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1일 목요일
61 소이비도 제4권 진정한 세 여인
세 여인
손소홍은 초류빈이 떠나가는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며 한참 후에야 비로소 설소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설소하는 안간힘을 써서 흙탕물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될 수 있는 대로 거만하고 고귀한 자세를 취하려고 노력했으나 자신도 그것이 헛수고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스스로 자신의 꼴이 비참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손소홍은 여전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표 정이 없는 것도 일종의 경멸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설소하는 홀연 코웃음을 쳤다.
"네가 날 멸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너를 더욱 경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느냐?"
그녀가 반말로 나왔기 때문에 손소홍도 반말로 대꾸했다.
"알고 있다."
설소하는 즉시 말꼬리를 이었다.
"너는 너의 할아버지를 해쳤을 뿐만 아니라 초류빈마저 해쳤다. 그런데도 너는 나무토막처럼 여기에 멍하니 서 있는 도리밖에 없지 않느냐?"
손소홍은 태연하게 반문했다.
"그럼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된다고 생각하느냐?"
"그것은 너 자신이 잘 알고 있을 텐데...너는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알고 있다."
"그렇다면 너는 괴로워하고 참회를 해야 옳지 않을까?"
"너는 내가 괴로워하지 않는 것같이 보이느냐? 진짜 참회를 하는 자는 말로 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그래서 너는 무슨 행동을 했단 말이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이겠느냐?"
"너는 초류빈이 여기에서 떠나면 필시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최소한 그를 붙잡아야 할 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소홍은 다시 반문을 던졌다.
"내가 그를 붙잡는다고 일이 해결될 것 같으냐?"
이어 한숨을 내쉬며 단호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내가 만약 그를 붙잡았다면 그의 마음을 더욱 어지럽혀 죽음을 재촉하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다."
설소하는 눈썹을 살짝 위로 치켜올렸다.
"하지만 너는...심지어 눈물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다."
손소홍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대꾸했다.
"내가 통곡을 하고 싶었던 것을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러나 지금은 울고 싶지 않다."
설소하는 냉소를 날렸다.
"그럼 언제 울겠다는 거냐?"
"내일....."
"흥! 내일이라고? 내일이 되면 다시 내일이 있지 않느냐?"
"영원히 내일이 있으므로 영원히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비록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다. 내 진정 눈물을 흘릴지언정 내일로 미루어야겠다. 오늘은 다른 할 일이 있으니까."
겁쟁이와 바보만이 영원히 내일의 일로 인해 눈물을 흘릴 것이다.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할 용기를 갖춘 자는 역시 마찬가지로 현실을 마주할 용기를 지니고 있을 것이며 절대 자신을 눈물 속에 매장해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눈물은 치욕을 씻을 수 없고 더욱이 잘못을 보완할 수도 없다. 진정으로 참회하는 자는 용기를 꺼내 그 순간부터 새로운 계획을 할 것이다.
설소하는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입을 나불거린 것은 손소홍에게 심적인 타격을 주는데 목적이 있었다. 손소홍이 자기를 멸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로 하여금 자신마저 멸시하게 할 속셈이었다.
그러나 설소하는 실패했다.
손소홍은 그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굳세고 용기 있는 여인이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후에야 설소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할 일이 많다고 했는데 너는 무엇을 하겠느냐?"
손소홍은 천천히 그의 말을 받았다.
"여자가 남자를 돕는다는 것은 죽음을 함께 하는 게 아니다. 남자가 편안한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격려와 위안을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남자로 하여금 자신의 가치를 재인식하도록....."
설소하는 아니꼽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것으로써 충분하단 말이냐?"
손소홍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외에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일이 또 무엇이겠느냐?"
그녀는 더 이상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어떤 남자라 해도 이런 여인을 만나게 되면 모두 감격하게 될 것이다.
손소홍이 홀연 먼저 입을 열었다.
"너는 나에게 심적인 타격을 주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하고 있지만 나는 너를 나무라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문득 네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불쌍하다고? 어느 면에서 불쌍하다는 거냐?"
"저는 자신이 젊고 아름다우며 총명하다고 자부해 이 세상 모든 남자가 너의 발 밑에 무릎을 꿇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 남이 진심으로 너를 대하면 너는 도리어 그를 바보로 취급하고 고통을 주었지만 언젠가는 진심으로 너를 대한 사람은 네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많지 않으며 진실한 감정은 결코 청춘과 미모로 살 수 없는 가장 고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라 생각되어서다."
그녀는 설소하를 주시하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때가 되면 너는 비로소 아무것도 얻지 못한 빈껍데기뿐인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여인이 그런 지경에 처하게 되면 가장 불쌍한 신세가 되는 것이다."
"너는...지금 내가 그런 지경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단 말이냐?"
설소하는 부인을 하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으나 음성은 떨렸다. 전신이 떨리고 있기 때문이다. 분노로 인한 건지 아니면 추위 탓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공포를 느낀 요소가 가장 큰 것 같았다.
손소홍은 아무 대꾸없이 냉랭하게 그녀의 새파란 얼굴과 흙탕물로 뒤범벅인 몸을 주시할 뿐이다. 침묵과 차가운 눈초리는 어떠한 말보다도 그녀에게 괴로움을 안겨 줄 수 있었다.
설소하는 홀연 대소를 터뜨렸다.
