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1일 목요일

47 소이비도 제3권 밝혀진 비밀





밝혀진 비밀



이곳은 본디부터 매우 황폐한 곳이다. 여기에서 길 모퉁이를 하나 지나면 더욱 황폐한 곳이고 사람의 그림자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낭천은 상관비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빠른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앞서 가던 설서선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형무명의 모습이 노란 점 하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의 뒤를 쫓고 있는 낭천의 모습은 매우 여유만만했다. 낭천의 황삼청년을 미행하는 태도는 매우 능란했다. 누구나 미행을 한다면 절대로 조급해서는 아니 되며 극히 침착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조금이라도 서둘게 되면 상대에게 발각되어 오히려 화를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얼마쯤 걸었을까. 이들의 눈앞에 자그마한 동산이 하나 나타났다. 형무명은 뒤에 사람이 쫓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듯 급히 동산으로 접어들었다. 그러자 상관비는 걸음을 더욱 빨리 해 급히 형무명의 뒤를 쫓았다.

상관비가 산으로 몸을 감추자 낭천도 신법을 전개해 동산 위로 올라갔다. 산 위로 가면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낭천은 결코 실망하지 않았다

형무명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두려움이라고는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사람이 죽음이 두렵지 않을 때 그 무엇이 두렵겠는가.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으나 지금 그의 두 눈은 두려움으로 충만해 있었다. 대체 그는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형무명의 손이 검을 움켜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먼저 검을 쓰던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이었다. 형무명이 오른손에 검을 잡게 되면 그것은 살인의 표적으로써 누구든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곳 산 위는 더욱 황폐했고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형무명은 검을 쥐었던 손을 다시 내렸다. 그리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바로 이때, 상관비의 얼음장 같은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이어 상관비의 유령과 같은 몸이 형무명의 가까이로 다가왔다.

형무명의 눈은 유난히 번득였으나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상관비가 먼저 냉랭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제 연극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오."

그의 말이 끝나자 형무명은 서서히 등을 돌렸다. 그는 극히 담담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상관비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한마디 힘주어 말했다.

"내가 연극을 했다고?"

"그렇소. 분명 연극을 하고 있었소. 당신이 손영감의 뒤를 일부러 미행하고 있는 것이 바로 연극이오. 당신은 그들을 미행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소."

형무명은 냉소를 쳤다.

"그럼 내가 그들을 뒤쫓고 있는 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오?"

"그것은 바로 나 때문이오."

"아니, 그것은 어째서요?"

"당신은 내가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들의 뒤를 미행하는 척한 것이기 때문이오."

형무명은 싸늘한 코웃음을 터뜨렸다.

"흥! 그것은 소방주 당신의 미행 방법이 고명하지 못했기 때문이오."

"그렇소. 나의 미행 방법은 비록 고명하지는 못하지만 나는 지금 당장 당신을 죽일 수가 있소. 그리고 내가 말하지 않았어도 내가 당신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오."

형무명은 물론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놀라는 표정이 전혀 없었고 몹시 담담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소리에 놀란 사람은 바로 낭천이었다. 이들 두 사람은 본시 동일 문하의 사람인 것 같았다. 한데 어째서 그들 간에 서로 살인에 관한 대화가 오가고 있는 것일까.

상관비가 다시 냉랭히 입을 열었다.

"나는 십 년 전부터 당신을 죽이겠다는 일념을 품고 있었소.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당신도 모르지는 않겠지?"

형무명은 담담히 침묵을 지켰을 뿐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형무명, 그는 언제나 남으로부터 질문을 받아도 그 말에 정면으로 대답한 적이 매우 드물었다.

순간, 상관비의 표정이 갑자기 얼음장같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또한 두 눈에서 무서운 살기가 폭사되었다.

"만약에 네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면 나는 좀더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다. 비단 너는 나의 지위를 갈취했을 뿐만 아니라 내 어머니의 목숨까지도 빼앗은 놈이다. 네가 나타나기 전에는 모든 것이 다 나의 손아귀에 있었지만 네가 나타난 후로는 그 모든 것이 다 너의 손아귀로 들어갔다."

