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18 소이비도 제2권 흘러간 세월 - 극락동주





극락동주



심미 대사는 전칠이 어린아이에게서 바꾸어 가지고 온 두 그릇의강냉이죽을 안심하고 먹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출가(出家)한 사람은 모든 행동에 얌전하고 절도가 있는 것을 중요시하므로 전칠이 한 그릇을 다 먹을 때까지 심미 대사는 겨우 두 수저를 떠먹었을 뿐이었다.

이때 마차는 이미 마을을 벗어나왔다.

마부는 이 귀찮은 손님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목적지까지 태워다 준 후 편안히 먹고 쉬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말을 몰았다.

전칠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 상태로 간다면 날이 밝기 전에 숭산에 도착할 수가 있겠군요."

"지금쯤 아마 본문의 제자들이 마중 나와 있을 것이오. 그저 ....."

여기까지 말하던 심미 대사는 갑자기 죽그릇을 떨어뜨리면서 전신을 떨기 시작했다.

전칠의 안색이 급변했다.

"대사...혹시 대사도....."

여기까지 말한 그는 갑자기 무엇인가 느낀 듯 사색이 된 채 버럭 소리쳤다.

"이 죽에도 독이 있단 말이오?"

심미 대사는 장탄식을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칠은 몸을 돌려 초류빈의 목덜미를 잡으면서 소리쳤다.

"나의 얼굴을 좀 보아라! 나의 얼굴이....."

초류빈은 탄식을 터뜨렸다.

"나는 비록 너를 매우 증오하고 있기는 하지만 허무하게 죽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구나."

전칠은 안색이 완전히 회색으로 변했고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붉게 충혈되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두 눈으로 초류빈을 노려보고 있던 그는 갑자기 음험하게 웃었다

"으흐흐흐.....너는 내가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는 하지만 나는 네가 죽는 꼴을 꼭 보아야겠다."

이렇게 말하는 그는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이를 부드득 갈며 말을 이었다.

"내 너를 진작 죽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기만 하구나."

초류빈은 비웃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네가 나를 죽이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렇다. 지금 너를 죽이기엔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너를 죽일 수가 있다."

이렇게 소리친 그는 두 손을 들어 초류빈의 목을 잡았다.

낭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표정은 매우 보기 흉했지만 몸은 완전하게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설소하는 사랑에 찬 눈초리로 낭천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당신은 정말 철인과 같군요. 저는 본시 최소한 삼사 일이 지나서야 일어날 줄 알았는데 반나절도 안 되어 일어나시다니 정말 놀라워요."

낭천은 방안을 두 바퀴 돌고 나서 갑자기 입을 떼며 물었다.

"당신은 그가 무사하게 소림사에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당신은 말끝마다 그 사람만 찾는군요. 당신은 어째서 저나 당신 자신에 대해선 얘기하지 않나요."

설소하는 서운하다는 눈빛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낭천은 여전히 걱정어린 얼굴로 설소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다시 물었다.

"당신은 그가 평안하게 소림사에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호호호...당신은 정말 어쩔 수가 없군요."

설소하는 눈을 가볍게 흘기다가 낭천의 손을 잡고 자리에 앉히며 마치 속삭이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안심하세요. 지금쯤 아마 심미 대사의 방장실(方丈室)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을 거예요. 소림사의 차맛은 천하일품이지요."

낭천의 얼굴엔 절로 웃음이 떠올랐다.

"내가 알기엔 그는 설사 남에게 목이 잡혀 있다 해도 결코 차를 마시지는 않을 것이오."

초류빈은 호흡이 곤란해지는 것을 느꼈다. 전칠의 얼굴도 갈수록 점점 더 공포스럽게 변해갔고 그 자신 역시도 숨통이 막힐 듯한지 파란 힘줄이 최대한으로 팽창된 그의 두 손은 초류빈의 목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초류빈은 눈앞이 점점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고 전칠의 얼굴이 점점 멀어져 보였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점점 임박해 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가 있었다

초류빈은 죽음과 삶을 사이에 둔 이 순간에 많은 생각이 떠오를 줄 알았다.

그것은 한 사람이 죽음을 눈앞에 두는 순간엔 많은 일이 뇌리에 떠오르기 마련이라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비애는 물론 심지어 공포조차 느끼지 못했고 도리어 마음 한구석에서부터 울음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일 뿐 입을 통해 흘러나오지는 못했다.

초류빈은 자신이 전칠과 동시에 숨을 거두어 황천행 동료가 될 줄이야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칠은 몹시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초류빈, 너의 명이 꽤나 길구나. 너는 어째서 아직 죽지를 않느냐?"

