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소이비도 제2권 일대의 영웅
제2권 일대의 영웅
일대의 영웅
손님들은 서로 웃으며 돈을 내놓았다.
식당의 점원은 벌써 쟁반을 들고 노인 옆에 선 채 돈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 노선생은 그제야 하품을 하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일의 시작은 흥운장에서부터다."
긴 머리 낭자가 다시 얼른 말을 가로챘다.
"흥운장이라고요? 혹시 그곳은 호유성, 호나리께서 계시는 곳이 아닙니까? 듣기론 그곳은 집이 굉장히 좋고 또 경치가 아름다우며 양쪽에 강이 자리잡고 있어 정말 좋은 곳이라 하더군요."
손 노선생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 좋은 집은 원래 초류빈이 호유성에게 준 것이다. 두 사람은 생사를 같이하기로 한 형제이며 호부인은 또 초탐화의 무슨 친척이 되는 사람이라고....."
조부와 손녀 두 사람은 주거니받거니 하며 전날 흥운장에서 일어난 일을 대충 얘기하는 것이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초류빈이 어떻게 해서 호천강을 다치게 했으며 또 어떻게 해서 매복하고 있던 사람에게 붙잡혔는가 하는 것이었다. 얘기를 듣는 사람들은 모두가 아쉬운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또 설소하의 이야기도 나왔다.
즉 그녀가 어떻게 납치를 당했고 청년 낭천이 번개 같은 검으로 어떻게 해서 설소하를 구했는가 하는 얘기였다.
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손 노선생의 눈에서 전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그리고는 우연인지 고의인지 줄곧 낭천과 설소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긴 머리 낭자의 눈도 그들이 있는 곳으로 자주 시선이 옮겨졌다.
낭천은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혹시 우리가 누구라는 것을 알고 우리더러 일부러 들으라고 하는 얘기가 아닐까?'
이때 긴 머리 낭자가 다시 맑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매화도는 이미 그...비검객이란 사람에게 살해를 당했다는 말인가요?"
손 노선생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조대야(趙大爺)와 전(田)대야는 그 죽은 사람이 매화도가 아니라 초류빈이 진짜 매화도라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누가 진짜 매화도인가요?"
"그 누구도 진짜 매화도를 보지 못했으니 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리가 없지. 그러나 조대야와 전대야가 신분을 내걸고 맹세코 초류빈이 매화도라 하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그래서 심미 대사가 그를 데리고 가게 되었다....."
그는 담배를 한 모금 맛있게 빨아대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나 소림사에 도착했을 때는 초탐화가 심미 대사를 모시고 돌아가게 되었다."
이 말은 설소하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도록 했다.
낭천은 그녀보다 더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길에서 무슨 변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긴 머리 낭자가 질문을 해주었다.
손 노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기를
"알고보니 그를 소림사로 압송해 가던 심미 대사와 전칠, 그리고 소림 제자 네 사람은 그만 도중에서 묘강 극락동의 독수를 당했다. 심미 대사는 중독이 된 후 초류빈을 석방해 주었다. 그러나 초류빈은 그의 중독이 심한 것을 보고 소림사에 해독약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소림사로 데리고 갔단다."
머리가 긴 낭자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면서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초탐화는 정말 일대의 영웅이시군요. 만약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어찌 그를 구할 수 있었겠어요?"
"그렇지. 그러나 소림사의 승려들은 그를 고맙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를 죽이려 하고 있다."
"왜 그런가요?"
"이 모든 사실은 초탐화가 직접 얘기한 것이다. 그러나 소림사의 승려들은 그의 말이라면 하나도 믿지 않으니까."
"하지만...그건 심미 대사께서 인정하시면 되잖아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심미 대사는 소림사에 도착하자마자 돌아가셨단다. 심미 대사 외에는 이 세상에 그 사실의 진상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단다."
손 노선생이 여기까지 말하자 사방의 객석에서는 모두 이구동성으로 한탄을 했다.
낭천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럼 초탐화는 이미 소림사의 독수를 당했습니까?"
손 노선생은 낭천을 힐끔 흘겨보더니 천천히 입을 떼었다.
"소림사가 비록 무림에 군림하고 있고 문하 제자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 뛰어난 일류고수들이지만 초탐화를 죽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머리가 긴 낭자도 낭천을 날카롭게 흘겨보고는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잘 하는 사람이라도 혼자서 그 많은 소림사의 제자들을 어찌 당해낼 수 있겠어요?"
손 노선생의 표정은 이때 엄숙하게 굳어져 있었다.
"설혹 소림사에 팔백 명의 제자가 있다 해도 누가 감히 먼저 덤벼들겠느냐? 또 누가 먼저 초탐화의 첫 칼을 맞을 용기가 있겠느냐?"
긴 머리의 낭자는 손뻑을 치며 흥미진진한 듯이 말했다.
"맞았어요. 비도탈명은 헛소문이 아니랍니다. 그러니 소림사에 설사 팔백 명의 제자가 있다고 해도 그를 당할 수는 없을 거예요. 아마 그분은 지금쯤 멀리 달아나고 있을 거예요."
손 노선생은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는 가지 않았다."
