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9일 화요일
44 소이비도 제3권 깨어진 침묵
깨어진 침묵
초류빈을 보고 밖으로 뛰쳐나온 낭천의 위는 이미 마비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그가 뛰쳐나가는 것을 보고도 형무명은 말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입가에 냉혹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낭천이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초류빈을 구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더욱이 그것은 설소하라는 여인 때문에 더 확고하다는 사실을 느낀 것이다.
낭천은 전신이 졸아드는 것을 느끼고 갑자기 허리를 굽히고는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낭천이 토한 것은 물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낭천은 추종해 오던 이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다.
'당신은 꼭 제게 약속을 해 주셔야 해요. 어떤 일이 있어도 꼭 돌아오신다고요. 저는 영원히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
어렴풋이 그러나 귓전을 강하게 때리는 음성, 바로 설소하였다. 더욱이 낭천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인의 말이기도 했다. 낭천은 이 애절한 말을 위해서라도 결코 죽을 수 없었다.
그러나 초류빈...낭천의 가장 좋은 친구일 뿐만 아니라 낭천이 여태까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인격이 완전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이곳에 서서 다른 사람이 초류빈을 죽이는 것을 어떻게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낭천은 속이 뒤집히는 것을 참지 못하고 계속 쓴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한편, 매우 컴컴하기 이를 데 없는 지하실 안의 초류빈은 지금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지도 몰랐을 뿐 아니라 또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는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느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움직일 수도 없었다. 바로 모든 혈도가 제압당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호천강이 빙긋 웃으며 말을 했다.
"아무리 사나운 맹수라 할지라도 열흘을 넘게 굶주리다 보면 자연히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호유성이 길게 탄식을 내뿜었다.
"난 본래부터 그를 죽이길 바라지 않지만...지난날의 그 교훈 때문에 다시는 그런 의외의 일을 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오."
형무명은 한참 머뭇거리고 있더니 갑자기 물었다.
"그의 칼은 어디 있소?"
호유성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내키지 않는 투로 물었다.
"형대협께선 그의 칼을 보고 싶습니까?"
형무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것은 전혀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호유성은 서릿발처럼 싸늘한 그의 표정을 쳐다보다가 결국은 품속에서 한 자루 칼을 꺼냈다. 칼은 매우 가벼울 뿐 아니라 짧고 가늘어 마치 한 잎의 버들잎을 보는 것 같았다. 형무명은 그 칼을 받아 가볍게 매만졌다.
호유성은 그의 이러한 행동이 우스웠던지 빙긋 웃었다.
"사실 이 칼은 이기(利器)가 아닌 보통 칼에 불과합니다."
형무명은 넋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이기라고...당신 같은 사람이 이기를 얘기할 자격이 있소?"
이때 형무명의 눈동자는 호유성을 쏘아보며 마치 심문을 하듯 냉랭하게 따지고 있었다.
"당신은 무엇이 이기인 줄이나 알고 그러는 거요?"
형무명의 눈동자에는 비록 신광이 번뜩이지는 않았지만 형용할 수 없는 괴이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마치 꿈속에서 귀신의 눈을 보고 깜짝 놀라 깬 후에도 여전히 무서움을 타는 것 같은 그런 눈이었다.
호유성은 숨통까지 막히는 것을 느끼고 억지로 입을 벌려 물었다.
"나...난 모르니 가르쳐 주십시오."
형무명은 그제야 눈동자를 다시 칼로 돌렸다.
"살인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기요. 그렇지 않으면 제아무리 좋은 칼이라도 당신 같은 사람의 수중에 들어가면 이기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오."
호유성은 빙긋 웃으며 그의 말에 찬동을 보냈다.
"그렇습니다. 형대협의 견해는 과연 고명합니다."
형무명은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려 다시 물었다.
"당신은 오늘날까지 이 칼 아래 몇 명이나 죽었을 것 같소?"
"글쎄...아마 헤아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형무명은 힘 있고 짧은 어투로 내뱉었다.
