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13 소이비도 제1권 숙명
숙명
여기까지 말을 하고 난 초류빈은 일부러 헛기침을 한 차례 토해내고 나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하여튼 모든 비겁한 일들을 나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전부 다 해치웠소. 그러나 나는 여전히 협의의 인사라고 자칭하고 있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작스레 찰싹! 하는 소리가 나며 조정의가 그의 뺨을 후려쳤다.
순간 호유성이 두 눈을 부릅뜬 채 괴성을 지르며 저지했다.
"안 되오. 호걸은 결코 죽여서는 안 되오. 또한 모욕을 주어서도 절대 안 되오."
"괜찮소. 그가 나의 따귀를 때렸다는 것을 나는 다만 미친 개에게 물렸다고밖에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초류빈은 여전히 비웃음을 안면 가득히 띤 채 담담하게 말했다.
조정의는 미간을 찌푸리며 괴성을 질렀다.
"설사 내가 너를 죽이고 싶지 않다고 해도 나는 너를 살지도 못하고 또한 죽지도 못하게 할 수가 있다."
"만약 나 초모인이 당신네들 같은 비열하기 짝이 없는 위선자들을 무서워하고 있다면 난 벌써 목숨을 끊고 말았을 것이오."
초류빈은 의연한 모습으로 단호하게 말하며 차가운 코웃음을 터뜨렸다.
"흥! 당신네들에게 무슨 수단이 있는지 어디 한번 마음대로 써 보시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정의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조정의는 살기어린 음성을 내뱉으며 손을 쓰려는 듯 장삼을 벗어던졌다.
호유성은 의자에 앉은 채 다소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현제, 용서하게....."
초류빈은 가벼운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형님, 이러지 마시오. 만약 나에게도 처자식이 있다면 아마 형님과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오."
순간, 조정의의 철장이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는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미소만은 잃지 않았다.
대청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초류빈의 이런 당당한 모습을 보고 절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강호의 사람들이 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뼈대라고 말할 수가 있다.
초류빈 역시 그에게는 단단한 뼈대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이 때였다.
대청 밖에서 누군가가 성급히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낭자, 지금 어디에서 돌아오는 길이오? 그리고 이분은?"
설소하가 헝클어진 머리와 의상 또한 매우 난잡한 모습을 한 채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는 한 명의 청년이 우뚝 서 있었다.
한데 이상하게도 이 엄동설한의 계절인데도 청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여름의 얇은 장삼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일에는 결코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듯이 허리를 편 채 몹시 여유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또한 그의 안색은 마치 화강암처럼 강인하면서도 냉막하여 다른 사람이 감히 항거를 할 수 없는 그런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어깨 뒤로 한 구의 시체가 매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낭천을 보자 초류빈은 심히 격동되어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초류빈은 겉으로 애써 태연스러운 척하면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자신의 몰골을 낭천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낭천이 자기를 위하여 모험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때 낭천은 초류빈의 모습을 뚫어져라 하고 계속 쳐다보다가 냉막했던 얼굴에 격동의 빛을 보이기 시작했다.
순간 초류빈에게 쏜살같이 달려갔다.
조정의는 저지를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조정의 역시 그의 쾌검 맛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손마운은 그러한 것도 모르고 대뜸 길을 막으며 호통을 쳤다.
"너는 누구냐? 대체 무엇을 하려고 그러는 것이냐?"
낭천은 두 눈을 치켜올리며 같이 큰소리로 외쳤다.
"너는 누구냐?"
이러한 뜻밖의 호통을 받은 공손마운은 분노를 금치 못하여 사지를 부르르 떨며 냉랭하게 말했다.
"너를 혼내주겠다!"
그는 싸늘한 대갈성과 함께 번개같이 낭천을 향해 출수했다. 어느 누구도 감히 이를 말릴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조정의는 처음부터 그들이 싸우기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칠 역시 남의 손을 빌려서 이 청년의 무공내력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설소하는 초류빈의 몰골을 보자 깜짝 놀라 공손마운의 출수를 볼 수 있을 만큼 여유를 얻지 못했다. 호유성 역시 남의 일에 더 이상 참견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낭천이 피하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순간, 펑! 하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공손마운의 정권이 낭천의 가슴팍에 정통으로 격중되고 말았다. 그러나 낭천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반면에 공손마운은 두 주먹을 꼭 쥔 채 허리가 구부러졌다.
낭천은 여전히 격동된 표정으로 초류빈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더니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그는 당신의 친구요?"
초류빈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떠올리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에게 저런 친구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때 공손마운이 낭천의 등을 향하여 또다시 일장을 격출해 갔다.
순간 낭천은 잽싸게 몸을 돌렸다.
잇따라 펑! 하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공손마운의 몸이 여지없이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 군웅들은 일순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강호를 진동시킨 공손마운이 한 청년 앞에서 허수아비처럼 일격도 받아내지 못하다니.....
