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1일 목요일

45 소이비도 제3권 마지막 용기





마지막 용기



두 사람은 다시 말을 잊었다. 그러나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주위에는 어느 새 어둠이 짙게 깔렸고 휘황찬란한 불빛이 태양을 대신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큰길로 걸어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길은 어떻게 된 일인지 대낮보다 어두운 밤에 사람들이 더 많았다. 각양각색의 상가들이 모두 밖으로 밝은 등불을 내걸고 제 집의 명물을 선전하고 있었다.

그때 초류빈의 발길이 갑자기 멈추더니 만두를 파는 작은 음식점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영령이 아직도 기다리고 있을까.....'

초류빈은 갑자기 부끄러움이 엄습해 와 몸둘 바를 몰랐다. 그는 이미 그 일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낭천은 걸음을 멈추었다. 이 순간 그의 두 눈동자에서 광채가 번뜩였다. 그것은 설영령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눈빛과 똑같았다. 낭천은 한 번도 이런 곳에 와 본 적이 없었다.

초류빈은 어리둥절해 하는 낭천을 보며 속으로 만족의 웃음을 터뜨렸다. 초류빈은 자기의 이 어린 친구가 아직도 동심(童心)을 잃지 않은 것이 무엇보다 유쾌했던 것이다.

낭천이 갑자기 입맛을 다시며 입을 열었다.

"우리 오랫동안 함께 술을 마시지 못했군요."

"왜, 마시고 싶은가?"

낭천은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웬지 모르겠지만 그저 당신과 함께 있으면 술이 마시고 싶어집니다."

낭천의 얼굴에는 순진한 미소가 가득 피어오르고 있었다.

초류빈은 마음이 더욱 유쾌해 사양하지 않고 웃음을 터뜨렸다.

"좋네, 우리 저쪽으로 가 마시는 게 어떤가?"

"좋습니다. 우리 처지에 비싼 곳으론 갈 수가 없지요."

두 사람은 유쾌히 웃으며 부지런히 발길을 옮겼다. 이 세상에는 매우 기묘한 일들이 많다. 그 예를 들자면 추악한 여인일수록 뽐내고 가난한 사람일수록 남에게 술을 사주고 싶어한다.

자신이 술을 사는 것이 남이 사주는 것보다 훨씬 유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즐거움을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만두집은 작기도 했지만 장사가 별로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이유는 대부분의 손님들을 길가에 있는 상점에 빼앗겼기 때문에 지금 한창 저녁 식사 시간인 데도 겨우 점포 안에는 다섯 명밖에 손님이 들어와 있지 않았다.

구석진 상에 한 백의인이 앉아 있었다.

초류빈은 점포 안으로 들어서는 즉시 그 백의인을 보았다. 낭천 역시 첫눈에 그를 보았다. 아니 이 두 사람뿐이 아니라 그 어떤 사람이 들어와도 눈길이 모두 그에게 쏠릴 것이다.

비록 연기가 새까맣게 일어나는 이런 작은 집에 앉아 있어도 그 사람의 하얀 옷에는 먼지 한 점 묻어 있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비록 주름살이 져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가 이미 늙었다고는 말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는 비록 간단하게 차려 입었지만 매우 깨끗하고 또 화려했다.

하지만 이런 것이 사람의 눈길을 끌고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람의 눈을 끄는 것은 바로 그의 기품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표현할 수 없는 오만한 기품이었다.

그의 옆에 있는 몇몇 상은 비어 있었고 건너편 상이나 떨어져 있는 상에 몇몇 손님들이 있기는 했지만 모두 낮은 음성으로 얘기를 하고 있어 점포 안은 비교적 조용했다. 이 사람이 바로 전날 작은 은자를 열 손가락으로 마치 예리한 비수처럼 잘라 버린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어째서 아직까지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일까. 혹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사람은 마침 술잔을 들어 마시려고 하다가 초류빈이 들어서자 즉시 동작을 멈추고 뚫어져라 초류빈을 쳐다보았다. 그 사람의 건너편에는 일신을 붉은 옷으로 차리고 길게 머리를 땋은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갑작스레 변하는 그 사람의 눈빛에 따라 천천히 뒤를 돌아다보다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아니!"

처녀는 외침과 동시 앞으로 급급히 달려와 초류빈의 손을 꼭 쥐면서 활짝 웃었다.

