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01 소이비도 제1권 운명의 실타래는 이어지고







운명의 실타래는 이어지고



몰아치는 차가운 북풍(北風)은 마치 칼날처럼 예리했다. 대지를 철판처럼 꽁꽁 얼어붙게 만든 한파는 마치 세상에 있는 모든 물건을 냉동시키려 하는 것 같았다. 쉴새없이 휘몰아치는 함박눈은 산처럼 쌓여 끝이 없는 은색(銀色)의 세계를 이루고, 그토록 기승을 부리던 폭설과 싸늘한 바람도 끝이 있는 듯 천천히 멈추어졌다.

이때, 한 대의 마차가 북방(北方)으로부터 천천히 달려왔다. 수북이 쌓인 눈 위를 구르는 마차바퀴 소리가 마치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처럼 들리며 고요한 적막을 깨고 분명하게 들려왔다.

초류빈(楚留賓)!

그는 기지개를 쭉 켜더니 털가죽에 싸여 있는 다리를 될 수 있는 데까지 편안하게 뻗었다. 마차 안은 비록 따스하고 편안했지만, 이 여행은 너무나 길고 지루하며 또 적적했다. 초류빈은 심한 권태를 느꼈다. 그는 적적하고 외로운 것을 가장 싫어했다. 그러나 싫어하면서도 때로는 고독을 즐겼다.

'하기사 세상살이란 본시 모순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라 그 누구도 어찌할 수가 없는 거야.....'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초류빈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더니 마차 한구석에서 술병을 꺼내어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곤 심한 기침을 연발하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나오는 기침 때문에 그의 병자같이 창백했던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다. 그것은 마치 지옥의 불길이 그의 육체와 영혼을 불태우는 것과도 같았다.

초류빈은 술병이 비자 즉시 작은 칼을 하나 꺼내더니 나무 토막을 깎아 사람의 형상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칼날이 무척이나 예리하여 나뭇조각은 마치 가을 낙엽처럼 그의 손이 놀리는 대로 떨어져 나갔다. 그는 여인을 조각하고 있었다. 인형의 곡선과 윤곽은 더할 수 없이 부드럽고 뚜렷했다. 목각인형 이 완전히 만들어졌을 때는 마치 살아 숨쉬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지경이었다.

그는 비단 이 여인, 즉 목각인형에게 형태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생명과 영혼까지 안겨다 주려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생명과 영혼이 자신이 움직이고 있는 칼날에 따라 서서히 사라지는 듯한 환상을 느끼는 듯했다.

초류빈의 두 눈은 특이하게 생겼다. 그의 눈동자는 마치 봄날에 막 자라나는 풀처럼 초록빛을 띠고 있는 듯했고 마치 봄바람에 흔들리는 수양버들처럼 부드럽고 영활해 보였다. 뿐만 아니라 한여름에 태양빛이 반사되는 바닷물처럼 사람들에게 유쾌함을 주는 활력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초류빈은 완성된 여인의 목각인형을 멍하니 넋을 잃은 채 내려다보았다.

그의 두 눈엔 짙은 우수가 가득차 있었다. 오랜 시간 여인의 인형만을 뚫어지게 내려다보던 그는 갑자기 마차의 문을 열고 땅으로 뛰어내렸다. 마차를 몰고 가던 대한은 이것을 보자 급히 소리를 질러 마차를 세웠다. 마부는 텁석부리 수염을 기르고 날카로운 눈초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초류빈에게 닿았을 때는 더할 수 없이 부드럽고 충성과 연민의 빛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런 모습은 마치 주인을 대하는 충성스런 맹견(猛犬)과도 같은 것이었다.

초류빈은 눈이 덮인 땅을 두 손으로 파헤쳐 조각된 여인의 인형을 묻어 주고는 그 앞에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손은 혹독한 추위에 이미 얼어 버렸고 얼굴도 빨갛게 변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이런 행동을 보았다면 매우 놀라고 또 의아해 할 것이다. 하지만 마차를 모는 대한은 이런 것이 습관이 된 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또 날도 곧 어두워질 것 같으니 어서 마차에 오르십시오."

