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20 소이비도 제2권 황홀한 여체





황홀한 여체



낭천은 많은 음식을 먹어치웠으며 그 속도는 매우 느렸다. 그는 음식을 입으로 가져갈 때마다 천천히 잘게 씹은 후 서서히 삼켰다. 하지만 초류빈처럼 음식을 음미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그는 될 수 있는 한 음식의 양분을 최대한으로 흡수하려고 했던 것이다.

어떤 음식이든 간에 자신의 신체에서 최대의 힘이 되어 줄 것을 희망한 것이며, 오랜 고난의 생활은 그에게 극히 자연스러운 습관을 안겨다 주었고 그로 하여금 음식의 귀중함을 알게 했다. 황야에서의 음식은 항상 그의 마지막 식사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 끼의 식사를 하고 나면 언제 다시 두 번째 식사를 하게 될지 그것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매 끼의 식사 때마다 음식을 조금도 낭비하지 않고 다 섭취하곤 했다.

이 객잔은 그다지 크지가 않았다. 낭천과 설소하는 쉬지 않고 하루를 걸은 후 이곳 객잔에 투숙한 것이다. 때가 너무나 늦어 음식점이 문을 닫아 그들은 방안에서 식사를 해야만 했다.

설소하는 손으로 턱을 고인 채 낭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음식물에 대해서 이렇게 중요시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 다. 그것도 그럴 것이 굶주림을 겪어본 사람만이 음식물의 중요성을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낭천은 마지막 한 알의 쌀까지 완전히 먹어치우고 나서야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만족스러운 탄식을 터뜨렸다.

설소하는 빙그레 웃으면서 물었다.

"배부르게 잡수셨나요?"

낭천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설소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매우 많은 양을 잡수시는군요. 당신이 한 끼 잡수시는 음식이라면 저는 삼 일이라도 다 먹지 못할 거예요."

낭천은 빙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삼 일 동안 식사를 하지 않고도 견딜 수가 있지만 당신은 그렇게 할 수가 있겠소?"

그의 웃음은 눈에서부터 시작되었다가 서서히 그것이 확대되어 마지막으로 입가에 도착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얼어붙은 얼음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과 같았다.

설소하는 그의 이러한 웃음을 바라보면서 넋을 잃고 말았다. 얼마쯤 침묵이 지나자 설소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당신은 한 가지 잊은 것이 있어요."

"잊은 것이 있다니 대체 그것이 무엇이오?"

"당신의 금사갑을 제가 가지고 있어요."

설소하는 이렇게 대답하면서 가지고 온 보따리를 풀어 금사갑을 꺼내 놓자 그것은 눈부신 광채를 발했다.

과연 무림의 인물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탐을 낼 만한 물건이었다.

설소하는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당신의 상처를 보기 위해 이것을 벗길 도리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돌려주는 것을 깜박 잊고 있었어요."

낭천은 금사갑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말했다.

"당신이 가지시오."

설소하의 두 눈에 일순 기쁨의 빛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으면서 입을 떼었다.

"이것은 당신이 천신만고 끝에 얻은 것인데 어찌 가볍게 남에게 넘겨줄 수가 있겠어요?"

낭천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매우 부드럽고 따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며 또 다른 사람에겐 주지 않을 것이오. 다만 당신에게 주는 것이니 받아 두시오."

설소하의 두 눈은 감격과 기쁨의 빛으로 가득차 있었다.

두 사람은 넋을 잃고 서로 마주보았다.

이렇게 서로 뜨겁게 마주보면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설소하는 격동을 못 참아 낭천의 품속으로 와락 파고들어 왔다.

밖에서는 강한 바람이 거세게 몰아닥치고 상 위에 놓인 등잔불도 꺼질 듯이 심하게 흔들렸다. 설소하의 몸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매끄럽고 따스했으며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낭천의 가슴은 더더욱 심하게 뛰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따스하고 감미로운 흥분에 싸인 적이 없었다. 낭천 역시 남자이며 또한 혈기가 왕성한 청년이다. 비록 그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고 배우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는 서서히 고개를 숙여 설소하의 입술을 자신의 입으로 덮었다. 그녀의 입술은 불같이 뜨거웠다.

이 순간 천지간의 모든 것이 아무 의미없이 변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세상의 만물이 사라지고 시간까지도 정지된 듯하였다.