"저는 당신이 꼭 오실 줄로 믿고 있었어요. 그리고 당신도 영원히 절 잊지 않으실 걸로 믿고 있었어요!"

과연 설영령은 아직도 이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류빈은 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힘껏 잡았다.

"영령, 너 여태껏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느냐?"

설영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눈시울이 어느 새 붉어지고 있었다.

"당신,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저는 아주 기다리다 지쳐 죽을 뻔했단 말예요."

이때 낭천이 입을 열어 물었다.

"낭자, 정말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소?"

설영령은 그제야 낭천을 발견했다. 순간 그녀의 안색이 그만 크게 변했다. 설영령은 물론 낭천을 알고 있었지만 낭천은 그녀를 몰라보았다.

그는 물론 부서진 그 작은 누각 위에 올라가 본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꿈에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설영령은 눈을 깜박거리며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제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있었겠어요?"

낭천 역시 냉랭하게 말했다.

"사람을 기다리지 않아도 할 일이 많을 텐데...그리고 또 만약 정말로 이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어째서 입구를 지키지 않고 이렇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소?"

초류빈은 낭천이 이런 말을 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낭천도 원래 평소에는 사람에게 자극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초류빈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그는 예리하게 변해 있었다. 그것도 무섭도록 예리하게 말이다. 낭천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다.

낭천은 남들이 자기의 친구인 초류빈을 속이는 것을 죽도록 싫어했다. 초류빈은 속으로 길게 탄식을 했다. 낭천의 이 관찰하는 방법은 비단 예리할 뿐 아니라 그 어떤 사람과도 크게 달랐다.

확실히 모든 일에 대해 그 누구보다 고명했고 자세히 살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떻게 설소하 앞에서는 바보요, 장님이 되어버린 것일까.

이때 설영령은 무엇이라 말을 못하고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질 것 같았다.

"당신도 만약 같은 곳에서 십여 일 동안을 애타게 기다리다 보면 어째서 제가 등을 돌리고 앉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거예요."

설영령은 조그만 손을 들어 눈자위를 꼭꼭 누르더니 유연한 어조로 다시 이었다.

"처음엔 그 누가 들어와도 기다리고 있는 내 마음이 팔딱팔딱 뛰었어요. 그러나 며칠이 지난 후 저는 자연히 알게 되었어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제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문을 주시하고 있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계속 문을 주시하고 있으면 더욱 초조해져서 만약 더 이상 그대로 주시하고 앉아 있다가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어요."

낭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너무 많은 말을 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설영령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울먹였다.

"만약 저분 여대협께서 저와 함께 있어 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벌써 미쳤을 거예요."

초류빈은 그 말에 눈을 돌리는 순간 즉시 그 백의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미소를 띠며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형씨, 감사....."

순간 백의인이 갑자기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녀 대신 내게 감사할 필요는 없소. 내가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을 기다리기 위해서였소."

초류빈은 의외라는 듯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나를 기다렸다고?"

백의인은 오만하게 대꾸했다.

"그렇소. 바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소."

백의인은 비록 웃었으나 감출 수 없는 오만스런 기품이 다시 사람으로 하여금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이 세상에는 그저 소수의 사람만이 내가 기다릴 수 있는 가치가 있는 사람이오. 초탐화 당신도 물론 그 중의 한 사람이오."

초류빈이 놀란 기색을 나타내기도 전에 설영령이 먼저 말을 가로챘다.

"저는 아직 이분이 누구라는 것을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아셨죠?"

백의인은 그녀를 흘깃 쳐다보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만약 이 강호에서 오래 살려면 꼭 알아두어야 할 사람들이 몇 명 있소. 물론 이 초탐화도 그 중의 한 사람이오."

이때 낭천이 갑자기 끼여들었다.

"그밖엔 누구요?"

백의인은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사람은 말고라도 최소한 나와 당신이 있소."

낭천은 자기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두 눈에 일종의 처량하기 그지없는 빛을 떠올렸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의자에 쓰러지듯 풀썩 앉아서 크게 소리쳤다.

"술 갖고 오너라. 이 집에서 제일 독한 술로!"

점원은 허리를 굽신거리며 다가와 물었다.

"안주는 무엇으로 할까요, 손님?"

"안주? 역시 술이다."

