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11 소이비도 제1권 영웅은 말이 없다
영웅은 말이 없다
음성은 나직하고 담담했으나 마치 천만 근의 무게를 지닌 듯했다. 그리고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예리한 비수처럼 날카롭고도 차가웠다. 방안에 들어와 그는 이제서야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바로 영민한 고양이처럼 걸을 때에 발자국소리조차 내지 않았던 세 번째 사람이었다.
그러나 철전갑은 그의 목소리를 듣기가 무섭게 눈을 번쩍 떴다. 너무도 귀에 익은 목소리였기에 눈을 뜬 철전갑의 시야에 일순 조정의와 청삼노인 사이에 앉아 있는 청년이 들어왔다.
낭천! 그 고독하면서도 냉막한 청년 낭천이었던 것이다.
'천도령,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철전갑은 흥분을 금치 못하고 격동에 가득찬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소리를 내지 않고 입속으로만 뇌까렸을 따름이었다.
조정의는 안색이 싹 변해 눈을 부릅뜨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친구는 이런 자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지 않는단 말이오?"
낭천은 무표정한 얼굴로 주위를 휘둘러보며 대답했다.
"만약 내가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아마 당신네들은 일제히 나를 죽이려고 덤벼들 것이오. 그렇지요?"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라 공손우의 입에서 폭갈이 터져나왔다.
"이놈! 개소리 말아라!"
그러나 낭천은 야박한 표정으로 태연하게 응수했다.
"내 입으로 하는 말이 개소리라면 나와 말을 하고 있는 당신 역시 개가 아니겠소?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렇게 떠들고 야단이오?"
이거야말로 치욕적인 반격이었다.
"이...이놈이....."
공손우는 상대방의 날카로운 대꾸에 아연실색하여 한동안 뭐라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때 장님인 역명호가 급히 흥분하는 좌중을 만류하며 크게 소리쳤다.
"우리가 친구를 청해 온 이유가 바로 친구더러 공도를 주지하라는 것이었소. 용서해 줄 데가 있다고 변호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즉시 이 자를 놓아 주겠소."
조정의는 당치도 않다는 표정으로 강경하게 맞섰다.
"내가 보기에 저 자는 쓸데없는 시비를 일으키려는 것 같소. 여러분께서는 그의 말에 신경을 쓸 필요가 추호도 없소."
낭천은 길길이 날뛰는 조정의를 한참 노려보다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귀하께서 그렇게 자신있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그날 옹가장에 가서 살인을 한 사람들 중에 귀하도 역시 있었던 것 같구려."
순간, 중원팔의는 일제히 경악의 소리를 질렀다.
"뭐라구?"
낭천은 그들을 향해 점잖게 입을 열었다.
"그가 철전갑을 죽이려고 하는 이유는 다만 그의 입을 영원히 봉하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소."
"이놈! 개....."
조정의는 이 소리에 다급함을 금치 못하고 노갈을 터뜨리려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공손우가 개소리라고 했다가 개망신을 당한 것이 생각난 때문이다.
보아하니 이 젊은 청년은 입이 매워 자기가 그 소리를 했다가는 또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다. 하물며 대협의 신분으로 욕설을 퍼붓는다는 것은 신분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그는 할 수 없이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침착을 되찾으려 안간힘을 썼다.
"으하하하하...귀하는 그처럼 젊은 나이에도 입심이 아주 좋구려. 그러나 귀하의 일방적인 말을 누가 믿어줄 것 같소?"
"일방적인 말? 그렇다면 당신네들이 하는 말은 일방적인 억지가 아니란 말이오?"
낭천은 경멸의 빛이 물결치는 눈으로 빈정거렸다.
조정의는 터지려는 분통을 억누르고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귀하는 철전갑 자신이 시인하는 말을 못 들었소?"
"물론 듣기는 들었소!"
말이 막 끝나는 순간, 느닷없이 낭천의 허리에 차고 있던 쇠붙이 같은 장검이 갑자기 조정의의 목에까지 기습적으로 뻗쳐갔다. 실로 귀신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경쾌한 쾌검이었다.
"엇!"
조정의는 강호에서 굴러먹은 백전노장이었다. 그는 싸늘한 검기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재빨리 피하려 했다.
그러나 낭천의 쾌검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목에 썰렁한 쇠붙이의 감촉을 느끼며 조정의는 말을 더듬거렸다.
