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1일 목요일
51 소이비도 제4권 용호상봉
용호상봉
상관금홍의 눈동자는 줄곧 서문옥의 눈을 주시했다. 서문옥은 원 래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쳐다볼 생각이었으나 상관금홍의 눈길이 일종의 기이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는 듯 도저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그가 만약 한 사람을 노려본다면 상대방도 어쩔 수 없이 그를 쳐다보아야만 한다. 상관금홍의 눈길을 받는다는 것은 실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서문옥은 자신의 몸이 차차 차가워지며 손끝에서부터 살얼음 같은 한류(寒流)가 곧장 심장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상관금홍은 홀연 입을 열었다.
"그 술과 요리 속에 독이 있느냐?" 서문옥은 억지로 웃었다.
"어찌 독이 있겠습니까?" 상관금홍은 여전히 그의 눈을 주시하며 말을 받았다.
"정녕 독이 없다면 왜 먹지 않느냐?" 서문옥은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대답했다.
"저도 역시 배가 고프지 않기 때문에 감히 방주님의 술과 요리를 낭비할 수 없습니다." 상관금홍의 질문은 즉시 그의 말끝을 이었다.
"정말 배가 고프지 않느냐?" 서문옥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듬거렸다.
"저...정말입니다." 상관금홍은 그의 가슴에 못을 박듯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말했다.
"낭비는 용서할 수 있지만 거짓말은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서문옥은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꾹 참았다.
"그까짓 일로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상관금홍이 냉랭하게 잘라 말했다.
"거짓말은 어디까지나 거짓말이다. 크고 작은 일에 상관없이." 서문옥의 음성도 단호하게 변했다.
"배가 고프지 않기 때문에 배가 고프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점심을 먹을 때가 훨씬 지났는 데도 어째서 배가 고프지 않다는 거냐?" 서문옥의 말투는 아직도 공손한 편이지만 미간에 짜증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아침을 먹은 게 아직도 소화가 안 된 모양입니다." 상관금홍의 입가에 한 가닥의 음산한 웃음이 스쳐갔다.
"너는 아침 식사를 성 안 남쪽에 있는 규원관(奎元館)에서 먹지 않았느냐?" 상관금홍의 입에선 책을 읽듯 말이 술술 새어나왔다.
"너는 그곳에서 새우튀김 한 접시, 전복죽 한 그릇 그리고 계사면(鷄絲面) 한 그릇을 주문해 새우튀김을 다섯 조각 먹고 전복죽을 두 숟갈 뜨고 계사면을 반 그릇 정도 먹지 않았느냐?" 그 말을 들은 서문옥의 안색이 이내 변했다.
"방주께서 나의 일거일동을 그렇게도 상세하게 조사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상관금홍은 태연하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
"네가 먹은 음식이 정녕 아직 소화가 안 되었다면 아직도 뱃속에 남아 있을 게 분명하지 않느냐?" 서문옥은 상대방이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지만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아직 남아 있을 겁니다." 그러자 상관금홍의 눈동자에 금시 짙은 살기가 감돌았다.
"좋다. 그의 배를 찢어 아직도 음식이 남아 있는가를 확인해라!" 주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상관금홍이 고의로 서문옥에게 시비를 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사태가 이렇게 심각하게 변하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해 한결같이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상관금홍의 말은 즉 추상같은 명령이다. 그의 명령이 떨어진 이상 어떠한 일이 있어도 실천에 옮겨야 했다.
서문옥의 안색은 더욱 잿빛으로 변했다.
"방주께선 혹시 농담을 하시는 게 아닙니까?" 상관금홍은 아예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때 네 명의 황삼인이 앞으로 다가왔다.
서문옥은 본능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켜 검을 뽑았다. 아주 민첩한 동작이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비록 그가 검을 어떻게 뽑았는지 보지 못했지만 그의 검법이 상당한 지경에 도달해 있음을 짐작했다. 그런데, 그가 갓 검을 뽑자 돌연 예리한 파공음이 들리며 상관금홍 앞에 놓여 있던 젖가락이 어느 사이에 날아가서 문옥의 양 어깨 견정혈(肩井血)에 꽂혔다.
