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05 소이비도 제1권 함박눈이 내리는 밤




함박눈이 내리는 밤



초류빈은 술주전자를 들어 나머지 술을 단숨에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그리고는 또 심한 기침을 쉬지 않고 했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서 병자에게서나 볼 수 있는 홍조가 다시 떠올랐다.

초류빈은 한 손을 들어 가슴을 쓰다듬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유성(有星), 벽운(碧雲), 나는 절대 당신들을 탓하지 않겠소.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나는 절대로 당신들을 탓하지 않을 것이오. 나는 당신들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소. 모든 잘못은 나 한 사람에게 있소."

바로 이 때였다.

갑자기 퉁! 하면서 무거운 물체가 땅에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면서 한 사람이 문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나타난 사람은 몸집이 마치 고깃덩어리처럼 비대했을 뿐만 아니라 두 다리가 없어 둥글둥글한 호박처럼 보였다. 그의 온 몸은 때와 먼지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수염과 머리카락이 한 데 뒤엉켜 있어 비할 데 없이 더러웠다. 여기에다 몇 년 동안 전혀 목욕을 하지 않았는지 온 몸에서 악취가 심하게 풍겨 나오고 있었다.

초류빈은 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친구, 친구가 만약 밥을 얻어먹으러 온 것이라면 시간을 잘못 택했소."

하지만 이 괴인은 전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두 손으로 땅을 집더니 깡충 몸을 날려 난롯가로 왔다. 괴인이 이렇게 뛰는 모습은 마치 메뚜기나 벼룩이 뛰는 것처럼 하나도 힘이 들어 보이지 않았다.

초류빈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귀하도 역시 금사갑을 얻기 위해 온 것이오?"

괴인은 여전히 들은 척 만 척 다시 한번 도약하여 홍한민 앞으로 날아갔다.

초류빈의 음성이 서릿발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친구, 나의 손에 있는 이 칼은 과일이나 깎아 먹는 칼이 아니오. 만약에 귀하가 손을 멈추지 않는다면 아마 여기 시체가 하나 더 늘어날 것이오."

괴인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홍한민의 몸에서 금사갑을 벗기는 것이 아닌가. 금사갑은 보기에 금칠을 한 갑옷에 불과하여 별로 특이한 데가 없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있었다. 즉, 초류빈은 괴인이 갑옷을 벗기는 것을 보고도 그 자리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의 수중에 있는 칼도 그냥 들려져 있었다. 다만 그의 두 눈에선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경악의 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괴인은 두 손으로 금사갑을 꽉 껴안은 채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핫! 이거야말로 어부지리로군. 이 보물이 내 손에 들어오게 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초류빈의 입에서 싸늘한 말이 새어나왔다.

"나는 아직 이곳에 있고 칼을 아직 내 수중에 있소. 그런데도 귀하가 그런 말을 하다니 너무 이르다고 생각지 않소?"

괴인은 다시 훌쩍 몸을 날리더니 초류빈 앞으로 구르듯이 다가와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음흉스럽게 웃었다.

"으흐흐흐...당신의 칼이 손에 있다면 어째서 나를 죽이지 않는것이오? 소문에 의하면 초탐화의 보도는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다고 하던데 당신이 만약 던지면 나는 결코 피하지 못할 것이 아니겠소?"

"나는 당신이 귀엽다고 느껴져 차마 손을 쓸 수가 없구려."

이 말을 들은 괴인은 다시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당신이 얘기하고 싶지 않다면 내가 대신 얘기해 주겠소."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딴 사람들은 당신이 중독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나만은 당신이 중독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다만 당신이 상상 외로 침착하여 다른 사람들이 속은 것이오."

초류빈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 말없이 괴인을 노려 보았다.

괴인은 다리가 없어 아주 작은 키라 초류빈을 올려다 보며 말을 계속했다.

"그렇지만 나까지 속일 수는 없소. 왜냐하면 나는 당신이 마신 술에는 색도 없고 맛도 전혀 없는 독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오. 설사 당신의 코가 개보다 더 예민하다 해도 절대 그 냄새는 맡을 수가 없소."

"귀하는 어떻게 그리 잘 알 수 있소?"

"헤헤헤...물론 나는 누구보다 잘 알 수밖에 없지. 독을 쓴 자가 바로 소생이니까 말이오."

초류빈은 안색이 변하지 않았지만 눈가에는 가벼운 경련이 파르르 일어났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 때 초류빈은 한숨을 내뿜으면서 입을 열었다.