"헤아릴 수가 있소!"
금전방이 강호에 나선 지는 불과 이 년밖에 되지 않지만 그 전에 얼마나 오랜 세월을 두고 창설 계획을 세웠는지 모른다.
때문에 금전방이 이 짧은 이 년이라는 세월에 강호를 위진시킬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호유성은 이런 점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금전방이 창립하기도 전에 강호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의 내력을 상세히 조사해 본 적이 있었다. 이 일에 그 얼마나 많은 인력과 무수한 물질을 소비했는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일이었다.
호유성은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이해할 수가 없어 계속 다그쳐 물었다.
"정말입니까? 정말 헤아릴 수 있단 말입니까?"
형무명은 짧게 대꾸했다.
"일흔여섯 명."
그리고 나서 형무명은 냉랭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 일흔여섯 명 중에서 당신보다 무공이 낮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소."
그러나 호유성은 이미 이런 일에 대해서는 이력이 생긴 듯 빙긋 웃기만 하면서 시선을 천천히 초류빈에게 돌렸다. 그 행동은 마치 형무명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초류빈 본인에게 증명해 보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초류빈에게는 고개조차 들 힘이 없었다.
이때 호유성이 입을 열어 말했다.
"초류빈 자신이 이 칼에 죽게 된다면 아마 억울하지 않을 것입니다."
호유성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칼빛이 번쩍 하더니 형무명의 손에서 곧장 초류빈의 앞으로 비수가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이 순간 호유성은 너무 기뻐 탄성까지 지를 뻔했다. 그러나 칼은 초류빈의 목에 떨어지지 않고 도중에서 갑자기 빙글 돌더니 바로 그의 신변에 떨어졌다. 이제보니 형무명의 암기를 쓰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었다.
이때 형무명이 냉랭한 어조로 명령했다.
"어서 그의 혈도를 풀어주시오."
호유성은 매우 놀라고 또 당황했다.
"그...그렇지만....."
형무명은 그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소리쳤다.
"그의 혈도를 풀어주라고 했소!"
이 어조에는 감히 항거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호유성 부자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다가 이내 그의 의사를 알아차렸다.
호유성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리며 말했다.
"상관방주께서 필요로 하는 것은 초류빈인데 죽든 살든 상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호천강도 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상관방주께선 술은 입에도 대시지 않는 분이니 당연히 술 주정뱅이는 싫어하시겠죠?"
호유성도 그 기세를 타고 다시 말했다.
"그리고 산 사람을 데리고 가느니 죽은 사람을 데리고 가는게 훨씬 편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는 어떤 의외의 일이 일어나지도 않을 것입니다."
호천강은 영악한 눈초리를 빛내며 빠지지 않고 거들었다.
"그러나 형대협께선 반항할 힘이 없는 사람에겐 절대 출수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형무명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버럭 소리쳤다
"정말 말들이 많군!"
호유성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예, 알았습니다. 제가 가서 그의 혈도를 풀어주지요."
처음부터 혈도를 제압한 사람이 호유성이었으므로 푸는 것도 매우 용이한 일이었다. 호유성은 초류빈의 어깨를 툭 치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현제, 형씨께서 자네와 겨루고 싶은 모양이니 절대 조심해야 할 걸세."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호유성은 초류빈더러 현제라고 부를 수 있는 배짱이 있는가 보다. 그런데 그 말투 역시 옛날과 조금도 다름없이 부드럽고 정답지 않은가. 간악의 도가 지나쳐 선하게 보이는 사람, 이런 사람을 과연 숭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초류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씁쓸하게 웃으며 옆에 떨어진 칼을 주웠다. 이것이 바로 그로 하여금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만은 비도탈명이다. 한 번도 실수를 해 본 적이 없던 그의 칼이 다시 수중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초류빈에게 아직도 이 칼을 발출해 낼 힘이 있을까.