강호 사람들은 상관금홍의 무공이 고심막측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가 출수하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가 출수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의 손은 아예 움직였다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젓가락은 어느 새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날아갔고 서문옥은 나직한 신음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상관금홍의 입에서 다시 명령이 떨어졌다.
"끌고 나가 자세히 보아라!"
황삼 대한들은 즉시 서문옥을 양쪽에서 부축해 일으켰다.
서문옥은 입술을 옴지락거렸지만 너무나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상관금홍의 표정은 다시 잠잠하게 변했다.
"그가 먹은 음식이 아직도 뱃속에 남아 있다면 내가 그의 목숨을 변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는 죽어 마땅하다." 황삼인들은 지체하지 않고 서문옥을 끌고 나갔다.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 감히 움직이는 자도 없었다. 모두들 바늘 방석에 앉은 듯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대청 밖에서 일성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황삼인이 걸어 들어와 상관금홍에게 공손히 몸을 숙였다.
"이미 조사해 보았습니다."
"음식은 아직 남아 있더냐?"
"없습니다. 그의 배는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상관금홍은 손뼉을 한 번 쳤다.
"좋다." 하고 말하더니 독사같은 눈빛으로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일일이 훑어보았다.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저 모양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알겠소?" 모두들 있는 힘을 다해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금홍은 다시 그들에게 물었다.
"여러분, 지금도 배고프지 않은 자가 있소?" 그러자 이번엔 모두들 앞을 다투어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입속으로 쑤셔 넣었다. 하지만 치아가 떨리기 때문에 씹지는 못하고 단지 울상이 되어 입 안에 있는 음식을 그냥 꿀꺽 삼켰다.
바로 그때였다. 한 사람이 느닷없이 뛰쳐 들어와 곧 쓰러질 듯한 자세로 문 옆에 기대섰다. 그 사람은 눈동자의 초점을 일은 채 망연히 주위를 휘둘러보며 악을 쓰듯 외쳤다.
"빨간 옷을 입은 자...빨간 옷을 입은 자는 어디 있느냐?" 다름 아닌 낭천이었다. 호유성은 대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낭천의 시선은 그제야 그에게 집중되었다.
"네놈이 빨간 옷을....."그의 눈동자는 비록 초점 을 잃고 곧 쓰러질 듯 꼴이 비참했지만 손에는 검이 단단히 쥐어져 있었다. 그의 손에 검이 쥐어져 있는 한 충분히 호유성으로 하여금 간담이 싸늘해지게 만들 수 있었다.
호유성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낭천은 지체하지 않고 그를 향해 덮쳐갔다. 검광이 불안스레 번뜩이자 그의 걸음도 검빛같이 불안정했다.
호유성은 그의 눈빛에 질겁을 하며 몸을 돌려 도망쳤다.
낭천은 비칠거리며 그를 쫓아갔다. 그가 앞으로 다가오기도 전에 이미 술냄새가 물씬 풍겨 왔다.
호유성의 안색은 원래 크게 변해 있었지만 이때 그는 눈동자를 갑자기 사르르 굴리더니 살그머니 발을 내밀어 호유성이 원래 앉아 있던 의자를 끌어 낭천의 앞길을 막았다.
낭천은 그것을 전혀 보지 못하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의자에 걸려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러자 손에 쥐고 있던 검도 한 쪽으로 날아갔다.
그는 뜻밖에도 검을 쓸 힘조차 잃고 있는 것이다.
호유성은 눈빛을 번쩍 빛내며 몸을 숙여 검을 집는 것과 동시 낭천의 목덜미를 겨냥했다. 하지만 그는 곧장 검을 내찌르지 못했다. 상관금홍의 안색을 보았기 때문이다.