"하루가 가기도 전에 나는 여러 가지 상상도 못할 일을 겪었소. 보아하니 오늘 나는 운수가 괜찮은 것 같구려."

괴인의 음침하고 눈꼽이 낀 눈이 하얗게 변했다.

"귀하는 이제 누구의 손에 의해 죽게 되는지 알고 싶지 않소?"

초류빈은 고소를 지으며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소. 죽어도 누구 손에 죽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소?"

괴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귀하께서는 견식이 넓으니 강호에서 가장 비겁하고 파렴치한 자가 일곱 명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겠지?"

이 말을 들은 초류빈의 얼굴이 처음으로 약간 일그러졌다.

"칠묘인(七妙人) 말이오?"

괴인은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크게 웃었다.

"헤헤헤...맞았소. 그 남녀 일곱 명은 남도여창으로 더할 수 없이 파렴치한 자들이오. 딴 것은 배우지 못했지만 독을 사용하고 남을 속이며 처녀를 강간하는 등 온갖 못된 짓을 하는 데는 강호에서 가장 독보적인 존재들이지요."

초류빈은 눈을 크게 뜨고 괴인을 주시하며 물었다.

"귀하도 그 칠묘인 중의 한 사람이오?"

괴인은 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칠묘인 중에서도 가장 비겁하고 몰염치한 자가 있는데 당신은 그가 누구인지 아시오?"

초류빈은 마른 침을 삼키며 서슴없이 말했다.

"묘랑군(妙郞君) 화봉이오."

괴인은 시커먼 얼굴 속에서 징그럽게 웃었다.

"헤헤헤...약간 틀렸소. 그의 정확한 이름은 흑심묘랑군(黑心妙郞君)이오. 그놈은 아는 게 하나도 없고 오직 양가댁 부녀들을 속?여 몸과 재산을 빼앗는 것만 알고 있소. 그리고 독으로 논한다면 아마 극락동의 오독동자에 비해 손색이 없지요."

"귀하는 그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소?"

"물론이지요. 내가 바로 그 사람이고 그 사람이 바로 나니까. 헤헤헤....."

초류빈은 흠칫 몸을 떨었다. 그제서야 그의 안색은 완전히 변했다.

화봉은 사악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귀하는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하시오? 흑심묘랑군이 어째서 이 꼴이 되었는지 말이오."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양가댁 규수들을 유혹해 몸을 빼앗고 재물을 갈취할 수 있겠소? 그동안 당신이 겪었던 여자들은 모두 장님이 아니었소?"

초류빈은 장탄식을 하며 물었다. 그의 이런 표정에는 의혹이 가득차 있었다.

화봉은 씨익 웃으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또 틀렸소. 내가 유흑했던 여자들은 장님이 아닐 뿐더러 모두가 매우 아름다웠소. 다만 어떤 사람이라도 두 다리가 잘린 채 지하실에 갇혀 매일 한 끼씩 소금도 치지 않은 돼지고기를 먹다 보면 아마 몇 년 후에는 나처럼 될 것이오."

초류빈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렇다면 자면이랑 손육과 장미 부인이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말이오?"

화봉은 잠시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가 자조적인 웃음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아까 손육이 당신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나도 한마디 하겠소. 아마 이번 이야기가 더 재미있을 것이오."

"어디 한번 해 보시오."

화봉은 초류빈의 맞은편 벽에 비스듬히 기대앉으며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운수가 매우 나빴소. 귀신에게 홀려 털보의 마누라와 눈이 맞게 된 것이오. 여기에다 설상가상으로 아이까지 배게 되자 그녀는 꼭 나를 따라가겠다고 매달리게 되었소."

초류빈의 표정에 아연 놀라운 빛이 나타났다.

"오라! 이제 보니 자면이랑이 말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군. 그가 당신을 대신해서 누명을 썼지요?"

화봉은 당치도 않다는 듯이 손을 홰홰 저었다.

"그는 한 가지 잘못 말한 것이 있소."

"그게 뭐요?

"나는 그녀를 갈취하지 않았소. 설사 그런 마음을 가졌다 해도 그건 불가능한 것이었소. 장미 부인, 그녀는 귀신같이 약아 도저히 손을 쓸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소....."

