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1일 목요일

60 소이비도 제4권 야릇한 관계





야릇한 관계



소슬한 바람이 부는 가운데 가랑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손소홍은 석고상처럼 굳어진 채로 마냥 빗속에 서 있었다.

그녀는 목청이 터져라고 무엇인가 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기력이 없었다. 그녀는 앞으로 뛰쳐나가려 했지만 역시 몸이 굳어져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위가 오무라들면서 구토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심지어 눈물마저 흘릴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초류빈은 그녀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지금도 역시 멈추지 않고 천천히 앞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차츰 정자 앞으로 다가가 상관금홍을 주시했다.

상관금홍은 아예 그에게 눈길도 돌리지 않고 수중에 쥐고 있는 담뱃대를 응시하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은 늦게 당도했소."

초류빈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렇소. 나는 늦은 것 같소."

그는 단지 자신의 입술이 말라 혓바닥이 마치 녹슬은 철판 같은 느낌이었다. 그로선 난생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두려움이라는 말인가?

상관금홍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늦었다는 것은 오지 않은 것보다는 낫소."

"내가 꼭 오리라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었을 텐데."

"하지만 애석하게도 와야 할 사람이 늦게 당도했고 오지 않아도 될 사람이 먼저 왔소."

이 한마디가 끝나자 두 사람은 모두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았다.

그들은 확고한 자신이 생길 때를 기다려 출수할 모양인 것 같았다. 그들이 어떠한 행동을 취하는 순간 양단간의 사생결판이 지어질 것이 분명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두운 숲 속에 또 다른 두 사람이 도사리고 있었다. 두 쌍의 눈, 네 개의 눈동자는 계속 초류빈과 상관금홍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중 한 쌍의 눈동자는 가을 호수처럼 맑고 햇빛처럼 밝았다.

눈을 까뒤집고 세상 천지를 뒤진다 해도 이렇게 아름다운 눈동자는 다시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다른 한 쌍의 눈동자는 완전히 죽어 있는 잿빛이었다. 아마 지옥에서도 이보다 무서운 눈동자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어둠 속에 설사 악귀가 숨어 있었다 해도 아마 벌써 놀란 나머지 줄행랑을 쳤을 것이다. 이 한 쌍의 눈동자는 염라대왕이 보아도 오싹 소름이 끼칠 것이다.

그들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설소하와 형무명이다. 그들은 이곳에 온 지 오래 된 것 같았다. 설소하는 형무명에게 몸을 바싹 기댄 채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싸고 있었다. 형무명은 아무 소리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설소하가 홀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만약 그를 죽이려면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예요. 이같이 좋은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거예요."

형무명은 냉랭하게 그녀의 말을 받았다.

"지금은 그를 죽일 사람이 있으니 구태여 내가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소."

설소하는 대뜸 눈을 흘겼다.

"내가 죽이라고 하는 자는 초류빈이 아니에요."

"그럼 누구를 죽이란 말이오?"

"상관금홍이에요, 상관금홍!"

그녀는 상관금홍의 이름을 내뱉으면서 흥분한 탓인지 전신에 가벼운 경련이 일며 손톱은 형무명의 살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형무명은 아무런 감각도 없는 듯 여전히 돌부처마냥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엔 한 가닥 기이한 광채가 번뜩였다. 그것은 마치 지옥에서 새어나오는 불길과 같았다.

설소하는 재촉하듯 힘주어 발을 이어갔다.

"그는 온 정신을 기울여 초류빈을 상대해야 하므로 절대 다른 사람에게는 신경쓸 여지가 없을 거예요. 더구나 그는 아직 당신 오른손의 비밀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영락없이 당신 손에 죽게 될 거예요."

형무명은 그래도 움직이지 않는다.

설소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금전방에 대해 당신보다 더 많이 아는 자는 없어요. 그를 죽인다면 당신은 자연적으로 금전방의 방주가 될 수 있어요."

그녀는 나직하게 숨을 몰아쉬고 있다. 그 숨소리는 영락없이 발정한 한 마리의 암캐였다. 그녀는 쌕쌕 숨을 몰아쉬며 다시 말했다.

"당신이 설사 금전방의 방주가 될 생각이 없다 해도 최소한 상관금홍에게 당신의 무서운 일면을 보여줘야 해요. 그가 지옥에 가서라도 후회하도록 말이에요."

