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1일 목요일
57 소이비도 제4권 심리전법
심리전법
어둠이 찾아들자 바람은 더욱더 혹독하게 차가웠다. 주위는 죽은 듯이 고요했고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바람을 이기지 못해 서로 부딪치는 소리만이 처량하게 들려왔다.
한편 정자 위로 올라간 초류빈은 어떻게 됐을까. 손소홍은 한참 동안 아무런 기척이 없자 참지 못하고 뛰어나가 큰소리로 외쳤다.
"위에서 무엇하고 계시지요? 어째서 내려오지 않는 것이죠?"
그러나 정자 위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째 아무 대답이 없을까. 팔각정 위에 무슨 매복이라도 있어 초류빈이 그 독수에 걸린 것이 아닐까.
팔각정 위에 덮인 기와는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한가운데는 금빛 찬란한 색이었다. 그 금색으로 된 정 중앙엔 작은 쇠상자가 있었다.
쇠상자는 보통 철갑으로 아무런 장식도 없고 또 무슨 기관이 설치되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철갑이 어떻게 해서 팔각정 위에 올려진 것일까.
그 철갑 안에는 한줌의 긴 머리카락이 들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별로 특이한 점이 없고 검고 매우 길었다. 향기는 물론 없었지만 악취도 없었다. 그 머리카락은 온 세상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머리카락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초류빈은 어째서 넋을 잃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며 손소홍이 부르는 것도 듣지 못한 것일까. 긴 머리카락은 도대체 어떠한 머리카락일까. 비단 손소홍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초류빈의 안색은 몹시 침중했고 두 눈도 충혈되어 있었다. 손소홍은 지금 초류빈의 그러한 표정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초류빈이 술에 만취되어 있을 때도 그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돌변한 것일까.
머리카락은 정자 안에 있는 돌로 만든 상 위에 올려졌다. 그러나 초류빈은 시종일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그 머리카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손소홍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것은 누구의 머리카락이에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으며 또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이러한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을 터인데 누구의 머리카락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손소홍은 미간을 찌푸린 채 나직하게 말했다.
"머리카락이 이렇게 긴 것으로 보아 여자의 것이 분명하군요."
그녀는 비록 말을 이렇게 했으나 자신의 판단이 정확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 당시엔 남자의 머리카락도 이렇게 길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자신의 신체 모발은 부모님께서 받은 것으로 절대 상하게 해선 안 된다고 모든 사람에게 인식되어 있었다. 그 누구를 막론하고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상하게 하면 그것은 부모에 대한 불효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끔 얘기를 하는 것을 들어보면 여자가 남자로 분장하고 다니다가 긴 머리카락이 두건 밑으로 삐져나오면 그 사람이 필시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얘기를 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른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얘기는 세살 먹은 어린아이나 속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한 것은 사람들이 얘기할 때 꼭 그렇게 할 뿐만 아니라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손소홍은 발을 구르면서 짜증을 부리듯이 말했다.
"어찌 되었던 간에 이것은 사람의 머리카락에 불과한데 이상할 것이 뭐 있겠어요?"
그녀의 뒤를 따라 올라온 손노선생이 헛기침을 하더니 그녀의 말을 받았다.
"있지, 있구 말구!"
손소홍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말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예요?"
손노선생은 약간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상해도 보통 이상한 게 아니다!"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다그치듯 재촉했다.
"어느 점이 이상하다는 거예요?"
손노선생은 하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조용하게 말했다.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 멈추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머리카락이 어떻게 해서 철갑 속에 들어 있느냐? 철갑이 어떻게 해서 정자 위에 놓여졌으며 누가 갖다 놓았단 말이냐? 그리고 무슨 뜻에서 이런 짓을 했단 말이냐? 이 모든 것이 다 이상한 것이다."
그녀는 두 눈을 깜박이면서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노선생은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단정적으로 말했다.
"만약 내 짐작이 틀림없다면 이것은 상관금홍의 수작일 것이다."
손소홍은 아연실색하여 반문했다.
"상관금홍이 했다고요? 그가 뭣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이지요?"
손노선생은 소리없이 웃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것은 초류빈으로 하여금 이 머리카락을 보게 하기 위한 것이지!"
그녀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하지만...하지만....."
손노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자신있게 서서히 말을 꺼냈다.
