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10 소이비도 제1권 인육을 파는 여인
인육을 파는 여인
매림을 지나 가산을 끼고 돌연 세 칸의 아담한 누각이 시야에 들어온다. 누각 앞 넓은 공지에서 두 사람이 악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텁석부리 사나이와 철담진팔방 진효의였다.
두 사람은 모두 권풍이 강맹하여 주위에 쌓인 눈이 분분히 허공으로 휘날렸다.
텁석부리 사나이의 성난 고함소리가 주위를 진동시켰다.
"진가야, 너 자신은 협의지사라 자처하고 있지만 사실은 개똥만치도 값어치 없는 인간이다. 네 아들이 불치의 중상을 입은 게 다른 사람과 대관절 무슨 상관이 있다고 매이선생에게 독수를 전개했느냐?"
"너는 어디서 굴러온 녀석이기에 건방지게 노부의 일에 간섭하느냐? 강호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네놈을 없애 버려야겠다!"
진효의는 노기충천한 얼굴로 부르짖었다.
한편 호유성은 한 쪽에서 발을 굴러가며 만류하고 있고 유룡생은 뒷짐을 진 채 방관만 하고 있었다.
초류빈이 물찬 제비처럼 달려오자 호유성은 즉시 그를 맞이하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현제, 자네가 어서 저들을 만류해 주게. 매화도가 아직 나타나기도 전에 자기들끼리 싸움을 벌이다니...이게 대관절 무슨 꼴인가?"
초류빈이 입을 열기도 전에 왼쪽에 서 있던 유룡생이 냉소를 치며 호유성의 말을 받았다.
"이것은 강장 수하에 약병이 없다는 좋은 본보기요. 초탐화의 시중을 드는 졸개마저 이런 훌륭한 솜씨를 지니고 있다니...정말 무서운 일이오."
"내 수하는 비록 흉맹한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 그를 건드리기 전에는 절대로 먼저 남을 건드리지 않을 걸세."
초류빈은 담담하게 말한 후 유룡생이 다시 입을 열기 전에 호유성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호유성은 대꾸를 하기 앞서 먼저 한숨을 내쉬었다.
"진중의 상세가 워낙 위독하여 결국 숨을 거두자 진형님께선....."
초류빈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아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어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그래서 그는 그 죄를 매이선생에게 전가시켰단 말입니까?"
호유성은 멋쩍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 부자는 워낙 정이 두터워 진형님은 아들을 잃자 너무나 비통한 나머지 그만 매이선생에게 출수를 한 걸세. 하지만 상세가 그다지 심하지는 않네."
초류빈은 코웃음을 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유성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그들을 좀 만류해 주게. 자네 이외에는 아무의 말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네."
초류빈의 눈빛은 차가웠다. 그리고 그의 음성은 더욱 차가웠다.
"내가 왜 그를 만류합니까? 그가 만약 출수를 하지 않았다면 내가 출수를 할 것입니다."
호유성은 그의 강경한 말투로 인해 어리둥절해지며 더 이상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몰랐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계속 진효의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초식은 비록 절묘한 데는 없지만 자신의 안전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맹공을 퍼붓기 때문에 일초 일식은 모두 농후한 살기가 곁들여 있었다. 흡사 꼬리에 불이 붙은 한 마리의 들소와도 같았다.
진효의는 상식에서 벗어난 맹공을 받게 되자 숨이 막히는 것 같은 질식감을 느꼈다.
유룡생은 문득 의아한 눈빛을 발했다.
"귀하의 시종이 전개하는 초식은 실로 강호에서 보기 드문 것이군요."
"....."
"그는 일초를 전개할 때마다 마치 먼저 상대방의 일격을 맞을 각오가 되어 있는 것 같군요. 무림에서 저런 권법을 사용하는 자가 있다니 보통 상식으로선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그의 말에 초류빈이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것은 아주 이해하기 쉬운 원리라네. 다른 사람은 그의 주먹을 맞으면 견딜 수 없지만 그는 다른 사람의 주먹을 맞아도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유룡생은 그의 말에 언뜻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안색이 약간 변하며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저쪽에서 들려오는 큰소리가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저런 발칙한 놈. 밑바닥에서 굴러먹는 놈이 감히 윗사람에게 덤벼들다니! 노부가 네놈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다!"
호통소리와 함께 달려온 사람은 조정의였다.
그는 달려오자마자 텁석부리 사나이를 향해 덮쳐가려 했으나 그보다 앞서 초류빈의 서릿발같이 차가운 음성이 주위를 진동시쳤다.
"만약 두 사람이 한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의 비도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그 말은 염라대왕의 최후 통첩과 같은 것이었다.
즉시 신형을 멈추며 찢어지는 듯한 음성으로 외쳤다.
"당신이 데려온 노재(奴才)가 윗사람에게 무엄한 짓을 하는 데도 당신은 비단 혼을 내주지 않을 뿐더러 도리어 그의 기염을 돋워 주다니 강호의 공도(公道)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소?"
초류빈은 그와 대조적으로 안색이 차분하게 변했다.
"강호의 공도가 도대체 무엇이오? 두 사람이 한 사람을 공격하는 게 공도란 말이오?"
조정의는 치밀어오르는 울화를 억제하기 힘드는지 전신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분명히 말하겠지만 이것은 쌍방이 무예를 겨루는 게 아니라 서로 마음을 합쳐 발칙한 녀석을 혼내 주는 것이 그 목적이오!"
초류빈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허허...조대협이 정녕 그를 혼내 주고 싶으면 진대협과 교대를 해서 직접 그와 겨루어 보는 것이 어떻겠소?"
조정의는 발끈 화를 냈다.
"저 따위 잡것도 나와 겨룰 자격이 있단 말이오?"
"그는 잡것이 아니라 엄연한 사람이오."
초류빈은 싸늘한 음성을 내뱉으며 경멸의 빛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조정의를 쏘아보았다.
"조대협도 그와 다른 곳이 없는데 혹시 잡것이 아니오?"
조정의는 안색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며 울화통이 터져 코가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발전되자 호유성은 계속 침묵만 지킬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가 막 입을 열려는데 갑자기 펑! 하는 굉음이 들리며 싸움을 전개하고 있던 두 사람은 정면으로 일 장을 교환했다.