잠시 말을 멈춘 그는 허공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때 털보는 이미 모든 것을 눈치채고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소. 나는 궁리 끝에 나의 죄를 뒤집어 씌울 사람으로 자면이랑 손육을 택해 장미 부인으로 하여금 그를 유혹하도록 한 것이오. 그녀는 처음에 자면이랑의 인물이 못났다고 하면서 거절했으나 나의 계속되는 권유에 어쩔 수 없이 승낙하고 말았소."

초류빈은 탄복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 보니 당신 두 사람은 서로 내통을 하고 있었군."

화봉은 쓰다 달다 얘기하지 않고 자기 말만 계속했다.

"만약 당시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냥 갔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거요. 그러나 장미 부인이 가진 재물이 너무 많은지라 나는 차마 그대로 놓아 줄 수가 없었소. 일이 안정되면 내가 찾아간다고 했지요. 그때 가서 자면이랑을 처치하고 같이 편안하게 살자고 그녀와 약속을 했소."

여기까지 말한 그는 회한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나는 여자의 마음이 갈대와 같이 쉽게 변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소. 그녀는 자면이랑과 밤낮을 같이 지내다가 자면이랑에게 애정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오. 그래서 내가 그녀를 찾아오자 그들은 힘을 합쳐 나의 두 다리를 자른 후 지하실에다 가두어 두고 십 년 동안 산송장이 되도록 한 것이오."

초류빈은 미흡한 듯이 다그쳐 물었다.

"한데 그녀는 어째서 그 당시 당신을 죽이지 않았소?"

화봉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여자의 마음을 알고 있다면 어찌 이런 꼴을 당했겠소?"

그는 재차 땅이 꺼질 것 갈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전에 나는 내가 여자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해 왔기 때문에 오늘 같은 꼴을 당했소. 만약 자신이 여자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는 남자가 있다면 그가 받는 죄는 지극히 참혹한 것일 거요."

초류빈은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는 아까 것보다 확실히 더 재미가 있군."

화봉은 정색을 하더니 여유있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가장 재미있는 일에 대해서 아직 듣지 못했소."

"그게 무엇이오?"

화봉은 키득키득 웃으며 머리가 가려운지 긁적긁적 긁었다. 허연 비듬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당신이 나의 독에 걸린 이상 비단 힘을 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세 시진 후면 죽게 된다는 것이오. 그래서 나는 지금 당신을 죽이지 않겠소. 당신으로 하여금 이곳에 앉아 천천히 죽음의 맛을 음미하도록 해 주겠소."

"하하하...그럴 필요는 없소.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십 차례나 죽음의 맛을 보아왔으니까."

화봉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자신있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틀림없이 마지막이 될 것이오."

초류빈은 웃음을 짓지 않았다.

"그렇다면 귀하는 어서 가 보시오. 다만...밖에 눈보라가 휘날리고 천지가 온통 얼음에 뒤덮였는데 귀하가 그래 가지고 얼마나 갈지 궁금하구려."

화봉은 금사갑을 거두며 빙글빙글 웃었다.

"귀하는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다리가 없는 사람도 말을 탈 수가 있소. 나는 밖에 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울음소리가 우렁찬 것으로 보아 매우 좋은 말인 것 같소."

말을 마친 그는 만면에 흐뭇한 미소를 띤 채 밖으로 기어나가다가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부디 안녕히 계시오. 안녕히....."

초류빈은 빙긋이 맑은 미소를 지으며 답례했다.

"살펴 가시오. 밖까지 모셔다 드리지 못하는 점을 용서하시구려."

이윽고 요갈하던 말발굽 소리가 점차 멀어져 갔다.

초류빈은 의자에 앉은 채 상 위에 놓인 술주전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두 주전자 중에 하나는 이미 비어 있었고 하나에는 아직 술이 남아 있었다.

초류빈은 주전자를 들어 냄새를 맡고 또 한 모금 맛을 보더니 감탄한 듯이 중얼거렸다.

"과연 무색무미하군. 이 자는 독을 쓰는 솜씨가 괜찮군."

이렇게 중얼거린 그는 다시 한 모금 마시더니 술맛을 감상하는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으음...술맛도 괜찮군. 하기사 한 잔을 먹어도 죽고 한 주전자를 다 마셔도 죽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이 술을 남겨 둘 수가 있겠는가."

