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8일 목요일

강호무정 제1장 과거(過去)와 현재(現在) - 검궁인





비극의 서막





대명(大明) 홍무(洪武) 5년 5월 21일.

하루의 일과를 마친 태양이 황하(黃河)의 나루터 위로 어스름히 기울 무렵. 아름답게 타오르는 석양(夕陽)에 취한 듯 한 소년이 나루터에 앉아 있다.

소년의 나이는 일곱 살 가량 되어 보였는데 석양을 받은 얼굴은 붉게 채색되어 있었고 두 눈은 꿈꾸는 듯 몽롱해 보였다.

아는 사람은 소년의 자세와 눈빛 만을 보고도 그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렇다. 소년은 고기잡이 나간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소년의 집안 내력은 보잘 것이 없었다.

장강십팔채(長江十八寨) 중 비교적 세력이 약한 진산채(進山寨)에 속한 하급 녹림가의 집안이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포구에서 선부(船父)로 일하며 어머니는 수채(水寨)에서 주방일을 보고 있었다.

소년의 할아버지는 어부(漁夫)였다. 지금 소년은 어부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석양은 핏빛으로 타오르다가 차츰 보랏빛으로 변하며 서녘으로 기울어가고, 석양에 물든 황하도 같은 색으로 점차 물들어가고 있었다.

문득 황하 저편으로 고기잡이배들이 나타났다.

"오셨어!"

소년은 반색을 하며 벌떡 일어나더니 배를 향해 냅다 두 손을 흔들었다.

과연 멀리 보이는 깃발은 장강십팔채의 표식을 달고 있었으며 그 배들 중 한 척에는 소년이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고기잡이 배는 모두 다섯 척이었다. 배는 금방 나루터에 도착해 닻을 내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종종걸음으로 내리는 어부들 가운데 한 명의 백발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할아버지!"

소년은 크게 외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자 노인은 팔을 활짝 벌려 달려오는 소년을 마주 안았다.

"헤헤! 할아버지,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아세요?"

"오냐, 오냐. 허허헛......!"

노인은 손자의 재롱이 몹시 귀여운 듯 연신 웃음을 흘리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소년은 노인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소년은 할아버지에게서 나는 비릿한 고기 비늘 냄새가 몹시 좋았다.

그것은 할아버지의 냄새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행복(幸福)의 냄새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소년을 업고 걸었다. 다른 어부들은 조손(組孫)의 그 같은 모습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어부 생활은 늘 단조로운 것이고 이런 사소한 행복은 어쩌면 그들의 인생의 전부인지도 몰랐다.

어느덧 석양은 떨어지고 나룻터에는 어둠이 잦아들고 있었다.

진산채(進山寨).

장강십팔채 중 서열 16위에 해당하는 수채였다.

지금 진산채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일단의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도열한 채 저녁 짓는 연기가 평화롭게 피어오르고 있는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백색무복(白色武服)을 걸쳤으며 가슴에는 승천하는 용(龍) 형상의 수가 놓여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눈빛이 부리부리하고 양 쪽 태양혈이 불룩 솟아 있는 인물들이었다. 문득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모두 준비되었나?"

나직하게 깔리는 음성에는 진기가 충만하게 담겨 있었다.

"옛!"

일제히 대답하는 자들의 두 눈에는 열기, 흥분, 살기(殺氣)와 같은 기운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그럼 쳐라!"

시작(始作)이었다.

이것이 훗날 무림사가(武林史家)들이 정사대전(正邪大戰), 또는 사십일백화대전(四十日白華大戰)이라고 기록한 정도연합맹(正道聯合盟)과 녹림무림(綠林武林)과의 전쟁이었다.

죽음(死)의 광란무(狂亂舞).......

승부는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었다. 오래도록 준비해온 정도연합맹은 전력으로 보나 인원으로 보나 모든 면에서 월등히 앞섰던 것이다.

백화(白華)란 무림을 정화(淨化)하겠다는 백도인의 일방적인 선언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싸움은 불과 40일 동안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막(幕)이 내린 후의 결과는 그야말로 참혹무비한 것이었다.

충천하는 화광(化光)!

"허억...... 콜록......꼭 잡아라 강아(江兒)야......."

노인은 연신 기침을 하면서 불길 속을 달리고 있었다. 노인의 목을 꽈악 끌어안고 등 뒤에 업힌 소년은 겁에 질린 채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소년은 보았다.

아버지의 수급이 하늘로 치솟는 것을.......

어머니의 치마가 뜯겨 허연 허벅지가 보인 채 쫓기다가 헛간에 쓰러지고.......

그 위로 여러 명의 백색무복을 입은 사나이들이 번갈아 능욕을 한 뒤 죽이는 광경을 그는 똑똑히 보았다.

"으아아악!"

비명과 비명!

귀청을 찢는 듯한 비명소리와 함께 충천하는 불길 속으로 노인은 필사적으로 손자 하나를 구하기 위해 달아나고 있었다. 노인은 높은 무공을 지니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전신이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오직 손자를 살려야겠다는 일념 만으로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하며 달아나고 있었다. 얼마나 갔을까?

문득 노인의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노인의 눈에 절망이 어렸다. 그림자들은 사정없이 검을 휘둘렀다. 노인은 두 자루의 검을 맞고 허공을 휘저으며 쓰러졌다. 그러나 쓰러지면서도 행여나 다칠세라 손자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나 쓰러진 노인의 등으로 다시 한 자루의 장창(長槍)이 사정없이 박혔다.

마치 노인이 안고 있던 손자까지 일부러 겨냥한 듯 백색무복의 무사는 장창을 땅에까지 박히도록 깊숙히 꽂았다.

노인은 불에 덴 듯한 고통을 느꼈으나 창이 파고든 순간 손자를 안은 채 필사적으로 몸을 구부렸다.

그는 창 끝이 소년의 얼굴을 온통 피로 물들이는 것을 보면서도 소년의 귀에 대고 필사적으로 속삭이고 있었다.

"강아...... 절대 움직이지 말아라...... 절대로...... 울지 말아라...... 넌 살아야 해...... 반드시...... 끄르륵!"

노인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노인의 혀도 더이상 움직여지지 않았다. 노인의 손에 더이상 힘이 주어지지도 않았다.

노인은 눈을 부릅뜬 채 미처 감지도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할아버지......!'

소년의 얼굴은 할아버지의 등을 뚫고 나온 창에 길게 찢긴 채 온통 피투성이었다. 흘러내린 피가 소년의 눈과 입 속으로 흘러들어와 잠시 후에는 그만 숨이 막혀 기절을 하고 말았다.

긴 어둠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어둠이 가고 거짓말처럼 광명(光明)이 대지에 밀려들었을 때 소년은 할아버지의 시신 밑에서 간신히 기어 일어서고 있었다.

"......!"

소년의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너무나도 공포스런 것이었다.

온통 시신과 불에 탄 잔해(殘骸)뿐,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살아있는 것은 단 하나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한결같이 시신 뿐이요, 폐허 만이 그의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울지 않았다. 죽기 전에 한 할아버지의 말이 소년을 다시는 울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소년은 입술을 악물었다. 그리고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며 내심 피를 토하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 만 울테야......'

"으허어엉......! 할아버지이......!"

소년의 간장을 끊어내듯 애처러운 울음이 폐허가 된 진산채를 울렸다. 소년의 울음은 길게 이어졌고 영원히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소년의 이름은 백리진강(白里眞强)이었다.



대명(大明) 홍무(洪武) 8년 10월 4일 아침.

백제성(白帝城).

이곳은 사천(四川)의 명소였다. 이곳 백제성에서 세인의 존경을 받는 집안이 있었다. 일명 금문장(金文莊)이라 불리는 곳으로 장주(莊主) 백난천(白蘭天)은 유림(儒林)의 선비로 인품이 출중하고 명리에 담백하며 가난한 자를 돌보아 주기로 유명했다.

이 금문장이 때아닌 비보(悲報)로 온통 발칵 뒤집혀지고 있었다.

백난천의 금지옥엽이자 하나뿐인 외동딸 백가소(白茄韶)가 돌연 행방불명된 것이었다.

백가소는 아름답기로 사천일미(四川一美)이며, 학예(學藝)에 뛰어나고 심성 곱기로도 인근에 널리 알려져 명문가의 청혼이 줄을 잇는 소녀였다.

그런데 어제 오후 시녀 국향(菊香)을 대동하고 산책을 나간 뒤로 귀가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로 인해 금문장은 발칵 뒤집혀 식솔 전원이 동원되어 수색을 나갔다.

결국 다음날 새벽 식솔들은 백가소의 몸종인 국향의 시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국향은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그녀는 전라(全裸)로 능욕을 당한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잔혹하게도 그녀의 유두가 도려내어져 있었고 심하게 유린당한 흔적이 나신의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국향의 나이 17세.

백가소보다 겨우 한 살이 많은 나이였다. 그로 인해 금문장은 경악과 충격에서 휩싸이고 말았다.

식솔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었으며 장주인 백난천은 경황이 없는 채 안색이 백지장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대책이 없었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백가소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국향이 시신으로 발견된 후 금문장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온통 어수선한 분위기에 잠겨있을 때였다.

한 명의 청년이 금문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나타나자 금문장의 식솔들은 모두 반가운 표정으로 맞이했다. 뿐만 아니라 장주인 백난천은 구세주라도 만난 듯 맨발로 뛰어나와 맞이하고 있었다.

백난천은 급히 그를 서재로 불러들였다.

"여보게! 마침 잘 왔네. 큰일이 났네."

백난천은 그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청년에게 얘기했다. 얘기를 듣는 청년의 얼굴은 점차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청년은 금문장의 젊은 집사(執事)였다.

그는 삼 일 전 장주의 심부름을 갔다가 돌아온 것이었다. 이 청년은 금문장의 대소사를 도맡아 처리해왔으며 차분하고 정확한 일처리로 인해 모든 사람들의 신임을 사고 있었다.

그는 약관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나이였으나 그가 하는 일은 언제나 실수가 없고 완벽했던 것이다. 따라서 백난천조차 그를 태산같이 믿고 의지하고 있었다.

얘기를 다 듣고난 청년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국향의 시신은 어디 있습니까?"

"별원에 안치해 놓았네."

"일단 시신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그, 그러세."

청년은 별원으로 가 국향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관을 보았다. 그는 서슴없이 관뚜껑을 열어 젖혔다.

"......."

관 속에는 국향의 시신이 누워 있었다. 발견 당시의 모습이 하도 처참하여 그녀의 몸에는 흰 천을 덮어놓고 있었다. 청년은 천을 걷어 제쳤다.

그러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알몸이 나타났다. 아무리 죽은 시신이라 하지만 한창 무렵의 처녀였으므로 백난천은 민망함을 금치 못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눈썹 한 번 까딱하지 않고 국향의 나신을 살펴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국향의 육체 곳곳을 면밀히 조사하고 있었다.

"......."

그러는 동안 청년의 안색은 점차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는 시신의 형태를 자세히 관찰한 후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해 낸 듯했다.

먼저 흉수(凶手)는 한 명이 아니었다.

적어도 셋, 또는 넷은 된다. 그것은 국향을 능욕한 자의 숫자였다. 또한 변태적이며 야비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그녀의 육체를 가지고 희롱했다는 것이 곳곳에 드러나 있었다.

손자국, 이빨 자국, 국향의 국부에 남아 있는 상흔들.......

그러나 청년 집사의 마음이 무거워진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내심 놀란 것은 바로 국향의 사인(死因) 때문이었다. 국향의 직접적인 사인은 능욕 때문이 아니라 어떤 무공(武功)으로 인한 내부적인 공상(功傷)에 의한 것이었다.

그것은 아주 치밀하고 교활한 짓이었다.

그녀를 죽인 자는 무림인이되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고의로 강호상에서 가장 흔한 내력지기(內力之氣)를 이용하여 그녀의 장부를 파열시킨 것이었다.

따라서 어느 파(派), 어느 자의 소행인지 짐작할 수도 없게 만든 것이었다.

"무슨...... 단서라도 발견했나?"

백난천은 청년이 오랫동안 말이 없자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잠시 생각 좀 해봐야겠습니다."

"제발...... 범인을 잡아 주게. 관부(官府)에서도 다녀가긴 했네만 아무래도 이 일은 자네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네."

과연 그렇다.

관부에서는 국향의 시신을 슬쩍 살펴보고 갔을 뿐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도 못했다.

청년은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그 후 반나절을 그는 방 안에 틀어박혀 명상에 잠겨 있었다. 백난천은 청년이 다시 나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으나 저녁이 될 때까지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저녁 무렵,

청년은 비로소 밖으로 나왔다.

그가 방 안에서 나왔을 때 그의 손에는 한 자루의 녹슨 철검(鐵劍)이 들려 있었다.

금문장의 식솔들은 그가 검을 갖고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평소에 말이 없는 그였기에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청년 집사는 아무도 모르게 장원을 빠져 나가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있었다.

국향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금문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야산이었다.

그곳에 당도한 청년은 면밀히 주위의 흔적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는 밤새도록 반경을 넓혀가면서 흔적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별 무소득이었다.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

청년은 바위 위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어느덧 어둠이 가고 동이 터오르고 있었다. 그동안 청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새벽 여명이 사위를 비출 무렵 그는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 청년의 눈은 어떤 결의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추적(追跡).

바야흐로 추적이 시작되었다.

놀랍게도 청년의 눈은 야수안(野獸眼)이 되어 있었고, 길바닥을 훑어보는 그의 눈빛에서는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매서운 광채가 점차 강하게 번뜩이기 시작했다.

청년 집사, 그의 이름은 장천림(長天林)이었다.



제1장 과거(過去)와 현재(現在)



홍무(洪武) 8년 10월 7일. 오 시(午時).

사천(四川)의 중심에 위치한 백림(白林).

백림의 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주루(酒樓)에 흑의를 입은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장천림(長天林).

이것이 그의 이름이었으나 그 이름을 아는 자는 하늘 아래 몇 되지 않았다.

장천림은 소면 한 그릇을 시켜 놓았으나 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

벌써 사흘째 그는 백난천의 금지옥엽 백가소를 찾아 헤맸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사실 그는 백가소를 찾는 일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막막한 심정이었다. 더구나 그는 수 년 만에 세상에 나온 것이었다.

그동안 장천림은 오직 금문장에만 틀어박혀 있다시피 했다. 그는 지난 과거는 기억 저편에 아득히 묻어두고 아주 단순한 삶에 파묻혀 있었다.

하기야 과거는 기억하기도 싫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으므로.

"......."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백가소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그는 입맛을 완전히 잃고 있었다.

그는 소면에는 젓가락도 대지 않은 채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는 뿌연 이슬이 어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창가에서 내려다보이는 가도에 어떤 행렬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그의 뿌연 시야에 들어왔다.

일단의 병사들이 죄인을 호송하는 듯 오라에 묶인 자들을 수레에 싣고 다가오고 있었다. 사오십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삼엄하게 경비하는 것으로 미루어 무척 중요한 죄인이거나 흉악범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덜컹덜컹.......

수레는 주루 앞을 멈추지 않고 지나가고 있었다. 이때 장천림의 옆자리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저게 뭐지?"

장천림은 그들이 아까부터 술잔을 기울이던 중년 상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것도 모르나? 이런....... 소식이 깡통이구먼?"

"아니...... 뭘?"

"저들이 누군지 아나? 빌어먹을, 아주 나쁜 놈들이라구. 저 놈들은 부녀자들을 납치해 노예로 팔아먹는 악질 노예 사냥꾼들이라구. 이번에 관에서 벼르고 벼르다가 일당을 체포하여 압송해 가는 중이라네."

"노예 사냥꾼?"

약간은 멍청해 보이는 상인이 의아한 듯 반문한다.

"그런 직업도 있었나?"

"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저 놈들은 패를 이루어 예쁘게 생긴 아녀자라면 처녀건 부인이건 가리지 않고 납치해 실컷 농락한 후 팔아먹는 놈들일세. 쯧....... 저 놈들에게 희생된 부녀자들이 수백...... 아니 수천이 넘었네."

"허허....... 그런 작자들이 있다니."

"하지만 이번에 관에서 잡아 들였으니 곧 일망타진될 거야."

"에이! 저런 놈들은 그저 광장에서 오마분시(五馬分屍)를 시켜버려야 해!"

상인은 흥분한 듯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고 있었다.

"아암! 사지를 갈가리 찢어죽여야 하고 말고!"

한편 사라져가는 행렬을 바라보던 장천림의 눈이 일순 번쩍 빛나고 있었다. 불현듯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서고 있었다.

탁!

그가 탁자에 내려놓은 것은 두어 푼 가량 되는 은자였다.

문득 바람소리가 난다고 했을 때, 두 상인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창 밖을 바라보며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흑의청년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땅땅땅땅땅.....

신경을 온통 뒤집어 버리는 날카로운 철판(鐵板) 두드리는 소리다.

어느새 아침이다. 또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덜커덩!

밖으로부터 굳게 잠겼던 창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어 눈까풀 위로 뿌연 빛이 자극적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713호는 눈을 떴다.

석실이었다. 고작해야 이십여 평(坪)밖에 되지 않는 비좁은 석실 안에서 삽십여 명 정도의 아이들이 부시시 눈을 비비며 일어나고 있었다.

딱딱한 돌바닥에 침구와 침낭이 제대로 있을 리가 없었다. 적당히 자리잡고 쭈그려 누우면 그 자리가 곧 침대요, 침실인 셈이었다.

하루 종일을 시달리고 지쳐버린 심신은 불면증 따위의 사치를 불러 들일 리가 없었다. 등이 땅에 닿기만 해도 촌각(寸刻) 안에 깊이 잠들어 버리는 아이들이었다.

713호가 일어나 새벽 추위에 잔뜩 굳어있는 육체의 신경세포를 되살리기 위하여 관절을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뚜둑...... 뚝......!

손가락 마디와 허리, 무릎의 관절에서 둔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무심하게 들으며 작은 운동을 하는데 옆에서 한 아이의 절망적인 중얼거림이 들렸다.

"또 죽었군."

713호는 시선을 돌렸다.

한 쪽 구석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소년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 시간에 여전히 누워있다는 것은 곧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바로 옆에서 사람이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무관심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하나 둘 밖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있어 동료들의 죽음이란 이미 관심권 밖에 있었다. 워낙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일이었으므로.

713호도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이 일과(日課)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쯤이면 시체는 흔적도 없이 치워져 있으리라.

사방이 병풍같은 절벽으로 쌓여 있는 공지,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계곡 한가운데 있는 분지였다.

대략 천여 평 남짓한 공지에는 200여 명 가량의 비슷한 나이 또래의 소년들이 도열하고 있었다. 소년들이 바라보는 정면에는 나무로 높이 축조된 단(檀)이 있었다.

단 위에는 거대한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 대원(大元)

금색 글씨로 그같은 글이 수놓아져 있었다. 단 위에는 팔인의 금색무복을 입은 중년교두(中年敎頭)들이 위풍당당한 자세로 우뚝 서 있었다.

713호가 소속되어 있는 청룡단(靑龍檀) 스물일곱 명, 아니 이제는 스물여섯 명으로 줄어든 소년들도 대열의 가운데에 섰다.

둥........

어디선가 묵직한 징소리가 울렸다.

이어, 조회(朝會)가 시작되었다. 조회는 늘상 있어온 형식을 따랐다. 간단히 훈시가 있은 다음 대원제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게 한다.

"대원제국 만세(大元帝國萬歲)!"

"황제폐하 천세(皇帝陛下千歲)!"

삼창의 발호가 있고서 조회는 끝났다. 조회는 불과 뜨거운 차 석 잔을 마실 시간에 끝난 것이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200여 명의 소년들은 구분이 되어 있었다.

선두에 깃발이 있고, 그 깃발에는 각각 다른 표식이 있었다.

- 청룡단(靑龍檀).

- 주작단(朱雀檀).

- 현무단(玄武檀).

- 백호단(白虎檀).

등이 그것이었다.

삐이이익!

팔인의 교두들이 동시에 호각을 불었다. 그러자 소년들은 각기 소속대로 분산되어 흩어졌다. 그들은 하루의 훈련을 시작하기 위해 대열을 나누는 것이었다.

하루를 시작하는 713호의 눈빛은 암울하기만 했다.

'오늘도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것이 그의 중얼거림이었다.

때는 대원 말기(大元末期), 절강성(浙江省) 최남단의 절곡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홍무 8년 10월 8일 새벽.

백림(白林)에서 사십여 리 떨어진 숲길을 두 사람이 달리고 있었다.

"헉...... 하아...... 하......!"

정병(鄭兵).

그는 가슴까지 치밀어 오르는 벅찬 호흡을 가다듬지 못하고 괴로워 하고 있었다. 죽어라 뛰고는 있으나 그의 마음은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다시 잡힌다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숲길을 달리면서도 못내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자신의 옆에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함께 달리고 있는 청년에 대해서였다.

정병은 이른바 노예 사냥꾼으로 불리는 조직의 소두목이었다.

오늘 새벽 그는 관청(官廳)의 뇌옥에 갇혀 있다가 한 청년으로부터 극적인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도주(逃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근 두 시진 이상을 쉬지 않고 달리면서도 그를 뇌옥에서 구해준 청년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왜?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중죄인인 자신을 구했는지 알 수 없었다.

만일 이 사실이 알려지면 청년은 무서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구했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청년은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규칙적인 보폭으로 뛰고 있을 뿐이었다.

"헉...... 허헉!"

마침내 정병은 더이상 뛸 수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마침내 그는 발을 멈추었다.

"자...... 잠깐만......."

그러자 청년도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바로 금문장의 젊은 집사 장천림이었다.

정병은 거친 숨을 돌리며 주위를 살펴 보았다. 그들이 멈춘 곳은 숲 속으로 꽤나 들어와 있어 어지간해서는 남들의 눈에 띄기가 힘든 곳이었다. 그는 안심하고 장천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정병은 내심 흑!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청년의 시선이 마치 뱀처럼 차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때 장천림은 그의 숨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나이 십육 세. 이름 백가소(白茄韶). 붉은 장미가 수놓아진 백의를 입고 있으며 맑은 눈동자에 목덜미에는 손톱 반 만한 점(點)이 있다. 그녀는 지금 어디 있느냐?"

".......?"

너무나 뜻밖이었다. 정병은 미처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입을 벌린 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나이 십육 세. 이름 백가소......."



챙챙챙......!

"반란(叛亂)이다! 쫓아라......!"

713호는 잠결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떴다.

".......!"

한 방에 있던 다른 소년들도 이미 깨어 있었다. 그들의 눈은 형형히 빛나고 있었고, 가슴은 눈에 띄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탈출이다.

소년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그런 말을 내뱉는 듯 했다. 이때였다.

쾅!

단단히 밖으로부터 잠겨 있던 창문이 박살났다. 동시에 화광이 방 안을 밝게 비쳤다. 소년들은 희망과 불안으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이때 벌떡 일어서서 외치는 소년이 있었다.

"백호, 주작, 현무단의 동료들이 드디어 일어섰다! 자! 우리들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 언제까지나 노예로 벌레처럼 살아갈 것이냐? 동료들이여! 검을 들어라! 자유(自由)를 찾자!"

이렇게 외친 소년은 744호였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먼저 부서진 창문을 통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가자!"

"나가자! 싸우자!"

744호의 행동에 고무된 듯 몇 명의 소년들이 소리치며 뛰어 나갔다. 713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사실 얼마 전부터 이런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 각 단에 있던 소년들이 은밀히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모종의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그것은 이곳을 탈출하자는 모의였다. 조회 때마다 연락이 오고가는 것을 713호는 몇 번인가 보았다. 그런데 드디어 오늘을 거사일(擧事日)로 잡은 모양이었다.

실상 이 방에서도 744호는 몇 차례 선동적인 발언을 하였으며 그에 따라 소년들도 불만을 토로하고 그에게 동조하는 기운을 보이고 있었다.

드디어 일은 기어코 터진 것이다.

"......!"

713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석실 안에는 어느새 자신밖에 없었다. 모두가 밖으로 뛰쳐나간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 남아 있을 아이는 없었다. 죽으면 죽었지 이왕이면 폭풍 속에 자신을 던져 버리고 싶은 것이 이곳의 아이들이었다.

713호는 조용히 일어섰다.

그는 한 쪽 벽에 덩그라니 세워져 있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철검(鐵劍)을 집어 들었다.

그는 침착했다.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고 다른 아이들과 달리 흥분하지도 않았다.



"으아아아아!"

정병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어찌된 셈인지 목젖이 굳어 아무런 비명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는 무섭게 사지를 비틀어대고 있었다.

"모른다."

그 말이 자신의 입 밖에 나온 순간부터 시작된 고문이었다. 아혈조차 제압당한 채 받는 고문은 한도 끝도 없었다. 영겁의 지옥에 떨어진 양 고통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더욱 다양해지고 더욱 배증하고 있었다.

