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1일 목요일

52 소이비도 제4권 주지육림酒池肉林





주지육림(酒池肉林)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았다. 대들보 위에 쌓인 먼지가 바스락 떨어졌다. 바람 때문일까? 아니면 그들의 살기로 인해 먼지가 떨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상관금홍은 돌연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초류빈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움직인다는 것은 즉 움직이지 않는 것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움직인다는 소위 동중유정(動中有靜) 정중유동(靜中有動)이란 뜻을 너는 아느냐?" 창노한 음성이 모든 사람의 고막을 진동시켰다. 하지만 어느 방면에서 들려오는지는 걷잡을 수 없었다.

그 즉시 다른 음성이 웃으며 그 음성을 받았다.

"정녕 그렇다면 싸운다는 것은 즉 싸우지 않는 것이며 싸우지 않는 것은 싸운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저들은 무엇 때문에 싸우려 하죠?" 이 음성은 맑고 가늘어 흡사 봄을 노래하는 꾀꼬리 같았다. 그러나 그 음성의 주인공이 어디 있는지 역시 아무도 볼 수 없었다.

노인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그들이 싸우려는 것은 단지 무공의 진정한 뜻을 모르는 까닭이지." 처녀는 까르르 웃었다.

"호호호...저들은 무공을 모르면서도 제각기 굉장히 아는 척을 하고 있어요." 처녀의 음성이 다시 들려오자 초류빈과 상관금홍을 제외하고 모두 안색이 크게 변했다. 초류빈과 상관금홍이 무공을 모른다는 말을 하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들마저도 무공을 모른다면 이 세상에서 무공을 아는 자는 누구이겠는가?

노인의 음성이 중인의 사색을 중단시켰다.

"저들은 손에 환이 없지만 마음속에 환이 있다는 것으로 이미 무학의 최고봉을 정복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사실은 거리가 너무 멀지." 처녀는 계속 노인의 말을 받기 앞서 다시 까르르 웃었다.

"멀었다고요? 최고 경지에 도달하려면 어느 정도의 거리가 있나요?" 노인은 지체하지 않고 대꾸했다.

"최소한 십만 팔천 리는 될 것이다." 처녀는 다시 질문을 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비로소 무학의 절정을 정복할 수 있나요?"

"수중에 환이 없을 뿐 아니라 심중에도 환이 없고, 환이 즉 내 자신이며 내 자신이 환과 동화되는 단계가 되면 어느 정도 절정에 접근했다고 볼 수 있지."

"절정에 접근했다뇨? 그렇다면 아직도 거리가 있단 말인가요?"

"약간의 거리가 떨어졌지. 진정한 무학의 절정은 무환무아(無環無我)로서 즉 환과 내 자신을 모두 망각할 수 있는 관계에 도달한다면 그거야말로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며 뚫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되지." 노인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 초류빈과 상관금홍의 안색에도 변화가 있었다.

처녀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할아버지의 말을 들으니 한 가지 생각나는 일이 있어요."

"무슨 말인지 어서 해 보아라."

"불문의 오조(五祖)께서 말씀하시기를 몸은 보리수(菩提樹)요. 마음은 명경대(明鏡臺)이니 시시각각 부지런히 닦고 가꾼다면 먼지가 남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고심(高深)한 분리가 아니겠어요?"

"그것은 즉 환과 자신을 동화시킨 것과 같은 도리라 할 수 있다. 그 경지를 터득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 처녀는 다시 말했다.

"육조(六祖) 혜능(惠能)께서는 더욱 묘한 말씀을 하셨죠. 보리(菩提)는 본래 수(樹)가 아니요. 명경(明鏡) 역시 대(臺)가 아니니 원래 아무 물건도 없는 것, 어디에 먼지가 떨어지랴. 그래서 그분은 선종(禪宗)의 도통(道統)을 계승받게 되었죠."

"그렇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선종의 진리인 것이다. 그 단계에 발을 내딛는다면 명실공히 선불의 경지를 터득한 셈이지."

"그렇다면 제가 방금 배운 무학의 진리도 선종의 진리와 같겠네요?"

"세상 만사만물이 절정에 도달할 때는 그 진리가 원래 비슷한 것이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 모두 무인무아(無人無我) 물아양망(物我兩忘)의 경지를 터득해야지만 비로소 절정을 정복했다고 장담할 수 있겠네요." 노인은 힘주어 대꾸했다.