"호호호...그렇다. 나는 줄곧 그를 바보로 취급하고 내 발바닥만 핥게 해 왔다. 하지만 난 다시 그를 찾아갈 것이다. 그는 변함없이 나한테 무릎을 꿇고 내 말에 순종할 것이다."
"과연 너의 뜻대로 될지 당장 가서 시험해 보는 게 어떠냐?"
"시험을 하지 않아도 나는 자신이 있다. 내가 없으면 그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다."
그녀는 비록 시험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이미 몸을 돌려 앞으로 질주해 갔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갔다.
그녀 자신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 기회를 만약 놓친다면 그녀는 정말 쓰러질 것이다.
손소홍은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비로소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때 안개 같은 빗발이 뿌려지는 어둠 속에서 또 하나의 사람 인영이 나타났다.
이 사람은 언제 왔는지 알 수 없으나 온몸이 축축하게 젖은 것으로 미루어 온 지 오래 된 것 같았다.
손소홍은 먼저 상대방의 눈동자부터 보았다. 그 눈동자는 별로 빛나지 않았다. 어쩌면 눈물을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눈빛은 초점을 잃고 있는 느낌마저 주었다.
그러나 그 눈동자는 철썩같이 믿어 온 사람의 마음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애수가 짙게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손소홍은 그의 얼굴을 보았다. 티를 찾아볼 수 없는 완미한 얼굴은 아니었다. 오래도록 햇빛을 보지 못한 것처럼 안색은 너무나도 창백했다.
그런데도 어찌된 영문인지 손소홍은 그를 보는 순간 자기가 여지껏 보아온 사람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란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이미 헝클어져 있고 옷도 빗물에 축축하게 젖어 있어 응당 초라하게 보여야 하건만 이상하게도 손소홍은 전혀 초라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인상은 그렇게도 청아하고 고귀하기만 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녀를 접하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독특한 기질과 매력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손소홍은 이 여인을 처음 보았지만 대번에 누구인지 추측해 낼 수 있었다. 설벽운. 그녀만이 비로소 초류빈 같은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손소홍은 내심 탄식했다.
'왜 다른 사람들은 설소하를 강호 제일의 미녀라 하는 것일까? 그 칭호를 설벽운에게 붙여야 옳다. 젊었을 때는 물론 두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지금도 그녀는 설소하보다 훨씬 낫다.'
그녀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지금은 비오는 밤중이었고 그녀는 여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자가 여자를 보는 견해는 어찌 되었든 간에 남자와는 다르다.
설벽운은 그녀를 주시하며 천천히 앞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손낭자죠?"
손소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당신을 알고 있어요. 그 사람에게서 가끔 당신 얘기를 들었어요."
설벽운은 그녀의 말을 듣자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극히 처량한 웃음이었다. 그녀는 물론 손소홍이 말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손소홍이 물었다.
"당신은 이곳에 온 지 오래 되었나요?"
설벽운은 고개를 떨구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나는 그가 이곳에서 결투를 벌인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몇 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달려왔어요. 그런데 문득 당신한테 하는 게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녀의 음성은 부드럽고 느렸다. 한 마디를 할 때마다 먼저 깊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든 담담하여 다른 사람이 들으면 필시 그녀를 냉막하고 무정한 여인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손소홍은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냉막한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너무나 많은 고통과 시련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손소홍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동정을 느켜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 사람은 당신을 무척 만나고 싶어 했어요. 당신이 정녕 이곳까지 온 이상 왜 그 사람을 만나지 않죠?"
설벽운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말을 더듬거렸다.
"나는...그럴 수가 없어요."
그녀는 본래 초류빈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이곳에 당도했을 때 이미 많은 사람이 초류빈의 주위에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만 모습을 나타낼 용기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행여나 다른 사람이 자기와 초류빈의 감정을 간파할까 봐 두려웠다.
그녀가 만약 초류빈 앞에 나서게 되면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수 없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비록 그러한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손소홍은 이해할 수 있었다.
손소홍은 탄식했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에 의해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자를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의 의사를 따르는 것은 상대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반대로 사랑하기 때문이죠. 상대가 무엇을 요구하든 따르는 것이 참된 사랑임을 깨달았어요."
설벽운은 줄곧 자신을 억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물은 이미 샘 솟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소홍의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바늘처럼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을 파고들어 이성이라는 벽을 무너뜨린 것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반문한 적이 있었다.
'지금의 나는 설소하와 같이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 이것은 누구의 과오로 인해 조성된 결과인가? 내 자신의 잘못이 아닐까.'
그녀는 한때 초류빈을 원망하고 저주했다. 이러한 비극을 조성한 장본인이 바로 초류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그 잘못이 초류빈에게 있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 나는 왜 그의 의사에 따랐을까? 왜 솔직히 내 마음을 털어놓아 오직 그만을 사랑하며 그 이외의 사람에겐 절대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분명하게 말을 하지 못했을까?'
손소홍은 다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비록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은 잘 모르지만....."
설벽운은 홀연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이제 나도 알았어요. 당신을 보자 나는 곧 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손소홍은 커다란 눈으로 그녀를 주시할 뿐이다.
설벽운은 스스로 말을 이어갔다.
"내가 만약 당신과 같은 용기가 있었고 당신과 같이 신념이 확고했다면 오늘날 이런 결과는 없었을 거예요."
"그러나 당신은....."
