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1일 목요일

64 소이비도 제4권 사랑과 우정







사랑과 우정



하나는 사랑이며 또 하나는 미움이다. 낭천은 사랑의 힘으로 해서 다시 삶을 찾아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미움의 힘으로 해서 형무명에게 생명의 활력을 불어넣어 준 것이다.

그는 형무명이 삶을 다시 영위하기를 원했다. 만약 그것이 복수라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복수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복수를 한다면 인류의 역사는 더욱 찬란한 것이 될 테고 인류의 생명은 아마 영원히 존재될 것이다.

어찌 되었든 복수를 했다는 것은 통쾌하고 유쾌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낭천은 통쾌함과 유쾌함을 느끼고 있을까? 그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은 다만 피로감뿐이었다.

그는 손에 있던 검을 한참이나 넋이 빠진 사람처럼 바라보고 있다가 힘없이 떨어뜨리고 말았다.

손소홍은 이런 광경을 내려다보고 난 후 가볍게 탄식을 토해냈다. 그러더니 천천히 말을 꺼냈다.

"사람 한 명을 죽이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에요."

이것은 바로 초류빈이 했던 말이다. 어떠한 사람에 대해서든 그의 출발점은 원점에서 시작된다.

미움은 궤멸을 조성하지만 사랑은 사람에게 삶의 참맛을 느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은 항상 이렇게 넓으며 그의 인격은 영원히 위대한 것이다.

손소홍은 지금 낭천이 초류빈과 똑같이 변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초류빈을 바라보았다. 초류빈의 표정도 몹시 피곤해 보였으며 말조차 하기 싫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손소홍은 그를 한동안 쳐다보더니 갑자기 웃으며 말을 꺼냈다.

"이 세상에서 공력이 가장 고강한 두 사람을 두 분이 격파시켰어요. 그리고 이 세상에서 세력이 가장 큰 방파도 두 분의 손에 의하여 와해 되었으니 두 분께서는 기뻐해야 할 것인데 어째서 도리어 그렇게 암담한 표정을 짓고 계시지요? 마치 자신이 패한 것같이 ....."

초류빈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이윽고 길게 탄식을 터뜨리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제나 한 사람이 승리를 하고 나면 유난히 피곤해지고 적적해지고 적막해지는 법이오."

그러자 손소홍은 의문스럽다는 눈초리로 물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에요?"

초류빈은 마른침을 한 차례 삼키고 담담하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미 승리를 했고 또한 완전히 성공을 했기 때문이오. 그러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분투할 것이 없게 되며 공허만 남게 마련이오."

여기까지 말을 하고 난 초류빈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반대로 패배를 한 사람은 도리어 전신이 밝아지고 다음을 위해 분투할 수가 있소."

그러자 손소홍은 무엇인가 잠시 생각을 더듬는 듯하더니 즉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승리를 하고 성공하는 것도 결코 유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인가요?"

초류빈은 또다시 침묵을 지키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드리면서 말을 꺼냈다.

"하하...비록 그렇게 유쾌한 것은 못되지만 패배한 것보다는 아마 훨씬 더 나을 것이오."

승리와 성공은 사람에게 결코 충분한 만족감을 가져다 줄 수는 없으며 또한 건전한 쾌락을 느끼지도 못한다.

건전한 즐거움은 끝없는 어느 목적을 향해 고전분투할 때가 있는 것이다. 만약 누구를 막론하고 그러한 즐거움을 느꼈다면 그 사람은 아마 이 세상을 헛되게 살아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장정― 정자란 사람들이 이별을 하는 장소로 정해졌고 또 사용해 온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별이란 우리 사람들의 가슴에 아픔을 안겨다 주는 것이다.

주위는 더욱더 처량하게 여겨졌다.

장정 밖에 있는 작은 오솔길에서 한 쌍의 남녀가 작별을 아쉬워하면서 무엇인가 열심히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청년은 얼핏 보아 매우 영준하게 생겼으며 여자 또한 아름다웠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가 사랑하고 있는 사이인데 청춘의 환희를 누리지도 아니하고 이별을 하려는 것인가?

청년의 몸에는 검이 메어져 있었다. 청년의 두 눈은 눈물을 흘렸던 탓인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여기까지 바래다 주어서 고맙소. 이제는 그만 돌아가 보시오."

그러자 낭자는 천천히 고개를 떨구면서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언제쯤 다시 돌아올 것이죠?"

청년은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다소 주춤거리더니 침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것은 확실하게 모르겠소. 어쩌면 일 년이고...어쩌면....."

이 말을 듣고 난 낭자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어째서 꼭 가야 하며 왜 저를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시는 것이죠?"

"내 벌써 얘기했지만 나는 그들을 찾아서 그들을 꼭 이겨야만 하오."

이렇게 말한 한 청년의 두 눈에서는 강한 광채가 폭사되어 나왔다. 청년은 먼 곳을 바라보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상관금홍, 곽숭양, 초류빈, 여봉선...나는 그들에게 내가 그들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 준 후에....."

말이 끝나자 낭자는 다그쳐 물었다.

"그렇게 한 후에 어떻게 하시려는 것이죠?"

낭자는 잠시 말을 멈추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지금 매우 행복스러운데 당신은 그들을 격파시키면 우리가 더욱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인가요?"

청년은 가벼운 한숨을 몰아쉬고 나더니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오. 하지만 나는 꼭 해야만 하오."

낭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문스러운 시선으로 청년을 주시하며 물었다.

