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02 소이비도 제1권 저승 사자
저승 사자
안에는 술단지 몇 개가 실렸다. 이 술은 모두 정체 모를 청년이 산 것이었다. 자기가 산 술이라 청년은 아무 부담감없이 한 사발 또 한 사발 쉬지 않고 마셨으나 거나하게 취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초류빈은 더할 수 없이 유쾌한 표정으로 청년이 술을 마시는 것을 지켜 보고 있었다. 길에 쌓였던 눈은 이제 얼어붙어 빙판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이 타고 있는 마차는 반은 말에 의해 굴러가고 반은 빙판에 의해 미끄러지면서 계속 전진해 갔다.
청년은 천천히 술사발을 내려놓더니 궁금한 듯이 물었다.
"당신은 어째서 꼭 마차에서 술을 마시자고 하는 것입니까?"
초류빈은 씨익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건 객잔에 오래 머물러 있을 형편이 못되기 때문일세."
"무엇 때문이죠?"
초류빈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누구를 막론하고 사람을 죽이고 나면 항상 번거로운 일이 따르기 마련일세. 나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번거로운 것만은 아주 질색일세."
청년은 다시 술을 한 사발 퍼서 꿀꺽꿀꺽 마시고 나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확실히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꼭 죽여야 할 사람이면 마땅히 죽여야만 하겠지요."
초류빈은 소리없이 웃으며 넌지시 물었다.
"자네는 정말 오십 냥의 은자 때문에 백사를 죽였는가?"
청년은 마른 안주 하나를 들어 질겅질겅 씹으며 대답했다.
"오십 냥이 없어도 그를 죽이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오십 냥이 생긴다면 더 좋지 않습니까?"
초류빈은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자넨 무엇 때문에 오십 냥만 요구한 것인가?"
청년의 대답은 지극히 간단했다.
"그건 그 자의 목숨이 오십 냥의 값어치밖에는 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초류빈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강호에는 당연히 죽어야 할 사람들이 많네. 그들의 가치가 오십 냥에 불과하지만은 않지. 때문에 자네는 장차 큰 부자가 될 수도 있네. 그럼 나도 자네 덕으로 가끔 공짜 술을 얻어 먹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청년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저는 너무 가난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에게도 오십 냥을 드릴 수가 있는데."
초류빈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자네는 무엇 때문에 나에게 오십 냥을 주겠다는 건가?"
"당신이 저를 대신해서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초류빈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자네는 잘못 생각하고 있네. 그 자는 오십 냥은커녕 한푼 어치의 가치도 없는 인간이네."
그리고는 다시 웃음을 거두면서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자네는 제갈뢰가 무슨 이유로 자네를 죽이려 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나?"
청년이 말없이 고개를 흔들자 초류빈은 두 눈을 감았다 뜨며 말을 이었다.
"비록 백사가 제갈뢰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자네는 죽이지 않았나? 결국 그는 자네가 방심한 틈을 노려 자네를 죽임으로써 자기의 위신을 회복하려 했던 것일세."
청년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사람의 마음은 때때로 야수보다도 더 악독할 때가 있습니다. 야수가 사람을 잡아먹을 때는 최소한 그 사람이 왜 하는 것인지를 알도록 하지요....."
"....."
"그러나 사람이 야수를 보고 악독하다고 하는 말은 들었어도 야수가 사람더러 악독하다고 하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사실 야수란 오직 자신의 삶을 위해서만 살생을 하지요.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야수가 사람을 죽이는 일보다 훨씬 더 많다는 점입니다."
초류빈은 청년을 주시하면서 익살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자네는 야수들과 친구가 될 뜻이 있다는 건가?"
청년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지만 야수들은 술을 마시지 못하니 아쉬울 따름입니다."
초류빈은 청년이 웃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는 이 가벼운 웃음이 한 사람의 얼굴에 이렇게 큰 변화를 가져다 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원래 청년의 얼굴은 냉막함과 고독으로 찌들어 마치 야산을 헤매는 늑대를 연상케 했으나 청년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을 때는 그렇게 천진스럽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초류빈은 지금까지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웃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때 청년은 초류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유명한 사람입니까?"
