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15 소이비도 제1권 뱀과 학
뱀과 학
낭천은 대뜸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 밖에는 한 사람도 지키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어쩌면 어느 누구도 낭천이 감히 대뜸 들어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기회에 낮잠이나 실컷 자려고 했을 것이다.
땔감을 쌓아 두는 이 광 속엔 단 하나의 매우 작은 창문이 있었다. 그야말로 한마디로 표현해 천생의 지옥처럼 음산했다.
재목들이 작은 산처럼 쌓여 있는 아래 한 사람이 이미 기절을 한 것인지 아니면 잠이 들어 버렸는지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낭천은 그 자의 옷을 보자 일시에 뜨거운 피가 들끓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낭천은 어째서 이 사나이에게 이처럼 깊고도 강한 우정이 생겼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단숨에 달려가 격동에 찬 어조로 입을 떼었다.
"당...당신....."
바로 그 순간이었다. 휘익! 하는 예리한 파공음이 일더니 한가닥의 검빛이 낭천의 앞으로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검빛은 번개같이 낭천의 두 다리를 휘감고 덮쳐왔다. 이 졸지의 변화는 너무나 크게 사람의 상상을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덮쳐오는 일검의 위세도 매우 빨랐다. 다행히 낭천도 수중에 검을 쥐고 있었던 까닭에 그의 검이 더 빨랐다. 그 빠르기는 정말 불가사의할 정도라 상대의 검이 비록 먼저 찔러왔으나 낭천의 검이 먼저 발출되고 있었다.
챙!
맑은 금속성 소리가 울려퍼지며 낭천의 검은 상대방의 검신에 부딪쳤다. 상대방은 이 순간 갑자기 손목이 절단되는 것을 느끼고 수중에 있던 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나 상대방도 보기드문 고수인 듯 위험에 처했으나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에 바닥으로 몸을 굴려 일 장 밖으로 나가 있었다. 상대는 바로 유룡생이었다.
낭천은 그를 알지 못했지만 그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일검을 출수한 후에 즉시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낭천이 비록 번개같이 뒤로 피해 내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 버렸다. 문 밖에는 이미 한 개의 몽둥이와 한 자루의 금도가 길을 막고 있었다.
낭천은 깜짝 놀라 막 걸음을 멈추는 순간 갑자기 거대한 진동이 일어나더니 작은 산처럼 쌓아 놓은 재목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리고 재목들 뒤로 몇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열 명 이상의 사람들은 모두 경장을 입고 손에는 활을 든 채 낭천을 겨누고 있었다. 지금 이런 거리 정도에서는 궁도의 위력이란 실로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것이다. 어느 누구이든 간에 제아무리 위대한 실력이 있고 없고 간에 이런 땔감 광 속에서 십여 자루의 활시위를 벗어난다는 것은 실로 하늘을 날으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인 것이다.
낭천이 싸늘한 눈초리로 사방을 훑어보자 전칠이 웃으며 입을 떼었다.
"또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가?"
낭천은 천천히 한숨을 내뿜으며 그 자리에 내려앉았다.
"어서 쏘기나 하시오."
그러자 전칠은 갑자기 광이 떠나가라 크게 웃어젖혔다.
"으하하하하...당신은 과연 통쾌무쌍한 사람이구려. 내 그렇다면 당신의 소원을 이루어 주겠소."
전칠이 막 손을 흔들자 화살이 비오듯 쏟아져 왔다. 바로 이 위기일발의 순간, 낭천은 갑자기 바닥에 몸을 굴리더니 왼손으로 아까 유룡생이 떨어뜨린 탈정검을 주워 들었다.
검빛을 앞으로 날리는 순간 하나의 무형 담벼락을 만들어 화살들을 사방으로 날리게 만들었다.
"이놈, 어딜!"
그때 조정의가 폭갈을 내지르며 자금도로 일식의 입벽화산(立劈華山)을 전개해 내었다.
그러나 조정의의 일검이 막 내려오는 순간 앞에서 한가닥의 검빛이 먼저 폭사되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 일검의 빠르기는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았다.
"아니!"
