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19 소이비도 제2권 사랑과 의리





사랑과 의리



날이 밝아왔다.

초류빈은 인사불성인 채 쓰러져 있는 심미 대사 옆에 앉아 있었고 잠에 빠져 있는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극락동주의 독충들을 모두 매장한 후에 한 시진이나 걸어 작은 고릉에 가 지금 타고 있는 마차를 구입했던 것이다.

마차는 매우 낡았다. 초류빈은 지금 달콤하게 잠자고 있었다.

그것은 극도로 피로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그릇의 두부 국을 마시고 난 초류빈은 이내 노곤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두 눈을 감았던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차가 갑자기 정지했다.

초류빈은 이 순간 눈을 뜨고 급히 창문을 열며 고개를 밖으로 내밀었다. 순간 싸늘한 바람이 그의 안면을 강하게 때려 그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들게 하였다.

마부의 음성이 들려왔다.

"숭산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선 더 이상 갈 수 없으니 나리께선 걸어가시지요."

이 마부는 초류빈에 의해 따스한 이불 속에서부터 끌려나왔고 또 마누라가 이 일을 하라고 바가지를 긁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거기에다 품삯까지 마누라가 먼저 손아귀에 넣었기 때문에 내심 몹시 기분 나빴다. 만약 그렇지만 않았다면 그는 아마 중도에서 마차를 세워 더 이상 가지 못하겠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초류빈은 이러한 마부의 심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지라 군소리 없이 심미 대사를 부축해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은자 몇 푼을 꺼내어 마부의 손에 쥐어 주고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날씨도 추운데 가다가 술이라도 한 잔 사 마시구려. 남자에게 용돈이 없다는 것은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오."

마부는 더할 수 없이 기뻐하면서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마부가 감사의 인사말을 하기도 전에 초류빈은 심미 대사를 부축한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숭산은 온통 눈과 얼음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지가 오래였다.

초류빈은 신법을 전개해 산 위로 달려 올라갔다. 산 밑에는 작은 절간이 하나 있었고 몇 명의 회포승인이 대전에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바람을 피하면서 문 뒤에 서서 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은 누군가가 경공술을 전개해 산 위로 달려 올라오는 것을 보자 급히 마중나오면서 물었다.

"시주께선 어디서 오셨습니까? 혹시....."

그중 한 명이 채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또 한 명의 화상은 초류빈이 화상을 한 명 안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급히 끼여들면서 물었다.

"시주께서 안고 있는 사람은 소림의 제자가 아니오?"

초류빈은 그들의 물음엔 대답하지 않고 갑자기 몸을 날려 두 화상의 머리 위를 지나 계속 산 위로 달려 올라갔다.

이렇게 약 한 시진쯤 지나자 소림사의 웅장한 건축이 눈에 들어왔다. 소림사의 조사(祖師)인 달마승인이 중원에 온 후 이십팔 대가 지나는 동안 소림에선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고 무림 종주의 자리를 굳혀왔다.

높고 붉은 지붕 위엔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고 녹색의 담장은 장성을 방불케 하였다.

초류빈이 산 뒤를 통해 사내로 들어가 보자 거기엔 작고 큰 탑들이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초류빈은 이곳이 바로 소림사의 성지(聖地)인 탑림(塔林)이라는 것을 알았다. 바로 소림 역대 조상의 무덤이기도 하다.

여기에 묻힌 고승들은 살아 생전에 천하에 그 명성을 떨치고 죽은 지금에도 소림 승려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누구든 이곳에만 오면 속세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물며 초류빈은 오래 전부터 험악한 세상을 증오하고 명리와 재력에 대해선 도외시하지 않았던가.

그는 심미 대사를 안은 채 가볍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 갑자기 한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감히 소림의 금지를 침범하다니 시주께선 너무 안하무인격인 것 같소."

초류빈은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심미 대사께서 부상을 당하시어 소생이 여기까지 호송해 온 것이오. 방장 대사를 좀 만나게 해주시오."

일순 경악의 소리가 연이어 들리면서 소림승려들이 분분히 나타나 합장의 예를 취했다.

"고맙습니다. 시주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십니까?"

초류빈은 절로 탄식을 터뜨리면서 대꾸했다.

