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07 소이비도 제1권 악동惡童
악동(惡童)
초류빈은 술을 마셨기 때문에 해독약의 약력(藥力)이 더욱 빠른 속도로 발동되어 여섯 시진도 채 못되어서 그는 체력을 완전히 회복했다.
이때 동쪽 하늘에 먼동이 텄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비록 밤새도록 고통스러운 시련을 겪었지만 초류빈의 체력이 회복되었다는 기쁨이 그의 피로를 말끔히 가시게 했다. 단지 과음을 한 탓인지 뒷골이 약간 아플 따름이었다.
매이선생도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또 날이 밝았군."
텁석부리 사나이는 그가 못마땅한 투로 중얼거리는 것을 듣자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날이 밝은데 대해 무슨 불만이라도 있단 말이오?"
매이선생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상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지만 밤새워 술을 마시는 날이면 날이 밝는 것이 가장 두렵소. 만약 날이 밝지 않으면 계속 아무런 불편없이 술을 마실 수 있지만 일단 날이 밝으면 나는 즉시 두통을 느껴 더 이상 술을 마시기가 곤란하오."
초류빈은 본디 눈을 내리감은 채 운공조식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말을 듣자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것은 귀하뿐만 아니라 술을 마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버릇일 것이오."
매이선생은 머리를 긁적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정녕 그렇다면 날이 완전히 밝기 전에 얼른 몇 잔을 더 마십시다."
초류빈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담았다.
"우리가 계속 술을 퍼마신다면 매대선생께서는 마음 아파 하실 것이오."
매이선생은 수긍이 간다는 듯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그래서 그는 일찌감치 깊은 잠에 빠졌소. 직접 자기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아깝다는 생각이 덜할 테니까요."
초류빈은 그의 말에 호응하는 뜻에서 눈을 뜨고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고는 콜록콜록 계속 기침을 했다.
매이선생은 그의 기침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홀연 물었다.
"당신은 언제부터 기침을 하기 시작했소?"
초류빈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아마 십 년은 되었을 것이오."
그 말에 매이선생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오랫동안 기침을 해 왔으니 필시 폐(肺)가 상했을 것이고 계속 폭음을 한다면 아마....."
초류빈은 자신을 비웃듯 히죽 웃었다.
"폐가 상했다고요? 그렇다면 나에게도 상할 수 있는 폐가 있단 말이오? 내 폐는 아마 벌써 썩어 없어졌을 것이오."
여기까지 말한 그는 갑자기 눈빛을 번쩍 빛내며 음성을 낮추어 말을 이어갔다.
"이곳에 또 손님이 오는 것 같소."
매이선생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이른 새벽부터 손님이 온 것을 보니 형님의 손님이 아니라 나를 찾아온 게 분명한 것 같소."
사실 그도 이제서야 밖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리는 것을 의식했다. 찾아온 것은 한 명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모두들 걸음이 가벼웠다.
밖에선 곧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말씀 좀 묻겠소. 이곳이 바로 매화초당이오?"
약간의 시간을 두었다가 앞쪽 대청에서 매대선생의 음성이 들렸다.
"날이 밝기도 전에 찾아오다니 도둑이요, 아니면 강도요?"
그러자 상대방은 곧 그의 말을 받았다.
"우리들은 강도가 아닐 뿐만 아니라 예물을 갖고 찾아온 방문객입니다."
매대선생은 그 즉시 냉소를 날렸다.
"날이 밝기도 전에 예물을 갖고 온 것을 보니 좋은 의미에서 찾아온 것은 아니겠군. 미안하지만 그냥 돌아가 주시오!"
상대방은 축객령을 받았는 데도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여유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정녕 그러시다면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왕마결(王摩結)의 그림을 도로 갖고 가야겠군요."
왕마결은 전대의 유명한 화가다.
"무엇이? 왕마결....."
상대방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매대선생의 놀란 외침이 들리며 문이 벌컥 열렸다.
매이선생은 앉은 그 자리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들은 형님의 성질을 낱낱이 파악하고 그가 사족을 못쓰는 물건을 가지고 온 것으로 미루어 심상치 않은 목적이 있는 게 분명하오. 대관절 어디서 온 사람인지 알아봐야겠소."
그는 나가지 않고 단지 문을 살짝 열어 문틈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나타난 방문객은 모두 세 명이었다.
한 사람은 삼십 세 가량으로서 키가 작고 체격이 단단하며 형형한 눈빛 그리고 손에는 긴 나무상자를 들고 있었다. 두 번째 사람은 안색이 대추처럼 붉으며 긴 수염을 허리 아래까지 내려뜨리고 일신에 자색 비단 장포를 입고 있었다. 눈동자를 굴릴 때마다 칼날같이 예리한 섬광이 번뜩이는 것으로 보아 명령을 내리는 습관이 몸에 밴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세 번째는 열 살 남짓한 어린애였다. 둥근 얼굴, 둥근 눈동자, 흰 토끼털로 가장자리를 장식한 붉은 바람막이 옷을 입고 있어 더욱 천진난만하게 보였다.