"나는 이제서야 내가 그분의 아내가 될 자격이 없는 여자라는 것을 알았어요. 당신이야말로 그에게 어울리는 여인이에요."
손소홍은 고개를 숙였다.
설벽운은 아예 그녀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당신 같은 여자라야 만이 그를 위하고 격려해 줄 수 있을 거예요. 그가 무슨 일을 하든 당신은 그에 대해 믿음이 변치 않지만 나는....."
그녀는 울적한 듯 한숨을 내쉬며 다시 눈물을 흘렸다.
손소홍은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홀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당신은 다시 그를 만날 기회가 있을 거예요. 예전의 일은 이미 지나갔으니 차후로 두 사람은 다시....."
설벽운은 다시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당신은 그에게 기회가 있고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손소홍은 단호하게 말하더니 빙긋이 웃었다.
"물론이에요. 다른 사람은 그의 모습을 보고 십중팔구 그가 자신에 대해 믿음을 잃었다고 생각할 거예요. 자신에 대한 믿음마저 잃은 사람이라면 자연히 희망이 없겠죠."
"바로 그러기에....."
손소홍은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즉시 말을 가로챘다.
"하지만 저는 알고 있어요. 그가 그런 자신없는 태도를 취한 것은 고의로 상관금홍으로 하여금 자기를 경시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거예요. 상관금홍이 적을 가볍게 여기는 생각을 갖게 되면 주의력이 분산될 가능성이 없지 않죠."
그녀는 눈동자를 유난히 빛내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그럴 가능성이 현실로 된다면 그분은 능히 상관금홍을 죽일 수 있을 거예요."
설벽운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가 정말 자신에 대해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그분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당신이 그에게 준 도움이 얼마나 큰지 당신 자신도 결코 모를 거예요."
손소홍은 고개를 다시 숙이며 빙그레 웃었다.
"저도 알고 있어요."
그녀는 비단 초류빈에게 진심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벽운은 그녀를 쳐다보며 일종의 꼬집어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부러움? 질투? 자책? 아니면 초류빈을 위한 기쁨인지.....
반평생 고통과 자포자기로 살아온 초류빈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손소홍 같은 여인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이번에 설사 싸움에서 이긴다 해도 언젠가는 쓰러지게 될 것이다. 설령 그를 쓰러뜨릴 사람이 없다 해도 그는 스스로 자신을 쓰러뜨릴 것이다.
설벽운은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그가 당신을 만난 것은 어쩌면 하늘이 그에게 내린 보상일 거예요. 물론 그에게 응당히 있어야 할 보상이지만....."
여기서 일단 말을 끊은 그녀는 홀연 물었다.
"형무명은 어떻게 하죠? 그분이 설사 상관금홍을 격파시킬 수 있다 해도 그들 두 사람의 협공은 당해내지 못할 거예요."
손소홍은 생각을 굴리며 대답했다.
"형무명은 어쩌면 출수하지 않을 거예요. 상관금홍이 짐짓 필승할 자신을 갖고 있다면 구태여 그가 출수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물론 나중엔 후회하겠지만 그때는 이미 때가 늦었을 거예요."
그녀의 말은 옳았다. 그것이야말로 초류빈의 유일한 기회이다. 그들이 초류빈을 쓰러뜨리려면 역시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없을 것이다. 비도탈명, 그는 절대 어느 누구에게도 두 번째 기회를 주지 않는다.
문제는 누가 먼저 그 기회를 포착하느냐는 것이다.
설벽운은 다그치듯 물었다.
"그럼 당신의 말뜻은 형무명이 출수하지 않아야만 그에게 기회가 있다는 건가요?"
"맞아요."
"그럼 당신은 형무명이 출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나요?"
"확신을 할 수 없어요."
하고 대답한 손소홍은 얼른 다음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한 시진 이내엔 어느 누구도 출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한 시진 이내에 기적이 생길 리는 없잖아요?"
"있어요."
"무슨 기적이죠?"
"낭천이에요."
설벽운은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몹시 실망을 하는 표정이었다.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모두들 낭천의 말만 나오면 실망할 것이다.
손소홍은 자신 있게 말을 이었다.
"모두들 낭천이 구제받을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에게 올가미가 씌워져 있기 때문이에요."
"올가미라뇨?"
"그래요. 올가미예요. 그 올가미를 풀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을 거예요."
"그게 누구죠?"
"올가미를 풀 수 있는 사람은 올가미를 씌운 사람뿐이에요."
"그렇다면...설소하....."
"그래요. 설소하는 사랑할 가치가 없는 여자임을 스스로 발견했을 때 그의 올가미는 자연히 풀어질 거예요."
설벽운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의 말이 옳은지도 몰라요. 그러나 그는 이미 수렁에 빠진 지 오래 되었는데 한 시진 이내에 벗어날 수 있을까요?"
"다른 원인이라면 물론 불가능하지만 초류빈을 위해서라면 가능할 수도 있어요."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사람은 자기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선 왕왕 평상시 해낼 수 없는 일을 행하게 되는 예가 있어요."
설소하는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되길 바랄 뿐이에요."
"그래서 저는 지금 낭천을 찾아가 그에게 모든 것을 얘기하겠어요."
"잠깐만. 나는...아직 당신에게 할 말이 남아 있어요."
"듣겠어요."