형무명의 눈에서 만약 지옥의 불길이 내뿜어지고 있다면 지금 그 불길은 활활 타오를 것이다.

설소하는 다시 그를 재촉했다.

"어서! 어서 나가세요. 이번 기회를 놓치면 평생토록 후회할 거예요."

형무명은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나가겠소!"

설소하는 그제야 암암리에 숨을 내쉬며 생긋이 웃음을 보였다.

"어서 가세요. 저는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겠어요. 당신이 이번 일만 성공한다면 저는 영원히 당신 소유가 될 거예요."

형무명은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나를 기다릴 필요는 없소!"

설소하는 그 말에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그건....."

형무명은 즉시 그녀의 말을 받았다.

"당신도 나와 함께 밖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오."

설소하는 홀연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금시 공포의 빛이 짙게 깔리며 뒷걸음질하려 했으나 형무명은 이미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설소하는 자주 눈물을 흘리는 여자가 아니다. 그녀는 여자가 눈물로써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눈물 외에도 보다 좋은 방법이 많았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고통을 참지 못해 눈물이 새어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손목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대관절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형무명은 그녀의 말을 중간에서 끊어 버렸다.

"당신은 여지껏 살아오면서 단 한 가지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 같소."

"과오라뇨?"

형무명은 한마디 한마디 뚜렷하게 내뱉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낭천과 같이 당신을 좋아한다는 생각 말이오!"

초류빈은 숲을 등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설소하와 형무명이 걸어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상관금홍의 얼굴에 기이한 변화가 이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상관금홍의 주의력이 분산되다니 실로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생전 남에게 이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앞으로도 절대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초류빈은 이 기회를 이용하지 못했다.

비도탈명은 그의 수중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이미 등뒤에서 엄습해 오는 무서운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비도를 전개하는 데 있어 비단 손을 사용할 뿐 아니라 온 정신, 온 정력을 동원해야만 했다. 그의 비도가 만약 손에서 벗어난다면 등뒤에서 가해 오는 공격은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는 일곱 자 가량 미끄러져 즉시 형무명의 얼굴을 보았다.

형무명은 이미 그의 뒤에 와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비로소 설소하를 보았다. 그녀가 이렇게 비참한 꼴을 하고 있는 것은 처음 본다.

비는 더욱 굵게 쏟아졌다.

모든 사람의 몸은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높이 받쳐든 호롱불은 이미 점차 처마 밑으로 옮겨졌다. 불빛은 먼곳까지 미치지 못했다.

형무명은 등불이 미치지 않는 곳에 서 있었다. 그 자체는 하나의 그림자이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체 같았다.

그러나 초류빈의 눈길은 상관금홍에게서 옮겨져 그를 응시했다. 상관금홍의 눈길은 초류빈의 옆에서 옮겨져 그를 주시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모두 이런 싸움의 승부를 판가름하는 열쇠가 그들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게 아니라 형무명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형무명은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여지껏 살아오면서 이렇게 광소를 터뜨린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허리를 구부리면서까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상관금홍은 홀연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마음껏 웃어라. 이 자리에서 웃을 수 있는 자는 오직 너밖에 없으니까."

형무명은 그제야 웃음을 죽이고 즉시 반문했다.

"당신은 웃고 싶지 않소?"

"나는 웃을 수가 없다."

"어째서 웃을 수 없다는 건지....."

"그 이유를 너는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렇소. 나는 알고 있소. 분명히 알고 있소."

그는 다시 한 차례 야릇한 웃음을 발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네들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소. 당신네들이 그 사실을 안다면 나에게 감히 출수하지 못할 것이오."

그렇다! 그의 말은 결코 과장된 게 아니다. 초류빈과 상관금홍은 감히 그에게 출수할 수 없었다.

상관금홍이 만약 출수하여 그를 죽인다 해도 그 자신 역시 초류빈에 의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는 물론 초류빈에게 기회를 줄 리가 만무하다. 초류빈의 상황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형무명은 다시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을 도와 초류빈을 죽일 수 있지만 반대로 그를 도와 당신을 죽일 수도 있소."

상관금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능히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믿고 있다고? 당신은 나를 폐인으로 보고 있지 않단 말이오?"