그 어린애를 제외하고 나머지 두 사람은 모두 양미간에 울적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체격이 단단한 사나이는 손에 나무 상자를 든 채 공손히 매대선생에게 몸을 숙였다.
"이 그림은 우리 주인께서 막대한 은자를 치러서 구입한 것으로 이미 명가(名家)의 감정을 받아 진품임이 증명되었습니다. 매대선생께서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십시오."
매대선생의 시선은 시종 나무상자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상대방 세 사람의 신분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실눈을 뜨고 뚫어지게 상자를 주시하면서 넌지시 입을 열었다.
"아무 이유없이 예물을 줄 리가 만무하오. 당신네들이 요구하는 게 대관절 무엇이오?"
사나이는 옆에 서 있는 노인에게 힐끗 시선을 던지더니 입가에 상투적인 미소를 떠올렸다.
"단지 매이선생이 계시는 곳을 가르침 받고 싶을 뿐입니다."
매대선생은 긴장되었던 표정을 금세 풀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일이라면 간단하오."
이어 빼앗다시피 사나이의 손에서 나무상자를 낚아채고 안쪽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둘째, 어서 나와 보게. 자네를 찾아온 사람이 있네."
매이선생은 탄식을 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제기랄, 왕마결의 그림이 생기니까 동생을 헌신짝 버리듯 하는군!"
그는 투덜대면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자색 장포를 입은 노인과 건장한 사나이는 매이선생을 보자 울적했던 신색이 이내 밝아졌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눈썹을 찡그리며 매이선생의 아래위를 열심히 살폈다.
"이 사람은 꾀죄죄하게 생겼는데 과연 병을 치료할 재간이 있을까요?"
그의 눈은 매이선생을 훑고 있지만 자색 장포를 입은 노인에게 의문을 제시한 것이다.
매이선생은 헤벌쭉하게 웃으며 아이의 말을 받았다.
"히히...큰 병은 치료할 수 없고 작은 병은 죽을 염려가 없으니 이럭저럭 심심치 않게 대접을 받아왔다네."
자색 장포를 입은 노인은 행여나 어린애가 다시 경솔한 말을 할까 봐 얼른 헛기침을 하며 심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귀하의 신통한 의술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소. 그래서 특별히 귀하를 모시러 왔으니 함께 가 주셨으면 감사하겠소. 대가는 요구하는 대로 얼마든지 먼저 드리겠소."
매이선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곁눈으로 노인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알고 보니 당신은 내 성격까지 낱낱이 알고 있구려. 한데, 내가 선금 받고 도망갈까 봐 두렵지는 않소?"
자색 장포를 입은 노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그 표정은 어림도 없는 말을 한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건장하게 생긴 사나이가 즉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나섰다.
"매이선생께서 저희들의 청을 받아 주신다면 응당히 드려야 할 대가 이외에도 또 후한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매이선생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사뭇 싸늘한 음성으로 반문했다.
"나는 선금을 받는 외에 또 삼불치(三不治)라는 버릇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강도를 치료해 주지 않고 또한 도둑도 치료해 주지 않소."
건장한 사나이는 가슴을 펴며 자신있게 말했다.
"나는 파영(巴英)이라 하여 비록 무명소졸이지만....."
여기까지 말한 사나이는 옆에 서 있는 노인을 가리키며 말을 계속했다.
"이분은 진효의(秦孝儀), 진어르신네로서 아마 매이선생도 이 어르신네의 협명(俠名)을 들었으리라 믿습니다."
매이선생은 자색 장포를 입은 노인을 유심히 살피며 반문했다.
"진효의라 하면...바로 철담진팔방(鐵膽震八方)이라 일컫는 진효의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바로 이 어르신네입니다."
매이선생은 마음을 결정했는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음...진효의의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다는 것은 알고 있소. 며칠 후에 다시 찾아와 보시오. 그때 나에게 여유가 있다면 함께 갈 수도 있을 것이오."
그의 퉁명스런 말이 끝나자마자 안색이 불그스름한 어린애는 펄쩍 뛰며 큰소리로 외쳤다.
"정말 건방진 사람이군요. 더 이상 그와 입씨름을 할 필요없이 당장 끌고 가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 되잖아요?"
