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1일 목요일
55 소이비도 제4권 사랑에 눈 먼 사나이
사랑에 눈 먼 사나이
이날 밤에도 안개가 자욱했다. 때는 비록 겨울이었지만 안개는 마치 봄날의 그것과 같았다.
상관금홍은 안개를 헤치고 유유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초류빈은 한시라도 빨리 낭천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조금도 서두르지는 않았다. 근래에 들어 그의 심정은 매우 침울했으며 그 자신도 모르는 무형의 압력에 의해 억눌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압력이 어찌나 강한지 호흡까지 곤란할 정도였다. 다만 손소홍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만은 비교적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손소홍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많이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보다 그녀가 더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류빈은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일상 중에서 가장 유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초류빈은 그녀에게서 도피할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남에게서 증오는 받을지언정 사랑을 받고 싶지는 않죠?'
초류빈은 가슴 한구석을 칼로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그는 사랑을 받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고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초류빈은 자신이 남에게 사랑을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받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 자신의 자물쇠가 있다. 그것은 자신 이외엔 그 누구도 열 수 없는 것이다.
초류빈이 그러하지만 낭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자물쇠는 그 자신들도 영원히 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 과연 그들은 자물쇠를 지닌 채 무덤 속으로 들어갈 것이란 말인가.
얼마 후 손소홍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이제 다 왔어요."
길은 매우 황폐했고 길 옆엔 자그마한 집이 한 채 있었다. 그 집의 방에선 밝은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초라한 집에서 밝은 불빛이 새어나온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손소홍은 서서히 고개를 돌리더니 설소하를 향해 냉랭히 말했다.
"당신은 이곳을 알겠지?"
설소하가 어찌 이 집을 모르겠는가. 이곳은 바로 그녀와 낭천의 집이었다.
설소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낭천은 벌써 돌아왔나요?"
그녀의 말은 약간 떨리는 것 같았다. 낭천, 그를 만나기도 전에 벌써 흥분하고 있는 것일까?
손소홍은 냉랭히 입을 열었다.
"당신도 들어가서 그를 만나고 싶나요?"
설소하는 뜻밖이라는 듯이 떠듬떠듬 말문을 열었다.
"내...내가...들어가 보아도...될까요?"
"이 집은 원래 당신의 집이에요. 들어가고 싶으면 들어가 보시지요."
설소하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물론 다르지요. 당신이 더 잘 알겠지만 이런 상황을 만든 사람이 누구죠?"
설소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손소홍은 냉랭하게 웃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은 이곳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었지요. 하지만 당신은 그것을 원치 않았어요."
설소하가 나지막이 말을 받았다.
"나는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이미 깨달았어요. 내가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저를 보호해 주었기 때문이에요. 만약에 그가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벌써 피살당했을 거예요."
그녀의 음성은 점점 낮아졌다가 급기야는 눈물까지 흘렸다. 설소하는 말을 멈추고 긴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이었다.
"내가 그와 같이 있을 땐 그 누구도 나를 해치려 들지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누구든지 나를 죽일 수 있어요. 그것도 아주 손쉽게....."
하지만 손소홍은 추호의 동정심도 느끼지 않는지 설소하를 노려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은 그가 지금도 전과 같이 당신을 보호해 줄 줄 아세요?"
설소하는 계속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이제 나에겐 상관없는 일이에요."
이렇게 말한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쳐들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그저 그를 한번 만나보고 싶을 뿐이에요. 그와 만나면 몇 마디 하고는 그냥 떠날 거예요. 이 요구는 그리 무리한 것이 아니니 허락해 주겠지요....."
손소홍의 말투는 여전히 냉담했다.
"우리는 거절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다만 당신의 말을 믿기가 어려울 뿐이에요."
"설사 내가 약속대로 가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들은 나를 쫓을 수는 없어요!"
손소홍은 매우 의아한 표정으로 초류빈을 바라보았다.
초류빈은 그저 담담히 서 있었고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속마음은 몹시 어지러웠다. 초류빈의 가장 커다란 약점은 바로 마음이 약한 것이었다.
여느 때는 일을 그렇게 처리해선 안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마음이 약한 그는 강경하게 밀고 나가지를 못하곤 한다.
그의 이러한 약점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매우 많았고 그들은 이런 그의 약점을 적당히 이용했다.
초류빈도 물론 그런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로서는 그런 것에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는 남이 자신에게 폐를 끼치게는 할 망정 남에게 폐를 끼치지는 못할 사람이었다. 또한 자신이 남에게 속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묵인하기도 한다.
초류빈은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그는 군자라고 해도 좋고 바보라고 해도 상관이 없다.
어찌 되었건 세상에서 초류빈과 같은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든 그 같은 사람을 만나면 절대로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남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한 적이 매우 드물고 피를 흘리게 한 적은 더욱 드물다.
그는 모든 눈물과 피를 자신이 대신해서 흘리기를 원하는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남으로 하여금 왕왕 눈물을 흘리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감동의 눈물이고 감격인 것이다. 손소홍은 내심 탄식을 터뜨렸다.
