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1일 목요일

53 소이비도 제4권 타락된 영웅





타락된 영웅



밤의 피리 소리가 계속 밤바람에 실려오자 초류빈은 홀연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하나, 그 웃음 또한 무슨 맛이겠는가. 낭천은?

초류빈은 줄곧 그의 행적을 수소문하며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아는 자가 없었다. 심지어 그를 본 사람조차 없었다.

초류빈은 낭천이 금전방의 총단에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설사 그가 거기까지 생각했다손 치더라도 금전방의 총단이 어디 있는지 아는 자가 없는 것이다.

바람 속에서 등잔불이 흔들리듯 술이 술잔 속에서 흔들린다. 혼탁한 술, 침침한 등불, 그가 지금 술을 마시고 있는 곳은 국수를 주로 파는 극히 초라하고 작은 집이었다.

이 부근은 전부 이런 식의 누추한 가게였다. 이런 곳에 오는 사람은 모두 극히 평범한 인물로서 아무도 그를 몰라보고 그도 역시 다른 사람을 알지 못했다.

그는 이런 분위기를 좋아했다. 약간 을씨년스러우면서도 고독한 느낌을 주고 그래서 다소의 낭만도 곁들여 있었다.

삶의 영욕(榮辱), 생명의 비환(悲歡),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그러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단지 술이 들어 있는 술잔을 쥐고 있는 한 그들은 만족을 느낀다.

이곳에는 득의에 찬 웃음소리도 없고 비통에 찬 가락도 없다. 야색은 그렇게도 평정하고 그렇게 담막(淡漠)하다.

별안간 고요 속에 소동이 일었다. 그 소동의 기인(起因)은 거친 욕설에서 비롯되었다.

"술벌레, 이 맞아 죽어도 시원치 않을 놈, 감히 술을 훔쳐 마시려 하다니, 설사 네놈이 뱃속으로 삼킨다 해도 다시 토해내게 만들 테다!"

초류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아마 술벌레라는 말이 그의 고막을 자극시킨 까닭일 것이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한 사람이 술단지를 안은 채 비록 매를 맞아 땅에 쓰러졌지만, 계속 죽을 힘을 다해 목을 길게 빼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그리고 허리에 기름기가 잔뜩 묻은 행주치마를 두른 영감이 계속 욕설을 하며 쉴새없이 매를 내치고 있었다.

초류빈은 암암리 한숨을 내쉬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마시게 내버려 두시오. 돈은 내가 치르겠소."

욕설과 매는 멎고 소동도 정지되었다. 돈은 비단 사람의 손을 멈추게 할 뿐더러 사람의 입까지 봉할 수 있는 위력을 지니고 있는가 보다.

땅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일어날 겨를도 없이 술단지를 부둥켜안고 계속 입 안으로 술을 쏟아넣었다.

그는 술단지 속에 자신의 몸을 내던져 빠져 죽으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상심하는 일이 없다고 사람이 어떻게 이 정도로 변할 수 있을까? 다감한 사람이 아니면 상심사가 있을 리 만무하니.....

초류빈은 그 사람에 대해 심심한 동정을 느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혼자서 술을 마시는 것보다 재미없는 일은 없으니 나와 함께 술잔을 나누지 않겠소?"

그 사람은 초류빈의 말을 듣자 벌떡 일어나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

"너는 뭐하는 녀석이냐? 네놈이 나하고 술 마실 자격이 있단 말이냐? 고약한 놈, 네놈이 설사 삼 백 단지의 술을 더 사준다 해도 나하고 같이 술을 마실 생각은....."

여기에서 사나이의 말은 별안간 중단되었다. 마치 누가 갑자기 그의 목을 두 손으로 조인 듯했다.

초류빈도 역시 멍해지며 자신도 모르게 격동되는 음성으로 외쳤다.

"다...당신은....."

사나이는 그 즉시 술단지를 땅에 팽개치고 몸을 돌려 달아났다.

초류빈은 즉시 그를 쫓아가며 외쳤다.

