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06 소이비도 제1권 미친 사람




미친 사람



텁석부리는 갑자기 상반신의 옷을 벗어 던졌다. 더할 수 없이 건?강한 구리빛 체구를 드러낸 텁석부리는 말 대신 마차의 고삐를 자기의 어깨에다 메었다.

그리고는 한 필의 천리마처럼 마차를 몰고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초류빈은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그는 텁석부리의 심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초류빈의 두 눈에도 역시 눈물이 고였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비통의 눈물인지 그것은 초류빈 자신만이 알 뿐이었다.

땅에 쌓인 눈을 헤치며 텁석부리는 마차를 몰고 미친 듯이 달려갔다.

이렇게 얼마를 달려 그들은 우가장(牛家莊)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가장은 매우 번영하고 있는 작은 고을이었다.

이 때는 날이 어두웠지만 눈은 내리지 않았으며 눈이 멈추자 길 양쪽 상가(商街)의 사람들이 나와 눈을 치우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한 사나이가 윗도리를 벗어던진 채 마차를 끌고 달려오는 것을 보자 모두들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비교적 겁이 많은 사람들은 자기 집으로 달아나기도 했다.

질풍같이 달려오던 마차는 한 주루 앞까지 달려왔다.

마차가 달려오는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텁석부리는 급히 멈추기 위하여 발을 앞으로 내뻗으면서 몸을 뒤로 젖혔다.

우지직!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마차는 그의 등에 부딪쳐 앞부분이 박살이 나고야 말았다. 게다가 그의 두 다리는 눈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어가 지상에 쌓인 눈들을 하늘 높이 날리게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이 불가사의한 광경에 모두 넋을 잃고 말았다.

주루 안에 있던 손님들은 이 무서운 힘을 지닌 사나이가 한 사람을 업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자 절반 이상은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텁석부리는 세 개의 의자를 한 데 모아 놓고 또 하나의 의자를 뒤에 놓았다. 그리고는 반소안이 입고 있었던 가죽외투를 꺼내 놓았다. 그제서야 그는 초류빈을 그 위에다 편안하게 앉혔다.

초류빈의 얼굴은 혈색이 하나도 없이 창백했다. 입술도 푸르게 변했다. 누가 보아도 그의 이런 모습은 중병을 앓다 곧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이런 사람이 주루로 술을 마시러 오다니...그것은 이 주루가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주인은 물론 점원들도 상상하지 못한 일에 다만 넋을 잃고 있었다.

텁석부리는 탁자를 한 번 탁 내리치고 큰소리로 외쳤다.

"술을 가지고 와라! 가장 좋은 술을 갖고 와야 한다. 만약 물을 한 방울이라도 섞으면 네놈들의 머리통을 쪼개고 거기다 술을 부어 넣겠다."

이런 텁석부리를 초류빈은 잠시 바라보더니 갑자기 소리없이 웃었다.

"이십 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자네는 철갑금강(鐵甲金剛)의 호기를 부리는군."

"옛?"

텁석부리는 철갑금강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매우 놀란 듯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도련님께서 아직도 그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제자신도 그 이름을 잃어버렸으니까요."

초류빈의 시커먼 눈썹이 위로 찡긋 치켜져 올라갔다.

"자네...자네도 오늘은 맹세를 깨뜨리고 술을 마실 건가?"

텁석부리는 윗도리를 걸치며 단호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오늘 도련님께서 얼마나 마실는지 모르나 저도 도련님과 똑같은 양의 술을 마시겠습니다."

초류빈은 유쾌한 듯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자네가 맹세를 깨뜨리면서까지 술을 마시겠다니...나는 이 인생을 헛되이 살지는 않았나 보군."

남아 있는 손님들은 그들이 미친 듯이 웃으며 얘기하는 것을 보자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빈사 상태에 있는 사람이 이다지도 태연할 수가 있다니 그들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 후 술이 날라져 왔다. 비록 최상품은 아니었지만 물을 타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텁석부리는 잔을 높이 들어올리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도련님, 저의 방자함을 용서하십시오. 자,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좋아!"

초류빈도 술잔을 들어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손이 심하게 떨려 술은 절반이나 그의 옷에 쏟아졌다. 그는 옷에 쏟아진 술을 털어내며,

"하하하하...이 옷은 나와 함께 몇 년이나 지내왔지만 난 한 번도 이 옷에게 술을 준 적이 없지. 자! 나의 옷아, 오랜 세월 동안 나의 몸을 감싸준 고마움에 대해 너에게도 한 잔 주마."

그러더니 텁석부리가 따라준 술을 모두 자기의 옷에다 쏟았다.

주루의 주인과 점원들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사람은 죽을 병에 걸려 있을 뿐만 아니라 미쳤군.....'

그러나 두 사람은 개의치 않고 잔을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쉴새없이 술을 마셨다. 초류빈은 두 손으로 잔을 꼭 잡은 채 한 잔 한 잔씩 입으로 가져갔다.