아름다운 여인이 늙은 것과 영웅의 종말은 오두 이 세상에서 어쩔 수 없는 커다란 슬픔이다. 이런 슬픔은 사람으로 하여금 동정을 가지게 만들며 또 제일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는 단 한 사람도 초류빈을 동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호천강의 눈동자에는 교활스러움이 잔뜩 빛나고 있었다.
"비도탈명이 아직도 그 영민함을 발휘할 수가 있을까요?"
초류빈은 고개를 들어 한참 동안이나 호천강을 쳐다보다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형무명이 음침하게 입을 열었다.
"난 살인을 할 때면 으레 남에게 먼저 기회를 준다. 이것이 바로 당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요. 알겠소?"
초류빈은 아무 말없이 그저 처량하게 웃을 뿐이었다.
형무명은 차갑게 소리쳤다
"자, 어서 일어서시오!"
초류빈은 갑자기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호천강이 앞으로 나서며 짐짓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아저씨께서 만약 일어서지 못하시겠다면 제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호천강은 그러다가 눈을 깜박거리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저는 소문에 아저씨께선 앉아서도 비도를 발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누워서도 똑같이 발출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초류빈이 탄식을 하며 무엇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한 사람이 돌진해 들어왔다. 낭천이었다. 낭천의 얼굴에는 조금도 혈색이 없어 마치 죽은 사람같을 뿐 아니라 입에는 핏자국까지 있었다.
비록 잠깐의 시간이었으나 낭천은 이미 옛날의 그 영민한 행동을 많이 잊어버린 것 같았다. 낭천은 나는 듯 지하실 속으로 돌진해 들어왔으나 즉시 멈추었다. 형무명이 홱 몸을 돌렸다.
"아직도 그 마음을 버리지 못했느냐?"
이때 초류빈이 이미 고개를 들고 있었다. 넋을 잃은 혼탁한 그의 두 눈동자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낭천은 힐끗 그를 쳐다보았을 뿐 즉시 몸을 돌렸다.
"그를 죽이려면 우선 나부터 죽여야 하오!"
낭천의 음성은 매우 침중했고 또 평안스러웠다. 이 말은 여태까지 갈등해 온 낭천의 결심을 완전히 드러낸 것이었다. 형무명의 회색빛 눈동자는 즉시 특이한 변화가 일어났다.
형무명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듯 되물었다.
"그녀가 걱정되지 않느냐?"
낭천은 별 관심없는 어투로 대꾸했다.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그녀는 살아갈 수가 있소."
이 한마디 역시 아까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평안스러웠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고통의 빛이 역력하게 드러났고 호흡까지도 힘이 들 정도였다.
형무명은 이 순간 심리적으로 어떤 반응을 얻었는지 담담하게 입을 떼었다.
"그녀가 상심을 해도 좋으냐?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낭천은 황급히 형무명의 말을 잘랐다.
"살아서 불안을 느끼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소. 내가 죽지 않으면 그녀는 아마 너무 상심을 할 것이오."
형무명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너는 그녀가 그런 사람이라고 믿느냐?"
낭천은 서슴지 않고 대꾸했다.
"물론이오."
이것은 사실이었다. 낭천의 머릿속에는 여자 설소하는 비단 선녀일 뿐만 아니라 성녀(聖女)이기도 했다. 다시 형무명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가 웃는 것을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형무명 자신까지도 자기가 언제 웃었는지 잊어버릴 정도였다.
형무명의 옷음은 매우 특이했다. 그의 얼굴 근육은 이미 못쓰게 된 지도 오래 되어 굳은 빵처럼 딱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낭천은 그가 웃는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냉랭하게 소리쳤다.
"너무 좋아하지 마시오. 당신은 나를 죽일 수 있는 팔 할의 기회가 있지만 내게도 역시 이 할의 기회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순간 형무명의 미소는 이내 사라졌다.
"내 아까도 말했지만 난 너의 목숨을 꼭 살려줄 것이다."
낭천은 충혈된 눈알을 번뜩이며 버럭 소리쳤다.
"필요없소!"
"내가 널 살려주는 것은 장차....."