초류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몸을 돌리려 하다가 마차가 서 있는 옆으로 매우 깊이 찍힌 사람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마차 앞으로 끝없이 이어진 발자국은 매우 깊이 찍혀진 것으로 보아 먼 길을 걸어와 몹시 피곤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두커니 서서 발자국을 내려다보던 초류빈의 두 눈이 흥미롭다는 듯이 반짝이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런 엄동설한에 빙판을 걸어왔다니 매우 고독하고 가련한 사람이 분명하겠군."

그러자 텁석부리 사나이가 암암리에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받았다.

"도련님께서는 더욱 고독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초류빈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안 좌석 밑에는 적지 않은 통나무들이 쌓여 있었다. 초류 빈은 그 중 하나를 꺼내 다시 조각하기 시작했다. 그 수법은 매우 노련했으나 그가 조각하고 있는 사람은 항상 같은 여인이었다. 이때 그의 귓전에 말발굽 소리보다 훨씬 낮은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초류빈은 기대하고 있던 소리라 하던 동작을 멈추고 마차의 휘장을 걷고 밖을 내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마차 밖에는 외롭게만 느껴지는 한 명의 인영이 매우 느린 속도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으며 정지하거나 쉬지 않았다. 더구나 마차가 뒤따라 달려가는 소리를 충분히 들었을 텐데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으며 매우 얇은 옷을 입고 있었다. 모자도 쓰지 않은 머리 위에 쌓였던 눈이 서서히 녹아 그의 목줄기를 타고 몸 안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도 움츠리거나 떨지 않고 계속 걸음을 옮겨갔다. 마치 쇠로 만들어진 몸뚱이를 지녔기 때문에 어떤 고난이라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차가 가까이 달려가자 초류빈은 상대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짙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두 눈, 얄팍한 입술이 굳게 닫혀 있는 사나이였다. 게다가 우뚝 솟은 콧날이 더욱 얼굴을 야위어 보이도록 했다. 이런 얼굴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화강암과 같은 강인함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어떤 일에 대해서는 믈론,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까지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 다.

초류빈은 입가에 보기 드물게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마차의 문을 열더니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마차로 올라오게. 내가 태워다 주지."

그의 말은 비록 간단하기는 했지만 감히 쉽게 거역하지 못할 힘이 들어 있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라도 이렇게 끝없는 빙판 위에서 이런 제의를 받는다면 결코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청년은 이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걸음만 옮길 뿐이었다.

"자네 벙어리인가?"

초류빈이 다시 묻자 청년의 손이 갑자기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으로 옮겨졌다. 그것은 장검이라기보다는 어린아이 장난감처럼 생긴 한낱 쇠붙이에 불과했다. 청년의 손은 이미 얼어 붙어 구운 생선의 속살보다 더 하얗게 변해 있었지만 동작은 매우 유연했다.

초류빈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자네는 벙어리가 아닌 것 같군. 그렇다면 올라와서 우리 술이나 한 잔 같이 하세."

청년은 갑자기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술을 마실 수 있는 형편이 못됩니다."

초류빈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술은 내가 내는 것이지 자네더러 돈을 내라고 하지는 않겠네."

청년은 당면하고 있는 추위만큼이나 더욱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산 물건이 아니면 절대로 손에 넣지 않고 내가 산 술이 아니면 절대 마시지 않겠소. 내 말을 알아들으셨습니까?"

초류빈은 고소를 금치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알아들었네."

청년은 계속 앞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알았으면 그만 가 보시오."

초류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갑자기 소리없이 웃으며 다시 물었다.

"자네 말대로 그냥 가겠네. 그러나 자네가 술을 사 마실 수 있는 형편이 되면 나에게 한턱 내겠는가?"

