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1일 목요일

49 소이비도 제4권 살인 청부





살인 청부



설소하는 상관금홍의 손을 잡으며 간드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당신의 솜씨에 정말 탄복했어요."

상관금홍은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설소하는 교태롭게 웃으며 흑단같은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말했다.

"형무명의 살인 솜씨가 비록 빠르기는 하지만 당신은 그보다 몇 배나 더욱 빠르다는 것을 알았어요. 당신은 살인을 하는 데도 전혀 손을 쓸 필요가 없으니까요." 상관금홍은 담담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내가 꼭 손을 써야 할 만한 솜씨를 지닌 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소하는 눈을 반짝이며 상관금홍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이 직접 손을 써야 할 상대는 그리 많지가 않아요. 있다면 단 한 명뿐이에요." 상관금홍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초류빈!" 그녀의 눈에서는 예리한 신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그 사람은 꼭 오뚝이 같아요. 당장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어떻게 보면 영원히 쓰러지지 않을 사람 같기도 해요. 저는 그가 어떤 인간인지 상상하기조차 어려워요. 군자인지 바보인지 아니면 영웅인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어요." 상관금홍은 언잖은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는 그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구나!" 설소하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어요. 그의 손에 죽지 않으려면 흥미를, 당연히 흥미를 가져야 해요." 상관금홍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사람이란 괴상한 동물이에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선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날이 가면 권태를 느끼게 돼요. 하지만 자신의 적에 대해서는 그 정반대거든요." 그녀는 상관금홍의 동조를 구하려는 듯이 빤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이러한 이치에 대해선 당신도 잘 알고 있겠지요?" 상관금홍은 한숨을 내쉬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흥미도 여러 가지가 있다. 이는 그를 증오하기 때문이냐? 그렇지 않으면 두려워하기 때문이냐? 내가 보기엔 네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인 것 같구나." 설소하는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호호호...당신은 그를 질투하는 모양이군요." 상관금홍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아리송한 표정으로 물었다.

"낭천은 어떻더냐?" 설소하는 방긋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질투를 할 줄 알아요. 낭천, 그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일지도 몰라요." 상관금홍은 볼멘 목소리로 툭 쏘아주듯이 말했다.

"내가 물은 것은 그것이 아니다. 너는 어째서 그를 죽이지 않았느냐?" 설소하는 배시시 웃으면서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반문했다.

"저도 당신에게 묻겠어요. 형무명은 어째서 그를 죽이지 않았을까요?" 상관금홍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며 냉랭하게 대꾸했다.

"나는 너에게 직접 손을 쓰라고 했는데, 왜 차마 그를 죽일 수가 없더냐?" 그녀는 흑백이 뚜렷한 두 눈을 깜박이면서 말했다.

"살인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에요. 하나 내 말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에요. 저는 아직까지 낭천보다 말을 잘 듣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어요." 그녀는 상관금홍의 품속으로 쓰러지듯 기대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제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말다툼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에요. 당신이 꼭 저더러 그를 죽이라면 앞으로 많은 기회가 있으니 당신 말대로 하겠어요."

상관금홍은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석양에 물들어 마치 잘 익은 사과처럼 탐스러워 잘못 만지면 곧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의 앵두 같은 붉은 입술 사이로 향긋하면서도 포근한 입김이 새어나왔다.

상관금홍은 서서히 고개를 밑으로 숙였다. 드디어 두 사람의 입술이 하나로 합쳐지자 전신이 자지러질 듯한 짜릿한 쾌감이 두 사람을 황홀케 하였다.

길고 긴 입맞춤이 끝나자 설소하는 뼈없는 동물처럼 흐느적거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상관금홍의 두 눈도 이와 동시에 가늘게 떠졌다. 그러나 그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심지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상관금홍은 풀밭에 쓰러져 뜨겁게 달아오른 여체를 흐느적거리며 무엇인가를 간절하게 요구하고 있는 설소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샛노랗게 변해 있는 잔디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눈엔 시들은 잔디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 인영이 서서히 나타났다. 누군가가 온 것이다.