돌연 텁석부리가 상을 내리치면서 울부짖듯 말했다.

"도련님,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어 꿈이라면 깨지 말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불공평한 세상이 원망스럽습니다."

초류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세상일이란 때때로 사람의 상상을 초월할 수가 있어. 모든 것이 다 공평할 수는 없네. 그래서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 하지 않는가?"

텁석부리는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인생무상이라...도련님, 제가 다시 한 잔 올리겠습니다."

그의 광소가 어찌나 크고 우렁찼던지 옆자리의 술상에 있는 면까지도 심하게 흔들려 밖으로 쏟아졌다.

그러자 웃음이 그치는 순간 그는 다시 상 위에 엎어져 대성통곡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초류빈은 애석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십 년 동안 자네가 없었다면 나는...나는 이미 저승에 가 있었을 걸세. 나는 자네의 고심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네를 혹독하게 부려먹었지. 그러나 이후부터 다시 자네 특유의 웅풍(雄風)을 발휘하기 바라네. 그럼 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텁석부리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도련님, 도련님께선 어찌 그리 의기소침한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모든 것을 일장춘몽으로 돌리십시오."

그들이 울다가 웃었다가 하는 광경을 본 주인과 점원들은 서로 마주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알고 보니 두 사람 다 미친 사람이었군.....'

바로 이 때였다. 느닷없이 한 사람이 비틀거리면서 달려들어 오더니 계산대를 덮치듯 달려가 소리를 질렀다.

"술! 술! 어서 술을 가져와라!"

그의 이런 행동은 마치 지금 술을 마시지 못하면 곧 죽게 되는 것처럼 경황이 없었다.

주인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혼자 중얼거렸다.

"미치광이가 또 하나 나타났군."

이 사람은 색이 허옇게 바랜 남색 장포를 입고 있었다. 가슴과 소매에는 비록 문사건(文士巾)을 매고 있었지만 머리가 헝클어진 채 밖으로 제멋대로 빠져나와 있었다. 그리고 깡마른 데다가 노랗게 떠 있어 한마디로 완전히 타락한 서생 같았다.

점원은 무뚝뚝한 태도로 주전자에 술을 담아 가지고 왔다.

남의서생은 술주전자를 보자 급히 받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이내 입을 열고 나서 무섭게 소리쳤다.

"이것도 술이라고 가져왔느냐? 이건 술이 아닌 식초란 말이야."

점원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를 흘겨보더니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저희 집엔 좋은 술이 없습니다. 다만....."

점원이 뭐라 더 입을 열기 전에 남의서생은 대노하여 외쳤다.

"너는 이 어르신네에게 술을 사 먹을 돈이 없는 줄 아느냐? 자! 가져가거라!"

하고는 즉시 품속에서 오십 냥이나 되는 은자를 꺼내 던져주는 것이었다.

본시 술집의 기생과 점원들은 돈에 따라 태도가 변하는 법이다. 이 점원도 예외는 아니어서 즉시 공손하게 술을 바꿔다 주었다.

남의서생은 역시 술주전자를 입으로 가져가 이내 단숨에 벌컥벌컥 다 마셔 버렸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남들은 그가 술을 급히 먹다가 숨이 막혔을 것이라 생각했다.

초류빈은 그가 지금에야 술맛을 음미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남의서생은 한참만에야 길게 숨을 내쉬더니 잠꼬대를 하듯 중얼거렸다.

"술이 좋지는 않지만 이런 곳에선 이대로 마시는 수밖에 없지."

옆에 서 있던 점원이 만면에 미소를 띠면서 허리를 굽신거렸다.

"이 술은 십 년이나 묵은 것으로 특별한 손님이 아니면 내놓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이 또 엉뚱한 결과를 가져왔다.

남의서생은 갑자기 주먹으로 상을 탕 내리치며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어째서 술맛이 약한가 했더니 술을 너무 오래 두었군. 어서 가서 새로 빚은 술을 갖고 와라. 더도 말고 술 서말에다 안주 몇 가지 갖고 오면 된다!"

점원은 입을 쩍 벌렸으나 즉시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어르신네께선 무슨 안주를 원하십니까?"

남의서생은 주루 안을 쭉 둘러보더니 조금도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호기롭게 소리쳤다.

"이런 집에 뭐가 있겠느냐? 튀긴 칠면조 다리에다 생강을 듬뿍 넣어 와라. 그리고 오리창자를 볶아 주었으면 좋겠다. 단생강은 가장 매운 것을 써야 하고 칠면조 털을 깨끗이 벗겨야 한다."

남의서생은 비록 옷차림이 남루하고 지저분했지만 먹고 마시는 데는 극히 치밀했다.

초류빈은 이 사람이 매우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남의서생은 눈이 술 이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쉴새없이 술을 마셔댔다.

