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1일 목요일
58 소이비도 제4권 진정한 대장부의 울음
진정한 대장부의 울음
손노선생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차분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 인화보감에는 비단 그의 무공심법이 수록돼 있을 뿐만 아니라 시독술(施毒術), 백용술(白容術) 그리고 묘강(苗疆)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방고술(放蠱術)과 새외에서 전해온 섭심술(攝心術)이 수록돼 있다네."
여기까지 말한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러한 비급이 만약 사악한 무리의 손에 들어간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네."
초류빈 역시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습니다. 무궁한 후환을 초래할 일이 분명할 것입니다."
손노선생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그 무학의 결정(結晶)을 차마 하루 아침에 불태워 버릴 수 없었네. 그래서 멀리 새외로 떠나기 전에 그는 그 비급을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기로 결심한 걸세."
여기까지 듣자 초류빈은 이번 일에 대한 자초지종에 대해 어느 정도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흥운장에 숨겨져 있는 무공비급이 바로 인화보감이라는 것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있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그는 비급을 누구한테 내주었습니까?"
손노선생은 초류빈을 주시하며 간단하게 대꾸했다.
"바로 자네라네."
초류빈은 일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상상을 못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저라뇨?"
손노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이 세상 천지에 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초류빈을 제외하고 또 누가 있겠는가?"
그는 이어 다시 말했다.
"그는 인화보감을 자네에게 보관시켰을 뿐 아니라 자네더러 그를 대신해 자질이 뛰어난 제자를 골라 그의 의발전인을 만들도록 부탁했네."
초류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저는 그 일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때 자네는 마침 길을 떠났기 때문에 그를 직접 대면하지 못했지."
초류빈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십삼 년이라면...맞습니다. 그때 저는 관외로 나갔지요.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부상을 입어, 만약 호유성이 저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저는....."
여기까지 말하자 그는 목이 막히는 것 같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은 그가 일생을 통해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일로 인해 그의 일생은 비로소 행복에서 불행으로 전환된 것이다.
손노선생은 그의 괴로운 심정을 아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왕인화는 비록 자네를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설부인을 만났네. 당시 그 심대협(沈大俠)이 부두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물론 오래 머무를 수 없어서 그 인화보감을 설부인에게 맡겼네."
왕인화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남녀 관계에 있어 영특한 위인이었다. 그러나 초류빈과 설벽운의 감정이 어떠한가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설벽운은 왜 한 번도 초류빈에게 그 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을까?
초류빈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선배님은 그러한 일을 어디에서 들으셨습니까? 믿을 수 있는 일입니까?"
손노선생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지."
이렇게 되자 옆에 있던 손소홍은 입을 열지 않고는 못배겼다.
"그 일은 저의 이숙에게서 직접 들은 거예요. 왕노선배님은 흥운장으로, 아니 유원에 당도해 설부인을 만나고 있을 때 저의 이숙께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감개가 새로운지 그녀는 길게 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저의 이숙께선 한 발짝도 그곳을 떠나지 않으셨어요."
초류빈은 이제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바가 있어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그는 왕인화의 부탁을 받아 그곳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었단 말이오?"
손노선생이 그의 말을 받았다.
"왕인화가 그런 중요한 물건을 자네에게 맡기기로 결정한 이상 절대 자네를 의심할 리는 없네. 다만 자네의 무공에 대해 절대적으로 믿을 수 없어 행여나 누가 그 소식을 염탐해 비급을 강탈할 가능성이 있기에 둘째를 그곳에 남게 한 걸세. 만일의 경우 일이 발생한다면 그는 자네를 도울 수 있을 테니까."
손소홍이 다시 입을 열어 좀더 상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저의 이숙께선 왕년에 왕노선배님에게 구명지은을 입은 적이 있어요. 이숙께선 워낙 은원을 분명히 하는 위인인지라 왕노선배님의 부탁이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승낙할 도리밖에 없으셨을 거예요."
손노선생은 심각한 표정으로 변해갔다.
"나중에 그는 설부인이 인화보감을 자네에게 내주지 않았다는 소식을 무의식 중에 듣고 더욱 마음이 놓이지 않아 자네가 관외로 떠난 후에는 더더욱 한 발짝도 그곳을 떠난 적이 없었다네."
초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을 했다.
"남의 부탁을 받고 그 일에 충실할 수 있는 손이협은 명실공히 손색없는 왕노선배님의 좋은 친구입니다. 그런데....."
그는 손노선생을 주시하며 한마디 한마디 뚜렷하게 물었다.
"손이협께선 설부인이 인화보감을 저에게 내주지 않았다는 소식을 누구를 통해 알아냈는지요? 그 일에 대해선 저도 전혀 모르는데....."
손노선생은 담배 연기를 길게 들이키며 천천히 말했다.
"심지어 자네도 모르는 일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나?"
초류빈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는 또한 설벽운이 자기에게 숨겨온 일이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손노선생은 다시 말했다.
"왕인화는 비단 살인을 하는 수단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사람을 구하는 솜씨 또한 출중했네. 중년 이후에 그의 의술(醫術)은 더욱 신통인 경지에 도달해 거의 치료하지 못하는 질환이 없을 정도였네."
