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14 소이비도 제1권 악惡과 원怨





악(惡)과 원(怨)



지난 며칠 동안 내리 퍼붓던 눈으로 지상엔 햇빛 한 줄기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우연히 거세게 퍼붓던 눈이 멈추고 태양이 찬란하게 빛났다.

온 대지에 햇빛이 비치고 있었지만 초류빈이 있는 방에는 한 가닥도 스며들지 않았다. 하루 종일 어둠만이 존재하는, 낮과 밤을 통 구분할 수 없는 굴 속에 그는 갇혀 있었다. 그러나 초류빈은 실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초류빈은 이 세상의 많은 곳이 평생 동안 햇빛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미 이 실망이라는 것에 대해 오래 전부터 습관이 되어 버렸던 것이었다. 또한 그는 전칠과 조정의가 자기를 어떻게 대해 왔는지에 대해서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무튼 그들이 어떻게 자기를 대하든, 그리고 어떻게 생각을 하든 생각조차도 하기 싫었다.

지금 전칠 그들은 초류빈을 음침한 방 속에다 감금시켜 놓고 소림사의 중들을 데리고 진효의 부자를 만나러 가면서 호천강을 시켜 그를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초류빈은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호천강을 나무라지 않았다. 호천강에게는 그 나름대로 고초가 있었고 또 초류빈에게는 그를 어떻게 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단지 지금 초류빈이 의식하고 있는 것이라면 낭천이 영원히 자기를 구하러 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낭천의 검법이 비록 빠르기는 해도 무공에는 그나름대로의 허다한 약점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낭천은 대전의 경험이 적어 만약 전칠이나 심미 대사와 같은 강적과 마주친다면 일검에 득수는커녕 어쩌면 영원히 승리를 할 수 없을는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약 이삼 년만 지나면 낭천은 자신의 무공에 대해 약점을 전부 터득할 것이니까 그때는 아마 온 천하에 그를 이길 수 있는 적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초류빈은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필코 이삼 년을 더 살아야 했다.

땅바닥이 어찌나 차가웠던지 싸늘한 한기가 뼛속 깊이 파고들어 온몸에 경련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차가운 한기에 의해 초류빈은 다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목구멍이 타오르도록, 그리고 벌겋게 붓도록 나오는 기침은 초류빈으로 하여금 더할 수 없이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이런 고통쯤은 참을 수 있었으나 온몸을 덥힐 수 있는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싶어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욕망이 되어 버렸다.

만약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이런 운명적인 고통을 참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초류빈은 웃었다. 그는 세상 일이 변하는 것에 이상한 재미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원래 그의 소유였고 모든 것이 그의 지휘 아래 행사되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타인에 의해 도적으로 몰려 개처럼 이 어두운 방구석에 갇히게 되었으니 어찌 우스운 일이 아니라는 말인가. 이런 결과는 그 누가 또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한가닥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렇다면 조정의가 일각도 기다리지 못하고 곧 자신을 죽이려고 한단 말인가. 그러나 다음 순간 초류빈은 나타난 사람이 조정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초류빈이 막 코끝을 자극시키는 한 줄기의 술냄새를 맡은 것과 동시에 술을 든 한 손이 문틈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들어온 손은 매우 작았고 붉은 옷소매가 흐릿하게 눈에 들어왔다.

초류빈은 침을 꿀꺽 삼키며 나직하게 소리쳤다.

"천강, 바로 너였구나!"

그러자 그 작은 손은 다시 뒤로 물러나더니 두 손으로 술잔을 받쳐든 채 걸어들어와 장난스럽게 웃었다.

"난 지금 아저씨가 틀림없이 술을 마시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가져왔어요. 그렇지요?"

"내가 술을 마시고 싶다는 것을 알고 술을 가져온 것이라고?"

호천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초류빈에게 내밀었다.

초류빈이 막 입을 벌리려고 할 때 호천강은 갑자기 술잔을 거둬들이고는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만약 이 술이 무엇인지 알아맞춘다면 드리겠습니다."

초류빈은 지그시 눈을 감고는 코를 벌름거리며 술의 냄새를 맡아 보았다.