바로 이 때였다. 따가닥 따가닥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바로 주루 밖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남의서생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가려 하였다. 하지만 탁상 위에 남아 있는 술을 보자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이어 연속 세 잔이나 따라 마시고는 오리창자를 손으로 집어 입으로 가져가 씹으면서 중얼거렸다.

"한 잔 술에 세상 시름을 달래니 온 세상이 나의 고향이로구나....."

이때, 갑자기 낭랑한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여기에 와 있었군!"

그러자 또 다른 한 명이 냉큼 말을 받았다.

"내 말이 어떤가? 술집에 가면 틀림없이 찾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 고함소리와 함께 대여섯 명의 장한이 우루루 주루로 들어와 남의서생을 둘러쌌다. 모두 경장차림에 각기 칼과 검을 차고 있었는데 기세가 등등했다.

그 중 깡마른 자가 말채찍을 들어 남의서생을 가리키면서 버럭 노성을 질렸다.

"남의 돈을 받아먹고도 병을 치료해 주지 않고 여기 와서 술을 마시다니 이게 무슨 짓이냐?"

이 말을 들은 남의서생은 헤벌쭉 웃으며 말을 받았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모르시오? 그건 술벌레가 뱃속에서 크게 발작했기 때문이오. 나 매이선생(梅二先生)은 술벌레가 일단 발작하면 천지가 개벽하는 한이 있어도 우선 술을 마셔야 하오. 그런데 남의 병을 치료할 여유가 어디 있소?"

말이 끝나자 한 명의 곰보 장한이 앞으로 쑥 나서면서 입을 열었다.

"조노대(趙老大), 들으셨습니까? 저는 이 술주정뱅이가 이렇게 파렴치한 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그저 손에 은자가 들어오기만 하면 육친도 알아보지 못하는 놈입니다."

깡마른 사나이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잔뜩 들어 있었다.

"이 술주정뱅이의 습관이 그렇기는 하지만 넷째의 병은 꼭 이 자가 치료해야만 한다!"

초류빈은 처음 이 자들이 원수를 찾으려는 줄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듣고 비로소 이 매이선생이라는 자가 의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 자는 돈을 받고도 병을 치료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 아닌가.

조노대는 수중의 채찍을 휘둘러 매이 선생 앞에 놓인 토기(土器) 주전자를 후려치면서 소리쳤다.

"자! 이제 순순히 우리를 따라와라. 그저 넷째의 병만 치료해 준다면 술값은 더 쳐서 충분하게 주겠다."

매이선생은 박살이 난 채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주전자를 보고 장탄식을 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당신들이 나 매이선생의 습관을 잘 알고 있다면 나에게 세 가지 금기(禁忌)가 있다는 것도 아실 텐데....."

조노대는 흉흉한 눈빛으로 매이 선생을 주시했다.

"그게 뭐냐?"

매이선생은 손가락 하나를 세우면서 천천히 대답했다.

"첫째, 선금(先金)이 아니면 절대로 치료해 주지 않고, 또 내가 요구하는 액수에서 한 푼이 모자라도 치료하지 않는 거요."

이 말을 들은 곰보 장한이 격한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가 너에게 준 치료비가 한 푼이라도 모자란단 말이냐?"

매이선생은 씨익 웃더니 자기의 말을 계속했다.

"둘째, 예의가 어긋나고 융숭한 대접을 하지 않으면 치료해 주지 않소. 그리고 셋째, 강도나 좀도둑, 그리고 살인자들은 절대 치료를 하지 않소."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당신들은 세 가지 중에서 두 가지나 어겼소. 그리고도 나 매이선생으로 하여금 병을 치료해 줄 것을 요구하니 잠꼬대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곰보 장한의 노기는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네놈의 숨통을 끊어 주마!"

하지만 매이선생은 두 눈을 감으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죽인다 해도 나는 치료해 줄 수 없소."

"이...이놈이....."

곰보 장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매이 선생을 향해 거센 손바람을 쏘아냈다.

펑!

둔탁한 소리가 매이선생의 가슴팍에서 새어나왔다.

"으윽!"

가벼운 신음소리를 내지른 매이선생은 일 장 밖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그의 입가에서 선혈이 낭자하게 흘러나왔다.

초류빈은 처음 그가 태연자약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강호의 이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공력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사실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이어 조노대는 허리에서 장검을 뽑아들더니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네가 만약 다시 한번 거절한다면 내 너의 팔을 하나 잘라 버리겠다!"

매이선생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으며 그래도 태연하게 말했다.

"않는다면 않는 것이지 무슨 잔말이 그리 많으냐? 내가 너희들을 두려워할 줄 알았느냐?"

"뭐라고? 이놈이 정말....."

조노대는 참을 수 없이 격노하여 즉시 매이선생에게 덮쳐가려 하였다.

순간, 텁석부리가 탁상을 힘껏 내리치며 노기띤 음성으로 고함을 질렀다.