파영은 얼른 그를 만류하며 매이선생을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만약 병이 심하지 않다면 며칠을 기다려도 무방하겠지만 워낙 병세가 심해 며칠은커녕 아마 몇 시진만 지체해도 구제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매이선생의 태도는 강경했다.
"그럼 당신네들 환자는 중요하고 이곳에 있는 환자는 죽어도 좋다는 뜻이오?"
파영은 눈이 휘둥그래지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곳에도 환자가 있단 말이오?"
"그렇소. 그를 완치시켜 주기 전에는 절대로 이곳을 떠날 수가 없소."
파영은 난처해 우선 진효의의 안색을 살피고 나서 더듬거렸다.
"저...하지만 우리 쪽의 환자는 진어르신네의 자제분이며 또한 당금 소림 장문인의 유일한 속가(俗家) 제자인데 어떻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매이선생도 펄쩍 뛰었다.
"진효의의 아들이면 어떻고 소림 화상의 제자라면 또 어떻소? 그의 목숨이 이곳에 있는 내 환자의 목숨보다 더 귀중하단 말이오?"
진효의의 얼굴은 노기로 가득차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어린애는 눈알을 사르르 굴리더니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만약 당신의 환자가 숨을 거둔다면 어떻게 하실 작정이죠?"
메이선생은 턱을 쓱 문지르며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그가 숨을 거둔다면 물론 더 이상 치료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는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어린애는 빙그레 웃으며
"과연 그럴까요?"
하는 한마디를 내뱉더니 다짜고짜 안쪽에 있는 방으로 훌쩍 뛰어 들어갔다. 실로 놀랍도록 빠른 신법이었다.
파영과 진효의는 서로 눈빛만 교환할 뿐 뜻밖에도 어린애의 당돌한 행동을 만류하지 않았다.
방안에 앉아 있던 텁석부리 사나이는 웬 어린애가 별안간 뛰어들어오자 깜짝 놀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린애는 그를 힐끗 쳐다보고 이내 한쪽에 앉아 있는 초류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이 바로 환자인가요?"
초류빈은 그들의 대화를 처음부터 듣고 있었기 때문에 덤덤하게 웃으며 도리어 반문을 했다.
"소형제, 자네는 내가 빨리 죽기를 원하고 있나?"
어린애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맞았어요. 당신이 죽어야지만 저 꾀죄죄한 늙은이가 우리와 함께 진형님의 병을 치료하러 갈 거예요."
그는 말을 하면서 어느 새 소매 속에서 세 개의 작은 독침을 격출해 초류빈의 얼굴과 목을 노렸다. 비단 겨냥하는 수법이 잽싸고 정확할 뿐 아니라 진력이 십분 곁들여 있었다.
열 살 가량의 나이 어린 녀석이 이렇게도 악랄한 수단을 전개하리라곤 아마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상대가 초류빈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독침을 맞고 숨을 거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초류빈은 살짝 손을 떨쳐 세 개의 독침을 전부 격추시켰다.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끌끌 찼다.
"어린것이 벌써부터 수단이 이렇게 악독하니 성장하면 더욱 지독해지겠구나."
어린애는 조금도 안색이 동요되지 않고 코웃음을 쳤다.
"나의 독침을 떨어뜨렸다고 해서 나에게 훈시를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군!"
그는 말을 끝내는 즉시 몸을 뒤로 곤두박질하더니 수중에 이미 두 자루의 단검을 꼬나쥐었다. 그리고는 다음 말을 내뱉기도 전에 이미 전광석화와도 같이 초류빈을 향해 연거푸 일곱 가지의 살초를 전개했다.
이 어린애가 전개하는 초식에는 무궁한 변화가 숨겨져 있어 설사 일반 강호의 고수라 할지라도 그 앞에서는 두 손을 번쩍 드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초류빈과 무슨 불공대천의 한이라도 있는 듯 필사적으로 살초를 펼치는 게 아닌가.
초류빈은 앉은 자리에서 몸을 살그머니 피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이 어린것이 성장하면 강호에 또 하나의 살성(殺星) 음무극(陰無極)이 생겨나겠군."
한쪽에 서 있던 텁석부리 사나이가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그의 말을 받았다.
"음무극은 비록 혈검(血劍)이라 일컬었었지만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것은....."
어린애는 공격 초식을 거두고 냉랭하게 외쳤다.
"음무극. 그가 뭐 대수로울 게 있다는 거냐? 나는 일곱 살 때 이미 살인을 했다. 그런데 감히 나와 그를 비교할 수 있단 말이냐?"
그의 얼굴에는 득의한 기색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초류빈이 앉은 자리에서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자신의 살초를 여유있게 피하는 것을 보자 내심 다소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추호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
초류빈은 우울한 눈빛으로 상대방을 응시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 음무극도 어렸을 때는 너같이 악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텁석부리 사나이의 심각한 음성이 뒤따랐다.