그러자 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이미 눈부신 검빛이 번뜩였다. 검빛이 허공으로 날으는 것은 그야말로 번개와 같았다. 그러나 다시 한 가닥의 광망이 일어났는데 먼저 출수한 빛보다 더욱 빨랐다. 그것은 무엇일까. 다음 순간 번쩍이던 빛들이 일시에 싹 거두어졌다. 동시에 모든 동작들도 멈추어졌다.
형무명의 검은 어느 새 낭천의 어깨를 찌르고 있었다. 그러나 낭천의 검은 형무명의 목구멍과 아직도 네 치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때문에 낭천의 어깨에서 시뻘건 피가 흘러내려 옷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형무명의 검은 그 자리에서 정지했다. 어째서 계속 찔러 내려가지 않는 것일까. 순간 놀랍게도 형무명의 어깨에 한 자루의 칼이 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비도탈명, 바로 비도탈명이었다. 도대체 어떤 마력이 작용을 하여 다 죽어가는 초류빈으로 하여금 이 칼을 발출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했을까.
이 순간 호유성 부자는 안색이 백지장처럼 변해 손을 떨며 한걸음 한걸음씩 후퇴하여 담구석까지 물러나왔다.
두 부자는 초류빈이 대체 어디서 힘이 생겨 칼을 발출해 냈는지 알지 못했다. 이때 초류빈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형무명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초류빈을 주시했으나 그 회색빛 눈동자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형무명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멋진 칼이오."
초류빈은 예의 그 버릇대로 빙긋 웃었다.
"별것 아니오. 다만 당신이 나를 얕보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안중에 두지 않았던 것뿐이오. 만약 그렇지 않았던들 나는 당신을 상처 입히지 못했을 거요."
형무명은 갑자기 싸늘한 냉소를 터뜨렸다.
"나를 속일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당신이 진정한 실력가이며 또 나아가선 나보다 강하다는 결론이오."
초류빈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난 속인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또 당신에게 칼을 던진다고 경고한 적도 없었소. 이것은 당신이 자초한 것이오. 다시 말해 자신의 눈동자가 자기를 속인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오."
형무명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한마디 한마디 분명하게 말했다.
"그렇소. 틀린 건 당신이 아니고 나였소."
초류빈은 다시 참을 수 없이 탄식을 토했다.
"당신은 흉수이지만 결코 소인(小人)은 아니오."
형무명은 호유성을 흘깃 쳐다보더니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소인은 결코 흉수와 말할 수 없는 거요."
초류빈은 천천히 손을 내저었다.
"좋소. 당신은 그만 가 보도록 하시오."
갑자기 형무명이 화를 벌컥 냈다.
"어째서 날 죽이지 않는 거요?"
"당신이 내 친구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오."
형무명은 일순 말을 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기의 어깨에 박혀 있는 칼을 보았다.
다시 잠시 후 형무명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난 그의 팔을 절단시키려고 했었소."
"나도 알고 있소."
형무명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의 이 칼은 무척 가볍구려."
초류빈은 싸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나 나는 누가 내게 한 가지를 주면 세 가지로 보답하는 사람이오."
형무명은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비록 무엇이라고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눈동자에는 일종의 말할 수 없는 특이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형무명이 상관금홍을 쳐다보는 눈초리와 똑같았다.
초류빈은 천천히 입을 떼었다.
"내 당신에게 두 가지 일을 가르쳐 주겠소."
형무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시오."
"내 비록 비도탈명으로 일흔여섯 명을 상하게 했지만 그중 스물일곱 명은 죽지 않았소. 그 나머지 마흔아홉 명은 꼭 죽여야 할 놈들이었소."
초류빈은 나직이 기침을 토해낸 후 계속 이었다.
"나는 여태까지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사람을 잘못 죽인 적이 없었소. 그래서 나는 지금 당신이 만약 훗날 다시 사람을 죽인다면 많이 고려를 해 주길 바라오."
형무명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나도 당신에게 한 가지 말해 줄 것이 있소."
