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1일 목요일
59 소이비도 제4권 천당에서 지옥으로
천당에서 지옥으로
밤, 주막엔 등잔불 하나와 두 사람이 있다. 불빛은 음침하고 그들의 심정은 더욱 침침하고 어두웠다. 등잔은 초류빈 앞에 있고 술도 역시 그의 앞에 놓여 있다. 그러나 그는 술잔을 들 기력마저 잃은 듯 단지 그곳에 앉아 멍하니 술잔만 쳐다볼 뿐이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렀을까.
초류빈은 홀연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갑시다."
손소홍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나직이 말했다.
"저도...함께 가는 건가요?"
초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함께 왔으니 물론 함께 돌아가야지."
손소홍은 그의 말에 멍해졌다.
"돌아가다뇨? 그럼 당신은 흥운장에 들르지 않을 생각이란 말예요?"
초류빈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소홍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흥운장에 들르는 게 목적이 아니었던가요?"
초류빈은 잠시 멈칫하다가 대꾸했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소."
손소홍의 반문이 대뜸 뒤따랐다.
"어째서 그럴 필요가 없죠?"
초류빈은 곧 꺼져가려는 등잔불을 주시하며 천천히 말했다.
"역명당의 말을 빌어 그녀가 무사히 집에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오."
손소홍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의 한마디를 듣고 안심할 수 있단 말인가요?"
초류빈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사람의 말이라면 난 무엇이든 믿을 수가 있소."
손소홍은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당신은 정말 그녀를 보고 싶은 생각이 없나요?"
초류빈은 대답을 하기 앞서 오랜 침묵을 지켰다.
"만난다는 것은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것만 못할 것이오. 정녕 그녀가 별고 없다는 것을 안 이상 구태여 직접 찾아가 볼 필요가 뭐 있겠소?"
"하지만 이곳까지 왔는데 가 본들 또한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초류빈은 다시 긴 침묵을 지키다가 홀연 빙긋이 웃었다.
"그녀가 무사한가를 확인하는 게 내 목적이었으니 목적을 달성한 이상 더 이상의 무위한 행동을 하기 싫소."
손소홍은 한숨을 내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은 정말 괴상한 사람이군요. 하는 일마다 모두 이해하기가 힘들어요."
초류빈은 담담하게 그녀의 말을 받았다.
"세월이 흐르면 차츰 이해하게 될 것이오."
손소홍은 잠시 멍해져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최소한 중원팔의의 시체는 묻어주고 떠나야 하지 않아요?"
"그들은 기다릴 수 있지만 상관금홍은 기다리지 않을 것이오."
초류빈은 담담하게 말하더니 처량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죽은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보다 참을성이 많은 법이오. 안 그렇소?"
손소홍은 입을 삐죽거리며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알고보니 당신은 죽은 자에게는 의리가 그리 강하지 못한 것 같군요."
초류빈은 그녀의 빈정거리는 말을 들은 척 만 척하다가 홀연 물었다.
"어제 우리가 언제쯤 출발했는지 기억하고 있소?"
손소홍은 생각을 굴리며 대답했다.
"지금과 비슷한 밤중에 출발했어요."
"그럼 우린 오늘 언제쯤 여기에 당도했소?"
"날이 어두워지기 전이니까 아마 신시(申時) 무렵이겠죠."
"우린 어떤 방법으로 왔소?"
"처음엔 마차를 이용해 일단의 거리를 재촉했으며 그 다음엔 경공을 전개했고 오늘 아침에는 다시 말을 바꾸어 탔죠."
"그러니 우리가 지금 똑같은 방법으로 돌아간다 해도 빨라야 신시 전후에 그쪽에 당도하게 될 것이오. 안 그렇소?"
"맞아요."
"하지만 우린 지금 오랫동안 휴식을 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체력은 절대 어제만큼 좋지 않을 것이오. 설사 경공을 전개한다 해도 역시 어제와 같이 빠르지 못할 건 뻔한 사실이오."
손소홍은 흑백이 뚜렷한 눈동자를 깜박거리며 생긋이 웃었다.