우렁찬 굉음과 함께 진효의는 진동의 힘에 의해 뒤로 비실비실 일곱 자 가량 물러나 폭싹 땅에 주저앉았다. 그것을 본 조정의와 호유성은 깜짝 놀라 일제히 앞으로 달려가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한편 텁석부리 사나이는 제자리에 우뚝 선 채로 싸늘하게 외쳤다.
"또 나를 혼내 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어디 나와 봐라!"
유룡생은 뒷짐을 지고 밤하늘을 향해 시선을 던진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보아하니 오늘은 어르신네들이 쌍것을 혼내 주는 게 아니라 쌍것이 어르신네들을 혼내 주는 결과가 되었군."
이때 진효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조정의의 귀에 대고 몇 마디 소곤거렸다.
잠시 후, 조정의는 대뜸 횃불같이 형형한 눈빛으로 텁석부리 사나이를 노려보았다.
"네가 강호에서 보기 드문 절학을 터득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진대협은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너에게 암산을 당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가소로운 듯 싸늘히 웃었다.
"너희들은 패하면 남의 암산을 당했다 하는군. 만약 내가 패했다면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 하겠지. 흥! 가소롭기 짝이 없다!"
조정의의 눈에선 한 가닥 악독한 광채가 번뜩였다.
"철(鐵)가야, 노부는 그래도 너의 목숨만은 살려 주고 싶었는데 이제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구나!"
텁석부리 사나이는 상대방이 자기의 성(姓)을 입 밖에 내뱉자 안색이 급변했다. 그러나 그것도 일순간에 불과할 뿐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외쳤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사는 것에 대해 이미 싫증을 느꼈다. 비장한 수단이 있다면 지금 당장 전개하라!"
조정의는 독기가 서린 눈빛으로 그를 한동안 노려보더니 징그럽게 웃었다.
"흐흐흐...내가 직접 손을 쓰지 않아도 네놈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더니 그는 진효의를 부축하고 곧 몸을 돌렸다.
그러자 호유성은 황급히 그의 앞으로 달려가 어쩔 줄 모르는 웃음을 지었다.
"형님들, 화만 내실 게 아니라 자초지종을....."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효의는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우리 부자 두 사람이 모두 보기좋게 당했는데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인가?"
호유성은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어 손등으로 연신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훔쳤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진효의와 조정의는 이미 멀리 벗어나 있었다.
초류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 제가 돌아오자마자 말썽을 부려 미안합니다. 진작 이럴 줄 알았다면....."
울적해 있던 호유성은 돌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현제, 그런 말 말게. 우리 형제가 언제 말썽을 두려워한 적이 있는가?"
"하지만 형님의 입장이 난처....."
초류빈은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호유성은 그가 말을 맺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현제, 내 염려는 말게. 자네가 무슨 일을 하든 나는 늘 자네 편에 서 있네."
초류빈은 뜨거운 피가 가슴 밑바닥에서 용솟음쳐 올라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호유성은 텁석부리 사나이를 힐끗 쳐다보며 무슨 말을 하려는 눈치였으나 고개를 한 번 내두르더니 화제를 돌렸다.
"날이 곧 밝아올 것이니 오늘밤은 매화도가 나타나지 않을 모양이군. 자네들도 긴 여로에 몹시 지쳐 있을 테니 일찍 가서 쉬도록 하게."
그는 이미 울적한 심사에서 벗어나 있었다.
"나는 이미 사람을 시켜 청죽헌을 말끔히 청소해 놓았네. 하지만 자네가 만약 냉향소축에서 기거하길 원한다면 설낭자를 당분간 벽운과 함께 있게 하겠네."
초류빈은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럴 필요없습니다. 청죽헌이면 되겠습니다."
호유성은 다시 텁석부리 사나이에게 시선을 돌렸으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무슨 근심스러운 일이 있는지 안색이 몹시 울적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잎은 출렁이는 파도와도 같다. 서걱서걱 잎사귀가 흔들리는 소리를 듣노라면 제아무리 낙천적인 사람도 다소 처량한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십 년 만에 돌아온 초류빈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콩알만한 등잔 불빛 아래서 보니 그의 눈가를 수놓은 주름살은 더욱 깊게 보인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다. 침묵이 길수록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지기 마련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텁석부리 사나이는 큰 결심을 내린 듯 입술을 깨물며 한마디 내뱉었다.
"도련님, 저는 어쩔 수 없이 떠나야겠습니다."
초류빈의 눈가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떠나겠다고? 자네도 떠나겠단 말인가?"
텁석부리 사나이의 안색은 소나기가 쏟아지기 직전의 하늘빛과 같았다.
"저는 도련님 부자의 대은을 받아 원래는 남은 생애를 도련님께 바칠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그는 처연한 눈길을 허공에 힐끗 던지며 괴로운 심정을 억눌렀다.
"조정의, 그들은 저의 내력을 알아차린 게 분명합니다. 지금 쯤 그들은 이미 저의 원수들에게 모든 사실을 통지했을 겁니다. 저는 생사를 심중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초류빈이 그의 말을 이었다.
"자네는 나에게 화를 끼칠까 봐 떠나려는 게 아닌가? 어서 말해 보게."
텁석부리 사나이는 육중한 허우대를 들먹거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련님은 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위인이라는 것을 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십여 년 전의 그 사건은 저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어찌 도련님도 저와 함께 남의 손가락질을 받게 할 수 있겠습니가?"
"무엇인가? 그를 괴롭히고 있는 십여 년 전의 사건은 그것은 조정의가 말했던 것과 관계있는 것이 분명한데."
초류빈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장탄식을 했다.
"그것은 자네가 무의식중에 저지른 실수가 아닌가? 그동안 자네가 겪은 고통으로써 충분히 죄값을 치렀다고 생각하네."
텁석부리 사나이는 다시 씁쓰레하게 웃었다.
"도련님께선 비록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지만 다른 사람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강호의 혈채(血債)는 피로써 씻어야만 해결되는 것이다.
그는 초류빈이 입을 열기 전에 다시 말했다.