"나는 이미 오랫동안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바깥 사람들의 일은 낱낱이 알고 있어요. 당신은 그 점에 대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손소홍은 미소를 띠고 대꾸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에게 매우 영리한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설벽운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어찌 되었든 그는 역시 내 아들이에요. 그를 제외하곤 나에겐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부탁드리는 것인데 그분을 만나면 내 아들을 용서해 달라는 말을 전해 주세요."
손소홍은 가볍게 탄식을 했다.
"그분은 생전 누구를 미워한 적이 없어요. 당신도 그 점만은 알고 있을 거예요."
설벽운은 생각에 잠겼다. 하고자 하는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손소홍은 잽싸게 그녀의 표정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당신은 저에게 인화보감에 관해 말하려는 건가요?"
설벽운은 약간 놀랐다.
"당신도 그 일을 알고 있나요?"
손소홍은 방그레 웃었다.
"저의 숙부님은 바로 손....."
설벽운은 대뜸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래요. 왕노선배님이 왔을 때 손이 선생도 함께 있었어요."
"그렇다면 그 인화보감은 확실히 당신 수중에 있겠군요."
"그래요. 하지만 나는 그 일을 줄곧 그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왜 그랬죠?"
"당시 나는 무공이 비단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도리어 그를 해친다고 생각했어요. 그의 무공이 높을수록 더욱 많은 위험이 따를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당신은 그 일을 숨기고 그가 평범한 사람이 되어 평범하게 일생을 마치기를 바랐군요."
설벽운은 처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어쩌면 믿지 않으려 하겠지만....."
"저는 믿어요. 제가 만약 당신이었더라도 역시 그렇게 했을 거예요."
여자만이 여자의 생각을 이해한다. 여자라야 만이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여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한쪽에선 여자의 행동이 심지어 우스꽝스럽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여자는 어떠한 원인도 자기의 생각보다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설벽운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분에게 숨긴 것을 후회하고 있어요."
"당신이 그에게 숨긴 것은 그를 위해서였는데 왜 후회를 하죠?"
"그것은...그가 만약 인화보감에 수록돼 있는 무공 또한 터득했다면 오늘 설사 상관금홍과 형무명의 협공을 받아도 상관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당신은 죄책감을 느끼고 그에게 용서를 비는 건가요?"
설벽운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를 탓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 일을 털어놓지 않으면 난 죄책감에....."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소홍은 강경한 어투로 말했다.
"그것은 그릇된 생각이에요."
"그릇된 생각이라니....."
"그분이 만일 인화보감에 수록된 무공을 연마했다면 더욱 상관금홍의 적수가 될 수 없을 거예요."
"그건 왜 그렇죠?"
손소홍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낭천의 검이 무엇 때문에 무서운지 알고 있나요?"
"어느 누구보다도 빠르기 때문이겠죠."
"그럼 어째서 남들보다 빠른지 아시나요?"
"그것은....."
"그가 빠른 것은 다른 사람보다 정신통일이 잘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비도탈명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들이 만약 도중에서 다른 무공을 연마했다면 도리어 정신이 분산되어 어쩌면 지금과 같이 속도가 빠르지 못할 거예요."
설벽운은 고개를 떨구었다가 한참 후에야 차분히 가다듬어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내 뜻을 그에게 전해 주길 바래요."
손소홍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당신네들은 나중에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텐데 당신은 왜 직접 그에게 말하지 않죠?"
설벽운은 또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킨 후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안색은 홀연 차분하게 변해 있었다.
"이후에 우리는 어쩌면 더 이상 만날 기회가 없을 거예요."
손소홍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서죠?"
설벽운은 즉시 그녀의 말을 받았다.
"왜냐하면...왜냐하면 난 아주 아주 먼 곳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에요."
손소홍은 안타까워 말을 더듬거렸다.
"꼭...꼭 가야만 되나요?"
"꼭 가야 돼요."
"무엇 때문이죠?"
"난 이미 결심했기 때문이에요."
"결심요?"
"내 일생의 최대 약점은 한 번도 결심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에요. 이것은 어쩌면 처음으로 내린 것인지도 몰라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다시 나의 결심을 변경시키려는 것이 싫어요."
그녀의 말을 다 듣고 난 손소홍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하지만 우리는 겨우 한 번밖에 만나지 않았고 말도 별로 많이 나누지 못했으니 다시 한 번 나를 만나주세요. 저도 당신에게 할 얘기가 많아요."
설벽운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이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좋아요. 내일 아침에 바로 여기 이 자리에서 당신을 기다리겠어요."
설벽운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지금 하늘과 땅 사이에는 오직 손소홍 한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웬만해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여인이었는데 돌연 샘물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 역시 결심을 내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저 초류빈이 죽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꼭 그를 여기로 데려오려고 했다. 손소홍이 초류빈을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이미 자기의 일생을 그에게 주기로 결심을 했던 것이다.
이 결심만은 한 번도 변경시키지 않았으나 지금은 자기의 욕심이 너무 크다는 것을 느켜 자신을 희생하려고 결심했다. 그것은 자기보다 설벽운이 더욱 초류빈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는 본시 그에게 속해 있으므로 그 누구도 그들을 떼어 놓을 수가 없다.
'호천강도 안 된다. 그는 원래부터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입술을 깨문 채 눈물을 닦았다.
'설사 눈물이 난다 해도 내일 흘려야 한다. 오늘 나에겐 많은 할 일이 남아 있다.....'