"치...친구...이게 무슨 짓이오?"
낭천은 싸늘한 얼굴로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내 다시 묻겠소. 그날 옹가장에 살인을 하러 간 사람 중에 역시 귀하도 한몫 끼여 있었음이 틀림없지요?"
조정의는 분노에 찬 부르짖음을 토했다.
"당...당신은 미쳤소?"
"당신이 시인을 하지 않으면 내 당장 당신을 죽이겠소!"
낭천의 이 한 마디는 무게가 있고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조정의는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나...나는....."
그가 말을 더듬거리자 낭천은 냉랭한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똑똑하게 말하시오. 한 마디라도 잘못 하는 날에는 목이 꿰뚤릴 줄 아시오!"
낭천의 쇠붙이 같은 장검은 여전히 조정의의 목을 겨냥하고 있었다.
중원팔의는 조정의를 구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낭천의 쾌검, 그것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빠르지 않던가. 제아무리 그런 마음이 있어도 그들은 간담이 졸아들어 감히 함부로 출수를 못하는 것이었다.
사실이 그렇다. 이토록 빠른 쾌검 아래 누가 감히 사람을 구출해 낼 수 있겠는가. 하물며 그들도 역시 조정의가 기를 쓰고 철전갑을 죽이려는 사건의 진상을 알고 싶지 않은가.
낭천의 냉혹한 목소리가 조용한 실내를 나지막하게 울렸다.
"내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물어보겠다. 옹천검은 네가 죽인 것이지?"
조정의는 사지를 부들부들 떨며 가까스로 입을 열고 있었다.
"맞소. 내...내가 죽인....."
"뭣?"
말이 채 다 나오기도 전에 중원팔의는 똑같이 안색이 싹 핏기를 잃었다.
공손우가 펄쩍 뛰며 악귀같이 부르짖었다.
"너 이 개구멍으로 나온 놈!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서도 감히 여기에 와서 공증인노릇을 하려 하다니....."
그러자 낭천의 두 눈에 이채를 가득 담은 채 갑자기 소리없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여러분, 화내지 마시오. 옹천검의 죽음은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소."
중원팔의는 다시 한번 멍청해졌다.
공손우가 눈알을 희번득이며 분에 치받혀 숨을 씨근거렸다.
"하지만...하지만...그놈 자신이....."
그러나 낭천의 음성은 고요한 호수의 물결처럼 잔잔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다만 사람이 협박을 받을 때 하는 얘기는 절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조정의의 안색은 점점 시뻘겋게 변해갔다.
이와는 반대로 중원팔의의 안색은 점차적으로 창백해졌다. 뒤이어 그들은 분분히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언제 그를 핍박하였소?"
"우리는 그를 협박한 적이 없소!"
"만약 그에게 억울함이 있다면 왜 얘기를 안하겠소?"
그러나 여럿이 한꺼번에 얘기를 하니 뭐가 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이런 소갈 속에서 역명호가 정색을 하며 소리쳤다.
"철전갑! 만약 너에게 무슨 억울한 데가 있다면 지금 속히 우리 형님들에게 해명을 해 보아라!"
역명호의 목소리는 느릿느릿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한마디 한甕떫?천근 같은 무게가 있었다.
즉시 공손우가 철전갑의 앞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그렇다! 나에게 할 말이 있다면 마음놓고 해 보아라. 너의 입을 막으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철전갑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통스러운 듯 아랫입술만 지그시 깨물고 있을 뿐이었다. 변명을 한다는 것, 그것은 본의는 아니었지만 옹천검에게 지은 죄를 더욱 가증시키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웅대랑도 왼눈을 번뜩이며 추궁했다.
"철전갑, 네가 얘기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네가 시인을 했다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우린 절대로 칼로 너를 위협하지 않겠다!"
철전갑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낭천을 향하여 빙긋이 웃어 보였다.
"천도련님, 저는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도련님의 호의만은 정말 고맙습니다."
공손우는 낭천을 향해 번쩍 고개를 돌리며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물었다.
"당신 들었소? 그 자신이 할 말이 없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나 낭천의 표정은 지극히 냉담했다.
"그가 말을 하든 안하든 나는 그가 친구를 팔아 버린 소인배라고는 절대 보지 않소."
공손우는 마치 야수의 부르짖음 같은 괴성을 질렀다.