그러나 전칠은 껄껄 대소를 터뜨리며 말을 꺼냈다.
"아주 빠른 출수였소. 나는 전칠이라고 하오. 귀하의 존성대명은 무엇이며 나 전칠과 친구로 사귀지 않겠소?"
"나에게는 이름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당신과 같은 친구를 사귀고 싶지 않소."
낭천은 일언지하에 그의 청을 거절했다. 순간 다른 사람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하고 말았다.
그러나 전칠만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젊은이는 역시 젊은이다운 패기가 있구려. 그러나 젊은이는 친구를 잘못 사귀었소."
낭천은 가늘게 신음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전칠은 초류빈을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그는 친구의 친구되는 분이오?"
"그렇소."
"친구는 그가 누구인지 아오?"
"물론."
그러자 전칠은 가벼운 미소를 흘리고 난 후 차분한 음성으로 다시 말을 꺼냈다.
"친구, 그가 매화도라는 것을 알고 있소?"
이러한 소리에 낭천은 다소 격동한 듯이 두 눈을 치켜올리며 다시 한번 큰소리로 외쳤다.
"매화도?"
전칠은 마른침을 한차례 삼키고 난 후 즉시 입을 열었다.
"이 일을 얘기하면 아마 믿기가 어려울 것이오. 그러나 사실이 눈앞에 있으니 어느 누구도 함부로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낭천은 초류빈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이렇게 노려보는 예리한 눈초리는 금방이라도 그의 심장을 도려낼 것만 같았다.
전칠은 차가운 시선을 급히 감추고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만약 귀하가 믿지 못하겠다면 그에게 직접 물어보시오."
낭천은 고개를 돌리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어볼 필요도 없소. 그는 절대로 매화도가 아니오."
"어째서?"
전칠이 급히 다그쳤다.
낭천은 어깨에 메고 있던 시체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으며 침중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진짜 매화도는 여기에 있소."
이러한 소리를 듣자 군중들은 전부가 다 대경실색하여 두 눈을 크게 뜨고 이쪽으로 모여들었다. 시체는 언뜻 보아 매우 말라 보이는 듯한 사람이었다. 원래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일신에 흑의를 걸치고 있었으며 입은 굳게 다문 상태로 축 늘어져 있었다. 또 시체의 목에 하나의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보였다.
전칠은 한참 동안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을 더듬더니 황망히 입을 열었다.
"이 자가 바로 매화도요?"
낭천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전철은 다시 입가에 가벼운 웃음을 떠올리며 여유있게 말했다.
"친구는 역시 나이가 젊구려. 어디 한번 생각을 해보시오. 만약 우리 모두가 시체를 하나 끌고 와서 그를 보고 매화도라고 한다면 누가 그 말을 믿겠소?"
예리한 시선으로 그들의 안색을 살피던 낭천이 안면을 실룩거리며 단호한 어조로 딱 잘라 말했다.
"나는 결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오."
전칠은 안색을 굳히며 냉랭한 눈빛으로 낭천을 주시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으로 이 시체가 바로 분명히 매화도라는 것을 증명해 줄 수가 있소?"
"그의 입을 보시오."
전칠은 헛기침을 토해내며 비웃었다.
"내가 왜 그를 보아야 하오? 죽은 자가 무슨 수로 말을 한다고 그러시오."
순간 다른 사람들은 모두 대소를 터뜨렸다. 그들은 다만 전칠의 말에 웃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설소하가 황급히 말을 꺼냈다.
"그의 말이 맞아요. 이 시체는 확실히 매화도예요."
전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꺼냈다.
"음, 그렇다면 시체가 낭자에게 알려준 것이란 말이오?"
"그래요."
설소하는 재빨리 대답을 한 후 말을 계속하였다.
"진중이 죽은 이유는 악독한 암기에 맞았기 때문이에요. 그의 공력으로 암기를 피해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에요. 그러나 오문천 같은 고인이 암기를 피할 수가 없었다는 것은 이상하잖아요?"
그러자 전칠은 설소하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며 의아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렇다면 낭자께선 벌써 그가 누구인지 깨달았다는 말이오?"
설소하는 아름다운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그래요. 매화도의 비밀은 바로 그의 입 속에 있어요."
그녀는 지체없이 품속에서 한 자루의 비수를 꺼내어 시체의 입을 벌렸다. 시체의 입 속에는 한 자루의 시커먼 강관이 물려져 있었다.
설소하가 즉시 입을 열었다.
"그는 남과 이야기를 할 때 갑작스레 입으로 암기를 발하기 때문에 상대는 절대로 방비를 하지 못하지요."
"그의 입 속에 강관이 물려져 있는데 어떻게 남과 얘기를 할 수가 있소?"
전칠의 질문에 설소하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담고 대답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비밀 중의 비밀이에요. 그는 입으로는 살인을 하고 배로 말을 해요."
이 한마디는 어느 사람이라도 얼핏 듣기에 아주 우스꽝스러운 말이다.