그는 너무도 괴로워 벌레처럼 바닥을 기며 손으로 땅을 긁었다. 손톱이 빠지고 모래알이 손톱 속으로 들어가 박혔다. 뿐만 아니라 무릎이 온통 까지고 뼈가 드러나고 있었다.

그래도 고문은 조금도 멈추어지지 않았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

마침내 그는 애원했다.

"흐으...... 차라리...... 죽여 주시오!"

구슬픈 눈으로 장천림을 바라보며 빌고 또 빌었다. 벌써 수백 번도 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할 수 없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무엇이든 아는 대로 대답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장천림은 그것을 묵살한 채 더욱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더 다양하고 극랄한 고문을 가할 뿐이었다.

정병은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 이렇게 극악스런 경우를 당해 본 적이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고통이 사라지며 한 가닥 차가운 음성이 귓전으로 흘러 둘어왔다.

"내가 어릴 적에 수천 가지의 고문술(拷問術)을 배웠었지. 그때는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지금와서는 무척 요긴하게 쓰게 되었다."

"......."

"너무 고통스러워 말라.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이것은 내가 아는 고문 수법 중 초보적인 것에 불과하다."

"......!"

말을 할 수는 없었으나 정병은 가능하기만 하다면 머리를 땅에 부딪쳐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근육이 제멋대로 뒤틀리고, 심장을 천만 마리의 개미가 갉아 먹는 듯 하고, 오장육부가 비비 꼬인다.

어디 그뿐이랴?

눈알을 천 개의 침으로 찌르는 듯하고, 심줄이 뽑혀 나가는 듯한 고통이었다. 그는 오줌과 똥을 내갈겼으며 체중이 순식간에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야말로 얼마나 격심한 고통이었는지 알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겨우 시작이라니?

으흐흐...... 차라리 죽여...... 죽이라구......!

"자, 시간을 줄이기 위하여 한 번만 더 묻겠다. 그녀의 행방은?"

순간 아혈이 거짓말처럼 풀리며 정병은 입이 자유로와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비명을 지르듯이 입을 열었다.

"예! 예! 어디 있는 지 알 것 같습니다요! 알고 말고요...... 하지만......"

"하지만은 없다. 어디 있느냐?"

장천림의 음성은 비정하기만 했다.

"우...... 우리의 짓이 아니고...... 해...... 해룡파(海龍派)의 짓일 겁니다. 정말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런 소녀는......"

벌벌 떠는 정병을 차갑게 내려보면서 장천림은 물었다.

"해룡파?"

"으흐흐...... 예...... 저희 말고도 가끔씩 이 지역에 들어와 부녀자를 납치해 가는 놈들입니다. 요 며칠 전에도 그들이 이곳을 지나갔습니다. 아마 그때 어른께서 찾으시는 분을 납치했을지도......"

"확실한가?"

"화...... 화...... 확실합니다!"

"그들은 어디로 갔느냐?"

정병의 온 몸은 사시나무처럼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예예...... 그들은 주로 양자강 줄기를 따라 활동합니다. 사천과 호북의 접경지역인 무협(巫峽)에 산채가 있다고 들었는데......"

정병은 심장이 멎는 듯 했다. 청년의 눈에서 파란 불빛이 흘러나오는 듯 했기 때문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나...... 나리...... 제발 목숨만......"

장천림은 몇 가지를 더 물었다.

그는 아주 냉혹했다. 마침내 그는 알고 싶은 것을 알아낸 뒤 떠나갔다.

그가 떠나버린 숲 속에는 심장을 철검으로 관통당한 정병의 시체 만이 눈을 부릅뜬 채 누워 있었다.

강호무정 제2장 반란(叛亂) - 검궁인





제2장 반란(叛亂)



자욱한 연기와 사방을 울리는 함성소리!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

713호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시체들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문득 그의 등 뒤에서 살기가 다가왔다.

".......!"

빙글 돌아선 그의 눈에는 한 명의 금색 무복을 입은 중년인이 보였다. 중년인의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금검(金劍)이 들려 있었다.

"칠백십삼 호....... 너마저......?"

중년인의 고통스런 음성에는 실망이 담겨 있었다.

"......."

713호의 눈빛은 더욱 암울해졌다. 금의중년인은 자신을 가르치던 교두 중의 한 명이었다. 하나같이 음악하고 잔인한 교두들 중에서도 비교적 그는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

교두는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며 달려 들었다. 그의 금검은 패천마혼세(覇天魔魂勢)라는 초식이었다.

713호는 간신히 피했다. 그러나 교두는 또 다시 그에게 달려들었다. 지금 두 사람이 있는 곳은 밖으로 통하는 요로로 누가 죽던 양보를 해야할 위치였다.

이리 저리 다섯 차례나 몸을 피하던 713호는 문득 검세가 사나와지는 것을 느꼈다.

파츠웃!

"......!"

그의 왼쪽 어깨가 불에 덴 듯이 화끈해지며 피보라가 일어났다. 순간 713호는 반사적으로 오른쪽으로 몸을 틀며 수중의 철검을 그었다.

슈욱!

밤하늘을 가르는 유성(流星)과도 같다.......

언젠가 그는 이 검법을 배우면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눈 앞의 교두가 가르쳐준 검법이었다.

유성잔월(流星殘月)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검초식이었다.

"크아악!"

713호의 검이 교두의 목을 날렸다. 그는 자신이 가르친 제자에게, 그것도 그가 직접 전수한 유성잔월(流星殘月)이라는 검법 아래 고혼이 되었다.

"......."

713호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철검에서 흘러내리는 핏방울과 자신의 왼쪽 어깨에서 뿜어지는 피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똑같은 피. 똑같은 색이었다.

그의 표정이 점차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의 뇌리에는 지난 십여 년간 당해왔던 모든 고통과 수모들이 서서히 소용돌이치며 어떤 응어리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눈길을 돌려 함성이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동공 깊이 가라앉아 있던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마침내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순간 그의 신형은 함성이 들리는 곳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차차차창......!

본부 앞 공지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난전(亂戰)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싸움은 거의 일방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절곡 외곽을 경비하던 수백 명의 흑의인들에게 소년들이 몰리고 있으며, 이미 중과부적으로 당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수세에 몰린 소년들은 이제 수십 명밖에 남지 않았으며 그나마 태반이 중상을 입고 몸을 운신하기도 힘든 입장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밥 한 끼 지을 시간 쯤이면 반란이 평정될 것이다.

광장에 쌓여 있는 시체들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 그야말로 혈하를 이루고 있었다.

"크흐흐......! 어서 무기를 버려라! 너희들의 탈출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투항하는 자는 살고, 끝까지 반항한다면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다."

흑의인들은 기세등등하게 소년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때였다.

휘...... 익!

문득 한 가닥 인영이 흑의인들 사이로 파고 들었다. 이어 검광이 눈부시게 일어나더니 상황이 돌변했다.

"크아악!"

여기저기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리며 흑의인들의 진용이 흐트러지는 것이 아닌가?

놀라운 일이었다. 713호가 뛰어든 순간 상황은 일시에 변화를 일으키게 된 것이었다. 713호는 흑의인들의 진세 중앙으로 파고 들어 가차없는 살수를 전개하고 있었다.

그의 검법은 악랄하고 쾌속했다. 흑의인들은 미처 자세를 잡기도 전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정확!

신속!

713호의 검이 한 번씩 호선을 그릴 때마다 정확하게 한 명씩의 목이 날아갔다. 잠시 후 장내의 판도는 달라졌다.

수십 명의 흑의인들이 쓰러지자 진세에 구멍이 뚫렸으며, 용기를 얻은 소년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덤비니 그 상황에 소년들은 용기백배하여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

한편 713호는 전세가 소년들에게 유리해지자 다시 다른 방향으로 신형을 날렸다.



이름모를 산동(山洞).

어두침침한 산동 안으로 새벽 여명이 막 들어서려 하고 있었다. 그 여명에 동굴 안의 풍경이 어스름히 드러나고 있었다. 동굴 벽에 죽은 듯이 기대어 앉아 있는 네 명의 소년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713호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피로 목욕을 한 듯한 모습이었다.

아수라(阿修羅).

그렇다. 새벽까지 계속된 혈전은 지옥의 아수라들이 싸운 것이나 다름없는 악전이었다. 그 속에서 그들은 살아남았던 것이다.

이백여 명에 가까운 소년들이 다 죽고 이곳 산동에 웅크리고 죽은 듯이 늘어져 있는 소년들이 생존자의 전부였던 것이다. 그나마 713호의 눈부신 활약이 없었다면 그들도 모두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절곡을 벗어나 이곳까지 달아났다는 것을 의미할 뿐, 저들의 추적은 계속될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대체 대원 천하에서 그들이 숨어 있을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

죽음같은 침묵이 흘렀다. 그런 가운데도 동굴 속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점점 안으로 비쳐들고 있었다. 문득 네 명의 소년들 중에서 몸집이 다소 뚱뚱한 소년이 입을 열었다.

"모두 죽었겠지......?"

소년의 오른쪽 어깨 부분에 76이라는 번호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것은 소년들의 고유번호를 의미했다. 나머지 소년들도 같은 부분에 번호가 수놓아져 있었다.

76번이라면 현무단 소속이다.

1번부터 200번까지는 현무단, 201번부터 400번까지는 주작단, 401번부터 600번까지는 백호단, 601번부터 1000번까지는 청룡단 등, 도합 1000명의 소년들이 조직을 나누어 훈련을 받았다.

물론 조직에 따라 받는 훈련의 종류도 틀렸다.

현무단은 변장술과 잠입, 추적을 전문으로 하며 주작단은 독극물 및 폭약, 암기술을 전문으로 한다. 백호단은 전술 및 전략, 기관장치 등을, 청룡단은 암살 및 실질적인 살수훈련을 전문적으로 배우게 되어있었다.

76번 현무단 소속의 소년이 한 말은 아무런 메아리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공허하게 끝났다. 소년들은 아무도 대꾸하지 않고 땅바닥 만을 내려다 볼 뿐이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무렵에 303번 소년이 툴툴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후후....... 잘 된 일이야. 이제 모두 진짜 편해질 테니까 말야."

303호는 아무도 대꾸하는 자가 없는 가운데 계속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는 훈련 도중에 죽는 아이들을 부러워 한 적이 있었어. 그들에겐 더이상의 고통이 없을 테니까....... 후후...... 이제 나도 곧 그렇게 되겠지. 안 그래?"

소년들은 아무도 말이 없었다. 잠시 후 76번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젠장! 나는 당장 죽어도 좋지만 한 가지 알고 싶은 것이 있어."

".......?"

그 말에 소년들은 일제히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궁금한 것이 있다니.......?

76은 문득 실성한 듯이 웃었다.

"내 이름이 뭔지 말이야........ 히히히........ 그것마저 안 된다면 하다 못해 우리가 무엇때문에 이런 지옥의 훈련을 받아야 했는지 말이야........ 히히........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죽기는 정말 억울하단 말이야."

그렇다.

그것은 소년 모두의 공통된 의문이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을 몰랐으며, 또는 왜 절곡에서 그런 지독한 훈련을 받아야 하는 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죽음보다도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소년들은 동감하고 있었다. 76번의 심정은 모두의 심정인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서 걷기 전부터 이곳에서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따라서 소년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훈련의 연속뿐,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대부분이 막 젖을 뗄 무렵부터 이곳에서 생활해왔으므로.

소년들이 76번의 말에 한결같이 공감한 채 침울한 분위기에 잠겨있을 때 문득 한 쪽 구석에서 착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우리들은 원(元)에 대항하여 반원운동을 벌이는 열사(烈士)들을 척살하기 위해 훈련받는 살수 집단이야."

".......?"

소년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

"원은 너희들도 아다시피 몽고족들이 이 땅에 세운 제국이다. 그들의 학정은 한족을 말살시키고 있다. 따라서 한족을 부활시키려는 열사들은 반원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쳐 노력하고 있다. 비록 처음에는 조그맣게 시작된 혁명이었으나 시간이 흐를 수록 그 운동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마침내 대원의 힘을 약화시키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원에서는 그들을 척살하기 위한 힘이 필요해진 것이다."

소년들의 안색이 변했다. 그야말로 처음 듣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더욱이 그 반원 조직은 은밀할 뿐더러 무림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어 보통의 군사로는 제압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같은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훈련시켜 전문적으로 지사들을 척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혈랑대(血狼隊)........ 일명 혈명대(血命隊)라고도 불리우는 우리들이지."

".......!"

아이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말이었다.

이제까지 그토록 무서운 훈련을 받아 오면서도 교두들은 아무도 그 목적에 대하여 이야기해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구석에 앉아 있던 소년의 설명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들의 훈련은 앞으로 이 년이면 끝나게 되어 있었지. 그때가 되면 우리는 원의 앞잡이가 되어 수많은 한족의 열사들을 죽이게 되었을 거야."

이때였다. 76호가 그의 말을 막으며 물었다.

"잠깐, 육백 호! 너는 어떻게 그토록 자세히 알 수 있었지?"

600호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흘렀다.

"나는 육백 호가 아니야. 내 이름은 장하영(長河英)이야."

"장....... 하....... 영?"

소년들은 놀라 마지 않았다. 600호의 이름이 장하영이라는 것에 그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의 이름이 장하영이라서가 아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이곳에 와 있었으므로 대부분 자신의 이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600호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소년들의 시선은 일제히 장하영에게 쏠리고 있었다.

경이(驚異)!

아니 차라리 경악에 가까운 시선들이었다. 장하영은 늠름하게 어깨를 으쓱하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반원 세력의 중추(中樞) 역을 하고 계시는 하북방면 백련대(白蓮隊) 대장군 장무혁(長武赫)의 아들이다. 내 나이 여섯 살 때 목적을 가지고 이곳으로 침투했다."

".......!"

동굴 안에 있던 나머지 삼인의 소년들은 마치 쇠뭉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한참 후에야 76호가 불현듯 뭔가를 깨달은 듯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장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곳의 반란은 내가 주도해서 일어났다. 자그마치 십 년 동안에 걸쳐 면밀하게 계획한 끝에........"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돌연 76호가 소리를 지르며 장하영에게 덤벼들었다. 그의 두 눈은 잔뜩 부릅떠져 있었으며 얼굴에는 온통 증오가 어려 있었다.

"으와아아악!"

그는 괴성을 내지르며 장하영의 멱살을 잡고 주먹으로 그의 면상을 마구 갈기는 것이 아닌가? 그의 갑작스러운 발작에 다른 소년들은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두 명의 소년이 달려들어 간신히 그를 떼어냈다.

"놔! 놓으란 말이야! 저 놈 때문에 수많은 동료들이 무참하게 죽었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76호는 울부짖으며 몸부림을 쳤다. 동굴 안은 삽시에 그의 고함과 욕설로 뒤덮였으며 소년들은 그를 말리느라고 애를 썼다.

이때였다. 이제까지 한 번도 입을 연 적이 없었던 713호가 묵직한 어조로 말했다.

"그만들 해. 오히려 잘 된 일이야. 언제까지나 그들의 개가 되는 훈련을 받으며 이유도 없이 죽는 것보다는 낫다."

".......!"

그의 말은 결정적이었다. 한데 엉겨붙어 뒹굴던 소년들은 일제히 동작을 멈추었다.

713호의 말은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소년들은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더니 힘없이 동굴 벽에 기댄 채 다시 애초의 침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얼마나 긴 침묵이었을까?

문득 303호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칠십육 호, 이름을 알고 싶다고 했지?"

".......?"

"후훗........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죽기 전에 이름이나 알고 싶어. 아니....... 하다못해 아무 이름이나 하나 갖고 싶어."

말을 잠시 중단한 303호는 고개를 돌려 장하영을 돌아보았다.

"이봐! 육백 호, 아니 장하영. 보아하니 네 놈은 우리보다 배운 것이 많은 것 같은데 우리들의 이름을 지어주지 않겠나?"

장하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뜻밖의 제의였다. 303호는 장난스런 기분으로 말을 이었다.

"내 성(姓)은 석(石)이었던 것 같아. 왠지 그런 기분이 들어. 그리고 어렸을 적에 어떤 숲 속에서 살았던 것 같아. 어때? 내 이름을 하나 만들어 주는 것이?"

장하영은 씨익 웃었다. 그는 알맞은 체격이었으나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소년이었다. 어쩐지 나이보다 더 성숙한 느낌이 든다고 할까.

"좋아, 친구. 자네의 성은 석씨이고 이름은 돌아갈 회(廻), 수풀 림(林)이라고 하자. 그런즉 석회림(石廻林)이 네 이름이다."

순간 303호는 박수를 쳤다.

"그래 좋군! 고마워 장하영. 친구들! 지금부터 나는 석회림이다. 그렇게 불러줘!"

"나도 하나 지어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아침 하늘이다. 가장 맑고 신선하거든!"

76호의 말에 장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성은 조씨(朝氏)야. 그리고 이름은 천백(天白)으로 하지. 어떤가? 아침 조(朝)에 하늘 천(天), 흰 백(白). 아침의  맑은 하늘을 의미하지."

"이야아! 멋있군! 그래! 앞으로 내 이름은 조천백이다. 조천백........ 으하하하하!"

303호나 76호는 미칠 듯이 좋아하고 있었다. 어찌나 좋아하는지 그들은 눈물까지 질금질금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웃음은 길게 가지 않았다. 들뜬 마음이 가라앉게 되자 그들은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제까지 어떤 한 사람만이 그들의 분위기에 동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었다.

마침내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713호에게 향했다. 그는 이제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도 그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713호야 말로 그들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아무도 살아서 이곳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 아닌가?

713호는 소년들 중에서 유일한 청룡단 소속이었다.

청룡단은 전문적인 자객으로 키워지는 조직이었으므로 그들 중에서 가장 무공이 강한 편이었다. 다만 그 한 가지 사실 만 가지고도 713호는 존경을 받을 만 했다.

그런데다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무혼(武魂)과 투지, 죽음을 불사했던 놀라운 정신력은 어떠한 것이었던가?

그가 아니었더라면 아무도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소년들은 일제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713호도 이젠 이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713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침내 그는 입을 열었다.

"나?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다. 또한 좋아하는 것 따위도 없어."

그 한 마디뿐이었다. 그는 다시 입을 굳게 다물고 말았다. 이렇게 되니 소년들은 713호를 위해 머리를 짜기 시작했다. 어쩐지 그를 위해 좋은 이름을 지어주어야만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이 들었던 것이다.

마침내 장하영이 좋은 생각이 난 듯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 칠백십삼 호는 우리의 은인이다. 그러니 그에게 우리들의 이름 중 한 자씩을 선사하는 것이다."

".......?"

뜻밖의 제의였다. 소년들이 미처 뭐라 답하기도 전에 장하영은 거침없이 말했다.

"나는 나의 성인 장(長)자를 주겠다. 그리고 너는 천(天)자, 넌 림(林)자를 주는 것이 어떠냐? 장천림(長天林), 그 이름이 어떠냐?"

".......!"

그 순간 말없이 기대앉아 있던 713호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도 비로소 감정이 동하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그는 입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의 이름이 장천림이라고........?"

"하하하! 멋있다. 장천림! 그 이름이야말로 제일 멋지다."

"아암, 정말 훌륭한 이름이야."

소년들은 박수를 치며 자신들의 일처럼 기뻐했다. 바로 그때였다. 밖으로부터 인기척이 들려온 것은.

".......!"

소년들은 아연 긴장했다. 어느새 추적자들이 쫓아온 것이다. 이제까지의 화기애애했던 소년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졌고 두 눈은 긴장으로 인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잠깐!"

막 철검을 들고 뛰쳐 나가려던 소년들을 막은 것은 장천림이었다.

그는 의아해하는 세 소년, 즉 장하영, 석회림, 조천백에게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여기서 한꺼번에 밖으로 나가면 모두 죽는다. 내가 놈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할 테니 너희들은 그 사이에 흩어져서 달아나라."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천림........"

소년들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그들은 강한 아이들이었다. 이제껏 그들은 한 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장천림의 말에는 한결같이 눈시울이 젖고 있었다.

"하지만 넌......."

장하영의 말에 장천림은 담담히 말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끌 능력이 있는 자가 있느냐? 그건 오직 나밖에 할 놈이 없어."

그는 그 말을 남기고 철검을 안은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야아아아!"

멀어져가는 장천림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

동굴 안의 소년들은 벽에 기대여 숨을 죽인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장천림....... 과연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들은 한결같이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며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장하영이 주먹으로 눈을 문지르며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도 나가자.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 이대로 개죽음을 하기에는 너무나 억울하지 않느냐? 어떻게든 살아서 복수를 해야 해! 우리들을 위해 놈들에게 달려간 장천림을 위해서도 말이야."

그 말에 소년들은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

너의 말이 맞다........

우리는 살아야 해........



"놈은 지쳤다!"

휘익! 휙휙휙!

살기에 찬 호통과 함께 인영들이 어지럽게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들은 먹이를 쫓는 사냥개처럼 일제히 하나의 목표를 향해 사정권을 좁혀가고 있었다.

장천림은 막다른 길로 쫓기고 있었다. 그의 무공이 아무리 높다해도 중과부적이었다. 그는 벌써 이삼십여 명을 해치웠으나 이제는 탈진상태였다.

더욱이 그는 지금 달아나고 있는 길이 막다른 절벽으로 향해져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가는 데까지는 가야 했다. 자신 하나의 희생으로 세 명의 소년들이 살아날 수 있으면 그것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

너희들은 살아남아라.

보란 듯이 살아나 행복하게 사는 거다.

그것만이 나를 위한 길이요, 복수를 하는 길이다.......

장천림은 문득 물소리를 들었다.

쏴아아...... 우르릉...... 쿵쿵......!

급류(急流)였다.

급류는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장천림은 막다른 절벽 끝에 몰리고 말았다.

"흐흐흐.......! 칠백십삼 호! 이제 네가 달아날 곳은 없다. 순순히 검을 버려라!"

흑의인 오십여 명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장천림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 으핫핫핫.......!"

".......?"

흑의인들은 어리둥절했다.

그가 이 상황에서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린다는 것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쳤군!"

어떤 자가 그렇게 내뱉었다. 그는 수중의 강궁(强穹)에 독을 바른 살을 메긴 후 쏘았다.

"앗! 저 놈.......!"

"저......."

흑의인들이 경악성을 발하는 사이였다. 장천림은 느닷없이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신형을 날리는 것이 아닌가.

그 아래는 천길의 낭떠러지였을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돌출한 기암괴석들이 솟아 있어 떨어져 살아난다는 것은 기적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장천림.

그는 그렇게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그가 살아날 희망은 전무했다. 적어도 흑의인들이 보기에는 그랬다.

흑의인들은 절벽 위에서 장천림의 몸뚱이가 하나의 바위에 떨어져 부딪친 후 퉁겨오르는 것을 보았고 이내 급류에 떨어져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급류의 물이 빨갛게 물드는 것은 그가 치유할 수 없는 중상을 입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사람의 운명이란 오직 하늘 만이 아는 법이다.

마침 절강성(浙江省)의 풍광수려한 절경을 유람하던 선비가 있었다. 그는 이민족 원(元)에게 짖밟힌 산하가 미워 몸을 숨기고 평생을 쌓은 학문조차 가슴 깊이 묻어버린 청렴한 학자였다.

그의 집은 사천의 백제성(百帝城)이었다.

그러나 집을 떠난 그는 지난 이 년여 간 여기저기를 떠돌며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마침 절강성의 한 계곡을 지날 때였다.

그는 급류에 떠내려 오는 한 구의 시신을 보게 되었다. 그는 어렵게 그 시신을 건져냈다. 비록 시신일망정 물고기밥이 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최소한 매장이라도 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급류에서 건져낸 시신은 놀랍게도 아직 미약한 숨결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불과 십수 세에 불과한 어린 소년이라는 것이 선비의 동정심을 불러 일으켰다.

마침 선비는 가산이 넉넉한 편이었다. 그는 그 길로 여행을 취소하고 마차를 세내어 백제성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어떻게든 소년을 살려 보기로 한 것이었다.

죽어도 벌써 죽었어야 할 소년의 명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선비의 이름은 백난천(白蘭天), 금문장(金文莊)의 장주였다.

소년은 금문장에서 마침내 극적으로 살아났다. 그러나 그를 살리기 위해 백난천은 재산의 반을 써야 했다. 수많은 영약과 이름난 의원들을 동원하였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소년이 살아난 것을 보고 그는 크게 기뻐했다. 마침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살아난 소년의 용모가 영준하고 믿음직스럽게 보여 자신의 양자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소년은 그 제의를 한사코 사양했다. 그리고 금문장의 하인으로 삼아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소년의 이름은 장천림, 바로 713호였다.

이후 그는 금문장에서 없어서는 아니될 존재가 되었다. 그는 집사(執事)를 맡아 금문장의 재산을 크게 늘렸을 뿐더러, 여러 가지 일들을 비상한 능력으로 처리해 나갔다.

장천림은 과묵한 성품으로 말이 없었다. 말보다는 언제나 행동을 앞세웠다. 또한 자신의 공을 자랑하는 법도 없었다.