"어젯밤에도 저는 간신히 당신을 따라갔는데 이번에는 어림도 없을 거예요."
"그러니 결과는 뻔한 것이오. 우리가 설사 지금 출발한다 해도 상관금홍과의 약속 시간은 지키기 어려울 것이오."
손소홍은 홀연 고개를 떨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초류빈의 표정과 음성은 모두 심각하게 변했다.
"당신도 내가 약속을 어기기 싫어하는 사람인 줄 알고 있을 테니 출발을 재촉하는 건 당연한 일이오."
손소홍은 입술을 깨물며 더욱 고개를 깊이 숙여 초류빈의 눈길을 피했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무슨 부탁이오."
"이번에는 경공도 전개하지 말고 말을 탈 필요도 없이 계속 마차를 이용하도록 해요."
"나더러 마차 안에서 휴식을 취하라는 것이오?"
"그래요. 그렇지 안고서는 설사 당신이 시간에 맞추어 당도한다 해도 아마 쓰러져 있을 거예요. 당신이 땅에 누워 상관금홍과 싸울 수는 없잖아요."
초류빈은 생각을 굴리더니 빙그레 웃었다.
"좋소. 당신의 말대로 마차를 이용하겠소."
손소홍은 그가 쾌히 승낙하자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얼굴에 웃음을 활짝 지었다.
"우린 마차 안에다 술을 실을 수도 있어요. 당신이 만약 잠이 오지 않는다면 우리 함께 술을 마시도록 해요."
초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술을 많이 마시면 자연히 잠이 올 것이오."
손소홍은 무엇이 그다지도 기쁜지 연신 생글생글 웃었다.
"틀림없는 말이에요. 당신이 마차 안에서 잠을 푹 잘 수 있다면 상관금홍은 절대 당신의 적수가 되지 못할 거예요."
초류빈은 그녀를 똑바로 주시하며 물었다.
"당신은 내 무공에 대해 굉장한 자신을 갖고 있는 모양이군."
손소홍은 눈을 곱게 흘겼다.
"물론이죠. 제가 만약 당신에 대해 자신을 갖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얼굴이 빨개지며 홀연 밖으로 뛰쳐나가면서 까르르 웃었다.
"호호호...저는 당장 가서 마차를 빌려올 테니 당신은 술이나 준비하세요. 그리고 시간 여유가 있다면 그녀에게 가 보아도 좋아요. 저는 절대 질투 따위는 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녀는 길게 땋아 늘인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초류빈은 잠시 동안 멍해져 있다가 비로소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고개를 들면 맞은편 누각이 시야에 들어온다. 누각의 등불은 다시 밝혀졌다.
누각의 사람은?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또 바느질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자상한 어머님 손에 쥐어져 있는 바늘은 마치 영원히 쉴새없는 것 같다. 하지만 고독만큼 지속되진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긴 것은 고독이다.
하루 또 하루, 일 년 그리고 또 횟수가 거듭되지만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바느질은 끝이 없고, 고독 역시 세월이 흐름에 따라 더욱 뼈에 사무쳐 갈 뿐이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생명을 매장했다. 그 작은 누각은 바로 그녀의 무덤이다. 한 사람, 아니 한 여인에게 만약 청춘이 없고 애정과 즐거움이 없다면 목숨이 살아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설벽운, 설벽운...당신의 운명은 너무 비참하오. 당신은 갖은 고통을.....'
초류빈은 다시 허리를 굽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피가 가래에 섞여 입 안에 가득찼다. 초류빈도 어찌 그녀가 보고 싶지 않겠는가.
그는 비록 지금 이곳에 서 있지만 마음은 벌써 날개가 돋혀 작은 누각으로 날아갔다. 그의 마음은 누각으로 날아갔지만 이곳에 서 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찾아가 볼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달려갈 수 있는 입장도 되지 못했다. 설사 마지막 한 번이라 해도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것이며 만난들 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녀는 이미 그의 소유가 아니다. 그녀에겐 자신의 남편이 있고 자기의 아들이 있으며 자기의 천지(天地)가 있다.