설소하는 전신을 점점 더 강하게 떨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그녀의 떨리는 몸을 따라 낭천의 손은 그녀의 몸 이곳 저곳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여인의 피부는 부드럽고 매끄러웠으며 또 불같이 뜨거웠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어깨 밑으로 늘어지더니 긴 치마도 흘러 내려왔다. 그녀의 길고 흰 다리는 가냘프게 떨리면서 꼭 포개져 있었다. 낭천의 숨소리가 마치 야산의 늑대와 같이 거칠어져 갔다.

희미한 등불 아래 두 사람은 서로의 호흡을 느끼면서 꼭 붙은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설소하는 낭천의 목을 으스러져라 안은 채 향기로운 숨소리를 낭천의 귀에다 뿜어냈다. 그리고 가지런한 치아로 낭천의 귀를 잘근잘근 씹었다.

낭천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하자 그는 전신이 심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십 년 동안 잠자고 있던 본능적인 욕정이 마지막 폭발 단계에 이른 것이다.

누가 먼저인지는 알 수 없으나 두 사람은 한 데 엉킨 채 침상 위에 쓰러졌다. 낭천은 자신을 가장 잘 억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은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단언하지만 이러한 상황하에서 자신을 억제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낭천은 서서히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녀는 태어날 때의 모습 그대로 되었다. 낭천은 그녀의 몸 위에 엎드려 그녀의 전신을 애무하면서 마지막 순간을 향해 동작을 옮겨갔다.

풍만한 그녀의 젖무덤은 낭천의 강한 상체에 눌려 곧 터질 듯했고 희고 고운 두 팔과 두 다리는 낭천의 전신을 뱀과 같이 감았다. 청춘남녀의 거칠은 숨소리와 살과 살이 마찰되는 소리만이 들리면서 두 사람은 하나가 되어 마지막 한 순간을 위해 뜀박질을 해 갔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최후의 순간에 도달하려는 순간 설소하가 갑자기 있는 힘을 다해 낭천을 침상 밑으로 밀어냈다.

낭천은 벌거숭이가 된 채 침상 밑에 떨어져 넋을 잃고 일어날 줄을 몰랐다.

곧이어 설소하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우리는 이래선 안 돼요...이렇게 해선 안 돼요....."

그녀는 상 한 모퉁이에 웅크린 채 이불을 가슴에 안고 눈물을 흘렸다.

"나도 참기가 어려웠어요. 하지만 우리가 지금 만약 참지 못한다면 나중에 꼭 후회할 것이에요...당신은 후에 저를 음탕한 여인으로 여기게 될 것이고요....."

낭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한참 후에야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이 식어 있었다.

설소하가 갑자기 침상 위에서 뛰어내려 오더니 낭천의 다리를 껴안으면서 흐느꼈다.

"부탁이에요. 저를 용서해 주세요...제가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들의 장래를 위한 것이에요."

그녀는 눈물을 뿌리며 간절한 어조로 계속했다.

"우리들은 아직 젊으며 많은 앞날이 있어요....."

그녀의 말에 낭천은 가볍게 탄식을 터뜨렸다.

"당신이 이렇게 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오. 이것은 나의 잘못인데 어찌 당신을 탓하겠소."

설소하는 여전히 흐느끼면서 그의 말을 받았다.

"저는...당신이 지금 매우 견디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당신이...만약에...꼭...꼭 필요하시다면 저는...당신에게 드리겠어요. 언젠가 저는 당신의 것이 될 것이니까요."

낭천은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당신이 견딜 수 있는데 내 어찌 견딜 수가 없겠소. 우리에겐 구만리 같은 앞날이 있지 않소."

이때 깊이 숙여진 설소하의 입가엔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이 거만하고 강인한 청년을 자신이 완전히 사로잡았으며 영원히 자신의 발 밑에 엎드려 있게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낭천은 벌거숭이인 설소하를 안아 침상 위에 눕히고 이불로 그녀를 덮어 주었다. 낭천의 눈에는 설소하가 아름다운 미의 화신으로 보였으며 그녀는 이미 낭천의 몸 일부분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낭천은 떠났다. 설소하는 그가 떠났어도 침상 위에 누운 채 신비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한 남자를 정복할 수 있는 것은 실로 유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 갑자기 창문이 열리면서 차가운 바람이 엄습해 오자 설소하는 상반신을 일으키면서 소리쳐 물었다.

"누구신가요?"

창문이 열리면서 한 공포스러운 얼굴이 창문 앞에 나타났다.

얼굴은 초록색인 듯하면서도 청색을 띠고 있어 마치 귀신과도 같았다.

