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1일 목요일
56 소이비도 제4권 여정만리
여정만리
그 음성은 매우 나지막했으나 무게가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 냉막하여 감정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향송은 그 음성이 몹시 귀에 익은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음성은 형무명의 입에서만이 나올 수 있었다. 그렇다! 바로 형무명이 온 것이다.
그의 옷은 더할 수 없이 남루했으며 표정도 몹시 초췌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눈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비록 잿빛이었지만 얼음장보다 더욱 차가운 빛은 보는 사람의 피를 동결시키기에 충분했다.
향송은 그의 시선을 의식적으로 피했다. 그리고는 그의 손을 힐끗 쳐다보았다. 형무명의 왼손은 아직도 헝겊으로 받쳐져 있었으며 그 색깔은 마치 돼지의 썩은 간과도 같았다.
그 손은 원래 살인을 할 수 있는 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보기만 해도 구토증을 느끼게 하는 쓸모없는 손이었다.
향송은 담담하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생은 비록 살인하는 방법을 모르지만 살인을 할 수는 있소. 그러나 형선생은 비록 살인하는 방법을 알고 있지만 아쉽게도 살인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하는 것이오."
형무명의 두 눈은 병아리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날카롭게 반짝였다. 그는 향송을 무섭게 쏘아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너는 내 손이 보이지 않느냐?"
향송은 애석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며 대꾸했다.
"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가 본 것은 살인을 하는 손이 아니오!"
형무명은 치미는 화를 억제하지 못해 버럭 폭갈을 터뜨렸다.
"네 손은 살인할 수 있고 나의 오른손은 살인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향송은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형무명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사람도 여러 가지입니다. 어떠한 사람들은 쉽게 죽일 수가 있으나 어떤 사람들은 용이하게 죽일 수가 없습니다."
형무명은 흥미롭다는 듯이 빙그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너는 어떤 종류냐?"
향송은 형무명이 계속해서 난폭한 언사를 사용하자 울화통이 터져 살기를 내뿜으며 냉혹하게 소리쳤다.
"나는 네가 죽일 수 없는 종류이다."
그의 두 눈에서 예리한 흉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그러한 모습은 마치 형무명이 손을 쓰기 전에 그를 처치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형무명은 느닷없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그의 이 웃음 속에는 분노와 원한 그리고 강력한 살기가 내포되어 있었다.
형무명의 웃음 역시 상관금홍처럼 웃는 것이 웃지 않는 때보다 더욱더 잔인하고 공포스러웠다.
향송은 그의 광적인 웃음에 움찔 놀라며 급히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형무명은 웃음을 뚝 그치며 쌀쌀하게 말했다.
"이제보니 너는 나를 증오하고 있었구나!"
향송은 음침하게 웃으며 냉랭하게 대꾸했다.
"너를 증오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
형무명은 담담하게 웃으며 물었다.
"너는 나를 죽이고 싶겠지?"
향송은 침을 꿀꺽 삼키며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응수했다.
"너를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다."
형무명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데 너는 왜 지금까지 기다린 것이냐?"
향송은 가슴을 쭉 펴고 차분한 어조로 대꾸했다.
"살인을 하려면 적당한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쯤은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형무명은 눈을 가늘게 뜨며 싸늘하게 말했다.
"너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느냐?"
향송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바로 그렇다!"
형무명은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애석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아직 내 비밀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게 안타깝구나."
향송이 약간 궁금하다는 빛을 띠며 반문했다.
"도대체 무슨 비밀이냐?"
형무명은 독사 같은 눈초리로 향송의 목을 뚫어져라 노려보면서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나의 오른손은 살인을 할 수 있으며, 왼손보다 더욱더 빠르다는 것을 너는 모르고 있었다!"
그 소리가 떨어지는 순간 형무명의 검은 이미 향송의 목을 정확하게 관통시키고 있었다. 이것은 정말 너무나도 신속무비하고 정확했다.
그가 언제 검을 뽑아 어떻게 향송의 목을 관통시켰는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한광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검은 이미 향송의 목을 여지없이 관통시켰고 그 순간 향송은 숨통이 끊어진 것이다.
