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1일 목요일

62 소이비도 제4권 찢기는 마음





찢기는 마음



호천강은 이불을 머리 끝까지 올린 채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바닥엔 아직 마르지 않은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켜져 있는 등불은 기름이 다 탄 듯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다 허물어져 가는 객잔 방에 희미한 등불이 어른거리는 것은 매우 음산해 보였고 전혀 생기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설벽운은 천천히 문을 열더니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자상한 어머니의 발걸음은 영원히 그렇게도 가벼운 것 같다.

세상의 어머니들이란 자신들이 꼬박 밤을 지새울망정 사랑스러운 아이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호천강은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다. 어쩌면 그 어떠한 사람보다도 세상물정에 대해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은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이 천진스러웠다.

그의 얼굴은 작고 창백했으며 몹시 야위었다. 그가 무슨 일을 했던 간에 그는 필경 고독하고 아무런 도움도 없는 어린아이임에 틀림없고 인생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설벽운은 조심스럽게 침상 곁으로 다가가 잠자고 있는 호천강을 내려다보았다. 순간 그녀는 코끝이 찡해오는 것을 느낀 것과 동시에 눈시울이 절로 뜨거워졌다.

호천강은 그녀의 유일한 혈육이다.

그녀의 피 한 방울, 살 한 점도 모두 호천강을 위해 바칠 수 있다. 그리고 호천강은 그녀에겐 이 세상에서 유일한 안식처이며 유일한 희망이다.

그녀는 죽는 한이 있어도 그와 헤어지지 않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설벽운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등불을 껐다.

'나는 더 이상 이 아이를 보아선 안 된다. 많이 보면 볼수록장차.....'

그녀는 앞으로 일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두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이 드디어 그녀의 야윈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호천강은 비록 두 눈을 꼭 감고 있었지만 역시 눈물 자국이 보였다. 그리고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너무 추워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일까?

설벽운은 허리를 다소곳이 숙여 이불을 덮어주려고 했다. 순간 그는 이불과 호천강의 옷이 촉촉히 젖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설벽운은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서야 장탄식을 터뜨리면서 탄식하듯 말했다.

"너도 나갔다 왔었구나."

그러나 호천강은 눈과 입을 꼭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벽운은 천천히 입을 열어 물었다.

"너는 내 뒤를 계속 따를 것이냐?"

호천강은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시 설벽운이 또 말했다.

"그리고 내가 한 말도 모두 다 들었겠지?"

호천강은 갑자기 이불 속에서 기름종이로 싼 작은 봉지를 꺼내면서 말했다.

"가지고 가세요."

설벽운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지?"

호천강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십니까? 이것을 가지고 가기 위해 돌아온 것이 아닙니까?"

설벽운의 두 눈에선 고통의 빛이 반사되었다.

"나는...너를 보기 위해 돌아온 것이다."

"이것 때문이 아니라 저를 보러 다시 돌아오셨다구요?"

이렇게 말한 호천강은 갑자기 눈을 뜨더니 그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역시 고통스러운 눈초리로 계속 말했다.

"아마 이 물건이 아니었더라면 벌써 가셨을 거예요."

설벽운은 암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멀리 떠나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호천강은 그녀의 말을 가로채면서 말했다.

"더 이상 얘기하실 필요없어요. 저도 어디로 가신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니까요."

설벽운은 의아해 하며 물었다.

"너도 알고 있었다고?"

호천강은 낭랑하게 말했다.

"초류빈을 구하러 가는 것이 아닌가요?"

설벽운은 아들의 그러한 말에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졌다.

호천강은 쉰 듯한 음성으로 계속 말했다.

"이 인화보감으로써 초류빈을 구할 생각이 아닌가요?"

그리고 기름종이로 싼 물건을 설벽운에게 던져주면서 계속 말했다.

"그런데 왜 가시지 않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설벽운은 심한 현기증을 느낀 듯이 비틀거렸다.

호천강은 몹시 흥분한 어조로 계속 말했다.