"좋소, 어서 말해 보시오."
"나는 여태까지 남의 은혜를 입은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남의 교훈은 더욱 듣기 싫어하오."
형무명은 여기까지 말을 하고는 갑자기 어깨에 박혀 있는 칼을 힘껏 누르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밖으로 노출된 칼날은 완전히 박혀 들어가고 겉부분에는 칼잡이만이 남았다. 피가, 짙은 피가 마구 쏟아져 내려왔다. 동시에 검도 땅바닥에 떨어졌다.
형무명은 아픔으로 인해 몸이 약간 흔들렸으나 그 표정은 여전히 석고처럼 냉혹하고 암석처럼 단단했다. 조금도 고통의 빛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 아니 얼굴 근육 하나 흔들리지 않은 것 같았다. 형무명은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향없이 걸어나갔다.
영웅, 영웅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이 바로 영웅이라는 말인가. 영웅을 대표하는 것은 바로 냉혹하고 잔인할 뿐 아니라 고통과 수심이 뒤따르며 또 무정하다.
영웅, 그들은 살인을 밥먹듯 하고 도박을 미친 사람처럼 즐기며 술을 물마시듯 들이키고 여색이라면 목숨을 걸고 밝힌다. 물론 이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영웅의 모든 것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영웅에게는 또다른 한 가지 무서운 것이 있다.
초류빈과 같은 영웅이 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 세상엔 영웅도 많고 또 공통된 점도 없지 않아 있으며 각양각색의 영웅들이 많지만 그들 중 공통된 점이 단 하나 있는 게 있다. 바로 어떠한 영웅이든 영웅이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낭천의 신색은 매우 숙연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뿜으며 우울하게 말했다.
"그는 아마 일생 동안 검을 사용하지 못할 겁니다."
초류빈은 별다른 빛도 없이 대꾸했다.
"하지만 그에겐 아직 오른손이 남아 있네."
"하지만 그는 왼손잡이인 까닭에 대신 오른손을 쓰면 매우 느릴 것입니다."
낭천은 재차 수심에 가득찬 한숨을 뿜어냈다.
"검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있어 느리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낭천은 여태까지 탄식을 뿜어낸 적이 별로 없었다. 지금 그가 탄식을 뿜어내는 것은 물론 형무명뿐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기준해서이기도 했다.
초류빈은 낭천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두 눈에 광채를 번뜩였다.
"어떤 사람이든 그저 결심만 세워져 있으면 입으로 검을 물어도 손과 똑같이 빠른 법일세.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기질이 모두 쇠퇴해 버리면 설사 두 손이 있다 한들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말일세."
초류빈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세상에는 비록 두 손이 완전한 사람들이 많지만 남보다 빨리 출수해 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네."
낭천은 조용히 듣고 있었으나 어느덧 암울한 두 눈동자에 신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낭천은 갑자기 앞으로 달려가 초류빈의 두 손을 꽉 잡았다.
"알겠습니다. 저는 이제야 당신의 뜻을 알겠습니다."
초류빈도 그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자네가 꼭 깨달을 것으로 믿고 있었네."
이 말이 끝났을 때 두 사람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차 있었다.
만약 제삼자가 이들 옆에 있었다면 분명히 이들이 태도에 감동되어 같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호천강 부자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이때 한참 밖으로 도망가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초류빈은 그들을 등지고 서 있었기 때문에 전혀 기미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낭천은 그냥 그들을 힐끗 쳐다보았을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호천강 부자가 모두 무사히 도망을 간 뒤 낭천은 탄식을 하며 말을 꺼냈다.
"당신이 그들을 놔줄 것이라는 걸 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초류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전날 나를 구해 준 적이 있었다네."
"그렇습니다. 그는 그저 단 한 번밖에 당신을 구하지 않았지만 죽이려고 했던 적은 무척 많았습니다."
초류빈은 약간 처량하게 웃었다.
"기억하기 매우 어려운 일이 있는가 하면 평생 잊지 못할 일도 있는 것이라네."