"더군다나 저는 그 매이선생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그는 부상을 입은 채 떠났으니 아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는 도련님의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저도 그를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초류빈은 다시 침묵을 지켰다. 그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한동안 후였다.
"그럼 자네는 어디로 갈 작정인가?"
"글쎄요. 지금으로선 저도 일정한 목적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말한 그는 돌연 히죽 웃었다. 사실, 그는 갑자기 떠나기로 작정했기에 미리 갈 곳을 정한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는 절대 멀리 떠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달이 밝은 밤이면 술단지를 안고 도련님을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자네의 말을 믿어도 되겠나?"
"사나이로서 어찌 일구이언을 할 수 있겠습니까?"
텁석부리 사나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모두 뜨거운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고개를 돌렸다. 영웅들의 이별은 때로는 여인의 이별보다도 더욱 단장의 슬픔을 느끼게 한다. 그들이 이별의 슬픔을 내색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초류빈은 이별의 아쉬움을 감추려는 듯 눈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자네가 떠나겠다니 나도 말리지 않겠네. 하지만 자네를 밖에까지 전송해 주고 싶네."
길게 뻗친 길, 그 길에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첫닭이 우는 소리에 대지는 깨어났다.
하지만 하늘색은 여전히 어둡다. 보아하니 오늘도 햇빛이 보일 것 같지 않다.
이 길은 어젯밤과 같이 여전히 조용하다. 비록 간혹 멀리서 들려오는 닭울음 소리와 초류빈의 기침소리가 정적을 깨지만 질식할 것 같은 고요의 문을 열게 할 수는 없었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홀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헤어지지 않는 연회는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도련님...이제 그만 돌아가십시오."
초류빈은 등 뒤로 그의 말을 들으며 계속 앞으로 몇 걸음 더 걸어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길 끝쪽에 외로이 서 있는 고목을 한동안 넋빠진 사람처럼 응시하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돌아가겠네. 자네...부디 몸조심하게."
담담한 음성이었으나 그 안에는 사나이의 뜨거운 정이 물결치고 있었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울먹거렸다.
"도련님도 몸조심하십시오."
그는 더 이상 초류빈의 얼굴을 바라볼 용기가 없어 고개를 숙인 채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십여 걸음 걸어가더니 그는 걸음을 멈추며 다시 몸을 돌렸다.
"도련님, 다른 일이 없으시다면 계속 이곳에 머물러 계십시오. 어찌 되었든 호어르신네는 나무랄 데 없는 사내대장부이며 도련님의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초류빈은 하늘을 우러러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호유성 같은 친구가 있는 한 내가 바랄 게 뭐 있겠는가?"
텁석부리 사나이는 감정을 억제하려는 듯 침을 꿀꺽 삼켰다.
"도련님이 이곳에 남아 계시겠다고 결정하셨다면 저는 빠른 시일 내에 도련님을 뵈러올 것입니다."
초류빈은 씁쓸히 웃었다.
"나는 갈 곳도 없어 이곳에 오래 머물게 될 걸세."
그는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은 울음보다도 처량했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휙 몸을 돌려 이를 악물고 앞을 향해 달려갔다.
날은 밝았지만 공기는 더욱 차가웠다.
죽은 듯한 회색 하늘이 무거운 중량에 억눌려 금방 무너질 것만 같다. 그러나 텁석부리 사나이의 심정은 하늘색보다 더욱 흐리고 무거웠다. 그가 무슨 이유로 인해 도망을 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그는 다시 끝없는 도망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그는 이미 초류빈과 함께 십 년이란 세월을 도망다녔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도망생활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일장의 무시무시한 악몽이다.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그러나 지나온 십 년 동안 그는 최소한 초류빈과 함께 있었기에 다소 마음의 의지가 되었다. 한데, 지금은 완전히 홀로 떨어져 있다. 그가 만약 겁 많은 졸부였다면 도리어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어떠한 일도 이런 고독한 도망생활의 고통과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을 몸소 체험한 그이기에 더욱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심지어 죽음보다 더한 것이다. 그런 절망적인 고독은 사람을 속박해 미치도록 만든다.
그는 죽을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리고 그는 도망가지 않을 수가 없다. 초류빈이 새로운 안정을 되찾은 이 마당에 그는 어떠한 고통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초류빈에게까지 폐를 끼칠 수가 없었다.
지금 그는 앞으로의 거취를 조용히 생각해야 원칙이거늘 자신에게 조용한 시간을 줄 용기가 없었다. 때문에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인 곳을 찾는 것이 시급했다.
수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함께 어울려 호흡한다는 것은 종종 두려움이나 고독을 잊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 목적지도 없이 계속 앞으로 달렸다.
얼마 동안 달렸을까. 그는 시장바닥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는 여지껏 살아 오면서 많은 곳을 다녀보았다.
사람의 코가 얼어 떨어질 정도로 추운 흑룡강(黑龍江)도 가 보았으며 가장 더운 지방으로 알려진 토노번(吐魯蕃)에는 칼자국을 남겼다.
그는 태산(泰山) 절정에 올라 해가 떠오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인적이 없는 바닷가에서 해가 떨어지는 광경도 본 적이 있다.
그는 심지어 황산유곡(黃山幽谷)에서 미개한 야만인같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육(生肉)을 뜯어먹기도 했다.
그러나 시장바닥에 온 것은 아마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겨울날 아침, 아마 시장바닥보다 사람이 붐비는 곳은 드물 것이다. 어느 누구라 해도 이런 곳에 오면 고독하다는 느낌이 사라질 것이다.
이곳에는 어린애를 업은 아낙네, 지렁이를 쥔 할머니, 온몸이 기름으로 뒤범벅 된 요리사, 머리기름 냄새를 물씬 풍기며 미꾸라지처럼 쏘다니는 계집애 등이 대집단을 이루고 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은 모두 장바구니를 들고 몸과 몸을 비벼대며 지나간다. 반찬거리를 사러 나온 촌부(村婦)가 고기를 파는 도부(屠夫)와 한 푼을 깎기 위해 얼굴이 붉어져 있는 광경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공기 속엔 생선의 비린내, 싱싱한 야채의 흙냄새 그리고 닭과 오리 몸에서 나는 그 특유의 악취로 충만되어 있다. 시장바닥에 와 보지 않은 사람은 그 많은 냄새가 종합되어 풍기는 의미를 음미하지 못할 것이다.