그런 그를 백난천은 장차 자신의 금지옥엽인 백가소의 부군감으로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하나밖에 없는 딸 백가소도 그를 무척 따르는 편이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금문장의 식솔들도 모두 그를 아끼고 존경했다.

다만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청년집사 장천림은 오만해지는 법도 없이 묵묵히 집사의 일을 충실하게 이행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백난천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금지옥엽 백가소가 납치되는 비극이 발생한 것이었다.

강호무정 제3장 추적(追跡) - 검궁인







제3장 추적(追跡)



홍무(洪武) 8년 11월 2일.

기루(妓樓) 춘강루(春江樓)는 초저녁부터 큰 손님을 맞았다.

그들은 불과 삼인이었다. 그러나 보통 손님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곳 무협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노예 사냥꾼 집단인 것이다.

이들과 기루와의 사이에는 특별히 깊은 관련이 맺어져 있었다. 이른바 수요자와 공급자라는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노예 사냥꾼들은 통상 기루에서 씀씀이가 컸다. 기루 또한 이들을 귀빈으로 접대하는 것이 상례였다.

"으하하하하......!"

"호호호......"

기루의 내실은 춘경(春景)이 아니라 온통 도화경(桃花景)이었다.

세 명의 중년 사나이들은 화려한 기루의 내실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목불인견의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들은 다섯 명의 기녀들을 데리고 놀고 있었다. 입으로는 끊임없이 음담패설을 주고 받으며 손으로는 완전히 발가벗긴 계집들의 은밀한 곳을 거침없이 더듬고 있었다.

더구나 지금 술상 위에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색다른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다.

두 명의 기녀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누워 있었다. 안주감인가? 아니면 이름하여 여곡주(女谷酒)라고 이르던가?

계집의 두 다리는 세워진 채 맞물려 있었고, 그 삼각 비역에 호박빛의 술이 담겨 있었다. 커다란 유방의 계곡 사이에는 싱싱한 생선회가 드문드문 놓여져 사내들의 젓가락질을 받고 있었다.

실로 이같은 황음한 광경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사나이들은 유방 위에 얹혀진 안주를 먹고, 여인의 꼭 다물려진 은밀한 부위에 고인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키들거리거나 지껄여지는 것은 전부가 음담패설이었고, 음탕한 그들의 손은 쉴 사이없이 자신들의 무릎에 앉아 있는 계집들의 비곡을 드나들고 있었다.

밖은 제법 카랑카랑한 바람이 불고 있었으나 실내는 한 여름처럼 뜨거웠다.

그런데.......

그들이 광오한 환락에 젖어있는 사이 창문 틈으로부터 희미한 연기가 스며들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연기는 은밀하게 실내의 바닥에 깔리며 은은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잠시 후 사나이들은 물론이려니와 기녀들도 눈꺼풀이 천 근처럼 무거워짐을 느끼며 스르르 모로 쓰러지고  있었다.

삐......익.

창문이 열리며 한 명의 흑의청년이 들어섰다. 그는 바로 장천림이었다.



질문의 횟수는 가능한 한 적을 수록 좋고 위협은 확실히 해야 한다. 더불어 머리를 쓸 여지를 남겨주면 안 되고 무조건 공포에 질려 묻는 말에만 대답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끄아아아악......!"

한 사내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다. 그의 사지는 통째로 뜯겨 나갔다.

"커어억...... 컥!"

또 한 명, 그는 두 눈이 닭다리에 찔려 있고 종내에는 입 속에 구운 오리 한 마리가 통째로 처박혀 숨이 막혀 죽었다.

"으으...... 으아아......!"

혼자 남게 된 자는 공포에 질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동료 둘이 무참하게 죽은 것을 보았다.

머리에 털난 이후로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없었다. 그도 잔인한 짓이라면 취미삼아 해오던 위인이었으되, 이런 일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가해자 쪽이 아니라 피해자 쪽이 될 줄이야.

장천림은 무표정했다.

그는 구석에 몰려 와들와들 떨고 있는 기녀들을 손짓해 불렀다.

"젓가락."

기녀들은 처음에는 멍한 표정이었으나 곧 후다닥 상 위에 널려 있던 젓가락을 가져왔다. 장천림은 모두 세 벌의 젓가락을 손에 쥐었다.

"저쪽으로 가라."

"으흐흐......."

사나이는 눈물 콧물까지 흘리면서 정신없이 장천림이 시키는 대로 했다. 이윽고 그가 벽에 기대어 서자,

슉!

한 개의 젓가락이 날아갔다. 빛살같은 속도였다.

"큭!"

사나이는 비명을 질렀다. 젓가락은 그의 팔목을 관통하여 벽에 박혔다.

"내게는 아직도 다섯 개의 젓가락이 있다. 모두 던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

슉!

장천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다른 쪽 팔목에 젓가락이 박혔다.

"크윽! 제발...... 왜 그러는지 말해 주오....... 제발......"

사나이는 해룡파의 소두목이었다. 그는 도대체 장천림이 왜 이런 모진 고문을 가하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무엇인가 알아야 대답을 할 것이 아닌가?

"나이는 십육 세. 이름은 백가소, 백의를 입었으며 가슴에는 붉은 장미가 수놓아져 있다."

"으아악!"

또 하나의 젓가락이 이번에는 발목에 꽂혔다.

"어디 있느냐? 너희들이 납치했다. 장소는 백제성 부근의 야산......."

슉!

"아아악!"

왼쪽 발목에도 또 하나의 젓가락이 박혔다. 그는 이제 사지를 벌린 채 벽에 붙어 있는 꼴이었다. 장천림은 수중에 두 개의 젓가락을 들고 있었다.

이번에 그가 노려보는 곳은 사나이로써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만일 그곳을 향해 날아간다면 사나이는 평생 다시는 계집을 안을 수 없게 되리라.

"으으으...... 봐, 봤소! 그...... 말씀하신 인상의 소녀는...... 수왕단(水王團)으로 넘어갔습니다요!"

"수왕단?"

"예...... 예! 황하(黃河)를 무대로 활동하는 작자들입죠....... 예....... 분명히 그런 소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코 우...... 우리가 납치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다만...... 야산에 버려져 있는 소녀를 발견한 것밖에는...... 미, 믿어 주십시오......."

슉!

"카아악......!"

다섯 번째의 젓가락은 사나이의 소중한 그곳에 꽂혔다. 이로써 그는 다시는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생명이란 소중한 것이 아닌가? 그는 애원의 눈빛으로 제발 목숨 만은 살려 달라고 빌었다.

슉!

마지막 젓가락은 애원하는 사나이의 목구멍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대황하(大黃河).

수만 년을 쉬임없이 흘러온 황하의 물은 언제나 탁하다.

도도히 흘러내리는 그 흐름 속에 한족의 영욕이 있으며, 중원의 역사가 숨쉬고 있다.

밤(夜). 흐르는 강물 위에 범선(帆船)이 떠있다.

범선 안에서는 축제라도 벌어진 양 쉴새없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횃불과 불빛이 강상까지 환하게 물들이고 있다.

이 범선은 황하 유역에서는 모양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유명한 범선이다. 황하 일대를 오르내리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어떤 조직의 범선인 것이다.

자시(子時)쯤 되었을까?

쏴아아.......!

문득 물결이 갈라지며 사람의 머리 하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범선의 후미진 쪽이었다.

"......."

사나이는 날카로운 눈으로 범선을 살폈다. 장천림이었다.

잠시 후 그는 경비경이 선미를 지나간 틈을 타 범선 위로 가볍게 뛰어 올랐다. 그의 동작은 민첩하기 그지 없었으며, 일 점의 소리도 내지 않았다.

뱃전에 소리없이 오른 그는 갑판의 잡동사니를 쌓아둔 뒤에 몸을 숨겼다. 바로 그때,

"헉........ 허헉.......!"

야릇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린 장천림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갑판 위의 풍경을 보라.

네 명의 험상궂게 생긴 장한들과 네 명의 여인들이 뒤섞여 혼음(混淫)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황하 가운데 떠있는 배 위라고는 하지만 지붕도 벽도 없는 갑판 위에서 혼음을 하다니 실로 낯뜨거운 일이었다. 그로 미루어 범선에 타고 있는 인물들이 어떤 부류인지 능히 짐작이 갈 일이었다.

장천림은 뱃전을 소리없이 이동하여 한 바퀴 돌았다. 정세를 살피기 위함이었다.

실로 뱃전에는 온통 광기(狂氣)에 가까운 난잡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십 명의 장한들이 술을 마시며 여인들과 난교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배 위의 전망대 위에 보초가 있었다. 단지 그 보초 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엉망으로 취해 있었다. 따라서 보초의 눈 만 피한다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활동할 수가 있었다.

장천림은 갑판 위를 모두 살폈으나 목적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곳에는 없다. 하긴 갑판 위에 나와 있는 자들은 모두 수왕단의 졸개들 뿐이다.'

수왕단(水王團).

그렇다. 그는 황하 일대를 주름 잡는다는 수왕단의 범선으로 잠입한 것이었다.

잠시 후 장천림은 선실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범선은 꽤 규모가 컸으므로 여러 개의 선실이 있었다.

그는 선실 하나 하나를 살피기 시작했다. 선실은 갑판 위에 있는 작자들보다는 비교적 신분이 높은 두목급들의 방인 듯 했다.

그러나 대충 선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풍경은 갑판 쪽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 역시 선실 안에서 흥청망청 술을 마시며 계집들을 희롱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장천림의 가슴 속에는 살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인신매매를 하는 작자들.......! 아무 여인이나 잡아 욕심을 채우며 환락에 취해 있군. 세상에 살아있어야 아무런 가치 없는 놈들........'

그러나 무작정 살인을 할 수 없었다. 그의 목적은 백가소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백가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가장 크고 호화로운 선실에 당도했다. 선실 안에는 수왕단의 단주로 보이는 사십대의 중년거한이 커다란 호피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는 네 명의 여인들을 희롱하고 있었다.

그 네 명의 여인들은 밖에 있는 어떤 여인들보다도 더 아름답고 젊은 미녀들이었다. 한결같이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선실 안의 풍경은 그야말로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 중년거한은 제왕이 부럽지 않은 환락을 만끽하고 있었다.

여인들 중  몇은 거한의 팔다리를 주무르고, 몇은 거한에게 음식을 먹여주고 있었다. 거한은 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털투성이의 팔을 뻗어 한꺼번에 두 여인들을 안고 여기저기를 주무르고 있었다.

실로 음탕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장천림은 서슴없이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누....... 누구냐?"

호피의자에 앉아 있던 거한은 갑자기 예고도 없이 들어선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장천림은 태연했다. 그는 대꾸도 없이 뚜벅뚜벅 걸어가 발로 진수성찬으로 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져 있는 주안상을 밟았다.

우지끈!

주안상은 대뜸 한가운데가 부러져 주저 앉았다.

"무...... 무슨 짓이냐?"

거한은 퉁방울같은 눈을 부릅뜨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그는 일어설 수가 없었다.

"으....... 헉!"

그는 헛바람을 들이켜며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장천림의 발이 그의 콧등을 밟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같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장천림의 발은 언제 어떻게 날아갔는지 그의 콧등을 정확히 짓밟았다.

거한은 과연 수왕단주였다. 그는 황하 유역을 제왕처럼 군림하는 작자였고 평생을 엽색질과 방화, 살인으로 보낸 작자였다. 그런데 이 갑작스런 사태에 완전히 주눅이 들어 버렸다.

장천림은 한 번 보고 그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겁이 많은 작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철검을 뽑지도 않은 채 검집째 그의 목을 눌렀다.

"으....... 캐액!"

목젖이 눌려지자 수왕단주는 호흡이 막혀 캑캑거리며 사색이 되고 말았다.

"나이는 십육 세, 이름은 백가소, 입은 옷은......."

그러나 장천림은 그만 입을 다물고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가 끝까지 다 묻기도 전에 수왕단주는 그만 기절을 해 버린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하반신이 푹 젖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알고 보니 수왕단은 덩치만 컸을 뿐, 그야말로 겁장이였던 것이다.

"사내 값을 못하는 놈이군........"

장천림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세상에는 겉보기와는 다른 위인이 있었다. 수왕단주같은 자가 바로 그런 위인이었다.

장천림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런 작자가 인신매매를 하는 집단의 영수일 줄은 정녕 뜻밖이었다.

이때였다.

"저어........ 나리."

".......?"

장천림은 흠칫하여 고개를 돌렸다. 그 음성은 구석으로 물러나 쪼그린 자세로 숨어있던 여인들 중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그는 한 여인을 발견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고 있었다.

"저어........ 혹시 목에 작은 점이 나 있는 그 소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

장천림은 전신을 떨었다.

"맞소. 보았소?"

여인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열여덟 살 가량 되어 보였는데 나이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풍만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가슴이 유난히 크고 허리는 대조적으로 가늘었으며 얼굴도 갸름하고 요염한 여인이었다.

피부가 투명한 것으로 미루어 과거에는 분명 신분이 높은 집안의 규수인 듯했다.

"백소저를 말씀하시는군요. 아, 하지만 그녀는 지금 이곳에 없답니다."

장천림은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찾았는가?

그런데 이제서야 비로소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는 다급히 물었다.

"그럼 어디에 있소?"

"백소저는........"

여인의 말은 이러했다.

백가소.

그녀는 잡혀온 여인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래서 수왕단주인 위한림(韋韓林)의 눈에 들어 그의 수청을 들어야 했다.

위한림은 본래 계집에게 싫증을 잘 내는 위인이었다. 처음에 그는 백가소에게 반해 한동안 다른 여인들은 일체 접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것은 백가소가 다른 여인들과는 달리 고집이 세어 그의 말을 잘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위한림같은 위인은 계집질을 밥먹듯 해왔으므로 도리어 뜻대로 응해주지 않는 여인에게 더 관심이 끌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결국 백가소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한동안 협박하고 달래고 해도 육체의 문을 열지 않던 그녀도 마침내 굴복을 하고만 것이었다.

위한림이 그녀에게 미약(媚藥)을 강제로 복용시킨 것이었다. 미약은 한 번 복용하게 되면 신지를 잃으므로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 하게 된다.

미약은 중독성이 있다. 처음에는 소량을 먹이고, 차츰 그 양을 늘려가게 되면 종내에는 미약을 하루라도 복용하지 않으면 미쳐버리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백가소는 한 달 이상 미약을 복용하게 되자 마침내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녀는 고고하던 자존심도, 순결한 여인으로서의 수치감도 다 사라져 버렸다. 누우라면 눕고 기라면 기었다. 핥으라면 핥았고 춤을 추라면 추는 애욕의 노리개가 되고 만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녀에게 매료되었던 위한림도 마침내 서서히 싫증을 내게 되었다. 그녀에게 더이상 흥미가 없어진 것이었다.

중독이 심해진 그녀는 더이상 예전의 청순하고 아름다운 백가소가 아니었다. 위한림은 그런 그녀를 자신의 수하들에게 넘겨 주었다.

그의 수하들은 백가소를 실컷 농락한 뒤 점점 중독증세가 심해진 그녀를 또다시 하북(河北) 연변에 있는 한 사창가에 팔아 넘겼다는 것이다.

너무나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으아아아아!"

장천림은 격분하여 울부짖는 듯한 비명을 발하면서 철검을 내리쳤다.

퍼어어억!

검집째 떨어진 철검 아래 혼절해 있던 수왕단주 위한림은 그 유난히 커다란 골통이 두부가 으깨어지듯 박살나 황천으로 가고 말았다.

"뭐, 뭐냐?"

"단주님의 음성인데......?"

잠시 후 비명을 듣고 선실로 우르르 뛰어드는 작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선실 안에 벌어진 풍경에 그만 아연실색하고 있었다.

죽음의 범선(帆船).

겉으로는 한가롭고 평화롭게 황하 한가운데 떠 있는 범선이었으나........ 밤이 이슥해지고 새벽 여명이 터올 때까지도 범선에서는 죽음의 비명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크아아아악!"

슉! 슈욱!

장천림은 철검을 휘둘렀다. 그의 철검이 한 번 번뜩일 때마다 정확히 한 놈의 목이 끊어져 잘린 채 갑판 위에 뒹굴곤 했다.

그의 마음 속에 자비심은 한 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이 범선 안에 살아 숨쉴 자격이 있는 놈은 한 명도 없다고 단정지었다.

그는 쉬지 않고 철검을 휘둘렀다.

피........ 피........ 피........

여인들은 한 선실 안에 뭉쳐 벌벌 떨고 있었고........

이백여 명에 가까운 수왕단의 졸개들이 모두 죽은 것은 새벽 여명이 온통 시체로 뒤덮인 갑판을 비칠 때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무엇인가 물 속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을때, 겁에 질린 채 선실 안에서 조심스럽게 밖을 내다 보던 담이 큰 한 여인은 볼 수 있었다.

밤새 지옥도를 연출했던 흑의청년이 입에 한 자루의 철검을 문 채 유유히 황하를 헤엄쳐 건너가는 것을.



며칠째 내린 눈으로 대지는 온통 건곤일색(乾坤一色)이다.

눈........ 눈........ 눈.

눈은 천지를 오직 하나의 색(色)으로 뒤덮었다.

황혼(黃昏)이 진다. 황혼은 눈부신 설지를 점차 핏빛으로 채색해가고 있었다.

이곳은 황하 연변. 하북(河北)의 평원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장천림은 묵묵히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걷고 있었다.

그에게는 고독한 여행자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눈길을 들어 멀리 바라다보이는 나룻터에 밀집되어 있는 군락을 보고 있었다.

그곳은 나룻터의 조악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선창이었다.

빈민들이 우글거리는 곳. 그곳은 더럽고 누추하며 온갖 추악한 군상들이 범벅을 이루어 사는 곳이다. 과연 그런 곳에 백가소가.......?

장천림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는 벌써 여러 곳을 전전했다. 수왕단의 범선에서 한 여인이 일러준 대로 그는 백가소가 팔려 갔음직한 사창가는 빠짐없이 뒤졌다.

없었다.

아니, 어떤 곳에서는 그녀를 알고 있는 자를 만나기도 했지만 그들의 말은 그녀가 이미 다른 곳으로 팔려 갔다는 것이었다. 다시 백가소가 팔려갔다는 사창가를 전전하기를 그 몇 번이던가?

그때마다 그는 번번히 한 발자국 늦고 있었다.

인생이 무상이라더니........

그는 그토록 아름답고 청순하며 예지 발랄하던 백가소가 더러운 창녀(娼女)가 되어 사창가를 전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곳은 열여섯 번째........

간신히 잡은 실낱같은 단서를 잡고 있다가 끊어질 듯 말 듯 할때 장천림은 참을 수 없는 절망과 분노를 느끼곤 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일대은인(一大恩人) 백난천의 금지옥엽.

어쩌면 그의 인생에 마지막 희망이 되어 줄 지도 몰랐을 백가소의 행방을 찾는 일을 어찌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번번히 무너지는 가슴을 달래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마침내 그는 나룻터의 창기촌까지 왔다.

".......!"

절로 눈살이 찌푸러진다.

얼기설기 지은 움막들........

한 움막마다 열 명도 넘는 식구들이 이와 빈대가 드글거리는 더러운 환경 속에서 살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집요했다.

움막을 하나하나 들추며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했다. 어떤 움막에서는 온통 피고름으로 전신이 짓물러 가는 창녀가 두 명의 거지들을 상대로 매춘(賣春)을 하고 있었다.

어떤 움막에서는 열세 살도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녀가 환갑이 넘은 영감을 상대로 그짓을 하고 있었다.

어떤 움막에서는 다섯 명이나 되는 사내들이 한 명의 창녀를 상대로 일을 치르고 있었다.

어떤 움막에서는........

"우웩........ 웩........ 웩........"

구역질이 치밀어 오른다.

몇 번이나 토(吐)했던가?

장천림은 먹은 것을 모두 토하고도 또 토했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풍경들이었다. 그는 토악질을 하면서도 끝까지 움막들을 뒤졌다.

어차피 각오한 일이 아니던가?

백가소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건 간에 그는 놀라지 않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였다.

그녀가 병신이면 어떠랴.

창녀이면 어떠랴.

본래부터 더러운 여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찾아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간이 흐를 수록 장천림은 자신의 운명이 비극적인 종말을 향해 한 발자국씩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곳 사창가에 있는 여인들은 대부분이 동전 몇 문(文)이면 스스럼없이 옷을 벗어던지는 최하급의 창녀들이었다.

그녀들은 텅빈 움막 속에 뒹굴고 있다가 장천림이 거적을 들추자 반색을 하고는 일어서곤 했다.

"흐응........ 어서 들어와요. 끝내주게 해줄께!"

"으응........ 들어오라니까?"

장천림은 눈물이 솟았다. 그는 거적을 내리고 돌아서면서 수없이 이를 갈고 있었다. 얼마나 뒤졌을까? 그가 움막촌을 이잡듯이 뒤지는 것을 본 포주 한 명이 다가왔다.

"헤헤........ 손님은 취미가 각별하신 모양이구려. 대체 어떤 계집을 찾으시오? 이곳에는 없는 계집이 없소이다. 그 방면의 기술이 기막힌 계집을 원하오? 아니면 변태적인......."

그 작자는 움막 하나 갖지 못한 포주였다. 따라서 이곳에서도 가장 싸구려 계집 몇을 데리고 있었다.

"나이는 십육 세, 이름은 백가소. 목에 작은 점이 있고........"

장천림은 그동안 수없이 뇌까린 말을 또 끄집어 내었다.

그러나 애꾸눈을 한 포주는 그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말하고 있었다.

"헤헤헤! 어떤 계집인지 모르나 내가 기막힌 계집을 하나 알고 있소. 나이도 비슷할 뿐더러 더구나 그 기술은........ 헷헷! 따라 오시겠소?"

장천림은 문득 이상한 예감을 느꼈다. 그것은 실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야릇한 느낌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애꾸를 따라 나서고 있었다.

'어쩌면........'

눈과 진흙이 엉겨 엉망이 된 골목길.

이곳은 아무리 긴 장화를 신는다 해도 잠시 후면 옷이 엉망이 되고마는 그런 곳이었다.

이곳에는 움막의 형태도 최악이었다. 움막이라야 진흙땅에 얕으막한 웅덩이를 파고 그 위를 간신히 더러운 천으로 덮어 간신히 지붕 형태를 만든 것이 고작이었다.

이렇게 눈이라도 내린 날이면 일대는 더러운 흙탕물이 넘쳐 움막 안으로 밀려들어가기도 했다.

"헤헤........ 좀 지저분하긴 해도 안에는 천하절색이 있소."

애꾸눈 포주는 손을 내밀었다.

장천림은 그에게 동전 열 닢을 던져주고 움막집, 아니 혈거(穴居) 안으로 들어갔다.

웬일인가........?

그 순간 그의 가슴은 격하게 뛰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운명의 예감이 가슴을 무섭게 치고 있었다.

있었다.

혈거 안 쪽, 아무렇게나 뭉쳐져 있는 넝마쪽 속에 비스듬히 누운 한 여인이 눈에 쏘듯이 들어왔다.

그녀는 아예 옷을 입지 않고 있었다. 달아날까봐 염려한 포주의 조처인지도 몰랐다. 이렇게 추운 날 아무것도 입지 않고 겨우 짚단 만 깔려 있는 맨바닥에 알몸으로 누워 있는 여인, 그녀였다.

"으아아아아아!"

장천림은 울부짖었다.

백가소였다.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여인 백가소였다. 어쩌면 그의 운명을 평화와 안락으로 뒤바꿔놓았을지도 모를 아름답고 청순했던 여인 백가소였다.

장천림은 비명을 지르며 벌거벗은 백가소를 안아들었다. 미칠 듯한 분노가 그의 가슴을 마구 때리고 있었다.

눈물이 얼굴을 적시고, 혈관은 무섭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소아(韶兒)! 소아.......!"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쏜살같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앞을 가로막는 자가 있었다.

"어딜 가시오? 그곳에서 재미를 보아야지........ 커억!"

애꾸눈 포주는 비명을 질렀다. 아니 비명보다 먼저 그의 두개골은 완전히 무너졌다.

장천림의 주먹이 천령개를 으스러뜨린 것이었다.

장천림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달려갔다. 그러나 계속 그의 앞을 가로막는 자들이 있었다.

이곳에는 악질 포주들이 있었다. 그들은 여인들을 짐승처럼 가두어 놓은 채 돈을 벌고 있었다. 그들은 패거리가 되어 폭력으로 이 일대의 질서(?)를 유지한다.

그것은 종종 이곳을 빠져 달아나려는 여인들 때문이었다. 여인들은 그들의 밥줄이었던 것이다.

장천림이 백가소를 안고 달리자 여기저기에서 그런 불한당들이 뛰쳐나와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서라!"

"흐흐! 여기가 어디라구 감히!"

그들의 손에는 도끼나 낫, 또는 커다란 식칼, 또는 쇠스랑같은 것들이 쥐어져 있었다. 이곳에서는 백주에 살인이 일어나도 관인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 일은 너무나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관인과 포주들 사이에는 일종의 묵계가 이루어져 있는 탓이기도 했다.