상관금홍은 다시 한숨을 내리쉬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못 보는 일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잘못 보았다고 어떻게 장담을 할 수 있겠소? 어쩌면 나는 진짜 폐인인지도 모르잖소?"

"너의 오른손은 왼손보다 더 힘이 세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소?"

"설소하는 연약한 여자가 아니다. 그녀를 한 손으로 제압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형무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정확히 보았소. 그러나 애석하게도 너무 늦었소."

상관금홍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나는 비단 잘못 보았을 뿐 아니라 잘못 행동했다."

"당신은 이제야 나에 대한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단 말이오?"

"그렇다. 나의 과오였다. 처음부터 너를 죽였어야 했을 텐데."

"그럼 무엇 때문에 죽이지 않았소?"

"차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당신에게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 있소?"

상관금홍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나도 역시 인간이다."

형무명의 표정은 어둠에 잠겨 자세히 볼 수 없었으나 음성은 시종일관 냉랭했다.

"나도 인간이기 때문에 차마 당신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단 말이오?"

상관금홍은 대꾸하기에 앞서 우선 설소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분명히 나를 죽이라고 했겠지?"

"그렇소."

"네가 만일 정말 나를 죽일 생각이 있다면 그녀를 데리고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소하는 돌연 대소를 터뜨렸다. 그녀가 비에 흠뻑 젖은 채 쓰러져 갑자기 대소를 터뜨리자 무덤에서 나온 산발귀신을 연상케 했다.

그녀는 대소를 그치더니 악을 쓰듯 외쳤다.

"그는 확실히 당신을 죽일 용기가 없어요. 당신이 죽으면 그도 살 수 없기 때문이에요. 이제야 나는 모든 것을 알았어요. 그는 애당초 당신을 위해 살아온 거예요. 그가 이곳에 온 것도 당신에게 그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함이죠. 그러나 다른 사람이 보는 견지에서 그는 한 푼의 가치도 없는 쓰레기 같은 인간에 불과해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너를 죽이기엔 극히 쉬운 일이라는 것이다."

"흥, 나를 죽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나요? 당신은 그에게 나를 죽이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나를 구해 주었어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그는 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친히 너를 죽이고 싶었기 때문이 다."

설소하는 다시 미친 듯이 웃어젖혔다.

"호호호...천만의 말씀, 그는 당신이 친히 그를 죽이기를 원하고 있는 거예요. 호호호....."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내가 당신과 함께 있을 때면 그는 거의 미칠 지경으로 질투를 느꼈죠. 그 당시 그가 나로 인해 그러는 줄 알았는데 이제 알고 보니 그것은 당신 때문이었어요."

"....."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누구나를 막론하고 미워했죠. 심지어 당신의 아들도 마찬가지예요. 당신 아들을 죽인 흉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요?"

상관금홍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담담하게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가 나를 위해 살인을 했다면 누구를 죽여도 상관없다."

설소하는 그를 주시하며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웃음은 점점 사라지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여지껏 남자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해 왔어요. 그런데 당신네 두 사람에 대해선 어떤 관계인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아요."

그녀는 냉소를 치며 말을 이어갔다.

"어떤 관계이든 그것은 틀림없이 구역질나는 성질의 관계일 거예요. 그러니 당신네들이 스스로 관계를 밝힌다 해도 나는 죽고 싶지 않아요."

상관금홍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너는 아는 것도 없으면서 말을 너무도 많이 하는구나."

설소하는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당신으로 하여금 그를 죽이게 할 순 없겠죠?"

형무명은 즉시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소."

설소하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내가 당신네들 손에 죽는 도리밖에 없겠군요. 문제는 누가 출수하느냐에 달려 있어요. 그가 출수할 건가요? 아니면 당신인가요?"

형무명은 입을 굳게 다물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살짝 떨쳐 설소하를 상관금홍의 발밑으로 팽개쳤다.

설소하는 흙탕물에 쓰러진 채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역시 여자이기 때문에 입을 움직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사소한 일에도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여인이 죽을 때 몸 전체에서 가장 늦게 굳어지는 부분이 바로 혓바닥이라는 흥미로운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여인의 혓바닥 근육은 유달리 다른 부분보다 훨씬 예민하기 때문이다. 설소하는 죽음을 의식하면서도 혀를 나불거리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있나요? 그가 원하는 대로 어서 어서 출수를 하시죠."

