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1일 목요일
48 소이비도 제3권 빗나간 우정
빗나간 우정
초류빈은 목이 메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네가 너를 해쳤구나. 내 지금 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설영령은 초류빈의 손을 잡으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너무도 고맙게 대해 주셨어요. 저를 해친 사람은 당신이 아니고 그예요."
초류빈은 즉시 말을 받았다.
"그가....."
설영령의 눈에서 비오듯 뜨거운 눈물이 쉴새없이 흘렀다.
"그는 저를 속였어요. 그리고 저는...저는 당신을 속였어요."
"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초류빈의 손을 잡은 설영령이 손에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긴 손톱이 초류빈의 손등을 파고들었다.
"저는 당신을 속였어요...저의 몸은 이미 그에게 함락되고 말았어요.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때...저는 지금껏 당신에게 숨겨온 것에 대해 자책과 죄의식을 느꼈어요."
그녀의 음성은 갑자기 뚜렷해지고 마치 죽어가던 사람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하지만 초류빈은 그것이 설영령의 마지막 안간힘이라는 것을 알았다. 만약 설영령이 젊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까지 살아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설영령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죽지 않고 지금까지 견디어 온 것은 당신에게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어요."
초류빈은 비통한 표정으로 반 울음섞인 어조로 말했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다. 나는 너를 잘 보호했어야 했는데."
설영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는 비록 저를 속였지만 저는 그를 저주하거나 증오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는 저보다 몇 십 배나 처참한 꼴이 되리라는 것을 저는 확신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 그는....."
바로 이때, 낭천이 날카롭게 달려들더니 초류빈을 밀쳐내고 설영령을 똑바로 노려보며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말했다.
"네가 여봉선을 데리고 이곳으로 왔느냐?"
설영령은 입을 꼭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낭천은 미친 듯이 소리쳤다.
"이 자가 여봉선을 이곳으로 데려오게 했느냐?"
설영령도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서 소리쳤다.
"그래요. 그가 그랬어요.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했는지 아세요? 당신은 그녀가 그동안 어떠한 일을 했는지 아세요? 그는 오직 당신을 위해....."
갑자기 설영령의 외침이 뚝 끊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떨구고 목에 핏발을 세운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적막. 무덤과 같은 적막이 방안에 흘렀다.
만약 사람의 그림자까지 없었다면 아마 온 천지가 무덤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렇게 심하게 불어대던 바람도 비통에 젖어 가볍게 흐느끼는 듯이 듣는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낭천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초류빈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초류빈의 얼굴을 보기를 원치 않는지 고개를 숙인 채 차갑게 물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러한 참극을 만든 것이오?"
이 물음에 대해 초류빈은 쉽게 대답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입을 열 수 없는 것이다. 초류빈은 자신의 그 어떠한 대답이라도 자신은 물론 낭천에게까지 괴로움만을 안겨 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낭천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고 계속 말했다.
"당신은 그녀가 나를 소침시키고 있다고 생각을 한 것이오. 당신은 그녀가 나의 곁에서 떠나야 만이 내가 정신을 차린다고 생각한 것이오. 하지만 당신은 내가 그녀가 없으면 한시도 살아갈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소."
초류빈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나는 자네가 속지 않고 자네가 사랑할 가치를 지닌 사람을 사랑하기를 희망하고 있었을 뿐일세. 그러면 자네는 모든 불행을 쉽게 잊을 수가 있을 걸세."
이때, 낭천은 거친 호흡을 내뿜으며 점점 격한 흥분에 젖어들고 있었다.
"당신은 지금 그녀가 나를 속이고 있으며 그녀는 내가 사랑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소."
"나는 그녀가 처음부터 자네에게 불행을 안겨 주었다는 것만을 알고 있을 뿐일세."
"당신은 내가 지금 행복한지 아니면 불행한지 알고 있다는 말이오?"
이렇게 물은 그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초류빈을 노려보면서 소리쳤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소? 어찌하여 나의 사상을 좌우하고 나의 행복을 파괴하려는 것이오?"