"소생은 초류빈이라고 하오."

정원은 더할 수 없이 조용했다. 나뭇가지 위에 쌓였던 눈들도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소림사 대나무 숲 깊은 곳에 매우 우아한 선방이 한 채 있었다. 창문을 통해 바라보노라면 두 사람이 마주앉아 장기를 두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의 태도가 어찌나 안정되고 무게가 있었든지 마치 이 조용한 천지가 하나로 융합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왼쪽에 앉아 있는 사람은 깡마른 데다가 왜소한 노인이었다. 하지만 형형한 눈빛과 우뚝 솟은 매부리코는 이 노인을 왜소하다는 느낌에서 벗어나 보는 이로 하여금 비할 데 없는 권위와 위엄을 느끼게 하였다.

이 노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백요생이었다. 천하에서 소림의 장문인인 심호 대사와 나란히 앉아 허심탄회하게 장기를 둘 수 있는 사람은 모르긴 해도 백요생밖에 없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이 장기를 두고 있을 땐 그 어떠한 일이라도 그들의 승부를 중지시킬 수가 없었다. 하지만 초류빈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호 대사가 입을 열어 물었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보고하러 들어왔던 소림의 제자가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사숙님의 방에 계십니다."

심호 대사는 의아해하며 다시 물었다.

"너의 이사숙이 어떻게 되었느냐?"

소림제자는 여전히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사숙께선 중상을 입으셨으며 사사숙과 칠사숙께서 그 어르신네의 상처를 살피고 계십니다."

초류빈은 뒷짐을 진 채 처마 밑에 서서 수없이 밀집해 있는 소림사의 웅장한 건축물들을 바라보았다.

싸늘한 바람소리에 은은한 법창소리가 실려오자 천지가 장엄함과 신비스러움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았다

초류빈은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지 않았다.

심호 대사와 백요생은 초류빈이 서 있는 곳에서 약 십 장쯤 떨어진 곳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심호 대사는 초탐화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눈으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심호 대사는 이 게을러 보이면서도 준수하고, 소홀해 보이면서도 침착한 이 시인 기질을 지닌 방랑객이 바로 그 유명한 강호 낭객인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듯 초류빈을 본 순간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심호 대사는 초류빈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특히 그의 살이라고는 거의 없는 긴 손을 더욱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그의 이 두 손엔 도대체 어떠한 마력이 있는 것일까? 어째서 쇠로 만들어진 극히 평범한 칼이 일단 그의 손에 들어가면 무서운 신기로 변하는 것일까?

백요생은 십 년 전에 초류빈을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십 년이 지난 지금 초류빈이 조금도 변한 데가 없다고 느꼈다.

그렇다. 초류빈은 별로 변한 것이 없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마음이며 십 년 전보다 더욱 침착하고 적막해진 것 같았다. 많은 사람과 같이 있어도 초류빈은 항상 고독해 했다.

백요생은 드디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탐화, 그동안 안녕하셨소?"

초류빈은 서서히 고개를 돌리더니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선생께서 아직 소생을 기억해 주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심호 대사는 합장의 예를 취하면서 말했다.

"탐화랑께선 노승을 아시는지 모르겠구려."

초류빈은 공손히 포권의 예를 취했다.

"소생 비록 견식이 미천하지만 덕망이 높으시고 태산북두로 받들어지고 계신 대사님을 어찌 모르겠습니까...오늘 이렇게 대사를 만나게 되어 무한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심호 대사는 겸허한 표정으로 말했다.

"탐화랑께선 너무 겸손해하지 마십시오. 폐사제를 이곳까지 호송해 주신 것에 대해 심심한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송구스럽습니다."

심호 대사는 재차 합장의 예를 취하면서 말했다.

"노승은 우선 사제의 상처를 살펴본 후에 다시 시주를 찾아오겠습니다."

초류빈이 역시 공수의 예를 취했다.

"장문인께선 어서 가 보십시오."

심호 대사가 안으로 들어가자 백요생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출가한 사람들의 수양이란 과연 비범한 것이구려. 만약 나였더라면 아마 귀하에 대해 이렇게 예의를 갖추어 대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의 말을 듣고 초류빈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오?"