"이곳은 술을 마시는 곳이다. 술맛 상하게 하지 말아라. 술을 마시지 않겠거든 모두 밖으로 꺼져라!"

이 고함소리는 마치 벼락이 치는 것처럼 들렸다.

조노대는 대경실색하여 본능적으로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났다.그런 연후에야 그는 텁석부리를 노려보며 엉겁결에 소리쳤다.

"네놈은 뭘하는 놈인데 감히 이 어르신네의 일에 간섭하려는 거냐?"

그러자 초류빈이 빙그레 웃으며 텁석부리에게 말했다.

"이대로 그냥 보내면 재미가 없을 것 같네. 그들로 하여금 이곳을 네 발로 기어나가도록 하게."

텁석부리는 초류빈의 말을 듣자 재차 고함을 질렀다.

"우리 도련님께서 너희들더러 기어나가라고 하셨는데 듣지 못했느냐?"

"뭐라고?"

조노대의 두 눈에 즉시 음흉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병에 걸려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져 있다. 또 한 사람은 술에 취해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는 것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흐흐흐흐...너희들은 아직 이 어르신네의 위명을 듣지 못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 어르신네가 그 무서움을 가르쳐 주지!"

말을 마친 그는 수중의 칼을 휘둘러 초류빈을 공격해 들어왔다.

"어딜!"

텁석부리는 냉큼 왼손을 뻗어 후려쳐 오는 칼을 향해 정면으로 부딪쳐 갔다. 보아하니 그는 만취가 된 것 같았다. 맨 팔뚝으로 예리한 칼을 막다니, 이것이 말짱한 정신으로 어찌 있을 수 있는 행동이란 말인가.

"앗!"

주루의 주인과 점원, 그리고 몇몇 손님들은 부지중에 비명을 질렀다. 곧이어 텁석부리의 왼팔이 시뻘건 선혈을 뿌리면서 떨어져 나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칼이 텁석부리 장한의 팔과 정면으로 부딪친 순간, 조노대는 갑자기 칼을 떨어뜨리며 뒤로 주루루 밀려나는 것이 아닌가.

잠시 멍청히 서 있던 조노대는 잠꼬대를 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저...저놈이 금종조 철포삼 공력을 연마하다니...내가 혹시 귀신을 만난 것이 아닐까?"

이때 곰보 장한의 얼굴도 잿빛으로 변했다.

그는 애써 미소를 띠더니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친구는 존성대명이 어떻게 되십니까? 우리 서로 인사나 나누고 친구가 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러나 텁석부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더할 수 없이 모욕적인 것이었다.

"너는 아직 내 이름을 알 자격이 없다. 어서 썩 꺼지지 못하겠느냐?"

조노대는 두렵기는 했지만 화가 치밀어올라 크게 소리쳤다.

"친구는 너무 날뛰지 마시오. 분명히 말해 두지만 우리 황하인교(黃河人蛟)도 만만한 인물이 아니오. 만약....."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곰보 장한은 급히 그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더니 무언가 귓속말로 얘기를 하면서 초류빈의 수중에 들려 있는 칼을 훔쳐보았다.

그러자 조노대는 안색이 재차 핼쓱하게 변했다.

"그가 틀림이 없나?"

곰보 장한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려 나오고 있었다.

"그가 아니면 또 누구이겠습니까? 보름 전에 저는 용신묘(龍神廟)의 노조구(老鳥龜)를 통해 그가 입관(入關)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노조구는 다년간 그를 보았기 때문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조노대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초류빈을 주시했다.

"하지만 저렇게 다 죽어 가는데....."

곰보 장한은 당치도 않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 사람은 먹고 마시고, 도박 그리고 계집질에 능통한 사람이라 몸이 항상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수중에 있는 칼은....."

여기까지 말한 그는 잠시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그의 칼은 절대로 주의해야 합니다.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목이 열 개라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조노대는 고소를 지으면서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만약 그가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해도 오지 않았을 것이네."

말을 마친 그는 즉시 만면에 어색한 미소를 띠며 초류빈에게 허리를 굽혔다.

"소인들의 견식이 부족하여 어르신네를 알아보지 못하고 주흥을 깨뜨렸습니다.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소인들은 곧 물러가겠습니다."

초류빈은 빙긋이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면 빨리 가 보게."

이윽고 조노대는 수하들을 거느리고 혼비백산하여 엉금엉금 기듯 달아나 버렸다.

초류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술을 마시고는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매이선생은 그제서야 일어났다. 그는 초류빈에게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다시 의자에 가서 앉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술! 술을 가지고 와라!"

점원은 두 눈이 휘둥그렇게 된 채 그를 지켜보았다. 방금 위맹한 일 장을 얻어맞고 나가떨어져 입으로 피까지 토한 그가 아닌가. 이런 그가 멀쩡하게 다시 술을 달라고 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이 무렵, 주루 안에 있던 손님들은 어느 틈엔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주루 안에는 오직 초류빈과 텁석부리 장한 그리고 매이선생 세 사람만이 있었다. 그들은 쉬지 않고 술을 마셨다.