그러나 전칠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는 확실히 뱃속으로 말을 하는 복화술(腹話術)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술법은 천축에서 전해 온 것이라고 한다.
설소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전칠에게 야릇한 눈빛으로 물었다.
"전칠야께서는 남과 겨룰 때 상대방의 어디를 노려보는가요?"
"물론 상대방의 신상이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설소하는 즉시 다그쳤다.
"신상 어디인가요?"
전칠은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얘기했다.
"어깨와 손, 그리고 눈....."
설소하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됐어요. 고수가 대결을 하는데 있어서 상대방의 입을 노려보는 사람은 절대로 없을 것이에요."
설소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그리고 입을 노려보고 싸우는 것은 배밖에 없지요. 그 이유는 개는 입으로 상대방을 물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사람은 절대로 입으로 상대방을 물지는 않지요."
이러한 말에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웃었다. 설소하 같은 미인의 입에서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다니.....
그러나 설소하의 안색은 석상처럼 굳어져 있었다.
"때문에 매화도는 남들의 이러한 약점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암산?하지요. 그리고 상대방이 고수이면 고수일수록 더욱더 그의 암산에 쉽게 걸려들지요. 그 이유는 고수일수록 상대방의 어깨 밑을 노려보기 때문이에요."
"낭자께서는 어떻게 이 비밀을 알아냈소?"
전칠은 일부러 헛기침을 한 차례 토해내고 나더니 엄중하게 물었다.
설소하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리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도 역시 그가 암기를 발출한 후에 알았어요."
"그렇다면....."
전칠은 문득 비릿한 조소가 번지는 얼굴로 낭천을 응시했다.
"그렇다면 이 청년은 개처럼 시종 그의 입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에 피할 수가 있었단 말이오?"
"전칠야께선 아직까지 그가 금사갑을 입고 있다는 것을 잘 모르는군요."
그녀의 말에 전칠은 두 눈을 번쩍 뜨며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래서 마운대협께서 조금 전에 때렸다가 오히려 자신의 손이 더 아팠군."
설소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원래 냉향소축으로 가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어요. 그런데 밤이 가까워지자 문득 한 가지 물건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어요. 그런데 뜻밖에도 제가 냉향소축으로 돌아가자마자 매화도가 즉시 나타났던 것이에요."
여기까지 말을 하고 난 설소하는 다소 두려운 표정을 떠올리더니 다시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 당시에 저는 그를 보지 못했어요. 제가 이상하다는 생각과 더불어 몸을 돌렸을 때 그는 벌써 저의 혈도를 찍고 말았던 거예요."
전칠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나지막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그 자의 경공술 또한 보통이 아니군....."
설소하는 길게 탄식을 터뜨리며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가 지니고 있는 신법은 유령처럼 빨라 제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는 벌써 저를 납치하여 밖으로 달아나고 있었던 것이에요. 그래서 저는 깜짝 놀라서 대체 왜 이러느냐고 큰소리로 호통을 쳤지요."
"그가 무어라고 했소?"
설소하는 순간 이를 부드득 갈며 냉랭하게 말했다.
"그는 아무런 소리도 않고 다만 음산하게 웃었을 뿐이에요."
전칠은 길게 숨을 몰아쉬고 나더니 이윽고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이제보니 그는 낭자에게 그가 바로 매화도라는 것을 이야기해 주지 않았구려."
"그가 저에게 얘기해 주지 않아도 저는 직감적으로 그가 바로 매화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 당시 저에게는 힘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삶조차 완전히 포기해 버린 상태였었지요."
여기에서 설소하는 잠시 숨을 돌리느라 말을 멈추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때 갑자기 한 줄기의 인영이 저의 앞에 나타났지요."
전칠은 말이 끊어지는 틈을 타 즉시 입을 벌렸다.
"그 한 줄기의 인영이 바로 이 청년이었군요."
"그래요. 바로 그래요."
설소하는 낭천을 향해 뚫어지듯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이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 너무나 빨리 왔어요. 매화도 역시 깜짝 놀란 듯이 저를 바닥에 그대로 팽개쳤지요...그리고 이분께서 '당신이 바로 매화도요?' 하고 물으니까 매화도가 말하기를 '매화도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냐, 어쨌든 너는 죽을 놈인데...'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입 속에서 갑자기 한 덩어리의 시커먼 물체가 격사되어 나왔지요."
설소하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저는 이러한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지요. 시커먼 흑점들이 전부 다 공자님의 몸에 격중된 것을 보고 저분께서도 다른 사람들처럼 아깝게도 목숨을 잃는구나 하고 생각을 했어요."
설소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저분께서는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끄떡도 하지 않는 것이에요. 그뿐만 아니라 저는 검광만 번쩍하는 것을 보았는데 매화도는 벌써 쓰러졌어요. 그 일검의 출수는 어찌나 빠른지 그의 눈앞에 가까이 있던 저도 자세하게 보지를 못할 정도였어요."