"이 인화보감이 있으면 상관금홍은 틀림없이 만나줄 거예요. 그 역시 무예를 연마한 사람이므로 인화보감을 보면 자연히 마음이 움직일 테니까요."

이렇게 말한 그는 이를 악문 채 계속 말을 이었다.

"어머니께선 이 기회를 이용해 그와 싸울 생각이겠지요? 물론 그가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아시겠지요....."

그는 한 차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더니 다시 말했다.

"그래서 어머니께선 잠시나마 그를 잡아두려는 것에 불과하지요. 그를 잡아두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초류빈이 오래 살 테니까요. 그렇게 되면 낭천이 그를 구하러 올는지도 모르지요."

설벽운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천강은 과연 더할 수 없이 총명한 청년이었다. 그는 설벽운의 마음을 완전히 간파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녀가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호천강은 계속해서 말했다

"초류빈이 어머니께 잘해 준 것은 사실이에요. 어머니께서 그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고 또 자식을 버린다 해도 나무랄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의 음성은 매우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께선 다른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셨나요. 저를 위해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저는....."

설벽운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참으면서 호천강의 손을 잡았다.

"나는 물론 너를 생각했다. 나는....."

호천강은 설벽운의 손을 뿌리치면서 소리쳤다.

"저에 대해서 생각하셨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어요. 어머니께서 내일 아침 저더러 그곳으로 가 그들을 기다리라고 하셨으니까요. 그들이 나를 보면 자연히 잘 돌보아 줄 테지요."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그를 꼭 구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어떻게 하지요. 그가 만약 어머니께서 죽는 것을 보면 마음이 더욱 어지러워지고 더욱 고통스러워 할 거예요. 설사 낭천이 달려간다 해도 그를 꼭 살려낼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지요."

설벽운의 몸은 학질에 걸리기라도 한 듯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호천강은 설벽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설사 그가 살아나갈 수 있고, 저를 돌봐 줄 수 있다고 해도 저는 그를 따르지 않을 거예요. 저는 그를 거들떠보고 싶지도 않아요."

설벽운은 흐느끼면서 물었다.

"무엇 때문이지?"

"그 이유는 간단하지요. 그가 증오스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너는 이미....."

"제가 그를 증오하는 것은 그가 저의 공력을 제거했기 때문이 아니에요."

"그럼 무엇 때문이지?"

"제가 그를 증오하는 것은 왜 그가 나의 아버지가 아니냐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제 자신을 증오하지요. 어째서 그의 아들이 되지 못했느냐고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이내 말을 계속했다.

"만약 제가 그의 아들이면 제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모든 것이 원만해질 것이고요."

여기까지 말한 호천강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대성통곡을 했다. 설벽운은 육신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한 아픔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그녀는 더 이상 이 고통을 참아내지 못하고 뒤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 아이가 만약 그의 아들이며 그가 만약 내 남편이라면.....'

그녀는 더 이상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이러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고난과 시련의 나날을 보내면서 그녀는 무수히 생각해 왔던 것이다.

불행한 부모 밑에 태어난 아이는 그 부모보다 더욱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 잘못은 부모에게 있는 것이지 아이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 불행의 씨앗까지도 부모와 같이 시련과 고난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설벽운은 있는 힘을 다해 일어나더니 호천강의 품에 쓰러지면서 비오듯이 눈물을 흘렸다.

"얘야, 너에게 너무 미안하구나. 나는 너에게 너무나 많은 죄를 지었다....."

이렇게 말한 그녀는 더욱더 흐느끼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 같은 부모와 너 같은 자식이 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때 창 밖에서 처량하면서도 무거운 탄식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목메인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은 그 애에게 죄를 진 것이 없으며 미안해 할 것도 없소. 모든 것이 내 잘못이오."

호유성. 그렇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바로 설벽운의 남편이고 호천강의 아버지인 바로 호유성 그였다. 전에 그를 보았던 사람이면 그가 이렇게 낭패하고 초췌하게 변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문 앞에 선 채 꼼짝하지도 않았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갈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호천강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올렸으며 아버지 하고 부르려는 듯 입술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의 입에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호유성은 장탄식을 터뜨리더니 말했다.