"....."
"당신은 그 아무것도 아니며 자신을 속이는 바보에 불과하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것도 모르는 바보천치란 말이오. 흥! 그러면서도 자신이 한 일이 고상하고 위대하다고 생각하시겠지."
그의 이러한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초류빈의 가슴을 찔러왔다. 세상에서 그러한 말보다 더 초류빈의 가슴을 상하게 하는 것은 또 없었다.
낭천은 어금니를 악문 채 계속 외쳤다.
"설사 그녀가 나에게 불행을 가져다 주었다고 합시다.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안겨 주었소. 설벽운의 모든 행복은 다 당신의 손에 의해 짓밟혔는데 당신은 그것도 부족하여 나의 행복까지도 짓밟아 놓을 생각이었소?"
초류빈은 손을 심하게 떨며 급기야 허리를 구부려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기침과 함께 그의 입에서 선혈이 터져나왔다.
낭천은 자신의 행복을 짓밟으려 이렇게 악랄한 수법을 쓴 초류빈을 그동안 경배했었다는 것에 대해 구토증이 일었다.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사람으로부터 배반을 당했다는 치욕감에 흠뻑 젖은 낭천은 두 눈이 붉게 충혈되었고 끓어오르는 화를 억제하지 못해 가슴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초류빈은 거의 쉴새없이 계속해서 기침과 선혈을 토해내고 있었다.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아픔 중에서도 복부가 터질 듯 답답했다.
낭천은 독기어린 눈초리로 초류빈을 한참 동안 노려보더니 서서히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초류빈은 기침을 하면서도 낭천의 앞을 가로막았다.
낭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무엇 때문에 나의 갈 길을 막는 거죠?"
초류빈은 소맷자락으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입을 열었다.
"자네...자네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
"그것은 당신이 참견할 일이 아니오."
초류빈은 한 발 더 다가서며 말했다.
"자네는 지금 그녀를 찾으러 가려고 그러나?"
"그렇소."
초류빈은 낭천의 두 손을 덥석 잡으며 강경하게 말했다.
"자네는 그녀를 찾아가면 절대로 아니 되네!"
"어째서 안 된다는 겁니까?"
"안 된다면 안 되는 것일세. 설사 자네가 그녀를 찾아 데리고 온다고 해도 그것은 더한 고통을 가져올 뿐일세. 그녀는 언젠가는 자네를 해칠 것이 분명하네. 나는 자네가 그러한 여자에 의해 망하는 것을 보고 싶지가 않아서 이러는 걸세."
낭천은 벌써부터 주먹을 쥐고 있었지만 초류빈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더욱 단단하게 쥐고 있었다. 그의 손마디는 하얗게 변해 있었고 안색도 백지장처럼 창백했으나 붉게 충혈된 눈에서는 용광로의 화염과 같이 뜨거운 열기가 폭사되었다.
초류빈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지금이 바로 그녀와 헤어질 때일세. 그래야만 일시적인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네. 만약 둘이 함께 있게 되면 자네는 평생 동안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할 거야. 자네는 다른 일에는 사리를 명확히 분간하면서도 어찌하여 이 일은....."
갑자기 낭천은 초류빈의 말을 자르고 힘주어 말했다.
"당신은 저의 진정한 친구입니까?"
"그렇네."
"지금 이 시간에도 저의 친굽니까?"
"그렇네."
낭천은 불꽃과 같은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부터는 친구가 아닙니다."
초류빈은 안색을 변색시키고 낭천의 앞으로 몸을 돌렸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당신이 나를 모독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그녀를 모독하는 것은 참을 수 없소."
초류빈은 씁쓸히 웃었다.
"자네는 지금 내가 그녀를 모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친구였기 때문에 저는 참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부터는 당신이 그녀에 대해서 모독하는 말 한마디라도 하면 나는 피로써 대가를 치르겠소."