상관비의 표정에 극심한 분노와 처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형무명 역시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그것은 모두 네가 나에게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관비는 참았던 울분이 치솟아 금방 얼굴을 붉게 상기시키며 어금니를 악문 채 절규를 토했다.

"내가 그것 때문에 지금 너에게 이러는 것을 너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해야 하는 진정한 의도는......"

그는 내심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을 애써 억제하고 있었지만 끝내 참아내지 못하고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그것은 바로 네가 우리 아버지의 사생아이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는 바로 너의 어머니 때문에 세상을 등지신 것이다."

순간 형무명의 두 눈이 갑자기 축소되고 눈동자가 마치 두 개의 핏덩이처럼 붉게 충혈되어 갔다.

이때, 동산 마루에서 지켜보던 낭천의 눈에서 갑자기 극심한 고통의 빛이 드리워졌다.

그는 형무명과 같은 고통을 지니고 있었고 어쩌면 형무명보다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관비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느라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형무명 역시 커다란 충격을 받았는지 매우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버티고 서 있었다.

잠시 후, 상관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이 모든 일을 여지껏 나에게 속여 왔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정말로 모르고 있었는 줄 아느냐?"

상관비가 말한 너희들이라는 것은 바로 형무명과 그의 아버지인 상관금홍을 일컫는 것이다. 이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올 때는 물론 그 자신이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하는 상관비는 몹시 고통스러워했고 그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 나머지 도리어 냉정해져 잠시 냉랭하게 웃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사실은 네가 나타난 그날부터 나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부터 너를 죽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형무명은 싸늘한 눈초리로 상관비를 응시했다.

"너에겐 그럴 기회가 많았을 텐데....."

"그땐 내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너는 이용할 가치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형무명을 바라보며 한 차례 냉랭하게 웃더니 다시 이었다.

"그때 너는 아버지의 눈에 한 자루의 칼, 살인을 할 수 있는 예리한 칼로 보였다. 내가 만약 아버지의 그 칼을 없애 버리면 아버지는 절대로 나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불구가 되어 버린 이상, 아버지께선 너의 죽음을 마음에 두지 않을 것이다."

형무명은 그 말을 듣고도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나의 생사에 대해서는 나 자신까지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 그런데 하물며 그가....."

상관비는 싸늘한 코웃음을 날렸다.

"너는 그런 식으로 말해서 남을 속이고 자신까지 속일 수 있는지는 몰라도 나만은 속일 수 없다. 난 결코 너의 위장전술에 속지 않는다."

"너를 속인다고?"

상관비는 냉랭하게 웃었다.

"흐흐...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너의 말이 진실이라면 어째서 자신을 숨기고 또 도피를 하는 것이냐?"

형무명은 마치 실신한 사람처럼 힘없이 웃으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흐흐흐...자신을 숨기고 도피를 한다? 흐흐흐.....흐."

"네가 일부러 손영감을 미행하는 것이 바로 자신을 숨기고 도피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순간 형무명의 눈이 유난히 빛났다.

"그게 어째서 도피라고 생각하느냐?"

"네가 미행하는 상대가 손영감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는 네가 미행을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네가 어떠한 결말을 본 후에 너를 죽이려고 했다."

상관비는 말을 하다가 문득 멈추고 형무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몹시 담담해 상관비의 그 말에도 아무런 감응을 받지 않은 듯했다.

상관비는 냉랭한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가 연극을 꾸미려고 미행한 상대를 잘못 택한 것이다. 너는 그들의 행방을 쫓을 마음이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죽일 것은 더욱 생각지도 않았다. 너와 그들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기 때문에 너로서는 그들을 미행할 이유도 구태여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순간 형무명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그의 웃음소리는 매우 특이해 마치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상관비는 그 웃음의 뜻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서 너의 이번 미행은 일종의 연막술에 불과한 것이었다. 내가 너에게 손을 쓰지 못하게 하려는 얕으막한 수작이었단 말이다. 너는 벌써부터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니까."

형무명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소를 터뜨렸다.

"흐흐...내가 죽음을 두려워했다고?"

