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08 소이비도 제1권 추억은 쓴 술처럼
추억은 쓴 술처럼
예전에 초류빈이 거주하던 유원은 지금은 비록 흥운장으로 변해 있지만 대문 양쪽에 걸려 있는 황제가 친필로 쓴 문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일문칠진사(一門七進士) 부자삼탐화(父子三探花)>
한 문중에서 일곱 명의 진사를 배출했고 부자 세 사람이 모두 탐화라는 뜻이었다.
초류빈은 그 문련을 보자 마치 무거운 쇠뭉치로 가슴을 얻어맞은 듯 그 자리에서 걸음이 굳어지고 말았다.
파영은 벌써 호천강을 안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진효의 역시 매이선생을 이끌고 성큼성큼 들어갔다.
대문을 지키고 있던 장정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초류빈을 쳐다볼 뿐이었다. 웬 낯선 사람이 문 앞에서 넋을 잃고 있으니 그들로서는 자연히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곳은 초류빈의 옛 집이다. 그는 이곳에서 가장 행복했던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설벽운과 단란했던 한때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친히 부모님과 형님의 영구를 이곳에서 옮겨 매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이 집 앞에서 낯선 사람이 되어 있지 않는가.
그는 감회에 젖기보다는 착잡한 심정이었다. 어머니의 품속같이 포근한 감정을 의당 느껴야 하건만 오히려 허전하기만 했으니, 텁석부리 사나이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울적하게 입을 열어 권했다.
"도련님, 어서 들어가십시오."
초류빈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곳까지 온 이상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겠군."
그런데 그가 막 대문 앞 돌계단 위로 발을 내딛자 우악스러운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호사야(胡四爺)의 문전에서 서성거리는 너는 누구냐?"
그 호통소리와 함께 비단옷을 입고 수중에 새장을 든 곰보 사나이가 뛰쳐나와 초류빈의 앞을 가로막았다.
초류빈은 상대방을 훑어보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귀하는....."
곰보 사나이는 코를 벌름거리며 큰소리로 대꾸했다.
"이 어르신네는 이 집의 총관이다. 그리고 내 딸은 호부인과 자매를 맺은 사이다. 어쩔 테냐?"
초류빈은 아무 표정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정녕 그렇다면 나는 이곳에서 기다리겠다."
곰보 사나이의 태도는 싸늘하기만 했다.
"누구를 기다린단 말이냐? 호사야의 문전에서 잡인들이 서성거리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상대방의 거만한 태도에 울화가 치밀었으나 참을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초류빈의 지금 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곰보 사나이는 상대방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한술 더 떠 호통을 치는 게 아닌가.
"냉큼 꺼지지 못하겠느냐? 보아하니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모양이구나!"
초류빈은 그런 대로 계속 참을 수가 있었지만 텁석부리 사나이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앞으로 막 달려가 곰보 사나이를 혼내 주려는데 안쪽에서 격정에 찬 음성이 들려왔다.
"류빈, 정말 자네가 왔나?"
화복(華服)을 입고 턱 밑에 짧은 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곰보 사나이를 제치고 문전에 나타났다. 그 중년 사나이는 초류빈을 보자 격동한 안색을 금치 못하며 다짜고짜 손을 잡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자네가 왔군...이게 꿈은 아니겠지....."
그는 말을 제대로 맺지 못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화복의 중년인! 그가 바로 초류빈이 사랑하는 정인(情人)마저 양보한 절친한 친구, 호유성(胡有星)이었다.
초류빈은 호유성의 손을 굳게 움켜쥐며 격동된 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형님....."
한 마디를 입 밖에 내뱉은 후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곰보 사나이는 이 광경을 보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가 전혀 상상을 하지 못했던 광경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유성은 중얼거리듯 다시 입을 열었다.
"현제, 자네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는가...왜 이제서야 ....."
그는 자신의 벅찬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듯 고개를 힘차게 내두르며 미친 사람마냥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우리 현제와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즐거운 일인데 나는 주책없이 눈물을 흘리다니....."
그는 말을 하면서 초류빈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속히 부인에게 알려 모두들 나와서 나의 현제를 맞이하게 하라! 너희들은 나의 이 현제가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하하하, 그의 내력을 알면 너희들은 기절초풍을 할 것이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두 사람의 다정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역시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았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그도 자신의 감정을 꼬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한편 곰보 사나이는 그제서야 길게 숨을 내쉬며 뒤통수를 멋적게 긁적거렸다.
"맙소사...알고 보니 그가 바로 초...초탐화였군. 이 집도 원래는 그의 소유였는데 나는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니...내가 죽일 놈이군....."
호천강은 열댓 명에게 둘러싸여 대청 한복판에 놓여져 있는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그는 부친과 초류빈의 관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감히 눈물조차 보일 수가 없었다.
호유성이 초류빈의 손을 잡고 대청 안으로 들어오자 호천강의 양쪽에 서 있던 두 명의 장한이 갑자기 앞으로 뛰쳐나와 초류빈에게 삿대질을 했다.
"강도령을 손상시킨 장본인이 바로 당신이오?"
초류빈은 대답보다 한숨이 앞섰다.
"그렇소."