"이것은 바로 진년(陳年)의 죽엽청이 아니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술이지. 만약 내가 이 술냄새를 진작 맡아 보지 못했다면 이미 죽었어야 했다."

호천강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이 아저씨더러 술과 여자에 대해선 아주 귀신이라고 하더니 정말이군요. 그러나 이 술을 마시고 싶다면 내게 한마디 대답을 해주어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흐르던 호천강의 미소가 음침하게 변했다.

"당신은 나의 아버님과 대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호천강은 여기서 잠시 말을 끊었다가 몹시 두려운 듯 내뱉었다.

"제 어머니가 혹시 당신을 좋아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갑자기 초류빈은 안색이 싹 변해 눈살을 찌푸렸다.

"오냐, 이것도 마땅히 네가 물어봐야 할 질문이냐?"

호천강은 분개한 어투로 급급히 소리쳤다.

"내가 어째서 물어보지 못합니까? 자기 어머니에 대한 일은 아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초류빈은 매우 화가 난 어조로 소리쳤다.

"너는 너의 어머니가 온 심혈을 기울여 널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다는 말이냐? 그런데 어째서 너는 그런 어머니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냐?"

"흥, 나를 속일 생각은 말라구요.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하든 날 속이지는 못할 겁니다!"

호천강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이를 악물었다.

"어머님께선 당신의 얘기만 꺼내면 방문을 닫고 혼자서 웁니다. 전날 제가 죽을 뻔했던 적에도 그처럼 상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호천강의 울부짖음이 계속되는 동안 초류빈의 마음은 진흙 덩어리로 변해 남에게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것 같았다.

초류빈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떼었다.

"천강, 내 너에게 한 가지 일러둘 것이 있다. 너는 이 세상 천지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의심해도 되지만 네 어머니만은 절대 의심해선 안 된다. 너의 어머니는 남에게 추호도 의심받을 만한 짓을 한 적이 없다."

초류빈은 눈길을 내리깔며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니 어서 이 술을 가지고 나가거라."

호천강은 벌떡 일어서며 큰소리로 외쳤다.

"이 술은 당신에게 주려고 가지고 온 것인데 도로 가지고 가라고요?"

그는 갑자기 손을 내뻗어 그 술을 몽땅 초류빈의 얼굴에다 쏟아 버렸다.

그러나 초류빈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너는 아직도 어린애라서 이해를 못한다. 그러니 내 결코 널 책망하지 않겠다."

"내가 만약 어린애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날 어떻게 할 작정이었습니까?"

호천강은 소리치며 갑자기 허리춤에서 칼을 뽑더니 그것을 초류빈의 얼굴에다 대고 마구 휘둘렀다.

"잘 보셨습니까? 이것은 바로 당신의 비도입니다. 어머님께서 제게 말씀하시길 내가 당신의 칼을 지니고 있으면 바로 호신부나 마찬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은 날 보호할 수가 없습니다."

초류빈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길게 한숨만 내쉬었다.

"맞았다. 칼이란 본래부터가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이지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순간 호천강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당신이 날 폐인으로 만들었으니 지금 나도 당신을 나와 똑같은 죄를 받게 하겠어요. 당신을....."

순간, 문 밖에서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천강아, 너 그 안에서 뭘 하고 있는 거냐?"

이 음성은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몹시 부드러웠다. 그러나 초류빈과 호천강은 이 음성을 듣는 순간 그만 안색이 크게 변했다.

호천강은 급급히 칼을 거두고 얼른 어린애와 같은 순진한 미소를 떠올렸다.

"어머님, 저 이 안에 있어요. 저는 초아저씨가 술을 마시고 싶어하시길래 가져왔어요. 그런데 어머니께서 부르시는 바람에 술을 몽땅 초아저씨께 쏟고 말았어요."

호천강이 이 말을 끝냈을 때 설벽운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설벽운의 아름다운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그 눈 속에는 비통과 분노가 가득 서려 있었다. 그러나 호천강이 달려간 순간 그녀의 눈동자는 이내 부드럽게 변했다.

"초아저씨는 지금 술을 마시고 싶지 않으시단다. 그리고 너도 잠을 잘 시간이니 어서 가자."