"무엇 때문이지요?"

청년이 말했다.

"나는 이렇게 밑바닥에서 평생을 지낼 수가 없소. 나는 꼭 유명해져야 하오. 상관금홍이나 초류빈과 같이 말이오. 틀림없이 해낼 수 있을 것이오."

청년은 이렇게 말하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자 낭자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는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자상스러움과 사랑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이윽고 길게 한숨을 터뜨리며 안정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당신은 틀림없이 해낼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어요. 당신이 언제 돌아오시건 간에 저는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들은 이별의 아쉬움을 가슴 아파하고 있었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미래에 대한 행복이 깃들여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별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정자가 있는 숲에서 그들의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초류빈과 손소홍 그리고 낭천이었다.

청년이 걸음을 옮겨 차츰 멀리 사라지자 손소홍은 길게 탄식을 터뜨리면서 입을 열었다.

"저 청년이 만약 상관금홍의 최후를 알고 있다면 아마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서 쉽사리 떠나지는 않을 것이에요....."

손소홍은 초류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두 눈은 어느 틈엔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킨 채 초류빈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그는 당신처럼 유명해지고 싶어하는데 그러나 당신은...당신은 그보다 더 즐거우신가요? 제 생각이지만 만약 당신이라면 절대로 저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에요."

초류빈의 시선은 청년이 사라진 곳에 멈추어져 있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그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만약 그였더라면 나 역시 저렇게 했을 것이오."

순간 손소홍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떠올렸다.

"당신이....."

초류빈이 입을 열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제나름대로 주어진 목적을 갖고 그 목표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해서 전진해야 하오. 단 그 결과가 성공인지 패배인지에 대해서는 그들은 생각하지 않고 또한 마음에 두지도 않소."

그의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가 어려 있었으며 두 눈에는 일종의 강한 광채가 폭사되어 나왔다.

"그러한 사람들이 바보라는 것은 일반 사람들의 견해요. 하지만 이 세상에 만약 그러한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변할 것인지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오."

손소홍의 두 눈에도 청년과 이별을 한 다정한 소녀와 같이 따뜻한 사랑의 광채가 폭사되어 나왔다.

낭천은 멀리 떨어져 서 있다가 이때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다가왔다. 하지만 손소홍은 초류빈의 손을 꼭 잡은 채 놓지를 않았다.

그녀는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사랑이 누구 앞에 내놓아도 결코 부끄러운 게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하고만 싶었다.

그러자 낭천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제나름대로의 생각이지만 그녀는 결코 돌아올 것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원래 이곳에서 설벽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설벽운과 호유성 사이에 어떠한 일이 생겼는지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상관금홍의 최후를 모르고 떠난 청년과 같은 것이다.

이 세상에는 모르는 채 그대로 지나쳐도 좋은 일이 많이 있다. 손소홍은 설벽운의 이름이 나오자 초류빈을 잡고 있던 손을 급히 놓았다. 그러더니 다시 손을 잡으면서 말을 꺼냈다.

"그녀는 나와 약속을 했기 때문에 틀림없이 올 것이에요."

낭천이 즉시 말을 꺼냈다.

"그녀는 아마 오지 않을 것입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손소홍은 두 눈을 치켜올리며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다그쳐 물었다.

"무엇 때문이지요?"

그러자 낭천은 길게 숨을 몰아쉬고 나더니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그녀는 자신이 이곳에 올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오."

이러한 말은 손소홍이 물었던 것에 대한 대답이었지만 그가 대답을 할 때는 시선이 초류빈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초류빈도 손소홍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는 얼마 전만 해도 설벽운의 얘기만 나오면 내심 더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자물쇠에 온몸이 채워져 꼼짝도 못하는 것과 같았다.

그는 이러한 고통 속에서 영원히 헤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이러한 고통은 과거와 같이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다. 도대체 어떠한 힘이 그의 몸에 채워진 자물쇠를 풀어준 것인가? 그와 설벽운 사이에 생긴 감정은 오랜 세월을 두고 천천히 쌓여진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두 감정 중에 어느 쪽이 더 강하단 말인가?

이때 설벽운은 그들에게서 멀리 떠나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 올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호천강은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어머님께선 어찌하여 마지막으로 그를 한 번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이죠?"

그러자 설벽운이 도리어 반문했다.

"너는 무엇 때문에 그를 만나려는 것이냐?"

호천강은 갑자기 입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저는 아버님이 무엇 때문에 죽은 것인지 그에게 자세하게 알려주었으면 합니다."

호유성은 과거에 어떠한 잘못을 저질렀던 간에 지금은 자신의 피로써 완전히 씻어냈다. 아들로서 이러한 사실을 남에게 인식시켜 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설벽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했던 것은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 의당한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지 남에게 용서를 구하거나 또한 남이 알아주기를 원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렇게 말을 한 그녀는 잠시 멈추는 듯하더니 다시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비단 자신을 위해 빚을 청산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빚까지도 청산해 주셨다. 우리가 그냥 편안하고 무사하게만 살아간다면 너의 아버님께서도 편히 눈을 감게 될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초류빈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서로가 만난다는 것이 피차간의 고통이라는 것을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이상 호유성의 시체를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강호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금전방의 시체를 치우는 방법은 매우 특이할 뿐만 아니라 또한 매우 신속하다. 그들이 설사 찾아낸다고 해도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다만 고통뿐이다.

이것은 손소홍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녀는 할아버지의 시체를 영원히 찾을 수가 없다. 이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 무척이나 많은 것이다.