"그는 초류빈이 이곳 지리를 살피기 위해 올 것이며 꼭 정자 위로 올라올 것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계산해 두고 있었다. 그래서 사전에 와서 철갑을 정자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손소홍은 의구심에 가득찬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하지만 이 머리카락은 뭐지요? 이것을 봐서는 안 될 일이라도 있나요? 그가 이따위 짓을 하는 것은 황당무계한 짓이 아닐까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갑자기 무엇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느꼈다. 상관금홍같이 심계가 뛰어난 위인이 아무 이유도 없이 황당무계한 일을 할 리는 만무한 것이다.
손노선생은 초류빈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 머리카락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소?"
초류빈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이윽고 장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고?"
손노선생은 별안간 움찔 놀라며 황급히 다그쳤다.
"확정할 수 있겠소?"
초류빈은 그가 고함을 치자 몹시 당황해 하였다.
"저는....."
손노선생은 다급한 기색으로 다시 재우쳐 물었다.
"확실하겐 단정할 수 없겠지?"
초류빈이 채 입을 열어 대꾸하기도 전에 손노선생은 계속해서 말했다.
"상관금홍이 이렇게 하는 것은 이 머리카락이 설벽운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며 설벽운은 이미 자신의 수중에 들어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기 위한 것이오. 그래서 당신으로 하여금 심리적으로 불안을 느끼게 하자는 속셈이오. 그런데 거기에 속을 필요가 뭐 있겠소?"
손소홍은 정색을 하고 끼여들었다.
"그래요! 그런데 설낭자가 만약 그의 손에 붙잡혀 있다면 어째서 직접 대면시켜 위협하지 않는 것이죠?"
초류빈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것은 그가 그렇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오. 딴 사람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내게만은 그렇게 할 수가 없을 것이오."
손소홍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급히 반문했다.
"그가 어째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죠?"
초류빈은 쓸쓸하게 웃으며 우울한 빛을 띠었다.
"만약 상관금홍이 이런 수단으로 초류빈을 이겼다는 것을 남들이 알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게 아니오?"
손소홍은 여전히 의구심이 가시지 않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머리카락만 보내온 것이잖아요."
초류빈은 빙그레 웃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수단이 고명하다는 점이오."
손소홍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머리카락이 그녀의 것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초류빈은 이내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어쩌면 그럴는지도 모르오. 그러나 이것은 그 누구도 확정할 수 없는 것이오."
"만약 당신이 이 일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다면 그의 속셈은 .....!"
초류빈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보았소!"
손소홍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은 회의를 느끼고 있는 것이에요. 그는 당신이 회의를 느낀 것이 분명하다고 계산해 두었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이죠. 당신은 그의 이런 속셈을 알면서도 그의 속셈에 걸려들려는 것이에요?"
말을 마친 그녀는 침중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계속 말을 이었다.
"이런 황당무계한 일을 내가 어째서 꼭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초류빈은 쓸쓸하게 웃으며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원래 세상만사가 다 그런 것 아니오? 속는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거기에 속아넘어 가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지사요!"
"그렇소! 만약 누군가가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나도 역시 속게 될 것이오."
손소홍은 뾰루퉁한 표정으로 완강하게 고개를 도리질했다.
"두 분께서 다 속으신다 해도 저만은 속지 않을 것이에요....."
손노선생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볍게 탄식했다.
"사실은 너도 속고 있다. 너는 이 머리카락이 설부인의 것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느냐? 지금 너도 여기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고 있다. 만약 마음이 안정 되지 않은 상태에서 네가 딴 사람과 결투를 한다면 상대의 공격이 너만 못하다 해도 너는 틀림없이 패할 것이다."
손소홍은 입을 삐죽거리다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하지만....."
그녀는 계속 더듬기만 했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관금홍의 목적은 머리카락으로 초류빈의 마음을 흐트러 놓으려는 것이다.
초류빈이 믿건 믿지 않건 혹은 회의를 느끼던 말던 초류빈이 이 일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면 상관금홍은 목적이 달성되는 셈이다. 그리고 초류빈이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설벽운, 그녀는 초류빈이 꿈에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이 머리카락이 그녀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의 가슴이 절로 아프고 심신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금치 못했다.
상관금홍은 설벽운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초류빈의 뇌리에 주입시켜 준 것이다. 문제는 머리카락이 누구의 것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초류빈이 어떠한 사람이냐에 있는 것이다.