"저 녀석이 성장하면 필시 무림의 일대 화근이 될 것이니 차라리....."
초류빈은 또 상대방의 공격을 피하며 대꾸했다.
"나이가 어려 차마 죽일 수가 없구나!"
어린애는 연속적으로 백여 초식이나 전개해도 전혀 상대방을 상하게 하지 못하자 제대로 적수를 만났다는 것을 알았다.
계속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기엔 역시 나이가 어린 것 같았다. 그는 나이에 비해 괴이할 만큼 냉담했던 기세가 차츰 누그러지면서 안색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너희들도 내 부모님이 누군지 알고 있느냐? 나에게 머리카락만한 상처라도 입힌다면 나의 부모님은 너희들을 발기발기 찢어 죽일 것이다."
초류빈은 악을 바락바락 쓰는 어린애를 계속 응시하며 안색이 돌연 차갑게 굳어졌다.
"너는 다른 사람을 죽여도 좋고 다른 사람은 너를 상하게 할 수 없다는 말이구나?"
어린애는 아랫입술을 굳게 깨물며 당황해 하는 안색을 즉시 감추었다.
"너에게 그럴 만한 용기가 있다면 나를 죽여도 무방하다!"
초류빈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한마디 한마디 뚜렷하게 내뱉었다.
"너에게 출수를 하지 않는 것은 네 나이가 너무 어리기 때문이다. 만약 너의 부모님이 너를 엄하게 단속한다면 너는 다시 인재가 될 가능성도 있다. 내 생각이 달라지기 전에 냉큼 손을 거두지 못하겠느냐?"
어린애는 자신의 실력으로선 도저히 상대방의 털끝 하나 상하게 할 수 없음을 알고 검을 거두는 동시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당신의 무공은 정말 훌륭하군요. 그런데 당신은 누구이기에 내가 전혀 모르고 있죠?"
어린애의 말투는 좀전보다 훨씬 공손해져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초류빈은 마음을 놓지 않았다.
"나의 이름을 묻는 것을 보니 나중에라도 복수할 생각을 갖고 있는 모양이구나?"
어린애의 얼굴엔 티없는 천진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이 내 목숨을 살려 주었는데 내 어찌 복수할 생각을 할 수 있겠어요? 내가 당신에게 백일곱 검을 격출했는 데도 당신은 앉은 자리에서 몸을 움직이지 않았으니 그저 감탄할 뿐이에요."
초류빈의 눈동자엔 섬광이 번뜩였고 입가에 한 가닥 미소가 스쳐 갔다.
"너는 내가 지니고 있는 무공을 배우고 싶지 않느냐?"
어린애는 금세 눈을 크게 뜨며 반색을 했다.
"저를 제자로 삼아 주겠어요?"
초류빈은 시종 어린애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담담하게 대꾸했다.
"네가 만약 내 말을 잘 듣는다면 장차 희망이 있을 수도 있다."
어린애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무릎을 꿇으며 큰절을 올렸다.
"스승님, 제자의 삼배(三拜)를 받으세요."
마지막 요 자가 입 밖에 내뱉어지는 순간, 다시 세 줄기의 검은 광채가 그의 등에서 폭사되었다. 알고 보니 어린애의 등 뒤에는 수시로 암기를 발할 수 있는 기묘한 장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초류빈은 이번엔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다. 만약 그가 숱한 싸움을 겪어 반응이 신속하지 않았다면 여지없이 이 악독한 동자의 손에 당했을 것이다.
어린애는 마지막으로 시도한 살초가 수포로 돌아가자 다시 쌍장을 교차시켜 앞으로 덮쳐오며 욕설을 퍼부었다.
"네까짓 놈이 무슨 자격으로 나의 스승이 되겠다는 거냐?"
침묵을 지키고 있던 텁석부리 사나이는 얼굴에 서릿발을 깔며 싸늘하게 외쳤다.
"저 녀석은 천성이 흉악하니 절대로 살려두어선 안 됩니다."
초류빈은 창백한 낯으로 한숨을 내쉬며 손을 젖혀 일 장을 격출해냈다.
한편 진효의와 파영은 어린애가 안으로 들어가 살인을 행하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태연자약하게 그곳에 서 있었다.
그리고 매대선생은 한 폭의 그림에 정신이 팔려 다른 일에는 전혀 신경쓸 여지가 없었다.
매이선생은 눈알을 굴리며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네들이 데리고 온 어린애가 살인을 하려는 데도 만류하지 않소?"
파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두 손을 양쪽으로 벌렸다.
"솔직히 말해 그 애가 하고자 하는 일은 아무도 만류할 수가 없습니다."