조정의는 대경실색하며 초식을 바꾸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검은 어느 새 그의 목구멍을 관통시켜 시커먼 피를 내쏟게 하고 있었다.
전칠은 그것을 보자 크게 놀라며 수중에 든 큰 몽둥이를 마구 휘둘렀다. 그때 한가닥의 찬란한 무지개가 일더니 한 물체가 재빠르게 문 밖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었다.
전칠은 막 추격해 나가려고 하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음인지 갑자기 멈추었다. 조정의가 자기의 목을 어루만지며 발버둥질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그는 아직도 숨을 거두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우선 이곳을 탈출하는 것이 급선무였지 사람을 죽이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저 두 치 정도밖에 검을 밀어넣지 않아 다행히 조정의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낭천은 작은 마당으로 달려나오자 수중의 탈정검을 표창처럼 세워 전칠에게 던졌다. 그래서 전칠은 막 추격을 하려다가 멈추고 만 것이다.
낭천의 장검은 전칠의 옆을 스치고 지나가 건너편 담벼락에 깊숙이 꽂혔다.
유룡생은 그제서야 한숨을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젊은이는 보기 드물게 매우 빠른 신법을 지니고 있군요."
전칠은 빙긋이 웃으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저 운이 좋았다고 보아야 할 뿐이오."
"운이 좋았다고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소장주께선 아까 그의 몸에 화살이 두 개 꽂힌 걸 보지 못했다는 말이오?"
유룡생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맞았소. 나는 아까 그가 검을 휘두를 때 그 검막 속에 허점이 있는 것을 보았소.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가 상처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오."
"그것은 그가 늘 금사갑을 입고 있기 때문이오. 나는 천만 번이나 주의를 했지만 그것을 잊고 있었던 거요. 그렇지 않았다면 그에게 제아무리 큰 실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마 이 광을 빠져나가지는 못했을 거요."
전칠은 매우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룡생은 길게 한 숨을 내뿜으며 씁쓸한 투로 말했다.
"그러나 아무튼 그는 오늘 오지 않았어야 했고 나도 오지 말았어야 했소."
전칠은 조용히 그를 위로했다.
"승부란 원래 병가상사이니 소장주께선 너무 심려치 마시오. 그가 비록 제일관문을 통과하기는 했지만 제이관문도 뚫을 것 같소?"
낭천이 막 문을 나서는 순간 갑자기 사면팔방에서 우렁찬 불호가 울려퍼졌다. 곧이어 낭천은 다섯 명의 회포숭려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다섯 사람은 모두 합장을 하고 있어 출수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으나 그들의 그 엄중한 모습들은 그야말로 산악이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맨 앞에 서 있는 승려는 백설처럼 흰 눈썹에다 긴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왼손에는 하나의 갈색 염주를 들고 있었다.
이 대사가 바로 소림의 호법대사 심미인 것이다.
낭천은 사방을 상세히 살펴보았지만 그 오만하고 당당한 신색은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이제 보니 출가하신 분들도 매복을 할 수 있군요."
심미 대사는 음침하게 입을 떼었다.
"노승은 사람을 해치고자 하는 마음은 없소. 그러니 시주께선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시오. 자고로 사람이란 입으로 화를 불러들이고 그 피해는 몸으로 받는 법이오. 그러므로 남을 상하게는커녕 오히려 자기 자신이 피해를 보고 마는 거요."
심미 대사는 매우 평온하게 얘기를 하는 것 같았으나 낭천의 귀에 닿았을 때는 그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우뢰와 같이 변해 귀를 진동시켰다.
낭천은 싸늘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러나 대사 역시 그 이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소."
그는 말하면서 옆으로 비스듬히 돌진해 들어갔다.
낭천은 만약 자신이 공중으로 뛴다면 단번에 허점이 드러나 심미 대사의 염주가 자기의 두 다리를 절단시킬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방법을 연구하다가 하는 수 없이 기회를 틈타 옆에 있는 두 사람 사이의 공지로 돌진해 들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막 움직이는 순간 소림 승려들도 갑자기 몸을 움직이더니 마치 소용돌이처럼 그의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낭천은 그들의 행동에 정신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끼고 즉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소림 승려들도 행동을 멈추었다.