어두운 밤에 창문 밖에 이러한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면 설사 담이 큰 남자라고 해도 기절초풍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설소하는 태연하게 다시 침상에 누웠다. 그녀는 놀라기는커녕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간드러지게 웃더니 입을 열었다.

"호호호...왔으면 어서 들어오시지 왜 서 있기만 하지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사람은 바람같이 그녀의 침상 앞에 도착했다. 이 나타난 사람의 덩치는 무서울 만큼 크고 얼굴과 목도 매우 길었다. 그의 기다란 목이 흰 헝겊으로 싸여져 있는 것이 마치 이미 죽어 굳어진 시체와도 같았다. 하지만 그의 동작은 매우 민첩했다.

설소하는 누운 채 그의 목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부상을 당하셨나요?"

사나이는 입을 꼭 다문 채 아무 말도 없이 설소하만 내려다 보았다.

설소하는 그 사나이가 아무 말이 없자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초류빈에게 당한 것인가요?"

사나이의 안색이 순간 급변했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설소하는 탄식을 터뜨렸다.

"저는 당신이 그를 죽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도리어 반대가 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요."

나타난 괴인의 얼굴은 더욱 파랗게 변했다.

"내가 그를 죽이려 했다는 것을 네가 어떻게 알았느냐?"

설소하는 그의 물음에 선뜻 대꾸했다

"그것은 그가 구독을 죽였기 때문이지요. 구독은 당신의 제자가 아니에요?"

그녀는 담담하게 웃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은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이상하게 생각하겠지요. 사실 그것은 매우 간단한 것이지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곧이어 말을 계속했다.

"청마 이곡은 생전에 제자를 두지 않았지만 구독은 비단 당신의 공력 신법을 터득했을 뿐만 아니라 청마수까지 얻어내지 않았습니까?"

나타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이곡이었다.

이곡은 충혈된 두 눈으로 설소하를 내려다보더니 한참 후에야 한마디 한마디 분명하게 말했다.

"나도 너를 알고 있다."

설소하는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정말 영웅이군요."

이곡은 다시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구독이 죽을 때 청마수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건 확실히 없었지요."

"그가 청마수를 너에게 주었느냐?"

"글세! 그런 것 같아요."

순간, 이곡의 얼굴엔 은은한 노기가 끓어올랐다.

"그가 만약 청마수를 너에게 주지 않았다면 그가 어떻게 해서 초류빈의 손에 죽었겠느냐?"

설소하는 방긋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당신은 청마수를 제게 주지 않았지만 당신도 초류빈의 손에 당했잖아요."

이곡은 이를 부드득 갈며 갑자기 달려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설소하는 무서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더욱 달콤하게 웃었다.

"호호호...설사 그가 저 때문에 죽었다고 해도 그는 한이 없을 거예요. 그는 매우 가치가 있다고 생각을 했으니까요."

그녀의 활짝 웃는 모습은 마치 만발해 있는 장미꽃과도 같았다.

이곡은 설소하를 내려다보면서 입가에 잔인한 웃음을 띠었다.

"나는 너에게 과연 그러한 가치가 있는지 한번 보아야겠다."

그는 설소하가 덮고 있는 이불을 확 잡아당겼다.

순간 설소하의 요염한 육체가 완전히 드러났다.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과 가냘픈 허리, 그리고 숲이 우거진 삼각지대 등은 어느 한 곳 가린 곳 없이 이곡의 눈앞에 펼쳐졌다.

이곡은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설소하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어때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녀는 두 다리를 벌려 가장 신비스러운 곳을 이곡의 눈앞에 드러냈다.

이곡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힘껏 잡아당겼다.

"으윽....."

설소하는 심한 아픔에 눈물이 나왔지만 눈물이 고인 두 눈엔 일종의 흥분과 갈망의 빛이 내포되어 있었다. 흥분 때문인지 아니면 아픔 때문인지 설소하는 신음과 가쁜 숨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당신은 어째서 제 머리만 잡고 있는 것이지요? 저의 몸은 가치가 없나요?"

이곡은 갑자기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짝!

이어서 그녀의 어깨를 잡더니 있는 힘을 다해 그녀의 몸을 비틀었다.

"윽....."

그러자 설소하의 몸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고통으로 인해 떨리는 것이 아니라 욕구적인 흥분에서 일어나는 경련이었다.

이곡은 그녀의 아랫배를 내리치면서 음험하게 말했다.

"네 이년, 네년은 학대받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설소하는 이곡의 심한 구타에 연신 신음을 토하면서 미친 듯이 소리쳤다.