상관금홍은 어느 때보다 음흉한 안색을 하고 돌부처처럼 자리에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움직이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은 감히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호유성은 얼른 자세를 가다듬고 웃음을 보였다.
"이 자는 형님 앞에서 감히 무례한 행동을 했으니 백 번 죽어 마땅할 줄 압니다." 상관금홍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문 밖에 개 한 마리가 있는데 너는 그것을 보았느냐?" 뜻하지 않은 질문에 호유성은 멍해졌다.
"네, 보았습니다....."
"그 자를 죽이려면 차라리 밖에 있는 개를 죽이는 게 나을 것이다." 호유성은 다시 멍해졌으나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형님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이런 사람은 확실히 개만도 못합니다." 상관금홍은 시선을 그의 눈동자에 못박으며 냉랭하게 물었다.
"그럼 너는 어떠냐?" 일순 호유성의 웃음이 얼어붙었다.
"저....." 상관금홍은 냉혹하게 그의 말을 이었다.
"그는 개만도 못하지만 너는 그보다도 못한 인간이다. 개가 그를 보아도 아마 도망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호유성은 정말 넋을 잃고 말았다.
상관금홍은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한 번 훑어보더니 퉁명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여러분들 중에 개와 결의형제를 맺고 싶은 자가 있소?" 모두들 즉시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없습니다."
"저들마저도 원하지 않는 일을 어찌 내가....." 상관금홍은 코웃음을 치며 다시 호유성에게 시선을 던졌다.
"내 생각 같아선 너는 저 개와 잘 어울릴 것 같다. 그러니까 개와 결의형제를 맺도록 해라!" 그가 입 밖에 내뱉은 말은 즉 명령이다.
하지만 호유성이 제아무리 파렴치한 사람이라 해도 어찌 그 모독을 참을 수 있겠는가. 그는 이마에서 구슬 같은 땀방울을 비오듯 쏟았다.
"다...당신이....." 그때 호천강이 갑자기 앞으로 걸어와 호유성의 손에서 검을 빼앗더니 천천히 말했다.
"이번 일은 애당초 후배가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일이 엉뚱하게 되어 아버님께 모독을 안겨 주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후배는 부친의 치욕을 풀어 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서 목숨을 내던져야 마땅하겠지만 어머님이 아직 생존해 계셔 효도를 다 하지 못했기 때문에 감히 목숨을 경시할 수 없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갑자기 검을 번뜩여 자신의 왼쪽 손을 잘라 버렸다. 그것을 지켜보던 중인은 일제히 아연실색을 금치 못했다.
호천강은 아픔으로 인해 전신에 심한 경련이 일었으나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리고는 끊어진 손을 상관금홍에게 내밀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방주님, 이 정도면 만족하겠습니까?" 상관금홍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 손으로 너희 부자의 생명을 대신할 작정이냐?" 호천강은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외쳤다.
"후배는....." 그는 말을 채 뱉지도 못하고 끝내 고통을 못 이겨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상관금홍의 입에선 다시 얼음장 같은 음성이 새어나왔다.
"네 아들의 과감한 행동을 생각해 이번만큼은 너를 용서해 주겠다. 그러니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고 당장 꺼져라!" 낭천은 드디어 일어섰다. 그는 조금 전에 일어났던 일을 깨끗이 잊은 듯 여전히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탁상 위에 있는 술병을 발견하고 미친 듯이 뛰어가 술병을 잡았다. 마치 술병이 자기의 생명인 듯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술병을 꼭 쥐었다.
그러자, 쨍! 하는 소리가 들리며 술병이 박살났다. 술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낭천의 손은 여전히 술병의 파편을 움켜쥐고 있었지만 떨리고 있었다.
상관금홍의 음성은 다시 대청 안에 찬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있는 술은 사람이 마시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마실 자격이 없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한 조각의 은자를 멀리 집어던지며 다시 말했다.