심미 대사가 엄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출가한 사람은 살생을 싫어하니 시주가 만약 이 자그마한 나한진(羅漢陣)을 빠져나갈 수 있다면 내 기꺼이 보내드리겠소."
그러나 낭천은 거칠게 숨을 몰아쉴 뿐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는 이때 소림 승려들이 비단 공력만 심후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배합도 물샐틈없이 엄중하다는 것을 알았다. 때문에 그는 서투른 동작으로는 절대 저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낭천은 여덟 살 되던 해, 한 마리의 학이 커다란 구렁이에게 잡힌 것을 보았다. 학의 입은 비록 길고 예리했지만 시종일관 감히 출수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철이 없었던 터라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후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다음에야 그는 학이 구렁이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구렁이는 일단 먹이를 잡게 되면 동그랗게 뱀진을 만든다. 머리와 꼬리가 서로 엉키는 것이 그야말로 번개와 같아 만약 학이 뱀의 머리를 물게 된다면 학의 두 다리는 여지없이 뱀의 꼬리에 감기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만약 뱀의 꼬리를 문다면 그 날카로운 이빨에 모가지를 물리고 말 것이다. 학은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까닭에 계속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구렁이가 참지 못하고 먼저 공격을 감행할 때 학은 번개처럼 주둥이를 내뻗어 뱀의 목 바로 아래에 있는 급소를 물어버렸다. 물론 학이 이긴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낭천은 그날 그것을 보고 이날까지 그 이치를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낭천은 소림 승려가 움직이지 않는 한 절대로 움직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낭천은 일언반구의 대답도 없이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었다.
시간은 초조하게 흘러가고 주위에 몰아치는 바람도 매우 차가웠다.
이윽고 심미 대사는 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시주, 그렇다면 항복을 하겠다는 말이오?"
"아니오."
낭천의 대답은 매우 간단하고 명확하여 한마디도 낭비할 수 없다는 듯 보였다.
심미 대사는 이 의외의 대답에 흰 눈썹을 꿈틀거렸다.
"시주, 기왕 항복할 수 없다면 어째서 가지 않는 것이오?"
낭천은 다시 명확하게 대꾸했다.
"당신이 나를 죽이지 못하면 나 역시 당신을 살해할 수 없으며 빠져나가지 못하는 거요."
심미 대사는 흰 눈썹을 꿈틀거렸다가 냉막하게 내뱉었다.
"만약 노승을 죽일 수만 있다면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겠소."
"그렇다면 좋소."
낭천은 대답하고 나서 드디어 몸을 움직였다. 일단 행동을 개시하게 되자 그 빠르기란 마치 번개와 같았다. 허공에 검빛이 번뜩이는가 싶었는데 날카로운 검이 어느 새 심미 대사의 목구멍을 향해 찔러가고 있었다.
그러자 소림 승려들도 즉시 행동을 개시하여 여덟아홉 개의 장이 한꺼번에 산악처럼 낭천을 향해 격출해 나갔다.
바로 낭천의 검이 나가는 순간 그의 발길이 갑자기 확 변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가 발길을 바꾸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단지 그의 몸이 방향을 바꾼 것으로만 알았다.
낭천의 일검은 분명히 심미 대사를 찔러온 것이었으나 갑자기 변경을 시키자 다른 네 승려는 자기네의 손이 마치 그 검에 절단되게끔 자청해서 내민 것 같았다.
네 승려가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하는 순간 심미 대사가 냉혹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좋다!"
이 짧은 외침과 함께 심미 대사의 옷소매 속에서는 이미 한 가닥의 경풍이 쏟아져 나왔다. 네 명의 소림 승려는 비록 위험에 처해 있었지만 심미 대사는 구태여 구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소림의 나한진만이 갖고 있는 위력인 것이다.
그런데 누가 짐작이라도 했겠는가? 이 순간 낭천의 검이 찔러나가는 방향을 다시 바꾸었다. 다른 사람이 검을 변화시킬 때는 단지 출수한 부위만 변경할 뿐이지만 낭천이 검을 변식시키자 온 방향이 모두 변해 버린 것이다.