하고는 단숨에 한 주전자의 술을 다 마셔 버리고 말았다. 입가에 흘러내린 술을 소매로 쓱 닦은 그는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초류빈...아! 초류빈...하기사 나는 벌써 죽었어야 했다. 죽는 것! 그까짓 게 뭐냐? 하지만 여기 이 자들과 같은 주방에서 마지막을 보낼 수야 없지 않은가."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가누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눈이 덮인 땅에는 동남쪽으로 말발굽이 나 있었다.

보아하니 화봉은 동남쪽으로 달려간 것 같았다.

초류빈은 가장 깨끗하게 눈이 쌓인 곳을 골라 정좌를 하고 앉아, 품에서 아직 미완성인 나무인형을 꺼냈다. 그 인형은 이미 얼굴의 윤곽이 잡혀 있었다. 인형의 두 눈은 마치 초류빈을 바라보는 것 같았고 게다가 눈언저리에는 깊은 수심이 서려 있는 것도 같았다.

초류빈은 나무인형을 내려다보며 마치 사람을 앞에 두고 하는 말p처럼 속삭였다.

"나를 쳐다보지 마시오. 나는 구제할 수 없는 주정뱅이이며 떠돌이요. 당신이 유성에게 간 것은 확실히 잘한 것이오. 잘못이 있다면 오직 나에게만 있소."

중얼거리기를 마친 그는 그 인형을 완성시키기 위해 다시 칼을 인형에다 대었다. 그러나 이미 그의 손은 전혀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먹구름이 낀 하늘에서 다시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초류빈은 계속해서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낮은 소리로 한 사람의 이름을 뇌까렸다.

"아...벽운! 벽운....."

이 소리를 벽운이란 여인이 들을 수 있을까? 없다! 벽운은 절대로 들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심한 기침소리를 듣고 달려온 사람이 있었다. 바로 텁석부리 장한이었다.

텁석부리 장한은 초류빈을 업은 채 말발자국을 따라 동남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두 시진 내에 두 다리가 잘린 사람을 찾으면 나는 살 수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가 술에다 독을 탄 이상 해독약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초류빈이 장한에게 마지막으로 말한 한마디였다.

장한은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갔다.

장한의 두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은 이미 벌써 얼음이 되어 있었지만 칼날 같은 바람은 쉬지 않고 그의 얼굴을 계속 후려치고 있었다. 이때 싸늘한 바람을 타고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텁석부리 장한은 먼 곳에서 들려오는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안색이 대뜸 변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비명이 난 곳을 향해 달려갔다. 얼마 후 그는 눈이 덮인 소나무숲 밖에 한 필의 말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장한은 계속해서 숲 속으로 달려들어갔다. 숲 속으로 달려 들어가던 장한은 무엇을 보았는지 흠칫하더니 이내 제자리에 굳어져 버렸다.

그는 묘랑군 화봉을 기어코 찾았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죽은 시체였다.

화봉의 몸은 완전히 벌집이 되어 있었다. 그의 몸에는 각양 각색의 암기인 비표(備漂), 화살, 은침, 오망주 등등이 수없이 꽂혀 있었다.

텁석부리 장한의 미간이 절로 일그러졌다. 이 사람이 너무도 처참하게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두 다리가 절단된 채 돼지와 같이 십여 년이나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지가 겨우 얼마 되지도 않아서 다시 이런 일을 당하고 만 것이다.

텁석부리 장한은 비분을 금치 못했다. 왜냐하면 이 자의 죽음으로 인해 초류빈이 같이 죽게 된다는 것을 생각한 때문이었다.

그는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바로 이놈입니까?"

그는 이 죽은 자가 초류빈이 찾고자 하는 사람이기를 희망했다.

초류빈은 장한의 등에 업힌 채 미약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다네."

텁석부리 장한은 부드득 이를 갈더니 급히 장삼을 벗어 나무 밑에다 깐 후 초류빈을 앉혔다. 그리고는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해독약이 그의 몸에 있을지 모르니 제가 가서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초류빈은 씁쓸하게 웃었다.

"조심하게, 암기에는 대부분 독이 묻어 있으니까 "

그는 자신의 생명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보다 남의 생명에 대해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텁석부리 장한은 그 말을 듣자 가슴 한구석에서부터 뜨거운 감격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비오듯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눈물을 가까스로 억제하며 화봉의 시체 앞으로 달려갔다. 화봉의 시체 옆으로 가서 한참 온몸을 뒤지던 장한은 문득 동작을 멈추며 맥이 풀린 듯 잠시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없는가?"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을 때 텁석부리 장한은 목이 메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초류빈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나는 내 운수가 결코 좋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네. 생각해 보게. 십여 년 동안 감금되어 있었던 사람에게 무슨 해독약이 있겠나?"

