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03 소이비도 제1권 사나이의 우정





사나이의 우정



초류빈은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사맹의 목에는 이미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를 죽인 사람은 피가 자신의 옷에 튈 것을 방비하기 위하여 미리 얼음조각을 준비했다가 구멍이 난 목에다 틀어막은 듯했다. 목에 박힌 얼음조각이 몸의 체온에 의해 녹아 없어질 때면 사맹의 피도 굳어져 흘러나올 수 없을 것이다.

시체가 쓰러지지 않은 채 기둥에 가볍게 기대 있는 것으로 보아 살인을 한 자의 신법과 살인 솜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사맹이 물론 곱게 당하고 있을 자는 아니리라. 하지만 그는 미처 손을 쓸 겨를도 없이 당하여 그의 시신은 원래의 자세를 유지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초류빈은 상대의 빠른 검법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우두커니 서 있던 초류빈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주루 안으로 들어갔다.

문에는 휘장도 쳐 있지 않았고 안에는 탁상도 없었으며 넓은 주루 안에는 창 쪽으로만 한 상의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 하지만 음식은 대부분 건드리지도 않았고 술잔에도 술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극락동에서 온 네 명의 늙은 동자도 이미 시체로 변해 있었다. 시체는 네 명 다 머리가 바깥을 향하고 다리는 안으로 향한 열십 자 모양으로 죽어 있는데, 황의동자의 발은 녹의동자와 맞닿아 있었고 흑의동자의 발은 홍의동자의 발과 닿아 있었다. 네 사람의 얼굴에는 음험한 웃음기가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그리고 네 사람의 목에도 모두 검에 의한 구멍이 뚫려져 있었다.

또 주루 안 한쪽 구석의 기둥 옆에는 우이가 반듯이 누운 채 죽어 있었으며 그의 손에는 암기가 한줌 꽉 움켜져 있었다. 보아하니 암기를 채 던져내기도 전에 목을 찔린 것이 분명했다.

초류빈은 놀라운 것인지 아니면 기뻐하는 것인지 몰라도 혼자 잠꼬대를 하듯 중얼거렸다.

"정말 놀랍도록 빠른 검법이군."

만약 이틀 전이라면 그는 세상에 이렇게 신속한 검법을 지닌 자가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 당대의 제일 검객이라는 칭호를 받던 천산일검(天山一劍) 설응자(雪鷹子)의 검법은 신속하기로 유명했으나, 이렇게 절묘하고 빠르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설응자 역시 낭패를 당한 적이 있어 그 불가일세의 검객은 검을 거두고 은거를 했다. 아마 지금쯤은 온통 얼어붙은 대지 어느 곳에 묻혀 긴 잠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빠른 검법을 실천한 인물은 누구란 말인가 ― 그것은 바로 신비스럽고 고독한 청년 ― 낭천이리라.

초류빈은 이곳 주루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혼자 생각을 굴렸다.

낭천은 냉막한 표정을 띠고 이곳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자 극락동의 호법인 홍, 녹, 흑, 황, 네 명의 동자 호법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낭천을 포위했을 것이다.

그들이 막 음험한 웃음을 띠고 공격하려 했을 때 낭천의 검은 이미 그들 네 사람의 목을 관통시켰다. 이것을 본 우이가 급히 한 줌의 암기를 손에 쥐었으나 미처 방출해 내기도 전에 낭천의 검은 다시 그의 목을 관통시켰을 것이다.

여기까지 나름대로 생각해 본 초류빈은 탄식을 터뜨리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장난감? 이제 누가 그의 검을 감히 장난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문득 그는 기둥에 장검으로 새긴 글씨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당신이 나를 위해 제갈뢰를 죽였으니 나도 당신을 위해 이 자들을 죽였습니다. 이제 당신에게 갚을 빚은 없습니다. 사람이 빚을 진다는 것은 가장 나쁜 일입니다.....>

여기까지 읽은 초류빈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자네를 위해서 단 한 사람을 죽였는데 자네는 나를 위해 여섯 명이나 죽였군. 자네는 가장 좋지 않은 것이 남에게 빚을 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 나에게는 이렇게 많은 빚을 남겼나?"