"어서 때리세요. 어서 저를 죽여 주세요....."

그녀의 음성엔 고통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그 어떤 원시적인 욕구를 갈망하고 있었다.

이곡은 냉랭하게 물었다.

"너는 내가 무섭지 않느냐?"

설소하는 흥분된 음성으로 그의 물음에 대꾸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당신을 무서워하겠어요? 당신은 비록 추하게 생겼지만 남자인 것은 분명하지요."

이곡은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끌어 침상 밑으로 내던졌다. 그리고는 다시 설소하를 끌어올렸다.

설소하는 이곡을 놓칠세라 꼭 껴안으면서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저는 당신이 무섭지 않아요. 저는 당신이 좋아요. 저는 많은 멋진 남자를 상대해 왔으며, 이젠 당신과 같은 남자가 필요해."

이렇게 말한 그녀는 욕정을 갈구하는 눈초리로 이곡을 쳐다보며 다시 입을 놀렸다.

"아니, 뭘 또 기다리세요....."

그녀의 말에 이곡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이곡이 아니고 그 어떠한 남자라 해도 더 이상 기다리진 못할 것이다.

방안에는 가쁜 숨소리만 남았다.

이윽고 이곡은 침상 옆에 서서 옷을 하나하나 주워 입었다. 그리고는 침상에 누워 일종의 정복자만이 가질 수 있는 교만과 만족을 얼굴에 떠올리고 있는 설소하를 내려다보았다.

한참이 지난 후 설소하가 홀연 방긋이 웃으며 물었다.

"이제야 제가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여자라는 걸 아셨어요?"

이곡은 침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정말 죽여야 하는 건데...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네 손에서 희생되어야 할는지 모르겠군."

설소하는 교태로운 몸매를 살짝 뒤척이며 배시시 웃었다.

"당신은 원래 저를 죽이려고 온 사람이었지요?"

이곡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설소하는 아름다운 여자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아양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저를 죽일 수 있나요?"

이곡은 잠시 그녀를 응시하다가 불쑥 물었다.

"너와 함께 온 그놈은 누구지?"

"왜 갑자기 그 사람을 묻는 거죠? 질투가 나서인가요? 아니면 두려워서인가요? 그분은 당신보다 몇 배나 더 착한 분이에요. 그분은 벌써 방을 얻어 멀찌감치 가서 잠을 자고 있어요. 만약 그분이 지금 이 광경을 보았다면 당신은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이곡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가 목격하지 못한 것을 그의 행운이라고 생각해."

설소하는 짐짓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상반신에 매달린 눈같이 흰 유방이 사나이의 관능을 언제라도 자극시킬 것 같았다.

"어머나! 당신은 그분까지 죽이려고 하세요?"

"흥!"

이곡은 대답 대신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설소하는 호들갑스럽게 웃으며,

"호호호...당신은 그를 죽이지 못할 거예요. 그분은 무공이 높을 뿐만 아니라 또 초류빈의 친구예요. 아셨어요? 저도 그분을 좋아하고 있어요."

이곡의 안색이 갑자기 창백하게 변하자 설소하는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며 가만히 웃었다.

"그분은 바로 이 앞 복도로 나가서 맨 끝방에 있어요. 당신은 그분을 찾아갈 용기가 있어요?"

말이 막 끝나는 순간 이곡은 이미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고 있었다.

이런 이곡의 뒷모습을 보며 설소하는 이불 속에서도 당부하기를 잊지 않았다.

"조심하세요. 당신이 목구멍에 일검을 찔리면 그때 가서 큰일을 치를 테니까."

그녀는 깔깔거리고 웃으며 알몸을 이불 속에 파묻었다.

그녀는 기분이 몹시 좋았다. 마치 어린애가 사탕을 훔쳐먹고도 어른에게 들키지 않은 것 같은 승리감도 맛보았다.

한 남자를 정복하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을 그녀는 알고 있었으며, 그것은 바로 하룻밤에 두 남자를 정복하고 그들이 서로 죽이게 하는 일이다.

"그들 중에 누가 강할까?"

이곡의 청마수가 낭천의 목을 내리칠 때를 생각하자 그녀의 눈은 진주알처럼 반짝였다. 또 낭천의 검이 이곡의 목구멍을 찌르는 것을 생각하며 그녀는 전신을 흥분으로 떨었다.

짜릿한 전율이 육체의 쾌락이 절정에 달한 순간처럼 그녀를 엄습해 왔다.

