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1일 목요일
50 소이비도 제4권 자초한 곤경
자초한 곤경
그녀는 낭천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침울하게 말했다.
"저는 당신이 저보다도 그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요." 낭천은 입을 야무지게 다문 채 무표정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설소하는 수심이 가득찬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어째서 앞뒤를 생각하지 않으시죠? 그는 당신으로 하여금 그를 위해 살인을 하게 하고 있지만 저는 그저 당신이 저를 위해서 살아주기를 원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런데도 제가 그보다 못하다는 것인가요?"
낭천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며 우울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당신하고만 있으면 의기소침해진다고 느끼고 있소. 나는 그의 그러한 생각을 지워버리고 당신과 함께 있으면 더욱더 힘이 난다는 것을 인식시켜야 하겠소."
그녀의 두 눈에서 다시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저는 당신이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때가 많이 있어요." 낭천은 냉혹한 표정으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나의 생각은 매우 단순한 것이오. 그래서 쉽사리 변하지 않는 것이오." 그녀는 애수가 짙게 담긴 시선으로 낭천을 지그시 응시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인가요?"
"그렇소.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오." 그의 대답은 매우 간단했다. 설소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서히 창가로 걸어갔다. 그녀는 창가에 기대며 애처로운 모습으로 창 밖을 바라보았으나 밖에는 아무도 없었고 쥐죽은 듯이 적막했다.
어떠한 생물체이든 간에 그저 이곳에만 오면 그 생물체는 순식간에 비참하게 생명을 잃을 것만 같았다. 이곳에서 가장 진실된 감정은 죽음, 바로 그것이었다.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그리고 창 밖에 있거나 방안에 있거나 간에 수시로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해 오는 것 느낄 수 있었다.
질식할 것만 같은 무거운 침묵이 방안의 공기를 탁하게 만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설소하는 피를 토하듯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과 초류빈 사이의 관계가 상관금홍과 형무명 사이의 관계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게 무슨 소리요?" 그녀는 처량하게 웃으며 서서히 말을 꺼냈다.
"형무명은 지금 완전히 상관금홍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어요. 상관금홍도 물론 그에게 잘 대해 주고 있어요. 지금까지는....."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지금 형무명은 이용가치를 잃고 있어요. 이제 곧 상관금홍에 의해 개처럼 쫓겨날 것이 분명해요. 이러한 결과에 대해 형무명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거예요." 낭천은 냉막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대꾸했다.
"어쩌면 벌써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오."
"만약 그가 결과가 이렇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무엇 때문에 그냥 있는 것이죠?" 낭천은 냉담하게 웃으며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그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일 것이오." 그녀의 두 눈에서 순간적으로 기이한 광채가 번쩍였다.
"그럼 당신은 또 왜 그러시는 것이죠?" 낭천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소하는 겨자를 씹은 듯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초류빈이 당신에게 잘 대해 주는 것은 이 세상에서 당신만이 진정으로 그를 도와주고 있기 때문이에요. 당신을 제외하고 나면 그는 외톨박이가 돼요. 그러나 당신이 그 이용가치를 잃었을 때 그는 혹시 상관금홍이 형무명에게 대하는 것처럼 당신을 대하지 않을까요?"
낭천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갑자기 냉혹한 음성으로 말했다.
"고개를 돌려 나를 보시오." 그의 이 한마디는 매우 느리기는 하였으나 반면에 매우 날카롭고 또 항거할 수 없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낭천, 그는 지금껏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없었다.
설소하는 가슴이 뜨끔해 바싹 긴장하였다.
"고개를 돌리라고요? 무엇 때문이죠?" 낭천은 지극히 냉담한 어조로 분명하게 말했다.
"내 당신에게 두 가지 일에 대해서 말해 줄 것이 있소." 그녀는 여전히 창 밖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얘기라면 이렇게도 들을 수 있어요." 낭천은 찬바람이 일듯한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나를 꼭 보아야겠소. 어떤 말은 귀로 들을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아야 만이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있소."