"술을 마시고 싶거든 혼자 나가서 사 먹어라!" 낭천은 고개를 들어 망연히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걸어갔다. 은자는 바로 그의 발밑에 있었다. 그는 백치처럼 한동안 멍청하니 은자를 내려다보더니 끝내 천천히 허리를 구부렸다.
이 순간 상관금홍의 눈동자에 한 가닥의 악의에 찬 웃음이 번뜩였다. 그가 웃을 때는 웃지 않을 때보다 더욱 잔혹해 보였다.
느닷없이 한 줄기의 싸늘한 광채가 번뜩인 것은 바로 그 찰나였다. 한 자루의 비수가 날아와 땅에 있는 은자를 보기 좋게 꽂아 버렸다.
낭천은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며 구부렸던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의 표정이 별안간 굳어졌다.
어느 새 나타났는지 한 사람이 문 앞에 서서 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여기에 있는 술은 밖에서 사 먹는 술보다 맛이 좋으니 자네가 마시겠다면 내가 한 잔 따라 주겠네." 탁상 위에는 또 하나의 술병이 놓여져 있었다. 졸지에 나타난 자는 말을 끝내는 즉시 앞으로 걸어가 한 잔의 술을 따르더니 낭천에게 내밀었다.
아무도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심지어 모든 사람의 호흡마저 전부 정지된 것 같았다.
상관금홍도 역시 입을 열지 않은 것은 실로 뜻밖의 일이었다. 그는 단지 새로 나타난 사람을 조용히 주시할 뿐이었다. 이 사람은 키가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일신에 남루한 옷을 입고 초췌해 보이는 중년인이었다.
그러나 상관금홍은 그가 술을 따라 술잔을 낭천에게 내미는 것을뻔히 지켜보면서도 비단 제지하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 아무런 표정도 나타내지 않았다. 상관금홍은 분명히 낭천에게 여기에 있는 술을 마실 자격이 없다고 했다.
그가 한 번 입 밖에 낸 말은 아무도 거역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로 그의 명령도 효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술잔은 이미 낭천의 손에 전해졌다.
낭천은 공허한 눈동자로 한참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두 줄기의 뜨거운 눈물이 양볼을 타고 흘러내려 술잔 속에 떨어졌다. 항상 피보다도 더 귀중하게 여기던 그의 눈물이 아닌가. 피를 흘리는 한이 있어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낭천, 그러한 낭천이 눈물을 흘렸다.
중년인의 눈시울도 붉어져 가는 것을 역력히 볼 수가 있었다. 눈동자는 눈물로 가득차 있지만 그의 입가엔 한 가닥의 미소가 얼룩져 있었다.
그 미소, 초췌하고 극히 평범해 보이는 중년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자 금시 그의 몸에서 휘황찬란한 광채가 발산되는 듯 보는 이로 하여금 판이하게 다른 인식을 갖게 했다.
한 사람이 미소를 짓는 힘이 이다지도 위대할 줄은 미처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도 역시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미소와 가득 고인 눈물이 무엇을 말하는지 형용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는 술잔을 힘껏 땅에 팽개치고 무엇에 튕기듯 밖으로 뛰쳐나갔다.
초췌한 중년인이 막 그의 뒤를 따라 나가려는데 홀연 상관금홍의 음성이 들렸다.
"잠깐만!" 중년인은 약간 멈칫하더니 드디어 걸음을 멈추었다.
상관금홍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녕 떠나갈 바엔 애당초 오지 말아야 했을 것이고 이미 온 이상 구태여 떠날 필요가 있겠소?" 칼날같이 사람의 심장을 파고들면서도 상관금홍에겐 흔히 찾아보기 드문 정중한 말투였다. 초췌한 중년인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담담히 웃었다
"그렇소.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구태여 떠날 필요는 없을 것 같소!" 그는 시종 상관금홍에게서 눈길을 돌리지 않았으나 이때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눈길이 드디어 상관금홍의 눈길과 마주쳤다.