"만약 누군가가 귀하의 사랑하는 제자를 상하게 했다면 귀하는 그 사람에 대해서 예의로써 대할 수가 있겠소?"

초류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선생께선 심미 대사가 나에 의해 상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백요생은 뒷짐을 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말을 내뱉었다.

"초탐화를 제외하고 또 누가 그를 상하게 할 수가 있겠소."

초류빈은 냉랭하게 반문을 하였다.

"만약 내가 그를 상하게 했다면 무엇 때문에 그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겠소?"

"그 점이 바로 귀하의 총명한 점이 아니겠소?"

백요생은 두 눈으로 야릇한 빛을 발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누구든지 소림의 호법을 상하게 하면 영원히 편안하게 살 수가 없소. 소림의 남과 북 두 곳에 있는 삼천 명의 제자는 절대로 그 자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오. 소림 제자들의 힘을 결코 경시해선 안 되는 것이지."

초류빈도 역지 냉랭하게 대꾸했다.

"선생의 말이 맞소."

순간 백요생의 안색이 약간 변하면서 입을 떼었다.

"하지만 귀하는 부상을 당한 심미 사형을 호송해 왔으니 다른 사람들은 비단 그가 귀하의 손에 부상을 당했다고 의심하지 않을 뿐더러 귀하가 매화도라는 것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오. 더구나 귀하는 그를 상하게 한 후 소림제자들에게 감사까지 받으려 하다니 정말 너무나 고명한 수단이오."

그의 말을 다 듣고 난 초류빈은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백요생이라는 사람은 과연 모르는 것이 없군요. 강호의 모든 큰 방파들이 선생의 친구가 되기를 갈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군....."

그는 잠시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비릿한 비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선생과 친구를 맺으면 좋은 점이 매우 많을 것이오."

백요생은 그의 말을 듣고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낭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한 것은 공도(公道)에 의한 것이오."

초류빈은 싸늘한 어조로 내뱉었다.

"하지만 선생은 한 가지 잊은 것이 있소. 심미 대사는 아직 죽지 않았소. 그는 자신이 누구에 의해 상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여기까지 말한 그는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며 말을 계속했다.

"그 때가 되면 선생은 지금까지 한 말을 다시 입 안에 담을 수가 있겠소?"

백요생은 탄식을 터뜨렸다

"만약 나의 짐작이 틀림없다면 심미 사형께선 아마 말할 수 있을 기회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오."

이때 심호 대사의 살기 띤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폐사제가 만약 시주의 손에 상하지 않았다면 누구에 의해 상했단 말이오?"

심호 대사는 어느 새 다시 밖으로 나와 있었고 그의 얼굴은 서릿발과 같이 차가웠다.

초류빈이 말을 받았다.

"대사께선 그가 누구의 독에 의해 중독된 것인지 알아내지 못하였소?"

심호 대사는 그의 물음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노기 띤 음성으로 소리쳤다.

"칠사제!"

소림은 무림의 정종으로써 권법과 장법으로 공력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무림의 인물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다만 수석 일곱 제자 중의 마지막인 심감 대사(心鑑大師)는 도중에 소림에 들어온 사람으로서 소림에 몸을 담기 전엔 칠교서생(七巧書生)이란 외호를 받고 있던 독을 행하는 대가였다.

심감 대사의 안색은 마치 병자와 같이 황색이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매우 날카로워 마치 겨울밤의 별빛과도 같았다.

심감 대사는 예리한 눈초리로 초류빈을 한참 동안 노려보더니 차갑게 입을 열었다.

"이사형께서 걸리신 독은 묘강 극락동주의 오독수정(五毒水晶)입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침울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그 독은 무색무미(無色無味)하며 수정구 같은 투명체로써 중독된 자가 해독약을 구하지 못할 땐 전신이 수정과 같은 투명체로 변해 오장육부가 환히 들여다보이게 됩니다."

그의 음성은 천만근이나 되듯이 몹시 무거웠다.

"그 때가 되면 설사 신선이라고 해도 구할 수가 없습니다."

초류빈은 웃으면서 말했다.

"대사께선 과연 고명하시군요....."

심감 대사는 냉랭하게 소리쳤다.

"빈승은 이사형께서 오독수정에 중독되셨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독을 쓴 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소."