설소하는 두 손을 꼭 쥐며 서서히 고개를 돌려 낭천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낭천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이미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낭천의 두 눈은 상관금홍의 눈과 같이 변해 있었다. 만약 한 사람의 눈이 이렇게 변했다면 그가 어떠한 말을 하든 모두 다 들어야 하며 절대 거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필시 후회해야 할 것이다.
이 순간에서야 그녀는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원래 낭천은 완전히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러한 생각이 잘못된 것이며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이제야 알았다.
낭천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그러나 남자의 심장 속엔 사랑이나 생명보다도 더욱더 중요한 일이 있다. 낭천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다시피 했으나 그것은 그녀가 그 당시엔 이러한 일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낭천으로 하여금 자신을 위해 죽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로 하여금 이 일을 포기하게 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천 근의 돌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무거운 압박감이 방안을 맴돌자 그녀는 참지 못하고 웃으면서 침묵을 깼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란 게 무엇이에요. 어서 해 보세요." 그녀의 웃음은 매우 감미로웠으나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였다.
낭천은 비할데없이 냉혹한 음성으로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분명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분명하게 말해 두겠소. 똑똑히 기억하시오. 초류빈은 나의 친구요. 나는 그 누구든지 나의 친구를 모독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소."
"그리고 또 뭐가 있죠?" 낭천은 분노서린 음성으로 절규하듯이 말했다.
"당신이 아까 한 말은 비단 나를 경시했을 뿐만이 아니라 형무명까지도 멸시했소."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두 눈엔 경악과 회의의 빛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낭천은 조금 누그러진 음성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가 가는 것은 자신이 가는 것이지 누구에게 쫓겨가는 것이 아니오." 설소하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저는 이해할 수 없어요....."
"굳이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소. 그저 기억해 두기만 하면 되오." 설소하는 고개를 숙이며 음울하게 말을 꺼냈다.
"당신이 한 말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기억해 두겠어요. 하지만 당신도 잊어서는 안 될 일이 있어요. 당신은 직접 말했지만...당신은 저를 사랑하는 마음이 영원히 변치 않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녀가 말꼬리를 흐리자 낭천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마음은 서서히 봄눈 녹듯이 온화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설소하의 몸엔 거대한 흡인력이 있어 그로 하여금 항거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가까이 다가오자 황급히 몸을 피하면서 소리쳤다.
"오늘은 안 돼요....." 낭천은 갑자기 몸이 석상처럼 굳어져 멍한 시선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설소하는 훈훈한 봄날씨처럼 부드럽게 웃으면서 속삭이듯이 말했다.
"오늘은 편히 쉬세요. 제가 옆에서 지켜 드리겠어요. 이제 그만 주무세요." 상관금홍은 방안에 서서 문을 뚫어지게 쏘아보며 굳은 듯이 움직일 줄을 몰랐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가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일까. 문 밖에 있던 수하들은 모두 철수하고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늘밤 누군가가 오니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수하들을 다 물리친 것이다.
상관금홍을 찾아올 사람이 어떠한 인물이기에 그가 이렇게 중시하는 것일까. 상관금홍은 무슨 일을 하든 반드시 모두 목적이 있었다. 그럼 이번의 목적은 무엇일까.
밤이 더욱 깊어져 사방은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낭천은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호흡이 극히 규칙적인 것을 보니 매우 달콤한 잠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 그는 잠을 자지 않았으며 정신이 지극히 맑았다. 아마 지금처럼 정신이 맑은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극도로 피로하지 않은 이상 잠을 절대 자지 않았다. 그러다가 요즈음은 어떻게 된 셈인지 누웠다 하면 곯아떨어졌다.
한데 오늘은 유난히 잠이 오지 않았다. 설소하는 바로 그의 옆에서 규칙적인 호흡으로 포근하게 잠들어 있었다. 낭천이 약간 몸을 돌리기만 하면 그녀의 따스하고 매끄러운 몸을 안을 수가 있었다. 하나 그는 자신을 억제하며 그녀를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는 그녀를 보는 순간 자신의 모든 이상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릴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설소하는 자기를 완전히 믿고 있는데 그가 어찌 그러한 일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여인의 향긋한 체취가 낭천의 마음을 유혹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모든 정신과 인내로써 흥분하는 마음을 억제해 나갔다.