텁석부리 사나이의 마음은 다소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이 냄새, 이 왁자지껄한 소리는 모두 선명한 생동이며 생명의 활력으로 가득차 있다.
세상에는 어쩌면 삶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자, 목을 매 다는 자, 쥐약을 삼키는 자...그러나 절대 시장바닥에서 자살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 텁석부리 사나이는 잠시 모든 것을 잊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만두가 먹고 싶어졌다.
그가 만두가게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 앞쪽에서 갑자기 한 사람이 우렁찬 음성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신선한 고기가 있습니다. 신선한 고기를 사십시오."
그것은 고기장수가 호객하는 소리였다. 한데 무슨 까닭인지 사람들은 겁에 질린 모습으로 분분히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어른들의 안색은 잿빛으로 변해 있고 어린애들은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뒤쪽에 있는 사람이 화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오? 무슨 일이기에 그다지도 놀란 표정들이오?"
앞쪽에서 달려온 사람은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며 대꾸했다.
"누가 고기를 팔고 있소."
그 말을 들은 뒤쪽에 있는 자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 시장바닥에서 고기를 파는 사람이 수십 명이 넘는데 뭐가 대수롭다고 겁에 질려 있소?"
앞쪽에서 달려온 사람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그 자가 파는 고기는 짐승 고기가 아니라 사람 고기요."
시장바닥에서 사람고기를 팔다니.
텁석부리 사나이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위엔 사람들이 더욱 많이 몰려들었다. 두려움을 느끼기엔 호기심이 훨씬 강했기 때문이다.
텁석부리 사나이도 호기심을 억제하지 못하고 인파를 헤치며 앞으로 다가갔다. 돌연 그는 무엇을 보았는지 안색이 변했다. 주위에 있는 어느 누구보다도 그는 더욱 놀란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꽂혀 있는 곳에는 몸집이 크고 뚱뚱한 외눈박이 부인이 손에 육중한 칼을 들고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근육 투성이이며 한 줄기의 칼자국이 검은 안대를 낀 오른쪽 눈가에서부터 입언저리까지 역력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칼자국으로 인해 언제나 징그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여인이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염라대왕이 보내온 악귀라 하는 것이 어울릴 것이다. 그녀 앞에 놓인 커다란 도마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은 황소나 양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것도 살아 있는 사람이다.
그 자의 옷은 홀랑 벗겨져 가련할이만큼 창백한 피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줄기줄기 뚜렷이 셀 수 있는 갈비뼈는 쉴새없이 경련이 일고 앙상한 손으로 머리를 움켜쥔 채 도마 위에 웅크리고 있는 자는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남자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의 몸에서 뼈를 뺀다면 살가죽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외눈박이 부인은 왼손으로 닭잡듯이 그의 목을 움켜쥐고 오른손은 칼을 높이 들어올린 자세였다. 그녀의 외눈에는 원한의 빛이 가득차 있고 또한 살기로 충만되어 있었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그녀를 보자 마치 무덤에서 나온 귀신을 만난 듯 즉시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지며 일순간에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외눈박이 부인도 그를 보자 얼굴에 그려진 칼자국이 홀연 핏빛으로 변하더니 입가에 징그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나리, 고기를 사러 왔소?"
그들은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듯싶었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너무 놀란 탓인지 아무 대답이 없다.
외눈박이 부인은 그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호들갑스럽게 웃었다.
"호호호... 물건을 식별할 줄 아는 사람에게 물건을 판다는 말이 있듯이 나리를 제외하고는 이 고기를 살 사람이 없을 것이오. 그래서 내 미리 나리가 오기를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소."
텁석부리 사나이는 그제서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형수님....."
형수님이란 세 글자가 입 밖에 나오자 외눈박이 부인은 느닷없이 가래침을 뱉어 정확하게 텁석부리 사나이의 얼굴에 가 떨어졌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물론 피할 수도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까닭을 생각지도 않고 도리어 고개를 떨구었다.
외눈박이 부인의 성난 호통소리가 뒤따랐다.
"무엇이? 형수님이라고? 내가 어째서 친구를 팔아 먹은 짐승만도 못한 놈의 형수냐! 다시 한번 형수라고 부른다면 우선 너의 혀를 도려내겠다!"
텁석부리 사나이의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감히 말대꾸를 하지 못했다.
외눈박이 부인은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너는 옹천검(翁天劍)을 배신한 대가로 그동안 필시 많은 재산을 모았을 것이니 고기를 몇 근 살 용의는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도마 위에 올려져 있는 사람의 머리카락을 잡아올리며 다시 징그럽게 웃었다.
"만약 네가 사지 않겠다면 나는 하는 수 없이 이 녀석을 개한테 먹이겠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그제서야 도마 위에 올려져 있는 사람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러자 그는 재차 질겁을 하며 외쳤다.
"앗! 매이선생...당신이....."
도마 위에 올려져 있는 자는 바로 초류빈의 생명을 구해 준 바 있는 매이선생이었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매이선생의 몰골을 보자 콧등이 시큰해지며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울부짖었다.
"매이선생, 어떻게 해서....."
외눈박이 부인의 노갈이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잔소리는 집어치워라! 이 고기를 살 테냐? 사지 않을 테냐? 그것만 대답해라!"
텁석부리 사나이는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길게 숨을 들이켰다.
"어떤 방법으로 팔 생각이오?"
외눈박이 부인의 대답은 야멸찼다.
"네가 요구하는 대로 팔겠다. 한 근을 요구하면 한 근의 값을 치러야 되고 열 근을 원한다면 열 근 값을 지불해라!"
그녀는 말을 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묵직한 식칼을 콱!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식칼은 도마 속으로 깊이 박혔다. 약 반 치만 간격이 빗나갔어도 매이선생의 목은 여지없이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외눈박이 부인은 눈을 부라린 채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
"네가 치러야 할 대가는 바로 너 자신의 피와 살이다."
텁석부리 사나이의 얼굴엔 경련이 일었다.
"내가 만약 그의 전체를 원한다면 어떻게 하겠소?"