청년은 부리부리한 눈을 들어 초류빈을 한참 응시하다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때가 되면 기꺼이 사 드리겠소."

"좋아! 하하하....."

초류빈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객잔 앞에 있는 주막에는 양피로 된 외투를 입은 대한들이 때때로 출입을 하고 있었다. 술을 마신 몇몇 사람들은 일부러 앞가슴 옷을 풀어 헤쳐 추위를 타지 않는다는 것을 과시하기도 했다.

초류빈이 이곳에 당도했을 때는 객잔에 빈 방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세상에 돈을 줘서 안 되는 일이 매우 드물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주막으로 들어간 그는 술과 요리를 시킨 후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그는 술을 별로 급히 마시지는 않으나 쉬지 않고 몇 날 며칠을 마실 수 있었다. 계속 술을 마시고 계속 기침을 하는 동안 날은 점차 어두워졌다.

이때, 텁석부리 대한이 들어와 그의 뒤에 서서 말을 꺼냈다.

"남쪽에 특실을 구하고 청소까지 깨끗이 해 놓았습니다. 도련님께선 어서 들어가 쉬십시오."

초류빈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한 잔의 술을 쭉 들이켰다.

텁석부리 대한이 다시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금사표국의 사람도 이 객잔에 있습니다. 보아하니 방금 새외에서 표물을 갖고 돌아온 것 같습니다."

"그래? 표물을 호송하는 자는 누구인가?"

"바로 급풍검(及風劍) 제갈뢰(諸葛雷)입니다."

이 말을 들은 초류빈은 갑자기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그놈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니 쉬운 일이 아니었겠군."

이때 뒤에 있는 문으로 세 명의 장한이 걸어 들어왔다. 그들은 매우 큰소리로 강호상에서 벌어졌던 피비린내 나는 사건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위명이 쟁쟁한 금사표국의 표두들이라는 것을 과시하는 것 같았다.

초류빈은 그 중 검붉은 얼굴에 뚱뚱한 자가 급풍검 제갈뢰라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었다. 그는 상대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을 원치 않는 듯 다시 고개를 숙이고 조각을 하기 시작했다.

제갈뢰 등은 주막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술과 음식을 시켜 마음껏 마시기 시작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나자 급풍검 제갈뢰가 크게 웃으면서 떠들기 시작했다.

"여보게 둘째, 자네는 우리가 태행산(太行山) 밑에서 태행 사호(太行四虎)를 만난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나?"

둘째라는 자가 거나하게 취한 얼굴로 서슴없이 말을 받았다.

"제가 어찌 그것을 잊겠습니까? 그날 태행 사호가 나타나 감히 형님의 표물을 노릴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또 한 명이 갑자기 앙천대소하며 말 틈에 끼여들었다.

"하지만 그놈들이 채 손을 쓰기도 전에 그들 네 명의 목을 형님의 장검이 관통시킬 줄이야 또 그들이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두 번째 장한이 가슴을 쭉 펴며 말했다.

"나 조노이(趙老二)가 큰소리를 치는 것이 아니라 만약 장력(掌力)으로 논한다면 우리 총표두의 금사장(金獅掌)이 으뜸이고 또 검법의 빠름을 논한다면 아마 형님을 따를 자가 없을 것입니다."

"허허허....."

