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09 소이비도 제1권 독부와 성녀聖女





독부와 성녀(聖女)



젊은이는 초류빈의 말을 듣자 약간 멍해지더니 곧 기분 나쁜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아주 재미있는 말이군요. 귀하의 옷에 눈이 달렸다니....."

초류빈은 그를 응시하며 한마디 한마디 또렷하게 말했다.

"만약 나의 옷에 눈이 없었다면 자네가 등뒤에서 전개한 일 검을 어떻게 피할 수 있었겠나!"

초류빈이 태연하게 말을 내뱉자 젊은이는 즉시 안색이 변하며 두 손을 가볍게 떨었다. 초류빈의 말에는 그의 암습을 책망하는 뜻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호유성은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의도인 듯 헛기침을 하더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둘 다 농담을 좋아하는군. 장검산장(藏劍山莊)의 소장주가 한 자루의 보검을 안중에 두지 않듯이 나의 현제는 옷이 찢어진 것을 개의치 않을 걸세."

초류빈은 안색이 다소 동요되었다.

"알고 보니 장검산장의 소장주 유룡생(游龍生)이었군."

"그렇다네. 유공자는 비단 장룡노인(藏龍老人)의 자제분일 뿐 아니라 또한 당대 제일검객 천산(天山) 설응자(雪鷹子) 선배님의 유일한 제자라네. 두 사람은 서로 통하는 바가 있을 테니 앞으로 좀더 친근하게 지내도록 하게."

호유성은 딱딱한 분위기를 완화시키려고 시종일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유룡생은 적의가 가득찬 눈빛으로 여전히 초류빈을 노려보고 있었다.

"친근하게 지낸다는 것은 나에게 과분한 일이고 우선 저 자의 존성대명(尊姓大名)부터 알고 싶습니다."

호유성은 약간 의외인 듯 눈을 크게 떴다.

"알고 보니 유공자는 아직 내 현제를 모르고 있군. 그가 바로 초류빈이라네. 당금 강호에서 유공자와 친구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오직 나의 현제뿐일 걸세."

초류빈의 이름이 밝혀지자 유룡생의 안색에 일순 변화가 일었다. 그의 시선은 초류빈의 얼굴에서 이내 손에 쥔 비도로 옮겨져 못이 박혔다. 그것은 바로 초류빈의 상징이었다.

유룡생은 비로소 눈앞의 인물이 천하제일 비도 초류빈이라는 것을 깨닫고 경시하던 마음을 버렸다. 그는 잔뜩 긴장된 얼굴로 초류빈을 응시했다.

바로 그때, 우렁한 외침소리와 함께 매림 속으로 뛰어들어 오는 인영이 있었다.

"밖에 죽어 있는 자를 누가 살해했소?"

나타난 사람은 광대뼈가 불룩하고 머리칼이 희끗한 위인이었다. 특히 미간에 서려 있는 살기와 양쪽으로 쭉 찢어져 굳게 다문 입술은 그의 인물됨이 편협하고 괴팍하다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는 바로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약간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철면무사 조정의였다.

초류빈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나를 제외하고 또 누가 있겠소?"

조정의는 칼날같이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역시 당신의 소행이었군. 당신이 나타나는 곳엔 늘 피바람이 뒤따른다는 것을 내가 깜박 잊고 있었다니....."

초류빈은 왼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입가에 야릇한 조소를 머금었다.

"그 자를 죽여서 안 될 이유라도 있소?"

조정의는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도리어 반문을 했다.

"당신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소?"

초류빈은 대꾸를 하기 앞서 나직이 탄식을 했다.

"매화도가 아니라는 것이 애석하게 생각될 뿐이오."

조정의는 대뜸 성난 표정으로 변했다.

"당신은 정녕 그가 매화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살수를 전개했소?"

대꾸하는 초류빈의 음성은 차분하기만 했다.

"그를 죽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피살당하는 것은 더욱 원치 않았소. 어떠한 상황에서도 살인은 피살당하는 것보다 나을 테니....."

조정의는 눈을 부라린 채 다그쳤다.

"그럼 그가 먼저 당신을 죽이려 했단 말이오?"

초류빈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조정의는 마치 죄인을 심문하듯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가 무엇 때문에 당신을 죽이려 했겠소?"