긴 머리 낭자는 아연 놀란 신색을 만면에 떠올렸다.
"왜요?"
손 노선생은 마치 남의 일처럼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림사의 제자들이 그를 당할 수는 없지만 그 소림 제자들의 포위를 뚫고 나갈 수는 없지. 더구나 아직은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갈 수 있겠느냐?"
머리가 긴 낭자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양손을 비벼댔다.
"갈 수도 없고 싸울 수도 없는데 어떻게 하죠?"
손 노선생은 날카롭게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만약 그가 팔백 명 소림 제자의 포위 속에서 비도를 한 번 날렸다 하면 꼼짝없이 죽게 된다. 그건 소림의 제자들이 단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칼을 무서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의 비도가 제아무리 강하고 위력이 있다 해도 팔백 명의 제자를 어찌 다 죽일 수 있겠느냐?"
긴 머리의 낭자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버텨도 안 되잖아요? 언젠가는 쓰러질 때가 있으니까요."
확실히 그건 낭천이 염려한 문제였으며 그는 지금 자신이 초류빈과 같은 상황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는 궁극적으로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다시 손 노선생의 음성이 그의 귓가로 울려왔다.
"그때 그들이 얘기하던 장소는 바로 심미 대사께서 기거하시던 선방(禪房) 옆이었다. 쌍방은 서로 의견충돌이 되자 초류빈은 틈을 타서 그 선방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그러자 머리가 긴 낭자는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되면 독 안에 든 쥐가 아니에요?"
"소림의 제자는 그가 바깥으로 뚫고 나가리라 생각했지 안으로 뛰어들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선방으로 뛰어들고 난 뒤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후회라고요? 초류빈이 자진해서 독 안으로 뛰어들었는데 그들이무엇 때문에 후회를 하죠?"
"선방 안에는 심미 대사의 유해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소림사의 보물로 대대로 내려오는 경전(經典)이 있고 또 암기가 수두룩한데 어찌 함부로 접근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그들이 선방 밖에서 닷새만 지켜도 초류빈은 굶어 죽거나 아니면 목이 말라서라도 죽을 게 아니에요?"
"소림의 제자도 그런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들은 다섯째 사숙인 심수(心樹) 대사가 그 선방에 남아 있다가 초탐화에게 혈도를 찍혀 버렸다. 그런데 그들이 어찌 그들의 사숙마저 함께 굶겨 죽일 수 있겠느냐?"
"당연히 그렇게 할 수야 없죠."
"맞았다. 그래서 그들은 음식과 물을 들여보내 줄 수밖에 없다. 심수가 굶어 죽지 않으면 초류빈도 죽을 수가 없다."
"소림사는 무림의 성지(聖地)로 불려오면서 수백 년 동안 어느 누구도 넘겨다 보지 못한 곳이에요. 그런데 초탐화는 단 혼자서 소림사의 사람이든 짐승이든 할 것 없이 발칵 뒤집어 놓았으니...소림의 팔백 제자는 그를 어떻게 잡아낼 수도 없고 오히려 그 반대로 매일 매일 먹여 주고 입혀 주어야 하고 또 들여보낸 물건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여기까지 말한 머리 긴 낭자는 무엇이 재미있는지 키득키득 웃더니
"정말 초탐화는 훌륭하고도 멋있는 분이에요. 오늘 얘기는 정말 재미있었어요."
하고는 말을 끊는 것이었다.
모든 얘기를 다 듣고 난 낭천은 전신의 피가 끓어올랐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뛰쳐 일어나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초류빈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요. 친한 친구란 말이오!'
사실 누구를 막론하고 초류빈을 친구로 두었다면 천하에 떠들고 다니며 자랑할 만했다
손 노선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 초탐화는 정말 일대의 영웅호걸이다. 그러나 그 위대한 영웅도 언젠가는 소림에다 뼈를 묻게 될 것이다."
머리가 긴 낭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얼굴을 노인의 턱밑으로 바싹 들이댔다.
"그건 또 왜 그렇죠?"
손 노선생은 고의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낭천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 말을 계속했다.
"누가 나서서 초류빈이 매화도가 아니라는 것과 심미 대사가 오독동자에게 살해되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 외에는 아무 방도가 없지. 모르면 몰라도 소림사에서는 절대 그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머리가 긴 낭자는 눈빛을 빛내며 신중하게 물었다.
"누가 그의 결백을 증명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손 노선생은 침묵을 지키다가 한참 후에야 긴 한숨과 함께 절망적으로 입을 여는 것이었다.
"이 천지에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제는 점심시간도 다 지났고 얘기도 다 끝났다.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가버리고 남은 사람들은 모두들 초류빈의 얘기로 화제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지만 하늘은 차츰 음침하게 어두워졌다.
이제 식당 안에는 몇 명의 사람만 남아 있을 뿐 모두 떠나가고 없었다.
손 노선생은 아직도 술을 마시며 계속해서 담배를 뻐끔뻐끔 빨아댔다.
그의 손녀딸은 고개를 숙이고 국수를 먹고 있었다.