초류빈은 덤덤하게 웃으며 반문했다.
"유명하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자네는 어떤가?"
"하지만 저는 유명해지고 싶습니다.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청년의 표정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기만 했다.
초류빈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명성을 날리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의 욕망이네. 하기사 자네는 그래도 남들보다 훨씬 솔직하군."
청년은 입술을 깨물며 두 눈에서 날카로운 신광을 번뜩였다.
"저는 딴 사람과는 다릅니다. 저는 꼭 이름을 날려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지 못하면 저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초류빈은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급히 물었다
"아니, 그건 무엇 때문인가?"
청년은 아무 대답이 없었으나 두 눈에서는 슬픔과 분노의 빛이 폭사되어 나왔다.
그제서야 초류빈은 이 청년에게 말못할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속단일지는 모르지만 청년의 신세내력은 수수께끼이면서도 비통과 불행으로 얼룩져 있는 것 같았다.
초류빈의 목소리는 지극히 부드러웠다.
"자네가 명성을 날리려면 최소한도 이름을 말해 줘야 할 것이 아닌가?"
청년은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낭천이라 부릅니다."
"낭천?"
초류빈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그럼 자네의 성이 낭씨란 말인가? 세상에 그런 성씨가 어디에 있는가?"
청년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에겐 성이 없습니다."
청년의 눈에는 핏발이 곤두서 마치 시뻘건 화염이 이글거리는 것 같았으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제가 명성을 날릴 때가 오면 진짜 이름을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초류빈이 얼른 말을 가로챘다.
"자네. 나는 그냥 자네를 낭천이라고 부르겠네. 그럼 우리 한 잔씩 더 하세."
초류빈은 단순에 한 사발의 술을 마셔 버리고 연속적으로 가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이 돌연한 모습에 낭천은 놀라움에 가득찬 표정으로 초류빈을 쳐다보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술잔을 들어 역시 단숨에 비워 버렸다.
가까스로 기침을 가라앉힌 초류빈은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낭천, 자네는 내가 왜 자네 같은 친구를 좋아하는지 아는가?"
낭천은 초류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모르겠다는 듯 두어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건 내가 기침을 하는 것을 보면서도 나에게 마시지 말라고 권하지 않았기 때문일세."
낭천은 천진스러운 눈동자에 짙은 의혹을 담았다.
"기침을 하면 술을 마실 수가 없는 것입니까?"
"원래는 건드리지도 못하게 되어 있지."
"그런데 무엇 때문에 마시는 겁니까? 혹시 속이 상한 일이라도 있나요?"
초류빈은 갑자기 눈빛을 흐리더니 또박또박 입을 놀렸다.
"나는 자네가 어려워하는 문제와 또 자네의 부모가 누구이며 자네에게 공력을 전수해 준 사부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묻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나?"
낭천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초류빈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자네는 왜 나에게 묻는 건가?"
낭천은 미묘한 표정으로 초류빈을 한참 바라보다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좋아!"
초류빈은 낭천에게 술을 권하기 위해 술단지를 옮기는 순간 다시 허리를 꼬부리면서 심하게 기침을 했다.
이때 갑자기 마차가 미끄러지며 급정거를 했다.
초류빈은 고개를 창 밖으로 내밀어 텁석부리 장한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장한의 대답은 지극히 담담했다.
"길을 막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래? 어떤 사람인가?"
"예, 눈사람(雪人)입니다."
"뭐라구?"
초류빈과 낭천은 즉시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과연 길 한가운데 눈사람 하나가 크게 만들어져 있었다. 낭천은 마치 지금껏 눈사람을 보지 못한 듯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초류빈은 낭천을 바라보며 흥미로운 듯이 물었다.
"자네는 눈사람을 만들어 본 적이 없나?"
낭천은 냉랭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저는 눈이 증오스럽습니다. 눈은 저에게 무서운 추위를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모든 열매나 초목을 얼게 하고 또 모든 동물들에게 배고픔과 고통을 주지요."