"잠깐만...형씨, 벌써 나를 잊었소?"

사나이는 더욱 달리는 속도를 재촉하며 악을 쓰듯 외쳤다.

"당신을 전혀 모르오! 당신의 술은 마시지 않겠소!"

두 사람은 쫓고 도망하며 눈 깜짝할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느 누가 이 광경을 보았더라도 두 사람 모두 어딘가 부족한 데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술을 훔친 녀석은 알고보니 미친 사람이었군. 매를 호되게 맞아 가면서까지 술을 훔쳐먹다가 막상 다른 사람이 사 준다니까 도리어 도망쳐 버리다니....."

"그 술을 사준 사람은 더욱 미친 것 같아. 돈을 쓰고 욕을 얻어먹었으면서도 상대방을 형씨라고 부르는 그런 사람은 난생 처음이야....."

물론 그는 그런 사람을 처음 본 것이다. 그런 사람은 원래 세상에 많지 않으니까.

도망친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무엇 때문에 초류빈을 확인하자 도망친 것일까?

그 원인을 다른 사람은 알 리가 없다. 심지어 초류빈 자신도 이런 데서 그를 만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초류빈이 처음으로 그를 보았을 때, 그는 어느 긴 한길 한복판에 있는 처마 아래 서 있었다. 그 한길엔 사람이 몹시 붐볐다.

그의 백설같이 횐 옷은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닭우리 안에 있는 한 마리 학 같았다. 그는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려 있는 자체마저 치욕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설사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황금을 그 앞에 내놓는다 해도 그는 자기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과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그였건만 지금은.....

단지 한 단지의 혼탁한 술을 마시기 위해 그는 사람의 야멸찬 욕설과 호된 매까지 맞아 가면서 돼지처럼 땅바닥에서 뒹굴었다.

초류빈은 그것이 동일한 인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감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앞에서 도망치고 있는 자는 틀립없이 예전에 그 고고했던 여봉선이었다. 무슨 일로 인해 그가 이렇게도 빨리, 이렇게도 심하게, 이렇게도 무섭게 변해 버린 것일까?

등불은 등뒤로 멀리 물러나고 별빛은 좀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여봉선은 홀연 걸음을 멈추고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쳐 보았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 왜냐하면 그는 낭천과 같이 도피하는 것은 단지 자기 자신뿐이다. 세상엔 아마 자신을 도피하려는 사람은 많겠지만 성공을 거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느꼈기 때문이다.

초류빈도 이미 멀리서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구부려 계속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기침을 하는 횟수가 비록 예전보다 줄어들었지만 일단 한번 기침을 하기 시작하면 좀처럼 멎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스스로 발견했다.

그것은 마치 그리움과 같은 게 아닐까? 한 사람을 그리워하는 횟수가 적어졌을 땐 그 사람을 잊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리움이 이미 뼛속 깊이 스며들었기 때문이리라.

그가 간신히 기침을 멈추자 여봉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왜 나를 쫓아왔소? 왜 내가 떠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소?"

그는 비록 될 수 있는 한 자신을 침착하게 보이려 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의 음성은 엄동설한 물 속에서 건져낸 토끼마냥 떨리고 있었다.

초류빈은 행여나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떠한 대답도 모두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이다.

여봉선은 다시 말했다.

"나는 원래 당신에게 빚진 것이 없는데 당신은 무엇 때문에 나한테 할 수 없는 일을 시켰소?"

초류빈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끝내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에게 빚을 졌소."

"설사 당신이 나에게 빚을 졌다 해도 갚을 필요는 없소."

"내가 당신에게 빚진 것은 원래 갚을 수 없는 것이오. 하지만 최소한 당신에게 술을 살 수 있는 기회는 주어야 할 게 아니겠소?"

여기까지 말한 그는 담담하게 웃었다.

"당신도 나에게 술을 산 적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여봉선은 술잔도 제대로 잡지 못할 정도로 계속 떨고 있었다. 그는 두 손으로 술잔을 받쳐 술을 마셨지만 술은 여전히 술잔을 차고 나와 그의 입가를 타고 온몸에 뿌려졌다.