그녀가 국수를 먹는 방법은 매우 재미있었다. 국수를 젓가락에 칭칭 감은 후 입을 벌려 쏙 집어넣는 것이었다.
설소하는 그윽한 시선으로 낭천을 주시하고 있었으나 낭천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들은 상 위에 갖다 놓은 음식을 건드리지도 않아 맨 위에는 허연 기름이 굳어져 있었다.
얼마나 또 지났을까?
머리가 긴 낭자는 천천히 젓가락을 놓더니 궁금한 듯이 물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보기에 그분 초탐화는 억울한가요?"
손 노선생은 연기를 뿜어내며 씁쓸하게 대답했다.
"글쎄...설령 내가 억울하게 생각한다 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긴 머리 낭자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분의 친구는요? 그를 구해줄 만한 친구는 없나요?"
손 노선생은 길게 탄식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다른 곳에 갇혀 있다면 누가 무슨 방법을 강구해서라도 구해준다지만 소림사에 갇혀 있는 이상 이 세상에서 그를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긴 머리 낭자는 애처로운 눈으로 다그쳤다.
"그럼...그렇게 훌륭한 영웅이 이대로 죽어 간단 말인가요?"
손 노선생은 한참 침묵을 지킨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법이야 있지만...희망은 매우 적어."
이 말을 들은 낭천의 가느스름한 눈이 갑자기 커지면서 밝아졌다.
긴 머리의 낭자가 낭천의 질문을 대신 해주고 있었다.
"어떤 방법인데요?"
손 노선생은 다시 낭천을 잠시 주시하다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진짜 매화도가 죽지 않고 다시 나타난다면 초류빈이 매화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지. 그가 진짜 매화도가 아닌 이상 심미 대사를 죽일 만한 이유가 없게 되니까 말이야."
긴 머리의 낭자는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바랄 수 없는 희망이군요. 진짜 매화도가 설령 죽지 않았다고 해도 그는 이미 어디론가 숨어 버렸을 거예요. 초류빈이 자기를 대신해서 죽게 말이에요."
손 노선생은 갑자기 담뱃대를 상에다 탁탁 치더니 불쑥 말머리를 돌렸다.
"넌 국수를 다 먹었느냐?"
긴 머리의 낭자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몹시 배가 고팠는데 그 얘기를 들으니 더 먹히지 않아요."
"먹히지 않으면 그만 가자꾸나. 어찌 되었든 우리가 여기 한평생 앉아 있어 봤자 초탐화를 구해줄 수는 없지 않겠느냐?"
"하긴 그렇군요."
긴 머리 낭자는 문 입구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낭천을 흘겨보고는 입으로 뭐라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낭천의 귀에 마치 이런 말로 들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대로 여기 앉아 있기만 하면 어떻게 그분을 구할 수 있겠어요?'
"흥! 저 늙은이와 젊은 처녀의 정체가 뭔지 아세요?"
낭천은 아무 생각도 없이 반문했다.
"정체가 뭐란 말이오?"
설소하는 살며시 웃으면서도 목소리는 진중했다.
"저 영감장이의 눈에 신광이 번뜩이는 것으로 보아 결코 내공이 약한 사람 같지 않아요. 그리고 처녀는 발걸음이 가볍고 동작이 날렵한 것으로 보아 경공이 저보다 과히 뒤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낭천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그래요?"
설소하는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보기에 두 사람은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사주팔자나 봐주는 사람 같지는 않고 필경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아요."
낭천은 멍청한 표정으로 설소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슨 목적이겠소?"
설소하는 곱게 눈을 흘겼다.
"그는 일부러 이런 얘기를 당신에게 해주고 당신더러 죽음을 자초하라는 것이에요."
"죽음을 자초하라니?"
설소하는 가벼운 한숨을 불어냈다.
"당신은 초류빈이 소림사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안 이상 모든 것을 물리치고 달려갈 것은 뻔하잖아요. 그런데 당신 혼자서 그 팔백 명의 제자들을 상대할 수 있겠어요?"
낭천은 침묵을 지키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설소하는 눈빛을 빛내며 야무지게 잘라 말했다.
"또 그들이 한 얘기가 모두 거짓이고 단지 당신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수작일는지도 몰라요."
그리고는 낭천의 손을 꼭 잡으며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설사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초류빈은 지금으로서는 아무 위험도 없을 거예요. 당신이 가면 오히려 그가 더 곤경에 빠지게 될지도 몰라요. 소림의 제자들이 당신을 미끼로 그분을 위협한다면 그분은 위험도 불구하고 당신을 구하러 나올 게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당신이 그분을 구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을 해치는 격이 돼요."
낭천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소. 당신의 생각이 치밀하고 옳소."
설소하는 더할 수 없이 고운 손으로 낭천의 양 손을 애무했다.
"당신, 소림에 가지 않겠다고 저와 약속해요, 네?"
낭천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가 이렇게 통쾌하게 승낙을 하자 설소하는 오히려 의심이 갔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두 사람의 표정은 암암리에 심각한 것이었다.
설소하가 차를 따라 낭천에게 갖다 주자 갑자기 낭천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새어나왔다.
"난 소림에 가지 않을 테니까 당신도 돌아가시오."