외눈박이 부인의 음성은 그녀가 들고 있는 칼날보다도 더 날카로웠다.
"그의 전체를 사겠다면 지금 당장 나를 따라와라!"
텁석부리 사나이는 무슨 결심을 한 듯이 이를 악물었다.
"좋소. 당신을 따라가겠소."
외눈박이 부인의 입가엔 다시 징그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네가 현명하다면 나를 순순히 따라가는 게 좋을 것이다. 십여 년 동안 이 잡듯이 방방곡곡을 뒤져 겨우 너를 찾아냈는데 쉽사리 도망갈 것이라 생각하면 그건 크나큰 오산이다."
외눈박이 부인의 음성에는 심장을 찢어발기는 듯한 원한이 가득 서려 있었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당신에게 발각된 이상 절대로 도망가지 않겠소."
산기슭을 끼고 일기의 황량한 묘지가 보인다.
주위에 보이는 것은 군데군데 솟아 있는 크고 작은 무덤뿐.
이곳엔 한 채의 쓰러져 가는 목옥(木屋)이 있었다. 원래는 무덤을 지키는 자가 기거하는 곳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같은 엄동설한, 심지어 무덤 속에 누워 있는 귀신들?마저도 추위를 두려워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는 판인데 무덤을 지키는 사람은 자연히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을 것이다.
목옥 처마에는 줄기줄기 고드름이 영글어 매달려 있었다. 뼈를 깎는 듯한 찬바람이 나무 틈새로 불어닥쳐 칼날보다 더 심한 한기를 느끼게 한다.
이런 날씨에 이 목옥에서 반 시간만 머문다 해도 아마 얼어 죽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 한 사람이 머물고 있었다. 그것도 오래 전부터.....
목옥 안에는 낡은 나무로 만든 탁상이 놓여져 있다. 탁상 위에 놓인 물건은 시커먼 항아리였다.
그 사람은 석고상처럼 탁상 앞에 무릎을 꿇고 넋빠진 사람처럼 시커먼 항아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것은 누더기가 되어 버린 솜옷, 털모자를 쓰고 허리엔 한 자루의 도끼가 걸려 있었다.
부엌 안쪽 구석에 땔감이 쌓여져 있지만 불을 피우진 않았다.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나이, 그의 차림새는 영락없는 나무꾼이다. 하지만 까무잡잡한 얼굴이며 높이 솟은 광대뼈. 짙은 눈썹 넓은 이마, 하마를 연상케 하는 코, 입, 더욱이 예리하게 빛나는 눈동자는 조금도 나무꾼 같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엔 비분과 원한의 빛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탁상 위에 올려져 있는 항아리만 주시할 뿐, 뼈가 녹아내리는 듯한 강추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잠시 후 목옥 밖에서 사그락사그락 눈을 밟는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나무꾼 차림을 한 사나이는 즉시 도끼자루에 손을 대며 무겁게 외쳤다.
"누구냐?"
목옥 밖에서 외눈박이 부인의 흥분되어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나예요."
나무꾼은 신색이 금세 긴장되더니 다그치듯 물었다.
"그 녀석은 성 안에 있습디까?"
외눈박이 부인의 음성은 찬바람과 함께 목옥 안으로 전해왔다.
"이번에 들은 소식은 정확했어요. 내가 지금 그를 데려왔으니 어서 문을 여세요."
나무꾼은 벌떡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그러자 외눈박이 부인과 텁석부리 사나이가 전후로 해서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의 몸엔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밖에는 다시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무꾼은 텁석부리 사나이를 보고 순간 눈에서 불꽃이 튕겼다. 그 불꽃은 이내 시퍼런 비수가 되어 텁석부리 사나이의 얼굴에 꽂혔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무꾼은 돌연 몸을 돌리더니 다시 폭싹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엔 어느 새 뜨거운 눈물이 고여 있었다.
돌연, 문 밖에서 다시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외눈박이 부인이 날카롭게 물었다.
"누구냐?"
"일곱째와 접니다."
마치 꽹과리를 치는 듯한 뾰족한 음성과 함께 두 사람이 모습을 나타냈다. 한 사람은 곰보로서 등에 커다란 바래 광주리를 짊어지고 있으며 한 사람은 대나무처럼 깡마른 자로서 두부 장수임을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사실 두 사람은 야채시장에서 줄곧 텁석부리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텁석부리 자신은 번잡한 생각이 가슴을 억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유의하지 못했었다.
두 사람은 방안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텁석부리 사나이를 노려보았다.
배추를 파는 곰보가 대뜸 그의 멱살을 잡고 싸늘하게 외쳤다.
"철가야, 그래도 할 말이 있느냐?"
"그를 놓아 주세요. 모든 사람이 당도한 후에 일을 해결하도록 해요."
외눈박이 부인의 말에 곰보는 입술을 깨물더니 멱살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는 탁상 위에 놓여 있는 검은 항아리를 향해 공손히 큰절을 세 번 올렸다. 그의 눈에도 역시 뜨거운 이슬이 번졌다.
항아리!
대체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길래 이들이 신주 모시듯 하는 것인가?
그로부터 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줄을 이어 세 사람이 더 나타났다. 약상자를 등에 짊어진 자, 술과 간단한 안주 따위를 담은 상자곽을 메고 온 자, 그리고 한 사람은 사주관상을 보는 장님이었다.
이 세 사람도 텁석부리 사나이를 보자 이를 부득부득 갈며 분노로 인해 표정이 일그러졌으나 공손히 검은 항아리를 향해 큰절을 올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깥은 설광(雪光)으로 인해 그런대로 밝았지만 목옥 안은 어둠침침하여 심지어 음산한 귀기마저 감돌았다.
일곱 사람은 한결같이 푸르뎅뎅한 안색으로 탁상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으스러지도록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지옥에서 복수를 하기 위해 뛰쳐나온 악귀와도 같았다. 철전갑도 만면에 비통한 신색을 담고 고개를 숙인 채 침묵만 지쳤다.
침묵이 흐를수록 음산한 분위기는 더욱 짙어갔다.
외눈박이 부인이 돌연 침묵을 깼다.
"시간이 많이 경과되었는데 셋째는 왜 아직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까요?"