'나는 네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다.'

초류빈은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렇게 말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초류빈은 그저 전칠의 음성이 점점 멀어져만 가고 마치 지옥의 문에서부터 들려오는 것과 갈이 여겨졌다

그는 발버둥질 칠 힘도 없었고 점점 혼수상태로 빠져 들어갔다.

이때 초류빈의 귓전에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 비명소리는 멀리서 들려온 것 같기도 했고 또 전칠의 입에서 나온 것 같기도 했다. 이어서 꽉 막혔던 가슴이 시원하게 트이면서 눈앞이 점점 밝아졌다.

뒤따라 초류빈의 시선에 전칠의 모습이 들어왔다.

전칠은 맞은편 자리에 비스듬하게 쓰러져 있었다. 비록 숨을 거둔 상태이기는 하지만 그의 두 눈은 아직도 뜨인 채 초류빈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심미 대사는 중독된 상태인 데도 불구하고 매우 큰 힘을 쓴 듯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초류빈은 잠시 멍하니 앉아 있더니 탄식을 터뜨리면서 입을 열어 물었다.

"대사께서 나를 구해주신 것이오?"

심미 대사는 그의 물음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혈도를 풀어 주며 서서히 입을 열었다.

"오독동자가 아직 오지 않았으니 어시 피하시오."

그러나 초류빈은 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움직이지도 않았다.

"대사께선 무엇 때문에 나를 구해준 것이오? 대사께선 내가 매화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소?"

심미 대사는 탄식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초시주, 시주가 매화도이건 아니건 어서 떠나시오. 오독동자가 들이닥치는 날엔 달아나고 싶어도 달아나지 못할 것이오."

초류빈은 검게 변해 있는 심미 대사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가볍게 탄식을 터뜨렸다.

"대사의 호의는 고맙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못하는 것이 없소. 그러나 단 한 가지, 달아나는 것만은 못하오."

심미 대사는 더욱더 조급해 하면서 입을 열었다.

"지금은 만용을 부릴 때가 아니오. 시주는 체력을 회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절대 오독동자의 상대가 되지 못하오."

여기까지 말했을 때 갑자기 처절한 말울음소리가 터져나오는가 싶더니 마차가 옆에 있는 나무에 가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꽝!

심미 대사는 마차가 부딪치며 기우뚱거리는 바람에 마차 안에서 곤두박질을 했다.

하지만 아픔을 무릅쓰고 계속 초조해 하며 소리쳤다.

"어서 떠나시오. 시주는 나를 구하겠다는 것이오?"

초류빈은 담담하게 말했다.

"대사께서 저를 구해주셨는데 제가 어찌 대사를 구할 수가 없겠습니까?"

심미 대사는 초조한 나머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하지만...나는 곧 죽게 될 몸이니 위기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살아날 수는 없을 것이오....."

초류빈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하지만 아직은 살아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한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칠의 품속에서 한 자루의 작은 칼을 꺼냈다

초류빈은 이 작은 칼을 서서히 매만지면서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띠었다.

마차는 길 옆에 있는 나무에 부딪친 후 비스듬히 쓰러져 있었고 마차바퀴는 아직도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돌고 있었다. 덜커덩거리는 마차바퀴 소리는 유난히도 크게 들려 이런 황량한 어둠 속에서 듣자니 몹시 불쾌했다.

초류빈은 혼잣말인 양 중얼거렸다.

"마차바퀴에 기름을 칠 때가 된 것 같군....."

이러한 때에 마차바퀴에 기름칠 것을 걱정하고 있다니 심미 대사는 초류빈이 불가사의할 정도로 이상하다고 느꼈다.

심미 대사는 육십여 년을 살아왔지만 이러한 사람은 난생 처음이었다.

이때 초류빈은 심미 대사를 부축하여 마차에서 내려왔다.

휘이익!

뼈를 깎는 듯한 바람이 그들의 얼굴을 엄습했고 그것은 마치 예리한 칼과 같이 날카로웠다.

심미 대사는 탄식을 터뜨리며 말했다.

"초시주, 이러지 말고 어서...어서 떠나시오."

초류빈은 그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비스듬히 쓰러져 있는 마차 위에 걸터앉았다.

하늘엔 달은 물론 별 하나 보이지 않았고 주위는 온통 칠흑과 같이 어둡기만 했다.

초류빈은 고개를 숙여 수중의 칼을 매만지면서 소리쳐 물었다.

"극락동주께서 오셨소?"

그러나 거칠은 바람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초류빈은 다시 한번 소리쳤다.