낭천은 다시 한숨을 내뿜었다.
"그것은 당신이 전혀 염두에도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낭천은 어쩌면 세상의 험한 일에 부딪쳐 보지 못한 젊은이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낭천이 인생의 어떠한 일에 대해 보는 방법은 대부분의 사람보다 더 예리하고 깊이 생각하는 성격이었다.
초류빈은 그의 이 날카로운 언변에 그만 탄식을 토했다.
"그러나 어떠한 일은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꼭 시시각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있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영원히 자기의 생각을 바꾸지 못한다네. 이것 역시 인생의 커다란 고통 중의 하나일세."
낭천이 갑자기 분노 섞인 음성으로 따지고 들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정말로 그가 한 것만 기억하고 다른 일은 모두 잊었다는 말씀입니까?"
초류빈은 바보처럼 웃었다.
"어쩌면 애초부터 그와 원한이 없었는지도 모르네. 왜냐하면 그에게도 그에 따른 고뇌가 있기 때문이네."
낭천은 멍청하게 그 말을 듣고 있다가 갑자기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으하하하...저는 이제야 세상의 많은 일들이 매우 불공도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불공도라고?"
낭천은 싸늘하게 미소지었다.
"불공도(不公道)란 설명을 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한 사람의 일생은 매우 선량한데 불행하게도 한 가지 일을 잘못 처리하여 그 일이 그의 가슴속에 남아 가끔 되살아나 평생의 한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들은 그를 용서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자신까지도 자기를 용서할 수 없는 이상한 것이죠."
초류빈은 그의 말이 점점 항변조로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초류빈도 일찍부터 한 번의 실수가 천추의 한을 맺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낭천은 계속 억양 높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마도 호유성 같은 사람은 그의 일생 동안에 단 한 번밖에는 좋은 일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것은...그가 당신을 구해 주었다는 그 사실만으로 당신은 영원히 그를 나쁜 인간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낭천의 말은 매우 대담하고 또 폐부를 찌르는 것이었다. 초류빈은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그의 뜻을 깨달았다.
낭천은 바로 설소하를 위해 불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낭천은 설소하가 여태까지 초류빈에게 단 한 번의 실수밖에는 없었는데 어째서 시종 그녀를 용서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사랑이라는 것은 확실히 미묘한 것이었다. 달콤할 때가 있으면 괴로울 때가 있고 또 매우 무서울 때도 있었다. 사랑은 사람으로 하여금 바보로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장님으로 만들 수 있었다.
한편 호천강 부자는 그 집을 무사히 빠져나온 것에 대해 그처럼 유쾌하고 즐거울 수가 없었다.
호유성이 먼저 높은 어조로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하...강아, 잘 기억해 두어라. 다른 사람의 약점은 우리들의 기회라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라.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영원히 실패를 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호천강은 즉시 대꾸했다.
"초류빈의 약점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호유성은 눈동자를 음산하게 굴렸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언젠가 우리들 손에 죽게 될 것이다."
그 순간 갑자기 높은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웃음소리는 건너편 지붕 위에서 들려왔다. 호유성 부자가 움찔하여 고개를 돌려보니 한 사람이 지붕 위에 앉아 닭다리를 뜯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호풍자였다. 호풍자는 탐욕스럽게 닭다리를 뜯고 있을 뿐 호유성 부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것은 마치 이 닭다리가 그들 부자보다 더 잘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호풍자는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너희들, 너무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다. 초류빈은 절대 쫓아오지 않을 테니까. 만약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그는 절대 너희들을 애초부터 그 집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호유성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호유성은 이때 초류빈이 비도탈명을 던진 힘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짐작을 한 것이다. 호유성은 분노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호풍자는 절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 호유성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포권의 예를 올렸다.
"요 며칠 동안 그 친구를 보살펴 주신데 대해 정말 감사합니다."
호풍자는 여전히 게걸스럽게 닭다리를 뜯으며 대꾸했다.