며칠 전만 해도 그 손은 살인 무기였다. 무슨 일로 인해 그가 이렇게 변했는가. 그 일이 그에게 준 타격은 가공할 만한 게 분명할 것이다.

초류빈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여봉선은 다시 술을 따랐다. 쨍! 하는 소리가 들리며 그의 술잔은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갑자기 움찔거리며 심한 경련이 일었다. 그는 자신의 떨리는 손을 뚫어지게 주시하더니 홀연 일 성의 광규와 함께 그 손을 자기 입 안으로 쑤셔넣었다.

있는 힘을 다해 쑤셔넣고 있는 손을 힘껏 깨물었다. 피는 그의 입가에 남아 있는 술자국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가 무슨 일을 하든 초류빈은 만류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얼른 여봉선의 손을 끌어당겼다.

"어서 놓으시오! 나는 이 손을 질겅질겅 씹어 삼키겠소!"

그 손은 원래 그가 가장 자랑스럽게 가장 아끼는 손이었다. 진정한 고통에 처하게 되면 자신이 가장 아끼는 물건을 파괴해 버리기 마련이다. 심지어 자기의 육신과 영혼마저도 파괴해 버린다. 그러한 고통을 해제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파괴뿐이다.

철저한 파괴!

초류빈의 신색은 울적하게 변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그릇된 일을 했다면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그이거늘 당신은 왜 자신을 학대하시오?"

여봉선의 음성은 찢어지는 듯했다.

"벌을 받아야 할 자는 바로 나요. 나 자신이란 말이오....."

그는 초류빈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다가 의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일어날 생각을 않고 그냥 바닥에 넘어진 채 방성통곡을 했다. 그러면서 띄엄띄엄 자신의 얘기를 울음을 섞어 가면서 했다.

초류빈은 귀로 그의 얘기를 들으며 눈으로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뇌리로 생각하는 것은 낭천이었다.

초류빈의 마음은 얼음장같이 식어갔다. 낭천도 이와 똑같은 타격을 받은 게 아닐까? 낭천은 이와 똑같은 꼴이 되어 있는 게 아닐까? 초류빈은 여봉선에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잠자코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럼 당신은 어째서 아직도 이곳에 남아 있소?"

극도의 비통은 왕왕 마비와 직결된다. 여봉선은 이미 마비된 듯 망연히 대답했다.

"이곳에 남아 있지 않으면 어디로 가란 말이오?"

"돌아가시오, 집으로."

"집....."

"당신은 지금 큰 병을 앓는 것과 다를 바 없소. 그 병을 고치는 데는 두 가지 약밖에 없소."

"두 가지 약이라니....."

"첫째는 집이고 둘째는 시간이오. 당신이 집으로 돌아간다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봉선은 홀연 활을 쏘듯 외쳤다.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소!"

초류빈은 그를 주시하며 즉시 반문했다.

"어째서 돌아갈 수 없다는 거요?"

"그...그 집은 이미 내 집이 아니오!"

초류빈의 음성은 어느 때보다도 차분했다.

"집은 언제까지나 집이오. 영원히 변할 수 없소. 그러기에 집은 고귀한 것이오."

여봉선은 다시 떨기 시작했다.

"집은 설사 영원히 변치 않는다 해도 나는 이미 변해 예전의 내가 아니오."

"당신이 만약 집으로 돌아가 조용히 일단의 세월을 보낸다면 기필코 당신은 당신 자신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오."

하며 다음 말을 이으려는데 돌연 등뒤에서 다른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만약 집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병은 영원히 치료받을 수 없겠네요?"

부드러운 음성, 사람을 범죄로 유도하는 어떤 힘이 깃들어 있는 음성이었다.

초류빈이 고개를 돌리기 전에 여봉선은 이미 벌떡 일어나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마치 귀신을 본 것 같았다.