백요생이 나서며 그의 말을 받았다.

"말 한번 잘 하셨소. 독은 죽어 있는 물체와 같은 것이니 독을 쓴 사람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겠소....."

심감 대사는 여전히 냉혹한 어조로 내뱉었다.

"극락동주가 비록 악독하기는 하나 남이 그를 건드리지 않으면 그도 남을 침범하지 않소."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정색을 하며 계속했다.

"그리고 본문은 극락동주와 아무런 갈등도 없는데 그가 무엇 때문에 이 사람을 암산하였겠소?"

그들 두 사람의 말을 들은 초류빈은 절로 탄식을 터뜨렸다.

"그것은 그의 상대가 심미 대사가 아닌 바로 소생이었기 때문이오."

백요생의 눈에서 형형한 빛이 발해졌다.

"매우 묘한 말씀이시군. 그가 해치고자 하는 사람은 이렇게 멀쩡하게 서 있고 무고한 심미 사형이 도리어 해를 입었다니 세상에 이러한 일이 어디에 있겠소?"

이렇게 외친 그는 초류빈을 똑바로 노려보면서 한마디 한마디 분명하게 말했다.

"만약 귀하가 이해할 수 있는 이유를 말할 수 있다면 나는 탄복할 것이오."

초류빈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나는 말하지 않겠소. 그것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당신들이 믿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오."

그 말에 모두들 안색이 변했다.

백요생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귀하의 말은 사실 믿기가 어렵소."

초류빈은 낭랑한 어조로 대꾸했다.

"내가 말할 수는 없지만 나를 대신해서 얘기해 줄 사람은 있소."

심호 대사는 의아해 하며 급급히 물었다.

"아니, 그게 누구요?"

초류빈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심미 대사! 그가 깨어난 후에 물어보시면 모든 것을 자연 알게 될 것이오."

그의 말을 들은 심호 대사는 칼날과 같이 예리한 눈초리로 초류빈을 노려보았다.

심감 대사는 얼굴에 서릿발을 내린 채 한마디 한마디 분명한 어조로 내뱉었다.

"이사형께선 영원히 입을 열 수가 없을 것이오."

칼날과 같이 예리한 바람이 지붕 위에 쌓여 있는 눈을 쉴새없이 휘날렸다.

거대한 소림사가 더할 수 없이 조용하고 죽은 듯이 고요한 가운데 종각의 범종이 은은히 들려왔다.

이 범종소리는 소림의 호법인 심미 대사의 원적(圓寂)을 애도하는 종소리였다.

초류빈은 이 순간 추위가 전신에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쉬지 않고 격렬하게 기침을 토했다. 내심 분노인지 또 후회인지 아니면 슬픔에 차 있는 것인지 그 자신조차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미묘했다.

한참 후에 기침을 멈춘 초류빈이 고개를 들어 보자 수십 명의 회포승인이 줄을 이어 이 작은 원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살얼음과 같이 차가운 빛이 역력했다. 입은 굳게 한일 자로 닫혀 있었고 두 눈에선 살기가 폭사되어 나왔다.

종소리도 어느 틈엔가 정지했고 마치 이 세상의 모든 소리가 추운 공기에 싸여 얼어붙어 버린 것 같았다. 다만 눈덮인 땅을 한발 한발 걸어오는 승인들의 발걸음소리만이 죽음의 의미를 깔면서 들려올 뿐이었다.

잠시 후 승인들의 발걸음소리까지도 멈추어졌을 때 초류빈은 자신이 납덩어리보다 더욱 무거운 얼음 속에 빙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엄숙하고도 숙연해야 할 성지는 일순 무서운 살기로 덮였다.

심호 대사가 냉랭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도 무슨 할 말이 있소?"

초류빈은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킨 후 장탄식을 터뜨렸다.

"나로선 더 이상 할 말이 없소."

말해 보았자 소용없는 것,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그는 생각한 것이다.

백요생은 비꼬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귀하는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소."

"하하하...당신의 말이 어쩌면 맞을 것이오. 하지만 시간이 다시 되돌아 온다고 해도 나는 역시 그렇게 했을 것이오."