왜냐하면 그녀는 초류빈이 절대로 거절하진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설소하가 침통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이 마자막일는지도 몰라요. 만약 내가 마지막으로 그를 보기 원했는 데도 당신들이 거절했다는 것을 그가 안다면 모르긴 해도 그는 평생동안 당신들을 증오할 거예요."
손소홍은 내심 코웃음을 치면서 다시 물었다.
"당신은 정말로 그와 몇 마디 나눈 후 즉시 떠날 건가요?"
설소하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이 내 이 마지막 부탁을 들어만 준다면 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예요."
이때, 계속 침묵을 지키며 망설이고 있던 초류빈이 가벼운 탄식을 토하더니 입을 열었다.
"만나게 해 주오. 몇 마디 나눈다고 해서 그 누구에게도 폐가 되지는 않을 것이오."
방 안은 몹시 더웠다. 방 안에는 네 개의 난로가 모두 용광로와 같이 뜨거운 열을 발하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빛으로 인해 온 방 안은 붉은 조명이 흐르고 있었다.
낭천의 얼굴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이글거리는 네 개의 난로 사이에 누워 있었고 몸에는 짧은 바지 이외엔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바지도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서 비오듯 땀을 흘리고 있었는데 호흡이 매우 거칠었다.
낭천은 완전히 허탈상태에 빠져 있었다.
또한 방 한구석에는 뜻밖에도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앉아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담배를 물고 있었다. 노인이 담배를 빨 때마다 그의 입과 코에선 굴뚝처럼 연기가 나왔고 그것은 방 안을 자욱하게 채우고 있었다.
이 노인은 실로 안개와 같은 인물이다. 그는 어디서 나타났다가 어디로 사라지는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어쩌면 가난뱅이 설서선생에 불과한지도 모르고 귀신도 예측할 수 없는 천기노인일지도 모른다.
낭천은 눈을 감고 있어서 방 안에 누가 나타났는지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손소홍은 방 안의 광경을 보고 몹시 의아해 하면서 손노선생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어른께서는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손노선생은 담배를 한 모금 빨고 나더니 나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내 지금 저놈을 찌고 있는 중이지."
"예? 찌고 있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만두도 아니고 또 무슨 생선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찌고 있는 거죠?"
손노선생은 빙긋 소리없이 웃었다.
"내가 지금 그를 찌고 있는 것은 그의 몸 속에 있는 술을 빼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다. 그러면 정신이 맑아지거든....."
여기까지 말한 그는 초류빈을 바라보더니 계속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 섞여 있는 용기를 쪄서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려는 것이네."
"그러면 저도 찔 필요가 있겠군요. 단 아쉬운 것이 있다면 만약 저의 몸에 있는 술을 다 빼낸다면 저는 아마 껍데기만 남게 될 것입니다."
손노선생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당신의 뱃속엔 술 이외에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초류빈은 가벼운 탄식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어쩌면 불가사의한 것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죠."
손노선생은 갑자기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매우 묘한 대답이군. 만약 배 안에 학문이 없다면 어디서 그러한 대답이 나오겠나? 하하하...사실 나는 당신을 한번 쪄보고 싶네. 그리고 조물주께서 당신을 어떻게 만들어냈는지 한번 보고 싶네."
손소홍은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그런 후엔 어떻게 하나요?"
"그런 후엔 천하의 모든 사람들을 다 불러다 놓고 그의 몸 속에 있는 것을 그들의 배에다 채워주고 싶은 생각이다."
"모든 사람에게 조금씩 말인가요?"
"조금이 아니라 많을수록 좋지....."
"그렇게 하면 천하 사람들이 다 그이처럼 되겠네요?"
"천하 사람들이 다 그처럼 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손소홍은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나쁜 점도 있어요."
손노선생이 급히 다그쳤다.
"그 나쁜 점이란 무엇이지?"
손소홍은 갑자기 머리를 숙이더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 두 사람은 옛날 얘기를 하는 습관이 있어서 일단 말을 주고받게 되면 다른 사람들은 감히 끼여들 엄두도 내지 못한다.
한데 손소홍이 대답을 기피하자 그제서야 초류빈에게 말할 기회가 왔다. 그는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선배님께서 만약 천하의 사람들을 모두 저와 같이 만들어 놓으신다면 단 한 종류의 사람들만이 찬성할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초류빈은 빙긋 웃었다.
"술 파는 사람들일 겁니다."
손노선생도 따라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보기엔 단 한 사람만이 나의 이러한 뜻에 반대할 것 같구려."
손소홍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게 누구죠?"
물음을 끝낸 그녀는 금방 몹시 후회를 했다. 이유는 그녀의 할아버지가 누구를 말하려는 것인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손노선생은 손소홍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가볍게 웃었다.
"바로 너다!"
그러자 손소홍은 갑자기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제가...제가 어째서 반대한다는 것인가요?"
"천하의 사람들이 만약 모두 그같이 변한다면 너는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모르고 망설이다가 처녀귀신이 될 게 아니냐!"
손소홍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발을 동동 구르며 몸을 급히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옆에서 타고 있는 난로만큼 붉어졌다.