이러한 일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이러한 고통 따위는 빠른 시일 내에 잊어버려야 한다.

그것은 죽는다는 것이 결코 이러한 고통을 버릴 수 있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것이 결코 어떠한 일의 해결방법이 될 수는 없다.

장정에선 다시 이별의 장면이 벌어졌다. 이번에 떠나는 사람은 낭천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 정말로 장생불로가 있는지 그리고 죽지 않는 신선이 있는지 그 여부를 확인하겠다고 말했다.

그가 말했던 것은 물론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초류빈은 제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초류빈이 심왕, 우왕, 왕진황, 주칠칠 등 기인들에 대한 얘기를 할 때는 그때마다 이상하게 표정이 변하곤 했다.

혹시 그는 이들 선배 인물들과 어떤 미묘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가 이번에 해외로 나간다는 것은 그들을 찾아가기 위한 것이 아닐까? 초류빈은 모든 것이 궁금했으나 묻지 않았다.

사람은 개나 말처럼 꼭 그 종류와 족보가 있어야만 좋은 것은 결코 아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된다는 것은 모두가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친구 간의 이별에서 축복이라는 것은 빠질 수가 없으며 또한 가슴 아파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별에는 축복만이 있을 뿐 아픔은 없었다. 그들은 서로가 모두 잘 살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도 확신했다. 특히 낭천이 초류빈의 손을 보았을 때 그는 더욱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초류빈과 손소홍은 서로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의 손은 술잔을 잡고 있었던 시간이 더 많았던 것이다. 술잔은 매우 차가웠다.

하지만 지금 그는 부드러움과 따스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손보다 더 따스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낭천은 손소홍이 누구보다도 이 손을 아껴 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의 손에는 상처가 나 있기는 하지만 차츰 가라앉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상처가 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길게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과거는 모두 지나간 것이다.'

이 한 마디는 매우 간단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틀림없이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낭천과 초류빈은 이것을 다 해냈다.

낭천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삼 년 후에 저는 틀림없이 돌아올 것입니다."

이렇게 말을 꺼내고 난 그는 만면에 미소를 띤 채 그들의 손을 바라보면서 다시 말을 꺼냈다.

"내가 돌아왔을 때 두 분께선 한턱 단단히 내셔야 합니다."

초류빈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러나 삼 년이란 너무 긴 시간이 아닐까?"

그러자 낭천은 가벼운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제가 마시고 싶어하는 술은 매우 특이한 술인데 두 분이 마시게 해 줄는지 잘 모르겠군요."

손소홍이 물었다.

"그 특이한 술이란 대체 어떠한 술이에요?"

낭천은 마른침을 한 차례 삼키고 나서 여유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혼인을 축하하는 혼인주입니다."

그렇다. 낭천이 삼 년 후라고 말을 한 것은 바로 혼인주를 먹기 위한 것이다.

그러자 손소홍은 자신도 모르게 절로 얼굴을 붉혔다.

낭천이 입을 열었다.

"저는 모든 술이란 하나도 빼지 않고 다 마셔보았으나 혼인주를 마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니 나를 실망키시지 마십시오."

손소홍은 절로 고개를 숙였으며 얼굴이 더욱 붉어진 채 초류빈을 몰래 훔쳐보았다.

초류빈의 표정은 매우 이상했다.

혼인주라는 말에 그는 일시 동안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이더니 잠시 후에야 천천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 역시 온갖 술을 다 산 적이 있으나 혼인주를 산 적은 한 번도 없었네. 자네는 무엇 때문인지 알고 있는가?"

낭천은 물론 그것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자 초류빈이 직접 대답했다.

"그것은 혼인주의 값이 너무나 비싸기 때문이네."

순간 낭천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초류빈을 향해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다그쳤다.

"아니, 너무 비싸다니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초류빈은 활짝 웃으면서 다소 여유있는 어조로 말했다.

"남자가 남에게 혼인주를 낼 때는 자기 자신이 평생 동안 이 혼인주로 인하여 진 빚을 천천히 갚아야 한다는 것일세."

초류빈은 말을 잠시 멈추는 듯하더니 또다시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평생을 두고 빚을 갚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친구를 실망키시지는 않겠네."

손소홍은 그의 말에 기쁨과 부끄러움이 함께 엉켜 자신도 모르게 갑자기 초류빈의 품속에 파고들었다. 낭천도 함께 웃었다.

그가 이렇게 여유있게 웃어 본 적도 꽤 오래 된 것 같았다. 이렇게 웃고 있는 순간 그는 갑자기 자신이 젊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비단 자신에 대하여 용기와 신념을 넣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인생에 대해서도 희망을 가졌다. 이러한 순간 앙상한 가지들도 그의 눈에는 발랄하고 그리고 매우 생기가 있어 보였다.

그는 비록 앙상한 가지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는 강한 생명력이 싹트고 있었으며, 또 얼마 후에는 다시 새로운 싹이 돋아 제모습 그대로 돌아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커다란 힘이 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초류빈에 대해서 탄복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감복도 금치 못했다.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항상 영원한 웃음을 지니고 있는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웃음을 안겨다 준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뱀을 그리는데 발을 그린다는 것은 비단 쓸데없는 짓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바보스럽고 우스운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 대부분의 번뇌는 결국 웃음이 너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웃음이란 마치 향수와도 같은 것이다. 비단 자신의 몸에 향기를 담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에게 즐거움도 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남에게 웃음을 줄 수 있다면 설사 우둔한 일을 한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더니 어느덧 삼 년이란 시간이 말없이 흘렀다.