향송의 두 눈은 튀어나올 듯이 돌출되었다. 죽으면서도 형무명의 빠른 검법을 믿지 못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귀두도와 상문도를 가지고 있는 두 사람도 혼비백산하여 멍하니 초점 잃은 눈으로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사색이 되어 부들부들 떨면서 엉거주춤 뒤로 물러났다.
형무명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죽음의 냄새를 물씬 풍기면서 음산하게 말했다.
"너희들이 내 비밀을 알고도 이곳을 나갈 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 소리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한광이 다시 번쩍했다. 이어서 시뻘건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그들이 있는 작은 방 안을 붉게 물들였다.
좋은 약은 대부분 쓰지만 독약은 달콤할 때가 많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이것과 같이 이상한 것이다.
가장 무섭고 가장 추악한 것이 그 어떤 순간에서 볼때 그 어떤 것보다 더 아름답고 또 선하게 보인다.
그래서 살인할 때의 검빛은 더할 수 없이 밝고 막 흘러나온 선혈은 유난히도 선명하고 아름답게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한순간의 감각에 지나지 않으며 진실만이 영원불멸의 것이라는 말이 있다. 진실은 절대 아름답지 못하다.
강호인들이 사용하는 검은 살인을 하는 검이지만 일반에서 사용하는 과도나 식도와 마찬가지로 모두 다 쇠붙이에 불과하다.
결국 검의 종류가 문제가 아니라 그 검을 사용하는 방법이며 목적이 문제인 것이다. 즉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적절하게 사용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간혹 어떤 사람은 어느 한순간의 아름다움만 잡으면 충분하며 영원한 일에 대해선 도외시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향송은 풍우쌍유성 그리고 금전방의 제팔 문파의 타주로서 무림에 명성을 떨쳤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싸늘한 시체가 되었으며 보통 사람의 시체와 별로 다른 점이 없었다.
설소하는 오히려 장탄식을 했다. 그녀는 오래도록 참고 참았다가 이제야 한숨을 내쉰 것이다. 그녀는 형무명을 정면으로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저를 구하러 오실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요."
형무명은 고개도 들지 않고 냉혹하게 말했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구하러 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설소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뜻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형무명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쏘아보며 싸늘한 음성으로 말을 했다.
"당신이 무엇을 안다는 것이오?"
그녀는 형무명을 마주 노려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이 저를 구하러 온 것은 상관금홍이 저를 죽이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형무명은 일언반구도 없이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설소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은 그를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을 정도로 증오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파괴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형무명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는 것처럼 무표정하게 서 있을 뿐이다.
설소하는 다시 탄식을 터뜨리면서 침울하게 말했다.
"지금에서야 저는 당신이라는 존재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상관비도 당신이 죽였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형무명은 갑자기 시선을 옮겨 자기의 수중에 있는 검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소!"
설소하는 비시시 웃으면서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당신이 절대로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만약 당신이 나를 죽이면 그것은 상관금홍의 뜻대로 되는 것이에요."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간드러진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당신은 저를 죽이지 않고 어디론가 데려갈 것이 분명해요!"
형무명은 고개를 쳐들어 그녀를 쏘아보며 냉막하게 반문했다.
"데려간다고?"
설소하는 형무명의 얼굴을 꿰뚫을 듯이 쏘아보며 신념에 찬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은 내가 상관금홍의 손에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비밀을 누설하는 것도 원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당신은 저를 데리고 갈 거죠!"
그녀의 음성은 어느덧 더할 수 없이 부드러워졌다.
"전 당신을 기꺼이 따라가겠어요. 당신이 어딜 가든지 저는 그림자처럼 뒤따르겠어요!"
형무명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서서히 고개를 들어 낭천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제야 낭천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낭천은 반대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었다.
설소하는 낭천을 냉막하게 쏘아보더니 그의 앞으로 걸어가 낭천의 얼굴에 느닷없이 침을 서너 번 뱉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또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설소하는 드디어 형무명을 따라서 떠나갔다.