그녀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주위는 매우 어두웠으며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그러나 밤이 오면 새벽이 올 것이고 또 반드시 해가 뜨기 마련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 단 두 종류의 사람만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즉 선과 악이다. 남자도 그렇지만 여자 역시 마찬가지다.
설소하는 물론 나쁜 사람, 즉 악인에 속해 있는 여자다. 하지만 설벽운과 손소홍은 어떤 종류에 속하는 사람일까? 그들은 물론 다 좋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두 사람에겐 또 서로의 다른 점이 있다. 설벽운은 어떠한 일에 있어서는 참고 참는다.
그녀는 여성의 가장 큰 미덕이 인내, 즉 참는 데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손소홍은 반항적인 기질이 있는 여자다. 잘못된 것이라고 느낀다면 그녀는 반항을 한다.
그녀는 고집이 있고 명랑하고 용기가 있다. 그리고 사람을 사랑할 줄도 알고 또 미워할 줄도 알고 있다.
바로 이 세상에 그와 같은 여자가 있기 때문에 인류는 부단히 전진되고 계속 생존해 나가는지도 모른다.
강한 여성은 인류의 상승을 인도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그녀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저 내가 그를 찾아가면 어느 때라도 그는 기어서 나에게 매달릴 것이다. 내가 없으면 그는 살아갈 수 없다.'
설소하는 진짜 이렇게 자신이 있는 것일까?
그녀는 확실히 자신이 있다. 그것은 낭천이 자신을 목숨보다도 더 소중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낭천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는 아직도 집 안에 있을 거야. 그곳은 우리 집이니까. 거기에 내가 두고 온 물건이 있고 내가 남긴 냄새가 있으니까. 그는 아직도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여기까지 생각한 설소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요 며칠 사이에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술만 먹고 있었을 거야. 그리고 집 안이 엉망진창이겠지. 아니 어쩌면 시체들도 치우지 않았을 거야.'
이렇게 생각한 설소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상관없어. 그저 나를 보기만 하면 그는 무슨 일이든지 앞다투어 할 거야.....'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 설소하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이 돌아갈 곳이 있고 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확실히 유쾌한 일이다.
'어쩌면 전에 내가 그에게 너무나 심하게 했는지도 몰라. 그를 너무 꽉 잡아두었지. 이젠 나도 방침을 바꾸어야지.....'
'남자란 어린아이와 같단 말이야. 남자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려면 어느 정도 단맛을 보여줘야 하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그녀는 전신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찌 되었든 그는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야. 어쩌면 내가 만난 남자 중 그 누구보다도 강할지도 모르지.'
그녀는 돌연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녀의 감정을 움직이게 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바로 낭천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녀는 낭천의 좋은 점이 그 어느 남성보다도 많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에게 잘해 줘야 될 거다. 이 세상에 그 같은 남자는 그리 많지 않을 거야. 아니 그 외엔 없을지도 몰라.....'
그녀는 생각하면 할수록 낭천이라는 존재가 꼭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놓쳐선 안 된다고 내심 다짐했다.
어쩌면 그녀도 애당초 그를 사랑했는지 모른다. 다만 그가 자신을 너무 사랑해 주므로 그녀로 하여금 귀찮다는 느낌을 갖게 했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가 그녀를 너무 깊이 사랑하지만 않았더라도 반대로 그녀가 그를 더욱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약점이며 인간에게만 있을 수 있는 모순인 것이다. 그래서 총명한 남자라면 그 어떠한 여성을 사랑하게 될때 절대로 자신의 사랑하는 마음을 상대 여성에게 완전무결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낭천, 안심해요. 이젠 절대로 당신을 괴롭히지 않겠어요. 과거는 지나간 것이며 우린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그저 당신이 전과 같이 나를 대해 준다면 저는 오직 당신의 뜻에만 따르겠어요.'
그러나 낭천은 과연 전과 같이 그녀를 대해 줄 것인가? 설소하는 갑자기 자신감을 잃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믿음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전에는 낭천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 이렇게 중요한지를 미처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낭천이 자신에게 잘해 주든 나쁘게 대하든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어떠한 물건에 대해 꼭 필요하다고 느꼈을 때에야 그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이러한 느낌도 역시 인류의 많은 약점 중의 하나다. 그러나 그것이 절실히 요망될 때일수록 잃을 가능성이 크니 이 또한 비극이 아닐 수가 없다.
설소하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길 옆에 자리잡고 있는 집이 눈에 들어왔다. 집 안에는 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몸에 바싹 붙은 옷 한쪽을 찢어 빗물에 적신 후 얼굴을 씻고 손으로 머리를 잘 다듬었다. 그녀는 낭천에게 자신의 낭패한 꼴을 그대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방 안 가운데에 놓여 있는 상 위엔 불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등 옆엔 죽을 끓인 솥이 있었다. 방 안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더럽지 않았다.
시체는 이미 치워졌고 핏자국도 말끔히 씻겨진 것이 전과 다름없이 깨끗했다.
낭천은 상 옆 의자에 앉은 채 죽을 먹고 있었다.
그는 본시 무엇을 하든 매우 느리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하는 습관이 있다. 그것은 음식을 얻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천천히 먹는 즐거움을 의식하면서 음식을 완전히 소화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못했다.