그녀의 마음도 불같이 타오르고 있을까. 젊은 여인의 불꽃.
언제는 세상 어느 여자나 할 수 있는 당돌한 말을 할 수도 있다는 이 여인이 이렇게 수줍어 할 수가 있을까.
손노선생은 대소를 터뜨리며 다시 담배를 빨기 시작했다.
그는 설소하가 온 것에 대하여 전혀 주위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고 한 번도 바라보지 않았다.
또한 어찌 된 일인지 그는 담뱃대에 불이 꺼진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방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들리는 소리라곤 난로 속에서 타고 있는 소나무 장작이 발하는 소리뿐이었다.
이때 설소하는 낭천 곁으로 다가가 있었다. 낭천을 제외하고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활활 타오르는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붉게 비췄다. 다음 순간 그녀의 얼굴은 다시 창백해졌다.
붉어졌을 땐 수줍어하는 선녀와 같았고 창백할 때는 마치 유령과도 흡사했다. 사람에겐 제각기 두 가지 얼굴이 있는 모양이다.
어느 땐 더할 수 없이 아름답고 또 어느 때는 더할 수 없이 추악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만은 어떻게 변해도 한결같이 아름답기만 했다.
설소하, 그녀가 만약 선자라면 물론 하늘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자이고 만약 유령이라면 지옥에서 가장 아름다운 귀신일 것이다.
하지만 낭천은 이미 결심을 내린 듯이 어떻게 변하든지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가 이 고가에 온 것은 당신에게 몇 마디 드리기 위한 것이에요. 당신이 듣든 안 듣든 그것은 상관없어요."
그러나 낭천은 그녀의 말을 못 들은 듯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데 그의 몸은 어떻게 해서 굳은 것일까.
설소하는 다시 천천히 말했다.
"그날 당신이 매우 실망했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저는 당신이 상관금홍의 손에 죽는 것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어요. 제가 그러한 방법을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당신을 구할 수 없었어요."
낭천은 역시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한데 그는 무엇 때문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것일까.
설소하는 당초 약속대로 몇 마디 하고 돌아가겠다는 것을 지키려는 것인지 낭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데 혼자서 계속 말을 하고 있었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당신에게 용서를 빌러온 것이 아니에요. 구원을 청하려는 것도 아니에요. 또한 어떤 부탁을 하려는 것도 아니에요. 우리의 연분은 이것으로 끝났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어요."
아때, 손소홍이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너무 말이 많아요."
설소하는 처량하게 웃었다.
"그래요. 내가 너무 말이 많았군요."
이렇게 말한 그녀는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그다지 빠르지는 않았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낭천은 아직도 꼼짝 않고 누워 있었고 눈도 뜨지 않았다.
이윽고 설소하가 문 앞에 도착하자 초류빈은 그제서야 겨우 한시름 놓았다.
이제 설소하가 문을 나서기만 하면 낭천은 영원히 그녀를 만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낭천은 그저 설소하만 만나지 않으면 소생할 수 있게 된다.
설소하도 자신이 일단 문만 나서게 되면 이 세상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는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미련이 없는 듯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 그녀의 두 눈동자에선 두려움의 광채가 새어나왔다.
방 안은 비록 대낮처럼 밝았지만 문 밖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비록 별빛은 있었으나 그녀는 그 별을 볼 수가 없었다.
설소하는 원래 눈부신 광채를 좋아한다. 그녀는 찬미와 힐책, 낭비와 행복 그리고 남에게 사랑을 받고 남에게 미움을 받는 것을 좋아했다.
설소하, 그녀는 지금까지 모든 것을 위해서 살아왔다. 만약 그러한 것들이 없는 속에서도 그녀가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무덤 속에서 사는 것과 다름없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밤은 더욱 깊어만 갔다. 설소하는 점점 문과 가까워졌고 그녀의 눈에서 발하고 있던 두려움의 빛은 차츰 원한의 빛으로 바뀌었다. 지금 만약 그녀에게 힘이 있었다면 닥치는 대로 죽일 것이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잠깐만....."
낭천의 이 말 한 마디가 수많은 사람들의 일생을 완전히 뒤바꿔 놓을 줄이야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바로 그 순간, 설소하의 마음도 정반대로 변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원한이 가득찼던 눈은 금방 득의와 자신 그리고 거만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변해 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설소하, 그녀는 여지껏 이렇게 아름다워 본 적이 없었다. 거만과 자신이야말로 여자에게 있어서는 가장 좋은 장식품일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없고 그 어떤 바람이 없는 여자라면 아무리 아름다워도 거기엔 생명이 없고 세상의 뭇남성을 사로잡을 강한 흡인력이 없는 것이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성공을 하는 것이 남자의 가장 좋은 장식품이며 그 남자가 아무리 추하게 생겼다 해도 여자의 눈에는 결코 추악하게 보이지 않는다.
설소하는 발길을 멈추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으며 그저 가볍게 탄식을 뿜어냈다. 그 탄식 속에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고독과 고통이 내포되어 있었다.