초류빈은 그 천지와 완전히 격리돼 있는 살마이다. 그녀는 원래 그의 것이었지만 지금은 볼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초류빈은 손등으로 입가의 피를 닦으며 입 안에 있는 피를 삼켰다. 피마저도 쓰디쓰다.
'벽운, 어찌 되었든 간에 당신만 무사하다면 나는 만족할 수 있소. 하늘에서든 지하에서든 우린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오.'
하지만 설벽운은 정말 무사할까? 바람은 차갑고 사람은 앙상한 나뭇가지보다 더 초췌하다.
초류빈은 외로이 바람 속에 서서 바람이 자기를 실어가길 바라고 있는 게 아닐까.
어느 새 손소홍은 되쫓아 와 넋 빠진 사람마냥 멍하니 그를 주시했다.
"다...당신은 그녀를 보러 가지 않았나요?"
초류빈은 고개를 흔들며 화제를 돌렸다.
"마차를 구해 왔소?"
손소홍은 한숨을 내쉬었다.
"골목 밖에 대기해 놓았어요. 당신이 정녕 그녀를 보러 갈 생각이 없다면 곧 출발하도록 해요."
초류빈은 맞은편 누각을 다시 힐끗 쳐다보았다.
"갑시다."
덜컹덜컹 마차는 흔들리고 술은 술잔 속에서 출렁였다. 술은 오래 묵은 진년노주(陳年老酒)다. 마차는 술보다도 횟수가 더 오래 되었고 말은 마차보다 더욱 늙었다.
초류빈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 말은 아마 삼국 시대의 관공(關公)이 타던 적토마일 것이고 마차도 벌써 골동품이 되었을 건데 당신은 용케 찾아냈으니 정말 감탄할 만한 일이오."
손소홍은 속으로 웃음을 금치 못하면서도 겉으론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제가 하는 일에 대해 언제나 불평만 하시는군요."
초류빈은 고개를 저었다.
"내 어찌 불평을 할 수 있겠소? 더없이 만족할 따름이오."
하고 말하면서 눈을 스르르 감았다.
"이 마차에 오르니 자연히 아주 오래 전의 일이 생각나는군."
손소홍은 깜찍하게 눈을 굴렸다.
"그래요? 무슨 일이 떠올랐죠?"
초류빈은 눈을 감은 채 망연히 대답했다.
"내가 어렸을 때 타고 놀던 그 목마(木馬)가 생각나는 거요. 지금 나는 바로 그 목마를 탄 기분이오."
그가 말을 끝내자마자 홀연 입 안에 무엇이 물려졌다.
손소홍은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그 대추를 잡수시고 일찍 주무세요."
초류빈은 쓴웃음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다면 좋겠건만 애석하게도."
손소홍은 대뜸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제가 이런 낡은 마차를 구한 것은 당신이 편히 잠을 잘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였어요. 당신이 오늘밤 편히 잠을 청한다면 내일 아침에 우린 다른 마차를 바꿔 타기로 해요."
초류빈은 술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면 잠을 청하기 위해서라도 술을 좀더 많이 마셔야겠소."
손소홍은 얼른 그의 빈잔을 채워 주며 생긋이 웃었다.
"맞아요. 당신은 마치 젖을 배불리 먹어야 자는 아기 같군요."
술잔의 술은 흔들리고 그녀의 땋아 늘인 머리카락도 흔들린다. 그녀의 눈빛은 부드러워 마치 창 밖의 별빛 같다. 별빛은 꿈 같다.
초류빈은 거나하게 취한 듯했다. 달밤에 손소홍과 같은 사람과 마주앉아 있는데 어찌 취하지 않으랴.
초류빈은 기지개를 한 번 켜더니 비스듬히 누워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자고로 성자(聖者)는 모두 괴로운 법, 술을 마시는 자 그 기분을 알리라....."
그의 음성은 점점 낮아지며 조용해졌다. 그는 드디어 잠들어 버린 것이다.