상관금홍은 초류빈의 심정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그의 심장에다 정확하게 화살을 쏜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에게 이러한 화살을 사용했다면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초류빈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많이 또 이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상관금홍의 무서운 점이었다.
상관금홍은 어떠한 수단을 써야 효과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어떤 특수한 인물에게 쓰는 수단이 남들에게는 황당무계하다고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것이 그 특수한 인물에게는 가장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는 병법에 있는 공심위상(攻心爲上)이라는 전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 사람의 마음을 공격하는 것은 최상의 전법이며 그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초류빈은 난간에 등을 기댄 채 될 수 있는 대로 다리를 편히 펴고 바닥에 앉았다. 그는 비록 아무 말없이 있었지만 손노선생과 손소홍은 그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초류빈은 지금 홍운장으로 가 그곳에 설벽운이 있는지 확인해 보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나긴 여행을 하기 위해선 우선 피로를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편안하게 다리를 펴고 앉은 것이다. 이것은 그의 습관이었고 또 매우 좋은 버릇이었다.
손소홍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으며 너무 힘껏 깨물었기 때문에 입술이 잘려져 나가는 듯한 아픔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이제 보니 그는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구나! 뿐만 아니라 그녀를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구나. 그녀가 그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너무나도 커 나는 비비고 들어갈 틈새도 없겠구나.'
이렇게 생각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서러움이 북받쳐 눈시울을 붉혔다. 잠시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나직하게 물었다.
"당신은 꼭 가실 건가요?"
초류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느 땐 대답하지 않는 것이 바로 대답일 수도 있다.
손노선생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물으나 마나다. 그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손소홍은 어느 새 초조한 기색을 띠며 냉큼 말을 받았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그곳에 없다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초류빈은 정자 밖의 야색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가 있든 없든 가봐야 하오! 그런 후에야 어떻게 한다는 것을 결정할 수 있겠소."
손소홍은 애수의 빛이 가득찬 표정으로 걱정스럽게 말했다.
"당신이 만약 그곳에 간다면 그것은 상관금홍의 계획대로 따르게 되는 것이에요."
초류빈은 의아한 빛을 띠며 그녀를 주시했다.
"그게 무슨 뜻이오?"
손소홍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서서히 말을 꺼냈다.
"그가 이렇게 하는 가장 큰 목적은 바로 당신으로 하여금 흥운장으로 가게 하는 데 있는 것이에요. 결투 날은 내일 모레로써 이곳에서 흥운장까지는 그리 가깝지 않아요. 설사 이틀 내로 다녀오실 수 있다 해도 체력에 큰 소모를 가져오게 돼요. 반대로 상관금홍은 이틀 사이에 충분한 휴식을 취할 것이에요."
말을 중단한 그녀는 초류빈을 한동안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나서 계속 말했다.
"당신이 이틀 동안 뛰어다닌 후 그를 상대로 싸움을 한다면 그 승부는 짐작이 가고도 남아요. 게다가 그는 어쩌면 매복까지 설치할 가능성도 많이 있어요."
초류빈은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그녀의 말이 끝나자 확고한 결심이 선 듯 단호하게 말했다.
"어떤 일에 있어서 해서는 안 되는 줄 뻔히 알고 있지만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소."
손소홍은 내심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며 침체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가시게 되면 자신의 생명을 걸고 모험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당신은 그녀가 그토록 소중한가요? 당신의 생명보다도 더욱더 중요한가요?"
초류빈은 다시 침묵을 지키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손소홍은 눈물이 가득 고여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아 급히 그의 시선을 피했다.
초류빈은 그러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분명하게 말했다.
"만약 낭자가 내 입장이 된다면 꼭 그렇게 할 것이며, 그녀가 만약 낭자라면 나도 낭자에 대해서 이렇게 대할 것이오."
손소홍은 그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한 듯이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두 눈에 고인 눈물은 소리없이 흘러내렸다.
여자가 만약 한 남자를 정말 사랑하게 된다면 그 여자는 자신이 그 남자의 유일한 여자이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제이, 제삼의 여자가 끼여드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찌 되었던 간에 초류빈의 마음속에 그녀가 자리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녀는 멍하니 서 있는 채 움직일 줄을 몰랐으며 지금의 심정이 달콤한지 아니면 쓴 것인지에 대해 알 수 없었다.
