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17 소이비도 제2권 친구와 적
친구와 적
소복히 눈이 쌓인 길목에 한 사람이 서 있었는데 그는 말고삐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 힘이 어찌나 세었든지 말은 미친 듯이 길길이 뛰고 있었으나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우중충한 청포를 입고 있었다. 그 장포는 누가 입더라도 땅에 질질 끌릴 만큼 긴 것이었으나 그 사람의 무릎도 채 덮지 못했다.
청포인은 한눈에 보아도 무서울 만큼 으시시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는데 머리 위에는 또 괴상한 모자를 쓰고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한 그루의 고목나무가 서 있는 것 같았다.
아무튼 한 손으로 달리는 말을 세울 수 있을 정도라면 가히 짐작이 되리라.
그러나 그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그의 두 눈동자였다. 그 두 개의 눈동자는 사람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의 눈동자는 청색이었는데 번쩍번쩍 빛까지 나 마치 성화가 불붙고 있는 것 같았다.
전칠은 고개를 내밀기 무섭게 다시 거두어들이며 입술이 하얗게 바랬다.
심미 대사는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짐작하고 침중하게 물었다.
"밖에 누가 있소?"
전칠은 떨리는 음성으로 겨우 대답하였다.
"...그렇소."
심미 대사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누구요?"
"이곡(伊哭)."
그러자 초류빈이 웃으며 말을 꺼냈다.
"이제보니 나를 찾으러 왔군."
심미 대사는 깜짝 놀라 소리쳐 물었다.
"청마수도 당신의 친구란 말이오?"
초류빈은 여전히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했다.
"애석하게도 이 친구는 나의 다른 친구와 같지 않소. 바로 내 목을 가지러 온 것이오."
심미 대사는 갑자기 얼굴이 침중해지더니 천천히 문을 열고 걸어나갔다.
"이시주요?"
청마수는 그의 아래 위를 훑어보며 냉랭히 물었다.
"심호냐? 아니면 심미냐?"
심미 대사는 격동을 누르며 겨우 대꾸했다.
"노승은 바로 심미요."
이곡은 대뜸 마차로 시선을 돌렸다.
"마차 안에는 누가 탔느냐?"
심미 대사는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대꾸했다.
"출가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소. 마차 안에는 전칠 시주와 초시주가 타고 있소."
이곡은 파란 눈에 광채를 폭사시키며 소리쳤다.
"좋다! 그렇다면 어서 초류빈을 내놓아라. 그럼 내 널 놓아 주겠다."
심미 대사는 마음을 가다듬고 조용히 말을 꺼냈다.
"노승이 초류빈을 소림사로 데려가는 것은 바로 그를 징벌하기 위해서요. 그리고 시주께서도 우리와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으니 우릴 막지 말아야 할 것이오."
이곡은 아무 말도 귀에 들리지 않는다는 듯 다시 재촉했다.
"화상! 초류빈을 내놓으면 너를 놓아줄 것이다."
이곡은 처음부터 이 한마디만 되풀이하면서 남이 무엇이라고 해도 듣지 못한 척했다. 이곡의 음산한 표정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아 조금의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심미 대사는 호흡을 가다듬고 말을 꺼냈다.
"노승이 만약 승낙을 하지 못하겠다면 시주는 어떻게 하겠소?"
"그럼 너부터 죽이고 나서 초류빈을 처리하겠다!"
이곡은 원래 왼팔을 늘어뜨리고 있었기 때문에 긴 청포에 가려져 있었다.
이때 갑자기 소매가 위로 거두어지는가 싶었는데 청색빛이 번쩍 하며 곧장 심미 대사를 향해 갔다.
이것이 바로 강호에 그 이름을 떨친 청마수라는 것이었다.
순간 심미 대사가 일성의 폭갈을 내지르자 그의 몸 뒤에서 네 개의 회색 인영이 번개같이 덮쳐왔다.
심미 대사가 이곡의 일격을 피하는 순간 네 승려가 대신 이곡을 포위했다.
이곡은 광폭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으하하하...좋다! 내 벌써부터 소림사의 나한진을 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던 참이다."