초류빈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계속 읽어 내려갔다.

<...내가 당신을 위해 죽인 사람이 비록 많기는 하지만 상황이 다릅니다. 당신은 여섯 명의 몫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죽였고 나는 한 사람 몫밖에 안 되는 여섯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피차 아무 빚도 없습니다.....>

다 읽고 난 초류빈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허허허...자네의 그런 계산은 정확하지 않네. 보아하니 자네는 돈을 벌기가 틀린 것 같군."

글이 끝난 기둥 밑에는 화살 표시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초류빈은 당연하다는 듯 화살 표시가 난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가 막 안으로 들어선 순간, 번쩍하며 싸늘한 광채가 발해지고 있는 검이 초류빈의 정면으로 뻗어나왔다. 검 끝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검을 쥐고 있는 사람은 덕성스럽게 생긴 노인이었다. 비록 수염은 아직 검은 색깔이었지만 노인의 얼굴에는 많은 주름살이 잡혀 있었다.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검을 꽉 쥔 채 뒷걸음질을 치면서 초류빈에게 물었다.

"당신은...당신은 누구요?"

노인은 될 수 있는 대로 크게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제대로 되지 않는 데다가 겁에 질려 있어 음성까지도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초류빈은 이 노인이 누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노인장께선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노인은 사색이 다 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모...모르겠소."

초류빈은 빙그레 웃으면서 다시 말을 꺼냈다.

"나는 노인장이 이곳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 그러니까 십 년 전, 노인장과 함께 술까지 마셨소."

노인의 두 눈에 가득찼던 경계의 빛이 누그러졌다. 하지만 역시 두 손으로는 검을 꽉 움켜잡고 좀처럼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손님의 존함은....."

초류빈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초씨요."

그제서야 노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들고 있던 검을 힘없이 떨어뜨리며 말을 꺼냈다.

"오! 초...초탐화이셨군요. 노부 이곳에서 기다린 지 오래요."

"저를 기다렸다고요?"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 한 공자...아니 젊은 영웅께서 많은 흉한들을 죽이신 후 한 사람만 살려 노부에게 맡겼지요. 그러면서 초탐화께서 곧 오실 것이니 그 자를 초탐화에게 넘겨 드리라 했습니다....."

노인은 한차례 진저리를 치고는 말을 끝맺었다.

"만약 무슨 차질이 있으면 노부의 목숨까지도....."

초류빈은 얼른 노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 자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노인은 바싹 마른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저 주방에 있습니다."

"좋소!"

부엌은 그다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았으나 매우 깨끗하게 정돈이 되어 있었으며 거기에는 한 명의 사나이가 사지를 꽁꽁 묶인 채 의자에 앉혀져 있었다.

이 사나이는 키가 매우 작은 데다가 깡말랐고 귀 쪽에 검은 털이 있었는데, 초류빈은 낭천이 잡아 둔 자가 바로 이 자가 틀림없을 것이라고 내심 짐작했다. 하지만 이 사내는 초류빈이 올 줄은 미처 짐작하지 못한 듯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경악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입술을 계속 옴지락거렸으나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낭천은 이 사나이의 사지를 꽁꽁 묶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이에 자갈까지 물렸기 때문이었다. 낭천은 사나이가 입을 열어 이곳 주인을 위협할 것이 염려되어 입까지 막아 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초류빈은 그제서야 낭천에게도 세심한 면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어째서 이 사나이의 혈도를 봉쇄하지 않았을까?

초류빈의 손에서 싸늘한 광채가 번뜩였다. 어느 틈엔가 비수를 꺼낸 그가 사나이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헝겊을 끄집어 낸 것이다.

비록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얼마나 신속한지 사나이는 하마터면 까무라칠 뻔했다.

"술을 가져오시오!"

초류빈이 주인에게 말하자 주인은 즉시 주방에 있는 술을 가지고 와 초류빈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술을 한 잔 따라 마신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름이 무엇이오?"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사나이는 바싹 마른 입술에 침을 묻히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생은 홍한민(洪寒珉)이라 합니다."

초류빈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나는 당신이 술을 먹을 줄 안다는 것을 알고 있소. 한 잔 하시오."