텁석부리 장한은 자기의 머리를 탕탕 치며 치를 떨었다.

"이놈을 해친 자가 누구란 말인가? 이 자를 해친 자가 누구라는 것을 알면...해독약은 이놈을 죽인 자가 갖고 간 것이 분명하다."

초류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 눈을 감았다. 이런 그의 얼굴에는 고독함이 가득차 있었다. 잠시 묵묵히 있던 그는 알쏭달쏭하게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고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네."

텁석부리 장한은 용기를 주듯 확신한다는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몸에 꽂힌 암기들은 평상시 자주 보던 것들입니다. 강호의 인물이라면 누구라도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오망주는 관외 사람이 사용하는 것이지만 근래에 와서는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초류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눈을 감자 텁석부리 장한은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몸에 이렇게 많은 암기가 꽂혀 있는 것으로 보아 한 사람이 손을 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초류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호흡은 점점 미약해져 마치 평온한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았다. 또 그는 딴 사람의 안위에 대해서는 끔찍하게 생각하나 자신의 생사에 대해서는 전혀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장한은 화봉의 시체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

"도련님! 저는 살인을 한 자가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초류빈은 서서히 눈을 뜨더니 무표정하게 장한을 바라보았다.

텁석부리 장한은 급급히 초류빈의 앞으로 달려갔다.

"손을 쓴 사람은 한 사람입니다. 이 열세 가지 암기는 오직 한 사람이 방출한 것입니다."

말을 멈춘 장한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흥분된 어조로 계속 이었다.

"그 사람이 발해 낸 열세 가지의 암기 중에서 어떤 한 가지라도 능히 화봉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열세 가지를 모두 던져야 직성이 풀렸던 모양입니다. 이런 미치광이 같은 잔인성을 지닌 사람이 강호에 또 누가 있겠습니까."

그제서야 초류빈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맞았네. 단 한 명, 바로 천수나찰(千手羅刹)이지. 묘랑군이 결국 여자의 손에 의해 죽었군."

텁석부리 장한은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그렇습니다. 천수나찰을 제외하고는 열세 가지 암기를 동시에 발해 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갑자기 뚝 그치더니 초류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물었다.

"도련님께선 벌써 아시고 계셨습니까?"

초류빈의 입가에 고소가 떠올랐다.

"한 번 만나보았지만 무슨 소용이 있겠나? 천수나찰의 행적이 묘연하여 지금 어디에 가 있는지 알 수조차 없지 않은가?"

텁석부리 장한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외쳤다.

"아닙니다. 우린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찾아내야 합니다."

초류빈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찾을 필요없네. 그리고 자네는 마실 술이나 좀 구해 주게."

장한의 놀란 얼굴을 바라보면서 초류빈은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다.

? "죽기 전에 한번 한없이 마시고 싶군. 그리고 지금은 매우 피로해. 그저 편안하게 쉬고 싶을 뿐이네."

텁석부리 장한은 갑자기 초류빈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런 그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도련님, 저는 도련님이 매우 피곤해 하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몇 년이 지나는 동안 도련님은 한 번도 유쾌하신 적이 없었지요? 고통과 슬픔의 나날을 보내는 사람으로서 어찌 피로를 느끼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는 울먹이며 초류빈의 어깨를 부축하더니 강경하게 말했다.

"하지만 도련님께선 절대 돌아가셔서는 안 됩니다. 만약 도련님께서 이대로 무의미하게 돌아가신다면 떠돌이 술주정뱅이라는 악명(惡名)을 벗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구천에 계신 도련님께서 어찌 마음이 편안하시겠습니까?"

드디어 초류빈의 질끈 감긴 두 눈을 뚫고 눈물이 흘러내려 왔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떠돌이 술주정뱅이면 어떤가? 어쨌거나 군자를 자칭하는 위선자(僞善者)보다는 낫지 않은가?"

텁석부리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 어느 부분은 이미 혹독한 추위에 얼어붙어 있었다.

"하지만...도련님께서는 원래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도련님의 좋은 점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자포자기하려는 것입니까? 설벽운(薛碧雲)이란 여자 때문입니까? 그것이 과연 가치가 있는 일입니까?"

초류빈은 번쩍 눈을 떴다. 그의 두 눈에서 무서운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닥쳐라! 네가 감히 그녀의 이름을 부르다니....."