"사실이 다 여기 있으니 당신은 믿기지 않아도 꼭 믿어야만 하오!"
옹대랑이 코웃음을 치며 끼여들었다.
"저 사람이 믿지 못한다면 그만두라지. 뭐 우리가 꼭 그더러 믿으라고 하는 것은 아니니까."
약장수 금풍백도 덩달아 맞장구를 쳤다.
"맞았습니다. 그는 원래부터 이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으니까요."
낭천의 싸늘한 목소리가 좌중에 울렸다.
"나는 기왕 이곳에 왔으니 이 일은 나와 관계가 있는 셈이 되었소."
성질이 제일 급한 공손우는 두 눈을 부릅뜨며 격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뭐라구요? 당신과 무슨 말라빠진 관계가 있다고 그러시오?"
낭천의 목소리는 신념에 가득차 있었다.
"만약 내가 믿지 않는다면 당신네들은 절대 그를 다치게 할 수 없소."
옹대랑은 드디어 분통이 터져 앙칼지게 소리쳤다.
"네놈이 뭔데 감히 우리 일에 참견을 하겠다는 거냐?"
"노부는 기어코 저 놈을 죽이고야 말겠다. 어디 네놈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보자!"
나무꾼 역벽화산의 입에서 싸늘한 노갈이 터져나오는 것과 동시에 그의 수중에 들려져 있던 도끼가 벌써 철전갑의 머리 위를 향해 무섭게 내리쳤다.
역벽화산!
이름 그대로 그의 힘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가 도끼를 휘둘렀을 때 그의 곁에 서 있던 역명호의 수염까지 도끼의 바람에 휘날릴 지경이었다.
이쯤 되면 철전갑에게 제아무리 철포삼(鐵袍衫) 같은 내공이 있다 해도 역시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원래 철포삼의 내공은 막강한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보통 창칼만 막을 수 있을 뿐이지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내리치는 도끼의 힘은 절대 막아낼 수가 없었다.
더구나 철포삼의 공력은 상대방의 보통 창칼도 어디로 찔러오는지 위치를 미리 알아야만 효과를 볼 수가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내공만으로 매화도를 생포할 것이지 무엇 때문에 또 금사갑을 찾으려 했겠는가.
절대절명의 순간, 갑자기 한 줄기의 검광이 번쩍이면서 팍! 하는 경쾌한 음향이 터져나왔다. 뒤이어 거대한 도끼는 갑자기 두 토막으로 잘리워져 바로 철전갑의 무릎 앞에 떨어졌다.
쿵!
묵중한 도끼날은 철전갑의 앞에서 땅바닥 깊이 박혀버렸다.
원래 낭천의 일검은 도끼 자루를 내리친 것으로 역벽화산이 도끼를 휘둘렀을 때는 이미 끝부분이 잘려져 나가 있었다.
"엇!"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른 그는 자기가 휘두른 힘에 견디지 못하고 손목, 팔꿈치, 어깨 등의 관절이 일제히 빠져나가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몸은 그대로 낭천의 검끝으로 부딪쳐갔다.
이 광경을 본 중원팔의는 일제히 대경실색하여 소리를 질렀다.
"앗! 저....."
그러나 그 경악의 외침이 채 다 터져나오기도 전에 낭천은 벌써 수중의 검을 거꾸로 돌리고 나무 손잡이로 역벽화산의 턱을 올려치고 있었다.
퍽!
둔탁한 소리가 역벽화산의 몸에서 터져나오는 순간 그는 뒤로 벌렁 나자빠져 기절을 하고 말았다.
중원팔의는 일순 너무도 놀란 듯 망연자실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조금 전 낭천이 조정의를 빠르게 제압했을 때, 그들은 그저 우연한 일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진짜 실력이었던 것이다.
실내에는 순식간에 쥐죽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중원팔의는 낭천의 이렇게 빠른 검법에 전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은 정녕 생각지도 못했다. 세상에 이토록 빠른 검법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낭천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철전갑의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 갑시다. 가서 술이나 마십시다."
철전갑은 그의 이끌림에 못이긴 척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자 공손우와 금풍백, 변호 세 사람이 동시에 그들의 갈길을 막았다.
금풍백이 괴상한 목소리로 외쳤다.
"친구, 이대로 떠나가려고 하오? 세상에 그렇게 쉬운 일이 어디에 있소?"
낭천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금풍백을 주시했다.