매이선생은 냉소를 날렸다.
"그가 만약 다른 사람에 의해 살해된다 해도 잠자코 있을 작정이오?"
파영은 단지 빙긋이 웃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매이선생은 그의 표정을 읽어내리며 다시 말했다.
"당신네들이 이처럼 안심하고 있는 것을 보니 그 어린애의 무공에 대해 굉장한 자신을 갖고 있는 모양이구려?"
파영은 계속 침묵만 지킬 수 없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솔직하게 말해 그 어린애의 무공은 대단합니다. 강호에서 오랫동안 경험을 쌓아 온 고수들도 그의 손에 당하는 것을 수 차례 지켜보았으니까요. 더군다나 그에게는 훌륭한 아버님과 이해심이 많은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손해를 보아도 불평을 할 수 없는 입장이죠."
"그럼 그의 부모도 여지껏 그의 행동을 묵인해 왔단 말이오?"
"저렇게 똑똑한 아들에게 부모님인들 어떻게 간섭할 수 있겠소?"
매이선생은 하늘로 시선을 던지며 경멸하는 말투로 말했다.
"그렇군. 그의 부모는 그가 살인을 한 것을 보고서도 겉으로는 몇 마디 꾸중을 할지 모르겠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도 기뻐하겠구려. 하지만 그가 오늘 만난 상대는 일반 사람과는 다르니 염라대왕을 만나게 될 우려도 없지 않을 것이오."
파영은 옆에 서 있는 진효의에게 힐끗 시선을 던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지요....."
매이선생은 여전히 하늘을 주시하며 구렁이가 담을 넘듯 천천히 말을 내뱉는다.
"이곳에 있는 내 환자가 손을 뻗치기만 하면 저 어린것의 목숨은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오."
파영은 당치도 않다는 듯 실소를 금치 못했다.
"손을 뻗치기만 하면 그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니...도저히 믿어지지 않는군요. 그럼 매이선생의 환자는 초류빈과 같이 비도가 번뜩이는 순간 붉은 혈화(血花)를 만들 신통한 재주라도 지니고 있단 말입니까?"
매이선생의 시선은 하늘에서 파영의 얼굴로 옮겨지며 얄팍한 입술 사이에 담담한 미소가 떠올랐다.
"솔직히 말해 나의 환자는 바로 초류빈이오."
그 한 마디가 내뱉어지자 파영의 안색이 금세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변하며 여유만만했던 웃음도 응결되었다.
"귀하는 농담도....."
매이선생은 뒷짐을 지고 남의 일을 얘기하듯 태연하게 말했다.
"믿지 못하겠다면 직접 들어가 보는 게 어떻겠소?"
파영은 귀신을 만난 것처럼 잠시 넋을 잃고 있다가 돌연 안쪽으로 달려가며 찢어지는 소리로 외쳤다.
"초탐화, 초대협!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매이선생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스스로 협의지사라고 자부하는 사람도 알고 보니 별것이 아니로군. 자기 아들의 생명만 귀중한 줄 알았지 남의 목숨은 파리 목숨으로 여기다니 쯧쯧....."
이때 진효의의 심각한 얼굴에 한 가닥의 악독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일순간에 불과할 뿐 그는 될 수 있는 한 그 미소를 숨기며 장탄식을 했다.
"초류빈이 정말 그 어린애를 살해한다면 아마 평생을 두고 후회하게 될 걸....."
초류빈이 전개한 일장은 언뜻 보아 아무런 위력 또한 변화도 없어 보였다.
어린애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적을 맞이하는 자세는 이상하리만큼 침착했다. 그는 상대방의 일 장이 뻗쳐 오는 것을 뻔히 지켜보면서도 뜻밖에도 피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상대방이 전개한 일장이 허초(虛招)라는 것을 간파하고 진정 살수는 뒤에 있다는 것을 예측했다. 그래서 그는 단지 수중의 단검을 비스듬히 꼬나쥐고 수비 자세를 겸한 역시 허초로써 대응했다.
초류빈이 전개한 일 장이 도중에서 어떠한 변화가 있어도 그의 검세(劍勢)는 상대적으로 변화가 생길 것이 분명했다. 예를 들어 초류빈의 일장이 만약 졸지에 실초(實招)로 변한다면 그의 일검도 잇따라 실초로 변해 상대방의 손목을 관통할 것이다.
그가 취한 자세는 빈틈이 없는 것으로 위치, 시간, 힘이 모두 적절한 안배가 되어 있었다. 강호에서 날리고 있는 검수(劍手)들 중에 이런 초식을 펼칠 만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 어린애는 비단 명인(名人)의 가르침을 받았을 뿐 아니라 무공을 연마하는 데 있어 탁월한 자질을 타고난 게 분명했다.