"그리 감사할 필요는 없다. 초류빈은 별로 많이 먹지 않았다. 매일 그저 닭다리 두 개에 빵 몇 개면 충분했으니까. 그리고 너를 대신해서 문을 지키는 놈도 정말 백치더구나. 나는 매번 초류빈에게 음식을 갖다줄 때마다 그의 수혈을 찔렀는데 그는 자기가 정말 잠을 잔 줄로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호유성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암중으로 이를 갈았다. 그 즉시 초류빈을 죽이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이때 호풍자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본래 너는 나를 관대하게 대해 주었고 나도 널 도와준 적이 있으므로 우린 이제 아무런 빚도 없는 것이다. 너 같은 인간에겐 난 말도 하기 싫다."
그러나 호유성은 화를 내기는커녕 빙긋 웃으며 듣기만 했다.
호풍자는 입가에 묻은 기름을 닦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내 꼭 네게 할 말이 있다. 마지막 한마디 말이다."
호유성은 약간 허리를 굽혔다.
"기꺼이 듣겠습니다."
호풍자는 경멸에 가득찬 음성으로 선언했다.
"네가 만약 상관금홍과 진정으로 의형제를 맺기 원한다면 목을 매달아 죽는 편이 아마 더 나을 것이다."
이것은 과연 최후의 한마디였다. 호풍자는 이 말을 끝내자마자 지붕 뒤로 미끄러져 내려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호유성은 그의 욕설과는 달리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나와 상관금홍이 의형제를 맺는 일을 뜻밖에도 강호상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군."
담은 몹시 길었다. 초류빈과 낭천은 그 긴 담을 따라 걸으며 이제는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두 사람은 모두 침묵이 만 마디의 말보다 귀중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느덧 곱게 낙조가 대지에 깔리기 시작했다.
고요한 정적과 황혼이 찾아오는 속으로 문득 어느 집 담너머에서 피리소리가 들려왔다. 고즈넉한 황혼을 타고 들려오는 처량한 피리소리는 가끔 사람으로 하여금 옛 일을 생각나게 만들고 또 향수를 느끼게 한다.
피리소리를 듣고 있던 낭천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저는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초류빈은 별 억양없이 물었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초류빈은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엔 참지 못하고 이렇게 반문했다.
"그녀가 자네를 기다릴 것 같은가?"
낭천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이번엔 그녀가 당신을 구해 주라고 해서 온 것입니다."
낭천의 확실한 대답에 초류빈은 그만 말문이 탁 막혀 버렸다. 초류빈은 비록 설소하라는 여인의 인간됨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그녀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낭천은 한숨과 함께 말을 꺼냈다.
"제 인생 중에서 가장 가깝고 친근한 사람은 단 두 사람밖에 없습니다. 저는...당신들이 친구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이 한마디는 어찌나 어렵게 시작했던지 한참 후에야 끝이 났고 또 긴 여운까지 남겼다. 매우 힘들게 말을 한 것으로 보아 낭천의 마음도 몹시 괴로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초류빈은 낭천의 괴로운 눈동자를 대하자 말할 수 없도록 서글퍼졌다. 오직 사랑을 해 본 사람만이 애정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이해할 수가 있다. 이제 피리소리는 점차 멀어지고 있었으나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서글픔을 자아냈다.
문득 초류빈이 입을 열었다.
"나도 그녀를 만나보고 싶네."
낭천은 놀란 눈으로 초류빈을 쳐다보았다.
초류빈도 다정하게 웃었다.
"만약 내가 가는 게 불편하다면 자네가 나 대신 그녀에게 감사를 전해 주게."
낭천은 갑자기 이렇게 소리쳤다.
"저는 다만 당신이 그녀를 상하게 하지 말기를 바랄 뿐입니다."
낭천은 본래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초류빈은 한 번도 설소하를 상하게 만든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초류빈을 상하게 한 것은 오직 그 자신뿐이었다. 그러나 낭천은 설소하를 위해서 이런 말을 한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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