손소홍이 얼른 그의 말을 이었다.
"호천강은 설벽운의 피를 타고 난 아들이에요. 그녀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어떤 일도 불사할 거예요. 제 생각으로는....."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초류빈은 그녀의 말뜻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어느 누구라도 알아들었을 것이다.
설벽운은 분명히 그 인화보감을 자기의 아들에게 전수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그 신서(神書)를 아주 극비밀리에 보관하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단지 그녀가 무엇 때문에 그 일을 줄곧 초류빈에게 숨겼느냐 하는 점이다.
초류빈이 처음으로 설벽운을 보았을 때 그 자신도 어린애였다. 그날은 마침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정원에 매화는 활짝 피었고 땅에 쌓인 눈도 유난히 희었다.
그날 초류빈은 정원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두 조각의 가장 검고 빛나는 숯을 골라 눈사람에게 한 쌍의 밝은 눈동자를 박아주려는 때였다. 그것은 그에게 가장 유쾌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는 눈을 굴리는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눈사람을 만드는 것은 바로 그 눈동자를 박아주는 한순간의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서였다.
눈동자를 박는 순간 우둔해 보이고 죽어 있던 눈사람은 돌연 생명을 부여받게 된다. 매번 그 순간이 되면 그는 형용할 수 없는 만족감과 즐거움을 만끽하게 된다.
그는 항상 창조를 좋아하고 파괴를 증오했다. 그는 생명을 뜨겁게 사랑했다.
그는 언제나 몰래몰래 눈사람을 만들고는 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만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의 환희를 나누어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만 해도 그는 자신의 환희를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해서 결국 그것이 감소되는 게 아니라는 진리를 몰랐다.
나중에서야 그는 비로소 환희를 즉 보물상자와 같은 것으로 남에게 많이 나누어 줄수록 자기에게 더욱 많은 것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통도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분담시킨다면 그 고통은 도리어 더욱 깊어질 뿐이다.
눈사람의 얼굴은 보름달처럼 둥그렇다. 그는 어느 부분에 눈을 박는 게 가장 적합할까 하고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늘 병상에만 누워 계시던 어머니가 홀연 이례적으로 정원에 들어왔다.
어머니 곁에는 빨간 바람막이옷을 걸친 여자 아이가 있었다. 빨간 바람막이옷. 매화보다도 선염(鮮艶)하다. 그러나 여자 아이의 얼굴은 백설보다도 더 창백했다.
빨간색과 흰색, 그것은 초류빈이 제일 좋아하는 색깔이다. 흰색은 순결을 상징하고 빨강은 정열을 뜻한다.
그가 처음으로 그녀를 보는 순간 이미 일종의 말할 수 없는 동정과 연민을 느꼈다. 행여나 그녀가 차가운 바람에 쓰러질까 봐 덥석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의 모친은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얘는 너의 먼 친척되는 이모님의 딸이다. 너의 이모는 아주 먼곳으로 떠나셨기 때문에 이 아이는 오늘부터 우리와 함께 살기로 했다."
"....."
"너는 늘상 누이동생이 없다고 불평이 대단하지 않았느냐? 이제 너의 소원대로 누이동생이 생겼으니 잘 위해 주도록 해라."
그러나 그는 어머님이 무슨 말을 하셨는지 귀에 잘 들리지 않았다. 여자 아이는 이미 앞으로 걸어와 그의 곁에서 눈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눈사람은 왜 눈이 없죠?"
그녀의 물음이었다. 처음 듣는 그녀의 음성이기도 했다. 어린 초류빈의 입가엔 금세 천진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네가 눈을 만들어 주지 않겠니?"
그녀는 생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는 수중에 쥐고 있던 한 쌍의 눈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자신의 즐거움을 남에게 나누어 주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후로부터 그는 무엇이 생기면 언제나 그녀와 나누어 가졌다. 심지어 누가 그에게 작은 곶감을 주어도 그는 그것을 숨겨 두었다가 그녀를 보면 절반을 나누어 주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단 한 가닥의 광채가 번뜩이는 것을 보아도 그는 여지껏 없었던 즐거움으로 생각했다. 어떠한 일도 그 즐거움을 대신해 줄 수는 없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목숨마저도 그녀와 함께 나누기로 했다.
'그녀도 나와 같을 거야.'
그는 믿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들이 헤어진 후에도 그의 마음 깊은 곳은 여전히 그녀의 고통, 그녀의 즐거움, 그녀의 비밀, 그녀의 모든 것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자는 오직 자기뿐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확신했다. 지금까지.....
허수룩한 골목.
어젯밤 첫눈이 내렸다.
눈은 녹아 땅은 질퍽질퍽할 뿐, 담벽 쪽으로 붙은 처마 밑에는 물론 건조한 부분은 있지만 진흙을 밟으며 걷고 있다. 질퍽질퍽한 부드러운 감촉은 언제나 그의 마음을 개운하게 해 주었다.
예전엔 그도 진흙땅을 싫어해 시간이 좀더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빙 돌아 건조한 길을 택해 걸었다.