낭천은 제자리에 선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입 안이 바싹바싹 타들어 갔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덧 날이 밝았다. 그래도 낭천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또 얼마나 지났을까...그는 쓰러졌다. 피로 범벅이 된 방바닥의 시체 옆에 쓰러진 것이다
낭천, 그는 지금 생사의 기로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이다.
<0O일 OO시, 서문 십리 밖 정자 옆에 있는 숲에서 기다리겠소! 상관금홍.>
이윽고 본격적인 겨울로 접어들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마지막 잎새까지 매서운 북서풍에 휘날려 어딘가로 사라졌고 나무엔 앙상한 가지만이 남게 되었다.
이 편지의 색은 마치 낙엽과 같이 노란색을 띠고 있었다. 죽음의 냄새가 풍기는 노란색, 노란 것은 생명이 없으며 노란 것은 무서운 것이다.
이 편지의 내용은 지극히 간단했고 명확했다. 상관금홍이 살인을 하는 방법과 똑같이 필요없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이 편지는 점원이 가져온 것이다.
점원은 이 편지를 가지고 올때 마치 중풍에 걸린 사람처럼 전신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지금 이 편지는 손소홍의 손에 들려 있다. 그 편지를 들고 있는 손소홍의 손도 매우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모레! 바로 모레군요."
손소홍은 탄식을 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일력을 보았는데 모레는 일진이 몹시 나쁜 날이에요!"
초류빈은 소리없이 웃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살인을 하는 데도 좋은 날을 택해야 하오?"
손소홍은 한참 동안 초류빈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느닷없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당신은 그를 죽이지 않을 수 없나요?"
초류빈은 입술을 꼭 다물었으며 웃음도 점점 사라졌다. 손소홍은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휙하고 밖으로 나갔다.
초류빈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잠시 앉아 있자 손소홍은 문방사우를 들고 다시 들어왔다.
그녀는 묵묵히 먹을 간 다음 종이를 펼쳤다. 그리고는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말씀하세요! 제가 받아 쓰겠어요."
초류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엇을 말하라는 것이오?"
손소홍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나, 이루지 못한 소원을 말씀하세요."
그녀의 음성은 지극히 안정되어 있는 듯했으나 붓을 잡고 있는 손은 격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초류빈은 다시 빙그레 웃었다.
"나더러 유언을 남기라는 것이오? 나는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지 않소."
손소홍은 안색이 미미하게 변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죽은 사람이 유언을 남기는 것을 보았나요?"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손에 쥐고 있는 붓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초류빈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두 눈은 촉촉히 젖기 시작했고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무슨 일이든지 다 얘기하세요. 예를 들어 낭천에 대해서 미처 얘기하지 못했던 것이나, 그에게 부탁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 말씀하세요!"
초류빈의 두 눈에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빛이 가득 채워졌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없소!"
초류빈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없다고요?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인가요?"
초류빈은 암담한 표정으로 서서히 말을 꺼냈다.
"나는 그에게 남을 죽이지 말라고 부탁할 수는 있어도 남을 사랑하지 못하게 할 수는 없소!"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쳐들어 초류빈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만약 딴 사람이 그를 죽이려 한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초류빈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와서 그를 죽일 사람이 또 누가 있겠소?"
손소홍은 이를 악물며 야멸차게 말을 뱉었다.
"상관금홍!"
초류빈은 고뇌가 깃들인 눈빛으로 허탈하게 말했다.
"상관금홍이 그를 놔둔 이상 절대로 그를 살해하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벌써 죽었을 것이오."
손소홍은 우울한 표정으로 암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초류빈은 창 밖을 바라보면서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리 긴 꿈이라 해도 언젠가는 깨어나기 마련이오. 그가 맑은 정신을 되찾았을 땐 어떠한 일이라도 그는 혼자 해낼 수 있을 것이오!"
"그럼 그녀는 어떡하죠?"
그녀는 이 한마디를 있는 힘을 다해서 한 것 같았다. 초류빈은 물론 손소홍이 말한 그녀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엔 고통의 빛이 더욱더 짙어졌다.