알다시피 무공 초식은 스승에게서 전수받지만 적을 임할 때의 임기응변과 정확한 판단은 자신의 요령에 달려 있는 것이다. 험잡을 데 없는 무공을 터득한 어린애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오늘 그가 만난 적수는 다름아닌 초류빈이었다. 초류빈이 전개한 일 장은 명실공히 아무런 변화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단지 출수가 너무 빨라 상대방으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굴릴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하게 할 뿐이었다. 그러니 어린애가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던 모든 대책은 도저히 펼칠 기회조차 없게 되었다.
내심 질겁을 하면서도 초류빈의 손목을 향해 어린애가 검날을 떨쳤을 때 초류빈의 손은 이미 그의 가슴에 와 닿았다.
그러나 어린애는 일 장을 맞고서도 별로 통증을 느끼지 않았다. 다만 한 잔의 독한 술을 마신 듯 한 갈래의 열류(熱流)가 상대방의 장심(掌心)을 통해 전신으로 스며들어오는 것을 의식했다.
이때 밖에서 파영의 외침이 들려온 것이다.
"초대협! 자비를 베푸십시오!"
파영이 외침과 함께 방안으로 뛰어들어왔을 때 어린애는 마치 엉망으로 취했다가 깨어난 듯 게슴츠레 눈을 뜨고 방에 쓰러져 있었다.
파영은 대경실색하여 어린애에게 달려가며 놀란 외침을 질렀다.
"강도령, 이게 어떻게 된 것이오?"
어린애 자신도 상황이 심상치 않게 변해 있음을 깨닫고 눈시울이 붉어지며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외쳤다.
"난...나는 이미 독수(毒手)를 당했으니 속히 아버님께 알려 복수를....."
그는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방성통곡을 터뜨렸다.
파영은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그의 이마에선 구슬 같은 땀방울이 비오듯 쏟아졌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냉랭히 말했다.
"저 어린애의 무공은 비록 폐지되었지만 목숨은 아무런 지장이 없다. 우리 도련님께선 자비를 베풀어 그를 살려 주었지만 만약 나라면...흥!"
파영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듣지 못했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그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가 만약 복수를 하고 싶으면 당장 출수를 하라!"
파영은 역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더니 홀연 초류빈을 향해 무릎을 꿇는 게 아닌가.
초류빈은 그가 별안간 무릎을 꿇는 바람에 도리어 멍해지며 눈썹을 가볍게 찌푸렸다.
"너는 저 어린애와 어떤 관계인가?"
파영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소인은 파영이라 합니다. 초대협은 소인을 모르겠지만 소인은 초대협을 알고 있습니다."
초류빈은 담담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나를 알고 있다니 잘되었다. 그의 부모가 복수할 생각이 있다면 언제든지 나를 찾아오라고 전하라.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니 저 어린애를 데리고 돌아가거라. 장차 비록 무공은 연마할 수 없지만 행동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다."
어린애는 주먹으로 땅을 치며 통곡을 했다.
"악랄한 놈, 나를 폐인으로 만들다니...차라리 나를 죽여라!"
텁석부리 사나이는 분노한 얼굴로 대뜸 호통을 쳤다.
"닥쳐라! 발칙한 녀석, 너는 도리어 우리 도련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해야 옳을 것이다. 너의 무공이 폐지 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오래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예전과 같이 계속 악랄한 수단을 전개한다면 조만간에 너는 비명횡사를 당할 것이다!"
그는 어린아이의 언행이 몹시 비위에 거슬리는 듯 두 눈에 살기마저 떠올랐다.
이때 한 사람의 냉랭한 음성이 노기등등한 그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정녕 그렇다면 살수무정(殺手無情)한 초탐화는 어째서 오늘날까지 횡사를 당하지 않았지?"
텁석부리 사나이는 홱 몸을 돌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는 누구냐?"
이때 자색 장포를 입은 진효의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초탐화, 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있소?"
초류빈은 예리한 눈빛으로 상대방을 훑어보며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알고 보니 철담진팔방 진대협이었구려. 어쩐지 저 어린것이 겁도 없이 함부로 살인을 행한다 했더니 진대협이 그의 뒤를 도와주고 있으니 그가 누군들 죽이지 못하겠소?"
진효의는 앞으로 걸어오면서 냉소를 날렸다.
"내가 살해한 사람은 아마 초형의 절반도 되지 못할 것이오."
초류빈은 아무 표정없이 그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야릇한 눈빛을 발했다.
"진대협, 겸손할 필요는 없소. 그리고 또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만약 내가 사람을 죽였다면 그것은 악독하고 냉혹한 것으로 해석되겠지만 귀하가 살인을 한다면 그것은 즉 하늘을 대신해 도(道)를 행한 것으로 평가되지 않겠소?"