술은 마실수록 양이 많아졌으나 반대로 얘기는 점점 더 적어졌다.

초류빈은 창을 통해 어두운 하늘을 잠시 바라보더니 갑자기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술이라는 것은 정말 묘하군. 취하려고 하면 할수록 취하지 않고 반대로 취하지 않으려 할 때는 취하기 쉬우니 말이네."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기나 했다는 것처럼 매이선생이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말을 받았다.

"하하하...한 번 취해 만 가지 시름을 잊을 수 있고 술에 취해 죽는다는 것은 성주(城主)에 봉해지는 것보다 더 좋소. 그러나 술에 취해 죽고 싶을수록 조물주께선 심술을 부려 죽지 못하게 하니 이것이 한스러울 따름이오."

텁석부리는 그의 말을 듣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매이선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초류빈을 향해 서서히 다가와 넌지시 물었다.

"귀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는지 아시오?"

초류빈은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

"얼마 살지 못할 것이오."

매이선생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찌 뒷처리를 준비하지 않고 여기 나와 술을 마시는 것이오?"

초류빈은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목소리도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이 몸은 생사를 초월한 몸이오. 내 어찌 생사를 염두에 두고 술마시는 시간을 허비할 수가 있겠소?"

이 말을 들은 매이선생은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었다.

"그렇소. 그렇고 말고. 생사는 극히 사소한 일이오. 술을 마시는 것보다 더 큰일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소? 귀하께선 나와 상통된 점이 있구려!"

이렇게 말한 그는 다시 초류빈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나직이 물었다.

"귀하께선 제가 누구인지 이미 아셨겠지요?"

초류빈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인사도 없는데 어찌 알 수 있겠소?

매이선생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다시 한번 다그쳤다.

"정말 나를 모르십니까?"

그러자 텁석부리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모른다면 모르는 것이지 웬 잔소리가 그렇게 많소?"

매이선생은 텁석부리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초류빈에게 물었다.

"귀하께서 나를 구해 준 것은 나로 하여금 귀하의 병을 치료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소?"

초류빈은 파랗게 변한 얼굴에 여전히 미소를 띠었다.

"귀하가 술을 마시고 싶다면 자리를 같이할 수도 있지만 만약 병을 치료해 주기 위한 것이라면 멀리 떨어져 앉으시오. 술을 먹는데 방해하지 말고."

매이선생은 초류빈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비시시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운수가 매우 좋으시군. 귀하가 나를 만나다니 정말 운수대통이오."

초류빈은 오히려 경멸의 빛이 담긴 조소를 보냈다.

"소생은 돈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강도와도 별 차이가 없으니 어서 돌아가시오."

매이선생의 고집도 보통 정도가 아니었다.

"안 되오, 안 돼. 다른 사람의 병은 치료하지 않아도 되지만 귀하의 병만은 내가 꼭 치료해 줘야겠소. 귀하가 나를 죽이면 몰라도....."

매이선생이라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미친 것 같았다. 아까는 남들이 죽인다 해도 치료해 주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기가 죽지 않는 한 기어코 병을 치료해 주겠다고 한다.

"도대체....."

이곳 주루의 점원은 당장 집으로 돌아가 이불을 푹 뒤집어 쓴 채 사흘 동안 꼼짝하지 않고 잤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그 이유는 세 사람의 미친 이들을 대하고 있자니 자신도 미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때 텁석부리가 갑자기 의자에서 뛰쳐 일어나 매이선생의 옷자락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당신은 우리 도련님이 무슨 병에 걸렸는지 알고 있단 말이오?"

매이선생은 텁석부리를 향해 두 눈을 부릅떴다.

"내가 모르면 누가 알겠소? 당신은 화봉이 진짜로 한계산(寒鷄散)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텁석부리는 실성한 것처럼 말을 되받았다.

"한계산? 그럼 우리 도련님께서 걸리신 독이 바로 한계산이란 말이오?"

매이선생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자기의 코끝을 가리켰다.

"매가(梅家)의 한계산을 제외하고 이 세상에 초탐화를 독살시킬 수 있는 독이 또 어디에 있겠소?"

텁석부리의 오만상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것은 엄청난 놀라움과 기쁨이 한 데 뒤섞여 밖으로 나타나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럼 화봉의 한계산은 바로 당신이 만들어 낸 것이었소?"

그러자 매이 선생은 주루가 떠나가라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핫! 나 묘랑중(妙郞中) 매이선생을 제외하고 또 누가 한계산을 만들 수가 있겠소? 당신은 견식이 너무 부족하군."

"다...당신이 바로 칠묘인 중의 한 사람인 묘랑중이라니....."