상관비는 형무명이 애써 태연하려고 하는데 대해서 실로 비웃음을 금치 못했다.

"그래도 너는 자신을 위장하려 드는구나. 하지만 전에는 네가 실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 당시에 너의 생명을 노리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너는 죽음의 무서움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때 그는 품속에서 두 개의 용봉환을 꺼내 들고 말을 했다.

"그러나 이제 너는 죽음의 맛을 볼 수가 있다."

그래도 형무명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보아하니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구나."

상관비는 소리없이 빙긋 웃었다.

"난 최소한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고명하다고 자부한다."

형무명은 실소를 터뜨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너는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다."

"무엇이냐?"

"다른 것은 몰라도 되지만 이 일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너는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상관비는 내심 약간 의아해 했으나 태연하게 대꾸했다.

"만약에 그 일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나는 절대로 모를 리가 없다!"

형무명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절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나의 비밀이며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니까...아는 사람은 오직 나 한 사람밖에는 없다."

순간 상관비의 두 눈에서 괴이한 광채가 폭사되어 나왔다.

"그래서 너는 지금 그 비밀을 나에게 말하겠다는 것이냐?"

형무명은 선뜻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말했다.

"그렇다. 나는 너에게 만은 가르쳐 주고 싶다. 하지만 거기엔 조건이 있다."

"무슨 조건이냐?"

그러자 형무명의 두 눈이 갑자기 축소되었다.

"내가 그것을 너에게 가르쳐 주면 너는 대신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상관비는 멈칫 하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죽어야 한다고?"

형무명은 상관비를 조롱하듯 피식 웃었다.

"나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살아 남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상관비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형무명을 똑바로 응시하더니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상관비, 그로서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확실히 우스운 일이었다. 불구의 몸이 되어서 어떻게 딴 사람의 목숨을 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상관비는 아직도 웃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하하하, 네가 무슨 재주로 나를 죽인단 말이냐? 너의 그 머리로 나를 받을 것이냐, 아니면 이빨로 나를 깨물 것이냐? 하하하....."

상관비가 웃는 사이에 형무명의 두 눈에서 무서운 살기가 폭사되었다.

"두 가지 다 아니다!"

순간, 상관비의 웃음소리가 돌연 뚝 끊어졌다. 형무명의 이렇게 간단명확한 대답은 농담이 아니며 또 무슨 공갈도 아니었다.

형무명은 매우 굵직한 음성으로 위협적으로 말했다.

"나는 이 손으로 너를 죽일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오른손을 서서히 들어올렸다.

상관비는 애써 태연을 가장하고 가소롭다는 듯이 대소를 터뜨렸다. 하지만 그 소리는 매우 부자연스러웠다.

"그 손으로...그 손으로 나를 죽인다고? 흥! 아마 강아지 한 마리 죽이지 못할 것이다!"

상관비의 그 말은 형무명을 비웃는 듯했으나 어딘가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형무명이 다시 냉랭히 대꾸했다.

"나는 사람만 죽이지 개는 죽이지 않는다."

순간, 상관비의 얼굴에 독기가 서리더니 갑자기 수중의 용봉환을 내던졌다.

용봉환은 무림에서 가장 위험한 병기였다. 그리고 그의 용상봉무 탈수쌍기라는 초식은 더더욱 무서운 것이었다. 만약에 극한 상황이 아니면 절대로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그 초식을 전개해 내기만 하면 상대방은 절대로 피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때, 싸늘한 검광이 동시에 폭사되어 나왔다.

순간, 상관비의 목에 여지없이 형무명의 검이 꽂혀 있었다. 하지만 검끝은 한두 치 정도밖에 꽂히지 않아 아직도 상관비는 호흡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이마에 파란 힘줄이 하나씩 둘씩 돌출되기 시작했고 두 눈은 시뻘겋게 핏발이 서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상관비는 이 자리에서 쓰러져 죽어도 형무명이 그 일검을 어떻게 전개해 낸 것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형무명은 상관비를 무섭게 노려보면서 또박또박 분명하게 말했다.

"나의 오른손은 왼손보다 더 빠르다. 이것이 바로 나의 비밀이었다."