설소하의 눈빛을 본 사람이라면 그녀가 이렇게 득의해 하고 있을 때에도 이렇듯 처량한 탄식을 발해낼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 초류빈의 가슴은 덜컹 하고 내려앉았다. 설소하의 그러한 탄식처럼 남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소리는 이 세상에 또 없을 것이다.
설사 가을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나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아니면 달빛 아래서 켜는 비파 소리나, 혹은 봄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퉁소 소리라 해도 그녀의 탄식보다 더 강한 마력을 지니지는 못할 것이다.
초류빈이 낭천을 바라보았다. 그는 낭천이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의 말 한마디만 들어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지금 낭천의 눈엔 설소하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며 설소하의 음성 이외엔 아무것도 듣기 싫었다.
잠시 후, 설소하는 다시 탄식을 터뜨리며 말했다.
"제 말은 모두 끝났어요. 여기에 더 머무를 수가 없어요."
낭천의 눈이 크게 빛났다.
"어째서 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오?"
"저는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약속을 했어요. 당신에게 몇 마디만 하고 즉시 떠나겠다고요."
"당신은 지금 떠날 생각이오?"
설소하는 또 그 마력의 탄식을 뿜어냈다.
"내가 설령 가지 않는다 해도 저는 쫓겨나고 말 거예요."
"누가 당신을 쫓아낸단 말이오?"
순간, 그녀의 두 눈동자에선 다시 강한 광채가 폭사되었다.
낭천은 그녀를 설득시키려는 듯이 힘주어 말했다.
"이것은 당신의 집이 아니오? 당신의 집에 당신이 왔는데 누가 내쫓는단 말이오?"
이때 설소하는 갑자기 몸을 돌려 낭천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는 마치 눈물이 고인 듯이 눈동자가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본 채로 입을 열지 않았다.
순간,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설소하가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이곳이 지금도 저의 집인가요?"
낭천은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당신이 원한다면 이곳은 당신 집이오."
그러자 설소하는 서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설소하는 당장 낭천의 품안으로 달려들고 싶었으나 다음 순간 그녀는 여러 시선들이 자신을 쏘아보고 있음을 의식한 듯 돌연 발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저도 물론 이곳에 있고 싶어요. 하지만 남들이 원치 않아요."
이때 낭천은 갑자기 이를 악물더니 목에 힘줄을 세우며 말했다.
"누가 원치 않는다는 말이오? 누구든지 당신이 이곳에 머물기를 반대한다면 도리어 그 사람이 이곳을 나가야 하오."
낭천은 더 이상 초류빈의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았고 남들이 무엇이라고 자신에 대해 생각을 하던 상관하지 않았다.
손노선생은 낭천의 피 속에 있는 술과 거위를 모두 제거해 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감정까지도 빼낸 것이다.
사람은 몸이 가장 허약할 때 반대로 그 감정은 가장 풍부한 것이다. 낭천은 다시는 설소하와 헤어지고 싶지 않은 듯 강경하게 소리쳤다.
"이곳에서 당신을 내쫓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소. 이곳에선 오직 당신이 남들을 내쫓을 수가 있소."
순간 설소하의 눈에선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선 미소가 피어올랐다.
"저도 당신과 단 둘이 있고 싶어요. 하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당신의 친구니....."
낭천은 무겁게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과 친구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은 내 친구도 될 수 없소."
낭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설소하는 낭천의 품으로 와락 달려들었다. 낭천은 그녀를 으스러져라 꼬옥 껴안았다.
설소하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당신의 입을 통해 그 한마디를 들은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해요. 저는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남들이 나에게 어떠한 말을 하든 저는 더 이상 마음에 두지 않겠어요."
이때, 초류빈은 몸을 돌려 밖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이 방에 남아 있을 아무런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그는 칠흙 같은 어둠 속에 서서 차가운 겨울 바람을 맞고 있었다.
이어 손소홍도 그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초류빈에게 다가서며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는 이렇게 떠날 건가요?"
초류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손소홍은 몹시 안타까운 듯 발을 구르며 말했다.
"저는 그가 그런 사람일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요. 정말...정말 배은망덕하고 친구를 모독하는 인간이군요!"
초류빈도 장탄식을 터뜨리면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낭자는 그를 잘못 알고 있소."
손소홍이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다고요? 그러면 그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요?"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
손소홍이 급히 다그쳤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어째서 그런 일을 해낼 수가 있죠?"
초류빈은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그것은....."
그는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이때 마침 손노선생이 뒤따라 나와 말을 받았다.
"그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자주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손소홍이 다시 물었다.
"어째서 그가 자주성을 잃은 것이지요? 누가 그에게 강요하고 또 그의 마음에 자물쇠를 채웠나요?"
"그에게 강요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는 그 자신이 자진해서 자물쇠에 채워졌다. 사실 그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는 다 자신을 채울 수 있는 자물쇠와 찜통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수시로 자신들로 하여금 채우고 찔 수가 있는 것이다."
손소홍은 입을 삐죽거리면서 내뱉듯 입을 열었다.
"저에겐 그런 것이 없어요."
손노선생은 그녀가 대견스러운 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긋이 웃었다.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직 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소홍은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며 반박하듯 소리쳤다.