초류빈은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이 등뒤에 나타난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내뱉은 말 속에 담겨져 있는 뜻도 알고 있었다.

'낭천에게는 집이 없다!'

초류빈의 마음은 다시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으나 음성은 조금도 격동된 곳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신이 이런 곳에 나타날 줄이야 천만 뜻밖이오."

나타난 자는 두말할 여지도 없이 설소하였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은방울이 구르는 듯한 웃음을.

"호호호...맞아요. 저는 좀처럼 이런 곳엔 오지 않아요. 하지만 이런 곳에서만이 당신을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죠. 당신을 찾아낼 수 있는 곳이라면 저는 어디라도 갈 수 있어요."

초류빈의 음성은 냉랭하게 변했다.

"당신이 나를 찾아온 것은 크나큰 잘못이오. 결국 후회하게 될 테니까."

설소하의 웃음소리는 더욱 높아져 갔다.

"호호호...후회라고요? 제가 무엇 때문에 후회를 하죠? 우리는 피차 옛친구이며 당신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이상 제가 어찌 당신을 찾아오지 않을 수 있나요?"

그녀의 음성은 더욱 부드럽게 변해갔다.

"제가 줄곧 당신을 보고 싶어했다는 사실을 모르시나요?"

"하지만 당신이 여봉선을 대하듯 낭천을 대했다는 사실을 내가 알았다면....."

설소하는 태연자약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제가 만약 여봉선을 버렸듯이 낭천을 버렸다면 당신은 저를 죽일 생각인가요?"

초류빈은 단호한 의지가 담긴 음성으로 말했다.

"내 뜻을 당신은 알고 있으리라 믿소."

"당신은 그로 하여금 스스로 제 곁을 떠나라고 권유하고 있지만, 제가 만약 먼저 그의 곁을 떠난다면 마침내 당신의 뜻대로 되는 게 아니겠어요?"

그가 당신에게서 떠나는 것과 당신이 그에게서 떠나는 것은 판이하게 다른 문제요."

설소하는 즉시 반문을 했다.

"어째서 다르다는 거죠"

초류빈은 힘주어 대꾸했다.

"나는 그가 재생의 길을 걷길 원하는 거지 결코 더욱 깊은 고통 속으로 함락되는 것을 원치 않소."

설소하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제가 만약 이미 그의 곁을 떠났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초류빈은 별안간 몸을 돌려 그녀를 똑바로 주시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당신은 오늘 이곳에 온 것을 진정 후회하게 될 것이오."

그의 신색은 여전히 평정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설소하는 돌연 일종의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압력을 느꼈고, 그 압력은 급기야 그녀의 얼굴에 띤 웃음을 굳어 버리게 했다.

그녀가 웃지 않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웃음, 그것은 원래 그녀에게 있어 가장 자신 있는 무기의 일종이었다.

그녀는 여지껏 다만 상관금홍을 대할 때만 그 무기가 십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초류빈에게도 그 무기가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심(信心)을 잃은 사람의 웃음은 평상시의 구실을 하지 못한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비로소 천천히 고개를 내둘렀다.

"저는 믿어요. 당신은 절대 저를 어떻게 하지 못할 거예요."

초류빈의 시선은 그녀의 눈꼬리에 얼어붙은 웃음에 못박혀 있었다.

"당신은 확고한 자신을 갖고 있단 말이오?"

설소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초류빈은 히죽 웃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없소. 나 자신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을 한 적이 왕왕 있으니까."

"그러나 당신이 만약 저에게 후회를 안겨 준다면 당신 자신은 더욱 뼈저린 후회를 하게 될 거예요."

"글쎄....."

"당신이 만약 낭천을 만나고 싶다면....."

그녀는 고의로 말끝을 흐리며 초류빈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초류빈의 눈동자엔 금세 갈망의 빛이 감돌았다.

"당신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소?"

"물론이죠."

설소하는 지체없이 다시 자신을 회복해 생긋이 웃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을 그에게 안내할 사람은 저뿐일 거예요 그리고 그를 구할 수 있는 사람도 오직 저뿐이에요. 제가 그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듯이 그를 구제할 수도 있어요."