손소홍은 정이 듬뿍 담긴 눈동자로 그를 오랫동안 주시하다가 손을 내밀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조용히 말했다.
"편히 주무세요. 당신이 깨어났을 때 모든 우수와 번뇌는 과거가 되어 있을 거예요. 그때가 되면 나는 당신이 과음하시는 것을 말리겠어요."
그녀의 눈동자는 검고 빛났다. 그리고 행복을 향한 동경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녀는 아직 젊다. 젊은이는 세상 만사에 대해 언제나 낙관적이며 무슨 일이든 자기 뜻대로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사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십중팔구이니...사실은 언제나 소원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지금 그녀가 만약 자기가 바라고 있는 것이 사실과는 너무나도 많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 벌써 눈물로 전신을 적셨을 것이다.
마부는 한가롭게 술을 마시고 있다. 그는 조금도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손소홍은 이미 그에게 분부를 내린 바 있다.
'우린 갈 길이 바쁘지 않으니 마차를 될 수 있는 한 천천히 몰도록 하세요.'
마부는 스스로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그 자신도 만약 사랑하는 이와 함께 마차를 탄다면 역시 마차를 빨리 몰지 않을 것이다.
그는 초류빈이 부러웠다. 초류빈은 실로 염복이 있는 녀석이라 느껴졌다. 그러나 만일 초류빈과 손소홍에게 닥칠 일을 그가 알고 있다면 놀란 나머지 술도 제대로 마시지 못할 것이다.
어느덧 날이 밝았다. 오늘은 바로 그들이 말한 내일이다. 초류빈이 깨어났을 때 찬란한 햇살은 마차를 온통 뒤덮고 있었다.
초류빈이 이렇게 늦잠을 잘 리 없건만 그동안에 쌓인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고, 더욱 중요한 원인은 아마 그가 어젯밤 마신 술일 것이다.
초류빈은 술잔을 들어 냄새를 맡아보더니 다시 천천히 내려 놓았다. 마차는 여전히 덜컹거리며 느릿느릿 기어가듯 했다.
손소홍은 초류빈의 무릎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초류빈은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살펴보았다. 그런데 마차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해는 중천에 떠 있는 게 분명하다.
다시 일단의 거리를 가자 고을 이름이 새겨져 있는 석패(石牌)가 시야에 들어왔다.
지금은 정오 무렵이니 상관금홍과의 약속은 세 시진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절반 가량밖에 오지 못했다.
초류빈은 갑자기 자기의 손끝이 차가워지며 떨리는 것을 의식했다.
그는 때론 수심에 잠기고 때론 슬픔에 젖으며 때론 번뇌와 고통에 시달리지만 울화가 치밀 때는 극히 드물었다. 지금 그는 분노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손소홍은 문득 잠에서 깨어나 그의 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다가 그의 성난 얼굴을 보았다. 그녀로선 그가 이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는 걸 처음 보는 것이다.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져 고개를 떨구며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화나셨나요?"
초류빈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소홍의 음성은 애처롭게 변했다.
"당신이 저를 탓하리라는 것은 각오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당신이 저를 때리든 욕하든 저는 달게 받겠어요. 단지 제가 무엇 때문에 이런 행동을 했는지 그것만 이해해 주세요."
초류빈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온몸에 힘이 풀어졌다. 손소홍의 이러한 행동은 완전히 그를 위한 것이었다.
그녀가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그녀가 진심으로 그를 대하는 이상 설사 그릇된 일을 저질렀다 해도 나무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초류빈은 울적하게 입을 열었다.
"나도 당신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을 탓하지는 않겠소. 하나 당신도 최소한 나라는 인간을 이해해야 될 게 아니겠소?"
손소홍은 조심스럽게 그를 주시했다.
"당신은...정말 제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세요?"
초류빈은 잠시 멈칫하다가 대꾸했다.
"당신이 만약 나를 이해한다면 이번 같은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오. 일부러 나를 붙잡아 상관금홍과의 약속을 어기게 했지만 나중에도 이런 기회는 없을 것 같소? 나와 상관금홍의 대결은 거의 숙명적인 것임을 명심하시오. 우린 언젠가는 사생결단을 내려야 하오. 그것은 바로 내일이 될 수도 있소."