"어머님, 초아저씬 분명히 남에게 누명을 쓴 것일 텐데 어째서 우린 그를 구하지 않는 겁니까?"

설벽운이 가볍게 꾸짖었다

"어린아이들은 함부로 참견하는 것이 아니다. 자, 어서 가서 자거라."

호천강은 몸을 돌려 초류빈을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아저씨,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내일 또 술을 가져올게요."

초류빈은 너무나 상반된 호천강의 이 웃음에 절로 손발에 식은땀을 흘렸다.

설벽운이 유유히 탄식을 내뿜으며 입을 떼었다.

"저는 본래 이 아이가 당신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지금 이 애의 태도를 보니...이제야 저는 마음을 놓겠어요. 이 애는 비록 엉뚱한 짓을 곧잘 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지만 나쁜 아이는 아니에요."

초류빈은 단지 쓰디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설벽운의 이 모성애가 가득찬 음성을 듣고 또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또 초류빈은 이미 오래 전부터 사랑이라는 것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그 중에서도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더욱 그렇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설벽운은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천천히 말을 토해내었다.

"당신은 원래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인데 지금은 어째서 그런가요?"

초류빈은 그저 목구멍이 꽉 막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설벽운이 다시 매몰찬 음성으로 입을 떼었다.

"당신은 내게 절대로 소하의 집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셨죠? 그런데 그들은 바로 당신을 소하의 집에서 찾아내었어요."

초류빈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웃을 수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웃고 있었다.

초류빈은 자기 발끝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떼었다.

"이 집은 십여 년 전에 건립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소?"

설벽운은 엉뚱한 그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 집은 이미 오래되어 지붕도 창문도 모두 썩었소. 과연...십여 년이라는 세월은 짧지 않은 것이오. 십여 년 동안 이 집은 모두 폐허가 되었는데 하물며 사람이란 또 어떻게 되었겠소?"

설벽운은 의식적으로 한걸음 물러났다. 초류빈이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 때는 바로 자기 자신을 상하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초류빈은 아직도 비록 웃고 있었지만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초류빈은 눈물이 왈칵 치밀었다. 흐르는 눈물을 참기 위해 그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어느 틈엔가 설벽운이 되돌아 와서 자기를 주시하고 있었다.

초류빈은 더듬거리며 입을 떼었다.

"당신...당신은 어째서 가지 않았소?"

설벽운은 숨을 크게 들이쉰 후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자세히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당신은 도대체 진짜 매화도예요, 아니에요?"

초류빈은 갑자기 입을 벌려 크게 웃어댔다.

"으하하하...내가 매화도인가 아닌가 하고...당신은 지금 내게 매화도냐고 물었소?"

설벽운은 약간 떨리는 어조로 말했다.

"난 비록 당신을 매화도로 알고 있지는 않지만 당신이 직접 말하는 것을 듣고 싶어서예요."

"당신이 기왕 믿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묻는 거요? 난 이미 거짓말에 도통한 사람이라 다시 물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이오? 내가 당신을 한 번 속일 수 있다면 백 번 천 번이라도 속일 수 있는 거요."

설벽운의 얼굴이 점차 하얗게 질려가더니 나중엔 몸까지도 부르르 떨었다. 한참 동안 경련을 일으키며 초류빈을 쏘아보고 있던 설벽운은 이윽고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을 놓아주겠어요. 하지만 당신은 이번에 떠나면 영원히 돌아오지 마세요. 알겠어요?"

초류빈은 안색이 변해 급급히 소리쳤다.

"안 되오! 당신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이오? 내가 당신더러 나를 구하러 오라고 한 것인지 아시오? 당신은 도대체 나라는 인간을 어떻게 보았소?"

그러나 설벽운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의 몸을 돌려 혈도를 풀어주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싸늘한 외침이 두 사람의 뒤에서 터져나왔다.

"벽운, 지금 뭘 하려는 거요?"

이것은 바로 그녀의 남편 호유성의 목소리였다.

설벽운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한마디 또렷하게 내뱉었다.

"제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당신은 모르신다는 말씀인가요?"

"그...그러나....."