"네가 내 아들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설벽운도 이때 고개를 돌려 호유성을 바라보았다.

호유성은 그녀의 눈과 마주치자 암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당신이 내 처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소. 나라는 존재는 생존할 가치가 없는 인간일 뿐이오."

그의 말을 듣던 설벽운이 입을 열었다.

"당신....."

호유성은 그녀가 채 말을 하기도 전에 다시 말했다.

"하지만 나는 좋은 아버지, 그리고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 왔소. 다만...결과가 좋지 않았을 뿐이오."

이렇게 말한 그는 설벽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더욱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모든 일에 실패했소."

호유성은 본시 의복과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상당히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외관이 단정한 사내대장부라서 성질 또한 장부답계 우락부락한 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설벽운은 갑자기 그가 가엾게 여겨지는 것을 느꼈다. 잠시 멍하니 호유성을 쳐다보고 있던 그녀는 어둠이 잔뜩 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에게도 송구스러워요. 저 역시 당신의 좋은 아내가 되어 드리지 못했지요."

호유성은 처량하게 웃었다.

"그것은 당신의 탓이 아니오. 나의 잘못이오. 만약 내가 당신을 만나지 못하고 초류빈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 멈추더니 이내 입을 열어 계속했다.

"결코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 것이고 모두가 행복했을 것이오."

그렇다. 설벽운도 그렇고 초류빈도 그렇지만 그 자신의 운명도 설벽운과 초류빈을 만났기 때문에 이렇게 변한 것이다. 만약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결코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설벽운은 다시 눈물을 흘렸다.

"당신은 어떻게 했던지 간에 그것은 당신의 집, 당신의 가정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한숨을 짧게 내쉬고는 이내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서 당신 잘못도 없고 또 당신만을 탓할 수도 없는 것이지요."

호유성은 처량하게 웃었다.

"우리에게 잘못이 없다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이오?"

설벽운은 창 밖에 내리고 있는 빗줄기를 망연히 바라보면서 말을 받았다.

"누가 잘못했을까? 누가 잘못한 것일까....."

그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그 뉘라서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엔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고 또 대답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다.

호유성은 다시 천천히 말했다.

"나는 본시 다시는 당신과 천강이를 만나려 하지 않았었소. 이번에 당신이 나왔을 때 나는 당신이 내 곁을 떠나려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여기까지 말한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장탄식을 터뜨리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만류하지 않았고 또 돌아와 줄 것을 애원하지도 않았던 것이오. 그것은....."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 멈추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한 모든 일이 당신에게 너무나 많은 고통과 실망을 안겨 주었다는 것을 내 자신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그는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뒤를 따라나오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소. 그저 멀리서라도 당신과 천강이를 보기만 해도 나는 만족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오."

설벽운은 흐느껴 울면서 말했다.

"제발 더 이상 아무 말씀 마세요. 제발....."

"그렇소. 나는 더 이상 말할 자격이 없소. 내가 무엇이라고 말해도 때는 이미 늦었으니까."

설벽운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당신도 알겠지만 저는 초류빈에게 너무나 많은 은혜를 입었어요. 저는 그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나 역시도 그에게 많은 것을 빚졌소. 어쩌면 당신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오. 그러니 당신은 나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하오."

이렇게 말한 호유성은 이미 결심을 내린 듯 갑자기 큰걸음으로 다가왔다.

설벽운은 급급하게 물었다.

"무얼 하시려는 것이지요? 혹시....."

호유성은 갑자기 손을 내밀더니 그녀의 혈도를 찍었다. 그리고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당신은 죽어선 안 되며 또 죽을 수 없소.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은 나요. 내가 살아 있으면....."

이렇게 말한 그는 말문이 자꾸 막혀 애를 썼다.

"모든 사람에게 고통만 안겨다 줄 뿐이오. 내가 죽어야 만이 모든 사람이 행복을 누릴 수가 있을 것이오."