"크아악!"

어찌 알았으랴? 이곳의 법(法)은 황제조차 인정해야 하거늘 백주에 그들의 밥줄 하나를 납치해 달아나려는 자를 가로막던 무리들은 그저 눈 앞이 번쩍하는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장천림이 손을 내저을 때마다 그들은 추풍낙엽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장천림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는 앞을 가로막는 포주들을 닥치는 대로 도살했다. 잠시 후에는 앞을 가로막는 자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가 빠져나간 자리에는 수십 명의 시신들이 눈과 진흙탕 속에 나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하북에 연한 시진 제양성(帝陽城).

제양성 외곽 지역에서 장원 한 채를 빌리는데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장원은 낡은데다 주인은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장천림은 이곳에서 꽤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백가소 때문이었다.

백가소는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다.

여자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백치(白痴)나 다름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로는 금문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어떻게든 그녀를 치료하여 회복시킨 후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것이 은인 백난천을 위하는 길이자 본인인 백가소에게도 필요한 조치였다.

그는 낡은 장원 한 채를 빌리기 위하여 기름진 배를 가진 고급관리 한 사람의 창고를 털어야 했다.

물론 그런 일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는 적당히 필요한 만큼의 보물을 빼내왔다. 그것으로 여러 가지 물품을 구입하고 백가소와 함께 보낼 각종 집기들을 장만했다.

그날부터 백가소를 회복시키기 위한 피나는 치료가 시작됐다.

그것은 많은 의약품이나 생필품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인내가 더욱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설사 그 일에 반 평생이 소모된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고 해낼 작정이었다.

백가소는 말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를 전혀 알아 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밥을 먹을 생각도,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만일 장천림의 안력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변해버린 그녀를 결코 알아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백가소는 완전히 딴 사람처럼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몸은 비쩍 여위었으며 그 긴 머리칼도 군데군데 뽑혀져 있었다. 빙결같이 고왔던 피부는 탄력을 잃고 말았고 신체의 어느 곳이나 온통 거무죽죽한 멍 투성이였다.

어디 그뿐인가?

황음하고 타락된 창녀생활로 화류장독(花柳粧毒)이 옮아 여기저기 피부에 부스럼이 생기기까지 했다.

그녀를 지난 날의 아름답고 청순한 모습으로 되돌린다는 것은 대라신선이 환생한다해도 도저히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일이었다.

그러나 장천림은 해낼 것이다.

그는 장원을 떠나지 않고 성심(誠心)을 다해 치료를 시작한 것이다.

그의 눈은 집념으로 불타고 있었으며 어떤 일이라도 감내할 결의가 되어 있었다.

"아아아아악.......! 날....... 날 내보내줘.......!"

"이 더러운 놈! 어서 날 풀어줘.......!"

"으아악...... 악마! 이 더러운 놈아.......!"

꽈당! 탕탕탕......!

괴성에 가까운 비명소리와 함께 밖에서 빗장을 질러 잠겨진 나무문이 부서질 듯 요동쳤다.

뿐만 아니라 안에서 무엇을 집어 던지는지 물건 깨어지는 소리가 쉴 사이없이 들렸다.

백가소는 미친 듯이 고함을 치고 욕을 했다.

"으으으......!"

장천림은 밖에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고개를 무릎 사이에 처박고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문을 열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드디어 그녀의 금단증상(禁斷症狀)이 시작된 것이다. 그녀는 많은 양의 미약을 오랫동안 복용했으므로 골수 깊이 중독되어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약을 끊는다는 것은 죽음 이상의 고통을 주는 일이었다.

백가소는 식음을 전폐하면서 미친 듯이 오직 미약 만을 찾았다.

고비를 넘겨야 한다.

'제발, 소야! 고비 만 넘겨다오!'

장천림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방 안에 가두었다.

쿵쿵쿵......!

방 안의 벽에 머리를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백가소의 이마는 깨어져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을 것이다. 장천림은 보지 않아도 훤히 눈에 그릴 수 있는 상황 때문에 미쳐버릴 것 만 같은 심정이었다.

그는 마침내 귀를 막고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술(酒).

제양성의 한 주점에 틀어 박힌 장천림은 벌써 다섯 동이의 독한 모태주를 퍼마시고 있었다.

괴로웠다.

꼭 이렇게 해서까지 백가소를 치료해야 한단 말인가?

지금 그녀가 당하고 있는 고통이야말로 정녕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설혹 그녀가 금단증상의 무서운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옛날의 순수무구한 소녀로 되돌아 올 수 없다는 것은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옳으냐?

장천림은 충혈된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벌써 사흘째였다.

쉴새없이 문을 두드리고 애원을 하고, 또는 벽에 머리를 찧어대는 백가소였다.

그러나 그는 문을 열어주지도 않았고, 그녀가 원하는 미약을 넣어주지도 않았다. 다만 먹을 것 만 가끔씩 넣어 주었다.

그러나 백가소는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아니 음식물은 넣는 즉시 내던지곤 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미약이었다.

마침내 장천림은 인내의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장천림은 계산을 하지도 않고 적당히 은자를 던져준 채 달려갔다.

잠시 후 그는 굳게 잠긴 나무 문을 열었다.

"......."

조용했다.

안에 의당 있어야 할 백가소의 인기척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며 어두컴컴한 실내를 살펴보았다.

"헉!"

그는 찬바람을 들이켰다.

눈(眼).

아니 눈이라기보다는 시퍼런 귀화(鬼火)였다. 한 쪽 구석에서 파랗게 타오르는 두 개의 눈이 그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가 주춤하고 한 발자국 물러서는 사이,

"죽엇!"

느닷없이 인영이 그를 향해 덮쳐들었다.

"음!"

그는 피하지 않았다. 그 인영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백가소는 그가 피하지 않고 서 있자 대뜸 목에 매달리더니 갈고리같은 앙상한 손으로 그의 목을 졸라대기 시작했다.

"나쁜 놈! 내놔! 약을...... 어서!"

장천림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실로 무서운 힘이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일개 여인의 손 힘이 이렇게 세다니.

그의 목은 손톱자국이 움푹 패이고 핏방울이 맺히고 있었으나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장천림의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금도 반항하지 않은 채 그는 목을 졸리고 있었다.

문득 마음 한 구석에 체념이 배였다. 차라리 이대로 그녀의 손에 목을 졸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떠돌고 있었다.

"악!"

돌연 백가소가 악을 썼다. 그의 목을 조르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탈진하여 기절해버린 것이었다.

"......."

바닥에 쓰러진 백가소의 모습은 비참했다.

그녀의 머리칼은 온통 산발이 되어 있었으며, 그나마 거의 뽑혀져 있었다. 게다가 전신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그가 가장 비싼 고급 비단옷을 입혀주었으나 그녀 스스로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것이었다.

문득 백가소가 눈을 떴다. 그녀는 천장을 향해 누워있었는데 갑자기 눈에 이상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앙상한 손으로 자신의 유방을 쓸어잡고 가랑이를 벌리며 애원하고 있었다.

"흐으응........ 날 가져. 응? 그 대신 약을 줘........ 널 즐겁게 해줄게....... 응?"

장천림은 그만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녀의 전신에서 악취가 풍기는 것은 화류병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먼저 미약의 금단증세를 고쳐야만 치료할 수 있는 것이다.

장천림은 구역질을 참으며 잠시 후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처절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강호무정 제4장 운명(運命)의 만남 - 검궁인







제4장 운명(運命)의 만남



치료에 들어간 지 백 일(百日)이 조금 넘었다.

백가소의 상태는 많이 호전되고 있었다. 지금의 그녀는 백 일 전과는 천양지차였다. 더이상의 금단증상은 일어나지 않게 된 것이었다.

이제는 미약을 달라고 하지 않았고, 식사도 비교적 규칙적으로 하는 편이었다.

장천림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백가소가 원하는 것이라면 설사 하늘의 달을 따다 달라고 하여도 해줄 참이었다.

희망이 생기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조금만 더 치료를 한다면........'

그는 본래 화류병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화류병을 치료하기 위해 성내는 물론 인근의 명의(名醫)란 명의는 다 찾았고, 약이란 약은 안 써본 것이 없는 그는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화류병도 거의 완쾌 상태였다.

뽑혔던 머리칼도 새로 자라나 칠흑같이 검고 탐스러운 미발(美髮)이 자라나고 있었다.

윤기를 잃고 거칠었던 피부도 은은히 윤기가 돌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피부는 부스럼 자리가 조금 남아 있을 뿐 말짱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이따금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곤 했다.

그런 모습은 장천림을 행복하게 했다. 다만 그녀는 벙어리라도 된 양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그렇다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실어증(失語症)도 머지 않아 치유되리라고 믿었다.

대체로 그녀가 하는 일은 단조로왔다.

그녀는 하루 종일 침상에 쪼그리고 앉아 멍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소야. 바람이 좋아. 산책이나 갈까?"

이따금 장천림은 그녀의 손을 잡고 화원으로 나갔다.

마침 사월(四月)이라 낡은 정원의 화원에는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화향이 그윽하게 풍기는 화원은 비록 잘 다듬어지지는 않았으나 나름대로 아취가 있었다.

백가소는 억지로 장천림에게 끌려나와 화원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그녀는 언제까지고 움직이지 않고 오직 화원의 꽃들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그럴 때면 장천림은 그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던가.

그녀가 처음으로 입을 떼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그것이 끝이었다.

그녀는 그 말을 한 뒤로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나 장천림은 뛸 듯이 기뻤다.

본래 그림 그리는 것이 취미인 그녀였다. 금문장에서도 틈만 나면 그림을 그리곤 하지 않았던가?

이제 제 자리로 돌아가는 거야.......

장천림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날 밤 장천림은 시내로 나가 화구상에서 가장 값비싼 화구(畵具) 일습을 구입해 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화구를 받은 백가소는 멍하니 바라만 볼 뿐 그림을 그릴 생각도 않는 것이 아닌가?

"소야. 네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려 보렴."

그러나 백가소는 말없이 고개를 젓기만 하는 것이었다. 장천림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런 가운데 며칠이 지나갔다.

"까르르........"

"소야?"

장천림은 깜짝 놀랐다. 며칠 간이나 허공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백가소가 화원을 산책하던 중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호호호........ 림 오빠. 이리와 보세요, 여기 이게 뭐죠?"

"뭔데?"

장천림은 눈물이 나도록 반가왔다. 그는 얼른 그녀에게 달려갔다. 백가소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본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것은 부드러운 흙을 기어다니고 있는 땅강아지였던 것이다.

"깔깔........ 이리와서 머리 좀 빗겨 주세요."

이제 그녀는 완전히 변했다. 백가소는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치장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장천림은 그녀가 하자는 대로 했다. 그녀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녀 앞에서 춤이라도 출 생각이었다.

이제 백가소는 완전히 옛날로 돌아간 듯 했다.

장천림은 비로소 그녀를 데리고 금문장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실로 거짓말같은 일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참아 왔던가?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가? 드디어 이제는 금문장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장천림은 장원을 나섰다. 그녀의 치유를 기념하기 위하여 축배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하하하.......! 잔을 들어라. 소아."

"........"

백가소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방 안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그것은 모두가 장천림이 손수 장만한 것이었다.

그는 백가소를 기쁘게 해주기 위하여 사람을 사지 않고 혼자서 모든 음식을 장만한 것이었다.

남자가 요리를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장천림의 요리 솜씨는 일류였다. 그동안 많은 실전(?)을 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마와요. 오빠........"

백가소의 눈에서 진주알같은 눈물이 또르륵 흘렀다. 장천림은 껄껄 웃으며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하하하! 이렇게 좋은 날 눈물은. 이것 좀 먹어 보아라. 네가 좋아하는 볶은 완두콩이다."

장천림은 완두콩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 주었다. 백가소는 눈물을 흘리며 완두콩을 삼켰다.

그녀의 눈에는 가슴이 터질 듯한 감격, 신뢰, 애정의 빛이 뜨겁게 일렁이고 있었다.

장천림은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그는 사가지고 온 술을 꽤 많이 마셨다. 실로 오랫만에 마음 놓고 마신 술이라서인지 다소 취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밤이 이슥해지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자야지."

"림오빠........"

문득 백가소가 애절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왜 그러느냐?"

"날....... 더럽다고 생각하시나요?"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소아?"

"난....... 그동안 너무나 타락해 있었어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전 더러운 계집이죠, 그렇지 않은가요?"

"그....... 그렇지 않다. 그건 너의 정신이 아니고......."

"후후........ 거짓말이에요. 그렇게 말을 하는 오빠도 속으로는 날 더럽다고 여기고 있죠? 그렇죠? 아무도 날....... 날 옛날의 백가소로 보아주지 않을 거예요."

"소아!"

장천림은 크게 부르짖었다.

"후후........ 그래요. 전 더러운 계집이에요. 화류병까지 옮았던 제가 감히 오빠와 맺어질 법이나 한 얘긴가요? 난 그때 죽어야 했을 계집이에요."

"소아!"

장천림은 와락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그는 세차게 그녀의 가냘픈 몸을 흔들며 격하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내가 널 이전이나 다름없이 아름답고 순결한 소아로 본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증명할 수 있겠느냐? 응?"

백가소는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더니 급기야 결심한 듯 입술을 열었다.

"그럼 날 안아줘요."

".......!"

장천림은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설마 이런 요구를 할 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그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사실 이제까지 백가소를 여자로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먼 미래의 일이었다. 더욱이 은인인 백난천의 허락이 있고서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

백가소의 갑작스런 요구에 그는 몸이 굳어지는 듯 했다.

"피이! 거봐요, 오빠는 속으로 날 더럽다고 여기고 계시는 거예요. 후후훗........ 난 실제 아주 추악한 계집이에요."

백가소의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흐르고 있었다.

"소아........"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장천림은 뜨거운 입술을 그녀의 꽃잎같은 입술에 갖다 대었다.

".......!"

백가소는 바르르 가는 몸을 떨고 있었다. 마치 화살을 맞은 작은 참새인 양 떨고 있었다.

장천림의 입술은 뜨거웠다. 그것은 술기운 탓만은 아니었다. 그는 백가소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영혼을 다 바쳐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장천림과 같은 부류의 인간은 일반인의 경우와 확연히 틀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했다.

삶과 죽음. 그것은 일반인과 근본적으로 틀린 것으로 그에게 인식되어왔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백가소의 과거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백가소는 여전히 백가소였다.

아무리 심한 고초를 겪었다해도 그의 마음 속에 있는 백가소는 여전히 순결무구한 여인으로 남아있는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더듬으며 전신이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그의 혀가 백가소의 고운 치열을 살며시 밀고 들어갔을때........

'......!'

의외로 그는 백가소의 혀가 굳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 그뿐 아니라 백가소는 전신이 싸늘하게 얼어 있었다.

'가엾은 소아........'

장천림은 그녀의 마음을 환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가 거절을 할까봐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장천림은 입술을 옮겼다.

그의 입술은 백가소의 귓볼로 다가가 뜨겁고 은밀하게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의 애무는 직관적이면서 성의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은 가능한 자제하면서 서서히 백가소의 육체와 영혼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아아........"

마침내 그는 백가소의 굳었던 몸이 풀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의 입술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의 동그란 턱을 지나 가녀린 목줄기로 끈질기게 애무해 나갔다.

"아아!"

백가소는 입술을 벌리며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장천림은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 침실로 향했다.

걸어가는 동안에도 그는 그녀의 옷을 반쯤 벗겨내고 있었다. 박속같이 하아얀 젓무덤이 드러나자 그의 손은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그녀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침상에 반듯이 눕혀진 백가소는 행복에 찬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장천림은 그녀의 옷을 모두 벗긴 후 스스로도 옷을 벗고 침상에 올랐다. 이윽고 두 남녀의 몸은 자연스럽게 하나로 합쳐졌다.

뜨거운 밤이었다.

사월(四月)의 밤은 화단의 꽃뿌리까지도 달아오르게 할 만큼 뜨거웠다. 그것은 방 안의 남녀의 영과 육이 혼연일치가 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장천림은 장원을 나서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밝았다. 어젯밤 한 바탕의 춘풍(春風)으로 그는 기분이 몹시 상쾌했다. 하룻밤 사이에 백가소는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백가소는 이제 그의 아내가 된 것이다.

오늘 이후로 모든 과거는 망각 저편으로 물러가게 될 것이다. 마치 그 자신의 어둡고 암울했던 지난 날처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백가소는 그에게 작은 부탁을 하나 했었다.

"책을 좀 구해다 줘요, 책을 읽고 싶어요."

"하하........ 물론이다. 소아. 내 금방 다녀오마."

그는 그렇게 흔쾌히 말하고 막 장원을 나서는 길이었다. 장원 문 앞까지 배웅하며 손을 흔들어주는 백가소의 표정도 달콤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그녀는 저 멀리 장천림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한편 장천림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돌아선 순간 그의 등을 바라보는 백가소의 눈동자에 깊은 체념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장천림은 모처럼 화창한 날씨에 기분이 좋아졌다.

책을 한 보따리 사고도 백가소에게 줄 것이 없나 하고 저자거라를 한 바퀴 돌고 있었다. 그러던 차 그의 눈길이 한 만두가게에 멎었다.

그곳에서 한 명의 거지소년이 만두가게 주인에게 매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이 빌어먹을 거지놈! 여기가 어디라고 도적질이냐! 이런 사지를 찢어 죽일 놈!"

퍽! 퍽퍽퍽!

만두가게 주인의 솥뚜껑 만한 주먹이 소년의 뺨과 면상을 사정없이 갈기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매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비명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있었다. 놀랍게도 소년는 땅바닥을 뒹굴면서도 집요하게 훔친 만두조각을 우적거리며 입 속에 틀어넣고 있었다.

그야말로 무서울 정도의 집념이었다.

".......!"

그 광경을 본 장천림은 가슴이 진동했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소년의 그런 행동은 오직 살아야 한다는 집념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뿐만 아니다. 소년의 그런 의지는 살아야 한다는 의지 이전에 무엇인가 꼭 해야만 할 일이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장천림은 문득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 소년에게 어떤 한(恨)이 있길래.......

아니면 어떤 기가 막힌 사연이 있단 말인가. 장천림은 자신도 모르게 만두가게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마침 소년은 발길에 채여 그의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 왔다. 장천림은 소년의 옷을 잡아 일으켰다. 소년은 그에게 잡혀 일으켜지면서 고개를 번쩍 들고 있었다. 순간 장천림은 가슴이 써늘해지는 것을 금치 못했다.

소년의 눈! 그 눈이 그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넌? 너도 날 때릴 거야? 때릴 테면 때려봐!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한 성난 눈빛이었다. 추호의 겁먹은 표정이나 기죽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 호전적인 눈이었다.

"......!"

장천림은 소년을 자세히 바라 보았다. 소년의 얼굴은 땟국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봉두난발에 입고 있는 옷도 걸레조각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장천림은 똑똑히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만일 머리를 단정히 빗기고 목욕을 시킨다면 소년의 얼굴은 매우 맑고 영준할 것이라고.

다만 옥(玉)에 티랄까? 소년의 왼쪽 뺨에는 한 줄기의 상흔(傷痕)이 길게 그어져 있었다. 더구나 그 상흔은 섬뜩하도록 붉은 빛을 띄고 있었다.

마치 날카로운 검이나 창 따위에 스친 상처자국같이 보였다.

"빌어먹을 놈! 아까부터 얼쩡거리더니 내 그럴 줄 알았다구! 가만히 보고 있는데 만두를 덥썩 훔치다니!"

만두가게의 주인은 욕설을 해대며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또 다시 주먹을 휘두르며 다가왔다.

"이것이면 되겠소?"

".......?"

장천림은 은자를 내밀었다. 만두가게 주인의 눈이 둥그레졌다.

소년이 만두 한 접시를 더러운 손으로 만졌기 때문에 한 접시의 만두가 몽땅 못쓰게 됐었다. 그런데 장천림이 내민 은자는 만두 한 접시가 아니라 한 솥을 사고도 남을 금액이었다.

"무, 물론입죠. 헤헤!"

만두가게 주인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그는 얼른 은자를 낚아채듯 받고는 홱 돌아섰다.

"이 빌어먹을 꼬마놈! 오늘 은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네 다리가 성치 않았을 거다!"

만두가게 주인은 소년을 향해 침을 퇘! 뱉고는 얼른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행여나 장천림의 마음이 변할까 두려운 모양이었다.

장천림은 소년의 손을 잡고 걸었다. 소년은 만두 조각을 꿀꺽 삼키더니 말없이 그의 손에 이끌려 걸었다.

얼마쯤 가자 장천림은 소년의 손을 놓아 주었다. 그리고 은자 한 덩이를 꺼내 소년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뭘 사먹거라."

그런데 소년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소년은 차갑게 그를 노려 보더니 야멸차게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난 거지가 아니오!"

장천림은 의아했다. 그러나 곧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거지라서 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돈으로 더이상 도둑질을 하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

그 말에 소년은 그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소년은 약 십이삼 세 가량 되어 보였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덥썩 은자를 받았다. 그러나 한 마디하기를 잊지 않는 것이었다.

"내 지금은 받지만 언젠가는 꼭 갚겠소, 왜냐하면 나는 이유없는 동정은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오."

"나도 네가 그러기를 바란다."

장천림은 돌아섰다. 그는 기분이 좋았다. 그는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너같은 아이는 언제고 일어서기 마련이지. 잘 되기를 빈다. 꼬마야.'

이때였다.

"내 이름은 백리진강(白里眞强)이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오?"

소년이 등 뒤에서 묻는 말이었다. 장천림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백리진강이라? 좋은 이름이다. 내 이름은 장천림이다."

"장천림...... 장천림......."

소년은 몇 번이나 장천림이란 이름을 되뇌었다. 마치 그 이름을 영원히 잊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장천림은 다시 걸었다.

그런데 소년 백리진강이 다시 그를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면서 물었다.

"또 무슨 볼 일이 있느냐? 돈이 부족하냐?"

백리진강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물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당신이라면 알 것같아서........"

"무엇을 말이냐?"

"천하에서 가장 강한 무공(武功)을 익히려면 어디로 가야 하오?"

장천림은 안색이 변했다. 너무나 뜻밖의 질문이었다. 아니 왠지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는 소년의 눈이 타고 있었다. 그 눈은 야수(野獸)의 눈빛을 닮아 있었다.

장천림은 생각했다.

'아마도 이 놈은 만나는 사람마다 이런 질문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

백리진강, 그는 벌써 수백 번도 더 그런 질문을 했다. 특히 무사들을 만날 때마다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각오하고 때로는 호되게 매를 맞으면서까지도 수없이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제대로 된 대답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인상이 좋지 못할 뿐더러 두 눈에 야수와 같은 빛을 담고 있는 그에게 그 누가 대답을 제대로 해주겠는가.

장천림은 잠시 생각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무공.......?'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질문이었다. 잠시 동안 장천림의 뇌리에는 수많은 문파와 무공들이 떠올랐으나 좀체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를 생각이 떠올렸다.

"그렇다면 소림사로 가라. 소림사의 승려들은 아주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의외로 백리진강은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는 것이 아닌가?

"안 돼요. 그곳은. 흐흐....... 그 중놈들은 턱없이 오만하고 되먹지 않은 놈들이에요. 그들에게 무공을 익히느니 차라리 개에게 익히겠어요."

".......!"

장천림은 다시 가슴이 섬뜩했다.

'소림사와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모양이군. 아니면....... 벌써 가보았다가 고초를 겪었던가?'

그는 다시 생각했다. 잠시 후 또 한 곳이 생각났다.

"확실히 모르지만........ 내가 알기로 황궁(皇宮)에 비밀무고(秘密武庫)가 있고 그 무고의 무학을 익히면 천하제일이 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황궁에 간다고 다 무학을 익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황실의 근위병이나 된다면 몰라도........"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백리진강의 눈이 일순 번쩍 빛나는 듯 했다.

그는 갑자기 땅에 무릎을 꿇었다.

"고마웠소! 내 평생 당신을 은인으로 생각하겠소. 만일 내가 황궁의 무학을 익힐 수 있다면 그때는 언제고 당신을 위해 한 가지 일을 하겠소!"

백리진강은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더니 쏜살같이 어디론가 뛰어갔다.

".......!"

장천림은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몸을 떨었다. 그는 가슴이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소년은 떠났으나 왠지 알 수 없는 여운이 남아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쓴 웃음을 지으며 장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던 장천림은 화석처럼 굳어졌다.

'믿을 수 없다.......'

그의 눈은 공포에 질린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장에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는 물건이 있었다. 아니다.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백가소.

그녀가 목을 맨 것이다. 장천림은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그는 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고개를 흔들고 눈을 감았다 떴다 하기를 수십여 차례, 그는 눈을 부릅뜨고 백가소를 바라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백가소는 백가소였다. 그녀는 목을 매단 채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백가소는 자살한 것이었다.

"왜? 왜지......?"