제갈뢰는 잔을 높이 들어올리고 기고만장하여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두 눈은 갑자기 주막집 문에서 굳어졌다. 문 앞에 걸어 놓은 바람막이가 옆으로 젖혀지면서 두 개의 인영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붉은색 피풍(披風)을 걸치고 있었고 머리에는 눈을 막는 삿갓을 쓰고 있었다. 두 사람은 생김새도 똑같았고 키도 똑같았다. 삿갓을 쓰고 있어 두 사람의 생김새가 어떤지는 볼 수 없었으나 그들이 들어올 때 쓴 신법(身法)에 놀라 사람들은 눈을 휘둥그래 뜬 채 두 사람을 주시했다. 하지만 초류빈의 눈길은 엉뚱하게도 문 밖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두 괴인이 들어오면서 휘장을 젖히는 순간 길에서 만났던 그 고독한 청년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청년은 바로 주막 문 앞에 서 있었다. 보아하니 그곳에 서 있은 지가 한참이나 되는 것 같았다. 그는 주막 안의 훈훈함과 뜨겁게 타오르는 불빛을 두려워하고 있는 듯했다.

초류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서서히 눈길을 돌려 붉은 피풍을 입고 온 두 사람을 주시했다. 마침 두 사람은 머리에 쓰고 있던 삿갓을 벗어 깡마르고 추악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의 코가 어찌나 큰지 두 눈이 마치 귀 옆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 두 사람은 얼굴 모양까지 똑같았다. 눈초리는 지극히 날카로워 마치 반짝이는 독사의 눈을 보는 듯했다. 그들은 주위를 한차례 예리하게 훑어보고는 붉은 피풍을 벗었다.

피풍 안에는 검으면서도 몸에 착 달라붙는 경쾌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들의 몸도 마치 독사와 같았다. 가냘프면서도 매우 단단했고 자유자재로 전신을 꿈틀거렸다. 거기에다가 옷도 축축하게 젖어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구토를 일으키게 했다.

이 두 명에게 오직 다른 곳이 있다면 한 명은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고 또 한 명은 솥밑바닥처럼 검다는 점이었다. 두 사람의 동작은 매우 느렸다. 삿갓과 피풍을 벗은 그들은 계산대가 있는 곳으로 가서 물건을 맡기더니 다시 몸을 돌려 제갈뢰의 앞으로 걸어갔다.

초류빈이 나무를 깎는 소리가 사각사각 하고 들릴 정도로 주막 안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했다.

제갈뢰는 이 두 사람을 보지 못한 척하려 했지만 그게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인가. 그는 어쩔 수 없이 극히 부자유스러운 미소를 띠며 의자에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두 분은 존성대명이 어찌 되십니까? 소생은 견식이 워낙 부족해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안색이 창백한 자가냉랭하게 물었다.

"네가 바로 급풍검 제갈뢰냐?"

그 음성은 더할 수 없이 뾰족한 데다가 극히 심하게 떨리고 있어 만약 독사가 말을 한다면 바로 이런 투의 목소리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제갈뢰는 상대의 말을 듣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 같았다. 사색이 다 된 그는 일순간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라 전신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검은 얼굴의 괴인이 싸늘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네까짓놈이 급풍검이란 호칭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

그는 갑자기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손에는 어느 틈엔가 검고도 가느다란 연검이 쥐어져 있었다. 괴인은 연검에다 진기를 주입시켜 제갈뢰를 가리키며 한마디 한마디 분명하게 말했다.

"새외에서 가져온 물건을 남겨 놓아라. 그럼 너의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이때, 제갈뢰와 마주앉아 있던 조노이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입을 열었다.

"허허허...두 분께서는 잘못 아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표물을 새외에다 갖다 주고 온 것이지 이곳으로 갖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말이 막 끝나는 순간이었다.

휙!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주막 안에 시뻘건 선혈이 홱 뿌려졌다. 조노이의 목은 이미 몸뚱아리에서 떨어져 주막 한구석으로 굴렀다. 옆에 서 있던 제갈뢰는 튀는 피로 인하여 온통 시뻘겋게 몸이 피로 물들었다.

제갈뢰의 안색이 다시 한번 싹 변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두 괴인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었던 것은 만만치 않은 공력과 배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즉시 냉담한 표정을 짓더니 품속에서 조그마한 황색 보따리를 꺼내어 상 위에다 올려 놓았다.