"바로 그것이다." 그러자 소녀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저도 이제야 모든 것을 깨달았어요." 노인이 다시 담담하게 말했다.

"단지 애석하게도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수중무환 심중유환의 경지를 터득했다고 스스로 만족하고 있지. 기실 그것은 갓 무공에 입문(入門)한 것에 불과하며 절정에 오르려면 아직도 엄청난 거리가 있다는 것을 모르지."

처녀가 여지없이 그의 말을 받았다.

"수중무환 심중유환의 경지를 터득하여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영원히 더 이상의 발전은 없겠네요?" 노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음...조금도 틀림이 없는 말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여기까지 듣자 초류빈과 상관금홍의 이마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상관금홍이 홀연 입을 열었다.

"손노선생이오?" 대답을 하는 자가 없었다.

상관금홍은 다시 심각하게 말했다.

"손노선생, 정녕 이곳에 왔다면 어째서 모습을 밝히지 않소?"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다. 바람이 불어와 창호지만 바스락 소리를 낼 뿐이다. 초류빈과 상관금홍이 만약 싸움을 할 결심이 섰다면 사실 그들을 만류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노인과 처녀의 대화가 그들의 투지를 완전히 소멸케 한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비록 여전히 대치하는 상태에서 원래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숨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숨막힐 듯한 살기와 압력이 별안간 사라졌기 때문이다.

초류빈은 길게 숨을 들이키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신룡(神龍)은 머리는 보여도 꼬리를 보이지 않는다더니 손노선생은 과연 인중룡(人中龍)이군." 상관금홍은 차가운 안색으로 냉랭하게 말했다.

"진리는 모든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문제는 과연 그 진리를 실천에 옮길 수 있느냐 하는 것이오." 초류빈은 빙긋이 웃었다.

"그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자체가 이미 쉬운 일이 아니오." 그가 이 한마디를 끝내기도 전에 밖에서 일진의 소동이 일었다. 그러더니 네 사람이 한 구의 관을 들고 뜨락으로 들어섰다.

새로 짠 관(棺), 아직 칠도 완전히 마르지 않은 것이었다.

네 사람은 그 관을 들고 곧장 상관금홍이 있는 대청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즉시 두 명의 황의대한이 그들을 가로막으며 싸늘하게 호통을 쳤다.

"이곳이 어딘 줄 알고 감히 관을 들고 들어오느냐? 냉큼 꺼지지 못하겠느냐?" 관을 들고 온 인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겁먹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곳에 상관 어르신네라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황의대한의 표정이 금시 굳어졌다.

"무슨 일로 상관 어르신네를 찾느냐?"

인부는 같이 온 동료들과 눈길을 교환하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다면 이곳이 틀림없군요. 이 관을 상관 어르신께 드리기 위해 온 것입니다." 황의대한은 험악한 인상으로 대뜸 호통을 쳤다.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구나! 너희들이 그 관을 사용한다면 안성마춤이다." 인부는 멋쩍게 웃었다.

"이 관은 남수(南壽)로 만든 것입니다. 저희들이 어떻게 이런 좋은 관을 쓸 수 있겠습니까?" 황의대한은 더 이상 분통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날렸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상관금홍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 관을 이리로 보내라고 한 자는 누구냐?"

그의 음성이 들리자 황의대한은 뻗었던 주먹을 즉시 거두었다.

인부는 그제야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멍하니 서 있다가 비로소 더듬거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송(宋)씨 성을 가진 어르신네께서 은자 넉 냥을 지불하면서 소인네들더러 오늘 이 관을 여운객잔 고귀청(高貴廳)으로 들어가 직접 상관 어르신네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상관금홍의 다그치는 듯한 반문이 즉시 인부의 말꼬리를 이었다.

"송가라고? 어떻게 생긴 사람이냐?" 인부는 상관금홍의 눈빛을 받자 온몸을 떨었다.

"저...남자였습니다. 나이는 그다지 많지 않고....." 그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자 뒤에 있던 인부가 대신 말했다.

"어제 야밤중에 그 사람이 관을 들고 와 소인네들을 깨워 일을 부탁했습니다. 그는 사전에 등불을 껐기 때문에 저희들은 아예 그의 얼굴조차 자세히 보지 못했습니다." 상관금홍은 심각한 안색을 하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이상의 것을 알아낼 수 없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인부는 다시 말했다.