이것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고통, 바로 그것이었다. 욕정, 그것은 인간의 삼대 본능의 하나로써 거센 파도처럼 밀려갔다가 다시 밀려오곤 하는 것이다.
낭천은 이 괴로움을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한 상태에서 잠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소하의 호흡이 조금 거칠어진 것 같았다.
바로 이때, 그녀는 서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샛별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낭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순간, 낭천의 속눈썹이 매우 길다는 것을 발견하고 가만히 손을 들어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순간, 만약 그녀가 정말로 손을 내밀어 눈썹을 만졌다면 이후 낭천은 영원히 그녀의 소유가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를 위해 낭천은 모든 것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그녀는 손을 움츠렸고 온화한 두 눈은 서릿발보다 더 차갑게 변했다.
"주무시나요?" 그녀가 가볍게 불렀으나 낭천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또 눈도 뜨지 않았다. 대답을 하고 눈을 뜰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설소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낭천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침상에서 내려와 조심스럽게 신발을 들었다. 그리고 민첩한 도둑고양이처럼 소리없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렇게 늦은 야밤에 그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순간, 낭천은 송곳으로 심장을 찔리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옛 말에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 세상에선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 가끔 있는 것이다. 낭천은 물론 알고 있으며 그러한 것이 가장 잔인하고 혹독하게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낭천은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문이 열렸다. 상관금홍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웃지 않는 것보다 더욱 잔인했다.
설소하는 문을 조심스럽게 닫더니 문에 기댄 채 상관금홍을 바라보았다.
툭!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신발이 힘없이 떨어졌다.
그녀는 장탄식을 하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미 제가 밖으로 나올 줄 알고 있었군요!" 상관금홍은 음침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녀는 의혹이 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저는 제가 무엇 때문에 이곳으로 왔는지 알 수가 없어요." 상관금홍은 뜻모를 미소를 띠며 간단하게 말했다.
"나는 알고 있다." 설소하는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그치듯 반문했다.
"당신이 알고 있다고요?" 상관금홍은 음흉하게 웃으며 서서히 말을 꺼냈다.
"네가 이곳으로 온 것은 낭천이 네가 상상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 믿음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가 편안하게 그리고 오래도록 살려면 나한테 와야만 한다." 설소하는 미미하게 안색이 변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은...당신은 믿을 수 있나요?" 상관금홍은 득의에 찬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그것은 너 자신이 더 잘 알 것이 아니냐." 이 세상에 믿을 만한 남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 남자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는 완전히 여자가 그 남자를 어떻게 대하느냐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설소하는 요염하게 웃으면서 나긋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군요. 저는 당신으로 하여금 실망하지 않도록 하겠어요." 그녀는 사나이의 간장을 녹일 듯이 교태를 부렸다. 처음에는 입으로 요염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손과 허리로, 다시 다리로.....
그녀는 이미 그 어떤 결심을 굳힌 듯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남자를 사로잡으려고 했다. 그녀는 가장 빠른 속도로 그리고 가장 무서운 무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인의 적나라한 육체만큼 사나이를 휘어잡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고 감히 장담할 수 있다.
특히 설소하와 같은 여인은 더더욱 불가항력의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한데 이상한 것은 상관금홍의 두 눈이 문에서 떨어질 줄을 모르는 것이다. 상관금홍은 그가 보고 있는 방문을 설소하보다 더 아름답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설소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비비 꼬았다.
"저를 안아 주세요. 저는 참을 수가 없어요!" 상관금홍은 그녀의 말대로 그녀를 껴안았다.
그러나 그의 두 눈은 여전히 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바로 이때였다.
펑!
소리와 함께 문이 부서져 나갈 듯이 활짝 열렸다. 이와 동시에 한 사람이 격사되어 나왔으며 그 사람의 전신에선 용암처럼 뜨거운 열기가 발산되어 나왔다. 그것은 분노의 열기인 것이다.
낭천! 지금 이 순간 낭천의 극에 달한 분노를 형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또 상상하지도 못할 것이다.