"두 분의 솜씨가 과연 대단하시군. 그렇소. 우리는 이번 관외에서 확실히 물건을 갖고 왔소. 그러나 두 분이 가지고 가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이오."

검은 얼굴의 사나이가 냉랭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제갈뢰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두 분께서는 절세의 무공을 소생에게 보여준 후에야 가지고 갈 수가 있소. 그래야만 나도 돌아가서 할 말이 있을 게 아니오?"

그는 대여섯 걸음 물러나면서 허리에 찬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상 위에 있는 접시를 들어 공중에다 던지고는 번개같이 칼을 휘둘렀다.

순간, 불빛을 받아 무지개빛 같은 검광이 난무하는 가운데 접시 안에 들어 있던 십여 마리의 왕새우가 여지없이 반으로 갈라져 땅으로 내려왔다. 절묘한 비기(秘技)였다. 이렇게 한 수를 보인 제갈뢰는 득의만면하여 말했다.

"만약 두 분께서도 나와 똑같이 할 수 있다면 나는 즉시 이 물건을 넘겨주겠소. 반대로 그렇게 되지 못할 땐 두 분께선 순순히 물러나시오."

검은 얼굴의 괴인은 음침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그것은 부엌에서나 쓰는 칼솜씨지 어찌 무공이라 할 수 있겠느냐."

말을 마친 그는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이 가벼운 호흡이 제갈뢰에 의해 두 조각으로 나 땅바닥에 떨어졌던 왕새우들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이어 검은 광채가 번뜩이는가 싶더니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주막 안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그 많은 새우들이 모두 그의 연검에 얽혀 있는 것이 아닌가? 정녕 놀라운 공력(功力)이 아닐 수 없었다. 검으로 이리저리 튀어오르는 새우들의 허리를 두 조각으로 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가느다란 연검으로 그 조각이 난 새우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순식간에 모두 관통시키기란 더더욱 어려운 것이다. 제갈뢰의 안색은 잿빛으로 변했다.

그는 상대의 무섭게 빠른 검법을 보는 순간 갑자기 두 사람이 뇌리에 떠올라서 무의식적으로 뒤로 두 발짝 물러나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두 분께선...혹시...벽혈쌍사(碧血雙蛇)가 아니십니까?"

벽혈쌍사!

이 한마디가 나오자 주막 안에서 관전을 하던 무림인 한 명은 대경실색하여 상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초류빈의 뒤에 서 있던 텁석부리 장한도 미간을 찌푸렸다

최근 황하(黃河) 일대에서 벽혈쌍사보다 더 악독한 자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들이 입고 있는 붉은색의 피풍은 사람의 피로 물을 들인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을 잘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벽혈쌍사가 어떤 일을 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십중팔구 그들의 손에 의해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얼굴이 검은 자는 이름하여 흑사(黑蛇), 안색이 창백한 자는 백사(白蛇)라 했다.

흑사는 흉칙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우리를 알아보는 것을 보니 눈은 아직 멀지 않은 것 같군."

제갈뢰의 몸은 마치 한겨울의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두 분께서...이 물건을 꼭 가져가시겠다면...소...소생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어...어서 가져가십시오."

백사가 안색을 서릿발처럼 굳히며 냉큼 말을 받았다.

"만약 네놈이 우리들 앞에서 기어다닌다면 우리 형제는 너를 놓아 주겠다. 그러나 만약 거절하면 이 보따리는 물론 갖고 가겠지만 네놈의 머리통을 끊어 놓고 가겠다!"

이런 소리는 처음 제갈뢰 등이 술을 마시면서 의기양양하게 하던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 이 말은 백사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음성은 칼날같이 예리하게 불가항력적인 위력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았다.

제갈뢰의 안색은 그야말로 썩은 돼지의 간 색깔처럼 변하면서 잠시 망설이다 손으로 땅을 짚고 엉금엉금 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초류빈은 돌연 탄식을 금치 못하면서 혼잣말처럽 중얼거렸다.