손노선생은 그녀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은 그가 꼭 해야 할 일이니 가도록 두어라!"
손소홍은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갑자기 웃었다. 그 웃음이 비록 쓰디쓴 것이었지만 그녀는 웃었다.
그녀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처량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저는 제가 바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어요. 그는 설부인을 저보다 일찍 알았으며 제가 그를 만나기 이전에 그들 사이엔 이미 많은 일이 생겼어요. 저는 나중에서야 그 틈바구니에 끼게 된 것이에요. 그러므로 화를 낼 사람은 그녀지 제가 아니에요."
손노선생은 그녀를 바라보며 자애롭게 웃었다.
"만약 한 사람이 자기가 바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점점 총명해지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손소홍은 처연한 미소를 띠며 야무지게 대꾸했다.
"하지만 제가 꼭 해야 할 일이 있겠어요."
손노선생은 의아한 빛을 띠며 눈을 깜박거렸다.
"무슨 일이냐?"
손소홍은 초류빈을 주시한 채 또박또박 말했다.
"저도 그와 같이 가겠어요!"
손노선생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도 좋다! 하지만....."
말꼬리를 흐린 그는 초류빈을 바라보았다.
초류빈은 소리없이 웃으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가 꼭 가겠다고 하면 물론 꼭 가야 되겠지요."
손노선생은 실소를 터뜨리며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나는 예순 살이 되어서야 여자와 다투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는데 당신은 나보다 더 일찍 깨우친 모양이구려!"
초류빈은 바닥에서 일어나 빙그레 웃으며 손노선생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니 오늘밤 즉시 떠납시다. 그런데 낭자는....."
그녀는 정색을 하고 급히 말을 가로챘다.
"당신은 여자라고 해서 모두 다 말만 앞세운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어떤 여자는 남자보다 더욱더 솔직하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손노선생은 피식 웃으며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그곳에 가서 둘째 숙부님께 그곳 동정을 여쭈어 보는 것을 잊지 마라!"
손소홍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이렇게 대답한 그녀는 초류빈을 바라보면서 계속 말했다.
"그가 만약 저와 같이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저는 둘째 숙부네 집에서 기다리겠어요!"
초류빈은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 궁금한 빛을 띠며 초류빈을 향해 물었다.
"손이협께선 흥운장에서 십삼 년 동안이나 계셨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지요?"
그는 이 일에 대해서 항상 이상하다고 생각해 왔다. 십삼 년 전이라면 그가 막 집을 떠날 때였다.
그때부터 손꼽추가 그곳에 있었는데 그 용의가 무엇인지 초류빈으로써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손꼽추는 초가와 아무런 왕래가 없을 뿐만 아니라 호천강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리고 설벽운, 그녀는 고아로서 어렸을 적부터 초가로 들어와 초류빈의 부친에 의해서 키워졌다. 그녀는 본래부터 내성적인 사람으로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다른 곳에 간 적이 지극히 드물었다.
그러한 그녀인지라 강호 중의 사람들과는 어떤 왕래도 있을 수 없었다. 만약 손꼽추가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고 그러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그 사람은 손꼽추에게 무슨 지시를 내렸을까. 만약 세상에 이 진상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손노선생뿐이다.
초류빈은 손노선생이 그 비밀에 대해 말해 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는 실망했다.
손노선생은 연신 담배만 피우고 있을 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손소홍은 초류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손노선생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저는 한 가지 일에 대해서 몹시 이상하게 생각한 것이 있었어요."
초류빈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손소홍은 눈을 반짝이며 초류빈을 마주 쳐다보았다.
"호천강이 상관금홍 앞에서 자기 손을 끊은 것에 대해서 당신은 알고 계시나요?"
초류빈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매우 특이한 아이라 그가 하는 일도 매우 특이하오."
손소홍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
"그가 그러한 일을 한 것에 대해 당신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초류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소홍은 가볍게 기침을 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는 그 당시에 상관금홍이 살기를 품고 있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우선 선수를 쳐 상관금홍으로 하여금 할 말이 없도록 유도한 것이지요.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비단 자신의 생명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담력이 있고 효심이 지극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했어요. 그리고 더욱 중시하도록 했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손노선생을 물끄러미 주시하다가 다시 초류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매우 잘한 짓이에요. 하지만 악독스러운 짓이지요. 그리고 그는 본성이 총명한 데다 또 악독하기 때문에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어요."