상관금홍의 입가에 더할 수없이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낭천이 밖으로 나올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단 말인가.
낭천은 상관금홍을 전혀 보지 못한 듯했다. 지금 그의 두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보이는 것은 오직 생각하기조차 싫은 악몽뿐이었다. 그의 전신이 격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설소하는 낭천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세차게 상관금홍의 목을 껴안은 채 소리쳤다.
"남의 방을 방문할 땐 필히 문을 두드려야 한다는 상식적인 예의도 모르나요?" 낭천은 두 주먹을 불끈 쥐더니 문을 힘껏 쳤다.
펑!
귀를 따갑게 하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그 문은 강철로 된 문인지라 오히려 그의 주먹에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는 아픔으로 인해 입술까지 하얗게 변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마음의 아픔보다 더한 아픔이 어디에 있겠는가.
설소하는 경멸하는 표정으로 냉랭하게 말했다.
"이제 보니 당신은 미친 사람이군요?" 낭천의 분노는 드디어 화산처럼 폭발했다.
"이제 보니 너는 이러한 여자였구나!"
설소하는 간드러지게 웃으며 동정하는 투로 말했다.
"호호호...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거예요...사실 저는 이러한 여자예요.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이, 당신이 생각하지 못한 것은 당신이 우둔했기 때문이죠." 그녀는 비웃음이 가득찬 미소를 띠며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이 조금이라도 총명했다면 이곳에 오지 말아야 했어요." 낭천은 절규하듯이 처절하게 소리쳤다.
"나는 이미 이렇게 왔다!" 설소하는 서릿발보다 더욱 차갑게 웃으면서 서성거렸다.
"왔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저를 깨물기라도 할 것인가요? 제가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지요? 당신이 저를 간섭할 수 있나요? 당신은 내 일에 참견할 아무런 자격도 없어요." 낭천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하나 그 눈물은 일순간에 얼음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은 형무명의 눈과 같이 절망의 빛으로 변했다. 이와 함께 그의 얼굴의 피가 다 말라 버린 듯 잿빛으로 변했다. 그는 마치 무덤에서 금방 기어나온 송장처럼 보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등골을 오싹하게 하였다.
"그렇다! 오지 말았어야 했다. 와서는 안 되었다....." 그는 오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온 것이다.
사람들은 어째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그것을 해 놓고선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일까.
낭천 자신도 어떻게 걸어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상관금홍은 줄곧 냉랭하게 그를 주시했다. 그가 밖으로 나가기까지.
설소하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저의 마음은 전부 당신의 소유예요. 이제는 저의 마음을 믿을 수 있겠죠?" 상관금홍은 나무에 못을 박듯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
"못 믿는다!" 이 한마디를 완전히 내뱉기도 전에 그는 어느 새 설소하를 팽개치고는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나갔다.
설소하의 몸은 굳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은 비애도 아니고 분노도 아닌 공포였다. 자신이 완전하게 낭천을 정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역시 이런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지금같이 그 농도가 짙지는 않았다.
'나는 대관절 무엇을 해 왔으며 무엇을 얻었을까? 그 무엇이 정말 의지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것일까.....'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조금 전에 벗었던 옷가지를 주섬주섬 집어 천천히 접더니 침상머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거울 앞으로 걸어가 자신의 알몸을 비춰 보며 가장 달콤한 미소를 짓는 한편 가장 요염한 자태를 취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자기의 원시적인 무기를 시험해 볼 작정이었다. 통로 막바지에 이르는 곳에 문지방이 있었다.
낭천은 도망치듯 그곳까지 달려가 문지방에 걸려 곤두박질과 함께 문 밖에 쓰러졌다. 그는 코를 땅에 처박고 쓰러진 채 움직이지도 않고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 그의 뇌리는 백지장처럼 공허하게 비어 있었다. 그것은 실로 이상한 일이다. 가을은 깊어 건조한 흙 속엔 낙엽의 내음이 깃들어 있었다. 낭천은 입으로 흙을 씹으며 계속 뱃속으로 삼켰다. 거칠고 건조한 흙이 그의 목줄기를 거쳐 위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는 흙으로써 자신의 육신을 가득 채우려는 심산 같았다.
