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12 소이비도 제1권 흘러간 세월
흘러간 세월
주위는 또다시 앞서의 정숙함을 되찾았다. 유룡생은 떠났다.
초류빈은 창 밖의 야색(夜色)을 한참 바라보다가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젊은이, 나를 원망하지 말게. 사실 나는 자네를 구해 주고 있는 것이네. 만약 자네가 설소하와 함께 어울리면 자네의 일생은 완전히 끝나 버리고 마네."
그는 문득 설소하와 만나기로 했던 일이 생각나자 곧장 밖으로 나왔다. 그는 걷는 도중 유룡생이 떠나면서 하던 말을 생각했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설소하를 좋아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오. 그녀는 벌써 오래 전부터 나와...나와...당신은 무엇 때문에 낡은 신발을 신으려 하오?'
그러나 초류빈은 이렇게 대꾸했었다.
'자고로 옛부터 헌 신발은 새 신발보다 신기가 편하다고 하네 .....'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초류빈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설소하를 정말로 그런 여자를 좋아할 필요가 있는가? 초류빈은 생각하면 할수록 웃음이 나왔다. 그가 대문 밖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앞길의 숲 속에서 벌써 두 명의 청의시녀가 두 개의 초롱불을 들고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초류빈은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려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설낭자께서 낭자들보고 마중하라고 한 것이오?"
"부인께서 우리들에게 상공님을 청하랍시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왼쪽의 청의소녀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초류빈은 뜻밖인 듯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부인?"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긴장된 표정을 지으며 다그쳤다.
"어느 부인이오?"
왼쪽의 청의시녀가 재차 상냥한 어조로 대답했다.
"우리 장주에게는 한 분의 부인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오른쪽의 청의시녀가 뒤를 이었다.
"부인께선 상공께서 세속적인 예의를 싫어하시는 줄을 잘 알고 있어서 특별히 내당에다 몇 가지 안주를 마련했으니 어서 저희들을 따라오세요."
초류빈은 그 자리에 멍청하게 서서 과거를 회상해 보았다.
그의 눈앞에 불현듯 설벽운의 영상이 떠올랐다.
십 년 전.
그 작은 누각은 그가 가끔 가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누각 안의 대리석으로 만든 식탁 위에는 항상 그가 좋아하는 음식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음식들이 아직까지도 그의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것들은 바로 벌꿀로 만든 운퇴(雲腿:요리의 일종)와 통닭을 튀긴 것 등이었다. 운퇴는 푸른 접시에 담겨져 있고 통닭은 녹색 접시에 담겨져 있었다.
식탁 위에는 문이 하나 있었다. 그 문을 지나면 곧 그녀의 규방이 나타난다. 그녀가 규방에서 나타날 때는 항상 은은한 매화 향기를 풍겨 주곤 했었다.
지난 십 년 동안 그는 한 번도 그곳을 생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유는 만약 그렇지 않으면 호유성에게나 그녀에게나 전부 다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던 초류빈은 벌써 누각 앞에까지 당도한 자신을 발견했다.
누각의 창문을 통해 스며나오는 불빛이 매우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누각은 십여 년 전과 별다른 차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창살까지도 옛날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십 년이란 세월은 결국 흘러갔다. 세월은 한번 흘러가면 다시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초류빈은 주저했다. 그는 더 이상 이 누각으로 올라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어제 있었던 일 이후 그녀가 대체 무엇 때문에 자기를 불렀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지금 그는 확실히 그녀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올라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그를 찾든 간에 초류빈에게는 절대적으로 뿌리칠 이유가 없었다.
대리석으로 된 매끄럽고 반질반질한 식탁 위에는 벌써 그가 좋아하는 운퇴와 통닭이 놓여 있었다.
초류빈은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움찔 놀랐다.
지나간 십여 년 동안의 이별이 이 짤막한 순간에 또다시 십 년 전으로 되돌아 간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규방쪽을 응시하였다. 돌연 초류빈의 심장이 방망이질을 하는 것처럼 펄떡펄떡 뛰기 시작했다.
초류빈은 더 이상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아 즉시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바로 이때 설벽운의 나긋나긋한 소리가 들려왔다.
"앉으세요!"
음성, 그것은 십 년 전처럼 다정했다. 그러나 또 아주 생소한 것 같기도 했다. 그는 할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뒤이어 주렴으로 된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순간 초류빈은 호흡이 딱 멈춰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때 나타난 사람은 붉은 옷을 입고 창백한 얼굴을 한 호천강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규방 안에 있는 채 호천강에게 분부했다.