그는 눈을 한 뭉치 뭉쳐 멀리 던지면서 말을 계속했다.
"배불리 먹고 따스하게 입고 생활을 해 나가는 사람들에게는 눈이란 매우 반가운 것이지요. 비단 눈사람을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설경(雪景)을 감상할 수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저 같은 사람은....."
여기까지 말한 그는 갑자기 초류빈을 똑바로 쳐다보며 비분에 가득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는 황야(荒野)에서 자랐습니다. 바람과 눈, 그리고 서리와 비는 저의 가장 큰 적입니다."
초류빈은 잠시 멍청하게 서 있더니 갑자기 눈을 한 덩어리 단단하게 뭉치면서 말했다.
"나는 눈을 싫어하지는 않네. 그러나 나의 갈 길을 막는 자를 가장 싫어하네."
그러더니 뭉친 눈을 길을 막고 서 있는 눈사람에게 던졌다.
퍽!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리와 함께 눈이 사방으로 튀었으나 눈사람은 쓰러지지 않았다. 그대신 눈 속에서 꽁꽁 얼어붙어 있는 진짜 사람의 시체가 나왔다.
이 시체는 얼굴이 더할 수 없이 추악했다. 시커먼 얼굴에 한 쌍의 부릅뜬 눈이 마치 죽은 생선의 눈알처럼 튀어나와 얼어 있었다.
시체를 보는 순간, 낭천은 안색이 급변해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앗! 이건 흑사가 아닙니까?"
과연 그 시체는 흑사였다.
흑사가 어떻게 해서 여기에서 죽어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를 죽인 사람은 무슨 이유로 흑사를 눈에다 뭉쳐 길 한가운데다 세워 둔 것일까?
텁석부리 장한은 시체를 눈 속에서 끄집어낸 다음 반듯하게 눕힌 채 유심히 살폈다.
도대체 어디를 어떻게 맞아 치명상을 입었는지 알아내려는 것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초류빈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낭천에게 말했다.
"자네는 누가 그를 죽였는지 아는가?"
낭천이 말없이 고개를 젖자 초류빈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범인은 바로 주막에서 보았던 그 황색 보따리일세."
낭천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보따리라니요?"
"확실히 보따리네. 그 황색 보따리는 상 위에 올려져 있었지만 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네. 그런데 흑사가 떠난 후 그 보따리도 감쪽같이 사라졌지. 그 보따리는 바로 흑사가 갖고 간 것일세."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그 보따리가 자신의 목숨을 빼앗아 갈 줄이야 그가 어찌 알았겠는가?"
초류빈은 어느 틈엔가 작은 조각칼을 수중에 들고 만지작거리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보따리엔 도대체 무슨 물건이 들어 있을까?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그 보따리에 흥미를 느끼고 있을까?"
묵묵히 듣고만 있던 낭천이 마침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급히 물었다.
"흑사를 죽인 자가 그 보따리에 목적이 있었다면 어째서 보따리를 겁탈해 간 후 그를 죽여 눈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일까요?"
초류빈은 경악에 찬 눈으로 낭천을 주시했다.
이 청년은 지극히 천진하여 세상 물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지혜와 치밀함, 그리고 재빠른 반응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것은 노련한 강호의 인물도 따르기가 힘든 것이다.
낭천은 미간을 찌푸린 채 다시 말을 이었다.
"살인자는 우리가 탄 마차가 이곳으로 지나간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눈사람을 만들어 길을 막은 것이 아닐까요?"
초류빈은 그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고 텁석부리 사나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치명상을 찾아냈는가?"
이렇게 물은 그는 텁석부리 장한이 뭐라 채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다시 엉뚱한 말을 했다.
"이젠 그만 찾게."
낭천이 냉랭한 목소리로 뒤를 이었다.
"맞습니다. 그들이 모두 나타났는데 찾을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초류빈은 예민하고도 강한 청각과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천하 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낭천이라는 청년에게도 그타 똑같은 실력이 있을 줄이야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야수와 같은 천부적 본능이 있는 낭천에 대해 초류빈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낭천을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더니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여러분, 어서 나오시오. 우리 술이나 한 잔씩 나눕시다!"