"이 관의 무게로 미루어 보아 속에...사람이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상관금홍은 힐끗 관을 보았다.

"당장 뚜껑을 열어라!" 하고 호령을 내렸다. 관 뚜껑은 못을 박지 않아 금방 열려졌다.

그 순간, 상관금홍의 냉혹한 얼굴이 돌연 다른 얼굴로 변해 버렸다. 사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심지어 눈썹도 찌푸리지 않고 입술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의 얼굴이 일순간에 갑자기 다른 얼굴로 변한 것 같았다. 마치 별안간 딱딱한 인피면구를 뒤집어 쓴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진짜 면목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진짜 면목을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 했으며 여지껏 원만하게 그것을 실천해 왔다.

세상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 아닌 다른 면구 하나쯤은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자신의 슬픔을 감추기 위해, 자신의 분노를 감추기 위해 그 면구는 필요한 것이며 어떤 사람은 웃고 싶지 않을 때는 부득이 웃어야 하고 생활 방편으로써 마음에도 없는 애교를 부려야만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숨기기 위해, 자신의 공포를 감추기 위해 다른 면구를 사용하기도 한다. 상관금홍이 늘 면구를 쓰고 있는 원인은 무엇일까?

관 속엔 과연 시체가 들어 있었다. 그 시체는 놀랍게도 다름 아닌 상관금홍의 외아들 상관비였다.

초류빈은 상관비가 죽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는 비단 형무명이 상관비를 죽이는 것을 친히 보았을 뿐 아니라 또한 형무명이 직접 시체를 땅 속에 묻는 것도 확인했다.

그런데 지금, 이 시체는 어떻게 해서 홀연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누가 이 시체를 땅 속에서 발굴한 것일까? 그리고 이 시체를 이곳으로 보낸 목적이 무엇일까?

초류빈의 눈빛은 유난히 빛났다. 많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상관금홍은 다시 또다른 면모로 바뀌어졌다. 그리고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초류빈에게 눈길을 집중시키며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

"당신은 전에 내 아들을 본 적이 있소?" 초류빈은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그렇소." 상관금홍은 다시 물었다.

"지금 다시 보니 느낌이 어떻소?" 시체는 이미 말끔히 씻겨져 전혀 땅 속에서 파낸 것 같지 않았다. 깨끗한 수의를 입고 있으므로 몸엔 흙도 묻어 있지 않고 핏자국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치명적인 상구(傷口)는 아직도 역력히 남아 있었다. 그 상구는 바로 목줄기에 있었다.

초류빈은 생각을 굴리며 대꾸했다.

"내 생각으로는...그는 별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숨을 거둔 것 같소."

"그가 짧은 시간에 숨을 거두었다는 뜻이오?"

"죽은 시체는 별로 고통스럽지 않고, 고통스러운 것은 죽음을 기다리는 그 일단의 시간이오. 보아하니 그는 고통을 느낄 시간이 없었던 것 같소." 상관비의 안색은 살아 있을 때보다 더 평온하고 안정되어 마치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죽음 직전에 보였던 그 공포의 표정은 어느 누구에 의해 이미 깨끗이 지워져 버렸다.

상관금홍은 비록 임의로 다른 면구를 쓸 수 있지만 눈동자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초류빈을 노려보고 있는 그의 눈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빨리 그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많지 않을 것이오."

초류빈도 그것을 시인했다.

"그렇소. 아마 다섯 명을 초과하지는 않을 것이오."

"당신도 역시 그 중의 한 사람이오!" 초류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도 그 중 한 사람이며 당신도 역시 마찬가지요." 상관금홍의 음성이 대뜸 싸늘하게 변했다.

"내가 어찌 내 아들을 죽일 수 있단 말이오?" 초류빈의 표정은 담담했다.

"당신은 물론 자신의 아들을 죽이지 않겠지만 내 뜻은 단지 당신에게 한 가지 사실을 깨우쳐 주고 싶을 뿐이오."

"그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즉 그를 죽이려는 사람이 될 수 없듯이 그를 죽이려는 사람은 꼭 그를 죽일 수 있는 사람만은 아닐 것이오." 여기까지 힘주어 말한 그는 천천히 다음 말을 이어갔다.