"어미가 한 말을 잊지 않았겠지? 속히 아저씨에게 술을 따라 드려라."
"예."
호천강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술을 따르면서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아저씨, 모든 것은 전부 소질의 잘못이옵니다. 아저씨, 이 소질의 실례된 점을 용서해 주십시오."
순간 초류빈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벽운, 벽운...당신이 나를 불러 온 이유가 바로 나에게 이런 쓰라린 고통을 주기 위함이오?"
그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어금니를 짓깨물었다.
호천강은 그런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또다시 또렷또렷하게 말을 꺼냈다.
"소질은 이후부터 더 이상 무공을 연마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사내대장부란 평생 동안 부모님의 슬하에서만 자랄 수는 없지 않아요? 아저씨는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소질에게 몇 가지 호신무술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
"호....."
초류빈은 암암리에 장탄식을 하면서 호천강에게 손을 뻗었다. 순간 한 자루의 작은 칼이 그의 식지와 중지 사이에서 나타났다. 설벽운은 규방 안에서 재빨리 명령했다.
"아저씨는 그 비도(飛刀)가 바로 호신부나 다름이 없으니 너는 속히 감사의 인사를 드려라!"
호천강은 즉시 두 손을 모아 인사를 했다.
"아저씨, 정말 감사합니다."
초류빈은 호천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정말 미치지 않는 곳이 없구나. 그런데 자식이 어머니를 대하는 마음은.....'
침중한 분위기와 답답한 분위기. 침중하기는 고통스러울 정도였고 답답하기는 질식을 할 정도였다.
청의소녀는 호천강을 데리고 갔다.
그러나 규방 안의 설벽운은 여전히 초류빈을 놓아 주지 않았다. 그녀는 무엇 때문에 초류빈을 여기에다 묶어 두려고 하는 걸까?
초류빈은 원래 예의에 구애를 받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유독 여기에 들어오기만 하면 항상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한다.
사랑이란 기묘한 것이라 때로는 총명하게 만들기도 하고 또 때로는 우둔하게 만들기도 한다.
밤은 서서히 깊어갔다. 설소하가 아직도 초류빈을 기다리고 있을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설벽운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무슨 다른 볼일이 있나요?"
초류빈은 엉겁결에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어...없소."
설벽운을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조용히 물었다.
"당신은 소하를 만나본 적이 있지요?"
"그렇소. 두...두 번 만났소."
설벽운의 청량한 목소리가 초류빈의 고막을 간지럽혔다.
"소하는 아주 가련한 아이에요. 그 애는 신세가 처량할 뿐만 아니라 또 만약 당신이 그의 부친을 보았다면 아마 곧 그녀의 불행을 알 수 있을 거예요."
초류빈은 신음 비슷한 소리를 이빨 사이로 흘려냈다.
"으음....."
그러자 설벽운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느 해 제가 사신애(捨身崖)로 가서 소원을 빌고 있을 때 마침 그녀가 사신애 밑으로 뛰어내리려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제가 간신히 그녀를 구해 주었어요. 한데 당신은 그녀가 왜 투신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알고 있나요?"
"모르겠소."
설벽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녀는 부친의 병 때문에 그랬어요."
설벽운은 잠시 멈추었다가 역시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그런 딸을 낳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에요. 저는 그녀를 동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탄복을 하고 있어요."
초류빈은 할 말이 없어 신음소리만 연발할 뿐이었다.
설벽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그녀는 용모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매우 총명해요. 그녀는 자?신의 출신이 너무 미천하여 무슨 일을 하든지 전부 다 남들이 흉본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초류빈은 강경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마 누구도 그녀를 얕보지 못할 것이오."
설벽운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것도 그녀가 노력을 했던 것의 한 결실이에요. 하지만 그녀는 나이가 너무 어리고 또 마음도 약하여 저는 그녀가 남에게 사기를 당할까 봐 걱정을 하고 있어요."
순간, 초류빈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었다.
'남들이 그녀에게 사기를 당하지 않는 것을 조물주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설벽운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저는 그녀에게 행복한 가정이 있기를 바래요. 그녀가 강호를 계속 방황하다가는 남에게 희롱을 당할 우려가 있으니까요."
초류빈은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물었다.