설소하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장내의 사람들 눈길은 삽시간에 낭천의 허리께에 있는 장검 쪽으로 몰려갔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장검이 매화도를 죽일 수 있었으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못했던 것이다.
전칠도 역시 검을 노려보았다. 일순 그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귀하, 혹시 벌써부터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오?"
낭천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소."
그러자 전칠은 또다시 입가에 미소를 떠올라며 엄중하게 입을 열었다.
"귀하는 그를 보자마자 즉시 나서서 그가 매화도인가를 자세하게 물어보았소?"
"그렇소."
"그렇다면 귀하는 야행인을 보기만 하면 즉서 달려가서 매화도가 맞는가를 물어본단 말이오?"
낭천은 침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소."
전칠은 다시금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만약 한가한 시간이 주어졌을 때 우연히도 야행인을 만나게 된다면 그에게 무어라고 묻겠소?"
"내가 왜 묻소. 누가 누구이든 간에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소."
낭천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차갑게 대꾸했다.
전칠은 갑자기 손을 탁 치면서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됐소. 귀하가 설사 묻는다고 해도 다만 그가 누구인가를 물었을 것이오...가령 예를 들면 귀하가 조금 전에 공손마운에게 물었을 때에도 다만 너는 누구냐고 했지요."
"나는 그가 매화도가 아니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는데 무엇 때문에 또 묻소?"
낭천의 말에 전칠은 정색을 하면서 시체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그렇다면 귀하는 왜 그렇게 물었소? 그럼 귀하는 벌써부터 그 자 매화도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단 말이오?"
전칠은 길게 숨을 몰아쉬고 난 후에 다시 물었다.
"귀하는 벌써부터 그가 매화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무엇 때문에 또 물었소?"
"그 이유는 누군가가 나에게 며칠 안으로 매화도가 반드시 이 부근에 나타나리라는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이오."
그러자 전칠은 초류빈을 날카롭게 노려보면서 즉시 다그쳤다.
"누가 당신에게 알려주었소? 매화도 자신이오? 아니면 매화도의 친구요?"
군중들은 이러한 소리를 듣자 일제히 초류빈을 주시했다. 그 이유는 그들 전부가 다 낭천과 초류빈이 미리 짜고서 수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칠은 군중들 앞으로 썩 나가더니 그 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을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혹시 네가 바로 매화도가 아니냐?"
그러자 그 자는 당황하여 더듬거렸다.
"전...전....."
순간, 전칠은 재빠르게 그의 혈도를 찍어 버렸다.
"틀림없군. 네놈이 바로 매화도였군."
전칠은 교활한 눈빛을 빛내면서 군중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매화도는 누구나가 다 이렇게 쉽게 잡을 수가 있는 것이오."
군중들은 즉시 대소를 터뜨리며 서로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들은 전칠의 말뜻을 단번에 알아차린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두 눈을 부릅뜨며 고함쳤다.
"혹시 네가 바로 매화도가 아니냐!"
"너야말로 바로 매화도지?"
"무슨 매화도가 이렇게 많으냐!"
"매화도가 이렇게 쉽게 잡히다니...우리도 잡으러 가자."
순간 낭천은 안색이 새파래지면서 손을 검자루에 슬며시 대었다.
초류빈이 갑작스레 탄식을 터뜨리며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그만 가 보게."
"가라고?"
낭천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초류빈을 빤히 직시했다.
초류빈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떠올리며 말을 꺼냈다.
"전칠야, 조대야 같은 대협께서 여기에 계시는데 어찌 매화도 같은 사람을 신출내기인 형제에게 빼앗기겠는가."
"나도 더 이상 저런 자들과 얘기를 나누고 싶지도 않소. 그런데 나의 검이....."
낭천은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냉랭하게 말했다.
초류빈은 일부러 헛기침을 한 차례 토했다.
"흠, 설사 그들을 모두 죽인다고 해도 형제가 매화도를 살해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일세. 알겠나....."
"그렇구려! 그렇구려."
"유명해지려면 일찍 이 도리를 먼저 알고 있어야만 하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나처럼 매화도로 불리게 될 걸세."
낭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즉시 말을 받았다.
"당신의 말뜻은 내가 유명해지고 싶다면 반드시 먼저 말을 잘 들어야만 한다는 것이오?"
초류빈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지. 자네가 자칭 대협이라고 하는 분들에게 양보를 해 주기만 하면 그분들은 자네를 가상한 젊은이라고 할 것이네."
여기까지 말하고 난 초류빈은 잠시 그를 주시하다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후에 또다시 긴 세월이 지나면 대협들은 모두가 세상을 하직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땐 자네가 유명해질 차례가 될 것일세."
그러자 낭천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고 나더니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웃어젖히는 낭천의 웃음은 여전히 매력적이면서 다소 적막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낭천은 이윽고 웃음을 멈추고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나는 영원히 유명해질 수가 없겠구려."