술을 마실 줄 아는 사람이 만약 더 빨리 취하고 싶다면 술에다 술로 안주를 삼는 방법이 제일 좋다. 이런 방법은 모두 알고 있기는 하지만 실상 이렇게 하는 사람은 무척 적었다. 그 이유는 누구든 자신에게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 없다면 늦게 취할수록 기분좋기 때문이다.

이때 백의인은 계속 낭천을 주의깊게 쳐다보고 있었다. 백의인의 예리한 눈빛이 점차 누그러지더니 그 다음에는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눈빛이 초류빈에게 향했을 때 즉시 다시 예리해졌다. 이때 초류빈도 한참 그를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귀하의 대명은....."

"여봉선(呂鳳先)이오."

이 이름은 확실히 사람을 놀라게 하고도 남을 이름이었다.

그러나 초류빈은 조금도 의아스럽게 생각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웃었을 뿐이다.

"과연 은극온후(銀戟溫候) 여대협이셨구려."

여봉선은 냉정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은극온후는 이미 십 년 전에 죽었소!"

이번에야 초류빈은 매우 의아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계속 말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구태여 묻지 않아도 그 이유는 여봉선이 말하리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과연 여봉선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은극온후는 이미 죽었으나 여봉선은 죽지 않았소."

초류빈은 계속 침묵을 지켰다. 그는 이 한 마디의 진실한 뜻을 알기 위해서 골몰했다.

여봉선은 원래부터 매우 거만한 사람이었다. 전날 백요생은 자기의 병기보에다 여봉선이 쓰는 무기 은극을 이 세상에서 다섯 번째로 이름난 것이라고 기록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것을 보았다면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했을 테지만 여봉선은 그것을 일생의 치욕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여봉선은 절대로 남의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봉선도 백요생이 절대 자기를 잘못 보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여봉선은 백요생의 일로 인하여 자기를 파괴시키고 대신 더욱 무서운 무공을 터득했던 것이다.

초류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소. 나는 이미 은극온후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여봉선은 초류빈을 주시하며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여봉선은 십 년 전에 죽었다가 오늘에서야 부활한 것이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 여대협을 다시 부활하게 만들었소?"

여봉선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이어 그는 그 손을 식탁 위에다 내려 놓았다.

"나로 하여금 다시 부활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이 손이오."

보통 사람이 보기에는 별로 특이한 손이 아닌 것 같았다. 단지 손가락이 길고 손톱이 깨끗하며 피부도 매우 매끄럽고 또 가늘었다. 이런 고귀한 것은 여봉선의 기질과 매우 부합이 잘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자세히 그리고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틀림없이 보통 손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손의 엄지와 중지 그리고 식지의 피부 색깔이 약간 다르다는 것이다. 이 세 손가락도 역시 피부가 희고 가늘었으나 특이한 광채가 번뜩이고 있었다. 이 손가락은 살과 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종의 괴상한 금속으로 만든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세 개의 손가락은 분명히 그의 손에서 자라고 있었다. 피가 흐르고 힘줄로 이루어진 다른 두 손가락 사이에 어째서 세 개의 인조 손가락이 자라고 있는 것일까.

여봉선은 자기의 손가락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길게 탄식을 내뿜었다.

"다만 오늘날에 와 한스러운 것이 있다면 백요생이 이미 죽어 버렸다는 것이오."

여봉선은 자기의 무기를 이 세상에서 다섯 번째로 뛰어난 무기로 기록한 것에 대해 오늘날 무엇을 따지고 싶은 게 있는 것일까.

초류빈은 조용히 물었다.

"그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무엇을 어떻게 할 셈이었소?"

여봉선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역력했다.

"그가 만약 죽지 않았다면 손가락도 병기로 칠 수 있느냐고 물어볼 생각이었소."

"내 오늘에서야 겨우 남이 얘기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구려."

"무슨 뜻이오?"

초류빈은 몇 번 눈을 깜박거렸다.

"그저 살인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기(利器)라고 한 것이오."

"....."

"그저 살인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손이라도 병기일 뿐만 아니라 이기도 될 수 있는 것이오."

여봉선은 생각에 잠겨 한참 동안 아무런 거동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 그의 엄지와 식지, 중지 세 손가락은 견고한 상을 꿰뚫고 있었다. 한데 놀랍게도 그 딱딱한 박달나무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술이 가득차 있던 술잔의 술도 조금도 넘치지 않았다.