"당신이 나오지 않겠다면 난 이만 가 보겠소."

그러더니 심미 대사를 번쩍 안아 올렸다.

심미 대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의아해하면서 물었다.

"시주...시주는 어디로 가려는 것이오?"

초류빈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물론 소림사요."

심미 대사는 의아해하며 반복했다.

"소림사!"

"우리가 이 고생을 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은 소림사로 가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하지만 지금은 갈 필요가 없소."

초류빈은 싸늘한 어조로 뱉어냈다.

"하지만 나는 꼭 가야겠소!"

심미 대사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무엇 때문이오?"

"그것은 소림사에 가야만 대사를 구할 수 있는 해독약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심미 대사는 믿어지지 않는 듯 더듬거리며 말했다.

"시주는...무엇 때문에 나를 구하려는 것이오? 나는 본시 시주의 적이 아니었소?"

초류빈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대사께선 나를 구해주셨소. 그것만으로도 대사는 아직 인간이라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오."

심미 대사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장탄식을 터뜨렸다.

"만의 하나라도 소림사에 도착할 수가 있다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주의 결백을 증명해 주겠소."

이렇게 말한 그는 마른침을 한차례 삼키더니 이내 말을 계속했다.

"나는 시주가 매화도가 아니라는 것을 단언할 수 있게 되었소."

초류빈은 그의 말을 듣고 그저 웃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심미 대사는 다시 암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나를 데리고서는 절대 소림사로 갈 수가 없소. 오독동자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절대로 시주를 놓아 주지 않을 것이오."

초류빈은 여전히 아무 말없이 그저 헛기침만 했다.

심미 대사는 탄식을 터뜨리며 말했다.

"시주의 경공술이라면 이곳을 피하기엔 아직 희망이 있을 것이오. 그런데 어찌 나 같은 짐까지 지려 하는 것이오....."

여기까지 말한 그는 잠시 멈추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시주가 나를 구해줄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편안히 죽을 수가 있을 것이오."

이때 갑자기 차가우면서도 징그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으하하...흐흐히히...무림의 정종인 소림의 고승이 무질서한 생활을 해 나가고 있는 천하의 풍류객 초탐화의 친구가 되었다니 정말 천하의 기문(奇聞)이 아닐 수가 없군."

이 웃음소리는 가까웠다가는 다시 멀어지고 하는 것이 도저히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심미 대사는 전신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극락동주?"

그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내가 끓인 강냉이죽의 맛이 어떻소?"

초류빈은 미소를 지으면서 대꾸했다

"귀하께서 이 풍류객 탐화의 목숨을 가지러 온 것이라면 어째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오?"

극락동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도 너의 목숨을 가져갈 수 있다."

초류빈은 냉랭하게 비웃었다

"자신이 대단하시군."

극락동주는 음흉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오늘밤까지 나의 손에 죽은 사람은 삼백구십이 명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를 보지 못했으며 심지어는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다."

그의 말을 들은 초류빈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나는 귀하가 난장이이고 또 사람들이 볼 수 없을 만큼 추하게 생겼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여기까지 말한 그는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비웃는 듯 말을 계속했다.

"나는 그것이 헛소문이 아닌 사실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네그려."

극락동주는 초류빈의 비웃는 말을 듣자 갑자기 웃음소리를 중지했다. 얼마쯤 지나자 극락동주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나는 너를 결코 쉽게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날이 밝기 전까지 온갖 고통을 다 겪게 한 후에야 죽게 할 것이다."

초류빈은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나는 날이 밝기 전까지 물론 죽지 않을 것이며, 날이 밝은 후에도 결코 죽지 않을 것이오. 하하하....."

그의 웃음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괴이한 대나무 퉁소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눈덮인 땅에 꿈틀거리는 검은 물체들이 무수하게 나타났다. 긴 것도 있고 짧은 것도 있었고 큰 것이 있는가 하면 작은 것도 있었다. 날이 어두워 이 물체들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강한 비린내가 사람으로 하여금 구토를 느끼게 하였다.

심미 대사는 아연실색하여 나직이 입을 열었다.

"오독이 일단 나오면 사람은 뼈만 남은 채 죽게 된다고 하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어서 떠나시오."

초류빈은 그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한 듯 담담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듣자하니 극락동엔 수천 수만 가지의 독물이 있다고 하는데 내가 본 것은 어찌 이 작은 벌레들에 불과할까....."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재차 말을 이었다.

"혹시 나머지 독물들은 모두 죽은 것이 아닐까?"