여기까지 말하고는 빙그레 웃으며 한쪽에 주저앉아 있는 어린애를 가리켰다.
"오늘 일만 하더라도 만일 저 어린것이 나를 죽였다면 필시 의원을 모셔 가기 위해 정당한 살인을 했다는 소문이 나돌 것이오. 그리고 그가 진대협과 함께 강호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암적인 존재를 제거했다는 풍문이 퍼질 게 분명하지 않소?"
진효의는 비록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모조리 겪은 능구렁이지만 이 때는 얼굴이 다소 붉어지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초류빈이 은근히 자신을 비꼬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린애는 허탈 상태에 빠져 있다가 분해 죽겠다는 듯 다시 방성통곡을 했다.
"진백부님, 왜 저를 위해 복수를 하지 않습니까?"
진효의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너를 손상시켰다면 자연히 복수해 줄 사람이 나서겠지만 초탐화가 널 상하게 한 이상 너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어린애는 울음을 뚝 그치고 반문을 했다.
"왜...그것은 무엇 때문이죠?"
진효의는 대답을 하기 앞서 우선 초류빈을 힐끗 쳐다보았다.
"너는 너를 상하게 한 장본인이 누구인지 아느냐?"
어린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나는 그가 단지 잔악무도한 흉적(兇賊)이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에요."
진효의의 눈동자에 한 가닥 악독스러운 미소가 스쳐갔다.
"그는 바로 이름도 거룩한 천하제일도(天下第一刀) 초류빈이다. 다시 말해 너의 아버지와는 생사지교(生死之交)를 맺은 사람이지."
그의 말이 입 밖에 나오자 어린애는 물론 멍해졌지만 초류빈은 깜작 놀라 다그쳐 물었다.
"그는 누구의 아들이오?"
진효의가 입을 열기도 전에 파영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는 바로 호유성, 호어르신네의 외아들 호천강입니다."
그 순간, 초류빈은 흡사 청천벽력을 맞은 듯 정신이 아찔해 온몸에 심한 경련이 일었다. 그는 나무토막처럼 그 자리에 앉은 채 칼날같이 예리하던 눈빛도 잿빛으로 변하여 관자놀이의 근육은 쉴새없이 실룩거렸다. 뿐만 아니라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양볼을 타고 입가로 흘러내렸다.
이러한 그의 모습을 보면 그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가를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텁석부리 사나이 역시 안색이 크게 변하여 온몸이 삽시간에 흥건히 땀에 젖었다. 텁석부리 사나이, 그는 누구보다도 호유성과 설벽운 부부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초류빈은 그들의 외아들을 상하게 했으니 그 고통은 상상만 해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파영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진어르신네의 큰도령, 옥면신권(玉面神拳) 진중(秦重)이 매화도(梅花盜)를 생포하려다가 불행히도 부상을 입었습니다. 비록 소림의 성약 소환단(小還丹)으로써 잠시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지만 역시 생명이 위독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는 누가 듣든 말든 계속 중얼거리듯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매이선생을 찾아왔는데 뜻밖에도 강도령이 변을 당할 줄이야....."
매이선생도 이때 초류빈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발견하고 우선 호천강의 상세부터 살펴보더니 자신있게 말했다.
"이 어린애는 비단 생명에 지장이 없을 뿐더러 일반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내가 보장하겠다."
일순 파영의 눈빛이 환희로 빛났다.
"무공도 회복될 수 있겠습니까?"
매이선생의 신색은 금세 차갑게 변했다.
"구태여 무공을 회복할 필요가 어디 있겠소? 그가 계속 살인을 해야지만 모두들 속이 시원하겠소?"
그의 호통을 치는 듯한 말투로 인해 파영은 멍해지더니 곧 천천히 좌우로 고개를 내둘렀다.
"매이선생, 그것은 잘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호어르신네의 혈육이라곤 오직 하나뿐입니다. 더욱이 강도령은 뛰어난 자질을 타고나 호어르신네 내외분께선 그에 대한 기대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강도령이 다시는 무공을 연마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습니까?"
매이선생의 표정과 음성은 여전히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원망하기 전에 자식의 버릇을 잘못 가르친 자신을 탓해야 될 것이오."
초류빈은 그들의 대화를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지금 이 시각에 그의 사고는 추억 속을 헤매고 있었다. 생각해선 안 될 일이 일순간에 그의 뇌리에 떠오른 것이다.
그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날은 정월(正月) 초여드렛날이었다.