초류빈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역시 좋은 일이기는 하지....."
낭천의 얼굴에도 은근히 미소가 떠올려지자 초류빈은 더욱더 활짝 얼굴을 폈다. 그들은 마치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얘기를 서로가 나누고 있는 듯 매우 유쾌한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장내에 있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들 두 사람이 마치 무슨 정신병자라도 되는 것처럼.....
낭천은 초류빈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유명하든 말든 우리 이렇게 만났으니 오늘 술이나 한 잔 나누도록 합시다."
"술? 좋지. 그런데 오늘만큼은....."
초류빈은 반색을 하다 말고 고개를 내저었다.
전칠은 가벼운 미소를 떠올리며 즉시 말끝을 이었다.
"오늘만큼은 결코 어울릴 수가 없지."
순간 낭천은 안색을 굳히고 검을 치켜올렸다.
"그건 대체 누가 한 소리요?"
이때 전칠이 손짓을 하자 대청 밖에서 즉시 두 명의 대한이 달려들어왔다. 그들의 수중에는 대도(大刀)가 들려져 있었다.
그 대도가 낭천을 향해 겨냥되고 있었다.
"전칠야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들은 싸늘한 얼굴로 낭천을 포위했다.
"전칠야의 명령을 거역하는 자는 오직 죽음밖에 없을 것이다."
돌연, 날카로운 호통과 동시에 두 사람은 낭천의 좌우를 향하여 일제히 강맹하게 휩쓸어 왔다.
낭천은 냉랭한 표정으로 그들의 출수를 지켜보았다. 마치 움직이지 않는 석고상과도 같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순간 한광이 번쩍 하는가 싶더니 두 마디의 경악성이 들렸다. 동시에 두 자루의 대도가 허공으로 뜨며 눈 깜짝할 사이에 대청 위의 대들보에 그대로 꽂히고 말았다.
두 명의 대한은 제각기 오른손목을 꼭 쥐고 있었다. 한가닥의 선혈이 손가락 사이로 주르르 흐르기 시작했다. 한데 낭천의 검은 그대로 허리께에 있었다. 어느 누구도 그가 언제 검을 뽑았는지 보지 못했다.
또한 어느 누구도 그의 검끝에 한 덩어리의 피가 응결되어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아주 빠르고 정확한 검법이었다. 또한 전칠의 가벼운 웃음도 이 검끝의 선혈에 따라 응질되었다.
낭천은 당당하게 말을 꺼냈다.
"전칠야의 말은 비록 명령이었지만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의 검은 어느 누구의 명령도 듣지를 않소....."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계속했다.
"나의 검은 다만 피를 부를 줄밖에 모르오."
그의 말에 두 대한은 진저리를 치며 전율을 금치 못했다. 두 사람의 오른팔에는 제각기 한 줄기의 시뻘건 혈흔이 남아 있었다.
만약 낭천의 출검이 옆으로 조금만 비켜졌다면 두 사람의 힘줄이 당장에 끊어져 버리고 말았으리라.....
낭천의 출검은 빠를 뿐만 아니라 또한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정확했다.
두 명의 대한들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더니 갑작스레 몸을 틀면서 대청 밖으로 황급히 달아났다. 예리한 검은 비록 말은 할 줄 모르나 세상의 어떠한 명령보다도 더 큰 효과가 있는 것이다.
낭천은 흡족한 눈길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또다시 초류빈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갑시다. 세상에서 우리를 저지할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니 술이나 마시러 갑시다."
초류빈이 채 대꾸도 하기 전에 호유성이 문득 말을 꺼냈다.
"당신이 그를 데리고 가겠다면 왜 먼저 그의 혈도를 풀어 주지 않소?"
순간, 낭천의 안면에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초류빈은 문득 그날의 일이 생각났다. 그날 낭천이 그를 대신하여 홍한민을 잡아 손육의 주방에다 감금시키면서 새끼줄로 홍한민을 묶었었다.
그때 초류빈은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낭천이 왜 홍한민의 혈도를 찍어 버리지 않고 새끼줄로 묶었는가? 이제보니 낭천은 검법상의 빠른 속도를 지니고 있었을 뿐 점혈은 할 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초류빈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내색을 않고 宣笭?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오늘은 내가 자네에게 술을 살 만큼 충분한 여유가 있지 않다네."
낭천은 무엇을 생각하는 듯 한참 동안 신음을 하더니 이윽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내가 당신에게 사 주겠소."
"자네가 사온 술이 아니라면 나는 절대로 마시지 않겠네."
낭천은 한참 동안 그를 응시하였다. 냉막한 눈망울 속에 알 수 없는 한가닥의 고통스러움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역시 초류빈이 모험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초류빈을 업고 가야만 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초류빈을 업으면 마음대로 출수를 하지 못해 쉽사리 밖으로 나갈 수가 없게 된다.