초류빈은 공허한 웃음을 터뜨리다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무수한 사람을 죽여 왔던 것만은 사실이오. 하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살리지 않은 적은 없었소."

심감 대사가 대노하여 소리쳤다.

"지금 이 시각에 와서도 참회하는 빛도 없이 도리어 입을 놀리려 하다니....."

여기까지 말한 그는 더욱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빈승이 살계(殺戒)를 저지르지 않을 수가 없겠소."

초류빈은 웃으면서 말했다.

"서슴지 말고 살계를 펴 보시오. 살인을 하는 화상이 한두 사람이 아니니 대사라고 못할 것은 없는 것이오."

심감 대사의 두 눈에서 살기가 폭사되어 나왔다.

"내가 살인을 하고자 하는 것은 복수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천하의 중생을 위해 악마를 제거시키고자 하는 것이오."

그리고 막 덤벼들려고 할때 갑자기 싸늘한 광채가 번득였다. 이 순간 초류빈의 수중에 작고 날카로운 비도가 쥐어져 있었다.

초류빈은 냉랭하게 외쳤다.

"내 대사에게 권하겠소. 절대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대사는 나의 상대가 되지 못하오."

순간 심감 대사는 마치 두 발이 땅에 얼어붙은 듯이 그 자리에 서서 꼼짝하지 못했다. 그는 만약 자신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초류빈 수중의 칼이 자신의 목을 관통시킬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심호 대사가 소리쳤다.

"시주는 끝끝내 반항을 할 생각이오?"

초류빈은 탄식을 터뜨리면서 말을 받았다.

"비록 좋은 생활을 영위해 나가지 못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죽고 싶은 생각은 없소."

백요생이 나서며 물었다.

"비도가 설사 빗나간 적이 없다고는 하지만 귀하에게 몇 자루의 비도가 있으며 사람을 죽인다면 몇 명을 죽일 수가 있겠소?"

초류빈은 그의 물음에 그저 담담하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말하지 않는 것이 그 어떠한 말을 하는 것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심호 대사는 초류빈 수중의 비도를 흘겨보며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좋소. 빈승이 시주의 비도가 어떠한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 가르침을 받아 보겠소."

그러더니 큰걸음으로 걸어나왔다.

하지만 백요생이 급히 제지했다.

"대사, 절대 경거망동해선 안 됩니다."

심호 대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무엇 때문이오?"

백요생은 탄식을 터뜨리면서 대답했다.

"당금 무림에서 그의 비도를 피해낼 수 있는 사람은 결단코 없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심호 대사가 반문했다.

"그의 비도를 피해낼 사람이 없다고요?"

백요생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습니다. 한 명도 없습니다."

심호 대사는 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겠소!"

이때 심감 대사도 달려와 만류했다.

"사형, 소림사의 모든 안위는 사형의 몸에 달려 있습니다. 진정하십시오."

초류빈은 웃으면서 입을 떼었다

"그렇습니다. 그 누구도 모험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소림사엔 삼천 명의 제자가 있소."

이렇게 말한 그는 주위를 훑어보며 말을 계속했다.

"그저 대사들께서 명령만 내리시면 대사들을 대신해서 죽음을 받을 사람은 적지 않을 것이오."

심호 대사의 안색이 수차에 걸쳐 변했다.

"본좌의 명령이 떨어지기 이전에 본문의 제자는 그 누구도 경거망동해선 안 된다."

이렇게 말한 그는 마른침을 한 차례 삼키며 급히 말을 이었다.

"만약 어기는 자가 있을 땐 본문의 규칙에 의거해서 가차없이 처단하겠다. 알겠느냐?"

소림의 승인들은 그의 말을 듣자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초류빈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나는 대사가 결코 제자들을 죽음에 처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소."

여기까지 말한 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냉막하게 말을 계속했다.

"소림사는 과연 무림의 정종으로써 손색이 없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바이오."

이때 백요생이 냉랭하게 물었다.

"소림의 사형제들이 설사 귀하와 싸울 수 없다고는 하지만 귀하는 이곳을 쉽게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초류빈은 빙긋 웃으면서 써답했다.

"나는 결코 가지 않을 것이오."

백요생은 의아해 하며 반문했다.

"가지 않겠다고?"