낭천의 검수가 얼마나 기묘한지 동쪽을 찌르는가 하면 갑자기 서쪽에서 나타나고는 하여 그 변화가 실로 막측하였다. 그러나 사실 그의 검세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상태였다. 변했다면 그의 발길의 변화가 너무 빨랐기 때문에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에 이런 두 다리가 있을까 하고 믿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때 예리한 소리가 들리면서 경풍을 내쏟던 심미 대사의 옷소매가 길게 찢겨져 나갔다. 곧이어 검빛이 갑자기 허공에 파란 무지개를 일으키더니 사람과 같이 혼연일체가 되어 진세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낭천은 천만다행으로 득수를 했으나 이미 등 뒤에 커다란 허점이 드러났다는 것을 그만 잊고 말았다.
이때 심미 대사가 커다란 음성으로 소리쳤다.
"잠깐만 멈추어라! 내 바래다 줄 테니까!"
동시에 낭천의 등 뒤로 한가닥의 막강한 경기가 들이닥쳤다.
이 순간 낭천은 마치 거센 쇠망치에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비록 금사갑을 입고 있었지만 이 순간 가슴의 피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그의 몸은 그 장력에 의해 실 끊어진 연처럼 허공으로 날았다.
이때 한 소년 승려가 큰소리로 외쳤다.
"추격합시다!"
그러나 심미 대사는 평온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만두어라."
소년 승려는 앞으로 나서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짙게 찌푸렸다.
"그는 이제 멀리 도망가지 못할 텐데 사숙께선 어째서 그를 도망가게 내버려 두는 것입니까?"
심미 대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으며 되물었다.
"그렇다. 그가 이미 중상을 입었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쫓겠느냐?"
소년 승려는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을 해 보더니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심미 대사는 낭천이 도주를 한 방향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떼었다.
"자고로 출가인이라면 자비를 베푸는 것이 본분이야.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을 수 있다면 되도록이면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좋다."
전칠은 이때 멀리서 이 다섯 승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칠은 빙긋이 웃더니 나직이 중얼거렸다.
"출가인의 자비 하나는 그럴싸하군. 만약 다른 사람이 그를 대신해 살인을 해 준다면 그 자신이 직접 손을 써서 불가를 더럽히는 일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전칠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언제까지나 마당 한구석에 서 있었다.
한편 낭천은 심미 대사가 밀어낸 장력에 의해 허공을 날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나는 세력을 빌어 장력을 해소시키려고 했다. 소림 호법의 장력은 과연 심후했고 또한 범상치 않았다.
낭천은 두 개의 지붕을 넘어서자 겨우 몸을 멈출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두 번째로 다시 뛸 때 자기의 내장이 이미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이런 상세쯤은 충분히 참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통으로 연마된 단련, 갖가지 고난이 엉켜 이룩되어 온 세월 등이 낭천으로 하여금 쉽게 넘어가지 않는 사람으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주위는 점차 어둠 속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사방에는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으나 이미 나무와 지붕 등에는 사람이 잠복할 만한 요소들이 갖추어지고 있었다.
지금 낭천이 만약 이곳에서 탈출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다행 중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림사의 호법과 또 사대 고승의 그 위맹한 공격 아래 탈출을 해낸 사람은 정말 천하에 보기 드문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낭천은 탈출을 원치 않았다. 그는 한 가지 하고자 했던 일이 성공을 하지 못하면 절대로 도중에서 포기를 하지 않는 성미였다.
전칠 그들은 과연 초류빈을 어디에다 숨겨 놓았다는 것일까. 낭천은 두 눈으로 마치 독수리처럼 사방을 살피며 고양이처럼 지붕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후원으로 접어들었다. 지붕 위에 있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목표물이 되기 쉽고 또 후원에는 몸을 숨길 만한 곳이 많기 때문이다.