손소홍은 눈을 깜박거리며 자신있게 말했다.
"내일이 되면 아마 모든 상황이 달라질 거예요."
초류빈은 그녀의 의미심장한 말에 약간 멍해졌다.
"내일이면 상황이 달라지다니....."
"내일쯤이면 상관금홍은 시체로 변해 있을 거예요. 아니, 어쩌면 오늘밤을 넘기지도 못할 거예요."
그녀의 말투는 자신에 넘쳐 있었다.
초류빈은 그녀가 무엇 때문에 이런 자신 있는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스스로 생각에 잠겼다.
손소홍은 다시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당신이 오늘 약속을 어긴다 해도 당신을 탓할 사람은 없을 거예요. 이번 약속은 처음부터 상관금홍이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니까요."
초류빈은 여전히 생각을 굴리다가 안색이 차츰 긴장되어 갔다.
손소홍의 표정이 도리어 활짝 풀리며 입가에 미소마저 번졌다.
"상관금홍이 저승으로 떠난다면 더욱이 당신을 탓할....."
초류빈은 홀연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이번 일은 당신 할아버지가 시킨 것이오?"
손소홍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생긋이 웃었다.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죠."
초류빈은 즉시 다그치듯 물었다.
"그럼 오늘밤 그 어르신네는 나를 대신해 상관금홍과 대결하게 될 거란 말이오?"
"그래요. 당신도 알다시피 상관금홍은 저의 할아버지만 보아도 마치 쥐가 고양이를 본 것처럼 겁을 집어먹죠. 이 세상에서 상관금홍을 처치할 수 있는 사람은 저의 할아버지밖에 없을 거예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초류빈의 손을 잡으며 말을 계속하려 했다. 한데 그녀의 말은 거기에서 중단되었다. 초류빈의 손이 얼음장같이 차갑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마음이 차갑지 않다면 손이 이렇게 차가울 리 없다. 한 사람이 만약 두려움을 느끼고 있지 않다면 역시 손이 이다지 차가울 리 없다.
초류빈, 그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초류빈의 표정을 보자 손소홍은 더욱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는 허공을 응시하며 심각하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 할아버지가 스스로 상관금홍을 찾아간 것이오? 아니면 당신이 그분에게 요구한 것이오?"
손소홍은 말을 더듬거렸다.
"그게...대관절 무슨 차이점이 있죠?"
초류빈의 신색은 더욱 심각하게 변했다.
"비단 차이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차이점은 굉장히 큰 것이오."
손소홍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그 어르신네께 부탁한 거예요. 상관금홍 같은 사람은 누가 죽여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어요? 구태여 당신이 직접 상대해야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초류빈은 그녀의 말을 수긍하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엔 완전히 다른 표정이 띠어져 있었다.
그 표정은 비단 두려움일 뿐더러 심지어 일종의 절망이었다.
손소홍은 그의 표정을 읽어내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죠?"
초류빈은 홀연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당신을 위해 염려하고 있는 것이오."
손소홍은 커다란 눈을 더욱 휘둥그래 떴다.
"저를 위해 염려하고 있다뇨? 어째서....."
초류빈은 천천히 그녀의 말을 받았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그릇된 일을 할 때가 있소. 그리고 어떤 잘못은 만회할 길이 있지만 어떤 일은 도저히 보상할 방법이 없는 것이오."
지금 그의 표정은 깊은 비통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손소홍을 응시하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한 가지 일을 행하는 데 있어 본래의 출발점이 제아무리 합리적인 것이었더라도 그 결과가 도저히 보상할 길 없는 과오가 되었을 때는 평생토록 후회를 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오. 설사 다른 사람은 그 잘못을 용서해 줄지 모르겠지만 그 스스로는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소. 그것이야말로 정말 무서운 고통이오."