그가 상을 꿰뚫는 것은 마치 예리하고 날렵한 칼로 두부를 자르는 것 같았다.

여봉선은 그제야 천천히 입을 떼었다.

"만약 이 손도 병기로 칠 수 있다면 병기보에 몇 번째로 기록될는지 모르겠소."

"지금은 아직 무엇이라 대꾸할 수가 없구려."

여봉선의 얼굴이 위로 쳐들어졌다.

"무엇 때문이오?"

"왜냐하면 그 병기를 상대하는 것이 살이 아니라 상이기 때문이오."

여봉선은 갑자기 후후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매우 오만스럽고 또 냉혹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상과 별다름이 없는 것 같소."

"뭐라고?"

여봉선은 침을 삼킨 후 천천히 입을 떼었다.

"그렇지만 물론 몇 사람은 예외요."

"몇 사람이오?"

여봉선은 냉랭하게 소리쳤다.

"나는 본래 여섯 명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단지 네 명 밖엔 없소."

여봉선은 의미있게 낭천을 쳐다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이유는...곽숭양은 이미 죽었고 또 한 사람은 비록 살아 있기는 하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오."

이때 낭천은 여봉선과 등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런 표정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 낭천의 표정이 시퍼렇게 변했다. 아마도 여봉선의 말뜻을 이미 알아차린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초류빈이 웃으며 얼른 그의 말을 뒤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부활할 거요. 십 년의 세월까지는 필요없이 말이오."

여봉선은 잔인할 만큼 차갑게 웃었다.

"그렇게는 안 될 거요."

초류빈은 눈을 크게 떴다.

"당신이 부활을 하는데 남은 왜 못한다는 거요?"

"그것은 다르오."

"뭐가 다르다는 말이오?"

여봉선은 냉랭하게 소리쳤다.

"그 이유는 이렇소. 내 죽음은 여인의 손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마음 또한 죽지 않았기 때문이오."

챙―

순간 날카로운 금속성이 귀를 째듯 터지더니 술잔이 박살이 났다. 그러나 낭천은 여전히 조용히 앉아 있었고 그림처럼 움직이지도 않았다.

여봉선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시선을 계속 초류빈에게 주었다.

"내가 이번에 나온 건 바로 그 네 사람을 찾아 나의 손가락이 병기인가 아닌가를 증명해 보기 위해서요. 그래서 나는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요."

초류빈은 일시 무엇이라 말을 못하고 한참 머뭇거리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꼭 증명을 해 보아야겠소?"

여봉선의 두 눈에서 신광이 번뜩였다.

"난 꼭 해야겠소."

"도대체 누구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은 거요?"

"나 자신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소"

초류빈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맞았소. 이 세상에 그 누구라도 다 속일 수가 있지만 자기 자신은 결코 속일 수 없소."

이때 여봉선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자, 그럼 밖에서 당신을 기다리겠소."

만두 가게에 있던 손님들은 어느 새 다 가 버리고 없었다. 설영령은 입술을 깨물고 있었는데 놀라서 정신이 나가 버린 것 같았다. 초류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설영령은 그의 옷깃을 잡고 나직이 말했다.

"꼭 나갈 건가요?"

초류빈은 씁쓸하게 웃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많은 일들이 한 번쯤은 마주쳐야 하는 일이며 또 영원히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초류빈의 눈길이 천천히 낭천에게 향했다. 그래도 낭천은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여봉선은 이미 문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이때 낭천이 갑자기 소리쳤다.

"잠깐!"

여봉선은 걸음을 멈추었으나 몸을 돌리지도 않은 채 싸늘하게 웃었다.

"당신도 할 말이 있소?"

"그렇소. 나도 한 가지 일을 증명해 주고 싶소."

"뭘 증명하겠다는 거요?"

낭천은 아직도 자기 손에 깨진 술잔이 있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먹을 으스러져라 쥐었다. 선혈이 한방울 한방울씩 그의 손에서 떨어져 탁상을 적셨다. 그리고 한마디 한마디 분명히 말했다.

"난 다만 그저 내가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 증명을 하고 싶을 뿐이오."

순간 여봉선이 몸을 홱 돌렸다. 그는 마치 이제야 처음으로 이 낭천이라는 인간을 본 것 같았다. 그러나 여봉선의 눈초리는 점차 날카로워지고 입가에도 냉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좋소. 내 기다리겠소!"