그러나 지금 진흙땅도 그 나름대로 좋은 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흙땅! 그는 묵묵히 짓밟음을 감수하며 자신의 부드러움으로 짓밟는 자의 발을 보호해 준다.
세상 사람들 중에도 진흙땅 같은 존재가 있지 않을까? 줄곧 남의 멸시와 압박을 받아오면서도 생전 원망의 말도 않고 반발도 하지 않는.....
이 세상에 축축한 진흙이 없다면 씨앗은 어떻게 싹이 돋아날 것이며 나무는 또한 어떻게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그들은 원망도 비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와 귀중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초류빈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담벽은 새로 칠해 단장을 했지만 손꼽추가 경영하는 그 작은 주막의 간판은 낡을 대로 낡아 있었다.
이곳에선 담 안쪽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없었다. 지금은 아직 낮이니 물론 담 안쪽에 있는 등잔불도 보이지 않는다.
'밤이 되면 누각의 그 외로운 등잔불은 다시 켜질까?.....'
주막 맞은편에 설벽운이 기거하는 누각이 보인다. 초류빈은 생각하기 싫은 일이 다시 퍼뜩 뇌리를 스쳤다.
이 년 동안 그는 늘 주막 입구 쪽에 있는 의자에 앉아 누각의 등잔불이 밝혀지기를 기다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손꼽추는 그의 곁에서 묵묵히 술을 따르며 질문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생전 입도 열지 않았다.
손소홍은 홀연 길게 한숨을 내쉬며 울적하게 말했다.
"곧 저녁밥을 먹을 시간이 될 텐데 주막으로 들어가는 손님이 없군요. 숙부님께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계속 상을 닦고 있는 게 아닐까요?"
두 사람은 곧 주막으로 들어갔다. 손꼽추는 상을 닦고 있지 않았다. 그는 다시는 상을 닦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상 위에 손이 있었다. 손은 여전히 걸레를 쥐고 있었다. 주막 문은 원래 닫혀 있었다.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고 불러도 역시 대답이 없었다.
손소홍은 초류빈보다 더욱 다급해져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첫눈에 들어온 것은 상 위에 있는 손이었다. 손목에서부터 끊어진 손, 손소홍은 질겁을 하며 앞으로 달려가 상 앞에서 몸이 굳어졌다. 그것은 바로 초류빈이 이 년 동안 매일 술을 마시던 상이었다.
초류빈의 안색도 파랗게 변해 있었다. 그는 그 손을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손에 대해서 그는 손소홍보다도 더 눈에 익었다. 이 년 동안 그 손은 그를 위해 얼마나 많은 술을 따라주었는지 모른다.
그가 곤드레 취했을 때 그를 부축해 방으로 안내해 준 것도 그 손이었으며 그가 병을 앓았을 때 약을 달여 주던 손도 바로 그 손이었다.
지금 그 손은 응고된 한 덩어리의 사육(死肉)에 불과했다. 피는 이미 마르고 힘줄도 오무라들어 손가락은 마치 자신의 생명을 잡으려는 듯 걸레를 움켜쥐고 있었다.
상을 닦고 있을 때 누구에 의해 손목이 끊어진 게 아닐까.
상은 미끈하고 깨끗하게 닦여져 있다. 그는 상을 닦을 때마다 초류빈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초류빈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 아팠다.
눈물이 용솟음치듯 손소홍의 눈동자에서 흘러내렸다.
"당신은 저 손이 누구 것인지 아시나요?"
초류빈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소홍은 찢겨져 나가는 듯한 음성으로 외쳤다.
"그럼 그는...그는 어디 있죠?"
그녀는 홀연 밖으로 뛰쳐나갔다. 손소홍이 다시 뛰쳐 들어왔을 때 초류빈은 여전히 넋 빠진 사람마냥 상 앞에 서서 그 손을 주시하고 있었다.
거무스름하게 변한 손, 네 손가락은 모두 걸레 속에 박혀 있지만 유독 식지 만은 쇠꼬챙이처럼 뻗어 앞쪽 창문을 가리키고 있었다.
창문은 열려 있다. 초류빈은 고개를 들어 뚫어지게 창문을 주시했다. 손소홍의 눈빛도 그의 눈빛을 따라 옮겨가더니 두 사람은 홀연 약속이나 한 듯 창문을 통해 밖으로 몸을 날렸다.
창 밖에는 뼈를 에이는 듯한 찬바람이 인간의 희노애락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위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극히 좁은 골목이다. 골목 끝단에 누구의 집인지 모르지만 작은 후문이 있을 뿐 다른 것은 찾아볼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다.
후문은 빠끔히 열려 있다. 그리고 손잡이 부분에 적갈색의 장인(掌印)이 찍혀 있다. 피를 묻혀 찍은 손자국이다.
손소홍은 거기까지 달려갔다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몸을 돌려 초류빈을 정시했다.
"상관금홍은 당신이 이곳에 오리라는 것을 벌써 예측하고 있었던 게 분명해요."
초류빈은 굳게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손소홍은 입술을 깨물며 다시 말했다.
"당신은 호유성을 만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흥운장으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을 거예요. 그리고 당신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먼저 저의 숙부님을 만나보러 올 것이라는 것도 그는 분명히 예측했을 거예요."