그는 몸에 묶인 줄을 끊어 준 후 술을 한 잔 따라 주었다.

홍한민은 마비되었던 양쪽 팔을 주무르면서 그래도 망설이자 초류빈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술을 권한다면 나는 결코 거절하지 않을 것이네."

잠시 망설이던 홍한민은 떨리는 손을 내밀어 술잔을 받아 들이켰다. 그러나 절반만 들어갔을 뿐 절반은 옷에 쏟아지고 말았다.

이것을 본 초류빈은 탄식을 터뜨렸다.

"아깝군 아까워...만약 당신도 나처럼 칼을 하나 구해 조각을 하면 아마 손이 떨리진 않을 것이오. 이건 나의 비결이오."

이렇게 말한 그는 다시 두 잔의 술을 따르며 말을 꺼냈다.

"가인(佳人)은 건방져서는 안 되며 좋은 술은 낭비해서는 안 되오. 이후부터 당신은 잘 기억하고 계시오."

그 말을 들은 홍한민은 손에 든 술이 쏟아질까 봐 단숨에 모두 마셔 버렸다.

이번에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자 초류빈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잘했소. 나는 평생 동안 단 두 가지 일에 대해서 배웠는데 그것을 모두 당신에게 얘기해 주었소. 자! 이제 어떻게 나에게 감사할 것이오?"

홍한민은 대답할 말이 없어 절로 더듬거렸다.

"소생...소생은....."

초류빈은 그의 표정을 보며 넌지시 말했다.

"황색 보따리를 내놓으시오. 그럼 난 그것으로 만족하겠소."

"황색 보따리라니...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생은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상대방의 대답에 초류빈은 애석한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대부분 마음이 넓은 줄 알고 있었지만 당신은...정말 당신은 나를 실망시키는군."

홍한민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결박도 풀리고 한 잔 술에 힘입어 몸이 별로 떨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대협께선 뭔가 오해를 하셨습니다. 소생은 정말....."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초류빈의 싸늘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너는 내 술을 마셨다. 그리고도 나를 속이려 하다니...내 술을 다시 돌려 줘야겠다!"

홍한민은 허리를 굽신거렸다.

"아...아무렴요. 소생 곧 사다가 올리겠습니다."

초류빈의 목소리는 지옥에서 울려나오는 것처럼 아랫배 깊숙한 곳에서 울려나왔다.

"나는 네가 방금 마신 두 잔만 돌려받으면 된다."

홍한민의 이마에는 일순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술은 이미 뱃속으로 들어갔는데 어떻게....."

"그거야 극히 쉽게 해결되는 방법이 있지."

이렇게 말한 초류빈은 홍한민의 아랫배에다 단검을 들이대며 음산하게 소리쳤다.

"술이 네 뱃속에 있다면 너의 배를 갈라야 할 것이 아니냐?"

홍한민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대협께선 어찌 소인과 농담을 하시려 합니까?"

"농담인지 아닌지는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한 그는 수중에 든 단검에다 약간 힘을 가해 그의 배에서 피가 나도록 하려고 했다. 그것은 겁쟁이들만이 거짓말을 하며 또 겁쟁이들은 일단 피를 보면 모든 것을 실토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뜻밖에도 그의 단검은 마치 절벽에 부딪치기라도 한 듯 홍한민의 가슴을 파고들어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홍한민은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한 듯 얼굴에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이때 초류빈의 두 눈에서는 이상한 광채가 번뜩였다. 그는 홍한민의 몸에 자신의 단검이 들어가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별로 놀라지 않았으며 도리어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너는 강호에서 얼마나 굴러먹었느냐?"

홍한민은 상대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던질 줄은 미처 생각지 못하고 당황했으나 곧 미소를 띠었다.

"벌써 이십 년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강호에 몇 가지 보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그 중 한 가지가 바로 금사갑(金絲甲)이다. 듣자하니 그 물건은 칼이 뚫지 못하며 물과 불에도 상하지 않지. 너는 강호에서 이십 년이나 굴러먹었으니 충분히 들어서 알고 있겠지?"