이렇게 중얼거리던 텁석부리는 이윽고 초류빈의 손을 붙들고 감격에 벅차 부르짖었다.

"도련님! 이제 사실 수 있습니다!"

초류빈은 텁석부리에게 손을 잡힌 채 씁쓸하게 웃었다.

"보아하니 조물주의 심술도 대단하군. 사람이 살려고 하면 죽음을 주고 또 죽으려고 하면 다시 살 길을 열어 주니 말일세."

잠시 후 마차는 다시 말에 이끌려 질풍같이 달려갔다.

텁석부리는 마부를 한 명 고용해서 마차를 몰게 하고 자기는 초류빈을 돌보기 위해 마차 안에 탔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묘랑중을 감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차가 달리자 텁석부리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당신이 독을 제거할 수가 있다면 어째서 또 딴 사람을 찾으러 가는 것이며 시간상으로 너무 늦지 않겠소?"

매이선생은 약간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그러나 자신있게 대답했다.

"내가 찾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매대선생(梅大先生)이라는 우리 집안의 큰형님이오. 그는 바로 이 부근에 있으니 안심하시오. 나 매이선생이 일단 치료해 주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은 절대 죽지 않소."

텁석부리는 그래도 한 가지 의심스러운 것이 있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를 찾으러 가는 것이오?"

"한계산의 해독약이 바로 그의 손에 있기 때문이오."

텁석부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매이선생이 묻기 시작했다.

"당신이 금종주 철포삼을 연마한 것이오? 아니면 십삼태보 횡련(十三太保橫練)을 연마한 것이오?"

텁석부리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철포삼이오."

매이선생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그토록 우둔한 공력을 연마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소. 그런 공력은 얼마 전 나를 잡으러 왔던 졸개들에게나 겁을 줄 수 있지 또 무슨 소용이 있겠소?"

텁석부리의 대답은 약간 퉁명스럽게 변했다.

"어쨌거나 공력을 연마하지 않은 것보다는 낫지 않소?"

매이선생은 그의 무뚝뚝한 태도에도 화를 내지 않고 역시 웃으면서 말했다.

"듣자하니 철포삼을 연마하려면 동정(童貞)의 몸이어야 한다는데 그 희생이 너무 크다고 생각지 않소?"

텁석부리는 가볍게 코웃음만 쳤다.

"흥!"

그래도 매이선생은 신이 나서 혼자 떠들었다.

"오십 년 이래 철갑금강(鐵甲金剛) 철전갑(鐵傳甲)이라는 사람만이 그 우둔한 공력을 연마했다고 들었소. 그러나 그도 이십 년 전에 절벽에서 떨어진 후 지금까지 생사를 모르고 있소."

텁석부리는 매이선생이 뭐라고 말하든지 간에 입을 꽉 다물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쯤 되자 매이선생도 입을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간 침묵이 흘렀을 때 다시 텁석부리가 입을 열었다.

"소문에 의하면 칠묘인은 모두가 파렴치한 사람이라 하던데 귀하는 그렇지 않은 것 같구려."

매이선생은 눈을 감은 채 비스듬히 앉아 말을 받았다.

"남의 치료비를 받아먹고 병을 치료해 주지 않는 것이 파렴치한이 아니란 말이오?"

텁석부리는 아직도 술에 취해 시뻘건 눈동자를 굴리며 히죽이 웃었다.

"귀하가 만약 그런 사람을 위해 치료를 해 준다면 그거야말로 파렴치한 짓이오. 돈을 갖는 것과 병을 치료해 주는 것은 별개의 일이오. 그런 사람들의 은자는 가을의 낙엽과도 같이 값어치가 없소."

매이선생은 씨익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당신은 겉보기와는 달리 그리 둔하지 않군."

텁석부리는 초류빈이 덮은 가죽옷을 매만져 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 사람의 눈에 비치는 소인은 모두가 소인이 아니오. 따라서 모두 군자로 보는 사람이라고 다 진정한 군자라고는 할 수 없소!"

초류빈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마차 안에 비스듬히 누운 채 담담하게 웃었다. 그의 이런 태도는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혼자 생각에 잠겨 지나간 추억들을 회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인간 세상의 모든 더러움은 모두 흰 눈에 의해 깨끗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천지는 온통 은회색이었다.

이 순간, 초류빈은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조금은 느끼고 있었다. 그의 뇌리 한구석에 돌연 하나의 회색 인영이 떠올랐다.

그것은 여자였다. 여인은 엷은 자줏빛 옷을 입고 있었으며 역시 자줏빛 피풍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마치 한겨울에 피어나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꽃 같았다.

그는 그녀가 눈을 매우 좋아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눈이 내리면 그녀는 때때로 그를 눈이 쌓인 마당으로 끌고 나갔다. 그리고는 눈을 뭉쳐 던지고는 깔깔거리고 웃으며 도망치고는 했다.