그러더니 기름종이로 싼 인화보감을 들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이어서 비바람소리와 함께 흐느낌에 찬 그의 음성이 멀리서 들려왔다.

"얘야, 너의 어머님을 잘 보살펴 드려라. 다만 이 아버지에 대해선...네가 인정을 하든 말든 그것은 상관없다."

호천강은 갑자기 눈을 크게 떴으며 문 밖에 내리고 있는 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더욱 참혹한 것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갑자기 목청을 돋우어 외쳤다.

"아버님, 인정합니다. 저에겐 당신만이 유일한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저만이 당신의 아들이지요."

그는 더욱더 소리 높게 외쳤다.

"저에겐 아버지 이외엔 아무도 필요없습니다."

이것은 아들이 아버지에 대한 참회다. 그리고 부자지간에만 있을 수 있는 감정이며 세상에서 이러한 감정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아버지인 호유성이 아들의 울부짖음을 듣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저 인간이라면 모두에게 참회와 후회를 느낄 때가 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참회했을 때 그 자가 비록 막다른 길에 처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역시 존경받을 수 있는 일이다.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이다. 다만 피만이 모든 과오를 씻을 수 있고 모든 원한을 끝맺음할 수 있다. 생명은 피에 귀속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새로운 생명 역시 피 속에서 태어난다.

여기는 매우 광활한 장원이다. 이 장원은 딴 부호들이 살고 있는 장원과 별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가 보면 사람의 숨을 막히게 하는 살기가 주위에 산재되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가 있다.

호유성은 대문 앞에 있는 돌계단에 올라 서 있었다. 원내는 죽은 듯이 조용했고 마치 아무도 살고 있지 않는 흉가와도 같았다.

하지만 그가 돌계단에 올라서기가 무섭게 갑자기 십여 개의 인영이 유령같이 나타났다.

나타난 사람은 모두 열여덟 명이었고 모두들 노란옷을 입고 있었다. 호유성은 그들의 얼굴을 전혀 분간해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가 않다. 그것은 그들의 얼굴을 일일이 분간해 낼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금전방의 수하들은 거의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말이 없다. 그것은 그들이 전혀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사 말을 한다고 해도 모두가 상관금홍과 똑같은 음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겐 눈도 없다. 그것은 그들이 볼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상관금홍이 그들에게 보도록 허락한 것뿐이다.

그들에게 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작은 귀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관금홍의 명령을 듣기 위한 부속품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에겐 영혼이 없다. 하지만 사지의 움직임은 매우 영활하고 민첩했으며 눈 깜짝할 사이에 호유성을 포위했다.

호유성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보아하니 이곳이 바로 금전방의 총타인 것 같군."

그러자 누군가가 물었다.

"너는 누구냐? 이곳에 무엇하러 온 것이냐?"

"사람을 찾으러 왔다."

"누구를 찾으러 온 것이냐?"

"너희들의 방주 상관금홍을 만나러 온 것이다. 그는 이미 돌아와 있겠지?"

상관금홍의 이름이 호유성의 입에서 나오자 상대방 황의인들은 마치 무서운 마력을 느낀 듯 급히 태도를 바꾸었다.

"방주께선 이미 돌아오셨습니다. 귀하께선....."

호유성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그에게 한 가지 줄 물건이 있어 찾아온 것이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방주께선 지금 손님을 만나실 수가 없습니다.

"그는 아직도 초류빈과 같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만나보아야겠군."

"존성대명이 어떻게 되십니까?"

"나의 성은 호이다. 지금 나는 매우 중요한 물건을 그에게 급히 줘야 한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잠시 멈추더니 이내 단호하게 외쳤다.

"만약 이 대사가 잘못 되는 날엔 너희들이 책임지겠느냐?"

"호씨라고요?...며칠 전에 방주와 결의를 맺으신 분이 바로 당신이오?"

"그렇다."

그의 대답이 막 끝나는 순간 갑자기 한광이 폭사되면서 한 자루의 칼과 두 자루의 검이 전광석화같이 동시에 그를 향해 엄습해 왔다.

호유성은 대노하여 소리쳤다.