텁석부리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잘못했습니다. 도련님, 용서해 주십시오."

초류빈은 잠시 텁석부리를 노려보더니 다시 두 눈을 감으면서 탄식을 내뿜었다.

"좋네! 자네가 꼭 찾겠다면 우리 찾으러 가세. 하지만 이 넓은 세상 어디 가서 그녀를 찾는단 말인가?"

텁석부리는 벌떡 뛰쳐 일어나 힘있게 말했다.

"천지신명께선 결코 저희들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말을 마친 그는 막 초류빈을 업으려고 하다가 대경실색하면서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앗!"

알고 보니 바로 초류빈이 앉아 있는 나무 위의 가지에 한 구의 시체가 걸려 있었던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벌거숭이가 된 여자의 시체였다.

이 여자의 몸은 완전히 얼어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뽀족한 창에 가슴이 찔린 채 나무에 박혀 있었다.

초류빈과 텁석부리 장한은 지상(地上)에 있는 화봉의 시체만을 주의했기 때문에 나무 위에 걸려 있는 벌거숭이 여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텁석부리는 훌쩍 몸을 날려 나무 위로 올라가더니 단번에 시체를 끌어내렸다.

여자의 얼굴에는 이미 살얼음이 얼어 있어 마치 투명한 유리를 뒤집어 쓴 것처럼 보였다.

나이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작은 몸과 얼굴의 형태로 보아 매우 아름다운 여인인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초류빈은 잠시 여인의 시체를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과연 그녀를 찾았군."

텁석부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으드득 갈았다.

"천수나찰도 악독하고 잔인하지만 천수나찰을 죽인 자는 더욱 악랄하군요. 그런데 왜 옷을 벗겼을까요?"

"그건 그녀가 입은 옷이 너무 값지기 때문일 걸세."

텁석부리는 그제서야 생각이 났는지 두 눈을 번뜩였다.

"그렇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천수나찰은 의복을 가장 중요시 한다더군요. 그녀가 입은 옷은 모두가 금이나 진주, 아니면 옥으로 장식되어 있다고 합니다."

"만약 사슴에게 녹용이 없고 코끼리에게 긴 상아가 없다면 사냥꾼들이 무엇 때문에 그것을 잡으려 하겠는가?"

"살인을 한 자는 금사갑을 쟁취하기 위해 이 여자를 죽인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금사갑 같은 보물을 얻고도 천수나찰의 옷을 벗겨간 것으로 보아 욕심이 대단한 자가 분명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욕심이 많은 사람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자네의 말이 맞네. 오직 한 사람이지."

"관 속에 들어가서도 손을 내밀어 돈을 요구할....."

"자네, 천수나찰의 가슴에 꽂힌 창을 뽑아 보게."

텁석부리는 즉시 시키는 대로 창을 뽑았다. 그것은 놀랍게도 창날이 순금으로 되어 있었으며 심지어는 귀중한 비취까지 박혀 있었다.

초류빈이 의미심장한 투로 물었다.

"시약선(施躍先)은 금품을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있어 사람을 죽인 후 옷까지 벗겨갔지만 그가 과연 이렇게 값진 창을 버리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텁석부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강호에서 이렇게 화려한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단 한 명 화화태소(花花太少) 반소안밖에 없지 않습니까?"

"틀림없네. 이것으로 보아 시약선과 반소안 두 사람의 짓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네."

"두 사람 중에 한 명은 금품을 목숨처럼 여기며 또 한 명은 금품을 돌이나 흙처럼 여기고 있는데 어떻게 한 데 어울릴 수 있겠습니까?"

"반소안은 명성이 대단할 뿐만 아니라 의식주 모든 것에 대해 견식이 대단하네. 시약선이 그를 따라다니기만 하면 음식을 푸짐하게 얻어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리라는 존칭까지 받을 수가 있지. 이렇게 좋고 편리한 일을 시약선이 어찌 마다고 하겠는가?"

그러자 텁석부리는 무릎을 치면서 급히 말했다.

"그럼 이젠 일이 좀 쉬워지겠군요. 이렇게 추운 날씨에 반소안은 절대 말을 타지 않고 물론 걷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는 십중팔구 마차를 탄 것이 분명하니 곧 쫓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숲 밖, 눈 덮인 땅에는 과연 말발굽과 마차바퀴 자국이 나 있었다. 바퀴와 바퀴 사이의 간격으로 보아 그들은 매우 큰 마차를 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런 마차는 매우 편안하기는 하나 그다지 빠르지는 못하다.