초류빈은 그러한 고통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일생 동안 유일한 잘못을 했고 그 잘못된 판단에 치러야 할 대가가 몸서리칠 정도로 가공스러웠다.
손소홍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마음속으로부터 홀연 일종의 공포를 느껴 음성이 떨렸다.
"그럼 당신은 제가 이번에 그릇된 판단을 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초류빈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대답은커녕 도리어 반문을 했다.
"당신은 그동안 줄곧 할아버지와 함께 있었소?"
손소홍이 고개를 끄덕거려 대답을 대신하자 초류빈은 다시 물었다.
"그럼 당신은 그가 무공을 전개하는 것을 본 적이 있소?"
손소홍은 생각을 굴리며 대답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것 같아요....."
손소홍은 재빨리 이어 말했다.
"그 어르신네는 아예 무공을 전개할 기회가 없었으며 그럴 필요도 없었어요."
초류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니...그게 무슨 말이오?"
손소홍은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 어르신네의 적수가 될 만한 사람이 없으니까요."
초류빈은 그 즉시 질문을 던졌다.
"상관금홍은 어떻소?"
손소홍은 즉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거렸다.
"그도 역시....."
그녀는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홀연 말을 중단했다.
초류빈이 그녀의 말을 이었다.
"상관금홍의 모든 행실에 대해 당신의 할아버지는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소?"
손소홍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요. 할아버지는 늘 상관금홍에게 분노를 느끼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분이 줄곧 상관금홍에게 결정적인 행동을 전개하지 않은 건 사실이 아니겠소?"
손소홍은 고개를 떨구었다.
"네, 아무런 행동도....."
초류빈은 그제야 화제를 핵심으로 돌렸다.
"그분이 무엇 때문에 그동안 분노를 느끼면서도 참아 왔겠소? 다시 말해 왜 당신의 부탁을 받고서야 행동으로 옮겼겠소?"
손소홍은 홀연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엔 공포의 빛이 더욱 짙어졌다.
"당신은...그럼 그 어르신네가 상관금홍을....."
그녀는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는 것을 느끼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초류빈이 천천히 그녀의 말을 받았다.
"한 사람의 무공이 만약 절정에 다다르면 자연히 일종의 두려움이 생기게 마련이오. 행여나 자기를 능가하는 자가 나타날세라, 행여나 자기의 무공이 퇴보할세라 늘 조바심을 금치 못할 것이오. 그런 상황에 도달하면 그는 왕왕 현실을 도피하게 되며 어떤 일이든 행동으로 옮길 자신을 잃게 되는 것이오."
그는 울적하게 한숨을 내쉬며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은 갑자기 강호에서 은퇴하거나 심지어 자포자기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향도 없지 않소. 자고로 그런 전례는 많았소. 그러한 자들이 계속 삶을 영위할 수있는 방법은 모든 일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고 망정(忘情)하는 경지를 스스로 터득하는 길밖에 없소."
손소홍은 자신의 몸이 점점 굳어져 가는 것을 의식했다. 그리고 온몸은 벌써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녀는 할아버지가 망정하는 경지를 아직 터득하지 못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손노인은 아직도 애착을 두고 관심을 갖는 일이 많았다.
초류빈은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생각이 그릇되기를 바랄 뿐이오. 단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소홍은 홀연 앞으로 달려가 그를 꼭 껴안았다. 그녀의 몸은 사시나무 떨 듯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초류빈은 그녀에 대한 동정인지 아니면 스스로 현실에 대한 비통감을 느꼈는지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손노선생, 그가 만약 감정이 없는 자라면 절대 손소홍의 부탁을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감정이 없는 사람은 아마 영원히 그릇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하늘은 무심하게도 늘 감정이 풍부한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가정한다는 자체가 바로 과오의 씨앗이란 말인가?
손소홍은 어느 새 흐느끼고 있었다.
"부탁이에요. 우리 한시 바삐 달려가 할아버지를 구해 줘야 해요. 할아버지를 구할 수 있다면 저는 무슨 일이라도 하겠어요."
창 밖에 말이 울부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말을 파는 마시(馬市)임에 분명하다.