그는 이미 빈 껍데기만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사상도 없고 감 각도 없으며 혈육도 없고 영혼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십여 년 간 영위해 온 생명이 일순간에 공백만 남게 된 것이다.
상관금홍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잠시 그를 조용히 지켜보더니 그의 몸을 넘어 방안으로 들어가 한 자루의 검을 들고 나왔다.
다음 순간, 검빛이 번뜩였다. 검은 낭천의 얼굴을 스치고 흙 속에 꽂혔다.
차가운 검날이 그의 얼굴에 한 줄기의 혈구(血口)를 그려 피가 검날을 따라 흙 속에 침투되었다.
상관금홍의 음성은 검날보다도 더욱 예리했다.
"그것이 바로 너의 검이다!" 낭천은 움직이지 않았다.
상관금홍은 다시 냉랭하게 외쳤다.
"네가 만약 죽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극히 간단한 일이다." 낭천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상관금홍은 스스로 말을 이어갔다.
"네가 만약 지금 죽는다면 너를 위해 슬퍼해 줄 사람은 없다. 삼 일을 넘기지 못하고 너의 시체는 마치 들개처럼 시궁창에 빠져 있을 것이다." 그는 냉소를 날리며 다시 말했다.
"한 사람이 만약 저런 여인 때문에 죽는다면 그것은 개만도 못한 짓이다."
낭천은 별안간 벌떡 일어나 땅에 꽂혀 있는 검을 뽑았다. 상관금홍은 뒷짐을 진 채 냉랭하게 그를 주시했다.
낭천의 눈동자는 핏빛으로 충혈돼 있고 입 안은 침으로 가득차 있어 보기에 한 마리의 야수 같았다.
그러나 상관금홍의 얼굴에선 아무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를 죽이고 싶은 모양인데 왜 출수를 하지 않고 망설이느냐?" 낭천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의 손등에 굵은 힘줄이 돌기된 것을 역력히 볼 수 있었다.
상관금홍의 시선은 그의 손에서 눈으로 옮겨졌다.
"네가 만약 나를 죽일 생각이라면 나는 절대 만류하지 않겠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낭천은 홀연 몸을 돌려 버렸다.
상관금홍의 냉소가 그의 뒷골을 때렸다.
"흥! 이제는 살인을 할 용기마저 잃은 모양이군." 낭천은 갑자기 허리를 구부리더니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상관금홍의 살얼음같이 차가왔던 눈빛이 차츰 온화해져 갔다.
"네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은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네가 만일 지금 목숨을 끊는다면 그것은 도피다. 네가 그런 겁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낭천의 등을 쳐다보며 계속 말을 끌어갔다.
"더욱이 네가 나한테 승낙한 일을 아직 실천에 옮기지 못했잖느냐?" 낭천은 이미 구토를 멈추고 계속해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너에게 계속 살아갈 용기가 남아 있다면 당장 나를 따라와라." 상관금홍은 말을 끝내더니 낭천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낭천은 자기가 토해낸 흙을 주시하다가 즉시 몸을 돌려 상관금홍의 뒤를 따랐다. 그는 시종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피를 흘릴 뿐이다. 그는 지금 피를 흘릴 생각인 것이다.
옆문을 뚫고 들어가니 또 작은 뜨락이 있었다. 뜨락엔 한 그루의 버드나무가 외로이 서서 가을바람에 탄식을 하고 있었다. 생명의 단축, 사람의 우둔함을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불빛도 있었다. 불빛은 문틈 사이로 새어나와 상관금홍의 발끝부터 비춰 주었다. 상관금홍은 걸음을 멈추더니 홀연 몸을 돌려 낭천의 축 늘어진 어깨를 두들겼다.
"가슴을 펴고 들어가라. 그 꼴을 다른 사람이 보면 구역질이 날 것이다." 낭천은 등을 밀리다시피 안으로 들어갔다. 이 방 안엔 누가 있으며 상관금홍이 무엇 때문에 자기를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낭천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마음이 죽은 사람인데 두려워할 게 있겠는가?