"나도 그 점을 이상하다고 생각했소. 그에게 이유를 물으려 했을 때 애석하게도 그는 나를 외면했소."

초류빈은 마치 남의 말을 하듯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것은 조정의로 하여금 울화가 치밀도록 만들었다.

조정의는 분노를 발산하기라도 하려는 듯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럼 당신은 어째서 애당초 그에게 입을 열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소?"

"나도 그에게 말을 할 기회를 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일단 내 손에서 비도가 날아가면 상대방의 생사에 대해선 나 자신도 통제할 수 없게 되어 있소."

초류빈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애석해 하였다.

조정의는 사리에 합당한 그의 말에 더 이상 따질 수가 없는 듯 다른 트집을 잡고 늘어졌다.

"당신은 이미 중원을 떠났는데 무엇 때문에 다시 돌아왔소?"

"조대협이 너무도 보고 싶어 이렇게 다시 왔소."

조정의는 초류빈의 넉살에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호유성을 가리키며 발광을 하듯 외쳐댔다.

"좋아, 좋아. 저 자는 자네의 형제이니 무슨 일을 저지르든 자네가 책임을 지게!"

호유성은 어색한 웃음으로 난처한 입장을 얼버무렸다.

"형님, 화를 낼 일이 아니니 차근차근 얘기하십시오."

그러나 조정의는 막무가내였다.

"또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인가? 우린 매화도를 상대하기에도 골치가 아픈데 이제 청마 이곡과도 원한을 맺게 되었으니 장차 어떻게 할 셈인가?"

초류빈의 입가에 있던 미소가 일순간에 사라지며 싸늘한 미소와 함께 그의 말을 받았다.

"내가 이곡의 제자 구독(丘獨)을 죽였으니 이곡은 필시 원수를 갚으러 오겠지. 하지만 그가 노리는 것은 나 개인일 뿐인데 조대협이 구태여 나를 위해 염려할 필요가 있겠소?"

조정의가 입을 열기도 전에 호유성이 얼른 나섰다.

"구독이 삼경 야밤에 이곳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필경 좋은 뜻을 품고 오진 않았을 것이네. 현제, 그를 죽인 것은 잘한 일이네. 입장을 바꾸어 내가 자네였더라도 역시 그를 죽였을 것이네."

조정의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숨을 씩씩 몰아쉬며 떠나갔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유룡생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조대협은 나이를 먹을수록 간담이 작아지는 것 같군요. 사실 이곡이 나타난다 한들 두려울 게 뭐 있겠소? 이번 기회에 비도탈명(飛刀奪命)의 묘기를 볼 수 있게 되어 은근히 기대가 되는군요."

초류빈은 그를 주시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자네가 정말 비도탈명을 구경하고 싶다면 구태여 이곡이 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을 텐데....."

그 말을 듣자 유룡생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 눈치였으나 초류빈이 쥐고 있는 비도를 힐끗 바라보더니 침을 꿀꺽 삼키고는 휙 하며 몸을 돌려 떠나갔다.

호유성은 그를 쫓아가려다가 걸음을 멈추며 탄식을 했다.

"현제, 자네가 약간 경솔한 것 같았네. 설사 자네가 그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친구로 사귈 마음이 없다 해도 구태여 그들의 비위를 상하게 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초류빈은 수중의 비도를 만지작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이미 나를 눈에 가시로 여기고 있으니 내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든 말든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친구 하나를 만드는 것은 적을 하나 만드는 것보다 좋을 걸세."

"허나 이 세상에 친구로서 손색이 없는 자가 몇이나 있겠습니까?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형님 같은 친구를 단 한 사람만 사귀어도 충분할 것입니다."

호유성은 매우 흐뭇한 듯 크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힘있게 두드렸다.

"좋아! 현제, 자네의 그 한 마디를 들을 수 있다면 내 설사 다른 모든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아도 역시 가치가 있는 일이라 생각하네."

초류빈은 마음속으로 격동을 느끼며 연거푸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호유성은 그가 기침을 심하게 하는 모습을 보고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그동안 자네의 기침은....."

초류빈은 그의 기침에 관해서는 얘기를 하고 싶지 않은 듯 얼른 그의 말을 중단시키며 화제를 돌렸다.

"형님, 나는 지금 단지 한 사람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누구인가?"