장천림은 넋을 잃은 채 중얼거렸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대답할 리가 없었다. 이때 그녀의 발치 아래 네 장의 그림(畵)이 떨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멍하니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그림에는 각각 한 명씩의 인물화(人物畵)가 그려져 있었다. 인물화 속에는 하나같이 준수하고 영기발랄한 이십대 청년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좋은 환경에서 자라 좋은 자양(滋養)의 음식물을 먹고 언제나 큰소리를 치면서 대로(大路)를 활보할 듯한 그런 류의 청년들이었다.

"이건....... 뭔가?"

장천림은 한참 후에야 중얼거렸다.

떨리는 손으로 그림을 집어들어 살피던 그는 그림 후면에 갈겨 쓴 듯한 백가소의 글씨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이들이 소아를 망친 흉수(凶手)들이에요. 소아는 처음 이들에게 납치되어 수모를 당한 뒤 버려졌어요. 림오빠.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소아의 원한을 갚아주세요. 소녀는 더럽혀진 몸으로는 더이상 살 수가 없답니다.

간단한 글이었다. 그러나 이 몇 줄의 글귀로 그녀가 자살한 이유는 충분히 설명되고 있었다. 백가소는 결국 한(恨)을 잊을 수가 없었다.

처음 화구를 달라고 했을 때부터 그녀에게는 죽음이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원수들의 얼굴을 그려놓고 유부의 길로 떠나버린 것이었다.

"으흐흐...... 소아!"

비가 내린다.

처음에는 가랑비였다가 나중에는 점차 굵어지는 빗줄기 속에 무덤을 만들고 있는 자가 있었다.

생명이란 덧없는 것이다.

어젯밤만 해도 뜨겁게 타오르며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속삭이던 아름다운 여인이 지금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비에 젖은 황토 속에 묻혔다.

떨리는 손으로 흙을 메우는 장천림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한참 후에야 완성된 봉분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돌아가는 줄 알았었다. 이제는 옛날로 돌아가 금문장으로 나란히 돌아가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니.......

장천림은 품 속에서 네 장의 인물화를 꺼냈다.

그림 속의 네 인물은 누가 보더라도 귀공자로 보일 만한 기품과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이 놈들이........

이 놈들이 소아를 죽인 것이다!

강호무정 제5장 원점(原點)으로 - 검궁인





제5장 원점(原點)으로



강호사공자(江湖四公子).

당금 무림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촌놈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하늘 아래 귀공자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강호사공자 만큼이나 그에 합당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찾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강호사공자는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장차의 중원무림을 이끌고 나갈 후기지수 중에서도 발군의 신성(神星)들이었다.

우선 그들의 내력은 쟁쟁했다.

당금 무림은 한 마디로 백도무림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수년 전 이른바 백화대전(白華大戰), 또는 사십일전쟁이라고 불리웠던 정사대전으로 인해 흑도녹림이 전멸을 하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녹림은 물론 흑도무림인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었다. 그로 인해 백도무림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무림연합맹(武林聯合盟).

당시 구파일방과 무림세가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던 연맹체는 지금도 존속하고 있었다. 연합맹은 공동의 행동과 의결방식을 정하고 각 파가 번갈아 맹주(盟主)와 집행기관이 되어 무림을 장악하고 있었다.

강호사공자는 무림맹 중에서도 지대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는 사대명문(四大名門)의 후예들이었다.

천인검객(天忍劍客) 북리웅풍(北里雄風)은 대화산검파(大華山劍派)의 직계 제자로 화산파의 후기지수로 불리우고 있으며, 권왕(拳王) 상관중(上官重)은 종남파(終南派)의 차기 장문인감으로 내정된 인물이었다.

천수관음(千手觀音) 당수문(唐秀紋)으로 말할 것같으면 사천당가(四川唐門)의 서열 이위에 있는 인물이며 백도제일검(白道第一劍) 백유성(白流星)은 대무당파(大武黨派)의 속가제자로 속가인물로는 제일인자로 불리우고 있었다.

그들이 이른바 강호사공자로 불리는 기재들이었다. 따라서 천하에서 그들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강호사공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세인들의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첫째는 그들의 출신이 비범하다는 것이었으며, 둘째는 출신 못지 않게 무공이 출중하다는 것이었다.

셋째는 그들의 출신이나 무공보다도 각자가 지닌 인품과 덕망이 범인들을 뛰어 넘는다는 것이었다.

넷째는 강호사공자가 필히 미래 무림의 주역이 되리라는 점이다.

다섯째는 그들이 단단히 결속되어 있어 그 의리(義理)가 골육 같다는 점이었다.

이상의 다섯 가지 점은 강호사공자를 무림의 대선배들도 한 수 양보하게 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토록 무림의 선망과 기대를 한 몸에 모으고 있는 강호사공자가 범인이었다는 사실은 실로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었다.

장천림은 백가소가 남긴 그림 속의 인물들을 알아내는데 그다지 많은 노력이 필요치 않았다.

그는 어떤 주루에서 강호를 잘 아는 표객 한 명에게 그림을 보인 바, 그림 속의 청년들이 바로 강호사공자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 강호사공자는 강호에서 가장 뛰어난 영재(英才)들을 가리키는 말일세!

- 강호사공자들이야말로 앞날의 무림을 떠받들 동량들일세!

- 허허! 자네도 한 번 만나보게 되면 그들을 존경하게 될 걸세!

- 강호사공자는........

장천림은 더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표객의 면상을 주먹으로 한 대 갈긴 후 주루를 뛰쳐나와 버렸다.

복수다! 강호사공자가 아니라 상대가 당금 무림의 맹주라 해도 복수를 하고야 말 것이다.

기다려라! 이 장천림이 간다.



홍무(洪武) 9년 6월 16일

사천(四川)의 험지를 비틀거리며 걷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전신은 피를 뒤집어 쓴 듯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장천림이었다.

전신에 성한 곳이라고는 한군데도 없었다. 여기저기 옷이 찢어졌음은 물론이려니와 곳곳에 암기와 자상(刺傷)이 나 있었다. 그런 상태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이 기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어젯밤 사천 지방을 군림하고 있는 무림명가인 당가보(唐家堡)에 단신으로 뛰어 들었다.

목적은 무림에 혁혁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강호사공자의 일원인 천수관음 당수문을 죽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수문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다. 그를 찾기도 전에 수많은 당가고수들의 합공을 받았으며, 또한 당가를 무림일절로 만든 암기술(暗器術)에 만신창이가 되고만 것이었다.

그는 목표를 이루지도 못하고 탈출했다. 그나마 생명을 부지한 것 만도 다행이었다.

그가 실패한 이유는 간단했다.

당가보의 경비가 상상보다 삼엄한 것에도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결정적인 원인은 그 자신이 지닌 무공이 너무나도 녹슬어 있다는 것이었다.

장천림은 출중한 무예를 익혔다. 그것은 대원제국이 반원지사들을 살해하기 위해 교육시킨 무공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익힌 무공은 빼어난 것이었다. 그것은 대원의 황실에서 전래로 내려오는 무예의 일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동안 너무나 몸을 쓰지 않았다. 그가 검을 잡은 것 만 해도 근 십 년 만이었던 것이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생각과 동작이 쉽게 연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역부족이었다. 그가 익힌 무학은 고도의 살인술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민첩한 동작과 감각이 최우선해야 했다. 그래야 한층 빛을 낼 수 있는 무학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몸은 녹슬었으며, 감각도 예전에 비한다면 십배 이상 퇴보되어 있었다.

안돼........

이 정도로는.......!

장천림은 사천 분지를 비틀거리며 걸었다. 그의 발 밑으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렇게 숨이 차서야........

이 상태로는 복수가 불가능해.

그에게는 어떤 변화가 필요했다. 어느덧 장천림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늪지로 찾아들고 있었다. 예전에 그가 배운 특별한 요상법을 시행하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그는 황하로 흘러드는 지류의 하나인 작은 샛강을 발견했다. 늪지는 밀집된 갈대숲 속에 있었다. 그곳에 질척한 진흙의 수렁이 있었다.

장천림은 망설임없이 그 수렁 속에 옷을 벗고 몸을 담그었다. 진흙으로 된 수렁 속이라 몸을 담그는 순간 목까지 잠겼다.

그는 알몸이었으므로 독암기나 자상에 인한 상처가 즉시 불에 덴 듯한 고통을 호소해 왔다.

그러나 꾹 참았다. 그에게는 금창약이나 별다른 치료법이 없었다.

수렁 속에서 흙의 자연정화작용으로 상처를 치료하고 독을 제거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류의 요상법은 동영(東瀛)의 인자(忍者)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하루, 이틀, 열흘........

십여 일이 꿈같이 흘렀다. 그동안 장천림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화기를 접하거나 음식물을 복용하게 되면 요상법은 효과를 잃기 때문이었다.

열흘째 되는 날 그는 수렁에서 걸어나왔다.

그의 전신에는 놀랍게도 수백 마리의 거머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거머리들이 달라붙어 그의 피를 빨아먹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거머리가 빨아먹고 있는 피는 바로 독혈(毒血)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손을 피부에 대고 문지르자 거머리가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거머리들은 독혈을 먹고 거의 기운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장천림은 찢어진 옷을 대충 걸치고 그곳을 떠났다.

지난 열흘 간 그는 많은 가능성을 생각했다.

복수를 위한 깊은 상념이었다. 그의 현재 실력으로 강호사공자를 죽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자칫하면 중원무림 전체를 상대로 싸워야 했다. 물론 자신에게는 그럴 만한 세력도 능력도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복수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설사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파는 한이 있더라도 백가소를 망치고 그녀를 자살로 몰고간 강호사공자는 죽여야만 했다.

그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곧바로 남하(南下)하기 시작했다.



절강성(浙江省) 최남단.

세인들이 한 번도 발을 디뎌본 적이 없는 오지(奧地)가 있다.

이름하여 불귀곡(不歸谷).

언제, 누가 붙였는지 몰라도 그런 이름이 붙어 있는 절곡이었다. 불귀곡이란 돌아오지 않는 계곡을 뜻한다. 문자 그대로 한 번 불귀곡에 발을 들이면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적어도 아득한 옛날에는 그랬다.

이 불귀곡에서 천여 명에 달하는 아이들이 고된 훈련을 받으며 하나 둘 쓰러져 갔고, 나중에는 탈출을 하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낙화처럼 쓰러져 갔던 것이다.

바로 대원제국이 기울어 갈 무렵의 일이었다.

그들은 최후의 발악으로 이곳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들을 모아놓고 반원지사들을 암살하기 위한 살인 교육을 시켰던 것이다.

돌아왔다.

"......."

장천림은 물경 십 년 만에 불귀곡으로 돌아온 것이다.

과거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는 감회에 젖어 잡초와 밀림이 우거져 있는 불귀곡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그 얼마나 많은 고통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시달려 왔던가.......?

장천림은 돌아온 것이다.

현무, 주작, 백호, 청룡단의 천여 명 아이들이 잠을 자던 석실들 하며........

그들이 훈련을 받기 위해 지어져 있던 모든 시설물들을 둘러보았다. 장천림은 미리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그는 단단히 각오를 한 것이다. 복수를 위해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자신의 녹슨 몸을 부활시키고........ 잃어버린 살수의 감각을 되찾기 위하여 이곳을 찾은 것이다.

그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하는 일은 이곳의 시설물들을 과거와 똑같이 복원시키는 것이었다. 혼자의 힘으로 불귀곡을 복원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해내야만 했다.

이날부터 장천림은 웃통을 벗고 등짐으로 바위를 나르며 공사에 착수했다.

기억을 되살려 가면서 옛날의 지옥훈련을 받던 시설들을 하나하나 복원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불귀곡에 도착한 날은 홍무 9년 9월 10일이었다.





황궁(皇宮).

천하에서 가장 화려한 곳. 아니 이런 설명보다는 천하에서 가장 위대한 곳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대명황조(大明皇朝)가 철혈의 권력을 행사하는 곳이며, 권문세가들이 처마를 맞대고 운집해 있는 곳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리라.

금릉(金陵:당금의 남경)의 중심부에 자리잡은 황궁은 지상최대의 건축물이며 신이 내린 인간최대의 권좌다.

황궁에서 동쪽으로 삼 리(三里)쯤 떨어진 곳에 대저택이 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대명황가의 권력자가 사는 저택이라면 세인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추가하여 저택의 주인이 환관(宦官) 등소(登素)라면 세인들은 안색이 변할 것이다.

환관이라면 대명부의 내전을 관장하는 남성을 거세한 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런 인간이라고 말 할 수는 결코 없다.

왜냐하면 이들 환관이야말로 당금의 조정을 흔들고 황제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력자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모든 환관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태태감(太太監) 등소.

그는 환관들의 우두머리급 위인으로 황제의 총애와 신임을 두텁게 입고 있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뿐으로 그것은 남성을 행사할 물건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그 외에는 온갖 부(富)와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었다.

그가 사는 저택만 하여도 넓이가 황궁을 빼놓고는 이곳 금릉에서 가장 클 정도였다.

가을이다.

스스스........

추풍(秋風)에 웅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저택의 후원에는 낙엽이 지고 있었다. 온갖 희귀식물의 전시장인 듯한 후원이었다.

낙엽이 떨어져 역시 거대한 인공연못 위에 떨어진다. 낙엽은 연못 위에 수북히 쌓여 부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정자(亭子).

날아갈 듯한 처마 끝에는 황금으로 주조된 풍경(風磬)이 걸려 있었다.

디잉........

이따금 맑은 음향이 들린다.

딱.

또 다른 소리가 있었다. 역시 청아한 음향이었다.

청옥(靑玉)으로 된 바둑판 위에 묘안옥(猫眼玉)으로 된 바둑돌이 떨어지는 소리다.

등소는 지금 느긋하게 정자에 앉아 집사와 함께 바둑을 두는 중이었다. 그의 바둑 실력은 국수급이라고 한다. 틈만 나면 이렇게 바둑을 두는 것이 그의 유일한 기쁨이었다.

망중한(忙中閑)을 즐기는 것이다.

지금 그가 돌은 둔 곳은 대마(大馬)의 급소를 노리는 위치였다. 그 바람에 집사는 낭패한 표정으로 잔뜩 눈살을 찌푸린 채 어쩔줄을 모르는 모습이었다.

이제 그가 대응수를 찾으려면 족히 뜨거운 차 석 잔은 마실 시간이 경과해야 하리라.

등소는 시선을 돌려 주변을 둘러 보았다. 느긋한 표정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연못가에서 잉어들에게 먹이를 주는 소년이 있었다.

소년의 나이는 십사 세쯤 되어 보인다. 일신에는 검박한 백의를 입었는데 복장으로 보아 그의 저택 일을 보는 하인임이 분명했다.

'못 보던 아이인데.......?'

그는 눈을 가늘게 하여 소년의 모습을 관찰했다.

등소의 나이 오십칠 세.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환관이기에 자식이 있을 리가 없었다.

사실 대부분의 환관들은 노후의 쓸쓸함을 달래기 위해 양자를 들이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등소는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핏줄이 다른 아이에게 정을 주는 것은 마음에 차지는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 차츰 마음이 달라지고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올해 들어 공연히 허전한 것이 가슴에 구멍이 숭숭 뚫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참한 아이라도 있다면 남들처럼 양자를 들일까 생각하는 중이다.

그러나 마땅한 인물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환관의 양자로 들어오는 자들은 뻔한 것이다.

그들은 환관의 권력이나 재산을 노리고 양자로 들어오는 것이다.

"저 아이는 누군가?"

집사 황신(黃信)은 고개를 돌렸다. 문득 그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얼마 전 들어온 아이입니다. 똑똑하고 여간 착한 것이 아닙니다. 머리도 영리한 것 같아 요즘 글(文)을 가르치고 있읍죠."

"그래.......?"

등소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수염도 없는 턱을 쓰다듬으며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부드러운 웃음이 흘러 나왔다.

"허허........ 오늘 밤 저 아이를 내 방으로 불러 들이게. 이야기라도 하고 싶군."

황신은 눈치가 빠르다. 그는 대뜸 주인의 심정을 눈치챘다.

"예. 알겠습니다. 저 아이는 고아인데다가 아직 이곳 권문가의 때가 묻지 않았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초겨울이다.

아직은 추위가 오기 이른 계절이었다. 불귀곡의 풍경은 변해가고 있었다.

잡초 무성하던 분지는 깨끗이 다듬어져 있었으며, 건물들은 제 모양을 찾고 있었다. 장천림이 불귀곡으로 들어온지 꼭 오십여 일 만의 일이었다.

그는 등가죽이 벗겨지고 손발에 못이 박혔다. 그동안 그는 전념으로 불귀곡을 복원시키고 있었다.

특히 그가 주력한 것은 지난 날 불귀곡에서 악명이 높았던 지옥십이관(地獄十二關)의 시설을 복원하는 일이었다.

지옥십이관은 소년들의 체력과 정신력, 투혼을 증진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의 시설들을 말한다. 지옥십이관을 통과하지 못하고 죽어간 소년들이 그 몇이던가?

장천림은 비지땀을 흘리며 지옥십이관을 복원시키고 있었다.



"이름은?"

"등진강(登眞强)입니다."

"부친의 이름은?"

"등소입니다."

"너는 언제 거세(去勢)했느냐?"

"한 달 전입니다."

"거세 방법은?"

"절단(切斷)입니다."

환관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남성의 거세였다. 환관의 자식은 다시 환관이 되는 것이 관례다. 태태감 등소의 양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등소의 양자가 된 소년은 몇 개월 후 환관으로 임용되었다.

처음에는 소감(少監)이라 하여 동자환관이 되는 것이다. 동자들은 주로 후궁들의 시중을 든다.

환관으로 입문하는 데는 심사가 엄격하기 그지 없었다. 등진강은 바지를 벗기고 검사를 당했다. 과연 그의 남성은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에 없었다.

그는 합격되었다.

그런데 그의 사타구니 안쪽이 유난히 부어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오직 등진강과 그의 양부인 태태감 등소 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양부인 등소가 태태감인 관계로 등진강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태감(少太監)이라는 동자환관으로서는 파격적인 진급을 하게 된다. 이후로 그는 황궁의 여러 곳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몸이 되었다.

등진강의 본래 이름은 백리진강(白里眞强)이었다.

자시(子時)가 넘었다.

등진강은 양부인 등소의 부름을 받았다. 등소는 백호피를 씌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는 등진강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부드럽기 그지 없었다.

"어서 오너라. 그래 황실의 생활은 할만 하더냐?"

"예. 아버님."

등진강은 조용히 대답하고는 뒤로 돌아가 양부 등소의 어깨를 주무른다. 등소는 흐뭇한 표정이었다.

백 번을 생각해 보아도 잘한 일이었다. 그는 양아들을 둔 일을 스스로 잘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꺼려지는 것은 등진강의 사내를 제거하지 않은 일이었다. 문득 등소는 음성을 낮추어 물었다.

"그곳은 어떠냐?"

등진강은 얼굴을 붉혔다.

"이제는 밖으로 끄집어 냈습니다."

"어디 보자."

등진강은 스스럼없이 바지를 벗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분명 등진강은 환관이었거늘 그의 사타구니에는 의당 없어야 할 물건이 그것도 늠름하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흐음.......! 탐스럽군."

등소는 눈을 지그시 감는다. 그는 손을 뻗어 등진강의 늠름한 사내를 잡았다.

손 안에 뿌듯하게 차오르는 부피감이 있었다. 그는 지난 날을 회상하고 있었다. 자신에게도 어릴 적에는 그런 물건이 있었다.

소년 적에는 그 물건을 가지고 아이들끼리 장난을 한 적도 있었다. 누구의 물건이 가장 크게 일어서는가를 자랑하기 위해 신나게 쥐고 흔들어대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 그의 사타구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명예도 좋고 부귀도 좋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남자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하는 사실이 항상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양자에게도 같은 불운의 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백리진강을 양자로 들였을 때 그는 결심했다.

'내 이 아이 만은 내시로 만들지 않으리라!'

만일 그 사실이 발각된다면 자신은 물론 구족(九族)이 멸하게 되는 중형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등진강의 사내를 거세하지 않은 것은 한이 맺혔기 때문이었다.

환관 심사의 눈을 피하는 방법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일을 위해서 그는 특별한 방법을 동원했다.

등진강의 가랑이 사이를 ㅉ고 그 속으로 물건을 밀어넣은 뒤 봉합 수술을 해 버린 것이었다. 그 시술은 자신이 직접했다. 기밀이 밖으로 누설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감쪽같다.

그러나 다시 물건을 꺼내니 등진강은 완벽한 사내 구실을 할 수 있는 몸이 된 것이다.

"조심하도록 해라. 발각나면 어떻게 되는 지 알지?"

등진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등소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 지 알고 있었다.

그는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들어왔다.

그동안 등소의 눈에 들기 위하여 얼마나 보이지 않는 노력을 하였던가? 결국 모든 일은 그의 뜻대로 된 것이다.

그는 등소의 양자가 되었고, 황실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신분으로까지 되었다. 이제 남은 일은........

"아무리 마음이 동한다 해도 내전(內殿)의 후궁이나 시녀들을 건드리는 일은 삼가해야 한다. 설혹 참을 수 없다면 이 애비가 적당한 계집을 구해 주마. 그 일은 꼭 집에서만 해야 한다. 알겠느냐?"

"물론입니다. 아버님."

등진강, 아니 백리진강은 진중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등소는 그가 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이렇게 바지를 벗기고 그의 물건을 만진다.

그것은 잃어버린 등소 자신의 물건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등소는 그에게 있어 은인이었다.

강호무정 제6장 소수마경(素手魔經) - 검궁인





제6장 소수마경(素手魔經 )



홍무(洪武) 11년 정월(正月).

날짜의 의미를 잊은 지 오래다.

장천림은 자신이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는지 계산하지 않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지옥십이관을 모두 넘었다.

과거 그는 지옥십이관 중에서 간신히 팔관까지는 통과했었다. 나머지 사관을 통과하는데 그는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넘겨야만 했다.

진저리 쳐지는 일이었다. 더욱이 교두(敎頭)도 없이 혼자서 지옥십이관을 넘는다는 것은 초인적인 의지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마음이 약해진다면 중도에서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뒤로 물러날 수 없도록 퇴로(退路)마저 기관을 봉쇄해 놓았다.

화관(火關)....... 빙관(氷關)....... 독관(毒關)....... 도관(刀關).......

그 관문들은 그의 몸에 무수한 상처를 만들었다. 그는 불에 온 몸을 데어 한 달 가량을 꼼짝도 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빙관에서는 온 몸이 얼어버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무서운 것은 독관이었다.

독관에서 전신을 칠백여 종의 독극물에 담근 채 온 몸이 두 배나 되도록 부은 상태로 그 독이 체내에서 섞여 일으키는 고통을 참는 것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무서운 극기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독관마저도 통과하였다. 그로 인해 그는 백독불침의 몸이 되었다.

도관(刀關)은 아수라지옥이었다.

도관에 들면 사방으로부터 무수한 창과 검, 칼들이 날아든다. 그 날카로운 칼날은 그의 몸을 수없이 난도질한다. 결국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곤 했다.

만일 그의 뇌리에 백가소의 환영이 남아 있지 않았더라면 벌써 포기했을 것이다.

어느새 세월은 물같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대충 불귀곡에 들어온 지 일 년 반이 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었다.

이대로 출곡한다 해도 과연 강호사공자를 죽일 수 있을까?

그 점에서 그는 자신이 없었다. 과거의 감각과 민첩함은 찾았으나 과연 중원 정통문파의 일류 고수인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지옥십이관을 모두 통과한 이상 더이상 불귀곡에 머문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그는 불귀곡을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출곡하기로 한 날 아침이었다.

그는 지옥십이관의 마지막 관문인 도관의 가로막힌 석벽 안쪽이 비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우연히 석벽을 두드리다가 발견한 사실이었다.

속이 비어있는 소리가 공명으로 전달되었던 것이다.

'이 안에 또 뭐가 있단 말인가.......?'

그는 철검으로 석벽을 후려쳤다. 과연 불꽃을 내면서도 울리는 소리는 허전한 것이었다. 그는 전력을 다해 석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반나절이나 되었을까?

마침내 와르르! 석벽이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은 놀랍게도 또 다른 석부였다.

반듯하게 다듬어진 석부는 한 눈에 보아도 인공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석부를 둘러 보았다.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었으나 무척이나 중요한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섯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석실에는 여러 가지 문서(文書)들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그 중 한 개의 방에는 영약(靈藥)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것은 내공을 증진시키는 영약들이었다.

나머지 세 개의 방에는 중원무림 각 대문파(各大門派)에 대한 상세한 내막을 적은 문서들이 서가에 정리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들을 척살할 때 참조하기 위해 작성한 것인 듯 했다.

놀라운 것은 마지막 방에 있었다.

비급(秘級). 서가의 책상에는 온통 무공비급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서가에는 대원제국 황가독문(皇家獨門)의 무공에서부터 중원제파의 각종 무공비급들이 꽂혀 있었다. 그것은 원이 중원무림을 격파하기 위해 수집한 것들이었다.