놀진 석양이 그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그 사람의 발걸음은 마치 토끼를 노리는 늑대같이 경쾌해 발걸음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상관금홍은 화석으로 변한 듯 티끌만큼도 미동하지 않았고 잔디 위에 쓰러져 있는 설소하만이 음탕한 신음을 발하며 몸을 비비 꼬았다.

이윽고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생전 등뒤에서 사람을 죽이지 않지만 이번만은 예외요!" 그 사람의 음성은 서릿발보다 더 차가웠으며 극도의 긴장에서인지 아니면 흥분에서인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것은 확실히 살인을 하기 위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상관금홍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언반구도 없었다. 지상의 그림자는 서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으나 들어올린 채 한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침묵이 잠시 동안 흐른 후에 그 사람은 말했다.

"언제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을 생각이오?" 상관금홍은 담담하게 말했다.

"등뒤에서 살인을 해도 마찬가진데 내가 무엇 때문에 고개를 돌려야 하느냐?" 이 말이 끝났을 때 설소하의 신음소리도 끝났다. 설소하는 두 눈을 뜨는 순간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지르다시피 외쳤다.

"낭천!"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벌떡 일어나 상관금홍의 옆을 지나 지상에 비친 그림자와 한 데 엉켰다.

상관금홍은 합쳐진 두 그림자를 내려다보면서 서서히 걸음을 옮겨 두 그림자 위에서 멈췄다.

설소하는 낭천의 두 손을 잡으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당신은 과연 와 주었군요. 저는 당신이 꼭 와 주실 줄 알았어요....." 그녀는 이 두 마디를 수 차례 되뇌었다. 하지만 매번 얘기할 때마다 그녀의 음성은 더욱더 온화했고 부드러웠으며 그리고 달콤했다. 그녀의 음성은 거대한 빙산이라도 순식간에 녹여 버릴 것만 같은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설소하는 첫사랑을 느낀 소녀처 럼 얼굴을 붉히며 띄엄띄엄 말했다.

"저는 당신이 집으로 돌아간 후 내가 없는 것을 알면 저를 찾아오실 것이라고 확신했어요." 강철처럼 단단하던 낭천의 마음은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따라 녹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던 그의 모든 긴장과 분노 그리고 원한이 그녀의 한마디 말마다 무형 중에 완전히 사그러졌다.

그녀는 낭천의 초췌하면서도 창백한 얼굴을 보고 눈시울을 붉히면서 목메인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저를 찾기 위해 숱한 고생을 하셨군요." 낭천의 음성도 쉰 듯이 가볍게 떨려 나왔다.

"나는 당신을 찾은 것으로 만족하오." 그렇다. 낭천은 그녀만 찾으면 그 어떤 대가라도 치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만 찾을 수 있다면 설사 지옥의 불길 속에 뛰어드는 것도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당신을 찾은 것으로 만족하오....." 이 간단한 한 마디에 내포되어 있는 사랑은 이 세상의 모든 표현으로도 완전히 표시할 수는 없었다.

바로 이때였다.

쌩!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검광이 번쩍 하면서 땅에 떨어져 있던 검이 공중으로 날아가다가 한 사람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상관금홍이 어느 틈엔지 이미 그들의 앞에 와 있었다.

상관금홍은 냉막한 표정으로 수중에 있는 검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강철로 만든 것으로써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검이었다. 이 검은 낭천이 이곳으로 오면서 어떤 사람에게 빌린 것이다.

상관금홍은 그 검에 매우 흥미가 있는 듯 유심히 살펴보았다.

낭천은 설소하만 있으면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곧 낭천의 전부인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이곳에서 자기 두 사람 외에 또 한 사람이 자신을 죽이고자 하고 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지금 그의 검은 이미 그 사람 손에 들어가 있었다. 더할 수 없이 무서운 사람의 손에 그의 검이 들려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손은 그저 검잡이만 잡으면 언제든지 날카로운 검 끝으로 상대의 심장을 여지없이 꿰뚫을 수 있는 것이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검에서 무시무시한 살기와 검기가 동시에 폭사되어 나왔다.