호유성은 반문을 하고 나서 초류빈이 대답도 하기 전에 즉시 말을 이었다.

"혹시 설소하가 아닌가?"

초류빈은 빙그레 웃었다.

"형님은 내 마음을 낱낱이 간파하고 있으니 역시 나의 지기이군요."

호유성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자네가 설낭자를 만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라고 벌써 생각하고 있었네. 초류빈이 천하제일 미인을 만나보지 않는다면 어디 초류빈이라 할 수 있겠는가?"

초류빈은 미소를 띠고 묵인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마 아무도 모를 것이다.

호유성은 그의 손을 잡고 숲 밖으로 걸어나가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자네가 그녀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다면 그것은 잘못 짚은 걸세. 그저께 밤에 불행한 일이 발생하자 그녀는 감히 냉향소축에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네."

"그래요?"

"그녀는 지금쯤 벽운과 함께 있을 걸세. 자네는 벽운도 만나볼 겸 그쪽으로 가 보는 게 좋을 것이네."

여기까지 말한 호유성은 약간 멈칫하더니 한숨과 함께 말을 이어갔다.

"그녀는 역시 소견 좁은 아녀자가 아닌가? 그녀를 위로해 준다는 생각으로 찾아가 주지 않겠나?"

그는 초류빈의 고통스러운 눈빛을 전혀 유의치 못하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사실 그녀도 강아 녀석이 고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진짜로 자네를 탓하진 않을 걸세."

초류빈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미 이곳까지 온 이상 냉향소축에 한번 가 보고 싶습니다. 어쩌면 설낭자가 벌써 돌아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호유성은 그를 힐끗 쳐다보며 눈에 웃음을 띠었다.

"보아하니 자네가 오늘밤에 그녀를 보기 전에는 심지어 잠을 청할 수도 없는 모양이로군."

초류빈은 역시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엔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는 듯 유난히 광채가 번뜩였다.

냉향소축! 이곳에 과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초류빈은 방 안으로 들어서며 다시 십 년 전의 추억 속으로 달려갔다. 이 방의 모든 것은 십 년 전과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탁상 하나에서부터 의자 하나까지 모두 십 년 전 놓여져 있던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탁상 위에 있는 붓과 서적마저도 하등의 변동이 없었다.

만약 설야가 아니었다면 창문에 비친 명월 역시 예전과 변함이 없을 것이다.

초류빈은 다시 십 년 전으로 되돌아 가는 것 같았다. 세월이 만약 십 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그는 어쩌면 설벽운과 함께 매화의 수를 헤아리고 있거나 아니면 돌아와 그들이 조금 전에 읊조렸던 시구를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붓을 들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것은 고통스러운 추억일 뿐 진작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당시 구태여 붓을 들 필요가 없었을 텐데.....

눈은 다시 대지에 뿌려지고 있었다. 창문에 떨어져 빗물로 녹아 내리는 눈송이는 정인의 속삭임 같았다.

초류빈은 감개를 금치 못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십 년이군...아니야, 어쩌면 십 년이 더 흘렀을지도 몰라. 간혹 시간이 느리다고 생각될 때도 있지만 일단 시간이 지나간 후에는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을 느끼고 누구나 놀라기 마련이죠."

호유성도 역시 그 나름대로 많은 감회가 있었다.

"자네는 내가 처음에 이곳에 올 때를 기억하고 있나? 그 날도 역시 눈이 내렸던 것 같은데....."

"내...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의 음성에는 감회와 고통이 한 데 어우러져 있었다. 호유성과의 만남. 그것이 그의 인생 항로를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바꾸어 놓을 줄은 그들 아무도 예기치 못했었던 일이었다.

호유성은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감회어린 얼굴로 재미나는 일이 생각난 듯 크게 웃었다.

"하하...그날 우리 두 사람은 자네 집에 소장해 두었던 술을 전부 바닥내 버렸지. 그리고 그날 자네가 취하는 것을 처음 보았네. 그런데도 자네는 한사코 취한 것을 부인했지. 결국 자네는 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정서(正書)로써 두보(杜甫)의 추홍팔수를 한 획도 흐트러짐이 없이 써 내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지....."

여기까지 말한 그는 책상 위에 있는 함 속에서 한 자루의 붓을 꺼냈다.