이어 상관비의 얼굴이 극심한 고통을 느낀 듯 심하게 일그러지더니 갑자기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또한 그의 목에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검이 그의 목에서 빠지면서 검붉은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때 상관비의 두 눈에는 회의와 비애 그리고 경악의 빛이 번갈아가며 드리워졌다. 상관비, 그는 형무명이 자신을 죽일 수 있었다는 것과 자신이 죽는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도 도저히 자신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필히 믿어야만 했다.

한편 상관비가 내던진 용봉환은 형무명의 왼팔에 박혀 있었다. 부러진 팔, 형무명은 이미 불구가 된 손으로 상관비의 쌍환을 막은 후, 오른손으로 검을 뽑아 상관비의 목을 찌른 것이다.

이 얼마나 멋있는 동작이었는가. 그 일검은 매우 정확했고 신속했고 그리고 추호의 인정도 없었다.

'나의 오른손은 왼손보다 더욱 빠르다. 이것이 바로 비밀이다.'

형무명의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 말은 믿기가 어렵게 누구에게나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상관비는 십여 년 동안이나 형무명과 같이 지냈지만 그가 오른손을 사용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그는 형무명이 어떻게 해서 오른손으로 그렇게 기이한 검법을 배웠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윽고 안간힘을 써 버티어 내려고 하던 상관비는 이제 더 버틸 기력이 없는지 풀썩 쓰러졌다. 그의 표정은 형무명을 향한 원망의 빛을 띤 채 서서히 숨져갔다.

상관비의 숨진 모습은 참으로 목불인견이었다. 목뼈가 부러져 아직도 검붉은 선혈이 흐르고 있었고 전신은 극심한 고통으로 마구 뒤틀려 있었다.

형무명은 고개를 숙여 상관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때, 형무명의 표정은 매우 실망한 듯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형무명은 눈을 뜨고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네가 무엇 때문에 나를 죽이려 했느냐? 무엇 때문에....."

그는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걸이는 매우 특이해 마치 암암리에 어떤 장단을 맞추어 걷는 것 같았다. 왼팔에 박힌 두 개의 용봉환을 그대로 꽂은 채 서서히 걸음을 옮겨 갔다.

경악과 회의, 불신...이것이 지금 낭천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어쩌면 자신보다 신속하지 못할는지 모르지만 그의 검법은 악랄하면서도 교묘했다.

낭천, 그는 정녕 형무명을 이길 수가 없단 말인가. 이것이 비록 현실이라고 할지언정 낭천과 같은 사람으로선 절대로 참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는 점점 멀어져 가는 형무명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뜨거운 피가 체내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낭천의 지금 심정은 당장 형무명을 쫓아가 고하를 가리고 싶었다.

이때 갑자기 한 손이 뻗어와 그를 잡았다. 그 손은 매우 안정된 손이었고 연약했다. 낭천이 고개를 돌리자 우정과 생명의 열기가 담긴 초류빈의 눈과 마주치게 되었다. 낭천을 잡아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은 그의 두 손이 아니라 지금과 같은 그의 두 눈동자였다.

낭천은 그런 초류빈의 진정어린 눈을 감히 정면으로는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장탄식을 터뜨렸다.

"어쩌면 나는 정말로 형무명을 이겨 내지 못할지도 모르지요."

초류빈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그보다 못한 것은 딱 한 가지가 있지...어떤 점입니까?"

"형무명은 살인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시킬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네. 한데 자네는 절대로 그러지 못한다는 점이야."

낭천은 다시 고개를 떨구고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암담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저는 확실히 그렇지가 못합니다."

"자네가 그렇지 못한 것은 자네에게 감정이 있기 때문일세. 자네의 검은 비록 추호도 인정이 없지만 자네의 본심에는 인정이 있다네."

"그래서...저는 영원히 승리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까?"

초류빈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자네는 이길 수 있네."

이렇게 말한 그는 낭천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나 입을 열지 않자 다시 말을 이었다.

"사람에게나 모든 동물에겐 감정이 있어야 생명이 있는 것이며 생명이 있음으로써 영기가 있고 변화가 있는 것일세."