그녀는 끝까지 두려움을 내색하기 싫어 초연한 태도를 애써 취했다.

상관금홍의 입가에 한 가닥의 잔혹한 미소가 스쳐갔다.

"고통을 받으며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너는 일종의 쾌락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 나를 죽이느냐에 달렸죠. 나는 빨리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천천히 죽어야지만 진정한 죽음의 맛을 음미할 수 있으니까."

그녀는 무슨 의미에선지 홀연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사람의 일생을 통해 이런 기회는 단 한 번밖에 없어요. 그러니 설사 고통을 좀더 받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은 충분한 가치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늦게 죽는다면 너는 보다 많은 말을 지껄일 수 있겠지. 말을 하는 자체는 비단 너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공포심마저 감소시키는 역할도 할 테니까."

"당신도 역시 나를 빨리 죽일 생각은 없겠죠? 당신은 원래 여자가 사경에서 헤매는 것을 보기 좋아하니까요. 더구나 나는 당신에게 많은 이익을 주었잖아요. 최소한 내가 그동안에 애써 모은 재산을 송두리채 사기쳐 갔으니 더 이상 이용할 가치가 없을 테니까 죽이려는 게 아닌가요?"

"그렇다. 너는 이제 한 푼의 값어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아예 너를 죽이는 것조차 귀찮게 여겨진다."

말을 끝낸 그는 홀연 설소하를 초류빈 앞으로 걷어찼다.

이제 그녀는 입을 놀릴 기력조차 잃게 되었다. 축축하게 젖은 옷은 바싹 그녀의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의 몸체는 여전히 미끈하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원래 무림의 제일가는 미인이며 또한 미인은 두뇌가 둔하다는 상례를 뒤엎고 굉장히 영특했다. 그녀는 하늘이 주신 천부적인 조건으로 얼마든지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심지어 죽음마저도 선택할 여지가 없는 상황에 놓여 있지 않은가. 그녀는 원래 구름을 타고 내려온 선녀였건만 지금은 흙탕물로 뒤범벅된 한 마리의 들개에 불과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일까? 혹시 그녀는 자신이 귀중하게 여겨야 할 것을 헌신짝 취급하듯 한 탓이 아닐까?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초류빈은 흙탕물 속에 쓰러져 있는 설소하를 주시하며 비애와 동정을 느꼈다. 그가 동정하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낭천이었다.

그녀의 꼴이 이 지경으로 된 것은 자업자득이지만, 낭천은? 낭천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그는 한 사람을 잘못 사랑했기 때문에 결국 비참하게 되었다. 그 사랑했다는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그래서 초류빈이 한층 더 비애를 느끼는지도 모른다.

상관금홍은 초류빈을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그녀를 죽이지 않겠소. 당신이 나보다도 그녀를 죽여야 할 이유가 훨씬 많기 때문에 당신에게 인계해 주겠소."

초류빈은 긴 침묵을 지킨 끝에 홀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당신은 나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 같소."

상관금홍은 그의 말을 음미하듯 역시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비로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내가 당신을 과소평가한 것 같소. 당신도 역시 그녀를 죽이지 않을 테니."

그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계속했다.

"살인을 하는 데는 살기가 필요한 것, 당신은 나를 상대하기 위해 모든 살기를 집중시키고 있을 테니 물론 섣불리 다른 사람에게 낭비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테지....."

초류빈은 차분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상대가 다르면 물론 죽일 수 있겠지만, 장소가 틀려도 역시 출수할 수 없소."

"이 장소가 틀린단 말이오?"

"원래는 맞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소."

"어째서 상황이 달라졌다는 거요?"

"이 장소는 지금 너무나 비좁은 느낌을 주고 있소."

상관금홍은 히죽이 웃었다.

"당신으로 하여금 불안을 느끼게 했단 말이오?"

초류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는 자신의 생각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형무명이 설사 출수를 하지 않는다 해도 그에게는 역시 일종의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더군다나 형무명은 수시로 출수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라 해도 그와 상관금홍이 연수한 일격은 받아내지 못할 것이다.

상관금홍의 안색은 다시 철판이 깔린 듯 차갑게 변했다.