설소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급히 다그쳤다.
"당신은요?
낭천은 심각한 표정으로 우물쭈물 대답했다.
"나...나는 어디 좀 다녀올 데가 있소."
설소하는 심한 충격을 받은 듯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 바람에 찻잔에 따르던 차가 전부 밖으로 쏟아져 그녀의 옷자락을 흠뻑 적셨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실성한 사람처럼 부르짖었다.
"당신은 혹시 매화도로 변장을 하려는 건 아니에요?"
낭천은 눈을 들어 그녀를 한참 응시하더니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렇소!"
설소하는 붉은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나지막하게 물었다.
"이미 결정을 내리셨나요?"
낭천은 조금도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소."
이 짧은 세 글자는 다시 생각해 볼 여지도 없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설소하는 약간 질린 듯한 얼굴로 침울하게 물었다.
"그런데...왜 저더러 돌아가라는 거죠?"
낭천의 대답은 역시 같았다.
"이건 내 일이오."
그러자 설소하는 고개를 떨구면서 간절하게 말했다.
"당신의 일은 또 저의 일이에요."
"그렇지만 초류빈은 당신의 친구가 아니잖소?"
설소하는 그윽한 눈길로 낭천을 쳐다보면서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당신의 친구라면 제 친구와도 다름이 없어요."
낭천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감격에 어린 빛이 떠올랐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소하는 더운 숨결을 낭천의 이마에 내쏟으며 지극히 상냥하게 말했다.
"당신이 친구에게 그만한 의리를 지켜주는데 저라고 그렇게 하지 말란 법이 있나요? 비록 아무 쓸모없는 저일는지 모르지만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서로 상의할 수도 있잖아요?"
낭천은 갑자기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의 눈과 표정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이 말없는 언어가 때로는 겉치레만 있는 말보다 감동적일 때가 있다.
설소하는 풍만한 몸을 낭천에게 살며시 기대고 방그레 웃더니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이 만약 매화도 흉내를 내려면 먼저 손을 쓸 상대를 물색해야 해요."
낭천도 신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설소하는 화사한 꽃향기 같은 향기를 뿜어내면서 정답게 속삭였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죄없는 무고한 사람을 해칠 수는 없잖아요?"
낭천은 자기에게 기대온 여인의 젖가슴이 지극히 부드럽다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그야 물론이오. 내가 찾는 상대는 바로 부정한 수법으로 돈을 긁어 모으는 부잣집이나 강도들이오."
설소하는 매력적으로 웃으며 낭천의 까칠한 턱수염을 어루만졌다.
"이 근처에 당신이 말한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제가 알고 있어요."
낭천은 여인의 부드러운 손길을 의식하며 발작적으로 물었다.
"누구요?"
설소하는 가볍게 몸을 틀고 낭천의 맞은편 의자에 가서 앉으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 사람은 지난 날 녹림의 유명한 강도였어요. 그러나 오십 세 이후로는 깨끗이 손을 씻었죠. 그래도 가끔 남몰래 나쁜 짓을 하고 다녀요."
낭천의 표정에는 별달리 큰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
"당신은 그 자의 이름을 아시오?"
설소하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말했다.
"그의 본명은 장승기(張勝奇)예요. 그러나 지금은 모두 장원외(張員外)라 하죠. 강호인이래요."
낭천은 절로 눈이 휘둥그래졌다.
"강호인이라고?"
설소하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는 은 십만 냥을 강탈하면 그 중 백 냥으로 길을 고치고 다리를 놓죠. 그리고 밤에 백 명의 사람을 죽였다면 아침에 약을 선사하고 또 죽까지 사람들에게 나눠주죠. 강도가 호인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더 쉬운 거예요."
장승기는 화려하게 꾸민 침상에 비스듬히 앉아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벌겋게 달아오른 화롯불을 바라보며 흰 죽을 한 모금씩 마시면서 그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밖에는 흰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으나 방안은 화창한 봄날 씨처럼 따뜻했다. 방안 한구석에 놓여져 있는 화분에는 수선화가 한창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그 화분 옆으로는 살이 통통하게 찐 고양이가 잠을 자고 있었다.
장승기는 허리를 쭉 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올해는 봄이 매우 일찍 오는군."
오늘은 그도 눈보라를 맞으며 몇 리 길을 다녔다.
그것은 자기가 일을 시키는 일꾼이 노새의 발길질에 걷어채여 몸져 눕게 되어 그 집에 병문안을 가기 위해서였다. 지금 그는 매우 피곤하나 기분은 좋았다.
대개 좋은 일을 하게 되면 기분이 좋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가 병문안을 갔을 때 그의 셋째 부인이 오동통하고 탐스러운 사내아이를 낳아 주었기 때문에 한층 더 마음이 뿌듯했다. 장승기는 하녀가 들고 온 담뱃대를 들어 몇 모금 깊이 빨았다.
그리고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순간 하녀가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소리를 지르며 죽이 담긴 그릇을 떨어뜨리고 마는 것이 아닌가.
"응?"