초류빈은 별안간 벌떡 일어나더니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손소홍은 다시 고개를 떨구며 힘없이 말했다.
"하지만 무슨 할 얘기가 있으실 게 아니에요....."
초류빈은 그녀의 말을 가로채며 울부짖는 것처럼 외쳤다.
"없소! 나에겐 할 얘기 없소!"
손소홍은 울먹이는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초류빈은 창 밖을 내다보면서 우수에 잠긴 어조로 말했다.
"그녀가 살아 있는 이상 그녀를 돌볼 사람이 있을 것이오. 그녀가 죽어도 그녀를 매장해 줄 사람이 있으니 내가 그녀에게 구태여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소! 내가 죽는다면 오히려 그녀에게는 좋을 것이오."
초류빈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으나 그의 어조에는 무한한 원한과 회의가 깃들여 있었다. 그는 납덩이처럼 굳은 얼굴로 창 밖을 계속 응시했다. 그는 어째서 고개를 돌리지 않는 것일까.
손소홍은 그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려 종이 위로 떨어졌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가련하도록 처절했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녀는 급히 눈물을 닦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당신은 무슨 말인가 반드시 해야 돼요. 당신은 어째서 제게 얘기해 주지 않는 것이지요?"
초류빈은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가 낭자에게 굳이 말해 줄 필요가 뭐 있겠소?"
"당신이 한 얘기는 제가 다 기억해 두겠어요. 그리고 당신이 죽으면 제가 대신해서 하나씩 해결해 드리겠어요. 그런 후에....."
초류빈은 몸을 홱 돌리며 다그치듯 물었다.
"그런 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오?"
손소홍은 처량하게 웃었다.
"그런 후에 저도 죽겠어요!"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꼭 쥐며 더 이상 초류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초류빈은 나직하게 물었다.
"낭자...낭자가 뭣 때문에 죽는다는 것이오?"
그녀는 흑백이 분명한 눈을 반짝이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죽지 않을 수 없어요! 만약 당신이 죽으면 저의 삶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스러운 것이 돼요."
그녀는 초류빈을 똑바로 쳐다보았으나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은 매우 평온했으나 그녀는 이미 확고부동한 결심을 굳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결심은 어느 누구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초류빈은 가슴이 뭉클했으며 찢어지는 듯이 아팠다. 그 아픔을 견디지 못한 그는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그의 심한 기침은 방안 공기를 더욱 처량하게 했다.
한참 후 기침이 멎자 손소홍은 탄식을 하며 말을 꺼냈다.
"제 삶을 유지시키시려면 당신은 정말 죽지 말아야 돼요. 상관금홍이 꼭 당신과 결투를 하자고 하는 것은 아니에요. 사실 그는 당신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는 거예요."
그녀는 초류빈의 눈치를 살피고 다시 말했다.
"우리는 멀리 떠날 수 있어요. 저와 함께 우리 집으로 가요. 그곳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상관금홍이 쇠신발이 닳도록 찾아헤매도 결코 못찾을 거예요."
초류빈은 아무 말없이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바로 이때, 갑자기 손노선생의 탄식어린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 그는 결코 가지 않을 것이다."
손소홍은 발을 동동 구르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할아버지께선 그것을 어떻게 아신단 말씀이세요?"
"그가 만약 갈 사람 같으면 너는 결코 그를 이렇게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손소홍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초류빈은 몹시 괴로운 표정으로 침울하게 말했다.
"선배님....."
손노선생은 손을 흔들어 그의 말을 가로챘다.
"나는 당신의 뜻을 잘 알고 있지. 그러나 나는 그로 하여금 살인을 하지 못하게 할 수는 있어도 누굴 사랑하는 것을 막을 순 없지 않나!"
사랑! 애정! 이것은 그 누구도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초류빈은 다시 기침을 했으며 이번에는 더욱 심했다.
서문 십 리 밖에 있는 정자 옆의 숲. 정자는 팔각정으로 산 밑에 자리하고 있는 숲 밖에 우뚝 서 있었다. 숲은 겨울을 맞아 앙상한 나무만이 남았고 팔각정 난간에 칠해져 있는 핏빛처럼 검붉은 단청도 대부분이 벗겨져 있어 한층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북서풍이 혹독하게 불어닥치고 있는 숲은 더할 수 없이 처량했다.