"이 세상엔 왕왕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의외의 일이 발생하기 마련이오. 그러니 모든 일을 자신의 짐작으로써만 단언을 내릴 순 없소." 상관금홍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전히 초류빈을 노려보았다. 초류빈의 눈빛은 이미 부드럽게 변해 심지어 동정하는 기색까지 깃들어 있었다. 그의 눈초리는 마치 상관금홍의 얼굴을 뚫고 마음속의 비애와 공포마저 낱낱이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상관금홍, 그는 줄곧 남을 침범해 왔고 남을 타격했다. 그런데 지금 그 자신도 드디어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타격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 자신도 꼬집어 말할 수 없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상관비는 어쨌든 그의 아들이 아닌가. 세상 어느 부모라 해도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타격은 적지 않을 것이다. 상관금홍은 차츰 불안을 느끼며 강철 같은 의지도 점점 동요되는 듯싶었다.

초류빈의 동정이 어린 눈빛은 흡사 한 자루의 쇠뭉치처럼 얼굴에 덮여 있는 딱딱한 면구를 박살내 버리는 것 같았다.

상관금홍은 자신의 육신이 산산조각으로 찢겨져 나가는 듯한 불안한 느낌을 더 이상 억제할 수 없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당신과 나의 일전(一戰)은 언젠가는 면할 수 없을 것이오." 초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즉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과도 같은 것이오." 초류빈은 이를 악물고 심장을 토하듯 말했다.

"오늘....." 상관금홍은 외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분노를 발산할 길이 없어 초류빈과 생사일전을 겨루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것도 바로 오늘 .....

초류빈은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언제라도 당신의 도전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오늘만큼은 거절하겠소." 상관금홍은 악을 쓰듯 다그쳤다.

"어째서 오늘은....." 초류빈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난...단지 술을 마시고 싶을 뿐이오." 그의 눈길은 관 속에 들어 있는 시체를 훑고 다시 말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왕왕 결투를 하기에는 아주 적당하지 않을 때가 있소. 그때는 다른 일을 하기에도 역시 적합하지 않소. 단지 술을 마시는 것만은 예외지만...오늘이 바로 그럴 때요." 그의 음성은 매우 부드러웠다. 다른 사람은 어쩌면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관금홍은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심정인 상태에서 남과 결투한다는 것은 우선 자기 손에 수갑을 채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미 적에게 가장 좋은 기회를 안겨 준 것이다. 초류빈은 뻔히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할 수 있었는 데도 불구하고 그 일검을 노리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기회가 많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 영원히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상관금홍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언제로 정하겠소?" 초류빈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오늘을 제외하고는 언제라도 좋소." 상관금홍은 계속 물었다.

"어디 가면 당신을 찾을 수 있겠소?"

"당신은 나를 찾을 필요가 없소. 단지 당신이 말만 하면 나는 언제라도 당신 앞에 나타날 것이오."

"내가 하는 말을 당신은 무시로 들을 수 있단 말이오?" 초류빈은 빙긋 웃었다.

"상관방주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을 것이오. 도리어 내가 듣지 않으려는 게 더욱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소." 상관금홍은 다시 오랜 침묵을 지키다가 돌연 엉뚱한 말을 내뱉었다.

"당신은 술을 마시고 싶다고 했는데 이곳에는 술이 준비되어 있소." 초류빈은 다시 빙긋 웃었다

"이곳에 있는 술을 내가 마실 자격이 있겠소?" 상관금홍은 그를 주시하며 못을 박듯 또렷하게 말했다.

"당신이 마실 자격이 없다면 세상천지 아무도 마실 자격이 없을 것이오." 그는 말을 끝내는 즉시 몸을 돌려 두 잔의 술을 따랐다.

"자, 내가 당신에게 한 잔 올리겠소." 초류빈은 술잔을 받아 단숨을 들이키고는 앙천장소를 터뜨렸다.

"하하하...과연 좋은 술이오!"

상관금홍도 술잔을 비우고 멍하니 수중의 빈잔을 주시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십 년 만에 나는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리며 술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으로 분쇄되었다.

상관금홍은 관 속에서 아들의 시체를 끌어안아 일으켜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나갔다.