호유성이 말끝을 흐리자 설벽운은 싸늘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뭐죠? 이것은 바로 당신이 했어야 하는 일이에요. 당신은 그가 우리에게 베풀어 준 은혜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당신은 옛날의 그 일을 잊었다는 말이에요? 그가 죽는 것을 보고만 있겠다는 거예요?"

설벽운은 부르르 몸을 떨더니 더욱 싸늘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당신이 기왕 하지 못할 일이라면 내가 하겠어요. 그래도 당신은 날 막을 작정이세요?"

호유성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자기의 가슴을 마구 두드리며 소리쳤다.

"그렇소! 난 겁이 나서 못하겠소. 난 담력이 없소. 난 사내대장부가 아니오. 그러나 당신은 우리가 이 일을 하고 난 후를 생각해 보았소? 만약 그가 달아나면 그들이 우리를 가만둘 것 같소?"

"아...아....."

설벽운은 갑자기 몸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더니 눈앞의 호유성이 마치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었던 사람처럼 눈삐ㅊ이 새로워지는 것이었다.

"당신은 변했군요...옛날의 당신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렇소! 난 어쩌면 변했을지도 모르오. 왜냐하면 난 지금 처자가 있는 몸이오.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먼저 그들이 나 때문에....."

호유성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설벽운이 갑자기 목을 놓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는 자식보다 그 어떤 것이라도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없다.

이때 호유성이 갑자기 초류빈의 앞에 무릎을 꿇더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현제, 정말 미안하네. 다만 날 용서해 주길 바랄 뿐일세."

초류빈은 오히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형님을 용서해 달라고요? 난 지금 형님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형님에게 말을 했지만 이 일은 형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입니다. 내가 만약 이곳을 나가고 싶어한다면 내게도 방법이 있으므로 구태여 당신들이 날 구해 주지 않아도 됩니다."

초류빈의 시선은 아직도 자기의 발끝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그들을 바라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흐르는 눈물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제, 자네의 고초는 내 이미 알고 있네. 그러나 나는 한 가지 보증할 수 있는 게 있네. 그들은 절대 자네를 죽이지 않을 걸세. 자네가 심호 대사만 만날 수 있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걸세."

초류빈은 호유성의 말에 눈살을 짙게 찌푸렸다.

"심호 대사? 그렇다면 그들이 날 소림사로 보낸다는 말입니까?"

호유성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진중은 비록 심호 대사의 제자이기는 하지만 심호 대사는 누명을 쓴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는 않을 것일세. 그리고 백요생 선배님도 지금 소림사에 계시니 그들은 분명히 자네를 위해 공도를 지켜주실 걸세."

초류빈은 이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전칠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전칠은 한참 동안이나 그를 바라보며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전칠이 나타나자 설벽운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후에 천천히 걸어나갔다.

밖에서 밤바람이 싸늘하게 불어오고 있었다.

설벽운은 몇 걸음 걸어나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엄중한 음성으로 입을 떼었다.

"강아, 이리 나오너라."

호천강은 때마침 집 뒤에 숨어 있다가 그 말을 듣자 얼른 달려나오며 웃었다.

"어머님, 소자는 잠이 오지 않아서...설벽운은 갑자기 싸늘한 음성으로 다그쳤다.

"그래서 넌 그들을 전부 이곳으로 데리고 왔구나, 그렇지?"

호천강은 활짝 웃으며 달려나오다가 갑자기 어머니 얼굴이 음침하게 변한 것을 보고는 금방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설벽운은 조용히 호천강을 바라보았다. 눈빛의 이 아이는 그녀의 고통과 함께 태어난 아이이자 그녀의 생명이며 혈육인 것이다. 어느 새 설벽운의 창백한 얼굴에 두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설벽운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째서 원한이란 은혜보다 잊기가 어려운 것일까....."

사실 남이 베풀어 준 은혜를 잊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지만 원한을 잊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괴로움은 어디까지나 잊을 수 없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철전갑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사당 안을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사당 한가운데는 마지막 불길인 듯 희미한 불씨가 재와 함께 사라져가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장작개비를 넣는 사람이 없었다.

낭천 역시 그림처럼 조용히 앉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철전갑이 한스러운 듯 말을 토해내었다.