초류빈이 이 말을 하는 동안 홍한민의 얼굴은 잿빛이 되었다. 그리고는 초류빈의 이야기가 막 끝나자마자 벌떡 뛰쳐 일어나 달아나려 하였으나 그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홍한민이 번개처럼 몸을 날려 문 입구에 당도했을 때 초류빈은 어느 틈엔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앗!"

홍한민은 급히 연자창(鍊子槍)을 뽑아 초류빈을 찔러갔다.

휘익 하는 예리한 파공음이 들리는 가운데 은색 광채가 번뜩였다. 보아하니 홍한민은 연자창을 다루는 조예가 상당한 것 같았다. 부드러운 연자창이 휘둘러지자 마치 강철처럼 꼿꼿해져서 초류빈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창!

갑자기 강철끼리 부딪치는 듯한 맑은 금속성이 터져나왔다.

초류빈은 이미 술잔을 들고 있던 손을 자기의 목이 있는 데까지 들어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홍한민의 창끝은 초류빈이 들고 있는 조그마한 술잔 속에 들어가 있었다. 정녕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어찌 된 셈인지 그 술잔은 깨지지도 않은 채였다.

초류빈은 태연하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만약 이후에도 누가 나더러 금주를 하라고 하면 나는 그에게 술을 마시는 데도 유익한 것이 많다고 말해 주겠다. 그 조그만 술잔이 생명까지 구해 줄 수 있으니까 말이야."

"으으으....."

홍한민은 알지 못할 신음소리를 내며 석상처럼 그 자리에 서서 엄동설한임에도 불구하고 이마에서는 비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토록 빠르고 정확하게 그리고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찌른 연자창이 술잔 속에 틀어박히고 말다니.

초류빈은 미동도 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네가 싸우고 싶지 않다면 술값 대신 몸에 입고 있는 금사갑을 벗어라."

홍한민의 음성은 떨려 나왔다.

"대...대협께선...정말....."

초류빈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그것을 갖고 싶어 그러는 것이 아니다. 네가 나의 눈을 피해 보따리를 가지고 달아난 것은 어디까지나 너의 능력이다. 하지만 보따리를 내가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은 잘못한 일이다. 나는 누명을 쓰는 것을 가장 싫어하니까."

흥한민의 입에서는 드디어 띄엄띄엄 말이 새어 나왔다.

"그렇습니다. 보따리는...소인이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그 보따리에는 확실히 금사갑이 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하지만....."

홍한민은 어찌나 마음이 급했던지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마음대로 나오지 않는 말에 눈물까지 흘릴 것 같았다.

초류빈은 안쓰러운 듯이 홍한민을 주시하며

"금사갑이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보물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네가 금사갑을 입고 있다 해도 나는 보통 때와 같이 너의 생명을 빼앗을 수가 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것으로 인하여 목숨을 버리려 하느냐?"

잠시 말을 멈춘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무겁게 말을 이었다.

"세상에 진기한 보물은 덕망이 있는 자만이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물건은 너 같은 자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네가 그것을 나에게 주면 너는 몇 년 더 살 수 있을 것이다."

홍한민은 옷소매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면서 탄식조로 말했다.

"소인도 그것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인이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초류빈의 두 눈이 성큼 치켜졌다.

"그럼, 그것을 누구에게 갖다 주려고 했단 말이냐?"

홍한민은 사색이 다 된 얼굴로 잠시 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초류빈은 싸늘한 미소를 띠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에게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실대로 말하게 하는 방법이 많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중 어느 방법도 사용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리고 너는 그런 방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게 하지 말기를 바란다."

홍한민은 체념한 듯이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초류빈은 덤덤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될 수 있으면 처음부터 자세하게 얘기해 주기를 바란다."

홍한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대협께서는 혹시 신륜(神倫) 대오(戴五)란 자를 알고 계십니까? 하기사 그런 하찮은 도둑놈에 대해서 대협께선 잘 모르실 것입니다."

초류빈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 자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본 적도 있다. 그는 경공술과 공력도 모두 약하지 않다. 그리고 주량 역시 괜찮지."

홍한민은 두려운 눈으로 초류빈을 쳐다보며 말하기를

"이 금사갑은 어디서인지는 모르지만 바로 그가 훔쳐온 것입니다."