모레! 내일 모레! 석양이 지자 하루해가 다시 저물기 시작했다.
모레, 석양이 질 무렵엔 바로 이곳에서 초류빈과 상관금홍이 피의 대혈전을 벌이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 일전은 무림 유사 이래 가장 경천동지할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초류빈은 그 광경을 그리면서 장탄식을 터뜨리며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석양 노을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광경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죽음에 직면하고 있는 사람의 눈에도 이 영원한 석양이 역시 아름답게 보일까?
손노선생과 손소홍은 정자 안에 조용히 앉아 있었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 사람의 지금 심정은 어떨까.
아름다운 손소홍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직 결투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 그는 뭣 때문에 먼저 이곳에 온 것이죠?"
손노선생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꺼냈다.
"고수들의 결투는 비단 무공의 강약을 보아야 할 뿐만 아니라 천시(天時)와 지리(地理) 그리고 인물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상관금홍이 이곳을 결투 장소로 선택한 것은 물론 그 나름대로 뜻이 있기 때문이다."
손소홍은 눈을 반짝이며 궁금한 빛을 띠고 말했다.
"무슨 뜻이 있다는 것이죠?"
손노선생은 헛기침을 가볍게 한 후 서서히 말문을 열었다.
"그는 이곳의 지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어쩌면 우선 이곳에다 미리 매복을 해 놓았을지도 모른다."
손소홍은 눈을 휘둥그래 뜨며 반문했다.
"그래서 초류빈이 이곳에 와서 지형을 기억하고 또 상관금홍이 어떤 곳에다 매복을 설치할 가능성이 있는지 살펴야 한다는 것인가요?"
손노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자고 이래 명장들은 큰 대전을 앞두고는 반드시 전장에 나가서 순찰을 했다고 한다. 어떠한 전투나 싸움이라도 만약 어느 한쪽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면 그쪽은 십중팔구 승리하게 된다."
손소홍은 초류빈을 가리키며 의아한 음성을 토했다.
"그런데 그는 어째서 이곳을 왔다갔다만 하는 것이지요?"
손노선생도 초류빈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가 여기서 왔다갔다 하는 데는 물론 목적이 있지."
손소홍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다그쳐 물었다.
"그 목적이 무엇이죠?"
손소홍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는 이곳의 토질을 조사하고 있는 것이다. 딱딱한지 부드러운지 아니면 건조한지를 조사하고 있단다."
손소홍은 더욱 의아스러운 빛을 띠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지요?"
손노선생은 온화한 표정으로 자상하게 말했다.
"토질이 다르면 경공술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똑같은 힘을 발휘할 때 만약 부드럽고 젖은 땅이라면 이 장밖에 뛰어오르지 못하지만, 건조하면서 딱딱한 땅이라면 이 장 다섯 치 정도는 뛰어오를 수가 있단다."
손소홍은 눈을 깜박이며 여전히 의아스러운 빛을 띠었다.
"그렇다고 해도 다섯 치 정도의 차이밖에 없지 않아요."
손노선생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고수끼리의 싸움에서는 한 치의 차이만 나도 치명적인 것이 된다."
이때 초류빈이 갑자기 몸을 돌려 정자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그는 정자 밖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석양이 찬란하게 비추고 있는 숲 속을 넋을 잃은 채 바라보았다.
손소홍은 그 광경을 보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가 거기서 넋을 잃고 서 있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인가요?"
손노선생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자신있게 말했다.
"이틀 후 그가 이곳에 올땐 상관금홍이 필시 먼저 와 있을 것이다."
손소홍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그쳐 물었다.
"그것을 어떻게 알지요?"
손노선생은 서슴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먼저 온 사람이 유리한 곳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아빠진 상관금홍이 어찌 그런 기회를 놓칠 수 있겠느냐!"
손소홍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초류빈이 먼저 와서 유리한 곳을 차지할 수도 있잖아요?"