묘지(墓地)― 무수한 영혼들이 잠을 자며 이미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을 인생의 무상함이 이곳에 존재해 있다.

강호에는 거의 날이면 날마다 결투가 벌어졌다.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각종의 다른 이유들 때문에 갖가지 틀린 방식으로 결투를 벌였다. 그렇지만 결투를 벌이는 장소는 그저 몇 군데 밖에는 없었다.

황야가 아니면 깊은 숲 속 그리고 황폐하고 으슥한 묘지.

그리고 강호인들은 십중팔구 목숨을 건 혈투라면 반드시 이런 곳을 택하고는 했다. 마치 이런 곳은 예로부터 죽음을 상징하고 있는 곳처럼.

어느덧 밤은 점차 깊어가고 뿌연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희뿌연 어둠 속에 서 있는 여봉선, 흰 장삼은 마치 눈과 같이 희었고 조용히 굳은 듯 회색 묘패 앞에 서 있었다.

희미한 안개 속에 비치는 그 모습을 보니 마치 지옥에서 온 사자가 죽음의 신호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 같았다.

설영령은 초류빈을 의지하고 그곳에 섰다. 그러한 그녀의 전신은 주체할 수 없도록 떨리고 있었다. 추워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무서워서 그런 것일까.

이때 낭천이 싸늘하게 입을 떼었다.

"당신은 좀 물러서시오!"

"저...저 말인가요?"

"그렇소. 바로 당신이오."

설영령은 입술을 깨물며 초류빈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초류빈의 눈빛은 그녀 가까이가 아니라 매우 멀리에 있었다.

초류빈의 마음이 이미 멀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안개가 너무 짙기 때문일까. 설영령은 초류빈의 눈에서도 동조의 빛을 발견하지 못하자 고개를 숙이며 슬픈 듯 말했다.

"당신들이 하는 말을 저는 들을 수가 없다는 건가요?"

낭천은 다시 싸늘하게 소리쳤다.

"당신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사람이 와도 들을 수 없는 것이오!"

초류빈이 탄식과 함께 말을 꺼냈다.

"영령, 남이 오랫동안 말동무가 되어 주었으면 너도 최소한 같이 있어 줘야 하지 않겠느냐?"

설영령은 고개를 숙이고 멍청하게 서 있다가 갑자기 높은 어조로 소리쳤다.

"저는 정말 추호도 이곳에 남아 있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또 전혀 오고 싶지도 않았고요.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서로 죽이는 것밖에 모르죠. 서로 죽이고 찢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물론 당신들도 모를 거예요. 만약 꼭 이래야만 영웅이 된다면 이 천하에 있는 영웅들이 한꺼번에 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요!"

초류빈과 낭천 그리고 여봉선은 아무 말없이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가 재빠른 다람쥐처럼 앞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

낭천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녀의 발자국소리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고개를 들어 초류빈을 바라보았다.

"저는 이 때까지 한 번도 당신에게 요구한 적이 없었지요?"

"자네는 그 누구에게도 요구한 적이 없었네."

"하지만 지금 단 한 가지 요구할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낭천은 이빨이 으스러져라 악물었다.

"이번엔 제발 무슨 일이 있든지 저를 막지 말고 저를 그냥 내버려 둬 주십시오. 그런데 당신이 만약 출수를 한다면 저는 죽어 버리고 말겠습니다."

순간, 초류빈의 얼굴 근육이 괴로움으로 인해 경련이 일었다.

"그러나 자넨 결코 이렇게 할 필요가 없네."

"아닙니다. 저는 꼭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게 말하는 낭천의 얼굴은 초류빈보다 더욱 괴로운 사람 같았다.

"그 이유는 여봉선의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이상 이렇게 나가다간 설사 제가 살아 있다고 한들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때문에 저는 절대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습니다."

초류빈이 놀란 어조로 반문했다.

"기회라고?"

낭천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만약 제가 부활을 하고 다시 태어난다면 이것이 저의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럼 이후엔 절대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말인가?"

낭천은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후엔 아무리 좋은 기회가 있다고 하더라도 저는...오늘 만약 이 용기를 잃어버린다면 이후에도 영원히 용기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커다란 타격을 받으면 침울해진다. 그런데 그 침울이 오래 지속되고 보면 아무리 의지가 굳은 사람이라도 자연히 약해지며 결국 또 용기가 사라지고 만다.