전칠은 눈빛을 번뜩이면서 그들의 얼굴을 한참 동안 쓸어보다가 갑자기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초류빈은 이 늙은 여우가 벌써 낭천의 약점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의식하자 즉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당신, 그렇게 좋아할 필요는 없소. 그는 절대로 당신에게 속아넘어가지는 않을 것이오. 하물며 설사 그가 나를 등에 업고 있다 해도 당신네들 역시 그의 적수는 못 될 것이오. 또 나 초모인이 절대로 그를 따라가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여기까지 말을 한 초류빈은 일부러 헛기침을 한 차례 토해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이유는 내가 만약 따라가면 당신네들 역시 내가 매화도라고 단정을 내릴 테니까."
초류빈이 이렇게 말한 몇 마디는 물론 낭천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였다.
낭천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들이 당신보고 매화도라고 하면 당신이 곧 매화도가 된다는 것이오?"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이든 개소리나 다름이 없지....."
"기왕 개소리라고 한다면 상관할 필요가 뭐 있겠소?"
낭천은 이미 결심을 했는지 잽싸게 허리를 굽혀 초류빈을 어깨에다 업었다.
바로 이 때였다. 전칠이 뒷짐을 지는 척하며 적시에 살수를 뻗어내었다.
순간 연곤이 수십 줄기의 한풍과 함께 낭천의 앞가슴 열한 군데의 혈도를 향해 날카롭게 기습해 갔던 것이다. 전칠의 연곤이 낭천의 몸에 정통으로 격출되기만 하면 낭천은 금시 끝장이 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낭천은 쉽사리 출검을 하지 않았다. 그의 검은 벌써 살인을 할 자신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조정의는 순간 안색이 새파래져 고함치듯 입을 열었다.
"매화도를 납치하는 데 있어서는 강호의 신의를 논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오. 그러니 여러분, 속히 출수를 하시오!"
그러나 군중들은 낭천의 분투를 여전히 지켜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전칠의 연곤혈수법은 강호의 일절이라고 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결코 낭천을 어쩌지는 못했다.
"매화도를 잡을 수가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영광이오. 그런데 여러분께서는 왜 이러한 기회를 놓치려고 하는 것이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조정의가 우렁찬 대갈을 터뜨리며 재빨리 손을 뻗쳤다. 순간, 일곱 자루의 병기가 일제히 낭천의 등에 업혀져 있는 초류빈을 향해 날카롭게 찔러갔다.
설소하는 재빨리 호유성의 옆으로 달려가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다급한 음성을 토했다.
"왜, 그들을 저지하지 않아요?"
"나 역시 점혈수법에 당해 있소."
호유성은 길게 탄식을 터뜨리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이때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비명과 함께 세 사람이 비틀거렸다.
낭천의 검이 결국은 뽑히고 말았던 것이다. 그의 검은 비록 전칠을 꼭 죽이려는 마음은 없었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을 상대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선혈이 뿜어지는 곳에 따라 초류빈의 가죽옷에 어느 새 혈화가 튀었다. 순간 모든 병기들은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때 전칠의 연곤이 여전히 날카로운 독사처럼 낭천의 전신 요혈을 향해 기습해 오고 있는 것이었다. 전칠의 연곤은 장검보다 훨씬 더 길었다.
낭천은 등 뒤에 있는 초류빈을 마음으로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더 이상 전진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초류빈 때문에 전진을 할 수가 없게 되자 반격은커녕 연신 수비에만 급급하는 길밖에 없었다.
설소하가 장탄식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역시 조대야께서는 협의무쌍하시군요."
조정의가 말을 받았다.
"노부가 벌써 얘기를 했다시피 매화도 같은 놈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강호의 도의를 찾을 필요는 절대 없소."
하면서 대청의 한쪽 구석으로 달려가더니 병기대 위에 걸려 있는 창을 집어 대뜸 커다란 창화를 그리며 초류빈의 등을 찔러갔다.
철면무사 조정의가 무림에서 명성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장창을 쓰는 데는 확실히 남달리 뛰어난 데가 있었다. 하물며 창은 모든 병기의 시조이고 곤은 모든 병기의 왕이니만큼 낭천의 짧은 검으로 긴 창과 연곤을 상대하기는 역시 부족했다. 그런데 또 하나 그 뒤에 초류빈이 업혀져 있으니.....
전칠은 자신의 특기로 남의 결점을 노렸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마지막 일격에 가서는 항상 빗나가 버리고 상대방을 쓰러뜨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수십 초 후에야 그는 낭천의 보법(步法)이 굉장히 기이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자기의 마지막 일격에 분명히 격중되었는가 싶을 땐 반드시 빗나가고 말았기 때문이다.
전칠은 누구보다도 경험이 풍부한 사람에 속했다. 그러나 여전히 낭천의 보법 내력을 알아내지 못하자 마음속으로 생각을 더듬었다.