"그렇다면 내가 꼭 당신을 죽여야만 갈 수가 있단 말이오?"
억양도 없이 잔잔한 목소리. 그러나 금풍백은 어찌된 일인지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쳤다.
금풍백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동안 수많은 위험을 겪었다. 그러나 오늘처럼 이렇게 등골이 오싹하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낭천의 검이 그렇게도 두려웠던 것이다.
역명호가 갑자기 장탄식을 하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를 보냅시다."
이 말을 들은 옹대랑이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그건 안 된다! 우리의 피맺힌 원한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아 냉막한 역명호의 목소리가 옹대랑의 말을 삼켜 버렸다.
"없었던 걸로 합시다."
이렇게 말한 그는 침착한 표정으로 낭천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귀하는 어서 가 보시오. 강호란 원래가 이런 것이오. 검이 빠른 자는 항상 우선권을 차지할 수가 있소."
낭천은 가볍게 웃으며 포권의 예를 취했다.
"고맙소. 귀하의 그 한 마디를 소생은 영원히 기억해 두겠소."
이렇게 말한 그는 철전갑을 부축하여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나갔다.
중원팔의의 표정은 갖가지로 변했다. 발을 동동 구르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이를 가는 자가 있고 또 목을 놓아 대성통곡을 하는 자도 있었다.
옹대랑은 대성통곡을 하다가 역명호를 향해 저주스러운 듯이 외쳤다.
"그를 놓아 주면 어떻게 합니까? 도대체 어찔려고 놓아 준 거예요?"
"형수님은 정말로 그가 우리를 다 죽여야 시원하시겠소?"
역명호의 말에 변호가 옹호하고 나섰다.
"둘째 형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숨이 붙어 있는 한 언젠가는 반드시 복수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옹대랑은 갑자기 변호의 멱살을 붙잡고 늘어졌다.
"이놈! 네가 무슨 염치가 있어 그런 말을 하느냐? 이번에도 역시 네놈이 데리고 온 친구가....."
옹대랑은 남편의 원수가 눈앞에서 유유히 사라지자 눈알이 홱 뒤집혔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변호를 박살낼 기세였다.
변호는 참혹하게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렇소. 이번에도 제가 데려온 친구가 일을 망쳤소. 내 형수님에게 반드시 그 죄를 갚아 드리겠습니다."
그는 갑자기 옹대랑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웅대랑은 자기가 너무 심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음인지 다급하게 소리쳤다.
"셋째, 돌아와요. 돌아와!"
그러나 그녀가 밖으로 달려나갔을 때 변호는 이미 종적도 보이지 않았다.
"내버려 두시오. 그가 그의 옛 친구를 찾아낼 수 있기를 비는 도리밖에 없소."
역명호의 말에 두 눈에서 번쩍 신광을 뿜어냈다.
"둘째 형의 말씀은 혹시....."
역명호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네가 기왕 알고 있다면 왜 또 구차스럽게 묻느냐?"
"만약 셋째 형이 정말 그 사람을 찾아올 수 있다면 그놈의 검이 제아무리 빠르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거다....."
금풍백은 초점 잃은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때 조정의가 멋적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사실 변대협께선 다른 사람을 찾으러 갈 필요조차 없었소."
금풍백은 어리둥절한 빛으로 조정의를 주시했다.
"그건 어째서요?"
조정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자기가 낭천에게 했던 말을 만회하기라도 하려는 듯 자신있게 말했다.
"내일과 모레, 이틀 동안에 세 분의 고인이 이곳으로 달려오기로 되어 있소. 그러니 그놈에게 설사 하늘로 올라가는 재주가 있다 해도 그 세 분의 고인 앞에선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오."
금풍백의 얼굴에 의문의 빛이 짙게 떠올랐다.
"세 분의 고인이란?"
조정의는 거드름을 피우며 말에 꼬리를 달았다.
"아마 여러분께서 그 사람의 이름을 들으면 깜짝 놀라게 될 것이오."
정오 무렵이었다. 그러나 날씨가 음침하기 짝이 없어 마치 황혼녘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낭천은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것은 철전갑이 처음 그를 보았을 때처럼 그렇게 고독하고 피곤한 기색을 띤 걸음이었다.
하지만 철전갑은 그제서야 그가 일단 강적을 만나기만 하면 성난 독수리처럼 변한다는 것을 알았다.