낭천은 냉랭하게 소리쳤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상관금홍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이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계속 검 끝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상관금홍의 입가에 경멸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낭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이 검으로 나를 죽이려고 했느냐?" 낭천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런데 그 검이 어떻다는 것이오?" 상관금홍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 검으로는 사람을 죽일 수 없다!" 낭천은 역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어떠한 검이라도 다 사람을 죽일 수 있소!" 상관금홍은 조소가 담긴 표정으로 확신하듯 말했다.

"하지만 이 검은 네 것이 아니다. 네가 만약 이 검을 사용한다면 너 자신밖에 살해할 수 없다." 말이 끝나는가 싶자 검광이 번쩍 하면서 검의 방향이 바꾸어졌다. 상관금홍은 손으로 검 끝을 부러뜨린 후 거꾸로 낭천에게 건네주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믿지 못하겠다면 한번 시험해 보아라!" 낭천은 비록 손을 뻗어내지는 않았으나 어깨의 근육이 다시 긴장되었다. 그는 자신이 이 사람 앞에서 시종일관 피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이런 감각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러한 감각은 그로 하여금 바짝 긴장하게 하여 뱃속의 창자까지 움츠러져 구토를 느끼게 하였다. 그렇다고 그가 어찌 검을 받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낭천은 손을 끌어내 상관금홍의 손에 들린 검을 낚아채듯이 잡았다.

설소하는 안색이 변하여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그를 죽일 것인가요? 당신은 그가 누구인지 아세요?" 낭천이 채 입을 열어 대꾸하기도 전에 그녀는 재빨리 말했다.

"이 사람은 저의 은인이에요." 낭천은 약간 의외인 듯 두 눈을 껌벅거렸다.

"은인?" 그녀는 정색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봉선이 저를 어찌나 괴롭혔는지 저는 죽고만 싶었어요. 만약 이분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그녀의 두 눈에서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낭천은 그녀의 모습에 당황하여 일시 동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설소하는 애처롭게 울면서 원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저는 당신이 저를 대신해서 이 사람에게 보답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당신은....." 상관금홍이 말을 가로채며 담담하게 말했다.

"살인! 살인이란 때로 수많은 보답 방법 중의 하나가 될 때가 있지." 설소하는 고개를 돌리며 다그치듯 반문했다.

"당신은 그로 하여금 살인을 하라는 것인가요?" 상관금홍은 음침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에게 목숨 하나를 빚졌으니 그것을 갚으려면 한 사람의 목숨을 바치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냐?" 설소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빚을 진 것은 나지 저 사람이 아니에요!" 상관금홍은 냉혹하게 코웃음을 치며 강경하게 말했다.

"너의 빚이 곧 그의 빚이 되는 것이 아니냐?" 설소하는 고개를 돌려 낭천을 바라보았다.

낭천은 이를 악물고 한마디 한마디 분명하게 말했다.

"그렇소! 그녀의 빚은 나의 빚이오. 그러니 내가 갚겠소!" 상관금홍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다시 반문했다.

"너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한테 빚진 것은 없느냐?" 낭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퉁명스럽게 응수했다.

"그렇소. 지금까지 없었소." 결단코 없다는 듯한 말씨였다.

상관금홍은 회심의 미소를 띠며 눈을 반짝였다.

"너는 누구의 목숨으로 나에게 빚을 갚으려는 거냐?" 낭천은 주저하지 않고 야무지게 대답했다.

"오직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의 목숨이라도 좋소." 상관금홍은 마른침을 삼키며 약간 긴장된 어조로 물었다.

"그 한 사람이란 누구냐?" 낭천은 빙그레 웃으며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초류빈!" 상관금홍은 싸늘하게 웃으며 비웃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는 그를 감히 죽이지 못하는 것이냐?" 일순 낭천의 두 눈이 고통의 빛으로 가득찼다.

"그렇소! 나는 그에게 너무나 많은 빚을 졌소." 상관금홍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좋다! 나를 따라오너라!" 그리고는 몸을 돌려 서서히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때 해는 이미 서산 너머로 그 모습을 감추어 땅거미가 천천히 내리기 시작했다.