텁석부리는 재차 정신을 가다듬더니 초류빈을 업은 채 미친 듯이 달려갔다. 이번에는 일정한 목표가 있어 쫓아가기가 비교적 쉬웠다. 마차바퀴 자국만 따라가면 되는 것이었다.

날이 점차 어두워지는 가운데 큰길에는 행인의 모습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텁석부리는 신법을 전개하여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비록 등에 한 사람을 업고 있기는 했지만 속력은 더할 수 없이 신속하고 경쾌했다.

이렇게 뛰어난 경신술을 지닌 사람이 남의 하인(下人)일 줄이야 누구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이렇게 고명한 경신술을 지닌 자라면 결코 무명소졸이 아니라는 것도 쉽게 알 수 있으리라.

얼마나 달렸을까? 갑자기 마차 바퀴 자국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텁석부리는 달려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속도를 늦추고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았다. 약 오 리 정도를 되돌아 간 텁석부리는 마차가 도중에서 옆으로 비켜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텁석부리는 처음 이 사잇길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사잇길의 양쪽이 향나무로 가득차 있고 그 입구에 망부석까지 서 있는 것이 어느 부잣집 능(陵)으로 향하는 길 같았기 때문이다.

이 길은 막다른 길이었다. 그 길의 끝에는 돌로 된 거대한 무덤이 하나 있었다. 마차는 바로 그 무덤 앞에서 정지해 있었다. 그러나 마차를 끌던 말은 온데간데 없고 짐승의 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있는 세 명의 장한이 마차 부근에 죽어 나자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마차 안에는 안색이 창백하고 나이가 사십 전후인 데다 깨끗한 용모를 지닌 중년인이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 역시 죽어 있었다. 중년인의 손에 비취로 된 값진 반지가 끼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자가 바로 금옥당(金玉堂)의 패가자(敗家子) 반소안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의 옆에는 또 묘령의 두 여인이 있었는데 그들 역시 반소안처럼 모두 중수법(重手法)에 의해 사혈이 찍혀 죽어 나뒹굴고 있었다.

마차 앞에 쓰러져 있는 세 사람은 강한 장풍에 의해 죽었다.

그렇다면 이건 또 누가 저지른 살인이란 말인가?

"혹시 시약선이....."

텁석부리는 막 입을 열려다가 무덤의 옆쪽으로 또 하나의 시체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시체는 대머리였는데 눈 위에 엎드린 채 죽어 있었으며 두 주먹을 꽉 쥔 것으로 보아 죽기 전에 무엇인가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쓴 것 같았다.

이 자는 다름아닌 시약선이었다.

초류빈은 탄식을 터뜨리며 경고하듯 입을 열었다.

"사람이란 도둑질이나 계집질은 해도 별 상관이 없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는 것이네. 그렇지 않으면 반소안처럼 누구 손에 죽었는지조차 모르고 죽는 결과를 낳게 되네."

텁석부리는 달려오느라고 더워졌는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쓱 닦았다.

"도련님께선 지금 반소안이 시약선에 의해 죽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초류빈은 서슴지 않고 머리를 끄덕였다.

"반소안의 편안하고 행복한 표정을 보았나? 그는 두 미인의 품에 안겨 한창 재미를 볼 때 사혈을 찍혀 죽었네. 이 마차 안에는 시약선과 반소안 두 사람뿐이었는데 시약선이 손을 쓰지 않았다면 또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초류빈은 텁석부리가 말을 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반소안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라 있지 않은가? 그들의 표정으로 보아 죽기 전까지만 해도 시약선이 독수를 쓸 줄 믿지 않았다는 것이네."

초류빈은 이어 두 명의 여인을 가리켰다.

"특히 이 두 여자를 보게. 눈과 입을 크게 벌린 채 마치 놀라움에 그냥 혼이 빠져 죽은 것 같지 않은가?"

여기까지 말한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이 사람은 재물은 중요시해도 여자에 대해서는 아까워하는 줄 모르는군. 미인이 황금보다 사랑스럽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 같네."

"그러나....."

초류빈은 텁석부리의 말을 가로막았다.

"시약선은 지금껏 반소안에게 많은 덕을 입으면서 부러울 것이 없었지. 그런데 이번에 반소안이 금사갑을 요구하자 시약선은 안 된다고 거절을 할 수가 없었네. 그래서 시약선은 반소안을 처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급히 독수를 내린 것이었네."