철전갑은 그의 뒤에 서서 걸음을 옮겨갔다. 철전갑은 하고 싶은 말이 태산같이 많았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무슨 얘기를 먼저 꺼내야 좋을지 갈피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초류빈도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다. 철전갑은 초류빈과 십여 년이나 생활을 같이하면서 그 역시 침묵으로 말을 대신하는 법을 배웠다.
처음 그는 '쎄쎄'라는 한 마디 단어밖에는 말하지 않았었다.
그것은 감사하다는 듯이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그것도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때문에 그 낭천에게는 목숨을 구해 받고도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낭천 역시 초류빈처럼 말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길가에는 자그마한 육각정(六角亭)이 하나 있었다. 육각정은 봄이 되면 행인들의 발길이 멈추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행인 대신 흰눈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때 낭천은 갑자기 철전갑에게 다가서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은 왜 마음속의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소?"
철전갑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탄식조로 대답했다.
"사람에게는 해서 되는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될 말이 있지요."
낭천은 걸음을 멈추고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당신은 좋은 친구요. 그러나 당신은 한 가지 잘못 알고 있는 일이 있소."
철전갑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이 냉막한 청년의 맑은 눈동자를 들여다 보았다.
"그게 뭡니까?"
낭천은 다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당신은 목숨이 자기의 것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게 잘못된 생각입니까?"
"물론이오. 잘못 되어도 이만저만 잘못된 것이 아니오."
이렇게 중얼거리던 그는 갑자기 눈을 딱 부릅뜨며 철전갑을 쏘아보았다.
"사람은 죽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아니오."
철전갑은 납득이 안 간다는 듯이 털투성이 얼굴을 갸우뚱했다.
"하지만 사람이 꼭 죽어야 할 때는....."
"설사 꼭 죽어야 할 때가 되었다 해도 발버둥이라도 한번 쳐 봐야 하오."
낭천은 음침하게 어두운 창공을 응시하며 부드럽게 말을 계속했다.
"조물주께서는 갈증을 느끼는 사람에게 물을 내려주시고 허기진 사람에게는 식량을 내려주셨소. 그리고 추워하는 사람에게는 옷을 하사하시었소....."
그는 다시 철전갑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다그쳤다.
"조물주께서는 당신에게 이렇게 많은 은총을 내리셨소. 그런데 당신은 조물주를 위해 무엇을 해 드렸소?"
철전갑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아무것도 해 드린 것이 없습니다."
낭천의 말이 다시 철전갑의 귀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당신의 부모님은 당신을 키우기 위해 많은 심혈을 기울여 왔소. 그런데 당신은 그들을 위하여 무엇을 해 드렸소?"
철전갑은 굵은 목에 달린 머리가 더 한층 수그러졌다.
낭천은 안타깝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당신은 해서는 안 된다는 말만 알고 있지 어떻게 부모님의 은혜와 조물주의 은총에 보답해야 하는지는 모르고 있구려?"
철전갑의 꽉 쥐어진 주먹에서는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낭천의 말은 지극히 단순하고 간단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깊고도 심오한 철학이 포함되어 있었다.
낭천의 목소리는 한마디 한마디 못박는 것처럼 들려왔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이유는 바르게 살기 위함이오. 그러니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함부로 좌우할 수가 없소."
철전갑은 고개를 푹 숙이며 힘없이 대답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잘....."
갑자기 말을 중단한 그는 큰 결심을 내린 듯 단호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내가 그 곡절을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은 이유는 다만...다만 ....."
그러나 낭천은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챘다.
"나는 당신을 믿소. 당신이 나에게 해명할 필요는 없소."
철전갑의 두 눈이 절로 휘둥그래졌다.
"천도련님은 무엇에다 근거를 두고 저를 믿는단 말입니까?"
낭천은 소리없이 미소를 지었다.
"나의 이 두 눈은 아직 멀지도 어둡지도 않소."
그리고는 자신이 넘치는 말투로 단정을 내리는 것이었다.
"그건, 아마 내가 산중에서 자랐기 때문일 거요. 산중에서 자란 사람은 전부 다 야수처럼 본능적으로 사람의 선악을 판별할 수가 있소."
초류빈의 생각 속에 만약 술을 먹지 않는 것보다 세상에 더 큰 괴로움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싫어하는 사람과 같이 술을 마시는 것이리라.