그녀는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쾌락 후의 피곤함에 잠이 들었다. 하지만 설소하는 자면서도 웃었다.

왜냐하면 누가 누구를 죽이든 그녀에게 있어서는 유쾌한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밤 그녀는 이미 충분한 만족을 느낀 것이다.

침상은 푹신푹신하고 이불도 깨끗했으나 낭천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잠을 못 이루는 것이 이토록 무서운 것인 줄은 미처 몰랐다. 예전에 그는 피곤하다고 느끼면 눈길에 쓰러져도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오늘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매우 피곤했으나 그는 아무리 뒤척여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감은 눈의 망막 속에 온통 설소하의 눈부신 자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설소하.

그녀를 생각하자 그는 마음속에서 한 가닥 달콤한 것이 물결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낭천은 그러나 또 자학에 빠져 버렸다. 그는 그녀를 범한 것에 대해 매우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 이후 그는 그녀를 더욱더 잘 대해 주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맹세를 했다. 그건 그녀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깨물어 먹고 싶도록 귀여웠기 때문이다. 아니 귀엽다기보다는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고귀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여자를 만난 자신을 행운아라고 그는 생각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가까스로 잠이 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는 갑자기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대부분의 야수들이 어떤 징조를 느끼면 깜짝 놀라는 것과 같은 낭천의 행동이었다. 그가 막 검을 허리에 차는 순간 창문이 벌컥 열려졌다.

이어 그는 한 쌍의 귀신보다 더 무서운 눈동자가 자기를 노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증오로 가득찬 눈이었다.

이곡은 창문 앞에 버티고 서서 싸늘하게 물었다.

"네놈이 설소하와 같이 온 놈이냐?"

낭천의 대답은 지극히 짤막했다.

"그렇소!"

"그래? 그럼 나오너라!"

창밖은 바로 담장이다. 담과 창문 사이에 세 자 넓이 공간에 낭천과 이곡은 마주서 있었다.

낭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원래가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먼저 입을 여는 예가 없었다

이곡의 두 눈에서 멸시와 증오에 가득찬 신광이 쏟아져 나왔다.

"너를 죽이겠다!"

이곡 역시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단 여섯 글자만 내뱉었을 따름이었다.

낭천은 잠시 침묵을 지키고 나서야 유유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오늘 살인을 하고 싶지 않소. 가시오!"

그러나 이곡의 대답은 한마디로 살기가 감돌았다.

"나도 오늘은 살인을 하고 싶지 않으나 너만은 죽이겠다!"

이렇게 말한 이곡은 다시 비웃음이 담긴 미소를 보냈다.

"너는 설소하와 같이 오는 것이 아니었어."

낭천의 눈에서 칼날 같은 광채가 폭사되어 나왔다.

"또다시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으면 너를 죽일 수밖에 없다!"

"그건 무슨 이유냐?"

"네겐 그녀의 이름을 부를 자격이 없다!"

"하하하...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녀와 잠자리도 같이했다. 어쩔 테냐?"

낭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원래 더할 수 없이 냉정하고 침착하여 이렇게 분노해 본 적이 없었으나 지금 그의 손은 분노로 인하여 떨리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는 검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때 그의 이성은 이미 그의 몸을 완전히 불태워 버리고 말았다.

휘익!

격노한 가운데 그의 장검이 허공을 가르며 찔러나갔다. 같은 순간에 청마수도 번개같이 뻗어나왔다.

쨍그랑!

맑은 금속성과 함께 낭천의 장검은 두 동강이 나서 떨어지고 말았다.

이곡은 싸늘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무공으로 나와 겨루어 보겠다고? 설소하는 너의 무공이 괜찮다고 하던데."

말을 하는 가운데 이곡의 청마수는 이미 십여 초식이나 공격을 하고 있었다.

이 병기는 정말 불가사의할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보기에는 매우 무겁고 둔한 것 같으나 매우 영활하여 나오는 초식 또한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낭천은 거의 막을 겨를이 없었다. 그의 손에는 오직 네 치 길이의 부러진 단검만 있을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신속무비한 걸음걸이로 간신히 피해낼 따름이었다.

이곡은 잠시 손을 멈추더니

"만약 내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을 한다면 내 너를 용서해 주겠다!"

그러나 낭천은 이를 악물고 콧등에서 땀만 흘릴 뿐이었다.

이곡은 청마수로 낭천을 똑바로 가리키며 넌지시 물었다.

"묻겠는데 설소하는 자주 다른 사람과 잠자리를 같이 하느냐? 그리고 너와도 잠자리를 같이 했느냐?"