텁석부리는 두 번이나 무엇인가 얘기를 하려 했지만 번번히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초류빈이 말을 다 하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시약선도 죽지 않았습니까?"

초류빈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남을 살해하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남에 의해 살해되네. 시약선이 살인을 할 때 어쩌면 한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네. 그 자를 발견한 시약선은 그 자의 입을 막기 위해 다시 독수를 전개했지. 그러나 그는 상대를 죽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자기가 죽고 말았네."

텁석부리는 한 차례 몸서리를 쳤다.

"시약선은 공력이 그리 약하지 않는데 도대체 누가 그를 죽였을까요?"

이렇게 말한 그는 천천히 시약선의 시체 앞으로 가서 그의 시체를 살폈다. 시약선의 몸에서는 별다른 상처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목 한가운데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다. 그것은 매우 둔한 쇠붙이에 의해 뚫린 것이었다.

초류빈은 텁석부리에게 업힌 채 잠시 시약선의 시체를 내려다보더니 만면에 밝은 미소를 띠었다.

"이제보니 그가 한 짓이었군."

텁석부리도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낭천도령의 검법은 과연 전광석화처럼 빠르군요. 시약선이 죽은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초류빈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잘 됐군. 정말 잘 되었어. 금사갑이 그의 손에 들어갔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나? 가만히 보니 매화도도 재수가 매우 나쁘군."

그러자 텁석부리는 서두르기 시작했다.

"우리 지금 당장 낭천도령을 찾으러 가지요. 낭천도령은 멀리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초류빈은 어리둥절한 듯이 다그쳤다.

"무엇 때문에 그를 찾겠다는 건가?"

"바로 해독약....."

초류빈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말을 가로챘다.

"만약 화봉의 몸에 진짜 해독약이 있었고 천수나찰이 겁탈해 간후 다시 시약선의 손에 들어갔다면 지금 그것은 시약선의 몸에 있을 걸세."

"그건 왜 그렇습니까?"

텁석부리의 질문에 초류빈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낭천은 절대 남의 물건을 훔칠 사람이 아니네. 그가 금사갑을 갖고 간 것은 그것이 내 소유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일 것일세."

텁석부리는 두 여자의 손가락에 끼여 있는 비취 반지와 팔찌를 보더니 탄복한 듯이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것들은 값을 따질 수 없는 귀한 물건이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이곳에는 값이 나가는 것이지만 낭천도령께선 하나도 건드리지 않으셨군요."

초류빈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해독약이 시약선의 몸에 없다면 우리가 낭천을 찾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세."

텁석부리의 손은 절로 무섭게 떨려왔다. 그러나 망설일 수는 없다. 마지막 한가닥 희망을 걸고 그는 시약선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마지막 희망도 금방 허무하게 깨어지고 말았다.

시약선의 몸에는 해독약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 텁석부리는 손뿐만 아니라 온몸을 떨더니 심한 현기증을 느킨 듯 몸을 비틀거렸다. 텁석부리는 흐르는 눈물을 아랑곳하지 않고 마차 안의 시체를 모두 치우더니 초류빈을 마차에다 눕혔다.

초류빈은 마차 속에 누워 지붕을 올려다 보았다.

거기에는 뜻밖에도 두 줄의 글씨가 씌어 있었다.

<내가 당신을 위해 복수를 해 주었으니 그 대가로 당신의 말을 타고 가겠소.>

"후후후....."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리고는

"나는 처음에 그가 한 일이라고 가정을 했지만 이번에는 확정을 했네. 세상에 죽은 사람에게까지 폐를 끼치지 않고자 하는 사람은 오직 낭천뿐일세."

이렇게 말한 그는 가볍게 웃더니

"그 아이는 정말 사랑스러워. 다만 내가....."

하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텁석부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초류빈은 이후로는 또다시 그 사랑스런 청년을 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고 말하려 했던 것이다.

텁석부리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초류빈은 씁쓸한 표정으로 그를 위로했다.

"자네는 나 때문에 비통해 할 것 없네. 죽음이란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무서운 것이 아닐 걸세....."

잠시 말을 멈춘 그는 다시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나는 전신에 힘이 없다 뿐이지 마음은 매우 안정되어 있으니까 염려하지 말게. 지금은 그저 술을 좀 마시고 싶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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