초류빈은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무엇이 이상하다는 것이오?"
손소홍은 초류빈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조용하게 말했다.
"그의 공력이 당신에 의해서 제거되어 체력이 보통 사람보다 더 쇠약해졌다는데 사실인가요?"
초류빈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일에 대해서 나는 잘한 것인지 아니면 잘못한 것인지 아직도 알 수 없소."
손소홍은 과거를 생각하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사람의 뼈가 강하기가 설사 쇠처럼 강하다 해도 자신의 손을 단칼에 절단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에요. 오직 한 가지 무쇠를 두부 자르듯이 할 수 있는 예리한 보검이라면 또 모르지요!"
초류빈은 약간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그럼 보검이 아니란 말이오?"
손소홍은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 아니에요!"
초류빈은 약간 회의의 빛을 띠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 호천강은 단칼에 자신의 손을 절단하지 않았소?"
손소홍은 뜻 모를 미소를 띠며 나직이 대답했다.
"그는 별로 힘을 쓰는 것 같지도 않았어요."
초류빈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낭자는 과연 나보다 세심하구려. 낭자의 말씀을 들으니 나 역시 이상하게 느껴지는구려."
손소홍은 피식 웃으며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보통 사람 같으면 손이 잘려지면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잠시 기절했을 것이에요."
초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경이의 빛을 띠고 말했다.
"그렇소! 설사 건강한 사나이라 해도 견디지 못할 것이오. 심후한 공력이 내재해 있지 않는 한 그건 극히 어려운 일이오."
손소홍은 의혹이 짙은 표정으로 초류빈을 빤히 쳐다보았다.
"더구나 호천강은 공력이 제거되고 체력이 극히 쇠약한 어린아이에 불과한데 어떻게 견딜 수가 있겠어요?"
초류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무엇인가를 느꼈는지 눈이 반짝 빛났다.
손소홍은 초류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계속 말했다.
"그는 비단 견뎌냈을 뿐만 아니라 태연하게 얘기까지 했으며 또 자신의 잘려진 팔을 주워올렸어요. 무공이 전혀 없는 사람으로서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초류빈은 가벼운 신음을 토하며 서서히 말을 꺼냈다.
"낭자의 뜻은...그의 무공은 이미 회복되었다는 것이오? 아니면 평상시 쇠약했던 모습은 모두 거짓이었단 말이오?"
손소홍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초류빈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띠었다.
"내가 그의 무공을 제거할 때 매우 비범한 수법을 사용했으므로 무공이 회복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오. 다만 한 가지."
말꼬리를 흐린 그는 잠시 멈추더니 손소홍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단 한 가지 흥운장에 전설로 내려오던 절세의 무공비급이 숨겨져 있다는데 무의식 중에 호천강이 그것을 얻었다면 경우가 다를 것이오."
손소홍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초류빈은 심중에 짚히는 바가 있는지 손노선생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손이협께서 그곳을 십여 년 동안이나 지키고 계셨던 것은 그 무공비급 때문이 아닐까요?"
손소홍은 여전히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그것에 대해선 모르겠어요."
이때, 손노선생이 느닷없이 파안대소를 하며 이들 사이에 끼여들었다.
"하하하...그에게 가르쳐 줄 생각이 있다면 속시원하게 이야기해 줄 것이지 뭘 그리 망설이고 있는 것이냐?"
손소홍은 고개를 숙인 채 손노선생을 힐끗 쳐다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욕 먹을까 봐 무서워요!"
손노선생은 다시 호탕하게 웃으면서 초류빈을 바라보았다.
"하하하...만약 여자로 하여금 비밀을 지키게 하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소! 그것은 여자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오! 하하하....."
손소홍은 입을 삐죽이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손노선생은 히죽히죽 웃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너는 아주 고명한 수단을 부렸다. 네가 직접 얘기하지 않고 나로 하여금 대신 얘기하게 하다니...정말 깜찍하구나!"
손소홍은 뾰로퉁해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설사 제가 얘기했다 해도 그에게만 얘기해 줬을 것이에요. 그는 남도 아니잖아요."
'그는 남이 아니다!'
초류빈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의 심정이 어떠한 것인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초류빈은 이 여자에게 또 빚을 졌고 그 빚을 영원히 갚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남이 아니라고 얘기한 것은 그 남자를 따르겠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남자는 말과 같이 네 다리가 달려 있다 해도 그녀를 따돌릴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손노선생은 갑자기 웃음을 거두고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말했다.