낭천은 몹시 흥분해 있어서 전신을 심하게 떨면서도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의 피이건 아니면 나의 피이건 어쨌든 나는 피를 볼 것이오."
그 말을 들은 초류빈은 갑작스레 쇠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아찔함을 느끼며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리고 그는 침울했으나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또 입술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다만, 그의 굳게 닫힌 입 사이로 시뻘건 선혈이 서서히 흘러내렸다.
낭천은 초류빈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지금 그녀를 찾으러 갈 것이오.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를 찾고야 말겠소. 나는 당신이 따라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소. 절대로 따라오지 마시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필시 후회하게 될 것이오."
그 음성은 크진 않았지만 매우 위협적이었다. 이 말을 끝낸 낭천은 즉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겨 갔다.
초류빈은 계속해서 기침과 선혈을 뱉어 이미 옷소매가 완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구부린 채 펼 줄을 몰랐다. 그의 눈앞에 핏자국이 어지럽게 나 있었다.
초류빈은 문득 문 밖의 어지러운 발자국들을 생각했다. 낭천은 필시 그녀를 찾아낼 것이다.
밖의 발자국들은 설소하가 일부러 표시를 한 발자국으로 낭천이 찾을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낭천의 혈액 속에는 본능적인 추적 공력이 잠재해 있으며 때로는 야수보다도 더욱 예민하다. 추적한 후엔 어떻게 할 것인가?
낭천은 필경 여봉선과 생사의 결투를 벌일 것이다. 설소하는 원래 남자들이 싸우는 것을 즐거워하는 여자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한 초류빈은 가슴이 싸늘하게 변해갔다. 낭천은 아직 여봉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지금 낭천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초류빈뿐이다. 하지만 낭천은 절대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
낭천은 자신이 한 번 뱉어낸 말은 절대로 책임을 지는 성격임을 초류빈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야심한 밤이고 낭천을 쫓아가기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초류빈은 설영령의 시체를 안아 침상에 눕히고 홑이불을 덮었다. 나중에야 어찌 되었건 낭천을 찿아가 그를 구해야겠다는 결심이 선 것이다. 설사 후회를 하는 한이 있어도.....
낭천은 자신을 이미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초류빈은 낭천을 영원한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낭천이 배반한다고 해도 초류빈은 이 일로 인해서 우정이 끊어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설사 생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변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설벽운! 설벽운! 당신은 잘 지내고 있소?'
초류빈은 설벽운을 생각하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아팠다. 그러나 그녀를 찾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호유성이 그녀를 잘 보살펴 주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호유성의 마음이 비록 변했지만 설벽운을 대하는 마음이 추호도 변하지 않았다면 그가 무슨 짓을 하든 다 용서할 수가 있다.
지금 호유성은 더할 수 없이 기쁜 심정을 지니고 있었다. 앞으로 며칠만 있으면 금전방의 제이인자의 위치에 서게 되며 당금 무림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사람의 의형제가 되는 것이다. 아들 호천강의 힘을 빌어 위치가 한결 나아지는 것이다.
그가 유일하게 의심을 하는 사람은 바로 자신의 처였다. 그녀는 어째서 우리와 함께 와서 이 영광을 같이 누리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무릇 사람의 욕망이란 끝이 없는 것이며 각기 다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최대의 욕망으로 여기고 또 어떠한 사람은 권세를 최대의 소원으로 생각하고 있다.
만약 이 두 가지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과연 더 이상 아무 불만이 없을까?
호천강은 무슨 생각에 골몰해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창 밖을 바라보면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호유성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엔 상관금홍이 친히 나를 마중하러 올 것 같으냐?"
호천강은 서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마중나올 것이며 의식도 성대하게 거행할 것입니다."
호유성은 빙그레 웃으며 자신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그의 형제라면 나의 체면이 곧 그의 체면이 되니까 그는 허술하게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말을 마친 그는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가 나를 마중하러 왔을 때 나는 그를 방주라고 칭해야 하겠느냐, 아니면 형님이라고 칭하는 것이 좋겠느냐?"