"당신은 겁이 많군. 하지만 기왕 이곳에 온 이상 순순히 보낼 사람은 없을 것이오. 그렇지 않느냐?"

마지막 한 마디는 형무명에게 내던진 것이다.

형무명은 즉시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그렇소."

그는 여전히 멀리 서 있지만 초류빈은 그가 상관금홍과 한 덩어리로 똘똘 뭉쳐 있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다.

그들이 합친 힘은 엄청나게 강해 아무도 물리칠 수 없고 아무도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초류빈은 가볍게 탄식을 하다가 문득 낭천의 모습이 뇌리에 떠올랐다. 낭천이 만약 이 자리에 자기와 함께 있다면―

상관금홍은 그의 표정에서 마음을 꿰뚫어보고 유연히 말했다.

"낭천이 만약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당신은 어쩌면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당신에게 실망밖에 줄 수 없는 존재인 것 같소."

초류빈은 강조를 하듯 힘주어 말했다.

"나는 그에 대해 실망을 느끼지 않았소.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수백 번 쓰러져도 역시 일어날 저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상관금홍은 야멸찬 말투로 내던졌다.

"당신은 그가 그런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오?"

초류빈의 음성은 못을 박듯 단호했다.

"물론이오."

"설사 당신이 그를 제대로 보았더라도 그가 일어섰을 때 당신은 이미 쓰러져 있을 것이오. 당신이 일단 쓰러지면 영원히 일어서지 못하리라고 나는 장담할 수 있소."

"지금....."

"지금 당신은 절대 기회가 없소. 다시 말해서 눈꼽만큼의 기회조차 없소."

그 말을 들은 초류빈은 홀연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나에게 장소를 선택할 아량은 베풀어야 될 게 아니겠소? 꼭 죽어야 할 사람이라면 죽을 장소를 택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오."

상관금홍의 입가엔 잔혹한 웃음이 스쳐갔다.

"당신은 또 그릇된 생각을 한 것 같소. 살인을 하는 자는 모든 권리를 쥐고 있소. 죽어야 할 자는 하등의 권리도 없는 것이오. 하지만....."

여기에서 일단 말을 중단한 그는 초류빈을 뚫어지게 주시하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당신에게만은 한 번 파격적인 예의를 할 용의가 있소. 당신은 비단 좋은 친구일 뿐 아니라 가장 구미에 맞는 적수니까."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소."

"그럼 당신은 어느 장소에서 죽고 싶소?"

초류빈은 천천히 대답했다.

"살아 생전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은 대부분 편안하게 죽기를 원하고 있소."

상관금홍은 잽싸게 말을 받았다.

"어떤 방법으로 죽든 편안한 죽음은 없소."

초류빈은 눈썹을 살짝 위로 치켜세웠다.

"나는 비가 내리지 않는 곳 그리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는 것을 원하고 있을 뿐이오. 축축하게 젖은 채로 비참한 꼴로 죽긴 싫으니까."

그는 다시 빙긋이 웃으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 목욕할 때를 제외하고 나는 몸이 물에 젖는 것을 원치 않았소."

상관금홍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한 번도 믿지 않았소. 이 세상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있으리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오. 그런데 지금...어느 정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소."

초류빈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요?"

하고 일종의 반문을 하자 상관금홍이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확실히 죽음에 대해 담담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요. 그래서 나는 더욱 이상하게 느껴지는 일이 있소."

초류빈의 시선은 줄곧 상관금홍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상하게 느껴지는 일이라니....."

상관금홍의 눈빛도 시종일관 초류빈의 표정을 지키고 있었다.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죽을 때 몸이 축축한 것을 개의하고 있으니 이상한 일이 아니겠소?"

그는 초류빈의 얼굴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듯 눈을 가늘게 감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로 당신이 그런 요구를 한 것은 필시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소."

"어떤 목적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오?"

"글쎄...어떤 사람은 당신이 일부러 지연작전을 쓰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오. 자신의 죽음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혹시나 무슨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바라는 경우도 있겠고, 최소한 신선한 공기를 한 모금이라도 더 들이킬 수 있는 이점이 있으니까."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내 어찌 당신을 그런 어리석은 자들과 비교할 수 있겠소. 당신 자신도 절대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이제 어느 누구도 당신을 죽음에서 구출하지 못할 것이오. 더욱이 당신은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잖소!"