그에게 한 가지 중요한 일이 생겨 설을 쇠자마자 관외(關外)로 달려가야만 했다. 그날도 역시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설벽운은 그를 위해 특별히 푸짐한 요리를 만들어 뒤뜰에서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며 설경(雪景)을 감상했다.
설벽운은 어렸을 때부터 그의 집에서 자라났다. 그녀의 부친은 바로 초류빈의 외숙이었다.
두 어르신네가 생존해 계실 때 벌써 이미 초류빈과 설벽운의 혼사를 결정했다. 당시에는 가까운 친척끼리 혼례를 올리는 것이 당연지사로 되어 있었다.
어릴 적에 혼사를 정한 남녀는 성장해감에 따라 쑥스러워하고 서로 상대방을 피하려는 게 상례지만 그들 두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두 사람은 비단 정인(情人)일 뿐 아니라 가장 의사가 상통되는 지기(知己)이기도 했다.
비록 십 년이 지난 지금이지만 초류빈은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은 매화가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그녀의 취기가 약간 오른 얼굴에 띠어진 웃음은 매화보다도 더 아름답고 행복에 가득차 있었다.
그런데 불행한 일이 곧 그들에게 닥쳐왔다.
초류빈이 관외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그와 원한이 있는 자가 당시 흉명이 가장 드높은 관외삼흉(關外三兇)과 결탁해 한단 부근 관도에서 느닷없이 기습을 가해 왔다. 초류빈은 비록 수중의 비도로 연거푸 열아홉 명을 죽였지만 역시 중상을 입고 곧 대흉(大兇) 복패(卜覇)의 독창(毒槍)에 목숨을 잃을 위급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바로 그때 유성처럼 나타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호유성이었다. 호유성은 나타나자마자 한 자루의 은장도로써 복패를 죽여 그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그리고 정성껏 초류빈의 상처를 치료해 주면서 직접 집까지 호송해 주었다.
그 일로 인해 호유성은 비단 그의 은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어떻게 된 영문인지 호유성은 갑자기 병상에 앓아 눕게 되었다. 무쇠같이 단단하던 호유성은 한 번 앓게 되자 보름도 채 못되어서 안색이 누렇게 변해 대나무처럼 깡말랐다.
초류빈은 거듭 그에게 물어 비로소 그가 설벽운 때문에 병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것은 약으로 치료할 수 없는 상사병(相思病)이었던 것이다.
호유성은 물론 초류빈이 이미 설벽운과 혼약이 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초류빈에게 사촌동생인 설벽운과 짝을 지어 달라고 정식으로 요구했다.
아니 그것은 요구라 하기보다는 간곡한 애원이었다. 초류빈이 어찌 그런 엄청난 부탁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자기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 상사병으로 인해 죽어가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그는 설벽운에게 그 일을 언급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설벽운은 역시 그의 청을 수락하지 않을 것이다. 초류빈은 고통과 모순의 갈림길에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술로써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술에 젖어 닷새를 지내자 초류빈은 드디어 한 가지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의 가슴을 도려내는 뼈아픈 결정이었다. 설벽운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 곁을 떠나게 할 결심을 한 것이다.
그는 곧 자신의 결심을 행동으로 옮겼다. 설벽운으로 하여금 호유성의 병을 간호하게 하고 그 자신은 주색잡기에 모든 시간을 허비했다. 심지어 한 달 내내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 일쑤였다.
그는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 설벽운과 호유성이 친근해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이다. 설벽운이 눈물을 흘리며 수차 그에게 옛날로 돌아가 달라고 애원했으나 초류빈은 도리어 욕설을 퍼부으며 훌쩍 밖으로 나가곤 했다.
그리고는 설상가상격으로 경성(京城)의 명기(名妓)로 알려진 소홍(小紅)과 소취(小翠)를 집에까지 데려와 공공연하게 잡스러운 행동을 감행했다. 그러는 중에 세월은 유수처럼 흘렀다.
이 년 후 설벽운의 마음은 결국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그녀는 초류빈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실망을 느껴 끝내 자기에게 깊은 정을 표해 온 호유성을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초류빈의 계획은 드디어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형용할 수 없는 고통과 눈물이 밑거름이 되어야만 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예전과 같이 겨울이 되면 설벽운과 함께 매화를 감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집과 모든 재산을 설벽운에게 결혼 선물로 주고 단신 홀몸으로 훌쩍 어디론가 떠나갔다. 자기가 죽어 땅에 묻힐 때까지 영원히 그녀를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한데, 그는 지금 그들의 외아들을 손상시키지 않았는가.
초류빈은 앞에 놓여져 있는 술잔을 눈물과 함께 삼키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호유성은 어디에 있소? 당신네들과 함께 그를 만나러 가겠소."
이어 파영이 앞장선 가운데 일행은 흥운장(興雲莊)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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