초류빈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손소홍은 더욱 힘을 주어 말을 이어갔다.
"이 모든 것은 틀림없이 그가 미리 만들어 놓은 함정이에요."
초류빈의 입은 더욱 굳게 다물어졌다.
손소홍은 다시 말했다.
"그러니 당신은 절대 이 문 안으로 들어가면 안 돼요."
초류빈은 홀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손소홍은 입술을 깨물어 가느다란 피가 흘러내렸다.
"저는 상관없어요. 상관금홍은 급급히 저를 죽이려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초류빈은 천천히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래서 당신도 들어갈 수 있단 말이오?"
손소홍의 말투는 표정만큼이나 단호했다.
"저는 저의 숙부님의 생사를 알기 위해서라도 기필코 들어가야 해요."
초류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당신은 상관금홍만큼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구려."
손소홍의 표정은 금세 멍해졌다.
"어째서....."
초류빈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가 애써 함정을 만들어 놓은 것은 내가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미리 계산해 두었기 때문이오. 설사 누가 내 두 다리를 절단해 버린다 해도 나는 아마 기어서라도 들어갈 것이오."
손소홍은 그를 주시했다.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양볼을 타고 계속 흘러내렸다. 그녀는 홀연 앞으로 달려가 초류빈을 꼭 껴안았다. 그녀의 뜨거운 눈물은 초류빈의 초췌한 얼굴을 뜨겁게 적셨다.
그녀는 자신의 눈물로써 그의 초췌한 얼굴을 씻어 주려는 듯 그의 얼굴을 비볐다.
이 세상에서 사람의 초췌함을 씻을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정인의 눈물이리라. 초류빈의 굳어졌던 사지는 점차 부드럽게 풀리며 드디어 벅찬 감정을 억제할 수 없어 역시 그녀를 꼭 껴안았다.
햇살은 이 좁은 막다른 골목에 혜택을 주기 싫은지 주위는 마치 황혼 무렵처럼 어둠침침했다. 후문 쪽은 더욱 어두워 으시시한 한기(寒氣)마저 느끼게 한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내 구역질이 날 정도로 짙은 비린내가 풍겨 왔다. 그것은 피비린내였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일종의 기이한 소리를 들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야수의 신음 같기도 했고 아귀들이 지옥에서 울부짖는 것 같은.....
그 끔찍한 소리는 바로 지하실에서 들려왔다.
지하실에선 십여 명이 이를 부드득 갈며 야수 같은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고 심지어 칼날이 몸에 박혀도 역시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원래는 스물일곱 명이었지만 지금 이미 아홉 명이 쓰러져 나머지 열여덟 명은 두 패로 갈라져, 우세를 차지하고 있는 쪽은 열세에 놓여 있는 쪽보다 인원수가 훨씬 많았다.
우세를 차지하고 있는 쪽은 모두 열세 명으로 한결같이 노란색 옷을 입고 대부분 강호에서 극히 보기 드문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의 손에는 쇠로 만든 주판이 쥐어져 있었다. 다른 한쪽은 원래 아홉 명이었지만 지금은 다섯 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중엔 앞 못보는 장님도 끼여 있었다.
그리고 상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대한이 있었는데 뜻밖에도 그의 손엔 아무 무기도 없었다.
그의 몸 자체가 똘똘 뭉친 강철이었다. 싸늘한 광채가 번쩍이는 가운데 한 자루의 어린도(魚麟刀)가 그의 왼쪽 어깨를 찔렀다. 그러나 마치 나무토막에 찍힌 듯 예리한 칼날은 단단한 근육에 박혀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황의인은 있는 힘을 다해 칼을 뽑으려 했으나 대한의 철권은 이미 그의 가슴팍에 격중되었다. 그 순간 우지직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황의인은 멀리 날아가 담벽에 부딪치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칼을 맞은 대한은 다신 왼쪽 팔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갑자기 우악스럽게 외쳤다.
"어서들 물러나시오! 내가 뒤를 막을 테니...어서!"
물러서는 자도 없고 대꾸하는 자도 없다. 지금까지 죽은 듯 땅에 쓰러져 있던 한 사람이 돌연 벌떡 일어서며 찢어질 듯한 소리로 외쳤다.
"물러날 수 없다. 우린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를 이곳에서 데려갈 것이다!"
이곳은 지하실이기 때문에 일 년 내내 횃불이 밝혀져 있다.
담구석에 박혀 있는 횃불의 빛을 빌어 황소만한 여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 줄기의 칼자국은 검은 안대를 낀 눈에서부터 입언저리까지 그어져 있었다.
그녀는 남은 왼쪽 눈으로 그 무쇠 같은 대한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 외눈엔 단지 원한, 죽어도 풀 수 없는 원한이 있을 뿐이다. 여도호(女屠戶) 옹대랑(翁大娘).
그렇다면 무쇠 같은 대한은 누구일까? 이 년 간 소식이 끊어졌던 철전갑이란 말인가? 그렇다. 바로 그였다.
철전갑 이외에 저렇게 무쇠 같은 몸집을 지닌 자는 없을 테니까.