이쯤 되자 초류빈의 안색은 크게 변했다. 이번에 그녀가 한 말은 거짓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가 거짓말을 할 때는 물론 무섭지만 사실을 말할 때는 더욱 가공스러럽다. 그녀 같은 사람이 사실을 말한다는 자체는 보다 많은 대가를 원하고 있다는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초류빈은 가볍게 자기의 손가락 끝을 문질렀다. 손가락 끝엔 이미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좋소.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말해 보시오."

설소하는 정이 듬뿍 담긴 눈동자로 그를 주시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언급을 하지 않아 초조해지는 쪽은 초류빈이었다.

"대관절 무엇을 원하고 있소?"

설소하가 다시 웃자 앵두 같은 붉은 입술 속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제가 당신에게 원하는 것은 너무나도 많아요. 하지만 지금은 단지 당신을 좀더 오래 쳐다보고 싶을 뿐이에요."

그녀는 혀를 내밀어 입술을 부드럽게 애무하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저는 당신이 화내시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당신이 화를 내시면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줄곧 보고 싶었어요. 오늘이 가장 좋은 기회인데 제가 어찌 놓칠 수 있겠어요?"

초류빈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냉큼 탁상 위에 있는 등잔불을 자기 앞으로 바싹 들여놓고 천천히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녀가 자기의 얼굴을 오래 보고 싶다니 그는 서슴없이 보여 주려는 것이다. 그리고 행여나 그녀가 자세히 보지 못할세라 등잔불을 바싹 앞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여인이 어떤 일을 하고 싶어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러면 여인은 곧 그 일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재미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여인은 어떤 일에 대해서도 흥미를 오래 간직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만류한다면 그녀의 흥미는 도리어 더욱 짙어진다.

이것은 어쩌면 여인의 가장 큰 고질인지도 모른다. 천백 년 전의 여인도 그런 고질이 있었고, 천백 년 후의 여인도 필시 그런 고질을 앓을 것이다.

이상한 것은, 남자는 여자에 대해 줄곧 연구를 거듭해 왔지만 여자의 그러한 고질을 이해하는 남자는 별로 많지 않다는 점이다.

초류빈은 그곳에 앉아 천천히 술을 들이켰다.

설소하는 그를 뚫어지게 주시하며 달콤하게 웃었다.

"당신은 정말 묘한 사람이에요. 말하는 것도 묘하고 하는 일도 묘하며 술을 마시는 모습은 더욱 묘해요. 당신이 술을 마시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저는 당신이 쥐고 있는 술잔이 되고 싶은 충동을 느껴요. 당신은 술잔을 쥐듯 여자한테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하나요?"

초류빈은 그냥 듣고만 있다.

"사실 당신이 여자를 대하는 방법은 더욱 묘해요. 당신은 여자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 같아요.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은 여자들이 원하는 것들이죠. 때론 당신은 가만히 있어도 당신 품안에 안기고 싶어하는 여자들이 많을 거예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제아무리 무서운 여인이라 해도 당신을 만나게 되면 도저히 벗어날 재간이 없게 되죠."

초류빈은 여전히 듣고만 있었다.

설소하는 봇물이 터진 듯 거침없이 말을 쏟아냈다.

"매년 당신을 만날 때마다 당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무척 재미있다고 느꼈어요. 하지만 나중에 자세히 생각해 보면 비로소 당신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당신은 원래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가장 화술이 뛰어난 사람은 왕왕 가장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진리를 아는 자는 별로 많지 않다.

설소하의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질 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당신에게 속지 않을 거예요. 이번엔 당신이 하도록 만들겠어요."

초류빈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당신이 싫증날 정도로 나를 본 후에 말을 하겠소."

"싫증날 정도는 아니지만 만족할 정도로 보았어요."

"그럼 당신이 나에게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설소하는 뚫어지게 그를 주시했다. 만약 그녀의 눈에도 이빨이 있다면 벌써 초류빈을 뱃속으로 삼켜버렸을 것이다.