배추를 파는 곰보 사나이가 대답을 했다.
"그에게도 소식을 보냈으니 어떠한 일이 있어도 달려올 것입니다."
외눈박이 부인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런데 왜 아직....."
이번에는 사주관상을 보는 장님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우리는 이미 십여 년 간 이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조금 더 기다려 봅시다."
외눈박이 부인도 역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십여 년...십여 년....."
그녀가 거듭해서 중얼거리는 음성은 점점 비통하게 변해갔다.
"그동안 나는 철가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지금은 애석하게도....."
그는 창백한 얼굴에 일진의 경련을 일으키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는 지금 어떻게 변해 있는지 넷째, 자네가 상세하게 얘기해 주겠나?"
약상자를 메고 온 사나이가 이를 갈면서 설명해 주었다.
"보기엔 십여 년 전과 별로 달라진 데가 없습니다. 단지 수염이 더 길어졌고 살이 약간 쪘을 뿐입니다."
장님은 천장을 우러러 몸소리를 치게 하는 웃음을 지었다.
"좋아, 좋아... 철가야, 그동안 나는 매일 하늘을 향해 네가 별고 없기를 기원해 왔다. 보아하니 하늘은 과연 나에게 실망을 주지 않을 모양이구나."
외눈박이 부인은 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내 남편 옹천검을 배신한 대가로 필시 한 밑천 잡았을 것이지만 우리가 그동안에 겪은 피나는 고통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거야....."
중얼거리듯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옆에 서 있는 술장수를 가리켰다.
"예전에 안락공자(安樂公子)로 알려진 다섯째는 술장수로 변모했고 둘째는 앞 못 보는 장님이 되었으니...이 모든 일을 너는 아마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무꾼이 냉랭하게 말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덕분인데 그가 어찌 생각을 하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철전갑은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아니, 눈을 감히 뜰 수 없기 때문에 감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가 눈을 뜬다면 불타고 있는 가슴과 같이 뜨거운 눈물이 펑펑 쏟아질 것이다.
그가 십여 년 동안 겪은 고통은 또한 누구에게 하소연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때, 밖에서 한 사람의 흥분에 들뜬 외침이 들려왔다.
"형수님, 형수님...좋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누군가가 밖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들은 외눈박이 부인은 즉시 밖을 향해 고함쳤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시끄러워요?"
"난 조금 전에 철면무사 조정의를 보았소. 그가 말하기를 그 철가란 작자는 바로....."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흥분된 얼굴로 한 인물이 헐레벌떡 달려들어 왔다. 그는 여덟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무림인의 형색을 하고 ?있었는데 등 뒤에는 이화대장을 메고 있었으며 키가 다른 사람보다 절반이나 더 큰 자였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중간에서 말을 뚝 멈추고 말았다. 자기가 찾으려 하는 사람인 철전갑이 바로 방안에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외눈박이 부인은 깔깔거리고 웃으며 물었다.
"미처 생각지 못했겠지요?"
"조정의가 말하기를 그는 호유성의 집에 있다고 하던데 어떻게 그가 여기에....."
경장대한은 너무도 뜻밖이라는 듯 망연자실하다가 갑자기 외눈박이 부인의 손목을 덥석 잡으며 다그쳐 물었다.
"형수님, 형수님께선 어떻게 해서 그를 찾아내셨습니까?"
"그건 용신묘(龍神廟)의 노오구가 말하기를 그가 벌써 초류빈과 함께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시종 그의 뒤를 미행하다가 마침 그가 초류빈과 헤어지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손을 써 버렸지요."
외눈박이 부인은 득의한 표정으로 자랑스럽게 말했다.
장님이 음침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 뒤에 덧붙였다.
"이것이 바로 조물주께서 그에게 내린 벌이다."
"그놈이 결국은 우리 중원팔의(中原八義)의 수중에 걸려들었군.아아...이제야 옹대가의 원한을 갚게 되었구나."
이렇게 중얼거리던 그는 갑자기 그 검은 항아리 앞에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일곱 사람도 일제히 무릎을 꿇으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항아리, 그 안에는 옹천검이라는 자의 유골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한참 후, 경장대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철전갑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철전갑, 너는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있느냐?"
"당신도 잘 있었소?"
철전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경장대한은 울분이 터절 듯한 모습으로 차갑게 말했다.
"난 물론 잘 있었다. 나 변호(邊鎬)는 평생 나쁜 일이라고는 한번도 한 적이 없는데 왜 너처럼 자라새끼 모양 고개를 움츠리고 살겠느냐?"
그러자 곰보장한이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소리쳤다.
"셋째 형, 그놈과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일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속히 그놈의 배를 갈라 심장을 꺼내서 하늘에 계신 큰형님의 영혼에게 제사나 지내도록 합시다."
"일곱째, 자네는 그 말을 잘못했네. 우리 형제들은 무슨 일이건 항상 광명정대하게 처리해야 하네. 그리고 설사 그를 죽인다 해도 그가 더 이상 할 말이 없도록 해 주어야 하네."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장님이 냉큼 말을 받았다.
"맞았어. 우리 기왕 십여 년이나 기다리지 않았는가? 그런데 몇 시진 더 기다린다고 뭐가 그리 어려운가?"
장님의 이 한마디가 나오자 나머지 사람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외눈박이 부인이 다그치듯 물었다.
"그럼 셋째의 뜻은 어떻게 하면 좋다는 거예요?"
변호는 정색을 하더니 차근차근하게 대답했다.
"우린 이 일에 대해 분명한 사실을 알아내야 할 뿐만 아니라 또 몇 명의 중인을 데려와 그들의 의견도 한번 물어봐야 하오. 만약 그들도 철가놈이 백번 죽어 마땅하다고 판결을 내리면 그때 가서 그를 죽여도 때는 늦지 않소."
이 말을 들은 곰보장한이 펄쩍 뛰며 소리를 질렀다.
"묻기는 뭘 묻는다는 거냐? 그의 죄는 이미 명백하게 드러났는데....."
이번에도 장님이 변호의 두 의견에 동조하고 나섰다.
"기왕 그의 죄가 명백하게 드러났다면 한번 물어보는 것이 또 무슨 상관이 있느냐?"