불꽃!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접촉되자 일련의 불꽃이 튕기는 것 같았다. 그 일련의 불꽃은 비록 육안으로써는 볼 수 없지만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은 마음속으로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의 심장에 진동이 일기 시작했다.
상관금홍의 눈동자 속엔 흡사 한 쌍의 악마의 손이 숨겨져 있는 듯 모든 사람의 영혼을 낚아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반면 초췌한 중년인의 눈동자는 광활무변한 망망대해나 푸르디푸른 창공 같아 세상의 모든 요마잡귀를 전부 용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상관금홍의 눈동자가 만약 한 자루의 검이라면 이 자의 눈은 칼집이라 할 수 있었다. 이 한 쌍의 눈을 보고 나서는 그가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미 그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상관금홍은 한마디 한마디 뚜렷하게 내뱉었다.
"당신의 비도는?" 중년인이 살짝 손목을 젖히자 한 자루의 비수가 이미 손끝에 매달려 있었다.
비도탈명!
이 한 자루의 비도를 보자 모두들 비로소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초류빈은 끝내 나타났다.
손, 그의 손은 이상하리만치 온정(穩定)해 흡사 공기 속에 응결돼 있는 것 같았다. 손가락은 길고 힘있어 보였다. 그리고 손톱은 짧게 가다듬어져 있었다. 그 손은 칼을 잡는 것보다 옷을 잡는 게 더 어울릴 것이다. 그러나 그 손은 무림에서 가장 가치 있고 가장 무서운 손이라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었다.
칼, 원래는 극히 평범한 비수다. 한데, 그 손에 쥐어지자 평범한 칼은 금방 천하에서 으뜸가는 비도로 변모했다.
상관금홍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어슬렁어슬렁 초류빈 앞으로 다가갔다.
지금 그들의 간격은 불과 이 장(二丈), 그러나 상관금홍의 손은 여전히 소매 속에 있었다. 그의 용봉쌍환(龍鳳雙環)은 이십 년 전에 이미 천하를 진동시켰다. 그리고 병기보에도 두 번째로 배열돼 초류빈의 비도보다도 인정을 받았다.
근 이십 년 동안 그가 쌍환을 발출하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단지 그의 쌍환이 무섭다는 것만 알 뿐 그 무서운 점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지금 그의 쌍환은 수중에 쥐어져 있을까?
모든 사람의 눈동자는 초류빈의 비도에서 상관금홍의 소매로 옮겨졌다. 상관금홍은 드디어 소매 속에서 손을 꺼냈다. 뜻밖에도 그는 빈손이었다.
이번엔 초류빈이 질문을 던졌다.
"당신의 쌍환은?" 상관금홍의 음성은 차분했다.
"내 몸에 지니고 있소."
"어디에?"
"마음속에."
"마음속?" 상관금홍의 음성은 표정과 같이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내 수중엔 비록 환이 없지만 내 마음속에 환이 있소."
그 말을 들은 초류빈의 눈동자가 돌연 가늘게 감아졌다.
보이지 않는 환, 보이지 않기에 수시로 전개할 수 있고 어디든지 겨냥할 수 있었다. 그의 쌍환은 이처럼 이미 상대방의 목줄기를 겨냥하고 있을 것이며 어쩌면 이미 상대방의 심장을 향해 날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쌍환에 격중되는 사람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쌍환의 존재를 보지 못할 것이다. 손에는 무기가 없지만 마음속에 무기가 있다. 그것은 즉 무학의 절정이며 선불(仙佛)의 경지를 터득했다는 증거다. 다른 사람은 그 진리를 몰라도 초류빈은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심지어 실망감까지 느낄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물건을 직접 보아야지만 그것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기 마련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물건은 사실 보이는 물건보다 훨씬 값어치가 나간다는 사실을 외면하기 일쑤다.
이 순간 상관금홍의 눈동자에서 발해지는 광휘는 초류빈을 압도하는 듯싶었다.