"내 이미 생각을 해 보았지만 당신이 벌써 그 매화도를 죽였다 하더라도 그들은 절대 승인하지 않을 것이오. 몇 날 며칠을 굶은 이리 떼가 고깃덩어리를 보고 어떻게 남에게 양보를 해 줄 수 있다는 말이오?"

낭천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아무리 권고를 해도 나는 기필코 가고야 말 것이오."

"다행히 당신이 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던들 그 사람들은 매화도의 진면목을 영원히 파악하지 못했을 거요."

말을 끝내고 철전갑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낭천을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그런데 당신은 정말로 우리집 도련님을 보지 못했소?"

"그렇소."

철전갑은 커져가는 불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있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다는 말일까....."

"그는 아마도 영원히 남들이 자기를 걱정해 주길 원치 않을 것이오."

철전갑은 그 말에 수긍이 가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소. 그 사람들은 비록 그를 눈에 가시로 여기고 있지만 그의 몸에 있는 털끝 하나라도 손을 대지 못할 거요."

철전갑은 다시 두어 바퀴 배회를 하고 사당 문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날이 밝았으니 이제 난 떠나야겠소."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철전갑은 돌아서려다가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만약 우리 도련님을 보시면 이 철전갑이 은혜와 원수를 밝혀내는 즉시 꼭 다시 돌아와 그를 찾겠다고 전해주시오."

"알겠소."

철전갑은 낭천의 야윈 얼굴을 세심히 바라보며 포권을 올렸다.

"그렇다면 난 이만 떠나겠소."

철전갑의 두 눈에는 비록 떠나길 꺼려하는 깊은 정이 서려 있었으나 막상 몸을 돌렸을 때에는 두번 다시 되돌아 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낭천 역시 움직이지 않고 고개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맑은 눈에는 뿌연 안개가 서려 있었다. 우정을 원한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

낭천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는 마치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았으나 두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물은 끝이 없이 흘러내려 얼핏 보아서는 화강석에 얼어붙은 한가닥 고드름 같았다.

낭천이 철전갑에게 초류빈에 대한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지 않았던 것은 철전갑이 초류빈 때문에 목숨을 내던지는 것이 보기 싫어서였고 더욱 중요한 것은 낭천 자신이 초류빈을 위해 목숨을 내던지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친구를 위한 일인데 어찌 이 한 목숨을 귀하게 여길 수 있겠는가.

사당 안에는 한기가 점점 몰려들고 있었다. 불도 이미 꺼진 지 오래였고 석반에도 하얗게 찬서리가 끼었다. 그러나 낭천은 굳은 듯 그 석반에 앉아 있었다. 그는 이 추위를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는 얇디얇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마음속에서는 뜨거운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멸의 불!

바로 어떤 사람들의 마음에 이런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까닭에 세상은 아직도 암흑 속에 빠지지 않는 것이었고 뜨거운 피가 들끓는 사내대장부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새벽의 햇빛이 한 개의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낭천은 눈을 뜨지 않고 대신 소리내어 물었다.

"당신이었구려. 무슨 소식이라도 있소?"

그는 야수들보다 더욱 민감한 촉각을 갖고 있었다.

문 밖에 나타난 사람은 과연 그가 기다리고 있던 설소하였다.

설소하의 얼굴은 어떤 흥분으로 인해 붉게 물들여져 있었고 거칠게 숨을 내뿜고 있었다.

"좋은 소식이에요."

"좋은 소식이라고?"

낭천은 이 세상에 아직도 좋은 소식이 있다는 소리를 거의 믿을 수 없었다.

설소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는 비록 잠시 동안은 탈출할 수 없어도 최소한의 위험은 멀어졌어요."

"음....."

낭천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뿜자 설소하는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전칠, 그들은 이미 심미 대사의 뜻에 따라 그를 소림사로 보내기로 했답니다. 소림의 장문인인 심호 대사는 사람됨이 몹시 강직하답니다. 소문을 듣자니 백요생도 그곳에 있다는군요. 그러나 이 두 대사가 그의 누명을 벗겨주지 못한다면 그는 결국 끝장이에요."

낭천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급급히 다그쳤다.