방 안엔 일곱 사람이 있었다. 일곱 모두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일곱 개의 예쁜 얼굴은 웃으며 그를 맞이했고 열네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그에게 요염한 시선을 집중시켰다. 낭천은 일순 멍해졌다.
상관금홍의 눈동자에 한 가닥의 득의한 웃음이 스쳐갔다.
"똑똑히 보아라.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여인은 그녀뿐만이 아니다. 안 그러냐?" 소녀들은 은방울을 굴리듯 까르르 웃으며 앞으로 다가와 낭천의 손을 잡았다. 싱그러운 체취가 육향을 곁들여 풍겨왔다.
방 한쪽 구석엔 몇 개의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관금홍이 그 중의 하나를 열자 불빛이 이내 어두워졌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전부 휘황찬란한 금은보석이었다.
상관금홍은 낭천을 주시하며 천천히 말했다.
"이런 상자 하나만 가지면 최소한 백 명이 넘는 소녀의 마음을 살 수 있다." 소녀들은 호들갑스럽게 웃으며 즉시 상관금홍의 말을 받았다.
"우리들의 마음은 이미 전부 그의 것이에요. 더 이상 살 필요가 없어요." 상관금홍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히 보고 들었느냐? 그녀만이 달콤한 속삭임을 할 줄 아는 게 아니다. 그것은 여자의 타고난 본능이기도 하다." 소녀들은 앞은 다투어 꾀꼬리처럼 재잘거렸다.
"우리들이 한 말은 모두 진심에서 우러나온 거예요." 상관금홍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진짜도 가짜이고 가짜도 진짜이니 진짜 가짜에 대해 구태여 열심히 파고들 필요는 없지." 이어 그는 천천히 낭천의 앞으로 걸어와 똑바로 그를 주시하며 물었다.
"너는 아직도 죽고 싶으냐?" 낭천은 대답을 하기에 앞서 탁상 위에 있는 술단지를 들어올려 꿀꺽꿀꺽 마시더니 갑자기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죽는다고? 어림없는 소리....." 상관금홍은 싱긋이 웃었다.
"좋다. 네가 계속 살고 싶다면 이 모든 것은 전부 네 것이다." 낭천은 힘껏 한 소녀를 품안에 껴안았다. 어찌나 힘주어 껴안았는지 그녀의 몸을 으스러뜨리려는 듯싶었다.
상관금홍은 소리없이 밖으로 물러나 조용히 문을 닫았다.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쉴새없이 밖으로 새어나왔다.
상관금홍은 뜨락 한복판으로 걸어가 하늘에 걸려 있는 초생달을 바라보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내일은 필시 좋은 날씨가 될 거야....." 상관금홍은 맑은 날씨를 좋아했다. 날씨가 좋으면 피도 빨리 마르고 사람도 빨리 죽기 때문이다.
청명한 날씨였다. 희뿌연 먼지가 휘날리는 긴 행길, 햇살은 신선하고 강렬했다.
한 필의 준마가 여운객잔(如雲客棧) 안에서 쏜살같이 달려나왔다. 안장에 앉아 있는 자는 짙은 눈썹에 황소 같은 큰 눈을 가진 건장한 사나이로서 일신에 황금색 옷을 입고 있었다. 지금 이 사나이는 오직 한 가지 일만 생각하고 있었다.
'낭천을 이리 데려와 자홍색의 옷을 입은 두 사람을 죽이게 하라!'
이것은 상관금홍의 명령이었다. 금전방의 부하들은 일단 상관금홍의 명령을 듣게 되면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호유성의 안색은 그가 입고 이는 옷색깔처럼 빨갛게 상기돼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술을 마신 것은 아니었다. 권력은 술보다도 더욱 강렬하게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상관금홍이 뜻밖에도 친히 이곳에 나타났으니 그로서는 더 없는 영광이었다. 무림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이리로 초청해 오늘의 이 영광을 친히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호유성으로선 안타까울 뿐이었다.
현재 이곳에 모인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강호인이라고 해서 모두 위험을 무릅써 가면서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할 위인이 아니었다. 주연은 이미 베풀어졌다.