그러자 장한은 버럭 화를 내며 싸늘한 노갈과 함께 다짜고짜 좌우 양쪽에서 초류빈을 향해 덮쳐갔다.
"건방진 놈, 감히 강도령을....."
초류빈은 강맹한 기세로 덮쳐오는 두 장한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전혀 몸을 피할 기색이 없었다. 그는 호유성에 대한 미안감 때문에 차라리 두들겨 맞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두 장한의 신형이 초류빈을 막 덥치려는 순간, 호유성이 성난 기합을 내지르며 손을 젖혀 일 장을 격출해 덮쳐가는 두 장한을 일 장 뒤로 밀어냈다.
"발칙한 놈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너희들은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두 장한은 아첨을 부리려다가 도리어 호통을 맞는 역효과를 자초한 것이다.
"우리들은 단지 강도령을 위해....."
한 장한이 어색한 얼굴로 말을 더듬거렸다. 이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호유성의 싸늘한 호통이 다시 대청 안을 진동시켰다.
"닥쳐라! 이 자리에서 말해 두지만 호유성의 아들은 바로 초류빈의 아들이다. 초류빈이 설사 저 철부지 녀석을 죽였다 해도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더욱 음성을 높였다.
"앞으로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이 일을 언급하지 말아라! 만약 오늘 있었던 일을 언급하는 자가 있으면 나에게 정면대결을 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초류빈은 나무토막처럼 아무 표정없이 멍하니 서 있었다. 호유성이 만일 그에게 욕설을 하거나 심지어 원수를 갚겠다고 나섰다면 차라리 그의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호유성?이 이다지도 의리를 앞세우자 그는 더욱 부끄럽고 마음이 괴로웠다.
그는 도저히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님, 강아가 바로 형님의 아들인지는 꿈에도....."
호유성은 힘있게 그의 어깨를 치며 더 이상 말을 못하게 했다.
"하하하...현제, 자네답지 않게 왜 구질구질한 얘기를 하는가. 워낙 버릇없이 자란 놈이라 그렇지 않아도 무공을 가르쳐 준 것을 후회하네."
그는 대소를 터뜨리며 주위를 향해 외쳤다.
"자, 모두들 들으시오. 오늘 나의 현제를 취하게 할 재간이 있는 자에게는 그 자리에서 오백 냥을 시사하겠소."
호유성은 초류빈을 원망하기는커녕 뜨거운 우정으로 대했다. 실로 그것은 진정한 사내대장부가 아니면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의연한 태도였다.
좌중의 인물들은 그러한 호유성에게 존경의 눈길을 보냈다.
문득 밖에서 우렁찬 음성이 들려왔다.
"어서 휘장을 젖히시오. 부인께서 나오셨소."
그러자 문 옆에 서 있던 동자가 휘장을 젖히는 가운데 설벽운의 모습이 나타났다. 초류빈은 드디어 설벽운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설벽운은 어쩌면 완전무결한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미인이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녀의 안색은 다소 창백했다. 그리고 몸이 약한 편이며 눈동자는 비록 샛별같이 빛나고 있지만 너무 냉막(冷漠)한 것이 흠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풍기는 기질(氣質)은 명실공히 따를 여인이 없었다.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그녀는 보는 이로 하여금 일종의 형용할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을 느끼게 했다.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그녀를 한 번 보면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 초류빈이 꿈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그리던 얼굴이었다.
매번 먼 산의 아지랑이처럼 아련히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하던 얼굴. 초류빈이 그녀에게 달려가 품안에 안으려면 산산조각으로 찢어지는 가슴과 함께 깨어나던 악몽. 그럴 때마다 초류빈은 식은땀 속에 젖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창 밖 어둠을 더듬으며 몸을 부들부들 떨어야만 했다.
그리고는 고통과 씨름하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날이 밝은 후에도 그의 고통은 추호도 사라지지 않고 도리어 더욱 농후한 자세로 그를 엄습해 오곤 했다.
지금 꿈 속에서 그리던 얼굴이 드디어 현실로서 눈앞에 나타났다. 심지어 그가 손을 뻗기만 해도 그녀의 촉감을 똑똑히 의식할 수도 있다.
이번만큼은 꿈이 아니라는 것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손을 내밀 수가 있겠는가? 그는 단지 그것도 꿈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꿈보다 몇 갑절 잔혹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미소로서 내심의 고통을 숨겨야만 한다.
"형수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형수님!
그 한 마디는 심장을 토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물론 자신 스스로가 그렇게 만들었지만, 그의 청춘과 영혼을 앗아간 정인이 지금은 형수님이 되어 있는 것이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차마 이 광경을 지켜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는 초류빈이 형수님이라고 부르는 그 한 마디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괴로움이 숨겨져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초류빈의 현재 입장이 되었다면 도저히 형수님이란 말을 입 밖에 낼 자신은 더욱 없었다.
그가 만약 고개를 돌려 창 밖 뜰에 쌓인 눈으로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면 아마 눈물이 흘러내렸을 것이다.
한편 설벽운은 초류빈의 칭호를 전혀 듣지 못한 듯했다. 그녀의 심신은 완전히 아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호천강은 어머니를 보자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어머님, 저는 이제 다시는 무공을 연마할 수 없는 폐인이 되었어요. 저는...차라리 죽고 싶을 뿐이에요....."