초류빈은 말을 선택하는 데 있어 남달리 뛰어난 재주가 있는 위인이다. 그가 말과 여자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강호에서 공인된 사실이다. 그것은 실로 쉬운 일이 아니다.
알다시피 말과 여자는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동물이다. 초류빈은 자신의 지식을 십분 발휘해 두 필의 가장 빠른 말을 골랐다.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가장 사랑스럽다고 할 수 없듯이 가장 빠른 말이 가장 건장하다고는 단언할 수 없는 법이다. 미녀는 왕왕 순종과 부드러움이 부족하고, 빠른 말은 지구력이 약하다. 두 필의 말은 드디어 지쳐서 쓰러졌다. 그러자 두 사람은 광풍을 몰고 경신술을 전개했다.
해는 서산마루로 기울고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한시도 쉴새없이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들은 행인들의 경악한 눈초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체력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의 뇌리엔 오직 시간 내에 상관금홍과 약속한 장소에 도착하는 일념뿐이었다. 야색이 깔리고 더욱 짙어져 갔다.
노상엔 이미 행인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늘은 별도 달도 없는 밤이다. 그리고 등불도 보이지 않는다. 어둠이 깔린 가운데 불빛이 어른어른 보인다. 그 숲, 바로 상관금홍과 약속한 장소다.
야심 속에 정자의 윤곽이 보이며 한 점의 불꽃이 반짝인다.
불꽃은 꺼졌다가 다시 밝아지더니 한 사람의 그림자가 은은히 시야에 나타났다.
손소홍은 그제야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며 온몸이 솜뭉치처럼 나른해졌다. 그녀가 쓰러지지 않고 여지껏 버틴 것은 일종의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녀를 지탱시킨 것은 마음속에 충만돼 있는 공포일 것이다.
공포는 왕왕 사람의 잠재력을 격발시킬 수 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자기가 보고자 하는 불꽃을 보았기 때문에 긴장이 풀려 그 자리에 쓰러졌다.
초류빈도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불꽃이 꺼지고 밝아지는 순간 일종의 규칙적인 박자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갑자기 그 불꽃은 등잔불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그날 다른 성 밖. 다른 정자 안에서 초류빈은 이와 똑같은 불꽃을 본 적이 있다. 그날 정자 안에는 손노선생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손노선생을 제외하고는 담배를 피우면서 이다지 밝은 빛을 낼 만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초류빈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 정자 안에 있는 사람은 손노선생임에 분명하다. 초류빈은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피가 용솟음쳐 올라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소홍은 땅에 쓰러진 채 나직이 흐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기쁨의 눈물이며 감격의 눈물이었다.
하늘은 결국 무심하지 않은 것 같았다.
초류빈은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정자를 향해 걸어갔다. 그 담배의 향기, 손소홍의 후각을 늘 애무했던 향기. 그녀는 벅찬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초류빈의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달려갔다.
"할아버지, 저희들이 돌아왔어요!"
그녀는 할아버지의 품안으로 뛰어들어가 마냥 울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정자 안의 불꽃은 갑자기 꺼졌다. 그리고 지극히 담담한 음성이 어둠을 뚫고 들려왔다.
"좋다. 나는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음성은 담담하다 못해 냉막하고 심지어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손소홍은 그 음성을 듣자 홀연 멍해지며 뜨겁게 용솟음쳐 오르던 피가 금세 얼음장같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 음성은 마치 천만 근이 넘는 쇠뭉치처럼 그녀를 대번에 천당에서부터 지옥으로 떨어뜨려 버렸다. 별안간 주위에 네 개의 초롱불이 밝혀졌다. 대나무로 높이 받쳐 든 황금색의 초롱이었다.
황금색 등불 아래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의 표정과 몸 그리고 심지어 마음마저도 황금으로 만들어진 듯 딱딱해 보였다. 그 자는 담뱃대를 입에 물고 있었다.
바로 손노선생이 늘 애용하던 그 담뱃대였다. 상관금홍! 정자 안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자는 손노선생이 아닌 상관금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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