초류빈은 그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줄곧 지켜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상관금홍이 만약 상관금홍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나의 친구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다시 한 잔의 술을 따라 들이키고는 시조를 읊조리듯 낭랑한 음성으로 외쳤다.

"본래 가인(佳人)인 것을 누가 적으로 만들었는고!" 쨍그랑!

그의 술잔도 바닥에 던져졌다.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돌부처로 변해 있다가 초류빈마저 밖으로 나가 버리자 비로소 길게 숨을 토했다.

사람들은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초류빈은 과연 초류빈답소. 천하를 두루 살펴 상관금홍의 술을 받을 수 있는 자는 오직 초류빈뿐이오.

"그들이 오늘 정말로 싸우지 않은 게 애석할 따름이오."

"나는 그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많다고 느꼈소."

"초류빈과 상관금홍에게 공통점이 있다니 당신은 혹시 정신이 이상해진 게 아니오?"

"그들의 행동과 생각은 물론 판이하게 다르겠지만...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둘 다 사람이 아니란 점이오. 그들이 하는 일은 사람이 절대 해낼 수 없는 일이오."

"이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소. 그들을 사람이라고 할 순 없소. 단지 한 사람은 신선이고 또 한 사람은 악마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오."

선과 악은 원래 일념(一念)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과 같이 신선과 악마의 거리도 그러한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초류빈이 만약 초류빈이 아니었더라면 바로 또 하나의 상관금홍일 것이다.

낭천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러자 설소하는 의자를 끌어 바로 그의 등뒤에 앉아 문을 닫았다. 한쪽 다리를 다른 다리 위에 포개고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의 치마자락 밑으로 한 쌍의 백옥같이 희고 고운 맨발이 노출되었다.

한 마리의 고양이가 살금살금 기어와 그녀의 발밑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녀는 붉게 물들인 엄지발가락으로 고양이를 희롱하며 아무 말없이 한참 동안 그냥 앉아 있었다.

낭천은 심지어 자세마저도 바꾸지 않았다. 공간에 굳어 있는 그의 자세는 보기에도 약간 우스꽝스러웠다.

그녀는 눈동자에 웃음을 담더니 이내 만면으로 퍼지게 하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마냥 그렇게 서 있는 것은 일종의 고통이 아닌가요? 내 곁에 의자가 있는데 왜 편한 자세로 앉지 않죠?" 낭천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육신뿐 아니라 영혼마저도 응결돼 있는 것 같았다.

설소하는 애당초 그의 대꾸를 바라지 않은 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물론 앉으려 하지 않겠죠? 이런 장소에선 앉는 것도 일종의 고통이 될 수 있으니까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그녀는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떠날 생각도 하지 않나요?"

그녀는 굳어 있는 낭천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계속 스스로 말을 이어갔다.

"나는 비록 문을 닫고 있지만 당신은 하시라도 나를 떠밀고 밖으로 나갈 수가 있잖아요. 더군다나 뒤쪽엔 창문이 있으니 당신은 얼마든지 도둑고양이처럼 창문을 통해 도망칠 재간이 있을 거예요. 그 두 가지 방법은 모두 극히 간단한 거예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의 눈동자는 더욱 밝아졌다. 아울러 웃음도 짙어졌다.

"당신은 그럴 용기가 없죠? 그렇죠?" 그녀는 혓바닥을 내밀어 입술을 쓰다듬듯 침을 발랐다.

"당신은 비록 마음속으로 나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고 있지만 역시 나에게 손을 쓸 용기가 없어요. 심지어 나를 건드리지도 못할 거예요. 그 이유는 간단하죠. 당신은 아직도 마음속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내 말이 틀리나요?"

그녀의 음성은 그렇게도 달콤하고 부드러울 수가 없었다. 그녀의 웃음도 평상시보다 더욱 요염하고 더욱 유쾌해졌다. 고양이가 그녀의 발바닥을 핥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는 일을 낙으로 삼는다. 그녀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로 인해 괴로워하길 바란다. 다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단지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괴로움을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녀는 비록 낭천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볼 수 없지만 낭천의 뒷덜미의 혈관이 폭열할 정도로 팽창되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보는 걸 일종의 향락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 편한 자세로 앉아 술을 한 잔 곁들였으면 금상첨화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말도 타 보았고 가마도 타 보았으며 가장 푹신한 의자에도 앉아 보았지만 낭천의 등을 깔고 앉을 때보다 더 유쾌한 때가 없었다.