설벽운은 그를 품안에 꼭 껴안았다.
"누가...누가 너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느냐?"
"바로 저 사람이에요."
설벽운의 시선은 호천강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옮겨가더니 드디어 초류빈의 얼굴에 던져졌다.
초류빈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마치 전혀 알지 못하는 생소한 사람을 보는 것처럼 싸늘하기만 했다. 그 싸늘한 눈빛이 차츰 원한의 빛으로 물들어 가더니 한마디 한마디 뚜렷하게 내뱉었다.
"당신이, 정말 당신이 내 아들을 손상시켰나요?"
초류빈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관절 무슨 힘이 그를 지탱하고 있는지 그는 뜻밖에도 쓰러지지 않았다.
설벽운은 매서운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잘 했어요. 정말 잘했어요. 당신이 언젠가는 다시 나타나 내 행복한 생활을 파괴하리라고 예측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악랄하게도....."
호유성은 얼른 헛기침을 하여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여보, 그게 무슨 당치도 않은 말이오? 그는 아무 잘못도 없소. 강아 그 녀석이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오. 더군다나 그 당시 류빈은 강아가 우리의 아들이라는 사실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호천강이 별안간 큰소리로 외쳤다.
"아니에요. 그는 모든 것을 벌써 알고 있었어요. 그는 원래 저를 상하게 할 수도 없었는데 아버님의 친구라는 말에 제가 손을 거두는 순간 기습한 거예요."
한쪽에 서 있던 텁석부리 사나이는 그 말을 듣자 분노가 치밀어올라 전신의 혈관이 모조리 파열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초류빈은 태연히 그 자리에 서서 전혀 자신을 위해 변호할 뜻을 비치지 않았다. 어떠한 고통이라도 다 극복한 그였다.
그런데 지금 일개 어린애를 상대해 얼굴을 붉혀가며 논쟁을 벌일 필요가 있겠는가?
호유성은 싸늘하게 호통쳤다.
"닥쳐라! 이 고약한 녀석. 누구 앞이라고 감히 거짓말을 하느 냐?"
호천강은 목이 터져라 울어댔다.
"엉엉...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어머님...제가 말한 것은 모두 사실이에요."
호유성은 대노하여 당장 그를 끌어오려 했으나 설벽운이 재빨리 앞을 가로막고 앙칼지게 외쳤다.
"당신은 어린것을 어떻게 할 작정이에요?"
호유성은 발을 동동 굴렀다.
"이 기회에 저 고약한 녀석을 차라리 없애 버리겠소!"
설벽운의 창백한 얼굴은 순간, 끓어오르는 혈기로 인해 빨갛게 상기되었다.
"그렇다면 나도 함께 죽여요!"
다음 순간, 그녀는 시선을 초류빈에게 던지며 코웃음쳤다.
"하여튼 당신네들은 살인을 밥먹듯 하니 무공을 상실한 어린애와 한 여인을 더 죽인다 해서 눈 하나 깜박하지 않겠죠?"
호유성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장탄식을 했다.
"여보,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 같구려."
설벽운은 아예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아들을 품안에 안은 채 내당 쪽으로 사라졌다. 떠나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비록 가벼웠지만 초류빈의 가슴을 산산조각으로 짓밟기엔 충분했다.
호유성은 초류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현제, 자네도 잘 알다시피 그녀는 원래 사리를 분별할 줄 모르는 여자가 아니었네. 단지 여인이 어머니가 되니까 다소 변화가 생기더군....."
초류빈은 무거운 표정으로 신음하듯 참을성을 토했다.
"나도 이해가 갑니다. 어머니라면 자기의 아들을 위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의 눈빛은 공허하기만 했다.
"나는 비록 남의 어머니가 되어 본 적은 없지만 최소한 남의 아들이 된 적은 있습니다."
술을 빌려 시름을 달래려 하지만 술을 마실수록 시름은 더해 갈 뿐이다. 술을 마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진리처럼 생각하고 있는 말이다. 하지만 진리가 완벽하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적은 양의 술을 마시면 물론 수심이 더욱 짙어지고 근심사가 자꾸 떠오르지만 정말 술에 취하게 되면 사상과 감각은 완전히 마비된다. 그럼 세상에서 어떠한 고통도 그를 괴롭히지 못하는 것이다.
초류빈은 그 점을 잘 알고 있기에 닥치는 대로 술을 퍼마셨다.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해야 할 필요가 느껴질 때는 도리어 쉽사리 취하지 않는다.
밤은 이미 깊었다. 술도 여러 단지가 동이 났다. 그러나 초류빈은 조금도 취의(醉意)를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또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을 발견했다. 다른 사람들도 역시 전혀 취의가 없지 않는가. 십여 명의 강호인이 한자리에 모여 밤이 깊도록 술을 마셨는 데도 전혀 취한 사람이 없다니 실로 흔한 일이 아니다.
밤기운이 짙어갈수록 모든 사람의 안색도 따라서 무겁게 변해갔다. 모두들 이따금씩 목을 길게 뽑아 창 밖을 내다보는 것이 아마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둥! 둥! 둥!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어둠을 뚫고 밤하늘에 울렸다.