이때 퉁소 소리는 더욱 촉급하게 들려왔고 땅에서 꿈틀거리고 있던 검은 물체들은 초류빈과 심미 대사를 완전히 포위했다. 그리고 몇 마리는 이미 그들의 발 바로 앞까지 기어왔다.

심미 대사는 전신을 사시나무 떨듯 하면서 초류빈에게 바싹 붙어섰다.

이때 극락동주의 징그러운 웃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흐흐흐...나의 극락충은 일곱 가지의 신물을 교배시켜 만들어 낸 것이다."

그의 음성에는 강한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사람의 피나 살이 아니면 아무것도 먹지를 않는다. 잠시 후 너희들이 그들의 먹이가 되어 그들의 뱃속으로 들어가면 아마 그들이 작다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갑자기 싸늘한 광채가 폭사되었다.

그것은 비도가 발해진 것이다.

심미 대사는 이젠 마지막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두 눈을 감았다. 그는 초류빈 수중의 비도가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초류빈은 이 유일한 희망을 망막한 어둠 속에다 버 린 것이다. 만약 그의 비도가 상대방에게 적중되지 못한다면 그들은 곧 앙상한 뼈만이 남게 될 것이다.

이것은 생명을 건 도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도박에서 이길 승산은 극히 희박했다. 이것은 마지막 기회이자 단 한 번밖에 없는 기회였다.

심미 대사는 초류빈이 이렇게 경솔한 행동을 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상상을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도 역시 생각하지 못했다. 바로 칼빛이 어둠 속에서 사라지는 순간 극히 짧은 비명소리가 터져나온 것이다. 이어서 어둠 속에서부터 하나의 검은 인영이 폭사되어 나왔다.

그 몸집은 어린아이와 같고 작은 몸에는 짧은 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비록 날씨가 더할 수 없이 추웠지만 그는 두 다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채 조금도 추위를 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머리도 매우 작았으나 두 눈만이 등불과 같이 반짝거렸다.

지금 그의 두 눈엔 경악과 원한의 빛으로 가득차 있는 채 초류빈을 꿰뚫어 보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무엇인가 말하려 했지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순간 심미 대사는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는 초류빈이 던져낸 칼이 상대의 목 중앙에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심미 대사는 비도가 일단 발해지면 절대 빗나가지 않는다는 말에 대해서 새삼 실감을 하게 되었다.

극락동주는 숨통이 막힌 듯 비틀거리면서 목에 꽂힌 비도를 뽑아냈다. 순간 그의 목에서 시뻘건 선혈이 흘러내렸다.

극락동주는 있는 힘을 다해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하면서 입가에 씁쓸한 웃음을 띠었다

"과연 놀라운 칼솜씨구나!"

이때 지상에서 꿈틀거리고 있던 독충들은 이미 초류빈과 심미 대사의 다리 위까지 기어 올라왔다.

하지만 초류빈은 움직이지 않았고 심미 대사는 더더욱 꼼짝하지 못했다. 그의 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렸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비도가 비록 천하제일이기는 하지만 그들 이 독충의 왕성한 식량이 되는 것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극락동주가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면서 선혈을 뿌리고 쓰러지자 수백 마리의 독충은 갑자기 그들에게서 빠져나갔다. 그 독충들은 화살과 같이 고개를 돌려 극락동주의 몸을 향해 앞다투어 달려간 것이다. 살을 갉아먹는 소리가 쉴새없이 들리는가 싶더니 잠시 후 극락동주의 시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곳엔 하얀 뼈만이 남았다.

그리고 마음껏 포식을 한 독충들도 모두들 땅에 늘어진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천하의 독물이 자신이 키운 독충에 의해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이 처참한 광경은 차마 두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심미 대사는 두 눈을 감고 합장을 한 채 한참 동안 염불을 외우더니 안도의 한숨과 함께 눈을 떴다.

그는 초류빈을 바라보면서 격찬을 했다.

"시주께선 비단 비도가 천하무쌍일 뿐만 아니라 정력(定力) 또한 다시 찾아볼 수 없는 것이구려."

초류빈은 씁쓸히 웃었다.

"송구스럽소. 나는 이 독충들의 습성을 알고 있었을 뿐이지 사실 나 자신도 매우 두려웠소."

심미 대사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시주께서도 두려워했단 말이오?"

초류빈은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죽은 사람을 제외하고 이러한 상황에 처한다면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소."

심미 대사는 장탄식을 터뜨렸다.

"위기에 처해 있으면서도 당황해 하지 않고 비록 두려웠으나 내색하지 않는 시주의 침착성에 나는 정말 탄복하는 바이오."

그의 음성은 마지막에 가선 거의 들리지 않더니 이내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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