"허어...이제 보니 저 자는 성질이 변했군. 어쩐지 그렇다 했지.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가 없지."

초류빈의 목소리는 매우 낮았으나, 쥐죽은 듯한 고요 속에 이 목소리는 분명하게 벽혈쌍사의 귀로 들어갔다. 쌍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초류빈을 쳐다보았다. 초류빈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각에 열중하고 있었다.

백사는 음침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이제 보니 여기에 고인(高人)이 또 한 분 계셨군."

흑사도 덩달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보따리는 남이 우리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누구든지 우리 형제보다 더 빠른 검법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우리 형제는 순순히 내주겠다."

이처럼 소리친 그들은 초류빈의 전신에다 시선을 고정시켰다. 초류빈은 자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라는 듯 조각에만 열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쌍사가 입술을 움직여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을 때, 돌연 문 밖에서부터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들의 머리는 몇 푼 어치 가치가 있소?"

이 음성을 들은 초류빈은 놀라는 한편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문쪽을 바라보았다

"으흐흐흐....."

백사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띠더니 갑자기 입을 벌려 강한 바람을 불어 초를 넘어뜨렸다.

순간, 검망이 번쩍이는 가운데 일곱 토막으로 끊어진 초는 그의 연검에 귀신같이 끼워졌다. 맨 상단에 꽂힌 촛불은 아직 꺼지지 않은 채 계속 타고 있었다. 정녕 무섭도록 빠른 검법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해 보이고 난 백사는 의기양양하게 말을 꺼냈다.

"어떠냐? 이 정도면 빠르다고 할 수 있겠느냐?"

청년은 아무 표정도 없이 그냥 가볍게 고개만 끄덕여 보이자 다시 백사가 청년을 주시하며 물었다.

"너도 나와 똑같이 해낼 수 있겠느냐?"

그러자 청년은 머리를 저으며 간단하게 잘라 말했다.

"나의 검은 촛불을 자르는 검이 아니오."

"그래? 그럼 네가 허리에 차고 있는 쇠는 무엇에 쓰는 것이냐?"

청년은 오른손을 검의 손잡이로 가지고 가더니 한마디 한마디 또렷하게 말을 받았다.

"내 검은 사람을 죽이는 것 외에는 사용하지 않소."

"살인?"

백사는 가소롭다는 듯이 앙천대소를 터뜨리면서 다그쳤다.

"으하하하! 네가 도대체 누구를 죽일 수 있다는 거냐?"

"바로 너!"

청년의 입에서 너라는 소리가 나온 것과 동시에 그의 검은 이미 싸늘한 검광으로 변하면서 백사를 향해 찔러갔다.

원래 청년은 검을 허리에 그대로 차고 있었다. 하지만 '너' 라는 말이 터져나오는 순간 청년의 검은 백사의 목을 정확하게 관통시키고 있었다. 그의 동작이 어찌나 빨랐던지 모든 사람들은 그가 무슨 수법을 썼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백사의 목에서는 피조차 쏟아져 나오지 않았다. 아니, 쏟아져 나오지 않는 게 아니라 미처 흘러나올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다.

청년은 심한 경련이 일어나고 있는 백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나직하게 물었다.

"어떻소? 당신의 검이 빠르오, 아니면 내 검이 더 빠르오?"

검에 목줄기가 관통된 백사가 대답을 할 리 만무하다. 얼굴에 심한 경련이 일어나더니 콧구멍이 점점 커졌고 입이 벌어지면서 혀가 길게 늘어져 나와 진한 선혈이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 무렵, 흑사는 이미 수중의 연검을 꼿꼿이 세운 채 높이 쳐들고 있었으나, 감히 검을 휘두르지는 못했다. 청년의 검법이 확실히 그들보다 빠른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흑사가 들고 있는 연검 역시 무섭게 떨리고 있는 가운데 그의 얼굴은 비지땀으로 온통 흥건히 젖어 있었다.