"제가 아직 어리다구요? 좋아요. 그럼 저는 어리다 치고 저 사람은 어른인가요?"
손소홍은 초류빈을 통해 손가락질을 하며 계속 소리쳤다.
"저 사람은 물론 어린아이가 아니겠지요. 그럼 그에게도 그 자신을 채울 수 있는 자물쇠가 있다는 것인가요?"
손노선생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있지."
그러자 손소홍은 초류빈을 잔뜩 노려보았다.
"당신은 할아버지의 말을 인정하나요?"
초류빈은 가벼운 탄식을 토해내고는 씁쓸히 웃었다.
"인정하오. 나에게도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니까....."
손노선생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선 아랑곳하지 않고 혹 다른 사람이 욕을 하고 그에게 죄를 범했다고 해도 절대로 마음에 두지 않는다. 남들은 그가 용기까지 잃은 줄 알고 있지....."
초류빈은 더욱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손노선생은 자신의 손녀인 손소홍에게 마치 아득한 옛날 얘기를 하듯이 손짓을 하며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친구에게 위험이 닥치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친구를 구해내는 그런 사람이지. 그래서 친구가 바로 그의 자물쇠며 찜통이다. 그는 그 찜통으로 자신의 생명과 용기를 쪄내는 것이란다."
손소홍은 열심히 이해하려고 애를 썼으나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다시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그럼 호유성과 같은 사람에게도 찜통이 있단 말인가요?"
"물론 있지."
"그럼 그의 찜통은 어떤 것이에요?"
"그것은 바로 금전과 권력이지. 그들은 오직 금전과 권력을 얻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써 가면서 발버둥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가 초류빈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금전을 얻으려는 것도 아니고...또한 권력 때문은 더욱 아니잖아요. 또한 그는 초류빈이 자신에게서 금전이나 권력을 쟁취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잖아요."
"그가 초류빈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의 마음에도 자물쇠가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자물쇠는 어떠한 것인가요?"
손소홍은 손노선생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는 초류빈을 한 번 힐끗 바라보더니 입을 다물고 말았다.
초류빈의 표정은 주위의 어둠보다 더 무겁고 어두웠다. 손소홍은 그제서야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호유성이 초류빈을 증오하며 죽이려 드는 것은 그가 불안을 느꼈고 동시에 질투심이 불타오르기 때문인 것이다.
그는 시종일관 초류빈이 모든 것을 다 거두어들일 것이라고 불안을 느꼈고 초류빈의 위대한 인격과 됨됨이에 대해서 강한 질투를 느낀 것이다.
그것은 호유성 자신이 절대로 초류빈과 같이 위대해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불안과 질투가 바로 그의 자물쇠인 것이다.
이러한 자물쇠는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거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낭천의 자물쇠는 무엇일까.
손노선생은 하늘에 박힌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면서 긴 탄식을 뿜어냈다.
"낭천의 자물쇠는 호유성과는 다르다. 낭천의 자물쇠는 바로 사랑인 것이다."
손소홍의 얼굴에는 아연한 빛이 드리워졌다.
"사랑? 사랑도 자물쇠가 될 수 있나요?"
"물론이지. 그것은 다른 어느 자물쇠보다 크고 더욱 무거운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정말 설소하를 사랑하고 있을까요? 그가 설소하를 사랑하는 것은 설소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물음에 대해저 대답하지 않았다. 이것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손소홍은 막연한 듯 가벼운 한숨을 몰아쉬더니 초류빈을 향하여 말문을 열었다.
"그는 당신의 친구예요. 당신은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그를 구해내야 하고 그의 크고 무거운 자물쇠를 풀어줘야 할 것이 아녜요?"
초류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때 방 안의 불빛이 사라졌다. 이제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암흑 세계가 된 것이다.
초류빈은 갑자기 허리를 구부리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낭천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자물쇠를 풀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낭천의 자물쇠는 그 자신 이외엔 아무도 풀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그를 구할 수 있는 것도 오직 그 자신뿐인 것이다.
난롯불은 이미 꺼졌다. 오직 하나만이 약하게 타고 있었다.
길고 미끈한 한 다리가 침상의 옆으로 늘어졌고 그것은 마치 멋진 조각품과 같았다.
그 세 개의 다리는 서로 엉켜 있었고 몸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비록 난롯불이 다 꺼지고 하나만 타고 있지만 방 안의 공기는 아직 뜨거웠는 데도 불구하고.....
낭천은 격한 흥분에 휘말려 들었고 마치 시위에 걸려 있는 화살과 같았다. 이제 목표물을 정확히 겨냥해서 날려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경험이 있는 사람은 잘 알겠지만 극도로 피로한 후의 긴장은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설소하는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잠깐만...잠깐만....."
하지만 낭천의 대답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그는 더 이상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설소하는 어금니를 굳게 깨문 채 붉게 충혈된 낭천의 눈을 바라보았다.
"당신은...당신은 어째서 저에게 묻지 않는 거예요?"
"뭘 물으라는 거요?"
"제가 상관금홍과 이미 관계를 가졌는지에 대해서 말이에요."