초류빈이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시비와 흑백이 가려지기 전에 내 어찌 갈 수가 있겠소?"

백요생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귀하는 극락동주를 이곳으로 데리고 와 심미 대사의 사인을 밝히기라도 하겠다는 것이오?"

초류빈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소. 그는 이미 죽었으니까....."

백요생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급급히 물었다.

"귀하가 그를 죽인 것이오?"

초류빈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 역시도 사람이오. 그래서 나의 비도를 피해내지 못했소."

이 말에 심호 대사가 황급히 끼여들면서 입을 열었다.

"시주가 만약 그의 시체를 찾아낼 수가 있다면 최소한 시주의 말이 완전한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될 것이오."

초류빈은 씁쓸히 웃으면서 말했다.

"설사 그의 시체를 찾아온다고 해도 그가 진짜 극락동주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으니 소용이 없을 것이오."

그러자 백요생이 냉랭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귀하의 결백을 증명해 줄 사람이 또 어디에 있소?"

"지금까지는 아직 생각해 낼 수가 없소."

백요생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이젠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초류빈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하...지금은 오직 술을 마시고 싶을 뿐이오."

낭천의 앉아 있는 모습은 매우 보기가 흉했다.

그는 가장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의자에 앉아 있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방안에 난로가 있어 매우 따뜻했지만 그는 도리어 거북하게 여겨졌다. 한편 설소하는 난롯가 옆에 웅크린 채 엎드려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난로에서 발해지는 뜨거운 열기에 의해 완숙한 사과와 같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틀 동안 그녀는 눈 한번 감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낭천의 상처가 기적적으로 완치되자 그녀는 겨우 안심을 하고 눈을 붙인 것이다.

그녀의 잠자는 모습은 더더욱 아름다웠다. 길고 부드러운 속눈썹은 마치 창에 걸쳐 놓은 휘장과 같이 그녀의 눈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벼운 숨결을 따라 터질 듯이 풍만한 가슴이 가볍게 기복을 일으켰다.

낭천은 넋을 잃은 채 설소하를 내려다보았다.

방안엔 그녀의 가볍고 일정한 숨소리와 난로 속의 목재가 타는 소리만이 들렸다. 밖에 쌓인 눈도 이제는 서서히 녹아 천지간에 따스함과 고요함으로 가득차 있었다.

낭천의 두 눈에 점점 고통의 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살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조용히 신을 신었다. 아름다운 일들이 순간 낭천의 뇌리에 떠올랐다가 즉시 사라졌다.

누구든지 아름다운 일들을 남겨두고 떠나려 한다면 그 사람에겐 고통과 불행만이 초래될 것이다.

낭천은 가볍게 탄식을 터뜨렸다.

"아!"

그는 방 한구석에 있는 상 위에 올려져 있던 검을 들어올렸다.

한쪽 벽에 초류빈이 친필로 쓴 족자가 걸려 있었다. 그 위엔 단 한 행으로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이 일은 추억으로 남으리라>

만약 이틀 전이라면 그는 이 글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낭천은 추억만이 영원히 남을 것이라는 뜻을 알았다. 오직 추억 속의 달콤함만이 영원히 유지될 것이다. 낭천은 서서히 검을 허리춤에다 걸쳤다.

이때 돌연 설소하의 음성이 들려왔다.

"왜...이러시는 것이지요?"

그녀는 갑자기 깨어나 아름다운 두 눈에 경악의 빛을 담은 채 낭천을 바라보았다. 낭천은 감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지 못했다. 그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 짤막하게 말했다.

"나는 가야겠소."

설소하는 의아해하며 다급하게 반문했다

"가시겠다고요?"

그녀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낭천의 앞으로 달려오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한테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떠나시겠다는 것인가요?"

낭천은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떠나갈 몸으로서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소."

설소하는 마치 전기에 감전이 된 듯 온몸을 심하게 떨더니 뒤로 물러나 의자 위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러는 그녀의 두 눈에는 수정과 같은 맑은 눈물이 흘러내려 왔다.

순간 낭천은 마음 한구석에서부터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러한 감정을 느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쓴 것인지 아니면 달콤한 것인지 그로서는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낭천은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리며 말을 했다.