"당신은 어째서 그런 말을 나에게 하시는 거요?"
설벽운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좀 격앙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제가 왜 당신에게 그런 얘기를 하는지 당신은 정말 모르시는가요?"
초류빈은 잠시 규방쪽을 응시하다가 돌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알겠소. 하하하...이제 난 알겠소."
그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원래 설벽운이 그를 여기에다 붙잡아놓은 이유는 바로 그와 설소하가 만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들이 밀회한다는 사실은 유룡생이 그녀에게 알려주었던 것이다.
설벽운의 달콤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찌 되었든 우린 다년간의 친구예요. 그래서 저는 당신에게 한 가지 일을 부탁하고 싶어요."
초류빈의 속은 쓰렸다. 그러나 겉으로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의 뜻은 나에게 설소하를 찾아가지 말라는 것이오?"
설벽운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맞았어요."
초류빈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넌지시 물었다.
"당신은 내가 그녀에게 반했다고 생각하오?"
설벽운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당신의 뜻이야 어쨌든 다만 당신이 저의 부탁을 들어주기만 원해요."
초류빈은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시고 나서 침울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나는 구제할 길 없는 건달이오. 만약 내가 그녀에게 찾아가면 해를 가하는 결과가 될 것이오."
"그렇다면 당신은 승낙을 한 것이지요?"
초류빈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이를 악물고 말을 꺼냈다.
"당신은 내가 항상 남에게 해를 끼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모르시오?"
이때 돌연 그녀의 섬섬옥수가 주렴에 뻗쳐졌다. 이 섬섬옥수는 부드럽고 또한 매우 예술적인 면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너무 꼭 쥐었기 때문에 백옥 같은 손등 위에 파란 힘줄이 약간씩 솟아 나오기도 했다.
순간 주렴이 그대로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구슬이 바닥에 주르르 떨어져 흩어지고 말았다. 마치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는 음향과도 같이 말이다.
초류빈은 그 손을 한참 동안이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응시하다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더니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이젠 그만 물러가겠소."
설벽운의 손등에는 처음보다 힘줄이 더욱 세차게 솟아나왔다. 그녀는 몹시 격분된 상태인 듯했다. 그녀는 다소 떨리는 음성으로 초류빈을 힐책했다.
"당신은 기왕에 떠나갔으면 그만인데 왜 다시 돌아왔어요?"
여기까지 말을 하고 난 설벽운은 떨리는 목소리를 억제하느라고 잠시 말을 중단시켰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당신은 왜 이제 다시금 돌아와서 남의 가정에 불행하게도 파탄을 가지고 오는 거예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초류빈의 굳게 다물었던 입술에 파르르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자 설벽운이 갑자기 주렴 뒤에서 튀어나오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나의 아들에게 매를 가한 것만으로도 충분하잖아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또 그녀에게 해를 가하려는 것인가요?"
그녀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갑작스레 변하는 그녀의 안색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격동함과 고통스러운 빛이 잔뜩 서려져 있는 듯했다.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침착하지 못한 표정을 보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오직 설소하가 그녀의 전부이기 때문이란 말인가?
초류빈은 고개조차 돌리지를 않았다. 돌리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돌릴 용기조차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아주 빠른 걸음으로 아래층을 향해 발을 옮기면서 마음으로 생각을 더듬었다.
"사실 당신은 나에게 부탁을 할 필요도 없소. 나는 원래부터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설벽운은 아래층을 향하여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초류빈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응시하고 있다가 갑자기 맥이 빠진 사람모양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연못에는 살얼음이 약간씩 얼었다.
붉은 난간이 살얼음 위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아마도 지금이 무더운 여름 날씨라고 하면 여기에는 은은한 연꽃 향기가 물씬 풍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는 사람의 뼈를 에이는 듯한 한풍밖에 없었던 것이다.
초류빈은 멍청한 눈빛을 하고 계단 위에 걸터앉아 연못 가장자리의 살얼음을 응시하면서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내 기왕에 떠났으면 그만이지 무엇 때문에 또다시 돌아왔나 ....."
초류빈이 자책하고 있을 때 먼 곳에서부터 삼경을 알리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여기에서 그는 냉향소축의 희미한 등불만을 계속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돌계단 위에 쌓여져 있는 적설은 그의 마음까지도 싸늘하게 해주X 었다. 초류빈은 또다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돌연 냉향소축 쪽에서 인영이 번쩍하고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초류빈은 이러한 것을 보자 일초도 주저하지 않고 즉시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어둠 속으로 날아간 인영을 향하여 황급히 뒤를 쫓기 시작했다. 이렇게 급하게 쫓아가고 있는 초류빈의 신법은 마치 전광석화와 같이 빨랐다.