"이놈!"

낭천은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고는 다시 한번 검을 거세게 찔러 갔으나 흥분한 가운데의 공격은 지극히 무모한 것이었다.

챙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겨우 남았던 반 자루의 단검은 다시 청마수에 의해 날아가 버렸다.

낭천이 쓰러지자 이곡의 청마수가 뒤따라 벽력같이 뻗어왔다.

낭천은 일어날 여지조차도 없어 하는 수 없이 땅바닥에서 뒹굴어 그의 위맹한 공격을 피해냈다.

청마수의 위력은 너무도 크고 위맹한 것이었다.

이곡은 다시 제자리에 버티고 서서 냉랭하게 물었다.

"말해라! 내가 묻는 말에 대답만 하면 너를 살려주겠다."

낭천은 처참하게도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쳤다.

"하겠소! 말하겠소!"

"그래? 으하하하....."

이곡의 입에서 득의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오는 순간, 갑자기 이곡의 눈앞에 검광이 번쩍했다. 이곡은 평생 동안 이토록 빠른 검광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검광을 보았을 때 검은 이미 그의 목구멍으로 들어가 있었다. 이곡의 얼굴엔 엄청난 놀라움으로 인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역력히 떠올랐다.

그는 죽기 전까지만 해도 이 일검이 어떻게 해서 자신의 목구멍으로 찔러들어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꿈에도 그는 이 청년이 그토록 빠른 일검을 격출할 줄은 몰랐다.

낭천은 두 개의 손가락으로 조금 전에 떨어뜨렸던 반 자루의 단검을 이곡의 목구멍에서 조금씩 뽑아내기 시작했다.

이곡의 얼굴 근육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낭천의 시선은 마치 얼음장 같았다. 그는 이곡을 노려보면서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입을 떼었다.

"그녀를 모욕하는 자는 죽는 길밖에 없다!"

이곡의 목구멍에서는 아직도 부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런 그의 눈썹과 눈 그리고 입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건 그가 웃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웃으면서 낭천에게 이런 말을 하려고 했을 것이다.

"언젠가는 너도 그녀의 손에 죽게 될 것이다....."

설소하가 노곤한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는 웬 그림자 하나가 창문 밖에서 서성이는 것을 보고 그가 낭천이라는 것을 알았다.

들어오고 싶지만 그녀가 깰까 봐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설소하는 알고 있었다. 만약 이곡이라면 그는 창밖에서 절대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설소하는 창문에 비치는 그림자를 보며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이곡은 매우 특이한 남자이며 여자를 다루는 솜씨가 능란했다.

그런 남자는 그녀에게 매우 새로운 맛을 주나, 낭천은 그보다 더 재미가 있었다. 그녀는 침상에 누워 유쾌한 기분으로 낭천을 좀더 기다리게 하고 나서 가볍게 불렀다.

"밖에 있는 분은 소천인가요?"

소천(小天), 매우 부드럽고 다정한 애칭이었다.

낭천의 그림자가 창문 밖에 우뚝 멈추어졌다.

"나요."

설소하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들어오시지 않는 거예요?"

낭천은 가만히 문을 열다가 문이 곧 열리는 것을 보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문을 잠그지 않았군요?"

설소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방긋이 웃었다.

"잊었어요. 전 뭐든지 잘 잊어버린답니다."

낭천은 급히 침상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싱싱한 여인의 살내음이 밴 이불이 그의 코를 자극했다. 풋풋한 풀냄새 같기도 한 그녀의 숨결이 낭천의 전신을 감싸는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은 약간 핼쓱했고 또 약간 부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것은 물론 이곡을 만족시켜 주고 또 자신도 만족한 노력의 부산물이다.

낭천은 안색이 약간 변하여 급히 물었다.

"무...무슨 일이 있었소?"

설소하는 쪽 고른 치아를 곱게 내보이며 달콤하게 웃었다.

"전 잠을 잘 자지 못하면 얼굴이 부어요. 어젯밤 밤새도록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해서....."

여기까지 말하던 그녀는 그래도 양심이 남아 있었든지 얼굴을 붉히며 아양을 떨었다.

"아이! 왜 자꾸 뚫어지게 쳐다봐요? 전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당신...당신은 또 엉뚱한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고는 이불을 머리 위까지 푹 뒤집어 쓰는 것이 아닌가!

낭천은 넋을 잃었다. 아니 마음까지도 따라서 녹아 버리는 것 같았다.