"백요생? 백요생이 누구요?"

"그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지혜로운 자래요. 모르는 것이 없고 또 깨닫지 못한 것이 없대요. 그리고 소문을 듣자니 오직 그 한 사람만이 매화도의 진가를 구별해 낼 수 있다는군요."

낭천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눈을 뜨고 설소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보기 싫은 사람이 누군지 아시오?"

설소하는 망설임없이 대꾸했다.

"혹 조정의와 같은 위선자가 아니에요?"

낭천은 얼굴에 한가닥 경멸의 웃음을 날렸다.

"위선자는 비록 악랄하지만 만사형통이라는 것이 제일 보기 싫은 것이오."

"만사형통? 당신은 혹 백요생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요?"

"그렇소.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총명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한마디가 남의 운명을 판가름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당신은 알고 있소?"

"하지만 다른 사람이 모두 말하길....."

낭천은 대뜸 싸늘하게 냉소를 날렸다.

"바로 남들이 그에게 모르는 것이 없다고 한 것이 결국은 그로 하여금 모르는 것도 아는 척해야 하는 사람으로 만들었고 거짓말쟁이로 만든 것이오. 그래서 여태까지 모르는 것이 없다고 우기게 된 거요."

설소하는 고개를 내저으며 더듬거렸다.

"당신은...그를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요?"

"난 오직 아무것도 모르는 한 사람만 믿을 수 있소."

설소하는 그제서야 얼굴을 활짝 펴고 웃었다.

"당신은 무척 재미있게 말을 하는군요. 만약 당신과 계속 대화를 나눈다면 나는 분명히 총명해질 거예요."

만약 한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호감을 느끼게 하려면 바로 그 상대로 하여금 자기가 그를 매우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줘야 하는 법이다. 바로 이 방법을 설소하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썼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녀는 성공하지 못했다.

낭천은 마치 전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멀리 밖에 쌓인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더니 음침한 어조로 물어왔다.

"그들은 언제쯤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소?"

"내일 아침이에요."

"어째서 내일까지 기다린다는 거요?"

"오늘밤 그들은 심미 대사의 피로연을 개최하기 때문이에요."

낭천은 갑자기 거칠게 고개를 돌렸다.

"그것 외에 또 다른 원인은 없소?"

"어째서 또 다른 원인이 있어야 하나요?"

낭천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심미 대사는 절대로 한 끼의 밥을 먹기 위해 지체하진 않을 거요."

"그래요. 그는 비록 한 끼의 밥을 먹기 위해 남는 것은 아니지만 꼭 남아 있을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오늘밤엔 특별한 또 한 명의 손님이 있기 때문이에요."

낭천은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누구요?"

"바로 철적 선생이에요."

낭천은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인 듯 급급히 다그쳤다.

"철적 선생이라고? 도대체 그가 누구요?"

"아니 당신은 여태껏 그가 누군지도 모르나요?"

낭천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렇다면 난 또 어째서 그를 꼭 알아야만 하오?"

설소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분은 비록 오늘날 강호에서 제일 명성을 떨치고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것과 맞먹기 때문이에요."

"음....."

낭천은 신음 비슷한 나직한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소문에 의하면 그 사람의 무공은 칠대문파의 장문인과 차이가 없다는 거예요."

"이 무림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고수라면 나도 적지 않게 만나보았소."

설소하는 급급히 주장을 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달라요. 그는 비단 무공만 절묘할 뿐 아니라 철적 속에는 열세 개의 섭혼정(攝魂訂)이 숨겨져 있어요. 그리고 아주 전문적으로 사람의 혈도만 찍어요. 그래서 오늘날엔 이 사람을 무림에서 제일 유명한 점혈가로 부르고 있어요."

설소하는 말을 하면서 낭천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주시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낭천은 그녀를 실망시켰다.

낭천은 조금도 경황스러운 빛을 띠지 않고 웃었다.

"이제보니 그들이 철적 선생을 초빙한 것은 바로 나를 대적하기 위해서였군....."

설소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미 대사는 일을 매우 조심스럽게 처리하시기 때문에 그는 아마도....."