그러나 그가 냉향소축까지 쫓아갔을 때에 상대방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초류빈은 이러한 광경을 보자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혹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닌가?"
초류빈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 이러한 생각을 더듬고 있을 때였다. 그는 문득 두 눈을 치켜올렸다.
백설이 반사되는 곳에 초류빈은 지붕 위에 하나의 발자국이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발자국은 한쪽뿐이었으며 발 앞부분밖에 나지 않았다.
초류빈은 눈 위에 나 있는 이 발자국을 한참 동안 응시하며 무엇인가 생각을 더듬었다. 그러더니 지붕 밑으로 뛰어내렸다.
실내에는 등불이 켜져 있었다. 초류빈은 주위를 이리저리 쓸어보고 난 후에 즉시 창문 가까이로 다가갔다. 초류빈은 주위를 주저하지 않고 창문을 살짝 두들겼다.
"설낭자!"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초류빈은 아무런 기척도 없자 또다시 창문을 두들겼다.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초류빈은 이런 상황에 처해지자 다소 불안을 느낀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거침없이 실내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둥그런 식탁이 하나 놓여져 있었으며 그 위에 자기가 좋아하는 갈비와 통닭이 놓여져 있었다. 그러나 설소하 자신은 어디로 갔는지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초류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주위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그의 시선이 한 군데로 멈추어져 움직일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다섯 개의 술잔이 식탁 위에 박혀져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섯 개의 술잔이 나란히 박혀 있는 모습은 언뜻 보아서는 마치 한송이의 아름다운 매화와도 같았다.
이것은 바로 매화도의 독특한 표시였다.
그렇다면 설소하는 벌써 매화도의 수중에 잡히고 말았단 말인가? 이러한 생각이 미치자 초류빈은 식탁 위의 한쪽을 향하여 힘을 주어 눌렀다.
순간 다섯 개의 술잔들이 모두 튀어나왔다. 그러자 상 위에 그대로 나 있는 구멍은 매우 예리하게 보였다. 다섯 개의 술잔은 추호의 손상도 없었다.
이 식탁은 비록 돌로 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다섯 개의 술잔을 추호의 손상도 없이 상 위에 그대로 박아 버린다는 것은 초류빈 자신까지도 해낼 수가 없는 일이었다. 매화도의 무공은 무서울 정도로 고강했다.
초류빈은 수중에 술잔을 들고는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바로 이 때였다. 갑작스레 칙! 소리와 함께 식탁 위의 등불이 꺼지더니 잇따라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수십 줄기의 한광이 초류빈을 향해 격사되어 나왔다.
그러나 당금 무림에서 초류빈의 암기수법이 최고라고 하는데 어찌 이러한 암기들이 감히 당해낼 수가 있겠는가.....
초류빈은 신속하게 몸을 빙그르르 돌리는 순간 벌써 열 개에 달하는 암기를 받았다. 그리고 나머지 쉽사리 받아낼 수가 없었던 암기는 모두 옆으로 옮겨졌다. 이때 밖에서부터 길게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매화도, 도망을 가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말아라.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속히 나와서 죽음을 받을 준비나 해라! 설사 네놈이 승천을 하는 재주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오늘밤만은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말소리가 잠시 멈추는 듯하더니 다시 들려왔다.
"매화도, 솔직하게 알려 주겠다. 낙양부의 전칠께서도 달려 오셨다. 그리고 마운수, 공손대협, 그 뿐만 아니라 초대협, 호유성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조용히 해라!"
이렇게 짧은 한 마디밖에 안했지만 초류빈은 목소리로 보아 이 자가 바로 전칠이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초류빈이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다시 전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구, 기왕에 여기까지 오셨는데 왜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기만 하오?"
초류빈은 일부러 한 차례의 헛기침을 토해내면서 느긋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기왕 여러분께서 여기까지 오셨는데 왜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소?"
그러자 밖에서 또다시 소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저놈은 우리들을 실내까지 유인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오."
"매화도는 원래 도둑놈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모습을 드러낼 수가 있겠소."
"그렇소. 매화도는 확실히 도둑놈에 지나지 않소.