순간, 낭천은 마치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머리가 아찔해 옴을 느끼고 동작을 멈췄다.
설소하는 낭천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전혀 물으려 하지도 않았어요. 그러면 당신은 저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말인가요?"
이때 낭천의 몸 전체는 점점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이마에선 식은땀이 비오듯이 흘러내렸다.
설소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전 당신이 무관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은 저를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그녀의 음성은 매우 처량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교활한 웃음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마치 고양이가 잡은 쥐를 노려보고 있는 것과 같았고, 상관금홍이 설소하를 보고 있을 때와 매우 흡사했다.
낭천은 끓어오르는 흥분을 억누르고 떨리는 음성으로 황급히 말했다.
"당신은 그와 관계가 있었다는 말이오?"
설소하는 가벼운 탄식을 토했다.
"한 마리의 연약한 쥐가 일단 무서운 고양이에게 잡히면 어떻게 된다는 것은 당신도 잘 아실 거예요."
순간 낭천은 기력을 잃고 그자리에 쓰러졌고 분노가 극치에 닿은 듯 더 이상 아무 동작도 하지 않았다.
설소하는 그런 낭천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울음섞인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이렇게 화를 내실 거라는 걸 알고는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어요. 그 말을 하지 않으면 전 가슴이 그만 터져버릴 거예요. 그리고 전 괴로워 창자가 마구 뒤틀렸을 거예요. 저의 진심은, 제 모든 것을 깨끗하게 보존하여 당신에게 모두 바치고 싶었어요. 하지만...흐흑!"
그녀는 그만 말끝을 맺지 못하고 낭천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하지만 저는 지금 당신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요. 그것이 비록 당신을 위한 것이었지만 저는....."
이때 낭천이 커다란 음성으로 외쳤다
"그것이 모두 나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 그래서 나는 당신의 순결을 다시 돌려주겠소."
설소하는 낭천의 가슴으로 더 파고들며 처량하게 말했다.
"순결은 영원히 돌아올 수 없어요."
"있소! 나에게 그 방법이 있단 말이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더니 이를 갈았다.
"상관금홍을 죽이고 당신의 청결한 몸을 뺏아간 놈을 죽이면 당신의 순결은 다시 돌아올 수 있소."
순간, 밖에서 냉랭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낭천과 설소하는 등골이 오싹해 저절로 몸을 움츠렸다.
세찬 바람이 문풍지를 울리며 지나갔다. 이어 한 사람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다면 네가 죽일 사람은 너무나 많다."
다음 순간, 또 다른 한 사람이 냉랭하게 말했다
"저 암캐의 몸은 한 번도 깨끗한 적이 없었지. 그녀를 본 사람이면 모두 그녀와 몸을 맞댔었다. 그것도 알몸으로 말이다. 하하하하....."
또 다른 사람이 말을 받았다.
"네가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한 남자들을 다 죽이려면 매일 여든 명을 죽인다고 해도 평생 다 죽이지 못할 것이다."
방에는 모두 세 개의 창문이 있었다. 그 창문마다에 각각 한 사람의 시커먼 그림자가 어렸다.
그들은 낭천과 설소하에게 위협을 하려는 듯 슬며시 그림자만 비추고 계속 입을 열지 않았다. 낭천과 설소하는 동시에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다음 순간 낭천은 번떡 몸을 일으키더니 벌거벗은 설소하의 몸을 이불로 덮어준 후 베개를 들어 상 위에 등잔을 깨뜨렸다.
"누구냐!"
그는 즉시 밖으로 달려나가려고 했으나 생각을 고치고 다시 돌아와 설소하의 옆으로 와 섰다.
바로 이때, 창 밖의 세 괴한은 동시에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하하....."
그 웃음소리는 어딘지 위장된 것같이 들렸다. 이들 두 남녀는 다시 전신이 섬뜩함을 느꼈다. 이때, 창 밖에서 조금 전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너는 저 암캐의 몸을 우리가 볼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냐?"
"저 암캐는 천하의 남자들에게 모두 몸을 허락하여 이젠 그 남자들을 못보면 안달병이 나는 계집이다."
펑!
괴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세 개의 창문이 동시에 부서졌다. 이어서 세 가닥의 강한 광선이 창 밖으로부터 폭사되어 들어와 설소하의 몸을 비추었다.
이미 창 밖에선 강한 광선뿐이고 사람의 그림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 불빛은 어찌나 강한지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뜰 수 없게 했다.
설소하는 세 줄기의 불빛이 모두 자신을 향하자 눈이 부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급히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두 손을 들긴 했으나 다른 어떤 행동을 취할 수가 없어 그녀는 그저 얼굴만을 가린 채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순간, 어찌 된 일인지 그녀의 몸을 덮었던 이불이 벗겨지며 그녀의 적나라한 알몸이 구석구석까지 드러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불을 끌어올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되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매우 태연했다.
이것을 본 낭천이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어서 이불을 덮으시오!"
하지만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서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또한 그렇게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낭천은 이를 악물고 그녀의 옷을 던져주었다.
"옷을 입으시오!"