호천강은 눈을 깜박거리더니 빙그레 웃었다.
"물론 형님이라고 칭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소자도 그를 백부님이라고 칭할 것입니다."
호유성은 박장대소하며 희색이 만면하였다.
"하하하...너에게 그러한 백부가 생긴다는 것은 크나큰 행복이다. 다만....."
호유성은 말을 잇지 못하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초류빈이 아직까지 죽지 않았는데 그가 약속을 꼭 지킨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호천강은 피식 웃으면서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 일은 이미 청첩장이 발해졌으며 또 천하 영웅이 다 아는 사실인데 만약 그가 약속을 어긴다면 강호인들은 그를 신용없는 사람이라고 욕할 것입니다."
호천강은 눈을 반짝이며 자신있게 말을 이어나갔다.
"상관금홍 같은 사람이 그러한 걸 모를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 약속이 어긋나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호유성은 그제야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무림인들이 그를 믿고 있는 것은 그가 한 말은 꼭 실천하며 아직 어긴 일이 없기 때문이다. 설사 그가 지금의 약속을 취소하고 싶어 해도 아마 그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상 위의 보고서는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날이 갈수록 수북이 쌓여져 갔다. 그뿐 아니라 금전방의 관할 구역도 시간이 지날수록 광범위해졌다. 더 나아가서 무엇이든지 자신이 직접 결정하고 있는 상관금홍은 점차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게 되었다.
상관금홍, 그는 자신 이외엔 누구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지 않는 게 아니라 믿지 못했다. 강철 같은 성격을 지닌 그인지라 다섯 시간 동안이나 쉬지 않고 계속 공무를 집행했으나 피로를 느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날아갈 듯이 상쾌해 하였다.
이때, 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들어왔다. 상관금홍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것은 이 방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제외하고는 오직 한 명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누구일까. 형무명, 바로 그였다. 형무명은 역시 예전과 다름없이 한걸음씩 옮겨 상관금홍의 뒤에 가서 섰다.
상관금홍은 그개도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초류빈은 어떻게 되었는가?"
형무명은 빳빳이 서서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입만 뻥끗했다.
"갔습니다!"
상관금홍은 별안간 몸을 홱 틀어 형무명을 바라보았다. 그는 형무명의 부러진 왼쪽 팔을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다시 자기의 할 일을 계속했다. 그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형무명의 얼굴에도 아무런 표정이 없었으며 초점 잃은 두 눈만이 먼 곳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상관금홍의 그러한 태도는 형무명이 다리가 부러지든지 그렇지 않으면 사지가 몽땅 잘리든지 자신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하였다.
그리고 형무명 역시 그의 그러한 태도에 추호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목석이라고나 할까. 그렇다. 이들은 바로 아무런 감각이 없는 목석, 바로 그것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문이 열리며 한 사나이가 수많은 서류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 많은 서류 중에 선뜻 눈에 띄는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분홍색 편지 한 통이었다.
상관금홍은 무표정하게 먼저 그 분홍색 편지를 뜯어 보았다. 거기엔 휘갈겨 쓴 듯한 글자가 간단하게 적혀 있었다.
<그곳입니다. 여봉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편지를 다 읽은 상관금홍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별안간 무슨 결심을 굳힌 듯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나갔다. 형무명은 그의 그림자처럼 묵묵히 뒤따라 나갔다.
얼마쯤 가자 형무명은 상관금홍의 발걸음이 갑자기 변한 것을 발견하고 더 이상 따라가선 안 된다는 것을 의식했다.
형무명은 처음엔 걸음을 다소 늦추는가 싶더니 이내 걸음을 멈추며 상관금홍의 뒷모습을 응시하였다. 하나 상관금홍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점점 사라져 가는 상관금홍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형무명의 두 눈에 형용하기 어려운 고통의 빛이 가득찼다.
밀림, 매우 우거진 소나무 숲이다. 사시사철 푸른 빛을 띠고 있는 이 소나무 숲은 일 년 내내 햇빛이 들지 않았다.