장승기는 대경실색하여 번쩍 눈을 떴다. 그의 눈앞에는 어느 틈엔가 흑의인이 어떻게 방안으로 들어왔는지 우뚝 서 있었다.
장승기는 비륵 녹림에서 손을 씻은 지 오래나 그래도 무공은 여전했다. 그는 갑작스런 침입자를 향해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어떤 놈이 감히 나리의 머리 위에서 흙장난이냐?"
폭갈을 지르는 가운데 그는 어느새 목침을 들고 흑의인을 향해 집어던졌으나 장승기는 상대가 언제 어떻게 출수를 했는지 전혀 보지 못했다. 다만 그의 가슴이 썰렁해지는 지극히 짧은 느낌만 받았을 뿐이건만 가슴에는 어느 틈엔가 다섯 개의 핏구멍이 뚫려져 있었다.
매화도가 다시 나타났다. 주루나 객점 어디서도 이 사건으로 인하여 쑥덕공론이 벌어졌다. 장승기를 죽인 사람이 그럼 진짜 매화도란 말인가?
또 이 다음의 상대는 누구일까?
재산이 있고 세도가 있는 사람은 그날부터 발을 뻗고 잠을 잘 수가 없게 되었다.
황혼 무렵, 땅땅땅! 하는 청아한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표정이 엄숙하고 냉담한 소림사의 승려들이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불전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발걸음은 평상시보다 더 가벼운 것 같았다. 그건 지난 여러 날 동안 소림사의 모든 사람 마음이 침통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염불을 외우는 소리는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소림사 근처에 사는 주민들은 이런 종소리와 염불을 외우는 소리를 듣고 소림 제자들이 저녁 수업을 시작하는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산세가 험악한 숭산(崇山) 중원오악(中原五嶽) 중의 하나이며 대소림사(大小林寺)가 있는 곳은 추위가 더 한층 심했다. 그 눈과 얼음이 쌓인 산을 한 사람이 급히 오르고 있었는데, 바로 소림의 문하이며 속가제자인 남양대협(南陽大俠) 소정이었다.
소정은 뒷산을 순시하는 동문 사형제들과 황급히 몇 마디 나누고는 곧장 후원으로 들어섰다. 주지의 방은 아무런 소리도 없고 조용했으며 오직 한 가닥 향긋한 향내음이 창문에서 흘러나와 사방으로 은은히 퍼지고 있을 뿐이었다. 소정은 발걸음이 몹시 가벼워 땅을 디뎌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가 후원으로 들어서자마자 장문인의 방에서 심호 대사(心湖大師)의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누구냐?"
소정은 문 밖 멀찌감치 서서 정중히 인사를 드렸다.
"제자 소정입니다. 긴히 여쭐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방장실에는 심호와 심감 그리고 백요생 세 사람뿐이었다.
그들은 모두 안색이 창백하여 무슨 걱정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소정은 안으로 들어가 다시 인사를 올리고 용건부터 말했다.
"강호에 매화도가 다시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심감과 백요생은 동시에 안색이 확 변했다.
"뭐? 매화도가?"
소정은 지체없이 아뢰었다.
"사흘 전 벌써 손을 씻고 은퇴한 독행도(獨行盜) 장승기가 갑자기 피살을 당하고 집안의 값진 물건들을 송두리째 가지고 갔습니다. 장승기의 치명상은 바로 가슴팍에 있는 다섯 점 매화 모양의 핏구멍입니다."
심감과 백요생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쳐다보고 있었으나 혈색은 파리하게 굳어 있었다.
심호 대사 역시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이런 모습은 마치 대웅보전에 모셔져 있는 불상과도 흡사했으나 손에 쥐어 있는 백팔염주는 어딘가 모르게 떨리는 것 같았다. 잠시 납덩어리 같은 침묵이 흘렀을 때 그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매화도가 또다시 나타났다면 초류빈의 얘기가 거짓이 아니라는 말이 아닌가? 그 자는 정말 억울한 것이 아닌가?"
백요생은 심감에게 동의라도 구하는 것처럼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지 않았다.
심감은 창문으로 걸어가 창밖에 쌓여 있는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아마 이것은 더욱더 초류빈이 매화도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심호 대사는 어리둥절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심감은 예지로 번뜩이는 눈을 그들에게로 돌리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만약 매화도라면 누가 저 대신 잡혔다고 합시다. 그러면 저는 틀림없이 잠시 동안 숨어서 동정을 살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시 떠돌아다니면 오히려 초류빈을 구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백요생도 심감의 말에 신중한 맞장구를 보냈다.
"그렇습니다. 매화도가 다시 나타난 것은 누군가 초류빈을 구출해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심호 대사는 곤혹스러운 빛으로 천천히 물었다.
"그럼 자네들의 의견은?"
심감은 방안을 서성거리며 신중하게 자기의 의견을 피력했다.
"장승기를 죽인 사람은 틀림없이 초류빈과 한패일 것입니다. 그가 매화도 행세를 하여 장승기를 죽인 것은 초류빈의 누명을 씻어 주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백요생이 말을 받았다.