석 잔의 술을 마시자 호유성의 안색은 더욱 빨개졌다. 그는 웃음을 만면에 담고 술잔을 들어올렸다.
"형님의 이 두터운 정의(情意)를 동생은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자, 이 동생이 형님에게 한 잔 올리겠습니다." 상관금홍은 담담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나는 생전 술을 입에 대 본 적이 없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호천강이 즉시 차를 따르더니 앞으로 다가갔다.
"정녕 그러시다면 차로써 술을 대신하는 게 어떻습니까?" 상관금홍의 음성은 여전히 담담했다.
"나는 차도 마시지 않는다." 호유성은 약간 멍해지더니 억지로 웃음을 보였다.
"그럼 형님은 평상시 무엇을 마십니까?" 상관금홍의 대답은 간단했다.
"물." 호유성은 다시 멍청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만 마시다니요?" 상관금홍의 눈빛은 시종 맞은편에 못박혀 있었다.
"물은 마음을 맑게 하는 효능이 있으니 물을 마시는 사람만이 마음이 헝클어지지 않는다." 호천강은 다시 한 잔의 물을 따라 두 손으로 바쳤다.
"이것은 맑은 물입니다." 상관금홍은 그것마저 거절했다.
"나는 단지 목이 마를 때만 물을 마신다. 지금은 목이 마르지 않다." 호유성의 표정은 더욱 어색하게 변했다.
하지만 호천강은 여전히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교활하게 웃었다.
"정녕 그러시다면 제가 백부님을 대신해 한 잔 마셔도 되겠습니까?" 하나 상관금홍의 음성에선 하등의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네가 따른 것이니 네가 마셔라." 호천강은 한 잔의 차 그리고 한 잔의 물을 차례로 마시고 나서 천천히 말했다.
"옛 사람들은 서로 피를 나누어 형제의 결의를 맸었지만 백부님과 부친께선 모두 세속을 통달하신 분이니 형식에 치중하시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촛불을 밝히는 일이 없어선 안 될 것 같습니다."
상관금홍은 즉시 물었다.
"촛불은 또 무슨 소용이 있느냐?" 호천강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천지신령에 대한 제(祭)를 올리는 뜻입니다." 상관금홍의 자세는 처음 의자에 앉을 때와 같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천지신령이 나에게 제를 올린 적이 없거늘 내가 왜 천지신령에게 제를 올리겠느냐?" 상대가 누구라도 이런 말을 들으면 무안해 안색이 변할 것이다. 그러나 호천강은 달랐다. 그의 얼굴에 띠어져 있는 웃음이 더욱 짙어져 갔다.
"옳은 말씀입니다. 백부님 같은 절세영웅이라면 천지신령께서도 필경 존경하고 있을 것입니다." 상관금홍의 대꾸는 더욱 걸작이었다.
"내가 그를 존경하지 않는데 그가 무엇 때문에 나를 존경하겠느냐?" 이쯤 되니 호천강이라 해도 역시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색함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헛기침을 두 번 하였으나 웃음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 백부님의 뜻은....." 상관금홍의 표정이 급히 염라대왕처럼 싸늘하게 변했다.
"나와 결의를 맺고자 하는 사람은 너의 부친이냐? 아니면 너냐?" 호천강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저의 부친입니다." 상관금홍은 호통을 치듯 냉랭하게 외쳤다.
"그럼 너는 한쪽으로 물러가 있어라."
"네." 호천강은 공손히 몸을 숙이며 한쪽으로 물러났다.
호유성의 안색은 이미 다소 새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웃음만큼은 잃지 않았다. 그러나 그 웃음은 울음보다도 더 보기 흉했다.
"견자(犬子)의 무례함에 대해 형님께선 너그러운 아량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상관금홍은 돌연 꽝! 탁상을 내리치며 싸늘하게 외쳤다.
"그러한 아들을 어찌 견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어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게 그런 아들이 없는 것이 애석할 뿐이다....." 유성은 넋 빠진 사람처럼 그곳에 앉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이때 짙은 눈썹에 황소 눈을 가진 건장한 사나이가 총총히 뛰어 들어와 상관금홍에게 무릎을 꿇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다만....." 상관금홍은 다그쳐 물었다.