"이것이 바로 당시 자네가 사용하던 붓이라네. 아직도 기억하고 있나?"

초류빈의 표정은 고통이 깃들어 있으나 입가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때 내기를 해서 내가 이긴 것까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호유성은 붓을 다시 함 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하지만 자네는 그 당시 이 붓이 십 년 후인 지금까지 이곳에 남아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네. 붓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이미 주인이 바뀐 걸....."

호유성은 가슴을 저미는 처량함에 말꼬리를 흐렸다. 호유성은 대견스럽다는 표정으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이상하게도 설소하는 자네가 언젠가는 돌아올 것임을 예측하고 있었는지 이곳에서 다년간 기거하면서도 여기에 있는 일초일목(一草一木)도 전혀 건드리지 않았네."

초류빈은 담담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그녀는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었을 텐데....."

"우리는 그녀에게 그렇게 해 달라고 요구한 적도 없는데 그녀는 말하기를....."

여기까지 말했을 때 밖에서 돌연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리, 안에 계십니까?"

호유성은 창문을 열고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여기 있다만, 무슨 일인가?"

창 밖에 있는 사나이는 뛰어왔는지 숨을 몰아쉬며 아뢰었다.

"진나으리의 도련님께서 위독하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진어르신네께선 즉시 호사야를 모셔오라는 분부를 내렸습니다."

호유성은 그 말을 듣자 안색이 약간 변하며 고개를 돌려 초류빈의 의사를 물었다.

"현제, 자네는....."

"나는 이곳에 남아 있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물론 되고 말고. 이곳은 원래 자네의 집이 아닌가, 설사 설소하가 돌아와도 자네를 대단히 환영할 걸세."

말을 끝낸 그는 총총히 밖으로 나갔다.

그가 문을 나서자마자 초류빈의 미소는 곧 사라졌다.

초류빈은 호피가 깔린 커다란 단목 의자에 가장 편한 자세로 앉았다. 이 의자의 나이는 그보다도 많다. 그의 기억으로 자기가 어렸을 때 늘 이 의자 위로 기어올라 가 부친을 위해 먹을 갈아 드리는 것을 즐겨했다.

그는 자기가 빨리 자라 이 의자에 앉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때 그는 일종의 기묘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행여나 의자도 사람과 같이 자꾸 자라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었다.

드디어 그가 의자에 단정히 앉을 수 있는 날이 도래했다. 그제서야 의자는 절대 자라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당시 의자를 위해 암암리 탄식을 했고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의자와 같이 영원히 자라나지 않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영원히 비애가 없기를, 애석하게도 의자는 여전하건만 사람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게 되었다.

"패기여, 젊은 날의 패기여....."

초류빈은 지나간 세월을 한탄하듯 나직이 뇌까렸다. 바로 그때, 그의 귓전에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호호호...그럼 당신은 자신이 더 늙었다고 생각하나요?"

웃음소리와 음성은 분명히 창 밖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방안은 그 웃음소리와 꾀꼬리 같은 음성으로 인해 일진의 부드러운 기류가 감돌았다. 그녀는 비록 들어오지 않았지만 이미 화사한 봄기운을 방안에 불러들인 것이다.

웃음소리만으로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초류빈의 눈동자는 금세 횃불처럼 빛났다. 그는 음성의 주인공이 누구라는 것을 단번에 알았다.

그러나 그는 단지 문쪽을 주시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설소하!

그의 예상대로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채 들어오는 여인은 바로 그녀였다.

무림인의 눈은 과연 멀지 않았다. 그녀는 확실히 인간의 절색이었다. 만약 어떤 자가 꽃으로써 그녀를 비유했다면 그것은 그녀에 대한 일종의 모독일 것이다. 세상에 어떠한 선화라 해도 그녀보다 더 사람의 말초신경을 자극시키지는 못하리라.

그녀의 전신 어느 한 곳도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을 곳이 없었지만 특히 애간장을 녹이게 하는 것은 그녀의 눈동자였다.

어떠한 남자도 그녀의 눈동자에 저항하거나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어떠한 범죄도 저지르게 할 수 있는 눈동자였다.