"너희들, 이게 무슨 짓이냐?"

그의 고함소리가 비록 청천벽력 같기는 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고 또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호유성은 본능적으로 주먹을 휘두르면서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그의 무공은 무시할 수 없다. 그의 권법은 강호의 독보적인 것으로써 그 위력은 거대한 바위라도 능히 조각낼 수가 있다.

그러나 그에게 지금 무기가 있다면 두 개의 맨주먹뿐이다.

상대의 병기는 모두 스물두 개다. 그 중엔 창, 쌍검, 쌍편 그리고 쌍필이 있다. 그 중에서도 필이 가장 짧은 병기로써 짧은 만큼 가장 무서운 무기다. 그리고 그 수법은 과거 생사판이 독보해 오던 타혈심법이다.

이 무기는 병기보에 기재되어 있으며 풍우쌍류성 향송에 비해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 검은 송문검으로써 검법은 예전과 같고 선기를 잡는 데 으뜸가는 병기이다. 당대법을 쓰고 있는 고수들 중에서 송문검을 이긴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가장 악랄한 것은 역시 칼이다. 구환도, 칼에 달린 환이 한 번씩 울릴 때마다 사람의 혼을 빼앗는다는 말이 있을 만큼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판관필이 호유성의 혈도를 여지없이 강타했다.

그러나 그는 비명도 지르지 않았고 신음도 토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목이 이미 관통되어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다만 피만 분수와 같이 쏟아져 나올 뿐이다.

그리고 그의 몸은 기둥이 넘어지듯 맥없이 쓰러졌다. 위로 치솟았던 피는 때마침 쓰러진 그의 몸에 고스란히 쏟아져 내려왔다.

호유성은 비록 목숨이 끊어지기는 했지만 눈을 감지 않았다. 그는 쓰러진 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상대방 황의인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은 당장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듯했고 얼굴에 묻은 피가 그의 눈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어 가는 광경은 더할 수 없이 비참했다.

그는 단연 죽음을 각오하고 이곳에 왔다. 하지만 그들이 어째서 상관금홍을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일까?

그것은 호유성을 보면 가차없이 죽이라는 상관금홍의 엄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관금홍은 지금 그 어떠한 사람이라도 이 장원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했다. 상관금홍의 이러한 명령은 즉 법이며 그 누구도 위반할 수가 없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기름종이에 싸여 있던 인화보감은 호유성의 품속에서 저절로 떨어져 나왔고 역시 피로 인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주의 깊게 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호유성의 품에서 나온 물건이 사람들에게 중요시 될 수 있을까? 이로 인해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인화보감도 신비의 무림 비급과 같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이것은 인류의 행운일까 아니면 불행일까? 기름종이에 싼 인화보감은 다시 호유성의 품에 넣어졌고 호유성의 시체도 치워졌다. 금전방의 속하들은 시체를 처리하는 데에는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솜씨를 지니고 있다. 그들이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특별하다.

사람이란 확실히 이상한 동물이다. 그들은 왕왕 이해하기 어려운 원인으로써 그 어떠한 물건을 갈구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버리곤 한다.

하지만 정녕 그 얻고자 하는 물건이 나타났을 때 그들은 그것을 소홀히 인식하거나 그것의 귀중함을 인식하지 못하기 일쑤다. 이것이 일류의 우둔함일까 아니면 총명함일까?

낭천에겐 검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에겐 지금 용기와 자신에 대한 신념이 생겨나 있었다.

여기 옆에 대나무 숲이 하나 있었다.

여기에 서 있으면 금전방의 장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낭천은 대나무 하나를 잘라 세 조각을 냈다. 그리고 자신의 옷을 찢어 뭉툭한 곳을 감아 검잡이처럼 해 놓았다.

그의 동작은 매우 신속했고 조금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손은 처음 초류빈과 만날 때처럼 안정되어 있었다.

손소홍은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았는데 매우 신기한 눈초리였다. 하지만 내심 의아함을 금치 못하고 물었다.

"이 검으로 상관금홍을 상대할 수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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