"다만 무엇이냐?" 그러자 사나이는 더욱 음성을 낮추었다.
"그는 너무나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입니다." 상관금홍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찬물을 끼얹어라!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면 오줌을 사용해라!" 사나이는 즉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는 다시 한번 상관금홍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송장을 제외하고 이 세상에서 오줌을 끼얹어 술에서 깨어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호유성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조심스레 물었다.
"형님은 혹시 누구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상관금홍의 음성은 안색만큼이나 차가웠다.
"나로 하여금 기다리게 할 자격을 갖춘 자가 있을 것 같으냐?"
"그럼 와야 할 사람은 모두 당도한 것 같은데 형님께선 왜 아직도....." 상관금홍은 홀연 그를 향해 히죽 웃음으로써 그의 말을 중단시키고 이상한 질문을 했다.
"너의 금년 나이는?" 호유성은 그가 왜 갑자기 자기의 나이를 묻는지 알 수 없었지만 꾸물댈 수 없었다.
"저...해 놓은 일도 없이 나이만 먹어 올해 쉰한 살입니다."
"그렇다면 나보다도 나이가 많은데 내가 너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는 게 좋지 않을까?" 그 말을 듣자 호유성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간사하게 웃었다.
"별말씀을, 어찌 나이로써 장유(長幼)를 가릴 수 있겠습니까? 제발 이 동생을 난처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상관금홍은 담담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정녕 나를 형님이라고 생각한다면 내 말을 들어야 되지 않겠느냐?"
"물론입니다."
"그럼 앉아서 술을 마셔라. 이곳에 모인 친구들에게도 한 잔씩 올리고....." 이곳에 모여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체면이 당당한 자들이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서 술을 마신다는 것은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상관금홍이 아예 젓가락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들고 있는 젓가락이 흡사 천 근 넘는 쇠붙이처럼 느껴져 도저히 음식을 집을 수 없었다.
그런데 상관금홍의 무감정한 음성이 들렸다.
"술과 요리를 차려 놓았는데 먹지 않는다는 것은 낭비요. 나는 낭비를 가장 싫어하니 어서들 잡수시오." 그 말이 떨어지자 비로소 주위에서 일제히 젓가락을 내밀었다.
호유성은 분위기가 완화되었다고 생각하고 얼른 웃으면서 상관금홍에게 권했다.
"이 고기는 아주 신선합니다. 형님께서도 맛 좀 보십시오."
"나는 배가 고플 때만 먹는다. 지금은 고프지 않다. 배가 고프지 않을 때 먹는 것도 역시 낭비다."
그러자 즉시 몇몇 사람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중에 한 사람은 키가 헌칠하며 손에는 눈부신 커다란 비취반지를 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허리엔 고색창연한 검을 차고 있었는데 검집에도 역시 많은 비취가 박혀 있었다.
이 사람도 줄곧 입을 열지 않고 있었지만 양미간에 은은히 짜증스러운 기색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는 여지껏 이런 강압적인 분위기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곳에 온 것이 후회스럽기만 했다. 그렇다. 그는 오지 말았어야 했던 것이다.
벽화헌(碧華軒). 금으로 새긴 현판이다. 천하를 총망라하여 보석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벽화헌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마치 무림인이 비도탈명을 모두 알고 있듯이.
벽화헌의 소주인(少主人) 서문옥(西門玉)은 어릴 적부터 봉황처럼 모셔져 그가 동쪽으로 가겠다면 절대 감히 서쪽이 옳은 길이라고 말하는 자가 없었다.
그가 검술을 연마하겠다니 즉시 이름이 알려진 명검객을 집으로 모셔 왔다. 그리고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를 위해 한 자루의 보검을 구해 주었다.
서문옥이 열네 살 때 이미 검으로써 살인을 한 적이 있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살인을 하는 기분이 어떠한가를 음미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측근은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그가 죽일 수 있는 사람을 물색해 그의 기분을 맞추어 주었다. 그러한 서문옥이 지금 이곳에 앉아 숨막힐 듯한 분위기에 어울려 있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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