"이 청년의 내력이 보통이 아닌 것 같으니 내 꼭 원수를 갚을 필요는 없지....."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나자 그는 즉시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친구, 이제 그를 내려놓으시오. 그러지 않으면 그가 친구에게 누를 끼치기도 전에 친구가 먼저 그에게 누를 끼치게 될 것이오."
설소하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어서 그를 내려놓으세요. 제가 보증을 하겠어요. 전칠야께서는 당신에게 절대로 해를 끼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에게 해를 가하고 싶은 마음도 없을 거예요."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말투는 부드러우면서도 관심이 깃든 음성이었다.
낭천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을 꺼냈다.
"당신들은 나보고 그를 내려놓으라고 하면서 왜 출수를 하시오?"
그러자 전칠은 재빨리 몸을 움직여 뒤로 칠 장 가량 물러났다. 조정의는 장창을 그대로 밀어내려다 말고 제대로 거두지 못한 채 창을 바닥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창! 하는 예리한 소리와 함께 창은 그대로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낭천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묵묵히 침묵을 지킨 채 초류빈을 의자에 앉히었다.
초류빈은 얼굴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그제서야 기침을 터뜨렸다. 초류빈은 낭천의 출수에 조금이라도 지장이 있을까 봐 계속 나오던 기침을 억지로 참았던 것이다.
낭천은 뜨거운 열혈이 용솟음치는 것을 억제하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내가 잘못했소. 나는 자신만을 의식하고 여지껏 당신을 잊고 있었소."
"자네가 잘했든 잘못했든 간에 나는 자네에게 감격하고 있네."
초류빈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또다시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낭천은 그를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갑작스레 조정의를 노려보더니 이어 침중하게 말했다.
"지난날 당신을 죽이지 않았던 자신이 심히 원망스럽소."
하는 소리가 채 멎기도 전에 벌써 일검이 나가고 말았다. 이 일검은 전광석화와 같이 빠르기 때문에 조정의는 미처 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위기일발의 순간, 대청 밖에서 갑작스레 염불하는 소리와 함께 한덩어리의 흑영이 낭천의 등 뒤를 향해 날카롭게 격사되어 왔다.
낭천은 재빨리 몸을 돌려 수중에 있는 장검으로 잽싸게 찔렀다.
순간 챙 하는 소리와 함께 흑영이 검끝에 정통으로 격중되고 말았다. 원래 날아오던 그 흑영은 염주들이었다. 염주가 낭천의 검끝에 걸려 둔탁한 소리를 내는 동시에 낭천의 장검은 윙윙 하는 진동소리를 냈다. 검은 끊이지 않고 계속 진동을 울려댔다. 그러나 낭천의 몸은 마치 석상과 같이 그 자리에서 굳어진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날이 환하게 밝아 왔다. 희미한 섬광 아래에 다섯 명의 회포 승인이 대청 밖에서부터 서서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맨 앞에 선 자는 눈썹이 눈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안색은 마치 어린애와 같이 불그스름하게 보였다. 그가 합장을 한 번 하자 낭천의 검끝에 걸려 있던 염주가 스르르 그의 수중으로 되돌아 갔다.
백미승인이 합장을 할 때 두 개의 손바닥은 마치 철판처럼 두껍고 단단하게 변했다.
조정의는 백미승인을 발견하자 즉시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말을 꺼냈다.
"대사께서 왕림하시는 것을 제대로 마중하지 못하여 정말 죄송하오!"
백미승인은 가벼운 미소로써 답례를 하고 낭천을 응시했다.
"이분 시주의 출검은 아주 빠르군요."
낭천은 마른침을 한 차례 삼키고 난 후에 천천히 말을 꺼냈다.
"만약 본인의 검이 빠르지 못했다면 대사의 염주 아래 벌써 목숨을 잃어버렸을 것이오."
백미승인은 일부러 헛기침을 토해내었다.
"흠, 빈승은 시주가 쓸데없는 살생을 저지를까 봐 출수를 하였던 것이오."
백미승인은 갑자기 멈추었다가 다시 계속 말하기 시작했다.
"시주, 이 점만은 명심하여 두시오. 시주의 검은 비록 빠르나 불여래 법안만큼 빠르지는 못하오."
낭천은 무엇인가 잠시 생각을 더듬다가 즉시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대사의 염주는 불여래 법안보다 더 빠르다는 말이오? 만약 내가 대사의 염주 아래 목숨을 잃었다면 또 한 가지의 살생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겠소."
조정의는 불쾌한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방자하오. 소림호법대사의 면전에서 어찌 그렇게 무례할 수가 있단 말이오?"
백미승인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띠며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괜찮소. 청년의 말솜씨는 원래부터가 예리한 도검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빈승은 아직까지 그대로 전달만 하오."
설소하가 갑작스레 끼여들며 가벼운 표정으로 말했다.
"심미 대사께서 기왕 이해를 해 주셨으니 당신은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빨리 가 보세요."