이 말이 떨어지는 순간, 길 옆에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쌓여 있던 눈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며 미친 듯한 웃음소리가 삭막한 주위에 메아리쳤다.
"으하하하...십 년 동안 보지 못했는데 탐화랑(探花郞)의 보도(寶刀)가 아직도 그렇게 날카로울 줄이야...축하하오."
웃음소리와 함께 눈이 덮인 길 왼쪽 숲속에서 한 명의 노인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외팔이에 이마가 툭 튀어나오고 누르스름한 얼굴에 매부리코를 지닌 노인이었다. 뒤이어 오른쪽 숲에서도 뼈에다 가죽만 씌운 듯한 깡마르고 작은 사람이 나타났다.
낭천의 안색이 싹 변했다. 그것은 이 자가 걸어나온 곳에 발자국이 전혀 나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답설무흔(踏雪無痕, 경공술의 일종). 눈길을 걸어오면서 전혀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니 상대의 경공술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이었다.
초류빈은 두 사람을 보자 만면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소생이 관내(關內)로 들어온 지 불과 보름밖에 되지 않았는데 금사표국의 사(査) 총표두(總驃頭)와 신행무영(神行無影) 우이(友二) 선생이 찾아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소. 그러고 보니 소생의 체면도 좀 살아나는 것 갈소이다."
깡마른 노인이 음침하게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호오! 기억력이 대단하시군. 우린 십삼 년 전에 한 번밖에 만난 적이 없는데 탐화랑이 아직도 이 절름발이 우이를 기억해 주다니....."
낭천은 그제서야 나중에 나타난 이 깡마른 노인의 다리 하나가 불구라는 것을 알았다. 절름발이에게 이토록 고명한 경공술이 있을 줄이야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신행무영 우이의 다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불구였으나, 그는 어렸을 때부터 피나는 노력을 해서 초인적인 경공술을 터득해 자신의 치명적인 결점을 보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는 낭천이 우이 노인에 대해 감탄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초류빈은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두 분께서는 몇몇 친구분들과 같이 오신 것 같은데 불러내어 소생에게 소개를 시켜 주지 않겠소?"
신행무영의 말투는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좋소. 그들도 오래 전부터 초탐화(楚探花)란 대명을 들어 한번 만나보고 싶어하던 참이었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숲속으로부터 네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비록 대낮이기는 했지만 초류빈은 그들을 보는 순간 한밤중에 도깨비라도 본 듯이 등골에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억제하지 못했다.
이 네 사람은 나이가 적지 않았으나 차림새는 모두 어린아이와 같았으며 몸에는 울긋불긋한 색동옷을 입고 발에는 호랑이가 수놓아진 꽃신발을 신고 있었으니 실로 그 모습은 흉칙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그들은 하는 행동도 어린아이와 같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삼 년 전에 먹은 송편까지 토해내게 할 정도로 민망스럽고 구역질이 났다. 특히나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팔목과 발목에 끼워져 있는 은빛 찬란한 요령(搖令)이었다. 그것은 걸을 때마다 짤랑짤랑 소리가 나서 몹시 귀에 거슬렸다.
텁석부리 장한은 이 네 사람을 보는 순간 안색이 급변하면서 외쳤다.
"흑사는 사람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
"뭐라구?"
초류빈이 대경실색하여 급히 고개를 돌리자 텁석부리 장한은 격동된 어조로 다시 말했다.
"흑사는 전갈과 독지네에 의해 죽은 것입니다!"
초류빈의 안색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렇다면 저 네 분은 묘강 극락동(極樂洞)의 오독동자(五毒童子) 문하란 말인가?"
텁석부리 장한이 채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네 사람 중에서 황의(黃衣)를 입은 동자가 깔깔거리고 웃으며 소리쳤다.
"우리가 애써서 만든 눈사람을 망쳐 놓았으니 그것을 배상해 주시오."