설소하는 이불깃을 살짝 걷으며 사나이를 녹여 버릴 듯한 미소를 보냈다.

"당신은...당신은 잘 주무셨어요?"

낭천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소. 웬 미친 개가 내 방 창문 밖에서 마구 짖어대는 바람에 말이오."

설소하는 눈을 깜박이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미친 개라구요?"

"그렇소. 하지만 난 이미 그놈을 죽여 강물에 던져 버리고 말았소."

갑자기 밖에서 땡땡땡 하는 소리가 들려 낭천은 창문을 약간 열어 보았다.

거기에는 점원이 마당에 놓여져 있는 세숫대야를 두들기며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여러 손님들, 여러분들은 요즘 강호를 떠들썩하게 하는 커다란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싶으십니까? 그러시다면 식당으로 오십시오. 거기에는 남쪽에서 오신 손(孫) 노선생께서 정각 오시(午時)에 얘기를 시작합니다. 신선하고 흥미있는 얘깃거리라는 것을 소생이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식사를 하시면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낭천이 창문을 닫으면서 고개를 가로젓자 설소하가 궁금한 듯이 살짝 물었다.

"듣고 싶지 않으세요?"

낭천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생각 없소."

설소하는 눈알을 사르르 굴리며 애교있게 말했다.

"전 가서 듣고 싶어요. 그리고 우리도 점심을 먹어야 하지 않겠어요?"

낭천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저 점원은 장사를 하는 수법이 비상한 것 같소."

설소하는 이불을 들치고 일어나려다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더니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알고보니 그녀는 전신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가 아닌가.

눈이 부실 만큼 황홀한 여체.

그녀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간드러지게 속삭였다.

"몰라요! 당신은 나빠요. 어서 옷이나 집어 줘요."

낭천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가슴은 방망이질을 하는 것처럼 쿵쾅거렸다.

그러자 설소하는 키득키득 웃으며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려요. 절대 훔쳐보면 안 돼요. 아시겠죠?"

강호의 일이란 언제나 흥미진진하여 그 누구도 듣고 싶어하는 것이어서 식당은 거의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꽉 차 있었다.

창문 쪽의 탁상에는 남색의 장삼을 입은 노인이 앉아 눈을 감고 긴 담뱃대를 빨고 있었으며 노인의 옆에는 나이가 어린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유난히 반짝이는 한 쌍의 크고 검은 눈은 한 번 보면 기어코 남자들의 넋을 빼앗을 것 같았다.

낭천과 설소하가 함께 들어서는 순간. 식당에 모인 손님들의 눈은 모두 못이 박힌 듯 그들에게서 움직이지 않았다.

긴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내린 커다란 눈의 낭자도 두 사람을 중심으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설소하도 그 낭자를 바라보더니 살며시 웃으면서 낭천에게 말했다.

"저 여자의 눈 좀 봐요. 이제부턴 제가 당신을 지켜야 되겠어요. 당신이 저 여자에게 홀리면 큰일이니까요."

그들은 자리에 앉아 몇 가지 음식을 주문했다.

이때 남삼의 노인이 담뱃대를 상에다 놓고 입을 열었다.

"홍아야. 이제 시간이 다 되었느냐?"

긴 머리의 낭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되었어요."

노인은 그제야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비록 늙고 바싹 말랐지만 눈만은 젊은이 못지 않게 젊어 정광이 번뜩이는 것이었다. 그가 눈알을 한 번 굴리니 모든 사람들을 다 노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설소하는 또 가볍게 웃으며 속삭였다.

"보아하니 저 손 노선생은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밥이나 얻어먹는 그런 엉터리 영감 같지는 않아요."

그녀의 말소리는 매우 낮았다. 하지만 손 노선생은 마치 그 말을 들은 것처럼 그녀의 얼굴을 쓸어보더니 입가에 한 가닥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머리가 긴 낭자가 뜨거운 차를 한 잔 가지고 와서 상 위에다 놓았다.

노인은 잔의 뚜껑을 열고 잔 속의 차 잎사귀를 불어가며 몇 모금 마시고 나서 갑자기 음성을 높여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매화도는 온갖 나쁜 짓을 하지만 탐화랑은 불우한 이웃을 돕는다!"

이렇게 소리친 그는 주위를 한 번 훑어본 후 다시 힘차게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내가 말한 두 사람이 누군지 아시오?"

그러나 긴 머리의 낭자는 그가 정말로 남에게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가 말을 이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고 길게 땋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입을 열었다.