상관금홍은 강조를 하듯 다시 말했다.
"칠 년 전에 내 손에선 이미 쌍환이 사라졌소." 초류빈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탄할 만한 일이오." 상관금홍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당신은 내 뜻을 알고 있소?" 초류빈의 가늘게 감았던 두 눈동자가 다시 확대되었다.
"묘(妙)의 조화(造化)라고나 할까. 환이 없으니 그 자신이 없을 것이며 흔적을 찾을 수가 없으니 모든 공간에 그는 존재하지 않겠소?" 이번엔 상관금홍이 고개를 고덕였다.
"과연 그 뜻을 알고 있구려." 초류빈은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안다는 것은 모르기 때문에 아는 것이고 모른다는 것은 즉, 알기 때문에 모르는 게 아니겠소?" 이 두 사람의 대화는 불문(佛門)의 고승이 서로 선의(禪意)를 교환하는 것 같았다. 그들 당사자 이외에 그 뜻을 아는 자는 없었다. 뜻을 모르기 때문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더욱 공포에 휩싸여 갔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에서 일어나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담벽에 붙어섰다.
상관금홍은 초류빈을 응시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초류빈은 과연 초류빈이구려." 초류빈은 히죽 웃었다.
"상관금홍은 또한 어찌 상관금홍이 아니겠소?"
"당신은 본디 삼 대째 탐화랑에 당선된 고귀하고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명문의 자손이거늘 어째서 이 죄악으로 가득찬 더러운 강호에 발을 들여놓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소." 초류빈은 빙긋 웃으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것은 내가 이곳에 오고 싶어 왔고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는 것같이 내 임의에 따른 것이오." 상관금홍의 눈빛이 유난히 빛났다.
"이곳에서 떠날 수 있을 것 같소?" 초류빈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떠나고 싶지 않고 이젠 또한 떠날 수 없는 것이겠죠." 상관금홍은 어금니를 깨물며 잇사이로 말을 내뱉었다.
"좋소. 그럼 출초(出招)하시오." 초류빈의 음성은 호수처럼 잔잔했다.
"이미 초식을 전개했소." 그 말을 들은 상관금홍은 자신도 모르게 다그치듯이 물었다.
"그게 어디에 있소." 초류빈의 입가엔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마음속에 있소. 내 비수엔 비록 초식이 전개되지 않았지만 마음속의 초식은 이미 전개되었소." 상관금홍의 눈동자도 역시 가늘게 감아졌다. 상관금홍의 쌍환이 어디에 있는지 본 사람은 없었다. 초류빈이 전개한 초식이 무엇인지 아는 자도 역시 없었다.
그러나 쌍환은 엄연히 있고 초식은 분명히 전개되었다. 모든 사람은 그것의 존재를 의식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비록 조용히 제자리에 서 있지만 이미 생사를 결정짓는 극단적인 상태로 돌입한 게 분명했다.
죽느냐 죽이느냐는 단 머리카락 하나도 용납할 수 없는 공간에서 결정될 일이다.
모두들 담구석으로 물러섰지만 무시무시한 살기는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의 마음은 오그라들고 있었다.
한편, 낭천은 계속 광분(狂奔)하고 있었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자신도 모르며 무엇을 해야 되는지도 전혀 몰랐다.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에 빠진 듯 그의 피는 들끓고 있었다.
그는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로, 언제까지 도망해야 한단 말인가? 끝없는 도망이다. 그가 도피하는 시각에 초류빈과 상관금홍은 여전히 대치하고 있었다. 입을 여는 자도 없었고 어떤 동작을 취하는 자도 없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단지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의식하고 식은땀이 땀구멍을 통해 한 방울 한 방울 스며나오는 것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 중에 어느 누구라도 일단 동작을 취한다면 그것은 필시 경천동지할 동작이리라. 도화선(導火線)은 이미 점화되었다. 생사를 판가름하는 결전(決戰)은 수시로 폭발할 수 있으며 어느 순간에도 폭발될 수가 있다. 어쩌면 바로 그 폭발되는 순간에 종식(終息) 될지도 모른다.