광소 속에 갑자기 한 가닥의 연기가 뿜어져나오는가 싶었는데 순식간에 온 하늘을 뒤덮는 것이 아닌가?
심미 대사는 그것을 보자 대경실색하며 외쳤다.
"빨리 코를 틀어 막아라!"
심미 대사가 문하들에게 경고를 하느라 그만 자기 자신을 잊고 말았다.
그가 고함을 내지를 때 한 가닥의 기체가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소림의 네 승려들은 갑자기 심미 대사의 표정이 창백해진 것을 보자 대경실색했다. 심미 대사는 즉시 공중으로 몸을 날려 삼 장 밖에 내려서더니 정좌를 하고는 수십 년 간 닦아온 진력으로 그 독기를 밀어내려고 했다.
소림 승려들은 즉시 한 줄로 늘어서서 심미 대사의 앞을 호위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리자 그들은 초류빈의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오직 심미 대사를 위해서 걱정을 했다.
이곡은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상관하지 않고 마차문 쪽으로 달려갔다.
초류빈은 여전히 마차 안에 앉아 있었으나 전칠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곡은 초류빈을 노려보며 싸늘한 음성으로 외겼다.
"구독은 네가 죽인 거냐?"
초류빈은 짧게 대꾸했다.
"그렇다."
이곡은 험상궂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잔인하게 웃었다.
"그래, 구독의 목숨으로 초류빈의 목숨과 바꾼다는 것...그것도 괜찮은 일이지."
이곡은 말하면서 청마수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한 가닥 싸늘한 바람이 주위를 휩쓸고 지나갔다.
이곡은 초류빈을 쏘아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또 무슨 할 말은 없느냐?"
초류빈은 번들번들 빛나는 그의 청마수를 쳐다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꼭 한마디밖엔 없다."
"무슨 말이냐? 어서 해 보아라."
초류빈은 말하기가 고된 듯 길게 한숨을 내뿜었다.
"왜 하필이면 내게로 와 죽음을 자초하려 하느냐?"
이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갑자기 초류빈의 손이 앞으로 뻗어져 나왔다. 칼집이 번쩍하는 순간 이곡은 잽싸게 공중으로 치솟고 있었다.
눈쌓인 대지 위에 선혈이 꽃잎처럼 선연하게 뿌려졌다. 그것은 마치 붉은 무늬를 새겨 놓은 것처럼 보였다.
이곡은 이미 수 장 밖에 나가 크게 소리쳤다.
"초류빈, 잘 기억해 두어라. 난....."
이곡은 여기까지 말하더니 갑자기 말을 끊었다. 싸늘한 바람이 휘잉 평원을 휘몰아쳐 가자 설야는 다시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고요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초류빈은 이때 이 상황이 매우 지루하다고 느꼈다. 그때 맑은 박수소리가 터져나오더니 전칠이 마차 뒤에서 크게 웃으며 달려나왔다.
"멋있었다! 비도탈명은 과연 소문 그대로군!"
초류빈은 잠시 설야 저편을 쳐다보고 있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만약 나의 혈도를 전부 풀어 주었다면 그는 절대 내 앞에서 도망을 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만약 너의 혈도를 전부 풀어 주었다면 너 역시 도망을 쳤을 것이다."
전칠은 초류빈의 어깨를 툭 치며 다시 말을 이었다.
"너는 오직 한쪽 육신으로 이곡을 부상 입히고 도망을 치게 만들었는데 너 같은 사람을 내 어찌 특별히 무서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이때 소림의 네 승려들이 심미 대사를 부축해서 데리고 왔다.
심미 대사는 얼굴이 노랗게 변한 채 마차에 오르는 즉시 서둘러 재촉했다.
"빨리 가자."
마차가 떠나게 되자 심미 대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정말 날카로운 청마수로군."
전칠은 빙긋이 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더욱 날카로운 것은 비도탈명이오."
심미 대사는 고개를 돌려 초류빈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구해 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소."
초류빈은 싱겁게 웃으며 더 이상 말하기 싫은 듯 잘랐다.
"내가 구한 것은 당신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오."
전칠은 나직한 음성으로 심미 대사의 귀에 대고 말했다.