말을 마치는 순간, 그의 몸은 이미 허공으로 붕 떠오른 채 초류빈에게 덥쳐오는 것이 아닌가. 초류빈은 상대가 몸을 날려 공격해 오는 것을 보고 있으면서도 입가에는 미소를 띤 채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로 이 순간! 갑자기 우이가 번개같이 몸을 날려 황의동자에게 달려가 그의 손을 잡더니 한쪽으로 유연하게 내려서는 것이었다. 이어 금사표국의 총표두 사맹(査猛)이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하하! 탐화랑께선 일대의 부호라 눈사람이 아니라 금사람(金人)이라 해도 능히 배상할 수 있소. 그러니 네 분께선 너무 서두르지 마시고 우선 인사부터 나누기로 합시다."
그러자 네 사람 중의 홍의동자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나는 저 사람을 알고 있소. 그는 초류빈이 아니오?"
흑의동자가 말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나는 그가 술을 폭음하며 투전을 하는데 정통하다는 것도 알고 있소. 진작부터 어울려 보고 싶었던 사람이오."
또 한 명 녹의를 입은 동자가 계속해서 말을 꺼냈다.
"나는 그의 학문이 비범하다는 것도 알고 있소. 그리고 친왕(親王)께서 친히 뽑은 탐화랑직에 선출되었다고 하더군. 어디 그뿐인가? 그의 애비의 애비도 탐화랑직을 받았었지."
홍의동자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다시 말을 받았다.
"하지만 여기 이 초탐화는 관직을 버리고 오히려 강도가 되는 것을 원하니 안타까울 뿐이오."
이들의 말을 듣고 난 낭천은 아연 넋을 잃고 말았다. 그는 이 새로 사귄 친구에게 이렇게 다채로운 이력이 있을 줄이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이 말한 것이 초류빈의 다채로운 경력의 눈꼽만큼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는 알 리가 없었다. 초류빈의 진짜 일생을 얘기하려면 네 사람이 네 개의 입을 통해 빠른 속도로 사흘낮 사흘 밤을 꼬박 지새워도 다 하지 못할 것이다.
낭천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는 초류빈의 두 눈에 고통의 빛이 역력히 서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때 우이가 돌연 냉랭하게 말을 꺼냈다.
"여러분들은 초탐화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구려. 그러나 초탐화의 신도(神刀)가 천하에서 으뜸이며 그의 손에서 일단 떨어져 나가면 한 사람의 생명이 정확하게 사라진다는 말도 들어 보셨소?"
황의동자가 비시시 웃으며 야멸차게 말했다.
"이제보니 당신은 내가 저 자의 신도에 찔려 죽을 것이 염려되어 조금 아까 나를 만류한 것이군요?"
초류빈이 소리없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안심하시오. 나는 오직 단칼에 사람을 죽이기는 하나 칼 하나로 여섯 명 모두를 죽일 수는 없소."
말을 중단한 그는 갑자기 살기띤 눈초리로 사방을 노려보면서 차갑게 말했다.
"여러분들께서 만약 제갈뢰의 복수를 하러 오셨다면 서슴지 말고 덤비시오. 난 이미 구천구백구십사 명을 죽였지만 잘하면 당신 여섯 명은 살 수가 있을 것이오."
금사표국의 총표두 사맹이 극히 부자연스럽게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제갈뢰는 죽음을 자초한 것이라 그건 초형을 탓하지 않소."
초류빈은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코웃음을 쳤다.
"여러분이 복수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면 나와 술이라도 같이 마시러 온 것이란 말이오?"
사맹이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우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황색 보따리를 찾기 위함이오."
초류빈의 미간이 일순 깊이 찌푸려졌다.
"보따리?"
"그렇소. 그 보따리는 금사표국이 부탁을 받고 운반하는 물건이오. 만약 그것을 잃게 되면 금사표국의 명성은 하루 아침에 허물어질 것이오."
초류빈은 멍청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는 그 보따리를 갖고 있지 않소."
우이는 빙긋이 웃으며 당치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초형은 농담도 잘하십니다. 초형께서 현장에 계셨는데 하찮은 흑사가 어찌 보따리를 가져갈 수 있겠소?"