한편, 그녀의 태도는 그다지도 친절하고 스스럼 없어서 추호의 사의(邪意)도 찾아볼 수 없다. 누가 보아도 그녀는 이 세상에서 제일 부드럽고 제일 순결한 여인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인상이야 어쨌든 초류빈의 그녀에 대한 인상은 변화시킬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초류빈이 그녀를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술집 주방, 바로 장미 부인 시체 곁에서 초류빈은 이미그녀의 '부드러움'과 '순결함'을 체험했다.

하지만 초류빈의 마음 한구석도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여인이 바로 그날 한사코 그에게 금사갑을 교환하자고 제의한 그 신비의 미녀와 동일한 인물이라곤 믿기 어려운 것만은 사실이었다. 지금 그녀의 표정과 풍기는 인상은 그날과 판이하게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만약 초류빈이 자기의 눈을 믿지 않는 위인이라면 그날, 그 악랄하고 음탕한 여인이 바로 지금 눈앞에서 천진스럽고 달콤한 미소를 띠고 있는 이 티없는 여인이라곤 도저히 믿지 않았을 것이다.

초류빈은 길게 숨을 내쉬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여자가 가질 수 있는 양면성에 그는 강한 반발심이 일었던 것이다.

설소하는 추파를 사르르 굴리더니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무엇 때문에 눈을 감죠? 제가 보기 싫어서인가요?"

초류빈은 눈을 감은 채 담담하게 대꾸했다.

"나는 단지 그날 낭자가 알몸이 되어 있을 때의 모습을 회상하고 있는 것뿐이오."

설소하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울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원래 당신이 저를 몰라보기를 바랐어요. 그러나 그 희망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초류빈은 눈을 뜨고 그녀를 똑바로 주시했다.

"내가 만약 그렇게도 빨리 낭자를 잊었다면 낭자는 필시 실망이 컸을 텐데....."

설소하는 보조개를 보이며 생긋이 웃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저를 보고서도 놀라는 기색이 없죠? 혹시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벌써 알고 있었나요?"

초류빈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입가에 신비스런 미소를 떠올렸다.

"그것은 아마 무림에 미인이란 칭호를 받을 만한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겠지....."

설소하는 살짝 곁눈질을 하여 그를 흘겨보았다.

"그게 아니라 당신은 이곡의 제자를 보자 제가 갖고 있던 청마수를 연상했을 것이고 유룡생을 보자 저의 어장검을 생각했겠죠!"

초류빈은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으며 미소로써 반문을 했다.

"내가 한 가지 이상하게 생각되는 일이 있는데, 낭자는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찌 감히 나를 찾아왔는지 사뭇 궁금하군....."

설소하는 대답을 하기에 앞서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추하게 생긴 며느리가 시부모님을 피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요? 그래서 호어르신네의 말을 듣자 즉시 이리로 달려온 거예요."

초류빈은 약간 의아해 하는 표정이었다.

"그래? 그가 일부러 낭자를 이곳으로 보냈단 말이오?"

설소하는 다시 생긋이 웃었다.

"당신은 그의 뜻을 모르고 있나요? 그는 벌써부터 우리 두 사람을 맺어 줄 생각을 갖고 있어요. 당신에게 늘 죄책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인가 봐요. 왜냐하면 그는 당신의....."

그녀의 말이 여기까지 이르자 초류빈의 안색은 대뜸 싸늘하게 변했다. 그는 설소하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안색이 싸늘하게 변하자 설소하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절대 하지 않았다.

초류빈은 그녀의 말을 계속 기다리는 듯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한마디 한마디 뚜렷하게 내뱉었다.

"그는 나에게 잘못한 것이 없소. 어느 누구도 마찬가지요. 다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지었을 뿐이지....."

설소하는 정이 담뿍 쏟아져 나오는 눈동자로 그를 주시하면서 물었다.

"당신은 누구에게 죄를 지었다는 거죠?"

"내가 죄를 지은 사람은 너무도 많아 나 자신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요."

초류빈의 냉랭한 음성에 비해 설소하의 음성은 대조적으로 부드러웠다.

"당신이 뭐라고 하든 저는 당신이 절대 남에게 죄를 지을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낭자는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 알고 있단 말이오?"

"물론 알고 있죠. 저는 어릴 때부터 당신에 관한 일을 수없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이곳이 바로 당신이 예전에 기거하던 곳임을 알게 되자 저는 흥분한 나머지 심지어 잠도 제대로 청할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사뿐히 몸을 돌리며 말을 계속했다.