이러한 말로 저마다 웅성대고 있었다. 초류빈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채 이러한 소리를 듣자 고개를 끄덕이며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그렇소. 매화도는 확실히 도둑놈에 지나지 않소. 그런데 그러한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라도 있다는 말이오?"
초류빈의 말소리가 끝나자 앞서의 우렁찬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렇다면 당신은 매화도가 아니란 말이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공손 대협, 그렇게 많이 물을 필요가 뭐 있겠소. 저 자가 바로 매화도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오."
조정의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하하하...조정의, 내 벌써부터 당신이 부린 수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소."
초류빈은 가소롭다는 듯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신속하게 밖으로 빠져나갔다. 순간 밖에 있던 많은 군웅들은 날카로운 고함과 함께 모두들 덤벼들려고 했다.
호유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잠깐만 멈추시오! 이분은 내 형제로서 이름은 초류빈이라고 하오."
이때 벌써 초류빈은 조정의 앞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더니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조대야의 이목은 정말 고명하오...만약 초모인의 행동이 민첩하지가 못했다면 아마 매화도를 대신하여 벌써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이오."
순간 조정의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이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야밤의 삼경쯤에 귀하가 혼자서 도둑고양이처럼 이곳에 몰래 숨어 있는데 조모인이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소."
조정의는 가볍게 숨을 몰아쉬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귀하의 병이 갑자기 나을 줄 내 어찌 알 수가 있었겠소 ....."
초류빈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나 초모인은 도둑고양이처럼 여기에 올 필요는 없소. 나 초모인은 광명정대하게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가 있소. 하물며 조대야께서 어찌 여기의 주인이 나와 약속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단언할 수가 있겠소."
조정의는 차가운 냉소를 치며 쌀쌀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귀하가 설낭자와 교분이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소. 그러나 여기에 있는 분들은 모두가 설낭자께서 오늘밤은 여기에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초류빈은 가늘게 신음소리를 토해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정의는 초류빈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냉랭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설낭자께서는 매화도를 피하기 위해 하오쯤에 벌씨 냉향소축에서 떠나가 버렸소."
"그렇다면 귀하가 먼저 자세하게 물어보고 난 후에 다시 출수를 해도 결코 늦지는 않았을 것이오."
조정의는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을 더듬더니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매화도 같은 사람에게는 먼저 선수를 치는 길밖에 없소. 만약 그에게 잠시라도 여유를 주면 시간이 너무 늦게 될 것이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초류빈은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먼저 선수를 치는 길밖에 없다...그렇다면 오늘 나 초모인이 귀하의 독수 아래에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결코 귀하를 원망할 필요는 없겠구려."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호유성이 헛기침을 한 차례 하고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어둠 속에서 잘못 보이는 것은 누구나가 가끔씩 있는 일이오. 그런데 하물며....."
조정의가 갑작스레 말을 가로챘다.
"하물며 나 조모인이 잘못 보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러자 초류빈이 두 눈을 치켜올리며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다그쳤다.
"잘못 보지는 않았다고? 그렇다면 조대야께서는 나 초모인이 바로 매화도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오?"
"그것은 아직까지 단언을 할 수가 없소. 우리들이 알기로는 매화도는 경공술이 뛰어나고 또한 출수도 아주 빠르며 악랄하오. 그러나 그의 성이 장가인지 이가인지 아직까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소."
초류빈은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렇소. 나 초모인 역시 지니고 있는 경공술이 매우 뛰어나고 출수 또한 늦지는 않은 편이오. 그리고 매화도가 다시 강호에 출현할 때에 나 초모인 역시 동시에 입관을 하였던 것이오."
여기까지 말을 하고 난 초류빈은 잠시 말을 멈추다가 다시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만약 나 초모인이 매화도가 아니라고 하면 그것이야 말로 이상한 일이 되고 말 것이오."
초류빈은 비웃음이 가득한 눈으로 조정의를 쏘아보았다.
"그런데 조대야께서는 초모인이 매화도라고 생각을 하고 계신다면 왜 아직까지 출수를 하지 않는 것이오?"
조정의는 마른침을 한 차례 삼키고 즉시 입을 열었다.
"일찍 출수를 하나 늦게 출수를 하나 전칠과 마운수 형께서 여기에 계시니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오."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호유성은 그제서야 사건이 커진 것을 알고 안색이 변하여 황급히 끼여들었다.