초류빈은 흥미로운 듯이 물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또 너희들 손에 들어왔느냐?"

"대오와 제갈뢰는 매우 친한 사이였습니다. 우리는 장가구(張家口)에서 우연히 그를 만나게 되었지요. 그래서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다가 만취한 그가 금사갑을 꺼내어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본 제갈뢰는 저절로 욕심이 생겨....."

초류빈의 두 눈에는 즉시 소름이 끼칠 것만 같은 살기가 번뜩였다.

"너희들은 그런 파렴치한 행동까지 했으면서 어찌 말하기를 꺼려 하느냐?"

홍한민은 고개를 푹 떨어뜨리면서 힘없이 중얼거렸다.

"대오는 금사갑이 강호인들이 혈안이 되어 찾고 있는 물건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만...어쨌든 그는 술을 먹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초류빈은 싸늘하게 웃었다.

"술을 마시지 말았어야 하는 게 아니라 못된 친구를 사귀지 말았어야 했다."

홍한민의 창백한 얼굴은 이때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초류빈의 말은 무게 있게 이어졌다.

"금사갑이 비록 무림삼보(武林三寶) 중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별로 소용이 없다. 서로 막상막하의 실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일반인으로선 손에 넣었다 해도 마찬가지로 죽게 된다. 그것이 어떻게 해서 모든 사람이 빼앗고자 하는 물건이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필경 원인이 있을 것이다."

"맞습니다. 거기에 비밀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비밀은 이미 비밀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여기까지 말했을 때 주루의 늙은 주인이 두 주전자의 술을 가지고 들어오더니 만면에 미소를 담은 채 입을 열었다.

"방금 데운 술입니다. 초탐화 대인께선 우선 한 잔 마셔 보십시오."

그러자 초류빈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주인장, 만약 다음에도 내가 와서 술을 팔아 주기를 바란다면 다시는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마시오. 나는 누가 나를 초탐화라 부르면 술맛이 일시에 달아나 버리고 마오."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술을 한 잔 따라 먼저 코에 갖다 댔다. 술향기가 어찌나 좋은지 초류빈은 감탄을 터뜨렸다.

"정말 좋은 술이로군요!"

그리고는 서슴없이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나서 습관처럼 허리를 꼬부리고 심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주인은 안타까운 듯이 의자를 초류빈에게 갖다 주었다.

"기침은 몸에 해롭습니다. 조심하셔야지요. 조심을....."

이렇게 말하는 노인의 창백한 얼굴에 갑자기 한 가닥 의미심장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잠시 멍하니 초류빈을 쳐다보고 있던 노인이 다시 말을 꺼냈다.

"하지만 이 술은 기침에 좋은 것이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기침이 곧 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소? 주인장도 한 잔 하시지요."

그가 잔을 내밀자 노인은 정중하게 사양했다.

"노부는 마시지 않겠소이다."

"무엇 때문이오? 빵장수는 쌀밥은 먹어도 빵은 먹지 않는다고 하던데 주인장께서도 그런 마음이오?"

"저도 평소에는 다소나마 술을 마셔 봤습니다. 하지만 여기 이 술만은 마실 수가 없습니다."

말을 마친 노인의 눈초리가 대뜸 칼날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그러나 초류빈은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계속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건 또 무엇 때문이오?"

"그것은 이 술을 마신 후에 조금이라도 진력(眞力)을 쓰면 술 속에 들었던 독이 즉시 발작하기 때문이오. 그러면 곧장 칠공에서 선혈을 흘리면서 죽게 되어 있는데 어찌 내가 마실 수 있겠소?"

"뭐라구요?"

초류빈은 아연실색하여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반면 죽을 상이 되어 있던 홍한민은 뛸 듯이 기뻐했다.

"아! 영감이 나를 도와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소. 내 차후에 크게 상을 내리리다!"

그러나 노인의 음성은 냉혹하기 짝이 없었다.

"나에게 감사할 것 없다!"

"하하하...선배님께서도 대단하시군요. 그럼 혹시 선배님께서도 ....."

갑자기 말을 중단한 그는 느닷없이 수중의 연자창을 다시 내찔렀다.

"어딜!"