그러나 설소하는 돌연 간드러지게 웃었다.
"호호호...호호호...무엇 때문이죠? 나의 이 아름다운 몸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서는 안 되나요?"
캄캄한 방 안의 침대에 누운 채 강한 광선에 알몸을 드러낸 설소하의 몸은 아름답기는커녕 오히려 보는 이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라고 낭천은 생각했다.
낭천은 그 강한 광선을 보면서도 눈앞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설소하!
그녀는 이제 그녀 자신의 알몸을 무기로까지 사용하려는 것이다.
낭천의 두 눈이 암흑 속에서 번쩍 빛났다. 그는 갑자기 옆에 있던 의자를 들어 내리쳤다.
그러자 그 의자는 금방 쓸모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낭천은 그것에서 두 개의 막대기를 집어들더니 무섭게 소리쳤다.
"누구든지 들어오기만 해라. 내 당장 쳐죽이고 말겠다."
이때, 밖에서 세 괴한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다만 이번엔 창가가 아니고 방문 앞이었다.
"흥! 이젠 사람까지 쳐죽이려 하는군."
"지금 저놈에게는 파리 한 마리도 죽일 만한 힘이 없지. 암 그렇구 말구....."
"그가 죽일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사람뿐이다.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이다!"
펑!
마지막 괴한의 말이 끝나면서 다시 커다란 굉음이 터지며 방문이 부서지고 말았다. 이어 그 부서진 문을 통해 세 사람이 들어왔다.
세 명의 황의인, 그들은 모두 삿갓을 쓰고 있었으며 얼굴이 반 이상이나 가려졌다. 그것은 금전방의 부하들이 가진 독특한 표시였다.
맨 앞의 사람은 손에 금사슬을 들고 있다. 이 사슬의 양끝엔 호박만한 둥근 쇳덩어리가 달려 있었다. 또한 두 번째 사람과 나머지 한 명의 손에는 칼과 집이 들려 있었다.
귀두도와 상문검. 이들 세 명은 모두 하나씩의 무기를 들고 있었고 이 살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다는 듯 몹시 날카로운 표정들이었다.
낭천은 흥분을 진정하고 냉정하려 애썼다. 그것은 주린 야수가 갑자기 피비린내를 맡고 도리어 진정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낭천의 반응은 비록 느려지고 체력이 많이 쇠약해졌지만 그의 본능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는 진한 피비린내를 맡은 것이다.
하나 설소하는 아직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무런 일도 당하지 않은 듯 매우 간드러진.....
"이제보니 풍우쌍류성 향송, 향타주이시군요. 마중을 못해 드려서 미안해요."
향송의 수중에 들려있는 류성추는 쉴새없이 흔들리고 있지만 그의 몸은 태산과 같았다.
설소하가 다시 간드러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향타주께선 이번에 저를 죽이려 온 것인가요? 상관금홍의 명령을 받고서요?"
향송은 음침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네 말이 맞다!"
그러자 설소하는 새침한 얼굴로 가벼운 탄식을 뿜어냈다.
"상관금홍이 이렇게 서둘러 제 목숨을 요구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군요."
"필요없는 목숨은 없어지는 것이 좋다!"
설소하의 표정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그녀는 향송의 말을 받아 또박또박 대꾸했다.
"당신은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그는 그런 이유 때문에 나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 무엇 때문이냐?"
"그가 저를 죽이려는 것은 딴 남자를 찾아가 그의 체면을 손상시킬 것이 두렵기 때문이에요."
향송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소를 터뜨렸다.
그러자 그 옆의 황의인이 무겁게 말했다.
"상관방주의 명령은 이유가 없으며 오직 집행뿐이다."
이때, 설소하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낭천을 쏘아보더니 냉랭히 물었다.
"당신은 이제 나를 보호할 힘이 없나요?"
낭천은 세 괴한이 무서워서도, 할 말이 없어서도 아니었으나 결국 입을 열지 않았다.
설소하는 다시 세 괴한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당신들이 이곳을 부수고 들어와 행패를 부리는 것은 저 사람이 더 이상 나를 보호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가요?"
향송이 음침하게 대답했다.
"한번 시험해 보면 알 것이다."
그러자 귀두도를 든 사람이 소리쳤다.
"시험해 볼 필요도 없다."
설소하가 급히 다그쳤다.
"그게 무슨 소리죠?"
귀두도를 든 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그의 앞에서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은 그에게 너를 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더 이상 시험해 볼 필요가 있겠느냐?"
설소하는 싸늘한 코웃음을 쳤다.
"흥! 그래요. 그는 지금 자신조차도 보호하기 힘들어요. 하지만 ....."
그녀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서서히 일어나 벌거벗은 채 침상 위에 우뚝 섰다.
주위 사람들의 눈이 일시에 휘둥그래졌다. 세상에 아무리 천하고 대담한 여자로서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침상 위에 올라 선 설소하는 극히 태연한 자세로 향송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당신도 나를 보호할 힘이 없으세요?"
그녀의 젖가슴은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고 두 다리는 대리석과 같이 매끈했다.