옹대랑은 안간힘을 써서 몸을 일으키며 철전갑을 내려다본 채 싸늘하게 외쳤다.
"너의 목숨은 우리의 것이다! 우리 말고는 아무도 너를 건드릴 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광이 다시 번쩍이며 그녀는 재차 쓰러졌다. 그녀는 이제 영원히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외눈을 여전히 크게 부릅뜬 채 철전갑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고통도, 아무런 공포도 느끼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원한뿐이었다. 십여 년 간 들끓어 오던 원한의 불길은 그녀의 마음속에 덩어리로 응결되어 그 외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철전갑은 다시 일검을 맞고 이를 악물며 외쳤다.
"당신네들은 정말 떠나지 않겠소? 당신네들이 전부 이곳에서 죽는다면 어떻게 나를 데려갈 수 있겠소?"
그러자 장님은 홀연 으시시한 음소를 발했다.
"으흐흐...우린 설령 모두 이곳에서 죽음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너의 혼백을 데려갈 것이다!"
그의 무공은 비록 눈뜬 사람보다 고강했지만 역시 앞 못보는 소경이기 때문에 모든 방음을 귀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누구도 입을 열어 말할 때는 청각이 평상시보다 예민하지 못하다. 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한 자루의 호두구(虎頭鉤)가 날아와 그의 앞가슴에 꽂혔다.
그 갈퀴 같은 호두구가 다시 허공으로 날아간 순간 선혈과 살점이 사방에 뿌려졌다.
피와 살!
철전갑은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도 살인을 한 적이 있지만 흉수는 아니었다. 그의 몸은 강철 같지만 마음은 한없이 연약했다.
지금 그는 심지어 손까지 연약해져 더 이상 살인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홀연 악을 쓰듯 외쳤다.
"그럼 내가 당신네들 손에 죽으면 어떻게 하겠소?"
장님의 음성은 냉랭하기만 했다.
"너를 죽일 수 있다면 우린 생사를 개의치 않는다.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오직 너를 죽이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싸늘하게 그의 말을 이었다.
"중원팔의가 만약 친히 너를 죽이지 못한다면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사람은 곰보로서 길고 짧은 두 자루의 칼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북파(北派) 음양도(陰陽刀)의 유일한 전인 공손우(公孫雨)였다.
철전갑은 홀연 대소를 터뜨렸다. 이런 마당에 지금 그가 왜 웃음을 터뜨렸는지 아는 자가 없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실로 듣는 이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하게 만들었다.
"하하하...알고보니 당신네들의 목적은 오직 나를 죽이는 데 있었구려. 그렇다면 문제는 간단하오. 하하하....."
그는 대소를 발하면서 주먹을 뻗어 앞에 있는 황의인을 격퇴시키는 동시 다짜고짜 공손우의 칼날을 향해 덮쳐갔다.
공손우가 깜짝 놀라는 순간 단도는 이미 철전갑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철전갑은 계속 가슴을 앞으로 밀며 성난 황소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내...내 빚은 청산되었소! 그래도 당신네들은 떠나지 않겠소?"
공손우의 얼굴에 심한 경련이 일더니 돌연 광규일성을 지르며 단도를 뽑았다. 시뻘건 피가 비오듯 그의 몸에 뿌려졌다.
그리고는 광규가 중단되며 그는 폭싹 땅에 쓰러졌다. 등에는 석 자 가량의 화창(火槍)이 꽂혀 있었다.
창꼬리에 달려 있는 붉은 술은 아직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철전갑도 역시 쓰러지며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내 빚은 청산되었소. 그런데 당신네들은 왜 떠나지....."
이때 다른 화창이 그를 향해 날아왔다. 그런데도 철전갑은 전혀 몸을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땅에 쓰러졌던 공손우는 돌연 광규와 함께 다시 철전갑의 몸으로 덮치며 찢어질 듯 외쳤다.
"우린 필시 무엇을 잘못 생각하고 있소! 그는 절대....."
외침은 중단되었다. 공손우의 등에 다시 한 자루의 화창이 꽂혔기 때문이다.
창! 창!
창이 뽑혀지는 순간 희미한 등불 아래 지하실은 이내 장막과 같은 짙은 안개에 싸이는 것 같았다.
붉은 안개!
혈무(血霧)! 이제 남은 것은 고작 열한 명. 그렇다고 해서 살겁은 정지되지 않고 쌍방의 정세는 더욱 현격한 차이가 있다.
늘 약상자를 들고 다니던 의원 차림의 사나이는 이미 여섯 군데 상처를 입고서도 악을 쓰듯 외쳤다.
"철가는 이미 죽었으니 우리도 이젠 물러납시다!"
그들 쪽은 단지 세 사람밖에 남지 않아 도저히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다른 한 사람은 도끼를 내러찍으며 역시 이를 악물고 외쳤다.
"형님, 물러나겠습니까?"
장님은 즉시 싸늘하게 호통을 쳤다.
"물러난다고.....! 중원팔의는 죽어도 함께 죽는다. 누가 다시 물러나자는 말을 한다면 내가 먼저 그를 죽이겠다!"