낭천은 초류빈의 이 말을 깊이 새겼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닐세."

"그럼....."

"가장 중요한 것은 자네가 형무명, 그를 죽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며 또 그를 죽일 수도 없다는 것일세."

낭천의 눈이 번쩍 빛났다.

"어째서 그를 죽일 필요가 없다는 겁니까?"

초류빈은 가벼운 한숨을 토하더니 나지막이 대꾸했다.

"그는 이미 죽었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를 또 죽이겠다는 건가?"

낭천은 초류빈의 그 말을 금방 알아듣지 못하여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의 마음은 이미 죽었습니다...하지만 그를 죽일 필요가 없다고는 해도 그를 죽이지 못할 것이라는 건 또 무엇 때문입니까?"

초류빈은 빙긋 웃더니 도리어 반문했다.

"자네는 그가 무엇 때문에 암암리에 오른손 검법을 연마했는지 알고 있는가?"

낭천은 전혀 그러한 생각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물론 알 리가 없었다.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초류빈은 천천히 말했다.

"만약 나의 짐작이 맞는다면 바로 상관금홍 때문일 걸세."

"상관금홍도 그의 비밀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초류빈은 고개를 무겁게 흔들었다.

"절대로 알 리가 없지....."

"그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형무명의 오른손이 왼손보다 더 빠르다면 본시 단번에 상관비의 목숨을 앗아갈 수가 있었을 것이네. 그러면 상관비로서도 전혀 반격을 할 여지가 없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는 상관비가 먼저 손을 쓰기를 기다렸다가 왼손으로 상관비의 쌍환을 막아내고서야 그에게 검을 던진 것이다."

낭천은 잠시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건 이미 왼팔이 불구가 되었으니 한 번 더 맞아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것이 중요한 원인은 아니네."

"그럼 그것은 또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 역시 상관금홍 때문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그는 상관금홍에 대해서 잘 알고 있네. 상관금홍은 어떠한 사람이라도 그 자신의 이익도구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네. 그러나 그 중에서 누구든지 이용가치가 없게 되면 상관금홍은 가차없이 그를 살해한다는 것도 물론 알고 있었지."

"그 점에 대해선 상관비도 이미 말했습니다."

"형무명은 상관금홍이 자신에게도 그렇게 대할 것이 두려웠던 것일세."

"상관금홍이 만약 그의 오른손이 왼손보다 더 빠르다는 것을 알면 그렇게 대하진 않겠죠?"

"그렇지만 그것을 몰랐으니까 형무명을 살해하려 했던 것일세."

낭천은 알 수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한데 형무명은 어째서 상관금홍에게 얘기하지 않았을까요?"

"그는 상관금홍에게 모종의 기이한 감정을 지니고 있는 것 같더군. 그는 상관금홍이 자신에게 잘 대해 주는 것은 자신의 검 때문이 아니고 자신의 사람됨 때문이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지."

낭천은 고개를 숙이고 듣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초류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상관금홍을 시험하려고 그를 찾아가고 있는 것일세. 자신의 왼팔이 끊어진 지금에도 상관금홍이 예전과 같이 대해 줄 것인지를 시험하자는 것이야."

낭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제야 대략 알 것 같군요."

"상관비의 말은 틀림이 없네. 형무명은 지금 두려움을 지니고 있네. 그렇지만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상관금홍의 냉대와 경멸이지 결코 죽음이 아닐세."

낭천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그렇다면 그에게도 감정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는 다른 사람에게는 비록 무정하지만 상관금홍에게는 예외일세. 그는 그 자신의 삶을 상관금홍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지."

낭천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이 세상에서 완전히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요?"

"형무명, 그는 상관금홍을 위해 죽을 수는 있지만 상관금홍의 손에 죽는 것은 원치 않을 것이네."

낭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암암리에 오른손 검법을 연마한 것이군요."

"그렇지....."

"그럼 그가 상관비의 쌍환을 왼팔로 막은 것은 쌍환을 막는 방법을 연습하려는 것이었겠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

"그래서...만약 상관금홍이 전과 같이 대해 주지 않으면 그는 또 상관금홍을 죽이겠군요. 좀전의 방법으로 말입니다."