낭천은 얼른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그는 내가 가서 초류빈을 구할까 봐 철적 선생을 초빙해 호위를 하려는 것이오?"

"하지만 그들이 찾지 않고 초빙하지 않아도 철적 선생은 꼭 올 거예요."

"그건 어째서요?"

"철적 선생의 사랑하는 처 여의(如意)가 매화도의 손에 죽었기 때문이에요."

낭천은 그 말을 듣자 두 눈을 크게 뜨며 허리에 찬 검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언제 도착할 예정이오?"

"그는 저녁에 식사를 하러 올 거래요."

"그렇다면 그들은 어쩌면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즉시 움직일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하지만 그들은 어쩌면 영원히 행동을 하지 않을지도 모르오."

설소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영원히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요? 그건 무엇 때문이죠?"

"만약 내 처자가 어느 사람의 손에 죽었다면 난 절대로 그의 목숨을 붙여 놓고 소림으로 보내지 않을 것이오."

설소하는 경악에 찬 음성으로 다급히 소리쳤다.

"그러니까 당신의 말은 철적 선생이 오자마자 초류빈에게 독수를 내릴까 봐 그러는 거군요?"

"그렇소....."

설소하는 길게 한숨을 내뿜었다.

"틀림없어요. 그것도 가능성이 있는 말이에요. 만약 그가 정말로 출수를 한다고 하더라도 심미 대사는 그를 막아내지 못할 거예요."

낭천은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다.

"자 당신의 말이 끝났으면 어서 가 보시오."

"그렇다면 당신은 철적 선생이 달려오기 전에 초탐화를 구해 주겠다는 건가요?"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무엇을 하든 당신과는 상관없으니 그만 가 보란 말이오."

설소하는 주춤거리며 선뜻 가기를 망설였다.

"그러나 당신 한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로 그를 구해내지 못할 거예요."

그녀는 그가 무어라고 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이었다.

"난 당신의 무공이 무척 고강하다는 것을 잘 알아요. 그러나 전칠과 조정의도 결코 약하지는 않아요. 더욱 심미 대사도 오늘날 소림에서 두 번째로 손꼽히는 고수인 까닭에....."

그러나 낭천은 냉랭하게 그녀를 쏘아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소하는 그의 그런 태도에 기가 꺾여 절로 말을 끊고는 길게 한숨을 내뿜었다.

"흥운장에는 지금 고수들이 구름처럼 많은데 당신이 밝은 대낮에 그를 구하러 간다면 그것은 정말로....."

낭천은 퉁명스럽게 뒤이어 소리쳤다

"정말로 미친 짓이지."

설소하는 더욱 기가 꺾여 고개를 푹 숙이고는 그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낭천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사람에겐 누구나 우연이 한 번씩 내비치는 적이 있소. 그건 절대 나쁜 일이 아니오."

"됐어요. 저는 당신의 뜻을 알겠어요. 그들은 감히 당신이 구하러 올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방비를 허술하게 할 것이고 그리고 어젯밤에 그들은 모두 밤을 지새웠기 때문에 모두 곯아떨어졌을 것이라는 거죠....."

낭천은 미간을 깊게 찌푸리며 소리쳤다.

"당신은 정말 말이 많군."

설소하는 주춤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좋아요. 전 이만 입을 다물겠어요. 그러나 당신은 기필코 조심을 해야 해요. 만일 무슨 일이 일어나면 이 흥운장에 다른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겨울의 낮은 매우 짧다. 정오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하늘은 점차 짙은 회색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을 밝히기엔 아직 이른 시각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이 시각이 가장 조용한 시간이었다.

낭천은 이미 흥운장 건너편의 지붕 위에서 한 시진 가량을 서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자 마치 살갗을 에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미 추위에는 숙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열 살 때 여우 한 마리를 잡기 위해 모진 눈보라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두 시진을 기다린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만약 그 여우를 잡지 못하면 굶어죽을 판이었다. 어떤 사람이건 간에 자기의 고통을 덜기 위해 고생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고통을 참는 것 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보통 사람이라면 이 일을 해내지 못할 것이다.

흥운장의 커다란 대문은 전날과 다름없이 활짝 열려져 있었다. 문 입구는 매우 조용한 것이 비단 마차가 보이지 않는 것 외에도 왕래하는 사람이 매우 드물었다.