초류빈은 흥운장(興雲莊) 안의 사람들 하나하나가 모두들 구역질이 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유룡생(游龍生)이 가장 좋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그는 최소한 아첨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약 구역질이 나는 사람이 거기다가 아첨까지 떤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모골이 송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초류빈은 하는 수 없이 병을 가장했다. 호유성은 그의 성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억지를 쓰지 않았다.
그래서 초류빈은 혼자 침상 위에 누워 조용히 날이 어둡기를 기다렸다. 초류빈은 오늘밤 반드시 재미있는 일이 많이 발생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대나무 잎사귀에 바람이 불어와 우수수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초류빈이 누운 방의 천장에 거미가 매달려 거미줄을 치기 시작했다. 거미뿐만 아니라 사람도 역시 거미줄처럼 제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사방에다 거미줄을 치는 것이다.
초류빈에게도 그 나름대로의 거미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은 평생 동안 그 거미줄 안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말아야만 했다. 그것은 그 거미줄이 원래부터 자신을 위하여 친 것이기 때문이다.
어젯밤 설소하와의 약속이 생각나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의 빛을 떠올렸다. 그러나 철전갑의 생각이 떠올랐을 때는 반대로 눈빛이 암담해졌다.
시간이 말없이 지나가는 가운데 결국 어둠이 대지를 덮기 시작했다.
초류빈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갑자기 눈 위를 걷는 미미한 발자국소리가 이쪽으로 가까워지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초류빈은 누가 왔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상대방 역시 들어오지 않고 창 밖에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초류빈은 즉각 온 자가 호유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호유성이라면 절대로 창 밖에 서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온 자는 누구란 말인가?
'벽운인가?'
이렇게 생각해 본 그는 단전의 혈기가 거꾸로 역류해 용솟음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 밖에서 갑자기 헛기침소리가 들리더니 이어 조심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초형, 잠이 드셨소?"
이것은 다름아닌 장검산장 유소장주의 음성이었다. 초류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유쾌한 한숨인지 아니면 실망의 한숨인지 그 자신도 몰랐다.
초류빈은 침상에서 일어나 신을 신고 걸어가 문을 열어 주었다.
"어서 들어오시오."
유룡생은 천천히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초류빈은 화섭자를 찾아 불을 켰다. 그는 유룡생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내심 의아했다. 자고로 안색이 하얗게 질린 사람치고 좋은 일을 만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초류빈은 모르는 척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차를 마시겠소? 아니면 술을 마시겠소?"
"술!"
초류빈은 빙그레 웃으며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내 방에는 원래부터 차를 마시겠다는 손님은 없소."
유룡생은 따라 주는 술을 연속 석 잔이나 마시고 나서 갑자기 정색을 하고 질문을 던졌다.
"초형은 내가 왜 술을 마시려고 하는지 알고 있소?"
초류빈은 다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술이란 조시구(釣詩鉤)라 하기도 하고 소수추(掃愁湫)라고도 하오. 즉 '시를 낚는 낚시'이며 '온갖 시름을 씻어버리는 비'라는 뜻이오."
여기까지 말한 초류빈은 슬쩍 유룡생의 안색을 살피며 말을 이어갔다.
"한데 귀하께서는 쓸어야 할 걱정도 없거니와 또 떠오르는 시도 없소. 그렇다면 술을 마시려는 이유는 혹시 담량을 돋우기 위해서가 아니오?"
유룡생은 두 눈을 부릅뜨다가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잇따라 그는 번개같이 허리에 찼던 장검을 뽑았다.
스르릉!
해맑은 금속성 소리와 함께 불빛에 비친 검신에서 검광이 번쩍 빛났다.
유룡생은 갑자기 광소를 뚝 그치더니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초류빈을 노려보았다.
"당신은 이 검을 아시오?"
초류빈은 그의 긴 손가락으로 유룡생의 장검을 매만져 보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좋은 검이오! 정말 좋은 검이오."
그러다가 그는 싸늘한 검기에 못견디는 것처럼 연신 기침을 하는 것이었다.
유룡생은 두 눈을 번뜩이며 싸늘하게 말했다.
"초형께선 검을 식별할 줄 아는 사람이라 물론 이 검이 천고의 신병(神兵)인 어장검(魚藏劍)보다는 예리하지 못하지만 무림에서 떨치는 명성이 절대 어장검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오."
초류빈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천천히 말했다.