낭천은 내심 불안을 느꼈으나 무엇 때문인지 그 자신조차도 알 수 없었다. 상관금홍은 앞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낭천이 따라오든지 말든지 상관이 없다는 듯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낭천은 아직도 그의 시선을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일종의 형용할 수 없는 압력이 자신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가 앞으로 가면 갈수록 그 압력은 더욱더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낭천은 불안을 떨쳐 버리려는 듯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엔 어느덧 초롱초롱한 별들이 한둘 떠오르고 있었다. 사방은 쥐죽은 듯이 고요했고 귀뚜라미 소리만이 요란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무거운 발걸음소리와.....

낭천은 자신의 발소리를 똑똑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상관금홍의 발걸음소리와 배합이 되어 기묘한 반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도 느꼈다.

한 마리의 귀뚜라미가 풀 속에서 뛰어나오다가 이 이상한 발걸음소리에 놀란 듯 다시 풀 속으로 숨어들었다. 지금 그들의 발걸음소리엔 무한한 살기가 내포되어 있는 듯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일까.

낭천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의 발걸음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발걸음이 갑자기 이토록 무거워진 것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낭천은 고개를 숙인 채 곰곰히 생각한 끝에 겨우 그 원인을 발견했다. 그것은 상관금홍이 첫 걸음을 딛는 사이에 그가 한 걸음을 내딛기 때문인 것이다. 상관금홍이 한 걸음 걸으면 그가 두 번째 걸음을 옮기고 상관금홍이 세 번째 걸음을 딛으면 그가 네 번째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이것은 시계 바늘처럼 규칙적이어서 티끌 만한 차이도 없었다. 낭천의 걸음걸이가 빠르면 상관금홍의 걸음도 빨라지고 그가 늦으면 상관금홍의 걸음도 늦추어졌다.

처음엔 물론 상관금홍이 배합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낭천이 배합을 했다.

상관금홍의 걸음이 빨라지면 낭천의 걸음도 빨라지고 상관금홍이 천천히 걸으면 그가 걸음을 늦추곤 하였다. 그의 걸음걸이는 상관금홍에게 무형중에 제압당하고 있어서 아무리 발걸음을 바꿔 딛으려고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낭천의 손바닥엔 땀이 흥건히 고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웬지 모르지만 이렇게 걷자 매우 마음이 편안해지고 전신의 근육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다고 느꼈다.

그의 몸은 마치 이 이상한 배합에 의해 최면이 되어 있는 듯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무서운 배합으로써 사람의 혼을 빼앗는 것이었다.

설소하도 이것을 발견하자 아름다운 두 눈에 경악과 원한이 엇갈린 가증스러운 빛이 폭사되어 나왔다. 낭천은 그녀의 전부였다.

이 세상에서 오직 그녀만이 낭천을 소유할 수가 있다. 그녀는 그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서 낭천을 뺏아가는 것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형무명은 아직도 그곳에 서 있었다. 해가 지고 밤이 되어 별이 떠올랐으나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 시선 하나 움직이지 않고 상관금홍이 사라진 곳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차라리 돌부처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때 상관금홍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형무명은 그의 거대한 삿갓과 넓은 황색 장포를 보았고 부러진 청강검이 그의 수중에 있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서야 낭천이 바싹 그를 뒤따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먼 곳에서 이 광경을 보았다면 상관금홍의 뒤를 따르고 있는 사람이 형무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두 사람의 발걸음이 매우 특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낭천이 이미 형무명의 위치를 대신했을 줄이야 그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형무명의 눈동자는 흐리멍텅해서 마치 썩은 동태눈을 연상케 했다. 그의 그러한 눈에는 생명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죽음의 맛도 없었다.

상관금홍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다가 그의 앞에서 멈췄다.

낭천도 뒤따라 걸음을 멈추었다.

상관금홍은 한참 동안 형무명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별안간 손을 뻗어 형무명의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쑥 뽑았다. 그리고는 지극히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너는 지금 이 검이 필요없겠지?" 형무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의 대답은 너무나 간단하고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 형무명 자신도 자기의 입에서 이러한 대답이 나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상관금홍은 부러진 검 조각을 형무명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그 대신 이것을 사용해라!" 형무명은 마치 최면술에 걸린 듯 그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응했다.