그것은 최종적으로 청룡단에 속한 자객들에게 익히게 할 목적이기도 했으며, 각 파의 무공들의 단점을 파악하기 위해 모아 놓은 것이기도 했다.

이것이다! 이것들을 익히자!

장천림은 하늘이 자신을 도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날부터 석실에 틀어박혀 새로운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다.

약실(藥室)에 있는 영단비약들은 그의 무공증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영약들을 복용하면서 잠을 자는 것도 잊고 피나는 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은 수염과 머리칼이 뒤엉켜 옛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입고 있는 옷도 거의 걸레쪽이 되다시피 했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나날이 새로운 무공을 익히는데 빠져들고 있었다.

세월은 바람처럼 흐른다. 그리고 흐르는 세월 속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었다.

인간도 변하고 산하(山河)도 변한다. 더욱이 목적을 가지고 한을 품은 인간의 마음은 더욱더 모질어지는 법인가 보다.

복수를 한다는 집념은 세월이 흐를 수록 쇠퇴해 가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극명해지고 있었다. 장천림은 시간도 정지된 듯한 불귀곡의 석부에서 혼자의 몸으로 무공을 익히는데 몰입되어 있었다.

만일 그에게 복수의 일념이 없었다면 도저히 그 많은 시간들을 견디어낼 수 없었으리라.



홍무(洪武) 13년 10월.

인간에게는 빈부(貧富)와 계급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속옷 나부랭이와 식사 후에 마시는 한 잔의 차에 이르기까지 등급에 의하여 격이 달라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에도 예외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계절이다. 땅을 가는 농부의 험한 손에 내리던 가을(秋)은 지금 이곳 황궁이 있는 금릉에도 똑같이 내리고 있다.

사나이.

비상하는 독수리 문양이 수놓아진 백색무복을 입고 황궁의 청석(靑石)이 반듯하게 깔려 있는 대도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걸어가는 품위있는 걸음걸이는 그가 곧 이 황궁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나이는 약관이 조금 넘어 보였을 뿐이나 그는 지나칠 정도로 잘 다듬어진 용모와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영준한 용모도 용모려니와 그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기상과 날카로운 면이 느껴지는 것이다.

규칙적인 걸음걸이로 걸어가던 사나이는 문득 걸음을 멈춘다.

그는 눈살을 약간 찌푸리고 있었다. 사나이의 시선에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사나이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육순이 넘어보이는 한 명의 환관 복장의 노인이 포박된 채 개처럼 의금부 관원들에게 끌려가고 있는 광경이 비친 것이다.

"으음.......? 등태감(登太監)이.......?"

이렇게 중얼거린 사나이는 본능적으로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쓸데없는 일이겠지."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가던 길을 간다.

그가 향하는 곳은 황궁에서는 약간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커다란 창고처럼 보이는 건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날따라 황궁 내의 공기가 다소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본래 황궁은 언제나 경비가 삼엄한 편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살벌한 기운이 퍼져 있다고 느끼는 것이었다. 황궁이라면 그에게는 집안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따라서 그가 모르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것은 사나이가 황궁 내에서 요직을 맡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보통 요직이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열 평 가량 되어 보이는 밀실이었다.

사방 벽에는 중원전도(中原全圖)가 벽지처럼 도배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딱딱하고 살풍경한 분위기였다.

이 밀실이 바로 대명황실의 최고 첩보기관인 동창(東廠)의 본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불과 몇몇의 요인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당금의 황제 홍무제(洪武帝)는 동창을 자신의 오른팔로 여기고 그들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었다.

동창의 힘은 절대적인 것이다. 이들은 황가의 인물에서 고관대작에 이르기까지 마음대로 체포, 구금의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역모의 가담자나 그밖의 불순분자들을 체포하여 심문한다.

그러므로 금릉의 권문세가에서는 동창 알기를 귀신 보듯 하는 것이다.

검은 태사의에 앉아 있는 역시 검은 옷의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

그는 언뜻 서당 훈장처럼 보이지만 실은 동창의 최고권좌에 앉아 있는 영반이었다. 수백 명의 생살여탈권을 한 손에 쥐고 대명부를 흔들고 있는 인물이었다.

대영반 장영걸(蔣英傑).

권문가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는 황제의 직속이며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하룻밤에 권문가를 온통 피비린내로 진동케 할 수도 있었다.

전 금군대도독(禁軍大都督)이었던 장무혁(蔣武赫) 대장군의 친 아우이자 대명제국을 일으킨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지금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언제나 그가 신뢰하고 있는 인물의 낮고 침착한 음성이 들리고 있었다.

"부영반 장하영(莊河英),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장영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린다.

"들어와라, 하영."

그의 말투는 인자하게 들렸다. 들어선 청년은 백색무복을 입고 있었다. 바로 방금 전 청석대로를 가로질러온 사나이였다.

장하영은 앞으로 다가와 한 쪽 무릎을 반쯤 꺾어 예를 표했다. 그리고 일어서더니 곧바로 부동의 자세를 취했다.

그를 바라보는 장영걸의 시선은 부드럽기만 했다.

'기특한 놈. 볼수록 커지는구나.'

장하영. 그는 석년에 병사한 금군대도독 장무혁의 독자(獨子)이자 바로 장영걸 본인의 조카이기도 하며, 또한 동창의 부영반이기도 하다.

장래가 촉망되는, 아니 전도가 양양한 청년이었다.

"그래 그동안 별고 없었느냐?"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이었다. 동창 소속의 사람이라면 꿈속에서라도 듣고 싶어하는 말소리지만 장하영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순간 장영걸은 내심 쓸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엇다.

'ㅉ. 여전하군. 녀석, 모처럼 삼촌을 보면 미소라도 지을 것이지........'

그는 섭섭하다. 그러나 그것이 조카 장하영의 성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장영걸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이곳은 동창밀실이고, 그가 조카를 부른 것은 공무가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 대환관인 등소가 체포되었다."

".......!"

"예전에 등소는 자신의 양자인 등진강이라는 소년을 소태감으로 들여보낸 적이 있었다. 아마 너도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

장하영은 안색이 변했다. 그는 웬만한 일에 안색이 변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 만큼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진동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는 소태감 등진강을 알고 있었다. 워낙 인상이 강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소년이 며칠 전 이유없이 행방을 감추었다. 그런데 그 사건을 조사하던 중 뜻밖의 사실이 밝혀졌다."

".......?"

"소년이 행방을 감춤과 동시에 황궁의 비밀무고(秘密武庫)가 털렸다는 것이다."

".......!"

"그래서 등소가 그 책임을 지고 체포당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비밀무고에서 없어진 물건이 문제인 것이다."

".......?"

장하영은 이제까지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다. 그러나 점차 그의 얼굴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천년하수오(千年荷首烏), 만년설삼(萬年雪蔘), 소림대환단(少林大還丹) 여섯 알, 구지자엽초(九枝紫葉草), 공청석유(孔淸石乳) 한 병........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종류의 영약류와 함께....... 아니다. 그런 것은 그다지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한 권의 중요한 문서(文書)가 없어진 사실이다. 그래서 너를 부른 것이다."

순간 장하영의 동공에서는 강한 의문이 떠올랐다.

'겨우 그런 일로 나를........'

아무리 중요한 물건이 없어졌다고 해도 그까짓 좀도적에 대한 일에 자신이 직접 나서야 되겠느냐는 강한 반발인 것이었다.

딴은 그렇다. 장하영은 동창이란 막강한 권력부의 부영반이다. 그런 그가 도적을 잡는 일에 직접 나선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아무리 없어진 물건들이 중요하다고 해도 고작 약 나부랭이일진데........ 그 정도로 동창이 나선다는 것만 해도 우스운 일이다.

그런데 자신을 장영걸이 친히 부르다니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때 그의 마음을 읽은 듯이 장영걸이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없어진 문서........ 아니다. 그것은 문서가 아니라 한 권의 무경(武經)이다. 그 무경이 무엇인지 아느냐? 이름을 들으면 너도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

"소수마경(素手魔經)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겠지?"

"소수마경!"

마침내 장하영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흘러 나왔다.

- 소수마경(素手魔經).

그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가?

전설은 말한다.

.......소수혈옥광(素手血玉光)이 나타나면 천하가 피에 잠기게 되노라!

소수마경은 칠백 년 전 천축(天竺) 소뢰음사(少雷音寺)에서 파생한 악마의 무경이었다. 이 무공을 익히게 되면 손바닥이 투명한 흰색을 띄게 되며 공력의 정도에 따라 손바닥 한가운데(掌中) 혈옥색의 반점이 생긴다.

일단 이 무공에 적중하게 되면 생물은 결코 죽음을 피할 수가 없다. 만일 십이 성에 달하게 되면 심성(心性)이 변하여 악마가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서운 마공이었다.

칠백 년 전 천축의 마승 파가랍(破伽拉)이 이 마공을 익혀 천축을 피로 혈세하고 중원으로 건너 왔을 때 중원은 도합 칠십오 개의 문파가 무너졌었다.

만일 당시 소림의 신승(神僧) 무한선사(無限禪師)가 소림의 백팔나한대진과 무당의 대칠성검진, 그리고 중원 무림의 일백팔인의 고수들이 연합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를 제거하지 못했을 것이다.

중원에서 소수혈옥이라는 말은 곧 죽음과 공포의 대명사였다. 그로 인해 소수마경은 금단의 마경으로 불리워졌으며 어떤 인물을 막론하고 그 마경을 익히게 되면 전 무림의 공적으로 선포된다는 철칙이 생겼다.

그후 칠백 년이 흐르는 사이 소수마경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데 그 마경이 황궁무고에서 잠자고 있었을 줄이야.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마경이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실로 전율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이 마경이 세상에 나간다면 머지 않아 천하는 피에 잠기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는 이 일이 더 번지기 전에 마경을 회수하여야 한다."

장하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녕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그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라고 느꼈다.

숙부 장영걸이 자신을 부른 것은 지당한 일이었다. 그가 생각하기로도 소수마경이 강호에 나간다면 이후로 벌어질 일은 상상하기도 무서운 결과가 파생할 것이다.

"너에게 환영팔신(幻影八神)을 주겠다. 적절히 부릴 줄로 믿는다."

환영팔신.

그들은 본래 사도 출신의 고수들이다. 후에 황궁에 투신하였으나 그들의 능력은 가히 신비경이었다. 그들이라면 무슨 일을 도모하든 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장하영은 본래 혼자서 일을 처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위인이었으나 이번만큼은 환영팔신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이번에는 그도 거절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 만의 방식을 고집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허허........ 너의 무운을 빈다. 즉시 떠나도록."

장하영은 절을 한 뒤 밀실을 물러났다.



준비는 간단했다.

장하영은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뒤 간단한 여장을 꾸렸다. 그는 방 안을 둘러 보았다. 쓸쓸한 방 안이었다. 특히나 부친이 돌아가신 이후로 그의 집안은 쓸쓸하기만 했다.

그는 금릉의 권문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전의 그의 과거가 자꾸만 떠오르고 있었다. 명예도 권력도 그에게는 뜬구름처럼 느껴지기만 했다.

그것은 그가 남다른 과거지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그는 한 소년을 떠올린다.

등진강. 그런 이름을 가진 소년이었다. 예전에 한 두 번인가 그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얼굴이 예쁘장하고 피부가 흰 소년이었다. 그는 소태감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왠지 남성을 거세한 환관이라는 느낌이 와 닿지 않았다.

특히나 왼쪽 뺨에 미세흔(微細痕)으로 그려져 있는 한 줄기의 상흔(傷痕)이 왠지 섬뜩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섬뜩하다고 느낀 것은 그 상흔 때문 만이 아니었다.

눈빛. 바로 등진강의 눈빛 때문이었다.

그는 등진강의 눈빛이 누군가를 닮아 있으며, 그 눈빛이 자신이 무척 싫어하는 눈빛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눈빛이 누구를 닮은 눈빛이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언젠가 우연히 동경(銅鏡)을 보고서야 그 눈빛이 자신의 눈빛을 닮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부터 그는 등진강이 더욱 싫어졌다. 그런데 놈이 기어이 일을 낸 것이다.

대체 놈의 정체는 무엇인가.......?

애당초 소수마경을 탈취할 목적으로 등소의 양자가 된 것인가? 그렇다면 놈은 무섭도록 집념어린 놈일 것이다.

놈이 양자가 된 것은 벌서 몇 년 전이었다. 그렇다면 놈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 많은 세월을 인내했다는 말이 된다. 그런 종류의 인간은 소름끼칠 정도로 잔인한 성품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장하영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회랑에 나서자 가을 하늘이 보였다. 그는 다시 허파를 최대한으로 늘리며 그 가을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그리고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는 요대의 단추를 눌렀다.

찰칵!

경쾌한 소리가 나며 요대는 한 자루의 검(劍)으로 바뀌었다.

신선한 검날(劍刃).

그것은 황제로부터 직접 하사받은 어검(御劍)이었다. 그는 이 검에 이름을 붙였다.

- 무루(無淚).

눈물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는 이 검을 사랑했다. 그는 검날을 손가락으로 퉁겼다.

찡........

심금을 울리는 맑은 울음소리가 나고 있었다.

철컥!

그는 다시 검을 요대로 집어넣으며 걸었다. 걷다보니 생각나는 얼굴들이 있었다.

잊혀진 과거 속에서도 언제나 뚜렷이 떠오르는 이름들과 함께 그들의 얼굴은 아직도 붓으로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기만 하다.

'석회림........ 조천백........ 그리고.......? 맞아. 장천림이랬지.'

순간 장하영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이 지겨운 생활을 얼마나 싫어했는가? 이번 기회에 그들을 만나 밤새워 술이나 마셔보자.'

장하영은 회랑이 끝나자 문득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팔신!"

순간 그림자가 이리저리 이동하는 듯 하더니 회랑 아래 팔인의 인물이 소리없이 떨어졌다. 그들은 똑같이 검은 옷을 입은 중년인들이었다.

장하영은 기분좋은 음성으로 명령했다.

"준비하라. 강호로 나간다."



홍무(洪武) 14년 5월 21일.

콰콰콰....... 꽝!

석부를 온통 진동하는 굉음이 울림과 동시에 돌가루가 사방으로 휘날렸다.

장천림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앞 석벽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는 다소 놀랐다.

그는 시험 삼아 천마쇄강인(天魔碎剛印)이라는 장법을 전개한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두께가 한 자가 넘는 두터운 석벽이 단번에 무너지며 구멍이 뚫린 것이 아닌가?

그는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후흐흐....... 후하하하핫핫핫.......!"

그의 웃음소리에 석실이 무너질 듯 진동하며 자욱한 돌가루가 회오리쳤다. 장천림은 신형을 날렸다.

휘익!

그의 신형은 육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빛살처럼 날아갔다. 그는 결심을 굳힌 것이다.

이제 나가자.

더이상 기다릴 수는 없지.

강호사공자.......!

개봉부(開封府).

와글와글........

시끌벅쩍........

대도에서는 흔히 수많은 인파를 보게 된다. 이곳 개봉부도 예외는 아니다. 개봉부는 하남의 성도이자 황하를 건너는 요지이므로 수륙양로의 중심지로 오래 전부터 많은 인파들이 들끓는 곳이다.

노상 연변에 위치한 주루는 이층이었다.

이층에서 내려다보면 저자의 풍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잇점이 있었다.

"......."

주루의 이층 창가에 한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허리에는 한 자루의 철검(鐵劍), 입고 있는 옷은 낡은 흑의였다. 그의 얼굴은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으나 무척이나 피로에 지치고 일면은 권태로와 보이기도 하는 얼굴이었다.

만일 그의 나이가 많지 않다는 점 만을 제외한다면 인생에 지친 중년의 나그네로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눈썹 모양이나 우뚝 선 콧날, 한 일 자로 다문 입술은 준수함을 느끼게 했다.

그는 아까부터 맞은 편 다점(茶店)을 보고 있었다.

찻집은 어디를 가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저자에 있는 맞은 편의 찻집은 손님들이 붐비고 있었다. 뜻밖인 것은 찻집의 주인이 직접 차를 팔고 있다는 점이었다.

주인은 이십 대였으나 다소 뚱뚱한 몸매로 인해 좀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그러나 그 역시 흰 얼굴에 준수한 편이었다.

그는 여유롭고 느긋한 모습이었으며 차를 끓이는 모습에서는 생활에 대한 만족과 흥미가 나타나 있었다. 흑의인은 아까부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몇 시진 째인가.

이윽고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찻집은 문을 닫고 있었다.

다점의 주인은 깨끗한 화복으로 갈아 입고 거리를 횡단하고 있었다. 그가 걸어가자 흑의사나이는 일어섰다. 그리고 주루를 내려와 멀찍이서 그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가?

멀리서 보았을 때와는 달리 화복인은 키가 장신이었다. 그에게서는 왠지 강인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일개 다점의 주인이라고 보기에는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해가 뉘엿뉘엿해지고 시장도 파시를 맞은 탓인지 사람들이 드문드문 사라지고 있었다. 다점 주인은 골목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역시 흑의사나이도 그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갔다. 다점 주인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흑의인은 여전히 그를 바라보며 따라가고 있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다점 주인은 다시 걸었다. 그러다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다점 주인이 의아한 듯이 물었다.

"선생, 혹시 나를........"

그는 자신의 뒤를 따르는 흑의인에게 의혹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겁을 먹은 표정은 아니었다.

이때 흑의사나이는 음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오랫만이군 칠십육 호. 아니....... 천백, 조천백(朝天白)."

순간 다점 주인은 불에 덴 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멍한 표정으로 초라해 보이는 흑의 사나이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이었다.

한참 후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묻고 있었다.

"당신........ 혹시........ 혹시........"

그는 갑자기 와락 다가서더니 흑의 사나이를 가까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연후 격동에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천림(天林)! 천림........ 맞지?"

그는 아득한 기억을 더듬어 무엇인가를 찾아냈는지 잔뜩 흥분한 음성으로 그렇게 묻고 있었다.

초라한 흑의사나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으아악! 살아 있었구만!"

덥썩!

거구의 사나이가 반가움과 희열에 젖어 굳세게 끌어안는 그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흑의사나이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잠자코 선 채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 나다. 장천림!"

다점 주인 조천백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소리치고 있었다.

"으하하하.......! 그래! 반드시 살아있을 줄 알았어. 왜.......? 이제야 나타났냐? 으하하하......!"

개봉부에서 가장 화려한 기루(妓樓).

천화루(天華樓)라면 웬만한 부호가 아니라면 감히 오를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 기루에서 기녀조차 부르지 않고 사나이 둘이서 연신 껄껄거리며 담소하고 있었다.

기녀를 부르지 않을 양이면 무엇 때문에 이런 비싼 기루에 왔는지 모르나........ 그들은 감회에 젖어 있었다.

다점의 주인 조천백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시켜놓은 술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잔뜩 흥분해 있었다. 그는 그저 연신 장천림의 얼굴을 바라보고 또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죽은 귀신이 살아온 듯 온통 신기한 표정이었다.

"대체 자네........ 그동안 무엇을 했길래 이제야 나타났는가?"

"......."

"난 반드시 자네가 살아올 줄 알았어. 암, 자네가 누군데 쉽게 죽겠나?"

"......."

"그래 지금껏 무엇하고 지냈나? 엉! 허허........ 말 좀 하게."

장천림은 비로소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은 부탁이 있어 왔네."

한 마디였다. 그러나 조천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응? 무슨 부탁인가? 허허........ 내가 개봉부에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나?"

장천림은 담담히 말했다.

"언젠가 자네가 개봉부에 가보고 싶다고 한 말을 떠올렸을 뿐이네."

"응. 응, 그랬었군. 하하........ 그래, 잘 왔어. 잘 왔다구!"

조천백은 눈물까지 질금질금 흘리며 기뻐한다. 그들이 어떤 사이인가?

불귀곡에서 생사를 함께 하던 혈명단의 옛 동지가 아닌가?

사실 조천백은 자신이 살아난 것이 바로 장천림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참, 부탁이 있다고 그랬지. 하하........ 무엇이든 말하게. 설사 하늘의 별이라도 따 달라면 따오겠네."

그렇다. 그는 새로운 삶의 은인인 장천림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건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장천림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결코 그런 쉬운 부탁이 아닐세."

맙소사!

하늘의 별을 따는 것이 쉬운 부탁이란 말인가? 조천백은 비로소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며 정색을 했다.

그는 잠시 장천림을 노려보더니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이보게 천림, 나는 이미 자네에게 목숨을 빚졌네. 그리고 지금 남은 나의 삶은 이미 자네의 것이네. 그러니 무슨 부탁이든 부담없이 하게."

잠시 말없이 조천백을 바라보던 장천림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강호사공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장천림을 보고 조천백은 그만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맙소사! 강호사공자라니........ 왜........ 왜 하필 그 자들과 원한을 맺었나?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는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장천림은 말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장천림의 눈을 한동안 응시하던 조천백은 한숨을 푹 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굳이 그 이유를 알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상대는 강호사공자일세. 보통 문제가 아닐세. 실로 우리 두 사람의 힘으로는 벅찬 상대란 말이야."

장천림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렇네. 사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네를 찾은 걸세."

"......."

장천림은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다시 놈들을 찾았을 때는 이미 놈들은 더욱 높은 곳으로 올라가 있었네. 나 혼자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곳으로........"

그의 짙은 검미가 잔뜩 찌푸러지고 있다.

그렇다. 그는 수 년간 혼자서 고독하게 불귀곡에서 무공수련을 쌓았다. 그 목적은 오직 강호사공자를 죽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공을 완성했다고 자신하고 강호에 나왔을 때 그는 이미 그 세월 동안 강호사공자 역시 놀고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지난 날보다 더욱 강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높은 곳에 올라가 있었다. 그는 혼자의 힘으로 강호사공자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조천백을 찾은 것이다.

조천백은 입술을 묘하게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좋아. 상대가 누구든 간에 어쨌든 자네의 원수는 곧 나의 원수이니 반드시 복수를 해야겠지. 그런데 계획은 세워두었나?"

장천림은 고개를 흔들었다. 조천백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으음. 어쨌든 좋아. 일단 동료들을 모으세. 참, 자네 회림을 알고 있지?"

"삼백삼 호?"

그래 그의 이름이 석회림(石回林)이지. 마침 그 놈이 이곳에서 의원 노릇을 하고 있다네. 기껏 훈련을 받을 때 배운 독술을 가지고 의원 노릇을 하며 생사람을 잡고 있지."

"잘됐군........"

장천림은 중얼거렸다. 그의 뇌리에는 석회림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불귀곡에서 간신히 살아 남은 소년들은 불과 네 명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그들을 잊을 리가 없었다.

장천림. 그는 이제 강호사공자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그 동료들을 찾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안돼!"

장천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째서?"

조천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석회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도중 느닷없이 장천림이 반대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장천림은 완강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에게 이미 부양할 아내가 있다면 곤란해. 그건 두 사람 모두를 죽이는 결과일 뿐이야."

그는 말을 마치고 굳게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어쨌든 안돼. 나 하나의 원한 때문에 행복한 가정을 파괴한다는 건 안 될 일이야. 만약 자네가 결혼을 했다면 나는 자네를 절대 찾지 않았을 거야."

"......."

"회림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세."

장천림의 단호한 말에 조천백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장천림이었다.

"자네 육백 호의 소식을 아나?"

그 말에 조천백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육백 호? 아, 장하영을 말하는군. 알고 있지. 그 놈은 아주 잘 되었어. 하하........ 놈은 동창의 부영반이란 높은 직위를 갖고 황궁에서 근무한다고 하더군. 허허........ 우리들 가운데 가장 잘된 셈이지."

"음. 그렇다면 그도 곤란하겠군."

장천림의 말에 조천백은 느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장천림이 비록 겉으로는 무정한 듯이 보이나 실은 무척이나 다감하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가리는 것이 많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새삼 장천림이란 사나이에 대한 매력이 더해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이었다.

장천림은 담담히 말했다.

"자, 이런 말은 그만하고 우리 술이나 마시세."

"술. 그것 좋지. 하하하! 자, 오늘 내가 옛 친구를 만난 기념으로 사겠네. 핫핫.......! 사실 그동안 돈을 좀 모았거든."

그는 손뼉을 딱딱 쳤다. 그러자 즉각 집사가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나리."

"핫핫핫! 오늘은 아주 기분 좋은 날이야. 이봐, 이 집에서 가장 예쁜 계집과 최고급의 술을 가져와라."

"예예! 알겠습니다요."

집사는 싱글벙글하면서 돌아갔다. 잠시 후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많은 안주와 술이 들어왔다.

디디디...... 딩!

은은한 주악소리가 들리더니 일단의 미희(美姬)들이 줄을 이어 들어왔다. 그녀들은 이 기루에서 가장 비싼 기녀들이었다.

기예를 다루는 기녀, 가무를 하는 기녀, 또는 수청을 드는 기녀까지 몽땅 동원된 것이다.

"하하하! 자, 우리 오늘밤은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봄세."