"당신이...당신이 나를 구해준 은혜에 대해서는 내...내 언젠가는 보답할 것이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설소하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좋아요. 어서 보답하세요. 내가 당신을 구해준 것은 당신의 보답을 받기 위한 것이었어요."

그녀는 비록 웃고 있기는 했지만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낭천은 암담한 표정으로 입을 떼었다.

"나도 당신의 마음을 알고 있소. 하지만 나는 초류빈을 찾아가지 않을 수가 없소."

설소하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말을 받았다.

"그를 찾아가는데 저에게 얘기해 주고 저와 같이 가면 안 되나요?"

낭천은 어찌할 바를 몰라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당신에게까지 폐를 끼치고 싶지 않소."

"나에게 폐가 된다고요? 당신은 당신이 간 후에 제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설소하는 눈물을 흘리면서 애처롭게 말했다.

낭천은 그녀의 말에 무엇인가 반박하려고 했지만 입술이 심하게 떨려 도무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입술, 아니 혀까지 이렇게 떨리기는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설소하는 갑자기 낭천에게 달려와 그를 놓칠세라 힘껏 껴안으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천천히 말했다.

"저를 데려가 주세요. 만약 저를 데려가 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당신 앞에서 죽겠어요."

아름다운 여인 앞에서 매정하게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 그리고 여인이 죽겠다고 할때 그것을 보고 있을 남자는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밤은 매우 조용했다. 방안에서 나오자 눈이 소복히 쌓인 매화를 볼 수 있었다. 이곳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냉향소축이다.

이상한 것은 이틀 사이에 흥운장이 온통 떠들썩했지만 이곳에 온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낭천을 찾으려 했다면 이곳에 왔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째서 이곳에 오지 않은 것일까? 그들은 무엇 때문에 설소하를 이토록 신임하고 있는 것일까?

설소하는 낭천의 손을 꽉 잡은 채 말했다.

"저는 언니에게 우선 말을 한 후에야 떠날 수 있어요."

"어서 갔다 오시오."

설소하는 가볍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을 이곳에 혼자 남겨두는 것이 걱정이 돼요. 우리 같이 가요."

낭천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하지만 당신의 언니께서....."

그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설소하는 그의 말을 받았다.

"안심하세요. 언니도 초류빈과는 매우 친한 사이니까요."

그러더니 낭천의 손을 잡고 매화림을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한 누각에 도착했다.

누각은 매우 조용했고 등불도 매우 우울해 보였다.

작은 누각 위 복도에 등잔이 걸려 있었는데 바람에 의해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누각에 있는 방은 온통 휘장으로 쳐져 있었지만 설벽운은 혼자 멍청하니 앉아서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었다.

설소하는 낭천을 데리고 누각 위로 올라와 가볍게 입을 열어 설벽운을 불렀다.

"큰언니...큰언니, 아직 안 주무시나요?"

그러나 설벽운은 그 자리에 멍청하게 앉은 채 고개도 들지 않았다.

설소하는 안타까운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큰언니, 저는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에요. 저는 가야 해요. 하지만...절대 언니의 온정을 잊지 않겠어요. 저는 곧 돌아올 거예요."

설벽운은 그녀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한참 동안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가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가거라.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곳은 미련을 남겨 둘 곳이 못된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난 설소하는 어깨를 들먹이며 다시 물었다.

"형부께선 어디에 계시지요?"

"형부? 누구의 형부....."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설소하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물론 저의 형부죠."

설벽운은 고개를 마구 저으며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너의 형부를 모른다...나는 모른다. 몰라....."

그녀의 몸부림치는 듯한 모습을 본 설소하는 일순 넋을 잃고 말았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있던 설소하는 애써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저희들은 지금 가까운 길을 택해 소림사로 갈 거예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설벽운은 갑자기 뛰어 일어나더니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어서 가라. 어서 가! 어서...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어서 가라. 어서 가!"

그녀는 미친 듯이 양손을 흔들면서 소리쳐 설소하와 낭천을 내쫓았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실성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하하...히히....."

이때 길게 늘어진 휘장 뒤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나타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호유성이었다. 그는 설벽운을 바라보더니 입가에 음험한 미소를 띠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그들이 소림사로 갔다고 해도 소용이 없지. 이 천하에서 초류빈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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