권태스러운 표정으로 음식을 자신의 입으로 억지로 가져가는 것 같았다. 그는 어째서 억지로 음식을 먹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이 쓰러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밤은 이미 깊었지만 그는 혼자 앉아서 죽을 억지로 입으로 가져가고 있을 뿐이다. 이런 모습을 보지 못한 사람은 이 모습이 얼마나 고독해 보이고 또 처량해 보이는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문이 가볍게 열리면서 설소하가 문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아무 말없이 낭천을 바라보았다.
낭천을 본 순간 그녀는 갑자기 체내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오랜 떠돌이 생활 끝에 가족을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어떻게 해서 이러한 느낌을 갖게 되었는지 그녀 자신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본시 차가운 피를 지닌 무정한 여자다.
그러나 낭천은 누가 들어온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 듯 고개를 숙인 채 계속 죽만 떠먹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의 얼굴 근육이 점점 굳어져 가는 것을 역력히 볼 수가 있었다.
드디어 설소하가 입을 열어 낭천을 불렀다.
"낭천....."
그녀의 음성은 여전히 부드럽고 달콤했으며 전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낭천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 그녀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의 눈초리는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혹시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이 아닐까? 설소하의 두 눈도 축축히 젖어 있었다. 얼마 간 무거운 침묵이 흐르자 설소하가 부드러우면서도 흐느낌에 가까운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낭천, 제가 돌아왔어요....."
그러나 낭천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고 또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는 온몸이 얼어붙어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설소하는 낭천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저는 당신이 기다려 주실 줄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저는 이 세상에서 유독 당신만이 저에게 진실로 대해 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이번에 그녀는 아무런 수단도 사용하지 않고 말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진실을 말한 것이다.
"저는 이제서야 모든 사람이 저에게 호의적으로 대해 준 것이 저를 이용하기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요...그리고 저는 그들을 이용하고...그렇지만 당신만은 제가 어떻게 하든 저에게 진실로 대해 주었지요."
이렇게 말한 그녀는 낭천의 표정에 대해서는 전혀 주의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점점 더 낭천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두 사람의 거리가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을 정도라 낭천의 표정 변화에 대해선 분명하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저는 다시는 당신을 속이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다시는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어떠한 일을 하시든 저는 당신을 따를 뿐이에요....."
딱!
이때 낭천의 수중에 있던 젓가락이 갑자기 부러졌다.
설소하는 낭천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다 갖다댄 후 꿈처럼 달콤한 음성으로 계속 말했다.
"제가 전에 당신에게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보상해 드리겠어요. 그리고 당신에게 저에게 당신이 해 준 것이 얼마나 보람이 있고 가치 있었던 것인지 느끼도록 해 드리겠어요."
그녀의 풍만한 가슴은 탄력이 있고 따스했으며 호흡에 따라 가볍게 출렁이고 있었다.
어떤 남자라도 그녀의 가슴에다 일단 손을 얹으면 다시는 떼어낼 수 없을 만큼 그녀의 가슴엔 무서운 흡인력이 있었다.
그러나 낭천은 그녀의 가슴에서 천천히 손을 떼었다.
순간 설소하의 두 눈은 두려움의 빛으로 가득찼다.
"당신은...당신은 혹시...혹시 저를 버리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낭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설소하라는 여자를 처음 본 듯이 그저 멍청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설소하의 몸은 어느 새 떨고 음성까지도 떨리고 있었다.
"제가 당신에게 말씀드린 것은 모두가 진실이에요. 전엔 제가 비록 딴 남자들과 관계가 있었지만 그것은 모두가 그들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어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그것은 낭천의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낭천의 표정은 마치 심한 구토를 일으키려는 듯 보기 흉하도록 일그러져 있었다.
설소하는 절로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당신...당신은 저의 진실이 싫으신가요? 아직도 제가 당신을 속이는 것을 원하시나요?"
낭천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더니 드디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 단 한 가지 의문이 있을 뿐이오."
설소하는 그의 말을 얼른 받아 물었다.
"그 의문이 무엇이지요?"
낭천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마디 한마디 분명하게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해서 당신과 같은 여자를 그토록 사랑했는지가 의문일 뿐이오."
설소하는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전신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몸을 심하게 떨었다.
낭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이 한 마디로써 자신의 의사를 십분 표현해 낸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갔다. 한 인간으로서 무수한 타격과 모욕을 당했을 땐 반드시 변하기 마련이다. 한 평범한 인간을 두고 얘기할 때 아니 그 이상의 어떠한 사람이라도 황당무계한 거짓말에 대해선 참을 수 있을지 몰라도 가장 참기 어려운 모욕은 결코 견뎌낼 수 없다.
물론 여자나 남자나 모두 마찬가지인 것이다. 설소하는 자기의 몸뚱이가 깊고 깊은 구덩이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낭천은 이때 이미 문고리를 향해 손을 내뻗어 문을 열었다.
설소하는 갑자기 뛰어가 낭천 앞에 무릎을 꿇더니 그의 두 다리를 감싸안으면서 목메어 애원을 했다.
"당신은 이대로 저를 버릴 생각이신가요...저에겐 이제 오직 당신만이 있을 뿐이에요....."
낭천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서서히 윗옷을 벗어 던진 후 설소하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빗속에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빗물은 매우 차가웠다.
그러나 낭천은 조금도 차가운 기를 느끼지 못했고 마치 자신의 몸에 묻은 모든 오점을 빗물로 씻어내려는 듯 먹구름이 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비를 맞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드디어 설소하라는 쇠사슬을 벗어던졌다.