초류빈은 안타까운 듯 미간을 모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번거로움을 가장 싫어하는데 어째서 그 번거로움이 자꾸 나에게만 찾아드는 것일까?
사맹은 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다시 말을 꺼냈다.
"초형께서 황색 보따리만 내주신다면 우리들은 즉시 떠나겠소. 그리고 물론 얼마 되지는 않지만 초형에게 술값을 드리겠소."
초류빈은 수중의 칼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을 하더니 갑자기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소. 황색 보따리는 확실히 나에게 있소. 하지만 당신들에게 돌려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이 말은 모든 사람들의 안색을 급변하게 만들었다.
우이가 급히 끼여들며 물었다.
"초형께선 고려를 하시는 데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오?"
초류빈은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한 시진이면 충분하오. 우리 한 시진 후에 이곳에서 다시 만납시다."
우이는 선선히 승낙했다.
"좋소! 한 시진 후에 만납시다."
그리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가볍게 휘둘러 떠나려고 했을 때, 황의동자가 웃음을 터뜨리며 초류빈의 앞을 가로막았다.
"헤헤헤...반 시진이면 멀리 도망치기에 충분할 텐데 무슨 한 시진이 필요하다는 것이오?"
우이가 급히 고개를 돌리면서 냉랭하게 소리쳤다.
"초탐화는 출도한 후 은거하기 전까지 칠 년 동안 크고 작은 싸움을 오백여 차례나 겪었지만 한 번도 도망간 적이 없소."
이렇게 하여 그들은 상승의 신법을 전개하여 일제히 눈이 덮인 숲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모두 떠나고 나자 낭천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초류빈에게 물었다.
"황색 보따리는 당신이 갖고 있지 않은 걸로 아는데요?"
초류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자 낭천은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지니고 있다고 엉뚱한 말을 하는 겁니까?"
초류빈의 얼굴에는 일순 번뇌의 빛이 물결쳤다.
"설혹 내가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일세. 그렇게 되면 싸움은 불가피할 것이 아닌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시인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일세."
"하지만 언젠가는 기필코 싸우게 될 것인데 또 무슨 고려해 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겁니까?"
초류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한 시진 안에 우선 한 사람을 찾아야 하네."
"누구를 찾으려는 겁니까?"
"물론 보따리를 훔친 자일세."
"예? 그럼 당신은 보따리를 훔친 자가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까?"
"어젯밤 주막에는 모두 세 명의 금사표두들이 있었지. 제갈뢰와 조노이를 제외한 또 한 명, 나는 바로 그 자를 찾으려는 것이네."
낭천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가죽옷에다 허리에 연검을 두르고 귀 옆에 검은 털이 난 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초류빈은 다시 한번 감탄한 빛을 떠올렸다.
"자네는 그를 두 번밖에 보지 않은 걸로 아는데 그렇게 자세하게 보았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
초류빈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허공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맞았네. 내가 말한 자는 바로 그 자일세. 어젯밤 주점에 있던 사람들 중에는 그 자만이 그 물건의 가치를 알고 있네. 그 자는 상 밑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주의하지 않았지. 그는 그 틈을 노려 보따리를 훔쳐간 것일세."
낭천은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초류빈은 조용히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그는 그 보따리의 가치를 알고 있기 때문에 혼자 삼킬 욕심을 품었네. 그리고 총표두가 자기를 의심할 것이 두려워 책임을 나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지. 나는 이런 일을 한두 번 당한 것이 아니네."
"그럼 우리들의 행적은 그 자가 사맹에게 알린 것이겠군요."
초류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낭천은 빙그레 웃으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놈은 사맹이 의심할 것이 염려되어 당분간은 도망을 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초류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맑은 눈에 신광을 내뿜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사맹 일행과 같이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사맹의 행방을 찾으면 그를 찾을 수 있는 것은 명약관화하다는 판단을 내리셨군요?"
초류빈은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만약 자네가 강호에서 사오 년 만 돌아다니면 더 이상 알 것이 없겠군. 만약 훗날 우리가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그 때도 변함없는 친구가 되기를 바라겠네."