황의인은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좋다! 배포가 대단하구나. 이 어르신네가 우선 네놈을....."
그의 음성도 돌연 중간에서 끊어졌다. 그리고 한 쌍의 눈동자는 즉시 죽은 금붕어처럼 밖으로 빠져나왔다.
죽음과 직결되는 고요 속에 단지 황의인의 목줄기에서 꼬르륵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는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끊어지지 않았지만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의 목줄기엔 어느 새 한 자루의 비수가 꽂혀 있었다.
비도탈명! 모든 동작은 별안간 전부 정지되고 모든 사람의 눈동자는 일제히 그 비도에 집중되었다. 그 비도가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누가 왔는지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지하실 입구는 어귀에 있었다. 초류빈은 바로 그곳에 서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지 못했다. 자기가 고개만 돌리면 그 비도탈명은 아무 형체도 없이 날아와 목줄기에 꽂힐 것만 같았다.
그들은 모두 금전방의 가장 충실하고 가장 뛰어난 수하 제자로서 절대 죽음 따위를 두려워할 만큼 간담이 작은 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너무나도 지쳐 있고 너무나도 많은 죽음을 보았고 너무나도 많은 피비린내를 맡았다.
그것으로 인해 그들은 이미 많은 용기를 상실했다. 게다가 비도탈명은 강호인의 심중에 비단 한 자루의 비수일 뿐더러 또한 일종의 악마의 화신이기도 했다.
지금 비도탈명! 이 네 글자는 더욱더 죽음과 똑같은 의미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지금에서야 비로소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들 동료의 시체는 바로 그들 발밑에 쓰러져 있다.
조금 전만 해도 그 시체는 엄연히 살아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초류빈이 갑자기 나타났다. 사전에 아무 예고도 없이. 그러자 살아 있던 사람이 일순간에 시체로 변하고 만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어떠한 일도 이번 변화처럼 사람에게 공포를 심어 주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공포는 어쩌면 죽음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공포 자체인지도 모른다.
장님은 돌연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초탐화가 왔소?"
그는 비록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지만 이미 초류빈의 존재를 의식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일종의 무서운 살기를 맡은 것 같았다.
초류빈은 간단하게 대꾸했다.
"그렇소."
그러자 장님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금풍백과 그 나무꾼 차림을 한 사나이도 덩달아 공손우와 철전갑의 핏속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마치 동떨어진 다른 세계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 세계엔 원한도 없고 고통도 없다.
초류빈은 천천히 걸어 황의인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적수공권 손에 비도가 쥐어져 있지 않았다. 비도는 마치 그의 눈동자에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들을 응시하며 한마디 한마디 못을 박듯 물었다.
"너희들이 데려온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황의인들의 눈동자는 전부 자신의 발끝을 주시하고 있었다.
초류빈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했다.
"나는 너희들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 내 생각을 바꿀 생각은 하지 말아라."
바로 그의 맞은편에 서 있는 황의인의 얼굴은 완전히 비지땀으로 범벅되어 온몸을 떨고 있다가 별안간 악을 쓰듯 외쳤다.
"당신은 손꼽추를 찾고 있소?"
초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러자 그 황의인의 얼굴에 돌연 일종의 기이한 웃음이 떠오르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좋소. 당신을 그에게 안내할 테니 나를 따라오시오!"
그는 호두구를 사용했다. 그런데 그 한마디를 끝내자마자 이미 수중의 호두구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그는 더 이상 이런 공포를 감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죽음은 도리어 그로서는 가장 빠른 해방이었다.
초류빈은 그가 쓰러지는 것을 지켜보더니 손등의 힘줄이 점점 굵어졌다. 손꼽추는 이미 죽은 것이다. 황의인의 죽음이 바로 그 대답이었다.
그러면 설벽운은?
초류빈의 눈동자에도 공포의 빛이 노출되었다. 그의 눈빛은 피바다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천천히 훑으며 점점 검은 자위가 오무라들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철전갑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그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고 미약하게 숨을 내쉬고 있었는데 피와 땀은 그의 얼굴에 뒤범벅되어 그야말로 목불인견이었다.
"역명당(易明堂)...역형님....."
장님의 철판을 뒤집어 쓴 듯한 얼굴에도 가벼운 경련이 일더니 이를 악물고 대꾸했다.
"나 여기 있다."
철전갑은 끊어질 듯한 음성으로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내...내 빚은 이제 청산되었소?"
"그렇다! 네 빚은 이미 청산되었다."
"하지만 난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소."
"어서 말해 봐라!"
"나는 비록 옹대가에게 빚을 졌지만 절대로 그를 배신하지는 않았소. 단지 난....."
장님 즉 역명당은 돌연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네가 말을 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친구를 배신한 사람은 절대로 이렇게 생사를 판가름하는 관문에서 친구를 위해 희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단 역명당만 깨달았을 뿐 아니라 금풍백과 그 나무꾼도 깨달았다. 단지 그들의 깨우침이 너무 늦었다는 게 애석할 따름이다.
역명당. 십여 년 간 광명을 잃은 그의 눈에서도 두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초류빈은 보고 있다. 똑똑히 그를 보고 있다. 그는 장님도 눈물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 자신 역시 뜨거운 눈물이 벌써 눈가에 어려 있었다.