상관금홍은 형무명이 검을 받자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너는 지금 어떠한 검을 사용해도 마찬가지다." 말을 마친 그는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낭천은 그의 뒤를 묵묵히 따르며 형무명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설소하는 그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죽음이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에요." 거대한 먹구름이 어느덧 하늘의 별까지 가렸다. 잠시 후엔 번개와 천둥이 치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거센 폭우가 온 대지를 집어삼킬 듯이 쏟아졌으나 형무명은 제자리에 선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의 전신은 비에 흠뻑 젖어 마치 물에 빠진 생쥐 같았다. 그의 두 눈에서 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빗물일까? 아니면 눈물일까?

형무명이 어찌 눈물을 흘릴 수가 있겠는가. 눈물,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그 대신 피를 흘린다.

검! 이 검은 종잇장처럼 얇으면서도 예리한 것이었다. 등불 아래 비친 검은 도깨비불 같은 새파란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그 검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케 할 뿐더러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하는 무서운 검이었다. 밖에서는 엄청난 폭우가 폭포처럼 쏟아졌으나 문과 창이 굳게 닫힌 방 안은 바람 한 점이 없었다.

낭천은 그 검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한동안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그 검에 넋이 빠진 듯하였다.

상관금홍은 그런 낭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너는 그 검을 어떻다고 생각하느냐?" 낭천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그 검에서 눈을 떼지 않고 취한 듯이 말했다.

"좋군요! 너무 좋은 검입니다." 상관금홍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전에 사용했던 검과 비교하면 어느 게 나으냐?"

"조금 가볍군요!" 상관금홍은 느닷없이 그의 수중에서 검을 나꿔채더니 낭천이 놀랄 틈도 없이 두 손가락으로 검 끝을 힘껏 튕겼다.

순간, 윙! 윙! 용이 우는 듯한 웅장하고도 청아한 소리가 나며 검신은 즉시 원형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웅웅거리는 소리가 한동안 듣는 사람의 심금을 격동시키며 계속되었다. 일순 낭천의 두 눈은 용광로처럼 무섭게 불길을 토했으며 전신을 부르르 떨기까지 하였다.

상관금홍은 소리없이 웃으며 재차 반문했다.

"이 검은 전에 네가 사용했던 검과 비교해 어느 쪽이 우월하냐?" 낭천은 다시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만약 내 검을 손가락으로 튕겼다면 부러졌을 것입니다." 상관금홍은 빙그레 웃으며 번개같이 칼을 휘둘렀다.

휙!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상 위에 놓였던 찻잔이 마치 두부처럼 반으로 잘라졌다.

낭천은 침을 흘리며 잠꼬대같이 중얼거렸다.

"정말 좋은 검이구나....." 상관금홍은 피식 웃으며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 검은 확실히 좋은 검이다. 겉으로 보기엔 다른 검과 별 차이가 없지만 사실은 당금 천하에서 명검을 잘 만드는 고대사(古代師)가 형무명을 위해서 특별히 만들었던 진품이다." 상관금홍은 담담하게 웃으면서 말을 계속했다.

"너의 검법은 형무명과 상통된 점이 있는 것 같구나."

낭천은 상관금홍의 수중에 있는 검을 탐스럽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곳이 몇 군데 있소!" 상관금홍은 검날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그가 손을 쓰는 것이 비록 악독하기는 하나 너는 그보다 더욱더 정확하고 안정되어 있다. 그것은 네가 그보다 더 침착하고 신중하게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검은 네가 사용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낭천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검이 아니오!" 상관금홍은 검과 낭천을 번갈아 보며 말을 받았다.

"검은 본시 임자가 없는 것이며 오직 훌륭한 영웅만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것이다." 상관금홍은 그 검을 낭천에게 건네주면서 말을 이었다.

"자! 이제부터 이 검의 주인은 바로 너다." 낭천은 한참 동안이나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저으며 똑같은 말을 했다.

"이것은 나의 검이 아니오!"

"이 검의 주인은 너만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이 검이 있어야 만이 너는 남을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관금홍은 가볍게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어쩌면 나까지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낭천은 이번엔 아예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상관금홍은 웃음을 거두고 정색을 하였다.

"네가 나에게 빚을 진 이상 너는 나를 위해서 살인을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살인할 수 있는 검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낭천은 드디어 손을 내밀어 검을 받았다.