"자, 보세요. 이 방안에 있는 물건은 십 년 전 당신이 떠날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잖아요? 심지어 당신이 책장 속에 숨겨 놓은 술마저도 저는 건드리지 않았어요. 제가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아시나요?"

초류빈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다.

설소하는 그가 아무런 반응도 없자 스스로 말꼬리를 이어갔다.

"당신은 아마 모르실 거예요. 그러니 제가 가르쳐 드리죠. 그래야만 저는 비로소 당신이 살던 곳임을 의식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어떤 때는 당신이 여전히 이 방안에 앉아 있다는 착각마저 느껴요. 저 의자에 앉아 저를 조용히 바라보며 다정하게 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만 같아요....."

그녀는 눈빛이 차츰 몽롱해지며 음성도 떨렸다.

"어떤 때 밤중에 잠에서 깨어나면 당신이 내 곁에 누워 있는 것만 같아요. 저 침상, 베개에는 여전히 당신의 체취가 남아 있어요."

초류빈은 돌연 조소를 흘리며 비꼬았다.

"글쎄, 내 체취 이외에도 다른 사람의 체취도 배어 있을 텐데....."

"당신은 다른 사람도 이 방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나요?"

설소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초류빈의 표정은 덤덤하다.

"이곳은 이미 낭자의 소유이니 낭자가 누구를 불러들이든 상관 없소."

"당신은 유룡생, 그 독사 같은 사람도 이곳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억울한 듯 그녀의 눈시울은 금방 붉어졌다.

"솔직히 말해 저는 아직 그들을 방으로 들어오게 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그들은 매검에서 저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죠. 제가 만약 그들을 방안으로 불러들였다면 구독과 진중은 어쩌면 살해되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다면 낭자는 그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단 말이오?"

초류빈의 빈정거림에 설소하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우물쭈물하였다.

"그것은 단지...이곳이 당신의 집이며 저는 당신이 남긴 것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싶어서예요. 만약 다른 남자가 들어온다면 당신이 남긴...저....."

그녀는 무엇이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초류빈은 히죽 웃으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다른 사내가 들어온다면 내 체취가 파괴된단 말이오?"

설소하는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숙였다.

"저의 뜻을 당신은 알고 있겠죠?"

초류빈은 흥미가 있다는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 몸에 체취가 있다는 사실을 나 자신도 이제서야 알았소.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줄 수 없겠소? 향긋한 냄새요, 아니면 구린내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소화는 원망투로 말했다.

"제가 그런 말씀을 드린 것은 당신의 비웃음을 사려는 게 아니었어요."

"그럼 낭자가 바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오?"

설소하는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였다.

"저의 말을 정말 모르시나요?"

초류빈은 마치 남의 일을 얘기하듯 다시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말한다면 다른 사람이 애써 보여줄 필요도 없이 나는 낭자를 차지할 희망이 있다는 뜻이오?"

설소하는 화촉동방을 밝히는 신부처럼 몸둘 바를 몰라했다.

"만약 제가 당신에 대해...벌써부터 마음을...그날 어떻게...당신 앞에서....."

그녀는 비록 한 마디로써 말을 이어 나갔지만 그것은 전부 말하는 것보다 효과적이며 재미가 있었다.

초류빈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 보니 그날 낭자가 내 앞에서 옷을 벗은 것은 금사갑을 얻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나를 원래 좋아했기 때문이었군."

설소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저...저는 물론 금사갑을 얻고 싶은 욕심도 없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만약 당신이 아니었더라면 제가...제가 어떻게....."

초류빈은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알고 보니 낭자는 일거양득을 노렸었군."

설소하는 살짝 고개를 들어 그를 훔쳐보더니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당신은 내가 왜 그 금사갑을 꼭 얻고자 하는 것인지 이상하게 생각하겠죠?"

초류빈은 왼손 엄지손가락으로 눈을 비비며 태연히 대꾸했다.

"그렇소. 그 점에 대해 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소."

설소하는 힘을 주어 말했다.

"제 손으로 친히 매화도를 죽이고 싶어서였어요."

"그렇소?"

초류빈은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설소하는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도 그의 표정을 샅샅이 읽어낼 수 있는지 곧 설명을 해 주었다.