낭천은 초류빈을 똑바로 주시하며 담담하게 물었다.
"그럼 저더러 그만 가라는 것입니까?"
초류빈은 즉시 머리를 끄덕였다.
"이 일은 나의 일이며 자네와는 상관이 없네. 그리고 상대방이 자네에게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자네가 이곳에 있을 필요가 뭔가?"
낭천은 약간 아쉬운 듯한 표정이었다.
"혹시 저에게 누를 끼칠까 염려되어 그러시는 겁니까? 아니면 저와 동행하기를 원치 않으시는 겁니까?"
초류빈의 두 눈에는 일순 고통의 빛이 어렸으나 그는 역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사람이란 만나면 언젠가는 반드시 헤어져야 하네. 우리도 언젠가는 헤어질 텐데 헤어지는 것이 빠르건 늦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낭천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갑자기 마차 안에서 두 사발의 술을 퍼서 한 잔을 초류빈에게 건네 주었다.
"우리 마지막으로 한 잔 더 하기로 하지요."
초류빈은 술잔을 받아 들고 쓸쓸하게 웃으며 단숨에 마셔 버리고는 다시 심하게 기침을 했다. 낭천도 술잔을 다 비운 후 초류빈을 한참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가 말없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잔뜩 흐렸던 하늘에서는 다시 탐스러운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초류빈은 눈발이 휘날리는 속으로 천천히 사라져가는 청년의 뒤를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더니 다시 한 사발의 술을 들어 높이 쳐들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낭천,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바라네. 나는 자네를 보내고 싶어 보낸 것이 아닐세. 나는 재수가 없고 귀찮고 또 위험한 사람이라 결코 자네와 친구가 될 수 없다네."
이렇게 중얼거린 그는 낭천이 사라진 후에 남겨진 눈 위의 고독한 발자국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텁석부리 장한은 시종 석상처럼 한쪽에 서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몸에 수북히 쌓이는 눈조차 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초류빈은 들었던 벌컥벌컥 마시고 나서 그제서야 텁석부리 장한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네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 그리고 될 수 있으면 흑사의 시체를 묻어 주게. 나는 한 시진 후에 돌아오겠네."
장한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별안간 고개를 번쩍 들고 입을 열었다.
"금사표국의 사맹이 비록 명성은 쟁쟁하지만 허명만 지닌 자에 불과합니다. 도련님께선 사십 초 이내에 그의 머리를 자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초류빈은 담담하게 웃었다.
"어쩌면 단 십 초도 필요가 없을지 모르네."
텁석부리 장한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리며 물었다.
"우이는 어떻습니까?"
"그의 경공술은 대단하네. 듣자하니 암기에도 매우 뛰어나다고 하더군. 그러나 난 이길 자신이 있네."
"듣자하니 극락동 문하들은 모두 상당한 외문(外門)의 공력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방금 그들이 흑사에게 손을 쓴 것을 보았는데 중원무림의 공력과는 크게 다르더군요."
"안심하게. 그 자들에 대해선 아직 나는 마음에도 두지 않네."
"도련님께선 저를 속이지 못합니다. 만약 위험하지 않으시다면 도련님께선 절대 낭천 도련님을 가게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초류빈은 갑자기 눈을 부릅뜨면서 호통을 쳤다.
"자네 언제부터 말이 그렇게 많아졌나?"
텁석부리 장한은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초류빈은 기침을 연발하면서 숲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으며 그의 심한 기침소리만이 눈이 내리는 황야를 한층 더 춥게 하였다.
이 광경을 본 장한의 우직스러운 눈매에 굵은 눈물이 맺혔다.
"도련님, 우리는 관외에서 얼마나 편안하게 지냈습니까?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런 고생을 자초하시는 겁니까? 십 년이 지났는 데도 아직 그를 잊지 못하신단 말씀입니까? 그리고 꼭 만나야 합니까? 도대체 그를 만난 후에 또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초류빈이 관내로 들어온 데에는 오직 한 가지 목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한 사람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가 누구인지는 오직 두 사람밖에 모르는 일이다.