그 순간 모두의 안색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변하며 한 사람이 참을 수 없다는 듯 불안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삼경이 되었는 데도 조(趙)어르신네는 어째서 돌아오시지 않는 걸까?"
초류빈은 영문을 몰라 눈썹을 가볍게 찌푸린 채 옆좌석에 앉아 있는 자에게 넌지시 물었다.
"방금 말한 조어르신네는 누구요? 여러분들은 그가 당도해야지만 마음 놓고 술을 마실 작정이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사나이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 조어르신네가 만약 오지 않으면 우리는 더 이상 술을 마실 수가 없도록 되어 있소."
다른 한 사람이 다시 이어 말했다.
"조어르신네라 함은 바로 철면무사(鐵面無私) 조정의(趙正義)를 가리키는 것이오. 그분은 우리 호사야와 결의형제(結義兄弟)를 맺었으니 초탐화도 아마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초류빈은 술잔을 높이 들어올려 호탕하게 웃었다.
"십 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형님은 명성이 혁혁한 형제들을 많이 사귀었군요. 소제가 우선 축하하는 의미에서 한 잔을 권하겠습니다."
호유성은 얼굴이 약간 붉어지는가 싶더니 미소를 지었다.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느낌이 있었다
"나의 형제는 역시 자네에게도 형제와 마찬가지니 나도 자네에게 한 잔 권하겠네."
초류빈은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것 정말 잘 되었군요. 졸지에 몇몇 형제가 생기는 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대영웅들이 과연 이 보잘것 없는 동생을 받아들일지 두려움이 앞서는군요."
호유성은 자신있게 큰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자네와 인연을 맺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걸세."
초류빈은 약간 멈칫하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술잔에 술을 따르며 다시 화제를 자연스럽게 돌렸다.
"단지...풍문에 의하면 조어르신네는 철면무사라 일컬어져 일 년 내내 웃는 얼굴을 보기 힘들다는데 그가 이곳에 당도하면 나는 아마 엄숙한 분위기에 눌려 술도 제대로 마시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가 당도해야지만 술을 마시겠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호유성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홀연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고 심각하게 말했다.
"매화도가 다시 강호에 나타났네....."
초류빈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어 말했다.
"그 일에 대해선 나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호유성은 힐끗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자네는 매화도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가?"
초류빈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대꾸했다.
"글쎄요. 소문에 의하면 그 자의 행동은 워낙 신출귀몰하다 고....."
이번에는 호유성이 그의 말을 앞질렀다.
"그렇다네. 그 자의 행동은 예측불허일세. 그런데 나는 그가 이곳 보정성(保定城)에 있다는 것을 장담할 수가 있네. 그것도 어쩌면 우리집 부근에 있을 걸세."
그 말이 입 밖에 나오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몸을 움츠렸다.
활활 타오르는 화롯불도 밖에서 침입해 들어오는 한기를 감당해 내지 못하는 성싶었다.
초류빈도 안색이 약간 동요되었다.
"그렇다면 그는 이미 이곳에 나타난 적이 있단 말입니까?"
호유성은 가볍게 탄식했다.
"그렇다네. 진효의. 진형님의 아들이 이미 그저께 밤에 그의 손에 당했다네."
초류빈은 눈썹을 찌푸리며 눈빛을 유난히 빛냈다.
"그는 어디에서 출수를 했습니까?"
호유성은 한마디 한마디 뚜렷하게 대답했다.
"바로 우리집 후원 냉향소축(冷香小築) 앞에 있는 매화림에서 독수를 전개한 걸세."
초류빈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다시 물었다.
"그 외에 또 어느 누가 그의 손에 상했습니까?"
호유성은 매화도의 얘기라면 골치가 아프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자네는 아마도 잘 호르겠지만 그 자는 매일 밤 단 한 사람에게만 독수를 전개한다네. 그것도 삼경이 되기 전에는 절대 출수를 하지 않지....."
여기까지 말한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살인을 하는 데는 독특한 버릇이 있지. 마치 술을 마시는 사람같이 비단 일정한 시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수량도 정해져 있다네."
초류빈은 그의 말에 빙긋이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그의 기분을 조금도 개운하게 전환시키지는 못했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비로소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까?"
"어젯밤은 이상하게도 아무런 사고가 없었네."
"그렇다면 매화도는 단지 진어르신네의 공자를 겨냥해 이곳에 나타난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미 목적이 달성되었으니 또 나타나지는 않을 겁니다."
호유성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는 조만간에 다시 나타날 걸세."
초류빈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럴 만한 이유라도 있단 말입니까? 혹시 형님과 무슨 원한이라도....."
호유성은 고개를 좌우로 내둘렀다.
"그가 노리고 있는 사람은 진중(秦重)도 나도 아니라네. 그의 대상은 바로 설....."
호유성의 입에서 설자가 튀어나오자 초류빈의 안색에 금세 변화가 생겼다.
그러나 그는 이내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다행하게도 호유성이 내뱉은 설 자 뒤에 이어나온 이름은 설벽운이 아니라 설소하(薛素霞)라는 여인이었다.