"당신도 아마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매화도를 제거한다면 그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공언했어요. 비록 제 입으로 한 말이지만 그 속엔 많은 고충이 담겨져 있어요."

초류빈의 눈동자에 한 가닥의 경멸하는 빛이 스쳐갔지만 설소하는 보지 못했다.

"낭자는 방금 친히 매화도를 죽이겠다고 했는데 그럼 자기를 자기에게 시집보내야 되겠구려."

"제가 그렇게 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에게도 시집을 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그녀는 여기까지 말하더니 홀연 고개를 들어 초류빈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세상에 어떤 남자도 제 눈에 들지 않아요....."

초류빈도 역시 그녀를 주시하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나는 어떻소?"

설소하는 얼굴을 붉히며 입을 삐죽거렸다.

"당신은 물론 예외예요."

초류빈은 눈을 살짝 감았다 뜨며 반문했다.

"무엇 때문에 그렇소?"

설소하는 사람의 영혼을 빨아들일 듯한 달콤한 음성으로 말을 했다.

"당신은 다른 남자와 다르기 때문이에요. 그 사람들은 개와 말과 같이 저를 등에 태우기도 하고 발바닥을 핥아 주기도 하면서 저의 환심을 사려 하지만 당신만은....."

초류빈은 재미있는 일이 생각난 듯 갑자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낭자는 왜 나에게서 금사갑을 빼앗아 가려 했소? 금사갑을 나에게 주어 내가 매화도를 살해한 후 낭자가 다시 나에게 시집을 온다면 그것이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니겠소?"

설소하는 그의 말을 듣자 일순 표정이 멍해졌으나 이내 티 하나 없는 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정말 좋은 생각이군요. 제가 왜 진작 그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후회가 막심해요."

그녀의 말은 어디서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쉽사리 분간할 수가 없었다. 앞뒤의 모순이 너무도 많았다.

초류빈은 눈동자를 예리하게 굴렸다.

"그렇게 좋은 생각은 아마 나 이외에는 아무도 생각해 내지 못할 것이오. 안 그렇소?"

설소하는 그의 풍자적인 말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그의 손을 꼭 쥐며 생기가 넘치는 음성으로 말했다.

"매화도는 요 며칠 사이에 다시 올 거예요. 내일 저는 이곳에서 그가 오기를 기다리겠어요."

초류빈은 그녀의 말뜻을 알 수 있었다.

"나더러 내일 다시 이곳으로 오라는 뜻이군."

설소하는 간곡한 부탁을 하듯 더욱 손에 힘을 주었다.

"당신은 저를 미끼로 삼아 그로 하여금 이곳에 나타나게끔 유도하세요. 하여튼 당신은 금사갑을 지니고 있으니 설사 당신이 그를 제거하지 못해도 그는 당신을 상하게 하지 못할 거예요. 당신이 만약 그를 제거한다면....."

그녀는 다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으나 그 한 쌍의 영혼을 사로잡는 눈동자는 여전히 초류빈의 눈을 잡고 있었다. 그녀가 입으로 다하지 못한 말은 이미 눈동자로서 말한 것이다.

초류빈은 눈동자에 광채를 번뜩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좋소, 내일 밤 내 틀림없이 오겠소. 만약 내가 오지 않으면 그것은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천치일 것이오."

설소하는 그제서야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가느다란 손끝으로 초류빈의 손등에 작은 원을 그렸다.

초류빈의 마음을 동그라미 속에 사로잡아 넣으려는 듯 초류빈은 홀연 다시 빙긋이 웃었다.

"오늘은 예상외로 얌전하군."

설소하의 안색은 복숭아빛으로 변해 있었다.

"저는 원래 얌전한 여자인 걸요."

초류빈은 야릇한 눈빛을 발하며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저었다.

"낭자는 이미 남자로 하여금 능동적인 행동을 취하게끔 하는 요령을 터득했단 말이오?"

설소하는 갑자기 숨소리가 촉급해지더니 음성이 떨렸다.

"그럼...당신은 지금...당장 저를....."

초류빈은 여전히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눈빛은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가웠지만 입가에 띠고 있는 미소만큼은 그다지 차지 않았다.

"만약 내가 낭자를 원한다면....."

설소하는 별안간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당신은 그럴 리가 없어요. 당신은 성인군자이니까요. 안 그래요?"