포효를 터뜨린 노인이 허리를 쭉 펴자 구부러졌던 몸이 갑자기 한 자나 더 늘어나며 재빨리 왼손을 내밀어 연자창의 끝을 홱 낚아채면서 소리쳤다.

"네까짓 놈이 감히 이 어르신네와 싸우겠다는 것이냐?"

그토록 담이 작고 연약하게 보이던 노인이 순식간에 삼백육십도로 사람이 달라진 것이다. 노인의 창백했던 얼굴에는 붉은 혈색이 감돌기 시작하더니 눈에서는 강한 신광까지 발해지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홍한민은 갑자기 한 사람이 생각나 대경실색하여 소리쳤다.

"앗! 선배님, 용서해 주십시오. 소인은 선배님이....."

홍한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인의 거센 오른쪽 주먹이 홍한민의 면상을 강타했다.

퍽!

마치 잘 익은 수박이 땅에 떨어져 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으악!"

뒤이어 붉은 선혈이 허공에 확 뿌려지면서 홍한민은 이 장 밖으로 날아가 떨어져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즉사를 면치 못하고 염라대왕 앞으로 끌려간 것이다.

이 광경을 본 초류빈은 장탄식을 금치 못했다.

"내 진작 말했지. 금사갑을 지니고 있으면 생명만 단축될 뿐이라고."

노인은 홍한민의 시체를 멍하니 내려다보더니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이십 년...이십 년....."

초류빈이 냉큼 말을 받았다.

"당신은 지난 이십 년 동안 사람을 죽이지 않았단 말이군?"

노인은 천천히 몸을 돌려 초류빈을 보며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동안 나는 어떻게 해야 사람을 죽일 수 있었는지는 잊지 않고 있었다."

"당신은 이런 일 때문에 사람을 죽인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오?"

"이십 년 전이라면 나는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십 년이나 지나지 않았소? 당신이 이십 년 동안 피해 있었다니 쉽지 않았겠군요. 한데 이제 와서 자신의 신분을 폭로해 버렸으니...너무 경솔했다고 생각지 않소? 안타까운 일이오."

순간 노인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럼 너는....."

초류빈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잊지 않았소. 자면이랑(紫面二郞) 손육이 이십 년 전에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말이오. 감히 강남(江南) 육십이수로(六十二水路) 부둣가 총두목의 애첩과 도망을 치다니...난 그 용기에 감탄해 왔소."

노인의 눈에서 새파란 신광이 빛살처럼 뻗어나왔다.

"네놈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느냐?"

초류빈은 의자에 앉은 채 조금도 겁을 내지 않았다.

"당신은 비꼰다고 생각하시오? 한 남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도망칠 수 있다는 것은 과연 남아의 용기요. 난 원래 당신의 그런 용기에 매우 탄복했었소. 그러나 지금은....."

여기까지 말한 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매우 실망했소. 그런 자면이랑이 이렇게도 꾀죄죄한 노인일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오. 암중에서 독을 사용하여 진실되게 승부를 가리지 못하니 내 어찌 실망하지 않겠소?"

자면이랑 손육이 살기띤 눈초리로 막 소리를 지르려 했을 때, 갑자기 어디선가 간드러진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를 원망하지 마라. 독을 쓰는 데도 학문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아직 그만한 학문이 없다!"

초류빈은 비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렇소. 나는 장미 부인의 수단이었다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소. 그러나 초류빈이 이십 년 전 강호에서 그 아름다움을 떨치던 미인의 손에 죽게 되다니...내 인생도 과히 헛되지는 않은 것 같소."

"흥, 입심이 대단하군. 내가 만약 이십 년 전에 너를 만났다면 결코 그와 도망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소리와 함께 한 명의 여인이 전신을 매력있게 흔들면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이 여인이 바로 지난 날 강호에 미모로 이름을 떨쳤던 장미 부인이었다. 비록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별로 늙지는 않았다. 그녀의 두 눈에는 아직도 요염한 광채가 담겨져 있었다. 또 치아도 백옥처럼 희고 가지런했다. 다만 그녀의 허리, 그녀의 허리는 너무 굵어 마치 통나무같이 보였다.