낭천은 아직도 그 황야에서의 생활이 몸에 배여 있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그를 한 마리의 야수로 변모시키고 있었다. 그는 어느 한가지의 일이라도 오랫동안 기다렸고 또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오래 보면 볼수록 또 오래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착오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아무리 작은 착오라 할지라도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눈보라가 점점 거세어지는 속으로 한 명의 대한이 과감하게 흥운장 안에서 걸어나왔다. 비록 그와의 거리는 무척 멀었지만 낭천은 그 사람이 곰보라는 것을 상세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낭천은 이 곰보가 바로 설소하의 아버지라는 것은 꿈에도 알지 못하고 단지 이 곰보가 흥운장에서 이름이 난 장사꾼 같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었다. 그 이유는 보통 장사꾼이라면 절대 이처럼 거만스럽게 나올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 장사꾼 설륭 총관은 찻집을 찾아 그동안 쌓였던 이야기를 털어 놓으려고 총총히 거리로 나갔다. 그런데 막 담모퉁이를 돌아 들었을 때 갑자기 한 자루의 날카로운 검이 목을 겨누고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아니....."

낭천은 이런 사람들에겐 정말 검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검으로 하는 것이 말로 하는 편보다 효과가 있기 때문에 자행한 것이다.

"자, 내 말에 분명히 대답해라. 만약 대답을 못한다면 난 널 죽일 것이고 거짓으로 대답했다 해도 죽이고 말 것이다. 알겠느냐?"

설륭 총관은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으나 검에 목이 베일까 봐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식은땀만 흘렸다.

낭천의 싸늘한 질문이 떨어졌다.

"초류빈은 아직도 흥운장 안에 있느냐?"

설륭 총관은 입술을 한참이나 놀리더니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네....."

"어디에 있느냐?"

"광...광 속에 갇혀 있습니다."

"나를 그곳으로 안내해라."

설륭 총관은 이 말을 듣자 크게 질겁을 하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내가 어떻게 당신을 데리고 그곳으로 갈 수가 있단 말이오? 나...나는 죽어도 못하오."

"아니다, 너는 꼭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어."

낭천은 홀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어 그의 살 속으로 찔러 넣었다. 그의 눈동자는 맹수의 굶주린 눈동자처럼 설륭총관의 피부를 뚫으며 냉랭히 입을 열었다.

"너는 꼭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다. 맞았지?"

설륭 총관은 겁에 질려 혼비백산한 채 다급히 시인했다.

"맞았소...맞았소....."

"좋다. 그렇다면 돌아서서 걸어라. 그리고 내가 바로 뒤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설륭 총관은 돌아서서 몇 발자국 걷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낡은 옷을 입으시오."

사실, 낭천이 입은 옷은 염소가죽으로 만든 것이라 사람의 눈을 끌기에 충분했다. 때문에 설륭 총관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확실히 좋은 묘안이었다.

두 사람은 흥운장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설륭 총관이 처음으로 손님을 데려온 것이 아닌 까닭에 모든 살마들은 그들을 주의하지 않았다. 광은 주방과는 그리 멀지 않았으나 안방과 매우 사이가 떨어져 있었다.

설륭 총관이 작은 길로 해서 광까지 가는 동안 별다른 사람들은 만나지 않았다. 아니 만났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가 주방에 술을 가지러 가는 줄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이 일이 이처럼 성공하기 쉬울 줄은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이윽고 쓸쓸한 작은 마당에 건물과 좀 떨어진 한 칸의 집이 눈앞에 나타났다. 낡은 외짝 대문은 튼튼한 자물쇠로 굳게 채워져 있었다.

설륭 총관은 걸음을 멈추고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초...초대협께서는 바로 이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낭천은 싸늘하게 그를 윽박질렀다.

"날 속이지는 않았겠지?"

설륭 총관의 안색이 싹 질렸다.

"제가 어찌 감히 목숨을 가지고 농담을 하겠습니까?"

"좋다!"

이 말을 뱉어 놓기 무섭게 낭천은 설륭 총관을 기절시켜 버리고 앞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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