그날 그가 친구 호유성(胡流星)을 데리고 돌아올 때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여인은 매화나무 옆에 있는 정자(亭子) 안에 앉아 매화가지에 핀 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자의 난간은 붉은색이었고 매화꽃도 붉은색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난간에 걸터앉아 있을 때는 매화와 난간이 모두 빛을 잃어야만 했다.

초류빈은 그 당시 호유성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호유성이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이미 완전히 반해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 그 화원은 아직도 옛모습 그대로 있을까? 매화도 역시 피었을까?

여기까지 생각하던 초류빈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매이선생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말을 꺼냈다.

"마차에 술이 실려 있으니 우리 한 잔 나누기로 합시다!"

눈은 내렸다가 멈추고 멈추는가 싶으면 다시 내리곤 했다.

마차는 매이선생이 지시하는 대로 산속으로 들어가 작은 다리 앞에서 정거했다. 다리가 너무 좁아 마차가 지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리 위에는 깨끗한 눈이 소복히 쌓여 있었는데 사람의 발자국 하나 없었다. 오직 작은 개(犬)의 발자국만이 다리 난간 옆을 따라 질서있게 찍혀 있었다.

텁석부리는 초류빈을 부축하여 작은 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가니 그곳에는 매화나무 숲이 있고 몇 채의 돌로 지은 집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붉은 매화꽃에 싸인 하얀 집들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이때 매화나무 숲 속으로부터 중얼거리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 다가간 그들은 거기에 한 노인이 두 소년을 시켜 매화 나무에 쌓인 눈을 물로 씻어내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텁석부리는 나지막하게 물었다.

"저 사람이 바로 매대선생이오?"

매이선생은 음성을 낮춰 조용히 말을 받았다.

"그가 아니고서야 또 누가 물로 나무 위의 눈을 씻게 할 수가 있겠소?"

텁석부리는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물로 씻고 나면 다시 눈이 쌓이고 또 그 물이 얼어 얼음이 된다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단 말이오?"

매이선생은 가벼운 한숨과 함께 고소를 던졌다.

"그는 그림의 진위와 값어치를 분별할 수가 있고 또 무서운 독약과 해독약을 제조해 낼 수가 있소. 그러나 그런 가장 간단한 상식에 대해서는 영원히 생각해 내지 못할 것이오."

이때 두 사람의 말을 들은 노인이 갑자기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마치 무서운 빚쟁이라도 만난 것처럼 대경실색하며 집안으로 미친 듯이 달려 들어갔다. 이어서 그의 당황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대청 안의 그림들을 모두 숨겨야지. 저 망나니가 보면 또 훔쳐 가서 술과 바꿔 먹을 게 아닌가."

이 말을 들은 매이선생이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형님, 안심하십시오. 오늘 저는 이미 술을 실컷 먹을 수 있는 물주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오직 두 친구를 데리고 왔을 뿐입니 다."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을 때 매대선생은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네 친구라면 만나지 않겠다. 네 친구들은 좋은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으니까. 나는 네 친구만 보면 최소한 삼 년은 재수가 없다!"

매이선생은 펄쩍 뛰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저를 괄시하는군요. 나라고 해서 좋은 친구를 사귀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좋습니다. 초탐화, 그가 우리를 괄시하는데 우린 그냥 돌아갑시다!"

텁석부리가 검미를 잔뜩 일그러뜨리며 뭐라고 한마디 하려고 했을 때, 매대선생은 갑자기 몸을 홱 돌리며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 기다려라. 너는 지금 부자(父子) 삼대가 탐화랑을 역임했던 초탐화를 얘기하는 것이냐?"

매이선생의 대답은 차가웠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는 것이죠?"

매대선생은 초류빈을 가리키며

"바로 이분인가?"

초류빈은 악의없이 웃으며 즉시 대답했다.

"송구스럽습니다. 소생이 초류빈입니다."

매대선생은 가까이 걸어와 그를 위아래로 몇 번인가 살펴보더니 갑자기 그의 손을 잡으면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내 이십 년 동안 마음속으로만 받들어 왔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소. 초형, 초형은 정말 이 늙은이를 말려 죽일 뻔했소이다."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초류빈은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대선생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깊이 인사를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초형, 소제의 무례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다만 제 동생이 너무 망나니라 그런 것이오. 이 년 전에도 그는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나에게 서화(書畵)를 감정하는 데 대가(大家)라고 소개했지요. 그래서 내가 서화를 모두 꺼내 보이자 그 중에서 두 장을 훔쳐 가지고 도망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에 초류빈은 실소를 금치 못하면서 말을 가로막았다.

"매대선생은 너무 그를 탓하지 마십시오. 술벌레가 발작했을 때 만약 술을 사 먹을 돈이 없다면 그 괴로움이란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매대선생은 멋적은 듯이 웃으며

"그렇다면 초형도 주도(酒道)에 밝으신가 보군요?"

초류빈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주선(酒仙)이 어디 따로 있습니까?"