이때 청년은 백사의 목을 관통시킨 검을 휙 잡아 뽑았다. 그러자 백사는 목으로부터 분수 같은 선혈을 내뿜으며 그 자리에 썩은 고목처럼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청년은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흑사를 향해 왼손을 내밀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는 사전에 약속을 했소. 어서 오십 냥의 은자를 내놓으시오."

흑사는 몸뿐만 아니라 파랗게 질린 입술까지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너...너는 정말 오십 냥의 은자 때문에 그를 죽인 것이냐?"

청년의 입가에는 처음으로 담담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소."

흑사의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그의 이러한 표정은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도저히 분간할 수가 없었다. 흑사는 멍청하니 넋을 잃고 서 있다가 품 속에서 은자를 꺼내 청년에게 건네주었다.

"주겠다. 모두 주겠다....."

그러더니 돌연 몸을 돌려 미친 듯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청년이 은자를 가지고 계산대로 가서 주인에게 물었다.

"이것이 오십 냥이 되는지 한번 봐 주시오."

주막 주인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면서 두 손을 내밀었으나 입은 이미 굳어 버린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때 초류빈은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텁석부리 사나이를 바라보면서 빙긋이 웃었다. 그제서야 텁석부리 사나이도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역시 쓸쓸하게 웃어 보였다.

오십 냥의 은자가 분명한 것을 확인한 청년은 서서히 몸을 돌려 초류빈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이때, 멍청하게 서 있던 제갈뢰가 별안간 몸을 날리며 장검을 휘둘러 청년의 등 뒤를 찌르는 것이 아닌가.

제갈뢰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의 동작은 너무나도 쾌속하고 갑작스러운 것이라 청년이 피하기는 이미 불가능했다.

제갈뢰의 장검이 막 청년의 등을 관통시키려는 찰나,

"으아아악!"

제갈뢰는 갑자기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 허공으로 다섯 자나 치솟아 올랐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제갈뢰의 검은 대들보 위에 깊이 박혀 버렸다.

대들보에 박힌 검의 흔들림이 채 정지하기도 전에 제갈뢰는 두 손으로 목을 감싼 채 내려섰다. 그리고는 당장이라도 튀어 나올 듯한 충혈된 눈으로 초류빈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이 무렵, 초류빈의손에 들려 있던 조각칼은 이미 그의 수중에 있지 않았다.

이 갑작스러운 일에 모든 사람들은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했다. 한참 후에야 사람들은 초류빈의 작은 칼이 제갈뢰의 목에 꽂혀 있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작은 칼이 어떻게 제갈뢰의 목에 꽂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초류빈을 한참 노려보던 제갈뢰는 돌연 꽂힌 칼을 뽑아내면서 미친 듯이 소리쳤다.

"이제 보니 너였구나!"

칼이 뽑혀지는 순간, 그의 목에서 선혈이 콸콸 쏟아져 나와 금방 그의 전신을 붉게 물들였다. 이런 그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초류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리더니 가볍게 장탄식을 했다.

"하지만 나를 알아보기엔 이미 늦었다. 만약 진작 나를 알아보았다면 너는 이런 낭패를 결코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제갈뢰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벼락을 맞은 고목이 쓰러지듯 쓰러져 버렸다. 영원히 이 세상과는 하직을 고하고 만 것이다.

청년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냉랭한 얼굴에 놀라움과 의혹의 빛이 가득히 떠올랐다. 그는 이 사람이 무엇 때문에 제갈뢰를 죽였는지 알지 못하겠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런 표정도 잠시였을 뿐 청년은 초류빈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때 야성(野性)으로 가득차 있던 청년의 눈빛이 갑자기 따뜻하게 변했다.

"약속대로 은자가 생겼으니 내가 술을 한 잔 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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