이어 그 뜨거운 눈물이 점점 식어가는 철전갑의 얼굴에 떨어졌다. 그는 몸을 숙여 소매로 가볍게 철전갑의 얼굴에 묻은 피와 땀을 닦아주었다.
철전갑은 눈을 뜨고 그제야 그를 발견했다.
"도련님...과연 오셨군요!"
그는 놀랍고도 기뻐 발버둥치며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다시 쓰러졌다.
초류빈은 무릎을 꿇었다.
"내가 왔네. 그러니 무슨 말이든 하고 싶으면 천천히 하게."
철전갑은 처연하게 웃었다.
"난 죽어도 한이 없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초류빈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자네는 꼭 해야 할 말이 있네. 자네가 정녕 옹대가를 배신하지 않았다면 왜 그 사연을 소상히 밝히지 않고 계속 도망만 쳤는가?"
"제가 도망친 것은 제 자신을 위한 게 아니었습니다."
초류빈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럼 누구를 위해....."
철전갑은 다시 처연히 웃으며 눈까풀이 천천히 감겨졌다. 그의 사지는 고통으로 인해 오무라들었지만 안색은 평온하게, 입가엔 심지어 한 가닥의 만족스러운 미소마저 띠고 있었다.
그는 아주 편안하게 죽었다.
사람이 편안하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초류빈은 온몸이 굳어 버린 듯 꼼짝도 하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철전갑이 누구 때문에 죽게 되었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필시 초류빈보다 먼저 흥운장에 당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상관금홍의 음모를 간파하고 앞서 이곳으로 달려온 게 분명했다.
초류빈에게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면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달려올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상관금홍의 음모를 알았을까.
그는 옹천검과 대관절 무슨 비밀이 있기에 죽어가면서도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을까?
초류빈은 울적하게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자네는 대관절 무슨 비밀을 간직하고 있기에 나한테까지 숨기려 했는가? 자네는 설사 아무 여한없이 눈을 감았다지만 내 마음이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그의 중얼대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금풍백이 돌연 큰소리로 외쳤다.
"그가 숨기고 있는 일을 나는 알고 있소!"
초류빈은 멍해져서 그에게 얼굴을 돌렸다.
"당...당신이 안다고?"
금풍백의 까무잡잡하던 얼굴은 지금 무서울이 만큼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한마디 한마디 뚜렷하게 말했다.
"옹대가가 친구를 대하는 의리는 천하인이 전부 알고 있는 것처럼 당신도 역시 알고 있으리라 믿소."
초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은 바가 있소."
"어떤 친구라도 그를 찾아오면 그는 거의 모든 요구를 들어 주었소. 그래서 자연히 그는 많은 돈이 필요했소. 하지만 그에게는 당신처럼 재산을 많이 가진 부친이 없었소."
초류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금풍백은 다른 사람의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스스로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그는 항상 돈 때문에 걱정을 했소. 한 사람이 만약 친구를 좋아하고 또한 체면을 살리려는데 돈이 없다면 암암리에 다른 방법으로 그 결함을 보충하는 수밖에 없었소."
이번엔 나무꾼 차림을 한 자가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럼...옹대가는 암암리에 본전없는 장사를 했단 말인가?"
금풍백은 대답을 하기에 앞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소. 나도 우연히 그 일을 알게 되었지만 차마 누구에게도 그것을 얘기할 수가 없었소. 옹대가의 입장에서 볼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소."
여기까지 말한 그는 더욱 힘주어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옹대가께서 노린 상대는 전부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소. 그는 비록 밑천없는 장사를 해 왔지만 양심에 부끄럽지는 않았소."
역명당은 안색이 이미 새파랗게 변해 심각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 일이 철전갑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금풍백은 시체로 변한 철전갑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말했다.
"옹대가가 거듭해서 사건을 일으키자 자연히 관가(官家)에선 범인을 찾아나서게 되었소. 그 사건을 담당한 자는 마침 철전갑과는 다정한 친구였소. 그들은 옹대가를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생각했지만 확실한 증거를 잡지 못했소."
"그래서 철전갑은 고의로 옹대가에게 접근해 확증을 잡으려 했단 말인가?"
금풍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틀림없이 그렇게 되었을 것이오."
이어 그는 다시 말했다.
"철전갑이 끝끝내 그것을 설명하지 않은 것은 옹대가가 확실히 의리 있는 좋은 친구임을 알았기 때문이오. 만약 그 일을 입 밖에 냈다면 죽은 후에도 명예에 큰 손실을 초래했을 것이오. 그래서 철전갑은 스스로 누명을 뒤집어 쓰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 도망을 쳐 왔던 것이오."
여기까지 들은 역명당은 홀연 호통을 치듯 싸늘하게 외쳤다.
"그럼 자네는 그것을 알면서도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는가?"
"내가...어떻게 그것을...옹대가는 나에게 태산 같은 은혜를 베풀었는데 철전갑도 하지 않으려는 말을 난들 어떻게 할 수 있었겠소?"
역명당은 즉시 냉소를 쳤다.