그녀가 술을 따라 입술에 갖다 대기도 전에 별안간 문이 열리면서 그녀가 앉아 있는 의자를 걷어차는 발이 있었다. 의자가 벌렁 뒤집혀져 그녀도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상관금홍이 돌아온 것이다. 외아들의 시체와 함께.

자기가 앉아 있는 의자를 누가 걷어찬다면 필경 울화가 치밀 것이다. 그러나 설소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지금 어떤 행동을 취하든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은 극히 어리석은 짓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발밑에 있던 고양이는 벌써 놀란 토끼처럼 열려진 문을 통해 도망쳐 버렸다.

상관금홍은 눈을 낭천의 뒷덜미에 못박으며 얼음장같이 차갑게 내뱉았다.

"고개를 돌려 이 사람이 누구인가를 똑똑히 보아라!" 낭천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혈관은 계속 움찔거렸다. 한참 후에야 그는 느릿느릿 고개를 돌려 상관금홍이 안고 있는 시체를 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가에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상관금홍은 그의 눈동자를 주시하며 물었다.

"너는 이 죽은 자를 알고 있겠지?"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상대방을 통해 확인하려는 말투였다. 낭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금홍의 음성은 화살이다. 그리고 그가 눈으로 주시하고 있는 자는 즉 표적물이 된다.

"며칠 전만 해도 엄연히 살아 있던 자가 지금은 죽어 있다. 너는 그것을 아느냐?" 낭천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금홍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지금 너는 졸지에 그의 시체를 보고서도 전혀 놀라는 표정이 없었다. 그것은 네가 이 사실을 벌써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게 아니냐?" 낭천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소.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벌써 알고 있었소." 상관금홍은 악을 쓰듯 음성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 낭천의 눈빛은 초점을 잃은 듯했지만 대꾸만은 단호했다.

"그를 죽인 자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오!" 그는 서슴없이 이 말을 내뱉으면서도 얼굴의 근육이 굳어 버린 듯 아무런 변화도 일지 않았다. 더욱이 그 한마디로 인해 자신에게 닥쳐올 결과가 무엇인지도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도리어 방안에 있던 소녀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해 모두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심지어 설소하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순간, 그녀의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일종의 미묘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것은 슬픔과 애석함이 뒤범벅된 감정 같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왜 갑자기 낭천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상태에서 상관금홍이 출수만 하면 낭천의 목숨은 곧 이슬처럼 사라질 것이라는 기정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상관금홍은 수시로 살수를 전개할 수 있었다.

낭천을 향하고 있는 그녀의 눈빛은 마치 송장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미련하기 짝이 없는 송장을.

'저런 사람은 비단 미련하기 짝이 없을 뿐더러 아예 정신이 돌아 버린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스스로 승인할 수가...저런 사람은 도저히 구제할 길이 없어. 그가 죽든 말든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설소하는 애써 자신의 감정을 부인하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녀는 단지 상관금홍이 좀더 빨리 낭천을 죽여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 순간이 빨리 올수록 자신의 번뇌가 감소될 것 같았다. 그러한 느낌에 그녀는 깜짝 놀라며 다시 자신에게 반문했다.

'나는 이미 그의 생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기로 작정했는데 왜 번뇌를 하는 것일까?'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상관금홍은 오랜 시간이 경과될 때까지 출수를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낭천의 눈동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낭천의 눈동자를 통해 자기가 아직 이해할 수 없는 한 가지 일을 캐내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낭천의 눈은 텅텅 비어 아무것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확실히 살아 있는 자의 눈동자 같지 않았다. 상관금홍은 문득 그 눈동자를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그 눈동자, 처음 보는 눈동자가 아니었다. 예전에도 많이 보던 눈동자다. 그가 형무명의 검을 뽑아 낭천에게 내줄 때 형무명의 눈동자가 지금 낭천의 눈동자와 거의 같았었다.

그가 사람을 살해할 때 숨을 거두기 직전의 상대방 눈동자도 역시 그랬었다. 정녕 감정이 없을 뿐 아니라 생명도 없고 모든 일에 대해 이미 완전한 절망을 느낀 눈동자였다.

낭천은 기다리고 있었다.

상관금홍은 홀연 입을 열었다.