두 사람.....?
한편, 숲속으로 들어온 초류빈의 얼굴에서 병적인 태도가 싹 가시며 이제까지와는 달리 그의 행동은 마치 사냥개처럼 경쾌하고 민첩했다. 그의 귀, 코, 눈, 전신의 모든 근육이 최대의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눈 덮인 땅, 앙상한 나뭇가지, 심지어는 공기 속에도 적이 남긴 흔적이 있었고 그는 그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십여 년 동안 그가 찾고자 한 사람은 그의 추격에서 벗어난 자가 한 명도 없었으며 그의 행동은 숲속의 토끼처럼 날렵하고 민첩했다. 하지만 보기에 너무도 유연하여 조금도 급히 서두르는 것 같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뛰어난 무용수가 어떤 음악이라 해도 자기 특유의 유연하고 아름다운 동작을 취할 수 있는 것과도 같았다.
십 년 전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관외로 나갈 때도 이 길을 지나간 적이 있었다.
때는 마침 만물이 생동하는 춘삼월. 그는 이 부근에 자그마한 주루 하나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곳을 지날 때 그는 가끔 들러 몇 근의 술을 마시곤 했다. 술맛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주위의 경치가 아름다운 것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봄이 되면 젊은 남녀들이 청산(靑山)과 녹수(綠水)를 구경하는 것이 마치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답게만 여겨졌다.
그는 쓰디쓴 술잔을 기울이면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런 것들이 그의 마음 한구석에 깊은 인상을 남기고, 지금 다시 이곳을 지나게 될 줄이야 그 자신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십 년이 지난 지금은 많은 것이 변해 있을 것이다. 당시 젊었던 여인들은 이제 어엿한 여염집 부인이 되었을 것이고 늙었던 사람들은 이미 땅 속에 묻혀 한 줌의 황토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아직 그 주루가 있어 주기를 바랐다. 그가 이렇게 희망하는 것은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만약 아직 그 주루가 있다면 금사 사맹이 그 주루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엄동설한, 백설이 뒤덮인 세상은 꽃 피고 새 우는 춘삼월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하지만 다시 그 길을 지나게 되자 그는 가슴이 바늘에 찔리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재산과 권력, 그리고 명예와 신의는 포기하기가 비교적 쉽다. 그러나 추억, 쓰고도 달콤한 추억은 영원히 잊어버릴 수가 없는 것이라 잊으려고 무진 애를 써도 그것은 뇌리에서 조금도 사라지지 않고 잊혀지지도 않았다.
초류빈은 회한의 표정을 띠고 계속 전진해 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그 작은 주루를 발견했다. 아니 차라리 주막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주홍색 난간에 푸른색 휘장은 매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춘삼월이 되었을 때 이곳 사방이 온통 이름모를 야생화(野生花)들로 가득차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사방이 온통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주홍색 난간은 이미 퇴색이 되어 있었고 눈이 덮인 땅에는 말 발자국이 어지럽게 나 있었다. 주막집 뒤에서는 때때로 히히히! 하는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초류빈은 자신의 짐작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으며 사맹 등은 반드시 이곳에 있다고 확신했다. 이런 혹독한 날씨에 절대 유객(遊客)들이 찾아올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초류빈은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주점 안은 지극히 조용했다. 사람의 음성은 전혀 들리지 않았으며 이상하리만큼 조용하고 때때로 말 울음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걸음을 옮겨 주막 뒤로 돌아갔다. 어쩌면 사맹 등이 이곳에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사맹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사맹은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자기를 보고 있지 않은가. 그의 눈은 당장 튀어나오기라도 할 듯이 돌출되어 있었고 그의 누런 얼굴은 더할 수 없이 흉칙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렇게 공포스러운 표정으로 그는 마구간 앞에 있는 기둥 옆에 서 있었다. 사맹은 그곳에 서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움직이지도 않았고 눈동자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초류빈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앗! 이...이럴 수가 있나....."
초류빈은 사맹이 다시는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저승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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