"내가 아까 그에게 우리를 따라 소림사로 갈 것인가 아니면 이곡의 손에 들어가고 싶은가 물어보고 나서 혈도를 풀어 주고 그에게 한 자루 비도를 준 것이오."
전칠은 웃으며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나는 이렇게 해주는 것으로 승리를 얻을 자신을 갖고 있었소."
심미 대사는 무엇인가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비도탈명...정말 빠른 칼이야....."
그러는 사이 마차는 쉬지 않고 앞으로 질주해 갔다.
심미 대사의 반응은 비록 빠르지 못했으나 내력만은 몹시 심후했다. 이날 저녁 때쯤 되어서 그는 이미 독기를 밀어내고 얼굴색도 점차 회복을 했다.
일행은 객잔을 찾아 저녁밥을 먹어야 했다. 심미 대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화상도 사람이니만큼 밥을 먹어야 할 뿐 아니라 잠까지 자야 했다. 그래서 일행은 길가의 깨끗한 객점을 찾아들었다.
전칠은 초류빈을 의자에다 앉힌 후 징그럽게 웃었다.
"내가 너의 한쪽 손의 혈도를 풀어 주는 것은 밥을 먹는 젓가락을 집으라는 것이지 함부로 쓰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또 내가 너의 입을 틀어막지 않은 것은 밥을 먹으라는 것이지 함부로 입을 놀리라는 게 아니다. 알겠느냐?"
초류빈은 탄식을 내뿜으며 고개를 저었다.
"밥을 먹을 때 술이 없으면 소금을 치지 않은 반찬을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요."
"밥만 주는 것도 네게는 과분한 것이니 잠자코 먹기나 해라."
소림사의 규칙은 과연 엄중했다. 이 소림 승려들은 밥을 먹을 때 비단 말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조금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상 위에는 비록 몇 가지 야채뿐이었지만 그들은 습관이 되어서인지, 아니면 배가 고팠기 때문인지 매우 맛있게 먹었다.
그러나 심미 대사는 내상이 막 완쾌되었기 때문에 그저 죽만 한 그릇 마셨을 뿐이었다.
그리고 전칠은 몇 가지 반찬을 주문하고는 혼자서 천천히 먹으려고 옆에 있는 자리에 따로 앉았다.
초류빈은 그때 문득 두부 한 개를 집어서 막 먹으려고 하다가 홀연 내려놓더니 안색이 크게 변하여 말했다.
"이 반찬은 먹을 수 없는 것이오."
전칠이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만약 이런 야채를 못 먹는다면 굶을 수밖에 없다!"
초류빈은 음침하게 말했다.
"반찬 속에 독이 있다."
전칠은 가소로운 듯 코웃음을 치며 소리쳤다.
"이놈, 술을 먹지 못하게 했더니 다시 시작하는구나. 하하하 ....."
이때 전칠은 갑자기 웃음을 딱 멈추었다. 그의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볼땐 숨도 못 쉬게 목덜미를 잡힌 것 같았다.
전칠은 네 승려의 안색이 회색빛으로 변한 것을 본 것이다. 그러나 네 승려는 감각이 없는 듯 계속 밥을 먹고 있었다.
심미 대사는 대경실색을 하여 크게 소리쳤다.
"어서 선천진기로 심맥을 막아라!"
그러나 네 승려는 아직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고 태연하게 웃었다.
"사숙께선 지금 저희들에게 분부하신 것입니까?"
심미 대사는 몹시 다급하여 급급히 소리쳤다.
"내 당연히 너희들에게 분부한 것이다. 너희들은 중독이 되었는데도 아무런 감각도 없다는 말이냐?"
한 승려가 의아한 듯 물었다.
"중독이 되었다고요? 누구 말씀입니까?"
네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이구동성으로 크게 외쳤다.
"자네 얼굴이 어째서....."
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네 사람은 동시에 쓰러졌다. 심미 대사가 다시 그들을 보았을 때에는 이미 얼굴 모습이 변형된 뒤였고 눈과 코 등 이목구비가 한 데 조여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네 승려가 중독된 독은 비단 냄새가 없었을 뿐 아니라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때문에 이들이 일단 발작을 시작하면 구할 방법이 없었다.