"너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느냐?" 낭천은 대답을 거부했다.

상관금홍은 다시 말했다.

"너는 승인하고 있다. 내가 너를 죽이기를 원하고 있단 말이다. 그렇지 않느냐?" 낭천은 여전히 대답을 거부했다.

그러자 상관금홍의 눈에 한 가닥의 잔인한 웃음이 스쳐갔다.

"여총관(呂總官)!"

그가 한 마디를 외치자 즉시 나타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원래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아는 자는 없었다. 이 부근에 과연 사람이 숨어 있을 만한 장소가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상관금홍의 주위엔 많은 사람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사람, 마치 유령 혹은 귀신 같은 존재. 상관금홍이 어딜 가면 그 귀신도 어디까지나 따라가기 마련이다.

상관금홍의 명령은 무당의 주문이며 단지 그만이 귀신을 불러낼 수 있을 것이다. 여총관이란 자가 만약 정말 귀신이라면 최소한 굶어 죽은 귀신이 아니라는 것만은 장담할 수 있었다.

굶어 죽은 귀신이라면 이렇게 몸집이 비대할 리는 만무했다. 비대하다 못해 마치 굴러가는 공과 같았다. 그러나 행동은 어느 누구 못지 않게 민첩해 데굴데굴 굴러 공손히 상관금홍에게 목을 숙였다.

"분부받고 대령했습니다." 상관금홍은 여전히 낭천을 주시하며 천천히 말했다.

"그는 죽음을 원하지만 우린 그에게 죽음을 주지 않는다." 여총관은 또랑또랑하게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우린 그에게 다른 것을 준다."

"알겠습니다."

"그에게 술과 계집을 주어라. 그가 누구를 원하든 얼마를 원하든 전부 주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상관금홍은 한쪽에 서 있는 설소하를 힐끗 쳐다보더니 강조를 하듯 조금 전의 말을 강조했다.

"그가 누구를 원하든 꼭 주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여총관은 대답하면서 의미심장하게 설소하를 힐끗 쳐다보았다.

"어느 누구도 막론한단 말씀입니까?"

"그렇다. 그가 설사 너의 마누라를 원한다 해도 주어야 한다." 여총관의 작은 눈이 일직선으로 변해 재차 몸을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가 원한다면 당장 속하의 마누라를 데려오겠습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던 설소하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가 만약 저를 원한다면 어떻게 하죠?" 상관금홍은 한 마디로 잘라 대꾸했다.

"말했듯이 어느 누구도 예외는 없다." 설소하는 금방 눈동자에 웃음을 담았다.

"하지만...저만큼은 예외예요. 저는 당신의 소유예요. 당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저를....."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바싹 상관금홍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웃음은 그렇게도 달콤했고 동작 또한 온유(溫柔)했다.

그러나 상관금홍은 아예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매섭게 손을 뻗쳐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어느 누구도 네년을 가질 수 있는데 왜 유독 그만은 꺼린단 말이냐?" 설소하는 뺨을 얻어맞고 그 진동에 의해 문 밖으로 날아갔다.

상관금홍은 못을 박듯 한마디 한마디 뚜렷하게 말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다 줄 수 있지만 절대 이곳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해라. 삼 개월 후 어떤 모습으로 변하는지 보고 싶다." 여총관은 즉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상관금홍은 그제야 천천히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나갔다.

낭천은 이를 악물고 있었지만 치아가 계속 상하로 부딪치며 떨리고 있었다. 끝내 그는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외쳤다.

"내가 네 아들을 죽였는데 너는 왜 나를 죽이지 않느냐?" 상관금홍은 이때 문 밖으로 나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천천히 대꾸했다.

"너로 하여금 살아가는 고통을 주기 위해서다!" 낭천의 몸이 갑자기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마치 무형의 채찍을 피하듯 그는 몸을 계속 오그러뜨려서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어느 누구도 그녀를 차지할 수 있지만 유독 자기만은 그녀를 차지할 수 없다.

살아 있는 고통...그러한 채찍이 쉴새없이 그의 몸을 내리치고 있는 것이다.

여총관은 가까이 다가와 무엇이 즐거운지 히죽히죽 웃었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겠소? 술과 계집을 즐긴다는 것은 인생의 쾌사(快事)이니만큼 아무 생각 말고 즐기시오." 여기까지 말한 그는 옆에 있는 소녀에게 고개를 돌려 차가운 안색으로 호통을 쳤다.