"여러분, 이러지 마시오. 나 호유성이 자신의 목숨으로 분명히 보장을 하겠는데 초류빈은 절대로 매화도가 아닐 것이오."
순간 조정의는 안색을 굳히며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은 그와 벌써 십 년씩이나 만나지를 못했는데 어찌 그가 매화도가 아니라는 것을 보장할 수 있겠소?"
호유성은 일순 당황하는 듯했으나 이내 자신있게 대답했다.
"나는 그의 사람됨을 누구보다 깊이 알고 또 믿고 있는 바이오....."
"자고로 옛날부터 사람은 겉모습을 보아서는 잘 모른다는 말이 있소."
이렇게 말을 한 자는 언뜻 보기에는 비록 환자처럼 보이고 안색 또한 매우 창백하게 보였지만 그러나 목소리는 심히 맑았다.
이 사람은 바로 온 천하에 명성을 떨쳤던 공손마운이었던 것이다.
공손마운의 등 뒤에 원의 차림을 한 자가 있었다.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받았다.
"그렇소. 나 전칠 역시 초탐화와 수십 년 전에 교분이 있었소. 그런데 지금 이러한 일이 발생했으니 나 전모인도 할 수 없이 우선 교분을 한 쪽에다 내버려 두어야만 하겠소."
"나에게도 적지 않은 친구가 있소. 그러나 전칠야와 같은 신분을 지닌 친구는 아직까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전칠야께선 나와 관계를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오."
초류빈은 입가에 엷은 비웃음을 피어올리며 전칠을 응시했다.
순간 전칠야의 안색이 갑자기 굳어지는 듯하더니 두 눈에서 대뜸 살기가 번뜩이고 이었다.
강호인들이라면 누구나 다 전칠야의 성격이 악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칠이 얼굴에 미소를 띠지 않고 있을 때가 바로 살인을 하려고 하는 순간이다.
때문에 모두가 다 그가 출수를 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는 출수를 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말조차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잠시 후, 공손마운, 조정의, 전칠 세 사람은 이를 부드득 갈면서 초류빈을 가운데에 두고 철저히 포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 사람은 초류빈의 수중에 있는 비도만을 응시하고 있을 뿐 어느 누구도 먼저 출수를 하지 않았다.
초류빈은 여전히 여유있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나 초모인은 세 분께서 나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소!"
초류빈은 잠시 세 사람의 모습을 쓸어보고 난 후에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목적은 물론 나 매화도를 죽이고 난 뒤에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하는 속셈이겠지요."
조정의는 이러한 말을 듣자 대뜸 안색을 굳히면서 말했다.
"부귀영화는 우리 강호인의 안중에 들지도 않소. 우리가 당신을 죽이려 하는 것은 다만 강호를 위해서 해를 제거하려는 것이오."
"하하...역시 철면무사답게 광명정대하면서도 협의무쌍 하시구려."
초류빈은 경멸의 빛이 일렁이는 눈빛으로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수중에 있는 비도를 매만졌다.
"그런데 귀하는 아직까지 출수를 않는 것이오?"
그러나 조정의는 이러한 물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길을 초류 빈의 비도가 움직이는 곳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을 뿐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초류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았소. 전칠야의 한 자루의 봉이 온 천하를 누르고 세 알의 칠담이 온 무림을 진동시키고 있으니 조대야께서는 전칠야가 출수를 한 후에 다시금 출수를 하려는 것이군요. 그렇다면 전칠야께서도 물론 거절을 하지는 않겠지요. 그렇지 않소?"
그러나 전칠야는 못 들었다는 듯이 태연자약하게 뒷짐만을 지고 있었다.
초류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전칠야께서도 공손 선생이 먼저 출수를 하기를 기다린다는 말이오?"
여기까지 말을 하고 난 초류빈은 무엇인가 잠시 생각을 더듬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음 그렇겠군...공손 선생의 마운십사식은 온 천하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이니 공손 선생께서 먼저 출수를 해야겠지요."
그러나 공손마운은 귀가 먹었는지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초류빈은 공손마운의 태도를 보자 비웃었다.
"정말 이상하구려. 세 분 전부 다 나를 죽이려고 벼르고 있으면서도 출수를 하지 않으니 혹시 세 분께서 서로가 겸손을 차리시는 것이 아니오?"