"초류빈이 정말 매화도가 아니라면 그의 한패들도 그렇게까지 행동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심호 대사는 벌떡 일어서서 심감과 같이 한동안 방안을 서성거리더니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오늘 보제원(菩提院)당번이 누군가?"
심감이 즉시 대답했다.
"둘째 사형의 문하인 일균(一菌)과 일진(一塵)입니다."
심호 대사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 듯 심감에게 명령을 내렸다.
"빨리 그들을 들라고 하게."
심감은 즉시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심호 대사는 뒷짐을 지고 서서 불화로에서 피어나는 향연기를 바라보며 넋을 잃고 있었다. 그리고는 일균과 일진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다섯째 사숙의 저녁 진지를 너희들이 갖다 드렸느냐?"
일균이 머리를 조아리며 황송한 듯이 대답했다.
"갖다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꼬리를 흐리자 심호 대사는 급히 다그쳤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단 말이냐?"
일균이 고개를 떨구고 차분히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제자들은 며칠 전의 규칙대로 식사를 문 앞에다 갖다 놓았습니다. 분량도 어제와 같고 물도 갖다 드렸습니다."
일진이 뒷말을 받았다.
"밥상은 제자가 직접 문 밖에다 놓았습니다. 그건 제자가 방안의 동정을 살펴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가 문 밖까지 가자 초류빈이 빨리 가라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제자는 더 머물지 못하고 몇 걸음 옆으로 갔습니다. 그때 초류빈의 손이 문틈으로 나오더니 그 밥상을 들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그런데 잠시 후 그는 밥상을 내던지고 말았습니다."
심호 대사는 그제야 번쩍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랬다더냐?"
일진은 더듬거리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아뢰었다.
"그는 반찬이 나쁘고 또 술이 없다고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심호 대사는 얼굴에 노기를 띠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놈이 여기를 어디로 생각한단 말이냐? 여기가 주루인 줄 알았던가?"
일균과 일진은 삭발을 하고 장문인을 모신 지 십여 년이 되었으나 장문인이 이토록 크게 화를 내는 것은 보지 못했다.
두 사람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말없는 가운데 앙금처럼 내리깔린 침묵 속에서 시간은 흘러가고, 심호 대사는 안색을 차츰 가라앉히더니 타오르는 향불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그가 먹고 싶다는 음식을 해주고 술도 갖다 주도록 하여라."
그러자 심감이 한걸음 다가서며 황급히 물었다.
"사형, 어쩌시려고....."
심호 대사는 얼른 손을 휘저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초류빈이 먹지 않겠다면 다섯째 사제도 그와 함께 굶어야 하지 않는가? 그는 원래 몸이 약한 데다 요 근래에 와서 또 병마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니 그에게 더 이상 고통을 주지 말아야 하네."
심감은 괴로운 표정으로 사형인 장문인 심호 대사를 주시했다.
"하지만...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면 초류빈은 더 발악을 할 것이 아닙니까?"
심호 대사는 신광을 번뜩이더니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네. 그놈이 하루 이틀쯤 더 날뛰도록 내버려 두게."
한편,
낭천은 반듯하게 침상에 누워 팔베개를 하고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거의 두 시진이나 이렇게 누운 자세로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몸은 마치 화강암이라도 된 것 같았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이것도 일종의 고된 훈련이었으며 반드시 초인적인 인내력이 있어야만 했다. 어떤 사람은 쉬지 않고 두 시진 동안 격렬한 운동을 할 수 있으나, 두 시진 동안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몇 명 없을 것이다.
황야의 생활로 이런 재주는 매우 큰 효력을 발휘할 수가 있었고 이 재주가 낭천의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 주었는지 모른다.
낭천은 여러 날 동안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찾지 못한 적이 있어 하는 수 없이 참고 기다렸다. 그러면서 몸은 움직이지 말아야 했다.
이렇게 움직이지 않으면 체력을 아낄 수 있었으며, 체력이 있어야만 음식을 찾아 먹을 수가 있고 또 달릴 수도 있다.
동물 중에서 감각이 예민하고 영리하기로 이름난 토끼도 여러 번 그가 화석(化石)인 줄 알았다. 그때 그는 너무나도 허기가 져서 일어날 기력조차 없었다. 그리고 한 번은 거의 보름 동안 눈과 바람만 불어 광막한 대지가 온통 하얀 벌떼들이 웅웅거리는 듯했다.
낭천의 나이 그때 겨우 열 살 그리고 또 이틀을 더 굶었다.
이런 상태 속에서 그는 곰 한 마리를 만난 것이다. 그는 이미 저?항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으며,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었다. 그 상황 속에서도 그는 문득 곰은 죽은 사람을 먹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누운 채 죽은 척했으나, 뜻밖에도 그가 만난 곰은 늙고 간사스러운 놈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놈도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놈은 갈 생각을 않고 혓바닥으로 낭천의 얼굴을 핥아보고 발도 긁어보며 심지어는 이빨로 물어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낭천은 끝내 참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튿날, 그는 얼어 죽은 들개 한 마리를 찾아 그것으로 요기를 하여 체력을 되찾은 후 그 곰을 찾아 복수했다.