초류빈은 낭천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느끼고 있었으므로 일시 아무 말도 못하다가 한참 후에야 탄식을 토해냈다.

"자네의 뜻은 알겠네. 하지만....."

낭천은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챘다.

"물론 저도 저의 동작이 느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 이 년 동안 저는 이미 저의 신법이 점차 둔해져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전의 낭천의 모습을 조금밖에 찾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저 자네의 결심만 확고한다면 모든 것은 다시 회복할 수가 있네. 그러나 지금은 아직 그 때가 아닐세."

낭천은 강하게 그의 말을 부정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지금이라고? 무엇 때문인가?"

낭천은 천천히 꼭 쥐고 있던 손바닥을 폈다. 그의 손은 완전히 선혈로 물들어 있었고 술잔의 깨진 조각들이 살에 박혀 있었다.

낭천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저는 육체의 고통이 마음의 번뇌를 감소시켜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또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맑게 하고 영민하게 만든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의 말은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고통이란 원래부터 사람의 심중을 자극시켜 줄 수 있는 까닭에 사람으로 하여금 반응을 빠르게 만들고 잠재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달리고 있는 말에 채찍질을 가하면 더욱 빨리 달리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인 것이다. 그리고 부상을 당한 야수는 평상시보다 더욱 맹렬해지는 것이다.

초류빈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이렇게 물었다.

"자신 있는가?"

"제가 자신이 없어 보입니까?"

초류빈은 활짝 웃더니 힘껏 그의 어깨를 쳤다.

"좋네, 그럼 가 보게."

그러나 낭천은 약간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아까 그 처녀는...누굽니까?"

"이름은 영령이라 하는데 그녀는 매우 가련한 처지라네."

낭천은 무섭게 눈을 빛냈다.

"그러나 저는 그녀가 거짓말을 잘한다는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녀는 정말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닙니다. 그녀가 기다렸던 것은 아마 다른 원인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초류빈은 영문을 몰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낭천은 일말의 정도 없는 어투로 계속 이었다.

"만약 그녀가 진정으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분명히 당신을 무척 염려해 주었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낭천은 다시 말을 가로챘다.

"지금 당신의 몰골은 그 누가 보더라도 많은 고초를 겪은 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전혀 어찌 된 일인지 당신에게 묻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행색에 대해선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녀에겐 물어볼 기회가 없었는지도 모르네."

낭천은 사납게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한 여인이 진정으로 한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절대로 기회 같은 건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초류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지금 자넨 내가 그녀에게 속아넘어 갈까 봐 그러는 건가?"

낭천은 초류빈의 그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저는 다만 그녀의 말이 전부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초류빈은 싱긋 웃었다.

"자네가 만약 좀더 즐겁게 살고 싶다면 여인들로 하여금 진지한 말을 하게끔 만들어야 하네."

낭천은 강하게 반박했다.

"그렇다면 모든 여인들이 다 거짓말을 한다는 말씀입니까?"

"자네가 만약 총명한 사람이라면 이후부터는 절대 정면에서 여인의 거짓말을 따지지 말게. 설사 자네가 알아낸다 하더라도 그녀에겐 더 좋은 해명 방법이 있기 때문이네. 설사 자네가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녀는 절대 자기의 말이 거짓이라고 시인을 하지 않을 걸세."

초뷰빈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다시 이었다.

"그래서 만약 거짓말을 잘하는 여인을 만나면 고의로 믿는 척하는 것일세.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또다른 고난을 맞아들일 걸세."

낭천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 한참 동안 초류빈을 주시했다.

그가 대답할 말을 잃고 있자 초류빈은 이렇게 물었다.

"뭐 또 물어볼 말이 있는가?"

"으하하하...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이미 당신이 알고 있기 때문에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낭천은 우렁차게 웃음을 터뜨리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초류빈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더할 수 없는 기쁨에 떨었다. 이 의지가 강한 청년은 결코 쓰러지지 않으리라.