전칠은 절로 몸서리를 치며 외쳤다.
"아니, 대체 무슨 독인데 이리도 무섭다는 말인가?"
심미 대사는 비록 수양이 깊은 사람이었으나 이렇게 되자 참지 못하고 밖으려 달려나가 마치 닭을 나꾸어채듯 점원의 멱살을 끌고 들어왔다.
"이놈! 너희들은 이 반찬에다 도대체 무슨 독을 집어 넣었느냐?"
점원은 바닥에 쓰러진 네 사람을 보자 그만 질겁을 하여 몸을 떨면서 미처 말을 꺼내지 못했다.
초류빈이 다시 탄식을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바보같은 짓...만약 내가 독을 집어 넣었다면 벌써 도망을 갔지 이곳에 있을 것 같소?"
심미 대사는 막 일장을 격출해 내려다가 즉시 멈추고 다시 밖으로 달려나갔다. 심미 대사는 초류빈의 말대로 점원이 한 짓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 내었던 것이다.
전칠은 뒤따라 나갔다가 다시 황급히 되돌아 와서는 초류빈을 옆구리에 끼고 냉정하게 말했다.
"설사 우리가 전부 독살을 당한다 하더라도 너는 도망가지 못할 것이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을 것이고 내가 살면 너도 살도록 할 것이다."
"정말 생각지도 않게 네가 날 정이 깊게 대해 주는구나. 그러나 애석하게도 넌 절세의 미인이 못되는 데다 난 남자라면 딱 질색이다."
초류빈이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저녁 무렵이 지나자 주방은 텅텅 비었다.
주방장과 다른 한 요리사는 술과 안주를 준비해 놓고 하루 중 가장 유쾌한 시간을 맞고 있었다.
그들이 하루하루 고된 시간을 견뎌내는 것은 바로 이런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심미 대사는 밖에서 허탕을 치자 매우 노하여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으나 두 사람을 보는 순간 일순 얼이 빠져 버렸다.
주방장은 얼큰하게 취기가 돌아 웃으며 농담을 건네었다.
"대사께서도 혹시 살짝 술을 마시러 온 것이 아닙니까? 여, 환영합니다요....."
그러나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들은 난로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난로 옆에 놓아 두었던 기름병이 쓰러져 난로 주위에 흘러내리자 즉시 시뻘건 불길이 치솟아올랐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한 마리 붉는 지네가 선연하게 나타났다.
독지네, 이제보니 바로 기름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주방장은 이 기름으로 반찬을 만들어 소림 승려들에게 먹인 후 자기들도 그 기름으로 반찬을 만들어 먹었기 때문에 원인도 모르는 채 죽어간 것이다. 어쨌든 이제 독의 원인은 찾았지만 이 독을 내린 사람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초류빈은 기름 속에 죽어 있는 지네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뿜었다.
"내 이미 그가 올 줄 알고 있었소."
심미 대사는 그 말을 듣자 급급히 소리쳤다.
"누구요? 시주는 독을 내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소?"
초류빈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말했다
"이 세상에 있는 독의 성분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소. 그 한 가지는 뱀이나 벌레에서 얻는 독이오. 초목에서 독을 얻는 사람은 비교적 많지만 뱀과 벌레 따위에서 독을 얻는 사람은 이 천하를 통틀어도 아마 얼마 되지 않을 것이오. 게다가 뱀과 벌레로 살인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이 천하를 통털어도 한두 사람 외에는 없소."
전칠은 움찔 몸을 떨며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렇다면...그렇다면 묘강 극락동(極樂洞)의 오독동자(五毒童子)라는 말이냐?"
초류빈은 탄식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도 그가 아니길 바라고 있다."
전칠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가 어째서 이 중원에 왔다는 말일까? 대체 무엇 때문에?"
"나를 찾으러 온 것이오."
"널 찾으러 왔다고? 그가 너의....."
전칠은 초류빈에게는 절대 이런 친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꺼내다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보아하니 너에겐 친구는 많지 않은 것 같은데 원수가 적지 않구나."