초류빈은 궁금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설소하라뇨? 그는 또 누구입니까?"
그의 질문에 호유성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자네가 설소하를 모르다니 이제는 정력이 쇠퇴한 모양이군. 만약 십 년 전이라면 자네는 설소하의 이름을 누구보다도 잘 기억하고 있을 걸세."
초류빈은 느끼는 바가 있어 미소를 띠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설소하는 미인이겠군요?"
"그녀는 비단 미인일 뿐 아니라 모두들 공인하는 무림에서 으뜸가는 미인이라네. 강호에서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녀로 인해 넋을 잃은 자가 부지기수라네."
호유성은 야릇한 눈빛으로 좌중을 휘둘러보며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하하하...자네는 여기 모인 사람들이 내 체면을 보아서 온 줄 아나? 만약 설소하가 이곳에 기거하지 않았다면 아마 내가 매일 밤 진수성찬을 차려 놓아도 그들은 적극적으로 말려들지 않았을 걸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말로 인해 모두 얼굴이 붉어졌다. 그중에서도 비단옷을 입은 두 소년의 얼굴이 더욱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호유성이 그들의 정곡을 여지없이 찔렀기 때문이었다. 호유성은 힘있게 그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자네들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네. 아직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희망이 있으니까 말일세. 만약 나의 현제가 십 년만 더 젊었다면 자네들은 어림도 없었을 것일세."
초류빈도 덩달아 크게 웃었다.
"하하...형님, 내가 정말 노쇠한 것 같습니까? 나는 비록 삼십 줄을 넘어섰지만 마음은 여전히 열여덟 살입니다."
호유성은 눈을 굴리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맞았어, 맞았어, 틀림없는 사실이야. 그녀의 치마밑에 무릎을 꿇는 자는 개미보다도 많지만 자네를 제외하고는 아마 아무도 희망이 없을 걸세!"
초류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십 년 동안이나 술잔 속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예전과 같이 수단이 고명하지를 못합니다."
호유성은 그의 손을 꼭 쥐며 약간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현제, 자네가 모르는 일이 있네. 그 설낭자는 비단 선녀같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또한 절개가 태산 같다네. 그녀는 아무에게도 정을 주지 않고 단지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매화도를 제거할 사람이 있으면 설사 거동이 불편한 늙은이 혹은 바보 천치라 할지라도 그의 아내가 되겠다고 공언을 했네."
초류빈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래서 매화도는 한사코 그녀를 제거하려는 모양이군요?"
호유성은 탄식을 했다.
"그렇다네. 그저께 밤에 매화도가 냉향소축에 나타난 것도 바로 그녀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네. 그런데 뜻밖에 진중이 마침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녀 대신 변을 당한 걸세."
초류빈의 눈빛이 순간 햇살같이 반짝 빛났다.
"진중도 역시 그녀의 치마밑에 무릎을 꿇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까?"
호유성은 고소를 지었다.
"그는 원래 가장 물망에 오른 후보였는데 말야, 애석하게도....."
초류빈의 입가엔 의미심장한 미소가 스쳐갔다.
"설낭자가 냉향소축에 기거하고 있으니 예전과 같이 조용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겠군요."
호유성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냉향소축은 원래 자네가 늘 기거하던 곳이므로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이....."
초류빈은 미소로써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미인의 향취가 늘 냉향소축에 감돈다면 나로서도 즐거운 일입니다."
이어 그는 형형한 눈빛으로 호유성을 주시하며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그 설낭자는 형님과 무슨 관계가 얽혀 있습니까?"
호유성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나서 대꾸했다.
"집사람이 보타사에서 불공을 올릴 때 우연히 그녀를 만나게 된 걸세.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마음이 맞아 흡사 자네와 나의 상황같이 자매의 인연을 맺게 되었지."
초류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부친은 바로 내가 문 밖에서 본 그 총관임이 분명합니까?"
호유성은 그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자네는 의외라고 생각하나? 사실 그렇게 못생긴 아버지에게서 그러한 미인이 태어나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네. 까치우리에서 봉황이 탄생했다고나 할까....."
초류빈은 앞에 놓여 있는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 다시 물었다.
"그 철면무사 조대협은 혹시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러 간 것이 아닙니까? 조대협이 이제는 미인에게 관심을 갖다니 실로 반가운 일이군요."
호유성은 그의 풍자적인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물론 그녀를 보호할 생각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이번 기회에 매화도를 제거할 계획이네. 게다가 중원무림의 거부와 명망이 있는 집안에서는 이미 막대한 은자를 모아 매화도를 잡는 현상금을 내걸었네. 그 막대한 은자는 지금 우리집에 보관돼 있네. 만약 무슨 실수가 생긴다면 아무도 그 책임을 지지 못할 걸세."
초류빈은 여기까지 듣자 안색이 비로소 동요되었다.
"형님은 무엇 때문에 그런 막대한 책임을 감당하게 되었습니까?"
호유성은 술잔을 들어 입술을 축인 후 대답했다.
"짐이 생기면 응당 짐을 짊어질 사람이 나서야 할 게 아닌가. 내 말을 이해하겠나?"
초류빈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삼경이 넘었으니 오늘밤에도 매화도가 나타날까요?"