초류빈은 담담하게 웃으며 앞으로 한걸음 내디뎠다.

"나는 여지껏 군자노릇을 한 번밖에 하지 않았소. 그 한 차례 군자노릇을 한 후 나는 삼 일 동안이나 후회를 했소."

설소하는 계속 눈웃음을 치며 도망가려는 자세였다.

그러나 초류빈은 이미 덥석 그녀의 손을 낚아채었다.

"알고 보니 낭자는 비단 남자로 하여금 능동적인 행동을 취하게 하는 요령을 터득했을 뿐 아니라 한술 더 떠 도망치는 묘기까지 배웠군."

남자가 모종의 행위를 원할 때 여자가 피한다면 그것은 남자의 욕망을 더욱 부채칠하게 된다.

설소하는 신음에 가까운 교성을 지르며 뜨거운 입김을 뿜어냈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이 가르쳐 준 거예요. 당신이 아니면 제가 이런 행동을 취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나는 낭자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군. 그리고 낭자 역시 너무나 빨리 배웠고....."

초류빈은 말을 하다 말고 돌연 그녀를 밀어내며 야릇한 눈길을 창문 쪽으로 던졌다.

"오늘의 구경거리는 이미 막이 내렸으니 자네가 만약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내일 일찍 와서 속편을 구경하도록 하게."

그러자 창 밖에선 즉시 냉소소리가 들려왔다.

"귀하가 여자를 다루는 수단은 과연 고명하군. 귀하의 칼이 역시 그 수단과 같이 고명하길 바랄 뿐이오."

상대방의 마지막 음성은 이미 십 장 밖에서 들려왔다.

설소하는 안색이 약간 변했다.

"유룡생이군요!"

"낭자는 그가 질투를 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소?"

그의 말에 설소하는 눈에서 싸늘한 빛을 내뿜으면서 코웃음을 쳤다.

"그가 무슨 자격으로 질투를 하죠? 스스로 명문의 자제라 자처하는 자가 남의 말을 엿듣는 파렴치한 행동을 하다니 나중에 다시 만나면 거들떠 보지도 말아야겠어요."

초류빈은 눈꼬리를 살짝 치켜세웠다.

"만약 그가 어장검을 다시 요구한다면 어떻게 하겠소?"

설소하는 자신있는 말투로 대답했다.

"제가 설사 어장검을 그의 앞에 내던져도 그는 아마 감히 주워가지 못할 거예요."

"음....."

초류빈은 재미있다는 듯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설소하는 코를 찡긋하며 다시 말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그런 사람은 개와 같이 천골(踐骨)을 타고 났어요. 누가 그를 때리고 욕할수록 그는 더욱 꼬리를 흔들면서 뒤를 졸졸 따라다니죠."

"개 한 마리가 늘 따라다니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겠군."

초류빈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소하는 아쉬움이 가득찬 눈빛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정말...가실 생각인가요? 왜 좀더 저에게 시간을 주지 않죠?"

초류빈은 입가에 잔잔한 고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직시했다.

"내가 계속 이곳에 앉아 있다가 개한테 물리면 나만 손해가 아니겠소?"

"흥, 그가 감히....."

설소하는 분연한 기색으로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유룡생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바로 그때, 멀리서 유룡생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쪽의 구경거리는 막을 내렸지만 이쪽 구경거리는 방금 막을 올렸소. 귀하는 구경을 할 생각이 없소?"

초류빈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나직이 설소하에게 속삭였다.

"자, 보시오. 내가 오래 이곳에 앉아 있지 못하도록 갖은 수단을 동원하지 않소?"

설소하는 창 앞쪽을 노려보며 한스럽게 말했다.

"정말 귀찮아 죽겠어요!"

그러더니 초류빈의 손을 꼭 쥐며 속삭였다.

"하지만 우린 내일이 있잖아요? 내일밤 잊지 말고 일찍 오세요."

초류빈은 미소를 남긴 채 그녀의 방을 나왔다.

유룡생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초류빈이 매림으로 발을 들여놓자 멀리서 욕설과 고함소리가 바람결에 실려왔다. 그는 고함소리를 지르는 장본인이 다름아닌 텁석부리 사나이임을 알고 지체없이 옷자락을 걷어붙이며 연자삼초수(燕子三抄水)의 경신술을 전개해 앞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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