이런 인내력은 천성이 아니라 길고도 고된 단련이 필요했다. 처음 시작 할 때는 얼마 되지 않아 전신이 근질근질하고 가려워서 미칠 것만 같더니 이윽고 그것은 차츰 마비되며 끝내는 전신 근육의 감각도 느끼지 못하게끔 되었다. 지금은 그가 움직일 필요가 없다고 느껴지면 여러 시진 움직이지 않고 있을 수 있었다.
설소하도 밖에서 돌아왔을 때 그가 깊은 잠이 든 줄 알았다.
오늘 설소하의 옷차림은 매우 이상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광목으로 만든 헐렁한 옷으로 그녀의 아름다운 몸의 곡선을 모두 덮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그녀의 머리에 낡고 헌 털실로 짠 모자를 써서 얼굴을 모두 가렸다. 그녀는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 나갔다가 두 시진 만에 들어온 것이다.
이때 낭천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어머나?"
설소하는 깜짝 놀라는 듯하더니 얼른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며 두 손으로 낭천의 가슴을 두드렸다.
"주무시는 척했군요? 저를 깜짝 놀라게 하려고."
여인의 매혹적인 웃음을 본 낭천은 살며시 그녀를 껴안았다. 마치 강하게 껴안으면 부서져 버릴 보물처럼.
설소하는 눈을 감고 고개를 쳐들며 남자의 입술과 애무를 기다렸다. 설소하에게 있어 그 짜릿한 쾌감이야말로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낭천은 천천히 손을 풀었다.
눈을 뜬 설소하는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통통하고 붉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제가 귀찮아요?"
낭천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절대로 아니오."
설소하는 처절하리만큼 요염한 빛을 떠올리며 나직이 물었다.
"그러데...이 이틀 동안 당신은 왜 저를 피하시죠?"
낭천은 그녀의 이글거리는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난...난 나 자신을 억제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
그러자 설소하는 갑자기 그의 볼에다 자기의 입을 갖다 대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당신은 정말 좋은 분이에요."
낭천은 그녀의 탄력있는 젖가슴이 가슴에 와 닿자 얼른 빠져나가 그녀의 벗어 놓은 모자를 들고 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자기의 가쁜 호흡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고개를 돌리며 담담하게 물었다.
"무슨 소식이라도 있소?"
설소하는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설레설레 머리를 저었다.
낭천의 눈빛이 암울해졌다.
"그 중들이 아직도 그를 놓아 주지 않는단 말이오?"
"숭산의 소림사는 항상 침착해요. 무슨 일을 하건 오래오래 관찰하고 절대 경거망동하지 않아요. 차라리 하지 않았으면 않았지 잘못을 하진 않아요."
"하지만 이미 일주일이 지나지 않았소?"
"아마 그들은 장승기를 죽인 사람이 매화도라는 것을 믿지 않나 봐요. 그건 매화도가 항상 계속해서 사건을 저지르지 절대 단 한 번으로는 그만두지 않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 같아요."
"그들이 믿는 날이 올 것이오. 나는 꼭 믿게 할 것이오."
"절 따라오세요. 가 볼 데가 있어요."
"어딜 간단 말이오?"
설소하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당신의 두 번째 상대를 찾는 거예요."
황혼 무렵, 타는 듯한 낙조가 대지 위에 내리자 거리는 낮과는 달리 또 다른 복잡함이 있었다. 수많은 인파들.....
낭천과 설소하도 사람들 속에 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차림이 전과 달리 매우 허술하여 많은 사람들 틈에서도 남의 주위를 받지 않았다.
이때 설소하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전당포 하나를 가리켰다.
"저 간판을 좀 보세요."
그녀가 가리키는 전당포는 규모가 매우 컸다.
<신기당포(申記當鋪)>
낭천은 영문을 모르고 다그쳤다.
"저 간판이 뭐가 어쨌단 말이오?"
설소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 앞을 지나 일곱 번째 되는 집 앞에서 또 한 군데 주루 밖에 걸려 있는 현판을 가리켰다.
"또 저걸 보세요."
이 집은 장사가 매우 잘 되었으며 길 밖에서도 주방 안의 음식을 만드느라 부산한 칼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층으로 된 이 집에는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차 있었다. 그 주루의 간판도 역시 '신기장원루'라 쓰여져 있었다.
이번에는 낭천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건 그가 이미 건너편에 있는 포목점에서도 검은 현판에 금으로 새긴 '신기포목점'이라 쓰여져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성 안에서 비교적 사람이 많이 붐비는 거리는 세 군데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세 군데 거리 중에서 다섯 집 건너뛰고 일곱 집 건너뛸 때마다 모두 신기라는 금글씨로 쓴 간판이 걸려 있는 집은 모두 장사가 잘되었다.
낭천의 표정에 야릇한 변화가 생겼다.
"이 많은 점포를 모두 한 사람이 경영한단 말이오?"
설소하는 눈빛을 빛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요. 모두 신노삼(申老三)이라는 자가 경영하는 거예요 "
낭천은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이젠 또 어딜 가야 하오?"
설소하는 소리없이 웃으며 낭천의 팔을 잡아 끌었다.
"저만 따라오시면 돼요."