초류빈은 별 관심이 없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원수가 많으면 이익이 될 때도 있지만 친구는 그저 한두 명이면 족하다. 이유는...어느 날엔 친구가 원수보다 더욱 해가 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아까부터 생각에 잠겨 있던 심미 대사가 갑자기 물었다.
"그런데 초시주는 반찬 속에 독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내었소?"
"글세,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간에 알아내었소."
초류빈은 빙긋이 웃더니 다시 말했다.
"내가 만약 어느 방파가 이길 것이라고 짐작하면 틀림없이 이기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내게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면 나는 그 대답을 하지 못하겠소."
심미 대사는 초류빈을 잠깐 동안 주시하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부터 길을 가는 도중에 그가 무엇을 먹거든 우리도 같이 먹도록 합시다."
숭산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이틀은 더 걸려야 했다. 그러나 이 이틀은 평범한 나날의 보통 이틀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강호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극락동자가 일단 누구를 죽이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꼭 죽이고 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미 대사는 네 제자들의 시체를 부근에 있는 사원에다 인계한 후 황급히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누구도 길 도중에 무엇을 먹겠다고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심미 대사의 일행은 먹지 않고 마시지 않을 수 있었지만 마부는 이들과 함께 굶을 수가 없었다.
마부는 이날 정오가 되자 저 혼자서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심미 대사와 전칠은 우두커니 마차 안에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몇 조각의 고기와 몇 개의 만두로 목숨을 걸기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마부는 몇 개의 만두를 들고 먹으면서 걸어왔다.
전칠은 마부의 얼굴을 한참 주의깊에 쳐다보고 있다가 급히 물었다.
"이 만두 한 개에 얼마냐?"
마부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가격이 매우 쌀 뿐 아니라 맛도 기가 막힙니다. 한번 잡수시지 않겠습니까?"
전칠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좋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몇 개만 다오. 그럼 내 밤에 너에게 술을 사줄 테니."
이렇게 약 몇 리를 가는 동안 마부에게는 아무런 이상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칠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만두를 심미 대사에게 건네주었다.
"이 만두엔 독이 없으니 대사께선 한번 잡숴 보시오."
심미 대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만두를 초류빈에게 내밀었다.
"초시주, 한번 먹어 보시오."
초류빈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생각지도 않게 두 분께선 매우 겸손하시구려."
초류빈은 말하면서 왼손으로 만두를 들었다. 그 이유는 그는 왼쪽 손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만두를 받아들기 무섭게 다시 내려놓는 것이었다.
"이 만두도 먹을 수 없는 것이오."
전칠은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마부는 아무렇지도 않지 않느냐?"
"그는 먹을 수 있어도 우린 먹을 수 없는 것이다."
"무엇 때문이냐?"
"왜냐하면 극락동자가 독살시키려는 사람은 그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칠은 냉소를 치며 소리쳤다.
"넌 우리를 굶겨 죽일 작정이냐?"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시험을 해보면 알 게 아니냐?"
전칠은 잠시 초류빈을 쏘아보고 있다가 마부를 불러 말을 멈추게 한 후 만두 반쪽을 떼어주고는 먹으라고 했다. 마부는 영문을 몰라 하면서 두세 입에 만두를 깨끗이 먹어치웠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중독된 현상은 보이지 않았다.
전칠은 때를 만났다는 듯 싸늘하게 냉소를 쳤다.
"이놈, 그래도 이 만두를 못 먹는 것이라고 할 테냐?"
초류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그래도 먹지 못한다."
전칠은 몹시 증오스러운 듯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오냐, 내 꼭 먹어 보아야겠다!"
전칠은 비록 입으로는 이렇게 말을 했지만 그래도 감히 모험은 하지 못했다. 그때 어디서 개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몹시 배가 고픈 듯 고개를 흔들며 마구 짖어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전칠은 가지고 있던 만두를 즉시 개에게 던져 주었다. 그러나 개는 이 만두에 대해 홍미가 별로 없는 듯 한 입만 물어 보더니 그대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개는 채 몇 걸음 가기도 전에 갑자기 마구 날뛰어 바닥에 쓰러져 한참 동안이나 몸부림치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개는 사력을 다한 듯 그제야 잠잠해지는 것이었다.