"어쩌면 그렇게는 못할지도 모르네. 하지만 최소한 시험은 해볼 걸세."

낭천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또한 그의 눈빛도 점점 담담해졌다.

잠시 후, 초류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상관금홍의 용봉환이 병기보에 이위로 기록되어 있네만, 그것은 그의 초식이 악랄하고 무서워서가 아니라 몹시 안정된 상태였기 때문이네."

"안정되어 있다니요?"

"천하의 병기는 그 어떤 것이라도 안정된 경지까지 연마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네. 한데 그것이 바로 뭇사람들이 따를 수 없는 상관금홍의 장점이었네. 상관비의 공격은 상관금홍과 비교한다면 만분의 일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아주 미약한 것이네."

"네에?"

낭천은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입을 열지 못했다.

초류빈은 지금껏 너무 많은 말을 했기 때문에 입이 마르고 진땀이 다 날 정도였다. 잠시 입을 다물고 휴식을 취한 초류빈은 계속해서 말을 꺼냈다.

"상관비가 형무명을 시기하고 증오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겠는가?"

낭천은 눈을 껌벅거리고 묵묵히 고개를 흔들었다.

초류빈이 다시 말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아버지가 공력의 오묘함을 상관비 자신에게는 전수해 주지 않고 오직 형무명에게만 전수해 주었기 때문일세."

낭천은 역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류빈은 지친 듯이 낭천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만약에 상관금홍이 용상봉무 탈수쌍비와 같은 악독한 초식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형무명, 그를 이길 수 있는 기회가 매우 희박하네."

낭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상관금홍은 그 악독한 초식을 전개할는지도 모르네. 그가 왼손이 부러진 형무명의 모습을 보게 되면 더 이상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형무명에게도 승리할 기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네."

낭천은 마치 금방 꿈에서 깨어난 듯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어찌 되었든 상관금홍은 형무명의 아버지가 아닙니까?"

초류빈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닐세. 절대로."

낭천은 눈이 휘둥그레져 초류빈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상관비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상관비의 추측에 불과한 것이고 그 짐작은 터무니없는 것일세."

"그럼 그가 말했던 모든 것이 다 거짓이란 말입니까?"

초류빈은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물론 거짓은 아니네. 하지만 그의 견해가 틀린 것이지."

"견해가 틀리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는 형무명이 나타난 후로 부친이 자신을 냉대하고 멀리해 왔다고 말을 했는데 그것은 사실일세. 하지만 상관금홍이 그렇게 한 것은 상관비, 그를 지나치게 사랑한 때문이지."

낭천은 이해가 가지 않는 듯이 급히 물었다.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냉대를 하고 멀리해 왔다면 그것은 또 무슨 이유입니까?"

"그것은 그가 형무명을 살인도구로 만들기 위해서였기 때문이었네. 형무명의 일생은 그것으로써 상관금홍의 손에 파괴된 것일세."

낭천은 깊은 생각에 빠져 얼른 헤어나지 못했다. 잠시 후, 그는 씁쓰레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만약 살인을 위해서 살고 있다면 그것은 슬픈 일이지요."

"그래서 나는 형무명이 상관금홍을 만난 그 순간부터 이미 그가 죽었다고 말한 것일세."

낭천은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심기가 매우 어지러웠다. 전신의 맥이 타 풀린 듯 대꾸할 기력조차 없었다.

초류빈은 마른침을 한 차례 삼키더니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상관금홍도 사람인지라 최소한 자신의 자식만은 사랑하는 본능이 잠재해 있었네. 그는 자신의 자식인 상관비가 살인도구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공력을 전수해 주지 않았던 것일세."

초류빈은 말을 멈추고 갑자기 크게 웃었다.

"하하하...한데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상관비가 아버지의 그러한 점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일세."

"결국 상관비는 상관금홍의 손에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군요."

초류빈은 탄식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 사람의 욕망이 너무 크다 보면 이렇게 오히려 화를 당하는 일이 있는 것일세."