무림은 태평했으나 결코 조용한 것만은 아니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영웅, 효웅들은 물러났으나 그들 뒤엔 언제나 젊은이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란 대개 인생의 참뜻을 모르고 혈기에 의존해 자기 멋대로 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남을 위에 서고 싶은 야망에 자신들을 끊임없이 채찍질한다.

세대는 돌고 돌기에 젊은이들은 항상 분란을 만들며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한 자루의 검을 의지한 채 천하를 질타하고 싶은 욕망! 그것은 젊은이라면 누구나 가져봄 직한 꿈이며 일종의 활력소인 것이다.

지난 삼 년 동안 뭇젊은이들은 한 가지 목표에만 모든 것을 쏟았다.

비도탈명, 초류빈!

그를 꺾고 천하제일이 되고 싶은 목적뿐인 것이다.

상관금홍, 곽숭양, 여봉선 등이 사라진 지금에는 그 누구도 초류빈이 천하제일인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조그만 비도지만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비도탈명, 젊은이들은 죽을 줄 알면서도 달려든다.

하지만 삼 년 동안 상관금홍을 만난 사람은 없었다. 상관금홍이 쓰러진 후 초류빈은 자취를 감춘 것이다.

상관금홍의 실종은 많은 젊은이들을 실망시켰다. 그들은 초류빈을 꺾고 단숨에 유명해지고 싶었는데 그 야망을 이룰 수 없게 된 것이다.

그즈음 강호엔 유명해지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소문이 나돌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백삼괴객(白衫怪客)이 한 자루의 목검을 차고 항주(抗州)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도로에서 내노라 하는 고수들을 제패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치는 그의 목검이 번개보다 빠르다 하고 혹자는 그와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초류빈밖에 없다고 한다.

결국 초류빈이 없어진 당금에선 백삼괴객이 천하제일인으로 부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많은 젊은이들은 백삼괴객을 꺾어 보려고 파리떼처럼 몰려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패뿐이었고 백삼괴객의 명성은 더욱더 높아졌다.

장안성.

육조의 도읍으로 그 화려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특히 장안성은 색향으로 기루의 규모나 수효가 중원에서 으뜸일 것이다.

장안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가향원(佳香院).

이곳에는 매우 특이한 기녀가 있어 언제나 화제로 떠올랐다. 그녀가 특별한 것은 그녀가 요구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남자였기 때문이다.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매일 최소한 열 명의 남자를 상대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매우 뛰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기에 남자들은 서로 자기를 원하는 형편이었다.

그렇지만 차츰 그녀를 찾는 남자의 숫자는 줄어들어 갔다. 처음엔 물론 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상대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에게 환멸을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그녀가 늙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가장 큰 원인은 그녀를 상대한 사람이라면 그녀가 사람이 아닌 욕정에 굶주린 암여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무서운 성욕은 마치 남자를 산 채로 집어삼킬 듯했던 것이다. 그녀는 비단 남자를 잔인하게 대했을 뿐만 아니라 남자들이 자신을 잔인하게 학대해 주기를 더욱 바랬다.

그런데 소문에 의하면 그 여자는 강호 제일의 미녀 설소하를 닮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남들이 말하는 것을 시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안성이 오늘따라 시끄럽고 사람이 몰리는 것은 오늘 백삼괴객이 장안성을 지나가기 때문이다.

백삼괴객은 장안성 일대에서 그 위명을 드높이는 철창(鐵槍) 유사강(柳士康)과 결투를 벌인다 한다.

철창 유사강으로 말하면 병기보에 실린 고수들이 없어진 후, 그들을 대신하여 명성을 날리는 오대후웅(五大后雄) 중의 일인이다.

오대후웅은 당금의 강자들로 그들은 은근히 자신들이 초류빈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장안성 교외의 송림.

많은 인파들이 오늘의 격전을 두 눈으로 생생히 보려고 몰려들었다.

강호엔 많은 결투가 벌어지지만 진정한 고수들의 대결은 좀처럼 보기가 힘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밀리고 있었다.

과연 백삼괴객이 오대후웅들을 이길 수 있을까?

"오대후웅은 비도탈명 초류빈과도 비교가 되는 인물인데 아무리 백삼괴객이 강하다 해도 꺾기는 어려울 거야."

"하지만 백삼괴객은 지금까지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잖아.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가 언제 검을 뽑았는지조차 본 사람이 없다는 걸세."

이때였다.

나직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대한들이 장내에 모습을 나타냈다. 하나같이 흑의에 영웅건을 쓴 이들은 한 사람을 호위하듯 에워싸고 있었다.

"철창 유사강이다. 그리고 흑의 대한들은 신창산장의 수하들이다."

수하들에 둘러싸인 유사강은 얼굴 전체에서 날카로운 빛을 번뜩이는 삼십대의 장한이었다.

탄탄한 근육질의 몸과 무거운 몸가짐은 그가 얼마나 각고의 수련을 쌓은 자인지를 한눈에 나타내고 있었다.

유사강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길을 비켜주었다. 사람들로 인해 원이 형성된 장내의 한가운데에 도착한 유사강은 천천히 말에서 내렸다.