전칠과 심미 대사는 그제야 크게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초류빈은 길게 탄식을 하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내 말이 어떠냐? 그러나 독살당한 건 네가 아니고 개라서 매우 애석하다."
전칠은 평소 기쁨과 슬픔을 잘 내색하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안색이 싹 변해 마부를 쏘아보며 호통쳤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마부는 몸을 벌벌 떨며 떨리는 음성으로 겨우 대답했다.
"소인은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만두는 아까 그 음식점에서 사온 것입니다."
전칠은 단번에 그의 멱살을 잡고 음흉하게 웃었다.
"개도 독살을 당했는데 너는 어째서 죽지 않는 것이냐? 네가 독을 쓴 게 분명하지?"
마부는 공포로 인해 파랗게 질려 몸을 떨며 일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초류빈은 담담하게 끼여들었다.
"그를 추궁해 보았자 아무런 소용도 없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전칠은 무서운 눈길을 그에게 돌리며 호통을 쳤다.
"이놈이 모르면 누가 안다는 말이냐?"
"내가 안다."
전칠은 움찔하며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네가 알고 있다고? 그럼 이 일이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그 만두 속엔 독이 들어 있지만 국수 국물 속에는 해독약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칠은 다시 한번 움찔하며 몹시 분한 듯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다면 우린 왜 아까 국수를 먹지 않았다는 말인가?"
초류빈은 경멸에 가득찬 음성으로 비웃었다.
"그러나 네가 만약 그 국수를 먹는다면 독은 다시 그 국수 속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극락동자가 독을 내리는 실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미처 방비할 새도 없이 손을 쓴다."
이런 적수를 만나게 되면 입을 다무는 것 외에 또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심미 대사는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다행히 하루 이틀만 있으면 소림사에 도착하게 될 테니 그 동안 꾹 참아 봅시다."
전칠은 참담한 생각이 들었다.
"대사, 아무리 먹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림없는 일일 것 같소."
"뭐요?"
"그들은 우리가 배가 고파 움직일 수 없을 때 출수를 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오."
심미 대사는 묵묵히 그 말을 들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전칠은 갑자기 눈을 번뜩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대사, 우린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온 것 같구려."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말이오?"
전칠은 표정을 어둡게 변화시키더니 음침하게 입을 떼었다.
"그가 노리는 것은 대사도 아니고 본인도 아니니....."
전칠은 초류빈을 쳐다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내심을 간파한 심미 대사는 싸늘한 어조로 못박아 말했다.
"노승은 이미 이 자를 소림사로 데려가겠다고 결심을 했으므로 절대 도중에서 죽게 할 수는 없소."
전칠은 이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초류빈을 볼 때마다 번뜩이는 그의 눈동자로 보아 이미 결심을 내린 것 같았다.
심미 대사 역시 전칠의 이런 속셈을 눈치챈 듯 언제 어디서나 한시라도 초류빈을 자기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전칠은 이것을 보자 몹시 증오스럽고 마음이 급했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마차는 계속 속력을 더해 이날 황혼녘에 한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에 도착은 했지만 이미 크게 혼난 바가 있는지라 이번에는 마부도 함부로 먹지를 못했다.
마차가 기다란 길을 지나고 있을 때 갑자기 일진의 구수한 빈대떡 굽는 냄새가 풍겨왔다. 좀더 앞으로 달려가 보니 길가에 즐비하게 빈대떡집이 늘어서 있었는데 적잖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맛있게 먹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이미 다 먹고 소매로 기름 묻은 입가를 닦고 있었 으나 독살당한 사람은 없었다.
전칠은 군침이 돌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 빈대떡도 먹을 수 없는 것이냐?"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오직 우리만은 먹을 수 없다."
초류빈의 말에 전칠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이런 말을 만약 이틀 전에 했다면 전칠은 절대로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극락동자의 독을 쓰는 수법이 너무 신비스럽고 공포스러워 모골이 송연할 지경까지 이르고 있었다. 때문에 전칠은 이 빈대떡을 먹고 나서 신선이 된다 하더라도 감히 시험을 해볼 수가 없었다.