"좋네. 자네는 옹대가의 형제임에 분명하네. 아주 잘한 짓이야!"
그는 일면 말을 내뱉으며 일면 격동에 북받쳐 온몸을 떨었다.
금풍백은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음성은 갑자기 차분하게 변했다.
"철전갑에게는 죽을 죄를 짓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난 어쩔 도리가 없었소. 사실 다른 방법이 없었소....."
그의 음성은 차츰 나직하게 변하더니 홀연 한 자루의 칼을 집었다. 조금 전에 철전갑의 가슴을 관통시켰던 단도였다.
그리고는 그 단도로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거의 철전갑과 같은 심장 부분이었다. 그도 비록 고통으로 인해 사지가 오무라들었지만 입가엔 철전갑과 동일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빚진 것이 많소. 그러나 이젠 빚을 갚았소."
그는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을 끌어올려 말을 끝내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도 역시 편안하게 저승으로 갔다. 편안하게 죽을 수 있는 것,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역명당은 홀연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좋아, 자네는 그 일을 밝힐 용기가 있고 그 빚을 청산할 용기가 있었으니 과연 나의 형제일세. 우리 중원팔의는 결코 남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네. 하하하....."
그의 광소 소리는 밤에 우는 올빼미 소리 같았다.
그 나무꾼차림을 한 사나이는 즉시 철전갑의 시체를 향해 무릎을 꿇은 채 큰절을 올리더니 다시 역명당에게 절을 올렸다.
"형님, 제가 먼저 떠나겠소."
역명당의 광소는 이미 멎어 있었다. 그리고 지극히 냉담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 자네가 먼저 가게. 내 곧 뒤따라 갈 걸세."
나무꾼 차림을 한 사나이는 결연히 말했다.
"그럼 저승에서 기다리겠소."
하고 한마디를 내뱉더니 수중의 도기를 번쩍 들어올렸다. 이내 선혈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는 더욱 빨리 더욱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만약 눈으로 친히 보지 않았다면 초류빈은 이 세상에서 죽음을 이렇게 담담하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으리라곤 도저히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역명당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아직 떠나지 않은 것은 당신에게 할 말이 남아 있기 때문이오."
초류빈은 고개를 끄덕이는 이외에 이미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철전갑이 언젠가는 이곳으로 오리라는 것을 알고 계속 지키고 있었소. 그래서 당신이 모르는 일도 우리는 많이 알고 있소."
역명당은 침중한 얼굴로 초류빈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다음 말을 이어갔다.
"상관금홍의 이번 음모에 대해 우리는 처음부터 낱낱이 알고 있었소. 물론 호유성도 역시 알고 있었소. 나는 줄곧 당신이 어떻게 해서 그런 사람을 친구로 사귀게 되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소."
초류빈은 더욱 할 말이 없었다.
역명당은 말을 계속했다.
"철전갑이 이번 일을 알게 된 것은 호유성의 입을 통한 것이오. 호유성은 철전갑을 죽음으로 몰아넣기 위해 이곳으로 오랬지만 우리가 따라왔으리라곤 아마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오. 우린 철전갑이 다른 사람 손에 죽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오."
초류빈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리고 호부인...설벽운은 죽지 않았으며 상관금홍에게 납치되지도 않았소. 당신이 만약 지금 흥운장으로 달려간다면 필시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것이오."
초류빈은 감격인지 기쁨인지 가슴으로부터 한 갈래의 뜨거운 피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역명당은 허망한 눈길을 허공에 던졌다.
"이제 우리 형제들의 은원은 전부 청산되었소.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우리를 한 군데에 합장해 주시오. 그리고 훗날 누가 중원팔의에 대해 묻거든 그 여덟 사람은 비록 살아 있을 때 가끔 그릇된 일을 했지만 죽음으로 모든 빚을 청산했다고 전해 주시오."
황의인들은 어느 새 살그머니 떠나갔다.
초류빈은 설사 보았다 해도 제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역명당의 행동을 제지할 수도 없었다. 역명당은 확실히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했다. 아무 거리낌없이 죽음을 택할 수 있다면 죽은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죽음은 그들에게 있어 귀가(歸家)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초류빈은 주위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훑어보며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가 떠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원한이 초래한 무서운 결과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깊고 뼈에 사무친 원한이었더라도 이제 청산되었다. 역명당의 말대로 이 사람들은 비록 살아 있을 때 가끔 그릇된 일을 했지만 아무 부끄러움없이 죽었다.
그들같이 죽을 수 있는 자가 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초류빈의 사지는 차가웠지만 가슴엔 타는 듯한 뜨거운 피가 들끓고 있었다. 그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들이 흘린 피 위에.....
그것은 대장부의 피다. 그는 이 대장부들의 시체와 함께 있을 망정 밖에 나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추악한 얼굴을 보기 싫었다. 사람이 스스로 부끄러움없이 죽는다면 죽음은 정말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죽는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은 아니다.
손소홍은 줄곧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차마 들어올 수가 없었다. 이 사나이들의 죽음을 보고 그녀는 비로소 진정한 사나이는 확실히 여자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여자로 태어난 게 자기의 복이라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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