그는 홀연 몸을 일으키며 말을 계속했다.
"조대협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여러분들도 더 이상 술을 마실 흥취가 없는 것 같으니 나는 그 틈을 타서 밖에 나가 매화나 감상해야겠습니다."
호유성은 검미를 찌푸렸다.
"현제, 자네가 보고 싶은 것은 매화가 아니라 매화도가 아닌가?"
초류빈은 빙긋이 웃으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네는 정말 위험을 무릅쓸 작정인가?"
호유성은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물었지만 초류빈은 미소로 대답할 뿐이었다. 호유성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홀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좋네. 자네가 한 가지 일을 결정하면 아무도 만류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더군다나 자네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 매화도는 아마 이 부근에 얼씬도 하지 못할 걸세."
초류빈은 그의 말을 등 뒤로 들으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뜰의 매화는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아니, 십 년 전보다 더욱 만발했다. 그런데 십 년 전에 함께 매화를 감상하던 사람은?
사람은 매화와 같이 일신의 오골은 남아 있지만 세월의 시달림마저 매화와 같이 감당해 낼 수 있을까? 꽃은 지면 다시 피컨만 사람은? 사람의 청춘은 한 번 물러가면 되찾을 수 없는 것일까?
초류빈은 조용히 그곳에 서서 멀리 떨어진 누각 쪽 한 점의 등블을 바라보고 있었다. 십 년 전 저 작은 누각은 자기의 소유였다. 또 누각에 있는 사람도 역시 그의 소유였건만.....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청춘과 함께 흘러갔다. 다시는 잡을 수 없는 추억의 일일 뿐이다.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그리움과 외로움뿐.
그리움은 고뇌스러운 것이지만 그리움마저 없다면 그는 아마 더 이상 이 세상을 살아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눈이 수북하게 쌓인 구름다리를 건너면 일련의 매림이다.
매림 속에 있는 작은 누각의 한 모퉁이가 빠끔히 시야에 들어왔다.
그곳은 초류빈이 예전에 글공부를 하고 검을 연마하던 곳이다. 그 작은 누각은 멀리 떨어져 있는 누각과 마주보고 있어 그의 창문을 열기만 하면 맞은편 누각에 나타난 그 정이 듬뿍 담긴 설벽운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달도 차면 기울 듯이 정도 농후해지면 얄팍해지는 법일까? 그는 조금 전에 설벽운이 취했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마치 남처럼 아니 원망스런 눈길로 냉정하게 자기를 대한 것은 아직도 사랑에 대한 미움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
초류빈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몸에 떨어진 눈을 털고 구름 다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구름다리 위에 쌓인 눈이 바스락 부서졌다.
뒤뜰은 어둠에 잠긴 채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삼경이 지나 매화도가 수시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으니 누가 이 주위에서 어슬렁거리겠는가.
초류빈은 매림 속에 있는 냉향소축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갔다. 그는 절세의 미모를 지니고 있다는 설소하를 찾아갈 생각은 없었다.
이럴 때 설소하도 절대 이곳에 남아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자기가 살던 옛 집을 거닐고 싶을 뿐이었다. 사람이 고독을 느끼게 되었을 때는 지나간 모든 일들이 그리워지기 마련이다.
바로 이때 고요한 매림 속에서 홀연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초류빈은 즉시 다른 사람으로 변모했다.
느슨하게 풀린 몸이 당장 힘으로 충만되며 마치 한 마리의 표범처럼 웃음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덮쳐갔다.
그는 어렴풋이 여인의 놀란 외침을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소리는 무척 미약해 확실한 것은 장담할 수 없었다.
이어 그는 한 줄기의 흰 인영이 뒤쪽으로 달아나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가 생각을 굴릴 여지도 없이 또 한 줄기의 검은 그림자가 그를 향해 덮쳐왔다. 그 인영은 몸집이 굉장히 우람했는데 덮쳐오는 기세는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쾌속했다.
이 장 가량 떨어진 곳까지 덮쳐왔을 때 일종의 싸늘한 한풍이 초류빈의 전신을 휘감는 듯했다. 초류빈은 오랜 경험으로써 상대방이 일종의 극랄한 외문장력(外門掌力)을 연마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 웅후한 손바람의 세기로 미루어 무림의 일류 인물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매화도!
혹시 그는 바로 매화도가 아닐까? 초류빈은 상대방이 격출한 일장을 정면으로 맞받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진력을 낭비해 가면서 다른 사람과 정면으로 장풍을 교환하는 것을 피해왔다.
그러나 싸늘하기 비할 데 없는 장력이 이미 그의 모든 퇴로를 봉쇄해 버렸다.
더군다나 두 사람은 모두 앞으로 맹렬히 달리는 기세이므로 어느 한쪽도 머리카락 하나 용납할 수 없는 찰나에 몸을 피한다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설사 간신히 몸을 피했다 해도 그것은 기선을 상대방에게 넘겨주는 결과를 자초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대방이 기선을 잡고 두 번째 공격을 전개할 때 다시 피하려 한다면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앞으로 치달리던 초류빈의 신형이 뜻밖에도 별안간 뒤로 물러나는 게 아닌가?