상관금홍은 만족한 표정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검이 이제 너의 것이 됐으니 내일이면 너는 나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을 것이다." 낭천이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죽일 사람은 누구요?" 상관금홍은 갑자기 박장대소하며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하하.....내가 너를 시켜 죽여야 할 사람은 결코 너의 친구가 아니니 안심해라!" 말을 마친 그는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그의 우렁찬 음성이 문 밖에서 들려왔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나의 친구이니 내일 정오까지는 그 누구도 시끄럽게 해서는 안 된다." 상관금홍은 방에 들어오지 않고 그대로 물러갔다. 방 안에는 설소하와 낭천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설소하는 방에 들어온 후 지금껏 입을 열지 않고 고개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상관금홍은 이 방에 오래 있었지만 시종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녀 역시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만 낭천이 검을 받을 때 무엇인가 말하려고 했으나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 방 안엔 젊은 남녀가 호젓이 있을 뿐이다.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비로소 설소하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당신은 정말 그를 위해서 살인을 할 생각인가요?" 낭천은 탄식을 하며 우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나는 그에게 빚을 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승낙하지 않았소?" 설소하는 나직히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했다.

"당신은 그가 누구를 죽이려고 하는지 아세요?" 낭천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짐작도 가지 않으세요?" 낭천이 다시 고개를 흔들며 힘없이 대답했다.

"모르오! 당신은 누군지 알고 있소?" 설소하는 안색이 변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저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면 당신이 죽여야 할 사람은 바로 호유성이에요!" 낭천은 의아한 빛을 띠며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오?" 설소하는 배시시 웃으면서 속삭이듯 대답했다.

"그것은 호유성이 그를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상관금홍은 지금껏 다른 사람만 이용해 왔거든요!" 낭천은 묵묵히 생각에 잠기더니 또박또박 말했다.

"호유성! 그 자는 벌써 죽었어야 할 존재요!" 설소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완강하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절대로 손을 쓸 수가 없어요!" 낭천은 어리둥절하여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무엇 때문이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반문하였다.

'당신은 상관금홍이 무엇 때문에 당신으로 하여금 그를 죽이게 하려는 것인지 아세요?" "자신이 죽이는 것보다 남이 죽여주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오."

설소하는 고개를 도리질하며 서서히 말했다.

"상관금홍이 호유성을 죽이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에요. 하물며 금전방엔 고수들이 구름처럼 많이 있어 호유성 한 사람이 아니라 백 명 천 명이라고 해도 금전방은 깨끗하게 처치할 수가 있어요. 상관금홍이 몸소 손을 쓰고 싶지 않다면 얼마든지 수하들을 시킬 수도 있는데 구태여 당신을 필요로 하겠어요?"

낭천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그치듯 물었다.

"당신은 그 원인을 알고 있소?" "물론 알고 있어요...앞으로 이틀만 있으면 초하루지요?" 낭천은 의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초하루가 어떻다는 거요?"

"다음달 초하루는 상관금홍이 호유성과의 형제를 맺을 날이며, 그 소식을 강호의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어요." 낭천은 휘둥그레져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상관금홍의 눈이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니오?" 설소하는 피식 웃으며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호유성과 형제를 맺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이미 약정이 된 것이라 어길 수도 없는 것이 그의 입장이에요. 그래서 그는 호유성을 아예 죽여 없애서 형제를 맺기로 한 것을 백지화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녀는 낭천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하며 계속 말했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형제를 맺을 수는 없잖아요." 낭천은 아무 말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설소하는 낭천의 얼굴을 주시한 채 상냥한 어조로 계속했다.

"하지만 이미 약조가 되어 있는 이상 상관금홍은 자신이 직접 손을 쓸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수하들을 시킬 수도 없기 때문에 당신을 이용하는 거예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호유성을 죽이기엔 당신이 가장 적합한 사람이지요." 낭천은 그래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무엇 때문이오?"