"냉큼 낭천 어르신네께 술을 대령하지 않고 뭘 꾸물대느냐?" 이 사람은 상관금홍에게 대할 때와 낭천에게 대할 때에 각기 다른 얼굴을 했다. 지금 소녀들에게 호통을 칠 때는 또 하나의 다른 얼굴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여러 개의 다른 얼굴을 갖고 있다. 얼굴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느껴질 때 그들은 마치 마술을 부리듯 금방 변모해 버린다.

얼굴을 자주, 그리고 판이하게 바꾸다 보면 차츰 자신의 얼굴이 원래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잊기 일쑤다.

게다가 그 도가 지나치면 아예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낼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연륜을 쌓아감에 따라 다른 얼굴을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손해를 작게 본다는 사실에 빠져들어 가기 때문이다.

다행하게도 이 세상엔 아직도 면구가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얼굴은 단 하나 자기 본래의 얼굴뿐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극히 소수지만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 얼마나 많은 손해를 보든 그 얼굴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울고 싶을 때 울고, 웃고 싶을 때 웃고, 또한 살고 싶으면 살고, 죽고 싶으면 죽는다. 그들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의 본색(本色)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남아의 본색이 세상에 만약 그런 사람이 없다면 인생은 정말 일장 사기극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과연 어떻게 변할까?

그렇다면 이 세상은 과연 어떻게 흘러갈까?

술상을 차려 왔다. 바깥 공기는 방 안보다 분명히 차가웁건만 술상을 차려 다시 들어온 소녀들의 옷은 얇아졌다.

여총관은 술을 따르고 잔을 높이 들었다.

"어서 술을 마시시오. 술을 많이 마시게 되면 당신은 곧 이 세상의 모든 계집이 누구나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오." 낭천은 이를 악문 채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똑같지 않다!" 여총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럼 당신은 어떤 계집을 원하고 있소?"

낭천의 눈동자에는 핏발이 무섭게 서 있었다.

"난 네 마누라를 원한다!"

밤. 밤의 환락가. 이곳에는 언제나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몰려든다.

그러나 초류빈은 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만이 남은 적적한 심정에 젖어 아예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멀리 떠나갔다. 너무 멀리, 산 너머 저 편 아지랑이처럼 그 자신도 그 존재를 느낄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는 호유성 부자의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설벽운은?

그녀는 종적도 찾을 길 없고 소식도 없다. 단지 그리움, 영원한 그리움이 있을 뿐이다.

천장지구유진시(天長地久有盡時)

차한면면무절기(此恨綿綿無節期)!

'하늘과 땅, 끝이 있을망정 이 한(恨)은 그칠 날이 없다.'

이 두 구절 시의 문장은 비록 평범할지 모르나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감정은 바다보다 깊다.

그러나 감성에 몰두하지 않는 자가 과연 그 속의 시큼한 맛을 음미할 수 있을까?

멀리서 야적(夜笛)의 슬픈 가락이 실려왔다. 처량한 야적, 사무치는 그리움이리라.

다정이 병이런가?

다정이 죄이런가?

꽃도 다정하면 일찍 지고.

다정인은 초췌, 초췌해 가니.....

천애(天涯)에 버려진 인간, 슬픔을 탓하랴.

취한 눈으로 쌍쌍이 짝짓는 것을 보는 것도

술에 젖은 술잔에 취함을 탓할소냐.

인적 없는 곳에서 외로이 비파를 뜯으며 눈물 흘리는 것보다 나으려니.....

노래를 파는 사람 자체만 해도 비고(悲苦)한 운명을 타고났을 텐데 왜 또 그렇게 처량한 가락으로 사랑의 눈물을 짜내는가?

초류빈은 가득 따른 술을 단숨에 비워 버리고 젓가락으로 장단을 맞추며 그 처량한 야적에 따라 나직이 읊조렸다.

화목(花木)은 설사 무정해도

언젠가는 시들고,

무정한 사람, 역시 초췌해질 날 있겠지.

사람이 무정하다면, 살아간들 무슨 맛인가?

설사 외로이 눈물 짓는다 한들 흘릴 눈물 없는 것보다 몇 갑절 나을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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