그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숨어 들어가다가 갑자기 귓전으로 맑은 웃음소리가 때려오는 것을 들었다. 웃음소리는 그렇게 높지 않았으나 거리가 매우 가까운 것 같았다. 낭천은 이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지만 웃음을 터뜨린 사람과의 거리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수 장 밖에는 자그마한 정자가 있었는데 그 속에서 한 사람이 정신없이 책을 읽고 있었다. 그의 그러한 태도는 전혀 다른 일을 주의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다 떨어진 금포를 입고 있었는데 얼굴이 매우 노랗고 또 깡말랐다. 턱에도 몇 가닥의 수염만 났을 뿐이었는데 마치 영양실조에 걸린 늙은 학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런 노학도가 만약 수 장 밖에서 웃었다면 다른 사람은 절대 그 웃음소리를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오직 내공이 절정에 달한 고수만이 이렇게 멀리까지 소리를 보낼 수 있는 것이다.
낭천은 절로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 노학도는 사뭇 그를 보지 못한 듯 손에다 연신 침을 발라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며 흥미진진하게 들여다 보고 있었다.
낭천은 마치 무엇에 놀란 듯 한걸음 한걸음 뒤로 물러나 몇 십보 후퇴를 한 후 갑자기 몸을 홱 돌렸다. 몸을 돌리는 순간 그는 이삼 장 밖으로 나가 더 이상 고개를 돌리지 않고 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매화가 한창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자라나고 있고 일진의 향기로운 냄새가 코를 진동시키며 마음을 녹였다.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어 목구멍으로 치밀어오른 피비린내를 가라앉혔다. 더구나 아까 진기를 끌어올릴 때는 가슴에서 선혈이 치솟아오르는 것 같아 이미 남과 겨루기엔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꼈다.
바로 이 순간 일진의 미세한 피리소리가 들려왔다. 피리소리가 돌려오자 매화 위에 쌓인 눈이 그 소리에 의해 한 송이 두 송이 떨어져 낭천의 헐떡거리는 몸 위에 쌓였다.
낭천은 눈보라가 휘날리는 속으로 한 사람이 수 장 밖에 떨어진 매화나무 아래에서 피리를 불고 있는 것을 보았다. 몸에 다 떨어진 금포를 걸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책을 읽던 그 노학도가 틀림없는 것 같았다. 피리소리는 점차 높아지고 그 굴곡도 심해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이제 낭천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한마디 한마디 말을 토해 내었다.
"당신이 바로 철적 선생이오?"
이때 철적 선생이 고개를 들었다. 순간 한 쌍의 눈동자가 마치 차가운 별처럼 폭사되어 나와 낭천의 두 눈에 꽂혔다.
바로 이 순간 철적이라는 노학도는 마치 십 년이나 더 젊어진 것 같았다.
철적 선생은 낭천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꽉 다문 입에서 말을 꺼냈다.
"상처를 입었는가?"
그의 말에 약간 의아스러워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이 사람은 정말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구나!'
낭천이 아무 말이 없자 철적 선생은 다시 물어왔다.
"등에 상처를 입었는가?"
낭천은 흠칫 놀라며 싸늘한 어투로 말했다.
"이미 아시면서 어째서 또 묻는 거요?"
철적 선생은 눈동자를 굴리며 재차 물었다.
"심미 화상이 한 짓이지?"
"흥!"
낭천이 코웃음을 치자 철적 선생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소림 호법이 이제보니 고작 이 정도였구나."
"고작 어떻다는 말이오?"
철적 선생은 담담한 투로 말을 이었다.
"그의 신분으로 봐선 배후에서 사람을 공격할 수가 없네. 그리고 기왕 자네를 부상당하게 했으면 자네를 살려 보내어선 더욱 안 되는 노릇이었네."
철적 선생은 말을 끝내고 담담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노화상이 남을 이용해서 살인을 하겠다는 말인가?"
낭천은 짓궂게 웃으며 냉막하게 말을 이었다.
"내 당신에게 한 가지 가르쳐 줄 것이 있소. 첫째, 만약 그가 배후에서 출수를 하지 않았다면 그는 도저히 손을 쓰지 못했을 거요. 둘째로 그가 아무리 어느 곳이나 출수를 한다 하더라도 나를 죽일 수는 없었을 거요. 셋째, 그리고 당신 역시 나를 죽이지는 못할 거요."
철적 선생은 고개를 하늘로 올리고 크게 웃어대었다.
"으하하하...젊은이가 너무 호언장담을 하는군."
철적 선생은 즉시 웃음을 거두고 매서운 어투로 말했다.