숲 속은 비록 어둠침침하기는 했으나 습기는 별로 없었으며 이따금 소나무의 그윽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풍겨 왔다. 설소하는 여봉선의 손을 꼭 잡은 채 소나무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당신은 후회하지 않겠어요?"
여봉선은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 내가 무엇 때문에 후회를 하겠소. 당신만 있다면 이 세상의 그 어느 남자도 후회하지 못할 것이오."
설소하는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면서 나긋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정말 그렇게도 좋으세요?"
여봉선은 우람한 팔로 그녀의 가냘픈 허리를 안았다.
"물론이오.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몇 천 배 만 배나....."
이렇게 말하면서 그의 손은 그녀의 젖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이때, 숲 속에서 갑자기 극히 경미한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발걸음소리는 매우 특이했다.
이 발걸음소리는 뭔지 모르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가슴을 짓밟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였다. 가벼우면서도 무겁게 느껴지는 발걸음소리가 드디어 멈췄다.
"상관금홍?"
상관금홍은 거대한 삿갓을 길이 눌러쓴 채 서릿발처럼 차가운 음성으로 반문했다.
"여봉선?"
여봉선은 한기가 이는 듯한 냉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소!"
그가 먼저 대답을 한 것이다. 대답을 하고 난 그는 즉시 후회했다. 그것은 자신의 기세가 상관금홍보다 못하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상관금홍은 싸늘하게 웃었다.
"여봉선! 너는 과연 내가 직접 나서서 손을 쓸 만한 가치가 있구나."
여봉선도 낭랑하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당신이 만약 상관금홍이 아니라면 나 역시 그대를 죽일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오."
말을 하고 난 그는 다시 자신을 욕했다. 그의 말은 비록 차갑기 그지없고 또 거만했지만 남자들이 듣기에는 마치 상관금홍에게 끌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말이기 때문이다.
상관금홍은 무표정하게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삿갓을 가볍게 쳐들어 설소하를 내려다보았다.
설소하는 아직도 나무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었는데 그녀의 두 눈은 점점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후에는 시뻘건 피를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자기로 인해 서로 피를 흘리기를 원했으며 그리고 그것을 즐기는 여자였다.
상관금홍도 한동안 그녀를 주시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소리쳤다.
"이리 와라!"
설소하는 그 순간, 몹시 당황해 하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여봉선과 상관금홍을 번갈아 보면서 일시 동안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여봉선은 싸늘하게 코웃음을 치며 자신있게 말했다.
"그녀는 절대로 가지 않을 것이오!"
설소하는 다시 여봉선을 한 번 바라보더니 이내 상관금홍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이 두 사람 중에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상관금홍은 석상처럼 우두커니 선 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매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여봉선은 호흡이 고르지 못하고 몹시 불안해 하는 듯했다.
설소하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여봉선의 긴장을 녹일 듯 요염하게 웃으며 눈을 찡긋했다. 여봉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이때였다. 설소하는 느닷없이 물찬 제비처럼 상관금홍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녀는 드디어 선택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절대 틀리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순간 여봉선의 두 눈은 초점을 잃고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는 처음으로 견딜 수 없는 수치와 패배의 맛을 본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에게 이중으로 고통을 안겨다 준 것이다.
"너는 이미 패했다."
상관금홍은 얼음장보다 더욱 차가운 음성으로 말을 뱉었다.
"나는 너를 죽이지 않겠다. 너는 이제 내가 죽일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상관금홍은 삿갓을 다시 푹 눌러쓰고 소나무 숲을 빠져나갔다. 설소하는 그의 뒤를 따라가다가 별안간 고개를 들어 여봉선을 향해 빙그레 웃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권하지만 당신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거예요."
그녀의 이 말이 여봉선의 귓전을 무섭게 파고들었다. 그렇다. 이렇게는 이 세상을 살아갈 아무런 흥미도 없는 것이다. 여봉선은 땅에 엎드려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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