낭천은 원래 말이 없고 묻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라 더 묻지 않고 그녀를 따라 성 밖으로 나갔다. 그곳은 불빛도 없고 사람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이었다.
가장 시끄러운 곳에서 또 가장 황량한 곳으로 오면 그 누구도 처량하고 침울해지기 쉬우나, 반대로 즐거움이 되기도 한다.
눈앞에 탁 트인 들판을 바라보며 낭천은 찬 공기를 듬뿍 들이켰다가 내뿜자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것 같고 온 천지가 모두 자기 것처럼 생각되었다.
설소하는 낭천의 어깨에 가만히 기대고 서서 그의 상념을 깨뜨리지 않은 채 어두운 밤하늘을 응시하다 유성 하나가 길게 꼬리를 끌며 떨어지는 것을 보자 활짝 밝은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저걸 봐요, 유성(流星)이에요!"
낭천은 천천히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원을 빌었소?"
설소하는 입을 삐죽거렸다.
"유성은 언제나 눈 깜짝하는 순간에 사라지기 때문에 미처 소원을 빌지 못해요. 그건 유성이 나타난다는 것을 미리 아는 사람만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누가 유성이 언제 나타날지 알고 있나요? 제가 보기에 그건 모두 거짓말인 것 같아요."
"설혹 거짓말이라 해도 그것이 사람에게 많은 아름다운 환상을 만들어 주지 않소? 사람이 아름다운 꿈이나 희망을 오래 간직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오."
이렇게 말하는 그의 음성은 지극히 부드러웠다.
설소하는 낭천을 올려다보며 고혹적으로 웃었다.
"당신도 그 전설을 알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낭천의 시선은 푸른 별들이 반짝이는 어두운 밤하늘에 고정되어 있었다. 유성은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않고 대신 그의 눈에는 한 가닥 처량한 슬픔이 감돌고 있었다.
낭천은 유유히 입을 열었다.
"그 전설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소."
설소하는 의지가 담긴 그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당신, 어머님 생각을 하시는 건가요? 어머님이 얘기해 주시던가요?"
낭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갑자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아갔다. 밤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초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은은히 들려왔으며, 어두운 먹구름에 가려 둥근 보름달은 절반밖에 보이지 않았다. 낭천은 앞에 매우 큰 장원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점점 가까이 가자 그 장원은 오히려 보이지 않았다. 그 장원의 담이 너무 높아 그의 시선을 가렸기 때문이었다.
설소하는 담 너머를 보려고 발돋움을 했다.
"굉장히 높은 담이군요. 높이가 사 장은 충분히 될까요?"
"거의 그 정도는 되겠소."
"넘어갈 수 있겠어요?"
"이 세상에서 자기 키의 네 배나 되는 담을 그냥 넘을 수 있는 사람은 없소. 그러나 굳이 들어가려 한다면 다른 방도가 있소."
설소하는 고개를 떨구고 잠시 무엇인가 생각에 잠겼다. 비록 허름한 무명옷에 감싸이긴 했어도 하얀 그녀의 목덜미가 너무나도 곱다고 낭천은 생각했다. 이윽고 그녀는 담장을 따라 서너 걸음 옮기고 난 후 다시 낭천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기가 바로 신노삼의 집이에요."
낭천의 눈빛이 돌연 번쩍 광채를 발했다.
"신노삼이 바로 내가 죽일 두 번째 상대란 말이오?"
"이 근처 몇백 리 안에서 그 자보다 더 좋은 상대는 없어요."
"하지만 그는 장사꾼이 아니오?"
"저도 당신이 장사꾼에게 손을 쓰는 것을 꺼린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장사꾼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어요."
낭천의 얼굴은 흐린 달빛을 받아 약간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어떤 종류요?"
설소하는 높은 담장을 한 번 더 올려다보고 나서 냉담하게 대답했다.
"아주 얌전하지 못한 종류예요. 생각해 보세요. 얌전하게 장사를 한 사람이 같은 성내에서 그리고 그것도 같은 거리에서 열 몇 개의 점포를 열고, 또 얌전한 장사꾼이 이렇게 높은 담을 쌓을 필요가 있을까요?"
낭천의 목소리에는 약간 강한 억양이 들어 있었다.
"담이 높고 점포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가 법을 어기는 것은 아니잖소?"
설소하는 당치도 않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담이 높은 것은 도둑이 제발 저리다는 격으로 남의 보복이 두려워서이고 점포가 많다는 것은 그가 부당한 강탈을 할 줄 알기 때문이죠."
낭천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강탈?"
설소하는 눈빛을 빛내며 다시 말했다.
"이 신씨 집은 대가족이라 사촌 형제들까지 모두 열여섯이나 되어요. 이 열여섯 사람이 모두 사십여 개의 점포를 경영하고 있어요."
낭천은 손으로 턱을 고이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따져보면 한 사람 앞에 점포가 두 개 내지 세 개씩 나누어지겠지. 으음.....별로 많지도 않군."
설소하는 조금도 당황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 사십여 개가 되는 점포가 모두 신노삼의 것이 되었어요."
낭천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아니, 그건 또 왜 그렇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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