그리고 이번에 비교적 많은 말을 했지만 한 번도 설소하의 말을 꺼낸 적은 없었다. 그러면 결론은 무엇인가. 여인의 애정도 결코 한 남자의 모든 생명까지 다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낭천은 과연 사내대장부였다. 사내대장부가 자고로 자기가 사는 것이 수치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느낀다면 영원히 사랑하는 여인을 만날 용기가 없는 것이며, 천하를 떠돌아다니는 중에도 언제나 죽을 준비가 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이미 그 사랑하는 여인을 볼 면목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낭천이 과연 여봉선을 이길 수 있을까. 만약 이번에 실패를 한다면 설사 여봉선이 그를 살려준다 하더라도 그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초류빈은 이런 걱정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다가 허리를 굽히고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피를 토했다.

여봉선은 아무 말없이 아직도 비석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 사람은 과연 참을성이 많았다. 참을성이 있는 자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무서운 적이다.

낭천은 선혈로 붉게 물든 손을 옷에다 닦았다. 피가 닦여지자 깨진 술잔 조각이 더욱 그의 살로 깊이 들어가 박혔다. 선혈은 이처럼 희미한 밤에도 여전히 붉게 보였다. 이 선혈만이 사람에게 원시의 야성을 드러내게 만든다.

정욕과 원수, 물론 다른 것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 선연한 피보다 더 충동적이고 직접적인 것은 없었다.

낭천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 것 같았다.

"네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너의 적을 죽여야 한다!"

여봉선은 그가 점차 접근해 오는 것을 보고 일종의 말할 수 없는 압력을 느꼈다. 여봉선은 이때 자기의 앞으로 걸어오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한 마리 야수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부상당한 한 마리 야수!

적과 친구간의 분별은 바로 생과 사의 분별에 있다. 만약 너를 죽이려는 사람이 있다면 너는 꼭 그를 죽여야 한다. 이 순간에는 결코 선택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존의 법칙이었다. 다시 말해서 무림의 법칙이기도 했다. 때문에 어떤 너그러움도 어떤 곳에서든지 실질적인 건 못된다.

피는 흘렀다. 쉴새없이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낭천의 모든 얼굴 근육은 고통 때문에 떨리고 있었지만 그의 손은 점차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그의 눈빛도 점점 냉혹해졌다.

여봉선은 낭천이 어떻게 해서 갑자기 이렇게 변했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여봉선은 낭천의 검법을 잘 알고 있었다. 낭천의 검법의 무서운 점은 빠름과 잔인함이 아니고 느림의 정확성이었다.

낭천이 만약 출수해서 사람을 죽인다면 최소한 칠 성의 공력이 있어야만 출수할 수가 있다. 그래서 그는 기다려야만 했다. 상대방이 허점을 노출시키고 상대방이 자기에게 기회를 주기만을 기다렸다.

여봉선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욱 오래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여봉선은 이미 낭천에게 기회를 주지 않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여봉선은 아무렇게나 그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에 온몸의 모든 곳이 허점인 것같이 보였다.

때문에 낭천의 검이 어느 부분이라도 마음대로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허점이 너무 많아서 결국은 허점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여봉선의 온몸이 이미 공령(空靈)이 되어 버렸다. 이 공령이라는 두 글자는 곧 무학의 최고 경지이기도 했다.

이때 초류빈은 묵묵히 먼 곳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의 눈동자에는 근심의 빛이 가득차 있었다. 초류빈도 누구의 무공이 더 높은지 알 수가 없었다.

더구나 낭천이 그를 이길 수 있는 희망은 전혀 있어 보이지 않았다. 낭천에게는 전혀 출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밤은 더욱 깊어 갔다. 그때 갑자기 묘지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귀화(鬼火)!

서풍이 불고 있었고 여봉선의 얼굴은 그 서쪽을 향해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자 한 점의 귀화가 그 바람을 따라 여봉선의 얼굴로 날아갔다.

그때 여봉선의 깊고 안정돼 있는 눈동자가 갑자기 깜박이더니 왼손을 약간 움직였다. 마치 이 귀화를 없애 버리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참았다. 생사의 결투에 있어 그 어떤 불필요한 동작이라도 모두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여봉선의 손은 비록 움직이지 않았지만 왼팔이 어깨의 근육으로부터 움직여야 한다는 지시를 받아서인지 더 이상 그 멋있는 공령의 자세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결코 좋은 기회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것보다 더 나쁜 기회라도 전혀 기회가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저 기회만 있으면 낭천은 절대 놓치지 않았다.

번쩍!

싸늘한 한망이 번쩍이며 그의 검이 이미 허공에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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