손노선생은 한숨을 내쉬며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쩌면 그는 남들과 같이 앞뒤다툼 하기를 원하지 않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어쩌면 따로 속셈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이렇게 말한 그는 별안간 호탕하게 웃고 나서 말을 이었다.
"하하하...초류빈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의 속셈에 대해선 나도 모를 때가 많다."
손소홍은 주위를 둘러보며 미흡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보기엔 이곳의 지리는 다 비슷한데...어느 곳이 유리한지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어요."
손노선생은 피식 웃으며 초류빈을 가리켰다.
"유리한 지리는 바로 그가 지금 서 있는 곳이다!"
손소홍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그가 지금 서 있는 곳이 다른 곳과 어떻게 다르다는 거예요?"
손노선생은 초류빈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상관금홍이 저곳에 서 있게 되면 초류빈은 두말할 나위없이 그의 맞은편에 서야 할 것이다."
그녀는 초생달 같은 눈썹을 찌푸리며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어째서요?"
손노선생은 손을 들어 서산을 가리키며 한마디 한마디 분명하게 말했다.
"결투할 시간은 해가 서산으로 질 때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갑자기 호들갑스럽게 말을 가로챘다.
"이제야 알겠어요. 석양이 이쪽으로 비추고 있으니까 이쪽에 서 있는 사람은 태양의 광선을 받아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상대에게 손을 쓸 기회를 주는 것이죠?"
손노선생은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것이다!"
손소홍은 배시시 웃으며 초류빈이 서 있는 곳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상관금홍이 저곳에 서 있을 것이 분명하다면 그는 저기에 서서 뭘하는 것이죠?"
손노선생은 노을을 감상이라도 하듯 주시하며 온화한 음성으로 말해 주었다.
"그가 이곳에 서 있는 것은 이곳에 어떤 약점들이 있는지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야만이 그도 유리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지 않겠니?"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 멈추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저것을 보아라! 석양이 숲 위를 비추고 있으니까 또 반짝거리는 빛이 있지 않느냐? 저 나뭇가지 위엔 서리가 끼어 있다. 그래서 이곳에 있는 사람은 눈부신 광채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때 초류빈은 이미 맞은편 나무 밑에 서 있었다. 손소홍은 영롱한 눈을 초류빈의 행동에 따라 움직였다.
순간, 눈부신 광채가 번쩍이며 그녀의 눈으로 폭사되어 오자 그녀는 저절로 눈을 감았다.
그 나무 위엔 서리가 가장 많이 쌓여 있었던 터라 태양 광선을 받는 각도가 제일 좋았다. 그러므로 반사되는 광선도 제일 눈부셨다.
손노선생은 빙그레 웃으면서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제야 알겠느냐?"
손소홍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무 밑에 서 있던 초류빈은 느닷없이 신형을 날려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는 마치 민첩한 원숭이처럼 경쾌하게 몸을 움직여 나뭇가지 하나를 밟아 보았다.
손노선생은 그의 비호처럼 날렵한 신법에 혀를 내두르며 탄식을 했다.
"그의 비도탈명이 신기에 가깝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의 경공술을 따를 자도 매우 드물겠구나!"
손소홍도 경이에 찬 표정으로 초류빈을 바라보았다.
"정말 굉장한 경공술이군요. 그런데 나무 위로 올라간 것은 또 무슨 이유 때문이지요?"
손노선생은 초류빈이 올라가 있는 나무를 쳐다보았다.
"지금 그는 나뭇가지의 강약을 시험해 보는 것이다. 저렇게 하는 데도 두 가지 원인이 있지."
손소홍은 호기심에 가득찬 눈을 영롱하게 반짝이며 재차 물었다.
"그 두 가지 원인이 무엇이지요?"
손노선생은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첫째는 상관금홍이 나뭇가지 위에다 수작을 했을 때 방비하기 위한 것이다."
손소홍은 미간을 찌푸리며 재촉해 물어왔다.
"어떤 수작이지요?"
손노선생은 그녀를 주시하며 오히려 반문했다.