"흥운장에 무공비급이 숨겨져 있다고 하는 것은 유언비어가 아닌 사실이오!"
일순, 초류빈은 안색이 급변하며 다그쳐 물었다.
"누구의 무공비급입니까? 제가 왜 모르고 있었지요?"
손노선생은 담뱃대에 불을 붙여 몇 모금 빨면서 천천히 말을 받았다.
"당신은 왕인화(王燐花)라는 사람에 대해 들은 적이 있소?"
초류빈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급히 말했다.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당금 천하에 어디 있겠습니까?"
손노선생은 다시 담배를 몇 모금 빨고 난 후 말을 이었다.
"왕인화는 심랑(沈浪) 심대협의 원수였소. 그러나 나중엔 심대협과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소. 그 사람은 원래 정파도 사파도 아닌 사람이었소. 무슨 일을 처리하든 경우가 밝았고 또 의리도 있는 사람이오. 그래서 그가 비록 심대협을 여러 차례에 걸쳐 해쳤으나 심대협은 그럴 적마다 그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었소."
초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듣자 하니 왕인화와 심대협은 부부가 되어 멀리 새외로 나가 편안한 일생을 보내고 있다는데 그것은 오래 전의 일이 아닙니까?"
손노선생은 초류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는 나중에 가서야 심대협에게 감화를 받은 것이오."
손노선생은 장탄식을 한 후 계속 말을 이었다.
"사람을 열 명 죽이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지만 한 사람을 감화시키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오. 이것으로 보아 심대협이 인중지룡이라는 것을 알 수 있소. 당신이 만약 몇 해만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그와 좋은 친구가 됐을 것이오."
초류빈의 두 눈엔 존경의 빛이 떠올랐다. 몇 백 년이 흐른 후에 만약 그의 이름이 남게 된다면 심랑만큼 명예와 존경을 받을 수 있을까?
단연코 초류빈이라면 만인의 존경을 받을 것이며 그 존경이 심랑에 비해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손노선생은 계속해서 말했다.
"심대협이 비록 인중지룡이기는 하지만 왕인화도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심대협의 적수가 될 수 있었겠소."
총명함과 기질이 서로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라면 친구가 될지언정 적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상관금홍만이 초류빈의 적이 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초류빈은 경이의 빛을 띠며 조용히 말했다.
"듣자하니 그 사람은 무림 중에서 유일무이한 기재라고 하더군요. 문무를 겸비하고 학식이 광활하여 그를 따를 자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손노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소! 그 사람은 비단 역학술(易學術)에 뛰어난 조예가 있을 뿐만 아니라 바둑, 회화, 독서, 음악 등 정서적인 면에서도 따를 자가 없소. 거기에다가 의술에도 정통하고 역용술에도 일가견이 있소. 그의 지식은 열 사람이 배워도 다 배우지 못할 것을 그는 혼자서 모두 다 배운 것이오."
손노선생은 꿈을 꾸듯 몽롱한 시선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는 야심이 너무나 커, 보는 것마다 다 배우려고 하다 보니 무공이 최고봉에 달하지 못했던 것이오.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총명한 재질로써 어찌 심대협에게 패했겠소."
초류빈은 갑자기 낭천의 모습이 떠올랐다.
낭천의 총명한 재질은 왕인화에 비해서 어떠한가.
낭천은 오로지 검술 한 가지에 대해서만 배우고 연마해 왔다. 그는 본시 자신의 검술을 전무후무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아무도 따를 수 없도록 최고 경지의 검술로 만들 수 있었으나 총명한 그는 어떻게 되었는가. 초류빈은 장탄식을 하며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손노선생은 계속해서 말했다.
"왕인화는 개과 천선한 후에 자신이 과거에 배웠던 것이 너무나 복잡할 뿐만 아니라 사악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고 인화보감(燐花寶鑑)을 태워 버리려고 했었소."
초류빈은 호기심이 가득찬 표정으로 다그쳐 물었다.
"인화보감이란 어떤 것입니까?"
손노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초류빈을 쳐다보았다.
"인화보감이란 그가 일생 동안 배운 것을 기록해 놓은 책이지!"
초류빈은 의아한 빛을 띠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그것을 어째서 태워 없애려고 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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