"전저(專儲)의 어장검. 무자(武子)의 탈정검(奪情劍)...사람은 검 때문에 명성을 날리고 검은 사람으로 인해 그 대를 이어 내려왔소."
유룡생은 하얗게 변한 얼굴에 한가닥 조소를 띠었다.
"그렇소. 이것이 바로 삼백 년 전 일대의 검호인 적무자(狄武子)가 사용했던 탈정검이오. 그러나 이 검에 대한 내력을 초형께서는 아마 아직 모르고 있을 것이오."
초류빈은 흥미로운 듯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어디 말씀해 보시오."
유룡생은 예리한 검날을 응시하면서 차분히 얘기를 꺼냈다.
적무자!
그는 어렸을 때부터 검을 사랑하여 일생을 검의 반려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은 사람이다.
하지만 인지상정이라 그도 중년에 들어서서 한 명의 여협(女俠)을 사랑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얼마 후 서로 혼인을 하기로 굳게 약속했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그것은 두 사람이 혼인하기 전날 밤 여협이 적무자의 친구인 신도(神刀) 팽경(彭瓊)과 암암리에 밀회를 즐기는 것을 적무자가 본 것이다.
천둥같이 화가 난 적무자는 탈정검으로 단칼에 두 사람을 살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후로 적무자는 다시는 혼인 얘기를 꺼내지 않고 일평생을 오직 검에다가 바쳤소."
이렇게 말하던 그는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더니 초류빈을 응시하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
"초형께선 아마 이 얘기의 내용이 매우 단조로워 아무 재미도 없다고 생각할 것이오. 그러나 이건 절대적인 사실로 추호의 거짓도 없소."
"하하하...난 그분 적무자께서 검법은 비록 고강하나 사람됨이 좀 너무 옹졸하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그건 어째서요?"
초류빈은 어깨를 으쓱 추스리며 여유있게 대답했다.
"귀하도 한번 생각해 보시오. 아무리 상대방이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이라 해도 어찌 한 명의 여자 때문에 친구와 의리를 끊을 수가 있겠소?"
유룡생은 차갑게 냉소를 쳤다.
"그러나 나는 적무자는 대영웅이며 대호걸이라 생각하오."
"그건 또 어째서요?"
초류빈의 물음에 유룡생은 당연한 것처럼 대답했다.
"이유는 간단하오. 그런 영웅호걸만이 그 어려운 일을 단호하게 끝장낼 수 있기 때문이오."
초류빈은 소리없이 미소를 보냈다.
"그럼 귀하도 역시 오늘밤 삼백 년 전의 적무자 흉내를 내려는 것이오?"
유룡생의 얼굴에 아련히 살기가 떠올랐다.
"만약 초형께서 오늘밤 삼백 년 전의 신도 팽경 흉내를 낸다면야....."
초류빈은 탄식을 하며 유유히 대꾸했다.
"보름날 밤, 계수나무 아래에서 절세의 가인과 밀회를 즐긴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이오? 귀하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살풍활戀?말씀만 하시는 거요?"
"귀하는 오늘밤 반드시 가야 한다는 뜻이구려?"
초류빈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만약 설낭자 같은 분에게 바람을 맞힌다면 너무 죄가 되는 것이 아니겠소?"
유룡생의 창백한 얼굴이 갑자기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잇따라 이마에 지렁이 같은 굵은 힘줄이 불끈 치솟는가 싶자, 휘익! 하는 파공음과 함께 탈정검은 빠르게 초류빈의 목을 노리고 짓찔러 들어왔다.
그러나 초류빈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살짝 몸을 흔들어 피하고는 아깝다는 듯이 말했다.
"귀하의 이 같은 검법으로는 적무자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할 것 같구려."
유룡생은 일격이 실패하자 이를 부드득 갈았다.
"하지만 이런 검법으로도 당신을 죽이기는 충분하오!"
싸늘한 고함과 함께 그는 연속적으로 십여 검을 찔러갔다.
휙! 휘익!
잇따라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무시무시한 살기가 사방에 회오리쳤다.
탁!
경쾌한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식탁 위에 있던 토기 주전자가 깨어지며 그 주전자 속의 술이 방바닥에 주르르 쏟아졌다. 유룡생이 펼치는 검법은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고 빨랐다.
그러나 초류빈은 제자리에 서서 별로 몸을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았는데 유룡생의 검을 전부 다 빗나가게 하는 것이 아닌가.