이어서 그는 자신의 병기인 십도금창(十道金槍)을 꺼내 조용히 닦기 시작했다. 결전을 앞둔 무사답게 그의 창 닦는 자세는 경건하기조차 했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중천의 해가 조금씩 서산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인파 사이에서 가벼운 소란이 일어났다.

"저 여자가 웬일로 이곳을....."

"흥! 저 여자는 남자라면 아무나 물불을 안 가리지만 특히 무림고수라면 체면 불구하고 마구 유혹을 하지."

"저 색녀는 세상의 모든 남자가 자신의 미소 앞에서 모두 굴복할 거란 망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 고질이야."

누가 보더라도 뛰어난 미인임에 분명한 여인. 그렇지만 눈 가에 흐르는 음란한 빛이 웬지 그녀를 추하게 만들고 있었다.

가향원의 특이한 기녀이며 강호 제일 미녀 설소하를 닮았다는 이 여인.

그녀는 소나무에 몸을 기댄 채 유사강을 향해 남들이 알지 못하게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석양이 송림을 붉게 채생하기 시작하자 멀리서 한 대의 마차가 나타났다.

마차는 유람이라도 나온 듯 느리게 느리게 송림으로 오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마차에 마부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마차는 곧장 송림으로 오고 있었다. 순백색의 설총마는 대단히 영리한 미물임에 분명했다.

"백삼괴객이 타고 다니는 마차다."

마차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도착하자 서서히 멈추었다. 마차를 보는 순간 유사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사강의 두 눈에선 화염 같은 광채가 스쳐갔다.

이어 그는 고저가 없는 음성으로 차분히 입을 열었다.

"백삼괴객이오? 본인은 철창 유사강이라 하오. 장시간 이곳에서 그대를 기다렸소."

"밝혀 두지만 늦은 건 본인이 아니오. 그대가 빨랐을 뿐이오."

마치 흐르는 물과 같다고 할까? 목소리는 일체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고 듣는 이에게 조금의 불쾌감도 주지 않는 해탈한 고승의 음성 같았다.

"그 말은 맞소. 이제 시간이 되었으니 모습을 나타내시오."

순간이었다. 마차에서 한 줄기 인영이 솟구친 것 같더니 한 사람이 유사강의 앞에 내려섰다.

말끔한 백의에 허리엔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목검이 비스듬히 걸려 있는 헌헌장부.

마치 조각을 본 듯 군살이라곤 하나도 없는 무쇠 같은 몸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눈매는 부드러웠으며 입가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이때, 그 헌헌장부를 보고 누구보다도 놀란 사람이 있었다.

소나무에 몸을 기대고 있던 여인은 두 눈을 부릅뜨며 튕겨지듯 앞으로 나온 것이다.

'낭...낭천!'

그녀는 백삼괴객이 누군지 알아본 것이다.

그런데 낭천이라면 삼 년 전 해외로 나갔던 초류빈의 유일한 친구인 그가 아닌가!

예전엔 마치 굶주린 이리와 같았던 그의 기질이 부드럽게 변했지만 그는 틀림없는 낭천이었다.

낭천은 여유있는 손놀림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검이래야 거무튀튀한 목검이지만 그가 잡고 있자 어떤 보검보다도 더 예리한 것 같았다.

"갈 길이 바쁜 몸...어서 공격하시오."

낭천의 재촉에 유사강이 미간을 찡그렸다.

"이 유사강은 오늘날까지 어느 정도 명성을 쌓았다고 자부하는 인물, 선수는 그대에게 양보하겠소."

낭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오. 이번 결투는 그대가 먼저 신청한 것. 도전을 받는 입장에서 어떻게 먼저 손을 쓸 수 있겠소."

유사강의 십도금창이 가볍게 떨렸다. 군중들은 이번 결투가 낭천이 먼저 도전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라고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얼핏 생각하면 별것 아니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즉 유사강이 낭천에게 먼저 도전을 신청한 것은 낭천을 꺾고 그가 얻은 명성을 일시에 자신이 차지하고 싶은 명예욕이 유사강에게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좋소. 본인이 먼저 선수를 치겠소."

유사강은 겸연쩍은 입장을 벗어나기 위해서인지 즉시 공격 준비를 하였다. 무림이란 곳은 오직 승자만이 변명도 명분도 세울 수 있는 곳인가.....

유사강의 신창이 바람소리를 내면서 낭천의 목을 파고들었다.

낭천은 그의 창이 자신의 목을 찌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동도 없었다.

목을 노리던 창이 갑자기 변화를 일으키며 낭천의 심장을 노렸다. 예측할 수 없는 변화이며 무섭도록 빠른 수법이었다.

그 눈, 낭천의 두 눈에서는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 하는 섬광이 지나갔다.

"윽!"

단연코 장담하건대 이토록 쾌속하고 신기한 검은 고금에 다시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 누구도 낭천이 언제 검을 뽑았는지 본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유사강의 철창은 반이 끊어져 있었고 그의 심장 부위에선 조금씩 선혈이 뿜어 나오고 있었다. 죽을 정도의 중상은 아니었으나 크게 상처를 입은 것이다.

누가 보아도 명백한 유사강의 패배였다.

낭천은 목검을 꽂으며 누구에게 하는 소리인지 혼자 중얼거렸다.

"지금까지의 결투 중 내가 원해서 한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내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시험하고 싶어 항주에서 청한 첫 번째 결투뿐이다. 하지만 그 후 나는 수많은 결투를 해야 했으며 천하엔 유명해지고 싶은 자들이 무수히 많음을 알았다. 나도 한때는 유명해지려고 천하를 횡행한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모든 결투를 서슴없이 받아준 것이다."

