걸릴지도 모르겠어."

막불 역시 뭔가를 더 말하려다 입만 달싹거린 후 자리에서 일어서 나갔다. 성숙랑은 갑작스럽게 설움이 복받쳐 울음을 울었다.

"흐흐흐...... 흑흑......."

집 안에는 고요한 정적과 그녀의 흐느낌만이 가득했다.

이틀이라는 시간은 길게 느끼면 너무도 긴 시간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도 한 순간처럼 짧게 느껴졌다.

그리고 드디어 막불이 떠나는 아침, 성숙랑은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장수면(長壽 )을 만들었다.

본시 장수면은 육십이 넘었을 때 회갑을 맞이해서나 먹는 것이었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이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장수면에는 그가 살아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었다.

그녀가 장수면과 소채 등 여러 음식을 탁자 위에 늘어놓자 막불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먹기만 했다.

그들은 원래 말은 많이 하지 않았지만 항상 훈훈한 분위기로 살아 왔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지만 지난 이틀 동안 그들이 나눈 얘기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로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의 훈훈한 기운도 느낄 수 없었다.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건  걱정스러움과 미안함, 그리고 절망감이었다.

탕! 탕! 탕―!

이때, 누군가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막불은 검과 봇짐을 챙겨들었다.

그리고는 무뚝뚝하게 한 마디 던지고 나가버렸다.

"다녀오겠소."

성숙랑은 그가 다정한 말 한 마디를 해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꼭 돌아올 테니 기다려 달라던가, 아니면 고생이 되겠지만 참아달라던가 아주 짧은 말이라도 좋으니 그녀를 안심시켜줄 말이 그녀에게는 필요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기대는 무참히 깨져버렸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탁자에 기대어 울음을 터뜨리는 것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