"물론이지."

두 사람은 잔을 부딪히며 폭음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술에 원한이라도 진 사람들인 양.......



골치가 지끈지끈 아프다.

어젯밤 늦도록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않았다. 장천림은 갈증을 느끼며 손을 저었다. 어디 물이라도 없는가 해서였다.

뭉클........

그런데 손에 잡히는 것은 뜻밖에도 뭉클한 감각의 피부였다.

'.......!'

그는 흠칫했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그것도 피부의 질감으로 보아 여자임이 분명했다.

여자라니? 그는 여자라고는 거의 접하지 않고 살아왔다. 단 한 번 여자를 안은 것은 바로 백가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는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이, 벌써 일어나시나요? 흐응. 좀더 자요."

애교있는 코먹은 음성이 귓전에 들린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있는 곳은 하나의 화려한 방 안이었다.

그런데 푹신한 침상 위에 자신은 이미 홀랑 벗고 있을 뿐더러 바로 옆에 역시 알몸의 여인이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어리둥절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어젯밤 여러 명의 기녀들과 함께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시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는 피식 웃었다.

그랬었군.

조천백 네가........

그는 몸을 일으켰다.

"아이........ 나리."

그의 목을 부드럽게 휘감는 손이 있었다. 장천림은 잠시 부르르 전율했다. 수 년 동안 여자라고는 구경도 하지 못했었다.

그도 남자였다. 더욱이 누구보다도 건장한 사나이다. 알몸으로 한 이불 속에 누워있는 여체를 접하고도 욕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어딘가 잘못된 것이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깨끗한 척 할 것은 없지!'

그는 여인의 허리를 와락 안았다.

"어머머.......?"

기녀는 코먹은 소리를 내면서 뒤로 벌렁 넘어졌다. 그 바람에 투실투실한 유방이 흔들렸다. 뿐만 아니라 희디흰 장딴지가 허공에서 한 바퀴 춤추듯 휘저어졌다. 그 위에 장천림의 육중한 몸이 짖눌러 갔다.

여인의 유방은 풍만했다. 한 손에 다 잡히지 않을 정도였으며 탄력이 있었다. 게다가 여인의 피부는 눈처럼 희고 비단결처럼 부드러웠다.

이만하면 일개 기녀치고는 일급이었다. 그 정도 기녀를 하룻밤 사려면 다점 주인인 조천백이 적어도 한 달 이상을 벌어야 할만한 돈을 지불해야 했다.

더욱이 기술 또한 일품이었다. 장천림의 손길이 닿는 순간 여인의 몸은 펄펄 끓었다. 아니 손길이 스칠 때마다 툭툭 튀곤 했다. 그의 손이 유방을 움켜쥐자 허리가 들썩여 지는가 하면 둔부가 경련을 일으켰다.

"흐응!"

콧소리 또한 색정적이었다. 일반적으로 돈을 받고 몸을 파는 기녀들이란 형식적으로 정사에 응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녀는 삼급에 속했다. 실제로 일급 기녀들은 그녀들 스스로 정사에 도취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쾌락을 상대에게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장천림은 오랜만에 처음으로 쾌락의 궁극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남성이 여인의 비궁으로 들어가는 순간 모든 것이 뇌리에서 잊혀졌다. 복수의 집념도, 앞날에 대한 걱정도.......

그는 성난 사자가 된 듯 미친 듯이 여체 위에서 용트림하고 있었다. 그가 거칠게 나오자 여인은 기성을 질렀다.

"아아........"

다섯 번째의 사정이 끝났을 때 여인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여인이 나른한 표정으로 떨어지자 장천림은 비로소 그녀를 놓아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장천림은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벌써 아침이었다. 아니 햇살이 벌써 한 뼘 이상 올라가 있었다. 그가 눈부신 듯 가늘게 눈을 좁히자 문득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천림. 잘 쉬었나? 기다리고 있었네."

반갑게 껄껄 웃으며 다가오는 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조천백이었다.

그의 뒤에는 또 한 명의 사나이가 따르고 있었다. 장천림은 처음에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날렵한 몸매에 황의를 입은 인물이었다. 그는 허리에 약상자를 끼고 있었는데 두 눈은 약간 갸르스름했다.

어딘가 어눌해 보이는 인상이었으나 그것은 그가 보여 주는 겉모습에 불과했다. 그를 보는 순간 장천림은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넌........ 삼백삼 호!"

장천림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하하하! 천림, 정말 오랫만이다."

303호, 아니 석회림은 달려오더니 그의 가슴을 세게 끌어안고 있었다.

장천림도 마주 포옹한 채 한참 동안을 감회에 젖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으로 번뜩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포옹을 풀고 난 후 그는 사나운 눈초리로 조천백을 노려보았다.

"천백, 왜.......?"

조천백은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그는 느물거리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아. 우리는 생사를 같이 한 사이가 아닌가? 그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네."

"........"

장천림은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애당초 석회림이 가정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자신의 일에 끌어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조천백이 석회림을 부른 것이다. 석회림은 그의 가슴을 쳤다.

"섭섭하네. 자네가 날 부르지 않는다면 친구를 모독하는 것일세."

"......."

장천림은 눈시울이 젖었다. 그는 친구가 이렇게 좋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제 혼자가 아닌 것이다. 비록 마음 한편으로는 꺼림직한 구석이 있었으나 역시 한편으로는 든든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강호무정 제7장 친구들 - 검궁인





제7장 친구들



홍무(洪武) 14년 10월 21일.

쏴아아아아........

낙양(洛陽) 거리는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가을비로 인해 온통 젖어가고 있었다.

가을비치고는 폭우였다. 거리는 온통 흙탕물이었고, 저 편의 산자락은 자욱한 우막에 가리고 있다.

천하객점(天下客店).

낙양 중심가에 자리잡은 객점은 한산했다. 객점의 이층에 있는 한 객방.

열려진 객실의 창문 안 쪽에 서서 묵묵히 가을비를 바라보는 사나이가 있었다. 장천림이었다.

"......."

그는 처마에 방울방울 맺히는 빗방울을 바라보다가 아름다운 얼굴 하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백가소였다.

빗방울 하나마다 백가소의 얼굴로 보이고 있었다.

'가소........ 불쌍한........'

그는 오열이 이는 것을 참지 못하고 기어이 어깨를 들먹이고 말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철혈의 의지를 지닌 장천림이 한낱 여인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오열을 참지 못하다니.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백가소에 대하여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찌 그녀를 위한 복수를 이토록 집요하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날이 갈수록 백가소의 죽음은 그의 가슴에 상처를 깊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는 지난 날을 생각할 때마다 백가소에 대한 온갖 추억들이 더욱 무거운 무게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불귀곡에서 외롭게 무공을 연마할 때마다 그에게 친구가 되어준 것은 바로 그녀에 대한 추억이었다.

문득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섰다. 다소 뚱뚱해 보이는 체격의 화복청년으로 조천백이었다.

"알아 보았나?"

장천림은 눈을 문지르며 물었다. 그러나 조천백은 이미 그가 울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는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장천림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낙양장(洛陽莊)에 와 있는 것이 확실해. 놈의 얼굴은 못 보았지만 수 차례에 걸쳐 정보를 검토한 바에 의하면 놈이 왔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네."

"음. 다행이군."

조천백은 과거 현무단 소속이었다. 현무단은 주로 잠입, 추적술에 관한 것을 훈련 받았다. 따라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데는 전문가였다.

조천백의 분석이라면 거의 정확할 것이다. 장천림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물었다.

"그나저나 석회림은 왜 아직.......?"

"곧 오겠지."

조천백은 간단히 대답하고는 슬쩍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천림. 이제 말할 때가 되지 않았나?"

"뭘?"

"도대체 무슨 이유로 강호사공자와 원한을 맺게 되었는지 말일세."

장천림은 그 말에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말을 해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네."

"으음."

조천백은 쓴 입맛을 다셨다. 그는 이제까지 그 사실이 가장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말을 하지 않으니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장천림은 문득 비장한 어투로 말했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해."

".......?"

"그놈들과는 절대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네."

"......."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흐른다. 조천백은 감히 더 물을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다만 마음 속으로 강호사공자와 장천림이 풀 수 없는 원한을 맺었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었다. 기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서로가 중재하고 양보하여 원한을 풀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강호사공자가 누구인가?

그들은 당금 무림의 떠오르는 신성일 뿐더러 이제는 무림연맹의 중추적인 직책을 담당하고 있는 유수한 명가의 제자들이 아닌가?

아무리 장천림의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그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불을 보고 뛰어드는 불나방같은 짓이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두 사람이 어색한 표정으로 창 밖에 내리는 가을비를 바라보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갔던 석회림이 들어온 것이다.

석회림은 들어서자마자 옷깃에 묻은 빗방울을 털 생각도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일단 조사를 끝냈어. 하지만 충분하지가 않을 거야."

그는 품 속에서 비에 젖지 않게 양피지로 감싼 두루마리를 꺼냈다.

그 두루마리에는 강호사공자의 일인인 종남파의 제이인자 권왕(拳王) 상관중(上官重)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

장천림은 그 모든 것을 끝까지 읽었다. 그런 연후 두루마리를 접으며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별로 약점이 없군."

그 말에 조천백이 나섰다.

"맞아. 그리고 우리의 무공과 상관중의 무공을 비교 검토해 본 결과 역시 쉽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지. 우리 모두가 합공한다 해도 삽십 초 이상은 소모될 거야. 또한 자네 혼자 상대한다면 적어도 이백 초 이상은 소요되어야 할 거야."

장천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천백의 말을 믿었다. 그의 분석이라면 정확하니까.

석회림은 신음을 발했다.

"으음. 그건 너무 시간이 길어."

조천백이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단 둘이 있을 때 얘기야. 그러나 현재의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혼자 떨어져 있게 하기는 불가능해. 또 지난 사흘 간 그가 낙양장을 벗어난 횟수는 겨우 일회에 불과해. 그것도 호위무사들을 대동한 채 말이야. 그러니 그를 척살하려면 좀더 색다른 방법을 써야 할 것 같아."

석회림은 걱정이 되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어쩌지.......?"

"......."

장내에는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서로 입을 다물고 묘안이 없을까를 구상하고 있었다.

장천림은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려 떨어지는 가을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먼저 입을 연 것은 조천백이었다.

"한 가지 가능성이 있어."

".......?"

두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상관중은 조금 묘한 습성을 지니고 있지. 그는 지나치게 외곬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가령 자신의 옷도 반드시 하남성의 비단으로 만든 백의 만을 고집한다는 것과, 신발도 천축의 흑색혁화, 그리고 마시는 차(茶)까지도 반드시 남해의 설빙로(雪氷露) 만 고집한다는 거야.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여자에 대한 것이야."

"여자?"

석회림이 반문한다.

"그래 여자지. 그 녀석의 성생활은 다소 변태적이야.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놈은 자신이 좋아하는 형이 아니면 절대 근처에 접근조차 하지도 못하게 하며 성교조차 반드시 한 가지 체위 만을 고집한다는 거야."

장천림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사실을 어떻게.......?"

"하하하! 날 얕보는 건가? 이래뵈도 현무단 출신일세."

"그렇군."

장천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혈명단의 아이들은 불가능이란 없도록 훈련받았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 다만 그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은 대원제국의 운이 다했을 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혈명단이 완성되었을 경우 대명제국은 지상에서 세워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조천백의 말이 이어졌다.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지."

그는 군뜸을 들이려는 듯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놈이 좋아하는 형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청순가련형이고 눈매가 맑은 여자여만 해. 또 성교는 반드시 대낮에 수풀이 우거진 곳에서만 해. 그것도 여성의 손을 뒤로 묶고 나무에 엎드리게 한 채 하의만을 벗기고는 뒤로........ 어때? 조금 미친 놈같지?"

이때였다.

조천백의 말이 계속될 수록 장천림의 안색은 창백해지고 있었다. 그는 안색이 하얗게 탈색된 채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석회림은 침을 타악 창 밖으로 뱉고 있었다.

"정말 변태적인 놈이군. 그런 놈이 무림맹의 총순찰(總巡察)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다니 무림맹도 썩었군........"

이때였다.

장천림은 갑자기 엉뚱한 얘기를 꺼내놓고 있었다.

"낙양에서 가장 뛰어난 화가(畵家)가 누구지?"

"화가?"

조천백과 석회림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느닷없이 화가라니?

그들은 장천림이 무엇 때문에 화가를 찾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장천림은 이미 계획이 서 있는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화가를 찾으러 갔다 오겠네."

".......?"

두 사람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장천림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과거에도 그랬다. 그는 소년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말이 없는 아이로 통했다. 따라서 장하영이 선동하여 반란을 획책하였을 적에도 그에게만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사실 당시만 하여도 어쩌면 장천림이 원의 첩자인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도리어 그가 아니었다면 그들 삼인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예상이란 왕왕 엉뚱하게 빗나가는 법이다.

"화가는 왜.......?"

"이것은?"

"아니오."

"그럼 이런 눈(眼)은.......?"

"그것도 아니오. 좀더 크고 끝이 둥그렇게 위로 말려 올라간 눈이오."

"허허........ 그럼 이것은?"

"조금 비슷하기는 하나 그것도 아니오. 왼쪽을 약간 크게 그리시오."

화가. 그는 낙양성에서 그림을 그리며 밥을 먹는 자다. 그는 평생에 걸쳐 이렇게 까다로운 손님은 처음 만났다.

흑의를 입은 청년은 그에게 여인의 인물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그 여인의 초상화는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해달라, 눈은 어쩌구........ 코는 어쩌구........

그는 벌써 사오십 장째를 버리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는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평생 많은 그림을 그려 왔지만 이런 생고생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청년은 그림 한 장을 그리는데 물경 오백 냥을 제시했던 것이다. 화가는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리고 한나절이 다 지나서야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완성해 놓고 보니 자신이 보아도 반할 정도의 기막힌 미소녀였다.

그 미소녀는 그림 속에서 웃고 있었다.

목에는 손톱 반 만한 크기의 작은 점이 나 있었는데 그 점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고 있었다.

"휴우........ 아무튼 내 평생 이런 고생은 처음이요."

방 안에는 수백 장의 파지(破紙)가 흩어져 있었다.

"수고했소."

장천림은 그에게 약속한 대로 은자 오백 냥을 주고 초상화를 든 채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곧장 객점으로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조천백이 그가 한 장의 초상화를 내밀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게 뭔가?"

"똑같은 인피면구를 만들어 주게."

"면구.......?"

조천백은 눈치가 빠르다. 그는 비로소 장천림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깨달았다. 그는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하하하하.......! 그랬었군! 기막혀! 정말 멋진 계획이야."

장천림은 고개를 돌려 석회림에게 부탁했다.

"자네는 이 그림을 잘 보고 몸매가 비슷한 여자를 구할 수 있겠지?"

석회림의 눈이 빛났다.

"후후! 날 보고 탐화랑이 되라 이건가?"

장천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중을 잡는 미끼지."

"정말 기가 막히는군. 장가야. 넌 생각보다 치밀하군. 하긴........ 그렇지 않았으면 그때 우리를 구해내지도 못했을 테지만."



상관중은 아침부터 기분이 몹시 나빠 있었다.

낙양장의 시녀가 영 자신의 취향에 어긋나게 구는 것이다. 어제 저녁 목욕물만 해도 너무 뜨거웠다. 그뿐이 아니다.

침상의 이불도 본견(本絹:비단을 말함)이 아니었고, 오늘 아침 마신 차 역시 남해산 설빙로가 아니었다.

물론 모든 것이 객지에 나와 있는 상태에서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나마 시녀의 머리가 길게 늘어뜨린 생머리가 아니었다면 그는 벌써 호통을 치거나 뺨을 후려 갈기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는 지금 공무수행 중이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거처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본래 자신의 거처를 떠나는 것을 싫어했다. 그것은 성격이 까다롭고 자신의 비위를 맞출 사람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직책상 순찰을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그에게 있어서 외지생활이란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때로는 색다른 재미를 볼 때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몹시 기분이 나빴다. 맹을 떠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거의 모르고 있었으나 상관중은 특이한 위인이었다. 그는 복고조에 빠져 있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한 번 좋아한 것이나 즐겨하는 것이라면 여하한 경우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다소 병적이기까지 했다. 여자만 하여도 그렇다.

상관중은 본래 전신에 교태가 흐르고 색기(色氣)가 흐르는 여자를 좋아했다. 그런데 몇 년 전 한 명의 여자를 겪은 이후로는 이상스럽게도 여자에 대한 취향이 바뀌어 버렸다.

믿을 수 없게도 그 이후로는 여자에 대한 관념이 완전히 변한 것이다. 그 이후에는........

상관중은 여기까지 생각하자 갑자기 아랫도리가 뿌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후후! 그러고 보니 그 계집종이........'

그는 모든 것을 마음에 들지 않게 하는 이곳 낙양장의 계집종이 떠올랐다. 계집종의 인상은 그가 새롭게 좋아하게 된 상이었다.

'후후, 그 계집을 불러서.......?'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계집종은 그가 이곳에 온 사흘 간 이미 실컷 주물렀다.

그러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생각보다는 신통치가 않았던 것이다.

낙양장의 장주는 무림맹 산하의 낙양지부장이다.

그는 순찰인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아낌없이 바치는 위인이었다. 아마도 그가 자신의 딸을 원한다면 딸 역시 바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사흘 간 부용(芙容)이란 이름을 가진 계집종을 계속 품었다. 아마도 낙양장주인 심전도(心傳刀) 추관명이란 위인은 정보를 듣고 일부러 긴머리를 가진 계집을 하녀로 배속해 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상관중이 실망한 것은 부용이 이미 처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니 처녀가 아닌 것은 물론이려니와 남자 경험이 무척이나 많다는 것이었다.

상관중은 그 방면에 있어서 이미 전문가였다.

따라서 그는 첫날 밤에 알아보았다. 그녀는 불과 행위의 절반도 진행되지 않았을때 이미 온 몸을 흔들며 난리를 피웠던 것이다.

그런 류의 여인은 그가 딱 싫어하는 형이다. 물론 과거에는 그와 정반대였지만........

상관중은 권태감이 일었다.

더이상 낙양장에 처박혀 있기에는 갑갑증이 났다. 그렇다고 달리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사대전 이후로는 무림맹에서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순찰이라는 것도 그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에이! 밖으로 나가 바람이나 쐬자. 뭐 특별한 일이 있을 지도 모르니.'

그는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사영(四影). 바람쐬러 가자!"

그가 그렇게 말하자, 어디선가 사인이 바람처럼 나타났다.

그들은 등에 검을 멘 장년인들로 하나같이 눈빛이 부리부리하고 기도가 심상치 않은 위인들이었다.

종남사영(終南四影)이란 별호를 지니고 있는 자들로 언제나 상관중을 그림자처럼 따르는 위인들이었다.

"어디가 좋을까?"

한 명이 대답했다.

"일단 저자로 나가 보지요."

"그럴까?"

오인의 사나이는 거들먹거리며 걸어나갔다.

낙양에서 그들이 두려워하거나 꺼릴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황제나 다름없는 것이다.

강호제일루(江湖第一樓).

이곳은 낙양 제일의 주루였다. 밤이 되자 낙양은 불야성을 이루었고, 주루에는 많은 주객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분위기는 한껏 흥청거리고 있었고 시끌벅적한 소음은 오늘따라 유난히 들뜬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다.

창가에 한 명의 백의청년이 앉아 있었다.

그는 일견하기에 평범한 복장이었으나 준수한 용모와 약간은 길게 찢어진 듯한 눈매가 은연중 범인들을 압도하는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그는 홀로 앉아 술을 자작하고 있었다.

얼마 후 두 명의 흑의 사나이가 그에게 다가오더니 공손히 인사했다.

그러나 청년은 가볍게 목례를 할 뿐 그들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흑의사나이들은 중년이었는데 그들의 인상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눈빛이 안으로 갈무리되어 있어 강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숨은 내가고수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흑의인들은 청년의 맞은 편에 착석했다.

"어찌 되었나?"

백의청년은 하댓말을 쓰고 있었다. 보아하니 주종관계이거나 신분이 높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흑의인이 공손히 대답했다.

"아직 종적을 찾지 못했습니다. 놈은 아마도 깊이 숨어버린 것 같습니다."

백의청년의 얼굴에 슬며시 짜증이 어렸다.

"아마도 놈은 은밀한 곳에 숨어 그 무경을 연마하는 것 같습니다."

흑의인의 말에 청년은 역시 눈살을 펴지 않으며 중얼거렸다.

"으음. 이제 나타날 때가 되었을 텐데........"

그들은 누구인가?

바로 동창에서 파견된 장하영과 그를 수행하는 환영팔신 중의 두 명이었다.

장하영. 그는 소수마경을 가지고 사라진 등진강, 아니 백리진강을 잡으러 강호에 나온 지 어언 일 년이 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는 백리진강의 그림자조차도 보지 못했다. 그는 황궁을 떠날 당시 장영걸에게 단단히 부탁받고 나왔다.

그러므로 그를 잡아 무경을 회수하지 않고는 금릉으로 돌아갈 수 없는 입장이었다.

사실 장하영은 애당초 이 일을 맡을 때부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사실 그의 마음은 딴 데 가 있었다. 그는 오랫만에 강호에 나와 세상 나들이도 할겸 또 한편으로는 옛 친구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서 승낙을 한 것이다.

그래서 다소 짜증이 나더라도 참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헛탕을 쳤다. 그는 두 명의 친구들이 개봉부에 있다는 말을 들어 그곳으로 가면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친구들을 쉽게 찾을 줄 알았고 또 반드시 그들을 만나 회포를 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개봉부에서 허탕을 친 것이었다. 그들이 생활터전을 정리하고 어디론가 떠났다는 소식 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 이후 두 사람의 행방을 수소문해 보았으나 도무지 오리무중이었다.

그는 그때문에 더욱 심기가 좋지 못했다. 그가 이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였다.

문득 계단쪽이 시끄러워지더니 오인의 인물이 올라왔다. 그는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앞장 선 자는 현의 비단을 입은, 얼굴이 뿌연 청년이었다. 나이는 대략 이십오륙 세 가량 되어 보였다.

그는 평소 안하무인격인 성품인지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중인들을 무시하는 표정이 배어 있었다.

그를 수행하는 듯한 네 명의 사나이들은 그를 마치 황태자라도 되는 양 모시며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거들먹거리고 있었다. 마침 주루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현의청년이 앉을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시선을 한바탕 장내로 굴리더니 한 곳에 멈추었다. 그곳은 주루에서 가장 좋은 장소였다.

마침 그곳에는 삼인의 중년상인이 앉아 담소하고 있었다.

"자리를 내라."

청년은 나직하게 말했다.

자리를 내라니?

그러나 그의 뒤를 따르던 네 명의 중년인들은 예! 하고 대답하더니 성큼성큼 상인들에게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상인들은 그들이 자신들을 향해 오자 겁에 질렸다.

일견하기에도 그들 중년인들은 무사로 보였다. 상인으로서는 강호의 무사들을 겁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일어서라. 공자께서 이 자리를 쓰시겠단다."

한 명의 중년무사가 차갑게 말하자 상인들은 울상을 지었다. 아무리 무사라고는 하지만 이런 모욕이 어디 있는가?

한 명의 상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는 우리가 먼저....... 으악!"

그는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뺨을 세차게 한 대 얻어맞고 저만치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 바람에 그의 이빨은 네 개나 부러졌다. 뿐만 아니라 온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 바람에 장내는 금세 싸늘해졌다.

그러나 중년무사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고집을 부리겠다면 목숨이 열 개인 것으로 간주하고 널 다루어주마."

그 말에 대항할 자가 어디 있겠는가?

"아, 알겠습니다. 나리........"

상인들은 저만치 날아가 혼절해 있는 동료를 이끌고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다.

자리는 간단히 비워졌다.

비단옷을 입은 청년은 의기양양하게 그 빈자리에 가 앉았다. 그는 장내의 소란이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듯이 지극히 태연한 표정이었다.

아니, 이런 현상은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한편 장하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이런 일을 보고 더욱 짜증이 나고 있었다.

그가 누군가?

대명 최고의 권력집행기관인 동창의 부영반인 것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막강한 권력의 제이인자인 것이다.

그는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저들은 누구인가?"

환영이신이 대답했다.

그는 강호사정에 정통한 위인답게 즉각 그들을 알아보았다.

"예. 비단옷을 입은 청년은 종남파 출신의 무림맹 총순찰인 권왕 상관중이라는 자이고 그 옆에는 그 자의 심복들로 종남사영이라고 합니다."

"흥! 철없는 것들........"

장하영이 코웃음을 치자 삼인은 즉시 묻는다.

"훈계할까요?"

사실 황궁과 무림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건드리지 않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굳이 분란이 일어난다면 무림 쪽에서 다소 양보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 더욱이 동창 부영반인 장하영 쪽이 유리한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지금 이 순간 장하영은 모든 것이 귀찮은 심정이었다.

"놔둬라. 공연히 시끄럽게 할 필요가 없다."