낭천은 천천히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모함과 터무니없는 혈기는 죽음뿐이다. 천하의 모든 젊은이들이 초류빈을 노리지만 진정 그들이 초류빈과 싸워 목숨을 건질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나는 이들에게 패배를 안겨 주어 자숙하기를 바라고 있다. 나 역시 패배의 쓰라림이 있었기에 오늘과 같은 성취가 있었던 것이다."

원숙해졌다고 할까! 낭천은 이미 명경지수와 같은 무심과 무탐(無貪)의 경지에 이른 것이 분명하다.

"조용히 자신을 돌이키며 끊임없이 정진하다 보면 모두 뛰어난 고수가 될 것이다. 나는 천하인이 모두 강자가 되기를 바란다. 강자란 결코 편협하거나 남을 괴롭히려 하지 않을 테니까."

낭천! 그는 확실히 많이 변했다. 이제는 철학과 이성을 가진 원숙한 인간이 된 것이다.

낭천이 막 마차로 오르려 할 때였다.

"잠깐!"

외침과 함께 낭천을 막아서는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을 보는 순간 영원히 무표정할 것 같은 낭천의 안색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어서 신음처럼 흘러나온 말 한 마디.

"설...소하!"

가향원이 특이한 기녀, 그녀는 강호 제일 미녀 설소하가 분명했던 것이다.

설소하가 고혹적인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아직도 낭천 정도는 충분히 유혹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절 모르진 않겠죠, 소천!"

낭천의 검미가 꿈틀했다. 그 옛날에는 얼마나 듣기 달콤했던 소천이란 호칭인가? 하지만 지금은 구역질을 느낄 정도로 귀에 거슬렸다.

"설낭자! 우리는 서로 잊혀진 지 오래 된 걸로 아는데....."

"그렇지 않아요.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소천을 죽도록 사랑해요. 다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서로 헤어져 있었지만....."

낭천은 분홍빛 윤기가 도는 설소하의 입술이 여전히 아름답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 입술은 독버섯이며 재앙을 부르는 근원이었다.

"과거는 돌아올 수 없는 것. 과거는 과거 속에 묻어둡시다."

낭천은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낭천! 전 당신이 원하면 뭐든지 하겠어요. 죽으라면 죽고, 구르라면 돼지우리에서도 구르겠어요. 하지만 전 당신을 잊을 수가 없어요."

설소하가 낭처의 다리를 잡으며 흐느꼈다.

"낭천! 제가 아름답다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제 몸은 당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드릴 수 있어요."

낭천은 설소하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인간의 본성이란 이토록 변하기 어려운 것인가?

설소하는 다시금 낭천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항시 자부하는 자신의 육체로...그렇지만 사나이의 마음이란 흐르는 물과 같아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이다.

"그 몸을 탐내는 자들은 천하에 많을 것이오. 또 그들 중에는 예전의 낭천처럼 미련한 자가 있을지도 모르지."

낭천이 다리를 빼며 마부석에 앉았다.

설소하의 홍수 같은 눈물 속에 악독한 빛이 나타났다. 그녀는 다시 낭천을 자신의 손에 넣을 수 없음을 알았다.

아니 자신에게 추호의 동정도 보내지 않음을 안 것이다.

사실 그녀는 백삼괴객이 온다기에 한번 유혹을 하려고 이곳에 나왔던 것이다. 아직도 그녀의 마음속엔 더러운 욕망이 가득차 있었으며 언제든지 그 욕망을 채워 줄 노예를 찾고 있었다.

그녀는 낭천을 확인하는 순간, 한 가닥의 희망을 느꼈다.

몇 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낭천의 마음도 풀어졌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자신이 있다. 저 사내에 관해선 천하에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낭천의 마음은 이미 굳어진 쇳덩이와 같았다.

"흥! 가라! 난 네가 아니라도 언제든지 남자를 잡을 수 있다."

낭천은 착잡한 시선으로 먼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대는 청춘과 미모가 한 오백 년 갈 거라고 생각하는군.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린다면 평범히 여생을 마칠 수가 있을 텐데.'

이때 마차 안에서 청아한 음성이 들려왔다.

"소천! 저 여인은 누구죠?"

"청매(淸妹)! 알려 하지 마시오. 미모는 천하제일이나 마음은 천하에서 제일 악독한 여자요."

"저 여인과 예전에 알고 있었나요?"

"그렇소. 나의 과거도 결코 깨끗한 것은 아니었소."

불쑥 마차 안에서 섬섬옥수가 살며시 나와 낭천의 등을 다독거려 주었다.

"자책하지 마세요. 지금의 당신은 깨끗해요. 하지만 저 여인은 여전히 추악하잖아요."

"....."

말 대신 낭천은 말고삐를 잡아챘다.

"청매! 지금 내 마음엔 조금 전의 여인 따위는 없소. 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초류빈을 만나 그에게 당신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뿐이오."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두 개의 옥수가 등 뒤에서 낭천의 가슴을 껴안았다.

"당신도 역시 좋은 여인이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난 언제나 마음이 평온하다오."

마차는 붉게 타오르는 석양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설소하는 그 후 어찌 되었을까?