"그럼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단 말이오?"

"내 생각에 당신이 그런 요구를 한 것은 그녀들에게 도주할 기회를 만들어 주는데 목적이 있는 것 같소. 당신은 내가 당신을 죽이기 전에 절대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정확한 계산을 하고 있을 테니 말이오. 그것은 마치 산해진미를 놓고 먼저 맛없는 만두 따위로 배를 채우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

초류빈은 담담하게 웃었다.

"이유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소."

"좋지 않은 이유지만 확고부동한 사실이오."

초류빈의 웃음은 다소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설사 확고부동한 사실이라 해도 당신이 정녕 그녀들의 죽음을 안중에 두고 있단 말이오?"

상관금홍은 냉소와 함께 대꾸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소."

그렇다.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녀들이 살아 있다는 자체는 그에게 아무런 위험도 줄 수 없었다. 그가 만약 그녀들을 죽이려 한다면 수시로 가능한 일이었다.

초류빈은 손소홍에게 눈길을 옮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생명이 있고 호흡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으로써 충분했다. 상관금홍과 함께 다른 데로 장소를 옮기는 이외에 초류빈이 손소홍을 위해 더 이상 무엇을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상관금홍은 말을 이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당신에게 만큼은 결례가 되는 행동을 할 수 없소. 당신은 다른 사람과 전혀 신분이 틀리니까 말이오."

그는 한마디 한마디 또렷하게 이어갔다.

"당신은 깨끗한 삶을 누려 왔으니 소원대로 깨끗한 죽음을 치르도록 해주겠소. 나의 가장 훌륭한 적수가 흙탕물에서 들개처럼 죽는 것은 나도 원하지 않으니까....."

죽음, 어떻게 죽을 것이며 어디서 죽느냐? 방법과 장소는 모두 중요한 것이 아니다. 편안하고 깨끗하게 죽을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손소홍은 어떻게 될 것인가?

초류빈은 차마 그녀에게 눈길을 돌릴 용기도 없었고 그럴 처지도 되지 못했다. 그의 주의력은 절대 분산될 수 없었다.

그는 지금 곧 떠나야만 한다. 물론 이번에 떠나면 영원히 그녀를 못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이번에 떠나면 어쩌면 이별이 아니라 사별이 될 것이다.

그녀는 과연 그가 이렇게 떠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둘까? 초류빈은 혹시나 그녀가 달려와 자기에게 매달리며 함께 죽겠다고 고집할까 봐 은근히 겁이 났다.

만약 그녀가 정말 그렇게 한다면 그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주먹을 날려 그녀를 기절시키거나 혈도를 찍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쓰러진 그녀를 향해 꿋꿋이 살아가라는 말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 장면은 처량하고 비참할 것이다.

초류빈은 물론 그녀가 그렇게 하지 않기를 내심 간곡히 바라고 있었다. 지금으로써도 그는 무거운 마음의 부담을 느끼고 있는데 만약 그녀가 그렇게 한다면 그의 감정이 무너질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그의 성격은 비록 강인했지만 감정은 약했다. 손소홍은 초류빈이 바라는 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심지어 초류빈에게 다가와 작별 인사도 나누지 않았다.

무엇 때문일까?

초류빈은 결국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기절해 버리지도 않았고 떠나지도 않았다. 그녀도 역시 초류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신색은 비록 슬픔에 젖어 있었지만 눈빛은 그렇게도 부드럽고 확고한 신념이 깃들어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비록 입을 열지 않았지만 눈동자는 초류빈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기꺼이 현실에 대응하세요. 저는 절대 당신을 붙잡거나 방해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필시 정확하고 올바르게 해 내리라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녀를 단 한 번 힐끗 초류빈은 바라보았지만 그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는 이미 그녀가 건장한 여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직접 말을 하지 않고 염려를 하지 않아도 그녀는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그에게 준 것은 안위와 격려였다.

초류빈은 형용할 수 없는 감격을 느꼈다. 그녀가 자기에게 준 도움이 얼마나 큰가를 그 자신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문득 자기가 이러한 여인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운임을 깨달았다.

초류빈은 드디어 떠났다.

그의 떠나는 걸음은 이곳에 올 때보다 더욱 굳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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