그의 신형 변화는 송사리가 물속에서 노니는 것보다 더욱 민활했다. 다음 순간, 흑의인의 뾰족한 기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장력은 태산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듯 앞으로 뻗쳐왔다.
초류빈은 뒤로 물러난 후 등이 지면과 거의 수평에 이르는 자세로 변해 있었다. 그의 손은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은 것 같은데 비도가 어느 새 격출되었다.
번쩍이는 도광(刀光)은 밤하늘의 유성과 같았다. 흑의인은 괴성을 지르더니 곧장 몸을 솟구쳐 허공에서 한 번 회전하며 비조투림(飛鳥投林) 신법으로 매림 속으로 도망갔다.
초류빈은 배에 힘을 살짝 주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흡사 애당초부터 하릴없이 그곳에 서 있었다는 듯이 태연한 신색으로 아예 흑의인을 추격할 뜻도 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흑의인은 바로 핏방울이 줄을 이은 끝단에 가서 쓰러져 있었다.
그는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선혈이 여전히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차가운 광채를 띤 작은 칼도 이미 뽑혀 한쪽에 팽개쳐져 있었다.
초류빈은 몸을 숙여 자기의 칼을 주우며 흑의인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았다. 그는 실망을 한 듯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자네는 매화도가 아닌데 왜 나로 하여금 출수를 하게끔 만들었는가?"
흑의인은 이를 악물고 목구멍에서 괴상한 음향을 낼 뿐으로 말을 내뱉을 수도 없는 모양이다.
초류빈은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는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자네가 바로 이곡(伊哭)의 수제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네. 십 년 전에 자네를 한 번 본 일이 있지. 나는 한 번 본 사람은 영원히 잊지 않는다네."
흑의인은 극심한 고통으로 발버둥질을 치며 찢어지는 듯한 음성으로 간신히 내뱉었다.
"나...나도 너를 알고 있다!"
초류빈은 그가 측은하게 생각되었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가 정녕 나를 알고 있다면 왜 나를 죽이려는 행동을 했는가? 혹시 나를 죽여 입을 봉하려던 심산이 아니었는가? 그러나 자네가 이곳에서 누구와 밀회를 즐긴다는 것은 구태여 남에게 숨길 필요가 없는 일이라 생각하는데....."
흑의인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눈동자에 원한의 빛을 가득 채웠다. 그는 안간힘을 써서 말을 내뱉으려는 모양인데 약간 힘을 주자 목줄기에서 다시 선혈이 뿜어졌다.
초류빈은 입꼬리를 야릇하게 비틀었다.
"자네가 모종의 중대한 비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네. 그러기에 내가 그 비밀을 알까 봐 다짜고짜 죽이려 했겠지. 물론 당시 자네는 상대가 나였다는 사실을 몰랐었겠고."
그는 잠시 말을 중단했다가 계속 이었다.
"자네가 나를 죽이려 했기에 나도 피치 못해 자네를 죽인 걸세. 자네는 상대를 잘못 선택했고 나 역시 사람을 잘못 죽였네."
흑의인은 쓰러진 채 잠자코 있다가 별안간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미친 사자마냥 초류빈에게 덮쳤다. 초류빈은 단지 조용히 그곳에 서서 그를 주시할 뿐 전혀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상대방의 손이 초류빈의 가슴에 닿으려는 찰나 썩은 통나무처럼 다시 땅에 쓰려졌다. 그리고는 영원히 움직이지 않았다.
초류빈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상대방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에 그는 사람을 보았지만 지금 쳐다보고 있는 것은 시체였다. 한참 멍하니 서 있던 초류빈은 미간을 찌푸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저께 밤에는 진효의의 아들이 이곳에 나타났고 오늘은 이곡의 제자가 나타났으니 설소하라는 여자도 한가할 때가 별로 많지 않은 모양이군. 뜨거운 피가 체내에 흐르는 젊은 남녀이니 당연한 일이겠지. 그런데 이곡의 제자는 무엇 때문에 나를 죽여 입을 봉하려 했을까? 혹시 그 속에 다른 비밀이 내포 되어 있는 게 아닐까?"
그는 알 수 없는 기묘한 예감에 잠시 상념에 잠겼다.
냉향소축 안의 등불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조금 전에 사라진 흑의 인영은 바로 그쪽으로 달려갔는데 늘씬한 몸매로 미루어 보아 여자임이 분명하다.
혹시 설소하가 아닐까? 초류빈은 생각을 굴리며 다시 걸음을 옮겨 갔다.
그의 눈빛이 돌연 강렬하게 빛나며 전신에 긴장감이 일었다. 뒤에서 섬뜩한 살기가 덮쳐오는 것을 직감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매화 위에 쌓인 눈이 분분히 떨어지며 형체를 걷잡을 수 없는 날카로운 검기가 초류빈의 등을 향해 빠르게 뻗쳐왔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검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설사 이 일검이 정면으로 뻗쳐왔다 해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등 뒤에서 그것도 기습을 전개해 오는 것이 아닌가.
초류빈은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지만 역시 검기가 뼛속 깊이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때 검끝에서 폭사된 한망(寒芒)은 이미 초류빈의 겉옷을 꿰뚫었다.