다시 몇 년 후, 장안성의 가장 천한 창녀촌에 매우 특별한 여자가 또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여자는 장안성의 명물로 이름이 나 있다고 한다. 그녀가 유명한 것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더할 수 없이 추악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마음속의 악이 얼굴에 모두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장 우스운 것은 그녀가 술에 만취되기만 하면 강호 제일의 미인이라고 자청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차는 황혼의 들판을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낭천의 옆엔 청초한 여인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우문청(宇文淸), 동해 만악도(萬嶽島)에서 은거하던 전대기인 심왕의 외손녀였다.

낭천은 해외에 은거하던 기인들을 찾아 많은 것을 배웠다.

낭천이 원래 전대기인을 찾은 것은 가문의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낭천의 가문은 이들 전대기인들에 의해 언제나 패배자의 위치에 있어 무명의 존재였다. 낭천이 이토록 유명해지려 했던 것도 가문의 치욕을 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전대기인들을 만남으로써 낭천은 성숙하고 그릇이 더욱 커질 수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인간의 증(憎)과 원(願)이 무엇인지도 깨달았다.

이제 그는 결코 무모하게 덤비지도 더 유명해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다만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다 보면 명예와 부는 저절로 곁에 머무르는 것이다.

낭천은 문득 목이 마르다고 느꼈다.

"청매! 죽엽청이 남아 있소?"

"목이 마르세요? 죽엽청보단 물이 나을 텐데....."

"난 이렇게 긴 여행을 할 때는 마차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보기 좋다고 생각하오. 내가 초류빈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역시 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소."

"당신의 친구는 술고래라면서요? 하지만 당신은 그만큼 술을 좋아하지는 않잖아요."

"그렇지만 남자란 때때로 술이 생각나는 것이오."

"전 이해를 못하겠어요."

그러면서 우문청은 마차 안에서 호리병을 꺼내 낭천에게 주었다.

낭천은 단숨에 몇 모금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술을 마시고 싶을 때 그 즉시 마실 수 있다는 것도 조그만 행복이다. 세상은 이런 조그만 행복들이 가득하기에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때 낭천은 자신들의 앞으로 묵묵히 걸어가는 한 사람을 보았다.

그는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단조롭게 걷고 있었다.

낭천은 그 사람의 걸음걸이를 보자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도 예전엔 저런 걸음을 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몸이 편할 것을 방지하며 언제나 자신의 신체가 최대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끔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시키는 걸음인 것이다.

낭천은 문득 호기심을 느꼈다.

'저 친구도 아마 예전의 나처럼 무뚝뚝하고 절대 남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 할 것이다.'

낭천은 마차를 그 사람의 곁으로 몰았다.

"친구, 마차를 타지 않겠나!"

예상대로 그 사람에게선 아무 대꾸가 없었다.

"그렇다면 갈증이 날 텐데 이 술이나 들게."

낭천이 죽엽청을 담은 호리병을 그에게 던졌다. 그 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볍게 호리병을 받았다.

그 순간 그의 한쪽 소매가 펄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외팔이였던 것이다.

외팔은 호리병을 그대로 낭천에게 다시 던졌다.

"이유없이 남의 호의를 받고 싶지는 않소."

"이유가 없지는 않네. 길을 가다 곤란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만나면 도와주는 것이 도리일세."

외팔이의 목소리는 지극히 담담하고 싸늘했다.

"난 아무 곤란도 없소. 즐기며 걷고 있는 것이오."

"자신을 단련하기 위해선 고독한 것도 좋으나 그것이 반드시 최상의 방법이라 할 수는 없네."

낭천의 말에 외팔이의 몸이 움찔했다. 이어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당신도 나와 같은 길을 걸었던 적이 있는 것 같군."

한데 외팔이를 보는 순간 낭천의 두 눈은 휘둥그래졌다.

'아...! 호천강.....'

외팔이 그는 놀랍게도 설벽운과 호유성의 아들이며 한때 너무 영악했던 호천강이었다.

호천강도 낭천을 알아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었구려. 당신이라면 나에게 있어 선배임이 확실하오."

이제는 어엿한 장부가 된 호천강을 보며 낭천은 매우 심정이 착잡했다.

사랑이 빚은 비극에 의해 너무도 고통을 받았던 호천강. 그도 일종의 피해자이며 희생물이 아닌가?

낭천은 호천강과 보조를 맞추며 말을 몰았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자네는 복수할 생각인가?"

"복수?"

호천강의 준수한 얼굴이 찡그려지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난 복수를 할 대상이 없소. 누가 나에게 원한을 품게 했단 말이오?"

"그렇다면 자네는 무엇 때문에 스스로 힘든 길을 걷나?"

"난 나의 길을 갈 뿐이오. 끓어오르는 젊은 혈기가 있기에 천하제일인이 되고픈 야망이 있을 뿐이오."

낭천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해가 가네. 나 역시 자네와 같은 시기가 있었으니까. 아니 지금도 그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모르지."

호천강이 신비로운 미소를 지었다.

"난 초류빈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지는 않소. 하지만 내가 천하제일인이 되려면 언젠가는 그와 맞부딪치게 될 것이오."

"하지만 그는 피할지도 모르지."

"피해도 상관없소. 난 일개인에게 원한을 가질 만큼 어리지는 않으니까."

"후후...이렇게 만나니 새삼 반갑군. 나와 술 한 잔 할 아량은 없나?"

"당신은 초류빈의 친구라 술을 좋아하는군. 내려오시오."

낭천이 마차에서 훌쩍 내려섰다. 그는 호천강과 똑같은 걸음걸이로 걷기 시작했다.

그는 한 모금의 죽엽청을 마신 후 호리병을 호천강에게 내밀었다.