"나 역시 자네가 이미 상처를 입었으므로 본래부터 출수하기가 싫었네. 그러나 자네의 그 이기가 너무 광오하여 내 자네에게 교훈을 주지 않을 수가 없네."
낭천 역시 자기가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것을 느꼈는지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철적 선생은 낭천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꺼냈다.
"자네는 이미 상처를 입었으니 내가 삼 초를 양보하겠다."
낭천은 철적 선생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가 소리내어 웃었다. 그는 웃으며 검을 허리춤에 찔러 넣고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철적 선생이 급급히 몸을 날려 독수리처럼 낭천의 앞을 가로막고는 소리쳤다.
"나를 만났으면서 또 어딜 가겠다는 말이냐?"
낭천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냉랭하게 입을 떼었다.
"그러나 내가 가지 않으면 당신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
철적 선생은 눈썹을 싹 치켜올리며 버럭 소리쳤다.
"내가 죽는 것이냐? 아니면 네가 죽는다는 것이냐?"
"그 누구라도 내게 삼 초를 양보할 수는 없소."
철적 선생은 그의 말뜻을 알았는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만약 너에게 삼 초를 양보하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소리냐?"
"맞았소."
"그렇다면 어째서 시합을 하지 않는 것이지?"
낭천은 이제 한마디의 대꾸도 없이 눈길을 들어 철적 선생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이 순간 철적 선생은 한 가닥의 한기가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철적 선생이 여태까지 이름을 떨쳐 온 것은 결코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고 크고 작은 무수한 혈전에서 얻은 풍부한 경험이었다. 철적 선생은 매번 혈전을 하면서 수많은 눈동자를 대해 왔다.
그러나 낭천의 두 눈동자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거의 무(無)에 가까울 만큼 표정 없는 눈동자.
철적은 자신도 모르게 위압감에 눌려 뒤로 반 정도 물러났다. 바로 이 순간 낭천의 검은 이미 출수되고 있었다.
그가 일검을 찔러내면 절대로 그 어떤 수확이 없이는 거두어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여태까지 지켜 온 낭천의 신조였다. 다시 말해서 그는 만약 자신이 없으면 절대 출수하지 않았다.
이때 철적 선생의 몸이 갑자기 매화가지 위로 치솟아 올라갔다. 그 서슬에 나뭇가지 위에 쌓여 있던 눈이 휘날려 주위를 눈보라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때 낭천은 고개조차 들지 않고 검을 다시 거두었다.
철적 선생도 이미 가벼운 몸짓으로 땅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철적 선생의 이 내려서는 동작은 마치 한 장의 종이가 떨어지는 듯했다. 한데 몸이 미처 땅에 내려서기도 전에 시뻘건 선혈이 떨어져 백설을 물들였다.
"내게 삼 초를 양보할 사람은 없소. 단 일 초도 받아넘기기 힘들 거요."
철적 선생은 매화나무에 몸을 기대어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얼굴은 몹시 창백했고 목구멍 아래로 붉은 피가 물들어 있었다. 사실 철적 선생은 낭천의 검이 출수되는 찰나 천하를 위진시킨 철적을 출수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철적 선생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낭천이 다시 냉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당신이 죽지 않았던 것은 당신이 내게 삼 초를 양보하겠다는 말을 지켰기 때문이오."
낭천은 말을 끝내고 나서 홀연히 웃더니 다시 이었다.
"그러나 당신은 심미 화상보다 훨씬 고강하오."
심미 대사가 아까 말하기를 나한진만 빠져나간다면 절대로 그를 상하게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나중에 그는 낭천에게 부상을 입혔다.
철적 선생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이렇게 소리쳤다.
"아직도 이초가 남았다."
"아직도 이초가 남았다고?"
철적 선생은 고통을 억지로 참으며 웃음을 띠었다
"나는 삼 초를 양보했는데 넌 아직까지 일 초밖에 출수하지 않았다."
낭천은 그 말에 몸을 돌리더니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시선으로 한참 그를 주시하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낭천은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철적 선생의 면전에다 가볍게 이장을 밀어내었다.