조정의가 즉시 입을 열었다.
"때는 이미 늦었을 것이오."
"그렇다면 당신이 나의 갈길을 막기라도 하겠단 말이오?"
낭천은 가소롭다는 얼굴로 비웃음을 머금은 채 큰 걸음으로 밖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순간 조정의의 안색이 다시금 변하고 말았다.
"대사!"
전칠이 미간을 치켜올리며 즉시 입을 열었다.
"심미 대사께서는 항상 자비심이 돈독하신데 어찌 청년을 이런 곤경에 빠뜨리겠소. 그냥 가도록 내버려 둡시다."
조정의는 길게 탄식을 터뜨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가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용이한 일이오. 그러나 만약 그가 다시 돌아오게 되면 문제는 아마 달라지게 될 것이오."
심미 대사가 말했다.
"보고에 의하면 본문의 속가제자 진중이 중상을 입었다고 하던데 지금 어디에 있소?"
조정의는 초류빈을 노려보더니 곧이어 침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안타깝게 대사께선 한 발 늦으셨소."
날은 또다시 밝았다. 길가에는 적지 않은 행인들이 무엇인가 서두르고 있는 듯 바쁘게들 다니고 있었다.
낭천은 어젯밤 자신이 걸었던 길을 다시 걸었다. 그의 걷는 걸음은 언뜻 보아 매우 경쾌한 인상을 풍겨 주었으나 심중은 심히 침울하기 이를 데 없는 상태였다.
이때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잠깐만....."
목소리는 마치 꾀꼬리와 같이 부드러웠다. 낭천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구인지 대뜸 알 수 있었다. 순간 가쁜 숨결과 담담한 향기가 그의 코끝에 은은하게 스며들어왔다. 갑작스레 설소하가 나타난 것이다.
설소하의 양 볼은 잘 익은 사과처럼 투명체로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길을 가던 행인들은 모두가 입을 벌리고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어떠한 자는 수중에 들고 가던 계란까지도 의식이 없는 사람처럼 그 자리에 떨구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낭천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장과도 같았다.
설소하는 가까이 다가와 숨을 몰아쉬며 나직이 말했다.
"저...저는 당신에게 사과하러 왔어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낭천은 그녀를 쏘아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당신이 나에게 사과할 필요는 없소."
설소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낭천을 힐끗 보고 나더니 즉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너무나 파렴치하고 무례한 사람들이에요."
낭천은 설소하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말을 내뱉었다.
"그것은 당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오."
"그러나 당신이 저를 구해주셨으니 제가 어찌....."
"나는 당신을 구했고 그들은 결코 구해 주지 않았소. 그리고 내가 당신을 구해 준 이유는 당신보고 그들을 대신하여 나에게 사과를 하라고 한 것은 아니오."
그러자 설소하의 얼굴은 더욱더 빨개졌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도 못하고 결국은 무안만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낭천은 퉁명스레 다그쳐 물었다.
"당신은 내게 또 무슨 할 말이 있소?"
순간 설소하는 무어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굳어져 버린 채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추고 말았다.
"그럼...나중에....."
낭천이 다시 몸을 돌리려고 하자 설소하가 다급한 음성으로 저지했다.
"잠깐만, 할 말이 있어요."
그러나 낭천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묵묵히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설소하는 냉랭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저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어디로 가야지만 당신을 찾을 수 있지요?"
낭천은 여전히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나를 찾을 필요는 없소."
순간 설소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무엇인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야릇한 눈빛을 발했다.
"그렇다면 초탐화에게 무슨 불길한 사고가 생겼다고 해도 당신에게 알려줄 필요가 없다는 것인가요?"
낭천은 그제서야 고개를 돌리며 대답해 주었다.
"당신은 서문 밖에 있는 심가사당을 알고 계시오?"
설소하는 비로소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떠올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모든 것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군요. 저는 이 성 안에서 오륙 년 동안을 살았어요."
"나는 바로 그 사당 안에서 살고 있소. 그리고 해가 지기 전에는 난 절대로 거기를 떠나지 않소."
"해가 진 후에는?"
낭천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며 하늘을 응시했다.
"당신, 잊지 마시오. 초류빈은 나의 친구요. 나에게는 결코 친구가 많지 않소. 그리고 그와 같은 친구를 다시 찾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오. 그러니까 만약 그가 죽으면 이 세상은 아마 흥미가 없어질 거요."
"저는 벌써부터 오늘밤 당신이 돌아와서 반드시 그를 구하리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짐작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알아두세요."
설소하는 숨을 한껏 들이마신 후 말을 계속했다.
"아무리 좋은 친구라고 해도 역시 자기의 목숨만큼은 중요하지 못해요."
낭천은 무섭게 두 눈을 부릅뜨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당신이 이후부터 다시는 그런 소리를 하지 않기를 바라고 싶소. 이번만은 내 못 들었던 것으로 해 두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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