"그가 상관금홍과 마주섰을 때 나뭇가지가 갑자기 부러지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녀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가지가 부러지면 물론 밑으로 떨어지겠지요."
이렇게 되자 손노선생이 묻고 그녀가 대답했다.
"나뭇가지가 어디로 떨어질 것 같으냐?"
그녀의 대답은 짤막했다.
"땅으로 떨어지지요."
이렇게 말한 그녀는 갑자기 눈빛을 번쩍이며 급히 말을 이었다.
"어쩌면 그의 머리 위나 얼굴 앞으로 떨어질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초류빈은 정신이 흐트러질 것이며 상관금홍은 그 기회를 이용해 살수를 전개할 것이에요."
손노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또 있지. 만부득이 할 경우 그는 나뭇가지 위로 후퇴하는 수밖에 없다. 만약 경공을 전개해 열세를 만회하게 되면 나뭇가지는 그들의 전장이 될 것이다."
손소홍은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그는 나뭇가지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조사하는 것이군요."
손노선생은 약간 피로한 기색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는 이제야 알았구나."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서야 알 것 같군요. 저는 결투를 하기 전에도 이렇게 많은 탐색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어요."
그는 정색을 하며 침중한 음성으로 설명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어느 경지까지 이르게 되면 그것이 곧 학문이다. 옷을 만들거나 음식을 장만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손노선생은 초류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들의 결투 날짜는 비록 이틀 후지만 사실은 그들이 처음 만날 때부터 결투는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들은 피차 간에 상대의 인내력과 지혜를 검토해 왔고 그동안의 승부는 이미 결정났다. 진짜 손을 쓰게 되면 단 일순간에 모든 것이 해결된다."
손소홍은 애석하다는 표정으로 우울하게 말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일순간의 일밖에 볼 수 없어요. 그 일순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심을 해왔는지 그 누가 알겠어요."
손노선생은 담뱃대를 꺼내 불을 당긴 후 한 모금 빨았다.
"진정한 한 고수가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진정 고독한 것이다. 그들은 남들이 그의 찬란한 일면밖에 볼 수 없는 대신 그의 피나는 희생은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은 고수의 이면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모르고 있다."
그녀는 별안간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옷자락을 매만졌다.
"그렇지만 진정한 고수들은 남들의 이해를 필요로 하고 있을까요?"
바로 이때였다. 초류빈이 나무 위에서 거대한 독수리처럼 날아 내려오더니 즉시 정자 위로 다시 신형을 날렸다.
손노선생은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들이마시고는 이내 길게 내뿜으면서 감탄어린 음성을 토했다.
"남들은 초류빈이 몹시 경솔하고 소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의 이러한 세심한 면을 누가 알겠느냐. 진짜 중요한 때가 오면 그는 어느 한 곳도 소홀하게 넘기지 않는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침울하게 입을 열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너무나 많이 소홀해 왔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말꼬리를 흐린 그녀는 번쩍 고개를 쳐들어 손노선생을 바라보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이 일전이 벌써 시작되었다면 할아버지께서는 누가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손노선생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 누구도 우세를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손소홍은 마음이 불안할 때면 입술을 깨무는 습관이 있었다.
손노선생은 갑자기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그녀는 움찔 놀라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제가 보기엔...상관금홍은 자신에 대해서 깊은 신념(信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손노선생은 고개를 끄덕여 맞장구를 쳤다.
"그렇다! 그것은 요 몇 년 동안 그가 행했던 일이 매우 순조로웠으며 실패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죽었다는 것은 그에게 더할 수 없이 큰 타격을 안겨다 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리고 형무명이 그의 곁에서 떠났으니 그에 대한 손실도 매우 클 것이에요."
손노선생은 팔짱을 끼며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침울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그래서 이 일전은 비단 두 사람의 생사와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무림의 운명과도 크나큰 관계가 있다."
손소홍은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다그쳐 물었다.
"그렇게 큰 관계가 있나요?"
손노선생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이 일전에서 상관금홍이 승리한다면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천하무림은 그의 손아귀에 떨어질 것이며 당금 무림에서 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눈알을 굴리면서 급히 말했다.