곰보장한은 빨리 죽이지 못하는 것이 원통한 듯 이를 부드득 갈며 물었다.
"한데...누구를 증인으로 찾아오려는 것이오?"
변호가 얼른 대답했다.
"우리가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공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 우리 중원팔의나 철전갑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어야 하오."
그러자 외눈박이 부인이 미간을 찡그리며 재촉했다.
"찾고자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빨리 얘기해 봐요."
변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나왔다.
"첫째는 바로 철면무사 조정의요. 그 사람은....."
이때 갑자기 철전갑이 차갑게 웃으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너희들은 번거롭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없이 아예 속시원히 나를 죽여라. 나는 확실히 과거에 옹천검에게 잘못한 것이 많아 지금 죽어도 억울할 것은 없다."
외눈박이 부인이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의 말투를 들어보니 아직 조정의에게 불만이 있는 것 같군."
"조정의가 기왕 셋째에게 그의 행적을 보고했다면 반드시 그와 무슨 갈등이 있었을 것이오. 그런 그가 어찌 공정한 공도(公道)를 할 수 있겠소?"
변호는 조금도 반박하지 않고 장님의 말을 받았다.
"기왕 그렇다면 조정의 말고 또 다른 두 사람을 찾읍시다."
변호는 아무도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자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두 사람 중 하나는 대관루(大觀樓)에서 철판쾌서(鐵板快書)를 논하는 노선생으로 이런 일에 대해서는 일대의 명가(名家)요, 그러면서도 강호인과는 아무 관련도 없소. 그리고 또 하나는 처음 강호에 나선 청년인데....."
여기까지 들은 외눈박이 부인이 금세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가로챘다.
"처음 강호에 나선 애송이가 뭘 안다고 그러세요?"
"그 청년이 비록 처음 강호에 나서기는 했으나 성격이 강인하여 절대로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지 않소. 그리고 내 그와 사귄 지가 불과 이틀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의 행동은 극히 광명정대하였소."
변호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외눈박이 부인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흥! 사귄 지가 이틀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남을 그렇게 믿다니, 알고 보니 셋째 아주버니의 친구 사귀기 좋아하는 버릇은 여전하군요."
이렇게 말하던 외눈박이 부인의 언성이 갑자기 높아졌다.
"만약 셋째 아주버니가 이 철가놈을 좋은 친구라 믿지 않고 또 데려오지 않았다면 옹천검이 어찌 그의 손 아래 목숨을 잃었겠어요?"
변호는 그녀의 호통을 듣자 더 할 말이 없는지 고개를 푹 숙여 버리고 말았다.
장님은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얼른 입을 열었다.
"일이야 어찌 되었든 몇 사람의 증인을 데리고 오겠다는 것은 그?리 나쁜 의견이 아니오. 그리고 우리 중원팔의는 절대 함부로 살인을 해서는 안 되오. 하물며 셋째는 이미 남을 청해 왔으니 우리는 절대로 남이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오."
외눈박이 부인은 뜻밖이라는 듯이 한쪽만 남은 눈을 더 크게 떴다.
"벌써 사람을 청해 왔다고?"
변호는 씁쓸하게 웃으며 변명하듯 말했다.
"난 원래 그들을 전부 다 호유성이 있는 쪽으로 청해 가려 하였소. 그런데 뜻밖에도 형수님이 벌써 철가놈을 잡아 놓았으니....."
외눈박이 부인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할 수 없다는 듯이 문 밖을 향해 소리쳤다.
"세 분께선 기왕 오셨으니 어서 들어오시오."
한편 철전갑은 더 이상 눈을 뜨지 않기로 내심 맹세를 하였다. 죽으면 죽었지 더 이상 그는 철면무사 조정의의 꼬락서니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는 두 눈을 꽉 감은 채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잠시 후, 세 사람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첫 번째 사람의 발걸음은 무게가 있었다.
그리고 하체가 날렵한 것을 보니 철면무사 조정의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았다. 조정의는 북쪽 지방의 호걸이라 특기가 두 다리를 잘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사람의 발자국소리는 약간 크게 들렸다. 하지만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여 매우 둔한 느낌이 들었다. 보아하니 이 자에게 설사 무공이 있다 해도 역시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닐 것이다.
철전갑은, 세 번째 사람의 발걸음소리는 전혀 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들어온 자는 두 명밖에 안 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세 번째 들어오는 사람은 걸음을 옮길 때 소리조차 내지 않는다는 것인가.
철전갑은 궁금하기 짝이 없었으나 결국은 눈을 뜨지 않았다.
이때 장님이 일어나며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분이 우리들의 이름을 몰라서는 안 된다."
변호가 즉시 말을 받아 세 번째 사나이를 향해 자기들을 소개했다.
"우리는 모두 여덟 형제로 강호 친구들은 오두 우리를 중원팔의라고 부르오."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장님이 불쑥 말을 꺼냈다.
"나는 둘째로서 이름은 역명호(易明湖)라 부르며 과거에는 신목여전(神木如電)이란 별호를 가지고 있었소. 그러나 지금은....."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참담한 얼굴로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은 내 별호가 유안무주(有眼無珠)로 변하고 말았소."
뒤이어 변호가 자기를 소개했다.
"나는 셋째 보마신창(寶馬神槍) 변호라 하오."
약장사 차림을 한 자가 입을 열었다.
"나는 넷째 금풍백(金風白)이오."
이때 노선생이 갑자기 말틈에 끼여들었다.
"귀하의 말투를 들어 보니 남양부(南陽府) 사람 같구려."
금풍백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노선생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아는 체를 했다.
"남양부 일첩당(一帖堂)의 금가약포(金家藥鋪)의 구충산(驅蟲散)0 은 아주 유명하오. 그런데 귀하는....."
금풍백은 고소를 지으며 나직하게 대꾸했다.
"만성원의 공자님께서도 오리발을 팔고 있는데 그까짓 일첩당쯤이야 뭐가 그리 대단하겠소?"
"그렇소."
노선생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주위를 휘둘러 보며 궁금한 듯이 물었다.
"실례지만 어느 분이시오?"
그러자 술장사 하는 자가 손가락으로 자기의 코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나요."