정적이 흐르는 야밤중에 고요만이 감도는 매림에서 거듭 초류빈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나타난 것이다.
십 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초류빈. 이것이 바로 집으로 돌아온 그에 대한 환영의 표시란 말인가? 초류빈이 만약 왼쪽으로 몸을 피한다면 오른쪽 옆구리에 구멍이 뚫릴 게 십중팔구.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몸을 번뜩인다면 여지없이 등 한복판이 관통될 것이다. 그가 어떤 방향으로 몸을 피하든 날아오는 검보다 빠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초류빈도 이렇게 빠른 검은 난생 처음이다.
찍!
검날이 초류빈의 가죽으로 된 겉옷을 찢었다. 바로 그 순간에 초류빈은 검날을 등에 붙이고 뒤로 미끄러졌다.
차가운 검날이 피부를 스쳐가는 것을 의식하며 초류빈은 머리칼이 쭈삣하게 곤두섰다. 수백 차례의 싸움을 치른 그였지만 이번처럼 죽음과 접근한 적은 없었다.
상대방은 일검이 빗나가자 초류빈보다 더욱 놀라는 것 같았다. 그는 칼날의 방향을 살짝 바꾸어 비스듬히 후려쳐 냈으나 초류빈의 칼은 이미 그의 손목을 스치며 그의 손목을 지나갔다. 이 일도(一刀)의 속도는 원체 빨라 상대방에게 도저히 검초(劍招)를 변화시킬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수중에 쥔 검을 떨어뜨리고 즉시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그와 같은 시각에 초류빈의 비도는 이미 손끝에 와 있었다. 이 세상에 초류빈의 비도를 피할 수 있는 신법을 지닌 자가 있을까? 비도가 손끝을 벗어나려는 찰나 한 사람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현제, 손을 거두게!"
그것은 호유성의 음성이었다.
초류빈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잠시 비도를 멈칫하는 사이에 호유성은 이미 매림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울러 허공으로 몸을 솟구친 사람도 사뿐히 땅에 내려섰다.
안색이 창백한 비단옷을 입은 젊은이였다.
호유성은 두 사람의 중간에 서서 딱하다는 듯 발을 굴렀다.
"자네들은 어떻게 해서 싸움을 벌이게 되었는가?"
비단옷을 입은 젊은이의 눈은 어둠 속에서 부엉이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는 초류빈을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숲 밖에 죽은 사람이 있기에 매림 속에 있는 자는 필경 매화도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초류빈은 히죽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자네는 왜 그 죽은 자를 매화도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젊은이는 코웃음을 쳤다.
"매화도는 그렇게 쉽사리 남의 손에 죽지 않을 것이오!"
초류빈은 눈썹을 약간 위로 치켜세웠다.
"그렇다면 매화도는 꼭 자네 손에 죽어야 된단 말인가? 하지만 애석하게도....."
호유성은 얼른 나서서 그의 말을 가로챘다.
"자, 이제 모두들 그만두게. 이번 일은 완전히 오해에서 비롯된 걸세. 내가 적시에 달려왔으니 망정이지 만약 한걸음만 늦었다 해도 용호상쟁(龍虎相爭)하여 필시 한쪽이 사상을 당했을 것이네."
초류빈은 담담하게 웃으며 땅에 떨어져 있는 검을 주워 손가락으로 살짝 튕쳤다.
그러자 검신에 진동이 일며 용이 울부짖는 듯한 음향이 멀리 메아리쳐 퍼졌다.
초류빈은 계속 미소를 담고 엄지 손가락을 위로 세웠다.
"좋은 검이군."
그는 두 손으로 검을 상대방에게 내주며 호의적인 미소를 지었다.
"검은 명검이고 그 검을 사용하는 사람 역시 명가(名家)이니 오늘 비록 오해로 인해 비롯된 일이지만 역시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이네. 명가의 명검 맛을 보는 것은 그렇게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니까."
젊은이는 창백한 얼굴을 약간 붉히며 검을 빼앗아 가더니 손을 살짝 펼쳤다. 그러자 창! 하는 예리한 금속성이 들리며 검은 두 동강이 났다.
초류빈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좋은 검을 부러뜨리다니 정말 아까운데....."
젊은이는 시종 초류빈을 노려보고 있다가 싸늘하게 외쳤다.
"나는 이 검을 사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인을 할 수 있으니 귀하는 쓸데없는 염려를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오."
그는 초류빈에게 악감정을 가진 것 같았다.
초류빈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혼잣말처럼 투덜댔다.
"진작 그럴 줄 알았으면 검을 돌려줄 필요없이 그 검을 팔아 새 옷을 사 입는 건데....."
젊은이의 서릿발같이 차가운 음성이 그의 말을 이었다.
"그 점에 대해선 아무 염려 마시오. 귀하의 옷을 찢었으니 그 열배라도 배상할 용의가 있소."
초류빈은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지금 내가 입고 있는 가죽옷과 똑같은 것을 찾아내기는 힘들 걸세."
"귀하가 입고 있는 옷에 어떤 특수한 점이라도 있단 말이오?"
초류빈은 정색을 했다.
"다른 특징은 없지만 단지 눈이 달려 있다는 게 다른 옷과 다른 점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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