그러나 공손마운 등 세 사람은 인내심을 극도로 발휘하여 초류빈이 아무리 입을 놀려도 시종 못 들은 척하고만 있었다.
사실상 세 사람은 초류빈의 수중에 있는 비도에 겁을 먹고 여태까지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초류빈의 비도가 수중을 떠났을 때는 이미 상대방은 염라부에 기록된다는 것을.....
또한 지금까지 그 비도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다는 것도. 때문에 그들은 섣불리 손을 쓰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들 세 사람마저 꼼짝도 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은 더욱더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호유성이 빙그레 웃음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 더 이상 다투지 말고 어서 술이나 마시러 가세."
? 호유성은 안도의 표정으로 초류빈의 곁으로 다가와 어깨에다 손을 올려놓았다.
순간, 초류빈은 안색이 급변하면서 그의 손을 재빨리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눈깜짝할 사이에 전칠야의 손이 벌써 그의 등 뒤로 뻗어왔던 것이다. 잇따라 한 자루의 금사가 마치 독사처럼 초류빈의 다리를 쓸어왔다.
초류빈은 비도를 쥐고 있었지만 호유성이 어리둥절해 아직도 그의 팔을 잡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비도를 날릴 수가 없었다.
초류빈은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무릎을 꿇었다.
공손마운이 적시에 그의 등 뒤에 있는 혈도를 찌르자 조정의 역시 발길로 그를 차버렸다.
일순 호유성이 사납게 두 눈을 치켜올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들 왜 이러시오? 속히 그를 놓아 주시오!"
호유성은 분기충천한 얼굴로 노갈을 터뜨리며 초류빈의 몸을 부축하려고 했다.
조정의가 위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를 제지했다.
"호랑이를 쫓기는 쉬워도 잡기는 어려운 법이오."
이때 전칠이 번개같이 몸을 날렸다.
"미안하오."
공손마운은 벌써 호유성의 앞길을 잽싸게 막아 버렸다.
순간,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호유성도 그대로 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조정의는 그가 채 일어나기도 전에 벌써 혈도를 찌르고 말았던 것이다.
호유성은 큰소리로 외쳤다.
"아니 왜 이러시는 것이오!"
조정의는 안색을 굳히며 침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비록 의형제 사이지만 그러나 강호의 도의는 형제의 정보다 더 엄중한 것입니다만 미안할 뿐이오."
"그는 절대로 매화도가 아니오. 절대로....."
호유성은 여전히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정의는 불쾌한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시끄럽소. 당신은 그가 매화도가 아니라는 것을 정확하게 증명해 줄 수 있겠소?"
전칠은 입가에 징그러운 미소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심지어는 그 자신까지도 시인을 했는데 호대협께서 그를 위하여 변명을 해줄 필요가 뭐 있겠소."
공손마운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호대협 역시 처자식과 명성과 지위가 있는 사람이오. 그러니 이러한 자 때문에 해를 입는다는 것은 너무 값어치가 없는 일이 아니겠소."
그러자 호유성은 울부짖는 듯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당신네들이 그를 석방해 주기만 하면 나 호유성이 자신의 목숨으로 모든 죄를 대신 갚아줄 것이오."
조정의는 고개를 약간 갸웃거리며 위엄있는 말투로 지껄였다.
"그러면 당신은 처자식이 그에게 해를 입기를 원하고 있소?"
호유성은 이러한 소리를 듣자 온몸을 부르르 떨며 한동안 할 말을 잃고 있었다.
한편 초류빈은 바닥에 그대로 쓰러진 채 마치 새우가 구부러져 있는 자세로 연신 기침만을 토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중의 비도만은 여전히 굳게 쥐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가 지니고 있는 비도는 지금의 상태로는 발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초류빈, 온 강호에 명성을 떨쳤던 대영웅이 이렇게 종말을 눈앞에 두게 되다니...호유성은 눈시울이 빨개지며 울부짖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현제, 미안하네. 모든 것은 전부 다 나의 잘못이네....."
대청 밖의 계단 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서 무엇인가 서로 의논을 하는 듯 소곤소곤대고 있었다.
"전칠야, 역시 듣던 바와 마찬가지로 대단하군. 그의 출수가 제아무리 빨라도 그리고 호대협께서 거기에 없었다고 해도 초류빈은 여전히 피해낼 수가 없었을 것이네."
"하물며 옆에 공손대협과 조대협이 있었는데."