노선생은 이 뜻밖의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술장사는 빙긋이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나는 장승훈(張承勳)이라 하오. 그리고 나무를 캐는 나무꾼은 내 여섯째 동생으로 그의 도끼는 지금 비록 나무밖에 자를 수가 없지만 옛날에는 확실히 역벽화산(力劈華山)을 할 수가 있었소."
장승운의 말이 끝나자 곰보장한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일곱째로 얼굴이 이렇게 얽었다고 해서 이름도 공손우(公孫雨)라 하오."
이번에는 두부 장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나는 여덟째로 궤탕답화(軌湯踏火) 서문열(西門烈)이라 하오. 그러나 지금은 아주 형편없이 몰락해 버렸소."
중원팔의에 대한 소개가 끝나자 노선생은 의아한 듯이 물었다.
"그런데 첫째는 어디로 갔소?"
"첫째 의박운천(義薄雲天) 옹천검은 남에 의해 피살을 당했소. 그리고 이분은 우리들의 형수님으로서....."
공손우의 눈길을 받은 외눈박이 부인이 얼른 입을 열었다.
"나는 이름이 과히 좋지 않아 여도호(女屠戶) 옹대랑(翁大琅)이라 하오. 당신은 잘 기억해 두었나요?"
노선생은 미소를 지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노부는 비록 나이는 먹었지만 기억력 하나는 아직 늙지 않았소."
옹대랑은 정색을 하더니 엄숙하게 말했다.
"우리가 당신더러 우리의 이름을 잘 기억해 두라는 이유는 당신의 입을 빌려서 명성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당신의 입을 통해 만천하의 군웅들에게 우리의 피맺힌 원한을 발표해 달라는 것이오."
노선생이 놀란 목소리로 다그쳐 물었다.
"피맺힌 원한? 그렇다면 옹천검 옹대협을 살해한 자는 바로....."
공손우가 얼른 철전갑을 손가락질하며 싸늘하게 말했다.
"바로 이 철갑금강 철전갑이오. 이놈이 우리 형님을 죽인 원흉이오."
그러자 금풍백이 안색을 굳히고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게 된 것이오. 우리 중원팔의는 친형제처럼 친하여 비록 나름대로 일이 있기는 하지만 해마다 중추절만 되면 꼭 큰형님의 산장에 모여 몇 개월씩 어울리곤 했었소."
장승훈이 말을 가로챘다.
"우리 여덟 형제는 항상 어울렸지만 화기애애하고 재미가 있었소. 그래서 다른 친구를 얻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소. 그런데 그 해 셋째 형님께서 한 사람을 데려와 아주 좋은 친구라고 우리에게 소개했소."
이 말을 받아 공손우가 저주스러운 듯이 소리쳤다.
"그 자가 바로 배은망덕하게도 친구를 배신해 혼자만의 부귀영화를 노린 철전갑이오."
금풍백이 뒤를 이었다.
"우리 큰형님은 원래 친구를 자기 생명처럼 여기는 분이었소. 그래서 철전갑의 사내다운 외모만 보고 곧 그를 형제처럼 대했소이다. 그런데...그는 사람이 아니라 한 마리의 짐승이었소!"
장승훈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철전갑을 노려보았다.
"설이 지난 후 우리는 모두 흩어졌소. 그런데 큰형님은 철전갑이 일정한 거처가 없어 몇 달 더 머물라고 권했소이다. 한데 뜻밖에도 저놈은 암암리에 큰형님의 원수와 서로 내통하여 야밤중에 습격을 감행, 우리 형님을 살해하고 옹가장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린 것이오. 우리 큰형수님은 요행 목숨은 잃지 않았으나 역시 중상을 입고 말았소."
말이 끝나자 옹대랑은 비통에 가득찬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내 얼굴의 이 험악한 칼자국을 보았겠죠? 나는 칼날에 하마터면 머리가 두 조각이 날 뻔했어요. 그들은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렇지 않았다면 나 역시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공손우가 이를 부드득 갈며 외친다.
"당시 옹가장의 사람은 전부 살해되었는 데도 흉수가 누구인지 몰랐소. 그러니 그 수법이 얼마나 악랄했겠소?"
금풍백이 눈물을 글썽이며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우리 형제들은 그 사건을 안 후 즉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맹세코 큰형님의 원수를 갚자고 하였소. 십여 년이 흐른 지금 결국 하늘도 무심치 않아....."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것을 본 옹대랑이 서릿발 같은 음성으로 물어왔다.
"이제 우리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얘기했어요. 그러니 세 분은 철전갑을 죽여야 할지 아니면 살려 줘야 할지 명확한 판단을 내려 주세요!"
조정의가 먼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힘주어 말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철전갑을 천 토막으로 내도 극히 당연한 일이오."
조정의의 말에 공손우는 입에 게거품을 물고 소리쳤다.
"당신은 우리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오? 믿지 못하겠거든 본인에게 직접 물어 보시오!"
철천갑은 조정의가 직접 묻는 것이 싫은 듯 이를 악물고 부르짖었다.
"내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옹대가에게 분명히 죄를 지었으니 아무 원망없이 죽겠다!"
공손우는 악에 받쳐서 길길이 날뛰며 눈을 희번득거렸다.
"자! 모두들 들었죠? 그의 입으로 말하는 것을 말이오!"
그러자 조정의가 엄숙한 목소리로 최후의 판결을 내렸다.
"그 자신이 시인한 이상 우리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소."
노선생도 장탄식을 하며 저주스러운 듯이 맞장구를 쳤다.
"이 늙은이는 별별 얘기를 다 들어보았지만 이렇게 악랄하고 정의를 모르는 사람의 얘기는 난생 처음이오."
옹대랑이 안면 근육을 파르르 떨며 확인하듯 물었다.
"그렇다면 세 분께서는 다 철천갑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신다는 말이군요?"
노선생이 먼저 기분좋게 대답했다.
"그렇소!"
조정의도 치를 떨며 목소리를 높였다.
"마땅히 난도질을 하고 강호에 공표를 해야 합니다."
바로 이때였다. 돌연 한 사람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귀하는 시종 강호, 강호 하는데 귀하 혼자만으로 전체 강호를 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피드 구독하기:
댓글 (Atom)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