이때 두 어린아이가 빈대떡집 앞에서 어머니를 조르고 있었다.
"엄마, 나 저 빈대떡 사 줘, 나 먹고 싶단 말이야....."
그러자 빈대떡집 옆에 있는 잡화상점 안에서 뚱뚱한 부인이 걸어나오더니 세차게 두 어린아이의 뺨을 갈기는 것이었다.
"뱃속에 거지가 들어앉았느냐? 지금 겨우 빵을 먹고 있는 것도 죽지 못해 사는 일인데 다시 빈대떡집까지 거덜을 내려고 하느냐? 오냐, 너희 그 죽지 않는 병신 같은 아비가 돈을 많이 벌면 그때 사 줄 테니 그만 울어라."
한 어린아이가 눈을 비비며 그래도 못내 발길을 옮기지 못했다.
"하지만 엄마, 난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면 그땐 빈대떡을 먹지 않고 계란덮밥을 먹을 테야."
초류빈은 그 모습을 보고 암암리에 길게 탄식을 토해내었다. 이 세상에는 빈부가 공평하지 못해 많은 사람들에게 한숨을 심어주고 있었다. 이 두 어린아이들은 그까짓 계란덮밥을 마음속으로 매우 과분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초류빈은 문득 보지 못할 것을 봤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길이 어찌나 좁은지 마차는 한참 비비적거절 후에야 겨우 거리를 빠져나올수 있었다. 이때 그 어린아이가 강냉이죽이 든 그릇을 들고 나와서 다른 사람이 먹는 빈대떡을 쳐다보며 울고 있었다.
전칠은 한참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마차에서 뛰어내려 은자 한 냥을 빈대떡 가게에다 던지고는 막 구워 만든 빈대떡을 집었다.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크게 화가 났으나 그의 이 재빠른 동작을 보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칠은 빈대떡을 그 두 아이에게 주며 말했다.
"아저씨가 이 빈대떡을 모두 너희에게 줄 테니 그 죽을 내게 주겠니?"
두 어린애는 그만 두 눈을 크게 뜨고 세상에 이처럼 맘씨 좋은 사람이 있었던가 하고 실로 믿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두 어린애가 멍청하게 서 있자 전칠은 허리춤을 두드리며 다시 말했다.
"자, 아저씨가 너희에게 돈도 줄 테다."
두 어린애가 멍하니 서 있다가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한 어린애는 빈대떡을, 한 어린애는 돈을 가지고 앞으로 달려갔다.
심미 대사는 전칠이 죽그릇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자 미소를 띠며 발했다.
"시주께선 과연 지혜가 높구려."
전칠은 멋쩍게 웃으며 변명했다.
"나는 먹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이따 밤에 길을 재촉해야 하는 까닭에 이거라도 먹어야만 정신이 날 것 같아서였소. 그러지 않고 도중에 다시 변화가 일어나 감당할 수 있는 체력이 못되면 어떻게 돌진해 갈 수가 있겠소?"
심미 대사는 기다리고 있었던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승의 생각도 바로 그렇소."
전칠은 한 그릇에 담겨 있는 죽을 내밀었다.
"자, 대사께서도 잡수어 보시오."
심미 대사는 신중히 고개를 조아렸다.
"고맙소."
죽은 비록 멀겋고 소금도 쳐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거무스레하기조차 했지만 하루를 굶은 이들에겐 산해진미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이 죽의 가치가 독이 없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칠은 득의한 표정으로 초류빈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 죽도 먹을 수 없는 것이냐?"
그러나 초류빈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심하게 기침을 했다.
전칠은 득의하게 웃어대며 소리쳤다.
"으하하하...극락동자가 만약 미리 알고 이 죽에다가 독을 넣었다면 내 독살을 당한다 해도 미련이 없다."
전칠은 계속 득의하게 웃으며 그릇에 있는 죽을 순식간에 깨끗이 먹어치웠다. 심미 대사 역시 극락동자에게 제아무리 비범한 수단이 있어도 신선이 아닌 이상 미리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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