"이것으로 당신이 양보한 삼 초를 모두....."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창! 하는 맑은 금속성이 울려퍼지더니 십여 점의 한성이 마치 폭우처럼 철적 선생이 수중에 들고 있는 철적에서 폭사되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낭천은 급급히 몸을 솟구쳐 삼 장 밖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막 땅에 내려설 때 그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철적 선생의 창백한 얼굴에 한 가닥 붉은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나도 오늘 비로소 한 가지 교훈을 배웠다. 오늘부터 나는 절대 남에게 삼초를 양보하지 않겠다. 그러나 너도 한 가지 교훈을 배워야 한다. 만약 꼭 출수를 할 것이라면 기필코 상대방을 쓰러뜨려라. 그렇지 않으면 출수를 하지 말아라."
낭천은 이를 악물고 다리에 꽂힌 침을 바라보며 한마디 한마디 또렷하게 뱉어냈다.
"이 일을 영원히 잊지 않겠소."
철적 선생은 손을 흔들었다.
"좋다. 그렇다면 이제 그만 가 보아라!"
낭천이 미처 대답을 하기 전에 일진의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한 사나이의 흥분된 음성이 터져나왔다.
"선배님, 철적 선배님, 이미 득수를 하셨습니까?"
철적 선생은 대꾸하지 않고 손을 내저어 재촉했다.
"빨리 가 보게. 내겐 이미 자네를 죽일 힘도 없지만 자네가 남의 손에 죽는 것도 싫다네."
낭천은 땅바닥에 쓰러져 번개같이 두 장 밖으로 몸을 굴렸다. 그는 이미 자신이 멀리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평평한 설지에 남겨지는 흔적이 치명적인 타격인 것이다. 그에겐 설지에 남겨지는 흔적을 없애 버릴 능력이 없었다. 이 흔적을 좇아 전칠 등은 얼마 있지 않아 자기를 쫓아올 것이다. 그뿐이 아니라 낭천은 목구멍 속에서 일진의 피비린내가 물씬 풍겨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 낭천에게 남은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그저 한 번만이라도 초류빈을 만나 자기가 전력을 다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웅후한 우정에 그는 이미 목숨을 내던질 각오를 하지 않았던가.
그때 하나의 인영이 낭천을 향해 번개같이 덮쳐왔다.
실내에는 한 자루의 촛불이 밝혀져 미미하게 빛을 내며 간혹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촛불에 초류빈의 창백하고 마치 병자와 같은 얼굴이 비쳐졌다.
초류빈은 연속적으로 기침을 해댄 탓에 이제는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호유성은 아까부터 묵묵히 초류빈을 쳐다보고 있다가 그가 기침을 끝내자 술잔을 내밀어 입에다 부어 주었다.
술을 완전히 마시고 난 후 초류빈은 바보스럽게 웃었다.
"형님, 당신은 내가 한 방울의 술도 흘리지 않는 것을 보았겠군요? 아니, 설사 남이 나를 거꾸로 매달아 놓고 술을 먹여도 나는 절대로 흘리지 않을 것입니다."
호유성은 웃으려고 했지만 어쩐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나더러 자네의 혈도를 풀지 말라는 건가?"
"나는 본래부터 유혹이 심한 사람이라 만약 형님이 내 혈도를 풀어 주면 도망을 갈지도 모릅니다."
호유성은 주위를 휘둘러 보았다.
"지금 그들은 이곳에 없으니 만약 내가....."
초류빈은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챘다.
"형님, 당신은 아직도 내 뜻을 모른다는 말입니까?"
호유성은 괴로운 얼굴로 길게 탄식을 뿜어내었다.
"물론 알고 있네. 그러나....."
초류빈은 예의 그 바보스러운 미소를 얼굴에 떠올리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나는 지금 형님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내게 결코 몹쓸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형님이 나를 그 땔감을 쌓아 두는 습기찬 광에서 이곳으로 옮겨 왔고 또 술도 있으니....."
초류빈은 여기서 말을 끊고 씨익 웃었다.
"이것으로 이미 형님은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닙니까?"
촛불은 점점 타들어가 이상한 분위기에 갇혀 있는 두 사람을 벽에 기다란 그림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호유성은 마치 무거운 압력에 눌린 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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