바로 그 찰나적인 순간에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필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질 자는 과연 누구일까? 비도탈명,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다.
이십 년 동안 초류빈의 비도를 피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상관금홍의 쌍환은 보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더욱 무서운 무기가 아닐까?
두 사람의 태도는 모두 침착했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신감이 충만해 있는 것 같았다. 이 세상에서 어느 누가 이 일전의 결과를 자신있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낭천은 쓰러졌다. 땅에 쓰러진 그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들어 망연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자신도 자기가 어디까지 달려왔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이곳은 작은 뜨락이었다. 뜨락 한복판엔 한 그루의 버드나무가 외로이 서서 가을바람에 탄식을 하고 있었다. 정면에 보이는 창문엔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 문이 빠꼼히 열려져 있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곳은 바로 낭천이 어젯밤에 미친 듯이 취한 곳이다. 자기가 어떻게 해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낭천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빠꼼히 열린 문 틈에선 달덩어리같이 예쁘장한 얼굴이 살짝 내밀어져 요염한 눈빛으로 낭천을 한 번 보고 나선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그 달덩어리, 바로 어젯밤 낭천에게 갖은 아양을 떨며 술을 권하던 얼굴이었다.
낭천은 벌떡 일어나 앞으로 달려갔다.
쿵!
뜻밖에도 문은 닫혀져 있었다. 그리고 안으로 잠가져 있었다.
불끈 쥔 주먹으로 거칠게 문을 두드렸다. 한참 후에야 안에서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누구시죠?" 낭천은 아무 감정없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나다." 문 안에서 즉시 반문이 왔다.
"나라뇨?"
"어젯밤에 이곳에서 술을 마신 사람이다!" 그러자 문 안에서 일련의 은방울 같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호호호...미친 사람이군!"
"호호호...그의 말투를 들어보니 마치 이곳의 주인이 된 것 같은데...호호호."
"어디서 굴러온 녀석이래?"
"호호호...글쎄, 어디서 굴러왔는지 누가 알겠어?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닌가 봐....." 모두들 귀에 익은 음성이었다. 어젯밤 그 음성들은 낭천에게 무수한 밀어를 속삭여 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전부 변하다니.....
낭천은 발끈 울화가 치밀어 문을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일곱 쌍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일제히 그를 노려보았다. 어젯밤 일곱 쌍의 눈동자는 솜사탕처럼 달콤했고 가을 호수처럼 맑았다. 그런데 지금, 솜사탕은 쓰디쓴 독약으로 변하고 호수 물도 얼음이 얼었다.
비칠거리며 앞으로 달려가 술병을 끌어안았다. 빈 술병이었다.
"술은 어디 있느냐?"
"없어요."
"당장 가서 갖고 와라!"
"갖고 오라뇨? 여기가 술 파는 곳인가요?" 낭천은 가장 가까이 서 있는 계집에게 덮쳐가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외쳤다.
"너희들은 나를 몰라보겠느냐." 아름다운 눈은 냉랭히 그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당신은 나를 아시나요? 내가 누구인지 아느냔 말이에요?" 낭천은 손가락 하나하나를 그녀의 멱살에서 풀며 귀신한테 홀린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는...어제 그곳이 아니란 말이냐?" 한 여인이 담담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장소는 어젯밤과 같지만 당신은 어젯밤의 당신이 아니에요." 달콤한 음성, 더욱 귀에 익은 것이다.
낭천의 전신이 돌연 극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눈을 꼭 감았다. 그녀를 보는 것이 싫었다. 게다가 볼 용기도 없었다.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그녀,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해도 아깝지 않은 그녀, 그러면서도 단지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흡족하고 즐거웠던 그 여자건만 지금 그는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예전의 그녀건만 그는 확실히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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