이런 여인의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사실 유쾌한 일이지만 괴롭기도 했다. 그녀는 사무치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단지 초류빈은 예외였다.

설소하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한마디 한마디 강조하듯 말했다.

"다른 것은 필요없어요. 제가 원하는 건 당신뿐이에요."

"나를 원한다고....."

설소하의 눈동자가 굴러가는 소리까지 초류빈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신 자신을 낭천과 교환한다면 가장 공평한 협상이 아니겠어요?"

초류빈은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공평하지 않소."

"어째서 공평하지 않다는 거죠? 낭천은 지금 제 소유가 아니라고 생각하나요?"

"그렇소. 당신은 이미 그를 버렸소."

설소하는 얼굴과 몸 전체로 웃었다.

"호호호...제가 그를 저버렸기 때문에 비로소 그는 영원히 제 소유가 된 거예요. 제가 만약 그를 구하러 간다면 그는 제것이 될 수 없죠. 그 이치를 당신은 모르나요?"

초류빈은 물론 알고 있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고통스러운 것이다.

설소하의 음성은 자신에 넘쳤다.

"당신이 그를 구할 수 있는 길은 자신으로써 교환하는 방법뿐이에요. 당신이 만약 승낙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그를 만날 수 없을 거예요."

초류빈은 술잔을 비우고 천천히 그녀 앞으로 걸어가 말했다.

"보아하니 당신의 청을 승낙하는 것 이외에는 별도리가 없을 것 같군. 안 그렇소?"

설소하는 더욱 요염한 자세를 취하며 더욱 득의하게 웃었다.

"당신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하겠....."

그녀의 음성은 별안간 끊어졌다. 초류빈의 손은 이미 그녀의 뺨을 계속해서 십여 차례나 후려쳤다.

설소하는 비단 피하지 않을 뿐더러 도리어 교성을 지르며 그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때려요! 때려요! 당신만 승낙해 주신다면 저는 사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당신에게 매를 맞겠어요."

돌연 한 사람이 손뼉을 치며 낭랑하게 외쳤다.

"정말 잘 때렸어요. 그녀가 스스로 매맞기를 원하는데 왜 계속 때리지 않죠?"

주막 문 앞에 색깔이 시꺼멓게 변한 초롱불이 걸려 있었다. 그 초롱불 아래 한 사람이 서 있었으니 커다란 눈동자, 길게 땋아 내린 머리카락...초류빈은 자신도 모르게 격동되는 음성으로 외쳤다.

"손낭자!"

손소홍은 보조개를 나타내며 생긋이 웃었다.

"저는 남자가 여자를 때리는 것을 가장 야만적인 행동이라 생각해 왔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군요."

설소하는 즉시 그녀의 말을 받았다.

"나도 역시 통쾌해요. 나는 그에게 매맞는 게 즐거우니까요."

그녀는 다시 초류빈의 팔에 매달리며 눈웃음을 쳤다.

"보아하니 당신은 질투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술로써 그 질투의 불길을 식혀 보는 게 어때요?"

손소홍은 뜻밖에도 정말 앞으로 다가와 초류빈의 술잔에 술을 따라 단숨에 들이켜더니 눈썹을 가볍게 찌푸렸다.

"질이 나쁜 술도 많이 마시면 좋은 술과 맛이 비슷하지만 첫 잔은 역시 잘 넘어가지 않는군요."

"다음에 저희 집에 들러 준다면 우리는 훌륭한 술로 당신을 접대할 것을 약속하겠어요."

설소하는 요염한 미소가 가득 담긴 얼굴을 쳐들어 초류빈에게 물었다.

"당신도 반대는 하지 않겠죠?"

초류빈이 대꾸도 하기 전에 손소홍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웃는 모습이 굉장히 아름답군요. 나는 비록 여자지만 자꾸만 당신한테 눈길이 쏠리네요."

설소하는 까르르 웃었다.