"그 두 사람이 누군가요? 저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손 노선생은 빙그레 웃으면서 핀잔을 주었다.

"그렇다면 너는 무식한 증거다. 그 두 사람은 정말 유명한 사람이지. 매화도는 수십 년 동안 두 번밖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강호인들이 저지른 사건을 모두 합친다 해도 그 한 사람 것보다 많지 않다."

머리가 긴 낭자는 혀를 차면서 다시 물었다.

"오! 무서운 사람이군요. 그럼 탐화랑은 또 누구인가요?"

손 노선생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사람은 대대로 벼슬에 올라 있는 관가의 공자님이시지. 선대 중에 일곱 분이 진사(進士)에 올랐으나 아깝게도 장원을 하신 분은 없었다. 그러던 중 노탐화는 슬하에 두 공자를 두었다. 그런데 이 두 공자는 머리가 비상하고 재주가 극히 뛰어났단다. 노인네는 모든 희망을 이 두 공자에게 걸었었지. 그들 두 공자 중에서 하나라도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하여 자신의 희망을 이루어 주었으면 하고 바랐었지."

긴 머리의 낭자는 흥미로운 듯이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탐화랑직도 괜찮은데 왜 꼭 장원이 되어야만 했을까요?"

손 노선생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큰 공자는 과거시험에서 낙방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들 부자는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온 정성과 희망을 작은 도령에게 걸었다. 하지만 이 작은 도령 역시 팔자에 타고 났는지 겨우 탐화랑에 합격했다. 노탐화는 너무도 실망한 나머지 그 이듬해를 넘기지 못하고 그만 세상을 떠나 버렸다. 뒤이어 큰아들 초탐화도 불치의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 작은 탐화랑은 상심한 나머지 관직을 버리고 집안의 재산을 모두 정리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웃을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정말 남을 돕는 그의 마음씨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 말한 손 노선생은 또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 무렵, 낭천은 혈관이 팽창되고 매우 흥분된 상태에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초류빈을 칭찬하는 소리를 듣자 자기를 칭찬하는 것보다 더 기뻤기 때문이었다.

손 노선생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 탐화랑은 재주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 어떤 기인에게서 일신에 경세의 무공을 전수받았었다....."

그러자 긴 머리의 낭자가 냉큼 말을 받았다.

"할아버지께서 오늘 말씀하실 얘기가 이 두 사람에 관해서인가요?"

손 노선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다."

긴 머리의 낭자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아이 좋아라. 무척 재미있을 거예요. 그런데...그런데 그 이름 있는 탐화랑이 어떻게 해서 또 악명 높은 매화도와 관련이 되었나요?"

손 노선생의 목소리가 엄숙하게 변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단다."

"어떤 이유죠?"

긴 머리 낭자의 물음에 손 노선생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그건 매화도가 탐화랑이고 탐화랑이 바로 매화도이기 때문이란다.

"으응?"

낭천은 갑자기 노기가 와락 치밀어올라 견딜 수 없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다.

이 순간 긴 머리의 낭자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초탐화께서 자신의 억만금이 되는 재산을 아끼지 않고 모두 이웃을 위해 도와주었다면 틀림없이 돈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일 거예요."

"그렇다면?"

노인의 반문에 긴 머리 낭자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그런 그가 어떻게 남의 물건을 훔치고 약탈하는 매화도가 될 수 있겠어요? 전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요."

손 노선생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일은 네가 믿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도 믿어지지 않아서 특별히 알아보고 오는 중이다."

"소식을 알아보는 데는 할아버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그 속의 자세한 사연을 할아버지는 다 알아내셨겠군요."

"물론이지. 알아내고 말고. 그러나 너무 복잡하고 불가사의하며 또 멋들어진 것이라....."

여기까지 말한 그는 별안간 말을 끊고 눈을 감은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긴 머리 낭자는 매우 초조한 듯이 종알거렸다.

"왜 말씀을 안하세요?"

손 노선생은 담뱃대를 들어 한 모금 길게 들이키더니 그 연기를 콧구멍으로 내뿜으며 여전히 꾸벅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긴 머리 낭자는 입을 삐죽거리며,

"가장 재미있는 곳에서 그만 끊어 버리시니 공연히 사람의 감정만 상하잖아요?"

하더니 갑자기 손뼉을 탁 치면서 호들갑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알았어요. 어르신네는 술을 잡숫고 싶은 모양이로군요."

사실 그녀만 알아차린 게 아니라 다른 여러 사람들도 모두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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