"그렇지. 조대협의 두 다리는 백만 냥 짜리로서 그 얼마나 멋진 발길질이었던가."
"소문에 남전북뢰라고 하고 있으니 우리 북쪽의 수법은 원래부터 고강했었지."
"그러나 공손대협의 장법은 또 어떠했는가. 만약 그가 적시에 출수를 하지 않았다면 초류빈이 한 대를 맞았다고 해도 곧 쓰러지지 않았을 것이지....."
"전칠야, 조대협, 거기에다 공손대협까지 합쳐졌으니 초류빈도 아주 재수가 나쁘군."
"말이 비록 그렇지만 그러나 만약 말이지, 호대협이 없었다면 ....."
"호유성이 초류빈에게 얼마나 의리가 있었는가."
"그렇지. 초류빈이 호유성과 같은 친구를 사귈 수가 있었다는 것은 정말로 영광이라고 할 수가 있지."
호유성은 대청 안의 태사의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이러한 대화를 들었을 때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초류빈이 제압당한 것은 순전히 자신의 실수로 인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자신이 그의 어깨에 손만 얹지 않았다면 그들은 초류빈을 이런 지경으로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초류빈은 바닥에 그대로 엎드린 채 연신 기침을 하고 있었다.
호유성은 눈물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현제, 미안하네. 모든 것은 전부가 다 나의 잘못이었네. 현제, 나 같은 친구를 두었다는 것은 정말 불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네."
"형님, 만약 나 초류빈이 죽지 않고 다시금 살아날 수가 있다면 여전히 형님과 같은 친구를 사귀려고 했을 것이오."
초류빈은 호유성을 원망하는 기색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순간 호유성은 뜨거운 열혈이 용솟음치는 것을 억제하지 못하여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출수를 막지 않았다면....."
"나는 형님께서 무슨 일을 하든지 전부가 다 내가 좋게 되기 위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다만 감격스러운 마음밖에 없소."
호유성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끼며 궁금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런데 자네는 그들에게 왜 자신이 매화도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는가? 무엇 때문에....."
초류빈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떠올리며 느긋한 표정으로 호유성을 주시했다.
"나 초류빈도 이제는 살 만큼 살았으니 더 이상 목숨을 부지할 필요가 뭐 있겠소. 하물며 소인배들에게 무릎을 꿇으라는 것은 내 적성에 결코 맞지가 않소."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전칠이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리더니 문득 말을 꺼냈다.
"하하...잘했군, 잘했어....."
공손마운은 냉소를 쳤다.
"그렇지. 그는 자신이 무어라고 변명을 하든 간에 우리가 절대로 그를 놓아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죽기 전에 욕을 했던 것이지."
초류빈은 즉시 고개를 끄덕이고 침중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그렇소. 일이 벌써 이 지경이 됐으니 나 초모인도 이젠 더 이상 할 말이 없소. 여러분, 나 초모인의 수중에 이젠 비도가 없으니 속히 출수를 하시오."
순간, 공손마운의 누르스름한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조정의도 안색이 새파래진 채 즉시 입을 열었다.
"만약 우리가 당신을 죽인다면 강호인들이 우리를 비웃을 것이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광명정대하게 천하의 군웅 앞에서 죽여 줄 것이오."
"내 당신에게는 정말 두 손 들었소. 당신의 마음속에는 열 마리의 구렁이가 들어 있지만 항상 광명정대하다는 말을 잊지 않는구려."
초류빈은 궁지에 몰려 있으면서도 조금도 굴하는 기색이 없었다.
전칠은 두 눈에 가득 살기를 떠올리며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비도탈명이라 담량도 아주 대단하군. 좋소. 만약 당신이 빨리 죽고 싶다면 나에게도 좋은 방법이 있소."
"나는 원래 당신에게 욕을 몇 마디 더 해 주려고 하였소. 그러나 나의 입이 더러워질까 봐 그만두겠소."
그러나 전칠은 못 들은 척하며 여전히 입가에 가벼운 미소만을 떠올린 채 초류빈을 주시했다.
"당신이 모든 죄악을 하나도 빠짐없이 고백을 하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에게 통쾌한 죽음을 하사하겠소."
"좋소, 그럼 내 고백하겠소."
초류빈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호유성이 급히 저지를 했다.
"안 되네."
그러나 초류빈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진 죄악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소. 나는 위선자로서 이간질을 하고 또 남이 방비를 못하는 틈을 타서 암산을 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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