가을의 숲은 매우 삭막했다. 이미 모든 잎들이 져서 앙상한 가지만이 바람에 울고 있었다. 이 숲을 지나자 황폐하고 조용한 작은 오솔길이 나타났다.

낭천은 작은 오솔길 끝에서 반짝이는 작은 등불을 바라보며 손짓을 했다.

"바로 저것이 저의 집입니다."

집!

초류빈의 귀에 들린 집이란 단어는 매우 생소한 것이며 또 멀리 있는 것이었다. 희미한 듯하면서도 강한 불빛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불이 켜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그녀가 잠들지 않은 모양입니다."

등잔불을 밝힌 조그만 방에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절세의 미녀...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정경인가.

낭천은 그 모습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뿌듯해짐을 느꼈다. 또한 그의 칼날과 같은 예리한 눈도 이내 부드러워졌다. 낭천은 본시 매우 고독하고 적적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가장 사랑하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감각은 확실히 행복한 것으로 낭천으로 하여금 황홀감을 느끼게 했다. 바로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과 또한 그것에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이 세상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낭천과 반대로 초류빈의 가슴은 점점 침체되기 시작했다. 행복의 빛으로 가득찬 낭천의 얼굴을 본 그는 갑자기 낭천에게 표현할 수 없는 짙은 죄의식을 느꼈다. 초류빈 그는 낭천으로 하여금 실망감을 갖게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신은 온갖 고통을 지닐 망정 낭천에게는 실망을 안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는 필히 낭천을 실망시켜야 만했다.

낭천은 지금 한껏 행복감에 젖어 있다가 설소하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면 어떻게 변할 것인지 상상조차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신이 낭천으로 하여금 일순 실망하고 비통해 하고 잠시나마 미치도록 만드는 것은 낭천의 앞날이 더욱 보람되고 정정당당한 대장부가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부터 낭천에 대해 영원히 지우지 못할 죄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볍고 긴 고통보다는 심하긴 하나 짧은 고통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

초류빈은 낭천이 짧고 심한 고통을 극복하고 조속한 시일 내에 설소하를 잊기를 바랬다.

설소하와 같은 여자는 사랑해 줄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상대해 줄 필요조차 없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불행한 것은 때때로 사랑할 가치가 없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감정이란 고삐가 풀린 야생마와 같은 것으로써 그 누구도 억제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큰 비애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는 숱한 비극을 남기며 이어져 왔는지도 모른다.

낭천과 초류빈이 그 오두막집의 가까이로 접근할 때까지 집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방안에 불은 밝혀져 있었으나 남편이 오기를 기다리며 바느질을 하고 있는 여인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방문의 틈 사이로 방안의 불빛이 새어나와 문 앞을 어스름하게 밝히고 있었다. 어젯밤에는 비가 왔는지 길이 매우 질었다.

그 땅 위에 뚜렷한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나 있었다. 크고 우람한 발자국들이었다. 그것은 필시 남자의 발자국들이었다.

"아니...이곳에 누가 왔단 말인가."

순간, 낭천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금방 생각을 바꾸어 다시 행복감에 젖은 표정으로 회복되었다.

그는 설소하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으며 설소하가 낭천 자신에게 절대로 죄를 범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초류빈은 묵묵히 낭천의 뒤를 따라갔다.

낭천은 계속 걸음을 옮기면서 뒤를 돌아다보며 가볍게 웃었다.

"저는 오늘 그녀가 만든 국에 죽순을 넣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음식 솜씨는 매우 훌륭합니다."

초류빈은 빙긋 미소를 머금었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커다란 그릇에 담겨진 갈비탕 속에 만약 죽순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면 초류빈은 설소하의 비밀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고 또한 오늘과 같은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참혹한 수단으로 자신을 끔찍하게도 사랑하고 있는 남편을 속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도 하기 싫었다.

'하지만 나 자신도 지금 낭천을 속이고 있잖은가? 나는 어째서 그녀가 지금 집에 없을 것이며 이 모든 것이 다 나 자신의 뜻이라는 것을 말해 주지 못하는 것일까.'

내심 그러한 생각을 하던 초류빈은 허리를 구부리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낭천은 미간을 접으며 말했다.