"이렇게 걷는 것도 오랜만이군. 예전엔 막막한 광야를 며칠씩 혼자 걷곤 했지."

호천강도 죽엽청을 몇 모금 마셨다.

"고독이란 때때로 사람을 나약하게도 하지만 비정해질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오."

"너무 비정해지진 말게. 최고의 경지에 이르려면 비정을 넘어 다정해야 하네. 초류빈의 경우가 그걸 여실히 증명하고 있지만....."

호천강이 힐끗 낭천을 쳐다본 후 잠시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그는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난 내 방법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오."

낭천은 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젊은이들이란 누구나 자기의 아집이 있기에 남의 말에 귀기울일 생각을 않는다. 특히 자신이 남보다 뛰어나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더하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낭천은 화제를 돌렸다.

"자네 어머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

"말하기가 곤란한가?"

잠시 애련에 물들었던 호천강의 눈이 다시 평소의 상태로 돌아왔다.

"그렇지는 않소. 그분은 지금 불문에 귀의했소."

"아!"

낭천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토했다.

"설벽운이 여승이 되다니....."

"가엾다는 표정을 짓지 마시오. 그분에게 있어선 그 길이 남은 여생을 편히 보낼 수 있는 방법인지도 모르니까....."

"....."

낭천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인생이란 처음엔 같이 시작하다가 어느 순간의 조그만 차이로 나중에 서로 만날 수 없는 위치에 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하지만 세월이 흐른 상태에서 옛사람의 소식을 들으면 비감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때, 멀리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무리들이 있었다.

호천강은 그들을 보자 온몸을 경직시켰다.

"당신은 먼저 가시오. 저들은 나와 시비가 있는 흑사방(黑死幇)의 무리들이오."

"자네가 피하면 되지 않는가?"

"저들이 피하면 그만이지만 난 피할 수 없소. 난 언제라도 정면에서 모든 것을 헤쳐나갈 것이오."

"그럼 난 가겠네."

낭천은 마차에 올라 호천강과 헤어졌다.

우문청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당신과 아는 사이인 모양인데 혼자서 저 많은 무리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요."

"내가 저 사람과 같은 처지에 있었을 때 나 역시 그 누구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소. 더 권해 봐야 그는 귀찮아할 것이오. 그리고 그는 절대로 저들에게 당하지도 않소."

낭천은 굳이 호천강에게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사나이는 만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상대를 찾을 수 있고, 아무리 마음이 통해도 평생을 같이 있을 수는 없기에 사나이들의 만남은 언제나 만나고 헤어짐의 연속인 것이다.

'미우나 고우나 사람은 옛사람이군.'

낭천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얼굴도 시간이 흐른 다음 만나니 어찌 이리 반가운가?

그래서 인간사가 결코 각박하지 않으며 원한이란 맺어졌다가도 풀리는 것인가?

두 남녀가 한 언덕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옆에는 소담한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기다린다는 것은 지겨운 일이나 이 두 남녀의 얼굴에는 가득 미소가 어려 있었다.

이들은 다름 아닌 초류빈과 손소홍이었다. 손소홍이 초류빈의 가슴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우리는 약속을 지키는군요. 낭천은 우리에게서 혼인주를 얻어먹고 싶다고 했는데...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어 즐거워요."

"난 그 약속보다 술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즐겁소."

"당신은 그동안 술을 마시지 못해 매우 답답했던 모양이군요."

"그렇소. 나의 주충들은 아마 아사직전일 것이오."

"전 그 주충들이 모두 죽기를 바래요."

"그 주충이 죽으면 난 인생의 즐거움을 하나 잃는 셈이 되오."

"엉터리!"

손소홍이 초류빈의 팔을 꼬집었다.

두 사람은 행복했다.

초류빈의 경우엔 얼마나 많은 시련 끝에 얻은 행복인가?

그가 진작 행복이란 일생에 있어 한 번뿐이 아니고 의지에 의해 여러 번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기나긴 고통의 세월은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상처는 남았지만 그 상처를 치료해 가는 과정도 행복이 아닌가. 그는 이제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아내의 뱃속에서는 그의 이세도 자라고 있으니까.

초류빈은 멀리 마차가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의 마음은 벌써 흥분되기 시작했다.

"낭천은 얼마나 변했을까? 그가 왔으니 난 마음놓고 은거를 해도 된다. 모르긴 해도 지금부터는 낭천이 천하제일의 위치에 설 것이다."

그는 낭천이 자신의 뒤를 이어주길 바라지만 낭천 역시 지금은 명리에 욕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초류빈은 갑자기 한바탕 웃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여자가 있고 친구가 있으니 이처럼 즐거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들은 모른다. 부와 명예를 가져야 인생이 보람된 줄 알고 악다구니를 쓰지만 결코 그것이 삶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초류빈은 누가 뭐래도 천하제일로 불리우고 있다. 하지만 자신은 한 번도 그것에 집착해 보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그의 인생은 윤택하며 조그만 행복이라도 가질 수 있었는지 모른다.

먼 훗날 자신의 과거를 돌아볼 때 웃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겠는가? 명예와 부는 언제라도 기회가 생기면 훌쩍 떠나 버린다.

그렇지만 사랑과 우정은 영원히 퇴색되지 않고 영원히 남는 것이다. 그렇기에 초류빈의 인생 여정은 언제나 인구에 회자되는 미담이 될 것이다.

사랑과 우정을 얻었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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