"당신은 무엇을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당신은 여자가 아니라 어린애에 불과해요."

손소홍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도리어 동정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웃을 수 있을 때 실컷 웃어 보세요. 곧 웃을 수 없게 될 테니까요."

암투는 시작되었다.

설소하는 여전히 요염하게 웃으며 눈꼬리를 살짝 치켜세웠다.

"그래요?"

손소홍은 자신 있는 말투로 말했다.

"그는 절대 당신 조건을 승낙하지 않을 거예요."

설소하는 힐끗 초류빈을 쳐다보았다.

"과연 그럴까요?"

손소홍의 맑은 눈빛은 능히 설소하의 분홍빛 색채를 띤 눈빛을 이길 수 있었다.

"당신이 해낼 수 있는 일은 나도 해낼 수 있으니까요."

설소하는 가소롭다는 듯 호들갑스럽게 웃어젖혔다.

"호호호호...당신도 해낼 수 있다뇨? 어린애는 역시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거든....."

손소홍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도 최소한 그를 낭천에게 데려다 줄 수 있어요."

설소하는 그녀의 말을 아예 믿으려 하지도 않았다.

"농담이 지나치군요."

"농담이 아니에요. 그리고 나는 낭천을 구제할 수 있는 방법도 알고 있어요."

"그래요?"

"그를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에요."

"그게 무슨 방법이죠?"

"당신을 죽이는 방법이에요. 그를 구제하려면 당신을 죽이는 수밖에 없어요. 당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그도 고통에서 해방될 거예요."

이때 초류빈은 술을 한 잔 들이켜고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옳은 얘기요."

설소하는 그 즉시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도 낭천과 다를 바가 없군요. 대다수 여자들의 말은 믿을 만한 게 못된다는 사실을 모르시나요? 당신은 정말 그녀가 낭천의 거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초류빈은 태연하게 말했다.

"이 세상엔 거짓말을 하는 남자도 있고 사실만을 말하는 여자도 있소."

손소홍이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맞아요. 당신은 천하의 모든 여자들이 모두 당신 자신 같다고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죠?"

"좋아요. 그럼 묻겠는데 낭천은 지금 어디에 있죠?"

"나의 조부님과 함께 있어요. 그 어르신네는 이미 상관금홍에게서 낭천을 데리고 나왔어요."

설소하는 다시 웃으며 초류빈을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은 저런 어리석은 말도 믿나요? 이 세상에 상관금홍에게서 사람을 빼낼 재간을 갖춘 자가 있을 것 같아요?"

초류빈은 미소를 지었다.

"아마 단 한 사람 있을 것이오. 그분이 바로 손낭자의 조부인 손노선생이오."

설소하의 얼굴은 다시 굳어졌다.

"좋아요. 그게 사실이라면 저도 한번 가 보고 싶군요."

손소홍은 즉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는 당신을 만나는 것을 원치 않으니까요. 지금 당신이 살아 있다는 자체부터 이미 불필요한 일로 되었어요."

설소하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나를 죽일 생각인가요?"

"당신은 벌써 죽었어야 했을 인간이에요."

설소하는 다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나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럼 죽일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나요?"

설소하는 눈동자를 사르르 굴렸다.

"이 세상 남자들 중에 나를 죽일 수 있는 자는 아마 단 한 사람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도 지금은 나에게 출수하지 못할 거예요."

그녀는 초류빈을 힐긋 쳐다보며 이어 말했다.

"그가 만약 나를 죽인다면 낭천이 그를 끝까지 원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 스스로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손소홍의 음성에는 단호한 결심이 깃들어 있었다.

"한 가지 명심해 두어야 할 일이 있어요. 나는 남자도 아니고 낭천의 원망을 받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아요."

설소하는 홀연 대소를 터뜨렸다.

"호호호...도전이군요! 나하고 결투할 작정이란 말예요?"

"맞았어요. 장소는 당신이 선택해요. 시간은 내가 정하겠어요."

"어느 때를 원하죠?"

"바로 지금이에요."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