"당신이 이곳에서 기거하게 되면 어쩌면 기침도 나을 것입니다. 이곳에는 술도 없고 대신 훌륭한 국이 있으니까요."

낭천은 인체에 그 국이 술보다 더 많은 해를 끼친다는 것을 모른다. 문고리는 잠기지 않았으나 방안에선 아무런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그간의 내용을 모르는 낭천은 전혀 불길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녀는 지금 부엌에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말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벌써 마중을 나왔을 겁니다."

초류빈은 시종일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지금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방문이 열렸다.

작은 객청은 매우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상 위에 놓인 등잔은 그리 밝은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어딘가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낭천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도착하니 긴장이 풀리는 것일까.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아내 설소하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그리 실망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한데 그녀는 대체 어디에 갔기에 집에 사람이 들어와도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부엌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았고 또 국이 끓는 냄새도 나지 않았다. 또한 설소하가 기거하고 있는 방은 굳게 닫혀져 있었다.

낭천은 고개를 돌려 입구에 서 있는 초류빈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어쩌면 자고 있을 것입니다. 항상 일찍 자는 버릇이 있으니까요."

초류빈은 웃으려고 하다가 갑자기 안색이 변했다. 그는 죽어가고 있는 듯한 여인의 신음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것은 설소하가 기거하고 있는 방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다음 순간 낭천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는 설소하의 방으로 달려가 닫힌 문을 마구 두드렸다.

"왜 그러시오. 어서 문을 여시오."

하지만 방 안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고 신음소리까지 끊어졌다. 방 안에 있는 신음소리의 주인공, 급히 대답을 하고는 싶었지만 말을 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낭천은 이마에서 비오듯 땀을 흘리며 있는 힘을 다해 문을 걷어찼다. 그와 동시에 초류빈은 눈을 감고 말았다.

낭천이 문을 박차고 방안의 정경을 보았을 때 어떠한 표정을 지을 것인지 보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끔찍하게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 거의 죽음에 당도해 있는 것을 본 사람의 표정은 어떠한 것일까. 더구나 전혀 예기치 않았고 도발적인 사고에 처한 사람의 표정.....

초류빈은 그러한 표정을 단 한 번도 본 일이 없으나 지금 낭천의 표정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문이 열린 후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혹시 낭천이 그 참혹한 정경을 목격하고 갑작스런 충격으로 인해 기절한 것이나 아닐까.

초류빈은 서서히 눈을 떴다. 낭천의 굳어진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하고 문 앞에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굳어져 있는 것이다. 이상한 것은 낭천의 표정이 경악에 차 있을 뿐 비통해 하는 빛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방안에 대해 어떤 광경이 벌어져 있는 것일까. 피.....!

초류빈은 약간 짐작은 했었지만 막상 그 광경을 목격하게 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앗!"

초류빈은 다시 크게 놀랐다. 하마터면 비명이 터져나올 뻔했다.

그는 방 안의 흥건한 핏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설영령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순간, 초류빈은 전신의 피가 한꺼번에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낭천은 초류빈을 멍청히 응시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표정은 매우 특이했다.

초류빈은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낭천이 혹시 무엇을 알아차린 것이 아닐까. 초류빈은 또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 아픔을 맛보아야만 했다.

다음 순간, 초류빈은 급히 달려가 설영령의 호흡과 맥박을 살펴보았다. 그는 설영령을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살리고 싶었다.

그러나 설영령, 그녀는 이미 회생할 가망이 없었다. 설영령은 서서히 눈을 뜨더니 초류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순간, 그녀의 눈에서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창백한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 눈물은 기쁨과 슬픔의 두 가지의 뜻을 지닌 눈물이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초류빈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 더할 수 없이 기뻤다.

초류빈의 두 눈에서도 눈물이 핑 돌았다.

"진정해라! 너는 아직 젊으니까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는 부득이 사실과 다른 말을 해야만 했다.

설영령은 초류빈의 말을 전혀 듣지 못했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 쉬며 억지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당신이 잘못한 거예요."

초류빈은 비통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렇다! 내가 잘못했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그녀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셨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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