그것은 마치 남루하여 더 이상 입을 수 없는 옷을 벗어 던진 것과 같았다.
설소하는 문앞에서 낭천의 옷만 잡고 있었다. 그녀는 이 옷 이외에 더 이상 아무것도 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제와서야 자신이 낭천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가 있었다.
그녀가 낭천을 괴롭혔던 것은 어쩌면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자란 어째서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괴롭히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그녀는 이제와서야 낭천이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가를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가 깨닫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 인간이란 모두가 다 그런 것인가?
자신이 얻은 물건에 대해서는 경멸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도 어째서 일단 그것을 잃었을 때야 그 귀중함을 깨닫는 것일까?
설소하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낭천이 벗어 던진 옷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두려울 것 없다. 나는 아직 예쁘고 젊다. 나를 좋아하는 남자라면 얼마든지 잡을 수가 있다....."
그녀는 미친 듯이 절규를 했고 그리고 비록 웃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우는 것보다 더욱 비참해 보였다
그녀는 남자를 얻는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진실은 단순히 청춘과 미모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비는 매우 차가웠다. 하지만 낭천은 차가워하기는커녕 마음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빗물을 맞으면서 그는 자신이 마비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년이 지나는 동안 처음으로 이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 년 동안 걸머지고 있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마음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때 누군가가 멀리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낭천....."
부르는 소리는 매우 가벼웠다. 만약 며칠 전에 들었다면 그는 아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귀가 어느 때보다 밝았고 두 눈도 비할 데없이 맑아 있었다.
"누구시오?"
이렇게 반문하고 몸을 서서히 돌리자 한 사람이 달려오고 있었다. 길게 땋은 두 가닥의 댕기와 반짝이는 두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처녀였다.
다만 매우 조급해 보이고 또 초췌해 보였다. 나타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손소홍이었다. 그녀는 낭천에게 바짝 다가서더니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말했다.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낭천은 그녀의 말을 가로채면서 말했다.
"나는 낭자를 기억하고 있소. 이 년 전에 낭자를 본 적이 있소. 낭자는 얘기를 매우 잘하지 않소. 요 며칠 전에도 낭자를 보았지만 낭자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소."
손소홍도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의 기억력이 이렇게 좋으실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요."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매우 상쾌해진 것 같았다. 그녀는 낭천이 다시 일어선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즉 낭천은 모든 악몽에서 헤어나 옛날 본연의 자세로 다시 되돌아 온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초류빈이 낭천의 진실한 친구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낭천은 그녀가 자신을 찾으러 온 것은 필시 무슨 일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묻지는 않았다.
자신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자연히 말을 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얼마쯤 침묵이 흐르자 낭천이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떤 말이든지 서슴지 말고 하시오. 낭자는 초류빈의 친구이니까."
손소홍은 흑백이 뚜렷한 두 눈을 깜박거리면서 물었다.
"당신은 그녀를 만나보셨나요?"
그녀는 즉 설소하를 말하는 것이었다.
낭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보았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소홍이 재빨리 물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지요?"
낭천의 안색은 순간 급변했다.
"그는 그고 나는 난데 낭자는 어째서 그것을 묻는 것이오?"
과거 누구든지 그 앞에서 설소하의 얘기를 꺼내기만 하면 그는 흥분을 느끼곤 했다. 그저 설소하의 이름만 들어도 그는 무서운 마력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
손소홍은 이러한 낭천의 모습을 보자 절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결국 자신의 몸에 감겨 있던 쇠사슬을 벗어 버렸군요."
낭천은 매우 안정된 어조로 물었다.
"쇠사슬?"
손소홍이 대답을 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다 자신을 묶을 수 있는 쇠사슬을 지니고 있지요. 그 쇠사슬을 풀 수 있는 사람에겐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지요."
낭천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소."
"꼭 이해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렇게 하신 것으로 끝내야지요."
낭천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말했다.
"내 이제야 이해할 것 같소."
"정말 이해하셨나요? 그럼 묻겠어요. 당신은 어떻게 해서 쇠사슬에서 벗어나신 것이죠?"
낭천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갑자기 생각이 트인 것뿐이오."
그의 대답은 매우 간단했다. 하지만 생각이 트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도를 내린 것도 역시 생각이 트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달마 도사는 벽을 마주한 채 십팔 년 동안 참선을 하고서야 생각이 트였다.
어떤 일이든지 그저 생각이 트일 수만 있다면 번뇌란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생각이 트이기 전까지는 무수한 번뇌를 겪었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손소홍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탄식을 터뜨렸다.
"한 사람이 생각이 트일 때까지 치러야 할 대가는 적은 것이 아닐 거예요....."
낭천은 더 이상 그러한 일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지가 않은 듯 화제를 바꿔 물었다.
"그가 낭자를 시켜 나를 찾아온 것이오?"
손소홍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는 지금 어디에 있소?"
손소홍은 갑자기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고 웃음도 일순 사라졌다.
낭천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낭자, 왜 그러시오?"
손소홍은 암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려 그가 어디에 있는지 저도 몰라요. 그리고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있지요."
낭천의 안색은 급변했다.
"낭자, 그게 무슨 말이오?"
"어쩌면 그를 찾을 수는 있을 거예요. 다만 그의 생사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낭천은 다그쳐 물었다.