초류빈은 마치 통닭 한 마리를 한입에 집어넣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것이 그 아름답던 장미 부인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미인이 늙는다는 것은 매우 안타깝고 가슴이 아픈 일이다. 장미 부인은 붉은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다소 희어진 머리카락은 깨끗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녀는 초류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천하제일의 풍류객 탐화랑에 대해 익히 들어왔지만 과연 명실상부하군. 나는 벌써 이십 년 동안 이렇게 멋진 남자를 보지 못했지.하지만....."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이십 년 전 우리집은 항상 강호의 소년 영웅이나 풍류검객들로 가득차 있었다. 모두 나를 방문하는 것이었고 나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누고 나를 쳐다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더할 수 없이 기뻐했지. 못 믿겠다면 저 사람에게 물어 보아라."

손육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초류빈은 장미 부인의 목에 찐 비곗살과 손육의 표정을 번갈아 살펴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 노인이 그동안 별로 행복하게 지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장미 부인은 초류빈을 주시하며 하소연하듯 입을 열었다.

"그동안 나는 죽은 것보다 더 큰 고역을 치르면서 살아왔지. 매일같이 방안에 숨어서 사람도 보지 못하며 말이야. 나는 이 따위 보잘것 없는 사내와 도망친 것을 후회하고 있어."

그러자 손육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진짜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데 그 따위 소리를 하는 것이냐?"

장미 부인의 얼굴에 서리가 끼었다.

"뭐라구?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너와 함께 이곳으로 와 고생을 하면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데 네가 후회는 무슨 후회냐?"

손육의 눈에서는 저주에 가득찬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보기도 싫다는 듯이 장미 부인은 서서히 몸을 돌려 초류빈에게 말했다.

"탐화랑, 네가 한번 말해 봐라. 이런 남자에게 양심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가 이런 인간인 줄 알았다면 나는 차라리 죽었을 것이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러나 눈물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초류빈은 여유있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부인께서 죽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오. 그렇지 않았더라면 소생은 큰 한을 안고 죽을 뻔했소."

"정말이냐? 네가 정말 나를 그렇게 생각했었느냐?"

"물론 진짜요. 부인 같은 뚱보 미인을 어디 가서 다시 찾을 수 있겠소?"

"뭐라고?"

장미 부인의 안색은 금방 핼쓱하게 굳어지고 끓어오르는 노화로 전신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손육은 고소하다는 듯이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초류빈은 딱하다는 듯이 죽은 홍한민을 가리키며 다시 조롱을 퍼부었다.

"사실 부인은 저 금사갑을 얻어도 아무 소용이 없소. 설혹 부인의 몸을 절반으로 쪼개도 부인의 몸에는 들어가지 않을 테니까."

장미 부인은 으스러져라 이를 갈았다.

"네...네놈이...내 결코 네놈이 편히 죽도록 하지 않겠다."

말을 마친 그녀는 즉시 머리에서 비녀를 하나 뽑아 들고 초류빈에게로 다가왔다. 초류빈은 이미 체념한 듯 담담한 미소만 띠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때 손육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면서 얼른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금사갑을 이미 손에 넣었는데 그놈과 다툴 필요가 어디 있소?"

장미 부인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받은 터라 미친 듯 소리쳤다.

"내 일에 대해 너는 상관하지 마라!"

그러나 이 고함소리가 그녀의 마지막 부르짖음이 될 줄이야 그녀가 어찌 알았겠는가. 장미 부인이 초류빈 바로 앞까지 갔을 때 느닷없이 손육이 그녀를 걷어차 버린 것이었다.

"아악!"

비명과 함께 그녀의 비대한 몸은 여지없이 공중으로 날아 호되게 천장에 부딪쳤다가 땅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녀 역시 홍한민처럼 단 일격에 즉사를 면치 못했다.

초류빈은 이 갑작스러운 사태의 변화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물었다.

"아니, 당신은 나를 살리기 위해 그녀를 죽였소?"

손육은 당치도 않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이십 년 동안 나는 그녀 때문에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에 시달려 왔다. 그녀는 정력이 너무 강해. 만약 내가 그녀를 죽이지 않았으면 나는 반 년도 못 가서 죽고 말았을 거다."