"이놈!"
유룡생은 부드득 이를 갈더니 더욱 신속하게 출수하기 시작했다. 사실 유룡생은 초류빈의 수중에 칼이 들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마음놓고 악랄한 출수를 한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초류빈은 칼을 뽑지 않고도 시종 여유만만하게 그의 공격을 피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미소까지 지으면서 조롱을 하는 것이었다.
"젊은 나이에 이런 쾌검을 연마한다는 것은 확실히 대단한 일이오. 그러나 당신 집안과 사문의 명성으로 따지고 볼 때 만약 이런 검법으로 강호에 나선다면 아마 일 년도 못가서 영존과 영사의 명성은 떨어지고 말 것이오."
초류빈은 무지막지하게 기습해 오는 칼날 속에서도 여전히 입을 열 여유가 있다. 그러니 유룡생의 분노가 어느 정도이겠는가.
초조와 분노가 뒤엉켜 그의 표정은 악귀처럼 변했다. 그러나 상대방의 옷깃 하나 스칠 수가 없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원래 그가 제일검으로 초류빈의 목을 찌르려고 할 때 초류빈은 살짝 왼쪽으로 몸을 피하는 동작을 취했었다. 그래서 그의 검도 즉시 왼쪽으로 따라갔다.
하지만 예상 외로 초류빈의 돌아가려던 몸이 딱 멈춰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의 출검(出劍)도 자연히 빗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형태로 그의 연속적인 십 검이 전부 빗나가 버린 것이다.
유룡생은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는 초류빈의 가슴팍을 향해 전력을 다한 일격을 찔러갔다. 동시에 그는 마음속으로 단단히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네가 아무리 수작을 부려도 절대로 속지 않는다.'
과연 초류빈은 왼쪽 어깨를 들썩하며 오른쪽으로 피하려 했다. 그러나 유룡생은 앞서 계속 속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따라가지 않고 곧장 찔러갔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번에 초류빈은 정말 오른쪽으로 피하고 말았다. 유룡생의 일검은 다시 어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아차! 또 속았구나.....'
그가 마음속으로 이렇게 부르짖고 있을 때 초류빈의 손가락이 벌써 그의 검신을 튕기고 있었다.
땅!
맑은 음향과 함께 유룡생은 오른쪽 손목이 마비되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어찌 그뿐이랴. 심지어는 수중의 장검까지도 그의 손을 벗어나 창 밖으로 그냥 날아가 버린 것이다.
초류빈은 여전히 원래의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전혀 움직여 본 적도 없다는 것처럼.
그러나 유룡생은 마치 수천 길이나 되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순간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멍청히 넋을 잃고 있는 그의 어깨를 초류빈은 가볍게 두들겼다.
"탈정검은 보통 병기가 아니니 속히 주우러 가시오."
"으으....."
유룡생은 이를 악물고 이빨 사이로 저주에 찬 신음소리를 토했다. 그는 밖으로 달려가다 말고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몸을 홱 돌(렸다.
"너...너도 남자라면 더도 말고 일 년만 기다려라. 내 일 년 후에는 기필코 너를 다시 찾으러 오겠다!"
"일 년? 일 년 가지고는 모자랄 걸?"
초류빈은 여유자적한 모습으로 팔짱을 낀 채 입가에 조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정색을 하며 진지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의 자질은 별로 나쁜 편이 아니오. 그리고 검법도 약하지는 않소. 그러나 대적을 할 때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힐 수가 없기 때문에 비록 출검은 빠르나 영악하지 못하오. 당신이 침착함을 찾지 못한다면 아마 평생을 가도 나를 이기지는 못할 것이오."
초류빈의 지적에 유룡생은 수치스런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생각지 못했던 약점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침착하다는 것은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어렵소. 그리고 만약 당신이 나를 이기려면 반드시 칠 년 간의 내공을 연마해야만 하오."
유룡생의 안색은 하얀 것에서 파랗게 변했다.
초류빈은 악의없는 미소를 보냈다.
"그럼 이젠 그만 가 보시오. 칠 년이란 세월은 긴 것이 아니오. 만약 내가 칠 년을 더 살아갈 수 있다면 내 반드시 당신의 복수를 받아 주겠소. 하물며 옛부터 군자가 복수를 하는데 있어서는 십 년도 늦지 않다는 속담이 있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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