"그의 생사가 어쨌다는 것이오?"
손소홍은 낭천을 똑바로 보면서 분명하게 말했다.
"그의 생사는 당신에게 달려 있어요."
밖에 비가 내리기는 하지만 방 안은 매우 건조했다. 커다란 방에는 창이 단 하나뿐이었고 그 창은 작고 땅에서 매우 높았다. 창문은 항상 닫혀 있는 데다가 햇빛이 들어오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담에는 하얀 칠이 매우 두껍게 칠해져 있었다.
그로 인해 담이 나무로 된 것인지 아니면 쇠로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담이 매우 두껍다는 것만은 누구나 알 수가 있었다.
방 안에는 두 개의 침상과 하나의 커다란 상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의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집기도 하나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방은 고행승이 사용하는 방보다도 더욱 간소하다. 그러나 강호에서 명성이 제일 가고 세력과 체력이 가장 크고 웅후한 금전방 방주가 이러한 곳에 기거하고 있다니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초류빈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상관금홍은 바로 그의 옆에 서 있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곳에 대해 만족하오?"
초류빈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웃으면서 한마디 했다.
"이곳은 매우 건조하구려."
"그렇소. 건조한 것은 사실이오. 물 한 방울 없다는 것을 내 보장할 수 있소."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 멈추더니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곳엔 물은 물론이지만 차와 술도 없으며 심지어는 이곳에선 눈물 한 방울 흘린 사람도 없소."
"피는? 이곳에서 피를 흘린 사람도 없소?"
"그것도 없소. 설사 이곳에서 죽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피는 이미 다 말라 버리니까."
이렇게 말한 그는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마음만 먹으면 그 사람이 살아 있든 죽어 있든 이곳에 들어올 수가 없소."
"솔직히 말해 살아서 이곳에 사는 것은 편치 않을지 몰라도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것은 괜찮은 일일 것이오."
"그것은 무엇 때문이오?"
"이곳은 무림과 같은 곳이니까."
"이곳이 정 맘에 든다면 내 당신을 이곳에다 묻어 주겠소."
이렇게 말한 상관금홍의 두 눈에선 잔혹한 광채가 폭사되어 나왔고 입가엔 살기띤 미소가 서렸다.
상관금홍은 바닥 한쪽을 가리키면서 계속 말했다.
"이곳에다 묻어 두면 내가 이곳에 서 있을 때마다 초류빈이란 불가사의한 인물이 내 발 밑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 아니겠소?"
여기까지 말한 그는 음침한 미소를 띠며 계속 지껄였다.
"그러면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나는 정신이 더욱더 맑아질 것이오."
"정신이 더욱 맑아진다고?"
"만약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없으면 남이 발 밑에 깔려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마다 자신에게 경고가 되거든....."
초류빈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정신이 너무 맑은 사람에게도 고통은 있는 것이오."
"나는 고통을 지금껏 느껴 보지도 못했고 앞으로도 고통 따위는 느끼지 않을 것이오."
"그것은 당신이 즐거움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오...나는 몇 번이고 어떻게 해서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당신에게 물으려고 했소."
상관금홍은 초류빈을 한참 동안 노려보더니 입을 열었다.
"자신이 왜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묻고 있는 사람이 없지 않아 있을 것이오. 하지만 더욱 가련한 것은 심지어 자신이 무엇 때문에 죽어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오."
초류빈이 배시시 웃었을 뿐 아무 말이 없자 상관금홍은 초류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재차 말했다.
"어쩌면 당신은 바로 후자에 속해 있을지도 모르오."
초류빈은 냉막하게 말했다.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소!"
상관금홍은 화를 버럭 내는 투로 외쳤다.
"생각하지 않았다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것은, 죽음이라는 것은 무슨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오."
이렇게 말한 초류빈은 상관금홍이 말을 하기도 전에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당신의 눈엔 내가 죽어 있는 시체로 보이겠지?"
"당신은 자신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있군."
"나의 죽음이 정해졌다면 나는 이제 아무런 표정도 지을 필요가 없고 또 번뇌를 느낄 필요도 없소. 하지만 당신은?"
이렇게 물은 그는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아 길게 기지개를 켜면서 만면에 웃음을 띤 채 계속 물었다.
"나는 이제 앉고 싶으면 앉고 자고 싶으면 자오. 그러나 당신은 그렇게 할 수가 있소?"
상관금홍은 일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두 주먹만 불끈 쥐었다.
초류빈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당신은 물론 나와 같이 할 수가 없소. 당신에게는 많은 걱정거리가 있고 나를 엄밀히 감시해야 하기 때문이오."
그리고 더욱 편한 자세를 취하면서 말을 계속 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당신보다 편할 것이오."
상관금홍도 갑자기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당신을 축축한 곳에서 죽이지 않겠다고 말한 이상 당신의 옷이 다 마른 후에 손을 쓰려고 했는데 지금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소."
"어째서 생각이 갑자기 바뀐 것이오?"
상관금홍은 천천히 입을 떼었다.
"나는 비단 당신에게 바싹 마른 새옷을 갈아 입혀줄 뿐만 아니라 술까지 주겠소."
이렇게 말한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띠며 계속했다.
"그것은 당신이 한 말이 매우 재미있었기 때문이오. 죽어 있는 사람의 입을 통해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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