"하지만 그건 당신이 자청한 일이 아니오? 당신은 이십 년 전의 일을 잊었소?"

"너는 내가 그녀를 유혹해서 도망쳤는 줄 아느냐?"

"그럼 아니란 말이오?"

"내가 저 계집을 만났을 때 나는 저 계집이 양두목의 마누라인 줄은 몰랐다."

손육은 이를 부드득 갈더니 마른 기침을 두어 번 하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저 계집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줄이야 어찌 알았겠나. 양두목이 삼십여 명의 고수들을 거느리고 나를 찾아 왔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도망치고 말았었다."

초류빈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최소한 그녀는 당신을 사랑했을 것이오. 그렇지 않고서야....."

"뭐? 나를 사랑했다고? 허허허....."

손육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리고 나서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나는 저 계집에게 이용당한 것에 불과하다. 저 계집은 양두목이 관외로 나간 틈을 타서 한 젊은 녀석과 붙어 아이까지 배게 되었다. 그러다가 뒤탈이 생길까 두려워 얼마간의 재산을 훔쳐 젊은 놈과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초류빈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오! 알고 보니 그 가운데 또 그런 곡절이 있었군요?"

손육은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젊은 녀석은 장미 부인이 갖고 나온 재산의 대부분을 훔쳐 달아나 버렸다는 것이다. 장미 부인은 사람과 돈을 졸지에 잃어버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재수없게 손육이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처음 손육은 그런 사실을 몰랐으나 그녀가 취중에 지껄여서야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쏟아진 물이라 손육에게는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 아이는 어떻게 되었소?"

손육은 이 물음에 입을 꽉 다물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럼 당신은 왜 진작 그녀를 죽이지 않고 지금까지 기다린 것이오?"

손육이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초류빈은 고소를 지으며 넌지시 물었다.

"난 이제 곧 죽을 몸인데 나에게 말해 준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겠소?"

손육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초류빈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음침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주막을 차리면 이점이 하나 있다. 그건 재미난 일에 대해서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강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 뭔지 알고 있느냐?"

"나는 주막을 차린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 수 있겠소?"

손육은 누가 엿듣는 것이 두려운 듯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음성을 낮추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너는 삼십 년 전 천하를 주름잡던 매화도(梅花盜)가 다시 출현했다는 것을 아느냐?"

매화도! 이 세 글자가 손육의 입에서 나오자 초류빈의 안색이 홱 달라졌다.

손육은 초류빈의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이 득의해 하며 계속해서 말했다.

"매화도가 강호를 종횡할 때 너는 어려서 그의 무서움에 대해 모를 것이다. 내가 말해 주지. 당시 강호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점창장문(點蒼掌門), 그러니까 당시 천하제일 검객이라 칭하던 오문천(吳問天)도 그의 손에 죽고 말았다."

손육은 한 차례 숨을 몰아쉬고 나서,

"게다가 그 자는 행적이 신출귀몰했지. 오문천은 그를 죽이겠다고 선언한 다음날 자기의 원락(院落)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고 다만 가슴에 매화꽃 모양의 핏자국만 있었을 뿐이다."

손육은 마치 매화도가 나타날 것이 두려운 것처럼 다시 주위를 휘둘러 보고는 더욱 음성을 낮추었다.

"핏자국은 바늘귀처럼 작았지만 그것이 매화도의 독문 표기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은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암기를 사용했는지는 아는 사람이 없다. 그것은 그와 싸운 사람 중에 살아난 자가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오직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은 그가 남자라는 것뿐이다."

매화도, 실로 그는 무서운 인물이었다. 그는 남의 재산을 마음대로 약탈했고 여색(女色) 또한 밝혔다. 이런 이유로 흑백 양도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하고 있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누구든지 그와 적대시하면 사흘 이내에 죽게 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초류빈은 다그치듯 물었다.

"그의 손에 죽은 사람들의 치명적인 상처가 바로 앞가슴이란 말이오?"

"그렇다! 앞가슴은 사람의 몸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공력을 연마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을 가장 중요시한다. 그러나 매화도는 앞가슴이 아니면 살인을 할 맛이 안 난다는 듯이 그곳만 노려서 살인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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