"좋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소년 한 명을 가리키며 명령을 내렸다.

"기학(騎鶴), 너는 나무 씻는 일은 나중으로 미루고 어서 가서 이십 년 동안 간직해 놓은 두 단지의 죽엽청을 가지고 오너라."

두 동자에게 분부를 내린 매대선생은 다시 공수의 예를 올렸다.

"좋은 꽃은 가인(佳人)에게 주어야 하고 좋은 술은 명사(名士)를 대접하는 데 써야 합니다. 저는 이미 이십 년 동안이나 간직해 왔는데 그것은 순전히 초형 같은 명사를 대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매이선생이 옆에서 냉큼 말을 받았다.

"그건 사실입니다. 우리 형편은 다른 사람이 왔을 땐 술이 아니라 식초 한 방울도 내놓지 않습니다. 그런데 초형께서 이곳에 오신 것이 술을 마시러 온 것이 아니라 아쉽군요."

매대선생은 초류빈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한계산의 독은 극히 작은 일에 불과합니다. 초형은 염려 놓으시고 술을 드십시오. 그 일에 대해서는 다 안배가 되어 있으니까요."

하고는 일행을 집안으로 안내했다.

집안은 매우 우아하고 운치있게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이십 년이나 간직해 온 죽엽청의 향기도 대단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나자 매대선생이 갑자기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소문에 의하면 대내(大內)에 숨겨져 있는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역시 가짜이고 진품은 존부(尊府)에 있다고 하던데 그거 사실입니까?"

초류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입니다 "

매대선생은 뛸 듯이 기뻐하며 손을 앞으로 모았다.

"만약 초형께서 그것을 제게 한 번만 보여주신다면 평생을 두고 감사드리겠습니다."

초류빈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선생께서 그것을 그렇게 보고 싶어하시는데 제가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다만 소생도 패가의 자손이라 이미 십여 년 전에 모든 가산을 탕진하였고 그 그림도 남의 손에 넘겨주고 지금은 없습니다."

매대선생은 경악의 빛을 떠올리더니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아깝군, 아까워....."

이렇게 중얼거린 그는 갑자기 일어나 내실로 들어가면서 다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닌가.

"기학아, 술을 다시 숨겨 두어라...이분 초탐화께선 충분히 마셨다."

매이선생이 황급히 자리를 차고 일어나 매대선생을 만류했다.

"청명상하도가 없으면 술도 마실 수 없습니까?"

매대선생의 목소리는 매화나무 가지에 언 얼음처럼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워졌다.

"나의 이 술은 원래부터 남에게 주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초류빈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웃었다. 그것은 이 사람이 괴팍한 성질을 지니고 마음이 좁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마음이 정직하고 천진스러워 최소한 위선자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텁석부리가 참지 못하고 벌떡 뛰쳐 일어나며 으름장을 놓았다.

"청명상하도가 없으면 해독약도 없다는 것이오?"

매대선생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싸늘하게 응수했다.

"술도 없는데 해독약은 무슨 놈의 해독약이오."

"뭐라구?"

텁석부리는 천둥같이 화가 치밀어 당장이라도 덮칠 듯 소매를 둥둥 걷어올렸다.

초류빈은 급히 그를 만류하면서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참게, 우리는 매대선생과 초면이 아닌가? 거기다가 그의 미주(美酒)까지 축냈는데 어찌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그만두게."

텁석부리는 타는 속을 억제하지 못하여 큰 덩치답지 않게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도련님께서....."

초류빈은 힘겹게 손을 들어올려 매대선생을 향해 포권의 예를 취했다.

"소생은 이만 물러갈까 합니다."

뜻밖의 말이라 매대선생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왜 해독약이 필요없소?"

초류빈은 텁석부리의 부축을 받으며 마치 남의 일처럼 말을 꺼냈다.

"그 어떤 물건이라도 각기 주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어찌 소생이 강요할 수가 있겠습니까?"

매대선생은 일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초형은 해독약이 없으면 곧 죽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소?"

초류빈은 한 가닥 기품있는 미소를 보냈다.

"인명은 재천이라 했습니다. 하늘에 바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매대선생은 초류빈을 한참 동안 주시하고 있더니 혼잣말처럼 지껄였다.

"맞았어. 맞는 말이야. 청명상하도까지 남에게 주었으니 하물며 자기의 생명쯤이야...천하에 이런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이렇게 뇌까리던 그는 다시 안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기학아! 술을 다시 가지고 오너라. 이 사람 말고 또 누가 내 술을 마시겠느냐?"

텁석부리는 놀라움과 기쁨을 금치 못하며 그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소망과 희열이 뒤범벅 된 그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주루룩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그럼 해독약도 주시는 겁니까?"

매대선생은 두 눈을 부릅뜨고 냉랭한 어조로 쏘아붙였다.

"술이 나왔는데 어찌 해독약을 주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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