"알겠습니다."

장하영은 눈길을 창 밖으로 돌렸다. 밤거리에는 불빛이 명멸하고 있었다.

낙양의 번화가에는 청등홍등이 걸리고 있었다. 가까운 환락가로부터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가 아득히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밤 경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지금 다른 생각에 젖어 있었다.

그 옛날 불귀곡에서 헤어진 친구들을 하나 둘 떠올리고 있었다.

조천백........ 석회림........ 장천림........

너희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



가신 이 그리워 눈을 감으면

뒷산에서 들려오는 소쩍새 소리

행여나 님이신가 귀 기울이면

들창에 문풍지만 혼자 울어요.

손 내밀면 쥐일 듯한 님의 숨결은

숨어든 한풍에 흩어져 가고

홀로 되어 눈물 짓는 이 내 슬픔만

새벽녘 서리 되어 흘러 내려요........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절로 코 끝이 찡해지는 슬픈 노래였다. 그 노랫소리는 강호제일루를 은은한 분위기로 만들고 있었다.

소녀는 십칠팔 세 가량 되어 보이는 가냘픈 체구로 머리는 길게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얼굴도 청순하기 이를 데 없다. 그녀는 주루에 올라와 비파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녀가 장내를 한 바퀴 돌았을 때 손님들의 요란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짝짝짝......!

"잘 한다!"

사실 주객들은 노래보다도 소녀의 미모에 더욱 취해 있었다.

강호에는 이렇게 노래를 파는 소녀들이 있었다. 소녀도 그런 부류인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 옆에는 칠순이 넘어 보이는 늙은이가 모자를 거꾸로 들고 따라다니며 손님들에게 구걸을 요청하고 있었다.

늙은이와 너무나 대조적인 탓인지 소녀의 미모는 더욱 돋보이고 있었다. 술을 마시던 주객들의 시선은 소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

특히 그중에서도 상관중의 시선은 소녀에게서 떠나갈 줄 몰랐다. 그는 발견한 것이다. 마침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물건(?)을 만난 것이다. 실로 생각지도 않았던 행운이었다.

그는 설마 오늘밤의 산책이 이런 좋은 결과를 낳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의 입술이 슬며시 벌어지며 웃음이 스며나오고 있었다.

'흐음........ 정말 나오기를 잘 했군.'

그의 가슴은 점차 뜨거워지고 있었다.

시종일관 소녀의 몸매를 훑어보던 그는 더욱더 몸이 달아 올랐다. 한 줌에 쥐일 것 같은 잘록한 허리, 동그랗고 팽팽해 보이는 둔부, 게다가 가슴은 벗겨 놓으면 알토란같을 것이다.

그의 눈가가 가늘게 춤추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마음에 들어하는 물건을 볼 때마다 즐겨 취하는 표정이었다.

'후후! 어디서 저런 아이가 다 나왔지? 안아보면 기가 막힐 몸매로군!'

한편 창가에 앉아있던 장하영도 소녀를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한 가닥 의혹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소녀의 얼굴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노인의 얼굴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서서히 경악이 떠오르고 있었다.

'저들은.......!'

무엇을 발견한 것일까? 그는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이때 소녀는 노래를 한 곡(曲) 더 부른 후 사뿐사뿐 걸어 마침내 상관중의 앞까지 갔다.

"나리. 소녀에게 온정을 베풀어 주세요."

소녀가 나긋이 허리를 굽혀 절을 하자 상관중의 입술이 춤추듯 벌어졌다.

"후후! 노래 솜씨가 좋군. 네 이름이 무엇이냐?"

소녀는 수줍은 듯 고개를 떨구며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대답한다.

"소녀의 천명은....... 탁완상(卓婉霜)이옵니다."

"탁완상이라. 흐음, 얼굴 만큼 이름도 예쁘군."

그는 턱짓을 했다. 그러자 종남사영 중 한 명이 눈치를 채고 재빨리 품 속에서 은표를 꺼냈다.

"얼마를.......?"

"오백 냥을 주어라."

"옛?"

그는 깜짝 놀랐다. 기껏 노래 따위나 부르는 계집에게 오백 냥이라니?

그러나 그는 상관중의 성격을 안다. 두말 하지도 않고 즉시 은표 한 장을 찢어 소녀에게 주었다.

"넌 오늘 운이 트였다."

소녀는 기쁜 듯 입을 벌리며 절을 했다.

"감사합니다. 나리."

상관중은 내심 중얼거렸다.

'고마와 할 것 없다. 너는 그 값을 하게 될 테니 말이다.'

소녀와 노인은 곧 밖으로 걸어내려 갔다. 그들이 나가자 즉시 상관중은 몸을 일으켰다.

한편 창가에 앉아있던 장하영도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우리도 간다."

".......?"

환영이신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묻지 않고 그들도 따라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낙양 외곽.

한적한 밤길에는 행인이 드물다. 그 길을 일노일소(一老一少)가 걷고 있었다.

얼마 전 강호제일루에서 노래를 부르던 소녀와 노인이었다. 그들은 하루의 일당을 흡족하게 채웠음인지 걸음도 가벼이 걷고 있었다.

낙양성을 빠져 나온 한적한 길이었다. 약간 이상한 점이 있다면 이들이 낙양성내로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나간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일면으로는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밤을 틈타 벌이를 할 장소를 이동한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얼마쯤 갔을까?

".......?"

노인은 걸음을 멈추었다. 문득 맞은 편에서 사인의 그림자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났다. 그리고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노인은 소녀의 손을 잡고 다시 걸었다. 설마하니 무슨 일이 있을려고........

노인은 가까이 다가간 순간 그들이 바로 강호제일루에서 은표를 주었던 네 명의 중년무사라는 것을 알고 어? 하고 신음을 발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슉! 슉슉!

문득 사인이 거의 동시에 손을 떨쳤다. 어둠이 짙어 그들의 손에서 무엇이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

문득 노인과 소녀는 가벼운 신음을 발하며 풀썩 쓰러지고 있었다. 인적도 없는 밤길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암습을 당하여 쓰러진다한들 달려와 볼 사람도 없었다.

네 명의 사나이는 쓰러진 소녀와 노인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신형을 날리더니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렸다.

그야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공연히 사람들을 암습해 놓고는 달아나 버리다니........

그러나 그 의문은 곧 풀렸다. 뒤이어 한 인영이 날아온 것이었다.

그는 즉시 땅에 떨어져 있는 소녀 만을 취해 어깨에 둘러멘 뒤 신속하게 숲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노인은 본 척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둔 채였다.

인영이 소녀를 데리고 사라진 직후, 죽은 듯 누워있던 노인이 꿈틀거리더니 툭툭 먼지를 털며 일어나고 있었다. 노인은 혀를 차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쯧! 지독한 놈들이군.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독수(毒手)를 쓰다니........ 미리 방비하지 않았다면 깨끗이 저 세상으로 갈 뻔했군. 벼락을 맞을 놈들........"

문득 그는 숲 속을 바라보더니 히죽 웃는다.

"히히........ 그나저나 너도 이젠 끝이다. 이 놈아."

무슨 뜻인가?

노인은 뜻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사라지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걸어가는 동안 노인의 굽어져 있던 허리는 어느덧 곧게 펴져 있었고, 걸음걸이조차 힘차게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노인, 그는 바로 조천백이었다.

"악! 나리........"

노래를 파는 소녀, 탁완상은 기겁을 하며 부르짖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어찌된 셈인지 꼼작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손이 등 뒤로 묶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숲 속이다.

하늘에는 달이 떠있어 그다지 어둡지는 않았다. 따라서 주위의 풍물이 그런대로 보이고 있었다.

"후후! 화대(花代) 값을 치뤄야 하지 않느냐? 물론 너에게도 좋은 일이고."

등 뒤에서 한 가닥 들뜬 음성이 들려왔다. 바로 상관중이었다.

그의 눈은 어떤 기대감으로 열기가 올라 있었다. 지금 그는 오랫만에 취향에 맞는 계집을 목전에 두고 잔뜩 달아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화, 화대요......?"

탁완상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맑은 눈을 굴렸다. 유난히 또랑또랑해 보이는 눈이었다. 그 눈 또한 상관중의 구미에 맞는 조건 중의 하나였다.

상관중은 침을 꿀꺽 삼켰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의 눈에 마침 좋은 것이 들어왔다. 그것은 벼락을 맞아 쓰러진 하나의 나무둥치였다.

상관중은 탁완상을 나무둥치에 엎드리게 했다.

"무....... 무엇하려는 거예요?"

탁완상은 더욱 더 기겁했다. 나무둥치에 엎드려진 자세는 그야말로 묘한 것이었다. 그녀는 손이 뒤로 묶여 있어 움직일 수가 없었으므로 더욱 당혹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녀가 별로 놀라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달빛이 그녀의 아래로 숙여져 있는 얼굴을 비치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그녀가 겁을 먹기는커녕 도리어 즐기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상관중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뒤쪽에 서 있었으므로 탁완상의 그런 표정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흐흐! 이제 너도 만족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음소를 흘리며 그녀의 치마를 활짝 걷어 올렸다. 그러자 탁완상의 치마 속에 있는 속곳이 드러났다. 속곳 아래로는 눈부시게 뽀얀 종아리가 보였다.

다만 종아리뿐이었는데도 상관중은 아랫도리가 불끈 일어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야릇한 흥분을 느끼며 손을 움직여 속곳을 휙 벗겨냈다. 그러자 달빛 아래 희멀건 엉덩이가 드러났다.

마침내 탁완상의 하체가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고 말았다. 하늘을 향해 치켜 올려진 엉덩이는 달빛보다도 희었다. 상의는 그대로인 채 하체 만 발가벗겨진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아찔한 유혹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헉!"

상관중은 뜨거운 숨을 삼켰다.

이런 모습은 그에게 강한 자극을 주었다. 더욱이 한적한 숲 속에서 나무둥치에 엎어놓은 여자의 엉덩이라니........

마침내 상관중은 자신도 바지 만을 벗은 채 탁완상의 뒤쪽으로 다가갔다.

"아........"

탁완상은 사나이의 거친 동작에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상관중은 애무의 절차 따위는 완전히 무시해 버린 채 막바로 파고든 것이었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느낌이었다. 탁완상은 얼굴이 나무둥치에 밀려 짓이겨지고 있었으나 조금도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뒤쪽에서 강한 힘이 가해질 때마다 피부가 쓸리는 고통보다도 훨씬 더 큰 쾌감이 그녀의 전신을 경련하게 했다.

상관중은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는 여자의 긴 머리칼을 마치 고삐인 양 휘어잡고 있었고, 한 손으로는 여자의 엉덩이를 단단히 잡고 있었다.

얼마나 뜨겁게 운동하였을까? 그는 우화등선(羽化登仙)하는 기분을 느끼며 화려하게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때였다.

스슷!

미세한 인기척과 함께 그의 등 뒤로 삼인의 인영이 소리없이 나타났다. 그들은 한 명의 노인과 두 명의 청년이었다.

바로 조천백과 장천림, 그리고 석회림이었다.

"히히히! 풍경 좋군. 달밤에 숲 속에서 계집의 엉덩짝을 안고 땀을 흘리다니 정말 취미치고는 아주 괴상한 취미야. 그렇지 않은가? 천림?"

조천백의 말에 장천림은 뚫어져라 상관중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무섭게 불타고 있었다.

나무둥치에 엎어져 있는 여인은 인피면구를 쓰고 있는 화류계의 싸구려 창녀였다. 그녀가 쓰고 있는 인피면구 속의 얼굴은 얽고 각이 진 투박한 추녀일 뿐이었다.

그러나 인피면구상의 얼굴은 그가 그토록 잊지 못하는 백가소의 얼굴이었다.

백가소........

이런 모습으로 당했더냐.......?

나무둥치에 엎어져 있는 창녀를 바라보는 장천림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헉! 누, 누구냐!"

조천백의 비웃음 소리를 들은 상관중은 기겁을 하고 여인에게서 떨어졌다. 그야말로 꼴불견이었다.

그의 아랫도리는 발목 아래까지 흘러 내려져 있었고, 막 분출을 끝낸 그의 양물은 초라한 모양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강호사공자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상관중은 낭패감을 느끼며 후다닥 바지를 치켜올렸다. 그와 동시에 눈을 부릅떴다.

"웬놈들이냐?"

장천림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더러운 놈. 널 죽이러 왔다."

".......!"

상관중은 안색이 싹 변했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들이 자신을 정말 죽이러 왔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쉽게 당할 상관중이 아니었다. 그의 별호가 권왕이니만큼 그의 권공(拳功)은 가히 후기지수 중의 무적이었다.

"가소로운 놈들........ 감히........"

막 주먹을 쥐고 내력을 일으키려던 그는 문득 안색이 새파래졌다. 운기한 순간 단전(丹田)이 텅 비어 있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이....... 이럴 수가.......!'

그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이때 석회림에 의해 손을 묶인 끈을 풀어낸 탁완상이 일어섰다.

그녀는 갑갑하다는 듯이 얼굴을 쓱 문질렀다.

".......!"

인피면구 아래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딴판이었다.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아니 그 얼굴은 상관중이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얼굴이었다.

그야말로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밑바닥 창녀의 흉한 얼굴이 아닌가!

"하....... 함정!"

상관중은 휘청거리며 부르짖었다. 그렇다. 그는 함정에 걸린 것이다. 눈 앞의 상대방들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치밀한 함정을 파두었던 것이다.

그는 산공독(散功毒)에 당했다.

그것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기발한 방법으로 당한 것이다. 바로 여인의 음문에 산공독을 발라놓았기에 정사를 하는 도중 그는 공력이 무산되어 버린 것이다.

"으으.......! 대체 네 놈들은 누구길래.......?"

그는 뒷걸음치고 있었다.

ㅆ....... 팟!

칙칙한 검광(劍光)이 일어났다.

"으아아악!"

상관중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놀랍게도 바지 앞자락과 함께 그의 양물이 깨끗이 잘려버린 것이다.

그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사타구니를 부여잡고 뒹구는 순간 장천림의 철검은 다시 호선을 그렸다.

고개를 떨구었던 것이 잘못이었다. 그것은 목을 쳐달라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캑........"

상관중의 수급이 저만치 굴러갔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어깨에서 분리되어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머리통 한가운데 박혀 있는 상관중의 동공은 크게 열려 있었다.

아직도 자신의 목은 어깨 위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듯이 그는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무림맹의 총순찰이라는 막강한 직위를 가진 강호사공자의 일인.

권왕 상관중은 이렇게 가장 저열한 모습으로 죽은 것이다.



"원상대로 해놓아라."

장하영의 음성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환영이신은 즉각 명대로 시행했다. 땅에 구덩이를 파고 상관중의 토막난 시신을 묻었다. 그리고 침을 퉤 뱉는 것이었다.

"지저분한 놈은 죽을 때도 지저분하게 죽는군."

그들은 장천림 일행이 사라진 뒤에 이곳에 나타났다. 그리고 장천림 일행이 땅에 매장한 상관중의 시신을 파헤쳤던 것이다.

장하영은 그 시신의 상태를 면밀히 조사했다. 그러는 사이 그의 안색은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는 본래 혈맥단에서 백호단 출신이었다. 백호단은 전술, 전략 및 기관 등의 전문가로 키워졌다.

그의 추리능력이나 분석력은 본래부터 뛰어난 편이었다. 고로 동창에서도 그의 명성은 크게 떨쳐지고 있었다.

그가 나서는 사건은 언제나 명백하게 밝혀지는 것이다.

"......."

달빛이 기울고 있었다.

장하영은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수시로 변하는 그의 얼굴은 어느 때는 심각하다가 어느 때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짓기까지 하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환영이신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비록 나이는 어려도 그들은 장하영이란 존재를 언제나 두려워 하고 있었다. 그는 지난 날 대명제국 창건의 일등공신인 대장군 장무혁의 독자로 어린 나이에 대명을 위해 원의 첩자로 들어갔던 인물인 것이다.

따라서 나이를 따질 수 없는 상관이자 무서운 능력의 위인인 것이다. 환영이신은 기다렸다. 그의 입에서 다음 명령이 나오기를.

이윽고 장하영은 입을 열었다.

"팔신을 소집해라. 장소는 하원객점 매화실. 내일 새벽까지다."

그 말이 끝이었다. 장하영은 명을 내리고 즉각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하원객점 매화실.

"......."

환영팔신은 부복하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장하영이 뒷짐을 진 채 등을 돌리고 있었다.

장내의 분위기는 무겁게 깔리고 있었다.

팔신은 그가 무슨 명을 내릴 지는 몰라도 필시 아주 중요한 것일 거라는 예감에 젖어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까지 뜨거운 차 석 잔을 마실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지금 등을 돌린 장하영의 시선은 지금 창 밖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쉴새없이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이렇듯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부드러운 미소를 흘리고 있다니.......

그는 무엇인가 즐거운 추억에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대인(大人)......."

이윽고 환영일신이 침묵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오!"

그제서야 장하영은 생각난 듯이 빙글 돌아섰다. 그의 안색은 아주 밝았다.

환영팔신은 어리둥절했다. 일찍이 그들의 상전 장하영이 이렇게 밝은 표정을 보인 적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황궁으로 돌아가라."

장하영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어검(御劍)을 풀었다.

그것은 황제가 친히 그의 무공을 포상하기 위해 하사한 것이었다.

"......!"

환영팔신은 깜짝 놀랐다. 뿐만 아니다. 장하영은 옷을 벗고 있었다. 그의 옷 안 쪽에는 날아가는 독수리 문양이 수놓아진 백색무복이 있었다.

그는 그것마저 벗고 미리 준비한 한 벌의 평범한 백삼을 걸쳐 입었다. 그는 백색무복을 탁자에 개어 놓았다.

"이 옷도 가지고 가라."

"대야!"

환영팔신은 떨리는 음성으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러나 또 있었다. 장하영은 소매 속에서 금패(金牌)마저 꺼냈다.

"이것도 필요없다. 가지고 가라."

"대야!"

이제는 심각해졌다. 그의 행동으로 미루어 지금 장하영은 황궁을 떠날 생각을 굳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야기 할 것 없다. 나는 이미 마음을 굳혔으니까. 너희들은 이 물건을 가지고 동창으로 돌아가 대영반께 이렇게 전해라. 장하영은 강호인으로 돌아간다고."

"......!"

"황궁은 나에게 어울리는 곳이 아니었다. 너희들은...... 새로운 부영반을 만나 그의 명을 받들어라."

"대, 대야!"

환영팔신은 놀라 부르짖었다.

"하하하하! 나는 꿈에도 그리던 옛 친구들을 만났다. 나는 그들과 함께 살겠다."

장하영은 감회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황궁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나에게는 감옥으로 느껴질 뿐이다. 훗훗......! 옛날부터 그랬었지. 내가 황궁을 떠나지 못한 것은 아버님 때문이었다. 아버님께서는 내가 장씨 무가를 이어주기를 바라고 계셨지."

환영팔신은 할 말을 잊은 채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길이 아님을 벌써부터 느끼고 있었다. 사람에게는 각자 길이 따로 있는 법이다. 나 장하영은 자유인(自由人)이다. 구속받고 계급이 있는 곳에서는 숨이 막혀 지내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건 너희들도 알고 있지 않느냐?"

"......."

장하영은 문득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핫......!"

장하영은 한참 후에야 웃음을 그쳤다.

"너무 많은 말을 했다. 말을 많이 하면 즐거움이 감소되는 법이지. 할 말은 끝났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이 장하영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만일 가능하다면 등진강에 대한 건(件)은 강호에서 처리해 보겠다."

"대야!"

그러나 환영팔신이 재차 그를 불렀을 때 이미 그 자리에 장하영은 머물러 있지 않았다. 어느새 그는 열린 창문을 통하여 밖으로 신형을 날린 것이었다.

환영팔신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은 장하영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한 번 마음먹은 것은 하늘이 무너져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너무나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환영팔신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장천림은 혼자 있고 싶었다.

그는 상관중을 죽인 후 이상한 허탈감에 서로잡혀 있었다. 그는 조천백과 석회림에게 잠시 다녀오겠다고 이른 후 혼자 나왔다.

저자에서 그는 향 한 줌과 술 한 병을 샀다. 그리고 그가 간 곳은 낙양 교외의 한적한 야산이었다.

"......."

야산의 언덕.

하늘은 맑다. 끝없이 푸른 창천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장천림은 한동안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소.......

한 명을 죽였어.

네가 부탁한 복수는 지금부터 시작이란다. 놈을 죽인 순간 내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지. 그런 놈들에게 티없이 청순한 너의 인생이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파괴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지고 이빨이 악다물려졌지.

가소.

너는 너무 일찍 죽었다. 살아서...... 이 천림이 너의 원수들을 하나 둘 처치하는 것을 꼭 너의 눈으로 직접 보았어야 하는 건데.

가소.......

장천림은 대지에 얼굴을 묻는다.

흙의 향기. 가을의 땅은 쓸쓸한 냄새를 지니고 있다. 그 향기는 지난 날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장천림은 사가지고 온 향을 끌렀다. 그는 흙을 모아 향로를 대신하여 향을 꽂았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향연 위로 백가소의 얼굴이 떠올랐다.

백가소의 얼굴은 그를 향하여 미소를 짓고 있었다.

림오빠.......

고마와요.......

장천림은 다시 얼굴을 땅에 묻었다. 오열이 어울리지 않게도 육 척의 건장한 사나이를 흔들리게 했다. 그는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긴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 후...... 하하하하......!"

술병을 땄다.

독한 주향이 풍겼다. 그가 막 술병을 입에 대려는 찰나 어디선가 꾸중이 들렸다.

"나쁜 녀석! 친구를 두고 혼자서만 맛있는 술을 몰래 마실 참이냐?"

"......!"

이 음성은?

그는 고개를 돌렸다. 사나이. 백의를 입은 준수한 사내 한 명이 우뚝 서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 한데.......

문득 그는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넌...... 육백 호?"

장하영은 껄껄 웃으며 다가왔다. 그는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있었는데 장천림의 앞에 털썩 주저앉더니 보따리를 끌렀다.

"......?"

보따리 속에는 술과 안주 등이 푸짐하게 들어 있었다.

"이봐. 천림. 너희들을 찾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니? 이 의리없는 놈들 같으니라구! 후후....... 하지만 결국은 찾아내고 말았지."

그는 안주를 벌려 놓더니 잔을 늘어놓는다. 그 잔은 한 개가 아니라 네 개였다.

"......?"

"천백과 회림도 곧 이곳으로 오게 될 거야."

장천림은 희미하게 웃었다.

"하영. 언제......?"

"훗! 낙양에서 너희들이 그 더러운 상관중이란 놈을 죽일 때 모두 보고 있었지."

장천림은 흠칫했다.

"내가 알기로 너는 황궁의......."

그는 말을 다 할 수 없었다.

"시끄러! 그 지긋지긋한 감옥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 지금 이 장하영은 강호인이고 야인일 뿐이야. 그리고 자네들의 친구일 뿐일세."

"......!"

장천림은 부르르 떨었다.

"후후....... 설마 너의 일에 날 끼워주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 그럴 권리도 없어. 너희들이 날 거부한다면 나는 끝없이 훼방을 놓으며 다닐테니 말이야. 강호사공자가 어디 그렇게 만만한 놈들인가? 상관중이란 놈은 그 중 제일 보잘 것 없는 놈이지."

"하영......."

장천림의 눈에 이슬이 어린다. 그는 강한 사나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기실 장천림은 누구보다 다정다감한 인물이었다.

다만 자라온 환경이 그를 고독하고 과묵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심경을 드러내지 않을 뿐 실제로는 무엇에나 심약한 정서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백가소의 죽음이 그의 인생을 이렇게 다른 방향으로 바꾸어 놓지 못했을 것이다.

장하영은 술을 따르다 말고 장천림을 바라보았다.

"천림. 정말 보고 싶었다."

"......!"

장천림은 그를 마주 보았다. 두 사나이. 그들은 마주보는 시선 속에 뜨거운 감정을 보내고 있었다.

"하영!"

"천림!"

포옹. 사나이들끼리의 뜨거운 포옹이 이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으며 굳세게 끌어안고 있었다.

이때였다.

"히히히! 정말 보기 좋은데?"

"껄껄! 글쎄 말이야. 이런 곳에서 사내놈들끼리 끌어안고 대체 무엇하는 짓이지?"

낯익은 음성들이다. 장하영은 벌떡 일어서더니 달려갔다.

덥썩!

세 사나이가 서로를 끌어안았다. 조천백, 석회림, 장하영, 세 사나이는 한데 어울려 언제까지고 떨어질 줄을 몰랐다.

"......."

그 광경을 바라보는 장천림의 시선은 젖어들고 있었다.

나는 외롭지 않다.......

저들이 있는 한.......

가을 하늘에 한 마리의 독수리가 비상하고 있었다. 독수리는 아득한 동쪽으로 사라졌는데 잠시 후에는 또 한 마리의 독수리가 그쪽으로 쏜살같이 날아가고 있었다.