"저는 이제야 이 일전에서 그가 절대 이길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어요!"
손노선생은 의아한 빛을 띠며 다그치듯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손소홍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확신하듯 말했다.
"그의 비도탈명은 지금까지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잖아요."
손노선생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탄식했다.
"상관금홍도 지금까지 패한 적이 없다."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할아버지께선 그가 한 번 패한 적이 있다는 것을 잊으셨나요?"
손노선생은 의혹스러운 눈을 깜박거렸다.
"언제 패했다는 거냐?"
그녀는 응석을 부리듯 애교스럽게 대답했다.
"그날 낙양성 밖에 있는 정자 안에서 그는 할아버지의 손에 패한 적이 있잖아요."
손노선생은 갑자기 입을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노선생의 손을 잡고 더욱 애교를 부렸다.
"저는 지금껏 할아버지한테 그 어떤 부탁도 해 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 한 가지만 부탁드리겠어요."
손노선생은 담배를 몇 모금 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얘기해 봐라."
"제발 부탁이에요. 초류빈이 죽지 않게만 해 주세요. 절대 죽게 해선 안 돼요....."
이렇게 말한 그녀는 갑자기 손노선생의 앞에 무릎을 꿇더니 애절하게 말을 이었다.
"이 세상에서 상관금홍을 제거시킬 수 있는 사람은 할아버지뿐이에요. 그리고 상관금홍만이 초류빈을 구할 수가 있어요. 만약 그가 죽는다면 저도 살 수 없어요."
손노선생의 두 눈은 갑자기 수심으로 가득찼으며 마치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입가엔 자상한 미소가 떠 있었다. 손노선생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더할 수 없이 온화한 음성로 말했다.
"너는 내 손녀 중에 자랑스러운 애다. 만약 네가 죽으면 또 누가 내 수염을 뽑고 내 머리를 땋아 주겠느냐?"
그녀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럼 할아버지께선 승낙해 주시는 거예요?"
손노선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애롭게 웃었다.
"네가 지금까지 얘기한 것은 바로 나로 하여금 이 일에 대해서 승낙해 주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지 않느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숙였다.
"할아버지께서는 아시면서도...여자가 크면 결코 잡아올 수 없게 되고 그때 여자의 마음은 밖으로 빠져나가는 거예요."
손노선생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너의 얼굴이 계속 이렇게 두꺼우면 남이 너를 받아들인다고 장담하지 못하겠다."
그녀는 손노선생의 귀에다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알고 있어요. 그가 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해도 저는 그가 필요하도록 할 방법이 있어요."
손노선생은 그녀를 와락 껴안으며 자상하게 말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손녀다. 하지만 넌 너무나 장난이 심하고 또 간덩이가 커서 시집가지 못할까 봐 매우 걱정했단다. 그런데 지금은 네가 좋아하는 사람을 찾았으니 나도 너만치 기쁘구나."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기쁨에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그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저의 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리고 그가 저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도 그의 복이에요. 저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어요."
손노선생은 다시 호탕하게 웃으며 대견스러워 했다.
"하하하...모르긴 해도 너 같은 아이는 이 세상에 다시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손노선생의 품에 안긴 채 그의 주름진 뺨에다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는 기쁨은 이루 형용할 수 없으며 당장이라도 하늘을 훨훨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녀에게는 가장 자랑할 만한 할아버지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사랑할 수 있는 님이 생겼기 때문이다.
혈육의 정과 남녀간의 애정을 모두 소유하게 되었는데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녀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앞길에는 무한한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때 대지는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황혼이 어둠의 장막으로 가려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사랑을 하면 눈이 멀고 바보가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 말은 듣기에 매우 평범한 것 같으나 거기에는 확실히 불변의 진리가 담겨 있다.
그녀가 만약 이때 눈을 뜬다면 손노선생의 눈에 담긴 고통과 비애가 얼마나 큰 것인지 발견했을 것이다. 설사 딴 사람이 발견했다고 해도 무엇 때문에 비통해 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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