또한 우거진 숲의 장관은 남성들로 하여금 흥분을 억제치 못하게 하기에 충분했고 전신의 피부는 마치 비단결과 같이 고왔다.
설소하, 그녀의 몸은 과연 그녀가 거만을 떨게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순간 낭천의 안면근육에는 경련이 일기 시작했고 식은땀이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설소하는 손을 들어 목에서부터 손이 닿을 수 있는 허벅다리까지 자신의 몸을 한 번 쓰다듬더니 이윽고 음탕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들은 저를 죽이는 게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결국 설소하 그녀는 자신의 교태스런 몸을 무기삼아 앞의 남성들을 흥분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향송은 가벼운 탄식을 내뿜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떤 여인들은 금전을 얻기 위해 몸을 파는데 넌 다르구나."
설소하는 다시 간드러지게 웃으며 대꾸했다.
"호호호...물론 저는 다르지요."
향송이 다시 소리쳤다.
"너는 딴 여자보다 더욱 대담하구나. 너는 너 자신의 몸에 대해서 값을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 너는 네가 기분만 내키면 너의 하인이라도 받아들일 여자다....."
그러자 설소하는 요염하게 웃어젖혔다.
"호호호호...당신은 나에게서 만족을 얻고 싶지 않은가요?"
이렇게 말한 그녀는 서서히 걸음을 옮겨가면서 다시 말했다.
"자! 마음대로 하세요. 내 몸을 한번 대하고 나면 그 누구도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향송은 여전히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설소하는 향송의 가까이로 접근하더니 다짜고짜 그의 목을 끌어안으려고 했다.
바로 그때, 향송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지더니 갑자기 주먹을 들어 설소하의 가슴을 후려쳤다. 설소하는 그에게 가슴을 한 대 맞고는 공중에서 한 바퀴 돌더니 침상 위로 나가떨어졌다.
이때, 향송의 삿갓이 떨어지고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설소하는 침상에 떨어지면서 날카로운 시선으로 급히 향송에게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녀는 안색이 급변하더니 갑자기 크게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상관금홍이 당신들을 시켜 나를 죽이게 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요. 이제보니 당신은 바로 음양인이군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음양인....."
향송은 생생한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봤다. 잠시 후, 향송은 시선을 돌려 낭천을 쳐다보며 힘주어 말했다.
"너는 밖에 나가 있거라."
낭천의 안색이 흑빛으로 변했다.
"뭐라구....."
"그럼 너는 이곳에서 이 더러운 암캐를 보호하겠다는 거냐?"
향송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서 나가라! 내가 이 계집을 죽이는 모습을 너는 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무엇 때문이냐?"
향송의 얼굴에 음험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흐흐흐...만약 네가 옆에서 그 광경을 보면 구역질이 나게 될 것이 분명할 테니 말이다."
낭천은 향송을 노려보며 일순 입을 열지 못하더니 기력을 잃은 듯 고개를 떨구었다.
순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별안간 뚝 끊겼다. 일이 이렇게 급박하게 되었는데 아무리 대담하고 살갗이 두꺼운 여자라고 해도 더 이상 웃음을 띠울 수는 없을 것이리라.
바로 그때, 낭천이 손을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향송을 향해 수중의 나무토막 두 개를 맹렬하게 격출했다.
낭천의 본능은 아직 상실되지 않았다. 그는 가장 좋은 기회를 이용하여 손을 쓴 것이었다.
단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그의 반응이 너무 늦었고 체력이 너무 쇠약해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그 찰나 금광이 번쩍 하더니 유성추가 날아들었다. 이어 나무조각이 나부끼면서 낭천의 수중에 있던 의자 다리는 이미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향송이 냉랭히 웃으며 말했다.
"나는 저 계집을 죽이러 온 것이지 너를 죽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그러니 죽음을 자초하지 말고 어서 나가거라!"
낭천의 양손엔 아직도 부서져 나간 나무조각이 들려져 있었다. 이것은 마치 임종 직전에 있는 사람이 마지막 살아날 희망을 찾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이 조그만 나무조각이 무슨 희망이 될 수 있겠는가.
그는 본시 살인을 하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상대를 죽이고 상대는 그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낭천은 이미 살인을 할 수가 없었다.
상대도 그를 죽이기를 원치 않는다. 이것은 낭천 자신이 상대에게 죽일 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한 것이다.
낭천 자신이 그에게 죽일 가치가 없는 존재로 보이며 그는 자신이 죽든 살든 관심 밖이라는 증거다. 한 사람이 애써서 일어서기란 매우 어렵지만 쓰러지기란 더할 수 없이 용이한 것이다.
낭천은 순간, 자신이 초류빈을 구할 때와 형무명과 싸울 때를 생각했다. 그 당시만 해도 낭천을 경시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지금은 오히려 자신이 구함을 받아야 할 때고 자신이 생각해 봐도 그에겐 아무런 기력이 없는 것이다.
향송의 음침한 음성은 가까우면서도 아득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네가 이곳에 있어도 상관은 없다. 네가 이곳에 있기를 원한다면 내 너에게 진정한 살인이 어떠한 것인지 보여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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