"당신은 금전방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뿐만 아니라 초류빈의 친구이기 때문이기도 해요. 호유성이 초류빈에게 너무나 많은 죄를 지었다는 것은 강호인들이 모두 아는 사실이 아니에요?" 그녀는 침울한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그래서 당신이 호유성을 죽이면 당신이 초류빈을 위해서 그를 죽였으리라고 남들이 생각할 것이며 절대 상관금홍을 의심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낭천은 얼음굴 속에서 나온 사람처럼 냉랭한 표정으로 강경하게 말했다.

"설사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해도 나는 그러한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을 용납할 수 없소!" 설소하는 근심이 가득찬 표정으로 힘없이 말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호유성을 죽이면 상관금홍은 당장 당신을 죽일 거예요."

낭천은 팔짱을 끼며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소하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가 당신을 죽이는 것은 비단 당신의 입을 막기 위한 것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호유성을 위해서 복수했다는 것을 남들에게 의식시키기 위한 것이에요." 낭천은 자기의 수중에 있는 검을 내려다볼 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설소하는 애수에 잠긴 듯한 시선으로 그를 한동안 주시했다.

"상관금홍의 공력이 얼마나 고강한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당신은...당신은 절대로....." 채 말을 끝내지 못한 그녀는 낭천의 품속으로 파고들면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가 없는 틈을 타서 도망가기로 해요!" 낭천은 두 눈이 휘둥그래져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망가라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낭천을 정감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저는 당신이 지금까지 달아난 적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당신은 도망가는 성질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저를 위해서 이번만은 제 말을 들어 주세요." 낭천은 고개를 흔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안 돼!" 설소하는 애원하다시피 애처롭게 입을 열었다.

"저를 위해서도 안 된다는 것인가요?" 그녀의 음성은 떨리기 시작했고 두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여자 특유의 무기를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낭천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천천히 말했다.

"바로 당신을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오." 그녀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다그쳐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낭천은 단호한 표정으로 침착하게 대꾸했다.

"당신을 위해서 나는 배은망덕한 필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이오." 설소하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애처롭게 쳐다보았다.

"하지만...하지만....." 그녀는 낭천의 품속으로 파고들면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당신이 영웅이든 필부이든 간에 제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에요. 저의 소원은 오직 당신과 함께 사는 것밖에 없어요."

낭천의 냉혹스런 두 눈이 서서히 온화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설소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내 지금 당신과 같이 있지 않소." 설소하는 더욱더 처량하게 울먹이며 하소연하듯 말했다.

"하지만 내일이면...내일 이후엔....." 그녀는 낭천을 꼭 껴안으면서 얼굴을 그의 가슴에다 비볐다.

"이번 한 번 저의 뜻을 따라 주신다면 이후에는 뭐든지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겠어요." 낭천은 갑자기 손을 거두었다. 그의 두 눈은 어느 새 원래의 냉막함을 되찾았다.

"나는 어떠한 일이라도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할 수 있소. 하지만 이번 일만은 안 되오!" 그녀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울부짖듯 말했다.

"무엇 때문이죠?...왜...무엇 때문에....." 낭천은 냉막한 표정으로 냉랭하게 말했다.

"사는 데도 여러 가지 방식이 있소! 당신이 만약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나로 하여금 정정당당하게 살아가도록 해주어야 하오." 그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끈덕지게 말했다.

"사는 것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잘 살 수 있어요. 산다는 것은 아무래도 죽는 것보다는 좋은 것이에요." 낭천은 으시시할 만큼 냉혹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전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소. 하나 지금은 그렇지 않소. 때때로 사는 것은 죽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았소." 그녀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면서 냉랭하게 응수했다.

"그 말은 당신이 한 것이 아니라 마치 초류빈이 한 것 같군요. 초류빈처럼 고독한 사람만이 그런 가소로운 말을 할 수 있어요." 낭천의 두 눈에 순간 고통의 빛이 가득 서렸다.

"당신은 그 말이 가소롭다고 생각하오?" 설소하는 오뉴월에 내리는 서리처럼 표독스럽게 대답했다.

"물론이에요! 만약 모든 사람이 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벌써 다 죽었을 거예요. 벌써 다....."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낭천은 느닷없이 그녀의 말을 가로채며 벽력같은 폭갈을 터뜨렸다.

"닥치시오! 더 이상 그 따위 소리는 하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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